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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64) 일본의 “중국열”
2014년 07월 01일 16시 34분  조회:5047  추천:21  작성자: 김문학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64)

일본의  "중국열"      
 
김문학          

  “한국병합”의 1910년 그해 중국(청국)에 거류한 일본인수는 6만 5,434명에 이르렀다.

  1890년에는 863명으였으나 청일전쟁(1894~95)후인 1895년에 1,125명으로, 일로전쟁(1904~05)이 끝나는 해인 1905년에는 일약 십배나 불어 11,090명으로 껑충 증폭한다. 신해혁명 5년후인 1916년에는 10만 4,275명에 이른다.

  우의 일본인수 통계에서 확인할수 있는것은 25년 동안 120배로 증가됬다는 사실이다. 중국에 체류한 일본인수가 이렇듯 많은 수자를 확보한 배경에는 당시 일본의 지대한 “청국열”이 뒤바침해준 까닭이였다.

  일청갑오전쟁후 일본정부는 명목상 청국의 “보전(保全)”, “변혁원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중국이 근대화하려면 일본의 부식(扶植)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정부는 일본인의 청국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흥미로운것은 한국병합의 1910년말 조선전역에 거류한 일본인수가 17만 1,543명으로 조선을 식민지화시킨 해, 역시 중국대륙에 대한 중국열(청국열)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것이다.

  일본의 근대는 거의 조선반도와 중국대륙에 상관관계(지원, 침략, 강점, 원조, 동정)로 내실을 이루고있으며 그 상관관계양상 역시 착종적이다. 대립, 주어, 동경, 동정, 원조, 경멸, 침탈의 다종다양한 형태로 중, 한에 접근해왔던것이다.

  중국 근대사나 한국 근대사에서 교과서적기술은 흔히  “반식민, 반봉건투쟁”, “반침략, 독립투쟁”의 구도로만 근대사를 리해하는 도식이 로정되지만 사실 력사의 양상은 이 도식보다 더 복잡하고 착종적이며 다양, 다층적이다. 보다 유연하고 다각한 시야에서 력사를 점검해보면 또 다른 새로운 력사사상(事象)들이 “발견”된다.

  당시 “청국열”의 붐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은 대체 어떤 계층이였을가? 사실 오늘날 글로벌화의 물결을 타고 출국붐이 식지 않는 중국인의 사정을 감안해도 알수 있듯이 주로 류학과 돈벌이, 그리고 무역, 상업에 종사하는 계층이 출국의 주류를 이루고있다.

  마찬가지로 100년전 일본인의 “중국붐”도 류사한 양상을 보였다. 중국땅을 밟은 일본인의 압도적으로 많은 다수는 상업, 무역, 산업 계층의 사람들이였다. 물론 “재아시아주의”의 미몽에 심취하여 진짜 중국을 도와 일본과 함께 손잡고 공동체를 무어 서양과 대적하려는 일본의 랑인(浪人), 아시아주의인물도 활약하였다.

  그럼 이제 당시 백년전 일본인의 “청국열”로 지대했던 중국관계양상을 구체적 실례를 들어 보기로 하자.

  근대사를 조감해보면 일본인은 조선인 뒤지지 않게 세계에서도 교육열심의 민이라는것이 알린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이후 근대국가로 거듭난 리유는 드높은 교육열의 덕이라는것은 누구나 주지하는 사실이다.              

      이시아 근대교육의 정립은 일본이 최초, 최우수했으며 그것이 그대로 조선과 청국에도 류입된다.

  일본인이 청국에 세운 학교로서는 1899년에 설립된 동문학당(東文學堂)을 꼽아야 한다. 그리고 1901년 북경에서 경영한 동문학사(東文學社), 역시 그해 남경에다 설립한 동문학당, 1905년 상해에 세운 류동고등예비학당(留東高等預備學堂) 등 저명한 근대 학교를 들어야 한다.

  이들 학교의 책임자는 중국인이 맡았으나 교원은 일본인이 주로 담임했다. 지금 수준의 정규학교는 아니라도 신식 근대교육의 모델을 당시의 중국에 제시해준 의미로부터 감안하여 그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북경 동문학당의 경영자 나카지마(中島裁之)는 이 학교에서 일본어를 교수하는 한편 각 분야의 전문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나카지마는 실업가이며 문학자인 기시다(岸田吟香)를 따라 중국 각지를 고찰하며 양무파의 대표적학자 오여륜(吳汝綸)에 사사하면서 훈도를 받아 학교를 설립한것이다. 학교는 인기가 높았으며 정원 30명을 초월하는 수배의 지원자가 쇄도했다고 한다. 나카지마는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지대한 문화적은혜를 수혜했다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수업료를 일절 면제했다.

  이에 대해 직예총독 리홍장과 그 후임이였던 원세개도 나카지마를 원조하였는데 리홍장은 기밀비에서 월 2백엔, 원세개는 월 백엔의 보조금을 제공했다. 이렇게 1906년 이 학당이 직예성관립중학당으로 개편될 때까지 수많은 우수한 인재를 배출했다.

  신해혁명전야, 중국 혁명파에게 대환영을 받은 인물중 국제법의 권위 테라오(寺尾享)교수와 헌법학의 소에지마(副島義一)교수는 특기할만한 인물이다. 당시 중국 혁명정부가 헌법에 어두워 송교인이 악전고투로 헌법을 기초하려 했으나 제대로 안되였다. 이리하여 초빙된 인물이 법률전문가 테라오였다. 그는 동경제국대의 최우수 현역교수였으나 전 재산을 털어 중국군사류학생을 위해 동빈학당(東斌學堂)을 세울 정도로 중국혁명에 여생을 바친 인물이였다.

  그는 “지나혁명가는 나의 동지다. 내 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하며 교수를 사임하고 대학동료 소에지마를 데리고 중국 남경림시정부에 부임하여 략법(림시헌법) 기초에 착수한다.

  당시 림시정부에 재정고문으로 시카타니(阪谷芳郞), 하라구치(原口要)가 초빙되였으며 각지의 륙군학교에도 많은 일본인 교관이 최빙되여 활약했다.

  그리고 손문, 황흥, 송교인은 각기 이케(池亨吉), 노(萱野長知), 키타(北一輝)를 비서 겸 고문으로 초빙하여 중국혁명에 도움을 청한다.

  1912년 1월 7일, 림시대총통으로 된 손문은 일본참모본부에서 파견되여온 후루카와(古川岩太郞) 등을 회견하고  “만일 일본에 지탱하지 않았다면 중국혁명의 성공은 곤란했을거외다”고 고백한다. 일본인의 “중국열”이 중국혁명성공에 대한 공헌을 솔직히 인정했던 력사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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