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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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51) 일한 근대의 "기폭제"가 된 한권의 중국책
2014년 03월 28일 23시 13분  조회:4050  추천:19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1)

일한 근대의 "기폭제"가 된 한권의 중국책

김문학        

 근대사에서 발견되는 한가지 사상(事象)은 “근대”라는 이미지, 표상이 중한일의 3자가 각기 이질적이라는것이다. 근대(modern)라는 말에 일본에서는 메이지시대의 “문명개화”란 4자숙어를 떠올리면서 하이칼라, 양복, 로쿠메이칸(鹿鳴館), 양풍건축에 철도, 과학, 학교 등 탐욕스레 흡취한 서구문명과 자본주의시스템은 풍요와 흡족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지 않다. 아편전쟁의 패북으로 시작된 “근대”는 굴욕적인것과 함께 네거티브한 이미지가 우선 떠오르며 서구렬강의 침략과 식민화의 억압에 신음해야 했던 기억은 육중하고도 암울하다. 한국 역시 중국과 거의 비슷한 “근대”이미지로 뇌리들속에 깊숙이 각인돼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되는 아시아의 근대사, 또 하나 “발견”되는것은 아편전쟁에서 서양렬강의 근대문명에 굴복해야 한 충격은 당사자인 청국인이 아니라 되려 바다건너 동쪽에 있는 섬나라 일본인들이였다는것이다.

     굴욕적인 《남경조약》으로 반식민지로 전락됨에도 불구하고 중국근대사연구 제일인자 서중약(徐中約)의 말대로 “아편전쟁은 중국인을 각성시키지 못했으며 중국인 스스로도 자신들의 후진성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개명한 “림측서도 적과 대항할 기회가 있는데도 사임당한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의 패북정보는 당시 나가사키에 있는 중국상인들의 “풍설서”를 통해 이내 전달된다. 일본 바쿠후와 지식인, 일반대중에 대한 충격은 지대했다. 필자가 접한 당시 1849년에 출간된 아편전쟁을 기술한 저서 《해외신화(海外新話)》[무네다(嶺田楓江)]를 비롯해 《해외여화(海外余話)》 등은 그야말로 경이로울만큼 전쟁의 일화, 내막 등 정보가 듬뿍 실려있다. 당시 이런 책들은 일반서민들까지도 애독했다고 한다. 
  
  물론 지식인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으며 요코이 코난(橫井小楠), 사이토(齊藤竹堂), 사토오(佐藤信淵), 타카시마(高島秋帆) 등 당대 수일의 학자들이 저서를 펴내 아편전쟁의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일본 역시 교훈을 섭취하여 해방(海防)을 강화하고 서양제국의 식민지화에서 리탈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소리높이 주장한다.

  1842년 사쿠마(佐久間象山)는 《해방8책(海防八策)》을 제출하여 청국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자고 창안하며 타카시마는 정부에 포술을 개진하고 해방(海防)강화의 구체안을 제출한다. 그리고 청국병이 패한 리유는 공론(空論)때문이라고 지적하며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섬나라근성”의 특징의 하나가 곧 천생적인 “위기의식”이 강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필자가 근대사를 읽으면서 재발견한것은 이같은 위기의식은 일본인의 “정신적구조”의 하나이며 평화시기인 오늘도 “위기설”은 지식인과 대중사회에서도 끊이지 않는것이다. 지금도 매년 홍수같이 쏟아지는 “일본위기설”의 저서가 서점가를 달구는 실례가 곧잘 그것을 립증한다. 이것은 또한 중국인의 태평한 “형세대호(形勢大好)”적 무경계의식과 대조적이다.

  당시 일본 전국이 아편전쟁에서 충격을 받고 서양의 침식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는 해방(海防)의식이 팽배해진데는 하나의 특기해야 할 기폭제가 있은것이다.


  그 기폭제로 된것이 바로 청국의 위원(魏源)의 명작 《해국도지(海國圖志)》란 책이다. 아편전쟁의 패북으로 인해 정부는 대응이 미미했지만 그래도 소수의 개명적인 지식인이 세계에 개안하고 서양지식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당시 1841년 여름 림측서가 파면되여 신강 이리쪽으로 좌천되면서 자신이 수집번역한 육필원고와 서양자료를 벗인 위원에게 맡기면서 연구하여 꼭 신저작을 써내라고 당부한다.


  청말 일류의 사상가, 사학자답게 위원(1794~1857)은 림측서에게서 받은 《사국지》를 바탕으로 수집, 연구를 가하여 1842년 12월 《해국도지》 50권을 탈고, 인쇄출판한다. 1847년에는 60권으로, 1852년에는 전간 100권의 대작으로 보완시킨다. 책의 내용은 세계 5대주 수십개 나라의 력사지리지식과 해방(海防)전략전술 및 서양조선, 조포기술에 관한 론술과 도설 10여권이 포괄된다.


  근대 중국인이 쓴 최초의 력사지지저작으로서 “서양의 장기로 서양을 제어하는(師夷之長技以制夷)” 사상이 돌출히 로정돼 있었다.


  그무렵 같은 맥락에서 복건성 순무 서계여(徐繼LI)가 편찬한 《영환지략(瀛環志略)》 10권도 출간되였다.


  그러나 위원의 이 위대한 저작은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지만 일본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의 오오니와(大庭修)교수에 따르면 《해국도지》가 일본에 수입된것은 1851년인데 1859년에는 그 지명도로 수입이 대폭 증대하여 일본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의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이 책을 앞다투어 번역, 출간, 평론하며 1854~1856년 3년사이에 출간된 각종 판본의 《해국도지》가 42종에 달했으며 이는 일본출판사에서도 전례없는 다양한 판본의 양상을 보였다.


  이 책은 일본지식사회에 지대한 충격과 함께 귀중한 “보물”로 추대됐고 그들의 시야를 넓혔으며 바쿠후말기 해외리해의 문화지도, 길잡이로 되였다.

  일본지식인들은 이 책을 통해 서양의 웨스턴 인팩트(서양충격)하에 서양사정 리해와 함께 중국아편전쟁의 교훈으로 “해방”의식을 키웠다. 바쿠후말기의 저명한 사상가, 개국론의 창시자인 사쿠마조잔은 《해국도지》를 읽고 공명을 일으키며 “위원이야말로 나의 해외의 동지로다”고 감탄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기도 한 메이지유신의 선구적 사상가, 혁명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사쿠마의 학생이기도 한데 그는 1855년 위원의 책을 탐독하고 크게 개안하며 감동받는다.


  근대의 길목에 들어선 일본에 《해국도지》는 근대화의 길잡이로 되였으며 바쿠후말기 유신사상형성에 큰 기폭제가 되였다. 일본의 식자들은 《해국도지》는 일본을 서구렬강의 식민지화전략의 위기에서 구해준 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근대 조선에도 1845년 《해국도지》가 조선의 사자를 통해 국내에 류입했는데 당시 조선지식인의 지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세계인식 및 국가의식확립에 기여한다. 실학파 거두인 박계수는 이에 대해 보배로 여기며 그의 제자들에게 읽도록 추천한다.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파 리더들도 이 책을 통해 세계인식에 개안하게 된다. 그리고 황준헌의 《조선책략》도 조선지식인에게 읽히면서 지대한 충격을 주게 된다.


  중국내에서는 사실 큰 주목을 못받은 위원의 《해국도지》는 주변의 일본과 조선에 큰 영향을 과시하면서 근대에서 서양을 대응하는 지침으로 된 사실에서 근대 동양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찾을수 있다. 또한 근대화대응에 지연된 중국의 세계인식수준과 양상이 재발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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