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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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백의민족과 개고기 단상 댓글:  조회:1601  추천:0  2021-10-11
백의민족과 개고기 단상 김정룡  인류가 동물을 가축화 한 시기는 대략 1만 년 전의 일이라고 하는데 이 시간은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것과 맞물린다. 아마 인류는 농경을 시작하면서 동물의 힘을 빌리고 이용하는 아이템에 의해 동물가축화 문화가 생겨났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각 대륙마다 동물을 가축화 한 종류가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온대대륙성 기후 지대인 유럽대륙과 중국의 중원 지역에서는 대략 13종의 동물을 가축화 했던데 비해 남미 대륙에서는 말을 구경한 것이 16세기 스페인 침략자들이 갖고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며 실제로 남미는 라마 외에 기타 동물을 가축화 한 종류가 매우 적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의민족도 농경문화가 어림잡아 5천 년 이상이니 그때부터 동물을 가축화 했을 것이다. 따라서 백의민족은 소, 돼지, 개, 닭 등 그 종류가 많지는 않았다. 백의민족은 가축 중에 소를 가장 소중하게 간주했다. ‘애비 없이는 살아도 소가 없이는 못 산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소가 농경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 컸다. 돼지를 키우는 목적은 주로 팔아서 살림살이에 보태는 것이었고, 닭도 생계유지 수단의 하나의 ‘도구’였다. 가축 중에 똥개는 순전히 육식용이었다. 본문에서는 주로 개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보련다. 개는 7대주 4대양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동물이며 그 종류도 수천수만 가지다. 따라서 종류에 따라 개의 역할도 달라진다. 캐나다 북부 지역에서는 허스키라는 개를 수레를 끄는 ‘일꾼’으로 활용하고 있다. 과거 전 지구적으로 개를 키우는 것은 집을 지키는 수호역할을 목적으로 했다. 일부 부잣집들은 덩치가 작은 개를 반려동물로 키웠다. 현대사회에서는 인류의 삶이 여유가 생김에 따라 한 사람 건너 애완견으로 개를 키우고 있다. 도시 길가에서 한참 애기를 안고 다닐 나이 여성들이 개를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일상화 되고 있고 아이를 태우는 유모차에 개를 태우고 다니는 여성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진짜 개 팔자가 상팔자인 시대가 왔다. 가축 중에 개가 인간과 가장 ‘정’이 깊은 동물이다. 주인이 가난하다고 배신하는 개는 세상에 없다. 자기를 예뻐하면 꼬리를 살살 흔들며 애교를 부린다. 개를 오래 키우면 그 개는 자기의 목숨보다 주인의 목숨을 더 중히 여기는 개도 있다. 한 독거노인이 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분명히 그 개가 수명을 다 하여 죽게 생겼는데도 주인을 지키려고 억지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 확연했다. 주인이 너무 안타까워 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먼저 저 세상에 가면 나도 따라서 네가 있는 곳에 갈 것이니 시름 놓고 천국에 가거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개는 금세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인간과 개에 관한 미담이 많고도 많다. 그래서일까? 사람이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거나 몰상식한 짓을 하면 ‘개보다 못한 자식’이라고 비난한다.  한편 인류는 키우는 가축을 도살하여 육식으로 먹는데 그 중에는 금기하는 동물도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에 관련하여 여러 설이 있다. 아브라함의 장남인 이스마엘은 하인 하갈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스마엘이 14세 때 본처에게서 이삭이 태어나자 쫓겨났다. 모자가 정처 없이 사막을 떠돌고 있을 때 갈증에 시달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찰나에 새끼를 낳은 어미 돼지가 나타나 이들에게 젖을 먹여 살아났고 그 후대들이 지금의 아랍민족이며 그래서 아랍민족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도 그냥 하나의 ‘설’일 뿐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  인류가 문명시대에 진입한 이래 금기사항을 만들어낸 것은 샤머니즘(미신) 사상과 종교의 계율에 의한 것이다.  이슬람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개고기를 예를 든다면 서양 사람들은 거의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개고기를 먹는 민족은 보편적이 아니라 매우 드물다. 그 중 개고기를 먹는 민족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이 백의민족이다.  백의민족은 본래 개고기를 영양식, 보양식으로 간주해왔다. 한국에서도 60~70년대까지만 해도 신체가 허약하면 의사들이 개고기를 드시라고 권유했을 정도로 개고기를 많이 먹었다. 중국에 이주해간 조선족은 개고기를 매우 즐겨 먹었다. 개혁개방 전 시골마을에서는 구질구질한 날씨 때면 동네 남정들이 모여 개추렴을 자주 했다. 필자의 모친은 해마다 봄철이면 개엿을 대려 남편에게 공대했다. 개혁개방 이후 연길에서는 아래개방지에 전문 개시장이 생겨났고 개고기 전문식당들이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1990년대 초 연길 00개고기 전문식당은 하루 평균 20여 마리 개를 잡아 들일만큼 장사가 호황이었다. 중국 한족들은 보편적으로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연변의 개고기가 자급자족이 되지 못해 연변을 벗어난 일명 ‘안쪽’지방에 가서 개를 구매해 공급하여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중국조선족은 보편적으로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 중국에서의 음식습관이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도 개고기를 찾아 먹는다. 그런데 앞으로 조선족은 한국 땅에서 개고기를 영원히 먹을 수 없을 날이 올 것 같다.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께서 청와대 주례회의 때 ‘이젠 개고기 식용 금지 검토할 때가 왔다’고 말해 관련 부처에서 검토에 착수했다. 한국대통령의 발언은 국민정서를 감안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개고기 식용 금지가 곧 실시 될 것으로 예측된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개고기에 대한 정서가 어떠한 지부터 살펴보자.  앞서 지적했듯이 한국 사람들이 본래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최근 수십 년 사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그 원인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기독교를 믿는 신도들 중 본래 먹던 개고기를 신앙에 의해 금기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과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으면 재수 없다는 ‘설’을 믿고 개고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짙다. 셋째, 한국에서 ‘서울88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자 IOC 관계자들이 사전답사를 할 때 대로변에 개고기음식점이 있는 것이 유럽국가 선수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라고 지적하고 심지어 개고기를 먹는 민족은 야만이라는 여론까지 떠돌아 정부가 나서 도로변에 개고기음식점을 후미진 골목으로 이전 명령을 내렸고 그때부터 ‘개고기식당’간판이 사라지고 ‘보신탕집’으로 바꿔버렸다.  국제적인 대잔치인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서양인들이 기피한다는 이유로 개고기문화를 완전히 바꿔버리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넷째, 2000년대 들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자 한 사람 건너 개를 키울게 되었고 이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 뿐더런 동물 관련단체가 나서 개고기 식용 금지를 정부에 제안하고 있는 것도 개고기를 먹지 않는 바람에 부채질 하고 있다.  한국에서 드물게 운영되고 있는 개고기음식점들은 간판으로 ‘보신탕집’이라고 고쳐 달고 영업을 하는데 비해 한국 내 조선족 밀집지역들에서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개고기음식점들은 지극 소수만 ‘보신탕집’이란 간판을 걸었을 뿐 절대다수는 그냥 ‘중국식’으로 ‘연변개고기’ ‘목단강개고기’, ‘진달래개고기’ 이런 식으로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해왔다.  그런데 앞으로 이런 간판들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것 같아 조선족사회 음식문화에도 큰 타격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동북아신문
365    코로나19와 <침묵의 봄> 댓글:  조회:1671  추천:3  2020-03-30
코로나19와 천만이 넘어 사는 도시 서울의 삶은 여러모로 답답했는데 올해의 봄은 더욱 답답하기 그지없다. 설을 쇠고 나면 새해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데 2월 초부터 모든 행사와 모임이 줄줄이 취소되어 우리에 갇힌 동물과 같다. 나의 주업은 신문발행이고 ‘부업(副業)’으로서 강연 다니고 세미나를 조직하고 다른 기관에서 마련한 세미나에 발제나 토론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내가 대표를 맡은 ‘多가치포럼’은 2020년 첫 행사로 본래 ‘3.8 여성의 날’을 맞아 조선족, 새터민, 고려인, 한국인 여성들이 모여 세미나를 개최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역시 취소되었다. 이외 ‘부업’이 또 있다. 서울시청을 비롯해 여러 관공서 회의에 참석하고 법무부회의도 참석한다. 가끔 작품 심사, 언어발표 심사, 기관 직원 채용 심사도 맡아본다. 법무부 제1기 이민자 맨토단 멘토로 합격되어 본래 2월 27일 법무부 장관 위촉장을 받고 사회통합프로그램과 조기적응프로그램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4월 22일 회의를 개최한다는 공지가 있긴 한데 그때 가봐야 확실하다는 전제가 달려 있다. 할지 말지 아직 확실한 결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름에 한 번씩 나가던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독서모임도 취소되고 있어 어디도 나갈 곳이 없다. 설 쇠고 나서 나의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은 두 달 넘게 아무 메모도 없이 깨끗하다. ‘일 년 계획은 봄에 달렸다’는 속담이 있듯이 해마다 설을 쇠고 나면 사회가 온통 분주하다. 이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나의 달력도 왕년 같으면 한주 평균 두 개 정도 ‘행사’가 메모 되었었는데 올해는 전혀 메모가 없이 깨끗하다. 깨끗하다는 것은 아무 활동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활동’은 ‘부업(副業)’이고 나의 ‘부업(副業)’은 곧 나의 ‘부업(富業)’이다. ‘부업(副業)’이 없으니 ‘부업(富業)’도 따라서 사라졌다. 주머니가 늘어야 되는데 줄어들고 있다. 경제적인 손해도 손해거니와 두 달 넘어가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슬슬 폐인이 되는 느낌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를 마치 중이 종치듯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옥이란 무엇이더냐? 단테는 에서 “희망이 없고, 꿈이 없고, 비전이 없는 곳이 곧 지옥이다.”고 했다. 지금의 나의 삶이 어쩌면 지옥일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렵고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지방에 3박4일쯤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부담 없이 한가한 며칠을 보내면 나아질 것 같았다. 왕년 같으면 이때쯤이면 거의 주말마다 지방 관광지를 부지런히 돌아다녔을 터인데 올해는 관관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괜히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까봐 걱정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인내성이 한계가 있는 법이다. 도무지 안 되겠다싶어 지난주에 대한민국에서 청정지역인 완도로 가기로 맘먹었다. 한국 관광지들은 중국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고 일본처럼 정교하지도 못하지만 나름대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아 구경할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떠나는 김에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먼 곳 중에 부산, 포항, 경주 등 경상도 지역에는 여러 차례 다녀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전라도로 가기로 했다. 전라도 중에 찾다보니 가장 먼 곳이 완도였다. 여수도 멀기는 하지만 수년 전 ‘여수엑스포’ 때 가보았기 때문에 완도를 택했다. 완도에서 1박, 목포에서 1박, 땅끝 마을 해남에서 1박하기로 스케줄을 짰다. 완도는 서울에서 440킬로미터 거리다. 서해안 고속도로 타면 330킬로쯤 직진이어서 운전하기 편하다. 목포에 거의 도착할 지점에서 해남으로 빠져나가는 국도를 타고 에돌아 100킬로쯤 더 간다. 가는 날 장날이라고 날씨를 잘 선택한 탓인지, 타고난 운이 좋은 건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했고 바람 한 점 없이 제법 훌륭한 봄날이었다. 도중에 개나리도 피고 목련도 피고 버들가지들이 뾰족뾰족 싹을 내미는 것을 구경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200킬로쯤 달린 지점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벌판을 만나 가슴이 확 뚫린 느낌이었다. 경상도 쪽에 여러 번 운전하고 다녀 봐도 김제 벌처럼 넓은 벌을 보지 못했다. 충청도도 마찬가지 넓은 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북쪽 강원도에 가면 가는 도중에 산이 너무 많아 터널을 수없이 만난다.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 지역에 들어서면 터널이 별로 없다. 나는 터널이 2킬로 넘으면 공포증이 생겨나 운전에 지장이 있다. 전라도에 터널이 매우 적고 있다 해도 길이가 짧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래저래 여러 가지 환경이 좋아 440킬로 먼 길이지만 운전을 신나게 할 수 있었다. 완도 목적지 앞두고 30킬로 지점에서 방역검사가 한 차례 있었다. 일행이 네 사람 모두 정상 체온이어서 무사히 통과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완도타워였다. 오후 2시경이었다. 기분 좋게 갔건만 정작 도착해서 기분이 이상해났다. 주차장에 차가 몇 대 없지 않는가. 타워 올라가는 길에 한 사람도 왕래하는 길손이 없다. 타워 앞에 올라가니 관광객이란 우리 일행뿐이었다. 타워 정상에 올라가면 전체 완도풍경이 한눈에 안겨올 것 같은데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갔던 김에 샤터를 눌러 기념으로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나마 다녀왔다는 흔적이기 때문에. 정상에 올라갈 수가 없으니 더 구경할 멋이 없어 시간도 매우 단축되어 발길을 장보고 기념관으로 돌렸다. 장보고 기념관도 굳게 닫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라 때 한반도 완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에로 일본에로 해상무역으로 명성을 휘날린 해상왕 장보고를 만나자던 기대가 다 사라져버렸다. 대충 말 타고 꽃구경, 변두리를 돌다가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떠났다. 역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번에는 완도수목원으로 가기로 했다. 설마 수목원은 닫지 않았겠지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 갔건만 역시나 문이 닫혀 있어 몹시 썰렁했다. 바닷가에서 신선한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느라 서성이다가 저녁이나 일찍 먹기로 했다. 보는 재미가 없으면 먹는 재미라도 즐겨야지. 완도읍에 전복거리가 있다. 전라남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전복전문음식점에 들어갔다. “이 어려운 시국에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더분하고 푼더분해 보이는 매너 좋은 주인의 인사말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 큰 음식점이 썰렁했다. 단체모임 손님 20명 있어도 워낙 큰 장소라 기분을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무튼 조용한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었다. 본래 음식은 기다려서 먹더라도 사람이 문정성시를 이루는 가게에서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시국에 문전성시는 한 물 건너간 얘기가 아닌가. 저녁 메뉴는 전복집이라 전복풀코스 요리였다. 일인당 5만원, 좀 비싸기는 하지만 ‘싼 것은 좋은 물건이 아니고 좋은 물건은 절대 싸지 않다.’는 중국속담이 있듯이 음식가치가 그만큼 풍부했다. 작년부터 터득한 것인데 지방에 관광 가면 호텔에 묵지 않고 한옥단지에 묵는 것이 나름대로 좋았다. 작년 8월 중순 고열 때 정선 한옥마을에 묵었는데 앞에는 계곡이고 뒤에는 산이어서 경치가 좋을뿐더러 너무 시원하다 못해 조금 추워서 잠잘 때 이불을 덮고 잔 기억이 있다. 피서를 제대로 하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청해진한옥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앞에는 완도 바다가 눈에 안겨오고 뒤에는 역시 산이다. 한옥은 여럿이 가면 잠자기도 편하고 음식도 해 먹을 수 있고 밖에서 바비큐도 해서 먹을 수 있고 불고기도 해 먹을 수 있어 그 재미가 쏠쏠하다. 이튿날 아침 청해진포구 촬영지를 가보기로 했다. 역시 문을 닫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나 가보지도 않고 미리 예단하고 포기하는 행위는 후회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고 설마 설마하면서 찾아갔는데 우리 일행의 성의를 알았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이곳마저 닫혀 있었으면 진짜 이번 완도여행은 추억을 남길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관광은 6대 요소로 이뤄진다. 중국식대로 말하자면 먹는 것(吃)이 첫 자리이고 잠자는 것(住), 이동하는 것(行), 관광지 구경하는 것(遊), 토산품(기념품)을 구매하는 것(購), 오락 구경하는 것(娛)의 순서이다. 이 6대 요소 중에서 일단 대한민국에서 귀한 음식으로 취급하는 전복을 먹었으니 괜찮은 편이고, 경치 놓은 한옥에서 잠을 잤으니 역시 합격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것은 말짱 꽝이었다. 그리고 먹는 것과 자는 것은 다른 지방에 가도 거기서 그것이기 때문에 손바닥 만한 한국 내에서는 별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관건은 관광지 구경이다. 어느 지역이든 어디를 가던 똑 같은 음식과 똑 같은 숙소는 흔하지만 똑 같은 관광지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여행에 있어서는 관광지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이번 완도 여행에서 관광지(청해진포구 촬영지 제외하고)가 모두 닫혀 있어 관광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한마디로 실패한 여행이었다. 목포에 가려다가 그곳도 역시 관광지가 모두 닫혀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다 도망가 버렸다. 해남도 마찬가지. 아무 의미도 없는 여행을 억지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3박4일로 잡은 여행이 1박 만에 끝나고 이튿날 청해진포구 촬영지에서 직접 가리봉을 찍고 돌아와 버렸다. 완도는 3월 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왕년 같으면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않으면 잠자리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올해는 숙소도 텅 비어 있었다. 겨울이 가고나면 어김없이 기온이 따뜻해지고 봄이 온다. 들에는 뭇꽃들이 만발하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이 곳 완도도 틀림없이 자연은 봄이 왔다. 그런데 봄이 왔는데 봄이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말이 있다. 완도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자연에 맞춰 인간사회에도 봄이 와서 북적대야 하는데 그놈의 코로나19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적막감에 휩싸여 있어 봄은 봄이 아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수년 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난다. 미국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1961년 지은 이다. 동양인들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대충 꽃, 아지랑이, 제비 등등이다. 미국인들은 봄에 대해 동양인에 비해 다른 문화적인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곧 새의 지저귐이라고 한다. 해마다 봄이 오면 새들이 기가 차게 시끄러울 정도로 지저귀였는데 어느 해인가. 새들이 도시 거리에 죽음으로 나타나고 쥐들도 죽어서 거리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그 해부터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가 지저귀지 않으니 봄은 침묵했다. 저자는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이유는 지구온난화에 의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새들의 먹을거리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인류가 화학비료를 생산하고 사용함에 따라 다수의 생물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례로 북미 지역에서만 참새가 35억 마리 죽었으니 봄을 알리는 지저귐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것을 ‘침묵의 봄’으로 표현한다면 이번 봄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활동이 사라진 것도 역시 ‘침묵의 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이와 비슷한 바이러스 때문에 봄이 오면 봄 같지 않은 봄, 즉 ‘침묵의 봄’이 또 올까 두렵다.
364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총 균 쇠』 댓글:  조회:3016  추천:2  2020-02-07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총 균 쇠』 중국 무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병원균의 주범은 박쥐란다. 앞서 있었던 사스, 에볼라의 병원균 주범도 박쥐다. 메르스의 병원균은 낙타이며 이 외 광우병이요, 조류독감이요, 돼지열병이요 하는 지구촌을 공포에 몰아넣는 전염병들의 공통점은 바로 동물 균이 인간의 몸에 옮겨져 병을 일으키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동물이 이렇듯 인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만 인간은 동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 특히 가축의 역사가 이미 가까우면 반만년, 멀면 일만 년이 되니 ‘이혼’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가축의 역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축의 역사는 농사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가축역사 및 가축의 균이 어떻게 인류를 몰살(아메리카 대륙의 사례)시키고 어떻게 인류역사에 해를 끼쳐왔는가에 대해 가장 생동하게 잘 설명한 사람으로서는『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1937년 9월 10일 생, 미국 생태학자)다. 때는 1972년 7월, 오스트레일리아주에 위치한 뉴기니 해변가에서 한 백인 생태학자가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마침 얄리라는 뉴기니 흑인정치가도 그곳에 있었고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선생님,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총 균 쇠』는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이 흑인의 질문에 대답으로 지은 책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고 지구촌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이 DNA가 우수해서, 지능이 뛰어나서, 체력적으로 전투력이 뛰어나서 등등 때문이란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헌데 이런 보편적인 인식에 찬물을 확 퍼부은 사람이 바로 재레드 다이아몬드다. 저자는 책에서 먼저 배경설명을 간단히 하고 나서 168명의 스페인 군대가 8만 명의 잉카제국의 대부대를 무너뜨리고 아타우알파 황제까지 생포한 과정을 영화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1532년 11월 16일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양측의 거리가 좁혀오자 놀란 쪽은 피사로 군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잉카제국의 황제를 모시고 나선 군대의 수는 8만이니 눈에 담을 수 없는 무리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어가(御駕)를 안내하고 인도하고 길을 정비하는 군대만 2천이고 그들의 복장은 바둑판처럼 두 색깔로 된 화려한 옷에 금과 은으로 눈이 부시게 치장하여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 2천 명의 어가 앞의 군대는 싸우는 무기 대신 모두 손에 빗자루를 정중하게 들고 있었다. 황제가 지나갈 길에 개미 한 마리, 지푸라기 한 오라기라도 없애기 위해 깨끗이 쓸어야 했다. 스페인 군대의 표정은 전투를 임한 전사의 굳은 얼굴들이었으나 잉카의 부대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환영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양측이 마주할 거리가 좁혀졌다. 피사로는 긴장하지 않고 성경을 아타우알파 황제에게 건넸다. 황제는 처음 접하는 책이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 거 뭐야?” 라고 못마땅해 하면서 땅바닥에 홱 던져버렸다. 성경을 목숨처럼 여기는 독실한 크리스찬인 피사로에게는 황제의 행위가 최대의 모욕이었다. “감히 성경을 던져.”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순간 “공격!” 하고 외쳤다. 장군의 군령이 떨어지자마자 스페인 군은 총을 쐈다. 당시 총은 살상목적이 아니라 공포를 던지는 무기였다. 그런데도 잉카부대는 처음 접하는 소리를 듣고 마치 천둥이 지구를 휩쓸어가는 소리처럼 기겁해서 오금이 저려났다. 또 행동이 민첩하고 영민하기 그지없는 말들이 방울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손살 같이 달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몹시 당황해났다. 그들은 말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스페인군대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잘 갈아진 칼로 잉카군의 목을 베기 시작했고 황제까지 손쉽게 생포할 수 있었다. 168명의 군대가 목을 벤 숫자가 7천이었다. 당연히 스페인군은 한 명의 사상도 없었다. 만약 날이 저물지 않았다면 나머지 7만여 명의 목도 모두 거둬졌을 것이라고 피사로는 말했다. 168명VS8만명. 현대화 핵전쟁도 아니고 재래식 전투에서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양측의 비례이지만 결과는 168명의 승리. 그것도 전혀 손실을 보지 않은 아주 깨끗하고 손쉬운 승리.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전투의 승리의 요인 및 소수 유럽인이 아메리카대륙을 정복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총과 쇠의 덕이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는 총이 없었던데 비해 유럽은 총기가 발달해 있었다. 살상무기로 사용하는 예리한 칼도 잉카제국에는 없었다. 이 두 가지 무기는 기술의 발달을 설명한다. 둘째 정보의 덕이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인 1519년, 그러니까 13년 전에 스페인 정복자 코로테스가 이끈 군대가 아젝트제국(멕시코)을 멸망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피사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정보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데 비해 잉카제국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잉카제국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균의 덕이었다. 유럽인이 달고 온 균에 의해 아메리카 토착인 인디언은 95%가 목숨을 잃었다. 균은 이렇듯 총 한 방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토착인을 몰살시켰던 것이다. 백인이 흑인노예를 데려와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한 이유가 바로 토착인 노동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 균 쇠』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유럽의 천연두, 장티푸스, 홍역, 매독 등 전염병이 아메리카대륙을 비롯해 다른 대륙에 전파되어 많은 인류가 생명을 잃었다는 사실을 많이 밝혀냈지만 재레드 다이아몬드처럼 자세하고 설득력 있게 정리한 사례는 없었다. 총∙균∙쇠 그리고 정보, 유럽인은 어떻게 이것들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농사의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지구촌에서 1천만 부가 팔린 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농사를 인류역사 이래 최대의 사기극이었다고 말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데 비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사 장점과 긍정적인데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우선 농사는 수렵 채집시대에 비해 잉여물이 생겨난다. 잉여물은 먹거리를 확보한다. 먹거리가 안전하게 확보되면 여성은 시름 놓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가사에 집중하게 된다. 중국의 ‘남주외, 여주내(男主外, 女主內)’ 전통도 농경문화의 전형적인 산물이다. 또 잉여물이 생겨나면 사람마다 가진 재간에 따라 분업이 생겨나고 발달한다. 예를 들어 전문직인 목공, 석공, 도공, 성직자, 교사, 작가, 예인(藝人), 기생 심지어 이야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야기꾼이 나타난다. 이것은 기술의 발전과 발달을 의미한다. 농사의 발달은 부족이 도시를 낳고, 도시는 국가를 낳고 국가는 제국을 낳는다. 농사의 최대 성과는 문자의 탄생이다. 문자 이전을 선사시대라 하고 문자기록 이후를 역사시대라 한다. 최초의 문자들은 모두 농사가 발달한 지역에서 새겨났고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상형문자이다. 최초 상형문자는 무엇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을까? 점의 결과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구석기시대에도 점치고 제사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왜 그때 문자가 탄생하지 않고 신석기시대 즉 농사가 시작되어 문자가 창제되었을까?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에 의하면 최초의 문자는 가을 수확물을 분배하고 저장하고 새해 농사준비 등등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 언제 밭을 갈고, 언제 씨앗 뿌리고, 언제 기음을 매고, 언제 수확해야 하는지를 기록으로 남겨야 경험이 누적되어 실패를 줄이고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문자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문자는 농사일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점차 각 영역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좋은 것은 선배들의 시행착오를 기록함으로써 데이터베이스 구축이었다. 이를 통해 실패를 피하고 새로운 것을 기록하여 정보로 사용하는 등 문자는 이렇듯 인류사회를 높은 차원으로 진화하게 만들었다. 인류가 농사를 발명한 것은 대략 1만 년 전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농사가 비록 1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 년 전이다. 2천 년 전,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중국은 그때 천하가 대혼란에 빠진 전국시대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분열시대를 나쁘기만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좋은 일도 많았다. 분열은 경쟁을 촉진하고 그 가운데서 새로운 것들이 창조된다. 또 혼란한 천하를 수습하려는 ‘구급처방’들이 생겨나는데 이를 정리한 것이 인문학이며 여기서 새로운 사상들이 탄생된다. 유가, 도가, 묵가, 명가, 법가 등 사상이 춘추시대에 싹트고 전국시대에 성숙되어 갔다. 여기서 사상이나 인문학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당시 농사 상황인데 중국역사상 그때 농사가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전국시기에 천하는 무한경쟁체제에 돌입했다. 은나라가 상공업을 중시했다면 주나라는 농업을 위주로 했다. 정치체제, 사회제도, 문화시스템 모두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이런 환경에서 전국시대에 무한경쟁의 가장 큰 성과는 철제농기구의 발명과 사용이었다. 철제농기구는 농업생산을 획기적으로 촉진시켰고 생산물도 대폭 늘었다. 쉽게 말하자면 재산이 갑자기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재산의 급증은 신흥지주계급을 탄생시켰다. 신흥지주계급은 기존의 사대부인 귀족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갈등을 빚기 마련이었다. 진나라 상앙이 바로 이 신흥지주계급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한편으로 철제전쟁무기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한족이 주변소수민족을 지배하고 광활한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철제품 사용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 균, 쇠 중에서 쇠의 역할이 이토록 인류사회발전에 기여가 컸던 것이다. 지구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흔히 인간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을 쉽게 한다. 옥스퍼드대학 생물학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에서 지구의 주인은 유전자라고 주장한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랑하는 인간도 유전자를 전달하는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부에서는 지구의 주인은 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을 예로 들면 사람의 얼굴피부에만 1천종에 달하는 균이 있고 전체 몸에 지니고 있는 균 종류는 얼마 될까? 인간은 실로 균덩어리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외계인을 만나 싸우게 된다면 누가 이길까? 아마 십중팔구는 외계인 쪽에 손을 들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정반대이다. 인간이 이긴다. 그런데 인간이 힘으로 이길까? NO! 외계인이 지구의 인간의 세균에 항체가 없어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외계인이 스스로 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만 보아도 지구의 주인은 균이라고 말해도 맞는 말인 것 같다. 특히 외계인의 입장에서 볼 때 더욱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균 가운데서도 동물균이 무서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동물의 균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어찌된 영문일까? 농경문화에서 가축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하나의 문화형태이다. 하지만 가축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각 지역에 따라 상황이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대륙은 가축으로 적합한 포유류가 소, 말, 되지, 개, 양, 당나귀 등 13종이나 있었다고 한다. 가축으로 적합하다는 것은 식성(가성비)이 맞아야 하고, 성격이 유순해야 하며, 성장속도도 고려대상이다. 다이아몬드가 든 예를 보자. 같은 무게 450킬로그램의 소와 사자를 비교했을 때 소를 잡아먹기까지 소에게 먹이는 옥수수가 4,500킬로그램이 필요한데 비해 사자를 잡아먹기까지 사자가 열 마리 소를 먹어야한다고 가정하면 사자 한 마리에 옥수수가 4만5천 킬로그램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성비가 맞지 않아 사자는 가축에서 탈락되었다는 것이다. 고릴라와 코끼리는 15년이 되어야 잡아먹을 수 있기에 성장속도가 느려 수지가 맞지 않아 가축으로 탈락, 회색곰은 무게도 좋고 육질도 좋고 기름도 많지만 그놈의 성격이 더럽게 좋지 않아 탈락이란다. 이래저래, 이런저런 조건을 다 배제하고도 유럽대륙에서는 13종이나 되는 포유류가 가축으로 선발되었던데 비해 아메리카 대륙에는 가축으로 달랑 라마 한 가지만 있었다고 한다. 가축은 인류에게 젖, 비료, 털, 노동력, 교통도구, 군사도구, 고기, 가죽을 제공해주어 인류사회에 지대한 기여를 해왔다. 이 외 가장 중요한 선물을 제공해 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균’이다. 다이아몬드는 이것을 가축이 인류에게 준 ‘사악한 선물’이었다고 표현한다. 왜 사악한 선물인가? 가축 균 때문에 인간이 병들고 전염병이 돌아 많은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럽인은 아프고 죽고 하는 시간을 거듭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대대로 내려오면서 항체가 생겨나 아픔에 시달리지 않고 죽음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유럽인은 13종이나 되는 가축 균을 몸에 달고 사는 것이 일상화되고 체질화화 되었다. 유럽인은 이미 새로운 질병을 이겨낼 만큼 면역력이 강해졌다. 이렇게 면역성이 강한 유럽인이 새로운 대륙인 아메리카에 가서 토착인을 접촉하게 되면 몸에 한 가지 항체밖에 없는 그들이 13종의 병원균에 노출되어 유행병이 돈다. 결국 몸이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병들어 죽고 만다. 심할 때 원주민 99%가 유럽인의 균에 의해 죽었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생겨난다. 지금까지 논의했던 농사의 성과와 결과, 그렇다면 유럽만 농사짓고 아메리카대륙이나 아프리카대륙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메리카도 아프리카도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유럽에 비해 그토록 낙후되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논의를 통해 다이아몬드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아프리카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은 횡적인 넓이보다 종적인 길이가 길다. 종적인 길이가 길면 농사의 확산과 발달이 매우 더딜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는 확산자체가 안 된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귤을 서울에, 평양에 옮겨 심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즉 제주를 벗어나면 서울과 평양일대에서는 귤농사 자체가 안 된다. 엉덩짝만한 한반도에서조차 이런 폐단이 있는데 하물며 아프리카대륙이나 아메리카대륙에서는 더 말치 않아도 명백한 일이다.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 이 속담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을 유력하게 증명하고 있다.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대륙에 비해 유라시아대륙은 횡적 넓이가 매우 넓다. 지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같은 위도에 있는 땅이 넓다는 뜻이다. 같은 위도에 처해 있는 지역은 기후가 같고 식생이 같고 토양성분도 같아서 농사의 확산이 매우 유리하다. 유라시아대륙의 이러한 자연환경이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대륙에 비해 농사가 발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총 균 쇠’도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환경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예를 들어 적도 가까운 너무 더운 지방 사람과 시베리아나 캐나다북부 같이 너무 추운 지방 사람은 게으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비해 온대대륙성과 온대해양성 기후 일대에서 사는 인간이 삶의 개척에 가장 적극적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문명창조와 진화에 앞장서왔던 것이다. 여기까지 논의하고 나서도 아직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즉 농사의 역사를 논하자면 유럽보다 중국이 앞서 있었고 농경에서 파생되어 생겨난 문명, 이른바 다이아몬드의 논지에 따라 말해도 각종문명이 중국이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유럽이 중국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겨우 150년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거두절미하고 뒤에서 허우적대던 유럽이 중국을 앞서게 된 요인이 무엇이었을까? 명나라 정하의 함대만 해도 콜럼버스함대에 비해 수백 배, 수천 배 규모였다. 그런데 왜 중국은 아메리카대륙을 발명하지 못했으며 새로운 식민지 개척에 나서지 않았을까?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중국은 쇄국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더 발전이 없이 정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통일된 거대한 제국이 쇄국 때문에 모험에 인색하여 사방에 담장을 치고 안일하게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유럽은 갈기갈기 수백 개의 소국(독일은 2백 년 전 프로시아 시절 200여개로 분열된 상태였음)으로 찢어져 분열되어 있었는데 오히려 이 분열상태가 경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 다이아몬드의 주장이다. 과학은 무지의 상태에서 호기심에 의해 탐구정신이 작동하여 발명된 것이듯, 본래 무였기 때문에 중국처럼 내세울 자존심도 없었고 내세울 체면도 없이 오로지 호기심으로 서로 경쟁에 뛰어든 결과 전근대적인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결론을 도출할 때가 되었다. 유럽이나 중국(황하와 양자강유역을 중심으로)은 농사에 가장 적합한 환경에 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빛나는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데 비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인류는 환경이 좋지 못한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문명 발전과 발달에 뒤쳐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환경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700페이지에 달하는 를 다섯 글자로 요약하면 ‘환경결정론’이다. 참고로 다이아몬드의 ‘환경결정론’이 다 맞는다고는 긍정할 수는 없다. 일례로 태풍이 많고 지진이 많은 환경이 매우 열악한 일본은 자연을 극복하고 세계선진국 반열에 오른 전형적인 좋은 사례도 있다. 때문에 다이아몬드의 학설을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우리 지식을 넓혀주는데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되기 때문에『총 균 쇠』가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363    재한조선족은 원숭이에게 감투 꼴 댓글:  조회:3367  추천:11  2020-01-06
재한조선족은 원숭이에게 감투 꼴 진나라 서울 함양으로 치달아 들어간 항우는 이전에 유방에게 항복한 진왕 영(瓔)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은 석 달을 두고 탔다고 한다. 항우는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으며 진나라의 재물들을 모두 거둬 갔다. 부녀자들도 모두 붙잡아 갈 만큼 항우의 군사는 갖은 잔학한 짓을 다하고는 함양을 떠났다. 그때 한생(韓生)이란 사람이 항우에게 말했다. “진나라 땅은 지리가 좋고 땅도 길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천하의 패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잿더미가 된 진나라 궁궐들이 보기에도 싫었을 뿐 아니라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한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이 부귀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밤에 비단 옷인지 누가 보고 알아 줄 것이냐.” 한생은 기어이 고향으로 가려는 항우를 보고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감투를 쓴 꼴이다.’고 했다가 항우의 노염을 사서 잡혀 죽었다. 항우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굉장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따라서 이 고사가 후세에 전해지면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스스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행위를 빗대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속담으로 전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속담을 우리 현실에 적용시켜보면 재한조선족사회 상황에 신통하게 하모니가 되어 있다. 10년 전의 일이다. 00한국 분이 필자에게 왈, “한국에 온 조선족 분들이 평균 수준이 굉장히 높네요.” “무슨 말씀인지?” “저마다 선생(교사) 했다는 분들이 엄청 많네요.” “아~, 그래요.” 뻥이다. 뻥도 보통 뻥이 아니라 한심한 강냉이 뻥 튀기 식의 뻥이다. 10년 전에 한국에 온 조선족 중에 교사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극히 소수였다. 00단체장의 우스운 이야기다. 자신은 조선글, 조선말 잘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연길에서 00중학교에서 선생 했다고 자랑한다. “그 학교가 조선족중학교인데”라고 말했더니 “아, 잘못 말했는데 xx중학교요.” “그 학교도 조선족학교인데요.” 얼굴이 원숭이의 궁둥이가 되어 머뭇거린다. 선생 해 본 적이 없는 단체장이 자신이 있어 보이기 위해 선생 했다고 뻥 친다. 조선족사회 리더라고 하는 단체장이 이 정도로 뻥 치고 있으니 일반 구성원들이야. 또 법원이나 검찰원에서 일반 직원으로 심부름이나 하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자신은 중국에서 판사 혹은 검사였다고 뻥친다. 왜냐? 한국에서는 판사나 검사가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기 때문에 자신을 최고 엘리트로 포장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언급했듯이 재일조선족사회와 재한조선족사회 최대 구분이 바로 전자는 유학생 주류로 형성된 것인데 비해 후자는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 온 조선족은 머리 쓸 필요 없이 팔다리가 멀쩡하면 모두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85만이나 밀려 온 것이다. 한국은 민주주의국가이다. 민간단체 설립이 굉장히 쉽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슬쩍슬쩍 한두 마디 변경해서 정관이나 만들고 회원 명단만 작성하면 되고 활동 내역도 어지간히 만들어 넣으면 00협회란 법적 등록이 가능하다. 재한조선족사회 00협회 이름으로 된 단체가 한 때 가장 많을 때 60여 개나 있었다. 개혁개방 직후 80년대 연길에 실체나 실속 없는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가 너무 많아 당시에 ‘무슨 놈의 꿍쓰(회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는 말이 유행되었다. 재한조선족사회 단체들이 똑 마치 그때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를 신통하게 닮았다. 구체적인 일은 하는 것이 전혀 없이 일단 단체장이라는 감투만 쓰면 능력은 없어도 자신이 큰 벼슬을 한 것처럼 개폼을 잡는다. 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이들 ‘회장님’들은 중국에 있을 때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더욱이 단체장 가운데 대학문을 나온 사람이 거푸 한두 명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재한조선족단체와 재일조선족단체의 큰 차이다. “저희들은 한국에서 여러 가지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재한조선족사회 리더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00사법기관 동포 관련 간담회에서 나온 조선족 단체장의 발언이다. 한국공무원들이 재한조선족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정말 창피하다. 창피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은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국가이고 동포밀집지역 관공서와 서울시청 등에서 다문화(이럴 때면 조선족도 다문화에 포함시킨다.) 관련 간담회가 많다. 뻥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에서 선생 했다거나 언론 관련 기관에 종사했다거나 혹은 자신을 지식인이라 폼 잡는 사람들이 회의에서 하는 발언들을 들고 있노라면 한국어가 서툰 것은 허물도 아니다. 회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을 길게 늘여놓고 게다가 목소리도 크고 악센트도 세서 동네망신이다. 참다못한 사회자께서 마이크를 놓으라고 제지한다. 단체장들은 스스로 재한조선족사회를 대표한다고 자랑한다. 문제는 대표라는 사람들이 이 수준이니 한국공무원들이 이쪽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겠는가? “중국에 있었을 때 같으면 함께 같은 밥상에 마주 않지도 못했을 ‘빈 깡통’들이 한국에 와서 회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정말 못 봐주겠다.” 조선족출신 00공무원의 말씀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정말 불가사의한 이상한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중국에서 경찰한테 감히 대들지 못하던 조선족들이 이상하게 한국에 와서 한국경찰한테 협조하지 않을뿐더러 경찰을 무시하고 을러멘다.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면 둘이 갈 일을 넷이 가고 넷이 갈 것을 여덟이나 갑니다. 동포들이 군중영웅심리가 강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지나가던 동포들이 경찰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있어 많이 출동해야 합니다.” 동포밀집지역 경찰공무원의 고충이 담긴 고백이다. 왜, 이럴까? 중국에서 돈고생 하다가 한국에 와서 얼마간 돈을 벌었으니 세상이 녹두 알만해 보이고 자신이 영웅이나 된 것처럼 행세한다. 이런 조선족이 굉장히 많다. 일하기 싫어 입에 풀칠도 곤란한 동포들이 한군데 모여 빈둥대면서도 트럼프부터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중국정치부터 일본우익에 이르기까지 세상사를 논하는데 한다하는 정치논객들을 뺨 칠 정도다. 서로 제 말이 옳다고 우겨대는 목소리는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든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진짜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말이 실감난다. 한국사회가 재한조선족사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 . ‘모든 일은 남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자.’ 이것이 필자의 일관된 신조이다. 언제 가면 재한조선족사회가 지적으로 변화되어 한국사회로부터 환영받는 집단으로 거듭날까? 지금으로서는 막연해 보인다. 참고로 모든 단체장이 다 그런 것처럼 이 글을 오해할 수 있는데 일부 조선족단체장들은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한국정부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다수의 재한조선족은 묵묵히 열심히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 밝히고 싶다.
362    부자 천국행은 낙타 바늘구멍 뚫기라는 말의 진실 댓글:  조회:1650  추천:1  2019-12-10
부자 천국행은 낙타 바늘구멍 뚫기라는 말의 진실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이 뒤섞인 감정을 시기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니체는 이러한 시기심을 르상티망이란 개념으로 표현한다. 니체의 르상티망에는 또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경우 그 대상을 폄하함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행위까지 포함되어 있다. 라는 이솝우화가 있다. 여우가 굉장히 먹음직스런 포도를 발견했다. 입에 군침이 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이 닿지 않아 도무지 먹을 수가 없다. 화가 치민 여우는 결국 “이 포도는 엄청 신 게 분명해. 이런 걸 먹는 자는 바보야.”라며 포기하고 가버린다. 취하고 싶은데 취할 수 없어 오히려 상대를 폄하하는 심리적인 행위.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미녀는 모두 취하고 싶다. 그러나 미녀의 수는 적고 부자나 관료 및 기타 능력자만 가능한 일이지 일반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취할 수 없을 바엔 미녀를 비정상 인간으로 모는 것이 대중의 심리다. 시내암의 에 등장하는 반금련, 염파석, 반교운, 가씨 등 미녀들이 모두 음란한 독부(毒婦)로서 비정상 인간이다. “이른 봄 버들잎 같은 눈썹에는 언제나 운우의 정을 그리워하는 듯 한과 시름을 품고 있고, 춘삼월 복사꽃 같은 얼굴에는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었다. 가는 허리는 걸을 때마다 하늘거렸고, 도톰한 입은 향기를 뿜어 벌과 나비가 미친 듯이 날아들었다.” 반금련의 모습이다. 기타 미녀들의 자태도 거의 이와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을 모두 음란한 것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실제역사사실이든 가공이든 하여튼 모든 남자들이 미녀를 품어보고 싶어 하면서도 미녀에게 이상할리만치 편견을 갖고 있다. “눈썹이 이른 봄 버들잎 같은” 여자를 보게 되면 반사적으로 그녀가 “늘 운우의 정이 그리워 한과 시름을 품고 있다.”고 믿게 되고, “얼굴이 복사꽃 같은” 여자를 보게 되면 자연적으로 “은은히 바람기를 감추고 있다.”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에 등장하는 이들 미녀들은 대개 독부라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실제로 반금련은 제 손으로 무대랑을 독살하였고, 반교운은 애매하게 석수를 모함하였다. 염파석은 송강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안달하였고, 백수영은 뇌형을 희롱하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그의 어머니까지 구타하였다. 가씨는 관청에 출두하여 남편 노준의를 무고하고 증인으로 나서 자칫하면 노준의는 죽음을 뻔 했다. 중국에서 과거 한 때 바람피운 자에게 썩은 새끼줄에 헌 신발을 달아매 목에 걸어놓고 비판 투쟁하였는데 모두 열광적으로 참여했고 어떤 이는 입에 거품 물고 돌까지 던지면서 굉장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사실 남이 바람피운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왜 미친 듯한 행동을 보이는가? 이에 한 심리학자가 답을 내놓았다. 나도 하고 싶은 데 그렇게 못해서 분하고 억울한 심리 작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바람을 아무나 피우나? 능력이 있어야지. 자신의 무능을 타인에게 돌 던지는 것으로 해소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서양에로 가보자.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 인류역사 이래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하는 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이 말씀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니체에 의하면 고대 로마시대에 로마제국의 지배아래에 있던 유대인은 줄곧 빈곤에 허덕였고 부와 권력을 거머쥔 로마인 지배자를 선망하면서도 증오했다. 하지만 현실을 바꿀 수도 로마인보다 위위를 점하기도 불가능했던 그들은 복수를 위해 신을 만들어 내 ‘로마인은 풍요로운데 우리는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다. 하지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쪽이지 부자와 권력자인 당신들은 신의 미움을 받고 있어서 천국에는 죽었다 깨도 갈 수 없다.’는 논리를 세웠다. 니체는 신이라는 로마인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가공의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현실세계의 강자와 약자를 반전시켜 심리적인 복수를 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열등감을 노력이나 도전으로 해소하려 하지 않고 열등감을 느끼는 원천인 ‘강한 타자’를 부정하는 가치관을 끌어내 자신을 긍정하려 한 사고관이다. 는 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설파한다. 우리는 문화대혁명 때 가난이 신성한 것으로 자화자찬했다. 손에 장알이 배기고 발에 쇠똥이 묻은 자는 사상이 붉고 지주와 자본가는 모두 몸과 마음이 썩어빠져 죽일 놈들이고 개 칠 몽둥이 하나 없는 빈곤한 자들이야말로 몸과 마음이 신성하다는데 주장에 열광했었다. 왜 그토록 가난이 위대한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자화자찬에 열광했을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가난한 자가 부자와의 ‘위치’를 반전시키려는 심리, 니체의 말대로 해석하자면 르상티망의 현상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부를 경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다. 부를 얻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부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일단 부를 얻게 되면 그들만큼 상대하기 곤란한 사람은 없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저서 에 등장하는 한 대목이다. 이외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르상티망의 현상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르상티망의 심리를 강하게 부추기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자기를 남한테 있어보이게 하는 행위도 르상티망의 표현이다. 남자들이 고급브랜드 자동차에 열광하거나 여성들이 고급브랜드 핸드백에 미치는 것 모두 좋은 예다. 한 남자가 2천만 주고 중고 BMW를 구매했는데 얼마 안 가서 망가져 정비소 갔더니 수리비 2천만 내라 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부잣집 마나님이 부러워 가짜명품인 것을 알면서 구입해서 들고 다니다가 망신당한 여자들 모두 르상티망에 빠져 인생을 잘못 저당 잡힌 불행한 사람들이다.
361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댓글:  조회:2799  추천:5  2019-11-22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평론가,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가 한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이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나치정권의 핍박에 의해 프랑스로 망명 갔다가 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시카고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면서 등 저서를 펴냈다. 은 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고 나서 지은 것이며 이 책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인데 독자들은 원제보다 부제에 더 끌렸다. 사람들은 흔히 악은 무시무시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상식인데 악의 평범성이라니? 그럼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본래부터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그럴 수 있단 말이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악의가 없어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한나 아렌트가 이런 주장을 펼쳤을까?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유대인 학살 계획을 지휘하던 최고 권위자였다. 당연히 600만 유태인을 ‘처리’하기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는데 주도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아이히만은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당시 그를 체포한 모사드 관계자와 그를 재판하는 판사 및 방청객들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고 모두 굉장히 의아했다. 왜냐면 사람들은 그를 굉장히 흉악하게 생기지 않으면 적어도 냉엄하고 독기 있는 건장한 게르만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는데 사실은 정반대로 무척 왜소하고 기가 약해보이고 얼굴도 매우 평범해 보이는 보통 남자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무시무시한 죄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를 마주한 사람들은 일제히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무지 믿기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악인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은 동서양이 따로 없다. 개혁개방 전 중국에서 항일 혹은 국공내전을 그린 영화는 전부 획일적으로 상대편을 흉측하거나 흉악스러운 모습으로 각색하였다. 한국영화도 마찬가지다. 악인의 모습은 전부 보기에도 무섭고 흉측스런 인간상이다. 등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족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답이 보인다. 문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상상으로 자리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이 너무나 생각 밖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가 연구해낸 것이 바로 ‘악의가 없어도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곧 ‘악의 평범성’이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악인이 되는가? 한나 아렌트는 이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내놓았다.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현행 시스템이 어떤 문제가 있고 내가 어떻게 고쳐 나아갈 것인가에 사고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다. 십분 맞는 말인 것 같다.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절대다수가 현행 시스템에 순응하면서 그 주어진 시스템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도모한다. 만약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치려고 들면 잘리기 십상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잘리면 당장 먹고사는 생계가 위협받기 때문에 현행 시스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거니와 주어진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고 고치려고 든다면 잘리지는 않아도 적어도 승진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전자에 무게를 둘 뿐 후자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특히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박근혜 정부 관료들, 삼성의 중견 간부들 사례) 현행시스템에 항거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다가 악인이 되어 철창신세를 지는 사례를 우리는 흔하게 목격하지 않았는가! 한편 맹자는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반대로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악의 존재라는 ‘성악설’로 맞섰다. 공맹을 추종하는 계열에서는 ‘성선설’을 믿고 상앙과 한비자를 추종하는 법가 계열에서는 ‘성악설’을 받아들여 2천여 년 동안 논쟁거리로 되어 왔다. 기독교는 성악설을 주장한다. 인간이 악의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해야 구원을 받아 선인(善人)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 이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다. 그러다가 요즘 이란 책을 읽고 나서 이 두 주장이 기초가 부실한 빌딩이 무너지듯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전혀 부질없는 ‘설’이라는 느낌을 통렬하게 받았다.
360    감언이설(敢言異說) 하는 김정운 교수 댓글:  조회:1466  추천:1  2019-10-28
감언이설(敢言異說) 하는 김정운 교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3) 조선일보에 의 코너가 있는데 연재 기고자는 김정운 교수다. 일단 연재 코너 제목이 특이해서 눈길이 간다. 감언이설이라는 사자성어는 본래 타인의 귀를 솔깃하게 달콤한 말을 한다는 뜻으로서 한문으로 ‘甘言利說’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감히 다른 말을 한다는 의미로 ’敢言異說‘라 제목을 달았다. ’아니면 말고‘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개인 억측이나 추측에 의한 의혹을 사실 확인도 없이 일단 폭로하여 사회적인 이목을 끌고 보자는 심리의 발로의 행위인데 김 교수가 말하는 ’아니면 말고‘는 나의 주장이 독자의 생각에 안 맞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나온 말 같다. 김 교수의 글을 일별해 보면 필자의 사견이 옳을 것이라 믿는다. 김 교수는 다른 말을 하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김 교수가 유명해진 것은 다른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교수의 책 제목들을 살펴보면 등인데 내용을 봐도 기존상식과 다른 말들을 하고 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비결을 물으면 100% 모두 일치하게 하는 대답이 있다. “비결이 뭐 따로 있어요, 노력한 덕분이죠. 거듭 맞는 실패를 딛고 좌절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죠.” 노력은 성공한 사람들의 미덕으로 간주되어왔다. 이것이 기존상식이다. 게다가 에디슨의 ‘1% 영감에 99% 노력’이란 ‘명언’까지 들먹이면서 노력을 찬양하는 분위기에서 우리는 살아왔다. 김 교수는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한 때 일본 작가 사이쇼 히로시가 지은 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김 교수는 이를 비정상이라 진단한다.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돌아치는 사람들이 성공한다면 새벽부터 약수터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 성공했겠네? 노력이 성공의 비결이 되던 시대는 과거 한강기적을 창조하던 시절 죽어라 일만 하던 때의 얘기지 21세기 세상은 노는 놈이 성공한다. ‘외설적’으로 들리지만 그의 저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허망한 외침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는 일과 삶의 조화를 잘 할 수 있는 휴테크를 전하는 책이다. 김 교수는 외친다. “한국인이여, 놀면 불안해지는 병에서 벗어나라!” ‘일하는 것’은 세계 최고이나 ‘노는 것’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한국사회의 근본 문제를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잘 노는 사람이 창의적이고 성공한다는 막연한 주장을 다양한 문화심리학적 개념들을 통해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이 책은, 한국사회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인 의사소통의 부재를 놀이와 재미를 통해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재미, 행복, 휴식의 심리학적 가치, 철학적 의미 등을 정립하고, 사소하지만 누구나 다양한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진짜 경쟁력 있는 사회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특히 이 책은 100세 시대를 살아갈 인간에게 미리 행복하게 살 준비를 하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일과 삶의 조화, 참 어려운 일이다. 중국문화의 골격이라 말할 수 있는 ‘예악(禮樂)’은 정치, 사회, 문화면의 제도적인 장치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기본 삶의 상식이라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예’는 일이라면 ‘악’은 오락이다. 인간은 일만하고 오락을 모르면 지쳐 병이 나기 십상이고 거꾸로 일을 안 하고 오락(노는 것)에만 빠진다면 곧 타락해버린다. 적당하게 일하고 적당하게 노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창조는 편집이다’ 창조는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편집할 줄 알아야 창조가 생긴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는 김 교수의 인문학 클래스다. 자신만의 새로움을 창조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가능한 것인가? 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서 탄생한다.” 자신만의 관점으로 편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에디톨로지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낯설게 보기’를 통해 독창적인 관점을 갖는 법, 암기형 공부가 아닌 주체적 공부로 나만의 이론과 철학을 만들어내는 법 등 실제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에디톨로지 방법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 심리학으로서 의무와 책임만 있고 재미는 잃어버린, 이 시대 남자들을 위한 심리에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공을 향해 달음질쳐보아도 왠지 행복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듯하다. 위로받고 싶지만 딱히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남자들이다. 이 책은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로망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행동해보지 못한 남자들의 심리적 여백을 통렬하게 채워준다. 어느 순간까지는 ‘무작정’ 달려온 남자들, 그들이 왜 어느 순간 자아를 상실한 느낌이 드는지, 권위와 의무감에 탈출구가 꽉 막힌 듯한 느낌이 드는지, 어디서도 지친 영혼을 뉘일 곳을 찾지 못하게 되는지, 그것에 대한 ‘문화심리학적’ 분석서인 셈이다. 남자들의 현실 키워드 ‘아내’로 대별되는 ‘안정과 로망의 경계’를 저자 자신의 경험에 비춰 풀어낸다. 글도 잘 쓰고 강의도 잘하는 남자 한 사람이 글도 잘 쓰고 강의도 잘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김 교수는 이 두 가지를 다 잘한다. 잘할 뿐만 아니라 아주 뛰어나다. 먼저 그의 유머감각이 뛰어난 글쓰기 솜씨 한 대목만 감상해보자. 의 서두다. 나는 유시민 작가가 몹시 불편하다. TV를 켜면 매번 그가 나온다. 그의 ‘구라’는 갈수록 현란해진다. 게다가 그가 쓴 책까지 모조리 잘 팔린다. 그게 나는 그냥 힘든 거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훨씬 잘생겼다! 그건 누가 봐도 그렇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아주 간단히 제쳤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올라가면 꼭 새 책을 내서 내 책을 끌어내리는 혜민 스님은 좀 다른 방식으로 따돌렸다. 그는 ‘스님’이고 나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비겁해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의 평화가 먼저다. 뜬금없지만 요즘은 이상순이라는 사뭇 촌스러운 사내가 날 괴롭힌다. 이효리 남편이란다. 참 선하고 따뜻해 보인다. 모난 성격 탓에 시종일관 부딪치며 살아왔던 나는 ‘부드러운 사내’만 보면 마음이 몹시 불편해진다. 그러나 이 경우 내 비장한 ‘인물론’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의 아내는 이효리란다. 그걸로 그냥 ‘게임 끝’이다. 아무리 비겁한 논리를 들이대도 해결되지 않는 이상순에 대한 내 질투는 이제 내 성격적인 열등감을 건드린다. 우리의 인생이 자주 꼬이는 이유는 ‘질투’와 ‘열등감’ 때문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질투가 외부를 향한다면 열등감은 내부를 향한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참 대단한 글 솜씨” 김 교수는 스스로 대한민국에서 강의를 잘하는 사람 2위라고 말한다. 자신보다 앞서 한 수 위인 강의자가 바로 도올 김용옥 교수란다. 유머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하게 들리지만 내가 보기엔 우열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김 교수의 강의 솜씨도 매우 뛰어나다. 저명한 음악가 슈베르트를 닮은 외모, 둥글 형 얼굴에 둥글 안경을 걸고 상의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 한 학생복을 늘 입고 강의에 나선다. 나훈아가 무대에 서면 관객을 확 잡아당기듯 김 교수도 청중이 확 빨려들게 하는 재주가 뛰어나다. 강의 잘하는 삼대 요소 : 아는 것이 많아야 하는 것, 강의자와 수강자 사이 정서교감이 이뤄져야 하는 것, 강약 조절을 잘 할 것. 이것을 나는 김 교수한테서 배웠다. 삐딱한 사람이 인기 높은 세상 앞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 도올 김용옥 교수와 가수 조영남은 둘 다 일반 상식 시각으로 보면 삐딱한 사람들이다. 김 교수도 역시 삐딱한 사람이다. 나는 어쩐지 지식이 태산 같아도 평범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별로다. 요즘 말대로 하면 튀는 사람이 나는 좋다. 김 교수는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13년 지내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강사도 했다. 한국에 돌아왔는데 취직이 안 되어 애먹었다. 당시 한국대학들에는 문화심리학과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다가 명지대학교에서 심리학과를 세우면서 취직했다.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글도 쓰고 TV강의를 비롯해 대중강의 많이 했다. 한창 잘 나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를 세워 연구 활동도 했다.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강의료가 최고로 비쌌다고 한다. 그토록 잘 나가던 김 교수는 어느 날 대학 교수를 때려치운다. 50살 교단을 떠난다. 지천명 문에 들어설 나이이면 교수로서 한창 ‘꽃 필’ 때 그만두다니. 한국에서 교수직은 평생직이다. 웬만한 하자 없는 한 자리보존은 철석같다. 그런데 그 편안하게 노후 보장 되는 교수직을 때려치웠으니 배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글 쓰고 강의하는 일이 많아서 외롭지도 않고 수입도 좋았겠지만 중국말로 표현하자면 하해(下海)는 모험이다. 대중인기가 절정일 때 김 교수는 어느 날 일본으로 떠난다. 며칠 간 여행이 아니라 일본 지방에 있는 ‘허름한 대학’에 가서 3년 간 그림을 배운다. 일본 사람은 고독하기로 유명하다. 고독한 일본에서 고독하게 지낸 체험을 바탕으로 는 글을 발표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듬해에 김 교수는 더 고독하고 외로운 길을 간다. 여수 앞바다 한적한 섬에다 자기만의 공간인 화실이자 글 쓰는 작업실을 만들었다. 이름은 ‘미력고(美力庫)’, 여기서 홀로 생활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 어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특히 그 한적한 곳에 거액을 투자해서 마련한 집이 앞으로 팔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오히려 한국 사람들의 사고에 문제가 있다고 꼬집는다. 한국 사람들은 집을 교환가치로만 보지 사용가치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은 집을 매매하는 재테크용으로 여길 뿐 내가 그 집을 사용하면서 얻는 행복에 대해선 고려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불행이다. 김 교수는 이렇듯 여러모로 타인과 대비되게 ‘삐딱한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필자가 김 교수를 좋아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359    대한민국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 가수 조영남 댓글:  조회:3803  추천:7  2019-10-18
대한민국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 가수 조영남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2) 인간은 흔히 누가 뭐래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기 싶은 것만 듣는 편파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요즘 조국사태를 보면 이해가는 것이 조국을 지지하는 쪽은 조국의 장점만 보이고 들릴 것이고, 조국을 반대하는 진영은 조국의 허물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릴 것이다. 나는 지금 요즘 대한민국을 가장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조국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뭐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가수 조영남의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눈치 빠른 독자께서는 서두를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릴 것이라 믿는다. 가수 조영남은 잘나가다가 고희 넘은 나이에 화토그림이 대작논란에 휩싸여 지금 은둔 상태에 있다. 원심과 항소심 모두 두 번이나 재판 받았으니 결과는 무죄이나 도덕적으로 치명타를 입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도 일부 돌아서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이 불미스런 사건 때문에 그의 과거마저 부정하고 싶지 않아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로 했다. 유명가수지만 일등 한 번도 먹지 못한 조영남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방송인 KBS에 두 가지 큰 음악프로가 있는데 하나는 매주 월요일 저녁 10시 있는 ‘가요무대’이고 다른 하나는 일요일 저녁 6시 방송하는 ‘열린음학회’이다. 그런데 ‘가요무대’에 가장 많이 출연한 가수는 주현미이고 ‘열림음악회에 가장 많이 출연한 가수는 조영남이다. 주현미는 히트곡이 너무 많아서 손꼽을 수 없을 만큼 유명하다. ‘가요무대’에 가장 많이 출연한 것은 십분 이해가 간다. 조영남은? 히트곡이란 달랑 ‘화개장터’ 하나다. 이 노래가 히트 칠 수 있었던 것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고질적인 갈등에 화합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히트곡이란 달랑 한 수밖에 없는 그가 왜 유명가수로 활동해왔을까? 조영남은 충청도의 한 조씨 가문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말대로 하면 믿거나 말거나 서울음대를 다녔다. 그러니까 어느 노래자랑에서 우승하고 가수로 데뷔한 ‘아마추어 가수’는 아니라는 얘기다. 조영남이 유명해진 계기는 1970년대 초반 미8군 위문공연에서 ‘딜라알라’를 부른 것이었다. ‘딜라알라’는 본래 톰존슨이 부른 노래인데 조영남이 한국어로 번안해서 불렀다. 이 노래를 부른 덕분에 한 목사의 눈에 들어 미국유학까지 다녀온다. 그 후 조영남은 숱한 외국가요를 번안해서 부른 유명가수로 떠올랐다. 현대사 한국가요계를 두 가지 산맥으로 분류하는데 한 부류는 나훈아와 이미자를 대표하는 민족정서를 잘 담고 있는 트로트이고 다른 한 부류는 조영남과 패티 김으로 대표되는 외국가요를 한국사회에 접목시킨 것이다. 이 정도면 유명할 만하다. 그렇지만 명색이 유명가수 생애에서 일등 한 번도 먹지 못했다는 것은 좀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나는 가수로서의 조영남은 별로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조영남이 나의 좋아하는 사람들 리스트에 올랐을까? 유명작가는 아니지만 가장 솔직한 사나이 미국 가는 것이 별 따기 만큼 아니더라도 엄청 힘들었던 시절 조영남은 아메리카 땅을 밟는다. 노래 공부 위해서가 아니라 신학 공부 위해서다. 그는 7년 동안이나 예수를 배웠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 모태신앙에다 무려 7년 예수를 배웠으니 철두철미한 예수쟁이 될 만했다. 그런데 그는 예수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유학공부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올 때 라는 책을 집필한 원고 한 뭉치를 보따리에 정중히 넣어갖고 귀국했다. 마음이 굉장히 설레고 들떴다. 제딴에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예수의 샅바를 잡은 사람으로서 엄청 히트 칠 것이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정작 책이 시중에 나왔는데 반응이 굉장히 싸늘했다. 책가위에 화투 그림 흙싸리를 디자인했다. 본인은 굉장히 신경을 써서 디자인했건만 보는 사람들은 아주 시큰둥했다. 인세가 엄청나리라 기대했는데 시쳇말로 망했다. 한국사회에서 인기를 끌지 못한 책이 어찌하다가 바다건너에서 굴러온 나의 시야에 걸려들어 흥미진지하게 읽었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한 계기는 재미있게 서술한 측면도 있지만 나에게는 기독교와 예수를 이해하는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요내용과 결론은 자신이 모태신앙자이면서 7년 동안 예수를 배웠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책 곳곳에서 이런 뜻이 아주 솔직하게 묻어나고 있다. 조영남은 가수이지만 책을 참 재미있고 솔직하게 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편 조영남은 그냥 평범한 ‘딴따라’가 아니라 공자, 노자, 부처, 맹자, 장자, 아리스토델레스, 플라톤 등 고전 인물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지식인이다. 지식도 있고 솔직하면서도 재미있다는 것이 조영남의 책에 대한 나의 평가이다. 한 권의 책 놓고 하는 평가가 아니다. 조영남은 이란 책을 지었다. 미대 졸업생은 아니지만 현대미술에 대해 평론할 만큼 지식을 갖췄으니 미술에 대해 아마추어는 아니다. 조영남의 또 다른 책 한권이 있는데 제목이 이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의적인 거짓말이든 고의적인 거짓말이든 하지 않고 100% 솔직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 거짓말을 몇 퍼센트 하면서 살까? 각자가 다르고 이에 대한 통계는 없다. 조영남은 자신은 80% 이상 솔직하다고 말한다. 이에 객관의 평가는 후한 편이다. 솔직한 사람도 보편적으로 책을 집필할 때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털어놓는 것이 50%에도 못 미친다. 조영남은 80% 이상이라고 하니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다. 왜 굳이 프로숫자까지 들먹이면서 그를 논하고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 사회 여느 분야에 모두 친구가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혼자서 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릴 적부터 다른 아이와 잘 어울릴 수 있고 친구를 잘 사귈 것을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임을 알 수 있듯이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성공한다 . 조영남은 대한민국에서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친구숫자를 놓고 논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 각계각층에 모두 친구가 있기로 유명하다. 본인이 ‘딴따라’이기 때문에 예술 분야의 친구는 물론 엄청 많다. 섹시봉 가수 그룹 인물들과 가장 친하고 또 패티 김 가수와 가장 잘 친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물급 정치인 정대철, 김한길을 비롯해 정계인물 친구가 많다. 학계를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도올∙김용옥 교수와도 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언론을 비롯해 아무튼 사회 힘깨나 쓰고 빽을 쓴다는 분야에 친구가 없는 분야가 없다는 것이 조영남에 대한 평가다. 남자 친구도 많고 여자 친구도 많다. 남자 친구가 많은 이유는 조영남이 술값 잘 내서 그렇다는 평가가 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수긍이 간다. 그럼 여자 친구는 어떻게 많이 사귈 수 있을까? 상대의 말을 아주 공손한 태도로 경청해 잘 들어주는 것이 비결이란다. 그리고 가령 상대 여자가 실수해서 커피를 옷에 쏟아놓아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던 얘기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도 또 다른 비결이라고 한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인생을 젊고 즐겁게 살아가는 큰 자산이 된다. 이면에서 사람들은 조영남을 부러워하고 있다.
358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1) 댓글:  조회:2865  추천:2  2019-10-08
도올은 나의 가장 훌륭한 스승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1) 50세 이전에 내가 좋아했던 인물을 회상해보면 거개가 죽은 사람들이었다. 막연하게 천하를 통일했던 시황제, 중국강토를 가장 넓게 만든 강희제, 모택동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유럽사람 치고 난쟁이지만 천하를 호령했던 나폴레옹, 낙후했던 농노제국가인 러시아를 자본주의 반열에 올려놓은 표트르 대제 등등의 위인들을 좋아했다. 그때는 좋아했다기보다 숭배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진실일 것이다. 좋아한다는 것과 숭배한다는 것의 차이는 좋아하는 사람이면 내가 따라 배울 수 있고 얼마만큼 흉내 낼 수도 있지만 숭배의 대상은 내가 도무지 따라 배울 수 흉내 낼 수 없었던 위대한 위인들이다. 지천명 나이가 되어서야 좋아하는 것과 숭배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고 이상에서 현실로 돌아서는 길을 찾았으니 늦은 건지, 빠른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철이 든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내가 숭배했던 대상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었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현재 지구상에 함께 숨 쉬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인생에서 이런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한국생활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2000년대 초반 어느 날 한국 00교회 도서실에서 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제목이 특이했다. 아마 이 제목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남자는 없을 것이다. 펼쳐보았다. 저자는 도올∙김용옥이었다. 그때는 나로서는 이 사람 뭘 하는 사람인지? 처음 접하는 인물이었다. 대충 페이지를 넘기니 내가 좋아하는 고전지식으로 풀이한 책이었다. 언어학도 좀 있고 말이다. 그에 의하면 동양에서의 사람 인(人)은 남자와 여자를 포함하고 있는데 비해 서양에서는 사람은 남자이지 여자가 아니다. 즉 Man은 사람이자 남자만 뜻할 뿐 여자는 Man 앞에 Wo를 붙여 Women이라 부른다. 동양에서 여자가 시집가도 남자의 성을 따르지 않고 친정의 성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비해 서양에서는 여자가 시집가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 이 관습이 아마 이 언어학적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동양의 문화적인 진화와 서양의 문화적인 진화사로 여자의 존재를 해부했다. 는 그의 처녀작이자 굉장히 깊이 있는 책이었다. 그 후 어느 날 TV를 켰더니 화면에 사진에서 보았던 도올∙김용옥 교수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이상했다. 책가위에 등장한 그의 사진모습은 머리숱이 나처럼 많았는데 TV에는 중머리다. 어느새 스님이 되었나? 그런데 옷차림은 스님의 모습이 아닌 중국 전통복장 다부산자다. 머리 모습과 옷차림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오뉴월에 오이를 거꾸로 먹는 것도 제 나름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색해 보였지만 한편 특이해 보였다. 그날 내가 본 그는 을 강의하고 있었다. 강의수준이 굉장했다. 확 끌려들었다. 강의를 잘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한 방울의 물을 전하려면 한 통의 물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듯이 선생은 아는 것이 굉장히 많아야 한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모두 강의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의는 세상만사 지식을 두루 많이 갖춰야 강의를 잘 할 수 있다. 도올은 진짜 아는 지식이 바다처럼 넓고 깊다. 국내에서 고려대철학과도 다니고 신학대학도 다녔다. 그가 젊었을 때는 한국과 중국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대만국립대학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일본 동경대학교에서 동양철학 전공으로 여전히 석사를 마치고 현대문명의 본산지인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하위를 취득했다. 그러니까 동양에서 좋다는 대학을 다 다녔고 또 미국까지 가서 현대문명의 본산지라고 말할 수 있는 최고 학부 하버드에서 서양문물도 읽혔기 때문에 지식섭렵이 방대하다. 그 분의 말씀에 따르면 36세까지 책만 읽었다. 둘째 강의자와 수강자 사이 정서교감이 잘 되어야 한다. 도올은 특이한 제스처로 강의한다. 목소리도 고음으로 특이하다. 옛날과 현재를 오가면서 한국사회 부조리에 대해 거침없이 두들긴다. 수강자들은 그의 강의를 들으면 체증이 확 풀린다.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린다. 그의 강의 재간은 수강자들의 정서를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강약 조절을 잘 해야 한다. 노래를 잘하는 기교 중에 강약 조절이 있다. 강의도 노래와 마찬가지로 강약조절을 잘 해야 한다. 너무 지나치게 같은 톤으로 소리 높게 질러대는 식의 강의는 식상하다. 너무 낮은 톤으로 시종일관 유지해도 수강자들이 잠이 온다. 중요하지 않는 부분에서는 조금 톤을 낮췄다가 포인트가 중요하다싶으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중점과 비중점이 뚜렷해진다. 강약조절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절주이다. 영어로 말하면 리듬이다. 도올은 이 면에서도 뛰어나다. 총적으로 도올은 강의를 연예인이 연기하듯 재미있게 해서 청중이 많다.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팬이 많다. 그 후 그는 KBS, MBC,SBS 지상파 방송 삼사에서 모두 강의했고 동양전통문화인 유∙불∙도를 모두 다 강의했다. 내가 시청한 강의만 120회 정도는 된다. 나는 그의 강의를 좋아하게 되니 자연적으로 그의 저서를 읽기를 좋아했다. 모두 40여권의 저작이 있는데 나는 모조리 사서 읽었다. 그래서 나도 아는 지식이 매우 많게 되었다. 내가 도올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풍부한 지식과 재미있는 강의만은 아니다. 그가 나를 매료시킨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그의 배포가 크고 배짱이 두둑한 것이다. 나는 그의 배짱을 두 가지로 나눠 말하고 싶다. 하나는 교수를 그만 두는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기독교를 향해 독설을 날린 것이다. 도올은 1982년 하버드를 졸업하고 모교인 고려대학교 철학과 부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중국전통 두루마기를 휘날려 눈길을 끌었다. 수강자는 보통 수백 명이었다. 인기가 좋았다. 그토록 잘나가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교수를 때려치운다. 당시로서는 교수를 그만두는 일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교수를 그만두더니 50넘은 나이에 한의학을 전공하여 한의원을 개원했다. 그의 배움의 욕망은 끝이 없다. 노력이 기가 막히다. 이런 그의 노력이 나를 감동시켰다. 도올(檮兀)이란 호는 매우 둔하다는 뜻이다. 그가 이 호를 지은 까닭은 스스로 머리가 둔하기 때문이란다. 머리가 둔하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엇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나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액면 그대로 넘어갈 수밖에. 어느 나라든지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이 있다. 한국에서의 성역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다.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불교는 뒷심이 없어 가장 글발이 있는 조계종 총무원장도 일개 평검사한테 조져 대는데 비해 한국 기독교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다. 왜일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의 믿는 구석은 바로 미제국주의다. 도올 다운 표현이다. 요한복음 강해란 책이 출간되자 기독교계에서 말이 많았다. 도올은 뒷공론으로 나를 헐뜯지 말고 학문적 논쟁을 하려면 TV공개 토론하자고 기독교계에 선전포고를 했다. 뒷공론이 심했던 기독교계는 어찌된 영문인지? 응전하지 않고 조용해졌다. 필자가 보기에도 한국 기독교는 문제가 많다. 기독교 삼대 정신인 박애, 자유, 평등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기복신앙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기독교 영향을 받은 연변조선족사회 기독교신자들도 이상해졌다. 예를 들어 10년 전 한국비자발급이 어려울 시절에 여러 차례 비자가 불허되었다가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헌금 50위안 냈더니 비자가 덜컥 나왔다는 것이다. 이 인과관계가 성립된다면 예수는 인류의 구세주가 아니라 심양영사관 영사인 셈이다. 도올은 이와 같은 한국기독교가 잘못 나아가고 있는 폐단에 독설을 날리고 기독교의 배타성, 오만성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도올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쉽게 말하자면 뜻이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혈혈단신으로 사상가답게 비판한다.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마음대로 씹어도 괜찮지만 기독교는 함부로 씹으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있다. 이러한 살벌한 사회정서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정신은 실로 대단한 용기다. 한 사람이 잘 나가면 사회적으로 씹히기 마련이다. 도올도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무척 많이 씹혔다. 그러나 도올은 그 어떤 공격에도 꿈쩍 않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간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올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즉 한국학계 분위기는 공자 왈, 맹자 왈은 동양철학 전공자들의 전유물이고 칸트를 말하려면 독일에 가서 철학을 배운 자만의 소유이고 등등 지식인들의 ‘울타리 의식’이 굉장히 강하다. 이런 닫힌 분위기에서 도올은 어려운 학문을 저서와 TV강의를 통해 대중화 했다는 것은 굉장한 하나의 혁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나는 일본어 전공자로서 이른바 문∙사∙철이라고 하는 인문학에 대해 매우 취약했었는데 도올을 통해 굉장히 많은 지식을 섭렵하게 되었고 지금은 역사문화이야기 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도올은 나에게 있어서 우리민족 중에서 살아 있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를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나의 글을 예리하다고 평가하는데 알게 모르게 아마 도올의 스타일을 닮은 것 같다.
357    일부 한국방송들이 탈북자 '애송이'를 잘못 키웠다 댓글:  조회:1894  추천:5  2019-08-30
한국방송들이 탈북자 ‘애송이’를 잘못 키웠다 강을 건너고 뗏목 버리는 탈북자들 요즘 탈북자인 한송이인지 두송이인지 하는 한국방송들에 출연해 꼴깝 떠는 ‘애송이’가 아프리카방송에서 조선족을 ‘쓰레기’, ‘거지’라는 저질스런 막말을 퍼부어 조선족사회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한송이란 탈북자는 갓 약관을 벗은 ‘애송이’다 ‘애송이’이기 때문에 세상에 철들지 못해 그렇거니 하고 지나칠 수도 있겠으나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들끓는 가마솥처럼 조선족사회가 부글거리는 이유가 따로 있다. 탈북자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그 이듬해인 1995년부터인데 그때가 고난의 행군이 시작이다. 초기 탈북은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은 두만강유역에서 발생했다. 중국 측 화룡시와 용정시 강변 조선족마을에 왔던 것이다. 당시 탈북자들이 건너온 가장 큰 이유는 배고파서였다. 조선족마을들에서 같은 민족이라 불쌍해서 밥을 지어주면 정신없이 먹는데 난생 밥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 같았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에 들어선 이래 백성들이 배고품에 심하게 시달려 있었다. 연변에 친척 있는 북한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음식을 정신없이 많이 먹어서 연변에는 유행어가 하나 생겨났다. 많이 먹는 사람보고 ‘너 북에서 왔나?’라고 비웃는 것이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탈북자가 늘어나자 언제 들이 닥칠지 몰라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끔 조선족마을 아줌마들이 밥을 미리 푸짐하게 지어놓는 사례도 한둘이 아니었다. 인간세상이란 사람이 늘면 그 가운데는 못 마땅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배를 두드려가며 배 불리 먹었으면 고마움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고 밥을 먹으면서 여기저기 무슨 물건이 있나 살펴보고는 다음번에 와서는 주인이 없는 틈을 타 도둑질해간다. ‘얼마나 배고프고 가난하면 저럴까!’ 배신감이 들지만 처음에는 조선족마을들에서 이렇게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도둑질이 나날이 늘자 따라서 불만이 늘기 마련이었다. ‘ 배은망덕’ 길러준 개에게 발뒤꿈치 물린 기분이다. 그렇지만 찾아오면 여전히 밥을 주었고 옷을 주었고 집에 있는 대로 먹거리를 챙겨주었다. 마음씨 착한 조선족마을 아줌마들의 ‘죄’라면 같은 한 핏줄을 물고 난 동족인 것이 ‘죄’였다. 한편 두만강을 사이 두고 자리 잡은 연변조선족마을 사람들은 절대다수가 이북 출신이기 때문에 탈북자들이 아무리 못 마땅해도 도와주는 것을 마치 본분으로 여겨왔다. 탈북자들의 배은망덕은 그 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다수 탈북자들이 일단 중국에 오면 일차적으로 발을 딛는 곳은 연변이다. 만약 연변조선족이 아니면 그들이 발을 못 붙인다. 발을 붙인다는 것은 연변조선족들이 그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는 뜻이다. 연변조선족들이 탈북자를 불쌍해서 거두다가 일자리도 얻게 하고 처녀의 경우 자기 조카나 지인의 아들에게 소개해 결혼시키는 경우(중국과 북한은 국제결혼이 안 돼 불법으로 살고 있음)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이유가 무엇이든 모두 떠나서 어찌되었든 탈북자들이 일차적으로 연변조선족 덕분에 배부르게 먹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탈북자들이 배고품을 해결하고 나니 슬슬 다른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중후반에 중국에 온 탈북자들은 개별적으로 고위급을 제외하고는 중국에서 발붙일 생각에 골몰하였다면 2000년대 들어 탈북자들은 중국이 목적지가 아니라 중국을 경유지로 삼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한국에 가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쉽게 말하자면 탈북자들은 중국조선족을 이용하는 수단으로 여겼을 뿐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짓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한송이란 ‘애송이’가 말하는 조선족이 신고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웬만해선 조선족이 탈북자를 신고하지 않는데 탈북자가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를 때 참다가 도가 지나치면 신고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듯 자신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조선족을 신고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말 ‘애송이’의 철없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싶다.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조선족의 도움에 의해 잘 지내다가 한국에 갈 때면 경제상 함께 지내던 조선족들의 도움을 받는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하나원에서 교육 받고 안치금 받고 집도 배정받으면 한편으로 중국에 두고 온 자녀를 한국에 데려올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족 애 아빠도 함께 한국에 데려오는 수속을 밟는다. 그런데 젊은 탈북여성들이 한국에서 수개월 혹은 1~2년 지내다 보면 중국조선족남편이 몹시 촌스러워 보이고 매너가 좋은 한국남자에게 반해 조선족남편을 헌 신발 버리듯 버리는 작전을 벌인다. 필자가 10년 전 직접 상담한 사례를 여기서 소개하는데 독자들은 탈북여성에게 치를 떨 것이다. 즉 탈북여성이 초청해 입국한 조선족남편이 한국에 온 지 3일 만에 탈북여자가 경찰에 ‘우리는 위장결혼이요.’라고 신고했다. 당시 한국사법부문에서 위장결혼이라면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무조건 강제 추방하던 시절이다. 아니 둘 사이 애까지 있는데 위장결혼이라니! 수년 전 경기도에서 연속 두 차례 조선족남자가 탈북여성을 때려죽인 사건이 있었다. 이유가 어떻든 살인행위를 정당화 할 수 없고 정당화해서도 안 되지만 얼마나 열 받았으면 그런 최악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탈북여성들이 중국에 있을 때는 한심한 을이었다가 한국에 오면 한심한 갑이 되어 조선족남자에게 개무시하고 갑질한다. 이쯤 되면 비인간적인 배은망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탈북여성들이 조선족의 신세를 지고는 한국에 오면 강을 건넜으니 뗏목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주인의 발꿈치를 물어 뜯는 비인간이 되는 것이다. 얼마 전 탈북 모자가 아사한 사건이 있었다. ‘애송이’를 비롯해 이혼하고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남자 때문인 것처럼 떠들고 있는데 제발 이런 사건은 내놓고 떠들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반성했으면 한다. 현재 한국에 85만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 필자는 지금까지 굶어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취직하는데 있어서 탈북자라는 신분을 속이고 연변에서 왔다고 조선족행세를 하는 경우가 있다. 주인이 탈북자 채용을 꺼려서 속인다고 한다. 필자는 한국 땅에서 조선족이 취직할 때 ‘나는 북한에서 온 탈북자요.’라고 거짓 신분을 말하는 사례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쪽이 취직에 유리한가? 편지의 문안처럼 너무나도 뻔한 일이다. ‘애송이’의 말대로 조선족이 쓰레기, 거지라면 왜 그 위대하신 탈북자들이 ‘쓰레기’나 ‘거지’같은 조선족 신분으로 위장할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볼품없는 일개 탈북 ‘애송이’가 이토록 날뛰고 있는 데는 한국방송들이 책임이 있다고 본다. 스무 살도 안 된 ‘애송이’를 여기저기 방송에서 스타처럼 키워놓아 눈에 뵈는 게 없이 설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방송들에서 ‘애송이’의 방송출연을 금지시키기를 청원한다. 물론 이 글에서 든 사례들은 개별 탈북자의 일이지 전체 탈북자를 매도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여느 사회도 마찬가지이듯이 다수 탈북자들은 착실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성품이나 인품도 좋다. 조선족사회와도 우호적인 탈북자가 많다. 필자가 주최한 ‘多가치포럼’ 토론회도 탈북여성을 패널로 초청한 사례도 있다. 조선족사회도 만찬가지로 탈북여성을 인신매매하거나 자기 요구에 거역하면 사지로 몬 사례도 있다. 하지만 한 사회를 향해 상욕을 퍼 붙는 행위는 자제해야 한다. 만약 ‘쓰레기’ ‘거지’라고 막말한다면 조선족이 탈북자들을 향해 할 수 있는 근거가 차고 넘치는데 거꾸로 탈북자가 조선족을 향해 이런 막말로 욕을 해대니 정말 어처구니없어 그냥 넘어가려고 생각하다가 기왕 일이 불거졌으니 한국방송들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356    조선족, 이상한 한국 때리기 댓글:  조회:2905  추천:15  2019-07-22
조선족, 이상한 한국 때리기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조선족이 남조선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토록 너무도 굳게 닫쳐 있어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양국의 문호가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빠금히 열리더니 1992년 양국 수교를 통해 많은 조선족이 한국나들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2007년 한국정부의 방문취업비자(H-2) 실시에 의해 한국에 온 조선족이 30여 만으로 증가되었다. 이 30여 만에 이르는 조선족은 노무일군으로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사례만 보아도 한국에서 번 돈을 중국에 송금한 액수가 연간 자치주 재정수입 2배가 넘는다는 통계가 있었다. 혹자는 3배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확한 수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아니었다면? 이런 질문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문제일 것이다. 2008년부터 시행된 재외동포비자(F-4)에 의해 한국에 온 조선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더니 지금은 국적취득자까지 포함해서 85만이 된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200만이 안 되는 조선족 중에 85만이 한국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해볼 문제이다. 중국조선족은 한국에 떠날 때는 모두 ‘몇 년간 돈을 벌어 고향 중국에 돌아가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그 굳센 다짐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빛이 바래더니 급기야 한국에서 뿌리박을 태세이다. 나의 조카는 2008년 한국에 금방 와서 하는 소리가 ‘5년(H-2만기가 5년)이 되면 무조건 중국에 간다. 그저 가는 것이 아니라 여권을 쫙쫙 찢어버리고 갈 것이다.’ 뜻인즉 죽었다 깨도 다시 한국에 오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 강철 같은 의지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5년이 지날 즘에 나보고 한국에 장기체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묻더니 후에 영주권을 취득했고 지금은 국적신청까지 해놓은 상태이다. 한국에 온 조선족 다수가 나의 조카 같은 패턴이기 때문에 85만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장기체류하려고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이미 수년 전에 잡지에 기고했다. 혹자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하층민 대우를 받으며 머물 이유가 없지 않느냐? 고 떠들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무시당하고 차별 받아도 한국이 좋으니까. 과거 돈벌이에만 치중하던 재한조선족사회는 이제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접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이 좋다는 것은 삶의 질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주 웃기는 일이 있다. 한국이 좋아서 살면서도 불구하고 입으로 한국을 욕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적지 않다. 10년 전 연길공항 흡연실에서 겪은 일인데 담배 태우는 조선족 중 반 넘는 사람이 한국나들이 경험자들이다. 이들은 거의 똑 같이 한국을 욕한다. 담배 끊은 지가 5년이 넘어 연길공한 흡연실에 들르지 못해 요즘은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으나 그 전에 내가 받은 인상은 ‘연길공항 흡연실은 한국을 욕하는 성토장’이었다. 조선족 밀집지역인 가리봉이나 대림동 음식점을 비롯해 조선족이 모이는 곳은 흔히 한국을 욕하는 성토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욕은 자유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욕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누구를 욕한다는 것은 미움의 발로인데 남을 미워하려면 그만큼 나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나는 이면에서 채널A 프로에 출연하는 탈북자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욕하는 사람들은 진정 한국시민으로 살아갈 자세가 안 된 사람들이다. 시민으로 살아갈 자세가 안 되면 의무감 책임감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쓰레기처리, 노상방뇨, 무단횡단, 시끌벅적 떠들기, 길에서 가래침 뱉기 등등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는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조선족이 무시당하는 데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크게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돈을 벌며 살아가는 과정에 스트레스가 심해 한국을 욕할 수는 있다. 이주민 생활이 만만치 않고 그만큼 힘들기 때문에,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다. 떠나기는 싫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을 욕한다면 삶이 괴롭다. 조선족 한국 때리기는 한국에서 장기체류하는 조선족이 있고 중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때리는 현상이 있다. 전자는 그나마 이해가 가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정말 불가사의다. 중국조선족엘리트에 속하는 일부 조선족을 만나면 한국의 이것도 저것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스스럼없이 비난하고 매도한다. 최근 몇 년래 조선족학자 중에 한국에 교환교수로 오거나 연구과제가 있어 한국에서 6개월 이상 체류하는 조선족엘리트들이 있다. 이분들 중에 중국관련 혹은 중국조선족 관련 주제로 세미나에 발제자나 토론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혹은 중국에서 초청받아 한국에 와서 세미나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학자는 공개석상에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경상도와 전라도는 쪼개지고, 여당과 야당이 맞서 서로 무조건 상대를 부정하는 한국정치가 엉망이다.” 그래서 “한국은 문제가 많은 국가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식으로 공격적으로 비난한다. 남북분단은 조선족학자가 거론하지 않아도 민족의 최대 아픔으로 남아 있고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이다. 만약 조선족학자 신분으로 남북분단을 거론하려면 한반도통일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옳지 않을까?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갈등도 어느 나라든지 모두 지역갈등이 있는 것처럼 그런 맥락에서 볼 문제이지 조선족학자가 떠들 일이 아니고 떠들어서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다. 중국도 땅덩이가 하도 커서 지역감정이 심각한 나라이다. 북경사람은 정치중심의 시민이라는 우월의식이 강하고, 상해사람은 중국 내 모든 타지방사람을 썅쌰런(鄕下人, 우리말로 촌놈)이라 비하하고, 남방 사람은 북방사람을 깔보고, 비동북지역 사람은 동북사람을 업신여기고, 하남성 사람은 타지방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하고 있다. 한국정치에 있어서 여당과 야당 문제는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관계 그런 차원이 아니라 조금 비약적인 논리이기는 하지만 마치 1949년 전 공산당과 국민당이 도저히 공존 불가능했던 것처럼 문제가 심각하다. 그렇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국제적으로 부러워하는 정치로 발전했고 여야대치국면도 대한민국발전에 발목을 잡을 때도 있지만 큰 틀에서는 전반 사회시스템이 그럭저럭 돌아가게끔 되어 있다. 때문에 조선족학자 신분으로 깊은 관찰이 없이 함부로 한국정치에 ‘감 놔라, 밤 놔라’ 떠들 일이 아니다. 한국의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비공개석상에서는 얼마든지 담론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개석상에서 이런 문제를 거론한다면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된다. 나의 뒷좌석에 앉은 한국인 왈, “조선족학자들이 이상하다. 본국에서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면서 왜 한국을 비난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저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무슨 기여를 했기에 저러지?” 조선족학자나 엘리트들이 한국 때리기는 고국에 대한 충정? 사랑? 내가 보기에는 다 아니다. 이분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우월성의 발로인 것 같다. 물론 대한민국은 문제가 많은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다. 미국은? 이상한 대통령 때문에 미국 내도 그렇거니와 국제적으로도 가장 시끄러운 시기를 맞은 것 같다. 유럽나라들도 일본도 만찬가지. 세상에 문제가 없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도 마치 투명한 진공 속에서 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유치한 행위가 아닐까! 거창하게 할아버지가 살던 고국이라는 명분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수가 85만이라면 중국에서 아무리 잘 나간다 해도 자신의 형제자매 혹은 조카, 혹은 사촌, 혹은 처가직계가 한국에 오지 않은 조선족엘리트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피붙이’가 먹고살아가는 나라를 비난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가 아닐까! 내가 어릴 적에 해박한 마을 유지한테서 배운 말이 있다. “사람이 똑똑하다는 기준이 뭔지 알아? 앉을 자리 설 자리 아는 자가 똑똑한 사람이야.”
355    조선 소설『벗』을 읽고서 댓글:  조회:3644  추천:0  2018-06-06
조선 소설『벗』을 읽고서 김정룡 ‘4.27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한사회에서는 ‘북한열풍’이 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사례가 많지만 여기서는 조선책 이야기를 해보련다. 최근 대한민국 서점가에서는 조선 작가 백남룡이 지은『벗』과『60년 후』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때마침 내가 3년차 다니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독서모임에서도 6월 11일에 이 두 권을 지정토론 책으로 선정하였기에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사실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 해 60~70여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으나 소설은 단 한 권 김별아의『미실』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2011년 내가『황제와 소녀』라는 장편역사소설을 쓰느라 참고서로 읽었던 것이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지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시간만 낭비할 뿐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헌데 조선 작가 백남룡의 책을 읽고 나서 진정한 소설이 무엇인지?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무엇인지?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이 나이 되어서 이제야 깨우치게 되었다. 『벗』은 240페이지 되는 분량인데 조선에서는 중편소설이라 하고 남한에서는 장편소설이라 말한다. 책의 분량이 적은 만큼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주인공 정진우 판사와 그의 아내 한은옥, 이혼소송을 제기한 채순희와 남편 리석춘 및 철부지 아들 호남, 리석춘의 직장 선배 연공과 그의 교사 아내, 도 공업기술위원회 채림 위원장, 리석춘의 직장 선배 설비관리원 아바이 등이다. 『벗』은 소설을 구성하는 줄거리는 채순희의 이혼소송이고 이 사건을 맡은 판사 정진우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다룬 것이다. 스토리가 간단하다. 소설을 보는 이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다. 스토리가 너무 간단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하고 짜릿한 사건전개가 없기 때문에 혹자는 정말 무미건조해서 재미없다고 말할 수 있고, 또 혹자는『벗』이야말로 진정한 소설의 정수를 보여주었다고 굉장히 후한 점수를 매길 수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일단 짚고 넘어가겠다. 현대사회에서 이혼소송이라 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이혼사유를 떠올릴 수 있다. 외도라고 부르는 어느 일방의 불륜의 삼각관계, 가정폭력, 주풍, 경제문제, 고부갈등, 성격차이 등등이다. 이혼사유 중에 가장 애매한 것이 성격차이이다. 그래서 남한의 어느 판사는 “연예인들의 이혼사유 중에 성격차이를 내세우는 사례가 많지만 겉으로 주장하는 핑계일 뿐이고 실제로는 어느 일방의 불륜이거나 말(공개) 못할 사연을 뭉뚱그려 성격차이라고 말한다.”고 꼬집었다. 『벗』은 채순희와 리석춘 둘 다 외도가 없다. 리석춘은 일반 선반공이고 채순희는 선반공으로부터 출발하여 노래재주가 뛰어나 도 문예선전대에 전근한 직업가수이지만 불륜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혼사유에서 가장 많이 적용되는 외도문제는 없었다는 얘기이다. 남편인 리석춘이 아내를 팼다거나 심지어 가벼운 손찌검한 일도 없고 술을 마시고 아내를 괴롭히는 못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또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생계가 어려워 이혼할 사유가 되는 일 없이 너무 열심히 사업에 종사하여 오히려 탈이라면 탈이었다. 또한 소설에서는 시어머니가 등장하지 않아 한국시리즈 드라마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부갈등을 비롯해 시댁식구들과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그러한 갈등은 아예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저것도 이혼사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채순희로 하여금 이혼소송을 제기하게 만들었을까? 성격차이다. 남한에서 이혼사유로 애매한 성격차이가 조선에서는 진정한 성격차이가 무엇인지를 이 소설이 똑똑히 보여준다. 채순희는 선반공 노동자 출신이며 남편인 리석춘한테서 기술을 배웠다. 사부와 학도 관계로부터 연인이 되었고 결혼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노래에 재주가 있어 직장 문예선전대 가수로 활동하다가 실력이 좋아 도 문예선전대에 전근한다. 채순희는 예쁘기도 하고 진취심도 강하고 승벽심도 억세다. 아내에 비해 남편은 가정적이면서도 직장 일에 충실하지만 젊은 나이에 대학 공부 할 궁리도 하지 않고 앉은 석동이처럼 제자리걸음으로 아주 보수적으로 살아간다. 물론 남편이 다축라사 가공기 신제품을 발명하여 도 공업기술위원회로부터 인정받았으나 5년간 죽을 고생으로 맺은 열매의 보상은 고작 꽃병 하나였다. 채순희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하고 소송을 제기한다. 남편은 명예에만 만족하고 별로 불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아내가 바가지 긁는 것을 싫어한다. 결국 이혼에 동의한다. 백년언약을 맺고 결혼하지만 살다보면 갈등이 생기고 도를 넘으면 헤어질 수 있다. 문제는 아이이다. 아들 호남이는 부모의 다툼으로 큰 상처를 받았다. 정진우 판사는 부부 일방이 어느 쪽도 이혼사유가 될 만한 사건이 없기에 앞뒤 뛰어다니며 열심히 조사에 나선다. 아내도 만나보고 남편도 만나고 남편 직장 선배들도 만나고 도 기술위원회 간부도 만나 충분히 들어보고 심지어 아들 호남이까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진우 판사는 이혼소송을 제기한 채순희의 벗도 되어주고 남편 리석춘의 벗도 되어주고 심지어 아들 호남이의 벗까지 되어준다. 그러고 나서 이혼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설득하여 끝내 헤어지지 않도록 결론을 내린다. 채순의 이혼소송을 없던 일로 만들기까지 정진우 판사의 피타는 노력이 있었다. 중국에서 공산당간부는 군중 속에 들어가 군중과 함께 ‘숨 쉬는 사업 작풍(作風)’이 조선에도 있었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충분히 실감했다. 정진우 판사는 리석춘의 공장에 수 없이 찾아갔고 또 리석춘의 맘을 돌리려고 추운 날씨에 강에 들어가 모래를 채취해 리석춘을 돕는다. 리석춘은 그 모래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판사의 성의를 봐서 잘 쓰겠다고 사의 표하면서 진정 마음으로 다가가 그의 말이라면 껌뻑 죽을 정도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판사의 설득에 의해 5년제 대학에 신청하고, 일만 일이라던 생활패턴을 바꿔 아내 채순희 공연도 관람하는 등 여러모로 아내에게 신경을 쓰는 ‘좋은 남편’으로 바뀐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채순희가 그토록 바랐던 희망사항이었고 이것을 판사가 나서서 실천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부모의 불화 때문에 불행해진 아들 호남에게 있어서 이혼을 부추기는 채림은 눈엣가시처럼 미웠던데 비해 이혼불가를 선언하고 심지어 호남이를 자기네 집에 데려다 밥 먹이고 재우고 하는 판사야말로 진정한 벗이었다. 소설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조선사회에 대한 재인식이다. 조선사회를 흔히 관료주의가 심각해서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갑질이나 하고 개개인의 고충을 외면하고 거들먹거리며 피도 눈물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기실 조선의 판사가 남한의 판사보다 인정미가 백배 천배 낫다. 진짜 사람냄새가 나는 곳이 조선 사회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남한사회는 현재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민들은 공동체의식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데 비해 조선은 진정한 공동체란 무엇인지를 이 소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아울러 정의로움이란 공정함이란 무엇인지? 라는 정의의 문제로까지 파고들어 교육가치도 충분히 지니고 있어 정말 명작이다. 1980년대 문화적으로 세련된 프랑스 파리에서 우리글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남한 소설이 아니고 조선 소설이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백남룡의 작가의『벗』이었다고 한다. 왜 이 소설이 파리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나는 알 것 같다. 중국과 한반도는 예로부터 문학작품에 선악구도를 분명히 하고 권선징악이 주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선악구도가 아니면 문학이 되지 않는 식의 교육환경에서 자라왔고 작품 활동을 해왔던 것이다. 일본문학은 선악구도로 스토리를 만들고 작품을 전개하지 않는다. 가령 선악구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입장에서는 그것을 선악구도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羅生門』하면 우리는 선악의 시각으로 읽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만약 내가 그 작품의 주인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는 것이 일본문학의 특징이다. 일본문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굵직하게 사람을 긴장시키거나 짜릿해서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가슴이 뛰는 스토리 구성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잔잔한 스토리에 섬세한 묘사로 작품을 짓는다. 이것이 일본문학이 노벨문학상수상자를 많이 배출하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남룡의『벗』이 바로 일본문학처럼 잔잔한 스토리에 선악구도가 없는 명작이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물론 한 권의 소설을 갖고 조선을 굉장히 이상적인 사회라고 평가한다면 무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울러 조선사회는 이 소설이 발표된 이후로 어두운 면이 많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소설을 읽은 독후감이기 때문에 조선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일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뭐니 뭐니 해도 소설을 읽는 묘미와 즐거움은 언어서술이 아니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빠져든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작가의 수준 높은 뛰어난 언어서술이다. 8년 전 남한 역사소설 김별아의『미실』을 읽고 나서 언어가 굉장히 파격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백남룡 작가의 언어특징은 섬세하면서도 파격적이고 또 멋진 언어서술이라고 나는 본다. 여기서 그의 멋진 서술 한 대목을 감상해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겠다. 창밖에서는 봄날의 어스름이 깃을 펴기 시작했다. 잎이 핀 가로수의 잔가지가 누구를 불러내고 싶은 듯 창문을 조심스레 건드려본다. 봄바람은 잠들고 싶지 않는 모양이다. 대륙의 먼먼 산발과 골짜기와 들판을 달려오고도 피로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바람은 지쳐서 집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밤이 되고 싸늘한 봄추위에 몸이 얼어드니 그제야 거처할 데가 생각난 것 같다. 바람한테는 보금자리가 없다. 어데서 누구한테서 무슨 일 때문에 쫓겨났는지 배반했는지 스스로 ‘가정’을 버렸는지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영원히 불행한 몸이다. 광막한 공간을 울며 정처 없이 떠다니고 나무숲이나 어느 강가에서 찬비를 맞으며 떨고 눈보라에 꽁꽁 언다. 세월을 두고 쌓이는 괴로움과 고통에 성질이 나서 해 비치는 따스하고 조용한 날에도 아무에게나 푸접없이 때로는 사납게 달려든다. 교만하고 질투하고 성내고 고함지르고 마구 잡아 흔든다. 그래서 짝을 못 가지고 불행하게 산다. 바람은 우의와 애정이 꽃처럼 아늑한 집안이 그리운 듯 나뭇가지로 창문을 두드리며 졸라댄다. 밤은 깊어 간다.
354    인형의 유래 댓글:  조회:3841  추천:0  2017-12-04
인형의 유래 “인형을 처음 만든 자는 대가 끊길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乎!)” 옛날 종법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대를 잇는 것이다(傳種接代). 만약 대를 잇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대가 끊긴다면 이는 곧 불효 중 최대의 불효요. 불효는 죄악이니 대가 끊긴다는 것은 죄악 중의 무거운 죄악이다. 그런데 ‘대가 끊길 것이다’고 욕을 퍼부으니 악담도 이와 같이 무시무시한 악담이 더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이 무시무시한 악담의 주인공이 길거리에 나선 남루한 옷차림에 봉두난발, 입이 거칠고 상스러운 파부(婆婦)일 것으로 짐작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인즉슨 위대한 성인 공자님이라는 것이다. 도덕군자의 상징인 공자는 왜 이와 같은 악담을 퍼부었을까?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상나라가 망한 이유 중 주요 이유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민심, 민심은 천심. 민심을 얻은 자는 이기고 민심을 잃은 자는 망한다. 많이 듣던 얘기이다. 상나라가 잃은 민심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 상나라는 어떻게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을까? 증거는? 그 주요 증거가 바로 순장제도와 인간제물이었다. 순장제도란 왕이나 귀족 더 나아가서 돈 있고 세력 있는 권세가들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무리를 산 채로 무덤에 파묻는 일종 관습이다. 순장의 숫자에 따라 부를 가늠하는 척도로 삼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을 산 채로 파묻으니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다음 상나라 때 사회 가장 큰 특징은 곧 모든 일에 길흉화복을 점치는 제사의식이었다. 제사의식에 필요한 것은 귀신에게 바치는 음식인데 주로 동물을 제물로 사용했다. 제물로는 양이 많이 사용(소뢰:小牢)되었고 소도 사용했다(대뢰:大牢). 물론 이 두 가지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개도 돼지도 염소도 사슴도 말도 있었다. 이런 동물을 짐승이라 하는데 집에서 짐승을 기를 때는 ‘축(畜)’이라 부르고 제물로 도살할 때는 ‘생(牲)’이라 한다. 사람을 ‘축생’이라 욕하는 관습이 여기서 생겨났던 것이다. 짐승을 도살하여 제물로 쓰는 것은 세계역사에서 보편적인 일이었다. 이와 좀 다르게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사례도 있었다. 상나라인이 바로 사람을 제물로 사용했다. 순장의 숫자가 부를 가늠하는 척도였던 것처럼 사람을 제물로 사용하는 숫자의 다소에 따라 부를 매기기도 했다. 노예와 평민을 제물로 사용한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개별적으로 귀족을 제물로 삼은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귀족 한 사람의 값이 노예나 평민 1만 명에 해당되었다고 하니 왕이나 굉장한 부자만 귀족을 제물로 삼을 수 있었다. 산 사람을 잡아서 제물로 삼았으니 이것도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상나라인은 이렇듯 순장과 인간제물을 통해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고 결국 주나라인에게 천하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천하를 얻은 주나라인은 상나라인의 교훈을 아로새기고 그들과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였다. 즉 순장제도와 인간제물을 폐지하였다. 그런데 수백수천 년의 관습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을까? 된 것도 안 된 것도 있었다. 된 것은 주나라 때 인간제물 관습이 기본상 사라졌다. 이에 비해 순장은 그 생명력이 매우 질겨 청나라 때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나라 때부터 제도로서의 순장은 사라지고 순장에 대해 사회적인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순장은 기어코 하고 싶은데 산 사람을 파묻자니 사회적인 비난을 받아야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냥 손 놓고 포기하자니 아쉽고 맘에 걸린다. 평생 후회할 것 같다. 밀고 나아가는 것과 포기하는 것 사이 절충대안이 없을까? 대책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대책이 바로 사람 같은 형상 즉 인형을 만들어 사자의 무덤에 파묻는 것이었다. 일종 대리만족의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야 맘이 편했다. 진시황의 병마용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쉽게 답이 얻어진다. 주나라 때 순장에 산 사람을 사용하는 대신 인형을 사용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궁여지책인 이마저도 거품 물고 반대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곧 위대한 성인 공자님이었다. BC 641년 송나라 양공이 조(曹), 주(邾) 두 나라와 동맹을 맺고 정(鄫)의 군주를 죽여 토지신에게 바칠 제물로 쓰고자 했다. 이때 자어(子魚)라는 ‘군법무관’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큰 짐승으로 작은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사람을 사용하다니요! 제사는 손님 접대와 같은데 어찌 인육을 먹겠습니까? 그렇게 세상일에 반하는 일을 하시면 결말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자어의 반대는 성공하지 못해서 그 운수 나쁜 군주는 끝내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순장에 반대한 제나라 진자항(陣子亢)은 자기 뜻을 관철시켰다. 그의 형인 진자거(陣子車)가 죽었을 때 형수와 집사는 산 사람을 순장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진자거가 다른 나라에서 보살핌도 잘 못 받고 병사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진자항은 즉시 그것이 예법에 맞지 않는 데다 자기 형을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두 사람이라고 반박했다. 진자거의 부인과 집사는 당연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자항은 왜 그토록 반대하였을까? 진자항은 공자의 광팬이었다. 공자는 순장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 대신 인형을 사용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순장용 인형에는 흙인형과 나무인형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물건을 공자는 극도로 혐오해서 심지어 “인형을 처음 만든 자는 대가 끊길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乎!)”라고까지 했다. 흙인형과 나무인형을 발명한 것은 본래 산 사람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을 산 채로 묻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진보적인 방식이었는데 공자는 왜 그런 저주를 했을까? 공자는 근본적으로 순장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보기에 순장은 인에 어긋났고 예가 아니었다. 그래서 산 사람을 쓰든 죽은 사람을 쓰든 안 되는 일이었고 또한 진짜 사람을 쓰든 가짜 사람을 쓰든 역시 안 되는 일이었다. 인형으로 순장을 하더라도 그것은 순장의 합리성과 합법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거짓으로 진실을 어지럽히는 짝퉁 순장인 셈이었다. 그런 식으로 빌미를 남기면 언제든 진짜 순장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철저히 제재해야만 했다. 확실히 그것은 소박하고 원시적인 인도주의였다. 바로 이것이 나중에 인(仁)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인의 본래 의미는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이다. 중국 최초 인본주의는 주나라 때 이렇게 탄생되었던 것이다.
353    여자는 기쁘게 해주는 사람 위해 화장한다 댓글:  조회:3979  추천:1  2017-11-26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두 자객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한다” 1. 역사상 최초로 자살한 자객, 서예 춘추시대 진영공(晉靈公)은 후세 진시황보다 인간적으로 더 악독하고 악랄하기 짝이 없는 폭군이었다. 얼마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면『좌전』『국어』『공양전』『여씨춘추』『사기』의「진세가」와「조세가」등 사서에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영공은 산해진미를 먹거나 백성의 소혈을 쥐어짜 궁궐을 꾸미는 데에만 열중했다. 이런 행위는 임금으로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다음 행위는 너무 끔찍해서 소름이 돋는다. 높은 누대에서 활로 탄알을 쏘아 사람을 맞히고 행인들이 그 탄알을 피해 허겁지겁 숨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기원전 607년 즉 노나라 선공(宣公) 2년의 어느 날 그는 곰발바닥이 설익었다는 이유로 요리사를 죽여서 키에 그 시체를 담아 밖에 버리게 했다. 진영공의 이 악랄한 행위는 정경(正卿: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직위)인 조순(趙盾)의 눈에 띄었다. 조순은 정의로운 관리였다. 진영공의 행위에 당연히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진영공의 앞에 선 조순은 눈엣가시였다. 횡행패도(橫行覇道)하려면 조순을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내놓고 광명정대하게 죽일 수가 없어 자객을 파견하여 없애기로 하였다.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암살하려 했으니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자객도 보통 자객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영공이 물색한 자객은 서예(鉏麑)였다. 서예가 조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동틀 무렵이었고 저택의 세 대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조정에 나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으므로 조순은 의관을 차려 입고 방 안에 단정히 앉아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자객이 왔는지는 당연히 몰랐으며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순의 모습이 하도 대바르고 있어 서예는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서예는 깊은 감동을 느끼고 내심 탄복했다고 한다. ‘홀로 있을 때도 정중함을 잃지 않다니 실로 백성들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로구나!’ 이런 사람을 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다. 실제 죽여야 할 사람은 조순이 아니라 진영공이라는 생각이 서예의 머리에 떠올랐다. 『중화사』저자 이중텐(易中天)은 당시 서예의 처지를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햄릿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아버지의 원혼을 본 이후로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곤경에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피살되었으며 그 범인은 자신의 숙부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숙부는 왕위가 탐이 났고 또 햄릿의 어머니의 미모에 반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 햄릿이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인은 승승장구하며 잘 살고 있는데 아버지는 지옥에서 갖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햄릿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 아들로서는 마땅히 복수의 검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신하로서 군주를 죽이는 것은 불가했다.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악으로 악을 응징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햄릿은 자살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책임의 방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구차하게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숙부인 왕을 죽이는 문제가 자신을 죽이는 문제로 번졌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그 유명한 햄릿의 대사가 탄생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서예도 마찬가지로 진퇴양난에 처했다. 명령에 따라야 했지만 충신을 죽일 수는 없었다. 나라의 동량을 죽이는 것은 불의였다. 그러나 군주의 명을 어기는 것은 불충이었다. 서예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는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홰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은 그는 역사상 최초의 ‘자살한 자객’이었다. 2.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자객, 예양 조씨 가문에서 조순보다 5대 아래인 조양자도 자객에게 암살당할 뻔 했다. 그 자객의 이름은 예양(豫讓)이었다. 예양은 춘추에서 전국시대에로 과도하는 시기의 인물이었다. 그는 晉나라의 대권을 손에 쥔 여섯 씨실(氏室) 중 하나였던 지백(知伯)의 부하였다. 지백은 천하다툼에서 조씨 가문 실세 조양자에게 살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양자는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지백의 두개골에 색칠하여 술 마시는 도구로 삼기까지 했다. 일설에 의하면 요강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이 일은 예양에게는 엄청난 치욕이었다. 예양은 자신의 주군을 위해 복수하기로 맘먹었다. 예양은 이름을 바꾸고 진양(陳陽)에 잠입한 뒤 노역형을 받은 범죄자로 변장해 궁 안에서 변소에 석회를 칠했다. 이때 석회를 바르는 흙손 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었다. 조양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단칼에 저 세상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늘은 조양자의 죽음을 원치 않았다. 막 볼일을 보러 걸어오던 조양자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매 같은 눈초리로 예양을 노려보았다. 예양은 꼼짝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자기가 지백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고 자백했다. 호위무사들이 포위한 채 검을 뽑아 들었을 때 갑자기 조양자가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 “이 자는 의로운 인물이다. 죽은 지백에게는 후손도 없는데 가신이 이렇게 복수를 하러 나서다니 보기 드문 일이로다!” 그러나 예양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제 본래 얼굴로 활개 치며 다니는 것은 당연히 힘들었다. 용모를 바꿔야 했다. 그래서 예양은 눈썹과 수염을 뽑고 몸에 반점을 가득 그려 넣은 뒤, 시험 삼아 거지를 흉내 내어 구걸을 나섰다. 아내조차 그를 몰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신기하기도 해라. 이 사람 목소리가 내 남편을 닮았네.” 이처럼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제야 예양은 조양자가 늘 다니는 길에 몸을 숨기고 습격할 준비를 취했다. 드디어 조양자의 수레가 정해진 길을 따라 다리를 건너왔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말이 놀라서 요동을 쳤다. 뭔가를 알아챈 조양자가 벌떡 일어났다. “예양이 분명하다.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예양은 다시 붙잡혔다. 이치대로라면 이번에는 다시 풀려날 가망이 없었다. 본래 예양은 복수를 위해 그토록 가시밭길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 예양이 고통스럽게 용모를 고칠 때 한 친구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말렸다. “이럴 필요가 뭐 있나? 자네 재주라면 투항해서 어렵지 않게 조씨에게 중용될 걸세. 그렇게 친해졌을 때 일을 도모하는 게 더 편하지 않겠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가? 자네가 이러는 건 기개는 있어보일지언정 너무 미련한 방법일세!” 예양은 웃으며 답했다. “자네가 말하는 방법은 확실히 가능성이 더 크긴 하지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좀 있다네. 만약 조씨가 정말 나를 가까이하고 신뢰한다면 내가 그를 죽이는 것은 옛 지기를 위해 새로운 지기에게 복수하고 예전 주공을 위해 지금 주공을 죽이는 꼴이 되지 않겠나. 지금 내 방법은 성공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만천하에 대의를 밝히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의 목적일세. 내가 어떻게 남의 밑에서 일하면서 그 사람의 머리를 취할 생각을 하겠는가!” 이런 ‘정의로운 뒷이야기’를 조양자가 반드시 알고 있었을 리는 없다. 이 순간 조양자는 예양 앞에 우뚝 서서 왕이 쓰는 ‘과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입을 열었다. “예양, 네가 왜 복수를 하려는지 과인이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는데 너는 과거에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적도 있지 않느냐? 지백이 범씨와 중항씨를 멸했을 때 너는 그들을 위해 복수를 하기는커녕 도리어 스스로 지백을 찾아가 주군으로 섬겼다. 똑같은 주군이건만 너는 왜 지백에게만 충성하고 범씨와 중항씨에게는 충성하지 않았느냐? 똑같은 원수이건만 너는 왜 과인만 미워하고 지백은 미워하지 않고서 죽을 둥 살 둥 그를 위해 복수를 하려고 하느냐?” 예양은 당당히 대답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오. 범씨와 중항씨를 위해 일할 때 그들은 나를 보통 사람으로 취급했으니 나도 당연히 보통사람처럼 보답했을 뿐이오. 그러나 지백은 나를 하늘 아래 가장 뛰어난 인물로 여겨주었소. 이에 나는 가장 뛰어난 인물처럼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조양자는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했다. “알겠네. 알겠어. 예양 선생, 자네는 지백에게 충성을 다했고 명예도 이루었네. 그리고 과인은 벌써 충분히 아량을 베푼 셈이니 이번에는 놓아주지 않겠네." 말을 마치고 그는 호위무사들에게 예양을 에워싸라고 명했다. 조양자는 이 존경할 만한 자객이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싸우다 죽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듯했다. 그것은 조양자가 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존경과 존중이었다. 그런데 예양은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자기가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혜로운 군주는 다른 사람의 뛰어남을 가리지 않고 충신은 절개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의리가 있다고 들었소. 오늘 나는 마땅히 엎드려 죽음을 기다려야 하지만 부디 내 청을 하나 들어주시오. 당신의 옷자락을 베어 소망을 이룬 셈 치게 도와주시오.” 뜻밖의 부탁이었지만 조양자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네. 그러면 검을 뽑게.” 예양은 검을 뽑아들고 뛰어들어 조양자의 옷을 베었다. 검을 휘두르면서 그는 울고 있었다. 하늘이시어, 마침내 지백의 은혜를 갚았나이다!“ 세 번 검을 휘두른 뒤 예양은 태연히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 일을 전해들은 천하의 인의지사들은 슬프게 울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군자는 예양처럼 고귀하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양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도 모두 동감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352    '뽀뽀 원조', 향토작가 김유정 댓글:  조회:4262  추천:5  2017-11-12
‘뽀뽀’ 원조, 향토작가 김유정 고층건물에 둘러싸인 콘크리트바닥을 밟고 매일 숨 막힐 듯 인파가 북적대는 서울에서 금전을 쫓는 돈벌레마냥 경쟁에 묻혀 사는 삶이 정말 심신이 고달프다. 지친 몸으로 퇴근하여 잠시나마 여유로움을 찾으려고 TV를 켜면 나랏돈을 도둑질하여 쌈짓돈처럼 썼다느니, 어느 정당은 내홍이 심하고 어느 정당은 쪼개지게 생겼고, 국민은 안중에 없고 지들 이권다툼에 혈안이라는 등등 정치판은 온통 실망스런 뉴스로 가득차고, 보험금 노려 가족을 살해하고, 옆집 미성년 여자애를 납치하여 강간하고 죽이고 등등 온통 살벌하다 못해 끔찍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 전반 뉴스프로그램은 부정적인 소식으로 도배한다. 드라마는 출생비밀이 단골로 등장하고 재벌가문은 가족끼리 물고 뜯고 직장에서나 친구끼리 서로 해꼬지하고, 참으로 우리는 불행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이 들어 때론 섬뜩한 심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쟁적인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의 생기를 마시며 시골풍경에 도취되고 옛정취가 살아 숨 쉬는 우리 전통을 찾아다니면 아직도 살맛나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더욱이 지방마다 문화유적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모습을 아빠 엄마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구경 오는 광경을 보노라면 우리민족의 정신문화가 살아있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고 맘으로 받아들여진다. 아~! 이 민족은 아직도 희망적인 민족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불쑥 떠올라 심정이 유쾌하다. 지난 5일 필자는 춘천근교에 있는 ‘김유정문학촌(金裕貞文學村)’을 방문했다. 시골에 자리하고 있는 ‘김유정문학촌’은 입구부터 자동차가 가득한 것을 보니 이곳을 찾는 관객이 엄청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김유정문학촌’이 무슨 매력이 있어 많은 관객을 유혹하고 있을까? 외관상으로 볼 때 하나의 촌이 온통 문학촌으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았고 주말이면 상설무대에서 상시 ‘아리랑공연’과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박양순의 유정의 사랑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김유정 작가의 생가에는 그의 일대기를 알 수 있는 전시관이 있고 해설사가 상시 설명하여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절을 보고 신도가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중이 좋아 중생이 모인다는 말이 있다. 문학촌을 잘 꾸며 놓아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것보다 김유정 작가 본인이 우리민족에게 남긴 유산이 크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되었다. 김유정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문학촌까지 건설되었을까? 대한민국에서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김유정을 모르는 사람은 꽤 많다. 필자도 글 쓰는 신분이지만 솔직히 김유정을 이번 방문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김유정이 윤동주보다 문학적인 가치가 떨어져서 그럴까? 필자는 그렇다고 여기지 않는다. 김유정은 1908년 태어나서 1937년 사망, 윤동주는 1917년 태어나서 1944년 사망했으니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고 거의 비슷한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적인 작가들이다. 필자가 생각하건대 김유정이 윤동주보다 덜 알려진 이유는 윤동주는 일제에 맞선 저항시인(필자는 이런 평가를 인정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객관적인 주장을 따르는 맥락에서 하는 말)이고 김유정은 순수 향토작가이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윤동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알만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언급하지 않고 김유정의 생애와 그의 문학작품을 살펴보고 문학적 가치를 조명해보자. 김유정의 본관은 청풍(淸風). 강원도 춘천 출신 아버지 김춘식(金春植)과 어머니 청송 심씨의 8남매 중 막내이다. 김유정의 가문은 조선팔도 100대 부자에 속할 만큼 어마어마한 갑부집안이었다. 김유정의 부친 대에 해마다 3천석 내지 6천석의 소작료를 거둬들였다. 춘천 실례마을이 본가인데 당시 서울에 99칸짜리 집을 짓고 살 정도로 대부자였다. 그러나 김유정은 막내여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12세 때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9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 오늘날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전신을 다녔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모두 중퇴였다. 김유정 자신이 밝힌 이유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만날 여자를 쫓아다니느라 수업시간을 채우지 못해 퇴학 맞았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김유정은 서울생활에서 미색에다 지식이 있고 판소리 예술에 뛰어난 박록주란 처녀에게 빠져 30여 차례 편지를 쓰기도 하고 스토커처럼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고 한다. 실로 풍류적인 사나이이었다. 결국 사랑은 혼인으로 이뤄지지 못해 정신적으로 좌절에 빠지기도 하였다. 한편 유복하던 집안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큰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는데 주색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여 김유정은 이래저래 실의에 빠져 한때 방탕생활로 세월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1932년에는 고향 실레마을에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세워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또 한때는 금광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이것도 저것도 실패하고 고민에 빠져 있던 와중에 친구의 권유에 의해 서울에 올라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1935년 단편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에, 「노다지」가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올랐다. 그 뒤 후기 구인회(九人會)의 일원으로 김문집(金文輯)·이상(李箱) 등과 교분을 가지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김유정은 등단하던 해에「금 따는 콩밭」·「떡」·「산골」·「만무방」·「봄봄」 등을 발표하였고, 그 이듬해인 1936년에 「산골 나그네」·「봄과 따라지」·「동백꽃」 등을 발표하였으며, 1937년에는 「땡볕」·「따라지」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불과 2년 남짓한 작가생활을 통해서 30편 내외의 단편과 1편의 미완성 장편, 그리고 1편의 번역소설을 남길 만큼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으나, 29세에 결핵병으로 요절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김유정의 소설은 그의 체험적 소재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고향 실레마을 사람들의 가난하고 무지하며 순박한 생활을 그린 「봄봄」·「동백꽃」 등의 계열로서 그의 작가적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일면이다. 다음은 그의 금광 체험에서 얻어진 것으로, 민족항일기의 가난 속에서 일확천금의 꿈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의 생태를 그린 「노다지」·「금 따는 콩밭」 등의 계열, 그리고 도시에서의 가난한 한 작가인 자신의 생활을 투영시킨 「따라지」·「봄과 따라지」 등의 계열이 그것이다. 그의 문학세계는 본질적으로 희화적(戱畫的)이어서, 냉철하고 이지적인 현실감각이나 비극적인 진지성보다는 따뜻하고 희극적인 인간미가 넘쳐흐르는 게 특징이다. 등장인물들의 우직하고 순진한 모습,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의 구사 등으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었다. 어리숭한 사람들을 해학적으로 다룬 것은 그의 애상적인 성격에 대한 반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대표작 「동백꽃」은 사춘기 남녀가 애정과 개성에 눈떠가는 과정을 전원 서정 속에 특유의 해학적 수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품집으로는 1938년에 나온 『동백꽃』이 있고, 1968년에 『김유정전집』이 출간되었다. ‘김유정문학촌’ 해설사의 해설에 의하면 김유정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첫째 짧은 시간에 32편의 단편소설, 12편의 수필, 1편의 미완성 장편, 1편의 번역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둘째 김유정의 32편 단편소설은 순수 한글로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명사, 동사 등 한문, 조사와 조동사 등을 한글로 쓰는 것이 보편적이고 한문을 쓰지 않으면 천박하게 보이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김유정은 한글 일색으로 썼다는 것이다. 셋째 중고등학교 교재에 「동백꽃」「봄`봄」「산골나그네」「소낙비」4편이나 실리고 대학입시에 가장 단골로 많이 출제되는 것이「봄`봄」이라고 한다. 넷째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기차역 이름이 사람의 이름으로 된 것은 ‘김유정역(서울-춘천행 춘천 바로 전 기차역)’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이외 ‘김유정우체국’이 있고 ‘농협 김유정지점’이 있는 등 사람의 이름을 딴 ‘호칭’ 중에 김유정이 으뜸이라고 한다. 필자의 이목을 끈 것은 바로 김유정이 처음으로 ‘뽀뽀’라는 말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의 단편소설 「산골나그네」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참새들은 소란히 지저귄다. 지직바닥(기직바닥)이 부스럼 자죽(자국)보다 질배(진배)없다. 술 짠지쪽 가래침 담뱃재- 뭣해 너저분하다. 우선 한길치에 자리를 잡고 게배(計杯)를 대 보았다. 마수걸이가 팔십오 전 외상이 이 원 각수다. 현금 팔십오 전 두 손에 들고 앉아 세이고 세이고 또 세어보고...... 뜰에서는 나그네(본 작품에서 나그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임)의 혀로 끌어올리는 인사. “안녕히 가십시게유.” “입이나 좀 맞추고 뽀! 뽀! 뽀!” “나두.”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이것이 우리말 ‘뽀뽀’의 원조이며 1961년 국어사전에 ‘뽀뽀’가 정식 올랐다고 한다. 이렇듯 김유정은 실로 우리민족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를 기리는 문학촌까지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유정문학촌은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문학작가 김유정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며, 그 기념 및 연구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는 김유정기념사업회가 2002년 8월 일반시민들에게 김유정의 삶과 문학을 좀 더 가까이 소개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968년 김유정 31주기를 맞아 발족된 김유정기념사업회는 김유정문인비를 건립하고, 김유정 문학의 밤, 김유정추모제를 개최하였다. 기념사업회는 김유정 작가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전시관 및 부대시설을 마련하고 작품의 무대인 실레마을에 문학산책로를 조성하는 등 김유정 작가의 문학적 업적과 문학정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2002년 8월 개관한 김유정문학촌을 운영하고 있다. 김유정기념사업회는 현재 김유정추모제, 김유정문학제, 학술발표회, 청소년문학축제, 김유정문학상 시상, 김유정문학캠프, 김유정백일장 및 소설문학상 시상, 소설의 고향을 찾아가는 문학기행, 김유정 소설과 만나는 삶의 체험, 순회문학강연 등 각종 문학축제와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김유정문학촌은 2개의 전시관에 김유정의 삶을 소개하고 그의 작품을 전시하며 홍보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이 전시관에서는 김유정이 몸담았던 구인회와 그의 문우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작품의 배경이 된 당시 농촌 상황을 알리고 있다. 김유정을 추모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기획, 운영하여 그의 생애와 업적을 일반시민들에게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중국 노벨문학상 수상자 莫言 작가가 한국방문 시 ‘김유정문학촌’을 찾았다고 한다. 莫言 작가는 향토작가로 유명하다. 김유정도 한국에서 가장 이름난 향토작가이다. 아마 이런 공통점이 莫言 작가가 이곳을 방문한 계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351    조선족을 추악하게 만드는 추악한 한국영화들 댓글:  조회:4710  추천:3  2017-09-14
조선족을 추악하게 만드는 추악한 한국영화들  특정약소집단에 대한 왜곡매도 행위 국가가 책임져야 김정룡     “여기(대림동) 조선족들만 사는데 여권 없는 중국인들 많아서 밤에 칼부림이 자주 나요. 경찰도 손 못 대는 무서운 곳이오.”   영화 ‘청년경찰’에 나오는 택시기사의 대사이다. 이 한 마디 대사 때문에 동포 최대 밀집지역인 대림동은 졸지에 범죄소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 화면에 조선족 폭력배들이 개돼지처럼 한 방에 수십 명 잠을 자면서 범죄를 일삼는다. 한국인에 비춰진 조선족의 모습은 한심한 더럽고 누추한 거지떼들이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조선족 범죄조직이 인신매매한 어린 소녀들을 폐건물에 감금한 장면은 물론 그 곳에서 난자를 채취하는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조선족은 정말 추악하고 악랄한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영화는 영화일 뿐 별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2010년 영화 ‘황해’는 영화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소위 대한민국 공영방송인 KBS가 ‘황해’라는 제목으로 조선족 보이스피싱 범죄를 그린 코미디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오랫동안 방송했다. 한국에서 최고 엘리트에 속하는 00한국 교수 분이 조선족 지성모임에서 “당신네 조선족은 왜 보이스피싱 범죄가 그토록 성행하고 있는가?”라고 말한다. 욕은 듣는 사람이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 장소에 있은 조선족이 마치 보이스피싱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한다. 교수가 이러할진대 일반 국민들이 ‘황해’ 프로그램을 보고 조선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답은 빤하다.    영화 ‘황해’(2010), ‘신세계’(2013), ‘악녀’(2017)에서는 모두 조선족이 살인을 일삼는 인물로 등장했고 ‘차이나타운’(2015), 조선족이 장기매매를 일삼는 폭력조직으로 등장했다. 올해 추석연휴를 맞아 가리봉을 배경(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구로4동이 배경으로 등장한다고 한다)으로 조선족 폭력조직을 소탕하는 영화 ‘범죄도시’가 10월 4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조선족을 모티브로 한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들이 조선족을 어떻게 생각할까?    ‘청년경찰’ 김주환 감독은 중국동포와 대림동을 범죄 온상으로 설정한 데는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고 설명한다. “미국영화도 냉전시대에는 항상 적군은 러시아였다”는 감독은 “‘신세계’ 이후 조선족이 적으로 나오는 영화가 늘었는데, 어떤 편견을 갖고 있지 않고 영화적인 장치일 뿐”이라고 밝혔다.    정말 한심하다. 감독의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 수준이라니?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적대관계 패턴을 조선족을 한국인의 적으로 설정하는 동일한 패턴으로 영화에 끌어들이다니?     ‘황해’부터 조선족을 범죄 집단으로 그리는 영화들이 지금까지 여러 편 나왔고 공영방송까지 조선족을 비방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되었으나 재한조선족사회는 침묵하고 있었다. 요즘 ‘청년경찰’이 상영됨과 동시에 이번에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지난 8.28 조선족사회가 기자회견을 갖고 거센 항의에 나섰다. 주최측 주요 요구사항은 영화감독 사과이며 재발방지대책이다.    지금까지 한국 언론매체들이 재한조선족사회를 망쳐놓았고 이에 상업목적으로 조선족을 ‘악의 축’으로 설정하고 왜곡 매도하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는 데는 대한민국 국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조선족이라는 이 특수군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하는가 하는데 있다.문제의 출발점은  조선족을 단순한 외국인으로 취급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만약 외국인 취급한다면 크게 시시비비가 일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여느 외국인이든 왜곡 매도하는 행위는 옳지않다. 그렇지 않고 조선족을 진정 동포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인정한다면 지금처럼 언론매체와 영화들에서 왜곡 매도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않을것이다. 물론 조선족은 엄연히 중국국적자이다. 그러나 민족성으로 따질때 한 피줄이고 이중문화정체성을 공유하는 특수한 군체인것도 사실이다. 이런 특수군체를 대함에 있어서 중국이나 일본은 한국과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대처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한국정부가 참조할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은 해외의 화교,화인 집단을 동포로 간주하고 법적으로 보호하고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일계인을 대함에 있어서 중국의 화교,화인 정책 버금가는 일련의 제도를 마련하고 실시하고 있다. 중국이 화교, 화인을 대하는 것처럼, 일본이 일계인을 대하는 것처럼 대한민국도 조선족을 두 나라와 같이 같은 맥락으로 대한다면 지금과 같이 언론 매체와 영화들이 앞장서서 동포를 범죄 집단으로 만들고 도무지 상종 못할 인간무리로 그리는데 앞장서지 못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몇 몇 영화감독의 개인 문제가 아니라 전반 대한민국이 조선족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한국정부가 앞장서 조선족을 동포로 끌어안아야 하는 존재로 인정하고 언론 매체나 영화들에서 조선족을 왜곡하고 매도하는 행위에 대한 브레이크를 건다면 작금의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고 앞으로 다시는 유사 행위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으나 거꾸로 지금처럼 한국정부가 손 놓고 있으면 문제해결이 지지부진할 것이고 앞으로도 유사행위가 계속 발생할 것이다.     
350    일부 한국 언론이 재한조선족사회 망쳐놓는다 댓글:  조회:4221  추천:3  2017-08-31
일부 한국 언론이 재한조선족사회 망쳐놓는다  최근 가리봉을 또 범죄소굴로 비화   김정룡     2006년 4월경 남구로역 부근에서 조선족이 한국인을 칼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며칠 후 방송3사 중 00방송 기자가 이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필자를 찾아와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필자는 거절했다. 거절 이유는 이렇다. 기자가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인데 내용이 “조선족들이 절대다수가 칼 차고 다니니 내국인들이 조선족을 만나면 각별히 조심하고 경계심을 바짝 차리라.”는 것이었다. 재한조선족들이 마치 보편적으로 살인자나 되는 것처럼 사실이 아닌 허위를 과장하여 보도하려는 것이었다.    2007년 4월 중국에서 범죄에 연루되었고 한국에 와서도 범죄를 저지른 조선족 00가 가리봉에서 검거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국 언론들이 마치 기다리기나 한 듯 뻥튀기처럼 부풀려 대서특필에 나섰다. 보도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조선족 폭력조직은 중국 북동부의 동북3성의 흑사파 조직원들이 국내에 들어와 결성했다. 경찰은 현재 16개 조직 2000여명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2000여명은 조직당 80~100명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며 “현재 불법체류자만 50만명 중 조선족이 대부분인 것으로 추정돼 조직원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족들은 1998년부터 방문취업비자로 대거 입국, 공단 밀집지역인 ‘가리봉동’에 정착했다. 흑사파 조직원들도 속속 들어오면서 중국 지명을 딴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가리봉동을 장악하는 과정을 전설처럼 ‘가리봉 잔혹사’라고 한다. 이들은 중국 본토 흑사회처럼 등에는 칼, 다리에는 도끼를 차고 다니면서 가리봉동 일대를 휩쓸었다. 팔 절단 250만원, 다리 절단 500만원, 청부살인 1000만원 등이다. 또한 이들은 국내 조폭들과 연대도 모색하고 있다. 한국어에 능숙한 조선족 출신들로 구성된 연변흑사파는 오래전부터 서울 등지에서 활동 무대가 겹치는 국내 조폭과 연합전선을 펴고 있다.“   위 기사내용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한국기자들이 ‘흑사회’란 의미를 모르고 연변흑사파란 호칭을 지어냈는데 이는 무지의 결과이다. 중국에서 한국사회가 말하는 깡패와 건달 및 양아치, 쉽게 말하자면 백도(白道:정도)를 걷지 않고 흑도(黑道)에 의해 살아가는 인간들을 총칭하여 ‘흑사회’라고 표현한다. 중국에는 흑사파란 폭력조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이 흑사파가 마치 중국 내 있었던 하나의 폭력조직이나 되는 것처럼, 또 이런 맥락에서 자기네 맘대로 존재도 하지 않는 ‘연변흑사파’란 호칭을 지어 내어 한국사회에 퍼뜨려 왔던 것이다.    둘째 2007년 당시 연변에서 온 폭력조직원이 2천명이라는 보도는 한심한 뻥튀기이다.    셋째 2007년 당시 한국에 불법체류 조선족 50만에 이른다는 것은 역시 뻥튀기이다. 기껏해야 3만에서 5만을 초과하지 않았다.    넷째 방문취업비자는 2007년 3월 4일부터 실시했는데 1998년부터 실시했다니 몰라도 너무 모르는 기자가 허튼 기사를 지어낸 것이다.   다섯째 연변흑사파들이 등에는 칼, 다리에는 도끼를 차고 가리봉을 휩쓴다고 했는데 필자가 가리봉에 만11년 넘게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거니와 가리봉 상인들에게 “돈을 뜯긴 적이 있느냐?” 진짜 방탄복을 입고 영업하느냐?“ 물은 결과 당사자들은 모두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얘기를 한다는 반응이었다.    여섯째 사람 사는 세상에 청부살인이 존재하듯 재한조선족사회에도 청부살인 사례가 있다. 하지만 가리봉에 이런 청부살인자들이 득실거리는 것처럼 과장하여 퍼뜨리는 것은 사회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기자의 도덕성을 벗어나는 행위이다.   영화 를 비롯해 재한조선족사회를 범죄의 소굴처럼 포장하더니 대한민국 공영방송인 KBS까지 나서 조선족을 비하하는 라는 개그콘서트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1년 내내 방송했다. 결과는 한국인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마치 보편적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원처럼 비쳐지는 악효과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조선족살인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수사 결과도 나오기 전에 언론들이 앞장서 ‘엽기적인 살인’ ‘인육매매’ ‘장기매매’를 들먹이며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였다. 허위도 자주 말하고 많이 말하면 사실처럼 각인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따라서 한국인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마치 범죄 무리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낙인 찍혀 있다.    가리봉은 조선족밀집지역 1번지로서 서울시와 구로구청이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환경도 좋아지고 범죄도 사라지고 있어 주민들이 살만한 곳이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7월 말 00주간지 00기자가 10년 전부터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위 내용을 ‘우라까이(해당 기자의 표현)’ 해서 새로운 기사랍시고 발표했다. 가리봉주민들이 난리 났다 기사 작성자가 가리봉에 와서 주민들에게 사과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날 그 기자는 “반발 신고가 있어 금세 기사를 내려 본 사람이 얼마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포털사이트에 아직도 떠돌고 있어 악영향이 아직도 크게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설혜심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2014년 동아시아재단 정책논쟁 기고문에서 이 두 영화와 언론 기사를 두루 언급하며 “미디어가 연변과 조선족(중국 동포)의 이미지를 갈수록 부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 언론들이 제발 사실이 아닌 허위기사, 혹은 작은 사실을 부풀려 크게 만드는 기사를 발표하여 재한조선족 이미지에 먹칠하는 행위를 멈추기를 간곡히 바란다. 
349    H-2와 F-4 연구(2) 댓글:  조회:3241  추천:0  2017-07-27
1.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 1.1. 왜곡된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 2017. 3월 말 기준으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재외동포는 776,726명이고 중국동포의 수는 650,094명으로서 83.7% 차지하고 있다(법무부 외국인정책본부 통계자료). 조선족출신 국적취득자(13만) 합치면 78만 명 조선족출신이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왜 이 많은 조선족이 한국에 왔을까? 다시 말하자면 이들의 한국입국목적이 무엇일까? 이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알아야 재한동포사회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한국사회에 알려진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이 ‘중국에서 차별받고 무시당했기 때문에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 전달된 이유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일부 기자들이 사실을 조작하고 왜곡한 허위정보를 전파를 타게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뷰에 응한 중국동포에게 “중국에서 차별당하고 무시당해 당당하게 살고 싶어 한국에 왔는데 정작 와보니 한국 역시 우리를 차별하고 무시한다.”는 내용을 기자들이 미리 자기네 입맛에 맞게 각본을 짜서 외우게 하고 그대로 말하게끔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중국동포는 중국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키는 서방질처럼 시키면 시킨 대로 따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왜곡된 허위정보가 전파를 타게 되어 중국을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허위를 진실인줄로 착각하고 중국동포들이 진짜 중국에서 차별받고 피해를 받아온 것, 그래서 한국에 온 줄로 잘못 알게 된 것이다. 일부 지각 있는 한국학자들조차 이와 같은 허위정보에 동조하여 조선족의 한국입국목적에 대해 역시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중국동포들은 식민시기에 중국에 가서 이산 트라우마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으로서 문화혁명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반혁명, 우파분자, 주자파 등으로 분류되어 비판받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으며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정치적 폭력이 난무한 문화혁명은 그 시기를 산 중국인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체험이었고 중국현대사의 커다란 정신적인 상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최병우 P416).” 여기까지는 맞는 말이다. 이어서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간직하며 살아가던 중국 소수민족들은 문화혁명이라는 정치적 혼란과 함께 자신의 고유문화가 비판받고 자신들의 삶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이중적인 고통을 받았다(최병우 P416).” “중국의 동포들은 이러한 아픈 기억을 해소하고 치유하는 길로서 한국이주를 감행하였지만 같은 민족이라고 상상하면서 동일성을 가꾸어 온 한국과 한국민으로부터 차별과 배제를 당하면서 이중 삼중의 트라우마를 겪게 되었다. 트라우마의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길은 트라우마가 된 사건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를 통해 진정으로 그 시대를 애도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있다(최병우 P439).” 최병우 선생의 이 주장은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문화혁명의 아픔, 영혼 깊이 상처를 겪은 조선족은 일부 지식인 및 당 간부들이었다. 필자의 부친은 시골 당지부 서기였는데 문화혁명시기에 주자파로 몰려 비판투쟁 받았으나 문화혁명이 끝나고 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채 1995년 생을 마감했다. 당시 문화혁명의 피해를 입은 조선족 간부 중에 필자의 부친과 같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처 깊었던 조선족 지식인들은 문화혁명이 끝나고 금방 중국정치에 동조하였고 현재도 마찬가지로 문화혁명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국행을 택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조선족 절대다수가 지식인이 아닌 농민출신과 도시 노동자 출신들이다. 이들이 한국에 온 목적은 문화혁명의 상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들의 한국입국목적은 경제적 이득 추구이고, 문화회귀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1.2. 경제적 이득 추구가 주요목적 개혁개방 전 중국조선족사회는 80%가 농경에 종사하며 농부의 삶을 살아왔다. 연변의 상황을 돌아보면 개혁개방 전 사회주의집단생산 시기 조선족마을들이 보편적으로 한족마을보다 경제적 수입이 높았고 따라서 삶의 질도 높았다. 배달민족의 전통적인 상부상조의 미덕 덕분이었을 것이다(《은둔의 나라 조선》저자 그리피스(1843년 ~ 1928년)는 그의 저서에서 조선인의 미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조선 사람의 커다란 미덕은 인간은 모두가 한형제임을 충실히 존중하고 매일 실천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민족성은 상부상조하고 후덕한 인정을 베푼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성과 구분된다.”). 그러던 데로부터 개혁개방을 실시하자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의 상황이 반전되었다. 즉 조선족마을이 못 살기 시작하였던 비해 한족마을들이 잘 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3년 호도거리생산 실시 이후 이와 같은 반전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외관상으로 보아도 조선족마을들은 겨우 한두 채의 벽돌집이 들어서는데 비해 한족마을은 해마다 벽돌집이 쑥쑥 올라가고 있었다. 조선족마을총각들은 장가가지 못해 마을에 아이 울음소리가 아주 드물었던 데 비해 한족마을총각들은 장가 잘도 갔다. 왜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 사이 이런 상반된 현상이 일어났을까? 필자의 고향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동불사 요구촌이다. 이 촌은 조선족마을 4개, 한족마을 1개로 이뤄졌다. 개혁개방 전에는 한족마을이 째지게 가난했고 조선족마을, 특히 필자의 마을은 잘 살았다. 그런데 개혁개방하자마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한족마을 청년들은 갓 가정을 이루고 신혼부부가 담배 1만 포기 재배하고 다른 농산품도 심었다. 담배 1만 포기 재배하려면 수확 철에 하루 평균 두세 시간만 잠을 자고 일해야 한다. 한족청년들은 그 고되고 힘든 일을 이겨내고 한해 만원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연변농촌은 농망기와 농한기가 거의 반반인데 한족들은 겨우 내내 쉬지 않고 싸리로 광주리 결었고 빗자루 틀어 도시에 팔아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족마을은 그 긴긴 반년 동안 끼리끼리 모여 화토치기, 마작놀이, 술놀이에 빠져 돈 벌 궁리가 없었다. 이렇듯 한족들은 당지에 머물면서 천연자원을 이용하여 부자가 되었던데 비해 조선족은 부를 창조하는 루트로서 한국행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도시에서는 개혁개방 이후 낙후된 공업이 새로운 생산 수요에 부응하지 못해 실업자가 급증하고 한편 직장 있어도 소비가 수입을 능가하는 현상이 심각해 한국행을 선택하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 너도나도 한국바람에 가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족이 한국에 온 목적은 돈 벌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일차적인 한국입국목적이었다.
348    H-2와 F-4 연구(1) 댓글:  조회:3697  추천:0  2017-07-24
방문취업비자(H-2)와 재외동포비자(F-4) 연구(1) 2017세계한인학술대회 발제 논문 연재 서론 2017년은 한중수교 25주년, 방문취업비자(H-2, 이하 H-2로 칭함) 실시 10주년을 맞는 해로서 재한동포사회에 있어서 자못 중요하고도 매우 의미 깊은 한해이다. 조선족이 한국에 입국하기 시작한 시점은 이 계기가 되었으나 당시는 매우 산발적이고 매우 적은 숫자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친척방문을 명분으로 한국에 왔다가 체류만기일(최장 90일)을 넘기고 한국에 남아 불법 취직하여 돈을 버는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나 이 시기를 재한조선족사회 혹은 재한동포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직후 중국조선족사회에 ‘한국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너도나도 한국에 가는 경쟁에 뛰어들어 1999년에 이르러 불법체류자만 6만 명이었다. 2004년 고용허가제 실시 전에는 소수 국제결혼자, 산업연수생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장기체류한 조선족 다수는 여권위변조, 밀입국, 위장결혼, 가짜친척초청이 많았고 또 관광, 상무고찰 등 단기비자로 입국하였다가 체류만료일을 넘기고 귀국하지 않은 불법체류자였다. 한국정부는 조선족불법체류문제가 사회이슈로 불거지자 2002년 3월 불법체류자종합방지대책을 마련하고 불법체류자 자진신고를 받고 출국유예 조치로 재입국 후 취업기회 제공하였고, 2004년 고용허가제를 실시하였고, 2005년과 2006년 두 차례 을 실시하여 3만여 명의 불법체류자를 구제하여 합법화 시켰지만 한국입국루트를 개방하지 않아 여전히 불법입국이 점점 더 늘어났고 불법체류 하는 수가 점점 더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재한중국동포사회에 햇볕을 비추기 시작한 제도가 H-2 실시였다. 1992년 한중수교가 중국조선족사회에 한국출국붐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다면 2007. 3. 4.부터 실시된 H-2 제도는 조선족이 한국에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는 루트를 개방하였고, 자유왕래가 보장되었으며, 따라서 재한동포사회는 음지에서 양지에로 나올 수 있었고, 수많은 단체들과 동호회가 생겨났고, 인간다운 인간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재한동포사회는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문화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H-2 실시를 재한동포사회에 있어서 하나의 큰 변혁의 전환점을 가져온 획기적인 제도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정책제도가 없듯이 H-2도 당시 중국동포에게 전부 재외동포비자(F-4, 이하 F-4로 칭함)를 부여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실시한 정책제도인 만큼 체류기간 제한과 취업업종범위제한 및 한해 한 번씩 연장수속을 밟아야 하고 동포를 동포로 대하지 않고 외국인인력범주에 포함시켜 일련의 제도를 마련하는 등 단점이 많고 허점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H-2 실시가 재한동포사회발전에 지대한 기여가 있었기 때문에 재한동포사회 성장을 논하는 관련 학술대회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H-2 실시 10주년을 맞으며 과거 10년을 돌아보고 재한동포사회 미래를 전망해 보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H-2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재외동포법과 관련된 F-4 실시에 대해 조명함으로써 재한동포사회를 한층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도록 논의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H-2 실시가 재한동포성장과 발전의 초보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면 F-4는 재한동포사회가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데 큰 기여가 있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재한동포사회에서 체류의 수가 가장 많은 H-2(2016.12.31. 기준 232,580명)와 F-4(2016.12.31.기준 275,342명) 현황과 개선과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재한동포사회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끔 노력하였고, 지역커뮤니티에 대한 논의를 통해 재한동포사회가 대한민국에서 처하고 있는 현실을 짚어보았다. 재한동포사회 일선에서 사업하고 있는 본인의 직업적인 특성에 의해 본고의 논거들은 이론적인 논거보다 사실적인 논거에 치중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딱딱한 이론에 치중하는 학술연구보다 재한동포사회 살아 숨 쉬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여 실제를 벗어나지 않는 진실한 삶의 현장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본고에서의 조선족, 동포 호칭을 일관성 있게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시기와 환경 및 상황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347    야단법석과 원효대사 댓글:  조회:4104  추천:1  2017-05-05
[역사문화이야기] 우리 말 어휘 중 75%가 한자어라고 한다. 한반도(조선반도)는 역사적으로 그만큼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왔다는 증거이리라. 그런데 한문과 한어의 유입 과정에 있어서 중국어휘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있고, 자체로 창작해낸 한자 어휘도 있고, 중국과 뜻이 다르게 사용되는 것도 있고, 중국에서는 일상용어가 아닌 것이 우리말에서 일상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어휘가 꽤 많다.   여기서 일일이 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 같아 일단 마지막 경우를 밝혀보려고 한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야단치다.’, ‘야단맞다.’, ‘야단법석을 떤다.’, ‘야단법석거리다’ 라는 등의 말을 곧잘 사용하고 있는데 ‘야단법석’은 한자어이다. ‘야단법석’의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중국에서는 일상용어로 사용되지 않고 우리민족은 매우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일상용어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먼저 ‘야단법석’의 유래를 살펴보자.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시기는 후한 때였고 위진남북조 시기 세상이 혼란스럽고 각박해져 정신적인 안식처를 찾고자 부처를 믿는 신도가 급격히 증가해 불교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당나라 때 불교의 ‘꽃’이 활짝 피었다.   당나라 초기 당태종 때인 627년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고자 천축에 떠나 간난신고 끝에 인도에 도착하여 18년 동안 연구를 거쳐 645년 불경 600권을 안고 장안에 돌아왔다. 당시 현장법사의 영향에 의해 당나라는 불교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이윽고 무측천이 온 나라가 불교의 천하가 되기를 명하였다.   무측천 시대에 불교를 대중화로 흥기 시키려고 가축도살을 금지할 만큼 여러 가지 극단적인 조치들이 잇따라 시행되었다. 하지만 불교를 대중화 시키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불경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어렵다 못해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불경을 민초들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실행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안이 바로 ‘야단법석’이었다.   야단(野壇)이란 세속도시(世俗都市)의 빈 공터, 즉 사람들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는 곳에 단(壇)을 설치하는 것이며, 법석(法席)이란 법어(法語:佛語)를 말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불교로 놓고 말하자면 절간은 ‘성(聖)의 세계’라면 야단법석은 ‘속(俗)의 세계’이다. 쉽게 말하자면 불교가 백성들을 신도로 불러들이려고 세속화(世俗化)하기 위해 야단법석이란 아이디어를 발굴했던 것이다.   이 야단법석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흔히 계급적 구분이 없이 각설이, 갑돌이, 짚세기 할 것 없이 아무나 모여서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 예하면 씨름, 널뛰기, 제기차기, 재주넘기, 수수께끼내기, 남녀데이트, 심지어 어떻게 하면 남녀가 더 자극적이고 또 어떻게 하면 애를 쉽게 배고 낳고 하는 등등의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부담 없이 서로 주고받고 맘이 내키는 대로 한바탕 떠들어대는 장소였다.  ‘야단법석’이란 말은 한바탕 떠들어 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야단법석은 그냥 한바탕 떠들어 대는 난장으로 끝나버리고 마는가? 아니다! 이 야단법석은 겉보기에는 일종 난장 같지만 역사적으로 변문(變文)이란 최대의 성과를 이룩해냈다.   변문이란 당대(唐代) 승려(和尙)들이 야단법석에서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무지한 민중에게 알아먹기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바꿔놓은 것(변경)을 의미한다. 불경(佛經)이야기의 재미를 북돋우려고 악기도 곁들고 노래도 부르면서 잡예(雜藝)식으로 설경(說經)하였는데, 이로부터 강창문학(講唱文學)이 생겨났고, 제궁조(諸宮調:스님들이 비파를 타면서 노래와 이야기를 섞어 설경하는 설창법)가 생겨났고, 송사(宋詞)가 생겨났고, 원곡(元曲)이 생겨났고, 명대(明代)에 이르러 설화문학(說話文學)이 소설문학으로 발전했고, 이윽고 20세기 초에는 백화문(白話文)이 생겨나게 되었다.   ‘야단법석’은 이렇듯 중국문학과 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한편 사람들은 흔히 서구민주화의 뿌리가 고대그리스의 광장문화에 있다고 해서, 그게 뭐 굉장히 대단한 줄로 여기고 있는데 기실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 아니다. 인류 고대사회에 있어서 그런 ‘광장문화’는 고대그리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 사회생활의 보편현상이었으며, 중국에도 있었고 한반도에도 있었던 ‘야단법석’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문화 맹아를 싹 틔운 ‘광장문화’였다.   우리민족 역사에서는 야단법석을 통해 불교를 대중화 시킨 주인공으로서는 7세기 신라에 살았던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이다. 바꿔 말하자면 원효대사야말로 ‘야단법석’의 원조이다.   원효대사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한 인물인지 현재 한국불교계에서 “원효 이후 1,400년 동안 원효를 뛰어넘는 스님이 없다.”고 말한다.  원효스님은 650년(진덕여왕 4)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唐)의 현장과 규기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원효스님은 중국행에 실패한 이후로 중국불교 번성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지 못하고 10년 뒤, 자기보다 10세나 연하인 의상(義湘)과 같이 중국 유학길을 재차 떠났다. 경주를 떠나 강주(수원) 남양(南陽) 해안에 이르러서 날이 저물었다. 날은 궂어 소낙비가 쏟아지고 더욱 컴컴해 졌다. 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어떤 움집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지새기로 하였다. 한 밤중에 원효는 심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행여나 하여 주위를 더듬거려 보니 손끝에 물이 담긴 그릇이 닿았다. 그는 황급히 물을 마시고는 계속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날이 활짝 밝자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움집이라 여겼던 곳은 고총이었고 그릇의 물은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 옛날 무덤은 지하실 같이 돌집을 짓고 방을 만들어 관을 넣고, 생시에 사용하던 물건을 넣어 두는 풍속이 있었다. 그가 빗물이 고인 해골을 보니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심한 구토를 느껴 전 날 먹은 음식까지 몽땅 토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어젯밤에 갈증이 나서, 무척 애쓰는 것을 보았는가?” “형님이 갈증으로 고생하다가 그릇의 물을 마시는 것을 보았지요.”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그것은 보통 물이 아니고 사람의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이었다네. 어젯밤 그것을 마실 때는 그토록 시원하여 세상모르게 잠을 잤는데, 오늘 아침 그것이 해골의 썩은 물이란 것을 발견하니 구토가 나서 큰 고생을 하였다네. 밤중의 마음과 아침의 내 마음이 다르지 않을 터인데 모를 때는 시원하던 것이 알고 나서는 기분이 좋지 않으니 더럽고 깨끗한 것이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一切唯心造)이라고 이제 깨달았다네.” 이와 같은 계기를 통해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사상을 깨달은 원효대사는 굳이 멀리 당나라까지 들어가 법을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원효스님은 스님의 신분으로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는 등 대중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자리(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利他)를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행'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효대사가 불교를 대중화 시키려고 촌촌락락(村村落落)을 찾아다니면서 낫 놓고 기윽(ㄱ) 자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어려운 불경을 재미있고 쉬운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주고 바가지를 악기로 삼아 반주하며 노래를 곁들어 부르면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쳤다. 원효가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었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판을 벌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야단법석’이다.   필자가 연변시골에 있었을 적에 잔치 집에서 저녁 오락 시 물독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반주하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이러한 관습이 원효대사가 바가지를 악기로 사용하는 것을 널리 보급시킨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공중장소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우리민족이 각종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놀기를 즐기는 관습이 모두 야단법석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북아신문 20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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