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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방황하는 노신(김문학)
2010년 07월 16일 10시 18분  조회:6851  추천:37  작성자: 김문학

<장편연재>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7)

방황하는 노신


김문학


  중국 근대의 언어, 문학을 개척한 위대한 문호 노신이 주수인에서 노신으로 되기까지는 사실 기나긴 방황과 사색의 터널을 거쳐야 했다.

노신 년보를 보면 그가 7년간의 일본유학을 접어두고 귀국하여 항주, 절강 양급사범학당의 생리화학교원으로 되는 때가 1909년 8월 해빛 따가운 한여름이었다.

이로써 노신의 문학생애에서 긴 침묵과정을 통해 “주수인”으로부터 “노신”으로 비약하기 위한 조주단계에 들어선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노신이란 인물은 중국 근대사 그리고 일본의 근대와 떼어버릴수 없는 상관관계에서 삶을 영위해온 중국의 대표적인 국민작가일뿐만아니라 보다 보편적 의미에서 근대정신사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인물상은 간단하게 위대한 문학가, 사상가, 혁명가라는 장식어로 규정짓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층적 성격을 띤, 국경을 뛰여넘은 그는 우선 코스모폴리탄적인 시각을 갖춘 “세계인” 그것이다.
                                          
노신에 관한 연구는 중국에서도 최근들어 활발해지고 있으며 신예학자들에 의한 “노신비판”역시 예리한데 있지만 노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분석연구는 오히려 노신을 동아시아의 대표적 작가로 높이 떠받드는 일본학계의 그것이 더 심도있다고 해야 할듯하다. 원노신박물관 관장이며 노신연구의 중견학자인 손욱도 필자와의 대담에서 동감을 표한적 있다.

  필자가 노신을 통해서 관찰된것은 하나는 노신이 왜 일본유학을 중도 하차하고 귀국한 뒤 소침해지고 침묵을 지키며 갈팡질팡 정신적으로 방황기를 겪어야 했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왜 그토록 각골통한의 정념으로 중국, 중국인의 국민성의 열악성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또한 시종 이것을 그의 성스러운 사명으로 삼았는가?

  이런것들에 대한 중국내의 학자나 저널리스트에서도 정확히 말해서 중핵을 찌른 그 확답을 못찾고있다. 이데올로기나 혁명가 정신 차원으로 기울어져 표피화되고 또 그것은 하나의 규정짓는 고정적 틀이 되여버렸다.

그렇듯 노신은 그 깊은 속을 헤아리기에는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귀국이후의 노신의 행적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그의 장장 7년반동안 일본유학의 삶에 대해서 비교고찰하기로 하자.

1902년부터 시작된 일본유학생활은 그에 있어서는 과연 생애의 황금시절이였다. 22세부터 29세의 다감한 청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그는 일본의 선진문물에 큰 컬쳐쇼크를 받게 되고 일본적인 서구문명에 개안한다. 일본에서 그는 “늘 일본기모노를 입기를 즐겼다. 외출시에도 일본 하카마를 걸치고 헌팅캡을 머리에 쓰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유학생이 잘 안신는 게다를 잘 신었는데 게다바람으로 밤시장을 거닐기도 했다.”

“간다의 중화요리집에서 중국훠투이나 두부 등 중국식품을 팔았으나 그는 한번도 산적이 없다.”

“동경에서  의식적으로 일본식의 생활을 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중국식 생활양식에 구애없이 적극적으로 일본풍습에 진입하는데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지향이 있었던것 같다.”(마루야마 노보루 《로신》 1965년)

  노신이 평생기른 수염도 일본유행의 팔자수염으로서 그는 일본에서부터 기른 수염양식을 죽을때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그는 철저하게 일본문화에 젖어 그속에 융화시키고자 하는 국제적인 실체험을 마침내 정신적 세계의 높이로 승화시킨다.

  노신이 가장 존경한 사람 역시 일본인 스승 후지노선생이였고 평생 친구로 사귄 외우 역시 우치야마 간조였으며 아들과 자신이 수진한 의사 역시 일본인이였고 지어 그가 죽기직전 남긴 절필도 일본어였다. 그는 “친일”에 가장 가까운 문호였으며 그런 친일적경향은 모두 일본의 생활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런 성향은 그 개인의 성격에서 나온 사생활이므로 지탄 할바 못되지만 일본의 삶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 정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것은 사실이다.

  많은 연구자들의 일본체험을 다룬 연구를 보면 노신이 “국민성 개조”에 뜻을 두게 된것은 시초 일본에서 아스.스미스의 《중국인의 성격》이나 일본인이 쓴 국민성 비판서나 잡지 특히 명치말기와 대정초기의 데모크라시 열풍을 타고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서양학설, 철학서를 로신은 많이 접했다. 노신은 중국일본유학생이 창간한 《절강조》, 《하남》 등 잡지에 《마라시력의 설》(1907년)  발표하여 유럽에 대한 중국의 갭을 지적하면서 개혁을 호소했다. 젊은 노신은 동생 주작인과 함께 외국번역소설도 내고 잡지도 창간하다가 실패하지만 그는 언설적, 문학적 면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렸다.

  그런데 귀국한뒤 노신은 “적막”과 소침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실제적으로 일본류학에서 학사나 석사, 박사따위 학위라는것을 획득하지 못했으며 홍문학원과 센다이의학교의 학력증명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대학에서 교수직으로 있기에는 학력부족이였다.

  1912년부터 1926년사이 북경정부의 교육부 과장직으로(공무원) 친구 서수당의 알선으로 취직한다. 유학시절과 대조적으로 1918년 5월 《신청년》에 《광인일기》를 발표하기까지 그는 거의 무명의 주수인으로 통했다. 실의에 빠져 고서를 베끼거나 탁본을 정리하는것이 그의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문학으로 국민을 각성하겠다고 센타이의학전문학교시절 결의했던 그답지 않게 그는 너무 의기소침, 방황에 자신의 신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 역시 많은 연구자들이 스쳐지나 버린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의 비교연구 끝에 찾아낸 답안은 이러하다.

  그때의 노신은 본국 동포들에 대한 “후진성”에서 무한한 절망감과 지어 혐오감마저 들었다. 그는 이미 일본에서 형성된 “국제인”이다. 국제인의 심중에는 언어나 복수문화체험의 기억적 장치가 있는데 상대도 그런 장치가 구비되지 못할때에는 상대에게 큰 절망과 실의를 느끼게 된다. 또한 그는 경계를 사는 “경계인”이기도 했다. 일본문화와 중국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는 인물이였다.

그가 중국에서 다시 본 동포의 후진된 모습은 아마도 역적인 컬쳐쇼크를 초래했을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중국을 바라보는 프리즘에는 “열등”, “후진”, “추루”,  “아큐” 등 비판적인 개념과 이미지로 충만되어 있어  다른 이미지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것이다. 즉 일본인의 눈으로 중국인을 바라보았던것이다.

서거 수일전에도 일본조계지에서 그는 일본 벗 우지야마에게 한 말이 “중국은 미래에 사막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의 중국인에 대한 절망감은 국제인의 안목을 갖춘 노신자신의 큰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성비판의 최대의 작가로 부각시킨 결정적 장본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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