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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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차이나타운이 왜 형성되나? 댓글:  조회:8640  추천:46  2011-05-13
차이나타운이 왜 형성되나? 인류문명은 그 형성토대와 특징 및 성격에 따라 나눔법이 각양각색이다. 필자는 기왕의 인류문명의 나눔법에 없는 발상을 해보았는데, 즉 두뇌문명과 정의문명(맘의 문명과 동일한 의미)으로 나눠본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뇌와 맘의 씀씀이가 모두 필요한 것이나 두뇌 중심을 위주로 삶을 영위하느냐, 아니면 맘의 중심을 위주로 삶을 영위하느냐에 따라 두뇌문명과 정의문명이 생겨난다. 따라서 두뇌문명이 주로 기독교문화권이라면 정의문명은 주로 유교문화권으로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인류역사는 각양각색의 문명에 의해 이합집산이 생겨났지만 그 문명에 따라 나타나는 표현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유목문화에 의해 생겨난 두뇌문명의 소유자인 서양인과 유태인 등은 이주에 직면해서 자기 문화를 지키면서도 타자세계에 쉽게 적응하고 융합된다. 이와 반대로 농경문화에 의해 생겨난 정의문명(유교문화권을 지칭함)의 소유자인 중국인과 한국인은 이주에 직면하면 타자세계와의 적응이 어렵고 녹아들지 못해 토착인과 마치 물과 기름처럼 분리현상이 극명하여 어울리지 못한다. 이른바 현대문명의 본산지인 미국의 실례를 보면 두뇌문명의 소유자인 다문화집단이 모여 오늘의 미국을 이뤄냈다. 이 두뇌문명의 다문화집단에 정의문명의 소유자인 동양의 중국인과 한국인이 진출하면 그 세계에 적응이 어렵고 쉽게 녹아들지 못해 자기네끼리 뭉치는 이른바 차이나타운과 한인타운을 형성하고 삶을 영위한다. 미국에 일본인이 적지 않지만 그들은 같은 유교문화와 한자를 공유해온 중국인과 한국인에 비해 정이 약하기 때문에 타자세계에서 자기네끼리 뭉치는 현상이 차하다. 그런고로 미국에서 저팬타운이 차이나타운과 한인타운에 비해 흥성하지 못하다. 중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정이 많고 한국인이 중국인에 비해 정이 더 많다. 필자는 우리민족을 정의민족이라 부르고 싶다. 미국에서의 차이나타운과 한인타운이 각자 자기네 민족전통문화를 그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반대로 타운이 흥성하면 흥성할수록 중국인과 한인이 그 사회 속에서 고립적인 삶을 보내는 역작용도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의문명이 농후하면 농후할수록 자기네 울타리 안에서는 정이 넘치고 있으나 타자세계에 대한 배척도가 강하다. 현재 한국에서의 차이나타운은 엄밀히 말하자면 인천의 차이나타운이 진짜 중국인(노화교와 신화교를 포함)을 대표하는 타운이고 가리봉과 대림 같은 차이나타운은 엄밀히 말하면 조선족타운이다. 그렇지만 형성초기에 조선족의 존재는 중국이란 나라와 밀착성이 강해 그냥 차이나타운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한국에서의 조선족타운은 조선족이 정이 많기 때문에 타향에서 자기네끼리 뭉치기 좋아하는데서 쉽게 형성되고 쉽게 흥성해졌다. 유감스런 것은 조선족의 정의문명이 타자세계를 대하는 맘의 씀씀이가 아주 인색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족이 한국사회에 쉽게 녹아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진단해본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9호
65    한국아이를 중국아이로 만들려하다니 댓글:  조회:7870  추천:48  2011-04-29
한국아이를 중국아이로 만들려하다니 중국 흑룡강성에서 온 김모 여인(38세)은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하여 자녀 둘을 낳고 사는 데 요즘 그의 한국인자녀가 중국아이로 전락될 위기에 몰려 가슴을 동동 구르고 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김모 여인은 1998년 유학생비자로 한국에 입국하였는데 유학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하였다. 여기저기 직장을 찾아 취직하던 중 2001년 3월경 한국인 정모(39세)를 사귀게 되었다. 둘은 처녀총각신분으로 결혼을 염두에 두고 동거에 들어갔다. 2002년 5월 아들애를 낳았으나 불법체류신분이라 혼인신고도 못하고 있어 아이를 남편의 친척호적에 올렸다. 2004년 6월 또 둘째를 출산했으나 여전히 체류신분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남편의 친척호적에 올렸다. 한국아이를 둘씩 낳았지만 불법체류신분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그녀에게 봄이 왔다. 자진신고로 중국에 출국하면 벌금도 없고 입국규제도 면제되고 한국인배우자 혹은 친척초청으로 재입국이 가능하다는 법무부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한국에서 먼저 혼인신고 하고 결혼식까지 거행하고 나서 가벼운 맘으로 중국에 귀국했다. 김모 여인이 귀국한 후 남편이 아내의 초청편리와 앞으로 안정된 가정을 위해 두 자녀를 유전자검사를 통해 자신의 호적에 자녀로 등록을 마쳤다. 이듬해 아내도 두 자녀와 유전자검사를 거쳐 생각대로 무사히 결혼비자를 발급받아 재입국하게 되어 가족이 안정되고 단란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인배우자와 결혼한 외국인배우자는 한국에서 실제 체류가 만2년이 넘으면 국적 혹은 영주권 취득신청자격을 부여받는다. 자녀 둘이나 낳고 사는 김모 여인은 귀화신청서류를 작성해 갖고 당당하게 남편과 동행하여 출입국을 방문했다. 들뜬 심정을 안고 출입국을 찾았던 부부는 서류를 검토하던 직원의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에 청정한 날씨에 난데없는 날벼락을 맞았다. 출입국직원이 귀화신청서류접수를 거부하면서 왈, “불법체류신분으로 자녀를 낳았고 호적을 타인 앞으로 올렸다가 찾았기 때문에 자녀를 중국에 보냈다가 아버지가 다시 초청해서 한국에 데려오라. 그때 가서 귀화신청이 접수가 가능하다.” 자녀 둘은 한국에서 출생했고 비록 호적을 타인 앞으로 올렸으나 어찌되었든 한국아이다. 만약 두 자녀를 중국에 보낸다면 한국국적을 취소하고 중국국적으로 변경한 다음 초청으로 한국에 데려와 다시 한국국적을 회복해야 한다. 일제 때 만주 땅에 갔다가 한중수교 이후 일세들이 고국에 돌아와 한국국적을 회복하는 그런 모양새도 아니고, 한국에서 출생하고 한국국적인 아이들을 한국국적을 버리게 만들고 중국국적으로 내몰려는 출입국직원의 행위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처사이다. 대한민국은 저출산국가로서 정부에서 이런저런 다출산정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를 대변하는 관공서 직원이 한국아이를 중국아이로 내몰다니? 중국동포타운신문 198호
64    차이나타운의 利와 弊 댓글:  조회:7533  추천:41  2011-04-29
차이나타운의 이(利)와 폐(弊) 기회연재 1. 차이나타운의 이와 폐               2. 차이나타운이 왜 형성되나?               3. 차이나타운이 한국인에게 미치는 영향               4. 차이나타운이 조선족에게 미치는 영향 인류역사에서 이주문화가 생겨난 이래 이주민들은 민족문화(里制文化:원시적 마을문화)를 바탕으로 집거지를 형성하고 생활을 영위해왔으며, 그 집거지를 영어로 ‘타운(TOWN)’이라 한다. 중국에서의 우리민족의 경우 연변을 조선인타운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물론 산재지구 조선족마을도 소형의 타운으로 인정된다). 중국 땅에서 조선인은 타운을 이루고 한반도의 민족문화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생활을 영위해왔다. 이러한 흐름은 민족문화 향수 속에서 편한 삶을 살아가는 자부심이 있는 반면, 타자(중국인사회) 속에서의 적응을 어렵게 만들고 타자세계에 녹아들지 못해 소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폐단도 있다. 한편 아무리 타운을 형성하고 선조들의 민족문화를 고수하면서 살아왔지만 필경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거주국의 문화, 사상, 이념에 물들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결국 조선족은 한국인과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집단으로 구분된다.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은 1990년대 중반부터 그 수가 급증함에 따라 서울 가리봉동, 독산동, 구로동, 대림동, 안산, 안양 등 곳에서 60·70년대 한국산업화시대 공돌이 공순이들이 살다 빠져나간 빈 쪽방들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따라서 차이나타운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한국 땅 차이나타운을 살펴보면 먼저 중국음식점이 생겨나고 따라서 고향식품을 판매하는 중국식품가게들이 즐비하게 생겨났다. 이국땅에서 고향음식을 먹을 수 있고 고향식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애국주의란 듣기엔 거창한 것이나 따지고 보면 개개인이 어릴 적 먹던 음식기호를 지켜내려는데 불과하다.” 중국인 석학 임어당의 명언이다. 이국땅에서 고향음식과 고향식품을 제공하는 차이나타운은 조선족에게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차이나타운이 더욱 흥성해진다. 한국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혹독한 고독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다가 차이나타운에서 친척, 친구, 동창들과 만나 고향음식을 먹으면서 회포를 푸는 것 또한 크나큰 희열이며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차이나타운은 고향 같은 분위기가 짙어 조선족에겐 이국땅에서 새로운 안식처가 되는 이점이 있는 반면에 다음과 같은 폐단도 있다. 우선 가리봉동과 같은 차이나타운에 들어서면 길옆 가게간판이며 다니는 사람들 및 익숙한 조선어와 중국어가 쏴라쏴라 쏟아져 나온다. 한국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중국연길의 한 골목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중국음식점들에 가면 손님전체가 중국인(조선족과 한족) 일색이다. 음식 먹으며 큰소리로 요란하게 떠들썩하는 분위기는 연길의 여느 음식점과 똑 같다. 하다못해 두 세상 손님이 있어도 동네가 떠들썩하게 요란하다. 조용한 한국음식점의 분위기는 상상도 못한다. 술에 취하면 자기네끼리 싸우고, 옆 손님과 걸고들며 싸우고, 모를 사람이 마주봐도 싸우고, 주인이 서비스 요리를 올리지 않는다고 싸우고, 너무 요란해 서빙아가씨가 듣지 못하면 간나새끼라고 싸우고, 외상놀음 하자고 싸우고, 계산할 때 꼬리를 떼라고 싸우고, 하여튼 싸움이 빈번하다. 한밤중의 호프집들의 싸움은 쩍하면 병으로 컵으로 칼로 치고 찌르고 피터지고 쓰러지고 영 말이 아니다. 주말이면 가리봉시장 골목은 조선족 주정배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다. 가리봉삼거리 신호등은 저녁이면 있으나마나다. 여느 중국의 도시 신호등과 똑 같이 지키지 않고 무단횡보 한다. 차이나타운에 사는 조선족의 가장 큰 폐단은 자기네끼리 얽히고설키고 중국에서의 생활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월이 길어지면 결국 한국이란 나라에서 살면서도 불구하고 한국인 속에 들어가지 못해 한국의 선진문화를 흡수하지 못하여 한국인과의 벽이 점점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폐단이 결과적으로 조선족이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살아도 한국인으로부터 소외당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요인이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주민은 타자세계에 적응하는 자는 성공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실패한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진단이다. 차이나타운의 이와 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63    영주권자 친척초청 혼란스럽다 댓글:  조회:8355  추천:50  2011-04-15
영주권자 친척초청 혼란스럽다.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하여 살고 있는 자, 한국인배우자의 귀책사유로 이혼한 자 및 결혼으로 국적취득한 자의 자녀는 2년 전만해도 국적취득자격만 부여되었다. 한국국적 취득자는 친척초청이 가능하고 미국이나 일본 등 나라에 가는 것이 수월한 등 이점이 있는 동시에 폐단도 있다. 중국 측의 퇴직금과 양로보험 혜택을 포기해야 하고 부동산 매매도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 한국정부 입장에선 국적취득자가 많이 증가되면 될수록 그만큼 정부부담이 증가된다. 이런 폐단을 최소화하여 누이 좋고 매부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곧 국적취득을 줄이고 대신 영주권취득을 증가하는 것이다. 영주권취득자도 초기엔 친인척초청이 가능했다. 기술연수교육정책이 실시된 이후로 피초청자는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기술연수이수과정을 거쳐 D-4→H-2로 변경할 수 있었다. 초청할 수 있는 비자종류는 F-5-E, F-5-7이며 한국인배우자와 혼인하여 영주권을 취득한 자들은 F-5-B 혹은 이혼자의 다수가 F-5를 발급받는다. 2011년 11월부터 출입국관리법 시행령이 개정되어 영주권자격을 취득한 재외동포도 국적취득자와 동일하게 친족을 방문취업(H-2)자격으로 초청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건은 초청자가 30주세 이상이고 피초청자는 25주세 이상일 경우는 방문취업(H-2)비자로 초청된다. 그런데 현재는 결혼으로 영주권을 취득한 자는 친인척초청이 불가능해졌다. 초청할 수 있는 비자종류는 F-5-E, F-5-7인데 결혼자는 현재 F-5-B로서 초청자체가 안 되고 이혼자는 다수 F-5로 제한되어 있어 배우자(재혼)초청만 가능할 뿐 기타 친인척초청은 불가능하다. 결혼자가 한국체류 2년이 되어야 국적신청 혹은 영주권신청자격이 부여되고 신청일로부터 또 2년 내지 2년 반이 걸려 입국일자부터 계산하면 4년 내지 4년 반 걸리는데 비해 영주권은 체류 2년 후 신청일로부터 6~7개월, 전후 2년 반 정도 걸린다. 시간도 단축되고 친인척초청이 가능하여 국적보다 영주권취득신청자가 훨씬 많아졌다. 헌데 최근 들어 이들이 친인척초청을 할 수 없는 F-5를 다수 발급받으니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연길에서 온 황 정자(가명 39세) 씨는 4년 전 한국인과 결혼했고 1년 지나 아들애까지 낳고 잘 살고 있다. 2년 지나 국적취득조건이 되지만 한국 오기 전 중국에서 사회보험에 가입하여 10년 동안 납부해온 것을 포기하려니 아쉽고 또 본인의 명의로 된 아파트 한 채가 있어 국적취득신청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주권취득정책이 시행되어 중국 측의 사회보험도 살리고 아파트도 살릴 수 있고 하나뿐인 남동생의 초청이 된다고 하여 영주권을 발급받았다. 얼마 전 초청서류를 밟으려고 관련업체를 찾았더니 F-5-B비자여서 초청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정책이 바뀔 줄 알았으면 국적취득을 신청하지 왜 영주권을 선택했겠느냐면서 후회스럽다고 한다. 결혼으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영주권취득신청 혹은 국적취득한 자의 자녀가 영주권신청을 제출할 경우 초기엔 F-5-E 혹은 F-5-7로 발급받았었는데 현재는 F-5-B 혹은 F-5로 나온다. 이 네 종류의 비자는 어떤 구분이 있으며 무슨 기준에 의해 다르게 발급하고 있는지? 상기 사례와 비슷하게 지난 몇 년 동안의 법무부중국동포정책을 살펴보면 일관성이 없이 변경되는 경우가 많아 동포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7호
62    老子聖像단상 댓글:  조회:7132  추천:38  2011-04-02
노자성상(老子圣像) 단상 중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하·상·주 단대공정 거대 프로젝트가 가동된 이래 현재까지 중화민족시조와 중화문화조상을 깍듯이 모시고 있다. 우선 미국자유여신상 높이를 초과하는 黃帝성상(106미터)이 있고 이와 비슷하게 염제성상과 치우성상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삼조당(三祖堂)’건설 프로젝트다. 2010년에는 공부가(孔府家) 고향 곡부를 비롯해 지방 여러 곳에 모셔졌던 공자를 중국심장부 천안문광장에 성상으로 모셨다. 2011년 3월 18일 하남성 영보시 함곡관에서 노자성상 낙성의식을 가졌다. 노자성상은 높이 28미터, 무게 60톤, 총투자가 2588만 위안이 들었다고 한다. 노자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서 본명은 이이(李耳)이고 자는 담(聃)이며 하남성 고현(苦縣:지금의 鹿邑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이 아닌 함곡관에 성상을 세운 이유는 이렇다. 노자는 초나라 수장실사(守藏室史: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중앙도서관 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공자에게 예의를 가르칠 만큼 학문수준이 대단했다. 그런 그가 무너져가는 주나라정치에 불만을 품고 현세를 도피하여 서방으로 발길을 옮기던 중, 함곡관에서 후세에 지대한 영향력을 남긴《도덕경》을 집필했다. 또 함곡관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요충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노자성상을 세운 것은 군사문화와 노자문화를 일체(一體)로 아우르는 인문경구를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중국문화를 도교와 유교(불교가 유입되기 전의 토착적인 것) 양대 산맥으로 보고 있는데, 도교는 모계사회의 잔재문화이고 유교는 부권제를 확립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문화였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선 도교 후 유교이다. 중국학자들은 도교의 원조를 황제(黃帝)라 보고 한나라 때부터 황제와 노자를 묶어서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 불렀다. 또 한나라 때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교삼대계열서(황제·소문경, 황제·영추경, 황제·소녀경)는 모두 황제와의 문답체로 되어 있다. 중국의학은 도교에서 유래되었고 도교의 원조는 황제이며 노자는 황제 때부터 흘러온 ‘도학’을 재정비하여 도를 만물의 본체라 보았고 무위자연론을 주장했다. 맹자가 공자의 유지를 계승했다 하여 유학을 공맹지도라 부르듯이 장자가 노자의 뒤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노장학파’ ‘노장철학’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노장철학’의 핵심은 ‘무위자연론’이다. 한나라 초기 난세를 수습하는 치국방침이 곧 ‘무위자연론’이었고 당나라 초기에도 역시 ‘무위자연론’을 실시하여 태평성세를 이뤄냈다. 노자로부터 기원된 도교는 중국정치, 철학, 사상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예술, 기공, 무예, 의학, 과학, 방중술, 민속, 풍속에 이르기까지 도교를 근저로 형성되고 발전되어왔다. 임어당은 “중국인은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따르고 문화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남겼다. 노신은 “중국문화의 뿌리는 도교에 있다.”고 지적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노자는 공자 버금으로 추앙 받아 마땅하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6호
61    조선족과 혼인한 한족의 딱한 사정 댓글:  조회:8551  추천:51  2011-04-01
조선족과 혼인한 한족의 딱한 사정 중국은 예로부터 오족(五族:한족, 만족, 장족, 몽고족, 회족)단합을 추구했고 따라서 이민족간의 통혼이 비교적 잘 되어왔다. 그런 환경 속에서 조선족만이 한족과의 통혼을 강력하게 거부해왔다. 개혁개방 전까지 조선족이 가끔 한족과 연애하면 어른들은 자식이 아들놈일 경우 부모와의 관계를 끊으려면 맘대로 하라 을러메고 딸애의 경우 종아리를 부러뜨린다고 협박하기가 일쑤였고 가족분위기는 그야말로 마치 쓰나미에 휩쓸린 집처럼 엉망이었다. 같은 조선족끼리도 한족학교를 다닌 처녀(한족을 닮아 예의범절을 모른다는 의미)를 며느리로 맞는 것을 꺼릴 만큼 부모들이 한족과의 통혼에 기를 쓰고 반대해왔다. 조선족이 아주 드문 지방에 살던 부모들은 자녀가 한족과 혼인할 가봐 조선족집거지인 연변으로 이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이 전통집거지가 해체되고 안쪽진출과 대학가는 자가 많아짐에 따라 한족과의 혼인장벽이 무너져가기 시작했고 현재는 통혼 수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추세인 것 같다. 중국 땅에서 한족과 통혼한 부부는 민족풍속과 민족문화차이가 있으나 그럭저럭 어영부영 살아갈 수 있지만 현재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과 혼인한 한족들이 딱한 처지에 봉착하고 있다. 흑룡강성 밀산의 우모 여인(36세)은 조선족 김모(38세)씨와 혼인하여 아들애를 낳고 살다가 시아버님이 한국국적을 회복하고 초청에 의해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은 방문취업비자(H-2)를 받았고 아내는 한족이라 C-3단기비자를 받고 입국하였다. 한국에 온 후 남편은 2세로 귀화신청을 제출할 수 있지만 아내는 한족이라 연장수속을 밟을 수 없어 중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불법으로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비자기한이 되면 중국에 갔다가 남편이 국적을 취득한 후 혼인으로 동거비자를 받아 재입국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운이 나쁘게도 남편이 귀화허가일자를 목전에 두고 음주운전에 걸려 귀화가 불허되었다. 하여 그녀는 한국에 올 수가 없어 이산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언제 되면 오붓한 가정을 이루려는지? 미지수다. 우모 여인처럼 조선족과 혼인한 한족여성의 경우 한국에 오기 힘들고 일단 입국하였더라도 체류가 허락되지 않는다. 심양에서 온 설모 여인(29세)은 연수로 한국에 입국하여 지내던 중 조선족 남자와 사귀고 동거하였으며 중국 측에 혼인신고를 하고 딸애까지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세 식구가 재미 좋게 살고 있지만 그녀는 체류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다. 한족은 재입국혜택이 없어 그녀는 현재 3년 전부터 불법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8월부터 실시한 불법체류구제정책에 아이를 낳은 자는 혜택 받을 수 있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녀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 남편은 H-2에서 이미 F-4로 변경된 상황이지만 아내는 한족이라 구제대상이 될 수 없다. 엄마가 불법이다 보니 아이를 키우는데 여러모로 애로가 많다. 언제 가야 체류문제가 해결될지? 그녀는 한숨만 짓고 있다. 현재 H-2소지자는 가족을 초청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내나 남편이 한족일 경우 초청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래저래 조선족과 혼인한 한족에겐 한국이란 나라는 지평선 너머의 세계로 멀리 느껴지고 있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6호
60    끊이지 않는 C-3의혹 댓글:  조회:6993  추천:29  2011-03-18
끊이지 않는 C-3의혹 법무부는 2010년 7월 12일부터 무연고동포한국어능력시험 합격자 중 추첨탈락자에게 1년 단기복수비자(C-3)를 발급하여 한국에 입국한 후 기술연수를 거쳐 H-2로 변경 가능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법무부의 이 획기적인 정책은 비록 반년 혹은 9개월 공부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나 수많은 동포들이 혜택을 볼 수 있어 대체로 환영받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정책이 생겨나면 기회를 틈타 비리를 챙기는 사기행각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 ‘C-3’실시 초기엔 중국 측 여행사들에서 인민폐 2~3만원 받았고, 혹은 한국 측 행정사 사무실과 여행사들에서 기술연수비자인 D-4를 발급받고 나중에 H-2로 변경하는 조건으로 300만원 좌우 받았다. 2~3개 월 후 차츰 가격이 떨어져 120~150만원이었고 현재는 매우 저렴한 수수료만 받고 변경이 가능하도록 자리를 잡았다. 한편 일부 업체들이 아직도 법무부 공식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여러 가지 수단으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 예하면 점수는 합격했으나 추첨탈락자는 반드시 C-3→D-4→H-2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요즘 한화 180~200만원 지불하면 기술연수절차가 없이, 즉 D-4를 밟지 않고 C-3에서 직접 H-2로 변경해 준다고 고객을 유혹하여 사기치고 있다. 또 18기와 19기는 점수불합격자도 전부 C-3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루머를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업체는 인민폐 5만 위안을 지불하면 C-3관광비자도 직접 H-2로 변경해주고 심지어 한족도 H-2나 F-4가 가능하다고 사기치고 있다. H-2는 방문취업비자로서 한국정부가 중국동포와 CIS지역고려인에게만 주는 혜택이고 F-4는 재외동포비자로서 한족은 H-2와 F-4를 절대 발급받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자종류와 비자성격을 모르는 백성을 상대로 어처구니없는 사기를 감행하고 있다. 이렇듯 C-3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사기행각이 생겨나는 것이 일부업체들의 비도덕적인 상도의 수단이 그 일차적인 원인이 되겠으나, 한편 한국정부의 새로운 정책집행일관성부재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법무부가 점수는 합격되었으나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자들에게 처음에는 C-3비자를 발급해주고 입국 후 농어축산업의 연수도 가능했는데 2010년 9월 3일부터 농어축산업은 아예 배제해버렸다. 또 55주세를 기준으로 미만인 자는 기술연수공부를 거치게 하고 넘는 자는 배제해버렸다. 물론 새로운 정책이 허점이 있으면 보완하는 것이 옳은 처사이지만 일부업체들이 이렇듯 한국정부의 우왕좌왕하는 정책실시와 일관성부재의 틈을 노리고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현지 불법입국알선 브로커들이 재외동포기술교육제도를 악용하여 한국지방자치단체, 각종 단체나 협회의 초청으로 단기종합사증을 발급받아 기술교육과 취업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현혹시켜 동포들을 모집하고 금품을 편취하고 있다. 각종 불법C-3의혹, 그 끝은 어디인지? 중국동포타운신문 195호
59    명의도용, 어떻게 하나? 댓글:  조회:7314  추천:42  2011-03-05
명의도용, 어떻게 하나? 4년 전부터 외국인등록증 소지자는 휴대폰을 구입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는 한 사람의 명의로 통신 삼사(KT, SK, LG) 각 한 대씩 개통할 수 있다. 이런 통신사의 조치에 의해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불편 없이 휴대폰을 소지할 수 있게 되었고 삶도 편리해졌다.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나면 좋은 점도 있지만 부작용도 일어나는 것이 인간세상의 이치이다. 2000년 초반까지 재한조선족의 대다수가 불법체류신분이어서 명의도용이 생겨날 수가 없었다. 2003년 한국정부의 외국인고용제에 의해 합법화가 시작되었고, 2007년 3월부터 방문취업비자의 실시에 따라 수많은 조선족이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하게 되었고, 현재는 재외동포비자(F-4)와 영주권(F-5) 소지자가 많아짐에 따라 명의도용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나는 열심히 살아가려는데 나의 뜻과 무관하게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연변에서 온 손모(30세)는 2010년 10월경 입국하여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고 구로구 가리봉동 한 휴대폰판매가게에서 휴대폰을 구입했고 일자리를 찾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 2월경 난데없는 두 통신사로부터 휴대폰요금청구서가 날아왔다. 살펴보니 전혀 모르는 전화번호이고 그는 두 통신사의 휴대폰을 구매한 적이 없다. 통신사에 어렵게 연락되어 문의했더니 휴대폰 구매지점이 서울송파구와 동대문구 소재 가게란다. 손모는 그 두 곳에 아예 가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휴대폰을 구매한단 말인가? 청정한 날씨에 웬 난데없는 날벼락이다. 두 곳 휴대폰판매가게에 찾아 따져 물었더니 점원이 “당신이 직접 사지 않았으면 타인이 당신의 외국인등록증을 갖고 산 것이겠지.”고 말한다. “나는 타인한테 신분증을 준 적이 없고, 설사 타인이 나의 신분증을 갖고 왔다면 본인인지를 확인도 않고 판매할 수 있느냐?”고 이치를 따지니 점원이 “아무튼 당신의 명의로 개통되어 있으니 요금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아무리 시비를 따지려고 해도 상대가 받아주지 않는다. 두 가게가 똑 같은 태도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 없이 정지요청을 하고 20여 만 원의 전화요금을 납부했다. 더 큰 문제는 뒤에 있었다. 해제절차를 밟으려니 위약금 각각 10여 만 원 합쳐 30만원 가까이 납부하란다. 손모는 이렇게 한국에 온지 반년이 되나마나할 시점에 50만원이란 돈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돈도 돈이거니와 시간을 팔고 또 정신적으로 힘든 것을 견디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 과정에 손모는 경찰에 신고해보았지만 경찰은 자기네 업무와 관련이 없다면서 모르쇠를 놓는다. 분명히 명의도용사건이니 경찰을 믿고 사건을 해결해 줄 것을 바랐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현재 한국 땅에서 명의도용으로 경제적, 정신적으로 고충을 겪고 있는 조선족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 더 큰 고충이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4호
58    재한조선족이 걸을 길은? 댓글:  조회:7441  추천:50  2011-03-04
재한조선족이 걸을 길은? 스무 살이면 인생의 성숙기를 맞는 나이로서 성인식을 치르고 사회구성원으로 독립적인 인생의 서막을 연다. 조선족의 한국바람, 일명 코리안드림이 스무 살을 훌쩍 넘어섰다. 그 동안 강산이 변해도 두 번 반이나 변했을법한 시간이 흘렀으나 재한조선족사회 상은 왠지 성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왜일까? 조선족은 나름대로 중국에서 교육제일, 위생제일, 체육제일 등등의 타이들을 갖고 우수민족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다민족국가에서 살아오면서 지나치게 ‘자기 것’만 내세우면서 울타리를 고수하고 타민족과 어울리지 못하고, 속된 말로 자기네 잔치만 벌이면서 생존해왔다. 그런고로 정인갑 선생의 지적처럼 주류사회진출이 미흡했고 유명작가나 국가적으로 공인받는 문화인을 배출하지 못했다. ‘자기네끼리만 노는’ 생활방식을 한국에 안고와 살아가다보니 한국인과 소통이 되지 않는다. 소통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선진문화흡수가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리고 소통의 목적은 정서의 공유이다. 조선족이 한국사회에 다가서려는 노력이 없었던 탓으로 현재 한국과 조선족사회는 정서공유가 매우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면 결국 같은 핏줄이지만 영원히 남남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한국정부동포정책에 부족한 점이 있어왔고 또 한국인의 조선족에 대한 편견도 조선족이 한국사회와 어울리는데 걸림돌로 작용해왔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마냥 남을 탓하는 흥타령이나 부르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이젠 스무 살이 넘은 재한조선족은 미래를 위해 우리 스스로 우리 문제를 탐구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우리 스스로 뭔가 만들어 가는 것으로 한국사회의 인정을 받고 서로 정서를 공유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필자는 재한중국동포교사모임도 주최하고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재한중국동포 민속장기대회도 개최해 보았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가니 조선족사회반응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언론을 비롯해 조선족사회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의 중시를 받기 시작했다. 재한조선족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으로 중국동포사회연구소는 재한조선족의 현실태를 분석하고 미래를 위한 방향을 모색하고자 ‘재한조선족이 나아갈 길’이란 주제로 학술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한국인의 주최로 열린 재한조선족 혹은 전체 조선족에 관련된 학술포럼은 많았으나 한국 땅에서 조선족이 주최가 되어 학술포럼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으로 된 학술포럼인 만큼 미흡한 것이 있지만 대체로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 재한조선족사회가 성숙해 나아가려면 조선족은 물론 한국인의 관심 있는 지지와 성원이 있기를 바란다.
57    법무부고충해소정책에 대한 몇가지 아쉬움 댓글:  조회:7045  추천:43  2011-02-19
법무부고충해소정책에 대한 몇 가지 아쉬움 법무부는 2010년 8월 2일부터 10년 이상 불법체류동포를 구제하고 따라서 2011년 1월 3일부터 새로운 방안을 실시하여 구제범위와 제출서류를 간소화하여 동포들에게 많은 혜택과 편리를 주었다. 2006년 <제2차 동포자진귀국지원정책프로그램> 이후 4년 만에 고충해소정책을 실시하여 동포사회는 매우 반기는 분위기이다. 총체적으로 크게 환영받을 일이지만 일부 아쉬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밀입국자들의 경우 실제 2011년 1월 3일 기준으로 한국입국시간이 10년이 넘었으나 2002과 2003년 법무부에 신고할 때 입국시간이 길면 불이익을 당할 가봐 입국시간을 줄여서 신고하였다. 이 부류에 속하는 동포 수가 굉장히 많다. 이들은 실제 입국시간이 10년이 넘었지만 법무부 전산망의 기재에 따르면 10년이 안 되어 구제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이들의 입국시간을 확인할 수 없기에 2002년과 2003년 법무부에 신고하고 여행증을 발급받은 자들을 전부 구제하는 것이다. 다음 2011년 1월 3일부터 실시하는 정책에 결혼자 중 협의이혼 혹은 한국인배우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혼된 자도 구제대상에 포함되어 많은 동포들이 혜택을 보게 되었다. 아쉬운 것은 위장결혼자들이 구제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위장결혼은 한국법으로 말하면 형사범죄이기에 배제시켰겠지만, 2006년처럼 위장결혼 자들도 자진으로 경찰조사를 받고 검찰에서 불기소유예처분으로 사건이 종결되면 구제해주는 방안도 포함시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자들의 수도 굉장히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다음 새벽부터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넘쳐나는 인파 때문에 1월 24일부터 연령별로 세 단계 나눠 접수를 받고 있다. 이 방안은 출입국입장에서는 접수자들이 붐벼 업무의 정상처리에 지장이 있던 것을 해소하고 동포들도 나름대로 반기고 있다. 그러나 1956년 12월 31일 전 출생자들의 접수를 2월 말로 마감하는데, 그렇다면 여권위변조 혹은 밀입국자가 처음 실명으로 여행증을 발급받으려면 1개월이란 시간이 소요되고 접수시간이 지나버린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앞으로 동포들의 실제사정을 감안하여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3호
56    批林批孔의 내막 댓글:  조회:7104  추천:60  2011-02-17
批林批孔의 내막 천안문광장 모택동 곁에 공자가 모셔졌다. 요즘 중국사회에서 이를 두고 갑을박론이 펼쳐지고 있다. 모택동시대에 뼈도 추스릴 수 없게 난도질 당하던 공자가 모택동과 같은 위인으로 모셔졌으니 그럴 수밖에! 공자는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와 같이 동서양에서 공통으로 인정하는 사대성인에 속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공자처럼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한 성인이 없다. 처음으로 진시황에 의해 죽었다. 한조 동중서에 의해 공자가 하나님 격으로 모셔졌다가 위진남북조시대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해 송조에 이르기까지 노자와 부처한테 외면당했다. 남송의 신유학창시자인 주희 덕분에 다시 위인으로 받들렸고 명말 이탁오에게 한바탕 두들겨 맞았다. 20세기 초 노신이 유교를 사람을 잡아먹는 종교라고 칼을 빼들었고 따라서 공자는 또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신중국 건립 후 중국공산당은 계급투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계급분류엔 여러 가지 방법과 방식이 있었지만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유물론과 유심론의 이분법으로 계급을 분류했다. 이것이 소위 혁명(유물론)과 반혁명(유심론)의 논리로 비화되었다. 이런 맥락으로 흘러 공자비판은 1971년 임표가 죽고 나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당시 소학생부터 운신조차 힘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으로부터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농군에 이르기까지 멋도 모르고 외치던 ‘비림비공운동’이다. 2,500년 전의 공자와 중국현대정치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임표가 대체 어떤 관련이 있었기에 한 몽둥이에 물매를 맞았을까? 임표는 이른바 ‘천재사관’을 주장했다. 이것이 선험론적인 유심론이며 영웅이 역사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역사를 창조했다는 유물론에 위배되었기에 공자사상과 일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와 임표를 한 꼬챙이에 달아놓고 두들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그럴듯한 명분이다. 허나 내막을 들춰보면 비림비공운동의 실제목적이 따로 있었다. 리차드·닉슨이 저서 <미래 영수들에게>에서 “모의 만년의 정치실패엔 부인 강청의 탓이 컸다.”고 지적했다. 세인이 아는 바와 같이 모는 만년에 부인 강청을 통제할 수 없었다. 강은 굴레 벗은 말처럼 날뛰었고 황하대륙의 주인(여황)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강은 모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던 임표 생전에는 그 기세에 눌려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가 임이 죽자 곧바로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앞에 또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있는 인물이 있다.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여황이 될 수 없다. 그가 바로 인민의 애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주은래였다. 주은래는 마치 유방과 한신에 비유되는 것처럼 모와의 관계가 돈독했다. 그런 인물을 어떻게 제거할까?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 강청으로 불리는 4인방이 궁리 끝에 비림비공운동을 빌어 화살을 주에게 돌리기로 작정했다. 무슨 말이냐? 신중국혁명은 사람마다 태도가 분명할 것을 요구한다. 즉 다시 말해 유교가 제창하는 중용은 혁명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이쪽저쪽 다 살피는 습성을 지닌 주은래야말로 명실상부한 중용사상이 가장 농후한 일인자라는 것이다. 또 주은래야말로 대표적인 재상유(宰相儒)라 낙인을 찍어놓고 비림비공운동을 빌어 간접적인 무기로 주은래를 거꾸러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리하여 말하면 임표와 공자는 정치적으로 한 꼬챙이에 묶을 이유가 없었으나 억지로 외형적인 모양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무기로 주은래를 죽이고 황하대륙을 4인방의 천하로 만들려고 한 것이 비림비공운동의 실제내막이었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3호
55    자진출국하려는데 강제추방하다니? 댓글:  조회:7970  추천:40  2011-01-27
자진출국하려는데 강제추방하다니? 요즘 동포사회에서 한국법무부의 자진출국정책을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가 널리 퍼지고 있다. 사연이 무엇인지? 살펴보니 정부가 자진출국자는 벌금을 면제하고 입국규제도 없다고 발표했으나 말한 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흑룍강성 목단강시 강모(54세)는 한국에서 수년간 불법체류하다가 2008년 5월경 사천지진 때 정부의 자진귀국정책에 호응하여 자진귀국했다. 2009년 친척초청으로 한국에 재입국하려고 비자발급신청을 제출했는데 기각되었다. 용정조선족출신 귀화인 최모 여인(55세)은 같은 조선족 남자와 한국에서 혼인신고했는데 남편이 위명여권으로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어 법무부에 체류변경신청을 제출할 수가 없다. 실명으로 당당하게 결혼동거생활을 하고자 지난 2010년 7월 중순경 남편을 설득하여 자진귀국하게 했다. 그녀는 남편이 자진귀국했으니 한국에 재입국으로 데려오는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사증발급신청을 제출했는데 기각되었다. 이유를 따지니 남편의 체류불명이란다. 아니 체류불명이어서 자진출국한 것인데 이제 와서 그 이유로 사증발급이 불허되다니? 한국 속담에 혹 떼 내려고 갔다가 오히려 혹을 붙여온다는 말이 있다. 길림시 이모(58세)는 한국에서 5년간 불법체류했고 아내는 현재 H-2비자로 체류하고 있다. 그는 합법신분으로 한국에서 체류하고 싶어 지난 2010년 8월 초경 자진귀국하고자 인천공항에 제발로 찾아갔다가 날벼락이 떨어졌다. 출입국법을 모르는 그들은 사전에 출입국문의전화 1345에 두 번이나 자문을 구했다. 알려준 대로 비행기티켓을 구입하고 출국하려는 당일 시간여유를 갖고 인천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에 찾아갔다. 여공무원이 여권을 살피더니 이름이 무엇인가? 물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모가 입국 시 위명을 대답했다. 곁에 있던 아내가 남편이 대답한 이름은 입국 시 위명이고 실제 이름이 홍길동이라고 밝혔다. 여공무원이 메모하고 나서 어디엔가 전화로 “이 분을 실명으로 여행증을 발급받고 출국하라고 알려드릴까요?”라고 하더니 상대방의 말(곁에서 들을 수 없었음)을 듣고 나서 기다리라했다. 10여분 지나 두 남자가 나타나더니 따라오라 해 영문을 모르고 따라갔다. 그 길이 결국 출입국관리사무소 보호소에 갇히는 길이었다. 결과는 1개월 갇혀 있었고 100만원 벌금을 납부하고 강제퇴거조치를 받고 중국에 갔다. 자진출국하려다 강제출국을 당했다. 그것도 벌금까지 내고 말이다. 지금 동포사회에 입국규제문제가 화제로 되고 있다. 입국규제란 출입국법위반, 위조공문서경력자, 한국 체류 시 각종 형사처벌을 받은 경력자 등등에 해당하는 자가 출국하면 몇 년 이내 한국에 재입국할 수 없다는 조치이다. 상황에 따라선 영구입국규제도 있다. 예하면 2006년 제2차중국동포자진귀국정책지원프로그램이 있었다. 길림성 훈춘에 살고 있는 박모 여인이 1990년대 말경 본명으로 한국에 왔다가 불법체류자로 강제퇴거 되었다. 2001년경 죽은 사촌언니 이름으로 한국에 입국했다가 역시 불법체류가 되어 2006년 7월경 자진귀국했다. 문제는 자진귀국 시 본명을 밝히지 않고 그냥 사촌언니 이름으로 돌아갔다. 1년 지나 비자발급신청을 제출하니 기각되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에 속하는 자들은 영구입국규제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자진귀국자가 재입국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동포사회의 한국법무부에 대한 불만은 정상적인 자진귀국자가 재입국이 되지 않는다는 것, 입국규제가 길어서 5년이라 정했으나 시간이 훨씬 지났어도 역시 재입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2호
54    현대판 '창씨개명' 댓글:  조회:8155  추천:37  2011-01-14
현대판 창씨개명 필자는 한국정부가 고국인 한국에 온 조선족의 이름표기를 엉뚱하게 하고 있어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내용의 글을 2007년 11월 15일자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그 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분들이 많이 지적해 왔으나 한국정부는 아직도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일전에 한국국적으로 귀화한 조선족출신 여성 한 분이 찾아와 자기이름이 한국호적에 엉뚱하게 올라 있어 고충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요지를 말하자면 중국에서 이름이 ‘김화자’인데 6년 전 한국인과 결혼하여 한국호적에 ‘진후아지’로 올랐다. 한국에 온 후 외국인등록증에는 ‘JIN HUAZI’로, 호적등본에는 ‘진후아지’로 기재되어 있고 할아버지가 지어준 우리민족 식의 전통이름인 ‘김화자’는 아무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만주 땅에 가서 여러 세대를 거쳐 오면서 지켜온 우리민족 식의 이름이 고국에 와서 사라진 것도 서운한데다 ‘진후아지’란 이름표기 때문에 고충을 겪게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한국국적으로 귀화한 후 친여동생을 초청했는데 비자가 기각되었다. 그 이유는 언니의 성이 ‘진’이고 여동생의 성이 ‘김’이기 때문이어서 자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 향해 통곡할 일이다. 친자매를 자매가 아니라니! 누구의 탓인가? 분명히 한국정부가 친자매를 두 성을 가진 남남으로 갈라놓았다. 한국은 진정 조선족의 고국이 맞는 것일까? 이 상황에서 언니가 여동생을 초청으로 한국에 데려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관할 관서에 ‘진후아지’를 ‘김화자’로 돌려놓는 정정신청을 제출하고 자매를 입증하는 유전자검사를 하면 된다. 이렇게 하려면 쓸데없는 돈을 팔고 시간을 팔고 정력을 팔아야 한다. 왜 한국정부는 부질없이 여러 세대를 거쳐 지켜온 우리민족 식의 이름을 버리게 하고 엉뚱한 탱자 같은 이름으로 표기하여 조선족출신 귀화인을 골탕 먹이고 있는지? 한국정부와 한국인은 귀화한 조선족마저 정체성이 한국보다 중국 측에 기울어져 있다고 서운해 한다. 공문서에 ‘진후아지’로 기재되어 고충을 겪게 된 여성이 과연 자신을 한국인으로 여기게 될까? <중국동포타운신문 191호>
53    조선족 전통문화 보존이유 댓글:  조회:7336  추천:41  2011-01-14
조선족 전통문화 보존이유 1990년대 한국인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중국이란 못사는 나라에서 온 세련되지 못하고 촌스럽고 가난한 인간집단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 이후 많은 한국인(정치인과 지식인)이 연변나들이를 통해 조선족은 중국이란 대국에서 떳떳이 살아가고 아울러 한국보다 민속전통문화를 더 잘 보존해 오고 있는데 대해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조선족은 어떻게 고국전통문화를 보존해 올 수 있었을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얘기해 보자. 연변지역은 150년 전부터 주로 중국 내 촹꽌둥(산해관 동쪽에 진출한다는 뜻)의 주역인 산동성에서 이주해 온 한족과 조선반도에서 과경해온 조선사람이 공동으로 개발해왔다. 따라서 이들 두 집단은 ‘중국사람’과 ‘조선사람’으로 호칭되었고 ‘한족말’과 ‘조선말’이란 언어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의식주를 포함해 각기 자기네들의 선조전통을 유지하면서 삶을 영위해왔다. 연변시골마을에 가면 외형과 실내구조가 다른 두 가지 가옥양식이 있는데 그것은 ‘한족집’과 ‘조선집’이다. 가옥양식이 다른 집에서 살고 있는 그들 두 집단은 먹는 음식도 ‘한족음식’과 ‘조선음식’으로 나뉘고 입는 옷도 ‘한족옷’과 ‘조선옷’으로 구분된다. 특히 일상생활과 관련되는 기물과 먹고 사는 농작물 및 농사짓는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그 절대다수가 ‘한족00’과 ‘조선00’으로 구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한족가마’와 ‘조선가마’, ‘한족항아리’와 ‘조선독’, ‘한족이블’과 ‘조선이블’이 있으며 특히 고추, 오이, 가지, 등 야채류도 ‘한족00’와 ‘조선00’로 부른다. 농기구도 ‘한족호미’와 ‘조선호미’로 분류하듯이 많은 것들이 생김새가 극명하게 대조된다. 두 민족의 물건을 살펴보면 한족기물·야채·농기구 등은 대체로 생김새가 크다는 것이고 반대로 조선기물·야채·농기구 등은 한족 것에 비해 자그마하고 아담지게 생겼다. 그 유래는 중국과 조선반도의 자연환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마치 명태도 조선의 것보다 러시아 것이 훨씬 더 큰 것처럼 말이다. 민속놀이를 말하자면 연변한족은 기껏해야 양걸이(穰歌)를 즐기고 술상에서 화쵄(劃拳)놀이로 한바탕 크게 떠드는 것뿐인데 비해 조선족은 그네, 씨름, 윷놀이, 장기, 널뛰기, 사물놀이 등 다양한 것들이 많다. 이 가운데 고국한국에선 그네가 사라져 있는데 비해 조선족은 아직도 인기종목으로 보존해오고 있다. 이렇듯 조선족이 선조의 전통문화를 잘 보존해 올 수 있었던 것을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족은 타관 땅에 이주 정착하는 과정(1949년 전)에 고국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하고 아울러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간다는 신념을 안고 살아왔기 때문에 선조의 전통문화를 고수해 왔던 것이다. 이민 1세와 2세들은 오늘날 3세나 4세와 달리 한족이란 표현이 없이 ‘중국사람’ ‘중국집’ ‘중국00’으로 불렀고 자신들의 호칭 및 ‘물건’호칭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붙여 불러왔다. ‘중국’과 ‘조선’의 구분(정치와 관계없이 민생과 문화 분야를 말함)을 선명하게 그었다는 뜻이다. 다음 조선민족은 자체종교는 없지만 풍류도의 핵심의미내용인 ‘멋’을 고수하고 남과 다르다는 차이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일례로 종교가 뚜렷한 회족, 藏族, 壯族 등 민족이 한족과의 통혼이 잘 되고 있는데 비해 유독 조선족이 한족과의 통혼이 드문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다음 중국정부소수민족정책의 우월성을 꼽을 수 있다. 해방 후 중앙정부에서 소수민족문화보존을 정책적으로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 등 나라에 이민 간 우리겨레들은 고국문화에 관심이 적고 정부정책에도 규정이 되지 않아 전통문화보존이 어렵다. 러시아 가레스끼(고려인)는 강압적인 소수민족탄압정책에 의해 언어를 상실했으니 기타 전통문화를 보존해올 여유가 없었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1호
52    불법체류 구제 대폭완화 댓글:  조회:9362  추천:39  2010-12-30
불법체류 구제 대폭완화 지난 2010년 8월 2일부터 불법체류 선별구제정책을 실시한 법무부는 2011년 1월 3일부터 구제대상, 조건, 제출서류 등을 구체적으로 공지함으로서 장기간 불법체류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커다란 새해 선물을 주었다. 2011년 1월 3일 기준으로 국내 장기 불법체류 등으로 인해 본국(중국)으로 귀국해도 정상적인 생활이 곤란하고 국내에서도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입장 등 인도적 측면을 고려하여 고충해소 신청대상을 확대하고 신청절차도 대폭 간소화했다. 10년 이상 불법체류자 및 당사자의 배우자와 부모 혹은 자녀는 불법체류시간에 관계없이 신청대상에 포함된다. 부 · 모 또는 배우자가 국적이나 영주권을 취득한 자, 국내에서 조선족끼리 자녀를 출생한 자, 산재후유증으로 치료가 요망되는 자, 한국인과 혼인하였다가 판결이혼 혹은 협의이혼으로 혼인이 파탄된 자, 체류기간이 지난 상태에서 한국인과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 방문취업(H-2)자격으로 입국하여 불법체류가 된 자 등도 신청대상에 포함된다. 신청서류는 체류허가 신청서, 신청대상 여부 입증서류, 동포입증서류(신분증·호구부), 유효기간이 있는 여권 혹은 여행증으로 신청이 가능하고 진정서, 재산관계증명서류는 제출할 필요가 없다. 구제대상으로 합법화 되면 시간제 취업이 가능한 일반연수(D-4)자격변경 및 기술교육 과정을 거친 후 국내에서 4년 10개월간 취업이 가능한 방문취업자격(H-2) 등으로 체류가 가능하다. 방문취업제 자격으로 변경받기 위해서는 재외동포기술지원단 지정학원에서 9개월간(국가기술 자격증 취득자는 3개월) 기술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다만 55세 이상은 기술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체류활동에 부합되는 자격으로 변경해주고 1949년 10월 1일 전 출생자는 재외동포(F-4)자격으로 체류가 가능하다. 범칙금(200만원) 납부 후 기술교육 등록절차를 거치고 자격변경 추천서를 발급하면 D-4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시행기간은 2011년 1월 3일부터 2011년 6월 30일까지이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0호
51    한단학보와 짝퉁신문 댓글:  조회:7264  추천:34  2010-12-16
한단학보와 짝퉁신문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에 공손룡(公孫龍)이 장자의 도를 알고 싶어 하니 위(魏)나라의 공자 위모(魏牟)가 그를 비웃으며 던진 비유가 있다. “자네는 저 수릉(壽陵)의 젊은이가 조(趙)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에 가서 그곳의 걸음걸이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그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엎드려 기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걸세. 지금 자네도 장자에 이끌려 여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는 그것을 배우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네 본래의 지혜를 잊어버리고 자네의 본분마저 잃게 될 걸세.” 이 말을 듣고 공손룡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도망쳤다고 한다. 재한조선족이 40만 명이니 여길시 인구와 맞먹는데 이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서 그들을 상대로 여러모로 할 일이 많다. 필자가 여기서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재한조선족을 상대로 하는 신문시장이다. 재한조선족을 상대로 발행되고 있는 신문이 2010년 상반년을 기준으로 한중동포신문, 동북아신문, 중국동포타운신문, 한민족신문, 한중법률신문, 흑룡강신문, 등이 있었다. 요즘 들어 재한조선족 ‘시장’을 바라보고 새로 신문을 만들었거나 이미 등록을 마치고 발간준비 중에 있고 또 신문을 내려고 알아보고 있는 등 여러 곳에서 신문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신문이 많이 생겨나면 날수록 경쟁이 붙을 것이고 따라서 재력과 인력이 탄탄하면 살아남을 것이고 그러지 못하면 자연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런 과정에서 살아남은 신문들은 서로 질을 높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독자들에겐 좋은 일이다. 이것이 사장경제논리이며 법칙이다. 시장경제논리와 법칙에 따르지 않고 섣불리 뛰어들어 야비한 수법으로 이익을 챙기려 든다면 자멸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독자들한테 피해를 입히고 신문시장을 흐리는 악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례로 최근 새로 생겨난 <중국동포신문>의 폐단을 들어보자. 첫째 야랑자대행위 신문을 만드는 자가 재한조선족사회흐름을 모르고 여기 저기 신문에 2~3개월 동안 찔죽거린 밑천으로 신문시장에 뛰어들어 한중수교18년인데 중국동포를 대변하는 신문이 없으니 자신이 진짜 대변지를 만드느라고 떠들고 있다. 이런 식으로 야랑자대(夜郞自大:세상에서 자기가 최고라는 뜻)를 자처하고 기존의 신문들을 마구 비하한다. 둘째 짝퉁신문 한국인은 흔히 중국을 짝퉁천국이라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허나 중국에 짝퉁신문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인이 재한조선족시장에 뛰어들어 짝퉁신문을 만들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신문은 표제가 중요한 것은 더 말할 것 없다. 새로 만든 신문이 시장점유가 힘들 것이 빤한 일이지만 그래도 실력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표제디자인을 다른 신문과 똑 같게 만들어 누가 봐도 짝퉁신문이다. 중국어 속담에 ‘물을 흐려놓고 고기를 잡는다(渾水摸魚)’는 말이 있다. 독자를 호도시켜 놓고 이익을 챙기려는 야비한 수법이다. 셋째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 중국동포신문은 수년 전 잠깐 몇 호가 시중에 나오다가 그만두었다. 짝퉁신문의 주인공이 그 이름을 따다 새로 만드는데 창간호(복간201호)라 기재했다. 뻥튀기라도 너무 한심한 뻥튀기이다. 시간적으로 10년이 되는 한중동포신문이 162호이며 중국동포타운신문이 189호를 맞는다. 200호가 넘는 신문은 유일하게 동북아신문 뿐이다. 수를 부풀려 있어 보이려는 심정이 절박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기만행각을 벌이는 것은 결국 다른 신문을 무시하고 독자들을 무시하는 태도이다. 아울러 신문은 언론매체로서 책임성이 강한 생리를 갖고 있다. 표제디자인을 짝퉁하고 수를 뻥튀기하는 이런 태도로 신문을 만들고 있으니 그 신문기사들의 진실과 신뢰성이 어떻게 보장되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한국 내에 중국정부를 등지고 여론을 퍼뜨리는 신문이 몇 개 있다. 그들 신문의 취지는 중국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데 있다. 재한조선족을 상대로 만드는 신문이 중국정부를 향해 독설을 퍼붓는 기사를 싣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 새로 생긴 짝퉁신문이 이런 기사를 담고 있는데 신문을 만들겠으면 최소한 흐름이나 알고 만들라고 권고하고 싶다. 이상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신문시장에 뛰어드는 행위는 한단학보의 고사처럼 결국 자멸하는 길밖에 없다. 태진아의 인기가요가 떠오른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필자는 “신문은 아무나 만드나”라고 말하고 싶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89호
50    불법체류 선별구제 합법화단상 댓글:  조회:7553  추천:41  2010-12-04
불법체류 선별구제 합법화 단상 한국정부가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 <중국동포 자진귀국지원정책프로그램>을 실시하여 6만여 명이 혜택을 받은 이후 4년 만에 불법체류자에 대한 선별구제방안을 내놓았다. 2010년 8월 1일 기준, 10년 이상 불법체류 중인 자로서 국내에서 일정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자, 가족 대부분이 국내에 체류하고 있어 중국 내 생활기반이 없다고 판단되는 자를 구제한다. 이외 불법시간이 10년이 안 되더라도 다음 사항에 해당되는 자는 구제받을 수 있다. 1. 부 또는 모가 국적을 취득한 자. 2. 국내에서 자녀를 출생한 자(중국동포 끼리 아이를 낳은 자도 포함됨) 3. 국민배우자의 귀책사유로 불법체류하게 된 자. 4. 산재피해 후유증으로 지속적인 치료가 요망되는 자. 5. 2007년 5월 31일 이전에 위명여권을 행사하여 현재 실명으로 체류 중인 자. 6. 2007년 3월 4일 이전 밀입국자로서 기초 조사를 거쳐 실명이 확인된 자. 7. 기타 위에 준하는 인도적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 위 7개 사항에 해당되는 자는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여 출입국에 제출하면 구제받을 수 있다. 다만 법무부에서 제출자의 구체 실정을 감안하여 200만~400만원의 범칙금을 받는다. 문제는 매번 법무부에서 새로운 입국정책을 실시하거나 불법체류자에 대한 구제방안이 나오면 기회를 이용하여 사기행각이 많아 동포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일부 대행업체들에서 서류를 작성해 주고 출입국접수업무를 하는 명목으로 일인당 600만원에서 800만원을 받아 폭리를 챙기고 있다. 청주에 살고 있는 중국동포 부부는 한국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데 애 아빠가 불법체류신분이다. 모대행업체를 찾았더니 700만원을 부르고 착수금으로 300만원을 요구하여 신뢰성이 없어 본지를 찾아왔다. 서울 영등포에 살고 있는 허 씨는 모대행업체에서 친속관계공증서류와 호구부가 있어 부자관계가 입증되는 데도 유전자검사를 시키고 이것저것 불필요한 절차를 강요하며 착수금으로 400만원을 요구했다. 안산에 살고 있는 박 모 여인은 한국생활이 11년이 되지만 그간 두 자녀를 공부시키고 남편이 장기 환자로서 많은 치료비를 대다 보니 수중에 남은 돈이 별로 없다. 박모 여인의 경우 비록 한국 내 생활기반이 튼튼하지는 않지만 출입국에서 인도주의 차원에서 구제해주고 벌금도 감면하여 실제 비용이 매우 적게 든다. 그런데도 모대행업체가 650만원을 내라고 하여 포기하였다가 본지를 보고 찾아와 출입국에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 대행업체들에서 불법체류자는 약자라는 심리를 이용하여 기회가 생겼을 때 폭리를 취하려고 수속비 명목으로 많은 돈을 뜯어내고 있다. 올해 들어 6월부터 C-3일년복수비자로 한국에 입국한 자를 상대로 사기행각이 극성이었고 8월초부터 불법체류 선별구제 합법화 기회를 이용하여 또 사기행각이 말썽을 부리고 있다. 언제가면 동포들이 불필요한 사기를 당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그날이 요원해 보인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88호
49    풍류로 보는 연변韓屋과 漢屋 댓글:  조회:7247  추천:47  2010-12-03
풍류로 보는 연변韓屋과 漢屋 중국 동북지역인 길림성 연변 시골에 가면 가옥의 외형만으로 한족마을과 조선족마을이 쉽게 구분된다. 연변 조선족은 대다수가 한반도 함경북도에서 이주한 과경민(跨境民)이다. 그들은 선조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산 밑에 샘물이 있고 샘물이 내를 이루고 냇물 양쪽에 작은 산맥이 뻗어 있어 포근하고 안온한 곳을 선택해 냇물 가까운 양쪽에 집을 짓고 살아왔다. 조선족 가옥구조는 6칸짜리와 8칸짜리가 보편적이고 외형상 지붕은 동서 양쪽을 보기 좋게 경사를 지워 좌우 앞뒤의 지붕 높이가 똑 같다. 한족 가옥의 지붕은 조선족 가옥의 지붕에 비해 남북의 경사도가 크고 동서 양쪽은 경사가 없이 깎아지른 듯한 수직절벽 모양인데 지붕꼭대기와 바람벽이 직선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지붕 모양만으로도 한눈에 조선족마을인지, 한족마을인지를 알 수가 있다. 조선족 가옥구조는 부유한 집들에 전통한옥처럼 마루가 있지만 대다수는 마루가 없고, 출입문(연변조선족은 바닥문이라 함)을 열고 들어가면 반 평(坪) 크기에 두 뼘만큼의 깊은 바닥이 있고 바닥 북쪽에 바닥보다 조금 더 크고 세 뼘 깊이의 부엌이 있다. 부엌간이 따로 없이 통 털어 정주간이라 하는데 온돌 면적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정주간 서쪽에 안방과 고방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다. 정주간 동쪽에 있는 방은 창고로도 사용하고 또 어떤 집들에서는 소를 키운다. 농경문화에서 소가 가장 소중한 존재로서 사람과 같이 한 집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문은 출입문이 있고 정주간에는 창문이 있고 안방과 동쪽 방에도 출입문이 있으며 고방에는 작은 창문을 만들어 오후 햇빛을 받아들이고 통풍으로 사용한다. 정주간 출입문과 대칭으로 북쪽에 부엌문이라 부르는 출입문을 만들어 아침 햇빛을 받을 수 있고 낮에는 집안 밝음에 도움이 된다. 특히 남북 출입문을 동시에 열면 시원한 바람이 통해 환기에 큰 역할을 한다. 이는 한민족이 풍류원리에 의해 지은 가옥구조이다. 필자가 1980년대 함경북도에 가보았는데 가옥구조가 연변조선족가옥구조와 똑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족가옥은 가운데 방이 부엌간이며 면적이 굉장히 크다. 부엌간은 조선족가옥과 달리 높낮음의 굴곡이 없다. 밖의 땅과 부엌간의 바닥 높이가 일치하다. 그리고 한족가옥 부엌간은 남쪽에 출입문만 있고 북쪽에 출입문 혹은 창문이 없어 통풍이 막히고 환기가 되지 않아 부엌에서 나오는 연기와 볶음요리가 위주인 관습으로 생겨나는 기름타는 냄새와 각종 요리냄새가 빠져나가지 못해 항상 집안이 매캐하게 이상한 냄새가 배어 있으며 대다수 사람들이 심한 천식에 시달리고 있다. 간혹 부엌간 북쪽에 환기용으로 구멍을 만들지만 구멍의 크기가 고양이나 드나들 정도로 작기에 통풍과 환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집안이 햇볕을 받지 못해 항상 어둠침침하다. 한족도 풍류원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통풍이 없고 환기가 되지 않는 가옥구조를 고집하면서 수천 년을 살아왔다. 부엌 양쪽에 같은 크기의 안방이 있고 방안의 특징은 남쪽에 창문만 있고 출입문이 없으며 바닥이 온돌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조선족가옥구조는 온돌면적이 큰 것이 특징이라면 한족가옥구조는 이와 정반대이다. 그래서 한족가옥은 조선족가옥에 비해 난방이 잘되지 않아 항상 춥다. 온돌 높이는 어른 엉덩이 높이와 비슷하고 오르내리기가 불편해 한족은 하루 종일 신발을 벗지 않고 산다. 민족마다 가옥구조가 나름대로의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모두 저마다 자연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활관과 가치관이 다른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한족마을 가옥구조와 조선족마을 가옥구조의 대비를 통해 우리민족이 얼마나 풍류를 중시해왔는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88호
48    동포상대사기에 같은 조선족이 앞잡이로 댓글:  조회:7296  추천:33  2010-11-19
동포상대사기에 같은 조선족이 앞잡이로 지난 수개월 동안 한국인이 출입국공무원으로 사칭하고 중국동포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뉴스가 한국 여러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으며 본지 고충상담실에서도 여러 건 접수하였다. 필자가 중국동포를 상대로 한 사기행각 사례들을 분석해 보았는바 집단사기와 개별사기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단사기는 흔히 유령사무실을 마련해 놓고 출입국공무원으로 위장하고 불법체류자를 합법화시켜준다는 명분과 일부 불법체류자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는 등 수법으로 수십 명의 고객을 불러 모아 수개월 동안 억대 돈을 사기 치는 행각을 벌렸다. 일부 나쁜 한국인이 중국동포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은 그렇다 치고 유감스런 것은 한국인의 집단사기에 조선족이 앞잡이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녕성 철령시에서 온 장모 여인(63세)은 지난 9월 초경 10년 이상 불법체류자를 합법화로 구제해준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대림역 부근 다방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국인 둘과 조선족 한 명을 만났다. 이 부장과 장 실장이란 한국인은 출입국공무원으로 위장하고 서두를 뗀 다음 조선족 남자가 “이 분들의 신분이 의심 없고 실제 많은 동포를 구제해 주었으며 저 자신도 이 분들의 덕분에 합법이 되었으니 믿으라.”고 입이 닳게 바람을 불어넣어 정말인 줄 믿고 이튿날 바로 본인과 동생 및 조카 셋의 체류합법수속비 명목으로 천만 원을 계좌로 입금했다고 한다. 필자가 “왜 사무실도 보지 못하고 다방에서 말이 오간 것을 믿고 거액의 돈을 입금했는가?” 고 물으니 그녀 왈, “같은 조선족이 나서서 사실인 듯 구수하게 얘기하는 데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수원에서 중국동포를 상대로 집단사기를 벌인 사건에도 한국인과 내연관계로 있는 조선족 여성이 끼어 있었다. 마장동 다단계판매사건도 한국인이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조선족을 내세워 강의하게 했다. 한국인의 사기행각에 끼어 있는 조선족 가운데 일부는 내막을 모르고 이용당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하기는 싫고 돈을 벌고 싶은 욕심에 의해 사기인줄 알면서도 같은 조선족한테 피해를 입히는 사례도 있어 매우 안타깝다. 개별사기는 흔히 조선족이 끼지 않고 한국인 두세 사람이 벌이는 경우가 많다. 훈춘에서 온 신모 여인(56세)은 지난 11월 4일 오전 10:00경 전주에 가려고 서울고속터미널에 갔다. 터미널이 하도 크고 붐비는 사람이 많아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배가 뚱뚱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자와 맵짜게 생긴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자 둘이 접근했다. 그들은 아주 친근하게 “아주머니 어디 가세요?” 물으니 주저 없이 대답하였다. 말투를 듣고 “아주머니 조선족이구먼. 한국엔 언제 왔어요?” “3년이 넘었습니다.” “아주머니 긴장해 하는 것을 보니 혹시 불법체류가 아니예요? 외국인등록증을 봅시다.” 불법체류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린 출입국공무원인데 우리 따라 출입국에 갈래요? 아니면 그냥 여기서 벌금만 내고 갈래요?”라고 협박이 시작되었다. 신모 여인은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너무 긴장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고기를 낚았다고 여긴 두 남자가 흥정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엔 400만원을 불렀다. 그만큼 큰돈이 없다고 하니 내리 깎고 또 깎은 끝에 현금인출기에서 50만원을 꺼내 주고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흥정에 들어가자 사기인줄 알아차렸지만 당시 어쩔 수 없이 빨리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냥 돈을 주고 말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면서 중국동포들이 나처럼 피해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신문에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불법체류중국동포들이 사기인줄 모르고 당하는 경우도 있고 알면서도 약자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사례가 많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87호
47    將棋로 보는 한민족정서 댓글:  조회:7396  추천:37  2010-11-19
將棋로 보는 한민족정서 장기는 약 4,000년 전 인도에서 발명되었다는 설이 있고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장기놀이가 있었다는 문헌기재가 있으며 한국 장기는 중국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기가 초한(楚漢)대국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한나라 내지 삼국시대에 본격적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지금 유행되고 있는 중국 장기는 10세기 중엽 후주(後周)의 무제가 만든 것이라 하며 북송과 남송의 교체시기에 광범히 유행되었다. 한반도에서는 한사군(漢四郡) 때 한인(漢人)들이 대량 이주해오면서 장기를 퍼뜨린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개로왕이 장기를 즐겼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로 된 역사기재이다. 고려 초부터 송나라 상인들이 들고 온 장기를 고려인이 대국하였다는 역사기재가 있으며 한국 장기는 조선시대에 양반이나 고관대작들의 전용놀이로 되면서 많이 발달하였고 중국 장기와 다르게 현행 놀이법도 조선시대 때 정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국 장기가 민중의 민속놀이로 정착된 것은 해방 후의 일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 장기가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이지만 중국 장기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우리민족정서에 맞게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은 중국 장기는 빅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승부만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중국 장기는 왕과 왕이 서로 대치되어 마주치면 노출시킨 측이 패한다. 또 중국 장기는 동일 수를 3회 이상 반복할 수 없으므로 만수빅장이라는 것이 없다. 다만 간혹 서로 기물이 많이 소진되어 승부를 가를 수 없는 경우는 있다. 이에 비해 한국 장기는 수세에 몰린 측이 고의로 왕을 상대 왕에게 노출시켜 빅장을 노리고 또 기물로 만수빅장을 요청하여 승부가 없이 끝내려고 드는 경우가 많다. 한국 장기의 빅장논리에 대해 대한장기협회 김응술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장기와 일본 장기는 오로지 승부만 있을 뿐 고의적인 빅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역사는 국토가 작은 범위 내에서 생존을 위해선 생사(승부)의 논리가 아닌 화해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역사이기 때문에 생사결단의 투지가 아니라 불리하면 화해를 요청하여 나라의 생존을 도모했기 때문에 장기놀이도 승부가 없이 빅장을 추구하는 식의 놀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중국 장기는 초나라 왕 항우와 한나라 왕 유방이 나라를 빼앗는 싸움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승부를 가르는 놀이로 정착되었으나 한국 장기는 영토 확대싸움보다 지켜내려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빅장논리가 발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역사적인 정서는 아기자기한 정의 문화이기 때문에 승부보다 화해에 무게를 두다 보니 장기놀이도 빅장논리가 발달하였던 것이다. 중국인의 영토 확장추구와 한국인의 영토를 지켜내려는 노력이 장기놀이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중국 장기는 초의 졸과 한의 병이 강을 건너기 전 자기 진지에선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할 수 있을 뿐 가로로 움직일 수 없으며 강을 건너 적진에서만 가로로 이동할 수 있다. 이는 졸병의 임무수행이 무엇인지가 명확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 장기는 졸병이 자기 진지에서부터 가로로 이동할 수 있는데 이는 공격이 우선이 아니고 방어에 무게를 둔 역사적인 정서에서 유래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음 중국 장기와 한국 장기에 있어서 차와 마(馬)만 주보(走步)가 같을 뿐 나머지는 다 다르다. 중국 장기는 포와 포가 서로 잡을 수 있지만 한국 장기는 포와 포가 서로 대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도 공격형을 추구하는 중국 장기와 공격보다 방어가 우선인 한국 장기의 차이점이라 하겠다. 세상에 절대적인 논리가 없듯이 중국 장기와 한국 장기를 단순히 공격과 방어의 논리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상(象)은 코끼리가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병기와 군수물자를 뜻하는데 중국 장기는 상이 밭 전(田)자로 움직이며 강을 건널 수 없지만 한국 장기는 밭전을 뛰어넘어 강을 건너 적진에 들어갈 수도 있다. 이는 한국 장기가 중국 장기보다 더 공격적이며 더 유연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다음 한국 장기가 중국 장기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역동적인 표현을 논해보자. 중국 장기는 왕이 사선으로 움직일 수 없으며 차도 왕궁에서 사선으로 못 가는데 비해 한국 장기는 왕과 차 및 상대의 졸병이 사선으로 마음대로 움직이며 또 중국 장기는 사(士)가 직선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오로지 사선으로 이동한다. 한국 장기는 사가 왕의 진영에서 직선·사선으로 마음대로 움직인다. 중국 장기가 유연성과 역동성이 떨어져 조금 딱딱한 기분이 드는데 반해 한국 장기는 유연성이 풍부해 재미가 더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 장기와 한국 장기의 이러한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말할 수 있다. “한국 장기는 한반도 지리적인 환경에 의한 풍류도 정신과 화기애애한 정의 문화에 따라 유연하고 역동성이 풍부하게 만들어진 것이고 국토를 지켜내려는 역사적인 원인으로 하여 화해의식에서 빅장의 논리가 발달하였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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