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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홍위병의 휘황한 략탈성과
인민페 4백억원. 황금 백만량.
출처: <<행복한 노인신문>>
【기밀 바다의 역사, 역사의 기밀】“문혁”기간 북경홍위병들의 이른바 레이드(집털이 승리)는 그야말로 매우 놀라운 것이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6월부터 10초의 기간에 그들이 개인집에 달려들어 략탈한 돈과 공채가 428억원이고 황금이 118.8여만량이였으며 골동품이 1000만개도 더 되였다. 이른바 “계급의 적”이라 하여 끌어 낸 것이 1.66만명이고 “반혁명”안건이 1,700여건. 거기에다 전국적으로 도시에서 쫓아낸 요물잡귀를 합치면 그 수가 3,900만명에 이르는 것이다.
문혁 때 홍위병들의 집털이
다가 알다싶히 “문혁”이 일어나서 얼마안되여 전국적으로 네가지를 타파하는 즉 “퍼쓰쥬” 바람이 불어치기 시작하여 그것이 전국에 퍼졌는바 처음에는 시내에 있는, 사람다니는 가도의 이름을 고치는 것부터 시작하더니 그것이 머리형과 복장을 고치는 것으로, 그 다음에는 “요물잡귀”를 잡아내면서 가택털이를 함으로 하여 막대한 재난을 가져왓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이 잘 모르고있는 것은 그 당시 림표의 지시에 따라서 수도 북경에서는 “홍위병 집털이 승리전시회”를 열었던 그 희한한 행사일 것이다.
인상적인 결과
1966년도 “퍼쓰쥬”가 시작되어 한달사이에 북경시에서 털리운 집이 11.4만호 넘고 쫓겨난 사람이 85,198명이였다. 그 외 다른 도시들인 상해에서는 8월23일부터 9월8일기간에 홍위병들 손에 털리운 집이 84,222호. 천진에서는 9월하순에 1,2만호가 털리웠다. 홍위병들이 략탈한 그 “전과”라는 것이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그해의 6월부터 10월초까지 홍위병들이 빼앗아 낸 개인의 현금과 공채가 428억원에 달하고 황금이 118,8만량에 달하며 골동품이 1,000여만건에 이르었던 것이다.
이른바 “계급의 적”이라 하여 잡아낸 것이 1,66만명에 “반혁명안건”이 1,700 여 종. “요물잡귀”로 몰려 쫓겨난 사람이 3,900만이 넘는 것이다.
북경시를 보면 1958년에 건국 후 처음으로 되는 문물조사 때 보존된 문물이 6,843곳이였는데 문화혁명기간에 “퍼쓰쥬”바람에 4,922곳이나 파괴되고말았다.
“퍼쓰쥬”운동이 마감에 이르었을 때 림표는 운동성과를 특별이 자랑시키느라 “림반(林办)”의 이름으로 “홍위병 집털이 성과 전람회”를 열어 전국에다 본보기를 보여줬던 것이다. 그때 북경에는 전시회에 대비하여 집털이 물건들을 너은 창고가 여럿되었는데 그 창고안에는 풍우란(冯友兰), 전백찬(翦伯赞), 상월(尚钺) 등 명인들이 수집한 서적(수자를 헤아릴 수 없는 고대의 책과 골동품)들도 빼앗아다 한데 처넣었거니와 지어는 저명한 사학가 상월(尚钺)이 몇십년간을 손에서 놓지 않고 푸채질을 했던 낡은 부채마저 고물품이라 하여 빼앗아 갓다. 문화예술가 이를테면 전한(田汉), 로사(老舍), 소군(萧军), 락빈기(骆宾基), 마련량(马连良), 순혜생(荀慧生)의 집에서 걷어간 개인의 자화(字画)와 예술품들도 한데다 처넣었던 것이다. 림표는 그것들로 1967년2월에 북경에서 <<수도홍위병 혁명반란 성과전람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전람관을 4개 설치하여 대중에게 전람시켯다. 첫관은 <<홍위병운동의 번성과 상승>>관이고 둘째관은 <<모든 요물잡귀를 쓰러버리자>>는 관이며 셋째관은 <<홍위병 집털이성과>> 전람관이고 넷째관은 <<전세계를 진감하는 홍위병>>이라는 전람관이였다. 그 중에서 첫째관과 둘째관은 홍위병운동의 발생, 발전과 이른바 “퍼쓰쥬”운동의 “휘황한 성적”을 전시한 것이였는데 거기에는 현저한 위치에다 섭원재(聂元梓) 등이 쓴 대자보와 모주석의 “나의 첫 번째대자보”가 걸려있었고 비판대상으로 되었던 등척(邓拓), 오함(吴晗), 료말사(廖沫沙)의 “삼가촌”과 “해서의 파직”등 작품과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가장 눈에 띄이는 것이 “홍위병 집털이성과”라는 세 번째 전람관이였는데 거기에는 진귀한 물건들이 많이 전시되고 있었다. 례를 들면 진주보석놀이개, 고물, 옥 에메랄드(玉石翡翠), 다양한 다이아몬드, 보석장식품과 기타 진귀한 보물들이였다.
한 고물전문가는 “홍위병 집털이 성과 전람회”를 세 번이나 와보고서는 감개하여 “과연 값진 보물들이로구나! 내가 이렇게 좋은것들을 처음으로 구경한다!”면서 눈이 번쩍 뜨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재간에는 이 전람관에 있는 보물들의 값을 계산하기조차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북경의 이 박물관은 1958년에 성립된 원 “사립지인박물관(私立志仁博物馆)”으로서 전시 된 물건중 많은것이 그전의 것이였다. 그 물건들의 소유자가 토로한 것을 보면 도자기유물을 비롯한 300개 이상의 조각과 다양한 종류의 컬렉션을 가지고있었는데 그 중 1급 국보급 수준의 문화 유물 30여개와 2급 국보급 조각문물이 50여개 뿐이였다고 한다. 그 외것은 다가 북경홍위병들이 날강도식의 집털이를 해서 전시회에 나온 것인데 그 중 “아이를 씻어준다”를 비롯한 4세트에 이르는 도자기들은 다가 직경이 30cm였다. 그때 그 하나 값만도 홍콩 시장에서 인민폐로 100만원이였니 그 돈이면 당시 “해방패"트럭을 88대 구입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경시 선무구(宣武区)의 “총리골목”에는 본래 옛날 총리급인물 6호가 있었는데 홍위병들은 그 집들을 습격하여 털어 낸 명나라 와 청나라 때의 물건만도 17트럭이나 되었다. 그중 3트럭은 도서였다. 그런 집들은 다가 명,청 때의 왕조의 후예였던 것이다. 다른 한 집은 러시아대사를 지낸 고위급 관리여서 해방후 정부의 초청을 받아 국경절에 천안문 성루에 오르기까지 했다. 홍위병들은 그의 집에서 들춰낸 Dingdai꽃 링세(三眼顶戴花翎)는 청나라 정부가 이른바 중국과 인도지간에 국경으로 확정한 “맥크마홍선”의 복제품이였다. 그런것을 깨버렸다.
당년의 중앙 아카이브 기록에 보면 원본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 복제품이 있은것이 얼마나 다행인비 모를 일이다. 유명한 문화 유산 전문가 사수청(史树青)은 그 일을 두고 매우 맹랑하다면서 자기는 그 집을 알고있다는 것이였다. 그는 그 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600년이나 연속 내려왔다는 그 자체가 매우 기적이라면서 가치있는 귀중한 역사적 유물을 가지고있어 좋았는데 불행하게도 “문화혁명”에 그 가족의 역사적 유물시스템이 파괴되었으니 우리는 많은 중요한 역사적 가치있는 유물을 더는 찾을 수 없게됐다고 말했다.
그번의 전시회《수도홍위병의 요물잡귀 집털이 성과 표》에는 아래와 같이 밝혀져 있다.
황금 103131량, 백은 345212량, 현금 55459919원, 문물, 옥기 61361개.
전람이 끝난 후 총기는 경찰에서 가져가고 골드 보석은 금융 부문에서 가져갔으며 전송 골동품들은 박물관을 보냈다. 그때의 포스터(대자보)와 붉은기들은 지금까지도 창고에 처박은대로 무져있다.
아래 왼쪽사진, 문화혁명은 잘못발동된 것이라 지적했다가 혀가 잘리우고 참혹하게 살해된 대바른
장지신.
그누가 바른말을 하면 그누가 잘못되던 저주러운 암흑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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