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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산국가'ㅡ크메르 루즈(红色高棉) (1)
김송죽 자료번역
출처: 캄보디아 NetEase> 뉴스 > 대형 관보 > 크메르 루즈 편집항목
红色高棉大屠杀 출처: 百度百科
ខ្មែរក្រហម
캄보디야 공산당을 일반적으로 크메르루즈(红色高棉)라 부른다.
(고명문자: 로마문자:KhmaeyKrahom;프랑스문자:Khmer Rouge)
과거 캄보디아의 정당이였다. 그 당은 1951년에 성립되였는데 전신은 인도지나공산당 캄보디야 지부였다. 그런것을 1966년에 캄보디아 공산당이라 이름을 바꾼것이다. 1981년12월8일에 해산을 선고했다.
그 당 역시 공산주의를 믿었으나 캄보디아의 집정당으로 있은 1975년부터 1979년초 기간에 허무하기 짝이없는 극좌의 정책을 실시함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이루형언키 어려운 재난을 덮씨워 천추에 용납못할 무서운 죄를 진 악당인 것이다. 그자들은 캄보디야에 민주정권을 건립한다고 부르짓었는데 3년 8개월간 국가를 지배하는 기간에 40만 300명 이상이 기근과 과로, 질병과 박해로 인해서 사망되였는바 20세기 최대규모의 인공재해로 인정되였다. 하여 근대의 인류역사에서 악명기록을 낸 것이다.
1997년,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 루즈(红色高棉) 심판위원회를 내왔는바 그들은 2003년에 캄보디아 정부와 연합국협의에 의해 공산국가였던 크메르 루즈를 심판하는 특별법정을 세웠던 것이다.
크메르 루즈(红色高棉)의 간략한 소개
크메르 루즈 즉 빨간 캄보디아(크메르어:Khmaey Krahom,프랑스어:Khmer Rouge)가 1950년 성립 될 당시는 인도지나 공산당의 한 지부로서 캄보디아 공산당이라고 불리우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70年에 캄보디아 민주당(Party of Democratic Kampuchea)이라 고치면서 캄보디아의 집정당으로 되었던 것인데 1998년에 이르어 정부에 항복하고 말았다.
“크메르 루즈”는 좌파세력이였던 시하누크의 칭호이기도 하다. 후에 자신의 무장을 갖추면서 크메르 혁명군이라 했고 무장기의가 승리해서는 캄보디아와 공동의 대명사로 된 것이다. 내부에서는 캄보디아공산당을 “안카(安卡)”라 부르기도했는데 캄보디아어로는 “조직”이라는 뜻이다. 그자들의 통치하에 세상을 놀래우는 제 동포에 대한 무자비한 대학살이 벌어졌던 것이다.
발전역사를 되새겨 보면
1935년,인도지나공산당은 마카오에서 제1차대표대회를 열고는 각기 인도지나사회주의련방 또는 사회주의국가를 세우기로 했던 것이다. 그에 앞서서 1930년2월3일,호지명(胡志明)은 홍콩에서 인도지나공산당을 성립했는데 그 당내에 캄보디아 지부도 있었던 것이다. 1951년2월,인도지나공산당은 자동적으로 해산되였다. 그리고는 동년의 9月에 산Yucheng(山玉成)이 마덕망성 삼락향에서 회의를 열고는 캄보디아인민혁명당이 성립되였음을 선포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캄보디아 인민당의 성립일로 정해져 내려오고있는 것이다.
1960년9월,캄보디아인민혁명당은 대표대회를 열고 자기들 당의 이름을 캄보디아로동당이라 고쳤다.
폴 포트 통제 기간의 크메르 루즈(红色高棉)
모택동이 길러낸 학생ㅡ 살인악마 폴포트
1962년,캄보디아로동당 총서기 도스무가 실종되자 폴 포트가 계임하면서 프랑스파가 그 당의 핵심으로 된 것이다
1966년, 폴포트는 리닝에서 중앙위원회 특별회의를 열고는 캄보디아로동당을 캄보디아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1967년4월,마덕망성 삼락향 농민들은 세금을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캄보디아공산당은 자체의 무장을 건립랬는데 그것을 캄보디아혁명군이라 이름짓고는 각지에서 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전이던 1964년에 미국은 비행기로 호치민 트레일(胡志明小道)을 폭격했고 1969년3월에도 공습으로 캄보디아에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1970년3월18일,캄보디아의 친미 우익세력 론놀, 스리마다(Shilimada) 등은 캄보디아(크메르)의 왕 노로돔 시아누크가 중국을 방문하는 기간에 정변을 일으켜 그의 17년간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1970년4월,미국과 남 베트남 군은 캄보디아 남부를 침공했다. 그리고 그해의 5월5일에 캄보디아민족단결정부가 성립되어 시하누크가 국가주석이 되고 쵸산판이 수상으로 된 것이다.
1975년4월1일,크메르루즈 군대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게되자 론놀(朗诺)은 하는 수 없이 미국으로 도망갓다. 그해의 4월17일,크메르루즈는 프놈펜을 점령하여 크메르 공화국을 뒤집어엎엇다.
크메르루즈(红色高棉)
1976년1월,캄보디아는 새 헌법늘 내오면서 국명을 미주캄보디아라 고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는 그해의 여름에 폴 포트가 총리에 취임했고 공공연하게 키우삼판(乔森潘)을 대통령으로 한다고 선포했다. 그리하여 왕노릇을 했던 시하누쿠는 1976년4월4일에 강요에 의해 은퇴하는 수 밖에 없었고 그런 후에는 실지로 가택 연금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크메르 루즈의 킬링 필드(杀人场)
크메르 루즈는 집권기간 캄보디아를 사회의 모든 클래스(계급)의 차별이 없는 국가로 만들것이라 장담했다.
그 정책은 다음과 같았다.
1). 통화(货币), 종교를 페지한다.
2). 사유 재산은 몰수한다.
3). 도시생활을 없애고 가족을 분리시킨다.
4). 은행을 청산하고 학교, 병원, 공장, 사원을 없애버린다.
5). 도서 인쇄와 출판을 금지한다.
6). 오직 혁명 노래만을 불러야 하고 혁명춤을 추며 혁명복장을 입어야지 서양문화를 전파해서는 안된다.
7). 상인, 교사, 률사, 의사, 승려는 모두 없애버린다.
8). 도시생활은 자본주의식이기에 시민들을 모두 집단농장에 보내여 농사일을 해야 한다. 등등.
지식분자는 개조시키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리유로 살해했는데 그 방법은 기계로 뒤통수에 구멍내여 뇌즙을 끄집어꺼내는 것이였다. 인재들이 살해되던 장면. (红色高棉“活体取脑机”真相)
므릇 학자건 작가건 교수건 교원이건 률사건 지식이 있을수록 그 다가 혁명해치울 대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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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상ㅡ 크메르 루즈는 전국의 인구를 농촌에 집중시켜 농업생산을 크게 발전시킴으로서 장차 농산품을 외국에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며 그것으로 농업기계들을 사들여 농업을 더 발전시킨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내부 관리가 문제였다. 농업방면에서 실제에 부합되지 않은 너무나 높은 생산 목표를 세웠길래 그 결과는 중국의 대약진 때 모양으로 되고말았던 것이다. 중간층의 간부들은 다가 상급에서 맡긴 임무량을 완성하느라 거짓보고를 하는 통에 전국성적인 기근을 트리거(引发)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들이 국내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곡물를 외국에 수출한 결과 그 반면으로 국내에서는 기근이 휩쓰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의 도시 주민들 거의가 농촌일에는 적응되지도 않은데다 기근까지 덮치니 대규모의 사망이 생기기 마련이였던 것이다.
정치상에서 크메르루즈가 지나친 관제와 숙청을 한것과도 관계된다. 그들은 전제 국민을 “이전사람”과 “새사람”으로 나누었는데 “새사람”은 반드시 개조를 거쳐야 한다면서 국민의 활동을 정부가 제한했는데 어느정도였는가? 그 누구든 약간만 위반해도 사형에 처했던 것이다. 돈이 취소되였다. 집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공공식당 외 다른 어디에서건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매점들을 전부 없애버렸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로약자가 일을 더는 하지 못할 시에는 량식을 아껴야 한다는 리유로 아예 살해했다. 부부마저도 분리시켰는데 1주일에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크메르 루즈의 통치기간 대도살에 목숨을 잃은자가 300만이상이니 전체인구의 약 1/5이 되는 것이다.
1975년4월17일, 크메르 루즈는 이제 미국군이 프놈펜을 공습 할 것이니 전체 시민들은 긴급히 피난을 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려 수도주민들을 강제적으시골에 보냈다. 그러면서 3일지나면 다시돌아올것이니 집재산들은 그냥놔두라 했다. 정부이 그같은 긴급대피 명령에 의심을 품고 움직이려 하지 않은 사람은 전부가 사살 되였다. 하여 200만명의 시민이 살아오던 프놈펜은 졸지에 유령도시로 변하고만 것이다.
이전 랑노(朗诺)정권시기의 군정인원은 다가 크메르 루즈의 정치적 억압과 청산대상이였다. 일반 군인을 포함하여 경찰이였건 공무원이였건 지어 랑노(朗诺)의 쿠데타 이전의 왕실성원마저도 숙청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처결방식이 잔인했다. 일반적으로 트럭에 실어 한곳에 가져다 부리고는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아니면 총살했던 것이다.
피난을 해야 살 수 있다는 충고와 독촉에 속히운 성시 피난민 인력들을 농민과 함께 운하건설노동에 강요되였다. 반항하면 당장에서 총살이였다. 게다가 국가는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량식과 생활물자공급이 결핍했기에 강제로동에서 굼주리고 맥이 진해서 죽어가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한편 크메르 루즈는 순결성을 보존한다면서 내부의 청결을 했는데 폴포트는 세균이라는 형용으로 당내에서 자기와 조금이라도 감정이 맞지 않은 사람이면 배척했다. 크메르 루즈는 건국초부터 (크메르 몸 베트남의 마음)을 제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크메르 루즈는 프로 창립 분자건만도 KGB 스파이라느니 당내에 뚫고들어온 미국중앙 정보국 (CIA)요원이라느니 덥터기를 씌워 처결했다. 1975년10월에 선포한 민족전선의 령도가 13명이였는데 1977년에 5명이나 그같이 억울하게 처결된 것이다. 내무부 장관을 포함하여 상공장관, 신문선전부장, 국가주석단제1부주석, 국가 통계국장 등이였다. 각 지방에서 당정군령도자로 있다가 처결 된것은 더욱 많은 것이다. 예를 들면 1978년,서남구영도자 따목(塔莫)이 책임졌던 동부지구의 간부와 군대에 대한 숙청을 보면 반년내에 처결한 것이 거이 10만에 이르는 것이다. 프놈펜 외곽에다 강제 수용소 Sㅡ21을 세웠다. 그것은 프놈펜 외각에 있는데 프랑스에서 지은 벽돌집으로서 이전에 중학교로 사용했던 것이다
This combination photo shows undated file pictures of the five former top members of Cambodia's notorious Khmer Rouge due to be tried by a U.N.-backed tribunal. (top l), known as "Duch', was former director of the Tuol Sleng torture center; former deputy and "Brother Number Two" (top center); former prime minister (top r); former foreign minister (bottom l) and his wife (bottom r), who served as social affairs minister for the Khmer Rouge. (AFP/AFP/Getty Images)
공산국가의 살인백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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