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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독립문"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김문학)
2010년 07월 01일 12시 53분  조회:5668  추천:35  작성자: 김문학

<장편연재>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3)

"독립문"은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김문학

 

서울 서대문구에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이 있다. 유명한 독립문은 바로 역에서 도보로 얼마 안 걸어 간 곳에 초연히 솟아 있다. 

그런데 이 유서깊은 “독립문”, 대체 그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한국인의 90%이상이 일본으로부터의, 식민지지배로부터의 독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필자가 한국에서 만난 주위의 지식인, 공무원, 회사원, 학생들속에 이같은 착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십상팔구였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유학생이나 또는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에게 질문을 해보았는데 역시 절대 다수가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 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왜냐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장장 35년을 몸으로 체험해야 했던 우리가 “독립”하면 아마도 그 극악무도의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나름대로 착각 할수 있는것도 당연 할지도 모른다. 

또한 포스트콜로니아리즘사회에서 식민지의 후예로 살아 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1945년 8.15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해방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심장한것이 아닐까. 역시 식민지 “후유증”의 하나라 할수 있다. 

그럼 이 “독립문”이 상징하는 독립이란 대체 그 누구로부터의 독립일까? 정답은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청일전쟁후 1895년 3월 체결된 《마관조약》의 제1조목이 “조선의 독립”에 관한 내용이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청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의 국가임을 확인 한다. 고로 위의 독립자주를 손해주는, 조선국이 청국에 대한 공헌전례(贡献典礼)등은 금후 전부 폐지할지로다” 

일본이 청국과 개전이유로서, 청국과 조선의 종속관계를 영원히 폐하고 그것을 명문화시킴으로써, “독립자주의 나라”조선의 보장을 선언했던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일본의 연속궁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하나 주목해야 할것은 우리의 기억속에서는 희미 하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기본 구도는 중국대륙과 주변국가의 조공(朝贡) 및 책봉관계였다. 

대륙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풍부한 문물과 선진문명을 과시하면서 변방 여러민족과 지역에 제국의 힘을 행사해왔다. 그중 일본이 당나라의 쇠락기엔 894년에 스가와 라미치자네(管原道真)는 견당사파견 중지를 요망한데서 견당사파견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뒤 13년후인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되고 60년뒤인 960년에 송나라가 통일왕조를 세운다. 일본은 좋은 타이밍에서 대륙의 중국권위로부터 거리를 적당히 두고 “자주독립”에 성공한다. 

일본은 바다라는 장벽을 여과장치로 중국의 문명을 좋은것만 따먹는데 성공시켜 외래문명 흡수의 우등생다운 본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일찍 문명으로서는 독립을 달성했기에 서양문명을 배우는데 용이했으며 그 점이 조선과의 큰 갭을 만들었다. 

조선은 지리적으로 대륙과 접속된 지근거리에 있었으므로 아무런 여과장치도 없이 중국문물을 수용, 하물며 청국에서 멸한 명나라의 중화를 동아시아에서 대신한 “소중화”로 스스로 자부했을만큼 중국물에 푹 젖어있었다. 일본에서는 수용하지 않는 중국의 환관, 궁녀, 전족, 과거제도 등을 조선이 고스란히 수용하고 정착시킨것이 그 좋은 례가 된다. 아무튼 조선은 조야를 불문하고 대륙 청국의 종속국으로서 거부반응을 보이면서도 또한 거기에 순응해온 속국으로서의 역사를 수백년 이어왔다. 

모택동은 1939년 그 저술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국주의 제국(诸国)은 중국을 패북시킨뒤, 중국에 예속했던 각국을 점령했다. 일본은 조선, 대만, 류구, 팽호도, 여순을 점령하고 영국은 필리핀, 부단, 향항을, 프랑스는 안남을 점령했다. ” 

전근대의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중화제국이 근대서양과 일본제국에 의해 속국을 많이 빼앗긴 사실을 모택동은 언급했다. 그리고 모택동의 말에서 또한 중화제국의 아시아질서를 붕괴당했다는 뉴앙스도 느낄수 있다. 鲁迅도 일본인 작품을 번역한 역사서문에서 일본에게 합병당한 조선을 두고 “원래 우리의 속국이였다”고 언급했다. 

이렇게 청국의 속국에서 독립을 맞은 영구한 기념으로 독립문을 세운것이다. 높이 15미터, 너비 12미터, 화강암으로 구축된 이는 파리의 개선문 (높이 50미터)을 본따서 설계 한것이다. 그보다 키는 낮지만 위엄을 자랑하는 웅위로운 모습이다. 

독립문의 고안자는 고명한 독립운동가 서재필이다. “독립협회”의 창시자의 한사람이기도 한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1880년 17세에 일본에 유학해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도를 받기도 한 그는 김옥균을 도와 갑신정변(1884년)을 주도하지만 실패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뒤 미국으로 재망명, 10년간 체류중 고학으로 서양의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딴다.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미국시민권도 획득한다. 

민비(명성황후는 그뒤 추임한 명칭) 암살(1895년 10월 8일)후 청일전쟁과 때를 같이 하여 조선혁신을 추진하던 김홍집 총리가 1896년 1월 서재필을 조선으로 불렀다. 외무대신직을 의뢰했지만 서재필은 고위관리직을 탐하지 않고 사절했다. 

그는 한글신문 《독립신문》을 그해 4월 7일 창간하여 독립활동을 벌인다. 지금 한국에서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 된 연유는 여기서 기인된것이다. 7월 2일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활약한다. 

이어서 1896년 11월 착수한것이 이 독립문이다. 당시 중국사절을 맞은 “영은문(迎恩门)”(은인인 중국인을 맞는 문)과 “모화관(幕花馆)”(중화를 숭모하는 관)이 서울 의주로에 설치되여 있었는데, 이 두 시설을 짖부스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의미는 심장하다. 그리고 모화관 자리에는 “독립관”을 세웠고 그것이 독립운동가의 활동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그것이 1897년 11월이다. 

그러나 근대사를 돌이켜보면 이 “독립”의 내실은 일본주도의 “독립”이 불과 했던 한계가 보인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성립에까지 이르지만 국내 보수파의 무함으로 인해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 1898년 11월 폐지되고, 그 간부들도 체포된다.  

결과적으로 내부적인 독립의 최후의 기회를 잃게 된다. 이리하여 결국 청국을 몰아낸 일본에게 큰 기회를 준다. 조선독립자주는 청국의 영향을 배제한 일본의 조선지배로 기울어간다. 그야말로 “호랑이를 몰아내고 승냥이를 끌어들인”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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