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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혁명이여 멀리가라!
개혁(改革)이라면 새롭게 고친다는 뜻이니 심리상 좋게 받아지지만 혁명(革命)이라면 목숨을 내거는 폭력이여서 공포를 주고 두려움을 안겨줄 뿐이다. 중국에서 이제 더는 제나라의 백성을 상대하여 무자비한 폭력과 직결되는 그따위 불민하고 야만스러운 짓거리ㅡ 혁명은 절대하지말고 싹 거둬치워야 한다!
왜서인가,리유는 간단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이른바"사회주혁명"이라는 미명하게 치르었던 운동들은 국정을 혼란하게 하고 파괴와 죽음과 원한만을 쌓았을 뿐 백성들에게 유익한것은 전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스스로 재난을 만들어 세상을 크게 웃긴 치욕의 대내란ㅡ문화혁명은 제쳐놓고 모택동이 그전에 벌리였던 "반우파운동" 하나만을 보기로 하자.
중공중앙에서 공포한 자료에 보면 1957년과 1958년에 우파로 되어 모자를 쓴 사람이 모두 55만2,973명인데 1978년후 그것은 한차례
인치(人治)를 주장해온 봉건적인 독재자에 의하여 당내민주와 국법이 무시되면서 제조된 철두철미한 억울한 안건으로 인정되여 모자를 벗은 사람이 55만2,877명이고 모자를 벗지 못한 사람은 전국적으로 다해봤자 모두 96명뿐이다. 그러니 결국보면 모자를 벗지 못한 우파분자 그 96명을 들춰내느라 55만이 넘는 지식분자ㅡ생사람을 잡아 그네들의 보귀한 일생을 망쳐버렸다는 얘기다.
모자를 벗지 못한 우파중 중앙급인원이 5명, 그들은 장백균(章伯鈞), 라륭기(羅隆基), 팽문응(彭文應), 저안평(儲安平), 진인병(陳仁炳)이다.
1957년 4월, 모택동이 각민주당파의 책임자들을 청하여 놓고는 공산당은 정풍을 하겠는데 도와달라했다. 그들은 그의 그 말을 딱 곧이듣고 제맘속의 말을 했다가 그만 다 그꼴이 되고만것이다.
(1) 장백균(章伯鈞)은 그당시 전국인대상위(全國人代常委), 전국정협부주석(全國政協副主席), 중앙교통부부부장, 농공민주당주석, 민맹중앙부주석을 지냈다. 그는 중공중앙통전부에서 연 좌담회석상에서 "현재 공업방면에 설계원이 있기는하지만 정치방면의 시설은 많고 설계원은 하나도 없다. 이래서야되겠는가, 내생각에는 정협, 인대, 민주당파, 인민단체는 의례 정치상의 네 개의 설게원을 세워서..." 그 말이 후에 그가 우파로 몰리우게 된 리유였던 것이다.
(2). 라륭기(羅隆基)는 그당시 전국정협위원, 중앙삼림공업부부장, 민맹중앙부주석이였다. 그는 전국인민대표회의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지난때의 "3반", "5반", "숙반"운동에서 빚어진 실책을 착실히 검사하게하끔해야하거니와 대중이 공개적으로 원안을 신소하게끔 고무해야한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발언이 결국은 우파의 "3대반동리론"의 하나로 되고만 것이다.
(3). 팽문응(彭文應)은 그당시 민맹중앙위원신분인데다 상해시정협위원이였다. 근는 "쏘련을 따라배우면 꼭 좋고 미국을 따라배우면 꼭 나쁜건아니다"고 했다.
(4). 저안평(儲安平)은 "광명일보"의 총편집이였다. 그는 "모주석과 주총리께 드리는 의견"서에다 쓰기를 "이 몇 년래 당과 군중지간의 관계가 그리좋지 않다" "관건은 '당천하'의 사상에 있는 것이다."
(5). 진인병(陳仁炳)은 민맹상해시위선전부(民盟上海市委宣傳部)의 부부장이였는데 모택동이 "진인병은 공산당의 정풍운동방법에 대해서 부동한 의견이 있다"고 말해서 우파로 된 것이다.
이상 다섯사람의 몸에서 발견된 공통점이라면 자기들이 한 발언은 잘못된것이 없다고 끝까지 우긴 그것이였다. 하길래 그들은 우파모자를 시종벗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들의 생명종말은 대체 어떠했는가를 보기로 하자.
장백균(章伯鈞)은 전국정협위원이라는 명예만을 가졌을 뿐 사회직무가 기본상 철소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점점 국민들의 기억속에서 잊어져갔는데 "문혁"때 온 가정이 박해를 받았다. 장백균(章伯鈞)은 74나던해인 1969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라륭기(羅隆基)는 지속적인 비판투쟁속에서도 한사코 머리숙일줄을 몰랐다. "골회를 다 태운들 너희들이 내가 사회주의를 반대한 흔적을 찾아낼수 있겠냐." 그가 한 말이다. 그는 1965년에 심장병으로 돌연히 세상떳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그가 낮에만도 친하게 보내는 녀인에게 전화를 쳤거니와 저녁때는 다른사람과 함께 식사까지했었는데 한밤중에 돌연히 발작해 옆에 사람이 없다보니 손이 전화통에 채 미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팽문응(彭文應)은 비판초기에 처를 잃었다. 병을 앓는 그의 처는 남편이 잘못되니 악연히 놀래서 그만 죽고만 것이다. 팽문응은 1958년에 직무를 철소당했거니와 원래부터 받아오던 월급과 진테도 잃고말았다. 명줄이 끊어지나다름없으니 생활은 극도로 빈궁해졌다. 그래도 그는 자기는 잘못한것이 없다고 뻣히였다. 1961년12월, 그의 둘째아들 팽지평이 극도의 고뇌와 생활상의 압력을 못이겨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고말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의 12월 12일에는 팽문응이 병으로 죽었으니 향년 58세였다. 그는 죽기전에 모택동에게 "만언서"를 써 전국내에서 우파투쟁을 중지하고 단결하여 사회주의건설에 힘써주기를 바랐다. "문혁"때 홍위병들이 그의 가족모를 전부 파헤치고 골회마저 없애버렸다.
저안평(儲安平)은 우파로 몰리게되자 가정불화가 생겨 처와 리혼하기에 이른건데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이 그녀가 적발하니 곤경을 이기지 못해 1957년 7월 "인민앞에 투항한다"는 발언을 하고만 것이다. 한지만 그는 광명일보총편집에서 떨어졋고 이어서 중앙선전부부부장의 지위도 잃고만 것이다. "문혁"이 시작되자마자 저안평은 끌려나와 투쟁받기시작했다. 그는 고통을 못이겨 강에 빠져 자살하려다발각되여 성사못했는데 그후로는 영 볼수없었다. 자살했는지 맞아죽었는지 아니면 중이 되느라 가출을 했는지... 그 누구도 종적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이제는 그들에 대한 평판을 관심하는 사람도 독촉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뒤늦게까지 살아있는건 진인병(陳仁炳) 한사람뿐이였는데 그는 그저 "나도 전에는 좋은일을 많이한 사람이였어, 살아있는 우파는 내야"를 외우다가 1990년 12월 9일, 상해에서 세상을 떳다. 향년 81세.
지금은 그들에 대한 평판을 관심하는 사람이 있기나한지?... 중국에서의 "반우파운동" 그것은 "혁명"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았을 뿐 기실은 그것이 폭력으로 강요된 억울한 사상개조였던 것이다.
법제가 없이 진행되는 운동ㅡ혁명때 사람의 목숨은 풀과같은 것이다. 혁명립장에 선자가 너를 반혁명이라 선포하면 너는 반혁명이 되는 것이지 아니라변명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당시 "우파"된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의별 희한한것들이 다 있어서 그것만이라도 모아 쓰면 아마 "웃음주머니"를 수십권이라도 만들어낼 것 같다.
아래 정말 있은 일 몇가지만 례를 들련다.
한친구가 회의때 실없이 우스개소리 한마디했는데 그 우스개인즉은 "흐루쇼브의 머리가 신통히 장백균의 머리같가"는 것이였다. 그 사람은 그 한마디에 우파가 되어 평생기도 못펴고 고생을 한 것이다.
어느 한 문화관의 관장은 마음이 선량한 사람이였다. 그는 자기의 동지가 우파가 되어 가정이 망하는 것을 원치않았다. 그러니 우에서 내려보낸 "우파지표"를 완성할 수 없어서 골머리를 앓았다. 이걸 어떻게 하나?... 상급에서 정해준 시일이 다되니 그는 마음을 도슬려먹고 그만 제이름을 써넣고말았다. 이틑날 그는 붙잡혀 북대황에 로개를 가고말았다.
왕쇼동은 12살나이에 우파가 됐으니 중국에서 아마 제일어린 동우(童右)일거다. 그애는 그림 특히는 만화그리기를 좋아했다. 어느날 면목아는 사람이 그보고 그림을 그리라했더니 그는 남은 일을 하고있는데 간부는 뒤짐을 지고 번들거리는 풍자만화를 제꺽그리였다. 그랬더니 그것이 공산당간부를 모욕하는것이 되어 그 애는 우파가 된 것이다.
황당하기 짝이없다.
이따위 "반우파운동"을 해서 국가가 잘된게 대체 무엇인가? 유익한 점이 조금이나 있었던가? 없었다, 하나도 없었다. 제마음대로 독재를 부리려고 전횡독단을 한 그 봉건군주의 야심적인 배짱이나 더 크게 키웠을 뿐 일호반점도 잘된것이 없었다.
중국은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하고 가난한 나라여서 응당 지식분자에 대한 우대와 보호책을 써야 옳았건만 그러지는 않고 되려 아까운 인재죽이기를 해서 국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계획건설은 속도가 늦어졌고 따라서 공상적인 유토피아식의 "인민공사화"나 "대약진"의 시달림속에 백성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었고 처참한 아사(餓死)에 헤매였을 뿐이다. 꼴이 그러했기에 세계는 내내 중국을 비웃었다.
세상 그 어느나라가 중국은 혁명을 해서 륭성발전한다고 보았던가?
없다! 개혁개방을 한 이후부터 세상은 중국을 괄목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혁명이여 멀리가라!
영원히 오지 말고 멀리멀리 가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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