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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속에 묻힌 거룩한 넋
ㅡ 독립투사 김좌진장군의 묘소를 찾아보고서
광음여류라, 걷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다. 희비애환이 반죽된 인세에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살고 죽었을것이니 풍류가인이 얼마고 절세의 인걸은 또 얼마였으랴!
올초에 나는 목단강에 갓다가 우연히 세파의 와중에 부대끼면서도 여지껏 살아온 긴좌진의 딸 김강석녀인을 알게 되었고 그 연분으로 약속이 있어서 지난 7월초 다시 만나서는 함께 장군의 구광(舊壙)을 참배하기까지 했다.
해림현 경내의 어느 소나무숲 우거진 자그마한 산, 그 산 바로 앞기슭에 김장군의 묘자리가 있는 것이다. 거금 60년전, 여기에 묘소가 생겨난 그때로부터 고향 홍성으로 이장됐고 지금은 이 자리에 구광만 남아있다. 하건만 그것이 장군의 딸에게는 더없이 귀중하기만 했다.
독립군에서 풍수를 아는 권화산과 오지영 두 로인이 수고스레 찾아내서 쓴 이 묘소는 과연 린근에서는 더 찾아볼수 없는 명소였음이 분명했다. 량켠에 산이 둘러있어서 아늑한 느낌인데 저 개활한 앞으로는 평야가 탁 틔여 시원함이 그지없다. 마치도 그것은 고인된 장군의 활달한 흉금이런듯.
15세때 벌써 30여명의 가노를 전부 해방하고 2000여석을 추수하던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해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나섯던 개혁의 선구자, 을사조약 체결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코저 조선팔도를 누비다가 체포되여 옥고를 치럿던 우국우민의 애국자, 3.1운동때는 만주로 들어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장령이 되었던 백야 김좌진장군은 조선이 낳은 희유의 장사였고 걸출한 독립운동가였다!
1924년 3월 10일, 김좌진 장군은 분산된 각지의 반일무장을 한데 뭇고 신민부(新民府)를 세웠다. 실력양성을 위한 둔병전(屯兵田)이였던것이다. 그때의 병력은 무려 1,260여명.
신민부가 한창 활약하고있었던 1930년, 그해의 1월 29일 아침은 과연 신수 흉했다. 장군은 아침진지를 들다 수저가 부러졌다. 괴이쩍게 생각한 장군은 식사를 마치고 저택앞 정미소마당으로 나갔다가 그만 괴한의 총에 저격되였던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42세.
파란만장의 생애에 비해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맹랑했다!
그때의 구광은 아직까지 메워지지 않고 거의 그대로 있었다. 뒤켠에 독립군이 심었다는 사시나무 두그루, 앞에는 잔디풀, 김녀사가 정성스레 심어놓은 봉선화가 한창 곱게 피고 있었다.
<<김선생, 독립군들이 숨겨둔 비석 저기에 있어요.>>
김강석녀인의 부름에 나는 숙였던 머리를 다시들고 따라서 구광에 들어갔다. 이제는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했어도 주인없는 고총같이 고적하지 않은 묘소, 세상 어디서 또 이런 효녀를 찾아보랴. 아직 마음편해본적 없었건만 딸의 손목을 이끌면서, 그리고 후에는 아니면 혼자서라도 남의 눈을 피하면서 아버지의 묘소를 고스란히 지켜왔다니 그 효성이 너무도 기특하고 구슬프기도 했다!
우리는 비석 하나를 더 찾아냈다.
구광의 앞쪽에 비석 하나가 더 감춰져있었던 것이다. 판자로 된 것이였다. 거기 비문에는 김좌진장군이 수난당한 년 월 일과 시간까지 똑똑히 밝혀져 있었다.
김강석녀인의 말에 의하면 이 비석 둘은 후에 살아남은 독립군들이 만든건데 사처로 흩어진 그네들은 자기가 숨져서 타계의 사람이 되기전까지는 잊지 않고 해마다 찾아와 참배를 하군 했다고 한다. 그러기를 1958도까지.
실로 기특한 일이요 눈물겨운 추억이였다.
김강석녀인은 장군의 유해를 이장하던 날의 정경을 이야기 했다.
그것은 1934년 4월 9일(음력) 새벽. 일제의 감시를 넘기느라 이장을 자못 은밀히 했었는데 독립군들은 유해를 다리곁 철길옆에 놓았다가 유개화차에 실어서 보내놓고는 모두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장군이 수난당했을 때는 비분에 몸이 떨려 울음조차 나가지 않았던 그네들이 유해와 리별하고서는 그렇게!
하늘을 집을 삼고 떠도는 신세
동서남북 찬바람에 갈 곳이 없어
어머님의 옛사랑이 다시 그립다
비오고 바람부는 들창밑에서
팔베개로 꿈을 꾸는 정든 전우야
어느날 어느 곳에서 무슨 꿈을 꾸느냐
귀뚜람이야 울지 말라 희망이 온다
이 노래는 김좌진장군이 생전에 부르군 했던 노래라면서 딸이 불렀다. 마지막 구절은 본래 “운다고 궂은비가 아니 올소냐”였는데 장군이 그렇게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래선지 노래를 듣노라니 불안과 위구에 가슴 떨고 혹은 전도에 절망해 탄식하는 독립군을, 고난과 고뇌속에서 방황하는 전우들을 다시금 분발하라 고무를 하는 김장군의 그 심정을 내가 보고있는 듯. 또한 내 눈앞에는 어느덧 독립군이 운명의 갈림길에 들어섯을 때 과감한 결책으로 부대를 이끌어 광활한 만주벌판을 행진했을 장군의 강개한 모습이 우렷이 떠오르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거족적인 성스러운 싸움에서 동포의 단합, 민족의 단결은 자못 중요하고 필요한것이였건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못하고있은것이 그때의 가슴 아픈 실태였다. 무엇보다 자기만을 진정한 혁명자로 생각하여 넓은 포용성이 없이 파쟁을 일삼아온 종파당쟁의 파괴가 무서웠던 것이다. 그때 결패있고 장군다운 위엄이 있었던 김좌진은 간요한 인간들의 분렬책동을 단호히 배격하면서 그 위해성을 준절히 갈파했던것이다.
서로 의합이 맞지 않은 3부(신민부, 정의부, 참의부)의 통합을 실현하려고 불철주야 끈질긴 노력을 경주했던 장군의 근엄한 모습을 눈앞에 재다시 그려본 나는 그당시 훌륭한 념원이 어의해 뜻을 이루기가 그리도 힘들었던가고 한숨쉬였다. 용감하고도 치졸했던 독립운동가들이여, 무원의 경지에서 고립됨은 스스로의 멸망을 초래함을 그대들은 그래 몰랐단 말인가?
신민부의 거두었던 김좌진이 쓰러지고 보니 기둥이 부러진 격이여서 온 만주의 독립군이 그만 사기 저락되는 혼란속에서 와해의 일로로 줄달음치고말았다.
이것이 그래 원통한 일이 아니였던가?
조선사람의 그 빌어먹다 오그라질 놈의 당파심!
1991년 9월 21일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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