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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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받은 선물
2013년 04월 06일 09시 10분  조회:5601  추천:2  작성자: 김정룡




새해 첫날 받은 선물

 

계사년 첫날 서울에 눈이 내렸다. 옛사람들은 새해첫날 내리는 눈을 풍요와 다산의 징조를 알리는 서설(瑞雪)이라 했던가.

눈은 낭만을 불러온다. 지천명이라 젊은이들처럼 가슴이 할랑거리는 설렘과 낭만은 없으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사각사각 서설(瑞雪)을 밟으며 외식 길에 나선 기분이 참 좋았다.

동네 음식점에서 우린 지난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 해야 할 일들을 담론했다. 여행계획을 잡아보기도 하고, 늦둥이를 보는 것이 어떨까······. 희소(喜笑)를 날리며 잔을 비우고 있을 때, 한 20대 후반 젊은 사내가 반갑게 다가왔다. 6주기술교육을 수료한 나의 제자 윤민호였다.

음식점에 나타난 윤민호는 내가 눈에 띄자 얼굴이 매우 상기되었다.

“자네, 새해 첫날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럼요, 선생님이 아시면 필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 그럼 기대해보지.”

나는 윤민호를 닦달하지 않고 일단 술잔을 나누고 나서 들어보기로 했다.

6주기술교육은 한국정부가 무연고동포들에게 한국에 올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대신 입국 후 6주 동안 기술교육을 이수해야 비자변경이 가능하도록 만든 제도이다. 시험이 없이 수료시간만 때우면 된다. 시험이 없으니 압력이 없다. 그들은 공부하기 위해 학원에 오는 것이 아니라 비자변경을 위해 핍박에 의해 양산에 오른 격으로 학원에 다닌다.

자의가 아니고 타의에 의해 등 떠밀려 학원에 온데다 한족지방에서 나고 자랐거나 고향이 연변이지만 한족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은 한국어는 고사하고 조선어도 젬병이라 강의를 알아먹지 못해 수업이 죽을 맛이다. 애먹이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중이 종치듯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쯤은 ‘고상’한 편이다. 그들은 억지로 죽치고 수업에 참가하는 것이 지옥이다.

윤민호는 심양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한족지방에서 살아온 탓에 우리말을 일상용어 몇 마디만 알아들을 뿐 입으로 번지는 건 젬병이다. 행위방식이나 사유방식도 99% 한족이다.

컴퓨터강의를 맡은 한국인강사가 같은 윤 씨라 반가워 ‘본’이 어딘가? 물었다. 한족이나 다름없는 윤민호가 ‘본’을 알 리가 만무했다. 문제는 그의 태도였다. 자신이 ‘본’을 모르고 있는 것을 창피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어온 강사를 오히려 못 마땅하다는 싸늘한 눈길이었다. 한국인 강사들은 조선족학생들과 마찰이 생겨도 훈계를 하지 못한다. 정서교감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변일중 교사출신이라 학생들에게 엄격했다. 그들이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지식 하나, 상식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한국생활적응에 도움을 주려고 열심히 강의에 몰두했다. 한글과 한국말을 모르는 학생이 30%이다. 그들을 위해 판서를 많이 하고 아울러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쓴다.

나의 강의는 한국문화, 한국역사, 한국민속, 한국법률 한국생활적응 등 사회통합프로그램이었다. 당연히 매 번마다 빼놓지 않는 것이 ‘본’에 관한 강의이다.

‘본’을 모르는 학생이 20%이다.

“본도 모르는 자가 무슨 조선족이냐?”고 강력하게 야단친다.

다른 학생들이 침묵을 지키는데 윤민호가 중국말로 투덜댄다.

“그런 걸 몰라도 지금까지 밥 먹고 살아왔습니다. 왜 하필 그걸 알아야 하나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조선족은 단군을 모르고 ‘본’을 몰라도 먹고 살아오는데 지장이 없었다.

2012년 한해 내가 교육시킨 6주기술교육생은 무려 413명이었다. 그 중 95%가 단군이란 ‘ㄷ'자도 들어본 적이 없단다. 민족의 조상을 모르고 살아왔다. 조상을 모른다는 것은 뿌리가 없는 집단이란 뜻인데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조선족 다수가 민족의 뿌리를 모르고 있을뿐더러 가문의 뿌리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더 큰 비극이다.

문제가 또 있다. ‘본’이 무슨 뜻이냐고 질문을 들이대면 아는 자가 한두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80%가 자신의 ‘본’을 알고 있었지만 그 ‘본’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본’이란 그 가문의 조상이 살던 곳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조선족 절대다수가 가문의 조상 뿌리조차 모르고 어영부영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본’을 모르는 학생에게 하룻밤의 시간만 준다. 이튿날 대답 못하면 나의 강의를 수강할 자격을 박탈한다. 강력하게 밀어붙이니 당일로 부모한테 물어 알아낸다. 채찍이다. 동시에 나는 강의를 재미있게 하려고 심혈을 쏟고 정열을 불태운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나는 일단 교단에 서면 천리마가 광야를 달리듯 거침이 없다. 이렇게 당근과 채찍을 겸비해 전원이 수업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교사는 생리상 우수한 학생 부류와 애 먹이는 부류를 잘 기억한다. 413명이 되는 단기수업제자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 나는 윤민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새해 첫날 음식점에서 우연하게 인상이 있는 제자를 만나 나는 몹시 기뻤다. 연거푸 석 잔을 건배했다.

“선생님은 저의 일생에서 가장 인상 깊고 가장 잊지 못할 스승입니다.”

제자의 진정이 가득 담긴 인사말이다.

“무슨 소린가, 내가 강의한 시간이 고작 30교시밖에 안되는데······.”

“비록 시간은 짧았지만 선생님 덕분에 저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가문의 뿌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왔으니 조상이 계시던 파평(파편 윤씨)에 가보고 싶어 오늘 다녀왔습니다.”

“아니, 그까짓 것 몰라도 밥 먹고 산다고 큰소리치던 자네가 ‘본관’까지 찾아가다니!”

나는 농으로 한소리 했지만 내심으로 제자가 한없이 대견해 보였다.

“어제저녁 조상의 뼈가 묻힌 곳에 찾아간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아버님께서······.”

그는 말하다 말고 뒤통수를 긁적거린다.

“그래, 아버님께서?”

말을 잇도록 유도했다.

“아들놈이 한국 가더니만 ‘사람 되었다’고 하시면서 몹시 기뻐하시는 모습이 전파를 통해 역력하게 전해왔습니다.”

교단에 서는 훈장은 제자들이 성숙되어가는 모습에 가슴 뿌듯하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끔 신선한 충격을 먹을 때가 있다. 새해 첫날 저녁 우연히 만난 제자가 밥값을 나 몰래 지불했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생활 10여 년 동안 한국인과 중국인한테서 수많은 대접을 받아보았다. 그 대접들은 서로 일로 얽힌 관계로 이뤄졌거나 친구로 친해 이뤄졌던 것이다. 한국생활 10여 년이 넘도록 내가 가르친 제자한테서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제자가 지불한 밥값은 단순한 수학적인 돈 계산으로 환산할 수 없다. 예로부터 훈장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스승은 제자들한테서 가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을 받으면 무한한 가치로 여긴다. 스승의 보람과 희열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새해 첫날 제자한테서 받은 선물이 나를 몹시 흥분케 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난 한해 있었던 일들이 필름처럼 떠올랐다.

지난 흑룡의 해에 나는 많은 일들을 해냈다. 예전처럼 글 쓰고 신문을 꾸리고, 민속장기대회를 개최하고, 교사모임도 열었다. 동북아신문 이동렬 대표와 손잡고 코리안드림 20년 넘어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여러 단체 132명을 이끌고 <여수국제박람회> 참관을 다녀왔다. 전 청화대 교수인 정인갑 선생과 힘을 모아 이동렬 대표를 수반으로 하는 ‘재한동포문인협회’를 출범시켰다. 많은 일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지난 한해에 행한 여러 가지 강의였다.

한국외국어대학 특강,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특강, 구로경찰서 특강, 구로구청 특강, 한국청소년교육센터 특강, 안산 모 고등학교 특강 등 한국인을 대상으로 많은 강의를 해왔다. KBS에 세 차례 출연했고, 북경중앙방송조선말프로 인터뷰도 7차례 했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수기공모작품 심사위원도 맡았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수많은 강의를 통해 조선족에 대한 이해와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 것이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지만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강의 중 가장 희열을 느낀 강의는 역시 6주기술교육생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사회통합프로그램교육이었다. 413명의 젊은이들한테 민족의 조상을 알려주고 가문의 뿌리를 찾아주었다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나는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는 강의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 훈장이 아니다.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하여 밥 먹고 사는 인간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일 중에 강의가 나의 몸에 가장 잘 맞는 항목이다. 직업상 매일 강의를 진행할 수 없어 빠질 때가 있으면 학생들의 강의요청이 빛발 친다.

내가 가르친 6주기술교육생은 과거 연변일중 제자에 비해 반쪽짜리 제자이다. 반쪽짜리 제자한테서 받은 선물이 가슴을 더 설레게 한다. 새해 첫날 반쪽짜리 제자한테서 받은 선물이 더욱 나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여러 가지 일 중에 새로운 한해에도 있을 6주기술교육 강의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고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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