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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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조선족 將棋실력 어디까지 댓글:  조회:6547  추천:2  2013-10-08
조선족 將棋실력 어디까지   2002년경 요녕 안산시 출신 김동학 씨가 한국장기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프로로도 유명했지만 한국에선 아마로부터 발걸음을 떼야했다. 워낙 실력이 출중해 아마대회에서 절대왕자로 군림했다. 아마대회에서 우승하면 프로입단자격이 주어진다. 김동학씨는 2005년부터 한국프로기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프로초단 때부터 각종대회에 우승을 거의 휩쓸다시피 하였는데 무려 우승 12회에 달했다. 김동학씨가 한국프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는 김경중 9단이 절대 강자였다. 한국장기 우승판도가 조선족 출신에 의해 바뀌게 되었다. 그즈음 김기영 젊은 기사가 김경중 9단과 김동학씨 양강 구도를 깨고 한국장기 ‘삼김’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김동학씨에 의해 조선족장기실력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 조선족 출신 김정수, 허금산, 김동일 등 선수들도 한국프로장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조선족장기실력을 한국사회에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20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 100주년 기념 세계인장기대회가 있었는데 한국인프로기사들이 예선전을 거쳐 출전선수가 선정되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국 유명 프로기사들이 대거 출전했지만 우승부터 3위까지 조선족의 몫이었고 4위에 미국 하여명, 한국프로는 5위에 겨우 진출했다. 한국브레인TV에서 반복하여 중계하는 바람에 조선족장기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한국 장기계가 모두 알게 되었다. 2011년 1월 30일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장기대회가 열렸고 그해 추석맞이로 2회대회까지 있었다. 조선족장기가 한국에서 자리잡아갈 즈음 브레인TV가 개최한 제2회햇터배클럽대항전이 있었는데 조선족을 대표하는 ‘백두산클럽’이 출전하여 우승을 거머쥐어 또 한 번 조선족장기실력을 알렸다. 제2회와 제3회 조선족장기대회에서 우승한 김철 선수는 올해 봄에 한국프로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 첫 대회로 ‘KBS추석맞이 왕중왕전’에 출전하여 쟁쟁한 한국프로기사들을 누르고 결승에 진출하였고 마지막 게임에서 황문수 9단을 가볍게 제치고 우승했다. 김철 선수에 의해 조선족장기 실력을 또 한 번 크게 과시하게 되었다. 조선족 장기는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대회조직까지 재미를 더해 한국사회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조선족장기대회이지만 한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한국인과 화합과 공존의 문화교류행사 일환으로 제3회와 제4회대회에 한국인을 참여시켰다. 지난 9월 8일 구로구청에서 열린 제4회대회에 한국인 선수 30여 명 출전하였고 한국프로기사들과 각 클럽 회장님들도 구경했다. 모두 조선족장기대회가 한국장기대회에 비해 재미있다는 평가였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한국장기대회는 프로든 아마든 전부 토너먼트 일색이어서 아침에 한 게임 두고 절반 집에 가고 또 한 게임 지나 절반 가고 나면 마지막 시상식에 몇 사람만 남게 되어 대회가 굉장히 슴슴하다는 것이다. 조선족장기대회는 참여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토너먼트가 아닌 적분순환제인데 실력여하를 떠나 참가자 전부 똑 같이 하루 7게임 두고 성적으로 순위를 가리는 대회방식으로 진행하다 보니 재미있고 마지막 시상식까지 전부 참가하여 장기꾼들의 참여의식에 재미까지 실어주었다. 또 한국장기대회는 기념품이나 경품이 없어 참가자들이 따분해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조선족장기대회는 기념품과 경품까지 푸짐히 준비하여 마치 잔치를 치르는 분위기여서 한국장기대회에서 볼 수 없는 진풍경을 그려주고 있다. 제4회대회 이튿날부터 필자는 한국장기계로부터 조선족장기대회가 굉장히 재미있다는 목소리를 들었고 앞으로 한국장기대회도 우리 조선족장기대회방식을 도입하겠으니 도와달라는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실제로 10월 6일 천호동클럽에서 조직한 장기대회에 조선족 심판 2명을 파견하여 대회진행을 도와주었다. 한국장기가 처음으로 적분순환제를 실시하는 의미 있는 대회였다.  
305    한국입국 쉬워지니 폐단 커 댓글:  조회:6079  추천:4  2013-10-02
한국입국 쉬워지니 폐단 커 빚 지지 않는 한국행, 중압감 없어 정서적 해이 심해   무연고동포 신규입국 추첨에 의해 한국에 입국하여 6주기술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조선족 K씨는 학원 다니는 첫날 아침, 술에 만취해 곤드레만드레 큰길이 좁다고 팔자걸음으로 간신히 몸을 가누고 왔다. 수업에 참가하긴 했는데 제집에서 하던 버릇대로 피실피실 소리 내 웃기도 하고 이 소리 저 소리 헛소리 쳐댄다. 이튿날 술이 깬 상태에서 등원했지만 눈빛이 이미 맛이 간 알코올 중독자이다. 학원에 술 마시고 오지 못하게 교육시키느라 숱한 애를 먹었다. S씨는 학원이 쉬는 일요일 오전 만취상태에서 찾아와 동반 여학원생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난동을 부린다. D씨는 점심에 술을 잔뜩 마시고 괜히 시비 걸고 타인과 싸운다. D씨처럼 술 마시고 타인과 걸고 들어 싸우는 일이 수두룩하다. 학원은 학교와 같이 마땅히 지켜할 기율과 규칙이 엄연히 있다. 그러나 학원에 온다는 개념이 없이 6주기술교육생 중에 상기 추태가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를 다잡느라 학원관계자들이 진땀을 뺀다. 더욱 가관인 것은 2주쯤 지나면 남녀 학원생이 친해지기 시작해 서로 연애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처녀총각이 연애한다면 찬성할 일이나 고향에 어린 아이와 남편을 두고 온 20대 후반에서 30대 여성들, 어린 아이와 아내를 두고 온 남성들 가정 도덕과 윤리를 아예 팽개치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남남의 남녀가 동거생활이 오래된 일이고 숫자도 많지만 수년 전만 해도 한국에 온지 몇 해 지나고 고독을 이기지 못해 남남이 부부처럼 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 요즘처럼 한국에 오자마자 남남이 붙어사는 사례는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수년 전 한국에 온 조선족은 절대다수가 열심히 또 착실하게 살아왔다. 이에 비해 요즈음 새로 입국하는 초보자들을 보면 오자마자 추태를 부리고 남남이 붙어사는데 왜 이렇듯 대조적일까? 조선족에 대한 한국정부의 문호개방 혜택에 의해 입국자가 급증함에 따라 소질이 형편없는 자들이 밀려오는 것이 문제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도 더욱 중요한 원인이 있다. 수년 전에 입국한 조선족은 절대다수가 한국에 연고가 없어 사증을 받으려면 보편적으로 6~10만 위안 쯤 빚지고 온다. 열심히 벌어 갚지 않으면 이자가 높아 아이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한편으로 아이 학비와 가족 생활비 부담 때문에 중압감에 짓눌려 할 수 없이 돈을 악착 같이 벌어야 한다. 돈을 악착 같이 버노라면 다른데 눈을 팔 겨를이 없다. 몇 해 지나 보릿고개를 넘기고 나서야 한 눈 팔며 살 수가 있다. 새로 입국한 조선족은 로또 당첨 같은 추첨이란 행운에 의해 사증 값과 비행기티켓만 사면 한국에 올 수가 있어 빚을 지지 않는다. 한국에 이미 자리 잡은 부모나 형제 하다못해 삼촌 사촌이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오자마자 돈을 벌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빚이 없고 발붙일 곳이 있으니 열심히 또 착실하게 살아야 할 압력이 없다. 정서적으로 해이하다 보니 쓸데없는 짓거리에 신경 쓰고 있다. 취업도 마찬가지로 해이하다. 재한조선족 일세대들은 일자리만 생기면 열심히 노동에 종사했다. 일이 힘들던 월급이 낮던 쉽게 자리를 옮기지 않고 죽기내기로 일했다. 휴일이면 다른 직장에 알바로 파출부로 뛰었다. 한 푼이라도 빨리 벌기 위해서였다. 이에 비해 요즘 입국자들은 일자리를 골라 취직하고 주 4회 휴무를 선택하고 월급이 낮으면 아예 머리를 돌린다. A직장에서 일하다가 B직장이 월급 5~10만원 더 준다면 주저 없이 자리를 옮긴다. 그나마 일을 하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고상’하다. 일이 조금 힘들어도 직장에서 조금만 무시당해도 팽개치고 중국에 돌아가는 사례도 꽤 발생하고 있다. 빚 없이 왔으니 돌아가는데 아무 주저심도 없다. 물론 신규입국자 중 다수는 열심히 착실하게 잘하고 있다. 본문의 취지는 재한조선족 일세대와 이세대의 삶의 태도 차이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304    일국양제(一國兩制) 유래 댓글:  조회:5326  추천:2  2013-09-16
일국양제(一國兩制) 유래   중국이 1997년 홍콩을 영국 수중에서 되찾으면서 일국양제의 정치체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등소평의 주도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다. 당시 세상만사 지식, 특히 역사지식에 눈이 어두웠던 필자는 일국양제의 정치체제가 등소평의 ‘창작품’으로 간주하고 인류역사에 없던 새로운 획기적인 발상인 줄로 알고 있었다. 10여년이 지나 역사문화에 흥미를 갖고 진지하게 파고든 결과 일국양제의 정치체제는 등소평의 새로운 획기적인 발상이 아니라 중국역사(한나라 초기)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울러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의 명언 “모든 현대사는 역사이다”가 만고의 진리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천년만년 이어가리라 믿었던 진제국이 불과 16년 만에 멸망하고 유방의 한조가 시작되었다. 진제국이 비록 중국제국역사에서 가장 단명한 왕조였으나 어찌되었던 중국 최초의 제국역사의 서막을 연데 대해선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역사에는 아이러니가 굉장히 많았다. 일례로 전국시대 후기에 들어 전국7웅이 남아 겸병을 벌일 때 사실 진나라는 서북쪽에 위치한 편벽한 ‘촌놈’의 나라였고 문화적으로도 초나라,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등에 비해 후진 국가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세련된 나라들이 최후의 패주가 된 것이 아니라 가장 ‘촌놈’의 나라로 여겨졌던 진나라가 통일(정확히 말하자면 統一이 아니라 一統이었음)의 역사 과제를 완수하는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사건을 그저 아이러니로만 취급할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촌놈’의 나라라 평가받았을지언정 통일을 이뤄냈다면 필경 그럴만한 소이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 소이연이란 대체 무었일까? 독자들은 모두 상앙변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상앙변법의 주요 내용으로서 봉건의 핵심이 되는 ‘분봉제’와 ‘정전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황무지개간을 장례하였다. ‘분봉제’와 ‘정전제’의 폐지는 제후국인 방국의 폐지를 의미하고 새로운 황무지개간을 통해 군량도 해결하고 경제적으로 재정의 건실함을 갖게 되었다. 대부와 사 집단의 귀족세습을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관리임명제를 실행하였다. 이 또한 봉건으로 된 방국으로부터 제국으로 가는 길을 닦아놓은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상앙의 변법을 통해 진나라는 제국의 틀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진나라가 통일을 이룬 소이연이다. 하지만 진제국의 수명은 매우 단명이었고 그 뒤를 이은 한조는 천하를 얻고 나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 고민의 초점은 정치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이다. 진나라 초기에도 일부 인사들이 봉건제도인 방국을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일부는 군현제를 중심으로 제국을 건립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시황제는 봉건제도인 방국은 낡은 것이고 아울러 천자는 허수아비여서 강력한 권력을 지향하는 시황제의 맘에 들지 않아 군현제를 선택하였고 이 정치제도가 2천년이나 지속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군현제를 실시한 진제국의 수명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유방의 한조 초기에 한신을 비롯한 충신들이 군현제가 아닌 봉건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군현제가 봉건제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만약 유방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면 새로운 내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방은 양쪽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여 경기지역(한국의 京畿라는 표현이 중국역사에 있었음)을 포함한 수도권에서는 군현제를 실시하고 기타지역은 봉건의 방국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일국양제이다. 한조 초기 유방이 궁여지책으로 일국양제를 실시하긴 하였으나 봉건 방국들의 반란이 여기저기서 그치지 않았고 ‘문경지치’로 소문난 태평성세 시절에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강력한 군주인 한 무제가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체적으로 군현제를 지방에까지 확대 실시하여 제국의 정치체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군현제의 기본은 귀족세습제가 아닌 관료임명제이고 관료들은 한나라 시기에는 ‘천거(薦擧)’, 위진남부조 시기엔 ‘찰거(察擧)’, 수`당부터는 ‘과거(科擧)’에 의해 등용되었는데 이들을 사대부라 부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士)는 공부한 귀족집단, 대부는 권력을 가진 관료집단이며 공부한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곧 ‘사대부’라 부른다. 이 사대부 집단이 제국의 관료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2천년 제국역사를 살펴보면 지방할거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례는 많았으나 사대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권을 위협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조가 518년 동안 지속된 역사는 사대부 집단의 역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조선왕조의 장수비결에 있어서 그저 막연하게 반도인의 민족기질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마땅히 사대부역사를 중점으로 풀어야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조선왕조의 장수비결, 이와 관련해선 별도의 주제로 발표할 계획이다. 2천 년 전 중국역사에 일국양제의 정치체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비록 역사에 존재해 있었던 사실도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저 역사로만 남을 것이나 후세의 현명한 지도자가 나타나 그것을 잘 활용한다면 현시대에 도움이 크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역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울이란 말이 십분 맞다. 등소평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고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만약 홍콩을 수복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대륙의 정치체제에 맞춘다면 큰 혼란이 조성되었을 것이나 등소평의 현명한 일국양제의 도입에 의해 무리가 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한조 초기의 일국양제와 등소평의 일국양제가 다른 점이라면 전자는 실패했고 후자는 성공했다는 것이다.    
303    조작글, 사람 잡는다 댓글:  조회:6586  추천:2  2013-09-02
조작글, 사람 잡는다   어제 한 지인이 연변통신이란 사이트에 들어가 보라고 해 보았더니 나의 인생에서 처음 소름이 돋는 경악함을 금치 못했다. 철마라는 이름으로 올린 글인데 제목은 로 되어 있었고 글 내용은 조선족과 중국을 팔아먹는 문구들로 채워졌다. 우선 글은 ‘1950년 조선족 팔로군 남한 침공 진실해 지자’라는 소제목을 달았고 그 밑에 ‘김정룡 조선족 칼람니스트’라고 밝혔다. 글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없어 여기서 반복하여 말하고 싶지 않다. 혹시 나와 같은 동명인이 이런 글을 썼을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족 칼람니스트 김정룡’이라 밝히면 독자들은 내가 쓴 글로 오해할 수 있다. 연변통신에 철마라는 이름으로 올린 글이 내가 쓴 것이 아니라는 점 여기서 명백히 밝힌다. 첫째 글에서 철자, 어휘사용, 두음법칙, 뛰어 쓰기 등 문법상 너무 서툴러 나를 잘 아는 독자는 내가 쓴 글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칼럼을 칼람이라 하는 등 철자도 개판이고 전반 문장구성과 문맥도 매끄럽지 못함). 둘째 나는 300여 편의 글을 썼지만 정치와 역사에 민감한 문제를 여태까지 건드린 적이 없다. 일례로 내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수많은 강의를 해왔고 그때마다 수강자들로부터 고구려와 동북공정문제를 질문 받는데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어서 대답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셋째 2007년 나의 글은 조글로와 동북아신문 사이트를 제외하곤 나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함부로 게재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고 처음부터 현재까지 나는 조글로와 동북아신문 사이트에만 글을 보낸다. 넷째 조글로와 동북아신문에 발표된 글을 중국과 한국 측 정규적인 신문이나 잡지 혹은 국가 공인 언론매체에서 지면 혹은 사이트에 전재하는 경우는 많은데 이 범위를 벗어난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다. 다섯째 지면을 놓고 말하자면 주로 중국동포타운신문에 게재하고 일부 중국 측과 한국 측 언론매체나 잡지에 간혹 전재하는 경우가 있다. 여섯째 요즘 조선족대모임 카페에서 나의 동의를 거치고 글을 올린다. 그 외 사이트나 카페들이 나의 동의를 거친 적이 없다. 나의 동의를 거치지 않는 사이트나 카페들이 올린 글 중 조작글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독자들은 유념하기 바란다. 일곱째 나는 한국식으로 글을 쓰지 조선어식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연변통신에 나의 이름으로 된 글은 조선어식으로 쓴 것이므로 내가 쓴 글이 아니다. 얼마 전 조글로에서 한 네티즌이 나를 한국언론매체에 출연하여 조선족역사에 관련해 양심선언을 했다고 댓글을 달았는데 실로 밥 먹고 할 일이 없는 인간들이다. 나는 학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데 무슨 놈의 양심선언인가? 글을 많이 쓰다 보니 어쩌다 자그마한 신문의 주필을 맡고 있고 포럼을 개최하다 보니 연구소 소장이란 호칭을 갖게 되었고 장기를 좋아해 장기협회 회장, 연변일중 선생 출신이라 교사협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생활이 충실한데 뭐 밥 먹고 할 지랄 없어 양심선언을 한단 말인가? 더욱이 나는 조선족으로서 조선족을 팔아먹을 이유가 없고 중국사람으로서 중국을 팔아먹을 이유가 털끝만치도 없다. 나는 조선족을 상대로 강의를 많이 하는데 중국의 장점을 많이 말해 학생들로부터 어쩌면 한국에 온지 10여년이 넘는데도 중국에 대한 좋은 감정이 계속 살아 있는가고 말한다. 때론 한국과 한국인, 중국과 중국인 및 조선족을 비판하는 글을 쓰지만 반동이 되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 균형감각으로 이쪽도 저쪽도 잘 되자는 취지에서 쓰는 것이지 정치적으로 문제 되게 글을 써 본 적이 없다. 연변통신에 나의 이름으로 된 글은 여태껏 내가 쓴 글의 성향을 완전히 벗어나 한편의 반동 글인데 재차 성명을 발표하건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나와 동명인이 쓴 것이 아니면 백 프로 조작글이다.
302    다문화병에 걸린 재한조선족 댓글:  조회:6200  추천:3  2013-08-08
다문화병에 걸린 재한조선족 ‘재한다문화’란 말은 없다   인간이 이름이 있듯이 모든 ‘업체’는 간판이 있다. 간판은 하고자 하는 사업의 취지와 내용에 맞아야 하는 것은 상식적인 문제이다. 간판은 또 대중성을 띄기 때문에 더구나 상식에 맞아야 한다. 상식에 맞지 않는 간판은 그 업체 존재의 의미를 떨어뜨린다. 지금 재한조선족사회는 춘추전국시대이다. 언론이 많고 단체 또한 자고 깨면 생겨나듯이 우후죽순마냥 나타나고 있다. 대충 손을 꼽아보아도 30개 ‘업체’가 쉽게 잡힌다. 뚜렷한 취지나 목표의식이 없이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업체’를 설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질적인 내용이 없이 허세에 매달려 회장님이랍시고 폼을 잡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 어찌되었든 언론이 많고 단체가 많은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많을수록 경쟁이 심할 것이고 경쟁이 심하면 적자생존법칙에 의해 자연도태를 거쳐 우수한 ‘업체’만 남게 될 것이다. 문제는 남이 하니 나도 따라하는 사례가 많다보니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재한조선족사회에 다문화바람이 불고 있다. 조선족이 다문화에 속하느냐, 마느냐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 논쟁에는 관심이 없고 다문화간판에만 관심이 있다. 2천8백억원(다문화) 대 1천2백만원(조선족)의 정부 지원, 다문화에 유혹이 클 만도 하다. 조선족간판은 메리트가 없다. 다문화간판을 걸어야 메리트가 크다. 그래서 경쟁하듯이 다문화란 간판에 매달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상식을 벗어나는 다문화간판이 나타나고 있어 사회의 웃음거리를 지어내고 있다. 며칠 전 필자가 대림동을 지나다가 우연히 조선족행사에 마련된 화환에 ‘재한다문화’ 00협회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재한다문화’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재한중국인 혹은 재한조선족이라 말하는 것은 중국에 이미 중국인집단이 있고 조선족집단의 존재가 있고 그 집단의 일부가 한국에 왔기 때문에 재한중국인 혹은 재한조선족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다문화란 어느 나라에 실체로 존재했던 것이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다문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재한다문화’는 존재하지 않는 상식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뿌리가 있는 집단의 일부가 한국에 오면 재한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있지만 뿌리가 없는 집단이 한국에 와서 새롭게 이뤄진 것은 재한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재한조선족사회가 다문화에 매달리고 있는데 다문화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다문화간판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다. 다문화란 말은 1957년 스위스에서 먼저 생겨났고 1970년대 캐나다를 거쳐 지구촌에 퍼졌다. 다문화, 그 뜻은 한 개 나라에서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저마다 갖지 않는 생활양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민족이 합쳐 전체 인구 중 30%를 넘으면 다문화사회로 인정된다. 스위스의 경우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등 언어가 국가공용어인데 진짜 다문화사회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스위스, 캐나다, 미국 같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국가들만이 다문화사회이다. 중국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법적으로 공존해 있지만 다문화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다민족국가라고 말한다. 현재 한국에 외국인 수가 150만 명(조선족 포함)이며 전체인구의 3%밖에 되지 않고 다양한 국가 사람들이 한국에 살고 있지만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어 진정 다문화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날로 증가하고 있는 외국인과의 화합과 공존을 위해, 특히 결혼이민자와 그 2세들의 한국생활정착을 돕기 위해 다문화란 개념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한국에서의 다문화는 결혼이민가족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에 따라 상응한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이민자 중심으로 이뤄진 한국다문화에 조선족사회가 명분도 없고 상식에도 맞지 않게 매달리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301    ‘먹었는가?’, 중국인의 인사말 댓글:  조회:5853  추천:3  2013-08-03
‘먹었는가?’, 중국인의 인사말   100년 전 미국 선교사 아더`스미스가 중국 산동성과 하북성에서 26년 동안 체류하면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중국인의 성격을 반영한《중국인의 소질》이란 책을 발표하여 구미문화권에서 일약 중국통 스타로 떠올랐다. 아더·스미스는 책에서 “중국인은 위를 채우고 돈지갑을 채우는 것을 인생의 전부 보람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확실히 중국인은 먹는 것을 으뜸으로 간주하는 민족임에 틀림없다고 판단되어 아더·스미스의 지적에 공감한다. 이 지구상의 인류는 같은 문화권에 속한 인간도 민족에 따라 인사말이 다르다. 예하면 중국, 일본, 한국은 한문과 유교를 공통분모로 하는 중화문화권에 속한다. 하지만 세 민족의 인사말이 다르다. 그것은 세 민족이 흘러온 역사에 의해 달라지 게 된 것이라 나는 판단한다. 한국인의 전통 인사말은 ‘무사(無事)한가?’인데 이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천 번의 외침을 받아오면서 늘 ‘일(事)’이 생겨 불안했기 때문에 일이 없는가는 뜻으로 ‘무사한가?’가 인사말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의 인사말은 서양인과 비슷하다. 아침·점심·저녁 인사말이 다르다. 중국인의 인사말은 ‘먹었는가?’인데 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인사말이다. 참 특이하다. 이것도 중국식 특색이 있는 인사말이다. 중국판 도올·김용옥 교수, 중국 CCTV 백가강단 프로에서 강펀치를 날리고 있는 역중천(易中天) 교수는 중국인의 ‘먹었는가?’의 인사말 유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유목민족은 초창기부터 짐승을 잡아먹었기에 배고픈 고생이 덜했다. 농경에 의지해 먹고 사는 중국인은 농사시간이 길고 흉년을 만나면 배고픈 고생을 많이 해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지인을 만나면 인사말로 ‘먹었는가?’고 묻는다는 것이다. 나는 ‘먹었는가?’의 인사말 유래를 역중천 교수와 달리 생각하고 있다. 중국문화는 선진시대(先秦)에 이미 성숙되고 완성되었다. 선진시대 중국문화를 살펴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와 비슷한 개념이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선진시대 중국문화는 이 현세 지평선 너머에 다른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세상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것이 없었다. 인간이 신앙이 없으면 현세에 묶여 살 수 밖에 없다. 바로 중국인은 선진시대문화의 영향 때문에 현세밖에 모르는 리얼리즘에 빠져 있었다. 신앙이 없는 현세생활이란 곧 인간은 타고 난 본능에 의해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인간이나 동물은 일단 먹어야 생명이 유지된다. 문화고 뭐고 간에 일단 먹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입는 것과 잠자는 것은 모두 먹는 것에 비하면 둘째 셋째 가는 문제이다. 한민족도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있듯이 먹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겨왔던 것이다. 과학이 창명한 현대사회에서 먹을 것이 풍부하다고는 하지만 역시 먹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수 있다. 옷은 10년 전 옷을 입어도 무리가 없고 한국 옷이냐, 중국옷이냐 굳이 가릴 필요 없다. 나는 20년 전 중국에 있을 때부터 줄곧 한국 옷을 입어왔지만 몸이 아무 거부반응이 없다. 이에 비해 음식은 한국에 온 지 강산이 한 번 반 바뀔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한식이 습관 되지 않는다. 연 며칠 한식만 먹으면 나의 몸에서 심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아직도 중식이 입에 더 맞는다는 뜻이다. 나의 회사 직원이 한국인과 중국인이 반반인데 정심 때면 조선족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중국음식점에 향하고 한국인은 한식집에 간다. 음식문제 만큼은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 타협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이 먹고 살기 위한 목적인데 서로 맛없게 먹는 것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 석학 임어당은 그의 저서 《중국인》에서 “애국주의란 듣기엔 거창하나 따지고 보면 각자 어릴 적 먹던 음식기호(飮食嗜好)를 지켜내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아~ 이 지구상의 인류는 공통적으로 먹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주장에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먹는 것이 최우선과제라면 신앙이 없이 현세주의에 빠져 있는 중국인은 당연히 먹는 것이 세상만사 중 으뜸으로 간주하고 인사말도 ‘먹었는가?’로 된 것이 동지섣달에 파리가 얼어 죽는 것이 이상할 것 없는 것처럼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는 본다. 중국인이 식을 세상만사 중 으뜸으로 간주해온 덕분에 중국요리가 세상에서 가장 발달할 수 있었다. 어느 서양 부자가 배부르고 등 따시니 “프랑스격조로 된 가옥에서 일본마누라 꿰 차고 중국요리를 먹는 것이 꿈이로다.”고 한담을 했다고 한다. 지구촌에 이런 삶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프랑스격조로 된 가옥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말이 되겠고, 마누라는 일본여자가 최고라는 뜻이겠고, 요리는 중국요리가 으뜸이란 의미일 것이다. 중국인이 먹는 것을 으뜸으로 간주해왔다는 증거가 또 있다. 문자결구(文字結構)이다. 한문이 상형문자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문을 상형문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따져보면 상형문자보다 회의문자(會意文字) 글자 수가 엄청 더 많다. 우선 아름다울 ‘미(美)’자가 회의자인데 위에는 ‘양(羊)’이고 양 아래는 사람 ‘인(人)’이 붙어 있다. 양과 사람이 합치면 아름답다는 것이다. 양(羊)이 말(言)하면 착할 ‘선(善)’이 된다. 상서로울 ‘상(祥)’자는 앞에 볼 ‘시(示)’ 변이고 뒤에 양이 붙어 있다. 볼 ‘시(示)’는 갑골문에서 하늘에서 무엇이 내래오는 모습인데 이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 국을 뜻하는 ‘갱(羹)’자는 위에 새끼양이고 아래는 또 양이 들어 있는 아름다울 ‘美’이다. 한 글자에 양이 두 개나 들어 있다. 새끼양으로 음식을 만드면 맛이 기가 막히게 좋으니 ‘갱(羹)’이 된 것이다. 의로울 ‘의(義)’자는 위에 양이고 아래는 나를 뜻하는 ‘아(我)’이다. 양이 나의 것이면 의로운 의미로 된다. 앞에 사람 ‘인(人)’변이 붙으면 의리라는 의(儀)가 되고 말씀 ‘언(言)’변이 붙으면 의논하는 ‘의(議)’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양(羊)’이 들어간 글자는 좋은 뜻이다. 상고시대 중국인은 왜 양(羊)을 그토록 미화하였을까? 양은 고기가 많고 맛이 좋다. 음식으로 사용하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양가죽을 벗겨 옷으로 입을 수 있고 양털은 여러모로 사용가치가 높다. 양의 특징은 온순하고 행동이 둔해 빨리 달리지 못한다. 다른 짐승에 비해 사람이 다루기가 가장 쉽고 편하다. 양의 이와 같은 실용가치에 의해 고대사회에서 양을 제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을 제물로 삼은 것은 동서고금(중국어로 古今中外라 함)이 모두 똑 같았다. ‘희생양’이란 서양 종교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양을 화폐교한 도구로 사용된 역사가 있고 중국에서는 양을 연 중 가장 큰 명절인 춘절(음력설)에 선물용으로 중시 받아왔다. 지금도 중국인은 양을 선물하는 관습이 유지되고 있다. 중국인이 식(食)을 세상만사 중 으뜸으로 간주했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로서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들 수 있다. 먹는 것을 하늘만큼 큰일로 여긴다는 뜻이다. 상고시대 인류는 하늘을 가장 으뜸의 경의로운 대상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서양은 하느님에 목을 맬 만큼 신앙이 발달했고 중국인은 서양인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인 하느님 신앙은 없었으나 아무튼 하늘을 경의롭게 여겨왔던 것만은 사실이다. 무슨 불상사가 생기면 “상제여, 나를 지켜주세요” “하늘이여, 나를 구해주세요”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하늘이 경의의 대상으로 된 것은 하늘은 크고 변화무상하고 지상의 운명은 하늘이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역대황제는 모두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진리로 받들어왔고 치국방침을 세웠다.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하나같이 받들어왔다면 중국문화는 먹는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성립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먹는 것과 관련된 중국문화를 알아보는 것이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300    동포정책 법무부가 주도하냐, '골목부'가 이끄냐? 댓글:  조회:7247  추천:3  2013-07-17
위명여권, 불체자 합법화 동포정책 법무부가 주도하냐, ‘골목부’가 이끄냐?   일부 단체 위명여권과 불체자 동포 구제정책이 나오기도 전 금전부터 챙겨 동포사회 혼란에 빠뜨려   “우리 00님이 적극적으로 데모한 덕분에 법무부가 위명여권과 불체자 구제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단체에 접수하면 선착순으로 먼저 구제받을 수 있다. 우리 00 보증으로 구제가 이뤄지니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우리 00를 찾아오도록 주변사람들을 동원하라.” 지난 6월 중후순경부터 동포사회에 시끌벅적하게 떠도는 말이다. 7월 1일부터 실시한다는 구체적인 일자까지 제시하면서 수속비까지 받았다. 한 개 단체의 사례가 아니라 여러 단체가 저지른 일이다. 동포밀집지역 여러 곳에서는 문어귀에 ‘긴급’이라 눈에 띄게 밝히고 위명여권과 불체자 조건 없이 구제함, 선착순 접수 등 내용의 전단지를 비치해 놓고 동포들을 유혹하고 있다. 바람이 일면 사기행각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은 이미 동포사회의 ‘관행’이라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본지가 입수한 소식에 의하면 00행정사는 외국인등록증 색이 칼라인 것만 구제되고 흑백이면 구제가 어려우니 120만원 더 내면 구제해주겠다고 하면서 추가비용까지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한심한 사기극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요즘 동포사회는 흑백외국인등록증을 소지했던 동포들이 구제받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져 또 새로운 혼란이 조성되고 있다. 동포정책을 펼치는 법무부는 아직까지도 불법체류 합법화 구제정책을 공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미 법무부가 시행에 들어간 것처럼 일부 단체와 행정사들이 돈을 받고 있어 동포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데모 덕분에 구제정책이 나오게 되었다.” 마치 법무부가 본래 구제정책을 펼 의도가 없었는데 단체들이 데모하여 어쩔 수 없이 핍박에 의해 양산박에 오른 것으로 오도(誤導)되고 있다. 당당한 대한민국 정부 부처인 법무부가 일부단체에 끌려 다니는 모양새로 동포사회에 비춰졌다는 뜻이다. 동포들은 이를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고 접수시키고 돈까지 납부했다. 법무부 정책이 공지되기도 전에 미리 돈부터 받는 것이 위법이 아니냐는 여론이 뜨거워지자 일부단체들에선 회원비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회원비를 받을까? 찜찜한 구석이 있다. 일부단체들에선 여론이 뜨거워지자 환불처리를 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동포사회는 법무부보다 일부 단체를 더 신임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 안타깝다. 이번 사태를 통해 법무부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과거 구제정책을 공지하기 전에 미리 법무부나 혹은 산하 출입국관리사무소 출신 일부 행정사들이 미리 소식을 알고 한발 앞서 접수에 들어가는 등 사회 혼란을 조성하여 언론은 늘 그들의 뒤를 쫓는 모양새가 되어버려 자기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사태는 법무부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권지도자와 법무부 책임자가 데모현장을 찾아 구제 약속을 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일부 단체들이 이를 이용한 것이 잘못일 뿐이다. 그렇지만 법무부가 하루 속히 정책을 마련하여 공지하고 언론을 통해 홍보가 잘 이뤄진다면 혼란한 동포사회가 어느 정도 수습이 빨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동포타운신문 251호
299    중국 반부패 험난한 길 댓글:  조회:6375  추천:5  2013-07-06
중국 반부패 험난한 길   인민폐 수억 원 들여 만든 영화 에 장개석이 아들 장경국과 나눈 대화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부패, 잡으면 당이 망하고 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腐敗, 反就亡黨, 不反就亡國.).” 그런데 ‘장개석전집’을 연구한 홍콩 00학자에 의하면 장개석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작가가 지어냈다는 것이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왜 작가가 영화에 이와 같은 말을 집어넣었을까? 해답은 독자들한테 맡기기로 하겠다. 중국부패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래서 매년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릴 때마다 건의 사항 중 첫 번째로 제기되는 것이 바로 부패문제이다. 요즘 시진핑 주석이 반부패운동을 벌여 인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고 국제사회도 희망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중국 반부패의 길은 험난하다고 보고 있다. 왜? 나는 역사문화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시각으로 현대를 조명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보인다고 주장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중국부패역사는 그 뿌리가 너무 깊어 뽑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중국부패역사는 대략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혹자는 2천 년 전 중국에 부패가 없었는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답부터 말하자면 전국시대 후기에 들어 부패가 싹 텄고, 대진제국시기부터 부패가 만연되기 시작하였고, 진·한대부터 매관매직이 생겨나면서 부패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청대말기까지 제국시대는 부패가 줄곧 성행하고 있었다. 그 후 중화민국정부도 오늘날 중국도 부패가 치명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후기 전에는 왜 부패가 없었을까? 중국부패역사는 관료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전국시대 후기 전까지 官은 대체로 사관(史官)과 무관(巫官) 두 가지였다. 사관은 사람의 일을 기록하는 직업이고 무관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관장하는 직업이다. 그 당시 사관과 무관은 제국시대 관료들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또 주나라 때 사회지도층인 대부와 사(士)를 관으로 취급할 수 있겠으나 역시 제국시대 관료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는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대부는 자신의 영지와 채읍이 있었기 때문에 ‘직업관료’신분이 아니었고 사는 귀족으로서 영지는 없었으나 대부를 보조해 영지를 가꾸기 때문에 먹고 사는데 지장에 없었다. 더욱이 대부는 자신의 영지가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타락은 있었어도 부패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부와 사는 모두 귀족신분으로서 대대로 세습되어 생계가 보장되기 때문에 부패할 이유가 없었고 정치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대부와 사의 정치참여 의미는 권력 확장이었다. 그러던 데로부터 전국시기 후기에 이르러 진나라가 상앙변법을 도입하면서 봉건을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고 따라서 대부와 사 계급의 세습을 폐지하고 대신 관원임명제를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역사에 부패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진제국이 건립됨에 따라 천하는 하나의 중앙집권통치권력 밑에 귀속되고 제국의 모든 것, 일초일목까지 공공의 재산으로 등장한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 부른다. 이때부터 나라의 길은 공로(公路), 관청에서 사무를 보는 직원을 공무원(공무원),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의 서류는 공문서(公文書)로 등장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公’은 백성의 몫까지 있는 진정한 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하위공’은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백성을 기만하는 허울 좋은 가면극이었고 실제로는 천하의 모든 것이 황제 일개인의 소유였다는 것이다(普天之下, 莫非皇土). 황제가 어떻게 천하를 소유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바로 황제는 천자요, 하늘이 내린 수권(授權)을 부여받아 천도를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천하가 황제의 것이지만 황제 일인이 직접 경영할 수 없다. 그래서 황제를 대신해 경영을 맡을 자들이 필요했고 그들을 역사에서는 관료집단이라 부른다. 기업을 말하자면 회장님이 직접 경영에 나설 수 없어 사장을 두고 그 밑에 부사장, 이사, 전무, 부장, 과장, 팀장, 대리 등 수많은 간부를 채용하여 경영을 맡기는 것과 같다. 일면 제국의 구조와 현대기업구조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제국의 모든 것은 황제의 소유이지만 현대기업은 주주제와 주식제로 서로 관리감독이 실시되고 있고 층층의 간부들은 모두 자신의 몫이 있기 때문에 회사의 흥망성쇠가 자신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에 책임감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제국의 관원은 자신의 몫이 없고 황제를 대신해 대리관원을 맡을 뿐이어서 제국의 흥망성쇠에 관심이 없다. 제국이 흥성하여도 개인의 주머니가 두툼해지는 것도 아니고 제국이 망해도 나 개인과는 무관하다. 더욱이 제국의 관원은 세습제가 아니므로 언제 어떻게 잘릴지 보장이 없기 때문에 자리에 있을 때 해먹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나면 빈털터리가 되기 때문에 극구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機不可失, 時不再來, 過期無效). 제국은 군현제(때로는 성·부·현제, 도·부·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제국초기부터 멸망까지 현의 행정단위는 줄곧 존재해왔다. 지금은 말단 행정단위가 향진이지만 제국시대 말단 관원이 바로 현령(縣令:현장, 현관)이었다. 현령은 비록 말단 관원이었으나 백성과 부딪치는 現場의 관원으로서 목민지관(牧民之官)이었기에 비리를 저지를 기회가 가장 많은 자리였다. 왜 역대 현령들이 비리를 많이 저질렀을까? 우선 제국은 농경문화 중심사회였기 때문에 세금을 거둬들이는 데 한계가 있어 재정이 충족하지 못했다. 넉넉지 못한 재정수입으로 황족일가의 사치를 보장해야 하고 제국의 권력보장을 위해 군대도 양성해야 하고 황제를 대신해 대리관원을 맡은 방대한 관료집단을 먹여 살려야 한다. 그래서 말단 관원인 현령의 봉급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현관의 봉급은 한 대의 경우 조 20휘(280키로그램)에 돈 2천 냥이었다. 명대에 인민폐로 환산하면 1,130원 정도였다. 현관뿐 아니라 전체 관료들의 봉급이 매우 낮았다. 명대 정이품에 해당하는 육부상서가 1년에 받는 돈이 은 152냥이었고 청대 일품 관원은 겨우 180냥을 받았을 뿐이다. 제국시대 官과 僚는 간부, 吏는 관청의 직원이었다. 관료와 관리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정무관 관료인 주목과 현관은 그나마 낮은 액수이나 정해진 봉급이 있었지만 사무관인 이원(吏員)과 아역(衙役)들은 정해진 봉급도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목민지관인 주목(州牧)과 현관 및 이원과 아역들이 비리를 저지른 데는 단순히 개인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제국의 관원체제는 임명제(한대에는 察擧, 위진남북조시대는 薦擧, 수당 이후로는 科擧制에 의해 관료를 등용시켰으나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임명제였음)이기 때문에 아래 관원은 윗선에 잘 보여야 자리를 보존할 수 있고 승진도 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을까? 역시 금품을 바치는 것이다(上貢). 이것을 역사에서는 ‘효경(孝敬)’이라 한다. ‘효경’의 내원은 백성을 상대로 수탈하는 것이다. 백성을 수탈하여 효경을 바치는 것은 제국시대에 있어서 하나의 룰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관장누규(官場陋規)’라 부른다. 제국시대 관원들은 거의 다 ‘관장누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해서(海瑞) 같은 청관이 가끔 있었지만 부하들의 사무용 용지조차 직접 챙기는 해서와 같은 ‘각박한’ 청관이 주변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해서가 파면된 것이 그가 세상이 혼탁한데 홀로 깨끗한 각박한 청관이었던 것이 숨은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제국시대 ‘효경’과 ‘관장누규’는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부간부들에 해당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간부들의 부패가 ‘효경’이 전부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일부 간부들의 과도한 사리사욕이 부패의 주요 이유이다. 일부 공공기관에서 간부 선거제를 실시하고 있으나 비리가 여전한 것은 부패가 단순히 ‘효경’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패의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 우선 제국은 소유권이 불분명했다. ‘천하위공’이 문제였다. 천하의 것이 모두 공이니 관리들은 황제의 대리인 역할만 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고 자리에 있을 때 해먹는 것이 관례로 흘러왔다. 또 ‘천하위공’은 황제 일인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황제는 방대한 관료집단을 두게 되었고 황제 자신은 자기 황족의 세습만 보존된다면 관료집단의 부패를 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황제가 맘먹고 부패 척결에 팔을 걷고 나선다면 그 방대한 관료무리가 반기를 들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제국은 무너지게 된다. 실제로 제국시대에 할거세력 무리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 사례는 있었어도 관료집단이 반기를 들어 봉기를 일으켜 제국을 전복시킨 사례는 없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황제가 관료집단의 부패를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배만 불리면 반항이 없었다는 증거이리라. 관료들의 부패의 원인 가운데 덕치가 문제였다. 덕치를 강요하기 때문에 관료들의 봉급을 낮게 책정하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그러나 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 덕이 밥그릇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제국시대에 덕치를 주장하였기에 청관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청관은 극소수였다. 임칙서 같은 아무리 청백한 관리라 하더라도 ‘관장누규’에 자유롭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간부들이 덕을 강요받기 때문에 청관이 있기는 하나 실제생활에 있어서 간부도 경제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인만큼 집도 마련하고 자녀를 공부시키고 사회 인간관계 처리도 해야 하는데 덕이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부패를 저지른다. 북경의 유명한 왕산 작가는 “당정간부들이 노임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관장에 있는 그들이 지출도 많을 것이니 일정한 회색수입은 눈감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당정간부를 하려 하겠느냐?”고 주장한다. 제국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중국도 마찬가지, 중국은 전통적으로 ‘가족본위’의 문화이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 부패를 저지르는 요소도 있다. 한국이 민주화사회라 하지만 아직도 간부들의 부패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통유교문화 영향에 의해 ‘가족본위’가 뿌리 깊기 때문이다. 제국시대 황제가 관료집단의 부패를 눈감아 주었다고 해서 제국시대에 반부패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세계역사에서 중국에 감찰기구가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고 한다. 진한시대에 이미 감찰부가 있었다. 서한 때는 ‘어사부(御史부)’, 동한 이후에는 ‘어사대(御史臺)’, 명·청 시대에는 ‘도찰원(都察院)’이라 불렀다. 그러나 고양이가 있다고 해서 쥐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제국시대 ‘고양이’는 ‘쥐’를 잡을 의지가 약했고 오히려 쥐가 마련한 먹거리를 나눠 먹으려는데 신경을 쓰고 있는 판에 부패를 잡는다는 것은 어쩌다 닭을 잡아 족제비한테 보이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기률검사위원회가 있고 반탐국이 있어도 부패가 만연한데 하물며 제국시대에 오죽했겠는가!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는 명언을 남겼다. 즉 오늘날의 사회 제현상은 역사의 관성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의 부패는 제국시대 2천여 년의 부패의 관성표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택동이 건국 초기 ‘삼반오반’운동을 일으켜 부패척결에 나서 효과를 거뒀으나 개혁개방 이후 경제시대에 들어 제국시대 부패가 다시 재현되고 있다. 2천여 년의 제국역사, 중화민족에게 휘황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동시에 사회를 좀 먹는 바이러스도 너무 많이 남겼다. 그 가운데 부패도 하나의 심각한 바이러스로 꼽을 수 있다. 장개석의 중화민국정부도 제국의 부패바이러스 영향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다. 오늘날 부패바이러스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뿌리 깊은 부패바이러스를 제거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그 길이 험난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298    조선여자 거시기 차고, 중국여자 거시기 따뜻하다? 댓글:  조회:13545  추천:4  2013-06-20
조선여자 거시기 차고, 중국여자 거시기 따뜻하다?     내가 소학교는 조선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부터 한족학교를 다녔다. 조선족과 한족의 삶이 여러모로 많이 달라 서로 궁금한 것도 참 많았다. 그때 한족아이들이 나한테 질문했던 중에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남는 것이 하나 있다. “니들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차다고 하는데 진짜냐?” 이 질문은 그 당시 한족성인남자들이 조선족여자에 대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내가 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냐.” 나의 퉁명스런 대답이었다. 사실 성경험이 없었던 고등학생인 내가 조선족여자의 음도가 찬지, 따뜻한지 알 길이 없었고 설사 조선족여자와 성관계 경험이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족여자와 성관계를 해봐야 비교가 될 터이니 말이다.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차다는 것을 거꾸로 추리하면 한족여자의 거시기는 따뜻하다는 말이 성립된다. 사회 성인이 되고 나서, 특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맨발의사 직업에 종사하면서 ‘직업병’ 때문인지 아무튼 나는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진짜 찬 것인지에 대해 살짝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의학상식에 의하면 조선족여자와 한족여자의 정상체온이 같은 36~37도이니 거시기의 온도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한족들이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차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걸까? 의학상식으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과학상식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관념상식’에 의해 의문을 풀 수밖에 없지 않는가. 여기서 말하는 ‘관념상식’이란 곧 생활관습에 의해 생겨난 억측일 수도 있다. 한족여자는 뜨거운 물을 마시고, 뜨거운 요리를 먹고, 서리 내리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이듬해 얼음이 풀릴 때까지 두터운 솜옷을 입는다. 조선족여자는 냉수를 마시고 냉식(冷食)을 먹고 아무리 살을 에는 엄동설한에도 솜옷이 미에 손상된다고 입지 않는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는 짐작이 올 것이라 믿는다.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한족여자의 거시기에 비해 차다는 인식은 곧바로 이러한 생활관습의 차이에서 생겨난 ‘관념상식’이라는 것을. 조선민족의 음식특징은 냉식이 위주이고 중국인의 음식특징은 열식이 위주이다. 김치는 찬 음식이다. 찬 음식인 김치는 우리민족음식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김치 사촌인 여러 가지 짠지들도 전부 찬 음식이다. 우리민족이 즐겨먹는 생회, 식혜 등도 찬 음식이다. 명태반찬도 찬 음식이고 낙지, 오징어무침 반찬도 찬 음식이다. 조선반도는 산이 많아 산나물도 굉장히 많다. 산나물을 더운물에 데쳐서는 식혀서 여러 가지 양념에 무쳐 먹는데 역시 찬 음식이다. 특히 오이, 고추, 파, 배추 등 여러 가지 야채는 날 것 그대로 장에 찍어 먹는다. 찬 음식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우리민족의 밥상은 이렇듯 찬 음식이 많고 뜨거운 음식은 한두 가지밖에 없다. 냉수에 찬 음식, 찬 술을 마시는 것은 전형적인 냉식이다. 내가 1980년대 초반 장춘에서 공부할 때 있었던 일이다. 한 주 네 끼만 쌀밥을 먹고 나머지는 밀가루 음식이어서 조선족음식습관에 맞지 않아 배고픈 고생을 참 많이 했다. 가끔 집에서 갖고 간 누룽지를 뜨거운 물에 담가 먹는 것이 생활개선이었다. 가을철 학교식당에서 겨울음식장만을 위해 배추를 학교운동장에 말렸다. 조선족학생들이 뜨거운 물에 담근 누룽지에 배추를 훔쳐 기숙사에서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 별미였다. 이를 목격한 한족학생들이 마치 우리조선족을 야만인 대하듯 이상한 눈길로 바라본다. “배추를 날것으로 먹는 것을 머리에 털이 나 처음 본다.” “그렇겠지, 너의 민족과 우리민족이 음식습관이 다르니까.” 이런 대화가 오갔고 우리조선족이 하도 맛있게 먹으니 걔들 입에 군침이 돌고 있었다. 먹어보고 싶어 하면서도 “배추를 날것으로 먹으면 배탈이 나지 않느냐? 균이 살아 있을 텐데.” 말이 많았다. 결국 한 학생이 먹어보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먹더니 맛이 있다고 엄지를 내민다. 왜 조선반도는 ‘냉식’, 중국인은 ‘열식’을 즐기는 음식문화가 생겨났을까? 조선반도는 산이 좋고 물이 좋다. 기후가 좋고 바다에 둘러 쌓여 공기도 맑고 좋다. 수질이 좋고 공기가 좋으니 야채나 산나물을 날것으로 먹어도 탈이 없다(조호길 선생의 지적). 조선반도는 또 예로부터 사계절이 분명하고 산천이 아름다워 ‘풍류’에 집착해왔다. 바람의 특징은 시원하다. 시원한 바람의 특징이 몸에 배인 조선반도 사람은 냉수를 마시면 시원한 느낌이 들어 곧 잘 마신다. 세상에서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 시원하다고 표현하는 민족은 조선민족밖에 없는 데 역시 바람의 시원한 원리에 따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반도 사람은 바람문화가 몸에 배어 시원한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음식문화도 역시 냉식을 즐긴다. 중국인이 냉수를 마시지 않는 것은 수질이 나쁜 이유도 있겠으나 냉수가 위에 들어가면 몸이 차지고 따라서 여러 가지 질병을 유발하기 쉽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반도 사람은 시원한 복장을 선호한다. 전통복장인 치마저고리가 유력한 증거이다. 이른바 한복이라 부르는 치마저고리는 디자인이 널찍한 것이 특징이다. 바람문화로 인하여 몸이 시원해야 생식력이 강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중국인이 조선족을 욕하는 말, ‘따쿠당(大褲襠)’은 확실히 바짓가랑이가 널찍하다. 널찍하다 못해 무릎까지 드리운다. 중국어로 ‘따쿠당’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왜 우리선조들이 바짓가랑이를 그토록 널찍하게 디자인하였을까? 바람문화 때문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통해야 거시기가 항상 정력왕성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남자들이 아직도 한겨울에 내복을 입지 않는 관습이 곧바로 이런 맥락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민족은 남자들이 주방에 얼씬거리는 사내를 영 못 마땅하게 여기고 바보 취급하는 것은 유교적 남존여비에 의해 그렇다고 믿는다. 사실 유교적 영향을 받기 썩 이전부터 조선반도는 사내들이 주방출입을 매우 꺼렸다. 도대체 무슨 이유였을까? 바로 주방엔 불이 있다. 사내 거시기가 불에 쬐이게 되면 정력이 떨어진다고 믿은 데서 비롯된 관습이었다. 중국인의 두터운 솜바지는 이른바 열복이다. 열복은 행동이 몹시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 열복을 즐겨 입는 관습은 역시 몸을 따뜻하게 굴어야 여러 가지 질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중국인은 우리민족에 비해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노인이 적고 고혈압 때문에 오는 여러 가지 질병도 적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산후병을 앓고 있는 부녀가 조선민족부녀들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것이 사실이다. 특수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중국여성의 산후조리는 아마 세상에서도 으뜸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따져 이폐가 어떠한지를 차치하고 일단 그들의 정성 하나만 정말 탄복한다. 중국부녀들이 분만하면 100일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이 드러누워 몸조리 한다. 먹는 것도 말 못할 정도로 잘 먹는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도 돼지고기 반 체, 계란 500개는 기본이다. 조선부녀들이 분만하면 기껏해야 돼지 족발 몇 개, 계란 이삼십 개, 미역 둬 근이면 족하다.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 않는가! 조선부녀들은 한 달 지나기 바쁘게 밥도 짓고 빨래도 한다. 중국부녀들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한 달이 아니라 곱하기 셋이 지날 때까지 황후보다 더 대접받는다. 조선부녀들은 한 달이 지나기 바쁘게 남편들이 참지 못하고 덮치는 데 비해 중국부녀들은 100일 동안 남편이 곁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다. 남편들이 그동안 아예 덮칠 엄두도 못 낸다. 유태인의 율법보다 더 철저하게 지킨다. 남편들이 참지 못하니 시중들러 온 처제와 그 짓거리 한다. 그래서 중국인 속담에 ‘처제는 절반 엉덩이’라는 말이 있다. 열수를 마시고 열식을 먹고 열복을 착용하는 중국부녀들의 몸이 냉수를 마시고 냉식을 먹고 시원한 한복을 입는 조선민족부녀들에 비해 몸이 따뜻할 것이란 인식이 틀리지는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민족의 생활관습에 의해 추리하면 “조선여자의 거시기는 차고 중국여자의 거시기는 따뜻하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나의 ‘논리’를 괴변이라 몰아붙여도 어쩔 수 없다.  
297    나는 신라통일 예찬론자다 댓글:  조회:7024  추천:12  2013-06-08
나는 신라통일 예찬론자다   “고구려가 통일했어야 했다.” “신라가 통일한 것이 다행이다.” 한국학계는 이 문제를 놓고 아직도 갑론을박 중에 있다. 조선족사회문화인들은 고구려통일예찬론(가설)에 빠져 신라통일을 영 못 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구려는 중원정권에 맞서 싸웠는데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즉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조개떡 하나 갖고 서울로 못 간다.’ 이북의 속담이다. 역사를 해부하고 진단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표면상의 어설픈 민족적인 감정을 갖고 역사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문화를 기본바탕으로 연구하고 그때 그 결과가 후예들한테 어떤 영향을 미쳐왔나를 충분히 공부하고 나서 발언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먼저 중국역사를 간단히 짚어보자. 중국은 통일과 분열 반복의 역사였고 그 동안 23개 왕조가 존재해 있었다. 23개 왕조 중에 위진남북조시대 일부이민족통치, 몽고족의 원나라 지배, 만주족의 청국 등 이민족의 천하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민족이 통치했던 아울러 통치기간이 어떻게 길었든 중국은 시종일관하게 한문화(漢文化)를 바탕으로 흘러왔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유명한 도사(道師), 유생(儒生), 법사(法師)를 불러들여 책사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오고 있다. 뜻인즉 중국을 다스림에 있어서 몽고문화가 아닌 중국전통문화(한문화)를 통치무기로 삼았다는 의미이다. 만주족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치포나 변발 등이 만주족의 문화였지만 통치무기는 여전히 한문화였다. 이 만문(滿文)자전인 것이 아니라 한문자전인 사실이 말해주듯 만족문화는 사라져가고 한문화사회였다. 그래서 중국역사는 문화역사라는 결론이다. 5천년 중국이 중국답게 흘러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튼튼하고 견고한 한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반도가 수차례 모자라는 천 번의 외침을 당해오면서도 오늘날까지 반도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반도의 삼국시기로 돌아가 보자. 고구려는 중원정권과 인접해 있었기에 중국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례로 왕을 제치고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막리지 연개소문은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은 청을 올린다. “전하, 가마솥의 받침대가 세 개이듯이 나라를 받치는 기둥도 마땅히 세 개여야 하옵니다. 우리고구려는 유교와 불교는 그런대로 보급되어 있으나 도교는 영 말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도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인 줄로 아옵니다. 그렇게 하려면 당나라에 요청하여 도사를 모셔오는 것이 시급하옵니다.”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청을 받아들였고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의 요청에 의해 도사를 파견하고 도관까지 지어주었다. 고구려왕이 직접 도사의 강의를 경청하였다는 이야기가 김부식의 《삼국사기》외 김일연의 《삼국유사》에 기재되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고구려는 문화적으로 중원정권과 발을 맞추기에 노력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아울러 고구려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국경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압력도 압력이거니와 더욱이 문화적으로 당나라가 많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중원문화에 대한 동경의 발로에서 생겨난 자발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화적으로 ‘대륙성’이 강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민족문화의 퇴화를 의미한다. 백제는 지리적으로 현해탄을 사이 두고 있는 일본과 가깝게 지냈고 아울러 중국 양자강중하류지역과 교류가 빈번해 문화적으로 많이 성숙되고 세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국제성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에 자민족문화성격이 점점 퇴화되어 가고 있었다. 고구려의 문화특징이 ‘대륙성’이었다면 백제의 문화특징은 ‘국제성’이었다. 고구려와 백제와는 십만 팔천 리나 다르게 신라는 문화적으로 ‘촌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신라는 위치적으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몹시 편벽했다. 육지를 통해 중원으로 가는 길목은 고구려가 막혀 있었고 해상통로는 백제가 버티고 있어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겨우 중원정권과 교류가 시작되었을 정도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신라는 중원문화의 영향이 아주 미미했다. 일례로 불교가 4세기 초에 고구려에, 4세기 후반에 백제에 전파되었던데 비해 신라는 527년에 이르러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외래종교를 받아들임에 있어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유교가 유입되자 신라 사람들은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풍교일 따름이며 다만 그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라 사람들은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풍교’라 불렀다. 썩 후에 불교가 유입되자 역시 같은 맥락에 의해 불교를 ‘석씨풍교’라 불렀다. 불교유입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신하들 앞에서 조카 이차돈의 목을 치면서까지 불교를 받아들인 제23대왕은 법흥왕이었다. ‘법’은 불교를 뜻하고 ‘흥’은 흥기를 의미하는데 법흥왕이란 곧 불교를 흥기시키는 왕이라는 뜻에 의해 지어진 호칭이었다. 제24대왕을 진흥왕이라 불렀는데 역시 불교를 진흥시킨다는 뜻에서 얻은 호칭이었다. 그런데 진흥왕은 비록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불교를 진흥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무기는 역시 불교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앞세워야 한다(興邦國, 須先風月道)”고 밀어붙였다. 아울러 본래 원화(源花)를 화랑으로 변모시키고 화랑도를 일으키는 것을 국가 으뜸의 대사로 추진했다. 화랑도는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원화도(源花徒), 풍류도(風流徒)라고도 부른다. 화랑도 명부를 ‘풍류황권’이라 했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화랑도는 신라고유풍교에서 유래되었고 아울러 신라풍교발전을 절정에로 이끌어 신라인의 정신지주가 되었고 신라인의 혼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화랑도에 대해 할 말이 태산 같이 많지만 생략하고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신채호의 의미 깊은 지적을 빌어 마무리 하겠다. “화랑을 모르고 조선을 말하는 것은 마치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운운하는 것과 같이 우둔하다.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것은 화랑이다. 유감스런 것은 화랑의 유풍이 미연하게나마 남아 있었는데 국풍파인 묘청집단을 숭송파(崇宋派)인 김부식 집단이 소탕해버림에 따라 조선은 한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필자는 단재·신채호의 지적을 동의하면서 약간 견해를 달리하고 싶다. 즉 단재·신채호의 말에 따르면 고려 중기부터 조선의 혼이었던 화랑유풍이 자취를 감추고 한문화일변도로 흘러왔기 때문에 조선다운문화가 소실되었다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임어당은 그의 저서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했지만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받들어왔다.”고 지적하였다.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문화라 하지만 인간은 문화보다 본능에 의해 세상을 살아가는 비중이 더 크다. 한 례로 유교는 강력한 사회질서를 구축하기를 강조해왔으나 중국인은 아직도 공공질서의식이 매우 빈약한 이유가 바로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을 주창하는 도교의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도리로 반도에서 비록 고려 중기부터 한문화에 빠져 왔고 조선조 518년 동안 유교를 뼈가 절도록 받아들였으나 반도인의 인간타입은 반도고유문화에서 형성된 ‘멋’ ‘맛’ ‘판’이다. 대저 ‘멋’ ‘맛’ ‘판’이란 무엇인가? ‘멋’ ‘맛’ ‘판’은 풍류도의 정수이며 쉽게 말하자면 신라풍교에서 유래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말하자면 신라풍교는 중국과 일본 및 중국동북쪽의 많은 민족과 다른 인간타입의 문화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멋’ ‘맛’ ‘판’이다. 아울러 ‘멋’ ‘맛’ ‘판’은 중국과 일본 및 동북쪽의 많은 민족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반도인만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잡아왔다. 필자는 이 세상에 없는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바람문화’이다. ‘바람문화’의 뿌리는 신라풍교이며 화랑을 거쳐 반도인만의 소유하고 있는 문화, 즉 ‘멋’ ‘맛’ ‘판’의 문화로 승화되었고 배달민족은 ‘선사(仙史)’를 창조해왔다. 전체우리민족은 세상에서 가장 ‘멋’을 좋아하고 아울러 체면문화를 비롯해 우리민족성격 90%이상이 ‘멋’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맛’은 단순히 음식 맛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삶 자체가 ‘맛’이다. ‘판’은 춤판, 노래판, 도박판, 술판 심지어 개판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은 일상생활의 다수 행위가 ‘판’과 관련이 있다. ‘멋’ ‘맛’ ‘판’은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는 중국어나 일본어로 번역이 되지 않는다. 왜일까? 우리민족만이 창조해낸 문화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류의 문화뿌리를 ‘멋’ ‘맛’ ‘판’으로 풀어낸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화제를 돌려서 신라문화가 어떻게 우리전체 민족의 문화로 되었는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답할 차례가 왔다. 답에 앞서 이런 가설을 해보자. 삼국 후기 고구려가 군사적으로 가장 강했기 때문에 고구려가 통일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오늘날 반도의 민족문화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 한때 절반중국을 통치했던 거란족은 자취를 감췄고 268년이나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은 자체문자와 언어 및 풍속, 민속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이 고구려도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로서 당시 고구려는 중원에 문화적으로 동화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풍교를 비롯해 자체문화를 강력하게 지켜왔던 신라는 통일신라를 거쳐 고구려유민과 백제유민에 이르기까지 ‘바람문화’를 전파시키고 하나의 민족문화로 자리매김 시켜왔다. 중국문화가 이미 선진시대에 완성되었다면 반도문화는 통일신라를 거쳐 완성되었다. 이 대목에 이르러 밝힐 것은 필자가 지난 10년 동안 한반도문화를 연구해온 결과 고구려 문화는 부분적으로 민속으로 남아 내려온 것은 있으나 전체반도를 아우를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는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라문화는 현재까지도 반도인의 주체문화로 골격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유력한 증거를 더 제시하자면 현재 반도인이든 해외동포든 우리전체민족이 ‘멋’ ‘맛’ ‘판’의 문화가 강하고 남과 북 해외동포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문화차이는 존재하고 있으나 총체적인 인간타입은 거기서 그것으로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언어가 그 민족의 역사를 말해주듯 광복 후 한국가요에 ‘바람’이란 어휘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고 우리전체 민족은 아직도 일상생활에서 ‘바람’이란 어휘를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사실이 유력한 증거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역사흐름을 무시하고 다만 신라가 당이라는 강대한 외세를 끌어들인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옳은 역사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삼국 시기는 서로 자기네 이익을 위해 타국과 손을 잡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특히 그 시대는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이 거의 전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거란에는 한족이 재상을 맡은 시기도 있었고 발해 백성은 말갈과 거란족이 절대다수였는데 고구려 출신 대조영이 왕을 해먹었지 않았는가! 민족이란 개념은 100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고 오늘과 같은 민족의식은 반세기역사로 보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시기를 오늘날과 같은 민족의식의 시각으로 보면 절대 안 된다. 신라가 당과의 연합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당은 대동강을 경계로 그 이북을 당에 귀속시키고 계림(오늘의 경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설인귀가 도독을 맡았다. 이렇게 되어 신라는 전쟁의 대가를 보상받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을 신라가 아니었다. 고구려유민과 백제유민과 손잡고 당과 맞서 싸웠다. 근 20년의 ‘독립운동’을 거쳐 끝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통일신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날도 국제관계는 서로간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빈번하다. ‘영원한 친구가 없고 영원한 이익만 있다(沒有永遠的朋友, 只有永恒的利益)’는 처칠의 말이 만고의 진리이다. 누구와 손잡던 그것은 당시 그 나라의 이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오늘날의 민족의식으로 그때 그 시절에 발생했던 사건을 재단할 일이 아니다. 다만 누가 통일의 주역이 되었든 간에 우리가 연구해야 과제는 민족문화의 연속성과 지속성이고 아울러 그 문화의 명맥으로 민족이 민족다운 인간타입을 유지해왔고 앞으로도 유지해 나아가는 것이 생존의 길이다. 동포문학 창간호        
296    중국인 폐쇄의식은 담장문화 때문 댓글:  조회:6228  추천:3  2013-06-03
중국인 폐쇄의식은 담장문화 때문   ‘시가지’를 뜻하는 말로 한국에서는 도시(都市)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성시(城市)라고 이름 한다. 도시와 성시가 얼핏 보면 같은 의미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문화적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많이 다르다. 도시는 도(都)와 시로 이뤄진 것이고, 성시는 성(城)과 시(市)가 합쳐진 것이다. 도는 무엇이고 성은 무엇이며 시 또한 무엇인가? 먼저 성부터 살펴보자. 성을 논의하려면 북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다. 왜냐하면 북경이 가장 대표적인 성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북경의 고칭은 ‘계(薊)’, ‘계성(薊城)’, ‘연경(燕京)’, ‘유주(幽州)’, ‘금중도(金中都)’, ‘원대도(元大都)’ 등등이며 역사의 시기에 따라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대하고 웅장한 모습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지금 남아 있는 북경성(北京城)의 모습은 명·청 시대 유물이고 그마저도 1949년 이후 많은 성벽이 철거된 상태이지만 성에 대한 역사는 살아 있다. 명·청 시대 북경성은 궁성(宮城), 황성(皇城), 경성(京城) 등 세 겹의 성으로 구성된 ‘성지성(城之城)’이다. 당의 장안도 북경처럼 세 겹의 성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궁성이 황성의 가운데 있은 것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궁성(宮城)은 황성의 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황제와 그의 가족이 거주하고 황제와 황족을 시중드는 환관과 궁녀와 호위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자금성(紫金城)이 곧 궁성이다. 자금성의 성벽(城牆)은 둘레길이가 6리(3키로 미터)이다. 6리라는 수치만 보아도 자금성의 규모가 얼마나 큰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금성은 4개의 문(오문:午門, 신무문:神武門, 동화문:東華門, 서화문:西華門)이 있다. 황성은 성벽의 둘레길이가 18리(9키로 미터)이며 역시 4개의 문(천안문:天安門, 지안문:地安門, 동안문:東安門, 서안문:西安門)이 있다. 황성의 외곽이 경성이다. 경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눈다. 내성 성벽 둘레길이가 46리(23키로 미터)이며 9개의 문이 있고 그 정양문(大前門)이 가장 웅장하다. 외성은 1553년 건립 시에 내성을 둘러싸게끔 설계하였는데 자금이 부족하여 남성(南城)밖에 건설하지 못했고 둘레길이가 28키로 미터이다. 경성은 황제가 거주하는 정치 중심 수부라는 뜻이며 궁성과 내성·외성을 포함한 총칭이며 凸자형으로 되어 있다. 중화민국이 명나라 초기 수도인 남경에 자리 잡고 나서 북경을 북평(북평)이라 불렀던 것은 ‘경(京)’은 천하에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맥락에 의해 격하시킨 거에서 유래되었던 것이었다. 성은 담장을 의미하는데 성벽 높이에 의해 신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 의해 자금성의 성벽이 가장 높고 황성의 성벽 및 경성 외곽 성벽이 차등으로 낮아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 의해 아문의 성벽도 급에 따라 높낮음이 결정되고 주택 담장도 신분에 따라 높낮음이 결정된다. 이는 신분이 높고 고귀할수록 평민과 더 멀리 거리를 두는 하나의 징표였다. 당연히 황제가 가장 신분이 높고 고귀하니 거주하는 궁성의 담장 높이가 가장 높았던 것이다. 성벽이 많으면 그에 따라 문이 많아진다. 북경이 성지성이기 때문에 문도 굉장히 많다. 문이 어찌나 많은지 북경시 주요간선도로는 절대다수가 문으로 명명되어 있다. 예하면 전문(前門), 복흥문(復興門), 건국문(建國門), 덕승문(德勝門) 등등의 수많은 문에 내외대가(內外大街) 혹은 동서남북의 위치에 따라 대가(大街)를 붙여 시가지 간선도로를 이름 지었다. 내가 1990년대 북경에 많이 다녔는데 길을 물으면 당지 사람들은 거의 다 00문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또 당지 사람들과 약속하면 거의 모두 00문으로 오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북경의 성벽과 성문은 북경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다. 실제로 스웨덴 학자 희인룡(중국명)은 북경의 역사와 문화는 성벽과 성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북경의 성벽과 성문》이란 저서를 출간하였다. 북경의 성문은 과거 역사문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에서도 굉장한 의미를 지녀왔다. 현대 중국인은 는 노래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현대 중국인은 북경에 가면 반드시 천안문구경을 빼놓지 않는다. 또 과거 황제가 외출할 때 사용했던 정양문(大前門)도 현대 중국인에게 매우 친숙했다. 바로 ‘대전문(大前門)표’ 담배 때문이었다. 아무튼 천안문과 대전문은 현대 중국인이 북경을 알게 되는 ‘키잡이’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는 도(都)의 의미를 살펴보자. 고대중국의 성은 주요하게 왕조국도(王朝國都), 제후봉지, 대부채읍(大夫采邑)의 중심 구역이었고 당연히 그들의 지위가 같을 수가 없었다. 《좌전》에 이르기를, “천자지역은 사방 9리, 제후는 7리, 후백(侯伯)은 5리, 자남(子男)은 3리이다.” 면적과 규모만 다를 뿐만 아니라 부르는 명칭도 존비에 따라 달랐다. 제후의 봉지를 도(都), 대부의 봉지를 읍(邑)이라 하고 도의 중에서 천자가 거주하는 곳을 경(京)이라 한다. 도는 크고 읍은 작으며 읍이 커지면 도가 된다. 민간에서는 크고 작은 성을 통칭하여 도읍(都邑)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도는 또 국(國)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국도(國都)라는 말은 있어도 국읍(國邑)이란 말은 없다. 하지만 읍의 의미는 작은 것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국가, 성시, 향촌, 이 세 가지 사구(社區:사회구역)를 모두 읍이라 부를 수 있었다. 주나라 때 800여 개의 제후국이 있었으니 그 규모를 따질 때 국보다 읍이 더 타당했을지도 모른다. 읍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글자 풀이에 따르면 위는 입 구(口)이고 아래 파(巴)는 인간이 변형된 모습이다. 사람(人)이 있고 구(口)가 있는 읍(邑)은 당연히 사구에 속할 것이다. 또 다른 해석에 의하면 읍(邑)자 위 구(口)는 인간의 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울타리를 둘러쌓아놓은 토성(圍墻), 일정한 범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나는 후자의 해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중국인은 울타리 의식이 강하고 이로서 외부, 외지,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폐쇄적인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市)를 분석해보자. 중국에서는 도시와 농촌을 성과 향이라 부른다. 고대중국에서는 이 성과 향의 가운데 자리한 곳이 바로 시라 불렀다. 시(市)는 사람들이 모여 매매교역을 진행한 곳이었다. 즉 성 안의 아무리 고귀한 신분의 인간도 알곡을 먹고 야채를 먹어야 하고 과일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는데 그 내원은 향촌에서 온다. 아울러 성 안의 고귀한 인간들이 향촌에 가서 직접 구입할 수는 없고 하여 신분이 천한 촌민들이 성과 가까운 곳에서 매매교역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옛날 3일장, 5일장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성 안의 인구가 나날이 증가하고 알곡과 야채 및 과일에 대한 수요량이 증가하여 3일장과 5일장으로는 매매교역이 턱 없이 부족하여 주요 명절을 제외하고는 상시로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또 가축에 의한 육류와 해산물 교역도 이뤄지고 땔감도 교역하고 옷가지 및 수많은 생활필수품을 교역해하기 때문에 상시 시장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점차 음식점도 생겨나고 기생집도 생겨나고 책방도 있어야 하는 등 문명의 발전과 발달에 의해 점차 시장이 활성화됨에 따라 시가 성과 가까이 옮겨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과 시가 하나가 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성과 시가 하나가 되었으나 여전히 귀천이 존재하고 이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성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하다. 그 징표로서 성의 성벽은 높은데 비해 시를 둘러싼 토성은 낮았다. 그러므로 성벽은 장(墻)이라 부른데 반해 시를 둘러싼 토성은 담(垣)이라 불렀다. 한국인이 토성을 담장이라 부르는 것이 이와 같이 낮은 토성의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시 구역에서 장사하는 상인이 부자가 되면 주택을 호화롭게 짓고 담장을 높이 쌓는다. 그들은 비록 정치적인 신분은 없으나 경제적으로 부를 나타내기 위해 시민들과 격리하는 심리가 강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일반 소상인들은 주택에 간혹 담장을 쌓아도 낮게 하거나 보통 담장이 아니라 울바자를 쳐놓았다. 상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담장이 없다. 왜냐하면 가게가 시민들에게 격리감을 주면 장사가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도리로 향촌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호족이나 지주들은 주택 주위에 높은 담장을 쌓아 신분과 부를 과시하였다. 이에 비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평민들은 주택에 담장이 없었고 기껏해야 울바자를 쳐놓았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성, 성벽, 담장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 바깥세상과 이질적인 존재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그 이질적인 존재가 바로 신분이고 이로서 신분사회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또 성에 살고 있는 높은 신분의 인간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겨난 것이 시(市)였기 때문에 성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했다. 시정잡배라는 말은 있어도 성도(城都)잡배라는 말이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대중국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다르게 먼저 성이 생기고 성 안의 인간의 생계를 위해 시가 생겨나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 성과 시가 하나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극히 짧은 상해나 20년의 역사밖에 안 되는 심천(深圳)는 성이 아닌 순수한 시이다. 그러므로 성의 대표적인 북경과 시의 대표적인 상해 두 지역 시민들의 인생관, 가치관을 비롯해 문화가 매우 이질적이다(북경인과 상해인의 비교는 별도의 글로 발표하겠다). 고대중국은 물론이고 지금도 행정구역으로 진(鎭)이 있다. 진은 고대중국에서 군사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성은 정치 중심지였고 진은 군사 중심지였다. 무한(武漢)은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으로 이뤄진 대도시이지만 습관적으로 무한삼진(武漢三鎭)이라 부른다. 고대의 무한은 군사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중국정부가 농촌과 도시의 최소 행정구획을 ‘사회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왜 이렇게 고쳤는지? 나는 실상을 잘 모르겠다. 다만 여기서 사(社)의 유래를 짚어보고 아울러 중국의 많은 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보면 ‘社’를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해석했다. 이 해석이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에 깃든 함의는 심오하다. 다시 말해 내가 중국 고향 동불사에 가서 흙을 쌓아놓기만 하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인류가 씨족사회에 진입해서 대지의 일정구역을 자기네 삶의 터전으로 간주했는데 그 일정구역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타씨족에게 알릴 징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최초에 씨족이 차지하고 있는 땅 한 곳을 선택해 흙을 뫼어놓는 것으로 징표로 삶았다. 그러다가 단순히 흙을 쌓아놓는 것으로 씨족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부족하게 인식되어 쌓아놓은 흙 위에 나뭇가지를 꼽아놓기도 하고 또 일정 세월이 흘러 집을 짓고(사당) 씨족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한 개 씨족의 족장은 이 ‘사’ 내에서 부족민을 거느리고 제사를 맡고 농사를 책임지고, 부족민은 족장의 인솔 하에 ‘사’에 모여 제사를 올리고 농사를 짓는다. 대체적으로 한 개 부족이 공동한 ‘사’ 내에서 같은 언어, 종교, 생활관습을 갖고 공동한 생활을 영위한다. ‘사회(社會)’란 부족민들이 ‘사’에 모여 공동생활을 영위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씨족사회에서 생겨난 사(社)의 문화가 국가시대, 정확히 말해서 왕조시대에 이르러 성(城)의 문화로 진화되었던 것이다. 왕조시대 왕도(王都) 뿐만 아니라 하나라 1만 개에 달하는 제후국, 상나라 3천 개에 이르는 제후국, 주나라 800여 개의 제후국의 수부가 전부 성(城)이었고 제국시대 23개 왕조 및 천도사건까지 합쳐 수많은 성이 있었다. 중국에 왜 고적(古迹)이 있는 도시가 그토록 많은지? 성의 문화를 이해하면 답이 보인다. 역사가 유구하고 분포범위가 굉장히 넓은 성의 문화(담장문화)는 찬란한 중화문명을 창조해낸 동시에 내와 외, 자와 타를 구분 짓는 문화로 자리매김 되었고 아울러 중국인으로 하여금 폐쇄의식을 갖게 만든 결과를 빚어냈다. 중국 절강성의 00지역의 이야기이다. 불과 백 리 사이 두고 두 마을이 있는데 A곳의 사람들은 짐을 나르는 멜대(扁担:한국인은 지게로 물건을 나르고 중국인은 멜대로 물건을 나른다) 자료로 무게가 가볍고 단단하며 탄성이 강한 대나무를 사용하는데 비해 B곳의 사람들은 멜대 자료로 무겁고 탄성이 약한 버드나무를 사용한다. 중국남방에는 대나무가 흔하다. 그러니까 대나무를 구하지 못해 불편한 버드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한테 영문을 물으면 대답이 아주 의외이다. “조상 때부터 버드나무를 사용해왔으니 우리도 이렇게 할 수밖에.”  
295    남북통일과 고려연방제논고 댓글:  조회:7005  추천:27  2013-05-09
남북통일과 고려연방제논고   1990년 내가 여행업에 종사할 때 한국관광객을 모시고 백두산관광을 온 한국 00여행사 사장이 “참 세월이 좋아졌습니다. 불과 이삼년 전까지 누가 중국으로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겠어요. 이런 추세라면 남북통일도 10년이면 가능하지 않겠어요.”라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그때는 절대다수 한국인이 남북통일에 대해 낙관적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현재 그때 상황에 비해 남북관계는 악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으로서는 남북통일이 언제 실현될 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언제가 되던 남북통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통일은 분열보다 더 말할 것 없이 좋으니까. 문제는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동서독일통일보다 힘들고 어려운 요소들이 많다는 것이다. 동서통일은 흡수통일이었지만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흡수통일이 어렵다는 것이다. 흡수통일이 아니라면 대등한 위치에서 남북이 서로 자기네 수지(이익)가 맞아야 목적이 달성될 것이니 이에 엄청난 어려움이 닥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물론 서로 간에 많은 양보가 없이는 절대 통일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으나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이론보다 실천이 수백 배 수천 배 더 어려울 것이다. 국호부터 문제이다. 남측은 ‘대한민국’을 주장할 것이고 북측은 ‘조선’을 내세울 것이다. 이런 논쟁을 막고자 김일성 주석이 1974년 ‘고려연방제’란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를 영어권에서 ‘KOREA’로 부르는 것은 고려에서 유래된 것이니 문제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연방제(聯邦制)’에 대해선 논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방’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지? 그 유래는 어떻게 온 것인지를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고려연방에서의 ‘방(邦)’은 방국(邦國)이다. 방국의 유래는 중국 주나라시기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하나라에도 방국이 있었고 은나라에도 방국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상황에 관해 고증이 어려운데 비해 주나라 방국은 하나의 정치제도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하였고 고증도 충분히 되고 있기 때문에 주나라 방국을 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3천 년 전 주 무왕은 천하를 얻게 되자 방국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본래 상의 3천여 개에 달하는 부족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방국제도를 실시하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방국제도란 도대체 무엇일까? 주왕은 수하 제후들을 거느리고 전쟁을 걸쳐 빼앗은 이민족의 땅과 본래 주에 속한 땅을 재분배하게 되었고 분배를 통해 새로운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토지재분배 방식은 다음과 같다. 가까운 형제와 친인척들에게 좋은 땅을 분배하고 전쟁에서 공로의 대소에 따라 차등으로 전국의 토지를 분배하였다. 토지를 분배하는 동시에 그 토지를 경작하고 지켜낼 책임자를 세웠다. 역사에서는 토지를 분배한 것을 ‘봉(封)’이라 하고 책임자를 제후라 부르는데 제후를 세우는 것을 ‘건(建)’이라 하며 봉건이란 이렇게 생겨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봉건이란 어휘는 명사가 아니라 ‘봉토건국’의 뜻으로 동사이다. 주왕조는 자신을 천하로 여기고 각 제후국을 통해 천하를 다스리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래서 각 제후국 사이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국제관계였다. 문제는 800여 개에 달하는 제후국을 하나의 온전한 국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국으로 보자면 규모나 범위가 부족하고 부족국가로 보자 하니 하상시대 부족국가보다 범위가 큰 것이 사실이었다. 실질적인 딜레마였다. 국보다 작고 부족국가보다 큰 것이 방(邦)이다. 이로서 800여 개의 제후국을 방국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주나라 봉건제도를 방국제도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 방국제도는 폐단이 많았다. 제후, 대부, 사가 소유한 재산은 전부 사유재산이었고 천자는 ‘경영’에 개입하지 못한다. 천자의 의무는 세금을 거둬들이고 말썽이 있으면 때로 훈계정도일 뿐이었다. 천자가 직접적인 ‘경영권’이 없으니 제후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고 따라서 대부가 제후를 능가하는 사례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천자는 명분만 갖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허수아비였다. 그래서 각 제후국, 즉 각 방국 사이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었고 천자가 완전히 통제권을 잃어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 그 시기를 역사에서는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각 방국 사이 패권다툼은 점차 서로 너 죽고 나 사는 ‘겸병(兼倂)’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전국시대라 부른다. 800여 개의 방국이 전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진(秦)ㆍ초(楚)ㆍ연(燕)ㆍ제(齐)ㆍ조(赵)ㆍ위(魏)ㆍ한(韩) 등 칠웅이 남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진이 기원전 221년 육국을 멸하고 천하통일을 이룬다. 진은 상앙의 변법(영주제를 폐지하고 지주제를 실시한다. 세습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실시한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다. 정전제를 폐지하고 토지확대개간을 장려한다.)을 수용한 덕분에 부국강병을 이뤘고 영정시대에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며 중국역사상 봉건으로 이뤄진 방국, 즉 분권시대를 마감하고 중앙통일집권제인 제국시대에 진입한다. 방국이란 개념을 중국역사를 통해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젠 한반도역사에서의 방국을 알아볼 차례이다. 인류역사는 원시공동체로부터 가족사회, 가족사회로부터 씨족사회, 씨족사회로부터 부족사회, 부족사회로부터 국에 이르렀다. 한반도 역사도 이와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왔다. 그런데 한반도역사에서는 중국의 서주·동주시기와 같은 봉건으로 이뤄진 방국시대를 찾아보기 어렵다. 4346년 전 단군이 조선을 세웠고 기원전 190년 전후하여 위만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고 북쪽에는 부여, 예, 맥, 저 등 부족국가, 남쪽은 변한, 진한, 마한의 부족국가들이 병립해 있었다. 그런데 이들 부족국가들은 중국의 주나라처럼 하나의 왕의 지배하에 귀속되었던 것이 아니라 모래알처럼 흩어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방국’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기원전 57년 신라의 건국, 기원전 37년 고구려의 건립, 기원전 18년 백제의 건립에 의해 삼국시대에 진입하였는데 삼국시대 역시 방국시대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기원 661년 백제의 멸망,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통일신라시대를 열었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한반도역사에 방국이 아예 없었던 것일까? 있기는 있었다. 그렇지만 그 방국이 도대체 어떻게 유래되었고 어떤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을까? 고증이 매우 어렵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같은 대형 서점에 가서 이 잡듯 뒤져보아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방식대로 터득한 바를 여기서 풀 수밖에 없다는 점 미리 밝혀둔다. 김일연의 《삼국유사》진흥왕편에 방국이 언급된 대목이 있다. “제24대 진흥왕(재위 534~576)은 천성이 풍미하다. 그는 나라(방국)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먼저 풍월도를 앞세워야 한다(興邦國, 須先風月道)고 호소하였다.” 여기에 등장된 방국이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역사를 살펴보면 방국은 반드시 귀속이 있어야 한다. 진흥왕이 신라를 방국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신라는 어디에 귀속된 방국이란 말인가? 신라는 육로로는 고구려, 해로로는 백제가 버티고 있어 6세기 초까지 중원조정과의 독립적인 외교가 막혀 있었다. 이런 폐쇄적인 국면을 제24대 진흥왕이 타개하였다. 기원 564년 진흥왕이 처음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중국북방왕조인 북제(北齊)에 조공하였다. 이듬해 북제 무성제가 조서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신라는 이렇게 당시 동아세아 국제질서이자 관례로 되는 조공책봉 ‘예의’에 편입되었다. 조공책봉 ‘예의’에 편입된 주변국들은 중원조정을 중심으로 하나의 방국이 아닌 방국으로 되었던 것이다. 물론 주나라 시기 방국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리고 신라가 방국이었다면 고구려와 백제도 중원정권과 조공책봉의 예의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방국이었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보다 일찍이 조공책봉 예의에 편입되고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원을 쫓았다. 신라는 비록 진흥왕이 동아세아국제질서에 편입되었으나 중원문화를 쫓는 것이 자국의 실제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라는 건국하여서부터 고구려와 백제와 달리 정치적으로 대제국인 한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라는 22대까지 왕의 호칭을 중원에 따르지 않았다. 1대 박혁거세는 거서간(세상을 밝게 비춘다), 2대 남해는 차차웅(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사장, 무당), 3대 유리부터 16대 홀해까지 이사금(연장자, 이빨이 드세다 뜻), 17대 내물부터 22대 지증까지 마립간(우두머리 중 우두머리), 23대 법흥부터 56대 경순까지 왕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23대왕은 불교를 흥기시킨다는 뜻으로 법흥왕이라 불렀고 24대왕은 불교를 진흥시킨다는 뜻으로 진흥왕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러고 보면 중국식을 따른 것은 576년 등극한 진지왕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는 문화적으로도 고구려와 백제와 크게 달랐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에 분주했지만 신라는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풍교’라 하고 불교를 불교라 부르지 않고 ‘석씨풍교’할 만큼 풍교에 심취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라는 자체문화인 풍교를 매우 중시하였고 방국이 된 후 중원문화를 따르자니 머슴이 주인의 비단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맞지를 않아 역시 토착문화인 풍월도를 주체문화로 밀고 나아갈 것을 진흥왕이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라는 비록 형식상 중원정권의 방국으로 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방국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라 볼 수 있다. 그 후 통일시대에 들어서 신라는 당과 여전히 조공책봉관계에 있었으나 삼국시기와 다르게 방국의 의미가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본문의 주제에 다시 돌아와 논의해보자. 김일성 주석이 제안한 고려연방은 남측 대한민국과 북측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각각 두 개의 방국으로 보고 하나의 연합정부를 세우자는 것인데 과연 타당한지? 문제가 없는 것인지?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보는 것이 무척 흥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남과 북을 두 개의 방국으로 인정한다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질 소지가 크다. 방국은 정치, 문화, 경제 등 제 분야에서 독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연합정부가 어떤 방법과 방식으로 통제가 가능한지? 혹시 각각 서로 현행체제를 유지하면서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실시하자는 것인지? 물론 이를 바라고 통일을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통일은 흡수통일도 아니고 일국양제도 아니고 고려연방제도 아닌 서로 간의 합의에 의해 하나의 완정한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것이다. 본문은 연방제에 대한 개념논고를 중점으로 전개하였을 뿐 고려연방제의 이와 폐에 대해 치중하여 논고를 전개하지 않았다. 나는 정치에 문외한이므로 연방제논고에 관심이 있는 지자들에게 토론의 참여를 발원한다.   후설 앞서 발표한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는가?’, ‘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의 두 편의 글은 필자가 현재 집필하고 있는 의 제목으로 된 중국역사문화를 해부하는 전체 작품 중 두개의 소제목이다. 의 작품은 중국역사문화의 흐름(流)을 짚는 동시에 ‘왜’라는 뿌리(源)를 밝히는 작업이다. 과거 10여 년 동안 꾸준한 준비과정을 거쳐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流’만 짚는 것은 에세이이고 ‘源’을 밝히는 것은 학문이다. 이미 18만 자 썼고 앞으로 5만 자 더 써야하는 시점에 이르러 한두 편을 미리 발표하여 독자들의 테스트를 받고 싶었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다행이다. 필자는 토법연강에 의해 취미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반응이 나에겐 크나큰 용기가 되었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힘을 얻어 기쁘다. 그리고 존경하는 독자께서 저자로서 독자들과 함께 깊이 있는 토론에 참여하기를 바라는데 죄송하지만 필자는 종래로 타인의 글이든 본인의 글이든 댓글을 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소신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독자들과 반드시 토론할 일이 있다면 별도의 문장을 지어 발표하는 것은 좋지만 일일이 반응하지는 않는다. 다만 존경하는 독자께서 필자가 겸허하게 테스트를 받고 있고 이를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하기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시기를 바란다. 이 기회를 빌어 저의 졸저를 관심 있게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294    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 댓글:  조회:7795  추천:44  2013-05-06
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   만약 대청제국이 조금만 융통성이 있었더라면 아편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8국 연합국의 침략도 없었을 것이며, 원명원이 약탈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러나 역사는 가설을 허락하지 않는다. 중국운명은 중국인이 스스로 빚어낸 결과였다. 중국, 중국이란 개념은 이렇다. 주나라 초기 중국이란 국호가 잠깐 등장했다가 그 후 청나라 말기까지 줄곧 중국, 중국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왕조호칭을 나라호칭으로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 서양이 중국을 침략하고 보니 역사와 문화가 유구하고 과거 지구상에서 가장 찬란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데서 중국, 중국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면서 중국, 중국인이란 호칭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때론 이민족이 통치하던 위진·남북조시대와 몽골족이 통치하던 원나라 및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나라시기 모두 자신들이 중국을 차지하고 있다는 관념이 강했다. 중국이란 말 그 대로 세게 중심이라는 뜻인데 본래 “중원을 차지하면 천하를 얻는다.”는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 어느 역사조대에서든 자신을 중국이라 여겼던 건만은 사실이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중심 국가, 또 문화가 가장 앞서 있었기 때문에 주변 이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취급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원을 기준으로 동쪽 이민족을 ‘동이(東夷)’, 남쪽 이민족을 ‘남만(南蠻)’, 서쪽 이민족을 ‘서융(西戎)’, 북쪽 이민족을 ‘북적(北狄)’이라 불렀다. 주나라 시기부터 중원의 천자를 중심으로 주변이민족과의 외교관계는 조공과 책봉의 패턴으로 굳어져왔다. 즉 주변 이민족은 중원조정에 특산물을 바치고 중원조정은 주변 이민족의 통치자를 00상장군, 00대장군, 00중장군, 00소장군 혹은 00왕의 식으로 책봉하였다. 중원조정은 주변 이민족과 단순한 조공과 책봉의 외교관계를 뛰어넘어 대국으로서의 위엄을 주변국에 보여주기도 하였다. 수양제(隋煬帝)는 정월 대보름이 오면 주변국의 사신들을 불러들여 대형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의 규모는 악사만 8천 명, 횃불을 든 자가 만여 명이었다. 음악소리가 사방 십리에 울려 퍼졌고 불빛이 사방 십리를 비추었다고 한다. 연회 기타 상황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연회에 참석했던 외국 사신들은 아마 대제국의 스케일에 기가 죽어 있었을 것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 및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 유학생이 2만여 명이나 장안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주변국 유학생들이 당나라에 가서 배운 학문은 주로 사서오경, 노자철학, 주역 등이었으며 과목이 단조로웠다. 지금처럼 학과가 세분화된 시대라라고 가정하면 유학생의 숫자는 아마 20만 명도 넘었을 것이다. 당시는 현시대처럼 국가 간 서로 유학생을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서 일방적으로 당나라로 몰려들기만 하였다. 당나라시기 때론 주변국에 유명 인사를 파견하여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에 도사(導師)를 파견하여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특강을 진행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의 실세였던 막리지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을 올렸다. “폐하, 가마솥의 받침대가 셋이듯 나라를 받치는 기둥도 세 개여야 마땅하오나 우리 고구려는 유교와 불교는 있으나 도교가 없어 기둥이 두 개이니 온전치 못하옵니다. 그래서 당에 요청하여 도사를 모셔오는 것이 지당할 것이옵니다.” 허수아비인 보장왕은 실세 막리지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윤허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도사를 파견하고 도관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도사의 강의를 보장왕이 직접 경청하였다고 적고 있다. 주변국 유학생이 장안에 밀물처럼 몰려들었고 또 도사를 파견하여 자기네 문화를 주변국에 전수하고 있었으니 중화사상의 우월성에 들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청나라는 비록 만주족이 통치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한문화 중심 국가였으며 여전히 한·당·송·명의 중화사상의 우월성을 물려받았다. 서구는 그리스 도시국가시대부터 무역을 중시해왔다. 그들이 무역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리스는 땅이 척박하여 농경에 의해 생계가 곤란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무역에 의지하여 생존의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무역은 전체 서구에 전파되었고 따라서 서구의 무역은 점차 자유무역, 평등무역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은 한나라시기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해외(중국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해외라고 표현함) 국가들과 무역을 많이 해왔으나 관방주도의 무역이었을 뿐 자유무역, 평등무역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 길을 열려고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영국의 왕은 “하느님이 중국 인구를 4억으로 만든 것은 우리 앵글로·색슨 민족에게 무역을 하여 부를 쌓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기뻐했다. 당시 영국의 복장 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중국을 고찰하고 나서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중국인은 수의(睡衣 : 잠옷)을 입지 않고 있다. 만약 중국인에게 수의를 입는 법을 가르치고 일인당 한 벌씩만 사도 4억 벌을 팔 수 있지 않는가! 당장 인도의 수의옷감을 독점할 것이다.”라고 몹시 들떠 있었다. 마치 한국인이 수년 전에 중국에 진출하면서 “13억 인구의 중국시장은 우리한테 기회이다. 일인당 칫솔 하나씩 사도 13억 개의 칫솔을 팔 수 있으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도 돈을 산더미로 벌어들일 수 있다.”는 자만에 찬 어리석은 판단과도 똑 같았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200년 전 영국인이 겪었던 착오적 판단을 한국인이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청나라 무역은 역시 관방의 주도로 통제하고 있었다. 영국 상인들이 청나라와 무역을 하려면 황제의 윤허를 받아야했다. 그래서 황제를 찾았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삼구구배(三叩九拜)’였다. 영국인은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예의가 없다. 그것도 한 번 아니고 세 번씩이나 머리를 조아리다니! 게다가 아홉 번씩이나 인사를 올린다는 것은 영국인에게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 한심하게 느껴진 것은 무역은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뭔 뚱딴지같이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아홉 번 인사를 올리다니 말이다. 영국 상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기 서양은 바티칸의 교황이 천하 중심이었듯이 중국은 중국의 천자가 세계 중심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 상인이 결국 중국인의 중화사상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 상인은 절대 ‘삼구구배’를 올릴 수 없다고 뻗히고 중국 관리들은 만약 ‘삼구구배’를 거절하면 당신들이 바라는 무역은 죽었다 깨도 성사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양쪽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결국 자유와 평등을 토대로 하는 ‘국제관례’의 정상 무역은 깨지고 남은 것은 영국인이 무력으로 중국 문을 여는 것이었다. 이렇듯 청나라 말기의 중국이 결국 중화사상 때문에 당하지 않을 침략을 당했고 결과는 참담하게 패배하여 반식민지국가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은 정확히 말하면 통상전쟁이지 아편전쟁이 아니다. 통상전쟁을 아편전쟁이라 표현한 것은 당시 영국의회 전쟁결의안에서 전쟁반대파들(262표)이 전쟁옹호론자들(271표)을 공격하며 비난조로 들먹인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남경조약을 살펴보면 오구(五口)통상, 홍콩 할양, 관세체결, 자유무역 등 거의가 경제에 관한 것들이다. 통상전쟁이든 아편전쟁이든 중국이 패배한 것은 서구의 선진과학기술과 민주정치에 무너졌고 그 전쟁을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중국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시 조정에 여전히 예부(禮部)가 존재해 있었고 여전히 중화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동아세아 조공책봉의 외교질서를 서구인에게 적용하려고 들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외교부에서 담당하는 국제관계 사무도 예부에서 취급하였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 관의 관계는 평등관계가 아니라 여전히 중화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외교관례에 따라 움직이려 들었기 때문에 서구세력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청국 조정의 규정에 따르면 영국 관원들이 청 조정에 보내는 문건은 ‘품첩(稟帖 : 관청에 내는 신고서)이라고 불렀다. 청나라 말기 중국의 사태는 바람 앞에 등화처럼 위태로웠으나 여전히 중화사상으로 무장된 수구파들에 의해 개혁이 이뤄지지 못했다. 엄복(嚴復)은 저서 《원강(原强)》에서 수구파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과거에 밝고 현재에 어두운 자는 하나는 얻고 둘을 잃은 것이다. 이들은 인류발전진화의 법칙과 서양 각국의 구체적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외국과 중국의 우열에 대해 세상 사람과 다른 고상한 견해나 내놓으면서 예의가 바른 백성이고 우수한 민족이며 주공과 공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고 예의로 다스려진다고 뽐낸다. 그들은 청일전쟁에서 여지없이 패하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러한 형세를 낳은 근본원인은 백성의 힘이 이미 약해졌고 백성의 지혜가 이미 낮아졌으며 백성의 덕이 이미 엷어진데 있는 것이지 결코 중국민족의 본바탕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수천 년 동안의 중국의 전제정치와 사회풍속에 의해 조성되어 결국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엄복,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을 비롯한 진보학자들이 서양의 자유와 민주, 데모크라시(민주)와 과학(사이언스)로 중국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이들은 중국역사는 문화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밝히는 ‘의고풍(擬古風)’을 일으키고 서양문화를 따라 배울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과 반대로 어릴 적에 영국 유학을 다녀왔고 9개 나라 언어를 마스터한 인문학자인 고홍명(睾鴻銘)은 수구파의 입장에서 서서 공자의 인의예지야말로 인류역사 이래 가장 지극한 윤리도덕이며 이상사회를 구축하는 최고 가치라고 주장하고 중국문화야말로 서양인이 배워야하는 모델이라고 역설하며 심지어 일부다처제를 찬양하고 부녀의 전족문화마저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중국인의 정신》이란 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먹은 진보파들이 아무리 목이 쉬도록 떠들어대도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굳어진 수구파들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보파는 재야인사들이고 수구파는 권력자들이었다. 전제국가에서 당연히 힘의 균형은 권력자들에게 절대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보파의 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보파들의 노력에 의해 서구의 민주와 공화제가 폭 넓게 홍보되어 기울어져가는 청나라 군대는 더는 희망이 없는 청조정을 위해 싸울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한(武漢)에서의 한 방의 총소리가 268년 통치했던 대청제국을 무너뜨린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진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의 제국역사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참으로 비극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2천년 제국역사의 키잡이는 중화사상이었고 이 튼튼하고 견고한 키잡이로 만경창파를 헤가르며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제국역사를 창조해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키잡이로 세상에서 가정 먼저 부유한 나라로 되었으나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손을 보지 않고 사용해온 키잡이가 고장 나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다. 먼 바다건너에서 밀려오는 ‘덕선생(데모크라시)’과 ‘사선생(사이언스)’의 파워에 밀려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이다. 하지만 제국은 사라졌으나 강산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거친 바다에서 훌륭한 뱃사공이 탄생한다는 속담이 있다. 5천년의 문명에 2천년의 제국역사는 거친 파도와 같았다. 중화사상이 독이 되어 2132년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나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중화사상은 필경 신주인(중국인)의 귀중한 재부이다. 다시 재정비하여 신주대륙(중국)을 이끄는 처방으로 활용한다면 보약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글로 발표하겠다.     .
293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나? 댓글:  조회:6491  추천:32  2013-05-01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나?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나? 이 질문은 100년 전 독일학자 막스 베버가 제기한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발전된 이유를 저서《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통해 밝혔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특질과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를 설명한 막스 베버의 대표작이다. 프로테스탄트란 개신교이다. 막스 베버는 개신교의 윤리의식을 청교도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생겨나고 발달한 것은 청교도의 신에 대한 신앙과 책임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 시민계급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 개혁을 수용한 사람들이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금전 추구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윤리적인 통제를 가함으로써 향락, 방탕, 재산을 낭비하는 일을 절제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금욕하는 것을 윤리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이렇게 얻은 자산의 양은 그의 신앙의 진실성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는 재산의 획득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을 돕는다. 이윤추구의 동기에 의해서 작동하는 모험가적 자본주의는 어느 시대에서,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다. 그러나 윤리적 측면에서 영리추구를 긍정한 것은 자명한 일이 결코 아니었으며 어느 일정한 시대 이후 성립된 것으로 그것도 서구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이와 같은 사태가 생겨나기 위해서 서양의 시민계급은 어느 특정한 생활태도의 훈련을 받고 합리적이며 방법적인 노동을 도덕적 의무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생활태도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자본주의 정신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소명의식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노동과 이윤추구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금욕적 생활과 저축 관념을 매개로 근대적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베버는 서구 자본주의 발생과 발전 원인을 설명한 동시에 ‘중국은 왜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한다. 베버에 따르면 중국은 과거 찬란한 문화역사가 있었지만 중국인은 신앙이 없는 민족이다. 신앙이 없으니 현실생활에 치중하는 리얼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중국인의 리얼리즘은 이 현세 밖에 다른 이상사회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상사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동경과 추구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돈이 생기면 서구처럼 아름다운 미래를 추구하기 위해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색을 추구하는 것으로 허무한 세월을 보낸다. 번 돈을 미래 자본 확대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주색에 탕진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 푼의 돈이 있으면 2할 정도 가계지출에 쓰고 5할 정도 후대에 유산으로 물려줄 궁리를 하고 나머지 3할은 주색에 써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인이 장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전혀 자본 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재래식의 장사와 근현대 자본주의는 성격상 본질상 다르다. 중국은 1천 년 전 송나라 초기 ‘자본주의맹아’가 있었다고 말한다. 근거가 있다. 첫째 시장발달이었다. 장택단(張澤端)의 그림 을 보면 당시 날씨가 화창한 청명 날 수천 명이 장터에서 붐비는 모습이 담겨 있다. 둘째 지폐(紙幣)의 출현이었다. 세계역사에서 지폐가 가장 먼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중국이다. 즉 송나라 초기에 이미 지폐가 유통되었던 것이다. 지폐가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은 물류교환시장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만약 중국이 송나라 초기에 출현했던 자본주의맹아가 줄곧 발전해왔다면 역사를 다시 써야 하겠으나 역사는 어디까지나 가설을 허용하지 않는다. 송나라 초기 출현했던 ‘자본주의맹아’가 어떻게 시들어지고 사라졌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경제적으로 잘 나가던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했다.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지방할거세력에 의해 무너진 전 왕조 당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지방군사 세력을 전부 중앙정부에 귀속시키고 병력을 무력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런 조치는 모든 권력을 황제 일인에게 집중시키는 전제통치에 도움에 되었으나 역대 왕조 가운데서 군사력이 가장 약한 결과를 빚어냈다. 군사가 약하니 외래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찮게 여겼던 말갈족(靺鞨族) 금나라한테 침략 당했고 패배했다. 전쟁에 패배한 송나라는 금나라에게 금을 바치고, 땅을 떼 주고, 비단을 바치고 미녀를 상납하는 조건으로 겨우 조정을 유지하였으나 금나라도 송나라 더러 남쪽으로 수도를 옮겨가는 조건을 걸었다. 결국 송나라는 북방을 포기하고 수도를 건업(建業 : 지금의 남경)에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남송의 역사가 개시되었다.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하게 되자 그 밑에 유능한 한족관리들이 오랑캐 밑에서 일하기 싫어 따라서 남쪽에 가게 되었고 돈 많은 부자와 유명 문인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사 갔는데 역사에서는 이들을 ‘객가(客家)’라고 부른다. 싱가폴 이광요(李光耀 : 한국에서는 영어식으로 이콴유라 함) 총리, 등소평 등 인물들이 ‘객가’출신 후예들이다. ‘객가’에 의해 그때부터 중국은 남방에 인재가 많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객가’들이 돈은 많은데 할 일이 없었다. 사내가 돈은 많은데 할 일이 없으면 뭘 생각할까? 송나라 초기 ‘자본주의맹아’를 살려 역사를 바꿔 볼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빤한 일이다. 식과 색이 아니겠는가? ‘객가’들이 할 일이 없어 일차적으로 먹는 것에 신경 쓰다 보니 요리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오늘날 중국요리가 세계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데는 남송시기 ‘객가’들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결과이다. 한편 ‘객가’들이 사나이의 본능인 색을 추구하다 못해 미련한 짓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전족(纏足)’문화이다.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인은 확실히 먹는 것에 관심이 컸고 신경을 많이 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송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어떤 사람과 식도락을 논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섬서성(陝西省) 대여현(大荔縣)에서 생산한 양고기를 푹 삶은 것에 행낙(杏酪)을 부어넣은 요리는 젓가락이 아닌 손가락으로 먹어야 한다. 하남성 남양현(南陽縣)에서 생산한 최고급 보리눈으로 온면을 만든다. 그 조리방법은 먼저 면에 훼나무의 연한 싹을 넣어 삶고 난 뒤 하남성 수현(脽縣)의 말저(抹猪 : 돼지기름)를 넣어 비벼먹는다. 공성(共城)의 특산물인 향기나는 멥쌀로 밥을 짓는데 그것을 다시 새끼 거위의 뱃속에 넣고 쪄서 요리를 만든다. 절강성의 호주(湖州)의 요리사가 송강(松江)에서 잡은 물고기로 회를 쳐서 내놓았다. 나는 이러한 산해진미를 포식하고 난 뒤 다시 여산(廬山) 강왕(康王) 계곡의 염천(廉泉)에서 길러온 물로 복건성의 증갱(曾坑)에서 생산한 명차를 우려내어 마셨다. 이윽고 옷을 벗고 편안히 누워서 사람에게 동파 선생의 를 읊조리게 하였으니 또한 족히 한 번 웃으며 즐길 수 있었다. 문인의 식탐이 이 정도였으니 관리들의 식문화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사치스러웠다. 송나라 나대경(羅大經)의 《계림옥로(鷄林玉路)》에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대부가 경사(京師)에서 돈을 주고 여자 하인 한 명을 샀다. 그녀는 스스로 자기가 채태사(蔡太師) 댁의 만두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주방에서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루는 그녀에게 만두를 만들도록 하자 뜻밖에도 만들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래서 주인이 그녀를 책망하여 말했다. “지난 번 자네가 만두를 만드는 주방에서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으면서 어찌 지금 만두를 못 만든단 말인가?”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주방에서 만두 속에 넣을 파를 가늘게 써는 일만을 담당했으니 어찌 만두를 제대로 만들 수 있겠어요!” 대지주는 식탐이 심한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음식기호 또한 기괴했다. 사천 지방의 유명한 지주였던 유문채(劉文彩)는 오리의 물갈퀴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 요리를 만들려면 백여 마리의 오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송나라 여몽정(呂蒙正)의 음식기호도 특이했다. 그는 닭의 혀로 만든 탕을 좋아했다. 하루는 후원에서 높이 쌓여 있는 한 무더기를 보고 새로 쌓은 토산이라고 생각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토산이 아니라 닭털더미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여몽정은 자기가 닭 요리를 많이 먹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닭털이 산을 이룰 정도로 많이 쌓여 있을까라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닭의 혀는 하나뿐인데 공께서는 계설탕 한 그릇을 만드는 데 혀가 얼마나 필요하고 그 요리를 모두 몇 번이나 먹었는지 아십니까?”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중국인은 확실히 돈이 있으면 소망을 갖고 미래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주색에 탕진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인이 현실에 안주하고 충실하여 오늘 아침 술이 생기면 오늘 취해버리는 ‘하루살이’ 인생관이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던 전부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둘째 중국역사는 중농억상 사상이 뿌리 깊었다. 송나라 시장이 활성화되었고 그에 따라 유통의 수요에 의해 지폐가 등장하였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고 더는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바로 뿌리 깊은 중농억상 사상 때문이었다. 은나라를 상나라라고도 부르는데 역사가들의 고증에 의하면 은나라는 상업이 발달하여 상(商)이라 불렀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장사를 상업(商業), 장사에 종사하는 자를 상인(商人)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상왕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3천 년 전 주나라가 상나라를 전복시킨 것은 인문문화가 무귀(巫鬼)문화에 대한 승리, 농경문화가 경상(經商)문화에 대한 승리였다. 주나라는 초기부터 분봉제와 정전제의 실시로 농업을 발전시켰다. 진대부터 청대까지 2천년 제국시대는 중앙통일집권제를 굳건하게 하고 황제들이 절대적인 권력 장악으로 전제통치를 위해 더욱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였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 진이 굴기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여불위를 비롯한 재부가 나라에 필적할 만한 거상들의 도움이 컸다. 상인의 세력이 막강해져 나라와 임금을 세우고 조정을 좌우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제통치 권력에 도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싹이 자라기 전에 미연에 잘라버려 우환을 제거해야 한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천하의 부자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명분은 수도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실질은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 상인들에게 장성을 건설하게 했으며 오령(五嶺)을 지키게 하였다. 한나라는 초기부터 억상정책을 펼쳤다. 장사꾼은 비단옷을 입을 수 없고 수레를 사용할 수 없으며 조세를 무겁게 매겨 그들을 곤혹스럽게 굴었다. 시정(市井)의 자손들은 관리가 될 수 없다는 규정까지 반포하였다. 아무리 이런저런 억상정책을 펼치고 조치를 취해도 때론 상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황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오국은 장강 하류에 위치하여 염전도 많고 광산도 적지 않아 풍부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반란의 자금줄이어서 한 무제는 강온 양면책을 동시에 시행하여 법적으로 염철의 사영(私營)을 엄금하는 한편 폐업한 염철 상인들을 염관(鹽官), 철관(鐵官)으로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공업이나 상업의 관영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민간에서 운영하는 상공업은 지속적인 제국의 약탈과 수탈 속에서 간신히 생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렇게 한나라 초기부터 억상정책을 기본국책사업으로 추진해온 결과 역대제국은 민간자본 발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생겨날 토양이 없었던 것이다. 털은 가죽이 있어야 붙는 법이다. 가죽이 없는 털이 생겨나는 법도 없다. 이 속담이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들지 못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충분할 것이다. 셋째 옛것을 숭상하고 지난 것에 집착하는 ‘인순수구(因循守舊)’의 전통 때문이다. 요순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인은 요순시대를 그리며 살아왔다. “그때는 자물쇠가 없어도 도둑이 드는 법이 없었고 물건을 줍으면 주인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고 마을 사람끼리 다투는 일이 없었지. 태평성세요, 실로 태평성세였지.” 늘 이와 같이 되풀이를 반복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다음과 같은 격언을 좋아한다. “세상의 기풍이 날로 못해가고 인심이 옛날 같지 않으니 오늘이 과거보다 못하구나(世風日下, 人心不古, 今不如昔).” 절강성의 어느 어촌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원래 너무 가난하여 장가를 가지 못한 노총각이 수두룩했다. 심지어는 장가를 간 사람도 신부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아 근수에 따라 처가에 돈을 지불하여 데리고 오는 낡은 풍속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지역은 크게 발전하여 많은 지역민들이 부자가 되었다. 돈을 빌려주거나 빌린 돈을 갚을 때 아직까지도 돈을 세지 않고 저울에 달아 주거니 받거니 한다. 예를 들어 백 위안을 몇 근, 몇 냥 빌렸고 오십 위안 몇 근 몇 냥 빌렸다는 식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처럼 부유한 곳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생각은 안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서 풍기가 크게 문란하였다. 그래서 스무 살이 넘은 청년 중에서 ‘임칙서(林則徐)’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현대화 중국에 아직도 이렇듯 황당한 일(물론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말이다.)이 있는데 전통사회 중국인은 더 어떠했을까?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전통을 목숨처럼 여기고 변혁을 거부하고 혁명을 거부해왔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봉건 영주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와 경제 시스템을 구축한 거대한 혁명이었다. 중국인은 1898년 개량을 요구하는 ‘무술변법(戊戌變法)’조차 실패하였는데 어찌 자체적으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292    음양학은 중국문화의 반창고 댓글:  조회:6011  추천:2  2013-04-15
음양학은 중국문화의 반창고   《홍루몽》제31회에 사상운(史湘雲)과 그의 시녀 취루(翠縷)가 음양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우선 취루가 사상운에게 음양이란 것은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으니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며 질문한다. 그러자 상운이 음양이란 사물의 성질이라고 하면서 예를 들어 설명한다. “하늘이 양이면 땅은 음이고, 불이 양이면 물은 음이며, 해가 양이면 달은 음이지.” 취루가 알았다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터득을 덧붙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햇님을 보고 태양이라고 하고 점치는 사람들이 달님을 보고 태음성(太陰星)이라고 하는 거군요.” 상운이 취루를 기특하다는 듯 미소를 짓자 취루가 재차 물었다. “그러한 큰 사물에게 음양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모기나 벼룩, 꽃이나 풀, 기와나 벽돌 같은 것에도 음양이 있나요?” “그렇고말고. 저 나무 잎사귀 하나만 보더라도 그래. 햇살을 받는 쪽은 양이고, 아래로 그늘진 쪽은 음이지.” 취루가 들고 있는 부채에도 음양이 있는 것이냐고 묻자 상운이 대답했다. “그럼, 이쪽이 정면이니 양이고 저쪽이 반대쪽이니 음이지.” 상운은 취루의 이어지는 질문에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다. “새나 짐승은 수컷이 양이고 암컷은 음이다.” 취루가 크게 깨달은 듯한 얼굴 표정으로 물었다. “세상 만물에 음양이 없는 것이 없다면서 왜 우리 사람들에게는 음양이 없는 걸까요.” 상운은 나이 어린 계집애가 혹시라도 엉큼한 ‘19금 이야기’를 꺼낼까봐 눈을 흘기며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취루는 자신도 알 것은 다 알고 있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왜 제가 몰라요. 아가씨가 양이면 저는 음이지요.” 상운은 난데없는 그녀의 말에 잠시 당혹스러웠다. 아니 여자면 모두 음이지 어떻게 음양으로 나뉜다는 말인가? 그러자 취루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람에게 주인이 양이고 노복은 음인 것으로 정해진 거예요. 제가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도리를 모를까 봐요.” 취루는 이렇게 세상 모든 사물에 음양이 존재하고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성격이 다르거나 성별이 다른 사물에 음양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에도 음양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라지만 남자 몸의 기는 양이고 혈은 음이 된다. 같은 도리로 여자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하다못해 손의 경우 손등은 양이고 손바닥은 음이다. 또 산이 양이라지만 햇빛을 잘 받는 쪽은 양이고 햇빛을 잘 받지 못하는 쪽은 음이 된다. 일반적으로 남쪽은 양이고 북쪽이 음이라지만 산의 북쪽은 음이고 강의 북쪽은 양이 된다. 그래서 한국의 ‘한양(漢陽)’은 한강 이북에 있고 중국 ‘심양(沈陽)’ 역시 심수 이북에 위치해 있다. 이렇듯 음양은 모든 사물에 다 적용되니 반창고 같은 존재이다. 중국인 선조들은 반창고 같은 존재인 음양으로 우주를 바라보았고 음양으로 우주를 관찰하는 방법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한 것이 바로 《주역》이다. 《주역》이 도대체 어떤 책인가? 《주역》은 단순히 사주팔자나 보는 하나의 ‘점서(占書)’가 아니다. 천문, 역법, 음악, 건축, 의학 등과 모두 연관시킬 수 있고 인간의 일생대사인 혼인과 제사, 먹고 사는 장사, 심지어 집을 사고 이사하는 일까지 모든 사회현상과 일상사에 가르침이 되는 지침서이다. 그래서 혹자는《주역》을 중국문화의 바이블이라고 말한다. 《주역》은 ‘역경(易經)’과 ‘역전(易傳)’ 두 가지가 있다. ‘역경’은 점복에 관한 것이고 ‘역전’은 철학에 관한 것이다. 은나라 때 점치는 방법은 거부기 껍데기를 태운다. ‘푸, 푸’ 타는 소리를 ‘복(卜)’이라 하고 타서 변하는 모양을 적은 것이 ‘갑골문’이다. 주나라 때부터 점치는 방법은 ‘괘(卦)’를 따지고 살피는 이른바 ‘계산(計算)’한다는 뜻으로 생겨난 ‘산괘(算卦 : 중국어 발음으로 쏸꽈라 함)’이다. ‘괘(卦)’는 양효(陽爻)와 음효(陰爻)가 있다. 쭉 뻗은 막대기 모양인 ‘양효’는 수컷인 남자를 뜻하는데서 유래되었고 가운데 구멍이 뚫린 ‘음효’는 암컷인 여자를 뜻하는데서 생겨났다고 한다. 음양은 중국인이 우주를 관찰하는 기본이자 근본이다. 모든 사물에 규율이 있듯이 음양에도 당연히 규율이 있다. 음양규율은 간단하다. 즉 일음일양(一陰一陽)이다. 한 번 음이 되었다가 한 번 양이 되고 또 한 번 양이 되었다가 한번 음이 되는 변화이다. 64괘는 음양의 조합과 일음일양 규율에 의해 만들어졌다. 음양학을 잘 파악하면 64괘를 쉽게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64괘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고 마지막 두 괘만 집고 넘어가자. 64괘 마지막 두 괘는 기제(旣濟)와 미제(未濟)이다. 제63괘가 기제라면 그것으로 끝나야 마땅한 것이 아니냐? 왜 기제 뒤에 또 미제가 따르는 것일까? 기제는 일의 성공과 완료를 뜻한다. 미제는 일의 미완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국철학의 심오함과 오묘함을 엿볼 수가 있다. 기제 뒤에 미제가 따르는 것은 ‘우환의식(憂患意識)’이다. 혁명이 성공을 거두했다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이 성공한 뒤에 할 일이 더 많다. 만약 혁명에 성공했다 하여 도취의식을 갖는다면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나태해지면 혁명에서 흘린 피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쉬운 말로 하면 애써 일궈놓은 것을 한 순간에 말아먹는 것이다. 음양학을 주축으로 이뤄진《주역》은 우주를 관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규율을 찾아내고 체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가장 오래된 고전이자 중화민족문화의 금자탑이며 중국인의 정신지혜이다. 현재 중국 총재국학반(總裁國學班 : CEO 강습반)에서《주역》을 필수과목으로 채택하여 중국고전에서 지혜를 얻고 있다.  
291    새해 첫날 받은 선물 댓글:  조회:5325  추천:2  2013-04-06
새해 첫날 받은 선물   계사년 첫날 서울에 눈이 내렸다. 옛사람들은 새해첫날 내리는 눈을 풍요와 다산의 징조를 알리는 서설(瑞雪)이라 했던가. 눈은 낭만을 불러온다. 지천명이라 젊은이들처럼 가슴이 할랑거리는 설렘과 낭만은 없으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사각사각 서설(瑞雪)을 밟으며 외식 길에 나선 기분이 참 좋았다. 동네 음식점에서 우린 지난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 해야 할 일들을 담론했다. 여행계획을 잡아보기도 하고, 늦둥이를 보는 것이 어떨까······. 희소(喜笑)를 날리며 잔을 비우고 있을 때, 한 20대 후반 젊은 사내가 반갑게 다가왔다. 6주기술교육을 수료한 나의 제자 윤민호였다. 음식점에 나타난 윤민호는 내가 눈에 띄자 얼굴이 매우 상기되었다. “자네, 새해 첫날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럼요, 선생님이 아시면 필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 그럼 기대해보지.” 나는 윤민호를 닦달하지 않고 일단 술잔을 나누고 나서 들어보기로 했다. 6주기술교육은 한국정부가 무연고동포들에게 한국에 올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대신 입국 후 6주 동안 기술교육을 이수해야 비자변경이 가능하도록 만든 제도이다. 시험이 없이 수료시간만 때우면 된다. 시험이 없으니 압력이 없다. 그들은 공부하기 위해 학원에 오는 것이 아니라 비자변경을 위해 핍박에 의해 양산에 오른 격으로 학원에 다닌다. 자의가 아니고 타의에 의해 등 떠밀려 학원에 온데다 한족지방에서 나고 자랐거나 고향이 연변이지만 한족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은 한국어는 고사하고 조선어도 젬병이라 강의를 알아먹지 못해 수업이 죽을 맛이다. 애먹이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중이 종치듯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쯤은 ‘고상’한 편이다. 그들은 억지로 죽치고 수업에 참가하는 것이 지옥이다. 윤민호는 심양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한족지방에서 살아온 탓에 우리말을 일상용어 몇 마디만 알아들을 뿐 입으로 번지는 건 젬병이다. 행위방식이나 사유방식도 99% 한족이다. 컴퓨터강의를 맡은 한국인강사가 같은 윤 씨라 반가워 ‘본’이 어딘가? 물었다. 한족이나 다름없는 윤민호가 ‘본’을 알 리가 만무했다. 문제는 그의 태도였다. 자신이 ‘본’을 모르고 있는 것을 창피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어온 강사를 오히려 못 마땅하다는 싸늘한 눈길이었다. 한국인 강사들은 조선족학생들과 마찰이 생겨도 훈계를 하지 못한다. 정서교감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변일중 교사출신이라 학생들에게 엄격했다. 그들이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지식 하나, 상식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한국생활적응에 도움을 주려고 열심히 강의에 몰두했다. 한글과 한국말을 모르는 학생이 30%이다. 그들을 위해 판서를 많이 하고 아울러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쓴다. 나의 강의는 한국문화, 한국역사, 한국민속, 한국법률 한국생활적응 등 사회통합프로그램이었다. 당연히 매 번마다 빼놓지 않는 것이 ‘본’에 관한 강의이다. ‘본’을 모르는 학생이 20%이다. “본도 모르는 자가 무슨 조선족이냐?”고 강력하게 야단친다. 다른 학생들이 침묵을 지키는데 윤민호가 중국말로 투덜댄다. “그런 걸 몰라도 지금까지 밥 먹고 살아왔습니다. 왜 하필 그걸 알아야 하나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조선족은 단군을 모르고 ‘본’을 몰라도 먹고 살아오는데 지장이 없었다. 2012년 한해 내가 교육시킨 6주기술교육생은 무려 413명이었다. 그 중 95%가 단군이란 ‘ㄷ'자도 들어본 적이 없단다. 민족의 조상을 모르고 살아왔다. 조상을 모른다는 것은 뿌리가 없는 집단이란 뜻인데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조선족 다수가 민족의 뿌리를 모르고 있을뿐더러 가문의 뿌리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더 큰 비극이다. 문제가 또 있다. ‘본’이 무슨 뜻이냐고 질문을 들이대면 아는 자가 한두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80%가 자신의 ‘본’을 알고 있었지만 그 ‘본’이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본’이란 그 가문의 조상이 살던 곳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조선족 절대다수가 가문의 조상 뿌리조차 모르고 어영부영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본’을 모르는 학생에게 하룻밤의 시간만 준다. 이튿날 대답 못하면 나의 강의를 수강할 자격을 박탈한다. 강력하게 밀어붙이니 당일로 부모한테 물어 알아낸다. 채찍이다. 동시에 나는 강의를 재미있게 하려고 심혈을 쏟고 정열을 불태운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나는 일단 교단에 서면 천리마가 광야를 달리듯 거침이 없다. 이렇게 당근과 채찍을 겸비해 전원이 수업에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교사는 생리상 우수한 학생 부류와 애 먹이는 부류를 잘 기억한다. 413명이 되는 단기수업제자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 나는 윤민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새해 첫날 음식점에서 우연하게 인상이 있는 제자를 만나 나는 몹시 기뻤다. 연거푸 석 잔을 건배했다. “선생님은 저의 일생에서 가장 인상 깊고 가장 잊지 못할 스승입니다.” 제자의 진정이 가득 담긴 인사말이다. “무슨 소린가, 내가 강의한 시간이 고작 30교시밖에 안되는데······.” “비록 시간은 짧았지만 선생님 덕분에 저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가문의 뿌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왔으니 조상이 계시던 파평(파편 윤씨)에 가보고 싶어 오늘 다녀왔습니다.” “아니, 그까짓 것 몰라도 밥 먹고 산다고 큰소리치던 자네가 ‘본관’까지 찾아가다니!” 나는 농으로 한소리 했지만 내심으로 제자가 한없이 대견해 보였다. “어제저녁 조상의 뼈가 묻힌 곳에 찾아간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아버님께서······.” 그는 말하다 말고 뒤통수를 긁적거린다. “그래, 아버님께서?” 말을 잇도록 유도했다. “아들놈이 한국 가더니만 ‘사람 되었다’고 하시면서 몹시 기뻐하시는 모습이 전파를 통해 역력하게 전해왔습니다.” 교단에 서는 훈장은 제자들이 성숙되어가는 모습에 가슴 뿌듯하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끔 신선한 충격을 먹을 때가 있다. 새해 첫날 저녁 우연히 만난 제자가 밥값을 나 몰래 지불했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생활 10여 년 동안 한국인과 중국인한테서 수많은 대접을 받아보았다. 그 대접들은 서로 일로 얽힌 관계로 이뤄졌거나 친구로 친해 이뤄졌던 것이다. 한국생활 10여 년이 넘도록 내가 가르친 제자한테서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제자가 지불한 밥값은 단순한 수학적인 돈 계산으로 환산할 수 없다. 예로부터 훈장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스승은 제자들한테서 가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을 받으면 무한한 가치로 여긴다. 스승의 보람과 희열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새해 첫날 제자한테서 받은 선물이 나를 몹시 흥분케 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난 한해 있었던 일들이 필름처럼 떠올랐다. 지난 흑룡의 해에 나는 많은 일들을 해냈다. 예전처럼 글 쓰고 신문을 꾸리고, 민속장기대회를 개최하고, 교사모임도 열었다. 동북아신문 이동렬 대표와 손잡고 코리안드림 20년 넘어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여러 단체 132명을 이끌고 참관을 다녀왔다. 전 청화대 교수인 정인갑 선생과 힘을 모아 이동렬 대표를 수반으로 하는 ‘재한동포문인협회’를 출범시켰다. 많은 일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지난 한해에 행한 여러 가지 강의였다. 한국외국어대학 특강,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특강, 구로경찰서 특강, 구로구청 특강, 한국청소년교육센터 특강, 안산 모 고등학교 특강 등 한국인을 대상으로 많은 강의를 해왔다. KBS에 세 차례 출연했고, 북경중앙방송조선말프로 인터뷰도 7차례 했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수기공모작품 심사위원도 맡았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수많은 강의를 통해 조선족에 대한 이해와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준 것이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지만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강의 중 가장 희열을 느낀 강의는 역시 6주기술교육생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사회통합프로그램교육이었다. 413명의 젊은이들한테 민족의 조상을 알려주고 가문의 뿌리를 찾아주었다는 이 한 가지만으로도 나는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는 강의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 훈장이 아니다.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하여 밥 먹고 사는 인간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일 중에 강의가 나의 몸에 가장 잘 맞는 항목이다. 직업상 매일 강의를 진행할 수 없어 빠질 때가 있으면 학생들의 강의요청이 빛발 친다. 내가 가르친 6주기술교육생은 과거 연변일중 제자에 비해 반쪽짜리 제자이다. 반쪽짜리 제자한테서 받은 선물이 가슴을 더 설레게 한다. 새해 첫날 반쪽짜리 제자한테서 받은 선물이 더욱 나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여러 가지 일 중에 새로운 한해에도 있을 6주기술교육 강의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고 심혈을 기울이겠다고.      
290    박근혜대통령을 악용하는 악덕상술 댓글:  조회:5255  추천:1  2013-03-29
박근혜대통령을 악용하는 악덕상술 일부 행정사, 여행사 동포 상대로 사기행각 극성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동포를 상대로 업무를 취급하는 행정사사무실이 500여 개 있고 여행사가 행정사사무실 숫자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포들이 모여 거주하는 곳이면 행정사사무실과 여행사가 있어 동포들의 출입국업무를 비롯해 고충상담이 쉬워지고 비행기티켓 구매 등 많은 편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행정사사무실, 여행사는 정상업무취급으로는 수익이 나지 않아 동포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 법무부에서 10년 이상 불체자구제정책을 실시하면 5년 이상이면 구제받는다는 거짓말로 돈을 받고는 돌려주지 않는 사례가 많다. 방문취업(H-2) 5년 만기자는 귀국하지 않고 체류연장을 보장해준다 하고, 위명여권 경력자도 본인이 신고하지 않고 돈만 내면 자기네가 알아서 해결한다는 등 사기항목이 가지각색이다. 보통 1인당 300~400만원, 수십 명의 돈을 받고 도망간 업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사기수법도 점점 더 교묘하게 변화되고 있다. 정부교체시기를 악용하여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이다. 2012년 12월 19일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불법체류자를 구제한다. 선착순으로 해결하니 빨리 접수해야 빠르게 구제받을 수 있다.”는 거짓말로 돈을 받는다. 일부 업소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위명여권 경력자든 위장결혼이든 심지어 형사범죄자든 동포를 다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접수받는다. 하얼빈에서 온 심모 여인(48세)은 부모 호적이 한국에 있지만 친척을 찾지 못해 인우보증인이 없어 국적이나 영주권신청을 제출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여러 곳 돌아다녀보았는데 불가능하다는 답이었다. 이쯤 되면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나 요행심리를 버리지 못해 Y구 소재 00행정사사무실에 찾았더니 영주권신청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100% 문제가 없다는 큰소리를 듣고 맡겼다. 처음 200만원 내고, 며칠 지나 또 다른 명분으로 80만원 주고 한 달 지나 100만원, 이제 마지막 관문에 이르렀으니 60만원 더 내야 한다 하여 모두 440만원을 주었으나 아무런 해결이 없다. 돈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니 박근혜 정부 출범이 안정되면 해결이 될 것이니 3개월 더 기다리라는 대답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해도 법 테두리 안에서 동포문제를 다루는 것이지 결코 대통령직으로 법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구제정책을 펼 수는 없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이다. 신청요건부족도 박근혜정부가 해결해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동포를 상대로 하는 사기행각은 사기 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사기 당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기당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사기 치는 자가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동포들의 요행심리 때문이다. 물론 사기 치는 자가 나쁘지만 동포사회도 스스로 반성이 필요하지 아닐까.
289    전사(戰士)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4947  추천:1  2013-03-16
전사(戰士)란 말의 유래   ‘士’를 중국과 한국은 선비 ‘사’라 하고 일본은 武士를 뜻하는 사무라이라 부른다. 왜 이렇듯 극명하게 다를까? 양쪽에 다 일리가 있다. 춘추시대에 사람은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로 구분하는데, 이를 계급이라 한다. 귀족계급은 다시 천자, 제후, 대부, 사(士)로 나뉘는데, 이를 등급이라 한다. 네 가지 등급가운데 앞에 세 가지 귀족은 모두 영지를 지니고 있어 ‘영주’라 부른다. 그러나 ‘사’는 영지가 없이 단지 제사권, 참정권, 참전권 등 세 가지 권리만 가지고 있었다. 춘추시대 전쟁은 제후가 통수권자이고 대부는 장군이고 평민은 참전권이 없어 ‘사’가 싸움의 주력군이었다. ‘戰士’와 ‘兵士’란 말이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귀족인 ‘사’가 병사 노릇하는 전쟁은 당연히 전국시기부터 있었던 전쟁에 비해 점잖고 재미있었다. 다시 말해서 춘추시대 전쟁은 양반 놀이었다면 전국시대 이후 전쟁은 상놈의 놀이었다. 염·황 시대 전쟁은 아무런 규칙이 없이 서로 마구 때리고 쫓고 도망가는 난전(亂戰)이었던데 비해 춘추시대 전쟁을 살펴보면 규칙이 엄격했는데 참으로 귀엽고 재미있었다. 첫째 시간을 엄격히 지켰다. 보통 아침 해가 떠오르면 집합하여 싸우고 아침밥을 먹기 전에 끝냈다. 아무리 길어도 하루를 초과하지 않으며 해가 지면 그만두었다. 둘째 지정된 장소에서만 싸웠다. 두 나라 국경선 변강(封疆이라고도 함)에서 싸웠다. 셋째 예의를 엄격하게 지켰다. 쌍방의 군대는 변강에 도착하면 일단 합숙에 들어간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 포진을 시작한다. 포진이 끝나면 각기 장군이나 사절을 파견해 대화를 시작한다. 넷째 유희규칙을 중시했다. 우선 적진에서 온 사자를 절대 죽이는 법이 없었다. 다음 상대가 전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하지 않는다. 그다음 거듭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 다친 사람을 더 가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네 번째는 머리가 흰 사람은 포로로 삼지 않는다. 다섯 번째 오십 보 후퇴하는 자를 쫓지 않는다. 오십 보만 후퇴하면 되는데 굳이 백 보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맹자의 '오십 보 백 보' 이야기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적군이 도망치는 전차가 구렁텅이에 빠지면 다가가서 구원해주었다는 것이다. 현대축구경기에서 상대팀 선수가 쓰러지면 다가가서 일으키는 것과 흡사했다. 어떻게 그토록 재미나는 전쟁이 가능했을까? 전쟁목적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전쟁목적은 ‘겸병(兼竝:상대국을 멸망시켜 삼킨다는 뜻)’이 아니라 ‘쟁패(爭覇)’였기 때문이다. ‘정패’는 천자의 이름을 빌어 천하를 정치적으로 제패하는 것이지 영토 뺏기 싸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춘추오패’는 기타 제후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패주가 되었을 뿐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배하지 않았다. ‘겸병’전쟁은 전국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겸병’의 수요에 따라 손무, 오기, 손빈 등 군사가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류의 전쟁은 냉정하고 야비하고 야만스러웠고 참혹했다. 춘추시기 일선에서 싸움하는 자가 ‘사’였다면 전국시기부터 평민이 싸움의 주력이었다. 그렇지만 평민출신군인을 ‘전민(戰民)’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춘추시기 관습에 의해 그냥 ‘전사’라고 불렀고 현대사회도 여전히 이 호칭이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 易中天의 시리즈강의 제2강 '병가의 사고' 참조.
288    금전과 색 교환 유래 댓글:  조회:5381  추천:4  2013-03-04
금전과 색 교환 유래   남녀 육체적 교합에 있어서 성을 즐기는 쾌감도가 여성이 남성보다 천배 만배 높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행복한 신음소리 내고 남자는 여자를 정복했다는 만족감에 젖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여자의 ‘표정’을 살핀다. 여성의 쾌감도가 남성보다 훨씬 높은 생리적 현상만을 따지면 마땅히 힘 빼고 고급단백질을 주고 쾌감을 주는 남자에게 여자가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이 도리이건만 현실은 거꾸로 남자가 여자한테 금전적인 대가를 치른다. 어찌된 영문일까? 원시남과 원시여가 동굴에서 한바탕 ‘짓거리’가 있었다. 생리적으로 성 흥분이 빨리 사라지는 원시남은 사냥에 나설 준비에 서두르지만 여흥이 가시지 않은(餘興未盡) 원시여는 실 한 오라기 가리지 않은 채 누운 자리에서 ‘명상’에 빠져 있다. 이때 동굴어구에 야만적인 남자가 몇이서 ‘냄새’에 끌려 동굴 안을 살피며 서성거린다. 원시남은 어떻게 해야 하나? 사냥에 나서는 원시남은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시여를 지켜내려 한다. 첫째 원시여를 숨겨놓는다. 동양역사에 처녀를 규방에 가두는 관습이 이와 같은 역사맥락에 의해 생겨난 문화였다. 둘째 원시여의 얼굴을 가린다. 예쁜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베일을 씌운다. 지금도 이슬람지역 여성들이 거리에 나설 때 히잡을 착용하는 관습이 역시 원시여를 지켜내려는 궁여지책에서 유래된 것이다. 셋째 원시여의 두 발을 묶어놓는다. 다른 남자와의 ‘왕래’를 차단하려고 원시여의 두 발을 꽁꽁 묶어놓는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있었던 중국전족문화는 발이 성기를 상징한다는 의식과 아울러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소족숭배문화(小足崇拜文化)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화유래가 있겠으나 이와 같은 원시여를 묶어두는 방식이 한몫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 세 가지 방법은 원시여를 지켜내는데 있어서 모두 궁여지책일 뿐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다. 좋은 방법이 있다. 사냥에 나서는 원시남은 여흥이 채 가시지 않은 원시여의 보조개를 귀엽게 살짝 비틀면서 “요 예쁜 것, 내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꿩고기를 잡아올게, 기다려!”라고 말하면 원시여는 순식간에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컥 삼킨다. 아울러 금방 즐겼던 여흥이 온데간데없이 귀신처럼 사라지고 오로지 꿩고기를 들고 올 낭군님만 그리게 된다. 꿩고기를 포식한 계집은 감사한 맘으로 기꺼이 사내에게 색으로 갚는다. 꿩고기를 중국식 표현을 빌려 ‘반표(飯票)’라고 하자. 남자는 ‘반표(飯票)’를 제공하고 여자는 색으로 갚는 패턴이 인간사회에 정착되었던 것이다. 재미나는 것은 수천수만 년 전의 ‘반표(飯票)’와 색의 교환이 오늘날 현대화사회에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화대를 치르고 여자의 몸을 산다든지, 좋은 일자리를 찾아주고 색을 갈취한다든가, 연예인지망생에게 장래를 보장해준다는 감언이설로 성을 농락한다든가, 하여튼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여자의 몸을 사는 현상이 모두 본질상 ‘반표(飯票)’와 색의 교환이다. 또 고급주택, 고급승용차, 고급악세사리 등 형식이 달라질 수는 있으나 이러한 것들이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반표(飯票)’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일부관리들이 ‘정부(情婦)’를 많이 두는 것이 부패의 큰 요인이라고 한다. 십분 맞는 말이다. ‘정부(情婦)’를 많이 두려면 그만큼 ‘반표(飯票)’가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부패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287    엘리트교육과정이 없는 한국 댓글:  조회:5327  추천:6  2013-02-28
엘리트교육 과정이 없는 한국   중국에서는 중앙 최고 지도부 간부로 등용되려면 적어도 기층행정조직(향·진)의 당위 혹은 정부의 행정단련을 거쳐 현·시급 나아가서 성급 지도부간부로 승진하고 나서 소수자가 최고 권자에 오를 수 있다. 개별적으로 도시국유기업에서 기층간부로부터 정계에 진출하여 한걸음, 한걸음 위로 밟아 최고엘리트에 등극한다. 기층부터 중앙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청년단조직과 당교는 중국식 엘리트양성 전문기관이다. 미국과 일본은 중국에 비해 방식이 다르지만 엘리트과정을 밟는 교육이 있다. 클린턴과 작은 부시 같은 전 대통령들이 엘리트교육과정을 거쳤다. 일본에서는 하다못해 외무성공무원이 되려면 일본 내 엘리트교육과정을 거치고 중국담당을 맡자면 먼저 대만에 유학하고 다음 대륙에 가서 공부하고 그다음 구미에서 보는 중국을 알기 위해 구미에 유학 간다. 외무부공무원이 되기까지 8년 혹은 10년이란 시간이 수요 된다. 업무상에서 베테랑 수준급일 수밖에 없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 같은 엘리트과정이 없을뿐더러 중국처럼 기층조직부터 행정과정을 밟는 프로그램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대학교수가 장관으로 임명되고, 대학 총장 혹은 검찰출신 외 별 다른 정부계열의 행정경험이 없는 분이 총리후보로 지명되고, 변호사가 경관(京官:서울시장)이 되고, 학생운동권 출신이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도지사로 되고, 과학자가 대통령후보로 인기를 끌기도 한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이래 역대대통령을 살펴보면 기층조직부터 행정과정을 거친 분이 단 하나도 없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박사를 취득한 학자출신이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순 군부출신이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평생 민주화운동 하던 분이고, 노무현은 변호사출신으로 한때 해양수산부장관을 잠깐 지낸 경력이 전부이고, 이명박은 대기업사장출신으로 서울시장을 거친 것이고, 박근혜는 정당을 움직이는 정치는 잘했을지 몰라도 행정경험이 전무하다. 중국에 비해 한국의 엘리트교육과정이 없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필자는 문화로 해석하려 한다. 중국인은 물을 끓여 마시므로 하여 모든 일에서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즐기는 관습이 정착되었던 것이다. 식사하는데 몇 시간씩 먹는 현상이 바로 먹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가 결국 최고엘리트권좌도 잡다한 행정과정을 거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인은 겉(表)보다 내실을 다지는 문화를 즐기기 때문에 최고엘리트권좌에 오르려면 역시 내실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산 좋고 물 좋아 어디가나 즉석에서 냉수를 벌렁벌렁 마실 수 있기 때문에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에만 치중하는 문화가 자리잡아왔다. 그래서 한국인은 내실을 다지는 과정 같은 문화를 거부하고 결과에만 치중하게 되었고 결국 이(里:속)보다 표(表:겉)에 집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치경력이 전무하고 행정경험이 전무한 학자도 대통령후보로 인기가 대단했던 것은 역시 한국인의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에만 치중하는 문화의 발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정치에 있어서 인기몰이란 말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인의 특이한 문화 ‘멋’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멋’이란 문화는 역시 내실(속)을 무시하고 겉(表)에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멋’을 추구하려면 역시 과정이 생략될 수밖에 없고 결과에만 매달리게 된다. 국회의원후보나 대통령후보로 나선 분의 과거 행정경력이나 혹은 앞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에 등극한 후 자격 적합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임시 ‘멋’이 있으면 그 쪽에 확 몰려든다. 엘리트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한국대통령이 엘리트교육을 받을 대로 받아온 중국주석에 비해 왠지 깊고 넓은 철학이 결여되어있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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