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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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코로나19와 <침묵의 봄> 댓글:  조회:1562  추천:3  2020-03-30
코로나19와 천만이 넘어 사는 도시 서울의 삶은 여러모로 답답했는데 올해의 봄은 더욱 답답하기 그지없다. 설을 쇠고 나면 새해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데 2월 초부터 모든 행사와 모임이 줄줄이 취소되어 우리에 갇힌 동물과 같다. 나의 주업은 신문발행이고 ‘부업(副業)’으로서 강연 다니고 세미나를 조직하고 다른 기관에서 마련한 세미나에 발제나 토론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내가 대표를 맡은 ‘多가치포럼’은 2020년 첫 행사로 본래 ‘3.8 여성의 날’을 맞아 조선족, 새터민, 고려인, 한국인 여성들이 모여 세미나를 개최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역시 취소되었다. 이외 ‘부업’이 또 있다. 서울시청을 비롯해 여러 관공서 회의에 참석하고 법무부회의도 참석한다. 가끔 작품 심사, 언어발표 심사, 기관 직원 채용 심사도 맡아본다. 법무부 제1기 이민자 맨토단 멘토로 합격되어 본래 2월 27일 법무부 장관 위촉장을 받고 사회통합프로그램과 조기적응프로그램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4월 22일 회의를 개최한다는 공지가 있긴 한데 그때 가봐야 확실하다는 전제가 달려 있다. 할지 말지 아직 확실한 결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름에 한 번씩 나가던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독서모임도 취소되고 있어 어디도 나갈 곳이 없다. 설 쇠고 나서 나의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은 두 달 넘게 아무 메모도 없이 깨끗하다. ‘일 년 계획은 봄에 달렸다’는 속담이 있듯이 해마다 설을 쇠고 나면 사회가 온통 분주하다. 이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나의 달력도 왕년 같으면 한주 평균 두 개 정도 ‘행사’가 메모 되었었는데 올해는 전혀 메모가 없이 깨끗하다. 깨끗하다는 것은 아무 활동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활동’은 ‘부업(副業)’이고 나의 ‘부업(副業)’은 곧 나의 ‘부업(富業)’이다. ‘부업(副業)’이 없으니 ‘부업(富業)’도 따라서 사라졌다. 주머니가 늘어야 되는데 줄어들고 있다. 경제적인 손해도 손해거니와 두 달 넘어가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슬슬 폐인이 되는 느낌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를 마치 중이 종치듯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옥이란 무엇이더냐? 단테는 에서 “희망이 없고, 꿈이 없고, 비전이 없는 곳이 곧 지옥이다.”고 했다. 지금의 나의 삶이 어쩌면 지옥일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렵고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지방에 3박4일쯤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부담 없이 한가한 며칠을 보내면 나아질 것 같았다. 왕년 같으면 이때쯤이면 거의 주말마다 지방 관광지를 부지런히 돌아다녔을 터인데 올해는 관관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괜히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까봐 걱정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인내성이 한계가 있는 법이다. 도무지 안 되겠다싶어 지난주에 대한민국에서 청정지역인 완도로 가기로 맘먹었다. 한국 관광지들은 중국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고 일본처럼 정교하지도 못하지만 나름대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아 구경할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떠나는 김에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먼 곳 중에 부산, 포항, 경주 등 경상도 지역에는 여러 차례 다녀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전라도로 가기로 했다. 전라도 중에 찾다보니 가장 먼 곳이 완도였다. 여수도 멀기는 하지만 수년 전 ‘여수엑스포’ 때 가보았기 때문에 완도를 택했다. 완도에서 1박, 목포에서 1박, 땅끝 마을 해남에서 1박하기로 스케줄을 짰다. 완도는 서울에서 440킬로미터 거리다. 서해안 고속도로 타면 330킬로쯤 직진이어서 운전하기 편하다. 목포에 거의 도착할 지점에서 해남으로 빠져나가는 국도를 타고 에돌아 100킬로쯤 더 간다. 가는 날 장날이라고 날씨를 잘 선택한 탓인지, 타고난 운이 좋은 건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했고 바람 한 점 없이 제법 훌륭한 봄날이었다. 도중에 개나리도 피고 목련도 피고 버들가지들이 뾰족뾰족 싹을 내미는 것을 구경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200킬로쯤 달린 지점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벌판을 만나 가슴이 확 뚫린 느낌이었다. 경상도 쪽에 여러 번 운전하고 다녀 봐도 김제 벌처럼 넓은 벌을 보지 못했다. 충청도도 마찬가지 넓은 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북쪽 강원도에 가면 가는 도중에 산이 너무 많아 터널을 수없이 만난다.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 지역에 들어서면 터널이 별로 없다. 나는 터널이 2킬로 넘으면 공포증이 생겨나 운전에 지장이 있다. 전라도에 터널이 매우 적고 있다 해도 길이가 짧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래저래 여러 가지 환경이 좋아 440킬로 먼 길이지만 운전을 신나게 할 수 있었다. 완도 목적지 앞두고 30킬로 지점에서 방역검사가 한 차례 있었다. 일행이 네 사람 모두 정상 체온이어서 무사히 통과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완도타워였다. 오후 2시경이었다. 기분 좋게 갔건만 정작 도착해서 기분이 이상해났다. 주차장에 차가 몇 대 없지 않는가. 타워 올라가는 길에 한 사람도 왕래하는 길손이 없다. 타워 앞에 올라가니 관광객이란 우리 일행뿐이었다. 타워 정상에 올라가면 전체 완도풍경이 한눈에 안겨올 것 같은데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갔던 김에 샤터를 눌러 기념으로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나마 다녀왔다는 흔적이기 때문에. 정상에 올라갈 수가 없으니 더 구경할 멋이 없어 시간도 매우 단축되어 발길을 장보고 기념관으로 돌렸다. 장보고 기념관도 굳게 닫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라 때 한반도 완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에로 일본에로 해상무역으로 명성을 휘날린 해상왕 장보고를 만나자던 기대가 다 사라져버렸다. 대충 말 타고 꽃구경, 변두리를 돌다가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떠났다. 역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번에는 완도수목원으로 가기로 했다. 설마 수목원은 닫지 않았겠지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 갔건만 역시나 문이 닫혀 있어 몹시 썰렁했다. 바닷가에서 신선한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느라 서성이다가 저녁이나 일찍 먹기로 했다. 보는 재미가 없으면 먹는 재미라도 즐겨야지. 완도읍에 전복거리가 있다. 전라남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전복전문음식점에 들어갔다. “이 어려운 시국에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더분하고 푼더분해 보이는 매너 좋은 주인의 인사말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 큰 음식점이 썰렁했다. 단체모임 손님 20명 있어도 워낙 큰 장소라 기분을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무튼 조용한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었다. 본래 음식은 기다려서 먹더라도 사람이 문정성시를 이루는 가게에서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시국에 문전성시는 한 물 건너간 얘기가 아닌가. 저녁 메뉴는 전복집이라 전복풀코스 요리였다. 일인당 5만원, 좀 비싸기는 하지만 ‘싼 것은 좋은 물건이 아니고 좋은 물건은 절대 싸지 않다.’는 중국속담이 있듯이 음식가치가 그만큼 풍부했다. 작년부터 터득한 것인데 지방에 관광 가면 호텔에 묵지 않고 한옥단지에 묵는 것이 나름대로 좋았다. 작년 8월 중순 고열 때 정선 한옥마을에 묵었는데 앞에는 계곡이고 뒤에는 산이어서 경치가 좋을뿐더러 너무 시원하다 못해 조금 추워서 잠잘 때 이불을 덮고 잔 기억이 있다. 피서를 제대로 하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청해진한옥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앞에는 완도 바다가 눈에 안겨오고 뒤에는 역시 산이다. 한옥은 여럿이 가면 잠자기도 편하고 음식도 해 먹을 수 있고 밖에서 바비큐도 해서 먹을 수 있고 불고기도 해 먹을 수 있어 그 재미가 쏠쏠하다. 이튿날 아침 청해진포구 촬영지를 가보기로 했다. 역시 문을 닫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나 가보지도 않고 미리 예단하고 포기하는 행위는 후회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고 설마 설마하면서 찾아갔는데 우리 일행의 성의를 알았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이곳마저 닫혀 있었으면 진짜 이번 완도여행은 추억을 남길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관광은 6대 요소로 이뤄진다. 중국식대로 말하자면 먹는 것(吃)이 첫 자리이고 잠자는 것(住), 이동하는 것(行), 관광지 구경하는 것(遊), 토산품(기념품)을 구매하는 것(購), 오락 구경하는 것(娛)의 순서이다. 이 6대 요소 중에서 일단 대한민국에서 귀한 음식으로 취급하는 전복을 먹었으니 괜찮은 편이고, 경치 놓은 한옥에서 잠을 잤으니 역시 합격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것은 말짱 꽝이었다. 그리고 먹는 것과 자는 것은 다른 지방에 가도 거기서 그것이기 때문에 손바닥 만한 한국 내에서는 별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관건은 관광지 구경이다. 어느 지역이든 어디를 가던 똑 같은 음식과 똑 같은 숙소는 흔하지만 똑 같은 관광지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여행에 있어서는 관광지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이번 완도 여행에서 관광지(청해진포구 촬영지 제외하고)가 모두 닫혀 있어 관광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한마디로 실패한 여행이었다. 목포에 가려다가 그곳도 역시 관광지가 모두 닫혀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다 도망가 버렸다. 해남도 마찬가지. 아무 의미도 없는 여행을 억지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3박4일로 잡은 여행이 1박 만에 끝나고 이튿날 청해진포구 촬영지에서 직접 가리봉을 찍고 돌아와 버렸다. 완도는 3월 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왕년 같으면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않으면 잠자리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올해는 숙소도 텅 비어 있었다. 겨울이 가고나면 어김없이 기온이 따뜻해지고 봄이 온다. 들에는 뭇꽃들이 만발하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이 곳 완도도 틀림없이 자연은 봄이 왔다. 그런데 봄이 왔는데 봄이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말이 있다. 완도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자연에 맞춰 인간사회에도 봄이 와서 북적대야 하는데 그놈의 코로나19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적막감에 휩싸여 있어 봄은 봄이 아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수년 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난다. 미국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1961년 지은 이다. 동양인들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대충 꽃, 아지랑이, 제비 등등이다. 미국인들은 봄에 대해 동양인에 비해 다른 문화적인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곧 새의 지저귐이라고 한다. 해마다 봄이 오면 새들이 기가 차게 시끄러울 정도로 지저귀였는데 어느 해인가. 새들이 도시 거리에 죽음으로 나타나고 쥐들도 죽어서 거리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그 해부터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가 지저귀지 않으니 봄은 침묵했다. 저자는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이유는 지구온난화에 의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새들의 먹을거리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인류가 화학비료를 생산하고 사용함에 따라 다수의 생물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례로 북미 지역에서만 참새가 35억 마리 죽었으니 봄을 알리는 지저귐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것을 ‘침묵의 봄’으로 표현한다면 이번 봄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활동이 사라진 것도 역시 ‘침묵의 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이와 비슷한 바이러스 때문에 봄이 오면 봄 같지 않은 봄, 즉 ‘침묵의 봄’이 또 올까 두렵다.
4    부자 천국행은 낙타 바늘구멍 뚫기라는 말의 진실 댓글:  조회:1549  추천:1  2019-12-10
부자 천국행은 낙타 바늘구멍 뚫기라는 말의 진실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이 뒤섞인 감정을 시기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니체는 이러한 시기심을 르상티망이란 개념으로 표현한다. 니체의 르상티망에는 또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경우 그 대상을 폄하함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행위까지 포함되어 있다. 라는 이솝우화가 있다. 여우가 굉장히 먹음직스런 포도를 발견했다. 입에 군침이 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이 닿지 않아 도무지 먹을 수가 없다. 화가 치민 여우는 결국 “이 포도는 엄청 신 게 분명해. 이런 걸 먹는 자는 바보야.”라며 포기하고 가버린다. 취하고 싶은데 취할 수 없어 오히려 상대를 폄하하는 심리적인 행위.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미녀는 모두 취하고 싶다. 그러나 미녀의 수는 적고 부자나 관료 및 기타 능력자만 가능한 일이지 일반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취할 수 없을 바엔 미녀를 비정상 인간으로 모는 것이 대중의 심리다. 시내암의 에 등장하는 반금련, 염파석, 반교운, 가씨 등 미녀들이 모두 음란한 독부(毒婦)로서 비정상 인간이다. “이른 봄 버들잎 같은 눈썹에는 언제나 운우의 정을 그리워하는 듯 한과 시름을 품고 있고, 춘삼월 복사꽃 같은 얼굴에는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었다. 가는 허리는 걸을 때마다 하늘거렸고, 도톰한 입은 향기를 뿜어 벌과 나비가 미친 듯이 날아들었다.” 반금련의 모습이다. 기타 미녀들의 자태도 거의 이와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을 모두 음란한 것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실제역사사실이든 가공이든 하여튼 모든 남자들이 미녀를 품어보고 싶어 하면서도 미녀에게 이상할리만치 편견을 갖고 있다. “눈썹이 이른 봄 버들잎 같은” 여자를 보게 되면 반사적으로 그녀가 “늘 운우의 정이 그리워 한과 시름을 품고 있다.”고 믿게 되고, “얼굴이 복사꽃 같은” 여자를 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다.”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에 등장하는 이들 미녀들은 대개 독부라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실제로 반금련은 제 손으로 무대랑을 독살하였고, 반교운은 애매하게 석수를 모함하였다. 염파석은 송강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안달하였고, 백수영은 뇌형을 희롱하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그의 어머니까지 구타하였다. 가씨는 관청에 출두하여 남편 노준의를 무고하고 증인으로 나서 자칫하면 노준의는 죽음을 뻔 했다. 중국에서 과거 한 때 바람피운 자에게 썩은 새끼줄에 헌 신발을 달아매 목에 걸어놓고 비판 투쟁하였는데 모두 열광적으로 참여했고 어떤 이는 입에 거품 물고 돌까지 던지면서 굉장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사실 남이 바람피운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왜 미친 듯한 행동을 보이는가? 이에 한 심리학자가 답을 내놓았다. 나도 하고 싶은 데 그렇게 못해서 분하고 억울한 심리 작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바람을 아무나 피우나? 능력이 있어야지. 자신의 무능을 타인에게 돌 던지는 것으로 해소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서양에로 가보자.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인류역사 이래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하는 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이 말씀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니체에 의하면 고대 로마시대에 로마제국의 지배아래에 있던 유대인은 줄곧 빈곤에 허덕였고 부와 권력을 거머쥔 로마인 지배자를 선망하면서도 증오했다. 하지만 현실을 바꿀 수도 로마인보다 위위를 점하기도 불가능했던 그들은 복수를 위해 신을 만들어 내 ‘로마인은 풍요로운데 우리는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다. 하지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쪽이지 부자와 권력자인 당신들은 신의 미움을 받고 있어서 천국에는 죽었다 깨도 갈 수 없다.’는 논리를 세웠다. 니체는 신이라는 로마인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가공의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현실세계의 강자와 약자를 반전시켜 심리적인 복수를 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열등감을 노력이나 도전으로 해소하려 하지 않고 열등감을 느끼는 원천인 ‘강한 타자’를 부정하는 가치관을 끌어내 자신을 긍정하려 한 사고관이다. 는 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설파한다. 우리는 문화대혁명 때 가난이 신성한 것으로 자화자찬했다. 손에 장알이 배기고 발에 쇠똥이 묻은 자는 사상이 붉고 지주와 자본가는 모두 몸과 마음이 썩어빠져 죽일 놈들이고 개 칠 몽둥이 하나 없는 빈곤한 자들이야말로 몸과 마음이 신성하다는데 주장에 열광했었다. 왜 그토록 가난이 위대한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자화자찬에 열광했을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가난한 자가 부자와의 ‘위치’를 반전시키려는 심리, 니체의 말대로 해석하자면 르상티망의 현상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부를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다. 부를 얻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부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일단 부를 얻게 되면 그들만큼 상대하기 곤란한 사람은 없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저서 에 등장하는 한 대목이다. 이외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르상티망의 현상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르상티망의 심리를 강하게 부추기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자기를 남한테 있어보이게 하는 행위도 르상티망의 표현이다. 남자들이 고급브랜드 자동차에 열광하거나 여성들이 고급브랜드 핸드백에 미치는 것 모두 좋은 예다. 한 남자가 2천만 주고 중고 BMW를 구매했는데 얼마 안 가서 망가져 정비소 갔더니 수리비 2천만 내라 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부잣집 마나님이 부러워 가짜명품인 것을 알면서 구입해서 들고 다니다가 망신당한 여자들 모두 르상티망에 빠져 인생을 잘못 저당 잡힌 불행한 사람들이다.
3    감언이설(敢言異說) 하는 김정운 교수 댓글:  조회:1378  추천:1  2019-10-28
감언이설(敢言異說) 하는 김정운 교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3) 조선일보에 의 코너가 있는데 연재 기고자는 김정운 교수다. 일단 연재 코너 제목이 특이해서 눈길이 간다. 감언이설이라는 사자성어는 본래 타인의 귀를 솔깃하게 달콤한 말을 한다는 뜻으로서 한문으로 ‘甘言利說’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감히 다른 말을 한다는 의미로 ’敢言異說‘라 제목을 달았다. ’아니면 말고‘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개인 억측이나 추측에 의한 의혹을 사실 확인도 없이 일단 폭로하여 사회적인 이목을 끌고 보자는 심리의 발로의 행위인데 김 교수가 말하는 ’아니면 말고‘는 나의 주장이 독자의 생각에 안 맞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나온 말 같다. 김 교수의 글을 일별해 보면 필자의 사견이 옳을 것이라 믿는다. 김 교수는 다른 말을 하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김 교수가 유명해진 것은 다른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교수의 책 제목들을 살펴보면 등인데 내용을 봐도 기존상식과 다른 말들을 하고 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비결을 물으면 100% 모두 일치하게 하는 대답이 있다. “비결이 뭐 따로 있어요, 노력한 덕분이죠. 거듭 맞는 실패를 딛고 좌절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죠.” 노력은 성공한 사람들의 미덕으로 간주되어왔다. 이것이 기존상식이다. 게다가 에디슨의 ‘1% 영감에 99% 노력’이란 ‘명언’까지 들먹이면서 노력을 찬양하는 분위기에서 우리는 살아왔다. 김 교수는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한 때 일본 작가 사이쇼 히로시가 지은 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김 교수는 이를 비정상이라 진단한다.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돌아치는 사람들이 성공한다면 새벽부터 약수터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 성공했겠네? 노력이 성공의 비결이 되던 시대는 과거 한강기적을 창조하던 시절 죽어라 일만 하던 때의 얘기지 21세기 세상은 노는 놈이 성공한다. ‘외설적’으로 들리지만 그의 저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허망한 외침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는 일과 삶의 조화를 잘 할 수 있는 휴테크를 전하는 책이다. 김 교수는 외친다. “한국인이여, 놀면 불안해지는 병에서 벗어나라!” ‘일하는 것’은 세계 최고이나 ‘노는 것’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한국사회의 근본 문제를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잘 노는 사람이 창의적이고 성공한다는 막연한 주장을 다양한 문화심리학적 개념들을 통해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이 책은, 한국사회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인 의사소통의 부재를 놀이와 재미를 통해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재미, 행복, 휴식의 심리학적 가치, 철학적 의미 등을 정립하고, 사소하지만 누구나 다양한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진짜 경쟁력 있는 사회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특히 이 책은 100세 시대를 살아갈 인간에게 미리 행복하게 살 준비를 하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일과 삶의 조화, 참 어려운 일이다. 중국문화의 골격이라 말할 수 있는 ‘예악(禮樂)’은 정치, 사회, 문화면의 제도적인 장치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기본 삶의 상식이라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예’는 일이라면 ‘악’은 오락이다. 인간은 일만하고 오락을 모르면 지쳐 병이 나기 십상이고 거꾸로 일을 안 하고 오락(노는 것)에만 빠진다면 곧 타락해버린다. 적당하게 일하고 적당하게 노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창조는 편집이다’ 창조는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편집할 줄 알아야 창조가 생긴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는 김 교수의 인문학 클래스다. 자신만의 새로움을 창조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가능한 것인가? 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서 탄생한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편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에디톨로지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낯설게 보기’를 통해 독창적인 관점을 갖는 법, 암기형 공부가 아닌 주체적 공부로 나만의 이론과 철학을 만들어내는 법 등 실제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에디톨로지 방법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 심리학으로서 의무와 책임만 있고 재미는 잃어버린, 이 시대 남자들을 위한 심리에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공을 향해 달음질쳐보아도 왠지 행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듯하다. 위로받고 싶지만 딱히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남자들이다. 이 책은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로망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행동해보지 못한 남자들의 심리적 여백을 통렬하게 채워준다. 어느 순간까지는 ‘무작정’ 달려온 남자들, 그들이 왜 어느 순간 자아를 상실한 느낌이 드는지, 권위와 의무감에 탈출구가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드는지, 어디서도 지친 영혼을 뉘일 곳을 찾지 못하게 되는지, 그것에 대한 ‘문화심리학적’ 분석서인 셈이다. 남자들의 현실 키워드 ‘아내’로 대별되는 ‘안정과 로망의 경계’를 저자 자신의 경험에 비춰 풀어낸다. 글도 잘 쓰고 강의도 잘하는 남자 한 사람이 글도 잘 쓰고 강의도 잘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김 교수는 이 두 가지를 다 잘한다. 잘할 뿐만 아니라 아주 뛰어나다. 먼저 그의 유머감각이 뛰어난 글쓰기 솜씨 한 대목만 감상해보자. 의 서두다. 나는 유시민 작가가 몹시 불편하다. TV를 켜면 매번 그가 나온다. 그의 ‘구라’는 갈수록 현란해진다. 게다가 그가 쓴 책까지 모조리 잘 팔린다. 그게 나는 그냥 힘든 거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잘생겼다! 그건 누가 봐도 그렇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아주 간단히 제쳤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라가면 꼭 새 책을 내서 내 책을 끌어내리는 혜민 스님은 좀 다른 방식으로 따돌렸다. 그는 ‘스님’이고 나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비겁해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평화가 먼저다. 뜬금없지만 요즘은 이상순이라는 사뭇 촌스러운 사내가 날 괴롭힌다. 이효리 남편이란다. 참 선하고 따뜻해 보인다. 모난 성격 탓에 시종일관 부딪치며 살아왔던 나는 ‘부드러운 사내’만 보면 마음이 몹시 불편해진다. 그러나 이 경우 내 비장한 ‘인물론’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의 아내는 이효리란다. 그걸로 그냥 ‘게임 끝’이다. 아무리 비겁한 논리를 들이대도 해결되지 않는 이상순에 대한 내 질투는 이제 내 성격적인 열등감을 건드린다. 우리의 인생이 자주 꼬이는 이유는 ‘질투’와 ‘열등감’ 때문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질투가 외부를 향한다면 열등감은 내부를 향한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참 대단한 글 솜씨” 김 교수는 스스로 대한민국에서 강의를 잘하는 사람 2위라고 말한다. 자신보다 앞서 한 수 위인 강의자가 바로 도올 김용옥 교수란다. 유머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하게 들리지만 내가 보기엔 우열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김 교수의 강의 솜씨도 매우 뛰어나다. 저명한 음악가 슈베르트를 닮은 외모, 둥글 형 얼굴에 둥글 안경을 걸고 상의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 한 학생복을 늘 입고 강의에 나선다. 나훈아가 무대에 서면 관객을 확 잡아당기듯 김 교수도 청중이 확 빨려들게 하는 재주가 뛰어나다. 강의 잘하는 삼대 요소 : 아는 것이 많아야 하는 것, 강의자와 수강자 사이 정서교감이 이뤄져야 하는 것, 강약 조절을 잘 할 것. 이것을 나는 김 교수한테서 배웠다. 삐딱한 사람이 인기 높은 세상 앞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도올 김용옥 교수와 가수 조영남은 둘 다 일반 상식 시각으로 보면 삐딱한 사람들이다. 김 교수도 역시 삐딱한 사람이다. 나는 어쩐지 지식이 태산 같아도 평범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별로다. 요즘 말대로 하면 튀는 사람이 나는 좋다. 김 교수는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13년 지내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강사도 했다. 한국에 돌아왔는데 취직이 안 되어 애먹었다. 당시 한국대학들에는 문화심리학과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다가 명지대학교에서 심리학과를 세우면서 취직했다.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글도 쓰고 TV강의를 비롯해 대중강의 많이 했다. 한창 잘 나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를 세워 연구 활동도 했다.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강의료가 최고로 비쌌다고 한다. 그토록 잘 나가던 김 교수는 어느 날 대학 교수를 때려치운다. 50살 교단을 떠난다. 지천명 문에 들어설 나이이면 교수로서 한창 ‘꽃 필’ 때 그만두다니. 한국에서 교수직은 평생직이다. 웬만한 하자 없는 한 자리보존은 철석같다. 그런데 그 편안하게 노후 보장 되는 교수직을 때려치웠으니 배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글 쓰고 강의하는 일이 많아서 외롭지도 않고 수입도 좋았겠지만 중국말로 표현하자면 하해(下海)는 모험이다. 대중인기가 절정일 때 김 교수는 어느 날 일본으로 떠난다. 며칠 간 여행이 아니라 일본 지방에 있는 ‘허름한 대학’에 가서 3년 간 그림을 배운다. 일본 사람은 고독하기로 유명하다. 고독한 일본에서 고독하게 지낸 체험을 바탕으로 는 글을 발표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듬해에 김 교수는 더 고독하고 외로운 길을 간다. 여수 앞바다 한적한 섬에다 자기만의 공간인 화실이자 글 쓰는 작업실을 만들었다. 이름은 ‘미력고(美力庫)’, 여기서 홀로 생활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 어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특히 그 한적한 곳에 거액을 투자해서 마련한 집이 앞으로 팔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오히려 한국 사람들의 사고에 문제가 있다고 꼬집는다. 한국 사람들은 집을 교환가치로만 보지 사용가치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은 집을 매매하는 재테크용으로 여길 뿐 내가 그 집을 사용하면서 얻는 행복에 대해선 고려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불행이다. 김 교수는 이렇듯 여러모로 타인과 대비되게 ‘삐딱한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필자가 김 교수를 좋아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2    일부 한국방송들이 탈북자 '애송이'를 잘못 키웠다 댓글:  조회:1791  추천:5  2019-08-30
한국방송들이 탈북자 ‘애송이’를 잘못 키웠다 강을 건너고 뗏목 버리는 탈북자들 요즘 탈북자인 한송이인지 두송이인지 하는 한국방송들에 출연해 꼴깝 떠는 ‘애송이’가 아프리카방송에서 조선족을 ‘쓰레기’, ‘거지’라는 저질스런 막말을 퍼부어 조선족사회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한송이란 탈북자는 갓 약관을 벗은 ‘애송이’다 ‘애송이’이기 때문에 세상에 철들지 못해 그렇거니 하고 지나칠 수도 있겠으나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들끓는 가마솥처럼 조선족사회가 부글거리는 이유가 따로 있다. 탈북자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그 이듬해인 1995년부터인데 그때가 고난의 행군이 시작이다. 초기 탈북은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은 두만강유역에서 발생했다. 중국 측 화룡시와 용정시 강변 조선족마을에 왔던 것이다. 당시 탈북자들이 건너온 가장 큰 이유는 배고파서였다. 조선족마을들에서 같은 민족이라 불쌍해서 밥을 지어주면 정신없이 먹는데 난생 밥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 같았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에 들어선 이래 백성들이 배고품에 심하게 시달려 있었다. 연변에 친척 있는 북한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음식을 정신없이 많이 먹어서 연변에는 유행어가 하나 생겨났다. 많이 먹는 사람보고 ‘너 북에서 왔나?’라고 비웃는 것이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탈북자가 늘어나자 언제 들이 닥칠지 몰라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끔 조선족마을 아줌마들이 밥을 미리 푸짐하게 지어놓는 사례도 한둘이 아니었다. 인간세상이란 사람이 늘면 그 가운데는 못 마땅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배를 두드려가며 배 불리 먹었으면 고마움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고 밥을 먹으면서 여기저기 무슨 물건이 있나 살펴보고는 다음번에 와서는 주인이 없는 틈을 타 도둑질해간다. ‘얼마나 배고프고 가난하면 저럴까!’ 배신감이 들지만 처음에는 조선족마을들에서 이렇게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도둑질이 나날이 늘자 따라서 불만이 늘기 마련이었다. ‘ 배은망덕’ 길러준 개에게 발뒤꿈치 물린 기분이다. 그렇지만 찾아오면 여전히 밥을 주었고 옷을 주었고 집에 있는 대로 먹거리를 챙겨주었다. 마음씨 착한 조선족마을 아줌마들의 ‘죄’라면 같은 한 핏줄을 물고 난 동족인 것이 ‘죄’였다. 한편 두만강을 사이 두고 자리 잡은 연변조선족마을 사람들은 절대다수가 이북 출신이기 때문에 탈북자들이 아무리 못 마땅해도 도와주는 것을 마치 본분으로 여겨왔다. 탈북자들의 배은망덕은 그 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다수 탈북자들이 일단 중국에 오면 일차적으로 발을 딛는 곳은 연변이다. 만약 연변조선족이 아니면 그들이 발을 못 붙인다. 발을 붙인다는 것은 연변조선족들이 그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는 뜻이다. 연변조선족들이 탈북자를 불쌍해서 거두다가 일자리도 얻게 하고 처녀의 경우 자기 조카나 지인의 아들에게 소개해 결혼시키는 경우(중국과 북한은 국제결혼이 안 돼 불법으로 살고 있음)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이유가 무엇이든 모두 떠나서 어찌되었든 탈북자들이 일차적으로 연변조선족 덕분에 배부르게 먹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탈북자들이 배고품을 해결하고 나니 슬슬 다른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중후반에 중국에 온 탈북자들은 개별적으로 고위급을 제외하고는 중국에서 발붙일 생각에 골몰하였다면 2000년대 들어 탈북자들은 중국이 목적지가 아니라 중국을 경유지로 삼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한국에 가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쉽게 말하자면 탈북자들은 중국조선족을 이용하는 수단으로 여겼을 뿐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짓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한송이란 ‘애송이’가 말하는 조선족이 신고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웬만해선 조선족이 탈북자를 신고하지 않는데 탈북자가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를 때 참다가 도가 지나치면 신고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듯 자신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조선족을 신고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말 ‘애송이’의 철없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싶다.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조선족의 도움에 의해 잘 지내다가 한국에 갈 때면 경제상 함께 지내던 조선족들의 도움을 받는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하나원에서 교육 받고 안치금 받고 집도 배정받으면 한편으로 중국에 두고 온 자녀를 한국에 데려올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족 애 아빠도 함께 한국에 데려오는 수속을 밟는다. 그런데 젊은 탈북여성들이 한국에서 수개월 혹은 1~2년 지내다 보면 중국조선족남편이 몹시 촌스러워 보이고 매너가 좋은 한국남자에게 반해 조선족남편을 헌 신발 버리듯 버리는 작전을 벌인다. 필자가 10년 전 직접 상담한 사례를 여기서 소개하는데 독자들은 탈북여성에게 치를 떨 것이다. 즉 탈북여성이 초청해 입국한 조선족남편이 한국에 온 지 3일 만에 탈북여자가 경찰에 ‘우리는 위장결혼이요.’라고 신고했다. 당시 한국사법부문에서 위장결혼이라면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무조건 강제 추방하던 시절이다. 아니 둘 사이 애까지 있는데 위장결혼이라니! 수년 전 경기도에서 연속 두 차례 조선족남자가 탈북여성을 때려죽인 사건이 있었다. 이유가 어떻든 살인행위를 정당화 할 수 없고 정당화해서도 안 되지만 얼마나 열 받았으면 그런 최악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탈북여성들이 중국에 있을 때는 한심한 을이었다가 한국에 오면 한심한 갑이 되어 조선족남자에게 개무시하고 갑질한다. 이쯤 되면 비인간적인 배은망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탈북여성들이 조선족의 신세를 지고는 한국에 오면 강을 건넜으니 뗏목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주인의 발꿈치를 물어 뜯는 비인간이 되는 것이다. 얼마 전 탈북 모자가 아사한 사건이 있었다. ‘애송이’를 비롯해 이혼하고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남자 때문인 것처럼 떠들고 있는데 제발 이런 사건은 내놓고 떠들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반성했으면 한다. 현재 한국에 85만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 필자는 지금까지 굶어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취직하는데 있어서 탈북자라는 신분을 속이고 연변에서 왔다고 조선족행세를 하는 경우가 있다. 주인이 탈북자 채용을 꺼려서 속인다고 한다. 필자는 한국 땅에서 조선족이 취직할 때 ‘나는 북한에서 온 탈북자요.’라고 거짓 신분을 말하는 사례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쪽이 취직에 유리한가? 편지의 문안처럼 너무나도 뻔한 일이다. ‘애송이’의 말대로 조선족이 쓰레기, 거지라면 왜 그 위대하신 탈북자들이 ‘쓰레기’나 ‘거지’같은 조선족 신분으로 위장할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볼품없는 일개 탈북 ‘애송이’가 이토록 날뛰고 있는 데는 한국방송들이 책임이 있다고 본다. 스무 살도 안 된 ‘애송이’를 여기저기 방송에서 스타처럼 키워놓아 눈에 뵈는 게 없이 설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방송들에서 ‘애송이’의 방송출연을 금지시키기를 청원한다. 물론 이 글에서 든 사례들은 개별 탈북자의 일이지 전체 탈북자를 매도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여느 사회도 마찬가지이듯이 다수 탈북자들은 착실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성품이나 인품도 좋다. 조선족사회와도 우호적인 탈북자가 많다. 필자가 주최한 ‘多가치포럼’ 토론회도 탈북여성을 패널로 초청한 사례도 있다. 조선족사회도 만찬가지로 탈북여성을 인신매매하거나 자기 요구에 거역하면 사지로 몬 사례도 있다. 하지만 한 사회를 향해 상욕을 퍼 붙는 행위는 자제해야 한다. 만약 ‘쓰레기’ ‘거지’라고 막말한다면 조선족이 탈북자들을 향해 할 수 있는 근거가 차고 넘치는데 거꾸로 탈북자가 조선족을 향해 이런 막말로 욕을 해대니 정말 어처구니없어 그냥 넘어가려고 생각하다가 기왕 일이 불거졌으니 한국방송들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1    14. 炎黃交流(황제와 소녀 연재) 댓글:  조회:3688  추천:0  2012-04-17
14. 炎黃交流: 염황교류 소녀, 늘어나고 줄어드는 비결을 익히다 뛰는 자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 헌원이 곤륜산에 있을 때 발명의 천재로 왕모와 만백성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독차지하면서 자부심 가득히 살아왔다. 헌데 이 중원에 와보니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너무나 많다. 우선 신농씨의 각종 발명이 헌원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이 낯설고 물선 고장에 와서 정착하려면 주변의 큰 인물들과 타협하며 잘 지내야 했다. 더욱이 장차 큰일을 도모하려면 머리 숙여 우수한 자들을 찾아다니며 겸허하게 배워야 했다. 신농씨는 헌원보다 수십 년이나 앞서 봄을 맞고 가을을 보낸 선배이다. 그의 어머니 강씨가 신룡(神龍)에게서 영감을 얻어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천재 신농씨다. 그는 천지의 도를 알고 인성에 밝아 천하를 얻게 되었다. 불을 지펴 음식을 해먹는 법을 발견하였고, 백초(百草)를 맛보아 약초를 찾아내 치병(治病)하고,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었으며, 팔괘(八卦)를 겹쳐 64효(六十四爻)의 점을 보는 점술을 고안해냈고, 정오의 해를 기준하여 한나절 저자를 세워 사람들에게 교역을 가르쳤다. 사람들이 나물 먹고 물 마시며, 나무 열매를 따먹고 소라와 조개 따위의 고기를 먹고 살았었는데, 그는 인간이 갈수록 불어나 그것으로는 먹고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오곡 심는 것을 가르치고 보습과 호미를 만들어 풀밭을 개간해 오곡이 흥성하게 했다. 중원에는 크고 작은 평야가 많다. 잘 개간하면 농경의 원천이 무궁무진하다. 장차 천하의 중심이 되기에 손색이 전혀 없는 훌륭한 고장이다. 하지만 중원은 마시는 물이 큰 문제다. 곤륜산은 산수가 천하제일로서 어느 강이든 개울물이든 계곡물이든 호수물이든 마음놓고 마셔도 전혀 탈이 없었다. 허나 중원은 모래가 섞인 물과 짙은 황토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은 수질이 아주 나빠 사람들이 여러 가지 병마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헌원이 이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시름 놓고 물을 마시게 할까? 아무리 궁리를 쥐어짜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신농씨를 찾아갔다. 신농씨는 인신우수의 형상이라 조금 미욱하고 어색하게 보이나 천성이 해박하여 무릇 찾아오는 손님이면 전부 환대했다. 헌원이 동방삭에게서 배운 인사법인 절을 넓죽 올렸다. “자네 명성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네. 젊은 사람으로서 많은 일들을 해냈더군.” 신농씨의 칭찬에 헌원이 송구스러웠다. “선배님의 업적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죠.” “아닐세. 내가 발명한 것과 자네가 발명한 것들은 사람들에게 모두 유익한 것이므로 우열을 따질 필요가 전혀 없네. 나의 수하에 있는 무리나 자네 수하에 있는 무리는 모두 인간일세. 그러므로 이 고장에 갓 발을 붙인 자네에게 무슨 곤란이 있으면 기꺼이 돕겠네.” 헌원이 수질이 나쁜 물 문제를 제기했다. “요즈음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네. 자넨 참으로 운이 좋은 사나이라네. 내가 얼마 전에 시름 놓고 마실 수 있는 물을 발견했다네.” 세상 이치는 묘한 것이어서 인간이 마음먹고 달려드는 일은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우연찮은 기회에 해결되는 일도 있다. 신농씨가 인간에게 이로운 약초와 식량을 찾기 위해 백 가지 풀을 시험 삼아 먹는 중이었다. 그는 오장육부와 12경락을 볼 수 있어 그 풀의 약성을 알 수 있는 장서(獐鼠: 노루와 쥐)를 데리고 다녔다. 하루는 장서가 파두(巴豆: 독성이 있는 콩)를 먹고 설사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장서를 푸른 잎을 가진 한 그루의 나무 밑에 두고 밤을 보냈는데 밤새 장서는 푸른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먹고 해독되어 다음날 기적적으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신기하게 여긴 신농씨는 이파리를 따 맛을 보았는데 그 맛이 매끄럽고 단맛이 나며 향기로워 갈증이 멎고 순간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밝아졌다. 그는 인간에게 이로울 것이라 생각하여 사람들에게 이 나무를 심어 가꾸도록 가르쳤는데, 그 나무가 바로 차나무이다. 신농씨가 직접 솥에 불을 지펴 물을 끓였는데 하인의 부주의로 찻잎이 솥에 떨어졌다. 차가 삶아진 물을 마셔보니 실로 맛이 향기롭고 부드러워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상쾌했다. “중원의 대부분은 수질이 나빠 사람들이 목 부위에 혹이 나고(갑상선 항진), 손과 발이 붓고(토질병), 만성설사에 시달리는 등 고통이 심하다네. 그래서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 마침 차를 끓여 마시는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차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네. 가령 차가 없으면 맹물만을 끓여 마셔도 나쁜 수질 때문에 걸리는 여러 가지 병을 피면할 수 있어 건강이 보장될 걸세.” “참으로 묘안입니다. 소인의 무리가 물 좋은 곤륜산에서 살다가 이 고장에 오니 수토가 맞지 않아, 특히 물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스승님 덕분에 저의 무리도 이젠 건강하게 지낼 수 있게 되어 삼가 감사를 올리나이다.” 곤륜산은 산간지대로서 산림이 빼곡히 우거지고 계곡이 많아 곡식을 심어먹을 땅이 극히 적다. 덩치 큰 아낙의 엉덩짝만한 황무지마저 흔치 않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육식과 초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농사법이 곤륜산에 전파되었으나 좁은 땅 때문에 크게 진전이 없었다. 그때 헌원이 발명한 농기구가 곡괭이와 괭이, 삽이다. 그 덕분에 곤륜산의 엉덩짝만한 토지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반면 중원은 몇날며칠을 가도가도 황무지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엄청난 황무지들은 인간이 개간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밭을 갈고 논을 만들 때 신농씨는 보습을 만들어 말이나 소가 끌게 하고 잡초는 호미로 해결을 보았다. 헌원이 신농씨의 보습과 호미를 받아들이고 신농씨는 헌원의 곡괭이와 괭이, 삽을 받아들여 농경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아소가 보습으로 밭과 논을 갈아대는 정경을 목격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판 사람들의 가슴이 우리 산속에 있던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넓고 크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산이든 벌판이든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거기서 거기네요.” 아소가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생글생글 웃었다. 헌원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건 무슨 소리요?” “호호, 당신이 쟁기를 발명한 것은 사내가 여자의 몸을 파헤치면 아기가 생산되는 원리에 의해 생겨난 발상이었죠.” “하하, 신농 선배가 만든 보습도 역시 사내가 여자를 개간하는 원리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오.” “맞아요. 그런데 보습의 위력이 쟁기보다 훨씬 굉장하네요.” 그 말에 헌원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소가 계속 이야기했다. “이 중원은 땅이 넓은 만큼 오곡을 비롯해 많은 작물의 재배가 가능하네요. 땅은 곳곳에 따라 그 질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땅에 무슨 곡식을 심고 무슨 야채를 재배하면 생산효율이 달라질 것이니 관찰이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헌원은 아소가 훌륭한 참모가 되어주어 마음이 든든했다. “토지의 성분 구조를 잘 파악해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듯이 사내가 여자와 교합하고자 하면 반드시 여자의 생리구조를 똑똑히 알아야 원만하게 치를 수 있답니다.” 여자의 성기는 외성기관과 내성기관으로 나눈다. 외성기관으로서는 음부(陰阜), 대음순, 음핵, 음전정(陰前庭)과 처녀막이다. 음부는 작은 배 아래 있다. 외음부의 위쪽은 피하지방이 비교적 많다. 작은 언덕처럼 부풀어 일어나고 음모가 떼를 지어 자란다. 근육 아래에 음골(陰骨)이 있는데 교합 시에 사내의 힘을 받는 지탱점이 된다. 대음순은 외음호이며 좌우로 대칭해 있고 비대하며 융기되어 있다. 피부엔 첩피(褶被: 겉옷 주름)가 있고 피하지방이 풍부하여 음모가 무성하게 자란다. 대음순이 양물의 자극을 받거나 혹은 압박을 받으면 성욕이 생기는데 그 쾌락 정도는 비교적 낮다. 소음순은 대음순 안쪽에 바짝 붙어 있다. 양쪽은 작은 꽃잎 모양의 추부(皱腑)이며 음모가 나지 않는다. 처녀 시에는 담색이 나타나며 성경험과 분만을 겪은 후의 추부색은 점점 진하여 암조(暗鳥)가 된다. 좌우 양 꽃잎의 소음순은 위쪽으로 붙어 둘러싸고 있는 음핵에 연접되어 있다. 아래쪽은 음도 입구에 연접되어 있다. 여기에 매우 많은 지각신경이 빽빽하게 분포되어 있어 성적 자극에 굉장히 민감하다. 전정은 이 소음순을 포위하고 있는 배 밑창의 비좁은 부분처럼 하반부에 질의 입구가 있다. 그 사이에 음핵과 회음의 두 개의 성감대가 있다. 회음과 항문 사이도 매우 중요한 성감대이며 수음 시 요도를 이용한다. 처녀막은 질의 입구를 가린다. 탄력적인 점막성(粘膜性)의 박막(薄膜)이 있다. 비록 처녀라도 모두 그 질 입구에 손가락 하나 크기의 엉성한 빈틈이 있어 월경을 모아 배출한다. 질 옆의 선관(腺管)과 대전정선(大前庭腺)은 요도구의 양쪽에 하나씩 대칭해 있다. 흥분자극에 당면했을 때 소음순이 열리며 투명하고 무미한 점액을 분비한다. 일반적으로 양물이 삽입되는 깊이는 여자의 생리구조와 우연하게 맞아떨어진다. 때문에 질이 양물의 자극을 받으면 곧 강박적으로 확장되며 아울러 저도 모르게 수축 동작이 일어난다. 질관(窒官) 외부의 1/3 부위는 수축력이 특별히 강해 양물을 팽팽하게 압박한다. 사내로 하여금 매우 유쾌함을 느끼게 하고 짜릿한 사정을 이끌어낸다. 중원은 산이 적고 평야가 많다. 간혹 산이 있긴 하지만 가물에 콩 나듯 드물고 고도가 높지 않고 산세가 험악하지도 않다. 이런 산형을 보통 여성성산이라 했다. 산이 낮고 세가 험악하지 않으니 계곡도 가파르지 못하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람들의 성격이 비교적 온화하고 부드럽다. 개명수와 우둘처럼 우락부락하고 왈가닥거리는 사나이가 아주 드물다. 우두머리인 신농씨도 헌원과 성격이 전혀 다르게 아주 지적이다. 거꾸로 고도가 높은 산에 계곡이 가파르고 하늘을 찌르는 수림이 빼곡하고 아홉 굽이를 흐르는 험한 폭포수와 낙차가 심한 강물이 있는 곤륜산의 사람들은 성격이 매우 남성적이다. 옥녀도 이런 자연환경 탓으로 대외적으로 살벌한 여인으로 알려졌다. 사내들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사나이답다. 신농씨가 비록 여러 가지 발명으로 명성을 떨치고 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긴 하지만 헌원처럼 사나이다운 통솔력이 부족하다. 신농씨는 비록 능력이 출중하나 아직도 여인네들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원에서는 우두머리가 병사를 이끌고 타 부족을 공략해 땅을 차지하면 자기네 소유라는 표식을 세운다. 경계에 도랑을 파고 가운데에는 큰 움을 파놓는다. 헌원의 눈에 그 도랑과 움은 암컷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저 움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오?” 헌원이 아소에게 물었다. “호호,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이곳은 아직도 여자 중심 사회에 머물러 있으니 그 징표들도 전부 암컷을 상징하는 것들로 되어 있지 않겠어요.” 아소는 그 징표들을 보고 여성의 자부심을 갖는 데 비해 헌원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우선 도랑과 움은 암컷의 음부가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이 먼 곳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땅의 경계가 한눈에 드러나지 못하고 중심이 어딘지도 일목요연하지 않다. 헌원이 그 문제로 신농씨를 찾아갔다. “스승님, 소인은 이곳 중원에 여러모로 크게 매력을 갖고 있지만 어떤 것들은 눈에 거슬립니다.” “거슬리는 것이 중대한 것이라면 나와 논의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차차 적응하면서 해결해 나가면 되네.” “소인이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사내들의 문제입니다. 물론 사내의 문제는 자연히 여자와도 관련이 있지요. 땅의 경계와 중심의 표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동방삭 스승을 통해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자넨 남근을 힘의 원리로 지나치게 밀어붙여 왕모와 갈등이 생겨 곤륜산을 떠나게 되었다고 하더구먼.” “그건 소인의 본의와 다르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곳 중원은 농경이 발전함에 따라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내들의 목소리가 높아가는 추세이나 아직도 여인들의 천하일세. 그러니 당연히 인간의 삶에 중요한 땅의 경계 표시도 도랑과 움으로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네.” “그 상황을 개변시키지 않으면 영원히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농씨가 헌원의 두꺼비 같은 손을 굳게 잡았다. “그렇다면 이방인인 자네가 나서 실천해보게나.” 헌원은 황릉 산꼭대기에 남근의 상징인 소도(蘇塗)를 세우고 이곳저곳에 역시 남근의 상징인 깃발을 꽂았다. 땅의 경계를 알리는 표식으로는 나무말뚝을 박았다. 말뚝도 두말할 것 없이 남근의 상징이다. 새로운 땅을 넓히면 그곳에 말뚝을 박고 한가운데에 중원 사람들이 상서로운 나무로 여기는 뽕나무를 세워놓았다. 중원 사람들은 중심에 파놓은 움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있었다. 헌원이 이런 전통풍습을 타파하고 뽕나무를 세운 곳에 모여 제사를 올리게 만들었다. 제사 장소는 똑같았으나 상징물이 달랐다. 부족민들은 흙을 쌓아놓고 ‘사(社)’라 부르며 제사를 올렸다. 헌원이 문자 만들기에 열심인 창힐(倉頡)을 불러 구경하게 하고 글자를 만들라 명했더니 그가 샤머니즘의 의미가 짙은 볼 ‘시(示)’에 흙 ‘토(土)’를 합쳐 ‘社’란 문자를 지어냈다. 처음엔 허허벌판에 나무를 세워놓는 것에서 시작해 헌원이 중원에 지상가옥 짓기를 전파한 이후로 제사를 올리는 곳에 사당을 지었다. 사당에는 부족의 최초 족장을 모셨는데 시체는 썩어 사라져버렸기에 다른 상징물로 대체했다. 그 상징물이 바로 족장의 남근 모형물이다. 남근 모형물은 부족들의 토템 동물의 뼈를 깎아 만들고 길이는 1자 2치이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성을 금기시하는 인습이 생겨 남근 모형물이 위패로 바뀌었다. 여성 상위사회였던 중원이 헌원의 남근을 상징하는 말뚝, 깃발, 지상가옥 및 사당 등에 의해 점차 하늘과 땅이 뒤바뀌어 사내 상위시대를 맞게 되었다. 한편 기나긴 난륜과 군혼시대를 거친 인류가 복희씨와 여와가 창안한 가취제도에 의해 혼인법이 생겨나 남과 여의 사회질서가 정립되어 가고 있었으나 그 과정이 대단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신농씨는 헌원이 아소와 지극히 친근한 모습을 보고 부러워 감탄했다. “하늘이 내린 한 쌍의 원앙이로구먼. 언제 혼인식을 치렀는가?” 헌원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혼인식이라니요?” “하하, 이곳 중원은 저 동방에 계시는 복희씨와 여와 부부의 선례에 따라 남녀가 혼인을 맺고 식을 거행한다네. 그렇게 되면 공식적인 부부가 되지. 혼인법에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복희씨를 찾아가 물어보게나.” 헌원과 아소는 비록 혼인하지는 않았으나 어렴풋이 그 뜻을 알고는 있었다. “호호, 혼인이라. 우리 둘 사이는 이미 혼인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하. 하긴 그렇소.”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붙어살면 그만이지 굳이 혼인을 해야 하나? 이것이 아소의 생각이다. 곤륜산은 남녀가 내것 네것 없이 눈이 맞으면 자유분방하게 교합을 하면 그만이었다. 아기가 생기면 여자들이 키우면 되었다. 굳이 혼인이란 법이 없이도 사람들은 잘만 살아갔다. 그런데 이곳 중원은 다르다. 물론 아직도 세도가 있는 여인네들은 여러 사내를 끼고 살고, 권세가 있고 재물이 있는 사내들 역시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혼인법도 공평하지 못하다 할 수 있었다. 신농씨는 여러 여자와 혼인하여 살고 있었다. 만약 헌원이 중원의 혼인법을 받아들인다면 아소 한 여자와만 결혼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아소는 사내를 꽉 움켜잡을 비법 연마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꿈결에 상아가 나타나 사내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비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동안 이 비법을 써먹지 않았다. 새파란 젊은 여인이, 게다가 천하일색인 소녀가 그 비법을 쓰지 않아도 헌원이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허나 혼인법을 받아들이면 말이 달라진다. 여러 부인을 만나면 그 가운데 화용월모(花容月貌)의 자색이 뛰어난 계집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사내는 갈대의 순정이 되어 마음이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소의 신조는 ‘사내란 여인 하기 나름이다’였다. 아소는 수탉이 홰를 치고 참새가 먹이를 찾아 지저귀는 이른 아침에 기상하여 뒷동산의 약수터를 찾았다. 마을 북쪽에 참나무, 잣나무, 싸리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바위산에 올랐다. 산 남쪽에 이백 길 되는 절벽이 있고 산 밑에 샘물이 흘렀다. 바위틈에 마치 여인의 작은 고추(음핵)처럼 생긴 돌이 있고 그 양쪽으로 샘물이 흐른다. 여인이 오줌을 싸는 모습과 흡사했다. 새벽녘의 샘물은 손발을 담그면 무척이나 차갑다. 한 모금 마시면 이가 얼어들고 배꼽에 얼음이 낀다. 그녀는 그 찬물에 음부를 담그었다. 얼음 같은 샘물에 산천어가 노닐었다. 옆으로 납작한 몸, 위턱은 눈 아래로 휘어져 내려와 뒤 끝은 눈 뒤를 지나고 위턱은 아래턱보다 약간 앞으로 튀어나왔고, 악골, 구개골, 혀에는 날카로운 이가 한 줄 혹은 두 줄로 배열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산천어들이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아소의 음부에 입을 맞추었다. 얼어들던 소녀의 음부는 온기를 느꼈고 산천어가 친구가 되어 참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수에 음부를 담그었다. 음부를 얼음 같은 찬물에 담그면 수축되고 뜨거운 물에 담그면 팽창된다. 동시에 곡도를 조이는 연습도 병행했다. 이렇게 수축과 팽창 연습을 매일 거르지 않고 석 달 열흘 동안 지속하면 음부에 강력한 힘이 생겨 팔뚝 두께의 박달나무 가지도 꺾을 수 있다. 헌원이 복희씨를 방문하기로 결정한 날 밤에 아소와 치열한 정사를 한바탕 치렀다. 남녀가 수십 번이나 천국과 지옥을 오간 다음에 절정에 이르렀다. 아소는 헌원이 파정(사정)하려는 낌새를 채고 음부에 힘을 쏟아 부었다. 헌원은 보물이 잘려나가는 느낌에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통증에서 오는 비명이 아니라 이상야릇한 번개가 양물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양물은 호수 안에서 포로가 되어 얌전해졌다. 그 이상야릇한 짜릿함의 여운이 오랫동안 떠나지 않고 헌원의 몸을 감돌았다. 헌원은 아소와 헤아릴 수 없이 정사를 치러왔지만 오늘 같은 짜릿함의 극치는 처음 맛보았다. 천하제일의 사나이가 소녀 앞에서 한 마리의 온순한 양이 되어버렸다. 아소에게서 시작된 음문 수축 기교는 수천 년 동안 후대에 전해져왔다. 황제의 궁녀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 기교를 연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夏)나라 말기에 걸왕을 망하게 한 매희, 은나라 주왕을 망하게 한 달기, 주나라를 망하게 한 포사는 물론이고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바친 서시, 한나라 때 흉노에 보내진 왕소군, 삼국 쟁투시기 여포의 여자 초선, 당 현종을 오금 못 쓰게 만든 양귀비, 서문경의 뼛속을 녹인 반금련 등의 미녀들이 비단 외모만 특출 나게 예뻤던 것이 아니라 교합 기교 역시 일품이었다. 그러므로 현대의 여성들도 이 기교를 익혀 아름다운 사랑을 누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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