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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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백의민족과 개고기 단상 댓글:  조회:1311  추천:0  2021-10-11
백의민족과 개고기 단상 김정룡  인류가 동물을 가축화 한 시기는 대략 1만 년 전의 일이라고 하는데 이 시간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것과 맞물린다. 아마 인류는 농경을 시작하면서 동물의 힘을 빌리고 이용하는 아이템에 의해 동물가축화 문화가 생겨났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각 대륙마다 동물을 가축화 한 종류가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온대대륙성 기후 지대인 유럽대륙과 중국의 중원 지역에서는 대략 13종의 동물을 가축화 했던데 비해 남미 대륙에서는 말을 구경한 것이 16세기 스페인 침략자들이 갖고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며 실제로 남미는 라마 외에 기타 동물을 가축화 한 종류가 매우 적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의민족도 농경문화가 어림잡아 5천 년 이상이니 그때부터 동물을 가축화 했을 것이다. 따라서 백의민족은 소, 돼지, 개, 닭 등 그 종류가 많지는 않았다. 백의민족은 가축 중에 소를 가장 소중하게 간주했다. ‘애비 없이는 살아도 소가 없이는 못 산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소가 농경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 컸다. 돼지를 키우는 목적은 주로 팔아서 살림살이에 보태는 것이었고, 닭도 생계유지 수단의 하나의 ‘도구’였다. 가축 중에 똥개는 순전히 육식용이었다. 본문에서는 주로 개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보련다. 개는 7대주 4대양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동물이며 그 종류도 수천수만 가지다. 따라서 종류에 따라 개의 역할도 달라진다. 캐나다 북부 지역에서는 허스키라는 개를 수레를 끄는 ‘일꾼’으로 활용하고 있다. 과거 전 지구적으로 개를 키우는 것은 집을 지키는 수호역할을 목적으로 했다. 일부 부잣집들은 덩치가 작은 개를 반려동물로 키웠다. 현대사회에서는 인류의 삶이 여유가 생김에 따라 한 사람 건너 애완견으로 개를 키우고 있다. 도시 길가에서 한참 애기를 안고 다닐 나이 여성들이 개를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일상화 되고 있고 아이를 태우는 유모차에 개를 태우고 다니는 여성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진짜 개 팔자가 상팔자인 시대가 왔다. 가축 중에 개가 인간과 가장 ‘정’이 깊은 동물이다. 주인이 가난하다고 배신하는 개는 세상에 없다. 자기를 예뻐하면 꼬리를 살살 흔들며 애교를 부린다. 개를 오래 키우면 그 개는 자기의 목숨보다 주인의 목숨을 더 중히 여기는 개도 있다. 한 독거노인이 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분명히 그 개가 수명을 다 하여 죽게 생겼는데도 주인을 지키려고 억지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 확연했다. 주인이 너무 안타까워 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먼저 저 세상에 가면 나도 따라서 네가 있는 곳에 갈 것이니 시름 놓고 천국에 가거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개는 금세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인간과 개에 관한 미담이 많고도 많다. 그래서일까? 사람이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거나 몰상식한 짓을 하면 ‘개보다 못한 자식’이라고 비난한다.  한편 인류는 키우는 가축을 도살하여 육식으로 먹는데 그 중에는 금기하는 동물도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에 관련하여 여러 설이 있다. 아브라함의 장남인 이스마엘은 하인 하갈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스마엘이 14세 때 본처에게서 이삭이 태어나자 쫓겨났다. 모자가 정처 없이 사막을 떠돌고 있을 때 갈증에 시달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찰나에 새끼를 낳은 어미 돼지가 나타나 이들에게 젖을 먹여 살아났고 그 후대들이 지금의 아랍민족이며 그래서 아랍민족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도 그냥 하나의 ‘설’일 뿐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  인류가 문명시대에 진입한 이래 금기사항을 만들어낸 것은 샤머니즘(미신) 사상과 종교의 계율에 의한 것이다.  이슬람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개고기를 예를 든다면 서양 사람들은 거의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개고기를 먹는 민족은 보편적이 아니라 매우 드물다. 그 중 개고기를 먹는 민족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이 백의민족이다.  백의민족은 본래 개고기를 영양식, 보양식으로 간주해왔다. 한국에서도 60~70년대까지만 해도 신체가 허약하면 의사들이 개고기를 드시라고 권유했을 정도로 개고기를 많이 먹었다. 중국에 이주해간 조선족은 개고기를 매우 즐겨 먹었다. 개혁개방 전 시골마을에서는 구질구질한 날씨 때면 동네 남정들이 모여 개추렴을 자주 했다. 필자의 모친은 해마다 봄철이면 개엿을 대려 남편에게 공대했다. 개혁개방 이후 연길에서는 아래개방지에 전문 개시장이 생겨났고 개고기 전문식당들이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1990년대 초 연길 00개고기 전문식당은 하루 평균 20여 마리 개를 잡아 들일만큼 장사가 호황이었다. 중국 한족들은 보편적으로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연변의 개고기가 자급자족이 되지 못해 연변을 벗어난 일명 ‘안쪽’지방에 가서 개를 구매해 공급하여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중국조선족은 보편적으로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 중국에서의 음식습관이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도 개고기를 찾아 먹는다. 그런데 앞으로 조선족은 한국 땅에서 개고기를 영원히 먹을 수 없을 날이 올 것 같다.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께서 청와대 주례회의 때 ‘이젠 개고기 식용 금지 검토할 때가 왔다’고 말해 관련 부처에서 검토에 착수했다. 한국대통령의 발언은 국민정서를 감안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개고기 식용 금지가 곧 실시 될 것으로 예측된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개고기에 대한 정서가 어떠한 지부터 살펴보자.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 사람들이 본래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최근 수십 년 사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그 원인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기독교를 믿는 신도들 중 본래 먹던 개고기를 신앙에 의해 금기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과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으면 재수 없다는 ‘설’을 믿고 개고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짙다. 셋째, 한국에서 ‘서울88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자 IOC 관계자들이 사전답사를 할 때 대로변에 개고기음식점이 있는 것이 유럽국가 선수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라고 지적하고 심지어 개고기를 먹는 민족은 야만이라는 여론까지 떠돌아 정부가 나서 도로변에 개고기음식점을 후미진 골목으로 이전 명령을 내렸고 그때부터 ‘개고기식당’간판이 사라지고 ‘보신탕집’으로 바꿔버렸다.  국제적인 대잔치인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서양인들이 기피한다는 이유로 개고기문화를 완전히 바꿔버리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넷째, 2000년대 들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자 한 사람 건너 개를 키울게 되었고 이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 뿐더런 동물 관련단체가 나서 개고기 식용 금지를 정부에 제안하고 있는 것도 개고기를 먹지 않는 바람에 부채질 하고 있다.  한국에서 드물게 운영되고 있는 개고기음식점들은 간판으로 ‘보신탕집’이라고 고쳐 달고 영업을 하는데 비해 한국 내 조선족 밀집지역들에서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개고기음식점들은 지극 소수만 ‘보신탕집’이란 간판을 걸었을 뿐 절대다수는 그냥 ‘중국식’으로 ‘연변개고기’ ‘목단강개고기’, ‘진달래개고기’ 이런 식으로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해왔다.  그런데 앞으로 이런 간판들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것 같아 조선족사회 음식문화에도 큰 타격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동북아신문
84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댓글:  조회:2549  추천:5  2019-11-22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평론가,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가 한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이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나치정권의 핍박에 의해 프랑스로 망명 갔다가 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시카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면서 등 저서를 펴냈다. 은 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고 나서 지은 것이며 이 책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인데 독자들은 원제보다 부제에 더 끌렸다. 사람들은 흔히 악은 무시무시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상식인데 악의 평범성이라니? 그럼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본래부터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그럴 수 있단 말이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악의가 없어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한나 아렌트가 이런 주장을 펼쳤을까?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유대인 학살 계획을 지휘하던 최고 권위자였다. 당연히 600만 유태인을 ‘처리’하기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는데 주도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아이히만은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당시 그를 체포한 모사드 관계자와 그를 재판하는 판사 및 방청객들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고 모두 굉장히 의아했다. 왜냐면 사람들은 그를 굉장히 흉악하게 생기지 않으면 적어도 냉엄하고 독기 있는 건장한 게르만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는데 사실은 정반대로 무척 왜소하고 기가 약해보이고 얼굴도 매우 평범해 보이는 보통 남자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무시무시한 죄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를 마주한 사람들은 일제히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무지 믿기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악인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은 동서양이 따로 없다. 개혁개방 전 중국에서 항일 혹은 국공내전을 그린 영화는 전부 획일적으로 상대편을 흉측하거나 흉악스러운 모습으로 각색하였다. 한국영화도 마찬가지다. 악인의 모습은 전부 보기에도 무섭고 흉측스런 인간상이다. 등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족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답이 보인다. 문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상상으로 자리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이 너무나 생각 밖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가 연구해낸 것이 바로 ‘악의가 없어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곧 ‘악의 평범성’이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악인이 되는가? 한나 아렌트는 이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내놓았다.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현행 시스템이 어떤 문제가 있고 내가 어떻게 고쳐 나아갈 것인가에 사고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다. 십분 맞는 말인 것 같다.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절대다수가 현행 시스템에 순응하면서 그 주어진 시스템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도모한다. 만약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치려고 들면 잘리기 십상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잘리면 당장 먹고사는 생계가 위협받기 때문에 현행 시스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거니와 주어진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고 고치려고 든다면 잘리지는 않아도 적어도 승진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전자에 무게를 둘 뿐 후자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특히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박근혜 정부 관료들, 삼성의 중견 간부들 사례) 현행시스템에 항거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다가 악인이 되어 철창신세를 지는 사례를 우리는 흔하게 목격하지 않았는가! 한편 맹자는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반대로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악의 존재라는 ‘성악설’로 맞섰다. 공맹을 추종하는 계열에서는 ‘성선설’을 믿고 상앙과 한비자를 추종하는 법가 계열에서는 ‘성악설’을 받아들여 2천여 년 동안 논쟁거리로 되어 왔다. 기독교는 성악설을 주장한다. 인간이 악의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해야 구원을 받아 선인(善人)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 이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다. 그러다가 요즘 이란 책을 읽고 나서 이 두 주장이 기초가 부실한 빌딩이 무너지듯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전혀 부질없는 ‘설’이라는 느낌을 통렬하게 받았다.
83    대한민국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 가수 조영남 댓글:  조회:3481  추천:7  2019-10-18
대한민국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 가수 조영남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2) 인간은 흔히 누가 뭐래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기 싶은 것만 듣는 편파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요즘 조국사태를 보면 이해가는 것이 조국을 지지하는 쪽은 조국의 장점만 보이고 들릴 것이고, 조국을 반대하는 진영은 조국의 허물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것이다. 나는 지금 요즘 대한민국을 가장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조국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뭐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가수 조영남의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눈치 빠른 독자께서는 서두를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릴 것이라 믿는다. 가수 조영남은 잘나가다가 고희 넘은 나이에 화토그림이 대작논란에 휩싸여 지금 은둔 상태에 있다. 원심과 항소심 모두 두 번이나 재판 받았으니 결과는 무죄이나 도덕적으로 치명타를 입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도 일부 돌아서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이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 그의 과거마저 부정하고 싶지 않아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로 했다. 유명가수지만 일등 한 번도 먹지 못한 조영남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방송인 KBS에 두 가지 큰 음악프로가 있는데 하나는 매주 월요일 저녁 10시 있는 ‘가요무대’이고 다른 하나는 일요일 저녁 6시 방송하는 ‘열린음학회’이다. 그런데 ‘가요무대’에 가장 많이 출연한 가수는 주현미이고 ‘열림음악회에 가장 많이 출연한 가수는 조영남이다. 주현미는 히트곡이 너무 많아서 손꼽을 수 없을 만큼 유명하다. ‘가요무대’에 가장 많이 출연한 것은 십분 이해가 간다. 조영남은? 히트곡이란 달랑 ‘화개장터’ 하나다. 이 노래가 히트 칠 수 있었던 것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고질적인 갈등에 화합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히트곡이란 달랑 한 수밖에 없는 그가 왜 유명가수로 활동해왔을까? 조영남은 충청도의 한 조씨 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말대로 하면 믿거나 말거나 서울음대를 다녔다. 그러니까 어느 노래자랑에서 우승하고 가수로 데뷔한 ‘아마추어 가수’는 아니라는 얘기다. 조영남이 유명해진 계기는 1970년대 초반 미8군 위문공연에서 ‘딜라알라’를 부른 것이었다. ‘딜라알라’는 본래 톰존슨이 부른 노래인데 조영남이 한국어로 번안해서 불렀다. 이 노래를 부른 덕분에 한 목사의 눈에 들어 미국유학까지 다녀온다. 그 후 조영남은 숱한 외국가요를 번안해서 부른 유명가수로 떠올랐다. 현대사 한국가요계를 두 가지 산맥으로 분류하는데 한 부류는 나훈아와 이미자를 대표하는 민족정서를 잘 담고 있는 트로트이고 다른 한 부류는 조영남과 패티 김으로 대표되는 외국가요를 한국사회에 접목시킨 것이다. 이 정도면 유명할 만하다. 그렇지만 명색이 유명가수 생애에서 일등 한 번도 먹지 못했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나는 가수로서의 조영남은 별로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조영남이 나의 좋아하는 사람들 리스트에 올랐을까? 유명작가는 아니지만 가장 솔직한 사나이 미국 가는 것이 별 따기 만큼 아니더라도 엄청 힘들었던 시절 조영남은 아메리카 땅을 밟는다. 노래 공부 위해서가 아니라 신학 공부 위해서다. 그는 7년 동안이나 예수를 배웠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 모태신앙에다 무려 7년 예수를 배웠으니 철두철미한 예수쟁이 될 만했다. 그런데 그는 예수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유학공부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올 때 라는 책을 집필한 원고 한 뭉치를 보따리에 정중히 넣어갖고 귀국했다. 마음이 굉장히 설레고 들떴다. 제딴에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예수의 샅바를 잡은 사람으로서 엄청 히트 칠 것이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정작 책이 시중에 나왔는데 반응이 굉장히 싸늘했다. 책가위에 화투 그림 흙싸리를 디자인했다. 본인은 굉장히 신경을 써서 디자인했건만 보는 사람들은 아주 시큰둥했다. 인세가 엄청나리라 기대했는데 시쳇말로 망했다. 한국사회에서 인기를 끌지 못한 책이 어찌하다가 바다건너에서 굴러온 나의 시야에 걸려들어 흥미진지하게 읽었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한 계기는 재미있게 서술한 측면도 있지만 나에게는 기독교와 예수를 이해하는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요내용과 결론은 자신이 모태신앙자이면서 7년 동안 예수를 배웠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책 곳곳에서 이런 뜻이 아주 솔직하게 묻어나고 있다. 조영남은 가수이지만 책을 참 재미있고 솔직하게 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편 조영남은 그냥 평범한 ‘딴따라’가 아니라 공자, 노자, 부처, 맹자, 장자, 아리스토델레스, 플라톤 등 고전 인물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지식인이다. 지식도 있고 솔직하면서도 재미있다는 것이 조영남의 책에 대한 나의 평가이다. 한 권의 책 놓고 하는 평가가 아니다. 조영남은 이란 책을 지었다. 미대 졸업생은 아니지만 현대미술에 대해 평론할 만큼 지식을 갖췄으니 미술에 대해 아마추어는 아니다. 조영남의 또 다른 책 한권이 있는데 제목이 이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의적인 거짓말이든 고의적인 거짓말이든 하지 않고 100% 솔직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 거짓말을 몇 퍼센트 하면서 살까? 각자가 다르고 이에 대한 통계는 없다. 조영남은 자신은 80% 이상 솔직하다고 말한다. 이에 객관의 평가는 후한 편이다. 솔직한 사람도 보편적으로 책을 집필할 때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털어놓는 것이 50%에도 못 미친다. 조영남은 80% 이상이라고 하니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다. 왜 굳이 프로숫자까지 들먹이면서 그를 논하고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 사회 여느 분야에 모두 친구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혼자서 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릴 적부터 다른 아이와 잘 어울릴 수 있고 친구를 잘 사귈 것을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임을 알 수 있듯이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성공한다 . 조영남은 대한민국에서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친구숫자를 놓고 논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각계각층에 모두 친구가 있기로 유명하다. 본인이 ‘딴따라’이기 때문에 예술 분야의 친구는 물론 엄청 많다. 섹시봉 가수 그룹 인물들과 가장 친하고 또 패티 김 가수와 가장 잘 친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물급 정치인 정대철, 김한길을 비롯해 정계인물 친구가 많다. 학계를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도올∙김용옥 교수와도 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언론을 비롯해 아무튼 사회 힘깨나 쓰고 빽을 쓴다는 분야에 친구가 없는 분야가 없다는 것이 조영남에 대한 평가다. 남자 친구도 많고 여자 친구도 많다. 남자 친구가 많은 이유는 조영남이 술값 잘 내서 그렇다는 평가가 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수긍이 간다. 그럼 여자 친구는 어떻게 많이 사귈 수 있을까? 상대의 말을 아주 공손한 태도로 경청해 잘 들어주는 것이 비결이란다. 그리고 가령 상대 여자가 실수해서 커피를 옷에 쏟아놓아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던 얘기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도 또 다른 비결이라고 한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인생을 젊고 즐겁게 살아가는 큰 자산이 된다. 이면에서 사람들은 조영남을 부러워하고 있다.
82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1) 댓글:  조회:2627  추천:2  2019-10-08
도올은 나의 가장 훌륭한 스승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1) 50세 이전에 내가 좋아했던 인물을 회상해보면 거개가 죽은 사람들이었다. 막연하게 천하를 통일했던 시황제, 중국강토를 가장 넓게 만든 강희제, 모택동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유럽사람 치고 난쟁이지만 천하를 호령했던 나폴레옹, 낙후했던 농노제국가인 러시아를 자본주의 반열에 올려놓은 표트르 대제 등등의 위인들을 좋아했다. 그때는 좋아했다기보다 숭배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진실일 것이다. 좋아한다는 것과 숭배한다는 것의 차이는 좋아하는 사람이면 내가 따라 배울 수 있고 얼마만큼 흉내 낼 수도 있지만 숭배의 대상은 내가 도무지 따라 배울 수 흉내 낼 수 없었던 위대한 위인들이다. 지천명 나이가 되어서야 좋아하는 것과 숭배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고 이상에서 현실로 돌아서는 길을 찾았으니 늦은 건지, 빠른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철이 든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내가 숭배했던 대상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었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현재 지구상에 함께 숨 쉬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인생에서 이런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한국생활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2000년대 초반 어느 날 한국 00교회 도서실에서 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제목이 특이했다. 아마 이 제목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남자는 없을 것이다. 펼쳐보았다. 저자는 도올∙김용옥이었다. 그때는 나로서는 이 사람 뭘 하는 사람인지? 처음 접하는 인물이었다. 대충 페이지를 넘기니 내가 좋아하는 고전지식으로 풀이한 책이었다. 언어학도 좀 있고 말이다. 그에 의하면 동양에서의 사람 인(人)은 남자와 여자를 포함하고 있는데 비해 서양에서는 사람은 남자이지 여자가 아니다. 즉 Man은 사람이자 남자만 뜻할 뿐 여자는 Man 앞에 Wo를 붙여 Women이라 부른다. 동양에서 여자가 시집가도 남자의 성을 따르지 않고 친정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비해 서양에서는 여자가 시집가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 이 관습이 아마 이 언어학적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동양의 문화적인 진화와 서양의 문화적인 진화사로 여자의 존재를 해부했다. 는 그의 처녀작이자 굉장히 깊이 있는 책이었다. 그 후 어느 날 TV를 켰더니 화면에 사진에서 보았던 도올∙김용옥 교수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책가위에 등장한 그의 사진모습은 머리숱이 나처럼 많았는데 TV에는 중머리다. 어느새 스님이 되었나? 그런데 옷차림은 스님의 모습이 아닌 중국 전통복장 다부산자다. 머리 모습과 옷차림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오뉴월에 오이를 거꾸로 먹는 것도 제 나름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색해 보였지만 한편 특이해 보였다. 그날 내가 본 그는 을 강의하고 있었다. 강의수준이 굉장했다. 확 끌려들었다. 강의를 잘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한 방울의 물을 전하려면 한 통의 물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듯이 선생은 아는 것이 굉장히 많아야 한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모두 강의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의는 세상만사 지식을 두루 많이 갖춰야 강의를 잘 할 수 있다. 도올은 진짜 아는 지식이 바다처럼 넓고 깊다. 국내에서 고려대철학과도 다니고 신학대학도 다녔다. 그가 젊었을 때는 한국과 중국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대만국립대학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일본 동경대학교에서 동양철학 전공으로 여전히 석사를 마치고 현대문명의 본산지인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하위를 취득했다. 그러니까 동양에서 좋다는 대학을 다 다녔고 또 미국까지 가서 현대문명의 본산지라고 말할 수 있는 최고 학부 하버드에서 서양문물도 읽혔기 때문에 지식섭렵이 방대하다. 그 분의 말씀에 따르면 36세까지 책만 읽었다. 둘째 강의자와 수강자 사이 정서교감이 잘 되어야 한다. 도올은 특이한 제스처로 강의한다. 목소리도 고음으로 특이하다. 옛날과 현재를 오가면서 한국사회 부조리에 대해 거침없이 두들긴다. 수강자들은 그의 강의를 들으면 체증이 확 풀린다.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린다. 그의 강의 재간은 수강자들의 정서를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강약 조절을 잘 해야 한다. 노래를 잘하는 기교 중에 강약 조절이 있다. 강의도 노래와 마찬가지로 강약조절을 잘 해야 한다. 너무 지나치게 같은 톤으로 소리 높게 질러대는 식의 강의는 식상하다. 너무 낮은 톤으로 시종일관 유지해도 수강자들이 잠이 온다. 중요하지 않는 부분에서는 조금 톤을 낮췄다가 포인트가 중요하다싶으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중점과 비중점이 뚜렷해진다. 강약조절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절주이다. 영어로 말하면 리듬이다. 도올은 이 면에서도 뛰어나다. 총적으로 도올은 강의를 연예인이 연기하듯 재미있게 해서 청중이 많다.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팬이 많다. 그 후 그는 KBS, MBC,SBS 지상파 방송 삼사에서 모두 강의했고 동양전통문화인 유∙불∙도를 모두 다 강의했다. 내가 시청한 강의만 120회 정도는 된다. 나는 그의 강의를 좋아하게 되니 자연적으로 그의 저서를 읽기를 좋아했다. 모두 40여권의 저작이 있는데 나는 모조리 사서 읽었다. 그래서 나도 아는 지식이 매우 많게 되었다. 내가 도올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풍부한 지식과 재미있는 강의만은 아니다. 그가 나를 매료시킨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의 배포가 크고 배짱이 두둑한 것이다. 나는 그의 배짱을 두 가지로 나눠 말하고 싶다. 하나는 교수를 그만 두는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기독교를 향해 독설을 날린 것이다. 도올은 1982년 하버드를 졸업하고 모교인 고려대학교 철학과 부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중국전통 두루마기를 휘날려 눈길을 끌었다. 수강자는 보통 수백 명이었다. 인기가 좋았다. 그토록 잘나가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교수를 때려치운다. 당시로서는 교수를 그만두는 일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교수를 그만두더니 50넘은 나이에 한의학을 전공하여 한의원을 개원했다. 그의 배움의 욕망은 끝이 없다. 노력이 기가 막히다. 이런 그의 노력이 나를 감동시켰다. 도올(檮兀)이란 호는 매우 둔하다는 뜻이다. 그가 이 호를 지은 까닭은 스스로 머리가 둔하기 때문이란다. 머리가 둔하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엇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나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액면 그대로 넘어갈 수밖에. 어느 나라든지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이 있다. 한국에서의 성역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다.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불교는 뒷심이 없어 가장 글발이 있는 조계종 총무원장도 일개 평검사한테 조져 대는데 비해 한국 기독교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다. 왜일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의 믿는 구석은 바로 미제국주의다. 도올 다운 표현이다. 요한복음 강해란 책이 출간되자 기독교계에서 말이 많았다. 도올은 뒷공론으로 나를 헐뜯지 말고 학문적 논쟁을 하려면 TV공개 토론하자고 기독교계에 선전포고를 했다. 뒷공론이 심했던 기독교계는 어찌된 영문인지? 응전하지 않고 조용해졌다. 필자가 보기에도 한국 기독교는 문제가 많다. 기독교 삼대 정신인 박애, 자유, 평등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기복신앙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기독교 영향을 받은 연변조선족사회 기독교신자들도 이상해졌다. 예를 들어 10년 전 한국비자발급이 어려울 시절에 여러 차례 비자가 불허되었다가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헌금 50위안 냈더니 비자가 덜컥 나왔다는 것이다. 이 인과관계가 성립된다면 예수는 인류의 구세주가 아니라 심양영사관 영사인 셈이다. 도올은 이와 같은 한국기독교가 잘못 나아가고 있는 폐단에 독설을 날리고 기독교의 배타성, 오만성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도올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쉽게 말하자면 뜻이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혈혈단신으로 사상가답게 비판한다.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마음대로 씹어도 괜찮지만 기독교는 함부로 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있다. 이러한 살벌한 사회정서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정신은 실로 대단한 용기다. 한 사람이 잘 나가면 사회적으로 씹히기 마련이다. 도올도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무척 많이 씹혔다. 그러나 도올은 그 어떤 공격에도 꿈쩍 않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간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올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즉 한국학계 분위기는 공자 왈, 맹자 왈은 동양철학 전공자들의 전유물이고 칸트를 말하려면 독일에 가서 철학을 배운 자만의 소유이고 등등 지식인들의 ‘울타리 의식’이 굉장히 강하다. 이런 닫힌 분위기에서 도올은 어려운 학문을 저서와 TV강의를 통해 대중화 했다는 것은 굉장한 하나의 혁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나는 일본어 전공자로서 이른바 문∙사∙철이라고 하는 인문학에 대해 매우 취약했었는데 도올을 통해 굉장히 많은 지식을 섭렵하게 되었고 지금은 역사문화이야기 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도올은 나에게 있어서 우리민족 중에서 살아 있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를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나의 글을 예리하다고 평가하는데 알게 모르게 아마 도올의 스타일을 닮은 것 같다.
81    조선 소설『벗』을 읽고서 댓글:  조회:3413  추천:0  2018-06-06
조선 소설『벗』을 읽고서 김정룡 ‘4.27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한사회에서는 ‘북한열풍’이 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사례가 많지만 여기서는 조선책 이야기를 해보련다. 최근 대한민국 서점가에서는 조선 작가 백남룡이 지은『벗』과『60년 후』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때마침 내가 3년차 다니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독서모임에서도 6월 11일에 이 두 권을 지정토론 책으로 선정하였기에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사실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 해 60~70여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으나 소설은 단 한 권 김별아의『미실』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2011년 내가『황제와 소녀』라는 장편역사소설을 쓰느라 참고서로 읽었던 것이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지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시간만 낭비할 뿐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헌데 조선 작가 백남룡의 책을 읽고 나서 진정한 소설이 무엇인지?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무엇인지?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이 나이 되어서 이제야 깨우치게 되었다. 『벗』은 240페이지 되는 분량인데 조선에서는 중편소설이라 하고 남한에서는 장편소설이라 말한다. 책의 분량이 적은 만큼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주인공 정진우 판사와 그의 아내 한은옥, 이혼소송을 제기한 채순희와 남편 리석춘 및 철부지 아들 호남, 리석춘의 직장 선배 연공과 그의 교사 아내, 도 공업기술위원회 채림 위원장, 리석춘의 직장 선배 설비관리원 아바이 등이다. 『벗』은 소설을 구성하는 줄거리는 채순희의 이혼소송이고 이 사건을 맡은 판사 정진우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다룬 것이다. 스토리가 간단하다. 소설을 보는 이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다. 스토리가 너무 간단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하고 짜릿한 사건전개가 없기 때문에 혹자는 정말 무미건조해서 재미없다고 말할 수 있고, 또 혹자는『벗』이야말로 진정한 소설의 정수를 보여주었다고 굉장히 후한 점수를 매길 수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일단 짚고 넘어가겠다. 현대사회에서 이혼소송이라 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이혼사유를 떠올릴 수 있다. 외도라고 부르는 어느 일방의 불륜의 삼각관계, 가정폭력, 주풍, 경제문제, 고부갈등, 성격차이 등등이다. 이혼사유 중에 가장 애매한 것이 성격차이이다. 그래서 남한의 어느 판사는 “연예인들의 이혼사유 중에 성격차이를 내세우는 사례가 많지만 겉으로 주장하는 핑계일 뿐이고 실제로는 어느 일방의 불륜이거나 말(공개) 못할 사연을 뭉뚱그려 성격차이라고 말한다.”고 꼬집었다. 『벗』은 채순희와 리석춘 둘 다 외도가 없다. 리석춘은 일반 선반공이고 채순희는 선반공으로부터 출발하여 노래재주가 뛰어나 도 문예선전대에 전근한 직업가수이지만 불륜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혼사유에서 가장 많이 적용되는 외도문제는 없었다는 얘기이다. 남편인 리석춘이 아내를 팼다거나 심지어 가벼운 손찌검한 일도 없고 술을 마시고 아내를 괴롭히는 못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또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생계가 어려워 이혼할 사유가 되는 일 없이 너무 열심히 사업에 종사하여 오히려 탈이라면 탈이었다. 또한 소설에서는 시어머니가 등장하지 않아 한국시리즈 드라마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부갈등을 비롯해 시댁식구들과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그러한 갈등은 아예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저것도 이혼사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채순희로 하여금 이혼소송을 제기하게 만들었을까? 성격차이다. 남한에서 이혼사유로 애매한 성격차이가 조선에서는 진정한 성격차이가 무엇인지를 이 소설이 똑똑히 보여준다. 채순희는 선반공 노동자 출신이며 남편인 리석춘한테서 기술을 배웠다. 사부와 학도 관계로부터 연인이 되었고 결혼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노래에 재주가 있어 직장 문예선전대 가수로 활동하다가 실력이 좋아 도 문예선전대에 전근한다. 채순희는 예쁘기도 하고 진취심도 강하고 승벽심도 억세다. 아내에 비해 남편은 가정적이면서도 직장 일에 충실하지만 젊은 나이에 대학 공부 할 궁리도 하지 않고 앉은 석동이처럼 제자리걸음으로 아주 보수적으로 살아간다. 물론 남편이 다축라사 가공기 신제품을 발명하여 도 공업기술위원회로부터 인정받았으나 5년간 죽을 고생으로 맺은 열매의 보상은 고작 꽃병 하나였다. 채순희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하고 소송을 제기한다. 남편은 명예에만 만족하고 별로 불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아내가 바가지 긁는 것을 싫어한다. 결국 이혼에 동의한다. 백년언약을 맺고 결혼하지만 살다보면 갈등이 생기고 도를 넘으면 헤어질 수 있다. 문제는 아이이다. 아들 호남이는 부모의 다툼으로 큰 상처를 받았다. 정진우 판사는 부부 일방이 어느 쪽도 이혼사유가 될 만한 사건이 없기에 앞뒤 뛰어다니며 열심히 조사에 나선다. 아내도 만나보고 남편도 만나고 남편 직장 선배들도 만나고 도 기술위원회 간부도 만나 충분히 들어보고 심지어 아들 호남이까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진우 판사는 이혼소송을 제기한 채순희의 벗도 되어주고 남편 리석춘의 벗도 되어주고 심지어 아들 호남이의 벗까지 되어준다. 그러고 나서 이혼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설득하여 끝내 헤어지지 않도록 결론을 내린다. 채순의 이혼소송을 없던 일로 만들기까지 정진우 판사의 피타는 노력이 있었다. 중국에서 공산당간부는 군중 속에 들어가 군중과 함께 ‘숨 쉬는 사업 작풍(作風)’이 조선에도 있었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충분히 실감했다. 정진우 판사는 리석춘의 공장에 수 없이 찾아갔고 또 리석춘의 맘을 돌리려고 추운 날씨에 강에 들어가 모래를 채취해 리석춘을 돕는다. 리석춘은 그 모래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판사의 성의를 봐서 잘 쓰겠다고 사의 표하면서 진정 마음으로 다가가 그의 말이라면 껌뻑 죽을 정도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판사의 설득에 의해 5년제 대학에 신청하고, 일만 일이라던 생활패턴을 바꿔 아내 채순희 공연도 관람하는 등 여러모로 아내에게 신경을 쓰는 ‘좋은 남편’으로 바뀐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채순희가 그토록 바랐던 희망사항이었고 이것을 판사가 나서서 실천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부모의 불화 때문에 불행해진 아들 호남에게 있어서 이혼을 부추기는 채림은 눈엣가시처럼 미웠던데 비해 이혼불가를 선언하고 심지어 호남이를 자기네 집에 데려다 밥 먹이고 재우고 하는 판사야말로 진정한 벗이었다. 소설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조선사회에 대한 재인식이다. 조선사회를 흔히 관료주의가 심각해서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갑질이나 하고 개개인의 고충을 외면하고 거들먹거리며 피도 눈물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기실 조선의 판사가 남한의 판사보다 인정미가 백배 천배 낫다. 진짜 사람냄새가 나는 곳이 조선 사회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남한사회는 현재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민들은 공동체의식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데 비해 조선은 진정한 공동체란 무엇인지를 이 소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아울러 정의로움이란 공정함이란 무엇인지? 라는 정의의 문제로까지 파고들어 교육가치도 충분히 지니고 있어 정말 명작이다. 1980년대 문화적으로 세련된 프랑스 파리에서 우리글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남한 소설이 아니고 조선 소설이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백남룡의 작가의『벗』이었다고 한다. 왜 이 소설이 파리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나는 알 것 같다. 중국과 한반도는 예로부터 문학작품에 선악구도를 분명히 하고 권선징악이 주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선악구도가 아니면 문학이 되지 않는 식의 교육환경에서 자라왔고 작품 활동을 해왔던 것이다. 일본문학은 선악구도로 스토리를 만들고 작품을 전개하지 않는다. 가령 선악구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입장에서는 그것을 선악구도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羅生門』하면 우리는 선악의 시각으로 읽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만약 내가 그 작품의 주인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는 것이 일본문학의 특징이다. 일본문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굵직하게 사람을 긴장시키거나 짜릿해서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가슴이 뛰는 스토리 구성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잔잔한 스토리에 섬세한 묘사로 작품을 짓는다. 이것이 일본문학이 노벨문학상수상자를 많이 배출하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남룡의『벗』이 바로 일본문학처럼 잔잔한 스토리에 선악구도가 없는 명작이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물론 한 권의 소설을 갖고 조선을 굉장히 이상적인 사회라고 평가한다면 무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울러 조선사회는 이 소설이 발표된 이후로 어두운 면이 많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소설을 읽은 독후감이기 때문에 조선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일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뭐니 뭐니 해도 소설을 읽는 묘미와 즐거움은 언어서술이 아니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빠져든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작가의 수준 높은 뛰어난 언어서술이다. 8년 전 남한 역사소설 김별아의『미실』을 읽고 나서 언어가 굉장히 파격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백남룡 작가의 언어특징은 섬세하면서도 파격적이고 또 멋진 언어서술이라고 나는 본다. 여기서 그의 멋진 서술 한 대목을 감상해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창밖에서는 봄날의 어스름이 깃을 펴기 시작했다. 잎이 핀 가로수의 잔가지가 누구를 불러내고 싶은 듯 창문을 조심스레 건드려본다. 봄바람은 잠들고 싶지 않는 모양이다. 대륙의 먼먼 산발과 골짜기와 들판을 달려오고도 피로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바람은 지쳐서 집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밤이 되고 싸늘한 봄추위에 몸이 얼어드니 그제야 거처할 데가 생각난 것 같다. 바람한테는 보금자리가 없다. 어데서 누구한테서 무슨 일 때문에 쫓겨났는지 배반했는지 스스로 ‘가정’을 버렸는지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영원히 불행한 몸이다. 광막한 공간을 울며 정처 없이 떠다니고 나무숲이나 어느 강가에서 찬비를 맞으며 떨고 눈보라에 꽁꽁 언다. 세월을 두고 쌓이는 괴로움과 고통에 성질이 나서 해 비치는 따스하고 조용한 날에도 아무에게나 푸접없이 때로는 사납게 달려든다. 교만하고 질투하고 성내고 고함지르고 마구 잡아 흔든다. 그래서 짝을 못 가지고 불행하게 산다. 바람은 우의와 애정이 꽃처럼 아늑한 집안이 그리운 듯 나뭇가지로 창문을 두드리며 졸라댄다. 밤은 깊어 간다.
80    '뽀뽀 원조', 향토작가 김유정 댓글:  조회:3989  추천:5  2017-11-12
‘뽀뽀’ 원조, 향토작가 김유정 고층건물에 둘러싸인 콘크리트바닥을 밟고 매일 숨 막힐 듯 인파가 북적대는 서울에서 금전을 쫓는 돈벌레마냥 경쟁에 묻혀 사는 삶이 정말 심신이 고달프다. 지친 몸으로 퇴근하여 잠시나마 여유로움을 찾으려고 TV를 켜면 나랏돈을 도둑질하여 쌈짓돈처럼 썼다느니, 어느 정당은 내홍이 심하고 어느 정당은 쪼개지게 생겼고, 국민은 안중에 없고 지들 이권다툼에 혈안이라는 등등 정치판은 온통 실망스런 뉴스로 가득차고, 보험금 노려 가족을 살해하고, 옆집 미성년 여자애를 납치하여 강간하고 죽이고 등등 온통 살벌하다 못해 끔찍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전반 뉴스프로그램은 부정적인 소식으로 도배한다. 드라마는 출생비밀이 단골로 등장하고 재벌가문은 가족끼리 물고 뜯고 직장에서나 친구끼리 서로 해꼬지하고, 참으로 우리는 불행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이 들어 때론 섬뜩한 심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쟁적인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의 생기를 마시며 시골풍경에 도취되고 옛정취가 살아 숨 쉬는 우리 전통을 찾아다니면 아직도 살맛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더욱이 지방마다 문화유적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모습을 아빠 엄마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구경 오는 광경을 보노라면 우리민족의 정신문화가 살아있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고 맘으로 받아들여진다. 아~! 이 민족은 아직도 희망적인 민족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불쑥 떠올라 심정이 유쾌하다. 지난 5일 필자는 춘천근교에 있는 ‘김유정문학촌(金裕貞文學村)’을 방문했다. 시골에 자리하고 있는 ‘김유정문학촌’은 입구부터 자동차가 가득한 것을 보니 이곳을 찾는 관객이 엄청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김유정문학촌’이 무슨 매력이 있어 많은 관객을 유혹하고 있을까? 외관상으로 볼 때 하나의 촌이 온통 문학촌으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았고 주말이면 상설무대에서 상시 ‘아리랑공연’과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박양순의 유정의 사랑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김유정 작가의 생가에는 그의 일대기를 알 수 있는 전시관이 있고 해설사가 상시 설명하여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절을 보고 신도가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중이 좋아 중생이 모인다는 말이 있다. 문학촌을 잘 꾸며 놓아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것보다 김유정 작가 본인이 우리민족에게 남긴 유산이 크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되었다. 김유정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문학촌까지 건설되었을까? 대한민국에서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김유정을 모르는 사람은 꽤 많다. 필자도 글 쓰는 신분이지만 솔직히 김유정을 이번 방문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김유정이 윤동주보다 문학적인 가치가 떨어져서 그럴까? 필자는 그렇다고 여기지 않는다. 김유정은 1908년 태어나서 1937년 사망, 윤동주는 1917년 태어나서 1944년 사망했으니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고 거의 비슷한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적인 작가들이다. 필자가 생각하건대 김유정이 윤동주보다 덜 알려진 이유는 윤동주는 일제에 맞선 저항시인(필자는 이런 평가를 인정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객관적인 주장을 따르는 맥락에서 하는 말)이고 김유정은 순수 향토작가이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윤동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알만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언급하지 않고 김유정의 생애와 그의 문학작품을 살펴보고 문학적 가치를 조명해보자. 김유정의 본관은 청풍(淸風). 강원도 춘천 출신 아버지 김춘식(金春植)과 어머니 청송 심씨의 8남매 중 막내이다. 김유정의 가문은 조선팔도 100대 부자에 속할 만큼 어마어마한 갑부집안이었다. 김유정의 부친 대에 해마다 3천석 내지 6천석의 소작료를 거둬들였다. 춘천 실례마을이 본가인데 당시 서울에 99칸짜리 집을 짓고 살 정도로 대부자였다. 그러나 김유정은 막내여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12세 때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9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 오늘날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전신을 다녔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모두 중퇴였다. 김유정 자신이 밝힌 이유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만날 여자를 쫓아다니느라 수업시간을 채우지 못해 퇴학 맞았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김유정은 서울생활에서 미색에다 지식이 있고 판소리 예술에 뛰어난 박록주란 처녀에게 빠져 30여 차례 편지를 쓰기도 하고 스토커처럼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고 한다. 실로 풍류적인 사나이이었다. 결국 사랑은 혼인으로 이뤄지지 못해 정신적으로 좌절에 빠지기도 하였다. 한편 유복하던 집안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큰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는데 주색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여 김유정은 이래저래 실의에 빠져 한때 방탕생활로 세월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1932년에는 고향 실레마을에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세워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또 한때는 금광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이것도 저것도 실패하고 고민에 빠져 있던 와중에 친구의 권유에 의해 서울에 올라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1935년 단편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노다지」가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올랐다. 그 뒤 후기 구인회(九人會)의 일원으로 김문집(金文輯)·이상(李箱) 등과 교분을 가지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김유정은 등단하던 해에「금 따는 콩밭」·「떡」·「산골」·「만무방」·「봄봄」 등을 발표하였고, 그 이듬해인 1936년에 「산골 나그네」·「봄과 따라지」·「동백꽃」 등을 발표하였으며, 1937년에는 「땡볕」·「따라지」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불과 2년 남짓한 작가생활을 통해서 30편 내외의 단편과 1편의 미완성 장편, 그리고 1편의 번역소설을 남길 만큼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으나, 29세에 결핵병으로 요절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김유정의 소설은 그의 체험적 소재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고향 실레마을 사람들의 가난하고 무지하며 순박한 생활을 그린 「봄봄」·「동백꽃」 등의 계열로서 그의 작가적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일면이다. 다음은 그의 금광 체험에서 얻어진 것으로, 민족항일기의 가난 속에서 일확천금의 꿈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의 생태를 그린 「노다지」·「금 따는 콩밭」 등의 계열, 그리고 도시에서의 가난한 한 작가인 자신의 생활을 투영시킨 「따라지」·「봄과 따라지」 등의 계열이 그것이다. 그의 문학세계는 본질적으로 희화적(戱畫的)이어서, 냉철하고 이지적인 현실감각이나 비극적인 진지성보다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흐르는 게 특징이다. 등장인물들의 우직하고 순진한 모습,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의 구사 등으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었다. 어리숭한 사람들을 해학적으로 다룬 것은 그의 애상적인 성격에 대한 반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대표작 「동백꽃」은 사춘기 남녀가 애정과 개성에 눈떠가는 과정을 전원 서정 속에 특유의 해학적 수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품집으로는 1938년에 나온 『동백꽃』이 있고, 1968년에 『김유정전집』이 출간되었다. ‘김유정문학촌’ 해설사의 해설에 의하면 김유정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첫째 짧은 시간에 32편의 단편소설, 12편의 수필, 1편의 미완성 장편, 1편의 번역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둘째 김유정의 32편 단편소설은 순수 한글로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명사, 동사 등 한문, 조사와 조동사 등을 한글로 쓰는 것이 보편적이고 한문을 쓰지 않으면 천박하게 보이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김유정은 한글 일색으로 썼다는 것이다. 셋째 중고등학교 교재에 「동백꽃」「봄`봄」「산골나그네」「소낙비」4편이나 실리고 대학입시에 가장 단골로 많이 출제되는 것이「봄`봄」이라고 한다. 넷째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기차역 이름이 사람의 이름으로 된 것은 ‘김유정역(서울-춘천행 춘천 바로 전 기차역)’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이외 ‘김유정우체국’이 있고 ‘농협 김유정지점’이 있는 등 사람의 이름을 딴 ‘호칭’ 중에 김유정이 으뜸이라고 한다. 필자의 이목을 끈 것은 바로 김유정이 처음으로 ‘뽀뽀’라는 말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의 단편소설 「산골나그네」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참새들은 소란히 지저귄다. 지직바닥(기직바닥)이 부스럼 자죽(자국)보다 질배(진배)없다. 술 짠지쪽 가래침 담뱃재- 뭣해 너저분하다. 우선 한길치에 자리를 잡고 게배(計杯)를 대 보았다. 마수걸이가 팔십오 전 외상이 이 원 각수다. 현금 팔십오 전 두 손에 들고 앉아 세이고 세이고 또 세어보고...... 뜰에서는 나그네(본 작품에서 나그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임)의 혀로 끌어올리는 인사. “안녕히 가십시게유.” “입이나 좀 맞추고 뽀! 뽀! 뽀!” “나두.”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이것이 우리말 ‘뽀뽀’의 원조이며 1961년 국어사전에 ‘뽀뽀’가 정식 올랐다고 한다. 이렇듯 김유정은 실로 우리민족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를 기리는 문학촌까지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유정문학촌은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문학작가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며, 그 기념 및 연구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는 김유정기념사업회가 2002년 8월 일반시민들에게 김유정의 삶과 문학을 좀 더 가까이 소개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968년 김유정 31주기를 맞아 발족된 김유정기념사업회는 김유정문인비를 건립하고, 김유정 문학의 밤, 김유정추모제를 개최하였다. 기념사업회는 김유정 작가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전시관 및 부대시설을 마련하고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는 등 김유정 작가의 문학적 업적과 문학정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2002년 8월 개관한 김유정문학촌을 운영하고 있다. 김유정기념사업회는 현재 김유정추모제, 김유정문학제, 학술발표회, 청소년문학축제, 김유정문학상 시상, 김유정문학캠프, 김유정백일장 및 소설문학상 시상, 소설의 고향을 찾아가는 문학기행, 김유정 소설과 만나는 삶의 체험, 순회문학강연 등 각종 문학축제와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김유정문학촌은 2개의 전시관에 김유정의 삶을 소개하고 그의 작품을 전시하며 홍보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이 전시관에서는 김유정이 몸담았던 구인회와 그의 문우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작품의 배경이 된 당시 농촌 상황을 알리고 있다. 김유정을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기획, 운영하여 그의 생애와 업적을 일반시민들에게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중국 노벨문학상 수상자 莫言 작가가 한국방문 시 ‘김유정문학촌’을 찾았다고 한다. 莫言 작가는 향토작가로 유명하다. 김유정도 한국에서 가장 이름난 향토작가이다. 아마 이런 공통점이 莫言 작가가 이곳을 방문한 계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79    조선족을 추악하게 만드는 추악한 한국영화들 댓글:  조회:4476  추천:3  2017-09-14
조선족을 추악하게 만드는 추악한 한국영화들  특정약소집단에 대한 왜곡매도 행위 국가가 책임져야 김정룡     “여기(대림동) 조선족들만 사는데 여권 없는 중국인들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요. 경찰도 손 못 대는 무서운 곳이오.”   영화 ‘청년경찰’에 나오는 택시기사의 대사이다. 이 한 마디 대사 때문에 동포 최대 밀집지역인 대림동은 졸지에 범죄소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 화면에 조선족 폭력배들이 개돼지처럼 한 방에 수십 명 잠을 자면서 범죄를 일삼는다. 한국인에 비춰진 조선족의 모습은 한심한 더럽고 누추한 거지떼들이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조선족 범죄조직이 인신매매한 어린 소녀들을 폐건물에 감금한 장면은 물론 그 곳에서 난자를 채취하는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조선족은 정말 추악하고 악랄한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영화는 영화일 뿐 별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2010년 영화 ‘황해’는 영화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소위 대한민국 공영방송인 KBS가 ‘황해’라는 제목으로 조선족 보이스피싱 범죄를 그린 코미디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오랫동안 방송했다. 한국에서 최고 엘리트에 속하는 00한국 교수 분이 조선족 지성모임에서 “당신네 조선족은 왜 보이스피싱 범죄가 그토록 성행하고 있는가?”라고 말한다. 욕은 듣는 사람이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 장소에 있은 조선족이 마치 보이스피싱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교수가 이러할진대 일반 국민들이 ‘황해’ 프로그램을 보고 조선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답은 빤하다.    영화 ‘황해’(2010), ‘신세계’(2013), ‘악녀’(2017)에서는 모두 조선족이 살인을 일삼는 인물로 등장했고 ‘차이나타운’(2015), 조선족이 장기매매를 일삼는 폭력조직으로 등장했다. 올해 추석연휴를 맞아 가리봉을 배경(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구로4동이 배경으로 등장한다고 한다)으로 조선족 폭력조직을 소탕하는 영화 ‘범죄도시’가 10월 4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조선족을 모티브로 한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들이 조선족을 어떻게 생각할까?    ‘청년경찰’ 김주환 감독은 중국동포와 대림동을 범죄 온상으로 설정한 데는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영화도 냉전시대에는 항상 적군은 러시아였다”는 감독은 “‘신세계’ 이후 조선족이 적으로 나오는 영화가 늘었는데, 어떤 편견을 갖고 있지 않고 영화적인 장치일 뿐”이라고 밝혔다.    정말 한심하다. 감독의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 수준이라니?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적대관계 패턴을 조선족을 한국인의 적으로 설정하는 동일한 패턴으로 영화에 끌어들이다니?     ‘황해’부터 조선족을 범죄 집단으로 그리는 영화들이 지금까지 여러 편 나왔고 공영방송까지 조선족을 비방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되었으나 재한조선족사회는 침묵하고 있었다. 요즘 ‘청년경찰’이 상영됨과 동시에 이번에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지난 8.28 조선족사회가 기자회견을 갖고 거센 항의에 나섰다. 주최측 주요 요구사항은 영화감독 사과이며 재발방지대책이다.    지금까지 한국 언론매체들이 재한조선족사회를 망쳐놓았고 이에 상업목적으로 조선족을 ‘악의 축’으로 설정하고 왜곡 매도하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는 데는 대한민국 국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조선족이라는 이 특수군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하는가 하는데 있다.문제의 출발점은  조선족을 단순한 외국인으로 취급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만약 외국인 취급한다면 크게 시시비비가 일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여느 외국인이든 왜곡 매도하는 행위는 옳지않다. 그렇지 않고 조선족을 진정 동포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인정한다면 지금처럼 언론매체와 영화들에서 왜곡 매도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않을것이다. 물론 조선족은 엄연히 중국국적자이다. 그러나 민족성으로 따질때 한 피줄이고 이중문화정체성을 공유하는 특수한 군체인것도 사실이다. 이런 특수군체를 대함에 있어서 중국이나 일본은 한국과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대처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국정부가 참조할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은 해외의 화교,화인 집단을 동포로 간주하고 법적으로 보호하고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일계인을 대함에 있어서 중국의 화교,화인 정책 버금가는 일련의 제도를 마련하고 실시하고 있다. 중국이 화교, 화인을 대하는 것처럼, 일본이 일계인을 대하는 것처럼 대한민국도 조선족을 두 나라와 같이 같은 맥락으로 대한다면 지금과 같이 언론 매체와 영화들이 앞장서서 동포를 범죄 집단으로 만들고 도무지 상종 못할 인간무리로 그리는데 앞장서지 못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몇 몇 영화감독의 개인 문제가 아니라 전반 대한민국이 조선족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한국정부가 앞장서 조선족을 동포로 끌어안아야 하는 존재로 인정하고 언론 매체나 영화들에서 조선족을 왜곡하고 매도하는 행위에 대한 브레이크를 건다면 작금의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고 앞으로 다시는 유사 행위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으나 거꾸로 지금처럼 한국정부가 손 놓고 있으면 문제해결이 지지부진할 것이고 앞으로도 유사행위가 계속 발생할 것이다.     
78    일부 한국 언론이 재한조선족사회 망쳐놓는다 댓글:  조회:3984  추천:3  2017-08-31
일부 한국 언론이 재한조선족사회 망쳐놓는다  최근 가리봉을 또 범죄소굴로 비화   김정룡     2006년 4월경 남구로역 부근에서 조선족이 한국인을 칼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며칠 후 방송3사 중 00방송 기자가 이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필자를 찾아와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필자는 거절했다. 거절 이유는 이렇다. 기자가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인데 내용이 “조선족들이 절대다수가 칼 차고 다니니 내국인들이 조선족을 만나면 각별히 조심하고 경계심을 바짝 차리라.”는 것이었다. 재한조선족들이 마치 보편적으로 살인자나 되는 것처럼 사실이 아닌 허위를 과장하여 보도하려는 것이었다.    2007년 4월 중국에서 범죄에 연루되었고 한국에 와서도 범죄를 저지른 조선족 00가 가리봉에서 검거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 언론들이 마치 기다리기나 한 듯 뻥튀기처럼 부풀려 대서특필에 나섰다. 보도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조선족 폭력조직은 중국 북동부의 동북3성의 흑사파 조직원들이 국내에 들어와 결성했다. 경찰은 현재 16개 조직 2000여명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2000여명은 조직당 80~100명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며 “현재 불법체류자만 50만명 중 조선족이 대부분인 것으로 추정돼 조직원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족들은 1998년부터 방문취업비자로 대거 입국, 공단 밀집지역인 ‘가리봉동’에 정착했다. 흑사파 조직원들도 속속 들어오면서 중국 지명을 딴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가리봉동을 장악하는 과정을 전설처럼 ‘가리봉 잔혹사’라고 한다. 이들은 중국 본토 흑사회처럼 등에는 칼, 다리에는 도끼를 차고 다니면서 가리봉동 일대를 휩쓸었다. 팔 절단 250만원, 다리 절단 500만원, 청부살인 1000만원 등이다. 또한 이들은 국내 조폭들과 연대도 모색하고 있다. 한국어에 능숙한 조선족 출신들로 구성된 연변흑사파는 오래전부터 서울 등지에서 활동 무대가 겹치는 국내 조폭과 연합전선을 펴고 있다.“   위 기사내용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한국기자들이 ‘흑사회’란 의미를 모르고 연변흑사파란 호칭을 지어냈는데 이는 무지의 결과이다. 중국에서 한국사회가 말하는 깡패와 건달 및 양아치, 쉽게 말하자면 백도(白道:정도)를 걷지 않고 흑도(黑道)에 의해 살아가는 인간들을 총칭하여 ‘흑사회’라고 표현한다. 중국에는 흑사파란 폭력조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이 흑사파가 마치 중국 내 있었던 하나의 폭력조직이나 되는 것처럼, 또 이런 맥락에서 자기네 맘대로 존재도 하지 않는 ‘연변흑사파’란 호칭을 지어 내어 한국사회에 퍼뜨려 왔던 것이다.    둘째 2007년 당시 연변에서 온 폭력조직원이 2천명이라는 보도는 한심한 뻥튀기이다.    셋째 2007년 당시 한국에 불법체류 조선족 50만에 이른다는 것은 역시 뻥튀기이다. 기껏해야 3만에서 5만을 초과하지 않았다.    넷째 방문취업비자는 2007년 3월 4일부터 실시했는데 1998년부터 실시했다니 몰라도 너무 모르는 기자가 허튼 기사를 지어낸 것이다.   다섯째 연변흑사파들이 등에는 칼, 다리에는 도끼를 차고 가리봉을 휩쓴다고 했는데 필자가 가리봉에 만11년 넘게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거니와 가리봉 상인들에게 “돈을 뜯긴 적이 있느냐?” 진짜 방탄복을 입고 영업하느냐?“ 물은 결과 당사자들은 모두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얘기를 한다는 반응이었다.    여섯째 사람 사는 세상에 청부살인이 존재하듯 재한조선족사회에도 청부살인 사례가 있다. 하지만 가리봉에 이런 청부살인자들이 득실거리는 것처럼 과장하여 퍼뜨리는 것은 사회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기자의 도덕성을 벗어나는 행위이다.   영화 를 비롯해 재한조선족사회를 범죄의 소굴처럼 포장하더니 대한민국 공영방송인 KBS까지 나서 조선족을 비하하는 라는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1년 내내 방송했다. 결과는 한국인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마치 보편적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원처럼 비쳐지는 악효과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조선족살인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수사 결과도 나오기 전에 언론들이 앞장서 ‘엽기적인 살인’ ‘인육매매’ ‘장기매매’를 들먹이며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였다. 허위도 자주 말하고 많이 말하면 사실처럼 각인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따라서 한국인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마치 범죄 무리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낙인 찍혀 있다.    가리봉은 조선족밀집지역 1번지로서 서울시와 구로구청이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환경도 좋아지고 범죄도 사라지고 있어 주민들이 살만한 곳이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7월 말 00주간지 00기자가 10년 전부터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위 내용을 ‘우라까이(해당 기자의 표현)’ 해서 새로운 기사랍시고 발표했다. 가리봉주민들이 난리 났다 기사 작성자가 가리봉에 와서 주민들에게 사과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날 그 기자는 “반발 신고가 있어 금세 기사를 내려 본 사람이 얼마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포털사이트에 아직도 떠돌고 있어 악영향이 아직도 크게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설혜심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2014년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기고문에서 이 두 영화와 언론 기사를 두루 언급하며 “미디어가 연변과 조선족(중국 동포)의 이미지를 갈수록 부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 언론들이 제발 사실이 아닌 허위기사, 혹은 작은 사실을 부풀려 크게 만드는 기사를 발표하여 재한조선족 이미지에 먹칠하는 행위를 멈추기를 간곡히 바란다. 
77    야단법석과 원효대사 댓글:  조회:3849  추천:1  2017-05-05
[역사문화이야기] 우리 말 어휘 중 75%가 한자어라고 한다. 한반도(조선반도)는 역사적으로 그만큼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왔다는 증거이리라. 그런데 한문과 한어의 유입 과정에 있어서 중국어휘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있고, 자체로 창작해낸 한자 어휘도 있고, 중국과 뜻이 다르게 사용되는 것도 있고, 중국에서는 일상용어가 아닌 것이 우리말에서 일상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어휘가 꽤 많다.   여기서 일일이 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 같아 일단 마지막 경우를 밝혀보려고 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야단치다.’, ‘야단맞다.’, ‘야단법석을 떤다.’, ‘야단법석거리다’ 라는 등의 말을 곧잘 사용하고 있는데 ‘야단법석’은 한자어이다. ‘야단법석’의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중국에서는 일상용어로 사용되지 않고 우리민족은 매우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일상용어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먼저 ‘야단법석’의 유래를 살펴보자.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시기는 후한 때였고 위진남북조 시기 세상이 혼란스럽고 각박해져 정신적인 안식처를 찾고자 부처를 믿는 신도가 급격히 증가해 불교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당나라 때 불교의 ‘꽃’이 활짝 피었다.   당나라 초기 당태종 때인 627년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고자 천축에 떠나 간난신고 끝에 인도에 도착하여 18년 동안 연구를 거쳐 645년 불경 600권을 안고 장안에 돌아왔다. 당시 현장법사의 영향에 의해 당나라는 불교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이윽고 무측천이 온 나라가 불교의 천하가 되기를 명하였다.   무측천 시대에 불교를 대중화로 흥기 시키려고 가축도살을 금지할 만큼 여러 가지 극단적인 조치들이 잇따라 시행되었다. 하지만 불교를 대중화 시키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불경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어렵다 못해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불경을 민초들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실행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안이 바로 ‘야단법석’이었다.   야단(野壇)이란 세속도시(世俗都市)의 빈 공터, 즉 사람들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는 곳에 단(壇)을 설치하는 것이며, 법석(法席)이란 법어(法語:佛語)를 말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불교로 놓고 말하자면 절간은 ‘성(聖)의 세계’라면 야단법석은 ‘속(俗)의 세계’이다. 쉽게 말하자면 불교가 백성들을 신도로 불러들이려고 세속화(世俗化)하기 위해 야단법석이란 아이디어를 발굴했던 것이다.   이 야단법석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흔히 계급적 구분이 없이 각설이, 갑돌이, 짚세기 할 것 없이 아무나 모여서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 예하면 씨름, 널뛰기, 제기차기, 재주넘기, 수수께끼내기, 남녀데이트, 심지어 어떻게 하면 남녀가 더 자극적이고 또 어떻게 하면 애를 쉽게 배고 낳고 하는 등등의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부담 없이 서로 주고받고 맘이 내키는 대로 한바탕 떠들어대는 장소였다.  ‘야단법석’이란 말은 한바탕 떠들어 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야단법석은 그냥 한바탕 떠들어 대는 난장으로 끝나버리고 마는가? 아니다! 이 야단법석은 겉보기에는 일종 난장 같지만 역사적으로 변문(變文)이란 최대의 성과를 이룩해냈다.   변문이란 당대(唐代) 승려(和尙)들이 야단법석에서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무지한 민중에게 알아먹기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바꿔놓은 것(변경)을 의미한다. 불경(佛經)이야기의 재미를 북돋우려고 악기도 곁들고 노래도 부르면서 잡예(雜藝)식으로 설경(說經)하였는데, 이로부터 강창문학(講唱文學)이 생겨났고, 제궁조(諸宮調:스님들이 비파를 타면서 노래와 이야기를 섞어 설경하는 설창법)가 생겨났고, 송사(宋詞)가 생겨났고, 원곡(元曲)이 생겨났고, 명대(明代)에 이르러 설화문학(說話文學)이 소설문학으로 발전했고, 이윽고 20세기 초에는 백화문(白話文)이 생겨나게 되었다.   ‘야단법석’은 이렇듯 중국문학과 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편 사람들은 흔히 서구민주화의 뿌리가 고대그리스의 광장문화에 있다고 해서, 그게 뭐 굉장히 대단한 줄로 여기고 있는데 기실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 아니다. 인류 고대사회에 있어서 그런 ‘광장문화’는 고대그리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 사회생활의 보편현상이었으며, 중국에도 있었고 한반도에도 있었던 ‘야단법석’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문화 맹아를 싹 틔운 ‘광장문화’였다.   우리민족 역사에서는 야단법석을 통해 불교를 대중화 시킨 주인공으로서는 7세기 신라에 살았던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이다. 바꿔 말하자면 원효대사야말로 ‘야단법석’의 원조이다.   원효대사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한 인물인지 현재 한국불교계에서 “원효 이후 1,400년 동안 원효를 뛰어넘는 스님이 없다.”고 말한다.  원효스님은 650년(진덕여왕 4)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唐)의 현장과 규기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원효스님은 중국행에 실패한 이후로 중국불교 번성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지 못하고 10년 뒤, 자기보다 10세나 연하인 의상(義湘)과 같이 중국 유학길을 재차 떠났다. 경주를 떠나 강주(수원) 남양(南陽) 해안에 이르러서 날이 저물었다. 날은 궂어 소낙비가 쏟아지고 더욱 컴컴해 졌다. 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어떤 움집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지새기로 하였다. 한 밤중에 원효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행여나 하여 주위를 더듬거려 보니 손끝에 물이 담긴 그릇이 닿았다. 그는 황급히 물을 마시고는 계속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날이 활짝 밝자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움집이라 여겼던 곳은 고총이었고 그릇의 물은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 옛날 무덤은 지하실 같이 돌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 관을 넣고, 생시에 사용하던 물건을 넣어 두는 풍속이 있었다. 그가 빗물이 고인 해골을 보니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심한 구토를 느껴 전 날 먹은 음식까지 몽땅 토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어젯밤에 갈증이 나서, 무척 애쓰는 것을 보았는가?” “형님이 갈증으로 고생하다가 그릇의 물을 마시는 것을 보았지요.”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그것은 보통 물이 아니고 사람의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네. 어젯밤 그것을 마실 때는 그토록 시원하여 세상모르게 잠을 잤는데, 오늘 아침 그것이 해골의 썩은 물이란 것을 발견하니 구토가 나서 큰 고생을 하였다네. 밤중의 마음과 아침의 내 마음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모를 때는 시원하던 것이 알고 나서는 기분이 좋지 않으니 더럽고 깨끗한 것이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一切唯心造)이라고 이제 깨달았다네.” 이와 같은 계기를 통해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사상을 깨달은 원효대사는 굳이 멀리 당나라까지 들어가 법을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원효스님은 스님의 신분으로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는 등 대중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자리(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利他)를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행'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효대사가 불교를 대중화 시키려고 촌촌락락(村村落落)을 찾아다니면서 낫 놓고 기윽(ㄱ) 자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어려운 불경을 재미있고 쉬운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주고 바가지를 악기로 삼아 반주하며 노래를 곁들어 부르면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쳤다. 원효가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었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판을 벌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야단법석’이다.   필자가 연변시골에 있었을 적에 잔치 집에서 저녁 오락 시 물독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반주하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이러한 관습이 원효대사가 바가지를 악기로 사용하는 것을 널리 보급시킨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공중장소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우리민족이 각종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놀기를 즐기는 관습이 모두 야단법석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북아신문 2017-5-1
76    영화 단평 <죽여주는 여자>를 보고서 댓글:  조회:4186  추천:1  2016-11-07
- 노인의 인생이란? 죽음이란?....   ‘죽여주다’는 우리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이 있다. 남녀 운우지정을 나눌 때 만족해하는 의미로 잘해주다 혹은 한국인들이 흔히 잘 쓰는 끝내주는 것을 우회적으로 죽여준다고 하고, 또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죽여준다는 의미에 쓰인다.   요즘 대한민국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이재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중견여배우 윤여정이 주연한 영화 에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담겨 있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영화 주인공 소영(윤여정 역)은 젊어서 주한미군과 얽혀 ‘양공주’로 살다가 남자한테 버림받아 홀로 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 없어 입양 보내고 닥치는 대로 이일저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오다가 나이가 들어 노동력을 상실하게 되자 성매매로 입에 풀칠하며 목숨을 부지한다.   서울에 노인들의 성매매가 잘 이뤄지는 곳으로서 탑골공원이 꼽히고 있다. 배우자가 없는 독거 남자 노인들이 공원을 서성이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50~60대 늙은 여자들이 접근한다. 그녀들의 접근 방식이 박카스를 팔면서 수작을 건다하여 ‘박카스아줌마’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박카스아줌마’ 혹은 ‘박카스할머니’라는 호칭은 탑골공원에서 성매매 하는 늙은 여자들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세상에 모든 일에 영역이라는 것이 있는 법. 한국‘박카스아줌마’들이 ‘독점’하고 있던 탑골공원 성매매 시장에 조선족 아줌마들이 나타나 자기네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싸움이 일어났고 경찰에 신고하는 소동까지 생겨나 방송을 탄 적이 있다. 필자는 에 혹시 조선족아줌마가 등장하지 않나하고 숨죽이고 봤으나 그런 일은 없어 다행이다 싶었다.   주인공 소영의 운명이 기구한데다 그녀 주변에 살고 있는 인물들 팔자도 거기서 그거라는 말이 있듯이 모두 사회 소외계층에서 헤매는 사람들이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성인 피규어작가(캐릭터를 축소한 인형 만드는 사람) 도훈(윤계상 역),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지내는 트렌스젠더인 티나(안아주 역) 셋이서 한 지붕을 이고 사이좋게 살아간다. 거기다 소영이 성매매하다 걸린 임질이란 성병을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가 오고 갈 곳이 없는 코피노 소년(한국남자들이 필리핀에 가서 당지 여성과 불장난하여 낳은 아이) 민호를 데려다 키운다. 속담에 ‘구차할 때 한 입 덜라’는 말이 있지만 소영이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코피노 소년을 데려온 것이 이해되지 않아 한 지붕 식구들이 물으니 장황하고 거창한 인류애적인 치장하고 포장하는 언설이 아니라 아주 소박하게 “나도 몰라, 그냥 그렇게 해야만 될 거 같아 데려왔어.”라고 답한다. 소영의 가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나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 발로의 행위가 아닌가 싶다.   어느 한 번 소영이 성 매수자 남자와 여관에 코피노 소년 민호를 데리고 가서 주인한테 맡긴다. 1~2만원의 화대가 오고가는 성매매도 신고 되면 경찰이 단속한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소영은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와 민호를 데리고 유유히 여관을 떠난다. 경찰의 눈에 띄었으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 여자를 성매매녀로 잡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무사하게 탈출하는 스토리도 유머적이다.   소영은 남자들 꼬시려고 접근할 때면 “잘해 줄 게.”라는 말을 밥 먹든 한다. 실제로 소영은 잘해주는 것으로 즉 ‘죽여주는 여자’로 탑골공원 일대 남자들 세상에 소문이 자자했다. 노인들도 성욕이 있기 마련인데 해소할 방법은 없고 하여 소영과 같은 대상을 찾아 푼다. 인류역사에 먼저 창녀가 있어 성을 매수하려는 남자가 생겨났는지, 아니면 성을 매수하려는 남자가 먼저 있어 창녀가 나타났는지? 닭과 달걀의 선후시비처럼 알 길이 없으나 어찌되었든 노인들 세계에도 수요가 많으니 소영과 같은 몸 팔아 생계유지하는 늙은 여자(65세)들도 있는 법이다. 아무리 수요니 공급이니 하는 언어로 포장해도 몸 파는 여자를 곱게 보는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소영이도 따가운 눈총을 받기 마련이고 다른 여자들한테 놀림을 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소영은 기죽지 않고 당당하고 담담하게 대처한다.   그렇게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듯’이 보이던 소영한테 심경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섹스로 남자들을 죽이던 데로부터 실제로 남자들의 목숨을 ‘죽여주는 여자’로 변신한다.   종수(조상건 역)는 젊어서부터 퇴임까지 사회 직위도 별로였고 경제적으로 가진 게 없이 볼품없는 사나이였다. 가진 게 없다고 해서 성욕까지 없으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그도 소영이와 성적으로 얽혀 있었다. 늙은이의 성적 행위는 잠시적인 기쁨으로 순간적인 고독은 달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삶에 대한 의욕까지 꺼지지 않게 밝히기는 역부족이었다. 종수는 고민 끝에 죽으려고 맘먹었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본 소영은 말리지 않고 죽게 방관한다.   그렇다면 있는 자의 노후는 행복한 것인가? 특히 병들면?   세르비송(박규태 역)이라는 노인은 재직 시 소위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편이었다. 퇴직하자 연금도 두둑하게 받았다. 자식도 미국 유학 보내고 그곳에 남아 자녀 둘 두고 잘 살고 있어 남부럽지 않는 노인 같았다. 그런 여유작작한 노인도 배우자가 없어 가끔 소영을 찾아 성욕을 해소하곤 했다. 금전적으로 여유도 있고 맘 씀씀이도 좋아 매번 소영에게 팁을 푸짐하게 주었다. 그토록 멋쟁이던 송노인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뇌졸중에 걸려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고 만다. 자녀들은 송노인을 집에 모시지 않고 요양시설에 보내 간병인을 붙여놓고는 가끔 들여다본다.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이 두 자녀를 데리고 문안 왔지만 손자손녀들은 할아버지 냄새 난다면서 코를 가리고 상을 찌그리면서 기겁한다. 의식이 남아 있는 송노인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지라 하루빨리 저 세상에 갈 것을 갈망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이런 부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소영이 그토록 잘해주던 송노인이 병환에 계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병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송노인은 소영을 반갑게 대하면서도 무서운 부탁을 한다. “제발 나를 죽게 해 달라.”는 것이다. 소영은 고민 끝에 송노인의 죽음을 돕는다.   마지막으로 소영은 청춘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재우(전무송 역)를 만난다. 재우는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가까울 정도로 여유가 있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자녀를 앞세운 것이 우울증을 불러왔고 수년 전 동반자 아내마저 저 세상에 가는 바람에 너무 고독하고 여생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재우의 걱정은 혼자서 죽는 것이 가장 두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소영한테 어려운 부탁을 한다. 소영이 어렵게 응하자 고급호텔 방에 가서 깨끗하게 샤워하고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수면제 한 줌 복용한다. 소영한테는 수면제 한 알 먹인다. 결과 재우는 그토록 두렵던 죽음을 ‘기쁘게’ 해결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최후의 남은 소원을 풀었다. 재우는 이렇게 영원히 잠들었고 소영은 이튿날 아침 깨어났고 재우를 남겨두고 호텔을 빠져나온다.   호텔을 떠난 소영은 재우가 남간 돈을 절을 찾아 시주하고 얼마만큼 현찰을 남겨 함께 살아온 한집식구 같은 도훈, 티나, 민호를 데리고 고급음식을 먹고 공원놀이터에 가서 신나게 놀고 티나 공연장에서 경찰에 붙잡힌다.   경찰차에 연행되어가는 소영은 “차라리 잘 됐지 뭐.”라고 말한다. 어차피 늙은 여자가 몸 팔아 생겨 유지한다는 자체가 고역이고 사회눈총을 받으며 고달픈 세상살이를 하루하루 중이 종치듯 지내는 것이 지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콩밥 신세를 지는 것이 어쩌면 그녀에게 탈출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차라리 잘 됐지 뭐.”라는 말을 남겼을 것이다.   영화는 생리상 소토리가 완전 픽션일 수도 있고 어느 정도 사실을 근거로 한 뼈대에 예술적인 살을 붙여 만들 수도 있다. 의 경우 우선 주인공 소영과 같은 인물이 현재에도 서울 탑골공원에서 한창 진행 중에 있는 몸 파는 늙은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므로 주연의 스토리는 완전 허구가 아니라 실제 사실에 가깝다. 단지 세 노인의 죽음을 방조한 이야기는 과장된 장면이지만 죽음에 직면한 세 노인의 처지는 현재 이 땅에서 수없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는 사실에 가까운 스토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다음 세 노인의 죽음을 다룬 이야기는 현대사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다. 전통시대 아니 불과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자녀가 부모를 모시는 것은 천륜이었다. 요즘 세태는 부모를 모시지 않는 것이 대세이고 조금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집에서 모시지 않고 노인들을 요양원에 보낸다. 이쯤해도 그나마 잘하는 편이라 말할 수 있다. 서울달동네에 거주하고 있는 독거노인을 비롯해 전국에 독거노인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 중에 자녀가 있으면서도 돌보지 않아 홀로 지내는 노인들이 많다. 이 분들은 국가로부터 생계비복지혜택을 받지도 못한다. 자녀가 있기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박스 줍고 파지 줍고 하는 것으로 겨우 입에 풀 칠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이 분들은 인생 최후 마지막 길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 노인들보다 더욱 비참하다. 쓸쓸하게 언제 어떻게 죽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를 보고 감상을 말하라면 필자는 한 마디로 요약해서 ‘슬프다’이다. 슬퍼도 너무 슬프다. 어쩌다 인간사회가 요지경으로 변해버렸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보다 더욱 삭막한 사회로 변해갈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예측이다. 지금도 슬프지만 앞을 생각하면 더욱 슬퍼진다. 노인의 인생이란 무엇이며 노인의 죽음이란 무엇인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 중에 가장 심각한 병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졌으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사회, 과연 발전인가? 변화인가? 필자는 항상 ‘인류사회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해왔다. 영화 가 나의 이 명제를 증명하고 있다.  동북아신문 10월 23일자  
75    재산이 얼마만큼 있으면 행복할까? 댓글:  조회:4385  추천:1  2016-08-17
재산이 얼마만큼 있으면 행복할까?   재산이 얼마만큼 있으면 행복할까? 얼핏 보면 바보 같은 질문이다. 질문 자체가 유치하다고 비난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재산이란 당연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냐고 순간적인 머리회전도 거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이럴 경우 재산과 행복을 비례등식화, 즉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지수가 플러스 되고 재산이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지수가 마이너스 된다는 관념에서 비롯된 결론이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재산과 행복이 비례등식화 되지 못하고 반비례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로또 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 중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필자가 아는 사례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의 일이다. 연변 시골에 있는 한 농부는 째지게 가난했다. 너무 가난해 아내도 떠나가고 자식한테도 버림 받았다. 죽지 못해 하루하루 중이 종치듯 허송세월을 보내며 힘겹게 살아가던 와중에 어릴 적 헤어졌던 한국에 있는 부자형님과 연락이 닿았다(형이 연길에서 잘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동생을 어렵게 찾았음). 형은 얼굴이 부티 나고 빤질빤질한데 동생은 나이와 걸맞지 않게 주름이 밭고랑이 되고 얼굴엔 기름기가 사라져 사막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은 형을 동생으로 동생을 형으로 착각할 만큼 상반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너무 가련하고 너무 불쌍해보였다. 그래서 형님이 그때 돈으로 인민폐 30만 위안을 주었다. 총명한 사람은 돌을 금으로 만들지만 바보는 금을 돌로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당시 30만 위안이면 의식주 때뻣이를 하고도 충분히 여유가 있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이 거금이 그의 손에 들어가서 돈질 못하고 불과 4개월 지나 또 거지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로또 당첨자들의 비운의 삶, 위의 농부 사례와 비슷한 사건들 등등 재산이 갑자기 생긴 사람 치고 후과가 깨끗한 자가 별로 존재하지 못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까? 필자는 요즘 이에 대한 확실한 해석의 답을 찾았다. 나는 서점에 가면 한 가지 습관이 있다. 내가 미리 구매하려는 책을 골라놓고는 종업원한테 “요즘 어떤 책이 잘 나가는가?” 묻는다. 사실상 종업원에게 나한테 추천하라는 부탁의 뜻이다. 그렇게 해서 구매한 책 한 권이 있다. 김형석 지은 이다. 김형석 선생은 70년 전에 남하하신 실향민이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32세에 연세대 교수로 취직하여 퇴직할 때까지 줄곧 한 대학에 머물렀다. 서울대 김태길 교수와 숭실대 안병욱 교수, 세 분은 재직 시 한국 철학계에서 서로 라이벌 관계였으나 우정이 두터운 친구로 지내 사회적으로 존경 받았다. 선생은 수필에 일가견이 있어 한국사회에서 철학자보다 수필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선생은 대중 강연을 많이 진행해왔는데 97세인 고령인 현재도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참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선생은 올해 97세인데 는 금년 봄에 쓴 책이다. 책의 내용은 선생의 인생담인데, 세상을 보는 가치관과 그의 삶의 궤적을 구수하게 그려낸 한 편의 묵직하고 깊이 있는 드라마이다. 참으로 배울 것이 많다. 여기서 선생의 가치관 하나만을 소개하려 한다. 선생은 ‘재산이 얼마만큼 있으면 행복할까?’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개개인이 자신이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있으면 행복하다.” 아주 간단해 보이는 말씀 같지만 참으로 명언이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로또 당첨자들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갑자기 생긴 거금을 정신적으로 감당하지 못해 모두 비운의 삶을 보내게 된 것이다. 위 연변 한 농부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갑자기 평생 손에 쥐어보지 못한 거금이 갑자기 생겨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의미 있게 유용하게 사용할 줄 몰라 돈을 돈 같이 쓰지 않고 온 동네 사람 다 불러 술 놀이하고 젊은이들한테 휘둘려 매일 나이트 다니고 술집 다니고 계집질까지 하다 보니 형이 준 돈을 유흥에 탕진해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회적으로 갑자기 쉽게 번 돈을 쉽게 쓰는 현상들을 많이 목격한다. 왜 그럴까? 너무 쉽게 번 돈은 정신적으로 감당이 잘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깡패나 양아치들이 협박의 수단에 의해 벌어들이거나 사기 쳐 벌어들이는 돈은 정신적으로 감당이 잘 안 돼 쉽게 써버린다. 특히 마약과 같은 모험이 큰 장사로 벌어들이는 돈은 씀씀이가 무척 헤퍼지기 마련이다. 이는 정신적으로 감당의 문제이다.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아가씨들, 특히 몸을 파는 창녀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버는 돈의 다수를 고급 옷과 핸드백, 성형수술, 몸치장에 필요한 고급 악세사리를 구매하는데 써버림으로써 보통여자들이 소유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자기들이 소유한다는 정신적인 위안으로 삼고 있다. 돈은 많이 버는데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이것이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아가씨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한국 대기업들이 창업주가 어렵고 힘들게 이뤄놓은 재산을 2세에 와서 후계자 승계문제로 흔히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현상도 역시 정신적으로 감당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민족의 유교문화는 아버지 것이면 나의 것이란 인식이 뿌리 깊고 장남이 무조건 1번이고 나머지 순차적으로 재산 분배받는 식이다. 만약 후계자로 된 장남이 능력이 된다면 모를까 능력이 부족할 경우에 형제간의 난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경우 장남이 무조건 1번 후계자란 문화가 없다. 따라서 아들이 무조건 우선이란 문화도 없다. 아들 셋이면 똑 같이 쌈짓돈을 주어 시험 운영을 해보게 하고 그 중에 가장 능력 있는 아들한테 기업을 물려준다. 아들 여럿이지만 모두 능력이 안 된다고 판단되면 사위가 후계자로 이어받는다. 한국의 경우 아들들의 능력이 안 되는 상황일지라도 만약 아들들을 제쳐놓고 사위가 승계 받는다면 하늘땅이 뒤번져질 만큼 큰 난이 일어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신적으로 감당이 될 능력 있는 후계자가 이어받아야 말썽이 적을 것인데 유교문화는 무조건 장남 그 다음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서열문화가 가문의 불화를 일으켜 형제 간 친척 간 관계가 파탄의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요즘 한국 종편 방송들에서 진행하고 있는 , , 등 프로그램들을 보면 보험금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 현제자매 간, 친척 간, 친구 간 사람을 죽음에로 몰아가는 사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얻어낸 거액의 보험금을 손에 넣었으나 그 후과는 모두 행복이 아니라 비극이다. 왜 그럴까? 모두 정신적으로 강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금중외(한국에서는 동서고금으로 표현함)로 본래 나의 것이 아닌데 갑자기 생긴 큰 재산이 말썽이 없는 사례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독일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 하나 해보자. 세 사람의 강도가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무엇이 있어 찾아가 보았더니 숲속에 황금 덩어리가 있었다. 세 강도 모두가 놀랐다. 이 금덩어리를 팔면 우리 셋이 부자는 못 되지만 한평생 먹고사는 데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발걸음을 고향으로 돌렸다. 산 밑에는 넓은 강물이 흐르고 강가에는 작은 나룻배 하나가 있었다. 금을 보자기에 숨겨 싸가지고 세 사람은 배를 저어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때 앉아 있던 한 강도가 옆에 있는 강도에게 눈짓을 했다. 그 뜻은 노를 젓고 있는 저놈을 죽이면 금이 우리 두 사람 몫이 되고 우리는 부자 행세를 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암시였다. 한 강도가 슬그머니 일어나 노를 젓고 있는 강도를 강물로 밀어 넣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두 강도는 껄껄 웃으면서 이제는 팔자를 고쳤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가는 길가에서 서로 협의했다. 금괴를 갖고 거리로 들어갔다가는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르니까 한 강도는 나무 그늘 으슥한 곳에서 금괴를 지키기로 하고 다른 한 강도는 거리로 들어가 점심 도시락을 사오기로 했다. 도시락을 준비하던 강도가 생각했다. “내가 저놈을 마저 죽이고 금괴를 가지면 큰 부자가 될 텐데 어떻게 죽일까?” 술병에 독약을 넣어 갖고 왔다. 금괴를 지키고 있던 강도도 같은 생각을 했다. 거리로 간 강도가 칼을 놓고 갔는데 그 칼을 갑자기 휘둘러 목을 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거리에 갔던 강도가 도시락을 꺼내놓고 술병까지 준비해 꺼내는 것을 본 강도가 칼을 들고 대들었다. 둘은 강도답게 싸움을 벌였으나 무기가 없는 강도가 크게 부상을 입고 쓰려졌다. 금괴를 다 줄 테니 내 목숨은 해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금괴를 본 강도는 그를 죽여 버렸다. 칼을 숲속에 내던지고 숨이 가쁘게 제자리로 돌아온 강도는 다른 강도가 준비해놓은 술병을 기울여 여러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신음하다가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세 강도의 욕심스러운 꿈은 사라지고 금괴는 또 어떤 사람에게로 갈지 모르게 그 자리에 남겨지고 말았다. 재산문제 뿐만 아니라 명예문제도 마찬가지이고 관직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명예욕에 눈이 어두워 지나치게 욕심 부려 자신이 감당 못할 명예를 얻게 된다면 그 사람이 몰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떤 라인을 잘 타 본인의 능력으로 감당 못할 감투를 얻게 되면 그 사람의 몰락은 역시 시간문제일 뿐이다. 여자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애인을 사귀도 가정도 화목하고 사업에 지장이 없는데 비해 어떤 사람은 애인을 두면 가정이 파탄 나고 사업도 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중국부패관료들이 애인 수십 명에서 100여 명을 둔 사건을 보면 결국 자신의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벌여놓았던 탓에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자를 사귀어도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사귀어야 할 것이다. 여자문제는 숫자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로서 감당이 되는 상황에서 사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의 궁극적인 질문, 재산이 얼마 있으면 행복할까? 이에 대해 김형석 선생은 “개개인이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재산이 많지도 적지도 않는 의식주가 해결되고 가정여행이나 다닐 수 있는 조금 여유가 있는 만큼의 재산이 가장 큰 행복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하나의 전제가 있다. 반드시 부정행위가 없이 자신의 신근한 노력에 의해 벌어들이는 재산이어야 한다.”      
74    윤동주의 정체성은 댓글:  조회:5757  추천:5  2015-09-01
윤동주의 정체성은?   윤동주는 한국문인사회에서 굉장히 존경받고 숭앙받는 인물인 것 같다. 수년 전 어느 한 번 술자리에서 한국문인 한 분이 “윤동주는 한국이 낳은 걸출한 시인이며 정말 대한민국의 자랑이다.”라고 가슴에 힘주어 역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에 대해 젬병이다. 평생 시 한 구절 써 본 적도 없고 남의 시 한 편 제대로 읽어본 기억도 없다. 당연히 윤동주의 시 한 구절 읽어본 적은 없지만 윤동주가 만주 간도 명동에서 태어났고 일본 후쿠오카에서 이립의 나이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었다. 한국 분의 말씀에 나는 심술궂게 한 마디 던졌다. “만약 윤동주가 일찍 사망하지 않고 중국에서 우리처럼 조선족으로 살고 있었다면 당신네 대한민국에서 지금처럼 그를 위대한 인물로 받들고 숭앙할 것인가?” 한국 분은 나의 홍두깨 같은 질문에 도발한다고 발끈했다. 나는 도발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니 답해보라고 졸랐다. 한국 분은 아마 갑작스런 한 방에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대답을 머뭇거리고 마는 것이었다. 동석했던 조선족 문인 몇 명이 질문이 참으로 현실적인 문제제기라고 나의 행위에 힘을 실어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 이국 타향에서 ‘디아스포라’신분으로 살아가는 같은 민족은 거주국에 관계없이 정체성에 대한 같은 문제의식을 품고 살아가는 듯하다. 최근 나는 나와 똑 같은 윤동주에 대한 정체성 문제의식을 제기한 재일조선인2세 서경식 작가를 그의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에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란 조직이 있는데 8년째 독서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민변독서모임 맴버 중에 검찰총장 후보, 대법관후보에 이름을 올렸던 분도 있고 법무부 요직에 종사했던 분들도 있다. 그들의 독서 폭이 매우 넓고 수준이 상당하다. 심지어 , 같은 어려운 서적을 독서모임 지정토론 책으로 선정할 정도로 굉장한 수준을 갖췄다. 지난 7월 13일 나는 이 민변독서모임 초청에 의해 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게 되었고 그 후부터 보름에 한 번씩 있게 될 독서모임에 정기회원으로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8월 31일 저녁 독서모임에서 서경식 저 이란 책을 토론하게 되었다. 저자 서경식은 1951년 일본에서 재일조선인2세로 태어났고 일본어로 문필활동을 한다. 그의 일본어로 된 작품이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것이 13편 된다. 책 제목이 이어서 나는 내용이 시에 관련된 전문지식이거나 상식을 담은 책인 줄 알고 거부감이 들었다. 민변독서모임 맴버들이 전문 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하필이면, 그런데 나의 예측은 빗나갔다. 저자는 일본에서 재일교포2세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신분의 고달픔, 고국 한국과의 정체성 정립문제 등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도 던져주는 질문이 많고 해법을 적지 않게 찾게 되는 훌륭한 저서이다. 저자 서경식은 윤동주의 사례를 들어 고국 한국이 안고 있는 좁은 울타리 의식을 비판한다. 아래에 중에 한국문학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라는 소제목의 일부내용을 발췌하니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께 맡긴다. 문학이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행위인 이상, 우선적으로 그것이 언어라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유통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라는 공간인 경우, 국가공용어(국어)라는 장벽을 의미하는데, 그 장벽은 교육이나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강화된다. 이 장벽 안에서는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소비자에 의해 구성되는 시장이 존재하고, 문학 행위의 대부분은 이러한 시장을 무시하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자본이 문학을 간섭하거나 지배하는 일이 생겨난다. 문학에는 이 장벽을 뛰어넘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이 장벽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만약 이와 같은 정의가 틀리지 않는다면 ‘한국문학’이라는 용어는 ‘민족문학’이라는 용어보다도 협소한 개념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일제 강점기 즉 대한민국 성립 이전의 문학은 ‘한국문학’일까? 그것이 현재 한국에 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유고 작가나 월북 작가, 디아스포라(이산민) 작가는 거기 포함되는 걸까? 혹은 재일조선인 허남기의 시나 김석범의 소설은 ‘한국문학’인가? 아니면 ‘일본문학’인가? 아니 애당초 이 둘 중의 하나로 분류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시인 윤동주는 만주 간도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후쿠오카에서 옥사했다. 만약 그가 해방 후까지 살아남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생활했다면 그의 작품은 ‘한국문학’에 속할까? ‘중국문학’에 속할까? 만약 “당연히 한국문학이지”라고 대답한다면 현재 연변에서 활동 중인 조선인 문학가들의 작품은 모두 ‘한국문학’에 속하는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이미 ‘한국문학’이라는 호칭에 모순과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분단과 이산이라는 현실을 살고 있는 조선민족의 문학을 ‘한국’이라는 한 국가에 한정 지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윤동주가 한국에서 많이 읽힌다는 의미에서는 ‘한국문학’이지만 동시에 ‘중국문학’이기도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학’이기도 하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본문학’일 수조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윤동주의 작품이 근대 이후 경험한 식민지 지배, 분단, 이산이라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무관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고뇌와 동경을 잘 표현했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한국’이라는 국가의 틀을 넘어선 조선민족의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민족문학’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요컨대 나는 근대 이후 조선민족의 경험에 뿌리 내린 문학을 널리 시야에 담는다는 의미에서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여기까지 책 중의 말). 인간은 흔히 자기 코도 닦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코를 닦으려 든다는 속담이 있다. 나를 두고 생겨난 말 같아 얼굴이 뜨거워난다. 자기 정체성도 정립하지 못하면서 윤동주를 거론하는 것은 스스로도 매우 웃기는 일이다. 3년 전 일이다. 나와 가까운 한 문인이 나 모르게 연변작가협회 회원가입신청을 얘기해 놓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대답했더니 가운데서 좋은 일 하느라 한 것이니 서류 작성해 보내란다. 얼마 후 가입이 “NO” 됐다는 소식이 왔다. 이유인즉슨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되려면 조선말 4대문학잡지에 수필이나 단편소설 15편 이상 발표한 경력이 있어야 되는데 김아무개는 연변에서 문필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장편역사소설 발표하는 등 연변작가협회와는 관련이 없기에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소식을 접하고 나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고 연변작가협회 책임자 중 한 분을 한국에서 만나 그쪽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나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리고 그 후 이 일을 잊고 있다가 요즘 서경식의 을 읽다보니 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즉 “나는 어디에 속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저도 모르게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답은 연변사람이지만 연변에 속하지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한국에 속하고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디아스포라신분이다. 현재 최선의 선택은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속하고 있는지를 고민하지 말고 오로지 나의 실력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8월 28일 오후 서울시 외국인다문화과 공무원 대상으로 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하였다. 이 특강은 구로구, 영등포구, 금천구, 관악구 등 조선족밀집지역 구청과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 공무원 대상으로 ‘중국동포이해강의’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기로 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된 첫 강의였다. 나는 비록 연변문단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니 속하지 못하지만 조선족이란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 학계와 공무원 사회 및 민변 같은 엘리트집단, 병원을 비롯한 기업을 대상으로 조선족역사문화를 알리는 강의를 많이 해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해나아 갈 타산이다. 이와 같은 의미 있는 활동으로 나의 정체성을 위로하기로 맘먹고 있다.
73    "재기 재기 옵소" 댓글:  조회:5369  추천:2  2014-11-18
“재기 재기 옵소” 인상 깊은 제주도 특산 조랑말과 감귤   “재기 재기 옵소”는 “얼른 얼른 오세요”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제주도에서 2박3일 동안 유람하면서 그 많은 관광지 가운데 유일하게 조랑말에 대해 설명하는 곳과 감귤체험 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구수한 제주도 지방사투리이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바람 많고, 여자가 많고 돌이 많은 삼다도이며 토지가 황량하고 척박하여 농사가 되지 않는 고장이다. 기자가 2박3일 돌아다니는 동안 곡식밭을 보지 못했고 야채도 무 한 종류만 있고 기타 종류는 보지 못했다. 간간히 푸른 말농장과 무밭과 서귀포 감귤나무가 눈에 안겨올 뿐 나머지는 전부 황무지였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홍콩시민들처럼 육지에서 공급하는 곡식과 야채를 막고 산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였고 물류 유통이 잘되어 제주도에도 없는 것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땅에서 먹을 것이 나지 않으니 바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에 해녀가 유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얼마 전에 00지상파 방송에서 제주해녀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92세 할머니가 아직도 건강한 모습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해녀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90 넘는 고령에 아직도 해녀생활 할 수 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의료진의 검진에 의하면 92세 해녀할머니의 뼈가 생리상 50대 여인의 뼈와 같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바로 제주도 특산인 조랑말뼈를 자주 고아먹은 덕분이라는 것이다. 조랑말은 보통말보다 키가 조금 작은 편이다. 세상의 동물 치고 잠을 서서 자는 것까지 포함해 날씨가 좋던 굳던 사시절 내내 평생 누워 있는 법이 없는 동물이 바로 제주도 조랑말이라고 한다. 조랑말 평균 수명이 30세라고 하니 30년 동안 한 번도 눕지를 않고 서서 생활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기타 말이나 소는 팔다리뼈들이 두 개로 뻗어 있는데 비해 조랑말뼈는 통뼈라고 한다. 일 년 사시절 평생 서 있으니 조랑말뼈가 얼마나 단단할 것인가? 가히 짐작하고도 나머지가 있을 만큼 의심의 여지가 없이 약재로 좋은 자료이다. 조랑말뼈는 250도 고온에 48시간 고으면 사골을 우린 것처럼 우윳빛이 나고 기름기가 풍부하다. 당지 사람들은 소뼈를 우린 소탕을 마시듯 마실 수 있으나 보관상 편리를 위해 지금은 환을 지어 병에 넣고 먹는다. 이렇게 하니 먼 곳에로의 이동이 편리해져 서울을 비롯한 한국 내 방방곳곳 사람들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이 구매하가고 있다. 조랑말뼈는 관절염, 골절, 오십견, 골다공증 등 뼈가 문제가 있거나 부실한데 모두 사용되며 효과가 뛰어나다. 제주도 한 민속마을은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정부에 ‘해체신청’을 제출하였는데 정부에서 300호나 되는 큰 마을의 해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연간 50억 원씩 지원하고 있다. 정부가 거액의 돈을 지원하는 이유가 바로 조랑말 보호 때문이라 한다. 지금 이 민속마을은 나라 지원에 의해 협동농장 식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 마을 도민들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만큼 많이 향상되고 있다. 제주도 감귤이 유명한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전체 제주도에서 감귤농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귀포 일대에만 재배가 가능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예로부터 감귤 농사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해왔다. 광복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은 자식을 출세시키려고 열심히 감귤 농사를 지어 뒷바라지를 해왔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감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부른다는 속설까지 생겨났다. 감귤나무는 성인의 보통 키를 넘지 않을 만큼 작다. 한 나무에 달리는 숫자가 많아 매우 탐스럽게 보였다. 감귤 수확은 절대 손으로 사과나 배처럼 송치 채로 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위로 송치를 자른다. 그렇지 않으면 이듬해에 열매가 맺지를 않는다고 한다. 제주도 감귤은 맛이 좋아 한국 내 육지에서 선호할 뿐만 아니라 국외에로 수출하고 있다. 감귤 농사도 현대화시대에 맞게 협동조합 식으로 운영하여 판로를 확보하고 있다. 게다가 감귤쵸콜렛을 비롯해 식품도 만들어 상품화시키고 있어 수입이 짭짤하다. 감귤 농사를 짓는 협동조합에서는 균을 재배하여 몸의 독소를 제거하고 장을 청소해주고 면역력을 높이는데 일품으로 꼽히는 상황버섯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판로가 굉장히 좋다. 제주도 특산품을 정리하면 상황버섯, 조랑말뼈, 동충하초가 유명하다. “재기 재기 옵서”를 반복해 다그치는 조합의 간부 안내 말에 의하면 이 특산품들은 중국관광객 즉 유우커(遊客)들이 굉장히 많이 사 간다고 한다. 제주도를 찾는 중국인관광객은 연간 3백만 명을 넘기고 있다. 관광지마다 중국인관광객으로 차고 넘치고 있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투자자들이 자고 깨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본래 5억을 투자하면 영주권을 부여하는 혜택이 최근 들어 돈 들고 오는 중국인 투자자가 너무 많아 법을 고칠 것을 검토 중이라 한다.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오는데 대해 찬반양론이 분분하다. 제주경제발전에 도움이 크다는 주장과 중국인투자가 급증하면서 난개발 우려와 자본독식 우려가 깊다는 주장이 팽팽하다. 중국인관광객이 떠들고 질서를 지키지 않고 아무데나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버리는 등 매너가 좋지 못한 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필자는 아일랜드호텔에 묵었는데 아침 식사(뷔페) 때 남방여인으로 보이는 한 여사가 한참 음식을 먹던 도중 접시와 젓가락 들고 음식코너에서 서성거리더니 생선구이를 한 점 자기 젓가락으로 집어 코에 대고 냄새 맡더니 도로 놓는 것이었다. 분명히 음식코너엔 공용 집게가 비치되어 있건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입안에 들락날락거리던 젓가락으로 집고 또 코에 대고 냄새까지 맡고는 도로 놓아버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음식 맛이 사라져 굶다시피 하였다. 제주도관광은 본래 천연자원을 우세로 하는 자연관광이 주류여야 하는데 요즘 인위적인 관광지가 많아 조금 식상했다. 유리성, 선녀와 나무꾼, 폴니벨리, 서커스 등 인위적인 것들이 매우 많았고 서커스는 중국인오락이고 폴니벨리는 몽골기마기교를 보여주는 코스였다. 우리민족 전통문화 오락관광은 제로여서 아쉬웠다. 좁은 제주도가 미어터질 지경으로 관광객이 많이 몰려오고 있지만 그들 중 절대다수는 재차 찾지를 않는다고 한다. 일회성 관광으로 그친다면 무궁무진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많은 수가 다시 오고 싶게 만들어야 아름다운 제주가 영원히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附說 : 이 글이 2014. 11. 17일자 아침시간에 발행된 중국동포타운신문 283호에 실렸는데 점심때쯤 독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독자 왈, “저도 작년 여름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호텔에서 아침식사 때 불쾌한 일을 겪었다. 음식코너 앞에 줄지어 선 중국아줌마들이 어찌나 큰소리로 떠드는지, 떠드는 것은 중국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어떤 아줌마들의 입에서 침이 튕겨 나왔고 그 더러운 침이 고스란히 음식에 발사되고 있었다. 그 불미스런 광경을 목격하고 몸을 돌려 나와 버렸다. 배는 고프고 하여 할 수 없이 마트에서 빵을 사 갖고 아침식사로 때웠다. 2박3일 여행인데 도착한 이튿날 아침에 불쾌한 일이 생겼고 나머지 시간을 매우 우울하게 보냈다. 다시는 제주도에 가고 싶지 않다.” 필자는 중국인관광객이 해외에서 매너가 좋지 못하면 국가 이미지에 손상되는데, 이 점을 감안하여 중국여유총국에서 중시를 일으키고 해외관광에 나서는 유우커들에게 기초공공질서 교육과 매너 지키기 교육을 실시하면 좋지 않을까라는 바람을 갖고 있다.
72    영화 소리굽쇠 주인공 왜 죽였을까? 댓글:  조회:5709  추천:0  2014-10-28
영화 소리굽쇠, 주인공을 왜 죽였을까? 영화 제작사들이 연변거리라 부르는 조선족밀집지역 일번지 가리봉에 와서 영화를 많이 찍어 시사회 참가 초청을 여러 차례 받았으나 한 번도 가지 않다가 조선족1급 배우 ‘쑤이러우(水肉)’로 소문난 이옥희 씨가 조선족으로 처음 한국영화에 캐스팅 된 영화 시사회 초청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10월 23일 서울 왕십리 CGV에서 영화 소리굽쇠 시사회가 있었다. 시사회에 참석하는 것은 영화관에 개봉되기 전에 미리 볼 수 있는 특권이 있으나 특권을 향수하는 대신 홍보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의무가 있다. 기자의 신분으로 참석하였으니 소식보도 식으로 기사만 쓰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필자는 조선족 위안부 할머니(이옥희)의 파란만장한 삶의 고통과 손녀 향옥(조안)의 코리안 드림을 담은 스토리로 만들어진 영화라 기사도 기사지만 영화평을 써내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한국에서 위안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혹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것은 여러 편 있었지만 영화로는 소리굽쇠가 처음이라는 것, 조선족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이기 때문에 조선족 배우가 출연하여 공감을 진실성 있게 느끼게 되는 것, 감독을 비롯해 배우와 스탭 전원이 재능기부로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것 등등의 의미가 있다. 일제 때 경상남도 밀양에서 천진난만한 소녀가 일본순사한테 속이어 만주 방직공장에 취직되는 줄 믿고 따라 나선 것이 일본군 위안부 생활의 시작이었다.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면서 모진 고통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족 할머니로 중국 흑룡강성 오지에서 살아왔다. 할머니에겐 유일한 핏줄로서 손녀 향옥이다. 향옥이는 중국 심양에서 통역 일 하다가 한국에 어학연수 기회가 생겨 코리안 드림의 꿈을 안고 입국한다. 향옥이는 통역사 공부하는 한편 조상의 연줄로 귀화수속을 밟는다. 이 과정에 신원보증을 선다고 나선 한국인이 돈을 사기치고 사라져 절망하게 된다. 귀화하면 할머니를 한국에 데려가겠다던 약속이 물거품이 되자 귀국하려고 서두른다. 이 때 덕수(김민상)라는 한국인 노총각이 나서 향옥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덕수는 할머니 소녀 때 첫사랑으로 좋아하던 동네 오빠의 손자이다. 향옥이가 한국에 떠날 때 할머니가 자신의 첫사랑 영감을 찾아보라고 부탁하면서 60여 년 간직해 오던 소리굽쇠를 목에 걸어준다. 마침 덕수 총각도 소리굽쇠를 간직하고 있어 과거 할머니가 맘에 품고 살아온 분의 손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덕수 아버지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피해자이다. 원폭이 덕수 가족에게 남긴 피해가 영화에서 드러난다. 덕수가 향옥이를 설득하여 한국에 남게 하고 두 사람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덕수는 시골에서 딸기 농사를 지으면서 심성이 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의 열매가 생겨 향옥이가 임신한다. 허나 태아가 뱃속에서 죽는 비극을 맞이한다. 원인이 바로 덕수 아버지가 원폭피해자인데 아들에게까지 후유증이 미쳤던 것이다. 덕수가 절망하여 망가진 모습으로 일인시위도 해보고 하다가 향옥의 곁으로 찾아온다. 잘 살아보려고 결심하는데 동네 양아치들이 국제결혼한 조선족여성들의 흉을 보는 소리 듣고 참지 못하고 싸우다가 죽는다. 부부가 알콩달콩 깨알 쏟아지게 잘 살고 있을 무렵 출입국 공무원이 덕수의 집을 방문하여 위장결혼여부를 확인한다. 진짜 결혼이 맞냐를 확인하려고 집안 곳곳을 샅샅이 훑어보며 하는 소리가 “요즘 국제결혼 온 여성들을 믿지 마라. 돈 관리를 마누라에게 맡기지 마라.”는 등 마뜩치 않는 말들을 늘여놓고 사라진다. 덕수가 죽자 출입국 공무원이 또 나타나 향옥에게 출국명령을 내린다. 남편이 죽었으니 한국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에 불법체류자가 되기 전에 출국하라는 것이다. 남편이 죽자 향옥이는 재산을 정신대연구소에 기부하고 어려울 때 도와주었던 식당을 운영하는 남편 의형제한테 인사하고 귀국하려고 찾아갔는데 문밖에서 출입국 공무원의 “요즘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 여성들이 남편의 재산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죽었으니 지금쯤 오디서 좋아 웃고 있을 것이다. 다시 이 가게에 나타나면 제보하라. 중국에 추방하게.”라는 억울하고 한심하고 괘씸하기 그지없는 말을 듣게 된다. 향옥이는 이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절망을 느끼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정처 없이 걷고 걷다가 다리 위에서 화물차에 치여 젊은 생을 마감한다. 너무 슬프다. 코리안 드림이 너무 슬프다는 얘기다. 주인공인 조선족 젊은 여성을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가? 살릴 수는 없었을까? 만약 내가 감독이라면 절망에 빠져 자결하려고 한강에서 투신하려고 할 찰나 평생 자기(손녀) 하나만 바라보고 모진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오신 할머니가 눈에 밟혀 멈추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재기에 성공하려고 이를 악문다. 학원에 계속 다니고 통역사의 꿈을 이뤄 한국에서 맹활약하는 해피엔딩으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예술을 모르는 나의 천박한 생각일 뿐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리굽쇠를 포인트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감독의 설정에 주인공 향옥이가 죽기로 되어 있는지 모른다. 소리굽쇠의 특성을 보면 할머니 일생이 불행하니 덕수 가족도 불행했다. 남편 덕수가 죽으니 아내인 향옥이도 죽는 게 맞는 것 같다. 이것이 곧 예술이다. 내가 아무리 코리안 드림이 너무 비극적으로 묘사되어 영화가 아쉽다고 외쳐도 무가내다. 그렇다면 소리굽쇠란 어떤 존재일까? 소리굽쇠의 특성을 모르면 영화가 도대체 어떤 판국인지 이해할 수 없다. 영화란 처음을 조금 보면 결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면 그건 예술이 아니다. 시종 아리송하다가 웬 막판에 무릎을 치며 그러면 그렇지가 나와야 진짜 예술적으로 잘 된 영화이다. 소리굽쇠 영화 예술 묘기가 또 하나 있다. 향옥이가 코리안 드림이 비극적으로 끝나자 고향 집에 돌아와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영화 첫 시작 화면이 향옥이가 밧줄에 목을 매는 것으로 전개된다. 중간 중간 때때로 향옥이가 밥을 먹지 않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는 장면이 나오고 할머니가 너무 속상해 듣지 않는 말을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다가 영화 끝날 무렵 한국에서 유골함이 날아온다. 마지막 화면은 할머니가 향옥이한테 너를 먹이려고 씨암탉을 잡는다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그렇다면 처음 화면부터 끝날 무렵까지 향옥이가 한국에서 중국으로 돌아가 우울증을 앓고 있고 심할 때엔 밧줄에 목을 매는 장면들은 현실일까? 할머니의 꿈(환각)일까? 할머니가 위안부 생활하면서 겪은 고통이 너무 심하고 후에 한족 사내와 살면서 더러운 기생이라는 욕을 먹으며 모진 매 맞던 고통 때문에 몸은 살아 있어도 정신은 이미 죽어 영혼이 떠도는, 꿈과 현실이 망각되는 비몽사몽 속에서 살아가는 비극,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예술묘기이다. 관객들이 이 예술묘기를 알아내려면 역시 소리굽쇠의 특성을 파악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배우들의 언어표현이다. 쑤이러우 배우의 구수한 연변말도 좋았지만 향옥이 배우를 맡은 조안 씨의 연변말 구사가 오리지날 연변말에 가까워 칭찬하고 싶다. 과거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변말 한다는 것이 평양말 본 따 어색하기 그지없는 연변말이랍시고 스크린에 올리고 가정 집 안방을 휘저은 사실이 메스꺼울 정도로 거부감을 느꼈었는데 소리굽쇠 영화는 연변말 구사가 잘 되어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어 좋았다.
71    재한동포의 生日 ‘중국동포의 날’ 탄생에 부쳐 댓글:  조회:6049  추천:5  2014-05-06
올해로 한중수교가 22주년이 되고, 한국체류 중국동포가 58만 명에 이르고 있는 가운데 중국동포들에 대한 한국정부의 문호개방이 더욱 확대되면서 앞으로 고국으로의 '동포 자유왕래'가 빈번해지고 국내 유입이 더욱 많아질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이처럼 한국내채류 동포가 늘어남에 따라 그동안 동포사회에서 이들을 상대로 비교적 큰 규모의 단합된 정기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대두되 왔다. 이에 한중동포신문, 중국동포타운신문, 동북아신문 등 언론 3사가 발의하고, 여러 중국동포 언론사와 단체들이 적극 동참하여 2014년을 '중국동포의 날' 생일 원년으로 삼고, 해마다 추석 전일을 '중국동포의 날'로 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이 뜻 깊은 경사를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금년 9월7일에 '제1회 중국동포민속문화大축제'를 개최하고자 한다. 우리 민족의 민속문화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민족의 애환과 삶의 철학을 담고 점철되면서, 발전 되고 계승되어 세계가 인정하는 아름다운 문화로 거듭났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됨에 따라 민속문화가 많이 사라졌고 사람들 속에 잊혀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민속문화의 소실을 대책 없이 지켜만 볼 수 없다. 모두가 힘을 합쳐 적극적으로 민속문화 살리기에 나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면 민속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중국 이주 조선족의 역사가 150여 년 흘렀다. 해외 750만 명의 재외동포 중, 중국조선족은 고국의 민속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20여 년의 코리안드림의 여파로 말미암아 집거지는 해체 되었고 인구도 급격히 줄어들어 민속문화가 예전처럼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 거주 중국동포의 수가 60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데, 민속장기 한 가지만 활성화되어 있을 뿐, 기타 민속문화 활동은 점차 고갈되어가고 있다. 이번에 개최 예정인 '중국동포민속문화대축제'는 한민족의 전통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60만 중국동포사회가 하나로 어울려지는 큰 잔치로서, 우리 선조들의 민속문화를 되살리고 고국의 민속문화 발전에 기여하며, 재한중국동포사회가 지역사회에 잘 정착하고, 또 고국에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과거 중국동북 3성에는 조선족집거지 향진들에서 매년 조선족운동대회를 개최하는 사례가 있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이 과거 향수를 못 잊고 있으며, 중국동포들은 워낙 집단민속오락 활동과 가무를 좋아하기 때문에 고국 땅에서 처음으로 열리게 되는 이번 축제에 적어도 5만 명 이상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중국동포의 날' 제정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이날을 재한중국동포들의 소중한 명절이 되기를 기대한다. 재한외국인방송
70    동포사회 이해 키워드 찾아야 댓글:  조회:6559  추천:2  2014-02-03
동포사회 이해 키워드를 찾아야   재외동포 이해교육 국민 참여 확대방안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이며 재외동포 신분인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해’, 이해는 인간사회 구성원 사이 화합과 공존을 도모하는 촉매제이며 갈등을 해소하고 없애는 용해제(溶解濟)이다. 중국에서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 ‘리제완쑤이!(理解萬歲!)’란 말이 전반사회에 널리 퍼져 유행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가령 술좌석에 말썽이 생기거나 가정불화가 있거나 심지어 시정장사치들끼리 다툼이 생겨도 입버릇처럼 ‘理解萬歲!’를 들먹였는데 전사회적으로 확실히 갈등해소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한중수교 20년이 넘었고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동포의 수가 60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데 한국사회와 동포사회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지난 동안에 한국사회, 특히 한국정부는 동포들이 고국을 이해할 것만 강조하는 반면 동포사회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이 일방통행 식으로 흘러와 동포정책이 실패를 거듭 겪어왔고 따라서 한국사회도 동포사회를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보아왔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사회와 동포사회가 화합과 공존을 이루려면 현시점에서 과거 일방통행 식 이해가 아닌 한국사회도 동포사회에 대한 이해가 매우 필수적이다.   민족이란 개념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이듯 동포란 개념도 혈통보다 문화가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문화란 한 인간집단의 ‘활법(活法)’이다. 활법이란 삶의 방법, 방식, 양태, 양식이다. 활법은 곧 한 인간집단의 정서이며 결국 문화란 정서이다. 중국조선족의 경우 선조들의 한반도문화와 중국문화가 몸에 배인 이중성문화 소유자이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적인 문화공동체로서 한국사회 문화와 같으면서도 다른 문화를 지닌 복잡한 집단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은 한국인과 정서가 다른 점이 굉장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는 사과는 사과이고 배는 배이지 사과배란 것이 없다. 중국조선족의 상징인 연변엔 사과배가 있다. 이북의 북청 사과나무가지를 만주(연길현 로투구진 소기촌)의 돌배나무에 접목시켜 맺은 과일이 곧 사과배인데 사과 맛도 있고 배 맛도 있는 과일이며 중국조선족은 마치 사과배처럼 이 중 ‘맛(문화)’을 지니고 있는 공동체이다. 한국사회는 동포사회가 지니고 있는 사과배와 같은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사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족사회는 사과 맛의 비중이 더 크냐, 배의 맛이 더 있냐는 것인데 이것이 곧 조선족사회 정서이며 이 조선족사회 정서를 파악하는 것이 곧 조선족사회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된다. (지난 12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길 가던 한국인 자매가 조선족들이 떠들어댄다고 ‘짱깨’라 욕한 것이 집단폭행사건이 발생하는 발단이 되었다. 경찰서에 가서까지 한국인자매가 끝까지 조선족들을 ‘짱깨’라 욕해 담당경찰을 놀라게 했는데 이럴 경우 한국인이 조선족 몸속에 배인 중국의 시끌벅적 떠드는 문화를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내국인과 동포사회 갈등을 줄이려면 한국인은 동포들의 정서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시급하다.     2년 전 강원도에서 조선족이 중국축구를 응원하는 문제를 갖고 한국인과 다투다가 칼부림으로 살인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한국인이 중국축구를 응원하는 조선족을 배신자라 욕하고 이 땅을 떠나라는 등 과격하게 밀어붙여 생겨난 일이었다. 이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난 주요 원인이 바로 한국인이 동포들의 정서를 모르고 일방적으로 혈통관념에 의해 서운한 감정만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은 단일민족 의식에 따른 ‘피는 물보다 더 진하다’는 하나의 진리만 알고 있을 뿐 ‘키운 정이 낳은 정보다 더 크다’는 또 다른 하나의 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키운 정이란 무엇일까? 조선족역사는 한반도인이 미국이나 일본 진출처럼 기성 사회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1세대들이 만주에 이주해 개간한 토지가 한반도 2배 되는데 이는 삶의 터전을 직접 개척했다는 뜻이다. 공산당은 집권 후 조선인과 한 약속을 지켰고 아울러 조선족자치주도 세워주고 소수민족정책을 우월하게 펼쳐 우대해 주었다. 그러므로 조선족이 공산당을 자연스레 따르게 되었고 주인의식을 갖고 생활해오다 보니 중국축구를 응원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이 이와 같은 조선족의 역사맥락을 이해한다면 서운한 감정이 많이 해소될 것이다.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은 다수가 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로 접근하여 제정하기 때문에 성공할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초기 장춘에 있는 대학들에서는 밀가루음식이 위주였고 가끔 강냉이떡을 먹기도 하였다. 한 주 쌀밥은 월, 수, 금, 일 점심 네 끼만 주는데 조선족학생은 쌀밥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입쌀권을 8근 주고 한족은 2근밖에 주지 않아 우리는 남아돌고 한족은 모자라 하는 말이 “니네 조선족은 왜 정부로부터 우대를 받는지 모르겠다.”고 부러워하였다. 또 10위안이면 한 달 생활비로 족할 시절에 소수민족비 4위안을 주어 한족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처럼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서를 잘 파악하고 상응한 정책을 펼쳐 소수민족들이 중국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중국화교정책을 들먹이면 화교들이 해외에서 모두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좋은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한국인은 반응하는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1960년대 말기 4~5 만 명에 이르는 화교들이 대거 조국에 밀려들었는데 중국정부는 아무런 거부 반응이 없이 전부 안치하고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화교자녀에게 가산점을 부여하고 화교자녀 취직문제와 승진문제에 있어서 우대정책을 펴기도 하는 등 우월한 정책을 많이 실시하고 있다. 중국은 일원화 지도체제이기 때문에 국무원 화교사무실에서 제정한 정책이면 교육부를 비롯해 일사분란하게 기층까지 시달되고 있다. 한국은 중국화교사무실에 해당되는 재외동포 전담기구가 없어 출입국은 법무부, 취업은 고용노동부가 관리하여 시어머니가 여럿 있어 복잡하다.   1993년 동남아관광 길에 올라 중국 심천에서 홍콩을 경유하는데 뤄후커우안과 홍콩입국장에 ‘회향창구(回鄕窓口)’가 있었다. 하루 10만 명에 달하는 홍콩시민이 대륙을 방문하고 또 돌아가는 출입경(출입국) 창구가 한국처럼 외국인 창구가 아니라 ‘회향창구’였다. 중국은 이렇게 해외 화교들의 심리와 그에 따른 정서를 잘 파악하고 입국창구하나라도 입맛에 맞게 설치하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김포국제공항과 인천국제공항은 코리안드림 20년이 넘어 외국인창구를 이용하다가 2013년에 새누리당 김회선 국회의원의 제의에 의해 인천국제공항에 ‘재외동포창구’가 생겼는데 ‘재외동포창구’보다 ‘회향창구’가 훨씬 정서적으로 다가온다고 본다. 중국은 조선족의 정서를 배려해 연변에서는 신분증에 아버지, 할아버지가 지어준 한글 이름을 버젓이 적고 있는데 할아버지 고향인 한국은 그 이름을 못 쓰게 하고 있다. 이유는 여권에 적힌 영문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는 조선족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외국인법에 맞춰 그냥 법으로만 밀어붙이기 때문에 조선족을 고국에 대한 감정이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법무부는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으로서 위의 사례와 같이 융통성 없이 따분하게 법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이해된다. 그렇다면 정서를 파악하고 동포들의 입맛에 맞게 동포정책을 펼치게끔 노력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재외동포재단과 학계가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재외동포를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해서는 교육현장에서 전 세계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의 역사적 배경과 현실상황을 알아가는 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현실교육은 재외동포의 정서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실효성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한국정부 동포정책이 성공하려면 동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서를 잘 파악하고 제정해야 하며 한국국민들이 동포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역시 동포들의 정서를 살피고 이해해야만이 공존과 화합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은 지난 1월 28일 주제로 열린 재외동포재단 포럼 토론고
69    재한조선족 왜 주눅 드나? 댓글:  조회:8634  추천:48  2013-10-22
재한조선족 왜 주눅 드나?   재한조선족이 60만 명에 육박함에 따라 여러 가지 소재의 글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좋은 일이다. 이른바 조선족 지성인들은 재한조선족의 정체성 문제를 많이 고민하고 있는듯하다. 역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정체성 문제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아무데나 반창고 붙이듯 갖다 붙이는 것은 현실성이 없어 지나치게 억지스러워 보인다. 요즘 는 글이 여러 인터넷매체를 달구고 있다. 재한조선족이 당당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현상은 잘 짚었다. 그러나 당당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본질을 짚지 못했다. 본질을 짚지 못하다 보니 그 이유를 심지어 왜곡하고 있다. 저자는 재한조선족이 당당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이유를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조선족역사’를 몰라서라고 보고 있다. 모르니까 주눅 들어 시든 배추신세로 살아가고 있다는 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채영춘 선생이 미국에 다녀와 쓴 글 ‘중국인은 뒤로’하는 문장을 보면 중국인이 서양에서 무시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우 무시당하는 중국인이 “우리 중국은 5천년 찬란한 문화를 지니고 있고 고대에 수많은 발명으로 세계문명에 기여했는데 왜 당신들이 우리를 무시하는가?” 이런 식으로 큰소리친다면 서양인한테 씨알이나 먹힐까? 서양인이 중국인을 무시하는 것은 중국인의 국민소질 때문이다. 마찬가지 도리로 조선족이 한국 땅에서 무시당하는 것 역시 조선족의 소질문제이다. 88서울올림픽 전후 초창기에 한국에 다녀온 조선족은 동정의 대상으로 대접을 받았지 무시당하지 않았다. 그 후 1992년 8월 24일 중한수교를 계기로 코리안드림 바람이 거세게 불어 조선족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특히 2007년 3월 4일 방문취업비자가 생겨남에 따라 30여 만으로 늘었다가 지금은 국적취득자까지 포함하여 60만에 가까운 조선족이 한국에 살고 있다. 이들이 한국인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조선족이 당당하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무시한다고 해서 “우리는 당당한 중국조선족, 과경민족의 자랑,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였고 국공내전에 적극 참전하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데 왜 당신들이 우리를 무시하는가?”고 호소한다면 정신병 취급받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자랑스러운 조선족역사’가 한국생활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늘날 개방된 사회에서 한 집단이 타자(他者)세계에서 무시당하는 것은 그 집단의 과거 역사와 관련이 없다. 미국이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가? 미국은 뿌리도 없고 ‘잡혈통’들이 모여 세운 나라로서 내세울 자랑스러운 역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타자세계에서 대접받는 것은 경제대국이자 국민소질 때문이다. 일본은 얄미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인이 타자세계에서 대접받고 있는 것은 역시 경제대국이자 일본인개개인의 국민소질 때문이다. 현시대에 있어서 한 집단이 대접받느냐, 무시당하느냐 하는 것은 그 집단이 속한 나라의 경제실력과 국민소질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실력과 국민소질을 말하자면 전자에 비해 후자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중국경제가 승승장구하고 있고 G2로 부상하였지만 중국인이 타자 세계에서 대접받지 못한 주요 이유가 바로 국민소질이다. 아무데나 낙서하고, 떠들고, 침 뱉고, 휴지를 아무데나 버리고, 교통규칙을 지키지 않는 등등의 낙후된 사회공공질서 의식이 부족하여 외면당하고 심지어 말밥에 오르고 있다. 전에 필자가 밝혔듯이 재일조선족사회는 유학생을 주류로 형성되었다면 재한조선족사회는 노무일군이 주류로 이뤄졌다. 하늘과 땅 차이이다. 노무일군의 출신을 보면 농민이 많고 가령 도시 호구를 갖고 있더라도 사회 밑바닥에서 왔거나 혹은 도시에 진출한 시간이 짧거나 아무튼 예전의 농경사회 낙후된 문화의식과 폐쇄된 언저리문화의식을 갖고 있는 집단인 조선족이 한국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한조선족의 본질적인 소질문제란 무엇일까? 우선 조선족은 공공질서의식이 형편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횡단보도를 가로 지르고, 아무데나 침을 뱉고, 전화 통화소리 높고, 공공장소에서 떠들고, 금연택시에서도 기어코 담배를 피워 기사와 싸우고, 택시에서 해바라기 까고, 술 마시고 싸움이 많고, 노상방뇨하고, 쓰레기를 아무렇게 아무데나 버리고, 쓸데없는 일에 경찰과 대들고 싸우고, 일 보러 가선 묻는 말에 대답 잘 안 하고, 인사성이 밝지 못한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고집만 세고, 사회주의 큰가마밥 의식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경제문화에 익숙지 못하고, 이루다 열거하자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주말 저녁 대림역 일대를 보면 담배꽁초를 비롯한 온갖 쓰레기들이 난장판을 이루고 술주정에 쌈박질이 많고 택시기사들이 피해 다닐 정도로 난잡하다. 이것이 재한조선족사회 추한 자화상의 축소판이다. 조선족은 자신들의 잘못은 모르고 한다하는 소리가 한국과 한국인이 어떻게 나쁘고 속 좁고 마치 상종할 수 없는 나라나 사람처럼 흉보기 일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한국과 한국인의 흉을 보면서도 정작 가라면 돌아갈 사람이 기본상 없다는 것이다. 한 이주 집단(장기체류 포함)이 타자세계에서 성공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야 한다. 재한조선족사회는 경제적으로 부자는 아니지만 코리안드림 20여 년을 통해 먹고 사는 보릿고개를 이미 넘었다.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중국어로 표현하자면 ‘小康’ 수준에 이르렀다. 둘째 문화적으로 적응이 잘 되어야 한다. 지금 재한조선족사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에 적응이 어려운 것이다. 문화라면 방대한 개념이지만 간단하게 줄여 말하자면 공공사회질서만 잘 지켜도 초보적으로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재한조선족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이다. 만약 지금의 상태대로 문화적 적응이 어렵다면 재한조선족사회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셋째 정치참여가 활발해야 한다. 정치참여가 활발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위 두 가지에 비하면 재한조선족발전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조선족출신 국회의원이 나오면 마치 재한조선족사회가 천지개벽을 맞아 획기적으로 바뀔 것처럼 떠들고 있는데 필자는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재한조선족사회발전은 한두 명의 국회의원 배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의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68    월세, 전세에 우는 재한조선족들 댓글:  조회:6342  추천:0  2013-10-17
월세, 전세에 우는 재한조선족들 일부 악덕 주인들 체류만기 악용해 보증금 돌려 안 줘 고충 심각해   한국에 사는 조선족이 60만 명에 가깝다. 연길시 인구를 초과하는 숫자 거의 모두 월세방, 전세방을 구해 거주하고 있다. 내 집이 아닌 임시 세 들어 살다보니 여러 가지 고충이 많다. 한국부동산 계약은 내용이 아주 간단하다. 임대인과 임차인 인적사항이 있고 보증금 금액과 월세 액수 및 계약기간을 명시하는 것이 전부이다. 세 들어 살다보면 자질구레한 일이 많지만 계약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 문제가 생기면 서로 책임을 상대에게 떠밀어 갈등을 빚기가 일쑤이다. 보일러가 고장 나면 수리비 혹은 교체비를 세입자가 부담하느냐 주인이 안느냐는 마찰을 비롯해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 갈등을 많이 겪는다. 맘씨 고운 주인을 만나면 그나마 편히 살 수 있지만 시비도리에 밝지 못한 주인을 만나면 혼줄 날 정도로 맘고생이 심하다.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 가장 큰 마찰은 보증금이다. 한국부동산법에 의하면 계약기간 만료 전에 임의적으로 보증금을 올릴 수 없다. 가령 올린다 해도 5%를 초과하지 못한다. 그러나 일부 주인은 10%~20% 마음대로 올린다. 임대인이 반발하면 살기 싫으면 집을 빼라고 닦달한다. 법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시간 팔고 돈 팔고 수지가 맞지 않는다. 부동산법에 의하면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세입자가 집을 뺄 수 있다. 다만 1개월 전에 미리 주인에게 통보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입자는 법대로 하였으나 주인은 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 맘대로 처리한다. 예를 들어 계약기간이 만료되든 1개월 전에 통보 받았든 주인은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날 때까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다. 조선족 Y씨 여인은 3년 전 영등포구 봉천동에서 1,000만원 보증금 월 30만원짜리 세집을 구했다. 2년 전 딸애가 한국에 왔고 강남 00무역회사에 근무하고 Y씨 여인도 강남 00음식점에 근무하고 있어 1년 전 모녀 직장이 가까운 건대입구 근처에 이사 갔다. 그때부터 큰 문제가 생겼다. 봉천동 주인이 집이 나가든 안 나가든 1개월 이내로 보증금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3개월 지나도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아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막무가내였다. 6개월 될 즈음 보증금을 돌려받았지만 황당한 사건이 생겼다. 주인이 6개월 비여 있은 기간의 월세 값 30만원씩 6개월 치 180만원을 보증금에서 까고 송금했다. 이 사건은 현재 민사소송 중에 있다. 요 몇 년래 재한조선족의 소득이 증가하고 가족이 늘어남에 따라 전세에 사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전세 보증금은 보통 수천만원이다. 한국에서 번 돈 저축을 거의 털어 걸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상식적으로 전세 보증금은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돌려받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제때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고 또 보증금을 날려버리는 사례도 일부 나타나고 있어 발을 동동 구르게 만드는 사건도 일어나고 있다. 조선족 H씨는 4년 전 구로구 개봉동에서 5,000만원짜리 전세를 구했다. 1년 전 개인 사정이 생겨 중국에 돌아가려고 집을 빼겠다고 주인에게 통보했다. 그런데 주인이 사업이 부도나고 집도 경매에 들어가 돈을 돌려받을 수가 없어 조카에게 맡기고 귀국했다. 주인이 경제형편이 나아졌지만 본인이 아니고 조카한테 돌려줄 수 없다는 핑계로 아직까지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H-2비자 소지자가 3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체류만기가 있는데 일부 주인들은 만기라는 약점을 잡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수많은 조선족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전세에 살던 만 55세 이상자들 중 3개월씩 임시 체류하고 귀국하는데 주인들이 이 약점을 잡고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사례도 허다하다.
67    연변지명유래 해석 오류 댓글:  조회:6464  추천:1  2013-10-11
연변지명유래 해석 오류     요 몇 년래 연변에서 지명유래와 유적유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역사문화에 연구에 심히 취미를 갖고 있는 필자는 여러 선생님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김호림 선생은 고구려유적부터 시작해 연변역사유적에 대한 연구가 깊고 넓으며 또 지명연구에도 기여가 크다. 개인적으로 일면식조차 없지만 이 기회를 빌어 경의 인사를 전한다. 역사유적과 지명연구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고고학지식, 역사문화지식, 인류사회학지식, 민속학지식 등 세상만사 지식을 갖춰야 한다. 가령 숱한 고생을 쏟고 연구해내도 사회적으로 인기가 별로이다. 인기 없는 일에 매진한다는 것은 웬만한 결심이 없이는 해낼 수 없다. 그래서 이 분야의 지식인들을 탄복하고 존경한다. 유적연구와 지명연구는 워낙 어려운 일이기에 가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유래를 정확히 짚지 못하면 세밀한 이성적 학문이 그냥 감성적인 개인 느낌에 의해 견강부회의 억지 해석이 될 수 있어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요즘 조글로에 실린 김호림 선생의 연변지명유래 해석에 있어서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필을 들게 되었다. 김호림 선생의 본문 중 한 단락이다. “연변의 많은 지명은 이처럼 이민들의 주거지 환경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용정이라는 이름은 19세기 말 이곳에 정착한 조선인들이 옛 우물을 발견하면서 작명되었고 도문은 도문이라는 이름 먼저 워낙 석회 가루가 날리는 동네라는 의미의 회막동(灰幕洞, 일명 회막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벌을 찾아 또 샘물을 찾아 이삿짐을 풀었던 조선인들은 간평間坪처럼 골짜기 사이에 들 평坪을 넣어 지명을 만들었고 또 약수동藥水洞처럼 샘물가에 삼수변의 동洞을 넣어 감칠맛 나는 이름을 지었다.” 위 문장에서 동(洞)에 대한 해석이 애매할 뿐만 아니라 洞의 유래가 설명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지명에서 나타난 洞은 감칠맛 나는 삼수변이 붙은 동이 아니다. 한반도 행정구역 나눔을 보면 道, 郡, 面, 里와 市, 區, 洞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洞은 원시인류가 산에서 대지에 내려와 거주할 때 일정기간 동굴에서 살았던 데서 유래되었고 里는 동굴 속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선 里를 마을 리라 해석한다. 洞과 里가 합쳐 洞里이며 우리 말 동네는 土話이고 표준어로 洞里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시인류가 무리지어 거주하는 곳이 洞里라는 뜻에서 오늘날까지도 동네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원시인류 생활모습에서 유래된 洞이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사용하고 있을까? 현대인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 원시적 어휘 잔재가 굉장히 많은데 일례로 驛은 본래 말을 쉬우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는데 오늘날 기차역이나 버스역은 말이 쉬는 곳이 아니나 원시적인 문화유래 때문에 세금 변인 金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馬변인 驛을 사용하고 있다. 자동차의 힘을 馬力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시를 비롯해 한국 도시사람들이 동굴 안에서 살고 있어 禿山洞, 大林洞, 加山洞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또 洞마다 洞長이 있는데 동굴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개 최소행정구역인 洞을 관리하는 직급이다. 한반도의 인류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洞里라 부른 것이 유래가 깊기 때문에 만주에 이주한 초기에 조선인 마을을 이루면 洞을 붙여 부른 사례가 많았을 것이고(실제로 해방 전에는 洞이 붙은 지명이 많았으나 해방 후 중국식 행정구역 나눔에 따라 洞이 사라지고 村이라 부르게 되었음)연변지명에 나타난 洞은 이와 같은 역사적인 맥락을 거슬러 살펴보아야 정학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식 행정구역엔 洞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살아온 조선족은 洞, 里, 洞里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할 수 있어 애매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유래를 연구하는 것은 학문이며 학문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근거를 토대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개인의 감성적인 느낌에 의해 해석한다면 견강부회 억지해석이 되어 학문적인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66    조선족 將棋실력 어디까지 댓글:  조회:6544  추천:2  2013-10-08
조선족 將棋실력 어디까지   2002년경 요녕 안산시 출신 김동학 씨가 한국장기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프로로도 유명했지만 한국에선 아마로부터 발걸음을 떼야했다. 워낙 실력이 출중해 아마대회에서 절대왕자로 군림했다. 아마대회에서 우승하면 프로입단자격이 주어진다. 김동학씨는 2005년부터 한국프로기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프로초단 때부터 각종대회에 우승을 거의 휩쓸다시피 하였는데 무려 우승 12회에 달했다. 김동학씨가 한국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는 김경중 9단이 절대 강자였다. 한국장기 우승판도가 조선족 출신에 의해 바뀌게 되었다. 그즈음 김기영 젊은 기사가 김경중 9단과 김동학씨 양강 구도를 깨고 한국장기 ‘삼김’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김동학씨에 의해 조선족장기실력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 조선족 출신 김정수, 허금산, 김동일 등 선수들도 한국프로장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조선족장기실력을 한국사회에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20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 100주년 기념 세계인장기대회가 있었는데 한국인프로기사들이 예선전을 거쳐 출전선수가 선정되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국 유명 프로기사들이 대거 출전했지만 우승부터 3위까지 조선족의 몫이었고 4위에 미국 하여명, 한국프로는 5위에 겨우 진출했다. 한국브레인TV에서 반복하여 중계하는 바람에 조선족장기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한국 장기계가 모두 알게 되었다. 2011년 1월 30일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장기대회가 열렸고 그해 추석맞이로 2회대회까지 있었다. 조선족장기가 한국에서 자리잡아갈 즈음 브레인TV가 개최한 제2회햇터배클럽대항전이 있었는데 조선족을 대표하는 ‘백두산클럽’이 출전하여 우승을 거머쥐어 또 한 번 조선족장기실력을 알렸다. 제2회와 제3회 조선족장기대회에서 우승한 김철 선수는 올해 봄에 한국프로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 첫 대회로 ‘KBS추석맞이 왕중왕전’에 출전하여 쟁쟁한 한국프로기사들을 누르고 결승에 진출하였고 마지막 게임에서 황문수 9단을 가볍게 제치고 우승했다. 김철 선수에 의해 조선족장기 실력을 또 한 번 크게 과시하게 되었다. 조선족 장기는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대회조직까지 재미를 더해 한국사회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조선족장기대회이지만 한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한국인과 화합과 공존의 문화교류행사 일환으로 제3회와 제4회대회에 한국인을 참여시켰다. 지난 9월 8일 구로구청에서 열린 제4회대회에 한국인 선수 30여 명 출전하였고 한국프로기사들과 각 클럽 회장님들도 구경했다. 모두 조선족장기대회가 한국장기대회에 비해 재미있다는 평가였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한국장기대회는 프로든 아마든 전부 토너먼트 일색이어서 아침에 한 게임 두고 절반 집에 가고 또 한 게임 지나 절반 가고 나면 마지막 시상식에 몇 사람만 남게 되어 대회가 굉장히 슴슴하다는 것이다. 조선족장기대회는 참여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토너먼트가 아닌 적분순환제인데 실력여하를 떠나 참가자 전부 똑 같이 하루 7게임 두고 성적으로 순위를 가리는 대회방식으로 진행하다 보니 재미있고 마지막 시상식까지 전부 참가하여 장기꾼들의 참여의식에 재미까지 실어주었다. 또 한국장기대회는 기념품이나 경품이 없어 참가자들이 따분해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조선족장기대회는 기념품과 경품까지 푸짐히 준비하여 마치 잔치를 치르는 분위기여서 한국장기대회에서 볼 수 없는 진풍경을 그려주고 있다. 제4회대회 이튿날부터 필자는 한국장기계로부터 조선족장기대회가 굉장히 재미있다는 목소리를 들었고 앞으로 한국장기대회도 우리 조선족장기대회방식을 도입하겠으니 도와달라는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실제로 10월 6일 천호동클럽에서 조직한 장기대회에 조선족 심판 2명을 파견하여 대회진행을 도와주었다. 한국장기가 처음으로 적분순환제를 실시하는 의미 있는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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