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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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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7)
2018년 12월 08일 13시 50분  조회:1285  추천:0  작성자: 김장혁








                  판문점 정전 그리고 돌아온 포로들
 
1년 6개월이나 끌어오던 포로송환문제에 관한 협의는 1958년 6월 8일에야 달성되였다. 그때부터 쌍방은 조인의식준비사업을 다그치게 되였다.
그런데 이튿날인 6월 9일에 남조선(한국) 국회에서는 귀국을 거절하는 조선측 포로를 즉시 석방하며 중국측 포로는 즉시 대만에 넘겨줄데 대한 “결의안”을 통과하였다. 이어 리승만 괴뢰군 헌병사령 원용덕에게 6월 17일부터 마산, 부산, 로산 등지에서 중조 포로를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6월 17일 오후, 포로영을 지키던 미군 경호일군들은 그림자를 감추었다.
밤 9시에 남조선 반공청년단 단원들, 대대장, 경비대원들은 여러 집중영에 뛰여들어 포로들에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너희들을 몽땅 석방한다!”, “안 달아나는 놈은 끝장낸다!” 하고 위협했다.
몇천명을 헤아리는 포로들은 그 놈들이 미리 끊어놓은 철조망을 꿰뚫고 우르르 쓸어나가 어둠 속에서 포로영 뒤산을 하얗게 뒤덮으며 도망쳤다. 특무들은 포로들을 뒤산 아래에 미리 서 있던 자동차들에 억압적으로 떠밀어싣고 부랴부랴 그 곳을 떠나가버렸다.
또 이와 동시에 미국측에서는 중조측 포로 2만 7천여명이나 억류하였다.
6월 19일, 중조측 수석대표 남일 장군은 이 사건과 관련해 미군측에 엄정한 항의를 제기하였다.
세계 평화를 요구하는 인민들과 여론을 불구하고 리승만은 판문점담판을 파괴하려고 남조선(한국) 경내에 계엄령을 내리고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괴뢰군 참모장 백선엽을 불러들였으며 “단독으로 북침”하려고 미쳐날뛰였다.
중조부대에서는 리승만의 기염을 꺾어버리고 정전담판에 배합하기 위하여 금성 남부전선에서 제3차 진공을 발동하였다. 천여문의 대포가 금성 남쪽의 25킬로메터에 달하는 적방어선에 분노의 불길을 토하였다. 아군 6개 군의 우세한 병력이 괴뢰군 4개 사단에 맹렬히 공격하였다. 하여 괴뢰군 도합 78,000여명을 살상포로하고 땅크 45대, 자동차 279대, 대표 425문을 로획하였다. 그리고 220여평방킬로메터나 되는 땅떵어리를 빼앗아내여 금성 남부 아군방어선을 곧게 펴놓았다.
아군이 계속 남쪽으로 쳐들어가자 미군측 수석대표 해리슨은 7월 15일에 당황망조하여 다시 판문점 담판석상에 돌아와 앉았다.
날따라 땡볕이 쨍쨍 내리쬐여 무더위만 더해가는 7월 20일에 중조측에서 조인대청을 조선민족의 특색이 짙은 기념물로 짓기 시작하였다. 나흘 사이에 길이 38메터 너비 18메터나 되는 정전조인식대청을 다 짛어놓았다.
조선 력사에서 잊을 수 없는 1953년 7월 27일 아침해가 불쑥 솟아올랐다. 비 온 뒤 맑은 하늘은 푸르기도 하였다.
오전 9시 45분, 조인식에 참가할 쌍방의 군관들과 기자, 촬영사들이 조인대청에 들어왔다.
오전 9시 59분, 쌍방대표단 성원들이 조인대청에 입장하였다.
중조측 대표들로는 남일 대장, 리상조 중장, 정국옥 장군, 시정문 장군, 주연 소장 등이였다.
오전 10시, 쌍방 수석대표들인 남일대장과 해리슨 중장은 조, 중, 영 세가지 문자로 된 13부의 정전협정서에 조인하였다.
점심, 라지오방송에서는 조선인민군 김일성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팽덕회 총사령관이 내린 정전명령이 울려퍼졌다.
1953년 7월 27일 밤 10시(평양시간), 조선군사정전협정은 정식으로 효과를 보기 시작하였다. 개성전선에서 밤낮없이 콩 볶듯 들려오던 총포소리가 가뭇없이 들리지 않았다.
이날 밤 맑게 개인 하늘에는 몇날째 처음으로 금싸락을 뿌려놓은듯 뭇별이 총총하였다. 집집마다에서 마음놓고 방공창문카텐을 젖혀놓아 고려왕조의 개성은  하늘의 별무리가 내려앉은듯이 환하였고 환락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7월 28일 오전 9시 30분에 팽덕회 사령관이 개성시 송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지원군대표단 본부 회의실에서 조선군사정전협정서와 림시보충협정서에 서명하였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원수는 평양에서 조선정전협정서와 림시보충협정서에 서명하였다.
개성에서 동남쪽으로 25킬로메터 떨어진 유명한 홍산포진지는 판문점담판을 보위하기 위해 7,600여명 미군과 괴뢰군을 소멸한 3차나 치렬한 전투를 한 피로 물든 전투진지였다.
7월 28일, 즉 정전한 그 이튿날, 홍산포진지에서는 지원군 전사들과 어제날의 적들인 영군 병사들과 정전을 경축하는 련환모임을 가졌다.
이 고지의 영군 병사들은 지원군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 영군의 한 부상병이 아군에 포로됐을 때다. 전사들은 상처를 잘 싸매주고 영군에 통지해 담가를 들고 와서 부상병을 들어가게 하였다. 그때 전사들은 그들이 안전하게 자기 진지로 돌아갈 때까지 총 한방도 쏘지 않았다. 영군 병사들은 “중국 사람은 말하면 말한대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감탄하였다.
전날 사전에 쌍방대표와 영어번역원이 함께 련환모임을 잘 협상한 후 오전 10시에 련환모임이 열렸다.
홍산포 진지에는 영어로 “정전을 경축한다!”, “우리는 당신들이 평안히 영국 고향에 돌아갈 것을 축원한다!” 등 구호를 새긴 붉은기가 펄럭였다.
그들은 서로 평화를 노래하는 영어와 조선어, 한어 문자가 박힌 축기를 교환하고 쌍방의 대표가 정전을 축하하는 축사를 드렸다.
뒤이어 그들은 미리 준비한 술잔을 들어 권커니작커니 하면서 술을 마셨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춤추고 노래하였다.
한 영군 병사는 감개무량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린 조선과 중국 사람들과 싸우려고 하지 않소. 개 같은 미국 놈들과 리승만이란 놈이 한동아리가 됐기 때문이요. 만약 미국 놈들이 간섭하지 않았더라면 조선문제는 진작 조선 사람들끼리 해결했을 거요.”
북경영화촬영소와 여러 나라 기자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이 격동적인 장면을 촬영하고 취재했다.
7월 30일 오후 6시, 개성전선의 보병부대는 앞당겨 진지를 떠났다.
홍산포진지의 용사들은 피로 지켜온 피로 물든 진지를 떠나게 되였다. 그들은 떠나가면서 머리를 들어 메꿔놓은 진지공사, 포격에 콩가루 된 온 산을 둘러보았다. 영군 병사들은 진지에서 철거하면서 이쪽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지원군 전사들도 손저어 해답하였다.
7월 30일 밤 10시, 아군 개성전선의 제일 마지막 경비부대가 떠날 때 팽덕회 최고사령관이 진지에 와서 부대 장병들을 시찰하였다.
포로송환을 할 때 리해식은 몇몇 동무들과 함께 판문점에서 올리뛰고 내리뛰면서 위생통과구역에서 장소배치, 환영대오조직 등 사업을 하였다.
포로접수구역은 판문점에서 서남쪽으로 1킬로메터 떨어진 가설령에 설정됐다. 불도젤로 빤빤하게 민 가설령 언덕에 길이 200메터나 되는 주홍색루각을 지어놓고 루각에 “조국의 품”이란 커다란 간판을 걸었다. 리해식 등 사업일군들은 주위에 색기를 촘촘히 꽂아놓았다.
8월 5일 오전 9시, 포로접수구역에 제일 첫패의 우리측 포로들이 송환되여왔다.
포로들은 미군 위생차우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중국인민지원군 군가를 노래부르고 구호를 부르면서 접수소에 다가왔다. 숱한 사업일군들과 기자들이 그쪽으로 눈길과 렌즈를 돌렸다.
그들은 먼 곳에서 높은 주홍색루각에 걸린 “조국의 품”이란 간판과 중조 국기를 보자 자기 피로 물들여 자체로 만든 자그마한 중조 국기를 흔들면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동방홍”을 높이 부르고 “조국 만세!” 구호를 높이 불렀다.
그들은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날 조중측 수석위원 리상조 중장, 위원 정국옥 장군 등이 마중하러 나왔다. 포로들은 차에서 내려 미군 놈들에게 갖은 모욕을 받던 설음이 북받쳐올라 사업일군들의 품에 와락 안겨 엉엉 울었다.
그들은 미군 놈들이 준 군복을 벗어버리고 포로접수소 천막에 들어갔다. 어떤 포로들은 실한오리 걸치지도 않고 건너왔다. 그리하여 우리측에서는 바삐 팬티를 400여개나 만들어 접수소에 가져와 그들에게 입혔다.
포로들은 접수소를 지나 위생구역에 들어갔다. 그들은 옷을 몽땅 벗어 번호를 단 후 둘둘 말아 뙤창만한 구멍으로 안에 떨어뜨렸다. 우리 사업일군들은 그 옷을 몽땅 호주머니로부터 혼솔까지 샅샅이 검사해 일부 남조선과 중국 대만특무들을 붙잡아냈다. 남조선과 중국 대만 놈들은 포로를 송환하는 기회에 특무를 혼입시켜 북반부에 침투하려고 들었던 것이다.
목욕을 다한 포로들은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 새 군복을 갈아입고 자동차에 다시 올라 개성시 교외에 있는 포로접대소와 병원에 가서 휴식하고 치료받았다.
포로송환 젤 마지막날인 9월 6일 오전 9시에 미국측에 인질로 갇혀 있던 이른바 “전쟁범죄자”들인 지원군포로 지도자 왕방, 위림, 장택석(영어번역), 오성덕을 비롯한 138명과 조선인민군포로 지도자들인 박상현, 리인철 등이 돌아왔다.
중조측 리상조 중장, 정국옥 장군 등이 마중나왔다.
제일 앞 위생차에서 박상현이 내렸다.
피골이 상접하고 눈확이 우묵하게 들어간 그는 리상조 중장의 품에 와락 안겨 엉엉 울었다.
그는 “나는 동지들을 보고서야 조국에 돌아온 걸 알, 알게 됐습니다.”라고 하며 울었다.
그는 이윽고 머리를 들더니
“지원군포로 지도자 왕방이랑 돌아왔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수장들이 “오늘 다 돌아오오.”라고 하자 한시름 놓았다.
박상현은 원래 조선 모 도의 당위원회 지도일군이였다. 1950년 10월 적들이 북반부에 쳐들어올 때 차에 앉아 북으로 철퇴하는 길에서 당지 반동분자들에게 들키워 미군에 생포되였다.
포로집중영에서 어느 자인지 포로조직구성 기밀을 루설하는 바람에 박상현의 신분이 발각됐다. 미군 놈들은 그를 사면에 바람이 불어들어오는 쇠살창독방에 가둬 얼궈 죽이려고 획책하였다. 그는 손가락이 다 다슬도록 쇠살창감방 땅바닥을 파서 동굴을 파고 바람에 날아드는 나무 잎을 한잎한잎 모아 동굴에 펴고 한파를 피하면서 살아남았던 것이다.
제일 마지막 위생차에서 귀밑머리난 듬성듬성하게 남은 지원군 모 사단 정치부 주임 겸 부정위 오성덕이 내렸다.
그는 수장들의 손을 굳게 잡아 흔들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수장들은 그를 굳게 포옹해주었다.
오성덕은 모 사단 부정위였는데 제5차 전역 때 부대를 따라 철퇴하다가 적들의 포위를 돌파하지 못하였다. 그는 10여명 전사들을 데리고 남쪽 험산준령에서 1년 6개월 동안이나 유격전을 하다가 전우들이 다 희생되고 탄알마저 다 떨어져 체포됐다.
그는 미군이 감방에 들이뿌린 신을 되내뿌리고 자기가 몇해전에 조국에서 항미전쟁에 나올 때 다 파이난 신을 밤도와 깁어 신고 돌아왔다. 판문점 포로교환소에 와서야 그는 그 헌 가죽신을 벗었다.
북경군사박물관에서 온 한 사업일군이 오성덕이 신고 온 그 헌 가죽신을 북경군사박물관에 가져가려고 찾아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리해식은 한 총무일군의 침대 밑에서 그 헌 가죽신을 찾아냈다. 들고 보니 그 헌 가죽신은 다닥다닥 깁고 기워서 원래 신 모양을 찾아볼 수 없었고 두껍고 무거웠다. 다만 신바닥만이 조선에 올 때 조국 부대에서 준 것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후에 그 헌 가죽신은 북경군사박물관에 보관해두었다.
박상현, 오성덕 등 포로지도자들은 중조부대 수장들과 함께 차에 앉아 개성시로 떠나갔다. 바깥에서 기다리던 중조부대 군관들과 사업일군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환영하였다.
 
 
 
 
 
 
                  비참한 녀성포로들
리해식은 당년에 중조 녀성포로들이 인간생지옥 같은 미제 집중영에서 갖은 시달림을 다 받은 비참한 사실, 그녀들이 송환돼올 때 그 눈물겨운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1953년 8월 9일 송환돼온 2,873명 포로 가운데는 조선인민군 녀성포로 473명과 중국인민지원군 녀성포로 1명이 있었다.
오전 10시 쯤 되자 우리측 녀성포로들을 실은 미군측 트럭과 위생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측 교환접수구역에 거의 이르렀다.
저 멀리서부터 녀성포로들의 노래소리, 구호소리, 울음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려왔다. 그녀들은 손에 손마다 자체로 만든 중조국기를 들고 흔들고 있었다. 트럭우의 녀성포로들은 운전실쪽으로 몰려서서 이쪽에 대고 손을 흔들며 흑흑 흐느껴 울고 있었고 다 쉰 목소리로 계속 구호를 불렀다.
그녀들은 차에서 부축받으면서 내리자마자 가슴이 뭉클해났다. 그녀들은 우리측 사업일군들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대성통곡쳤다.
인간생지옥에서 갖은 시달림과 모욕을 당한 그녀들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어머니 조국의 품에 돌아왔는데 어찌 기쁘지 않으랴.
적지 않은 녀성포로들은 벗어쥐고 있던 신으로 위생차 유리창문을 까부셨다. 미군 교환관이 차문을 열자 신짝을 그 자들한테 비발치듯 줴뿌렸다.
미군측 군관들은 날아가는 신짝들을 피해 우리측 교환관 등뒤에 피하였다. 심지어 미군 운전수들은 질겁해 위생차 운전실 꼭대기에 올라가 피하였다.
녀성포로들은 차에서 내리면서 수많은 거폭의 표어를 펼쳐들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형제적인 중화인민 만세!”
그 붉은 표어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 표어는 조선인민군 녀성포로 김영자 등이 부산역에서 차에 올라 북으로 떠날 때 손가락을 깨물어 쓴 것이였다. 그녀들은 그 표어를 들고 단식투쟁을 벌려 자체로 만든 인민군 군복을 입고 인민군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
그녀들은 작은 중조 국기를 들고 줄을 지어 씩씩하게 걸어 우리측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녀들 속에는 중국인민지원군 녀성포로 양옥화도 있었다. 그녀는 길이 1메터, 너비 60센치메터 되는 오성붉은기를 들고 차에 올라탔다. 수무살 밖에 안되는 양옥화는 중국인민지원군 사업일군을 보자 머리를 숙이더니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피눈물은 그의 여윈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때 위생통과구에서 기다리던 지원군 정치부 주임 두평 장군이 다가와서 양옥화의 손을 잡고 친절히 위문하였다.
“동무는 끝내 조국의 품에 돌아왔습니다. 조국은 어머니처럼 동무를 보살필 것입니다. 푹 쉬면서 몸조리를 잘하시오.”
방송소에서도 양옥화를 위해 한어로 환영사를 방송하여 그녀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양옥화는 감격의 눈물로 옷섶을 적셨다.
이때 미군측 위생차에서 중상을 입은 조선인민군 녀성포로 3명을 담가에 들어내리였다.
인간성이라고는 꼬물만치도 없는 미군 놈들은 갖은 수단으로 우리 측 녀성포로들을 모욕하고 박해하였다.
조선인민군 녀성포로 김모는 조선 황해도 해주시 녀대학생이였다. 그녀는 전쟁의 포소리가 울리자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다. 1950년 9월 중순에 미군이 인천에 등록한 뒤 인천 부근에서 체포되였다.
그녀는 미군 놈들을 이렇게 규탄하였다.
“그때 저는 150여명 녀군관과 녀전사들과 함께 서울 림시수용소에 압송돼갔어요. 미군 놈들은 몸을 수색한다는 구실 밑에 우리 옷을 몽땅 벗기고 총칼로 우리를 협박하여 서울 남대문의 사람이 제일 많은 큰거리로 몰고 나가질 않겠어요. 말을 듣지 않는 녀성포로는 날창으로 푹푹 찔러 온몸에 피가 랑자하게 만들었지요. 놈들은 추악하게도 촬영기자더러 그 장면을 찍어 수용소 흑판보에 내걸어 전람시키기까지 했어요.”
김모는 모욕감에 몸을 떨면서 팔소매로 눈물을 쓱 씃고 계속 공소하였다.
“개만도 못한 미군 소위 두 놈이 80여명 남녀포로들을 서울역에 압송해갈 때였어요. 달아나는 걸 방지한다는 허울 밑에 옷을 몽땅 벗기고 남자와 녀자의 손목을 한데 묶고 우격다짐으로 내걷게 하였어요. 그리고 잔등에다 ‘우리는 핍박에 못이겨 인민군에 가담하였다.’는 글을 써붙였댔지요. 그리고 숱한 사람들을 불러다 구경시키고 돌팔매질을 하게 했어요. 으흐흑, 흑흑.”
격분해 여기까지 공소하던 김모는 더는 말을 잊지 못하고 엉엉 통곡쳤다.
이때 옆에 서 있던 한 녀성포로가 공소하였다.
“남조선 광주시 포로수용소에서는 어쨌겠어요. 미군 군관놈이 녀성포로들을 커다란 방에 가둬놓고 옷을 몽땅 벗으라고 으르댔지요. 어데서 옷을 몽땅 벗기운 남자포로들을 데려다몰아넣고 호통쳤어요.
‘듣건대 공산당은 춤추길 좋아한다던데 오늘 춤을 춰라. 빨리 췃!”
쫄딱 벗은 남녀포로들이 억지로 춤을 추는 시늉을 내는 걸 보면서 양키놈들은 사탕을 질근질근 씹다가도 하하하 하고 징글스레 웃었댔지요. 짐승보다 못한 양키놈들은 짐승처럼 성욕이 발작하여 녀성포로들에게 달려들어 젖가슴을 만지고 끌어안아 땅바닥에 넘어뜨리고 강간도 서슴찮고 했어요. 으흐흑, 흑흑.”
그 녀성포로는 모욕감에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더니 울다가 또 공소하였다.
“그, 그 미군 놈들은 우릴 강간했고 심지어 밥하던 14세 박에 안되는 포로소녀마저 빼놓지 않고 강간하였어요.”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옆에 있던 녀성포로들이 너도 나도 공소하였다.
“남조선 대전시에서 한번은 미군 군관놈이 한 조선인민군 녀성포로를 붙들어내다가 사지를 묶어놓고 강간한 후 감방에 들여보냈지요. 두번째로 또 그 녀성포로를 강간한 후 총으로 쏴죽였는데요. 서울 괴뢰군형무소의 괴뢰군 군관놈들은 녀성포로 6명이나 붙잡아다가 륜간하였어요. 그중 한 녀성포로는 음부가 터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어요.”
당시 조선중앙통신사의 보도에 의하면, 우리측 녀성포로들 가운데서 미제와 괴뢰군 놈들에게 128명이 강간당하였는데 반항하다가 살해된 녀자포로가 34명이고 적들이 강간한 후 죄행을 덮어감추려고 살해한 녀성포로가 44명이나 되며 기타 리유로 살해한 녀성포로가 120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개성에 집이 있는 한 녀성포로는 이렇게 공소하였다.
1950년 가을, 적들은 500여명이나 되는 녀성포로들을 부산녀전쟁포로집중영에 가둔 후 사회의 녀건달들을 인민군녀성포로로 가장시켜 녀성포로들 속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그들은 미군과 괴뢰군을 비호하였으며 도처에서 음탕한 말을 해대면서 녀성포로들의 사상을 부식하고 롱락하려고 들었다. 녀성포로들은 그년들의 음모를 제때에 간파하고 몽땅 집중영에서 몰아냈다.
그러자 적들은 침대를 다 걷어가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녀성포로들은 한결같이 단식투쟁을 벌렸다. 하여 끝내 침대 우에서 자게 됐고 식사도 좀 개선되였다.
그후 적들은 단식투쟁을 한 22명 녀성포로들을 단식투쟁 지도자라고 붙잡아갔다. 적들은 그녀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전기취조를 하였으며 바늘로 손가락 끝을 찌르면서 단식투쟁 지도자를 대라고 을러멨다. 련 5일 동안이나 고문을 들이댔지만 아무 단서도 쥐지 못한 적들은 할수 없이 그녀들을 내놓았다.
1952년 봄, 적들은 녀성포로들을 몽땅 포로들이 “사망섬”이라고 부르는 거제도포로집중영에 압송해 가두었다.
“우리 녀성포로들 속에는 전기취조를 받아 정신착란이 온 리모가 있었지요. 한번은 그가 ‘혼자 나가지 말자’는 우리 녀성포로들의 포로보호규정을 잊고 혼자 변소로 갔지요. 그를 본 양키놈은 경위실에 붙들고 들어가 강간하지 않았겠어요. 하여 리모는 완전히 미쳐버렸어요. 그때 우리는 너무 격분해서 시위하면서 항의했지요. 미군 집중영당국에서는 별수없이 리모를 강간한 양키놈을 녀성포로영에서 다른데로 전근시켰지요.”
양모의 말에 이어 서울 태생인 송모가 석쉼한 목소리로 공소하였다. 그의 말투는 완전히 남쪽 서울말씨였다.
“전 1952년 5월 두드사건 뒤 담판에 참가한 3명 녀성포로 가운데 한사람이죠. 두두가 석방된 뒤 저도 다른 담판대표들과 함께 잡혀갔죠. 양키놈들이 저를 심문하다가 옷을 벗기고 강간할락꼬 미쳐날뛰잖겠어요. 제가 물고 뜯고 하면서 마구 밀쳐대니께. 양키놈들이 흉악한 상통을 해가지고 새빨갛게 단 쇠꼬챙이로 저의 젖가슴이캉 허벅다리캉 마구 지지지 않겠어요. 이 보세요.”
그녀의 걷어올린 팔다리를 보니 성한 데 없었다.
“그때 중립국인 스웨리예대표단이 집중영을 시찰할 때 전 양키놈들의 위협도 무릅쓰고 달려나가 팔다리 걷어올리고 양키놈들의 죄행을 공소했던 거래요. 그랬다고 절 또 단독감방에 가두질 않겠어요. 교환돼서 돌아올 때에야 내놓았어요.”
이때 숱한 어린애들을 혹은 안고 혹은 손잡고 온 녀성포로들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대부분 군관 가속이여서 부대를 따라 남하하였다가 포로됐던 것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인 23살 되는 조선인민군 녀성포로 김모는 둬살 박에 안되는 남자애를 안은 채 두 볼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전 포로된지 여섯달만에 집중영에서 이 어린애를 낳았지요. 옆의 동무들이 보살펴주지 않았더라면 저와 이 애는 집중영에서 굶어죽었을 거예요. 전 애를 낳고 몸이 어찌나 허약한지 두달 동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했지요. 그때 녀성포로들은 가련할 정도로 적은 밥그릇에서 밥 한숟가락씩 내 그릇에 더 놓아 우릴 먹게 했어요. 저는 눈물과 함께 전우들이 주는 밥을 삼키면서 끝내 몸을 춰세워 이 애를 살려냈어요. 후에 극악한 양키놈들은 모자방에 우릴 따로 가둬 굶겨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녀성포로들은 항의했지만요. 양키놈들은 우리 모자를 끌어다가 모자방에 따로 감금하였지요. 한 녀성포로는 굶어서 갈비뼈가 아롱아롱한 자기 어린애가 울자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정신이 나가 그만 자기 어린애를 침대 우에서 목을 조여 죽이까지 하였어요.”
가련한 23명 산모포로들은 1953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건군절에 어린애를 업고 철조망에 “우리는 전쟁포로가 아니다!”는 표어를 내걸고 철조망 안에서 구호를 부르며 시위행진하였다.
땅! 땅!
적들은 그녀들에게 최루탄을 130여발 쏘았다.
숱한 애들이 놀라 몇달동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조선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야 적들은 선전목적에 어린애들에게 옷과 신을 내주고 먹을 것을 좀 주었다.
쉰이 다 된 늙은 녀성포로들과 산모포로들이 어린애를 데리고 위생통과구역에 들어간 뒤였다. 환영하러 나온 부녀들이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죽일 양키놈들, 어쩜 쉰이 다 된 녀성을 다 포로라고 붙잡아뒀을가?”
“글쎄 말이요. 썩어질 놈들이 어린애한테 무슨 죄 있다고 감방에서 고생시켰다오?’
조선 녀성들은 질서을 유지시키는 리해식을 보더니 욱 모여와 물었다.
“지원군동무, 저 어린애한테 어떤 옷을 입히는가요? 큰 군복을 입히는가요?”
리해식은 웃으면서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린 어린애들도 돌아온다는 걸 알고 사전에 다 준비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새 군복을 입은 녀성포로들이 나왔다. 그녀들 속에는 하얀 바탕에 파란 무늬 가로 간 “꼬마해군” 군복을 입고 해군모자를 쓴 둬서너살 되는 남자애들과 빨갛고 노란 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자애들, 칠색단저고리에 파란 조끼를 입은 어린애들이 위생통과구역 앞에서 나왔다.
초조히 근심하던 부녀들은 그제야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하였다.
집중영에서 갖은 천대를 다 받던 녀성포로들은 곱게 차려입은 자기 어린애들을 안고 손에 손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목청껏 구호를 불렀다.
“김일성 원수님 만세!”
“모택동 주석님 만세!”
그 뒤에 지원군 녀성포로 양옥화가 새 지원군 군복을 입고 나왔다. 환영하러 나온 군중들은 그녀에게 꽃묶음을 안겨준다, 얼굴을 만진다 하면서 위안하였다. 어깨까지 쌍태머리를 땋아내리드리운 얼굴이 걀쭉한 중국 이 처녀는 열정적인 조선 부녀들 속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양옥화는 리해식 소속 군단에 있었다. 그녀는 1951년 5월 하순 제5차 전역이 끝날 때 북한강 북안인 지암리 부근에서 소속 사단과 함께 포위를 돌파하다가 포로되였다.
그녀는 꿈에도 자기가 전쟁터에서 포로돼 양키놈들이 왔다갔다하는 집중영 철조망 속에 갇히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며칠 동안이나 집중영에 웅크리고 앉아 창백한 얼굴에 겁기 띤 눈으로 철창 밖에서 총칼을 비껴들고 삽살거리는 미군 놈을 지켜볼뿐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적들은 그녀를 심문실로 끌고 가서 “사단 책임자가 누군가?” 하고 심문하였다.
그때 눈이 파랗고 코대가 큰 미군놈을 보던 양키놈을 쏘아보던 양옥화는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문하던 미군 군관놈들은 엉큼한 마음을 먹고 미국 사탕 한봉지를 꺼내주면서 희죽거렸다.
“더러운 개자식!”
양옥화는 미군 놈이 손에 든 그 사탕을 땅바닥에 탁 쳐던졌다. 그녀는 발로 심문실 문을 꽝 차고 나와버렸다.
그후에도 미군 군관놈은 더러운 마음을 죽이지 않고 그녀를 끌어내갔다. 그럴 때마다 조선인민군 녀성포로들은 단식투쟁을 하면서 항의하였다. 하여 그 양키놈은 양옥화를 되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교환돼 돌아올 때 양옥화는 조선인민군 녀성포로들과 함께 부산역에서 맨 마지막 렬차바곤에 앉아 북상귀국의 길에 들어섰다. 그녀들은 당장 조국의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고 끓어번지는 내심의 감격을 억누를길 없었다.
순간 차칸에서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동방홍” 노래소리, 구호소리, 웃음소리와 환호소리가 울려퍼졌다.
“개쌍년들, 무슨 개지랄들이냐?!”
양키놈들은 게사니처럼 꿱꿱거리더니 차창을 꽁꽁 닫아걸고 차간에 독가스탄을 들이쏘았다.
탕, 탕탕, 탕탕탕!
여섯발의 독가스탄이 녀성포로들과 어린애들 속에 날아와 터졌다. 순간 차간 안은 독가스로 자욱해졌다.
탕!
또 독가스탄이 날아왔다.
양옥화는 다른 녀성포로들과 어린애들을 구하려고 선뜻이 제 몸으로 독가스탄을 막았다. 그의 손은 폭발하는 독가스탄에 맞아 벌겋게 데였다.
돌아오는 길에서 국민당 특무놈들이 그녀를 정치적으로 롱락하고, 육체를 릉욕하려고 하였다. 그때 그녀와 조선인민군 녀성포로들이 견결히 반항했기에 위험에서 벗어났다.
몇해 동안 집중영에서 적들과 싸우면서 조선인민군 녀성포로들과 양옥화는 두터운 친선의 정을 맺었다. 갈라진 후에도 조선인민군 녀성포로들은 손목시계 하나를 개성시병원에서 치료받는 양옥화에게 기념으로 보내주었다.
양옥화는 송환돼 돌아오는 날까지도 조국에서 신고 온 겹겹이 기운 신을 신었다. 조국을 그처럼 그리던 그녀가 이제 곧 조국의 품 속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그녀는 조선인민군 녀성포로들과 함게 차에 앉아 개성시를 떠났다. 그들이 탄 차는 점점 멀어져갔다. 그 뒤에서는 우리측 접수일군들과 조선 군중들이 미제와 괴뢰군 집중영에서 갖은 릉욕을 다 당한 그녀들에게 오래도록 박수갈채를 보냈고 손을 저었다.
 
               적군 포로들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 지꿎은 장마비가 구질구질 쏟아졌다.
서울을 떠나 판문점을 향해 북으로 달니는 자동차들에는 겨릅대처럼 피골이 상접한 중조 측 포로들이 람루한 옷을 입고 비물에 푹 젖은채 맥없이 꽉 박아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우묵한 눈을 맥없이 내리뜬 포로들, 쏜살같이 내달리며 흔들리는 자동차 우에서 상처가 아파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소리를 내는 포로들, 두 다리 없는 포로들, 팔을 잃은 포로들, 참말로 그들의 모양은 처량하고 끔찍스러웠다. 미군 측에서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료처치대책도 대지 않았다.
이때 개성을 떠나 판문점을 향해 남으로 달리는 풍막자동차들에는 피둥피둥 살지고 불깃불깃하게 혈기왕성한 미군과 괴뢰군 측 포로들이 편안히 앉아 가고 있었다. 적측 포로들은 몽땅 회색캬바진 새 옷을 떨쳐입고 희희락락 떠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꽉 차넘쳤고 수심의 그늘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둘러멘 배낭에는 자기가 쓰던 시계와 라이터, 만년필과 치솔, 악기 그리고 우리측에서 준 기념품 같은 것을 불룩하게 걷어넣었다. 몇몇 부상당한 포로들 곁에는 흰 위생복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약가방을 둘러메고 청진기를 목에 건 채 딱 붙어앉아 간호하고 있었다.
포로교환구에 건너갈 때 적측의 어떤 포로들은 목에 기타를 걸고 겨드랑이에 불룩한 배낭을 끼고 떨굴가봐 조심스레 느릿느릿 걸어갔다. 적측 포로들 속에는 지팽이를 짚은 포로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부상당한 포로들은 우리측 포로수용소 의료일군들이 제때에 치료했기에 사지를 끊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측 포로들은 제때에 처치받지도 못하고 치료받지 못해 두 팔을 잃었거나 심지어 사지를 다 잃은 포로도 있었다. 우리 측 남녀포로들은 옷을 쫄딱 벗기우고 큰거리에 끌려나가 조리돌림을 당했고 돌팔매까지 맞았다. 녀성포로들은 강간당하기까지 않았던가!
미군측에서 우리측에 건네준 18부의 두꺼운 포로사망부에는 우리측 사망된 포로들의 이름이 꽉 박혀 있었다. 미군측에서는 많이 줄여서 8,840명만 죽었다고 했지만 기실 13,814명이나 집중영에서 사망, 살해되였다.
우리측의 눈물겹고 들끓는 장면과는 달리 적측 포로접수구의 분위기는 아주 쌀쌀하였다.
적측 포로들은 우리측 사업일군들과 굳게 악수하고 갈라져 적측 교환소에 가서도 웃으면서 이쪽에 대고 손을 저었다. 포로접수소 곁에 괴뢰군과 미군 병사들이 이쪽을 노려보면서 시꺼먼 총을 부여잡고 서 있었다. 군관들은 허리에 두 손을 찌르고 포로들을 쏘아보았다. 적측 포로들은 그 놈들을 보자 웃음을 거두고 몸을 옹송그리면서 접수소 안으로 들어갔다.
괴뢰군 군관은 허리에 두 손을 지르고 다리를 거만하게 척 벌리고 서서 괴뢰군 포로들을 보고 쌀쌀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자식들, 맥살도 없이 포로되다니? 저쪽에서 고생했지?”
괴뢰군 포로들은 그자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고 휴게실천막에 들어갔다.
포로들이 우리측 수용소에 있을 때 대우를 잘 받았다는 말을 할가봐 적측에서는 취재하러 온 기자들이 자기들 포로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제한하였다. 그자들은 전신무장한 적병들을 포치해 휴게실천막 둘레를 줄지어서서 지키게 하였고 휴게실천막으로 들어가는 길과 기자들 사이에 바줄을 매놓고 마구 드나들지 못하게 막았다. 포로들이 휴게실천막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기자들은 포로들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미군 안전군관은 사전에 기자들에게 공산당에 도움이 되는 보도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어떤 기자들은 돌아오는 포로들에게서 가만히 취재해가지고 미군의 검사를 피해 38선 이남, 남조선(대한민국) 경기도 파주 부근의 문산에 가서 소식을 보도하였다. 어떤 기자들은 일본 도꾜에 날아간 후 보도하였다.
이는 우리측에서 포로교환접수구 련합적십자회 사무실에 기자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면서 취재하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딴 판이였다.
적들이 아무리 소식을 봉쇄하려고 들어도 세계 정의적인 기자들의 보도에 의해 세계인민들은 우리측에서 적측 포로들을 아주 잘 우대했다는 것을 다 알게 되였다. 심지어 적측포로들도 우리측 포로수용소를 “어디 포로수용소 같은가? 꼭 학교나 휴양소 같네.”라고 할 지경이였다.
1952년 10월, 가을의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시원히 불어왔다. 맑은 물에 둘러싸인 조선 북반부 벽동전쟁포로관리소 운동장 주위에는 붉은기가 휘날리고 주석대 정면 량켠에는 중조 두 나라 국기가 높이 휘날렸다.
축구장에서는 흑인포로들과 백인포로들이 섞여 축구시합을 벌리느라고 법석거렸다. 작은 체육장에서는 집단체조하는 포로들, 권투시합과 씨름을 하는 포로들, 구경하면서 하하하 하고 웃음보를 터뜨리는 포로들로 법석 들끓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포로라는 수치감과 고독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황혼 무렵에 포로들은 줄을 지어 포로수용소에 들어갈 때 “동방홍”과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렀다.
밤이 되자 포로들은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으며 중조부대 선전대의 공연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12일 동안의 운동대회를 벌린 뒤 우승을 따낸 포로들에게 포로관리소의 수장이 직접 상품과 기념품을 발급하였다.
포로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번 운동대회는 정말 잘 열렸네.” , “이번 운동대회는 력사에 오를만해.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네.” 라고 하였다.
어떤 포로는 “운동대회는 포로라는 걸 다 잊게 했네.”라고 하였다.
한 미군 포로군관은 “지원군은 포로관리에서 전례없는 력사를 창조하였다.”라고 하였다.
운동대회에서 상품을 탄 한 포로는 흥분된 나머지 구호까지 불렀다.
“모주석 만세!”
“중국인민지원군 만세!”
운동대회 기간에 포로들은 저마다 자기 가족에게 편지를 써서 운동대회 성황을 알렸다.
한 포로는 자기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중량급권투경기에서 우승을 한 경과를 상세히 쓰고나서 집에 돌아가면 운동대회에서 탄 금빛빈침 등 정밀한 상품을 가져다주겠다고 하였다.
제네바공약 규정에 따라 우리 중조측에서는 1951년부터 포로들이 자기 가족들에게 편지나 사진을 보내게 하였다. 적지 않은 포로들은 편지에 제집 식구들에게 지원군 포로관리소에서 잘 보내기에 시름놓으라면서 “포로로 있는 것이 전선에서 싸우기보다 더 안전하다.”고 하였다.
한 포로의 안해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줄곧 매우 건강하다고 하니 지나간 두해에 비해 마음이 놓입니다.”라고 하였다.
3년 사이에 적측 포로들은 도합 2만 9천여통의 편지를 써서 가족들에게 보냈다. 편지 거개가 포로관리소가 좋다는 말을 써넣었다. 하여 우리측 포로정책에 대한 그 어떤 모욕중상도 믿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
성탄절이 돌아왔다. 바깥날씨는 실로 박달나무가 얼어 터질 지경이였다.
그러나 적측 포로들은 봄날처럼 훈훈한 집 안에서 성탄절을 즐거이 쇠였다. 회장에는 성탄나무, 은색의 종, 빨간 초가 갖춰져 있었다. 벽에는 숱한 표어가 붙어 있고 책상 우에는 국외에서 산 권연과 사타이 수두룩이 올랐다. 실로 집 안에는 서양민족풍속과 종교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미국과 영국적 포로들은 본토에서 집식구들과 함께 성탄절을 쇠는 감을 느끼게 되였다.
만회에서 한 금발머리 포로는 제2차세계대전 때 포로돼 독일파쑈집중영에서 갖은 시달림을 받던 정경을 소개하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독일 사람들은 천주교와 기독교를 믿지만 우리한테 성탄절을 쇠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갖은 혹형을 다해 우릴 못살게 굴었습니다. 중국 인민들은 종교를 믿지 않지만 우리한테 이렇게 성대한 성탄만회를 차려주었습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중국은 세계에서 제일 문명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온몸이 쇠기둥같이 새까만 포로가 일어나 구호를 불렀다.
“중국인민지원군 만세!”
“모주석 만세!”
장내에서는 우뢰 같은 구호소리가 울려퍼졌고 박수소리, 웃음소리, 찬탄소리 끝없었다. 서양음악에 맞춰 포로들은 춤추고 노래하였다.
에이피통신사의 한 기자가 다가와 묻자 좋은 대우를 받은 영국의 한 포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린 중조측 포로수용소에서 뜨끈뜨끈한 구들 우에 침대에서 새 이불을 덮고 잤고 잘 먹으면서 충분한 휴양을 하고 왔습니다. 우리 든 수용소에는 철조망도 없고 때리고 욕하는 일도 보고 죽자고 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선에도 약품이 딸렸지만 우리한테 먼저 썼습니다. 내 두 다리는 여섯달이나 움직이지 못했는데 중국 사람들이 치료해주었습니다. 보시오.”
그 포로는 성큼성큼 걸어보였다. 그러고나서 멨던 불룩한 배낭을 벗어 풀어헤치고 여러가지 약을 꺼내보였다.
“내 다리병이 도질가봐 약까지 넣어보냈수다. 중구사람은 제일이요.”
그 포로는 엄지손가락을 흔들어보였다.
미군 군의도 미국과 영국 포로들의 신체를 검사해보고 모두 매우 건강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42살에 나는 미군 상병자포로 상위 크린은 튼튼한 신체를 군의한테 검사맞히고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으면서 기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대전시 부근에서 남하하는 조선인민군 전사들에게 포로됐습니다. 그때 조선인민군 전사들은 비행기 폭격을 무릅쓰고 6일 동안이나 간고한 행군을 해서야 전선을 떠나 우리를 후방에 호송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과 한집 식구들처럼 이밥에 물고기반찬을 해서 하루에 세끼씩 먹었습니다. 비행기 폭격이 심한 날에는 세끼를 먹을 음식을 두때나 한때에 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얼마만큼 크면 그 많은 걸 다 먹겠습니까? 실로 배를 두드리면서 먹을 지경이였죠.”
그 포로는 분개한 어조로 뒤말을 이었다.
“그때 젤 괘씸한 건 미군 날강도드이 날아와 기관총소사하고 폭격을 해대는 것이였습니다.”
참말로 이 모든 것은 입으로 “인도주의”와 “인성론”을 부르짖는 미제와 리승만괴뢰군이 우리 포로들을 갖은 수단으로 구타하고 릉욕하고 무참히 살해한 죄행과는 얼마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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