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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철도는 문명사회의 가시화된 표징의 하나로서 한 사회의 집결력과 인적, 물적 효률을 높이는데 불가결의 요소이다.
맑스가 19세기 인류의 2대사건이 기차의 발명과 미국의 도금산업붐을 꼽고있는것은 바로 그가 인류사회 중요한 문물의 하나이기때문이였다. 세계 지성들이 기차의 탄생을 인류문명의 중대한 발명으로 간주하는데는 이런 연유에서였다.
100년전 동아시아사회에 기적소리 높이 울리며 등장한 기차,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산업아이템으로서의 기차, 철도가 중국과 일본에서의 운명은 그야말로 천양지별의 양상을 로정했다는것이 발견된다.
기차의 수용양상이 결국은 중일량국의 서양문명수용을 그대로 대변했다는 의미에서 오늘 다시금 백여년전 기차의 경우를 회고, 비교해보면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일본에서 최초로 기차가 등장한것은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인솔하는 “흑선” 즉 동인도함대가 일본의 문호를 두드린 다음해인 1854년이였다. 하지만 그 증기기관차는 실물의 4분의 1 사이즈의 모형이였으며 일미화친조약 체결을 위해 두번째로 일본을 방문한 페리제독이 전신기와 함께 바크쿠후장군에게 선상품으로 지참했던 물품이였다.
요코하마의 응접소 뒤골목에 설치한 레루우를 차바구니 하나를 련접한 증기기관차가 흰솜뭉치같은 연기를 토하며 칙칙폭폭 달리는 모습을 보고 바쿠후의 관리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기차라는 서양문물에 대해 일본인들은 지대한 호기심으로 대했으며 기관차모형을 활사한 그림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일본은 뒤이어 미국에게 동경ㅡ요코하마구간의 철도부설권을 허가하였으며 여의치 않았으나 그뒤 영국에서 철도건설비용을 차관하고 기술지도를 받아 신바시ㅡ요코하마구역 철도를 개설했다. 1872년 이 철도개업식이 성황리에 열렸다. 《우편보지(報知)신문》에 따르면 2만명 관중이 열광하는 와중에 천황은 정장을 하고 정부고관들도 례복차림으로 천황의 뒤를 이어 기차 1등차에 탔다. 한시간 남짓하여 천황과 고관들을 태운 기차가 신바시를 출발해 요코하마역에 도착했다.
당시 증기선(蒸氣船)에 대한 명칭으로 기차를 “륙증기(陸蒸氣)”로 칭했다고 한다. 대중들은 달리는 기차의 모습에 열광했다. 그야말로 그것은 문명개화의 상징물로 되여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 철도부설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으므로 정부의 재정을 압박했기에 민간에서 철도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일본철도회사가 1881년 11월 설립된다. 우에노ㅡ아오모리구간 전선이 개통되는것은 1891년 9월 1일이다.
철도, 기차가 문명의 심벌로서 일본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누린데 비해 청국에서는 어떠했을가?
사실 청국에 기차가 등장한 때는 일본보다 앞섰다. 북경에 있던 영국상인들은 청정부에 철도부설의 의미를 력설하여 1865년 북경 선무문밖에 1킬로의 레루를 부설하여 청정부에 피얼했다.
그러나 청국은 서양인의 근대화추진을 오히려 네가티브하게 “악”으로 받아들였다. 즉 서양인이 철도부설을 통해 청국을 공제하여 우리의 자원을 수탈하려는 “험악한 욕심”이 있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며 단연코 거절한다. 여기서부터 일본인이 서양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수용한데 비해 청국의 서양인식에서 로정된 경직된 가치관이 엿보인다. 무릇 대립적, 적대적으로 보려했던 세계인식의 양식은 백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인의 사고양식에 여전히 도사리고있다.
우여곡절을 거쳐 1876년 중국 최초의 정식 운수용 철도가 상해에서 탄생된다. 물론 중국 독자적인 건설이 아닌 영국상회에서 건설한 상해ㅡ오송(吳淞)구간의 15킬로 길이의 철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년후 청정부는 정식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핑게로 철도를 회수하고 파괴시켰다.
그러다가 1881년 북양대신 리홍장의 주도아래서 당산ㅡ서각장(胥各庄)구간의 철도가 부설된다. 하지만 일본에서처럼 각광을 받지 못하고 서민들의 강력한 반대를 환기시켰다. 풍수를 파괴한다느니, 지기(地氣)를 문란시킨다느니 야단법석이였다. 개명한 리홍장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에 못미친다고 한탄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결과 어찌됬을가? 그 증기기관차를 떼버리고 대신 노새를 철도우에서 차량을 끌게 했다. 근대 중국에서 벌어진 비근대적인 롱담이 아닐수 없었다!
근대적 기관차가 다시금 그 노새에게 밀려난 아이러니는 그야말로 중국 지식인의 표현을 빌어 “다시금 만만디의 중세기로 되돌아갔다”는 신전설의 탄생이였다.
그뒤 일본은 철도를 부설한지 10여년만메 아시아 최선진국으로 탈바꿈하며 1895년 청일갑오전쟁에서 일본문명의 승리를 과시하고야 만다.
조선은 그나마 일본에 의해 철도부설이 순탄히 추진된 셈이다. 《동아백과사전》에 따르면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간의 철도부설권을 얻어 모스가 자본주 찾기에 실패하자 1899년 그 권리를 일본에 팔아넘겼다. 그해 9월 일본은 경인철도주식회사를 통하여 제물포ㅡ노량진구간 33.2킬로의 철도를 완성시켰다. 이것이 한국 철도의 시초였다.
조선의 철도망은 첫 시작부터 일본의 손에 의해 건설, 운영되였다. 철도가 근대의 상징이듯이 조선의 “근대화는 사실 일본의 려과를 통해 조선에 건설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철도의 동아시아 3국의 운명, 그것은 바로 3국의 근대 운명의 상징이기도 했다. “철도 이 신식교통방식이 근대 중국에서의 수십년의 운명은 파란만장이다. 철도건설을 에워싼 정부의 명쟁암투(明爭暗鬪)를 통해 신생사물수용이 중국에서 간난곡절, 신구관념의 치렬한 싸움을 로정했다. 각종 정치력량의 대립, 국가와 궁정사이, 지방관리사이의 박투, 각 파벌의 투쟁 및 동일파벌내부의 내홍과 리익관계를 둘러싼 쟁탈전…그야말로 중국사회 관리사회의 ‘축영’이다.” 중국 근대사 연구의 중진학자, 중국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뢰이의 투철한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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