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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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문명개화”에 시작된 일본인의 육식
2014년 04월 14일 09시 41분  조회:5054  추천:21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53)

"문명개화"에 시작된 일본인의 육식

김문학        



 메이지유신전까지 절대적으로 문명의 스승으로 모시고 수용했던 중국문명중에서 일본인이 자주적으로 결락시킨 “3대 아이템”이 있다. 그것은 거세(환관), 전족과 과거제도였다. 이 역시 일본인이 외국문명을 흡취할 때 그 좋은것만 따먹는 수용의 천재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3대 아이템” 외에 또 한가지를 첨가해야 한다. 즉 고대 일본인이 중국에서 전형적 가축을 수용할 때 중국 고전 《순자(荀子)》, 《주례(周禮)》에 있는 가축 우(牛), 마(馬), 양(羊), 돈(豚), 견(犬), 계(鷄) 이 6축에서 양과 돼지(豚)를 루락시키고 대신 원숭이(猿)를 넣어 “5축”으로 했다.

  그러므로 일본에는 중국에서 수용한 12띠갓(干支)에서도 돼지띠 대신 메돼지(野猪)가 있다. 그리고 일본 화투(花札)의 칠월 홍싸리밑에 그려진 동물 역시 돼지가 아닌 무서운 긴 이빨을 드러낸 메돼지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書記)》에도 돼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속일본기》에도 천황이 돼지사양을 가르쳤다는 기사가 등장되지만 실제적으로 돼지를 비롯하여 소, 양 등을 육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에도시대에 와서야 돼지가 중국에서류구(琉球)를 거쳐 사츠마에 전해진다. 사츠마지역(일본 서남부)에서는 양돈과 함께 돼지고기를 먹었던것으로 추측할뿐이다.

  일본인이 고대부터 육식을 기피하거나 절제한 대신  그들은 스스로 미(米)식과 “채식민족”으로 칭할 정도로 거기에 고집해왔다.

  중국인과 한국인에게는 인류학적으로 기마민족, 목축업민이 혼혈되여 육식의 력사가 유구하며 어렸을 때 돼지 멱따는 장면이나 소를 죽이는 도살장면은 가끔 본 체험을 갖고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인에게는 가축도살장면은 볼수 없었다. 돼지와 소를 잡아먹는 일이 농촌에서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만큼 목축문화는 일본인에게 익숙한 문화가 아니였다.

  일본의 육식은 근대 서양문명의 도입에서 시작된다. 한마디로 말해 서양인의 건장한 체격과 투지는 육식(소고기)에서 기인됐다는 인식이 있었던것이다.

  1872년 궁중에 소고기가 납입되여 궁중주도형 육식이 스타트를 뗀다. 오츠카(大塚滋)박사에 따르면 1862년 요코하마 선술집을 경영하던 이세(伊勢)라는 남자가 소고기냄비탕집을 경영하여 육식제1호이라고 한다.
  유명한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젊은시절 오사카에서 무나카다(緖方洪庵)의 서생으로 있던 시절 소냄비탕집주인이 돼지를 죽일 때 돼지다리를 붙잡았다는 일화를 회술한다.
  당시 짐승을 죽이는것은 잔혹한 행위이며 가축을 살생하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사고가 일본인들속에 강유력히 존재했다 한다.

 1872년 궁중에 소고기가 납입되여 궁중주도형 육식이 스타트를 뗀다. 오츠카(大塚滋)박사에 따르면 1862년 요코하마 선술집을 경영하던 이세(伊勢)라는 남자가 소고기냄비탕집을 경영하여 육식제1호라고 한다.

 유명한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젊은시절 오사카에서 무나카다(緖方洪庵)의 서생으로 있던 시절 소냄비탕집주인이 돼지를 죽일 때 돼지다리를 붙잡았다는 일화를 회술한다.

  당시 짐승을 죽이는것은 잔혹한 행위이며 가축을 살생하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사고가 일본인들속에 존재했다 한다. 그러나 소고기는 “문명의 약”이였다. “천효만능의 쓴 약을 먹는것이 이 소고기탕을 한냄비 먹는것보다 못하다”는 말까지 류행했다.

  나가사키나 사츠마에서는 돼지고기도 소고기의 류행과 함께 대거 육식으로 보급됐다.

  “육식은 문명개화의 심벌”로 굳어진다. 1877년 신수도 도쿄에서는 “소고기육식은 천자의 식탁에서 아래로는 인력거군의 립식(立食)에 이르기까지 상하사회의 류행이 되였으며 오로지 소고기가 귀하고 이것을 먹는 일이 날로 성해졌다.”(《로문진보(魯文珍報) 》)

  당시 궁중은 물론 일본에서 육식의 일반 코스요리로서가 아니라 소고기냄비탕이 주체였다. 그것은 지금의 스키야기(불고기)와 비슷했다.

  《동경번창기》에는 일본인이 급격히 소고기를 선호하고 소고기를 문명으로 받아들인데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소고기는 인간에 대해 개화의 약방이고 문명의 량제(良劑)다. 그 정신을 양성하고 그 위장을 건장히 하며 그 혈맥을 도와주고 그 피육을 비(肥)하게 한다…”

 메이지말기로부터 다이쇼(大正)초년에 이른(1911~1915)사이 일반 일본인의 평균 육류소비량은 3.6그람이였다. 당시 “부국강병”의 슬로건아래 륙군은 인평균 매일 50그람, 해군은 160그람 정도의 육류를 부식으로 소비했다고 한다.(사바다토요유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렇게 많은 량이 아니였다. 또한 육식은 “서양풍”이 아닌 일본식으로 아렌지한 “샤부샤부”(소고기냄비) 등이 위주였다.

  영양학시각에서 보아 육식이 일본인에게 진짜 영양을 공급한것은 제2차세계대전후였으며 전후 경제부흥과 경제고도성장기인 1970년대에 이른 식생활의 서양화가 강력한 용수철이 되였던것이다. 1980년대에는 영양과잉으로 됐으며 현재 일본인의 평균신장(身長)이 중국과 한국을 추월하여 다시는 “소일본(小日本)”이 아니다.

  소고기육식과 함께 우유 역시 일본 문명개화의 하나의 식문화아이템이였다. 1853년 미국의 총령사로 일본에 온 하리스는 “일본에는 아직 우유마시는 습관이 없으며 양우 역시 농경이나 운반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1863년 미국의 무역사무관 라이스가 혹카이도에서 유우(乳牛)로 일본인에게 착유법을 가리킨다.

  1870년 동경에서 야마카다(山縣有朋) 등 정부고관이 목장경영과 착유법을 개시하며 1873년 《우유착취인심득규칙》이 동경에서 발포된다. 그리고 우유배달도구로 석으로 도금한 부리키깡통을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1882년에 우유에 당분을 넣은 콘텐츠밀크제조에 성공하여 우유소비량이 급속히 증폭되여 전 일본에 보급된다. 1900년대초에는 각지에 밀크홀이 서고 커피와 함께 우유를 많이 소비하게 된다.

  이렇게 일본의 문명개화에 성급한 정부에서는 구미문명을 받아들이는 창구로서 육식을 장려하고 우유섭취를 창도하여 일본인의 서양화에도 박차를 가해갔다.

  일본의 육식은 정치에 좌우지되였으며 국민들 역시 양고기를 안먹는 “온순한 양”처럼 정부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였다.  “문명개화”의 근대적정책이 일본인에게 갖다준 식문화의 혜택은 육식과 우유의 정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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