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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가장증오받은 이름ㅡ흐루쇼브
모택동이 생전에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한 원쑤는 누구였는가? 두말할것없이 그는 흐루쇼브였다.
1956년, 쏘공20차대회는 세계를 진감했다. 그번 회의가 쓰딸린의 위망을 들부셔놓았기 때문이다. 쓰딸린은 1924년에 레닌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아 1953년에 죽었으니 근 30여년간이나 쏘련에서는 둘도없는 권위자로 군림한 것이다. 쓰딸린이 쏘련의 공업을 발전시키고 독일파시스의 진공을 물리치고 전승한 것은 그야말로 존경해야 할 공적이였다. 하지만 그가 당내에서 잔혹한 투쟁을 벌려 육체를 훼멸하고 개인숭배를 고창하느라 민주를 탄압한 행위는 그야말로 용서못할 극악한 죄악이였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당내에다 원한을 많이 만들어 쌓았지만 누구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떠받들면서 구역질날지경으로 양심에 없는 찬양만해야했던 것이다. 한데 결국은 어떠했는가? 그가 일단 죽어버리니 완전히 변해버리고말았다. 더는 그럴필요가 없게되였던 것이다. 쓰딸린이 죽어서 3년만에 쏘련공산당은 20차대회에서 쓰딸린을 비판했거니와 그가 조작한 많고많은 숱한 억울한 안건들을 시정하기시작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쏘공은 1961년도 제22차대회때에는 쓰딸린시기의 잔혹한 당내투쟁을 극도로 혐오하기에 이르었던 것이다. 그때 쏘련공산당의 지도자였던 흐루쇼브는 쓰딸린을 집중해서 비판했거니와 온 세계, 특히는 사회주의진영의 눈길을 한데끌어모으는 놀라운 결의를 내리기까지 한 것이다.
“대회는 레닌의 묘에 이·쓰딸린의 수정관이 들어있는것은 합당치않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쓰딸린이 레닌의 가르침을 엄중히 위반했거니와 권리를 람용하여 정직한 쏘련사람들을 대규묘적으로 억압했기 때문이다. 그가 개인숭배기간에 저지른 행위들을 봐서 그의 령구를 브·이·레닌의 묘에 함께둘 수 없다.”
쏘련에서는 쓰딸린의 유체를 레닌묘에서 끄집어내여 태워버렸다. 사실보면 스딸린의 유체를 태워버린건 쏘공의 결의였지 흐루쇼브 그 한 개인만의 뜻이 아니였다. 그리고 실상 쓰딸린은 살았을적에 제절로 자기의 시체를 그꼴이되게 스스로 만든것이다.
쏘공의 그 거동이 모택동으로하여금 지대한 반감을 사게 만들었다. 하여 모택동의 눈에 흐루쇼브는 가장나쁜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20대후부터 벌써 중쏘관계는 내리막길을 걷기시작했는데 쏘련에서 시행한, 지어 중국에 와있었던 전문가들을 전부 철수하는 식의 극좌로선은 중국의 경제형편에다 설상가상으로 곤난을 더해주었던 것이다. 하여 쏘공과 중공은 점점 더 척을 짖고 적대가 된 것이다. 22대후부터 중쏘량당간에는 전면론전을 시작했는데 중공중앙에서 발표한 <<9평>>은 바로 모택동이 친히 지휘하여 만들어진것이였다. <<9평>>은 흐루쇼브의 믿그루를 뚜지였다. 흐르쇼브는 쓰딸린이 살았을적에 붉은광장에서 “쓰딸린은 우리를 낳은 아버지”라고 노래불렀던것이 그가 죽어 세상에 없으니 이제와서는 시체에다 채찍질을 안긴다고 하면서 너 흐루쇼브가 쓰딸린의 유체를 태워버릴 수는 있어도 쓰딸린을 쏘련인민의 맘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지는 못할것이라고 화나서 질책했던 것이다.
모택동이 흐루쇼브를 향해 그같이 포를 쏜건 쓰딸린이 감사해서가 아니였다. 모택동은 일찍부터 쓰딸린의 쇼비니즘에 대해서 극도로 혐오해왔던 것이다. 중공이 간고한 투쟁을 겪고있는것을 보면서도 쓰딸린은 전력으로 지지해주지 않았거니와 지어는 해방군은 장강까지만 나가고 더 나가지 말라, 장강을 남북의 분계선으로 만들라고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쓰딸린은 중국이 통일되여 강대해지는것을 무서워한다고여겼기에 쓰딸린의 그런말을 아예 듣지도 않았던 것이다.
전중국을 해방하고 몇 달지나서 모택동이 쏘련을 방문간건데 생각밖에도 쓰딸린은 정거장으로 마중도나오지 않고 오만을 부렸거니와 진지한 담화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하여 모쓰크바에서 멋없이 적적하게 보내다가 돌아온 모택동은 그에 대해서 불만이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흐르쇼부가 쓰딸린의 유체를 레닌묘에서 끄집어내여 태워버리니 모택동은 시각을 바꿔서 쓰딸린을 다시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쓰딸린은 30여년간이나 쏘련을 다스린 사람이 아닌가, 살았을적에 그같이 애대하면서 찬미하던 인간이 그가 죽으니 이제는 채찍질하면서 시체를 태워버리다니? 모택동의 눈에 흐루쇼브는 지독한 량면파, 야심가로 돼보였기에 반드시 경각성을 높혀야겠다고 생각하게되였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모택동은 자기처지를 생각해서 “중국에는 그같은 흐루쇼브가 없겠는가?”하면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가 문화혁명을 발동한 목적이 바로 자기 곁에서 잠자는 흐루쇼브를 찾아 잡아냄으로써 미루시 우환을 없애자는 것이였다. 모택동이 친히 제정한 계승자의 5항표준을 보면 그의 의향이 아주뚜렷한 것이다.
“계승자”는 “대다수사람과 단결하여 함께 사업할줄을 아는 무산계급정치가여야하며” 동시에 “특히는 흐루쇼브와 같은 그런 야심가와 음모가에 대해서는 경각성을 각별히 높혀야하며, 그따위 나쁜자가 당과 국가의 각급령도권을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거니와 계승자는 “반드시 당의 민주집중제를 집행함에 모범적인 집행자여야지 흐루쇼브처럼 그렇게 당의 민주집중제를 파괴하고 전제적인, 동지를 돌연습격하고, 도리도 없이, 개인독재를 부리는 자여서는 않된다.”
그때로부터 흐루쇼브는 “수정주의”와 동의어로 되였거니와 중국에서 외국사람을 꾸지람하는 어구로도 되여버렸던 것이다. 모택동은 흐루쇼브식인물이 당내에 숨어있는것을 찾아내여 빼버리느라 “문화혁명”을 발동하고서는 중국의 흐루쇼브를 찾느라 우아래를 근 10년간이나 올리훓고 내리훓은 것이다.
한때 요문원(姚文元)이나 척본우(戚本禹)가 요란스레 떠들어대서 나도《청궁밀사(清宫秘史)》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중국의 흐루쇼브”니 “중국의 흐루쇼브 류소기를 타도하자”느니 “우리곁에서 잠자는 흐루쇼브를 잡아내자”느니.... 그래서 그 세월에는 흐르쇼브가 우리 나라에서는 주파수가 제일높은 이름으로되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쨌다고 그랬는가?.....
지금생각하면 그저 허구푼웃음만나온다.
문화혁명ㅡ 따지고 보면 그건 순전히 모택동이 사후 자기도 쓰딸린모양으로 수정관에서 들려나갈것을 우려해서 피운 짓거리가 아니고 뭔가?....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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