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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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사생지간
2013년 09월 29일 19시 00분  조회:3611  추천:3  작성자: 김송죽
 

수필 사생지간

 

우리 몇은 술상에 둘러앉았다. 대학가는 학생집에서 청했으니 여느술판과는 달랐다. 고마움과 희망, 축복과 기대의 감정이 서로 안고 도는 즐거운 장소라 하겠다.

학생은 잔에 술을 부어 들고 “오늘 저는 여러 선생님덕분에 대학가게됐습니다.”하고 말했다.

헌데 학생이 부어주는 그 인사의 첫잔을 누가 받아야 옳은가 하는 문제를 놓고 롱담절반 진담절반 옥신각신하던 중에 내곁에 앉았던 동창생ㅡ 소학교장이 먼저 채여 대접받았다. 계몽스승은 중학선생이 아니라 그래도 소학선생이니 술잔이 먼저 차례지는건 당연하다는 주장이였다. 좌중은 별 시비없이 웃고말았다. 하긴 그럴법도하니까.

우리 모두는 이럴 때 내가 진정 너 대학생의 계몽스승이였으면 작히나 좋으랴 하는 심정이였다. 한 사람이 나라의 동량지재로 자라남에 있어서 계몽스승의 작용은 자못 크거니와 영광스럽고도 존경할만한 위치에 놓여있게되는게 아닌가!

 

쏘련 까자흐초원의 한 궁벽한 마을에 듀이센이라는 젊은 공산당원이 파견되여 마구간을 학교로 꾸리고 거기서 무지한 마을 사람들을 설복해 가면서 무식한 애들에게 처음으로 글을 가르쳤다. 그런 아이들 중 알찌나라는 녀학생이 후에 모스크바에 가 대학공부를 하고 철학박사로까지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마을에도 중학교가 일떠서 새학교입학식이 있게되였을 때 마을에서는 크게 출세한 그녀를 모셔다 제일 귀빈석에 앉히였다. 허나 그 녀인은 쏘독전쟁 때 죽은줄로만알았던 그의 첫스승이자 계몽자인 듀이센이 지금까지 살아있거니와 보통꼴호즈원이며 우편통신원으로 있다는걸 알았을 때는 자기가 받아서는 안될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묵과할수도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는 그만 결연히 떠나가버리고만다.

여기서 우리는 그 철학박사녀인의 참으로 인간다운 자각ㅡ 세월이 흘러가고 지위가 높아졌어도 계몽스승에 대한 경모의 심정만은 의연히 변함없는 갸륵한 성품을 읽을 수 있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다운 고상한 풍도가 아니겠는가!

헌데 공부많이하고 출세한 사람이라 해서 다 그녀처럼 고상한건 아니다. 준마가 망아지 때 자기를 길러준 사양원을 알아못보듯 어섯눈을 틔워준 스승을 잊고있는 사람은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제자가 잘될것을 바라고 잘되면 반가와하지 않을 스승이야 어디있으랴. 누가 만약 출세하면 “그인 내가 배워준 학생이였어.” 하면서 스스로 만족과 자랑감에 잠겨 되뇌여보는 것이 바로 스승이다.

 

내가 벌리에서 중학을 졸업한지도 어언 30년이 넘는다. 하건만 그때 나를 배워줫던 선생님들 중 지금도 의연히 교단에 오르고있는 이가 몇분계신다. 지금 일어를 배워주고있는 안영곤선생님과 교도주임사업을 하고있는 황동철 이 두분선생님은 내 초중때의 담임선생님인데 인젠 다 로인줄에 올라 머리가 반백이 되었다.

재작년그러께 겨울, 연변작가협회의 회의때 내가 귀향길에  모교에 피끗들렸었는데 모교에서는 모처럼 나를 위해 연석을 베풀엇던 것이다.

그때 황선생님께서 “송죽동무가 학교다닐때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더니만 끝내 성공했구만! 나는 스승으로서 이처럼 리상을 실현한 제자를 만나니 과연 기쁘기가 한량없소!” 하면서 손수 술을 부어 축복해주니 목이 메이도록 감격스럽던 일을 두고두고 잊을것 같지 않다. 자기에겐 푼전 한 잎 차례지는 것도 없건만 제자의 양광스러운 앞길을 성심으로 바라고 기뻐하는 것ㅡ 그것이 바로 스승의  감정이 아니겠는가. 헌데 사람마다가 제자로서 스승에 대한 경모의 감정은 대체 어느만큼이나될가? 나는 내가 목석같이 무감각하고 불민한 인간으로 되지 않은게 참으로 다행인가싶다.

어느해인가, 동생잔치에 상객으로 화남현 풍기촌에 갓을 때 나는 그곳에 내가 소학다닐 때 교장이였던 강현풍선생님이 아직 살아계신다는 소리를 듣고 차에서 내리자바람 찾아가

“선생님, 그간 옥체무강하셨습니까, 저는 선생님의 제자 김송죽이 올시다.” 하고 절을 올렸더니 선생님은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야, 이거 참 오래간만이구나! ‘문화혁명’에 고생많이했다는 소식을 내가 들었네라. 그래 몸은 일없게 됐는가?” 하고는 눈물짓는것이였다.

나도 그러했다. 회포인들 적었으랴. 격세해있은 그 몇 년간 가슴속에 묻어왔던 사생간의 그리움은 상봉의 그 시각 실로 진지한 동경과 반가움으로 부풀어올랐던 것이다.

 

엄해룡과 변태국이는 소학시절 내가 배워준 제자인데 지금도 의연히 한 향내에 살고있다. 1974년 겨울철의 어느날, 그들은 무죄판결받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내가 이웃마을에 조동되여 다심금 교편을 잡게되자 술근을 받아갖고 일부러 보러왔던 것이다. 여러해나 굴리우면서 짓몰린 끝에 교단에 다시오르기는했지만 아직도 “혁명자”들의 은근한 적대적인 감시속에 들어있은 나한테는 그네들의 그 “스승은 어디까지나 스승입니다.” 하면서 과감한 용기를 냈던 위문이 얼마나 고맙던지!

오는 정, 가는 정ㅡ 그래서 위안과 믿음속에 굳어지는 정. 사생간의 정도 실은 부모자식간의 정만 못지 않건만 그 가치와 귀중함을 사람들은 왕왕 몰라서 놓지거나 잃고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난생 처음 글이라고 써낸것은 두 개의 소절로 꾸며진 “땅크병형님”이라는 짤막한 아동시였는데 그것이 어느 소년간물에 발표된것이 조선전쟁이 바야흐로 끝나고있었던 1953년도 여름이였으니 소학5학년때의 일이다. 나한테 그같이 문학을 열애하게끔 이끌고 아름다운 리상의 싹을 틔워준 계몽스승은 김창민선생이다. 이젠 환갑이 다 되었을 그 선생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묘연하여 나는 지금도 가끔 그리워지군하는 마음이다. 

 

               

                    1990. 3. 31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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