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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김문학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인의 일상생활은
한일합병 100년.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한국지배 36년에 대한 력사적 기억.
식민지의 기나긴 경험은 당한 조선민족의 령혼에 지지리 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회억 자체도 피지배자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덧나는 상처처럼 꺼내기 싫은 과거일지도 모른다.
행, 불행을 떠나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 근대력사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지닌 력사과정이였으며 조선의 그 이후의 력사를 규정짓는 큰 구실을 했던것 역시 사실일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필자는 조선, 일본, 중국의 근대사 100년의 수없이도 많은 자료문헌을 섭렵하는 과정에서 일본식민통치를 당한 피식민지자의 후예로서 가슴아픈 대목들을 많이 조우했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력사가 우리 민족의 오늘을 이어온 과거의 아이덴티티의 피와 살이 된것이니 무조건 덮어감추거나 왜곡, 무시할수는 없다.
세계적으로도 일본과 같이 무섭게 동질적 사회, 문화를 이룬 우리 민족은 유별나게 나자신을 내세우며 우리의 반대편에 선 적, 상대에 대해 비관용적이라고 한국의 석학 이어령선생도 필자와 대담할 때 지적한적이 있다.
증오의 감정 역시 늘 동질, 균질적이여서 우리 아닌 남, 타자, 특히 일제와 같은 대상은 무조건 증오의 타킷이 되며 그 시대에 대한 모든 력사적 해석 역시 “증오”가 깔려있다. 여기에는 거의 어느 하나 누구의 이론(異論)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 태세로 기세당당하다.
그런데 증오의 절대적 감정, “정의(正義)”에 눈가려 망각한것은 리성적인 자기 성찰과 반추라는 중요한 팩터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제강점식민시기를 다룰 때 학문적인 접근이든 대중적인 언설이든 사석에서의 잡담이든 거개가 지극히 동질, 균질적 양상을 로정한다.
즉 일제통치의 력사적시간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피부로 느낀 감각이 시간의 추이와 더불어 “풍화” 내지는 단순한 “관념화”란 려과장치를 거쳐 무조건 “저항사관” 아니면 “매국친일” 2항 대립구조로 일축해버린다
그런데 중요한것을 여기서 빼놓고야말았다. 무엇인가? 력사적 사실이 인간의 일상에 의해 지탱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상”을 담론할 여지가 우리 민족에게 없다.
식민지시대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꺼리고있다. 력사란 정치나 경제,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만 많은 력사 공간시간은 오히려 그 정치체제하에서 생활해온 보통 일반인의 “일상생활”에 의해 전개해온것이 아닌가.
최근 다행히도 일제식민시기의 일상생활을 반영하는 책들이 속속 출간되여 세상의 해빛을 보고있다.
《내가 조선반도에서 한 일》(마츠오 시게루), 《일본제국이 점지해준 아이들》(카터.엣커트), 《일본통치하의 조선 진북의 력사》(사카이 도시오), 《생활자의 일본통치시대》(오선화),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타카사키 소오지) 등 저작이 나타나면서 일제식민시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일상에 대해 그 진실을 규명하고있다. 그것을 잠간 들여다 보기로 하자.
서울의 일본인은 줄지어서 타타미를 깐 일식가옥의 거리를 형성하여 살고있으며 이런 일본인사회와는 거리를 둔 조선인의 집에서는 라지오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 중계를 듣고있다.
그리고 청계천에서는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빨래방망이질을 하면서 환담하고있다. 종로거리의 영화관앞에서는 신작 영화를 관람하고자 행렬을 지어있는 조선인들. 물만두를 열심히 파는 중국인의 모습도 보인다.
손님으로 만원을 이룬 신와(信和)백화점.
까페 녀급과 환담하면서 큰 소리를 치는 남성취객.
사쿠라를 구경하는 덕수궁의 화창한 봄풍경.
학교에서 공부를 게을리해 버들회초리로 맞는 아이의 비명소리.
얼음이 석자두께로 언 한강우에서 썰매를 씽씽 타는 아이들.
길을 물어보는 일본인에게 친절히 가리키는 예쁜 조선아가씨.
이런것들이 식민지시기 당시의 하나하나의 풍경이다. 일제시기 일상생활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아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도 않았다. 서로 문화가 다른 민족이 같이 살다보면 알륵과 반목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는 인류학이 이미 실증하고 있는것들이다.
그러나 특히 도시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반목이 심했던것 같다. 서울에서 배내밀고 딸깍딸깍 게다소리를 내며 으시대던 일본인을 조선인은 아마 덜 반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을것이다. 서로 아주 친한 사이의 일본인과 조선인도 있었다. 민족을 넘어선 우정이였다.
전후 “고향”을 찾은 식민지시대의 일본인 교사가 한국인 제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전해진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일제시대의 력사를 굳어진 이데올로기일식의 저항, 친일, 2항 대립구도도 좋지만 그것을 넘어서 보다 생활 실제모습에 접근하는 인식방법이 필요하다고. 력사를 이룬 일상의 실상을 통해 우리와 타자의 과거를 알고 재인식하는것은 서로 유리하지 않을가.
-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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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에서 김선생만큼 진실을 말하고 특히 민감한 역사에서도
허상을 파헤쳐 진실을 과감히 말하는 양심적 지식인은 없다는 사실.
그리고 동아시아권에서 지명도를 자랑하며 경계를 넘어서 활약하는
학자,작가는 아직 없다는 사실.
이것만으로 우리 조선족의 자랑이고 긍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