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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을 살해한 자를 절대용서말라
2015년 11월 22일 01시 40분  조회:3979  추천:0  작성자: 김송죽
 

                                         한 홍위병의 참회 

                         모친을 살해한 자를 절대용서말라  

                                        

                                          베이징 변호사 장홍병(张红兵)

 
                       

              

장홍병(张紅兵), 원명 장철부(张铁夫). 올해 나이 61세. 1970년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이름을 빨간색으로 고치니 마뜩잖아서 너 왜 그러느냐 하면서 집에서 모택동이 류소기와 같이 혁명을 하고서도 이제와서 그를 타도하는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그가 문화대혁명을 발동한데 대해서 불만스러운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다고 장홍병은 “엄마는 반혁명”이라 하면서 고발하여 장홍병의 어머니 팡충모는 두달갇혔다가 총살당하고 말았다. 

장홍병은 점차 자라나면서 몇 년동안 마음상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왜 그같이 철없는 짓을 했던가? 후회가 막심한 그는 잔혹했던 지난세월의 역사를 돌이켜 회상하고 참회하는 심정에서 지난일을 세상에다 이같이 공개는 것이다.

 

올해 나이 61세인 장홍병은 8월2일,고향 안휘방부오하현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자신의 “역사적상처”를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45년전이니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때였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자 철부(铁夫)를 제멋대로 홍병(红兵)이라 고쳐지은 그해 내 나이는 16살이였는데 어머니를 비난하는 편지 한통을 써서 그것을 홍위병배지(红卫兵胸章)와 함께 당지의 군사대표가 든 기숙사 문쯤에다 끼워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나를 낳아 길러준 어머니를 반동이라 고발 한 것이였다. 나는 그 고발신에다 어머니 방충모(方忠谋)는 집에서 자기는 류소기를 지지한다면서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일으킨것은 틀린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러는 것을 아버지도 들었다. 나의 아버지는 성명이 장월생(张月生)인데 나와같이 어머니를 반동이라 했다.

그날 밤이였다. 내가 동생, 아버지와 같이 집에 있었는데 외삼촌(올해 66세)이 왔다가 이 일을 알고는 너가 왜 그렇게 철없이 덤비느냐고 나무랏다. 그러자 나는 두고봐요, 이제 아예 누나마저 고발할테야 했다. 누나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태도가 어머니와 같았던 것이다. 외삼촌은 그렇게 말없이 화목하던 한 가정이 이제 화를 당하겟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하면서  안달아했다. 나의 어머니 방충모는 그날로 붙잡혀가서 두달갇혔다가 “현행반혁명”이라 판결되여 총살당하고 말았다.” 

 

장홍병의 외삼촌이며 금년에 66세인 방매개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분쟁이 있은 그날 밤이였다. 장홍병은 제 아버지와 같이 한편이 되어 제 어머니와 견해가 같고 립장이 같은 제 누나마저 고발하여 검찰이 와서 당장 잡아가게 하리라 했다. 매우 불안했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재화를 입을 그따위 머저리짓은 제발 하지 말라고 설득하다가 안되겠길래 거기를 뛸쳐나와 도와줄 사람을 찾느라 헤맸다.... 방충모는 두달갇혔다가 끝내 ‘현행반혁명’이라 판결이 내려 총살되고 만 것이다.”

 

10년후인 1980년7월23일에 안휘숙현지구 중원지구 법원은 원래의 판결이 잘못되였으니 고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려내지도 못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원통하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제 어머니를 그같이 죽게 만든 장홍빈은 후회막급했거니와 어떻게 하면 속죄가 될지 내내 후회와 반성과 고통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다 그는 2011년9월에 안휘의 구전현당국을 찾아가 제 모친의 모를 “피해자유물”로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유관부문에서는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했다. 답복인즉은 그의 제의가 유물에 관한 국가규제와 요건에 부합되지 않기때문이라는 것이였다. 

 

다른 별 방법없은 장홍문은 지난해 8월에 청문회에 나서서 다시한번 자아 참회를 했다. 그래서라도 담은 얼마간 속죄를 하자는 심정이였다. 그가 말했다. “나는 제 어머니를 죽인 불효자입니다. 나를 반면교재로 삼아주시오. 그같은 역사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생기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히 다시생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기자가 그한테 물엇다.

“당신은 어떻게 되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아마 2009년도일겁니다. 나는 온라인을 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문화대혁명은 좋았다’면서 또 했으면 좋겠고 하길래 ‘정신나간 놈’이라 욕했습니다. 그같은 혁명은 죄악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은 그당시 아버지와 같이 어머니를 고발하자했다며?” 

장홍병은 다음과 간이 말했다.

“우리 집도 다른 여늬 집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아주 따뜻하고 화목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투쟁맞던 날 어머니가 나서서 ‘요원도우, 뿌요 우도우!’하고 고함치며서 자기 몸으로 주먹질을 막아 아버지를 보호했던 겁니다. 그날 투쟁대회가 끊나자 어머님은 아버지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나의 부모님들이 그같이 정깊은줄을 전에는 미처몰랐던 겁니다.” 

그의 부친 장월승(张月升)은 그당시 고진현위생과 과장(固镇县卫生科科长)이여서 “문혁”초기에 끌려나와 투쟁받은 것이다.     

“부부간 그같이 정이 깊었건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반동이라며 일러바치겠다고 했단말이지?”

“그렇습니다. 시대가 그러했으니까요. 그때는 사람들의 의식과 사회동향이 그러했던 겁니다.” 

“사회동향이 암만그렇다해도 제 어머니를 목숨잃게 할 정도까지야?”

“그렇습니다. 나는 ‘모친살인죄’를 졋으니 용서못받을 불효자입니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됩니다. 때는 1970년2월13일이였습니다. 우리 집 식솔들은 ‘문혁’을 놓고 가정변론을 했던 겁니다. 그날 어머님은 국가령도자가 자기에 대한 개인숭배를 하게끔 하는것은 맞지 않는다면서 ‘류소기는 참 좋은 사람이다, 나는 류소기를 위해 번안하겠다’라고 했던겁니다. 나는 그의 그런 말에  정말 크게 충격받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나의 심목중의 어머니 형상은 완전히 변해버리고 만 겁니다. 나의 어머니인 것이 아니라 계급의 적으로 보여졌던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비판투쟁해야겠다고 맘을 먹은 겁니다. 아버지도 이제부터 너하고는 견결히 계선을 갈라야겠다면서 그보고 네가 방금 내뿜은 그 독설들을 네절로 전부 쓰라고 했던 겁니다. 어머니는 하라는대로 한 장 썻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들고 문을 나가서면서 이제 당장 고발하리라 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고발하러 갔는데 당신은 왜 갓는가?”

기자의 이 물음에 장홍빈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나는 아버지가 다른 궁리를 할가봐 걱정한 겁니다. 말할것 같으면 어머니와는 감정이 깊거니와 또한 가정을 돌봐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어머니를 용서해줄것 같아서 말입니다. 나는 나 자신은 그래도 혁명립장이 견정하다는 것을 보여주느라고 검거신(检举信)을 쓴겁니다. 그래서는 그것을 홍위병배지(红卫兵胸章)와 함께 군대표가 들어있는 숙사의 문쯤에다 끼워넣고 돌아왔던 겁니다. 그 후 내가 집에 돌아와서입니다. 군대표와 민병패장이 들어오더니 어머니를 발로 차놓으면서 땅에 무릎을 꿇라했습니다. 그리고는 번들만두처럼 포승줄로 그를 묶는 것이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어머니가 묶이울 때 어깨 목에서 듣기끔찍스런 소리까지 났습니다.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날벼락’이였습니다.” 

“제 어머니를 고발하면서 후과가 어떠하리라는건 그래 생각지 않았단 말인가?”

“생각은 했습니다. 아버지가 고자질하고 돌아와서 어머니와 너같은 년을 총살해서야 아까울게 없는줄을 알겠지?”합디다. 그리고는 이어서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겁니다. “내가 적발신 끝에다 썻다. ‘방충모를 총살하라!’ 라고 말이다.”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은 그래 어머니가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후회되지도 않던가?”

이에 장홍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정작 그때를 당하니까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나 후회되지는 않았습니다. 가정에서 한바탕 계급투쟁을 했다는 생각에다 나와 아버지는 립장이 견정했다고 여긴 것 뿐 다른 생각은 더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과연 한심했지. 그때는 강제된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형식’에 얽매이다보니 인간의 선한 양심이란 그같이 다 잃어가며 사는 세월이였던 겁니다.”

“당신이 제 어머니를 고자질하니 주위의 사람들은 어떻게 보던가?”

“그당시 나의 부모님과 가까이 지낸 아저씨가 한분 있었는데 나보고 ‘너의 어머니가 집에서 한 말을 나가서는 하지 않았겠지, 너나 너의 아버니나 그렇게는 처사하지야 말아야 한다. 아무럼 어찌?....’ 하고 핑잔하는 것이였습니다. 주위의 사람 다들 의아해 하면서도 그 문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변론은 하지 않은것 같습디다.”    

“제 립장을 지키느라 어머니와 계선을 갈랐다 그거겠지?” 

“그때는 그랬습니다. 표면상 내 거동이 사리 없고 순 고상한 행위같아보였겠지만 기실은 립장이 견정한 혁명자로 표현함으로써 제 자신을 보호하자는 것이였습니다. 정치적인 연기를 한거지요. 그렇게 하면 앞길이 잘 풀릴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생각대로 되지 않은겁니다. 내나 내 동생이나 다 고중을 못갓거니와 군대에도 나가지 못하고 어느 공장에도 못들어가고 결국은 ‘하향지식청년’이 되어 촌에 가서 농사일이나 해야하는 신세가 되고말았던 겁니다. 후ㅡ 어쩌면 어머니는 꿈에마저 한번도 나타나지 않지. 나타나면 한마디 속죄라도 하련만 그때는....”

“당신생각에는 그 일이 자기 생활에 어떤 영향이 미쳤다고 여기는가?”

“사인방이 분쇄되니 나는 그네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건만 어쩐지 불안하면서 극도의 공포를 느꼈던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우울증이 심했던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귀찮아졌습니다. 다른 사람과 접촉하기 싫어지면서 자신을 완전히 폐쇄상태에 빠지게 했던겁니다. 그것은 공포스러운 것이였습니다.”

“어떤 종류에 드는 공포였는가?”

“나는 토지개혁때를 생각했습니다. 반혁명진압이였는데 외할아버지가 반혁명으로 몰려 총살되였던 겁니다. 나는 어머니가 그의 피를 이어받았길래 반혁명이 된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역시 어머님의 영향으로 반혁명이 될가봐 무서워났던 겁니다. 내 머릿속에 어느때 어머니와 같은 정치견해가 생길까봐 말입니다. 다시말해 유전되면 어쩌나 하구말입니다.”

“당신은 어머니에 대한 꿈을 꿔받는가?”

“꿧습니다. 후에는 여러번이나 꿧습니다. 어머니는 사형전 젊었을 때의 모습그대로였습니다.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니는 두손으로 나를 부추켜 세우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어머니 이 불효자는 어머님께 빕니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님은 못들은 척 아무응대없이 사라집디다. 번번히 그같이 말입니다. 나는 그것이 어머님이 나에 대한 징벌이라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그래 눈물이 안나던가?”

“왜 안나겠습니까. 눈물을 숱해흘렷습니다. 어떤 때는 목놓아 울기도했습니다. 제발 용서해달라구 빌면서 말입니다. 어떤 때는 밤에, 어떤 때는 낮에.....그러기를 얼만지..... 작은 이모와 외삼촌을 볼때마다 죄책감에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아 고개도 바로들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어머님을 다시금 평판해달라고 신소자료를 쓰면서도 그저 자신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너는 제 어머니를 죽게 했으니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고 자신을 저주하면서.”

“그래 이제는 어쩔 예산인가?”

“나는 응당 남들이 침을 뱉는 반면교재로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어느때부터 생긴건가?”

“어머님이 정작 돌아가시니 내 가슴은 무너졌습니다. 나는 그만 고통속에 빠지고 말았던 겁니다. 이 몇십년간 어느 하루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세상에 나같은 불효자식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1979년도에 형식상 공개반성을 했습니다. 관방에서 장지신(张志新)의 죽음에 대해서 반성한 것을 내가 신문에서 봤던겁니다. 그때 나와 아버지는 우리도 정말 잘못했다는 것을 통절히 느꼈던 겁니다.” 

“당신이 이제와서 공개반성하면 남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그걸 생각했는가?”

“내집사람과 친척, 친구들도 이해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보고 반성을 그렇게 한들 이제 무슨소용이 있는가구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욕하고 저주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고도 낮짝 들고 다니느냐, 살아서는 뭘하는가고 하면서 차라리 어머니 무덤에 가 엎어져 자살하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어머님의 무덤을 유물로 하고푼 생각은 어떻게 생겼는지?”

“지난세기 80년대 작가 파금(巴金)선생께서 문혁박물관(文革博物馆)을 세우자는 제안을 내놓은바있습니다. 이 땅에서 문화혁명과 같은 우매한 재난이 이제 다시 생겨서는 절대 안된다면서 자라나는 후대들에 대한 교육을 위해서도 그것은 마땅하고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그분의 제안이 옳고 정당하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그의 제안이 빈말이 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문혁박물관(文革博物馆)은 아무 때던 세워야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세상사람다가 침을 뱉고 타매하는 반면교재로 삼아주기를 바랍니다.

정말입니다. 

                                                       (据《新京报》)

 

장홍병 어린시절 가족사진. 오른쪽 둘째 장홍빈. 오른쪽 세 번째 아버지 장월승,왼쪽 둘째, 어머니 팡충모.                          

                                                          출처 : 허난 비즈니스 데일리 (정주) 



 

文革期间,国家各职能部门都处于不同程度的混乱状态,真实的死亡数据难于统计。
有国外科学家依据国内出版的县志等资料,计算出1966-1971年间中国农村地区
有50万到200万人被迫害致死。
这个数据很小。R.J.Rummel教授在其专著《一百年血淋淋的中国》中则认为,
文革丧生者约为773万人。
1980年邓小平对意大利女记者法拉奇说:“永远也统计不了,因为死的原因各种各样,
中国又是那样广大,总之,人死了很多”。
中共中央党史研究室合编的《建国以来历史政治运动事实》给出的文革数据则是:
“420余万人被关押审查;172万8000余人死亡;13万5000人被以反革命罪处决;
武斗死亡23万7000人;703万人伤残;7万1200余家庭整个被毁”。
1978年12月13日,叶剑英在中共中央工作会议闭幕式上说:文革期间,
全国整了1亿人,死了2000万人,浪费了8000亿人民币。
经多方报道分析与研判,较接近实际的文革中非正常死亡人数约在4、5百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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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김은철
날자:2015-11-22 16:08:46
이러루한 일은 문화운동기간에 너무 많이 일어났다. 사람을 때리면 투쟁할 때에는 언제나 노래를 불렀는데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는 그 당시 맹목적인 충성, 맹목적인 투쟁의 전투적 노래였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속에서 고통스레 투쟁을 받던 친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데도 지금 그노래를 부를때 머리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억울한 문화운동 부모도 원쑤로 몰아치던 그 때 더는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다. 에미를 반혁명으로 몰아 총살당하게 한 장홍병은 아마 죽어야 편안한 삶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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