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바람 너무 매도하지 말자
재한조선족사회 현황과 전망 강의고
현실 떠난 허황한 구호들
6`7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연길아리랑방송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여성시대 심리상담 생방송 프로가 있었다. 방송에 출연한 심리상담자는 최선생이라 부르는 양반이었다. 청취자들이 전화 오면 해답해주고 조언하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프로는 당시 처음으로 이와 같은 진행방식을 도입하여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청취자들이 자기 가족이 한국에 가 있다는 말과 자신도 한국에 갈 타산이란 얘기만 나오면 최선생이란 양반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한족들은 한국에 안 가도 당지에서 잘 살고 있는데 왜 조선족들은 한국에 가나? 당지에 남아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문화혁명 때 구호를 외치듯 소리높이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최선생이란 양반은 한국에 공무로 나들이 했던 분이고 자신은 한국에 가서 노무에 종사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여유가 있지만 절대다수 백성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한국행이 최선이란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소리만 치고 있는 모양새가 굉장히 아니꼽게 느껴졌다. 필자는 그 방송을 듣다가 ‘한국에 가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말리고 나선다면 당신이 그 집 아이 공부뒷바라지를 해줄 거냐?’는 생각이 떠올라 라디오를 꺼버렸다.
당시 최선생이란 심리상담자의 설득에 의해 한국행을 포기하고 당지에 남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정말 아라비안나이트(천방야담)와 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족사회 분위기는 한국 때문에 중국조선족사회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것,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고 가정 파탄이 증가하고 자녀교육 문제가 발생한 핵심주범으로 한국을 꼽으며 한국이 ‘나쁜 나라’로 지목되는 분위기였다. 분명한 것은 한국정부에서 조선족 보고 한국에 오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행에 나선 것은 어디까지나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봇물처럼 한국행에 목숨까지 거는 상황에서 최선생이란 양반처럼 한국에 가지 말고 당지에서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주장은 진짜 호랑이한테 고기를 탐하지 말고 풀 뜯어먹고 살라는 권유와 같이 황당무계하다.
최선생이 방송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조선족의 한국행을 말릴 때 한국에 체류하고 있은 조선족이 10여 만밖에 되지 않았다면 지금은 70만에 육박하고 있다. 방송이 조선족의 한국행을 저지하는데 실패했고 메아리 없는 허무한 외침뿐이었다.
만약 한국바람이 없었더라면 조선족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20여 년의 코리안 드림에 의해 농촌공동체가 해체되고 가정파탄이 증가하고 자녀교육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바꿔놓고 생각한다면 만약 한국바람이 없이 농촌에 현재까지 묶여 살고 있다면 조선족생활수준이 어떤 형편일까?
소위 지각이 있는 양반들이란 분들이 흔히 한국바람 얘기만 나오면 이혼율을 들먹이는데 농촌이나 도시 밑바닥 조선족들이 한국행에 나서지 않고 가난 속에서 계속 헤맨다면 가정을 지킬 수 있었을까?
1990년도부터 연길에 가라오케와 나이트 바람이 불었다. 당시 유흥업소에 종사한 아가씨들은 농촌에서 온 처녀이거나 도시여성이라면 갓 결혼하였으나 경제사정이 너무 안 좋아 먹고 살기 위해 가난을 벗어나려고 천한 것을 알면서도 그 직업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결혼한 지가 오래지 않는 신혼신부가 유흥업소에 종사할까!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자기가 먹고살만하니깐 이와 같은 현장의 실제요해도 없이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아가씨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한다. 그녀들의 가정은 한국바람이 아니었다면 100% 깨졌을 것이다. 그나마 코리안 드림 덕분에 부부 일방이 먼저 한국행에 나서고 아이가 큰 다음 따라서 한국에 가서 합류하여 잘 살고 있는 부부도 있다는 것이다.
자녀교육문제도 마찬가지, 밑바닥 인생살이에서 헤매던 부모들이 한국바람이 아니고 째지게 가난하다면 자녀를 대학공부까지 시킬 수 있는 조선족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자녀교육이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경제시대에 한국바람 덕분에 자녀를 대학공부까지 마친 조선족이 수없이 많아졌다는 긍정적인 측면은 왜 못 보고 있을까?
경제시대에 가만히 농촌을 계속 지킨다 해서 조선족사회가 과연 행복했을까? 도시에서 구조조정에 의해 직장을 잃은 조선족들이 경제사정이 굉장히 어려운데 한국행에 나서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정이 저절로 지켜질 수 있었을까? 돈이 없는데 자녀교육은 부모가 곁에 있다고 해서 잘 되었을까? 흑룡강신문 연길 주재 00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필자는 동감을 표한다. “조선족은 한국행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런 일이며 마땅히 고마워해야 한다.” 몰론 부정적인 문제들을 무시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소질문제로 취업분야가 단순노무 위주
필자는 1980년대 초반부터 조선족사회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고향을 떠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관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조선족이 고향을 떠나기 시작한 루트로서 우선 관내 진출이었다. 김치나 짠지 장사로부터 시작한 것이 부의 길을 창조하는 선택이었다. 그 후 1980년대 중 후반부터 러시아진출 바람이 일었고 1992년 중한수교를 계기로 한국기업 중국진출에 의해 취업길이 대폭 열렸고 한국관광객이 중국여행이 급증함에 따라 여행업종사자가 부쩍 늘었었다.
관내 진출이든 러시아진출이든 몸으로 때우는 품팔이 아니고 머리로 하는 일이 절대다수였기 때문에 그 당시 고향을 떠난 조선족들은 지능지수가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여기도 저기도 가기 힘든 조선족들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때우면서 품팔이로 돈벌이 할 수 있는 루트는 오로지 한국행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재일조선족사회는 1980년 초반부터 유학생 주류로 형성되었던데 비해 재한조선족은 시골 농민 출신과 도시 밑바닥 생활하던 조선족들이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소질이 그 어느 사회에 비해 보편적으로 낮은 편이다.
재한조선족사회의 취업실태를 살펴보면 여성들은 음식점, 가사도우미, 간병인이 많고 남성들은 건설현장 일명 노가다 종사자가 가장 많고 제조회사에 근무하는 수가 많다. 요즘 3세들이 시청 구청 경찰공무원, 은행공무원, 연구기관, 학계, 대기업, 무역회사, 여행사에 근무하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아직도 단순노무종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재한조선족 1세대들은 한국 올 때 보편적으로 10만 위안 정도 빚지고 왔기 때문에 한 달 두 번 휴무 직업을 선택하였고 그 두 날도 아까워 쉬지 않고 다른 직장에 파출을 뛰면서 정말 피땀으로 돈을 벌었다. 아무리 육신이 힘들어도 조선족사회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그 길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에 원망 없이 참고 견뎌 부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요 몇 년래 재한조선족사회도 먹고 살만하니깐 한 달 4회 휴무 아니면 취직하지 않고 심지어 남편이 숙련공으로 돈을 잘 버는 아내들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가정집에 출근하여 월급 100만원쯤 받는 직업을 선택하고 있다.
일부 중국에서 교사했던 분들이 한국에서 교사로 채용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의 목소리가 있지만 필자는 한국에서 교사하려면 언어와 문화적인 차이 및 소질 문제에 의해 시켜도 감당이 되지 않는 조선족이 절대다수라고 본다. 삼사십 대 결혼이민 조선족출신 여성들 중 일부가 한국에서 교사하는 사례가 꽤 되는데 그들은 한국에서 교대를 다녀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 교단에 서는 것이다.
문화차이와 소질문제로 직장생활이 어려워
문화차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하자면 두 집단 사이 살아온 삶의 방식, 방법, 양식이 서로 다르다는 뜻인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간단명료하게 ‘활법(活法)’의 차이라고 표현한다.
조선족은 한반도 조상들의 문화도 소유하고 있고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중국문화도 몸에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한국인과의 문화차이이다. 또 재한조선족은 다수가 농민출신이고 도시에서 왔다 해도 밑바닥 인생살이였기 때문에 서울과 같은 현대화 도시문명에 적응이 잘 될 수가 없다. 중국에서 비행기 타보지 못하고 한국에 온 수가 90% 이상 된다. 돈을 벌었으니 배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다녀오겠는데 비행기표 한 장 예약하려면 직원을 정말 짜증나게 한다. “중국 가는 비행기표 있나?” “언제 가시려고요?” “중국 어디로 가시는데요?” “편도를 요구합니까? 아니면 왕복입니까? 한 달 이내 아니면 6개월 이상짜리로 예약해 드릴까요?” 조선족한테 비행기표 한 장 팔아먹으려면 이렇듯 직원들이 수많은 말을 해야 한다. 만약 좌석이 없다고 하면 서서 가는 표라도 괜찮다고 말한다. 한국 올 때 검은 배 타고 밀입국했다가 돈을 벌어 처음 비행기 타기 때문에 기차처럼 서서 가도 되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종합 소질이 낮은데다가 한 때 중국에서 큰가마밥 먹던 의식이 몸에 배어 자본주의경제와 직장생리를 이해하지 못해 직장생활이 아주 어려웠다.
한국 업주들이 조선족직원을 채용하면 가장 힘든 문제로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억양이 다른데다가 한국인은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말귀를 알아먹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나마 눈치가 빠른 조선족은 빨리 적응하고 다수 조선족은 눈치조차 무뎌서 자꾸 직장을 바꿔야 하는 고충을 겪었다.
조선족은 다수가 성향이 직설적이어서 한국인직원들과 어울리는데 애 먹고 있다. 가령 한국음식점에서 한국아줌마들이 호박잎을 데쳐 쌈을 싸 먹으면 조선족아줌마들이 “한국 사람들은 잘 산다면서 별거 다 먹네, 우리 중국에선 호박잎을 돼지를 먹이지 사람이 먹는 법이 없다”고 쏘아댄다. 조선족아줌마의 말이 거짓이 아닌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상대와 불편해진다. 한국개그코너에 ‘불편한 진실’이란 프로가 있었듯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말하는 것은 트러블이 생기기 쉽다. 한국아줌마들이 조선족아줌마의 말을 듣고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는다. “그렇게 잘 살면서 왜 한국에 돈 벌려 왔나?”고 맞받아친다. 한국아줌마의 말도 사실이다. 앞뒤 말이 모두 진실이지만 이를 통해 서로 간에 앙금이 생기고 결국 힘든 쪽은 강 건너에서 굴러온 돌 신세인 조선족아줌마들이다.
또 조선족은 직장에서 가뜩이나 언어표현이 어눌한데다 중국은 전통 유교 국가이지만 문화대혁명을 거쳐 예의 문화가 많이 깨져버려 언어를 비롯해 예모예절이 차해 흔히 한국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문화에 적응 잘하려면 조선족밀집지역이 사라져야
필자가 아는 친구의 13세 되는 딸애가 중국 지방 교육국에서 조직한 방학 한국방문의 혜택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 친구의 집은 남구로역 근처였다. 딸애가 3일 지나서 서울에 가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아빠가 여기가 바로 서울이라고 하니 딸애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해불가의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다.
그 딸애의 상상 속의 서울은 가는 곳마다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고 굉장히 깨끗하고 굉장히 호화로운 현대화도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남구로역 부근은 어떠한가? 고층 빌딩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50%가량 되는 조선족이 복장도 깔끔하지 못한데다 길거리에서 떠들어대고 가래침을 뱉고 술 마시면 길가에서 소리 질러대고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큰길을 중국처럼 맘대로 가로지르고 도처에 쓰레기들이 무단 방치되어 냄새가 진동하니 그 딸애가 상상하던 서울과는 거리가 십만 팔천 리나 차이가 컸던 것이다.
조선족밀집지역 일번지인 가리봉, 요즘 대한민국에서 조선족이 가장 북적거리는 대림동을 비롯해 중국음식점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섰는데 이곳에 근무하는 중국명칭으로 하면 복무원들이 음식그릇을 손님에게 던지는 식이고 서비스 질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음식 먹는 손님자체도 다수가 중국 사람들이며 먹고 난 식탁이 지저분하고 바닥도 담배꽁초를 비롯해 휴지조각들이 사처에 널려 어지럽기 말이 아닌 음식점들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쩍하면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들은 음식점에서 자기네끼리 다투고 싸우는 사례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한국인 속에 홀로 생활하는 조선족은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한다. 가리봉에 모임이 있어 간혹 이곳을 찾아오는 한국생활에 물젖은 조선족이 남구로역 3번 출구에서 내리막길로 100미터 내려오면 가리봉3거리 횡단보도가 있는데 빨간불이어서 기다리면 맞은편에 마중 나온 친구가 “왜 빨리 건너오지 않고 뭐하냐?”고 소리친다. “빨간불인데 어떻게 건너느냐?”고 하면 “이 동네는 빨간불도 괜찮다. 그냥 무시하고 빨리 와라.”고 조른다. 이것이 조선족밀집지역 공공질서의 현주소이다.
대림역 7호선을 낀 대로 양측은 쓰레기가 지저분하기로 말이 아니다. 저녁마다 특히 주말마다 조선족 주정뱅이 너무 많아 택시 기사들은 이곳에서 손님 태우기를 매우 꺼려한다. 택시 안에서 금연인데 담배 피워 기사와 싸우는 사례는 흔한 일이고 심지어 택시 안에서 해바라기를 까고 바닥에 껍질을 버리는 조선족도 있다.
여러모로 볼 때 밀집지역 조선족은 앞으로 십년 이십년 더 살아도 한국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한국인들로부터 무시당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릿고개를 넘어 소강수준(小康水準)에 이르러
이주민사회(재한조선족)가 타자세계(他者世界:한국)에서 성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우선 조건으로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재한조선족의 경제형편을 살펴보면 먹고 살만한 보릿고개를 넘어서 ‘소강’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코리안 드림에 나선 조선족이 중국에 집 한 채쯤은 거의 다 마련해놓았고 자녀공부뒷바라지, 가족 생활비를 대고 있었다. 조선족노무일군의 매년 송금액이 정부 재정수입을 초과한다는 얘기는 벌써 10여 년 전부터 있은 일이다.
문제는 한국 내에서 조선족들이 아직도 지하 혹은 반지하나 지상이라도 쪽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그 분들이 조금 더 쾌적한 방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 여건이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체류문제가 확실히 온정 되지 못해 대한민국은 임시 스쳐지나가는 둥지이기 때문에 대충 엉덩이나 붙일 보금자리로만으로도 만족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따라서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도 현대화 새것으로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건이 충분하나 아직도 중고를 사서 사용하는 수가 다수이다.
올해 여름 필자가 큰방 세 칸 1억2천만짜리 전세로 이사하니 주변사람들이 식구 둘이서 왜 그 큰집에 이사했는가? 못 마땅하다는 표정들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 중국에, 그것도 살지도 않고 비워두면서 아무리 큰집을 사놓아도 아무 말들이 없는데 비해 한국에서 근사한 집에서 살면 이해불가라는 식이다. 뭘 말해주는가? 아직도 조선족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그냥 임시 돈벌이 하는 곳으로서 진정한 둥지의식이 없다는 증거이리라.
갓 입국한 젊은이들 전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닐 정도로 여유로워졌지만 현재 한국에 내로라하는 조선족기업가, 사업가가 없는 실정이다. 기껏해야 음식점운영으로 돈을 꽤 번 조선족의 수는 많을 수 있으나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큼 성장한 기업가나 사업가는 없는 실정이다. 이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취미생활이 풍부해져
이주민사회가 타자세계서 성공하는 두 번째 조건이 바로 문화적으로 적응이 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적응은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이주민집단의 문화생활이 풍부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타자세계 문화에 적응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먹고살만한 여유가 생기면 취미생활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기 때문에 각종 취미생활이 풍부해졌다. 가령 축구를 좋아하는 자는 축구단체, 배구를 즐기는 자는 배구협회, 민속장기를 좋아하는 자는 장기협회에 가입하고 등산, 낚시, 심지어 제기차기 동호회까지 생겨나 주말이면 각자가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충분히 즐길 수가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동포축구협회, 동포배구협회, 동포장기협회 등세 가지 단체이다.
축구협회는 산하에 30개 축구단이 있고 해마다 리그에 참여하는 팀만 해도 14개나 된다. 배구는 한국 측 생활체육에 포함되어 각종 시합에 많이 참여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민속장기는 올해로 5회째 큰 대회를 치렀는데 해마다 참석자가 120명에서 150명이다. 조선족장기수준이 너무 높아 한국 프로9단들을 가볍게 누르고 해마다 공식적인 시합에서 우승을 싹쓸이 하고 있다.
한국문화 적응은 주로 공공질서문화 지키기인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재한조선족은 공공질서의식이 굉장히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정치참여가 저조하다
정치참여가 활발해야 한다는 것이 이주민으로서 타자세계에서 성공조건의 세 번째 요소이다. 그렇다면 재한조선족의 정치참여는 어떤 형편일까?
한국은 선거정치이다. 선거는 투표에 의해 이뤄진다. 재한조선족의 정치참여, 즉 투표정치가 저조하다.
현재 대선이나 총선 선거권이 있는 자를 유권자라 표현하는데 한국국적 취득자를 의미한다. 그 외 영주권자나 재외동포비자로서 3년 이상 주소변경(타시 타구) 없이 거주자는 지자체단체장 선거권이 있다.
현재 조선족출신 국적자는 대략 13만이고 영주권자가 7만, 재외동포비자 20만 정도이다.
국적자 가운데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중국에 갔다가 후에 한국에 와서 국적을 회복한 조선족 분들 가운데 대한민국을 진짜 사랑해서 국적을 회복한 경우가 많지 않고 수년 전까지만 해도 자녀들이 한국에 오기 힘드니까 초청자격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국적 회복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 분들 중에는 차남이 한국에 있다면 장남은 몇 해 전 밀입국 혹은 위명여권 사용경력 때문에 입국규제에 걸려 한국에 오지 못해 속 태우는 분들이 꽤 된다. 그리고 이 분들의 거주환경은 거의 다 지하 반지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언제 재한조선족문제에 관심 갖고 신나서 양복에 넥타이 챙겨 매고 투표장에 갈 겨를이 없다. 또 결혼이주민 조선족출신여성들은 다수가 한국 속에서 살고 있으며 재한조선족사회에 아예 관심이 없다. 이 부류도 투표에 관심이 별로 없다. 이래저래 따져보면 투표에 나서는 수가 극히 저조하다.
문제는 선거 때마다 조선족출신 유권자들의 표가 선거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다면서 정치권에서 조선족사회를 이용하고 있거나 일부 조선족들이 정치권을 이용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의 정체성
재한조선족은 입국한 지가 오래지 않은 자는 물론이고 한국에서 10여 년 살아도 한국을 할아버지 고향, 한국인을 같은 핏줄이란 의식이 아주 미약하며 한국과 한국인을 보는 입장이 다수가 중국과 중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아직도 한국에 오랫동안 살아도 중국에 대한 감정이 한국에 대한 감정보다 더 깊다는 것이다. 그 주요 이유가 아마 중국소수민족정책 덕분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 다수는 대국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김호웅 교수는 ‘사과배’ 논리로 풀이하였고 정판룡 교수는 ‘며느리론’을 주장하였다. 두 분 모두 훌륭한 분이고 또 모두 조선족정체에 맞는 이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한국 분들은 필자에게 조선족정체성에 대해 많이 질문한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한다. 5년 전 연길에서 족저안마(足底按摩)방에 간 적이 있다. 큰 가게였는데 마담한테 조선족아가씨가 있는가? 물었더니 40여 명 아가씨 중에 조선족 둘 있긴 한데 일하고 있는 중이라 대답하였다. 그럼 한족아가씨도 좋다고 말했다. 필자는 한족아가씨 안마사 앞에서 한마디 입을 연 적이 없는데 10여 분 지나 “당신 조선족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네가 어떻게 아냐?” “행동거지를 보면 한족인지 조선족 손님인지 안다.” 그 아가씨의 말에 의하면 한족 손님은 보편적으로 윗옷과 바지를 벗어 빈 침대에 던져 놓거나 아무렇게 놓고 싶은 곳에 놓는데 비해 조선족 손님은 옷을 반드시 옷거리 찾아 걸어놓는다는 것이다. 이 한 가지 행위만을 보더라도 어느 민족인지 자신은 쉽게 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정체성이란 거창하게 풀이하자면 거창해지고 쉽게 풀이하면 쉬워진다. 필자는 한국인들 앞에서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의 정체성이라고 대답해준다.
재한조선족사회 전망
과거 재한조선족 1세대들은 거리에 나서거나 공공장소에 나타나면 촌스러운 티가 물씬 풍겨 입을 다물고 있어도 한 눈에 조선족이라고 짚어낼 수가 있었다. 현재 젊은이들은 한국젊은이들에 비해 외관상 차이가 없다. 외모만 보고 한국젊은이인지 조선족젊은이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어릴 때부터 안방에서 한국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성장하였고 가령 시골에서 태어났어도 도시에 가서 자랐거나 일부는 한국회사에 근무한 경력이 있어 1세대들과 달리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외관상 세련되었다고 해서 머리까지 세련된 것은 아니다. 한국문화에 적응하려면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조선족젊은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구해 근무하는 사례는 늘고 있지만 한국 주류사회 진출은 아직도 먼 이야기이다.
그리고 재한조선족이 70만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이는 굉장한 집단이다. 문제는 이 굉장한 집단을 이끌어 나아갈 리더가 현재로서는 없다는 것이다. 70만의 집단을 이끌어 나아갈 리더가 되려면 도덕적으로 검증이 되어야 하고 학식도 갖춰야 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리더가 현재 없다는 것이다.
한 이주민사회 리더는 유학생출신, 언론인, 기업가, 종교계에서 배출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수교 직후 조선족출신유학생(석`박사)을 한국에 남을 수 있게 만든 시점이 겨우 2008년 1월부터이니 6년이란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6년 동안 무슨 큰 인재가 배출될 것인가? 다음 재한조선족을 상대로 하는 언론들은 보편적으로 학벌이 낮고 경제적으로 아침을 먹으면 점심 걱정을 해야 하는 경제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내로라하는 기업가들이 배출되려면 아직도 먼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재한조선족사회에 리더다운 리더가 나타나고 기업가다운, 사업가다운 훌륭한 분들이 배출되려면 아직도 삼사십 년의 세월이 더 걸려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한국생활에 정착하려면 의식전환이 이뤄져야
재한조선족 다수한테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이냐 물으면 중국에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돌아가는 조선족은 극소수일 것이다. 3년만 벌고 간다. 5년 만기 되면 때려죽여도 한국에 있지 않고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던 조선족도 만기가 도래하면 어떻게 하면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을 수 있는가는 방법을 찾느라 혈안이다.
2012년 4월 11일부터 실시한 국가공인 기술자격증을 취득하면 재외동포비자로 변경해준다는 정책이 발표되자 재한조선족사회는 천지개벽이 일어날 정도로 학원가에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2012년과 2013년 말 금속재창호 자격증시험에 도전한 조선족이 2만4천명이고 합격률이 50%미만이었으니 1만 명쯤 이 한 가지 항목으로만 재외동포비자를 발급받게 되었다. 그 외 요리, 미용, 제빵제과, 세탁 등 많은 항목에 도전하여 재외동포비자 자격을 얻은 수도 수만 명에 이른다. 재외동포비자변경에 힘쓰지 않는 조선족이라 해서 만기가 되면 고향에 돌아갈 것인가? 아니다. 한국정부는 재입국정책을 계속 실시하여 본인이 원한다면 한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다.
수년 전 필자는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조선족이란 주제로 연변여성 잡지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때 돌아가지 않는 이유에 관련해 상세하게 밝혔기 때문에 여기서 중복하지 않겠다.
사람들은 흔히 재한조선족사회에 국회의원이 배출되면 마치 획기적으로 바뀔 것처럼 부풀어 있는데 필자는 국회의원이 5명 10명 나와도 재한조선족사회는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재한조선족사회가 바뀌려면 국회의원 배출보다 개개인의 의식전환이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우리를 무시하면 자꾸 한국 사람이 나쁘다고 나무라지 말고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하고 무시당하지 않도록 자질제고에 힘써야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영원한 진리이리라.
개개인의 자질제고 동시에 한국에서 살아갈 준비를 착실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재한조선족사회는 보험가입의식이 미약하다. 노후나 갑자기 병이 나는 것을 대비해 각종 보험가입에 준비하는 등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다수가 모임만 있으면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양꼬치집 가고 그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여가문화 즐길 거리를 개발하여 옛날 코스방식에서 탈피하여 보다 문명한 삶을 보내는 것이 의미가 클 것이다.
또 재한조선족은 이제는 한국에 돈 벌러 왔다는 생각에만 빠져버리지 말고 한국인처럼 돈을 버는 동시에 나의 삶을 어떻게 하면 보다 문화적이고 질적으로 보내겠는가에 신경을 쓸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으면 정신적으로도 여유로울 줄 알아야 삶이 보람이 있을 것이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이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서 행복을 찾는 것이 최선의 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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