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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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생이 꾸며낸 현대문자옥
2015년 11월 26일 10시 14분  조회:3605  추천:2  작성자: 김송죽
 

                   강생이 꾸며낸 현대문자옥

                              연루자 만여명.  습증훈은 일자리마저 떼우고 검토

 

                               출처: 중공 뉴스네트워크  작자:무문소(武文笑)   

 

장편소설 <<류지단>>을 탈고하기는 20세기60년대초였는데 그 소설은 섬북(陕北)、섬감(陕甘)혁명근거지와 중국공농홍군 제26군의 창건자의 한 사람인 류지단(刘志丹)의 혁명적 생애를 쓴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 출판되기도 전에 강생(康生)은 소설 <<류지단>>을 리용하여 중국현대사상 놀랍고도 터무니없는 끔찍스런 문자옥(文字狱)을 꾸며낸 것이다.

 

             용맹한 전사 예기치 않은 전투에서 희생

 

1932년12월,섬북의 용맹한 전사 류지단(刘志丹)은 홍16군을 정식 설립하고는 1934년에는 또 홍27군을 설립하였는바 선후하여 조금(照金)을 중심으로 한 근거지와 신부(神府)근거지、섬북근거지를 건립했던 것이다. 장기적인 군사투쟁과 실천중에서 영험(靈驗)이 생긴 류지단(刘志丹)의 유격전술은 발휘되고 발전하여 소문이 났다. 그럼으로 하여 류지단은 섬감홍군의 최고지도자로 홍군의 영혼으로 인정 되기에 이르었고 국민당은 두려움을 갖고 지어는 1만원(大洋)의 상금을 내걸고 그를 붙잡자고 한 것이다. 그 당시 이러한 소식을 들은 모택동은 조금도 이상해 하지 않고 가척부(贾拓夫)와 다음과 같이 감탄을 토로한 것이다.

“섬북에서 옛날에는 리자성(李自成)이 나더니 오늘은 류지단이 나왔구나! 섬북은 과연 인재가 나는 고장이구나!”

@贾拓夫(1912~1967) 8계중공중앙위원. 원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당조부서기엿다.

1934년~1935년간에 류지단이 이끄는 홍군은 급속히 장대해졌다. 1935년,류지단의 총지휘하에 홍26군과 홍27군은 국민당군 5,6만명의 포위토벌을 분쇄하고 6개 현을 해방했거니와 섬감, 섬북 근거지에다 섬감소비에트 정권을 세우고는 주변에 있는 22개현을 관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부득불 장학량의 대군을 끌어다 그를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것이다.

 

1935년9월,중앙홍군은 설산을 넘고 초지를 지나면서 천신만고 끝에 간신이  섬북에 이르었다. 그런데 이때 류지단의 운명은 험악했다. 그는 운수사납게 붙잡혀 적의 감방에 갇혓던 것이다. 모택동은 그 형편을 알자 가척부, 왕수도 등을 급속히 와요보(瓦窑堡)에 보내여 그 고장 백성들 속에서 “록림식 수령”으로 높이 칭송되고 있었던 류지단을 속히 구원하게끔 했다. 류지단은 과연 구원되었다. 그가 풀려나오자 모택동은 그에게 자기가 방금 새로 일떠세운 홍28군의 지휘를 맡겼던 것이다.  

 

1936년2월,류지단은 명령대로 부대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산서에 가서  하북과 열하전선에서 일본군과 맡붙어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의 부대는 분하(汾河)류역에서 장개석과 염석산의 습격에 들어 그만 불행스레 희생되고 만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32세였다. 류지단은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그번 싸움에서도 지휘를 잘했길래 홍군은 그 여세로 두달내에 18개의 현이나 점령 할 수 있은 것이다.

 

류지단이 희생 된 후 모택동은 “군중의 령수, 민족의 영웅”이라는 제사를 썻고 주은래는 “상하 오천년에 영웅이 수천만이건만 인민의 영웅은 류지단이다”라고 제사를 썻다. 미국기자 스노는 자기가 쓴 <<서행만기>>에 그를 “현대의 협객” 이라면서 “악과 악의 세력에 채찍을 안긴 중국의 로빈한”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류지단의 유체는 섬북의 와요보에 묻혓고 중국의 홍색소비에트는 그곳을 지단현으로 명명하여 길이 길이 전해지면서 기념하고 있다. 공산당과 인민은 민족영웅인 그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1956년에 공인출판사에서는 류지단의 일생전기로 되는 장편소설 <<류진단>>을 펴내기로 계획하고는 류지단의 동생 류경범(刘景范)의 처 리건동(李建彤)에게 그것의 집필을 맡겼던 것이다. 리건동은 처음에는 주저하면서 손을 감히 대지 못하다가 출판사에서 협조해 주리라 고무하니 그제야 신심이 생겨 그것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건동(李建彤)은 일찍이 연안에 있을 때부터 비록 짧기는 하지만 류지단의 휘황한 영웅생에 대한 얘기를 들어 얼마간 알았기에 결국은 마음먹고 출판사의 요구에 응하여 나선 것이다. 영웅의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그는 우선 그 당시의 사람들을 기회만 있으면 많이 방문하여 자료들을 충족히 모았다. 그러고나서는 옹근 6년간 붙박혀 소설을 썻던 것이다. 그 기간 그는 여섯 번이나 수개를 거쳐 마침내 장편소설 <<류지단>>을 탈고했다.

 

그런데 1962년 봄, 그녀가 작품이 다 완성되었으니 그것을 이제는 세상에다 홍보 하려고 준비를 할 때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 생길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녀가 쓴 장편 <<류지단>>은 “반당소설”이라는 것이였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였다.

그 일은 한 인물과 많이 관계되였으니 그 인물인즉은  염홍언(阎红彦)이라는 사람이였다. 그역시 용감히 싸워 공훈메달을 탄 이름난 장군으로서 류지단과 함께 서북홍군과 서북근거지를 창건했었기에 1955년에 상장군함(上将军衔)을 받은 것이다. 그 당시 그는 운남성위 제1서기에다 곤명부대 제1정위와 중공서남국 서기처 서기로 있었다. 염홍언(阎红彦)은 그 소설이 원칙성문제가 있거니와 역사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사실 <<류지단>>을 쓰면서 류경범(刘景范)과 리건동은 여러 방면의 의견을 청취했거니와 염홍언(阎红彦)이 서북에서 간부를 오래지낸 경력이 있으니까 원고를 한번 봐달라고 그한테 청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염홍언(阎红彦)은 원고를 대충보고서는 리건동에게 편지로 “사실을 가지고 류지단과 기타 동지들을 회억하게끔 하니 교육적 가치가 있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네가 쓴 <<류지단>>을 몇 편 읽어봤는데 실상은 이것이 소설형식을 빌어서 서북의 혁명투쟁력사를 쓴것이다. 그러나 허다한 것이 원칙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어떤것은 중앙이 결론을 내려야만 될 일이다. 그래서 사정과 부합되지 않으니 너의 이 글은 발표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염홍언(阎红彦)이 편지에서 말한 “허다한 원칙성 문제”란 바로 이른바 당사에서 의논이 되고있은 “서북역사문제”였던 것이다. 중앙홍군이 장정하여 섬북에 이르기 전에 류지단을 대표로 한 그곳의 공산당 사람들은 서북지구에서 그야말로 장쾌한 서사시다운 투쟁으로 섬감근거지를 건립했던 것이다. 한데 그것을 놓고 당사를 연구하고 만드는 사람들끼리 다년간 의견이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즉. 1962년도 여름과 가을지간에 염홍언(阎红彦)은 북대하에서 열린 회의기간에 뜻밖에도 장편소설 <<류지단>>을 이미 <<공인일보>>에서 련재하고있다는 소식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 즉시 전국총공회와 공청단중앙 책임자들에게 소설련재를 당장 중지 할 것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8월5일에《공인일보》는 련재를 중지했다. 8월17일,염홍언은 양상곤(杨尚昆)에게 편지했다. 그리고는 9월3일에는 서기처에다도 한통썻는데 그는 편제에 쓰기를 “내가 보기에는 소설 <<류지단>>은 내용이 류지단을 선전한다는 명의를 빌어 고강(高岗)이 변구의 고급간부회의와 7대전후의 서북역사좌담회에서 서북혁명수령은 자기였다고 조작했던 역사를 옳은것으로 긍정하고 있다” 고 고발했다.

그러면서 염홍언은 또 편지에다 소설에 등장하는 역사인물들의 대조표를 만들어 넣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자료들을 렬거하면서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허종(许钟)인즉 바로 습증훈(习仲勋)이고 라염(罗炎)은 고강(高岗)이라 했다.

 

한편 강생은 그 소설을 보지도 않고 모택동에게 쪽지를 써서 넘기였다. 

염홍언이 왜서 이 일을 강생에게 일러바쳤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다.   

 

염홍언이 쓴 편지를 받은 강생은 소설을 읽어보지도 않고 마치 흥분제 주사라도 맞은 것 같이 들떠갖고 결론을 내렷다.

“이것은 단순히 문예로만 볼것이 아니라 정치경향이 있는 것이다. 바로 모택동사상을 표절한 것이다.” 라는 죄명을 만들어 모택동에게 올리 받쳤다.

 

사실 보면 섬북근거지는 중공중앙과 련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류지단이 실천중에서 무장투쟁으로 홍군과 농촌근거지를 건립함으로서 한갈래의 정강산과 같은 길을 걸은것이다. 하건만 그랬다고 그것은 류지단이 모택동의 사상을 “표절”했다는 “죄”를 만들어 씌운것이였다.

“소설에서 섬감소비에트를 좋게 그린것은 즉 다시말해 중앙소비에트와 맛선것이다.”느니 “소설에 등장한 어떤 젊은 간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습중훈이다.”느니 “그가 당권을 찬탈하게 하느라 정치자본을 만든 것이다.”느니 하면서 강생은 그 소설은 완전히 “고강을 위해 번안한것”이라고 트집잡았다. 그리고는 중선부(中宣部)와 각종 간물에 이 소설을 련재하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령하면서 공인출판사에서는 중앙회의에서 심사하게끔 5차 수개고를 책으로 600부 찍고 4차수개고는 300부 찍어 올려보내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다.  

국제정세가 험악한데다 건국 후 일부 지도자들 간에 모순이 있음으로 하여 “계급투쟁”코드가 이루어 지면서 분위기는 사뭇 긴장해졌다. 하기에 모택동은 중공 제8계10중전회를 열고는 계급모순과 계급투쟁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 것이다. 강생은 쪽지에다 “소설을 리용하여 반당활동을 하는것은 한갓 큰 발명이다.”라고 써서 모택동에게 주었고 그것이 결국은 모택동의 어록으로까지 된 것이다. 후에 모택동은 “소설을 리용하여 반당활동을 한다”는 어록은 강생이 발명한 것이라 공개했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그 쪽지에 씌여진 글을 읽고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권을 뒤짚자면 우선먼저 여론을 일으켜야 한다. 의식을 돌려야 하니까말이다. 혁명적 계급이 그렇게 하거니와 반혁명적 계급도 역시 그렇게 하고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무자비한 탄압이었다.


모택동의 지지를 받은 강생은 힘을 냈다. 그의 작간에 의하여 습중훈(习仲勋), 가척부(贾拓夫), 류경범(刘景范) 등은 소설 <<류지단>>의 막후 선동자라 질책을 받았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였다.  중앙에서는 20명으로 조성된, 강생이 지휘하는, “습중훈 등 반당활동 심의위원회”를 내오고서는 잇따라서 “습(仲勋), 가(拓夫), 류(景范) 반당집단”이라는 것을 조작해 냈던 것이다.

1962년부터 1966년에 이르는 사이 서북5개성의 간부들이 련류되여 심사를 받았거니와 지어는 억울하게도 반당집단성원으로 몰리기 까지 한 것이다.   

습중훈은 마석오(马锡五)를 찾아 역사를 핵실했고 리건동(李建彤)을 찾아서는 형세가 좋지 않으니 주의하라 일깨워줫다.   

 

일찌기 1959년도에 리건동은 <<유지단>>소설 제3차 수개고를 습중훈에게 보내여 그를 심열하게끔 요청한바있은 것이다. 마침 로산회의가 시작된지 얼마안되거니와 반우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기에 정치기분은 아주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소설원고를 읽어 본 습중훈은 리건동보고 자기 생각에는 소설을 장편으로 폭이 크게 쓰느라 말고 단편으로 쓰는게 더 낳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장편으로 써내기로 작심하고 거의 다 써낸 리건동이였으니 그의 제의를 선선히 받아드릴리 만무였다.     

 

1961년 봄이 지나 여름철에 접어 들 때 습중훈은 제4차수개고를 받았다. 수개고를 받아 본 습중훈은 선후 두차례 리건동, 마석오와 공인출판사 편집 둘을 모여놓고 좌담회를 열었다. 습중훈이 마석오로인을 참여시킨것은 소설에서 구사되고있는 이야기중 사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작자 리건동에게 알려주겠끔 하자는 데서였다. 그때 승증훈은 명백히 자신의 주견을 말했다. “이 소설을 쓰는 목적이 주요하게 젊은이들을 교육하자는 것이다.” “모택동사상” “류지단이 생애가 모택동사상의 전형이 될 것이다”

그리했건만 강생은 1962년8월24일에 양상공(杨尚昆)에게 서기처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라고 지령적인 편지를 했던 것이다. 

리건동은 그제야 자기가 쓴 소설이 큰 말썽거리가 되었음을 알게되였다. 그는 9월6일에 자기가 쓴 소설에 등장한 몇몇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 해석했다. “소설에 나오는 몇이 실명이고 그 외는 다가 가명이다. 소설자료는 각방면으로 조사하고 모은 것으로서 이야기는 소설기법에 따라 허구하여 낸 것이다. 례를 들것 같으면 허종(许钟)은 본명 그대로인 그를 쓴 것으로서 지방에서 사업한 그를 대표적인 소비에트주석으로 부각한 것이다. 소재들은 기본상 조사해서 실증 된 것인바 습중훈동지에 관한 어떤 부분은 위남기의(渭南起义) 때의 중앙 군사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낸 이와 함께 쓴 것이다. 자기가 쓰는 것이 순수한 인물전기를 만들자는게 아니고 그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만들자는 것인지라 리건동은 창작기법상 허구를 하기가 마련이였다. 지협적인 보통인물 하나만을 원명으로 하고는 그 외는 다가 가명인 것이다.  그런데도 소설 <<류지단이>>이같이 무고한 사람들이 말아먹을줄이야 어찌알았으랴! 조사해 보니 <<류지단>>으로 인한 문자옥에 말려든 사람이 근 1만여명에 이른 것이다!


1966년5월, 강생은 “소설에서 찍어 말하지는 않았어도 이 소설은 너무나 크게 외곡되였다”면서 그당시 서북근거지의 지위와 작용이 “모택동사상을 류지단사상으로 고쳐버렸다”고 덤터기를 씌운 것이다. 그러면서 강생은 소설 <<류지단>>을 쓴것은 습중훈반당집단이 여론을 조성하느라 언영부터 계책을 꾸민 것이라면서 습중훈이 <<류지단>>의 첫 번째 인물이고 류경범이 둘째인물인데 필자는 류건동이라고 했다. 

 

소설 <<류지단>>의 첫째 죄는 “역사를 위조”하여 섬감을 중국혁명의 “중심”으로 하고 “정통”으로 만들자 한 것이고 둘째 죄는 “모택동사상을 류지단사상으로 고쳐 전당을 지휘하는 사상으로 하자고 꾀한 것”이고 셋째 죄는 “류지단을 모택동보다 더 영명한 예언자”로 만든 것이고 넷째 죄는 소설중의 인물인 라염과 허종은 고강과 습중훈이니 고강을 번안하고 습중훈이 당권을 잡게끔 올리추고 불어댄 것이라 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류지단>>안건은 승급했다. 충격을 맨먼저 받은 사람은 습중훈이였다. 그는 하루밤새에 부총리에서 나떨어져 직무를 잃었거니와 외지에 하방하여 어느 한 공장에서 막일을 했거니와 16년이나 심사를 끊임없이 받고 8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괴롭게 지낸 것이다. 원 국가경제위원회 주임이였던 가척부는 언영 철직되여 북경교구에 있는 한 감옥에 갇혔다가 문화혁명이 오니 1967년5월7일 박해를 받아 거기서 죽고말았다.

1967년12월, 리건동은 안범(案犯)이라 하여 잡히여서는 1970년4월에 습중훈반당집단이 소설로 반당활동을 하게끔 리용된 골간분자라는 모자를 썻다. 그러고도 내내지하실에 갇혔다가 1970년에 당적을 긁히우고 로동개조를 했다.  

1968년5월, 류경범은 자백을 강요하니 되려 강생의 믿그루를 뒤졌다가 반혁명으로 몰려 붙잡혀 10년을 옥살이했다.

1974년12월21일, 모택동이 친히 이 안건은 조사한지 오라니 이제는 더 할 필요가 없겠다고 하여 탄압을 더 하지 않고 그만둿다. 그러나 류경범은 감옥에서 나와갖고도 의연히 추궁대상이 되었다. 그는 “사인방”이 분쇄된 후에도 “고강을 번안했다”는 죄를 의연히 뒤집어썼다.    

원 공인출판사 사장 고려생(高丽生)은 혹독한 고문에 질려 그만 죽고말았다. 그리고 <<류지단>>소설의 책임편집 하가동(何家栋)은 농촌에 쫒겨갔는데 그의 어머니와 두 아들은 빈곤과 질병에 사망하고말았다. 

 

문화혁명기간에 섬북의 지단현에는 대자보가 나붙었는데 류지단과 류경범은 다가 “반역자”라 모욕했거니와 국민당이 마사버렷던 것을 수리한 보안(지단)기념당이 홍위병들 손에 다시한번  습격받아 거덜이 낫거니와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의 기념패마저도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고 류지단의 가족들은 제 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다른 농촌으로 쫓겨났던 것이다.

<<류지단>>소설안건이 “팽(팽덕회), 고(고강), 습(습중훈)반당집단”이던것이 나중에는 더 승급하여 그것이“서북반단집단”으로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서북의 대부분 국장이상 간부 수백명이 말려들었다. 그들뿐이 아니였다. 장정을 했던 사람도, 지어는 1962년에 그 안건을 심사했던 간부마저도 불행을 면치 못했다. 섬감녕 로구(老区)의 기층간부와 군중마저 수만명이 팽, 고, 습반당집단의 사람으로 몰렸거니와 지어 류동화에게 길을 안내해 줬던 사람중 왕열현(王悦贤)과 류경화(刘景华)같은 사람은 매를 맞아 죽었다. 그같이 리건동이 소설자료를 수집하느라 나다닐 때 길을 서준 사람마저도 걸려들었으니 그 수자를 다 합치면 만명도 넘은 것이다. 
                    

                            부총리였던 습중훈이 일자리를 띄우고  돌림투쟁을 받던 날. 
  
그로부터 17년후 소설 <<류지단>>은 마침내 루명을 벗고 출판되었다.

“4인방”이 분쇄되자 대량의 조사연구를 한 기초에서 1979년6월에 중앙조직부에서는 <<류지단안건>>을 평판할 보고서를 올렷던 것이다. 보고서는 “이 안건을 보면 이른바 <<류지단>>소설을 리용하여 반당할동을 했다는데 그것은 강생이 만들어 낸 틀리고 잘못된 안건인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하면서 강생과 그 한무리였던 ‘사인방’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연루되는 문자옥(文字狱)을 만든 것이다. <<류지단>>으로 인하여 박해받은 이들의 루명을 벗겨 억울함을 풀어줘야 마땅하거니와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한다.”라고 했다.

이 보고서를 접수한 중앙은 한달후에 시행명령을 내렸다.

그야말로 모진 우여곡적을 겪은 소설 <<류지단>>이 1979년에 공인출판사에 의하여 햇볕을 보게 되었으니 류지단이 희생되여 63년만이다. 康生
                                                    현대문자옥을 조작한 모택동의 졸개 강생
                                                                            

                     

康生(1898年-1975年12月16日),原名张宗可,字少卿,曾用名赵溶、张溶,乳名张旺,笔名鲁赤水,中国山东胶南县(今属山东青岛市黄岛区)人,胶南名门之后,曹汶张氏后人。曾经担任中共中央政治局常委、中共中央副主席、全国人大常委会副委员长、全国政协副主席等职务。发动"文化大革命"的主要成员之一,林彪江青反革命集团主犯。

康生1925年加入中国共产党。在革命战争年代,他长期领导秘密战线工作;1966年后,与林彪江青等相互勾结,是发动文革的主要成员之一;1975年12月16日在北京病逝。1980年,中共中央开除其党籍,撤销悼词;其骨灰被迁出八宝山革命公墓,后被划为林彪、江青反革命集团的主要成员之一。

康生出生于书香世家,由于受到家族薰陶,幼年时代便开始接触文艺作品,因此擅长中国传统书法、中国画及收藏,其艺术造诣曾被指为是众多中共领导中最为优秀者之一。                                 
                                              원문출처《복건당사월간》 

               관련글 : 전체보기에서 (218), 에세이 지천이 공노할 대원안(호풍집단안건)

                                                       김송죽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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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아래분
날자:2015-11-26 21:57:32
감사합니다. 틀린곳을 고쳤습니다.
1   작성자 : 독자
날자:2015-11-26 15:25:08
"류지단사건"의 시초의 사달을 일으킨 원흉은 염홍언인데,그저 "염홍언이 왜서 이 일을 강생에게 일러바쳤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다."고 얼머부리고 말았는지 의문이 되네요.
바이두를 검색해보니 평가가 상당히 높은사람이더군요. 이 인물에 대해 이해가 잘 안가네요.
그리고 다른하나는 리건동(李建彤)은 류지단의 동생 류경범(刘景范)의 딸이 아니라 아내더군요. 바이두에 그렇게 나와있더군요. 게다가 가족사진도 있구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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