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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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국에 '사나이'가 있는가? 댓글:  조회:4427  추천:29  2010-02-27
중국에 ‘사나이’가 있는가? 2월 27일 캐나다 밴쿠버에 또 한 번 오성홍기가 높이 올랐고 중국국가가 울러 펴졌다. 그 주인공은 여자 1000미터 쇼트트랙 우승자 왕멍이었다. 왕멍은 500미터와 3000미터계주까지 3관왕을 달성하여 시상식에서 환하게 웃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주양의 1500미터 우승을 포함해 중국이 한국을 제치고 여자 쇼트트랙 전체 네 개 종목을 석권했으며 세계에서 명실상부한 최강국임을 입증하였다. 중국이 이번 <2010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2월 27일까지 금메달 획득수가 모두 5개인데 그중 4개는 여자쇼트트랙이고 나머지 하나는 신설/조굉박이 双人自由式滑氷 종목에서 딴 것이다. 그러니까 5개 금메달에서 4.5개가 여자의 몫이었다는 얘기이고 남자들의 단독 종목에서 금메달 하나도 따지 못했다. 사실 중국스포츠는 남자에 비해 여자들의 약진이 주류를 이어왔다. 1980년대 중국여자배구는 배구세계월드컵과 올림픽을 비롯해 세계 정상급 경기에서 여섯 차례나 연속 우승했지만 남자배구는 세계무대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중국여자축구는 미국과 우승을 다툴 정도로 세계 정상급이었지만 남자축구는 아세아도 벗어나지 못해 껑껑 댔다. 여자 만 미터와 마라톤은 세계대회에서 우승했지만 남자선수들은 예선에도 나서지 못했다. 등등의 이러한 현상을 두고 당시에 ‘음성양쇠(陰盛陽衰)’란 말이 생겨났고, 남자들이 가정에서 마누라한테 주눅이 드니 밖에 나가서도 기를 못 펴서 그렇다는 말이 유행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1980년대 후반 중국에서 “사나이를 찾아라.”는 구호가 유행되었다. 이에 대해 가장 먼저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이 상해였다. 1991년 상해 텔레비전이 제작한 <<상해파 남편을 위한 변주곡(海派丈夫變奏曲)>>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그 주제가의 가사가 다음과 같다. 사나이는 어디에 있나? 남자들은 거리에 가득 찼는데, 젊은 이선생은 장바구니 들고 나오고, 왕씨 아저씨는 연탄을 사러 가네. 젊은 장씨는 우윳병 들고 가고, 조씨 아저씨 간장을 사오네. 아내가 고함을 지르면 남편은 온몸을 떤다네. 월급봉투 보너스봉투 모두 바치고, 먹다 남은 국이랑 식은 밥을 차려먹는 남편. 힘든 일 더러운 일은 혼자서 하고, 얻어맞고 욕을 먹어도 끾소리 못하는구나. 이쯤하면 확실히 사나이를 찾기가 힘들다. 요 몇 년래 류상이 110미터허들 세계챔피언이 되면서 중국남자들의 체면을 살리는 듯싶더니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또 중국‘사나이’가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중국에서의 ‘음성양쇠’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역사가 오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중국역사를 돌이켜보면 송대(宋代) 이전에는 그래도 남성은 대체로 남자다웠으나 송대 이후에는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명대나 청대에 이르러서는 갈수록 못해졌다. 그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홍루몽>>의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그렇다. 전통예법에 얽매인 가정(賈政)은 죽은 시체와도 같이 딱딱하기 그지없었고, 가사(賈赦)는 ‘구더기’같은 존재였다. 그나마 가장 훌륭한 남자라고 하는 것이 가보옥과 같은 여성화된 젊은 도련님이었다. 중국역사에서 남자가 남자답지 못한 것은 도가와 불가의 부드러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유교의 경직된 예의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강인했던 이민족도 중화문명에 융합되면 남자답지 못하게 변해버린다. 그 실례로서 본래 누르하치의 자손들은 거의 모두가 용맹하고 강인한 기병이었으나 200여년의 중화문명을 마신 결과 짐도 지지 못하는 나약한 팔기(八旗)의 귀족자제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易中天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한가롭게 차를 마시거나 새장을 들고 산보하는 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조상들이 힘들여 개척해놓은 강산을 일개 여인(자희태후)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중국역사에서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니 따라서 여자도 여자답지 못한 울지도 웃지도 못할 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을 중국어로 ‘男不男, 女不女’라 한다. 따라서 서양에서는 영웅이 미녀를 구해주고 사랑을 나누지만 중국에서는 미녀가 나약하기 그지없는 병신 같은 남자를 구해주고 사랑을 나눈다. 이러한 역사가 결국 여자가 남자 위에 설 정도로 여자들이 대가 세게 만들었다. 중국여자들이 가뜩이나 대가 센 데다 모택동이 “여성은 하늘의 절반을 떠인다.”는 말을 해 중국부녀들이 더구나 여성답지 못하게 말이 아니게 변해버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여자홍위병이다. 북경 대원(大院:혁명가 가족들이 모여 살던 곳) 안에서 살던 ‘말괄량이’나 ‘정신 나간 계집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전통교육은 받지 못하고 혁명정신만을 배웠기 때문에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선두에 서서 두 손을 양 옆구리에 찌르고 입만 벌리면 ‘제기랄!’이고 스승이고 선배고 노선만 다르면 두들겨 패는 망나니 계집애들이 모여 여자홍위병조직을 만들었다. 당시 시대정신이 이러한 망나니 계집애들을 요구했으므로 삽시간에 전국 도처에서 그들을 본받아 여자홍위병조직이 우후죽순마냥 생겨났다. 비록 여자홍위병조직이 2~3년이 지나자 시들어버렸지만 그 영향력이 지대하다. 1980년대 심각하게 나타났던 ‘음성양쇠’ 현상이 여자홍위병조직의 출몰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남녀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인 평등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특히 여자가 기가 세고 대가 세면 남자들이 기가 죽기 마련이다. 언제 가면 중국에서 ‘양성음쇠’ 세상이 되어 “사나이를 찾아라.”는 말을 듣지 않게 되겠는지?
5    얼빠진 '차오시엔족' 표기 댓글:  조회:6451  추천:38  2010-02-12
얼빠진 ‘차오시엔족’ 표기 주간조선은 2064호(2009. 7. 20)부터 2088호(2010. 1. 11)까지 중국의 소수민족을 소개하는 글을 9기에 나누어 연재하였다. 먼저 제목부터 살펴보자. ⑨ 차오시엔족(朝鮮族·조선족) ⑧ 고산족(高山族) ⑦ 먀오족(苗族·묘족) ⑥ 만주족 ⑤ 좡족(壯族·장족) ④ 몽골족 ③ 티베트족(짱족·藏族) ② 회족(回族·후이족) ① 위구르족(웨이우얼족) 위 아홉 개 제목의 표기법에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ㄱ. 고유한문음독, 중국현지음, 국제표기, 고유호칭의 혼재. ‘고산족’ ‘만주족’ ‘회족’은 우리민족 고유한문음독에 의한 것이고, ‘차오시엔족’ ‘먀오족’ ‘좡족’은 중국 현지음(중국어발음)을 따른 것이고, ‘티베트족’은 중국어에 없는 영어(Tibet)를 비롯해 국제적인 호칭에 근거한 것이고, ‘몽골족’과 ‘위구르족’은 우리민족이 오랫동안 불러온 고유호칭이다. 이렇듯 네 가지 형식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아주 혼란스럽다. ㄴ. 괄호 안의 한문표기와 한글표기 문장에서 괄호는 보충설명역할을 한다. 저자가 ‘만주족’ ‘몽골족’에는 아예 괄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두 민족은 한국인에게 굉장히 친밀감이 있는 모양이다. ‘고산족’의 괄호 안에는 한문만 있고 현지음인 한글표기가 없다. 또 ‘차오시엔족’ ‘먀오족’ ‘좡족’의 괄호 안에는 한문도 있고 고유한문음독으로 표기하였고, ‘티베트족’ ‘회족’에는 괄호 안에 한문도 있고 현지음도 있다. ‘위구르족’의 괄호 안에 한문이 없고 현지음을 따른 한글표기만 있다. 아주 복잡하다. ㄷ. 현지음+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 ‘고산족’ ‘위구르족’이란 표현은 우리민족고유한문음독 혹은 고유호칭을 따른 것으로서 보기에 아주 자연스럽다. 이에 비해 현지음인 ‘차오시엔’ ‘먀오’ ‘좡’에다 우리 말 ‘족’을 붙여놓으니 마치 양복을 입은 사람에게 갓을 씌워 놓은 듯 우스꽝스럽다. 차라리 현지음을 따르겠으면 아예 ‘차오시엔주’ ‘먀오주’ ‘좡주’라 하는 것이 훨씬 더 부드러울 것이다. ㄹ. 단모음과 쌍모음의 표기법 박승준 조선일보 중국전문기자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에서 중국현지음표기법에 있어서 쌍모음을 없애고 단모음만 사용하기로 통일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江:jiang’을 ‘장’으로 표기한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조선일보의 이동훈 기자는 ‘苗族’의 표기에 왜 ‘먀’란 쌍모음으로 표기하였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위 네 가지 폐단으로 볼 때 한국이 중국의 호칭(지명, 인명, 민족)을 표기함에 있어서 통일적인 것이 결여되어 매우 혼란스럽고 심지어 잡탕이라도 한심한 잡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조선일보는 왜 만주족, 몽골족, 회족, 위구르족 및 한국인에게 생소한 ‘고산족’은 고유한문음독전통 혹은 고유호칭전통에 따라 표기하고, 특히 만주족과 몽골족은 한문표기도 하지 않으면서 동족이라 말하는 조선족은 우리 전통을 버리고 중국어발음에 따라 ‘차오시엔족’이라 하고 ‘조선족’을 괄호 안에 집어넣어 표기하는가는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한테 그래 만주족, 몽골족, 회족, 위구르족 및 고산족보다 정서적으로 더 멀리 느껴진단 말인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는 2007. 11. 15일자로 조선일보(A33면)에 <박광석이 왜 피야오광스인가?>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후 한국이 조선족의 민족호칭과 인명의 표기에 있어서 계속 중국어발음을 따르고 있는데, 한국 분위기는 이렇다. “정서적으로는 ‘조선족’ 혹은 민족고유이름(박광석)대로 표기하는 것이 옳겠으나 중국에서 조선족을 ‘차오시엔주’, 박광석을 ‘피야오광스’라 하지 않느냐! 그래서 현지음을 따라 표기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한국이 진정 조선족을 동포로 여기고 있는가? 또 왜 한국은 주체성과 정체성이 없이 자아중심이 되지 못하고 동포마저 상대의 입장에 서서 남의 발음에 따라 표기해야 하는가? 한국의 정신적인 줏대(얼)는 어디에 갔는가? 새로운 사대주의발상이라 말하면 듣기 거북한 일이지만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차오시엔족’과 ‘피야오광스’의 표현은 얼빠진 표기법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4    미녀와 독부 댓글:  조회:4714  추천:25  2010-02-04
미녀와 독부      중국어 속담에 “만 가지 악 중에서 음란함이 으뜸이고, 가장 독한 것은 여자의 마음이다.(萬惡淫爲首, 最毒婦女心)”라는 말이 있다.  옛날 중국인은 일반 부녀보다 미녀는 바람기가 가득하고 음란하고 또 독하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서 <<수호전>>에 등장하는 반금련, 염파석, 반교운, 가씨 등 미녀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호전>>에서 반금련의 자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른봄 버들잎 같은 눈썹에는 언제나 운우의 정을 그리워하는 듯 한과 시름을 품고 있고, 춘삼월 복사꽃 같은 얼굴에는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었다. 가는 허리는 걸을 때마다 하늘거렸고, 도톰한 입은 향기를 뿜어 벌과 나비가 미친 듯이 날아들었다.” 기타 미녀들의 자태도 거의 이와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을 모두 음란한 것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실제역사사실이든 가공이든 하여튼 모든 남자들이 미녀를 품어보고 싶어 하면서도 미녀에게 이상할리만치 편견을 갖고 있고 또 조건반사적으로 미녀를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눈썹이 이른봄 버들잎 같은”여자를 보게 되면 반사적으로 그녀가 “늘 운우의 정이 그리워 한과 시름을 품고 있다.”고 믿게 되고, “얼굴이 복사꽃 같은” 여자를 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다.”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반금련은 자색이 뛰어난데다가 요염한 기운이 넘쳐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서문경은 반금련을 처음 보자마자 그만 몸이 흐믈해졌고 그녀에게 넋을 잃고 말았다. 서문경이 퇴자를 맞을까봐 두려워 머뭇거리자 반금련이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주동이 되어 “공연히 소란스럽게 하실 필요가 없어요, 정말로 저를 꾀어보려고 하세요?”라고 말하자 두 사람은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한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염파석과 장문원, 반교운과 배여해, 가씨와 이고가 간통했는데 모두 남자들이 여자에게 혼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이외에 <<수호전>>에 등장하는 미녀인 이사사와 백수영은 작부와 기생이어서 모든 남자를 지아비로 삼는 여자였다.  다음 미녀는 대개 독부라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실제로 <<수호전>>에서 반금련은 제 손으로 무대랑을 독살하였고, 반교운은 애매하게 석수를 모함하였다. 염파석은 송강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안달하였고, 백수영은 뇌형을 희롱하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그의 어머니까지 구타하였다. 가씨는 관청에 출두하여 남편 노준의를 무고하고 증인으로 나서 자칫하면 노준의는 죽음을 뻔 했다.  한나라 초기 여후(呂後)는 남편인 유방이 죽자 애첩이었던 척부인을 산채로 돼지우리에 처넣었다. 개국공신이었던 한신도 그녀의 꾀임에 빠져 죽었다.  무측천은 더욱 악독했다. “호랑이가 아무리 독해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딸을 제 손으로 죽이고, 태자 이현(李賢)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젊어서는 물론이고 노인이 되어서도 젊은 남자들을 끌어들여 난륜을 하는 등 음란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중국인은 미녀 하면 음란함이 떠오르고 독부라는 인식이 뿌리 깊다. 민간에서는 미녀를 며느리로 맞으면 집안에 화를 불러온다고 믿고 있어 설사 당사자들이 마음에 들어 해도 부모나 형제들의 관문을 넘지 못해 혼사가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과 조선에서는 일등 신붓감으로 신체가 건강해 보이고 엉덩이가 팡팡하고 젖가슴이 풍만하고 입술이 두툼한 여자를 꼽았다. 마치 조선영화<<사과 딸 때 처녀>>에서 600공의 주인공 순희의 어리무던하게 생긴 얼굴에 입술이 두툼해서 말수가 적어 보이고 젖가슴이 풍만하고 엉덩이가 팡팡해서 애내기를 잘할 것 같은 형상이 일등신붓감이었다.  미녀들이 음란하고 독하고 일등신붓감으로 외면당한 데는 그녀들의 탓보다 남자들의 탓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사내다운 호한들은 대개 여자를 가까이 하면 영웅이 될 수 없고 진정한 사내가 아니라고 여자를 멀리했다. 그리하여 미녀들은 할 수 없이 백면서생이거나 병신 같은 남자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백면서생이거나 병신 같은 남자들은 사내다운 면이 없어 그녀들의 생리적 욕구를 포함해 기타 사내에 대한 여러 가지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래서 그녀들의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진정한 호한들이 그녀들을 멀리하므로 할 수 없이 반금련과 같은 미녀는 건달인 서문경(전통관념으로 보면 건달이지만 요즘 시각으로 보면 여러모로 잘나가는 인간이었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문경도 무대랑이 간통현장에 들이닥쳤을 때 놀란 나머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었다. 반금련은 이렇게 원망한다. “평소에는 권술과 봉술을 잘한다고 떠벌리더니 급해지니까 종이호랑이처럼 아무 쓸모도 없네. 저렇게 놀라는 꼴이란!”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악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미녀들이 늘 운우의 정을 그리워하여 음란하고 독한 마음을 갖도록 만든 장본인은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남분여장하고 무대에 올라 앵앵거리는 여인의 목소리로 관객을 귀신홀리듯 인기 높았던 전통희극을 보면 중국전통사회모습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3    중국인의 인내 처세술 댓글:  조회:5634  추천:26  2010-01-06
중국인의 인내 처세술 중국인은 화가 날수록 웃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중국인의 인내를 두고 생겨난 것이다. 중국인이 화가 나도 반드시 웃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세상에서 인내심이 가장 강한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전국시대 위나라 방연은 귀곡자에게서 함께 병법을 배운 손빈이 자기보다 지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질투했다. 그의 음모는 바로 손빈의 슬개골을 깎아내어 병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손빈은 반신불수가 되어버렸다. 방연은 이젠 경쟁대상이 아니니 질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시름 놓았다. 허나 손빈은 참지 못할 수모를 당하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 유명한 <<손자병법>>을 지어냈으며 방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하게 되자 오나라에 끌려가 부차의 노예로 살아야 했다. 구천은 부차에게 온갖 비인간적인 수모를 당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구천이 심지어 부차의 대변을 맞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허나 구천은 수모를 참고 견디어 훗날 와신상담하여 끝내 부차를 멸망시켰다. 한신은 건달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이를 ‘사타구니 아래의 치욕’이라 불렀다. 훗날 한신은 이 일을 이렇게 변명하였다. “나는 장사일지니 나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 내 어찌 그 사람을 죽일 수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사람을 죽인다 하더라도 이름이 드러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참고 오늘의 공을 이룬 것이니라.” 사마천은 사서를 지으려고 여러 차례 한무제에게 원고를 바치면 제는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제는 사마천을 죽이는 대신 궁형(宮刑)을 가했다. 사마천은 남자로서 가장 치명적인 수치를 당하고도 참고 견디어 끝내 <<서기>>를 완성했다. 당대(唐代) 누사덕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남겨 유명해진 인물이다. 여기서 <<자치통감>>에 실린 그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말해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누사덕은 동생이 대주자사에 임명되어 부임지로 떠나게 되자 동생에게 물었다. “나는 재상의 자리에 있고 네가 주목(州牧)이 되었으니 우리 집안에 대한 황제의 은총이 지극하여 필시 사람들의 질시를 받을 것이다. 너는 앞으로 사람들의 질시를 어떻게 피할 것인가?” 동생이 대답했다. “지금부터 어떤 사람이 내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화내거나 싸우지 않고 얼굴에 묻은 침을 닦기만 하겠나이다.” 이 말을 들은 누사덕이 얼굴빛을 흐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우려하는 바이다. 어떤 사람이 네 얼굴에 침을 뱉는 까닭은 너에게 단단히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가 침을 닦으면 그의 뜻에 반감을 품는 것이므로 그의 분노를 더욱 크게 하는 것이니 침을 뱉으면 닦지 말고 스스로 마를 때까지 기다리고 웃어넘겨야 한다.” 후세 사람들이 누사덕의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에 침을 뱉어도 닦지 않고 저절로 마르기를 기다린다.’는 말을 들먹인다. 누사덕이 살아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촌놈’ ‘멍청이’이라고 욕을 많이 했다. 하지만 누사덕은 겉으로는 ‘촌놈’ ‘멍청이’인 것처럼 보였으나 속내는 아주 교활한 사람이었다. 불교를 숭상했던 무측천이 조서를 내려 온 나라에서 가축도살을 금지한 적이 있다. 당시 누사덕은 공무 수행 차 섬서 지방에 갔는데 연회석상에 양고기 요리가 오른 것을 보고 주방장에게 “웬 일인가?”고 물었다. “이것은 늑대에게 물려 죽은 양으로 만든 요리이나이다.” 주방장이 대답했다. 잠시 후 또 물고기 요리가 나오자 누사덕이 따져 물었다. “이것은 표범에게 물려 죽은 물고기입니다.”는 주방장의 말에 누사덕이 화를 내며 말했다. “이 멍청한 녀석아, 왜 수달에게 물려 죽은 물고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주방장이 시켜주는 대로 말을 바꿔하자 누사덕이 그 요리들을 다 먹어치웠다.
2    그 때 그 시절 해프닝 댓글:  조회:5111  추천:23  2010-01-04
그 때 그 시절 해프닝 2007년 2월 말에 있었던 일이다. 대만 모 신문사 기자가 강원도 스키관광을 왔다가 갑자기 맹장이 터져 복막염 때문에 서울 00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국어 한 마디도 모르는 대만기자는 영어를 잘하지만 의사나 간호사들이 회화가 되지 않아 내가 아침저녁으로 회진시간을 맞춰 중한, 한중 통역을 해주었다. 보름간의 치료를 거쳐 귀국하게 된 그 분이 나에게 사례금도 푼푼하게 주었고 귀국 전날 저녁 근사하게 한 턱 쏘았다. 그 분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대륙이 궁금했고 나도 대만의 이모저모에 대해 알고 싶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남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나랏일을 얘기하다가 서로 지나온 인생 얘기로 화제가 돌았다. 나는 그 분한테 시골소학교 3학년 때 문화대혁명을 맞아 학업이 중단을 맞다시피 했고 초중부터 요구촌 시골학교에 민족연합반을 만들어 한어로 수업(초중이지만 과목이란 어문과 수학밖에 없었음.)받다가 동불사고중졸업을 반년 앞두고 다시 조선반으로 옮겨져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데다 만날 이불짐을 둘러메고 농사일을 지원했던 굴곡 많은 학창시절을 얘기해 주었다. 그 분은 나보고 10년 동란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대학을 나왔는가? 고 물었다. 나는 급해 말고 차분하게 나의 과거사를 들어보라고 권했더니 흥미 있다고 얘기를 이어가라고 달라붙는다. 나는 1975년 7월 12일 동불사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시기 학생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명색이 고중졸업이지만 편지 한 장 변변히 쓸 줄 모를 정도로 수준이 영 개판이었다. 중학교시절 남들이 다 드는 공청단조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낙후분자였다. 실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폐인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명색이 고중졸업이라고 정치 대장이 하는 말이 나의 졸업을 은근히 기다렸단다. 생산대 회계로 써먹을 계획이란다. 나는 회계사업이 골머리가 아파날 것 같아 거절했다. 화가 난 정치 대장이 나보고 5년 동안 양치기를 하란다. 내가 왜 아까운 청춘을 양과 같이 5년을 보내야 하는가? 고 대들었더니 김 서기 막내아들이 정치 각오가 덜돼 먹었다고 비판한다. 아무튼 나는 한 달 양치기 하고 그만 두었다. 정치 대장이 당의 호소에 거부하는 나를 괘씸해 기양저수지전투대에 보냈다. 보름 만에 나는 또 당의 호소를 거슬러 집에 돌아왔다. 그 후 농촌에서 멀쩡한 밭을 사다리 식 제전을 만들고 벼 가을걷이 지나자 조전을 만드는 일선에서 전전하다가 1976년 2월 운이 좋게 촌위생소에 취직했다. 본래 타고난 체질이 약해 농사일이 버거웠던 나는 남들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그 해 10월 19살에 용정현 제4기 맨발의사학습반에 입학하게 되어 이불짐을 메고 용정현병원에 가서 1년 간 의사공부를 하는 행운을 맞이했다. 맨발의사직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민감한 반응이 있는 환자에게 어떤 주사는 금방 알레르기 때문에 급사하는 의료사고가 생길 위험이 커 늘 속이 조마조마했다. 한밤중에도 거리가 먼 이웃마을에 왕진을 다녀야 했다. 병보고 처방 떼고 약을 짓고 계산하고 돈 받고 주사 놓고 약 구입하면서 일인 다역을 소화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밤중에 한족마을에 왕진가면 수고했다고 요리를 볶고 술상을 갖추는데 위생이 불결해 입에서 거리가 멀지도 않은 목구멍에 도무지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먹지 않으면 성의를 무시한다고 곱지 않는 눈총을 받아야 한다. 께름직한 기분으로 귀가해 몸이 고달픈데 잠은 자꾸 도망간다. 말하기가 민망하지만 나는 19살 때부터 아기 낳는 장소에 많이 다녔다. 당시 도시에 시집간 여성들도 대다수가 본가인 시골에 와서 몸을 풀어 더군다나 내가 다니는 차수가 많아졌다. 나는 산파가 아니지만 정맥주사조차 놓지 못하는 산파들 때문에 내가 나타나야 했다. 산모가 힘이 떨어지면 정맥에 포도당을 밀어야 하고, 쇼크하면 구급치료를 해야 했다. 시골에 위생시설이 엉망이라 새파란 총각이 해산장소에 나타난다고 산모음부를 가리느라 먼지가 풀풀 나는 탄자를 가리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기왕에 맨발의사 얘기가 나온 김에 두 가지만 더 말해보겠다. 우리 마을에서 7리 떨어진 상촌이란 마을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되게 순진하다. 내가 21살 때 있었던 일이다. 한 부녀가 17살 먹은 자기 딸애가 아래가 끄는 병을 앓고 있으니 치료해 달라고 청을 들었다. 가렵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적충병(滴蟲病)을 시골 아낙네들은 아래가 끈다고 표현한다. 내가 중의처방책을 뒤적여 여섯 첩을 지어주었는데 병이 치유되었다고 닭 한 마리 들고 인사 왔다. 이 일이 한 입 두 입 입소문을 탔다.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졌다. 21살 되는 총각이 일시에 부녀병을 잘 치료하는 ‘명의’로 부상했다. 나는 겁이 났다. 이러다가 장가도 못 가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나는 재간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천진하고 우둔했다. 만약 그 재간을 계속 써먹었더라면 지금쯤은 이렇게 애타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계를 유지하느라 애쓸 필요 없이 큰 재산을 모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맨발의사 하느라 상상도 못할 일들이 많아 지금까지 그때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2살 되는 해 무더운 한여름에 타지에 시집 간 한 여인이 시골본가에 와서 몸을 풀었는데 산후출혈이 심했다. 친정엄마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생명이 위급하단다. 내가 그 집에 도착하니 미쳐 출혈을 수습하지 못해 온돌에 온통 피투성이었다. 지독한 피비린 냄새가 진동했다.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산모가 정신이 말짱하기에 총각을 꺼려할 것 같아 눈에 흰 천을 가리고 붕대로 아래를 틀어막고 25% 포도당을 정맥에 밀고 지혈제를 근육에 놓는 등 구급치료를 했다. 다행이 생명에 지장 없었다. 새파란 총각이 산후출혈을 처리하고 나니 그날 저녁 나는 밥을 먹지 못했고 싱숭생숭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후 그 산모는 나와 마주치면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나도 민망하기 마찬가지였다. 1977년 말경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도전해 보았지만 중학시절 공부를 너무 허술하게 했기에 인식분해나 방정식이 떠오르지 않았고, 오른손 왼손 법칙을 배운 기억은 있는데 가물가물했고, 역사는 진시황을 배우다 말았고, 지리는 아예 한 폐이지도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시험을 연거푸 해마다 보았으나 기초가 너무 빈약해 번번이 낙방이었다. 1978년 12월부터 나는 중학시절 한 마디도 배우지 못했던 외국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진전이 빨랐다. 그래서 일본어 전공에 도전했다. 해마다 일본어성적은 문제없었으나 총점이 몇 점씩 모자랐다. 그 주요 이유는 중학교를 한족반에 다녔기에 한어로 시험 보니 어문성적이 120점에서 50점을 넘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3년 처음 조선어로 시험을 봤는데 입시제도 회복 7년 만에 성공했다. 그 과정이 복잡했다. 1979년 봄 전주 맨발의사시험에 합격했으나 1981년 맨발의사직업을 때려치우고 입시에 뛰어들었는데 또 낙방했다. 소학교 교사를 하란다. 한 학기 하고 또 그만두고 입시에 매달렸다. 졸업분배는 연변1중이었다. 운이 좋게 첫 해부터 담임교사를 맡았다. 3년 동안 모든 정력을 아낌없이 제자들에게 쏟아 부었다. 경험이 전무 한 상황에서 신입생을 맡아 큰 차질이 없이 무난히 졸업시키니 학교지도부에 신임을 얻어 재차 담임을 맡게 되었다.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어 두 번째부터는 담임사업을 멋들어지게 해재꼈다. 학년 일이 등이 나왔고 체육제일 위생제일 우수반급 등 하여튼 한 학기에 상장을 무려 11개나 탔다.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과가 컸다. 그렇게 ‘잘 나가던’ 내가 당시 거세게 불어치는 하해 바람의 유혹에 못 이겨 1990년 4월 초경 사표를 제출했다. 학교지도부의 거듭 만류권고를 뿌리치고 1990년 5월 20일 교단을 떠나고 말았다. 지난 20년간 별로 해낸 일도 없이 바쁘게 보내느라 제자들을 잊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지난 9월 중순 중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제자 이설화(부반장)입니다. 10월 4일부터 5일까지 연변1중 졸업20주년 동창만회를 열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참석할 수 있습니까?” “두 말이면 잔소리지 10월 3일 내가 비행기로 날아가겠다.” “아이고 큰 시름 덜었습니다. 근데 꼭 약속을 지켜주세요.” “암, 그렇게 하구 말구” 나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제자와 한 약속을 지켰다. 20년 만에 제자들을 만나 감개무량했다. 일본 도시바에 아시아담당으로 근무하는 제자, 광동 일본기업에서 연봉 인민폐 30만원을 받는 제자, 교수가 된 제자, 정부 국장 부국장으로 승진한 제자. 불혹의 문턱에 가까운 제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한창 중견역할로 빛을 발하고 있어 가슴이 뿌듯했다. 3박4일 동안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나는 연변1중 교사생활이 3년 10개월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입생을 맡아 졸업시킨 행운이 있다. 이는 나에게 있어서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재산이다. 나는 본래 7년 대학입시를 본 의지와 의력을 가장 큰 재산으로 간주하고 살아왔다. 즉 무슨 일이나 내가 마음먹으면 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고 좌절에 부딪힐 때마다 헤쳐 나아가는 동력이 되어왔다. 제자들의 동창만회에 다녀온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7년 대학 입시는 내가 인생을 걸어가는 힘이 될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해 놓은 재산이 아니다. 연변1중제자들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남겨놓은 가장 큰 재산이리라. 앞으로 가령 지금 내가 한창 몰두해 쓰고 있는 역사소설이 세상의 빛을 본다 해도 제자를 남긴 재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변문학(2009.12)>>
1    社會와 會社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4490  추천:37  2009-08-06
會社와 會社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 조선족 칼럼니스트 수년 전부터 중국정부가 농촌과 도시의 최소 행정구획을 ‘사회구역’으로 나누고 있는데 필자는 여기서 ‘社’문화의 유래를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허신이 <<설문해자>>에서 ‘社’를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해석했다. 이 해석이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에 깃든 함의는 심오하다. 다시 말해 김정룡이 고향 동불사에 가서 흙을 쌓아놓기만 하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인류가 부족사회에 진입해서 대지의 일정구역을 자기네 부족민의 삶의 터전으로 간주했는데 그 일정구역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타부족에게 알릴 징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최초에 부족이 차지하고 있는 땅 한 곳을 선택해 흙을 뫼어놓는 것으로 징표로 삶았다. 그러다가 단순히 흙을 쌓아놓는 것으로 부족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부족하게 인식되어 쌓아놓은 흙 위에 나뭇가지를 꼽아놓기도 하고 또 일정 세월이 흘러 집을 짓고(사당) 부족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한 개 부족의 족장은 이 ‘사’ 내에서 부족민을 거느리고 제사를 맡고 농사를 책임지고, 부족민은 족장의 인솔 하에 ‘사’에 모여 제사를 올리고 농사를 짓는다. 대체적으로 한 개 부족이 공동한 ‘사’ 내에서 같은 언어, 종교, 생활관습을 갖고 공동한 생활을 영위한다.  ‘社會’란 부족민들이 ‘사’에 모여 공동생활을 영위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社’란 글자가 흙 ‘土’에 볼 ‘示’ 변이 붙었을까? 허신의 해석에 의하면 ‘示’는 갑골문에서 위에 하늘을 의미하는 가로에 하늘에서 뭔가 내려오는 뜻을 나타내는 세로 세 줄로 형성되었는데 이는 종교적인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로 ‘示’ 변이 붙은 모든 글자(祈, 禱, 福, 祖 등) 전부가 종교적인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社’란 인류가 부족을 형성하고 일정한 땅을 차지하고 그 땅 내에 모여 제사 같은 종교 활동과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영위해 간다는 뜻이다.  고대 인류는 ‘社’ 내에서의 제사를 매우 중시했는데 우리가 말하는 행복이란 ‘福’이 본래는 제사음식이며 고대사회에서 제사음식 차원을 따져 빈부를 가늠할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한족들은 ‘福’자를 출입문이나 창문에 붙여놓고 행복을 빌고 있다.  동양 삼국에서 ‘社’문화의 발원지는 중국이지만 근대문명이후 ‘社’문화를 계승 발전시킨 것은 일본이다.  ‘社會’를 거꾸로 말하면 ‘會社’인데 일본인들이 서양으로부터 근대기계문명과 유통문명을 받아들이면서 만들어 낸 경영성적인 기업을 ‘회사’라 이름 지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란 부족민이 ‘사’에 모여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원시적인 문화형태를 의미하는데 비해 ‘회사’란 근대문명이후 인류가 새로운 생존방식으로 모여서 ‘사’를 형성하고 삶을 영위하는 인위적인 문화형태를 뜻한다는 것이다. 중국인이 말하는 ‘股分’을 일본인은 ‘株式’이라 하는데 말 그대로 여럿이 모여 포기 식으로 ‘사’를 운영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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