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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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    서민(庶民)과 인민(人民)의 뜻 차이 댓글:  조회:3712  추천:0  2017-04-05
                                             서민(庶民)과 인민(人民)의 뜻 차이 교육부 고위간부였던 나향욱 씨가 지난해 ‘99% 개돼지’ 발언으로 곤혹을 치르다 결국 공직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다른 부처의 관료도 아니고 하필 대한민국 교육을 관장하는 주무부처의 고위 관료 입에서 나온 발언이라 나라 전체가 충격에 빠질 정도로 시끌벅적하게 이슈로 떠올랐었다. 00일보 00논설위원은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지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위관료들이 나향욱 씨와 같이 ‘99% 개돼지’ 의식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계급사회가 사라진 지도 반세기가 넘었건만 아직도 1%엘리트가 나머지 99%를 ‘개돼지’로 보는 데는 99%를 부르는 잘못된 호칭이 부채질 한 것 아닌지? 필자는 의심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99%를 공식적으로 서민(庶民)이라 부른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서민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비슷한 말로 서인(庶人)ㆍ인서(人庶)ㆍ하민(下民)등이 있다. 둘째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 비슷한 말로 범민이 있다. 그런데 서민이란 어휘의 글자 뜻과 그 유래를 살펴보면 폄하의 의미가 다분하다. 서민이란 ‘庶’는 적서(嫡庶)관계에서 첩의 자식을 뜻하는 글이고 ‘民’도 역시 폄하의 뜻이 짙은 글자이다. 그 유래는 중국 주나라 때부터 신분을 나타내는 5계급, 즉 천자(天子), 제후(諸侯), 대부(大夫), 사인(士人), 서민(庶民) 중 가장 낮은 계급이다. 계급사회에서 서민은 천대받는 천민이었다. 조선시대를 말하자면 신분을 크게 양민(양반, 중인, 상인)과 천민으로 나눴는데 천민이 바로 서민이었다. 역사적으로 서민은 역사무대에 주인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농민봉기로 황제가 된 명태조 주원장 같은 인물은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무대에 오를 수 있었지 계속 서민신분을 유지한 사람이 주인이 되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마천은『사기』를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 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나눠 구성하여 지었다. 여기서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 8편과 연표를 집대성한 표 10편을 제외하고 본기, 세가, 열전은 모두 인물을 다뤘는데 본기는 천자(제왕), 세가는 제후 왕, 열전은 무왕의 은주(殷紂) 토벌을 반대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먹다 죽은 이념과 원칙에 순사한 백이와 숙제를 시작하여 마지막에 이(利)를 좇는 상인의 열전 화식열전(貨殖列傳)까지 위대한 성현뿐 아니라 시정잡배가 도덕적 당위의 실천과 탐욕적 본능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생생한 모습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 다수의 인물은 바로 대부와 사인(士人)이었다. 말단 계급인 서민은 ‘명함’이 없었다.『사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서가 다 그러하다. 유교의 이념인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도 서민이 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즉 사인은 수신하고 대부는 제가하며 제후는 치국하고 천자는 평천하의 의무가 각각 주어졌던 것이다. 이것을 수학공식처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수양을 쌓아 수신이 잘되면 제가가 따라서 잘 되고, 제가가 잘 되면 따라서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천하가 자연스레 태평해진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 계급분할이 아니었다. 사인이 공부를 통해 출세하여 권력을 잡으면 사대부가 되는 것이고, 대부가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실력이 향상되면 제후의 자리를 빼앗고 제환공처럼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에 들어 새로운 신흥지주계급이 탄생되어 사회신분판도를 바꿔놓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전국시대에 들어 제후국들의 공왕(共王)이었던 천자가 유명무실해지다가 결국 진 영정에 의해 역사무대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춘추시대의 서민은 전쟁에 참전할 자격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군대를 하나? 사인이 했다. 병사란 사(士)가 사인의 사(士)인 것이 바로 이렇게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사인이 병사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춘추시대 전쟁은 진짜 ‘문명’했다. 왜냐? 병사인 사인들은 모두 배운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자. 춘추시대 사인이 병사로 주축이 된 전쟁은 네 가지 규칙이 있었다. 첫째 시간을 엄격히 지켰다. 보통 아침 해가 떠오르면 집합하여 싸우고 아침밥을 먹기 전에 끝냈다. 아무리 길어도 하루를 초과하지 않으며 해가 지면 그만두었다. 둘째 지정된 장소에서만 싸웠다. 두 나라 국경선 변강(封疆이라고도 함)에서 싸웠다. 셋째 예의를 엄격하게 지켰다. 쌍방의 군대는 변강에 도착하면 일단 합숙에 들어간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 포진을 시작한다. 포진이 끝나면 각기 장군이나 사절을 파견해 대화를 시작한다. 넷째 유희규칙을 중시했다. 우선 적진에서 온 사자를 절대 죽이는 법이 없었다. 다음 상대가 전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하지 않는다. 그다음 거듭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 다친 사람을 더 가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네 번째는 머리가 흰 사람은 포로로 삼지 않는다. 다섯 번째 오십 보 후퇴하는 자를 쫓지 않는다. 오십 보만 후퇴하면 되는데 굳이 백 보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맹자의 '오십 보 백 보' 이야기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어떻게 그토록 재미나는 전쟁이 가능했을까? 전쟁목적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전쟁목적은 ‘겸병(兼竝:상대국을 멸망시켜 삼킨다는 뜻)’이 아니라 ‘쟁패(爭覇)’였기 때문이다. ‘쟁패’는 천자의 이름을 빌어 천하를 정치적으로 제패하는 것이지 영토 뺏기 싸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춘추오패’는 기타 제후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패주가 되었을 뿐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배하지 않았다. ‘겸병’전쟁은 전국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겸병’의 수요에 따라 오기, 손빈 등 군사가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류의 전쟁은 냉정하고 야비하고 야만스러웠고 참혹했다. 춘추시기 일선에서 싸움하는 자가 ‘사’였고 서민은 기껏해야 후방지원군 노릇을 하였다면 전국시기부터 서민이 싸움의 주력이었다. 그렇지만 서민출신군인을 ‘전민(戰民)’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춘추시기 관습에 의해 그냥 ‘전사’라고 불렀고 현대사회도 여전히 이 호칭이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역사를 돌이켜보면 23개 왕조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에 있어서 개국황제들은 하나 같이 서민을 병사로 이용해서 승리하여 옥좌에 오르면 바로 돌아서서 서민을 착취하고 압박하는 사례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의 새 중국이 창립됨에 따라 서민, 신민(臣民), 백성, 평민 등등의 호칭 대신 인민이란 어휘를 주로 사용해왔다. 북한도 중국처럼 인민이란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인민이란 호칭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먼저 民이란 글자에 대해 살펴보자. 民은 본래 좋은 어휘가 아니었다. 적어도 존칭은 아니었다. 옛날에 이 글자는 보통 어둡다는 뜻의 ‘명(冥)’과 ‘명(暝)’ 그리고 맹인을 뜻하는 ‘맹(盲)’과 서민을 뜻하는 ‘맹(氓)’으로 해석되었다. 아마도 최초의 민은 모두 전쟁포로와 노예였기 때문에 눈을 찔러 장님이 된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여민(黎民)은 전쟁에서 패한 구려족(九黎族)이었고, 축민(畜民)은 상인이 다스리던 늙은 노예들이었으며 완민(頑民)은 주나라인에게 패하고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던 은상(殷商)의 귀족이었다. 이미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자연히 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노예는 평민으로 변했지만 역시 피통치자였다. 이른바 의민(蟻民), 초민(草民), 소민(小民), 천민(賤民), 조민(刁民), 비민(屁民), 순민(順民), 신민(臣民)과 마찬가지로 모두 명확하게 경멸과 차별의 뜻을 띄고 있었다. 臣民이란 전통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던 어휘로서 서양에서 말하는 시민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臣이란 본래 노예였다. 전쟁포로와 죄수도 포함되었다. 전쟁포로가 최초에는 살해되었고 나중에는 남자는 노예, 여자는 첩이 되었다. 그들은 목에 밧줄이 걸려 주인에게 가죽처럼 끌려 다녔다. 개별적으로 재주가 있으면 조금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춤을 추는 무신(舞臣)처럼, 또 드물게나마 간수나 중간 보스 격으로 주인을 도와 다른 노예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농업 노예들을 관리하던 적신(籍臣), 목축 노예들을 관리하던 목신(牧臣) 등이 그것이다. 시민은 최초 그리스에서 생겨난 것이고 공자가 말한 소인에 해당될 것이며 주나라의 국인(國人)과 흡사한 개념이다. 국인은 도성의 주민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민은 여자와 외국인은 제외되어 있었고 그리스적 성인 남자에게만 주어진 권리였으며 그들의 권리는 투표권이 있었고 자유를 의미하였다.  한편 人은 승리자와 통치자를 뜻했다. 상고시대에 인과 민은 평등하지 않았다. 가장 높은 등급의 사람은 大人, 그 다음은 小人, 가장 낮은 등급의 사람은 만민(萬民)이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인과 민을 합쳐 인민이라 부르는 것은 서민이라 부르는 호칭보다 훨씬 낫다. 적어도 폄하의 뜻이 없다는 것이다. 인민이란 호칭은 폄하의 뜻이 없는 일반 개념이지만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고 있고 폄하의 뜻이 다분한 서민이란 호칭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북에서 인민이란 호칭을 쓰고 있어 매우 꺼려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99%를 폄하의 뜻이 다분한 서민이란 호칭을 쓰는 한 평등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345    인문학이란? 댓글:  조회:3805  추천:1  2017-02-11
인문학이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네이버 선생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 자연을 다루는 자연과학에 대립되는 영역으로 자연과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현상을 다루는 데 반하여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으로 한다. 광범위한 학문영역이 인문학에 포함되는데 미국 국회법에 의해서 규정된 것을 따르면 언어, 언어학, 문학, 역사, 법률, 철학, 고고학, 예술사, 비평, 예술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이 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 기준을 설정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역사와 예술이 인문학에 포함되느냐 마느냐에 대한 이론(異論)들이 있기도 하다. 너무 잡다하다. 해석이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위 해석대로라면 마치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대비되고 인문학이 자연과학과 구분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과 같이 이해할 수 있어 굉장한 오류를 안고 있다. 사실 인문학은 자연과학과의 구분을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의 중심문화에서 탈피하고자 생겨난 하나의 학설이고 학문이다. 서양에서 인문학이 생겨난 것은 역시 근대화시기에 들어섬에 따라 나타났다. 근대화시기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예하면 기계문명의 탄생을 근대화시기 진입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지만, 막스 베버는 ‘탈주술시대의 개시가 바로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무슨 말이냐? 서양은 신이 통치하는 암흑기를 천여 년이나 지속해왔다. 이 시기를 중세기라 표현하는데 서양의 중세기 문화는 인간중심의 문화가 아니라 신의 중심 문화시대였다는 것이다. 즉 신 중심 문화에서 인간중심문화시대로의 진입이 바로 인문학의 시대 진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양의 인문학시대 진입은 기껏해야 3백여 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의 인문학시대는 이미 3천여 년 전에 개시 되었으니 서양에 비해 역사가 거의 3천년 앞서고 있다. 중국역사를 돌아보면 夏나라 때는 ‘천명’을 중시했다. 지상의 모든 존재와 인간의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믿음이 굳건히 자리 잡았는데 이것이 바로 천명사상이다. 천명사상이 그 시대 종교역할을 하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지만 너무 추상적이어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래서 은나라에 들어서면 좀 더 구체적인 숭배대상을 지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귀신’이다. 귀신이란 ‘귀’와 ‘신’이 합쳐진 개념이다. 원시인류는 낮과 밤이 바뀌고 사계절이 바뀌고 땅에서 식물이 생겨 자라고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데는 필시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그 힘이 바로 신이다. 그런데 신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힘을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귀’이다. 추상적인 신과 구체적인 귀를 합쳐놓은 것이 바로 귀신이다. 은나라 때 인류는 귀신이 모든 세상만사를 지배한다고 여기고 길흉화복을 전부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점을 쳐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래서 은나라를 ‘숭귀문화(崇鬼文化)’시대였다고 말한다. ‘숭귀문화’의 핵심은 제사였다.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이른바 ‘제정일치’시대였다. 제사는 제물이 필요하다. 그 제물로서 여러 가지 음식이 있을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희생이란 말이 제사에서 생겨난 것이다. 천지종묘(天地宗廟) 제사(祭祀)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일컫는 말로, 희는 색이 순수한 것, 생은 길함을 얻지 못해 죽이는 것 을 뜻한다. 희생양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유태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쳤던 사실(하나님이 받아주지 않았지만)이 그 시대 사람도 제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좋은 증거이다. 그리고 왕이 죽으면 왕비와 후궁들 및 내시들을 따라서 생매장하는 이른바 ‘순장’제도가 있었다. 제사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제도는 사람보다 귀신을 더 중히 여기는, 즉 사람 위에 귀신이 있고 귀신을 사람보다 더 중히 여기는 문화, 이것이 바로 귀신의 중심문화였다. 이와 같은 ‘숭귀문화’는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섬에 따라 타파된다. 주나라에 진입하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제도를 없애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 중심 문화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숭귀문화’를 타파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문학을 창조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사람중심문화를 구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무엇이었을까? 주나라 초기 주공이 예악(禮樂)제도를 지어냈다. 예는 명분이고 등급질서이다. 예하면 천자는 여자를 72명 소유할 수 있고 제후와 대부 및 사는 내리 차등으로 여자를 소유하고 백성은 여자 하나만 거느릴 수 있다는 제도가 바로 예이다. 제나라 재상 관중은 ‘사농공상’ 등급 제도를 실시하여 사회질서를 구축하였다. 이런 식으로 전체 사회는 등급과 질서에 따라 움직였다. 주나라 예악제도는 어떻게 실시가 가능했을까? 은나라가 상공중심시대였다면 주나라는 농경중심시대였다. 상공시대 인간관계는 횡적인 패턴이 강했던데 비해 농경시대 인간관계는 수직적인 패턴이 강했다. 즉 농경은 경험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나이 들수록 경험이 많고 그래서 연장자들이 받들리게 되는 데서 예가 생겨나고 실시되었던 것이다. 효는 예의 실시에 의해 자연적으로 따라서 실시되기로 되어 있다. 농경문화에서 예와 효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이블이다. 주나라 초기 주공이 구축했던 예악제도는 대략 300년 지나자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백가쟁명, 백화제방으로 소문난 춘추시대에 진입하였다. 당시 주요한 학파로서 공자를 위수로 하는 유가, 묵적을 두목으로 하는 묵가, 노자를 중심으로 하는 도가 등 세 학파가 가장 두각을 드러냈다. 공자는 주나라 예악제도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구체적인 처방으로 ‘인애’를 내세웠다. 공자의 인애는 부모를 효도하고 형제우애가 좋아야 하고 가족의 화목이 사회에 전파되면 나라는 잘 다스려 지고 그러면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이다. 본문의 주제와 연관시켜 말하자면 우리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중시를 돌릴 필요가 있다.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 이것이 바로 인문학사회로 진입했음을 말해주는 가장 유력한 징표이다. 묵자는 등급질서를 반대하고 사람마다 평등하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사상을 주장하였다. 노자는 인위적인 예악제도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어 폐지해야 하고 따라서 사람을 속박하는 모든 법과 제도를 없애고 사람은 본능에 따라 있는 그대로 자연적인 행위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무위’사상을 주장하였다. 춘추시대 이 세 학파는 나름대로 중시를 받았으나 천하를 구하는 처방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그래서 천하는 더 복잡하고 혼란한 전국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서로 패주가 되어 ‘칭패(稱覇)’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전국시대 전쟁은 서로 먹어치우는 ‘겸병(兼竝)’이 목적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수요에 의해 오기와 손빈을 위수로 하는 병가들이 중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병가는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천하를 얻는 전쟁에는 도움이 컸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평화 시기에 진입하면 금세 잊혀 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병가는 인문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국시대 ‘겸병’의 맹주가 되려면 부국강병을 이뤄야 했는데 현실을 떠난 이상만을 주장하는 유가, 묵가, 도가는 환영 받지 못하고 새로운 학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법가이다. 법가는 상앙의 법, 신불해의 술(術), 신도의 세(勢) 등 세 가지 파를 한비가 하나로 집대성하여 하나의 학파를 이뤘다. 이 가운데서 가장 역할이 지대했던 것은 상앙이다. 상앙이 처음 진효공을 찾아 유세할 때 오제의 帝道를 말했더니 진효공은 끄덕끄덕 졸았다. 다음번에 요순의 왕도를 이야기 했더니 진효공은 여전히 아무 취미를 느끼지 못하고 졸고 있었다. 세 번째는 춘추오패의 패도를 말했더니 진효공의 눈이 금세 황소눈이 되고 두 귀를 바짝 세우고 서로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이 해서 경청했다고 한다. 상앙이 진효공의 마음에 들어 재상이 되자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을 이뤄냈고 후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초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있어 한비의 사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한비의 책『한비자』를 읽은 진시황은 한비를 얻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다. 물론 한비는 이사의 음모술수에 걸려들어 모함당해 살해되었으나 진시황은 한비의 사상과 책략을 받아들여 천하를 통일하였던 것이다. 법가는 이렇게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너무 각박하여 민심을 얻지 못해 천만년 가리라던 진왕조는 15년 만에 가장 단명으로 끝났고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상앙과 한비 및 송나라 왕안석 등 모두 비명으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역중천 교수는 “법가는 피로 물든 사상”이라고 평가한다. 진왕조의 패망을 지켜본 유방은 한나라 초기에 노자의 무위사상으로 천하를 다스려 성공한다. 그러나 한무제에 이르러 유가가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진 이후 2천년 제국의 역사는 겉으로는 유가로 다스리고 암암리에는 법가로 다스리는 이중적인 ‘명유암법(明儒暗法)’으로 천하를 통치해왔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의 인문학은 3천 년 전 주나라시기부터 시작되었고 제자백가 중에서 유가와 법가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어 현재까지도 중국사회제도를 지배하고 있다. 한편 중국인의 사상을 지배해온 학파로서는 유가와 도가 양대 산맥이다. 이에 대해 임어당 선생은 “중국인은 문화적으로는 유가를 숭상하고 본능적으로는 도가를 받든다.”고 말했다.
344    『삼국유사』로 보는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1) 댓글:  조회:3775  추천:9  2017-02-04
『삼국유사』로 보는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 1 .『삼국유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영토를 잃은 민족은 회생이 가능하지만 역사를 잃은 민족은 희망이 없다.”『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신채호의 말씀이다. 유태인은 2천 년 동안이나 나라를 잃고 디아스포라로 지구촌에 흩어져 살았어도 민족이 소실되지 않고 존재했으며 끝내 자기들의 나라 재건에 성공했다.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역사를 지켜온 덕분이었다. 실제로 유태인은 그들의 역사이자 그들의 종교이며 그들의 종교이자 그들의 역사였다. 세상에서 이렇게 역사와 종교가 일치한 민족은 유태인밖에 없다. 또 유대율법을 풀어 쓴 유태인의 삶의 지침서인『탈무드』는 어느 나라에서 살든 무릇 유태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그래서일까, 하여튼 유태인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약 배달민족이 2천년 동안, 아니 200년 동안이라도 나라를 잃었다면 재생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배달민족은 자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배달민족은 기록에 굉장히 약한 민족이다. 역사서다운 역사서『삼국사기』는 1145년, 야사이긴 하나 해방 후 한국학계의 중시를 받고 있는『삼국유사』는 1280년 출간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서라고 말할 수 있는『춘추』를제쳐놓고『사기』에 비하면 1200년 뒤쳐져 있고 일본의『고사기』와『일본서기』에 비해도 600년이나 떨어져 있다. 늦게나마 출간되었으니 좋은 일이지만 이 두 사서에 대해 갑론을박이 자자하다. 먼저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부터 살펴보자. 김부식이『삼국사기』를 편찬한 목적은 그가 왕에게 올린 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식자층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여러 역사서의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겠다는 것, 셋째 왕·신하·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고 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는 데 거울로 삼으려 한 것이 최종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12세기 당시 상황에서 그때의 지식인이 갖출 수 있는 최상의 민족주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김부식이 취한 철저한 사대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모처럼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필요성을 자각하였지만, 지나친 중국 의존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입방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찌되었든『삼국사기』는 후세 사학자들이 고대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참고서 역할을 하고 있고 그래서 이 책의 역사적 가치는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사를 크게 정사와 야사로 나누는데 이른바 왕조중심의 역사를 기술한 것을 정사라 하고 민간 역사문화를 서술한 것을 야사로 취급한다. 이런 맥락에 따라『삼국사기』를 정사,『삼국유사』는 야사로 취급한다. 왕조중심의 정사도 중요하겠으나 신화를 포함한 민간 역사문화를 서술한 야사가 매우 중요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정사인『삼국사기』에는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대한 언급조차 없는데 비해 야사인『삼국유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지금 우리 겨레가 주장하고 있는 배달민족 조상을 단군으로, 최초 국가를 조선(고조선)이라 하는 것은『삼국유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달민족의 고대 신화, 민속, 경제, 종교, 풍속 등 여러 분야의 역사를 담은 사서는『삼국유사』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사서인『삼국유사』는 오늘날 제대로 된 번역서조차 없는 상황이라 서글프고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삼국유사』는 고려 때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한문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을 시도한 학자는 이병도 선생이며 1943년이 최초였다. 그때는 일제강점기어서 이 책의 번역서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병도 선생은 1956년 재출간했다. 그 후 지금까지 십 수 명에 이르는 학자들이 이 책의 편역, 번역, 역주에 매달려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필자가 보건대 전부 이병도 선생의 번역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절대다수가 베껴내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심지어 이병도 선생의 번역에 비해 어휘사용과 문법을 포함한 문맥이 더 어색한 것도 있다. 번역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그나마 넘어갈 수 있으나 번역이 원문에 비해 엉뚱한 뜻으로 번역되어 있거나 명사와 동사를 구분 못하거나 한문 어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저자가 전하려는 의도가 전혀 전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후 문맥이 뒤죽박죽이 되어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 못할 번역이 수두룩하다. 번역이 이토록 수준이 낮기 때문에『삼국유사』의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혀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폐단이 존재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번역이 이토록 엉망이지만 대한민국교육부 관리들과 사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필자는 우리민족 역사서를 집필한 학자에게『삼국유사』제대로 된 번역본이 한 권도 없다는 말을 했더니 ‘금시초문’이란다. 아마 절대다수 사학자들이 이 분처럼 모두 ‘금시초문’일 것이다. 문제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어느 드라마 대사가 떠오른다. “당신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가? 당신의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학계의 현주소이다. 이병도 선생을 포함해 왜 수많은 사학자들이『삼국유사』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한국 사학자들은 보편적으로 한문에 밝다. 문제는 한문에는 밝으나 한어에는 까막눈이다. 가령 현대한어 즉시의 뜻인 ‘立刻’을 세워서 조각하다, ‘老虎’를 늙은 범, ‘開胃’를 위를 짼다는 등 전부 천자문식으로 번역하다 보니 뜻이 엉망이다. 우리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중국말 속담 ‘車到山前必有路’를 수레가 산에 이르려면 반드시 길이 있어야 한다로 번역하니 한심하다는 말밖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삼국유사』에서 등장하는 한어를 천자문식으로 번역하다 보니 한어 어휘들이 제대로 번역 될 리가 없다. 예를 들어『삼국유사』권3 彌勒仙花 未尸郞 眞玆師 편에 ‘下榻’라는 어휘가 있는데 이병도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들이 이를 ‘말석’이라 번역했다. ‘下榻’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그 뜻은 ‘머물다’이다. 하정룡 선생이 유일하게 ‘머물다’로 번역했다. 원문의 뜻은 ‘절간에서 잠시 머물면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겠습니다.’인데 나머지 분들은 전부 ‘이 절간의 말석에서 기다리겠다.’고 오역하고 말았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에 진열되어 있는『삼국유사』역본 십 수 권 일일이 살펴보았는데 첫머리 번역부터 중구난방이다. 예를 들어『삼국유사』첫머리가 ‘敍曰’로 시작되는데 역자마다 제각각으로 번역했다. 이병도 선생은 ‘敍曰’을 현대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한문 ‘自敍’라고 달았다. 최호 선생은 ‘서(敍)한다’, 하정룡 선생은 ‘차례를 정하여 말하기를’, 이재호 선생은 ‘서술해 말한다’, 최광식 선생은 ‘서문에 이른다’, 최광식 선생과 백대재 선생 공역에서는 ‘서에 이른다’고 옮겼고 신태영 선생과 임명현 선생은 아예 ‘敍曰’을 무시해 버리고 번역하지 않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공동 편역에서는 ‘머리말’로 옮겼다. 이 중에서 ‘머리말’로 옮긴 것이 가장 적합한 번역이고 ‘敍曰’을 무시하고 옮기지 않아도 무방하다. 임명현 선생의『삼국유사』편역에서는 첫 구절에 등장하는 ‘仁義’를 ‘人義’로 잘못 표기하는 오류를 범했다. 물론 뜻을 모르고 한 일이 아니고 실수로 인한 오류라고 하지만 첫 구절부터 오류가 발견되면 이 책을 읽을 맛이 삽시간에 도망가고 만다. 또 첫 머리에 등장하는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이 구절의 번역도 중구난방이다. 고전연구실 옮김 신서원 편집부 꾸밈으로 된『삼국유사』는 “무릇 옛날 성인이 바야흐로 문화(예악)로서 나라를 창건하며 도(인의)로써 교화를 베풂에 있어서 괴변이나 폭력이나 도깨비 이야기는 어디서나 말하지 않았다.”로 옮겼다. 여기서 예악을 문화이고 인의를 도라고 옮긴 것은 오류이다. 괴력난신의 ‘怪’를 괴변이라 옮기는 것 오류이고 ‘力’을 폭력으로 옮기는 것은 더욱 오류이고 ‘神’은 도깨비가 아니다. 이 문장에서의 괴력난신은 초자연적인 힘을 의미한다. 즉 공자 같은 성인은 철저히 현실주의자로서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라는 말씀을 남겼듯이 그 어떤 초자연적인 신을 믿지 않았다. 또 이민수 옮김 을유문화사 출판본인『삼국유사』는 “대체로 옛날 성인은 예절과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과 의를 가지고 백성을 가르쳤다. 때문에 괴상한 일이나 힘이나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로 옮겼고 나머지 편역본, 번역본, 역주본 전부 똑 부러지게 정확하다 싶게 맞게 번역한 것이 없다. 이병도 선생의 지적처럼『삼국유사』는 불교지식을 비롯해 난삽하고 난해한 용어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번역이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병도 선생은 자신의 번역이 많이 미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후대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예를 들어 彌勒仙花 未尸郞 眞玆師 편에 ‘禮儀風敎, 不類於常’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병도 선생은 “예의와 풍교가 보통사람들과 달랐다.”라고 옮겼는데 후학들이 이 구절 번역을 전부 이병도 선생의 이대로 베껴내고 있다. 전체 대한민국 사학자들 중에 혹은 한학자 중에 禮儀風敎가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 참으로 비극이다. 필자는 이병도 선생의 역주본을 처음 접하고 이 번역이 무슨 뜻인지가 이해되지 않아 교보문고에 가서『삼국유사』모든 편역, 번역, 역주본을 샅샅이 훑어보았는데 전부 똑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 역주를 시도한 이병도 선생이 이 어휘의 뜻을 모르고 옮긴 번역을 후학들이 역시 모르고 그대로 베껴낸 결과였다. 대저 禮儀風敎란 무슨 뜻일까? 당시 신라 사람들은 외래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에 비해 달랐다. 즉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가령 불교가 유입되면 중국식 명칭을 따라 불교라고 그대로 따라 불렀다. 유교도 마찬가지였고 기타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신라에서만은 독특한 시각을 갖고 중국식 명칭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즉 당시 신라 사람들은 무릇 세상의 모든 종교는 풍교일 뿐인데 저마다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성격에 따라 풍교 앞에 달리 이름을 달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를 불교라 부르지 않고 석가모니가 창안한 종교(풍교)라는 뜻을 따라 ‘釋氏風敎’라고 불렀던 것이다. 禮儀風敎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답이 아주 간단하다. 즉 유교에 있어서 ‘禮’가 가장 중요한 바이블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유교를 禮敎라고 불렀다. 신라 사람들은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를 중시하는 종교(풍교)라고 인식하고 자기네들의 식에 따라 ‘禮儀風敎’라고 불렀던 것이다.『삼국유사』彌勒仙花 未尸郞 眞玆師 편에 ‘禮儀風敎, 不類於常’이란 구절을 마땅히 “유교지식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뛰어났다”고 번역해야 한다. 자아~, 禮儀風敎가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옮기지 못함으로 하여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어휘 번역의 오류인 것이 아니라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즉 신라 사람들은 외래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당시로서는 가장 문명이 앞서 있는 중국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에 따라 부르므로 하여 주체성과 정체성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서양문물이 동양에 불가항력적으로 밀려드는 근대화 시기 중국의 구호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구호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인데 비해 조선의 구호는 ‘동도서기(東道西器)’였다. 이렇다고 내세울 만한 우리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삼국유사』의 재해석을 통해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밝혀내어 청소년들에게 민족적인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이 해야 할 마땅한 책무이다. 요즘 온 나라가 어수선한 정국에 더욱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343    영화 단평 <죽여주는 여자>를 보고서 댓글:  조회:4397  추천:1  2016-11-07
- 노인의 인생이란? 죽음이란?....   ‘죽여주다’는 우리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이 있다. 남녀 운우지정을 나눌 때 만족해하는 의미로 잘해주다 혹은 한국인들이 흔히 잘 쓰는 끝내주는 것을 우회적으로 죽여준다고 하고, 또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죽여준다는 의미에 쓰인다.   요즘 대한민국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이재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중견여배우 윤여정이 주연한 영화 에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담겨 있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영화 주인공 소영(윤여정 역)은 젊어서 주한미군과 얽혀 ‘양공주’로 살다가 남자한테 버림받아 홀로 아이를 도저히 키울 수 없어 입양 보내고 닥치는 대로 이일저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오다가 나이가 들어 노동력을 상실하게 되자 성매매로 입에 풀칠하며 목숨을 부지한다.   서울에 노인들의 성매매가 잘 이뤄지는 곳으로서 탑골공원이 꼽히고 있다. 배우자가 없는 독거 남자 노인들이 공원을 서성이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50~60대 늙은 여자들이 접근한다. 그녀들의 접근 방식이 박카스를 팔면서 수작을 건다하여 ‘박카스아줌마’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박카스아줌마’ 혹은 ‘박카스할머니’라는 호칭은 탑골공원에서 성매매 하는 늙은 여자들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세상에 모든 일에 영역이라는 것이 있는 법. 한국‘박카스아줌마’들이 ‘독점’하고 있던 탑골공원 성매매 시장에 조선족 아줌마들이 나타나 자기네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싸움이 일어났고 경찰에 신고하는 소동까지 생겨나 방송을 탄 적이 있다. 필자는 에 혹시 조선족아줌마가 등장하지 않나하고 숨죽이고 봤으나 그런 일은 없어 다행이다 싶었다.   주인공 소영의 운명이 기구한데다 그녀 주변에 살고 있는 인물들 팔자도 거기서 그거라는 말이 있듯이 모두 사회 소외계층에서 헤매는 사람들이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성인 피규어작가(캐릭터를 축소한 인형 만드는 사람) 도훈(윤계상 역),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지내는 트렌스젠더인 티나(안아주 역) 셋이서 한 지붕을 이고 사이좋게 살아간다. 거기다 소영이 성매매하다 걸린 임질이란 성병을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가 오고 갈 곳이 없는 코피노 소년(한국남자들이 필리핀에 가서 당지 여성과 불장난하여 낳은 아이) 민호를 데려다 키운다. 속담에 ‘구차할 때 한 입 덜라’는 말이 있지만 소영이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코피노 소년을 데려온 것이 이해되지 않아 한 지붕 식구들이 물으니 장황하고 거창한 인류애적인 치장하고 포장하는 언설이 아니라 아주 소박하게 “나도 몰라, 그냥 그렇게 해야만 될 거 같아 데려왔어.”라고 답한다. 소영의 가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나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 발로의 행위가 아닌가 싶다.   어느 한 번 소영이 성 매수자 남자와 여관에 코피노 소년 민호를 데리고 가서 주인한테 맡긴다. 1~2만원의 화대가 오고가는 성매매도 신고 되면 경찰이 단속한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소영은 살그머니 방을 빠져나와 민호를 데리고 유유히 여관을 떠난다. 경찰의 눈에 띄었으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 여자를 성매매녀로 잡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무사하게 탈출하는 스토리도 유머적이다.   소영은 남자들 꼬시려고 접근할 때면 “잘해 줄 게.”라는 말을 밥 먹든 한다. 실제로 소영은 잘해주는 것으로 즉 ‘죽여주는 여자’로 탑골공원 일대 남자들 세상에 소문이 자자했다. 노인들도 성욕이 있기 마련인데 해소할 방법은 없고 하여 소영과 같은 대상을 찾아 푼다. 인류역사에 먼저 창녀가 있어 성을 매수하려는 남자가 생겨났는지, 아니면 성을 매수하려는 남자가 먼저 있어 창녀가 나타났는지? 닭과 달걀의 선후시비처럼 알 길이 없으나 어찌되었든 노인들 세계에도 수요가 많으니 소영과 같은 몸 팔아 생계유지하는 늙은 여자(65세)들도 있는 법이다. 아무리 수요니 공급이니 하는 언어로 포장해도 몸 파는 여자를 곱게 보는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소영이도 따가운 눈총을 받기 마련이고 다른 여자들한테 놀림을 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소영은 기죽지 않고 당당하고 담담하게 대처한다.   그렇게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듯’이 보이던 소영한테 심경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섹스로 남자들을 죽이던 데로부터 실제로 남자들의 목숨을 ‘죽여주는 여자’로 변신한다.   종수(조상건 역)는 젊어서부터 퇴임까지 사회 직위도 별로였고 경제적으로 가진 게 없이 볼품없는 사나이였다. 가진 게 없다고 해서 성욕까지 없으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그도 소영이와 성적으로 얽혀 있었다. 늙은이의 성적 행위는 잠시적인 기쁨으로 순간적인 고독은 달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삶에 대한 의욕까지 꺼지지 않게 밝히기는 역부족이었다. 종수는 고민 끝에 죽으려고 맘먹었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본 소영은 말리지 않고 죽게 방관한다.   그렇다면 있는 자의 노후는 행복한 것인가? 특히 병들면?   세르비송(박규태 역)이라는 노인은 재직 시 소위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편이었다. 퇴직하자 연금도 두둑하게 받았다. 자식도 미국 유학 보내고 그곳에 남아 자녀 둘 두고 잘 살고 있어 남부럽지 않는 노인 같았다. 그런 여유작작한 노인도 배우자가 없어 가끔 소영을 찾아 성욕을 해소하곤 했다. 금전적으로 여유도 있고 맘 씀씀이도 좋아 매번 소영에게 팁을 푸짐하게 주었다. 그토록 멋쟁이던 송노인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뇌졸중에 걸려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고 만다. 자녀들은 송노인을 집에 모시지 않고 요양시설에 보내 간병인을 붙여놓고는 가끔 들여다본다.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이 두 자녀를 데리고 문안 왔지만 손자손녀들은 할아버지 냄새 난다면서 코를 가리고 상을 찌그리면서 기겁한다. 의식이 남아 있는 송노인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지라 하루빨리 저 세상에 갈 것을 갈망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이런 부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소영이 그토록 잘해주던 송노인이 병환에 계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병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송노인은 소영을 반갑게 대하면서도 무서운 부탁을 한다. “제발 나를 죽게 해 달라.”는 것이다. 소영은 고민 끝에 송노인의 죽음을 돕는다.   마지막으로 소영은 청춘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재우(전무송 역)를 만난다. 재우는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가까울 정도로 여유가 있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자녀를 앞세운 것이 우울증을 불러왔고 수년 전 동반자 아내마저 저 세상에 가는 바람에 너무 고독하고 여생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재우의 걱정은 혼자서 죽는 것이 가장 두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소영한테 어려운 부탁을 한다. 소영이 어렵게 응하자 고급호텔 방에 가서 깨끗하게 샤워하고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수면제 한 줌 복용한다. 소영한테는 수면제 한 알 먹인다. 결과 재우는 그토록 두렵던 죽음을 ‘기쁘게’ 해결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최후의 남은 소원을 풀었다. 재우는 이렇게 영원히 잠들었고 소영은 이튿날 아침 깨어났고 재우를 남겨두고 호텔을 빠져나온다.   호텔을 떠난 소영은 재우가 남간 돈을 절을 찾아 시주하고 얼마만큼 현찰을 남겨 함께 살아온 한집식구 같은 도훈, 티나, 민호를 데리고 고급음식을 먹고 공원놀이터에 가서 신나게 놀고 티나 공연장에서 경찰에 붙잡힌다.   경찰차에 연행되어가는 소영은 “차라리 잘 됐지 뭐.”라고 말한다. 어차피 늙은 여자가 몸 팔아 생겨 유지한다는 자체가 고역이고 사회눈총을 받으며 고달픈 세상살이를 하루하루 중이 종치듯 지내는 것이 지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콩밥 신세를 지는 것이 어쩌면 그녀에게 탈출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차라리 잘 됐지 뭐.”라는 말을 남겼을 것이다.   영화는 생리상 소토리가 완전 픽션일 수도 있고 어느 정도 사실을 근거로 한 뼈대에 예술적인 살을 붙여 만들 수도 있다. 의 경우 우선 주인공 소영과 같은 인물이 현재에도 서울 탑골공원에서 한창 진행 중에 있는 몸 파는 늙은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므로 주연의 스토리는 완전 허구가 아니라 실제 사실에 가깝다. 단지 세 노인의 죽음을 방조한 이야기는 과장된 장면이지만 죽음에 직면한 세 노인의 처지는 현재 이 땅에서 수없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는 사실에 가까운 스토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다음 세 노인의 죽음을 다룬 이야기는 현대사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다. 전통시대 아니 불과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자녀가 부모를 모시는 것은 천륜이었다. 요즘 세태는 부모를 모시지 않는 것이 대세이고 조금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집에서 모시지 않고 노인들을 요양원에 보낸다. 이쯤해도 그나마 잘하는 편이라 말할 수 있다. 서울달동네에 거주하고 있는 독거노인을 비롯해 전국에 독거노인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 중에 자녀가 있으면서도 돌보지 않아 홀로 지내는 노인들이 많다. 이 분들은 국가로부터 생계비복지혜택을 받지도 못한다. 자녀가 있기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박스 줍고 파지 줍고 하는 것으로 겨우 입에 풀 칠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이 분들은 인생 최후 마지막 길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 노인들보다 더욱 비참하다. 쓸쓸하게 언제 어떻게 죽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를 보고 감상을 말하라면 필자는 한 마디로 요약해서 ‘슬프다’이다. 슬퍼도 너무 슬프다. 어쩌다 인간사회가 요지경으로 변해버렸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보다 더욱 삭막한 사회로 변해갈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예측이다. 지금도 슬프지만 앞을 생각하면 더욱 슬퍼진다. 노인의 인생이란 무엇이며 노인의 죽음이란 무엇인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 중에 가장 심각한 병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졌으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사회, 과연 발전인가? 변화인가? 필자는 항상 ‘인류사회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해왔다. 영화 가 나의 이 명제를 증명하고 있다.  동북아신문 10월 23일자  
342    재산이 얼마만큼 있으면 행복할까? 댓글:  조회:4644  추천:1  2016-08-17
재산이 얼마만큼 있으면 행복할까?   재산이 얼마만큼 있으면 행복할까? 얼핏 보면 바보 같은 질문이다. 질문 자체가 유치하다고 비난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재산이란 당연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냐고 순간적인 머리회전도 거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이럴 경우 재산과 행복을 비례등식화, 즉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지수가 플러스 되고 재산이 적으면 적을수록 행복지수가 마이너스 된다는 관념에서 비롯된 결론이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재산과 행복이 비례등식화 되지 못하고 반비례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예를 들어 세계적으로 로또 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 중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필자가 아는 사례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의 일이다. 연변 시골에 있는 한 농부는 째지게 가난했다. 너무 가난해 아내도 떠나가고 자식한테도 버림 받았다. 죽지 못해 하루하루 중이 종치듯 허송세월을 보내며 힘겹게 살아가던 와중에 어릴 적 헤어졌던 한국에 있는 부자형님과 연락이 닿았다(형이 연길에서 잘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동생을 어렵게 찾았음). 형은 얼굴이 부티 나고 빤질빤질한데 동생은 나이와 걸맞지 않게 주름이 밭고랑이 되고 얼굴엔 기름기가 사라져 사막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은 형을 동생으로 동생을 형으로 착각할 만큼 상반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너무 가련하고 너무 불쌍해보였다. 그래서 형님이 그때 돈으로 인민폐 30만 위안을 주었다. 총명한 사람은 돌을 금으로 만들지만 바보는 금을 돌로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당시 30만 위안이면 의식주 때뻣이를 하고도 충분히 여유가 있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이 거금이 그의 손에 들어가서 돈질 못하고 불과 4개월 지나 또 거지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로또 당첨자들의 비운의 삶, 위의 농부 사례와 비슷한 사건들 등등 재산이 갑자기 생긴 사람 치고 후과가 깨끗한 자가 별로 존재하지 못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까? 필자는 요즘 이에 대한 확실한 해석의 답을 찾았다. 나는 서점에 가면 한 가지 습관이 있다. 내가 미리 구매하려는 책을 골라놓고는 종업원한테 “요즘 어떤 책이 잘 나가는가?” 묻는다. 사실상 종업원에게 나한테 추천하라는 부탁의 뜻이다. 그렇게 해서 구매한 책 한 권이 있다. 김형석 지은 이다. 김형석 선생은 70년 전에 남하하신 실향민이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32세에 연세대 교수로 취직하여 퇴직할 때까지 줄곧 한 대학에 머물렀다. 서울대 김태길 교수와 숭실대 안병욱 교수, 세 분은 재직 시 한국 철학계에서 서로 라이벌 관계였으나 우정이 두터운 친구로 지내 사회적으로 존경 받았다. 선생은 수필에 일가견이 있어 한국사회에서 철학자보다 수필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선생은 대중 강연을 많이 진행해왔는데 97세인 고령인 현재도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참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선생은 올해 97세인데 는 금년 봄에 쓴 책이다. 책의 내용은 선생의 인생담인데, 세상을 보는 가치관과 그의 삶의 궤적을 구수하게 그려낸 한 편의 묵직하고 깊이 있는 드라마이다. 참으로 배울 것이 많다. 여기서 선생의 가치관 하나만을 소개하려 한다. 선생은 ‘재산이 얼마만큼 있으면 행복할까?’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개개인이 자신이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있으면 행복하다.” 아주 간단해 보이는 말씀 같지만 참으로 명언이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로또 당첨자들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갑자기 생긴 거금을 정신적으로 감당하지 못해 모두 비운의 삶을 보내게 된 것이다. 위 연변 한 농부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갑자기 평생 손에 쥐어보지 못한 거금이 갑자기 생겨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의미 있게 유용하게 사용할 줄 몰라 돈을 돈 같이 쓰지 않고 온 동네 사람 다 불러 술 놀이하고 젊은이들한테 휘둘려 매일 나이트 다니고 술집 다니고 계집질까지 하다 보니 형이 준 돈을 유흥에 탕진해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회적으로 갑자기 쉽게 번 돈을 쉽게 쓰는 현상들을 많이 목격한다. 왜 그럴까? 너무 쉽게 번 돈은 정신적으로 감당이 잘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깡패나 양아치들이 협박의 수단에 의해 벌어들이거나 사기 쳐 벌어들이는 돈은 정신적으로 감당이 잘 안 돼 쉽게 써버린다. 특히 마약과 같은 모험이 큰 장사로 벌어들이는 돈은 씀씀이가 무척 헤퍼지기 마련이다. 이는 정신적으로 감당의 문제이다.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아가씨들, 특히 몸을 파는 창녀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버는 돈의 다수를 고급 옷과 핸드백, 성형수술, 몸치장에 필요한 고급 악세사리를 구매하는데 써버림으로써 보통여자들이 소유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자기들이 소유한다는 정신적인 위안으로 삼고 있다. 돈은 많이 버는데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이것이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아가씨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한국 대기업들이 창업주가 어렵고 힘들게 이뤄놓은 재산을 2세에 와서 후계자 승계문제로 흔히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현상도 역시 정신적으로 감당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민족의 유교문화는 아버지 것이면 나의 것이란 인식이 뿌리 깊고 장남이 무조건 1번이고 나머지 순차적으로 재산 분배받는 식이다. 만약 후계자로 된 장남이 능력이 된다면 모를까 능력이 부족할 경우에 형제간의 난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경우 장남이 무조건 1번 후계자란 문화가 없다. 따라서 아들이 무조건 우선이란 문화도 없다. 아들 셋이면 똑 같이 쌈짓돈을 주어 시험 운영을 해보게 하고 그 중에 가장 능력 있는 아들한테 기업을 물려준다. 아들 여럿이지만 모두 능력이 안 된다고 판단되면 사위가 후계자로 이어받는다. 한국의 경우 아들들의 능력이 안 되는 상황일지라도 만약 아들들을 제쳐놓고 사위가 승계 받는다면 하늘땅이 뒤번져질 만큼 큰 난이 일어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신적으로 감당이 될 능력 있는 후계자가 이어받아야 말썽이 적을 것인데 유교문화는 무조건 장남 그 다음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서열문화가 가문의 불화를 일으켜 형제 간 친척 간 관계가 파탄의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요즘 한국 종편 방송들에서 진행하고 있는 , , 등 프로그램들을 보면 보험금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 현제자매 간, 친척 간, 친구 간 사람을 죽음에로 몰아가는 사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얻어낸 거액의 보험금을 손에 넣었으나 그 후과는 모두 행복이 아니라 비극이다. 왜 그럴까? 모두 정신적으로 강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금중외(한국에서는 동서고금으로 표현함)로 본래 나의 것이 아닌데 갑자기 생긴 큰 재산이 말썽이 없는 사례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독일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 하나 해보자. 세 사람의 강도가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느껴지는 무엇이 있어 찾아가 보았더니 숲속에 황금 덩어리가 있었다. 세 강도 모두가 놀랐다. 이 금덩어리를 팔면 우리 셋이 부자는 못 되지만 한평생 먹고사는 데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발걸음을 고향으로 돌렸다. 산 밑에는 넓은 강물이 흐르고 강가에는 작은 나룻배 하나가 있었다. 금을 보자기에 숨겨 싸가지고 세 사람은 배를 저어 강을 건너고 있었다. 그때 앉아 있던 한 강도가 옆에 있는 강도에게 눈짓을 했다. 그 뜻은 노를 젓고 있는 저놈을 죽이면 금이 우리 두 사람 몫이 되고 우리는 부자 행세를 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암시였다. 한 강도가 슬그머니 일어나 노를 젓고 있는 강도를 강물로 밀어 넣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두 강도는 껄껄 웃으면서 이제는 팔자를 고쳤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가는 길가에서 서로 협의했다. 금괴를 갖고 거리로 들어갔다가는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르니까 한 강도는 나무 그늘 으슥한 곳에서 금괴를 지키기로 하고 다른 한 강도는 거리로 들어가 점심 도시락을 사오기로 했다. 도시락을 준비하던 강도가 생각했다. “내가 저놈을 마저 죽이고 금괴를 가지면 큰 부자가 될 텐데 어떻게 죽일까?” 술병에 독약을 넣어 갖고 왔다. 금괴를 지키고 있던 강도도 같은 생각을 했다. 거리로 간 강도가 칼을 놓고 갔는데 그 칼을 갑자기 휘둘러 목을 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거리에 갔던 강도가 도시락을 꺼내놓고 술병까지 준비해 꺼내는 것을 본 강도가 칼을 들고 대들었다. 둘은 강도답게 싸움을 벌였으나 무기가 없는 강도가 크게 부상을 입고 쓰려졌다. 금괴를 다 줄 테니 내 목숨은 해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금괴를 본 강도는 그를 죽여 버렸다. 칼을 숲속에 내던지고 숨이 가쁘게 제자리로 돌아온 강도는 다른 강도가 준비해놓은 술병을 기울여 여러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신음하다가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세 강도의 욕심스러운 꿈은 사라지고 금괴는 또 어떤 사람에게로 갈지 모르게 그 자리에 남겨지고 말았다. 재산문제 뿐만 아니라 명예문제도 마찬가지이고 관직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명예욕에 눈이 어두워 지나치게 욕심 부려 자신이 감당 못할 명예를 얻게 된다면 그 사람이 몰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떤 라인을 잘 타 본인의 능력으로 감당 못할 감투를 얻게 되면 그 사람의 몰락은 역시 시간문제일 뿐이다. 여자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애인을 사귀도 가정도 화목하고 사업에 지장이 없는데 비해 어떤 사람은 애인을 두면 가정이 파탄 나고 사업도 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중국부패관료들이 애인 수십 명에서 100여 명을 둔 사건을 보면 결국 자신의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벌여놓았던 탓에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자를 사귀어도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사귀어야 할 것이다. 여자문제는 숫자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로서 감당이 되는 상황에서 사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문의 궁극적인 질문, 재산이 얼마 있으면 행복할까? 이에 대해 김형석 선생은 “개개인이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필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재산이 많지도 적지도 않는 의식주가 해결되고 가정여행이나 다닐 수 있는 조금 여유가 있는 만큼의 재산이 가장 큰 행복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하나의 전제가 있다. 반드시 부정행위가 없이 자신의 신근한 노력에 의해 벌어들이는 재산이어야 한다.”      
341    불법체류딱지는 뗐으나 합법장기체류, 합법취업 안 돼 댓글:  조회:4414  추천:1  2016-08-06
불법체류딱지는 뗐으나 합법장기체류, 합법취업 안 돼 55~59세 사이 구제 받은 조선족 여성들 고충   불법체류 신분은 언제 어디서 단속에 걸릴지 몰라 다수 조선족여성은 양지에서 활동하기엔 손발이 묶여 인적이 드문 ‘폐쇄된 곳’ 즉 가정집 가사도우미,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 절간의 식모 등 직종에 종사해왔다. 용정출신 김모 여인(57세)은 10년 전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상무고찰이란 단기비자로 입국하여 한국에서 10년 동안 불법체류로 살아왔다. 음식점 같은 인적이 붐비는 곳에 근무하면 단속에 걸릴 위험이 커 서울근교 00절간에서 밥 짓는 일을 8년 동안 해왔다. 부지런한데다 음식솜씨가 좋고 인격도 괜찮아 절간에서 “다시 오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녀도 절간에 8년 동안 머물면서 정이 들어 돌아가고 싶지만 걸림돌이 있다. 오상에서 온 박모 여인(58세)은 14년 전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친구의 소개로 한 부잣집인 가정집 가사도우미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지난 5월말까지 쭉 일 해왔다. 박모 여인이 14년 전 그 집에 들어갔을 때 태어난 지 3개월 되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 아빠와 엄마가 정상적인 혼인이 아니고 불장난으로 임신하고 출산을 고집하여 난 아이인데 엄마가 신분이 명확하지 못한 여인이라 그 집에서 쫓겨났고 아이는 남자집에서 키우게 되었다. 3개월 되는 핏덩이가 박모 여인의 손에서 14살 먹은 중학생이 되었고 키는 박모 여인이 올려 볼 정도로 훌쩍 자라버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이 진리라면 키운 정이 낳은 정보다 더 크다는 것도 또 하나의 진리이다. 이모는 내 자식처럼 끔찍하게 키웠고 아이는 이모를 엄마처럼 따르고 있다. 박모 여인이 자진출국 하니 마치 모자의 생이별처럼 심각해진 아이는 불과 1개월 사이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어서 지난 6월 말 아이가 박모 여인이 있는 중국에 따라 갔다가 함께 한국에 돌아왔다. 하지만 박모 여인은 현재 장기합법체류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 한숨짓고 있다. 심양에서 온 강모 여인(57세)은 대한민국 부자들이 모여 사는 서울 성북동 00대기업 회장님 댁에서 16년 동안 가사도우미로 일 해왔다. 불법체류 신분이라 맘대로 오갈 데가 없어 처음엔 엄청 힘들었으나 참고 견뎌 3년이 지난 시점부터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내왔다. 강모 여인은 내집이라 생각하고 맡은 바 일만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 누가 시키지도 않은 울안 공터를 밭으로 가꿔 야채농사를 지어 해마다 풍성하게 수확하고 있다. 회장님 댁은 일가족이 어찌나 박모 여인을 아끼는지 자진출국 할 때 임시지만 마치 다시 못 보는 이산가족처럼 눈물로 이별했다. 상기 세 명의 조선족아줌마들은 모두 다음과 공통점이 있다. 일단 한곳에서 오랫동안 일 해온 것이고, 자기 가족처럼, 내집처럼 진심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주인들은 모두 조선족아줌마들이 다시 한국에 오면 꼭 자기네 집에 올 것을 열 당부도 더 했던 것이다. 어떤 주인들은 월급 인상 조건을 걸면서까지 기어코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가정부나 식모는 회사 직원처럼 수시로 바꾸거나 아무나 대체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오래면 오래 될수록 서로 정이 들고 헤어지기 싫어한다. 어찌 보면 요즘 세월엔 부부가 이혼하는 것보다 가사도우미가 바뀌는 것을 더 힘들어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인들은 간절히 그녀들을 바라는 것인데 법무부 출입국정책이 그들의 바람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 4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을 한시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첫 3개월 간 1만7천 명 불법체류자가 자진출국 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중 다수가 조선족이다. 조선족불법체류자가 자진출국 했다가 재입국하게 되면 55세 이하는 C-3-8 비자로 입국하고 6주 기술교육 이수하면 방문취업비자(H-2)로 변경되고 단순노무 직종에 취업이 가능하다. 60세 이상 조선족은 재입국하게 되면 재외동포비자(F-4)를 발급받는다. 문제는 55세~59세 사이 분들이다. 이 연령대 구제받은 조선족은 불법체류 딱지는 뗐으나 장기합법체류신분을 얻으려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면 조금 지나친 표현이 되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현행 정책에 따르면 이 연령대 구제받아 재입국한 조선족은 한국생활이 불안하여 취업도 문제가 되고 있다. 즉 구제받은 55세~59세 사이 조선족은 일단 C-3-8 비자로 한국에 입국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자는 90체류 복수비자이지 장기체류 할 수 없다. 장기체류를 바라려면 반드시 국가인정 기술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여야 F-4로 변경하고 장기체류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석 달 머물고 다시 출국했다가 재입국을 반복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게 된다. 문제는 이 연령대 조선족들이 한국인들도 엄청 힘든 기능사자격증 취득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정말 죽을 맛이다. 한국주인들은 간절히 바라지만 이 연령대 조선족아줌마들은 장기체류 비자를 해결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석 달 한번 씩 재입국을 반복하다가 만 60세를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왕에 구제했으면 이와 같은 구체적인 형편과 실제적인 사정들을 감안하여 이들에게 장기체류비자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조선족사회에만 유리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도 간절히 바라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더 신경을 써 주기를 바란다.  
340    ‘정통편’ 중국은 일반약품, 한국은 반입금지 대상 댓글:  조회:4523  추천:1  2016-06-21
정통편 휴대하고 입국하다가 큰 문제 될 수도 있어 중국 사람이라면 정통편을 복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감기에 걸려도 복용하고 이빨이 아파도 복용하고 관절이 아파도 복용하고 두통을 비롯해 몸 어느 부위를 막론하고 통증이 있으면 절대다수 사람들이 정통편을 복용한다. 무릇 통증이 있으면 복용하여 즉시 효과 있다고 하여 정통편을 중국에서 만병통치약으로 부른다. 장기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하루에 3~4알(정), 심하면 7~8알씩 복용하는 사례가 흔하다. 중국에서 정통편에 대한 수요량이 너무 많아 개혁개방 전 인민공사 합작의료 시절 시골 위생소(한국 보건소에 해당함)들에서 정통편만은 한 알 1전씩 현금 받고 판매하였다. 중국 조선족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정통편 복용이 일상화 될 정도로 보편화 되었고 소비량도 엄청 많다. 중국에서 이렇듯 가장 보편화된 일반약품으로 취급되고 있는 정통편이 한국에서는 금지약품으로 조치하고 있다. 이유는 정통편이 마약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마약 성분을 포함한 향정신성의약품은 사람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기 때문에 잘못 섭취하거나 습관적으로 복용할 경우 인체에 큰 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며 정통편이 이에 속하기에 금지약품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마약에 굉장히 민감한 국가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가 잘 되어 불과 20년 전까지 마약안전지대였다. 하지만 구미(歐美)에 유학 갔던 한국인과 한국에 입국하는 서양인들이 대마초를 갖고 오기 시작하여 요 몇 년래 북한 마약이 조선족과 탈북자를 통해 한국에 반입됨에 따라 한국은 우려스런 지대로 변화되어가고 있다. 한국정부는 마약퇴치 의지가 굉장히 강하다. 이런 맥락에서 구미에서 문제가 되지 않아 습관적으로 피우는 대마초를 한국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마약사범으로 취급하고 법적 조치를 취한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는 아주 정상적이고 가장 보편화된 일반약품인 정통편을 한국에서는 마약으로 분류하고 반입을 금지한다. 정통편 반입이 금지됨에 따라 70만에 이르는 재한조선족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 중국에서 정통편 복용이 습관화 된 조선족은 한국생활에서도 역시 정통편을 자연스레 찾게 된다. 조선족 다수가 중국에서 해 보지도 못했던 건설현장, 제조업, 음식점, 가정부, 간병인 등 고된 중노동에 종사하여 몸 여기저기 탈이 생겨 통증이 많이 발생한다. 조선족은 한국에서도 치통, 두통, 관절통은 물론이고 무릇 몸에 탈이 생기고 통증이 오면 정통편을 복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습관적으로 복용해온 이유도 있고 한국진통제가 조선족 체질에 맞지 않아 효과가 덜 한 원인도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조선족은 한국에 처음 입국하든 자주 드나들든 올 때면 보편적으로 신주단지 모시듯 정통편을 갖고 오게 된다. 자신이 복용 목적도 있고 가족 및 주변 친척과 친구들의 부탁에 의해 적으면 수백 알 많으면 수천 알씩 갖고 온다. 한국에 와서 판매 목적으로 정통편을 갖고 오는 조선족은 매우 드물 것이다. 문제는 정통편을 휴대하고 한국에 입국할 때 세관에서 적발되면 마약류의 약품이라고 몰수당한다. 몰수당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양이 많을 경우 판매목적으로 휴대하여 입국하는 것 아니냐는 혐의를 받으면 곤란해진다. 판매를 통해 이득을 챙기는 금전은 얼마 되지 않지만 마약류의 약품을 시중에 유통시킨 범죄 혐의를 받으면 더욱 곤란해진다. 이쯤이면 그나마 또 괜찮은 편이다. 개별적으로 매우 드문 사례이긴 하지만 정통편을 많이 휴대하고 입국하다 입국거부당하고 강제퇴거조치를 받을 수도 있다. 정통편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여러모로 드러나고 있다. 한국에 처음 입국하거나 비자만료로 출국하였다가 재입국하는 조선족은 한국에 와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으려면 신체검사해야 하는데 만약 정통편을 복용하고 검사에 임하면 마약성분이 검출되어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신체검사를 앞둔 조선족은 적어도 1주 전부터 정통편 복용을 금지해야 한다. 중국에서 지극히 정상인데 한국에서 마약류약품으로 취급되는 정통편, 조선족은 한국생활에서도 복용해야 하는데 한국세관에서 반입금지 되는 정통편, 서로 모순되는 이 정통편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 즉 한국정부가 조선족사회 실제 상황을 감안하여 정통편 반입금지를 해제하고 휴대를 허락하든지, 아니면 조선족들이 한국정부의 요구에 부응하여 모두 정통편 휴대를 스스로 자발적으로 반입을 금하든지 하야 한다. 이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계속 속출 할 것이다.
339    진달래꽃 필 때까지(3) 댓글:  조회:4309  추천:0  2016-06-09
  진달래꽃 필 때까지(3)   3. 발가벗기는 면접 후보자 면접심사를 두고 나의 맘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듣는 말에 의하면 정치인이 되려면, 특히 국회의원이 되려면 비밀스런 개인사까지 발가벗겨야 한다. 학력, 가족상황, 사업상황, 재산, 전과경력까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왠지 나체로 대중 앞에 서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조선족출신이 한국과 같은 ‘나체’가 되는 정치풍토에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를 부르고 강가에 가면 강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는 속담이 있듯이 대한민국에서 정치하려면 홀딱 벗기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싫든 좋든 말이다. 사실 홀딱 벗기여 봤댔자 별로 맘에 꺼리 끼거나 사회가 알아도 얼굴을 쳐들고 다니지 못할 수치스런 일은 없지만 한국정치풍토에 적응되지 못한 것이 은근히 걱정이 되었고 명색이 국회의원 면접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면접을 앞두고 이 걱정 저 근심에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 엄마는 “너는 20대 초반부터 이미 ‘정치’ 했었다.”고 뜬금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그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의아해 물었다. “그때 그 사건 말이다.” 엄마는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온가족이 사회적으로 온역 취급당하는 왕따였고, 그야말로 풍비박산을 맞아 솔직히 말하자면 죽지 못해 살던 추억을 떠올리기 싫었지만 한편 이 딸이 철없이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 정의를 외치며 올곧은 가치관을 갖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습만은 지금까지도 아주 대견하게 간직해 오셨던 것이다. “그 당시 너 뿐만 아니라 온가족이 홀딱 발가벗은 것 마냥 창피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돌이켜보면 네가 실화를 토대로 정의를 구현하여 사회를 바꾸려고 했던 것이 옳았고 대가 바른 가치관이 그 험악하고 살벌하고 삭막한 사회를 헤쳐 나오는 동력이 되어 지금 한국정치에 뛰어드는 자격을 갖게 된 것이지.” 평소 말씀이 적던 엄마, 특히 이 딸이 20대 초반 꽃 같은 나이에 ‘사고’를 친 이후 정치와 멀리하려고 애쓰셨던 엄마께서 고무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다니!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엄마는 계속해서 편달한다. “나도 요 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난 엄마가 20여 년 전에 너무 큰 상처를 입어 속으로 은근히 반대할 줄 알았는데요.” “뭐 나쁜 일도 아닌데 왜 반대하겠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을 원 없이 해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 아니겠니. 그리고 추천받은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단 입증인데 반대할 이유가 없지.” 비록 별로 사회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는 연로한 조선족할머니의 말씀이지만 가족이고, 특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모성애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씀이라 나에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힘이 솓구치는 느낌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하늘을 날듯 몸이 가벼워졌다. 엄마께서 기분 좋게 이 딸을 바라보더니 “다만 그때 그 심정으로, 그때 그 맘가짐으로, 그때 그 가치관으로 오늘 대한민국정치에 임한다면 될 것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어제와 그제께처럼 또 한강을 건너 여의도로 향했다. 요즘 연 며칠 여의도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매일 간다. 구로구에서 여의도에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한다. 나는 한국생활 20여 년 동안 수없이 한강을 건너보았다. 그때마다 별다른 느낌이 없이 그냥 차바퀴가 굴러가는데 몸을 맡기고 아무 감각이 없이 건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매번 한강을 건널 때면 번마다 강물을 주시해보곤 한다. 차창을 열어 강바람을 들이마신다. 요즘 저도 모르게 강바람이 나에겐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의 꽉 막힌 답답한 생활에서 특히 잡생각에 빠져 있는 나의 가슴을 후련하게 열어주는 것은 강바람이 유일한 것 같다. 면접시간이 드디어 다가왔다. 난 간이 큰 편에 속하지만 대한민국정치 중심인 국회의사당에서 면접을 보게 되니 조금 긴장해났다. 오전 9시가 넘자 한 두 사람 모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4년 전 면접 본 경력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다지 긴장해난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매사가 경험이 중요하고 체험이 소중한 것 같다. 다수는 나처럼 긴장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 초보자들이 틀림없었다. 서로 묻지 않고 알려주지 않아도 얼굴에, 이마에 ‘난 초보요.’라는 문구가 그려져 있었다.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다. 습관적으로 얼굴에 뭐가 불미스런 이물질이 묻지를 않았나,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지 않았나 하고 거울에 비춰보고 옷매무시를 다듬고 문을 떼고 면접관 앞에 나타났다. 이력서에 자세히 밝혔는데 학력을 묻는다. 면접관 분께서 나의 학력을 사전에 알고 계시지만 아마 나의 표현력을 테스트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했다. 20여 년 전의 그때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석·박사 공부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그런 큰 꿈은 그 사건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는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와서 회사에 근무하다가 자영업을 하여 돈을 좀 만져보았지만 공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나는 어릴 적 꿈이 선생이었고 대학교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인생에는 예고 없이 불행이 닥쳐온다더니 진짜 인생을 망칠 사건 때문에 그 꿈을 포기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과거 품었던 꿈이 현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는 무척 괴로웠다. 그 괴로움을 달래보려고 돈을 버는데 매진하였다. 나는 무엇이든 맘만 먹으면 해낸다는 자신감이 강했다. 물론 자신감으로만은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남보다 노력을 더 경주해야 성공의 여신이 나를 맞아준다. 한국에서 여행사도 운영하고, 학원도 꾸리고, 음식점도 개업해보고, 중국식품도매도 해보았다. 때로는 투잡이 아니라 쓰리잡, 포잡까지 하면서 죽기내기로 돈을 버는데 정력을 집중하고 살았다. 신은 노력하는 자에게 보상을 베푸는 것 같다. 나는 밤잠을 덜 자면서 동분서주하여 한 때 기껏 소비하고도 일 년 남는 돈이 남들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하는 돈을 벌었다. 사회관계도 굉장히 발이 넓었다. 그러나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젊어서 이루지 못한 공부에 대한 꿈을 달랠 수가 없었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하자면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정신의 공허함을 메우지 못하는 법이다.” 중국 최고 성인인 공자는 당시 사회인간을 ‘소인’과 ‘군자’ 두 계층으로 나누고 “소인은 이해(利害)에 밝고 군자는 의리를 중히 여긴다.”고 말했다. 이해란 사소한 이해득실을 말하는데 소인은 이해득실에 연연하여 대범하지 못해 소위 소인배라 불린다. 조선조 518년 동안 유교일변도 사회로 됨에 따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분화가 심했다. 여기서 사는 선비이고 농은 농경에 종사하는 농부이고 공은 장인(匠人)을 뜻하며 상은 장사꾼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농부보다 더 천대 받은 가장 천한 계층이었다. 왜냐? 장사꾼은 이해득실을 따지고 쫓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유식한, 특히 유교사상의 지배하에 있는 집안은 장사를 천하게 여기는 경향이 심각하다. 아울러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도 사소한 상업에 종사하는 인간을 ‘소인’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내가 장사를 해보니 자연스레 이해득실을 따지고 쫓게 된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공자가 말한 ‘소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인’도 나름대로 삶의 보람이 있으나 나는 젊어서의 꿈을 잊지 않고 또 천성이 대범하여 그냥 ‘소인’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소인’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공자께서는 “소인이 군자가 되려면 배우라”고 했다. 첫 편은 ‘학이편(學而篇)’이며 첫머리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라는 말로 시작된다. 나는 위대한 군자가 되려는 이상적인 포부는 아니더라도 이해득실을 쫓는 ‘소인’에서 벗어나려고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2011년 서남대학교 외국어학부에 이름을 올렸다. 돈을 벌면서 공부하려니 정말 힘들었다. 한편으로 단체도 이끌고 열심히 봉사활동도 진행하면서 공부하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개발을 위해 공부는 필수라고 다짐하고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2015년 2월 졸업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2015년 8월 CEO리더스교육, 2015년 9월 인생지도자1급, 2015년 10월 명강사 최고위 과정 등 수료하였다. 확실히 배우니 사람이 달리지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우선 세상을 보는 눈이 확실하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눈앞의 이익에 많이 연연하였는데 지금은 멀리 보는 안목이 크게 자랐다. 과거 간혹 남들과 사소한 일에 따지고 지지고 볶고 했으나 지금은 웬만한 일은 그냥 넘어가곤 한다. 과거에는 상업에 대한 정보나 생활에 필요한 정보에 연연했다면 지금은 정치, 문화 등 다 방면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과거엔 대한민국 상류계층 분들과 만나면 대화가 딸릴 때가 많아 창피했었는데 지금은 대화가 자연스러워 스스로도 자부심이 생긴다. 이것이 자신의 가치상승이 아니겠는가! 배움의 효과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다음호에 계속  박옥선 중국동포타운신문 320호  
338    진달래꽃 필 때까지(2) 댓글:  조회:4923  추천:1  2016-05-18
진달래꽃 필 때까지(2)   2. 후보자등록과정 번갯불에 콩 볶듯 얼마 전에 5월 5일 어린이날 목요일이어서 이튿날인 5월 6일 금요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는 과정에 논란이 있었다. 임시공휴일을 끼워 넣어 4일 연휴 같은 국가적인 사항을 적어도 미리 수개월 전에 결정해야 국민들이 해외여행을 잡든지,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의미 있는 관광이나 뜻 깊은 이벤트를 마련할 것인데 불과 며칠 앞두고 부랴부랴 결정하니 국민들이 몹시 당황해 하였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공휴일은 미리 적어도 연초에 몽땅 정해놓고 움직인다. 한국처럼 며칠 앞두고 공휴일 정하는 사례는 기본상 없다. 일본사람들은 뭐나 자세하고 세밀하게 움직이는데 비해 한국은 뭐나 대충대충, 빨리빨리 하는 관습이 심각하다. 중국인의 성격은 대체적으로 느긋한 편이어서 ‘만만디’라는 별명이 있다. 한국인은 무슨 일을 착수하는데 있어서 준비시간이 충분하지 않고 다그치는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무슨 일이나 빨리빨리 결과를 보기를 원한다. 한국지하철역에서 오르내리는 손님들을 보면 저마다 마치 집구석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뛰어다니듯 빨리빨리 움직인다. 국회의원 후보자 등록과정도 번갯불에 콩 볶듯 불과 며칠 사이에 머리가 쥐나고 다리가 마비될 지경으로 빨리빨리 다그친다. 3월 16일 나는 비례대표 추천전화를 받고 그날 오후 이력서를 휴대폰으로 먼저 전송하고 나서 비례대표 후보 관련 서류를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튿날인 3월 17일 여러 관공서를 돌면서 후보자등록 관련 서류를 발급받았다. 관련 서류로서 기본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주민등록등본, 범죄경력증명서, 납세증명서, 재산증명서(가족 전체 포함)들이 있었다. 그래서 동사무소, 세무서, 경찰서를 찾아다니면서 서류준비를 하여 여의도 정당사무실로 달려갔다. 아무리 대한민국 관공서들이 민원처리가 잘 되어 있어도 이곳저곳, 이 서류 저 서류 발급 받으려면 하루 종일 걸린다. 잔등을 땀에 흥건히 적시며 이리저리 뛰어다녀 겨우 완성된 서류를 갖춰 갖고 여의도 정당사무실에 달려갔다. 내가 조금 약빠른 성격이니 망정이지 느릿느릿한 성격이면 하루 내내 뛰어다녀도 다 발급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고생고생 준비한 서류를 사무국직원에게 보였더니 전부 퇴자를 맞았다. 이유는 공직자 후보등록 관련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데 일반 서류를 갖췄기 때문이란다. 헐~, 나미아비타불! 다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새롭게 여러 서류를 발급받아야 할 생각을 하니 앞이 새카매 났다. 그러나 아무래도 해야 하는 일이라면 즐겁게 하는 것이 나의 생활철학이다.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동사무소, 경찰서, 세무서 등 여러 관공서를 쳇바퀴 돌듯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각지 못한 일이 나를 괴롭혔다. 공직자후보등록 관련 서류는 신청하여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나절 기다려야 한다. 세무서에서는 가족 전체 서류를 신청했는데 이튿날 찾을 수 있다고 한다. 18일까지 모든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 시간은 촉박하고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아 속이 타기 시작하였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이 중대한 일을 사전에 여유를 두고 미리 한두 달 시간차, 적어도 2주쯤의 여유를 갖고 준비하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리 빨리빨리 하는 대한민국이라지만 여느 마을 동네 통장을 선출하는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반장 선출도 아니고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선출하는 아주 중대한 일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듯 지지고 볶아대니 머리가 휑해 나기 시작하였다. 어찌되었든 모든 요구서류를 들고 여의도 정당사무실로 달려갔다. 나절로 차를 운전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마무리시간을 맞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엔 서류들이 문제없겠지. 이렇게 혼자 스스로 자아위안하면서 사무국 직원에게 서류뭉치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문제가 생겼다. 사무국 직원이 서류를 검토하더니 ‘재산신청서류가 불합격이니 다시 작성하라’고 한다. 즉 자세하게 재산이 10원이라도 모두 기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배기량 1600CC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단다. 자동차등록증에 보면 나의 차 쏘울 1590CC로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가족들 한 명 한 명 보험부터 통장까지, 그리고 합산 계산~ 그리고 법인회사, 투자회사, 타인명재산 등등은 포함하지 않는다. 다시 참빗질해도 또 빠진 것이 있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그날 정당사무실에 오후 3시 도착하여 준비해간 서류를 바쳤다. 아침부터 그 때까지 나는 곡기 구경 못해 위를 굶겼다. 굶주린 위는 강력한 항의를 제기한다. “빈곳에 빨리 ‘내용물’을 채워 포만감을 달라고.” 나의 몸에 달린 위이지만 제때 채우지 못하고 굶겨서 미안한 감이 들었다. 그래서 서류접수 완료되면 금세 여의도 근사한 음식점에 달려가 폭식할 계획이었다. 하나님, 맙소사! 내 딴에는 빈틈없이 준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잘못된 것을 수정하고 또 새로 보충하고 하느라 서류 두께는 마치 중·장편소설 분량이었다. 머리는 속여도 배는 속이지 못한다. 배가 고프다 못해 현기증이 났다. 벽시계를 쳐다보니 저녁밥 먹을 시간이 되었다. 굶주림에 시달린 위는 쉼 없이 항의해온다. 빨리 밥 달라고. 그렇지 않고 계속 몰라라 방치해두면 심한 위경련을 일으키겠다고. 하루 종일 곡기를 끊은 이유도 있고 또 처음해보는 일이고 게다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서류를 손보느라 긴장감에 휩싸여 머리가 어지러워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있다. 국회의원도 먹고 살자고 하는 노릇이 아닌가? 이렇게 배를 굶겨가면서까지 하필! “아무리 바빠도 저는 밖에 나가 식사하고 돌아와 계속 서류를 완성하겠습니다.” 정당사무국 담당 직원에게 말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빵과 샌드위치를 주문했으니 그냥 여기서 드시면서 서류를 마무리 하세요.” 나는 구세대도 아니고 신세대도 아닌 40대 여자다. 빵과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운다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빵과 샌드위치는 서양음식으로서 나에겐 배가 그토록 고프지 않을 때 간혹 간식으로 맛보는 식으로 먹는 것은 괜찮겠지만 당금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내가 서양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남들이 모두 불만의 소리 없이 동의하는데 나만 티 나게 놀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날 저녁 먹기는 먹었는데 뭘 어떻게 먹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위에 미안하지 않게 채우는 임무를 완성한다는 사명감으로 먹은 것 같다. 막바지에 후보자들이 몰려 컴퓨터 한 대씩 차지하고 서류준비에 분주했다. 그나마 경험 있으신 후보자들은 잘해 왔지만 나와 같이 초보자들은 당연 기각될만했다. 후보자들이 많으니 서류준비에 나타난 폐단들이 각양각색이었다. 오후 4시경 00후보는 서류를 행정관리 하는 분께 맡겼는데 여러 차례 자꾸 기각되니 화가 나서 “저 내일까지 전 재산 청산하고 서류접수를 하든지 포기를 하던지 할 겁니다.”고 하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저녁 10시경이 되어서야 서류가 완성되었다. 손에 쥐니 두툼하게 느껴졌다. 1990년대 초반 내가 흑룡강신문에 연재하던 장편소설 원고 분량은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내가 컴퓨터 다룰 줄 알아 그나마 그 시간에 완성한 것이지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면 혼자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아예 할 엄두조차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저녁 10시 되어 서류는 완성하였으나 다른 후보자들과 그 과정 경험담을 수다 떨다보니 어느덧 시계바늘은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귀가하려고 자동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데 손이고 발이고 감각이 나의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나의 몸에 달린 손과 발이 마치 동네 사람의 손과 발처럼 느껴졌다. 긴장이 풀리니 눈까풀이 처지고 온몸이 나른해나 운전하는데 무척 힘들었다. 한강을 지나며 차창을 내렸더니 시원한 강바람이 무겁던 머리를 자극하여 조금 정신이 들게 만들었다. 강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강바람을 여전히 변함없이 일으키고 있다. 밤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변함없이 여전히 깜박인다. 자연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나만이 지쳐 파김치가 되었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되어간다. 연로하신 엄마는 잠들지 못하고 이 딸이 귀가하기를 고이 기다리고 계신다. 작년에 중병을 앓고 난 엄마는 맘이 굉장히 여려지셨다. 웬만한 일에도 큰일 난 것처럼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곤 하신다. 천근만근의 몸을 끌고 겨우 집에 들어선 이 딸을 보시던 엄마는 놀라서 묻는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었나?” “아니요.” 나는 대답조차 할 힘이 없어 들릴까말까 하게 모기소리로 한마디 했다. 엄마는 나를 전장에서 패배한 패장을 바라보는 눈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 금방 시작인데 그토록 지쳐서야 버틸 수 있겠나? 관두는 것이 좋을 듯 싶구나.” 엄마는 이 딸의 지친 모습을 보고 그만두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도 내가 뭐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음이 생겼다. 답은 하나였다. 나는 남들(재한조선족사회)이 경험해보지 못한 좋은 공부를 한 것이 나의 자산이 될 것이며 영원히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렇게 좋게 생각하니 맘의 위로가 조금이나마 생겼다. 물론 자아위안으로 그치겠지만 말이다. 내일이면 면접 보는 날이다. 육신이 힘들고 정신이 힘들어도 좋은 일이니 견뎌내야지 하는 결심을 갖고 희망찬 내일을 바라며 힘내야 한다는 도리는 빤하지만 잠이 쉽게 들지 못한다.  글 박옥선  중국동포타운신문 319호  
337    진달래꽃 필 때까지(1) 댓글:  조회:4889  추천:1  2016-05-03
진달래꽃 필 때까지(1)   편집자 주 : CK여성위원회 박옥선 회장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조선족 출신으로서 처음 한국 정당 비례대표 순번(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최종 35명에서 31번 배정 받았음) 안에 들어 1개월 동안 한국정치에 입문하여 좋은 경험과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아직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박옥선 회장과 같은 정치경험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금후 한국정치에 출마하려는 조선족들에게 타산지석이 되어 길라잡이 역할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돈 팔고도 살 수 없는 그 귀중한 경험을 재한조선족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본지는 이번호부터 박옥선 회장의 체험담을 연재하오니 독자들께서 적극 읽어보기 바란다.   1. 느닷없이 찾아온 기회 서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하게 잘 닦여져 있다. 춘삼월 청정한 날씨에 봄기운마저 완연하다. 바깥 시원한 대지의 뻥 뚫린 우주의 세계와 달리 성냥갑처럼 답답한 자동차 안은 숨 막혀 온다. 차창을 열어 재꼈다. 아침 9시경이라 주야기온의 교차가 이뤄지는 시각, 조금 쌀쌀한 꽃샘추위가 살랑대지만 태양열의 발산에 힘 업은 양기에 실려 오는 훈훈한 봄바람이 얼굴을 매만지고 사라졌다 또 찾아오기를 반복한다. 기분이 더 없이 상쾌해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 년 사시절 매일 오늘처럼 날씨가 좋았으면······. 날씨가 좋으면 기분도 따라서 좋아진다. 기분이 좋으면 일도 잘 풀린다. 그래서 나는 유신론자는 아니지만 미리 며칠 전부터 날씨를 체크하고 날씨가 좋을 때 사업 건을 상담하고 추진하는 습관이 있다. 오전 10시, 6월에 있을 250명 단체 중국관광객 제주도 투어 건으로 중국00여행사에서 온 거래처 부장과 상담일정이 잡혔다. 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는 거래처라 은근히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사업에 있어서 우리백의민족은 이것저것 세심하게 따지지 않고 대충대충 넘어가지만 깐깐하기로 소문난 중국 상인들과 사업담판을 한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상대는 나의 사업에 대한 진정성과 성실성을 믿어 거래가 쉽게 이뤄졌다. 한국생활 20여 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업상 나름대로 성취도 있었으나 서울의 쳇바퀴 같은 리듬에 지치고 찌들었던 나였다. 하지만 오늘 따라 예기치 못했던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렌다. “따르릉, 따르릉” 휴대폰이 울린다. 하루에도 수십 통 전화가 걸려오니 일일이 받는 것도 귀찮다. 그러나 기분이 좋을 때면 전화통화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오늘 따라 왠지 걸려온 전화마다 잘 받고 싶어진다. 기분이 꿀꿀할 때면 걸려온 전화번호를 체크하고 받을 지 안 받을 지를 결정하고 대충 응수할 때가 많다. 아침 해는 시간에 쫓기는 듯 어느새 11시 되었다. 정오를 향해 달리는 태양은 마음껏 양기를 발산하여 대지를 훈훈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창밖을 넌지시 바라보며 걸려온 전화번호도 보지 않고 대뜸 상투적으로 “네, 박옥선입니다.”라고 응수하였다. “00의원입니다. 요즘 잘 지내시죠?” 야당 00중진의원님께서 걸려온 전화다. 정신을 가다듬고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날 00의원님과의 통화에서 내가 유일하게 길게 말한 대목이다. 나머지는 “아, 네.” “아, 네.” 마지막엔 “알겠습니다.”는 단마디로 통화를 마쳤다. 한국생활 20여 년 통해 터득한 한 가지 사실은 한국사회에서 누가 누구를 추천할 때면 이력서를 보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느닷없이 나한테 이력서를 요구할 때면 다수의 경우 나를 어디에 추천하는 경우라는 것이다. 00의원님의 “이력서를 보내주실래요.”라는 말에 나는 요즘이 20대 총선을 20여일 남겨둔 시점이라 무슨 뜻인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통화하면서 나의 가슴은 널뛰기를 하고 있었다. 준비가 덜 된 내가 느닷없이 비례대표 추천 소식을 접하게 되다니! 정말 내가 비례대표에 나설 자격이 있는지를 반문하니 마음이 평온치 못했다. 머리가 새하얘 난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생겨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긴 말을 못하고 짤막한 ‘아’와 ‘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나를 추천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전화통화하면서 순식간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굴리다 보니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중국에서 정치하는 사람은 탐오, 회뢰 등 착오를 지지 않고 맡은바 사업에서 성과가 있으면 평온하게 승진할 수 있고 탄탄대로를 걷게 되며 여생이 보장이 된다. 한국은 정치풍토가 중국과 전혀 다르다. 선거정치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에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에서 정치인은 세간의 욕을 먹는 직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해도 성과는 보이지 않고 나쁜 일 마이너스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씹히기 일쑤이다. 특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다면 온몸이 성할 데 없이 씹힐 것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듯이 세간의 눈총이 두려워 정치입문을 주저한다면 정의롭지 못한 선택이어서 평생 후회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학교 문을 나와 사회에 진출한 20대 초반 나이에 이미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니 심하게 말하면 동네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고 사랑하던 연인한테 버림당하는 아픔과 시련을 겼어보았다. 물론 내 딴에는 정의를 위해 한 일이었으나 세상사는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나는 ‘나쁜 년’이란 딱지를 달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고향은 흑룡강성 탕원이다. 평온하던 마을에 아이 셋(4살, 6살, 8살)이나 딸린 과부가 우리 마을 노총각한테 재가로 오게 되었다. 노총각은 심성이 착하나 조금 지력상수가 모자라 더하고 빼는 인생살이에 서투다. 하지만 노총각은 노모를 잘 모셔 효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렇듯 평온하던 모자의 생활에 과부가 들어옴에 따라 풍파가 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동네 말썽꾸러기 가문이 되고 말았다. 시어머니인 노모는 예의범절이 무엇인지 모르는 막무가내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해 잔소리가 잦았다. 이에 위아래가 없는 철부지 막가파 며느리는 앙심을 품고 보복하기 시작하였다. 시어머니가 80세를 훌쩍 넘기자 거동이 불편해 자립이 곤란해졌다. 며느리는 시어머님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던 데로부터 손찌검을 자주 했다. 점점 폭력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어느 하루 며느리가 손가락으로 시어머니의 입을 짜개놓았다. 그때 중국마을들은 지금과 달리 법률의식이 형편없이 결핍하였고 가정폭력을 법에서 제재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아마 있었을 수는 있었어도 법에 신고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하고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불의를 목격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너무 분개하여 이란 제목으로 흑룡강신문에 시리즈로 막가파며느리 행위를 지탄하는 내용의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 신문 글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나를 찬양하는 편지가 날아왔다. 불의를 과감하게 파헤치고 정의를 사회에 외치는 나의 행위에 감탄한다는 내용의 서신들이었다. 나는 처음 쓰는 소설이 신문에 연재로 게재되는 일만해도 성취감에 휩싸이게 되었던 데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정의 수호천사라는 명예를 받아 안아 한없이 기뻤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얼마가지 못하고 비극으로 번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마을 온역’ 취급까지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글 장르는 소설이었으나 남편을 ‘황00’, 부인을 ‘이00’라고 주인공들을 거의 실명에 가까운 실체를 밝힌 것이 문제였다. 남의 가정사를 함부로 사회에 터뜨리는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루건너 협박이 들어왔다. 당돌하기로 소문난 나였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처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서 공안국에도 찾아다니고 정부도 찾아다녔다. 내 딴에는 정의를 위해 한 일인데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또 호소하였다. 결국 경찰들이 나서서 ‘소설 속’ 주인공들을 찾아 협박행위를 멈추라고 명령하였다. 만약 협박을 멈추지 않으면 법에 따라 엄벌하겠다고 하니 그들 부부는 협박을 멈췄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는데 이번에는 엉뚱하게 생각지 못한데서 일이 크게 터지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이 나를 세상천지에 ‘동네 망신시킨 나쁜 년’으로 취급하고 길거리에서 나를 만나면 사람들은 마치 온역이나 만난 것처럼 슬슬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당시 학교교사였던 나는 교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고 친구나 동창생들 중에 고무격려의 편지를 보내오는 자도 있었으나 나를 나무라는 자도 적지 않았다. 더 슬프고 참기 어려운 것은 ‘나쁜 딸’을 둔 나의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당당히 쳐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장 슬프고 비극의 늪에 빠진 사건은 바로 사랑하던 연인이 나를 버리고 떠난 것이었다. 나는 정의를 위해 한 일이었는데 ‘나쁜 년’이 되어 일락천장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정말 죽고 싶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은 초췌하고 창백해져 백골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지옥을 헤매고 있던 와중에 어느 하루 짜개바지 친구가 찾아왔다. 죽도록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눈물이 말라 더 흘릴 눈물이 없었던 것이다. “난 죽고 싶어. 지금 어떻게 하면 고통을 적게 겪고 죽을 것인가를 매일 연구하고 있단 말이야.” 친구 왈, “죽는 사람은 남에게 죽겠다는 말 안 하고 죽는단 말이야, 너 내 앞에서 죽겠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아 너 진짜 죽지는 않을 것 같아 시름 놓인다.” 나는 슬퍼서 죽겠는데 친구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얄미웠다. 그러나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친구의 말이 맞았다.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은 오로지 하나, 바로 정든 고향이지만 그 고향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달리 살아가야 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때는 봄이 시작되는 계절이었다. 마지막으로 고별사라도 읊고 싶은 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옛사람들은 산을 찾아 고백을 잘했건만 나의 고향은 허허벌판이라 산이 없다. 해가 지고 인가가 드문 초저녁 고향 오솔길을 걷고 또 걸었다. 숨을 길게 들이 쉬고 한바탕 하소연 하려는데 코를 간질이는 무엇이 날아들었다. 길가에 듬성듬성 피고 있는 진달래가 있었다. 처량해 보였다. 나의 처지처럼 가련해보였다. 그러나 자연은 누가 뭐래도 섭리대로 돌아간다. 꽃망울을 깨고 만개를 준비하는 진달래꽃에서 향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자연의 계절이 어떻게 가고 오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내 속이 재가 되니 모든 게 귀찮아서였다. 진달래꽃 향기는 고목이 물을 만나 살아나듯 순간 나를 힘차게 자극하고 있었다. 나의 오장육부를 비롯한 장기가 꿈틀거리고 말초신경 감각이 돌아섰다. 아~ 인간세상이 나를 버려도 자연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지옥을 헤매던 나를 인간으로 그 기능을 회복시켜 준 것은 진달래꽃향기였다. 나는 나를 인간으로 회복시켜준 고향의 진달래꽃이 활짝 피면 다시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한다고 약속하고는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그 후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너무 일찍 나이에 너무 심한 풍파를 겪고 나서 불의를 목격하면 참견하지 말자고 골백번 결심하고 또 했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은 고치지 못하는 법. 그 후 나의 인생에서 산전수전 다 겪는 과정에 매번 또 불의를 만나면 참지 못하고 까밝힌다. 인간세상의 옳지 못한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 정의이다. 정치란 바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어찌 보면 정치가 나의 체질에 맞는 것 같다. 그래서 20대 총선 비례대표 추천에 응했던 것이다.   다음호 계속   중국동포타운신문 318호    
336    육룡이 나르샤가 남긴 교훈 댓글:  조회:4028  추천:1  2016-04-20
  육룡이 나르샤가 남긴 교훈 세종대왕의 업적은 이방원 덕분   여말선초(麗末鮮初) 역사를 다룬 사극이 여럿 있다. , , , 얼마 전 성황리에 방송된 등등이다. 제목은 본래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부터 세종대왕까지 여말선초 이 씨 왕가를 찬양하는 에 있는 구절이며 육룡은 목조(이성계의 고조부), 익조(이성계의 증조부), 탁(도)조(이성계의 조부), 환조(이성계의 아버지), 태조(이성계), 태종(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등 조선 왕조의 조상 넷과 왕을 지낸 두 인물을 뜻하는 말이다. 사극에 등장하는 육룡은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이방지, 분이, 무휼 등 개국 주역이며 이 중에서 정도전과 이방원이 비중을 크게 차지한다. 만약 정도전이란 역사인물이 없었다면 고려의 수명이 더 길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설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도전이란 인물이 나타나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새로 세웠다. 우리는 조선개국을 주도한 정도전이란 인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려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는 종교적으로는 불교 천하였고 정치적으로는 귀족세력이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강했다. 958년 광종이 귀족세력을 약화하려고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세력을 키웠으나 귀족들이 여전히 나라의 지배세력이었다. 최씨 일가 무신정권 80여 년 동안 왕은 허수아비였고 실권을 그들이 전부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여말(麗末)에 이르러 정몽주와 정도전이라는 두 걸출한 유학자가 배출되었고 이 두 거목은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정몽주(1337~1392)는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한 이후로 승승장구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한편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機智)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정도전(1342~1398)은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고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 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해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스승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둘 다 총명과 재질이 뛰어나 여말 가장 주목 받는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이라면 정몽주는 온건파, 정도전은 급진파였다. 오늘 한국정치에 비유하자면 정몽주는 보수이고 정도전은 진보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유교사상이 골수까지 침투된 인물들이지만 추구하는 길이 달랐다. 정몽주는 유교사상의 가장 근본인 역성혁명불가를 목숨 바쳐 지켜가려는 반면에 정도전은 썩어빠진 고려를 버리고 백성을 위해서라면 역성혁명도 불사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정도전이 오로지 백성이 편안하고 잘 사는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는 나라를 구상하고 백성을 중히 여겨 계민수전(計民授田) 같은 개혁을 밀어붙인 것은 그의 유배생활에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왕권을 약화하고 대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는 군신조화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등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이상주의자였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서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에 비춰보면 본래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씨조선 개국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제거하고 건국 후 왕권강화에 가장 큰 벽인 정도전을 살해함으로써 이씨조선의 정착에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성계가 가장 아끼던 인재였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그를 끝까지 설득하여 함께 새로운 조선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반대하며 오히려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를 무너뜨리려고 하자 이방원은 아버지 문병 왔다가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여 버렸던 것이다. 이방원은 이씨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과 한 배를 탔다가 정도전이 너무 안하무인으로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들자 두 사람은 갈등이 극에 달했다. 정도전은 지나친 이상주의자로서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백성을 위하고 종묘와 사직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눈에는 정도전도 역시 권력에 눈이 어두운 대신에 지나지 않았다. “당신이 하면 정치고 내가 하면 사심이냐? 너무 자신을 합리화하여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야망을 내가 박산 내 줄 것이다.” 이방원의 말이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경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고집하다가 결국 목숨을 이방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방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도전이 책동하여 책봉한 나이 어린 세자 방석을 죽여 버리고 자신은 손에 너무 피를 많이 묻혀 직접 왕위에 등극할 수 없음을 알고 둘째 형을 왕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둘째 형은 자신도 언제 이방원의 손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주동적으로 왕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하였다. 이방원은 재위 시에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셋째 아들 이도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도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총명이 뛰어나고 재주가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해도 정적이 많으면 그에 휘둘리다 보면 정사는 엉망일 것이고 새로운 업적은 꿈도 꿀 수가 없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선왕인 아버지 이방원 덕분에 걸림돌이 없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문화 분야에서 집현전 설치, 훈민정음 창제하였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발명하였다. 경제사회 분야에서 조세의 공평화, 노비의 지위를 개선하였다. 대외정책 분야에서는 국가주권 확립, 영토 확장 등 많은 업적을 남겨 위대한 군주로 칭송되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은 나름대로 당시 역사적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고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세종의 업적은 선왕 이방원 덕분이었다.
335    한국정치 우습게 보지 말자 댓글:  조회:4829  추천:9  2016-03-24
한국정치 우습게 보지 말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기적은 없었다   한국4.13총선 22일 앞두고 지난 22일 여야 양당에서 비례대표 순번을 공개하였다. 조선족출신들이 새누리당에 공개된 신청자가 5명이고 비공개 된 수까지 합치면 일여덟 명 된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추천에 의해 박옥선 CK여성위원회 회장이 홀로 이름을 올렸다. 공개에 의하면 더불어민주당은 35명을 발표했으나 20위까지 당선안정권이고 새누리당은 45명을 발표했고 25위까지 당선확률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순번을 보면 박옥선 회장이 그나마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순위에서 35명 안에 들었던데 비해 새누리당의 일여덟 명의 조선족출신들은 아예 45명 내에 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가 혹시나 한 명쯤은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그동안 국회에서 오랫동안 재외동포를 대변한 여야의 대표적인 심윤조 의원과 김성곤 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재외동포사회가 한국정치권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조선족 비례대표도 한 물 건너 간 것 아니냐고 짐작했었는데 결과는 예측대로였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2·8 전당대회에서 '재외동포 전문가를 비례대표에 우선순위 추천한다.'는 당헌 규정을 신설했지만 이번 20대 총선에서는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에 대해 여야 정당들을 원망하거나 나무랄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에게서 잘못을 찾고 4년 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 선거는 전략이다. 이번 조선족 비례대표가 배출되지 못한 것은 여야정당의 홀시가 중요하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조선족사회 선거 전략이 없었던 것이 가장 치명적인 실패요인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비례대표는 선출직은 아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중앙위원회 투표를 거쳐 최종 35명의 순위를 확정했다. 투표를 거치든 여당처럼 선거공관위 위원들이 압축하든 눈에 들어야 한다. 새누리당에 신청한 조선족 일여덟 명이 최종 45명에 들지 못했다는 것은 눈에 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눈에 들게 만드는 것이 곧바로 선거 전략이다. 비례대표의 개념은 그 사람이 소속된 분야의 전문가를 뜻한다. 정당은 각 분의야 전문가들을 섭외하여 의정활동을 펼치게 함으로써 정치가 역동성을 갖게 만든다. 조선족후보는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재한조선족을 대변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전문가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국정치를 가볍게 보거나 우습게 여기고 나도 신청하면 되겠거니 하는 하늘에 대고 막대로 재이는 식으로는 죽었다 깨도 비례대표로 당선될 수가 없다.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한국정치권에 향해 왜 조선족출신 국회의원이 필요한지, 의정활동을 어떻게 펼칠 것인지를 강력하게 어필하고 집단적으로 특정 대표성적인 후보를 선발하여 여야정당에 추천해도 될까 말까인데 제각각 서로 라인이나 타서 비례대표가 되려는 이번과 같은 이런 식으로는 4년 후 아니 40년이 지나도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없다. 한국정치는 겉으로 보기에는 가볍게 보이고 우습게 보인다. 한국인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개나 소나 다 국회의원이 된다. 정말 그럴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중국에서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꿈조차 꿀 수 없는 조선족들이 이런 표면적인 한국정치현상에 유혹되어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정치인들이 막말 하고 다니고 주먹다짐이 아니면 삿대질하고 상욕을 해대는 등 얼핏 보면 수준이 낮고 소질이 형편없이 보인다. 그래서 조선족들이 한국국회의원이 별거 아니네라고 여기고 나도 자격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미안한 일이지만 한국국회의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따져보면 대한민국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엘리트이며 적어도 조선족에 비하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우선 대한민국은 사농공상의 유교적인 전통에 의해 아직도 학력을 매우 중시하는 풍토가 짙다. 한국국회의원들의 보편적인 학력이 매우 높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야심차게 영입한 삼성전자 상무 출신 양향자 씨의 학력이 고졸이지만 대한민국사회에서 그녀처럼 성공한 사람은 로또 1등에 당첨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며 예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처럼 매우 드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비례대표로 공천된 사람 중에 논문표절 논란이 일고 있지만 정치하려고 나선 조선족출신들이 표절이든 무엇이든 논문 근처에나 가 보았는가? 비례대표에 나서는 자가 반드시 논문 쓴 경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대학 나왔다고 큰소리 칠 수 있겠으나 한국에 와서 석·박사에 버금가는 커리어를 쌓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재한조선족사회 분위기는 흔히 이자스민을 들먹이며 웬만한 조선족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제발 이와 같은 천박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자스민이 국회의원이 된 것은 찬스가 잘 맞아떨어진 케이스이기 때문에 다시는 같은 경우가 나올 확률이 제로다. 때문에 차기 21대 총선에서 조선족 비례대표를 배출하려면 철저한 준비를 마련해야 한다. 이번 실패는 각자가 제각기 논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비례대표가 되려면 학식 도덕 재원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재한조선족사회 엘리트들이 모여서 공약도 함께 만들고 연설문도 함께 작성하는 등 집단의 힘이 발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각자가 제 잘난 멋에 논다면 영원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3월 18일 중국동포타운신문 4층에서 진행되었던 동포사회현안 공개토론회에서 재한동포연합회 이선 이사의 제안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동포사회 단체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앞으로 조선족출신 국회의원을 배출하려면 지식인들로 뭉친, 마치 중국 당교와 비슷한 조선족인재양성기관이 세워져 거기서 훈련 받고 추천된 자를 여야 정당에 밀어주면 당선 확률이 높을 것이다.” 현재까지 재한조선족사회 분위기는 지적인 마인드나 동포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자격이 전혀 없이 곽재석 원장의 말대로 완장 찬 분들이 축제나 둬번 하고 자원봉사나 좀 나서면 국회의원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4년 후에도 국회의원 배출은 역시 천방야담이 될 수밖에 없다. 4년 후 진정 조선족출신 국회의원이 배출되려면 이선 이사의 제안이 십분 맞는 얘기이다. 현재로서는 이 길밖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관건은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렸다.    
334    공자와 예수 이야기(1) 댓글:  조회:4194  추천:0  2016-03-10
克己復禮는 복고주의 아니다 민변독서모임 9주년 기념행사 강의고   지난 3월 7일 저녁 서초구에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독서모임 9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독서모임은 보편적으로 처음엔 열정이 높다가 점차 식어져 3년을 넘기기 힘들다. 이런 독서모임의 ‘보편적인 생리’를 깨고 만9년 동안 이어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 동안 모두 204회 모임에 총 259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였다. 지금 회원들의 열기를 보아 10주년은 거뜬히 넘길 것 같다. 필자는 2015년 6월부터 이 독서모임에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지금은 열성회원으로 매번 빼놓지 않고 출석하고 있다. 나의 지식을 한국사회 최고 엘리트들과 공유할 수 있어 굉장히 좋고 또 한국 상층사회의 정서를 배울 수 있어 좋다. 한편 이날 기념행사에서 필자는 영광스럽게도 기독교 영지주의 교리 ‘에이돌론과 다이몬’을 동양 최고 성인인 공자의 克己復禮와 연관시켜 30분간 강연을 진행하였다. 기독교를 靈知主義와 文字主義 두 가지로 나누는데 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가 주류였다. 4세기 초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됨에 따라 문자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지금까지 문자주의 기독교로 흘러왔다. 영지주의란 로고스(진리, 이성, 논리, 원리, 윈칙)를 추구하고 그노시스(신비한 앎)를 얻는 것이며 입문식을 거쳐 세례를 받는 절차가 있고 최종 영적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영지주의 세례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가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는 흙의 단계로서 의식이 없는 상태이며, 물의 단계에 이르면 심적인 수준이 형성되며, 공기 세례를 받으면 영적 수준이 되고, 불의 세례를 받으면 영혼의 구원에 도달한다. 영지주의는 또 인간을 수준 낮은 자아(에이돌론)와 수준 높은 불멸의 자아(다이몬)로 나누고 에이돌론에서 다이몬으로 도약하려면 위와 같은 입문식과 세례를 거쳐야 한다. 문자주의란 성경문자 그대로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어떻게 처녀 뱃속에서 태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물을 아무 설비도 없이 즉석에서 포도주로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5병2어로 5천 명을 배 불리 먹이고도 남게 할 수 있는가?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부활 승천할 수 있는가? 등등의 의문을 품거나 제기하지 말고 성경문자 그대로 믿기만 하면 천국에로 간다는 것이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본래 기독교의 본질은 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요즘의 기독교는 영혼의 구원은 거론조차 되지 않고 흔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복 받고 천국에 간다든가, 예수를 믿으면 부자 된다는 기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의 일이다. 조선족이 한국에 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친인척 연고가 없는 조선족은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가짜비자 받고 한국행을 성사시킬 수 있었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연길시 장모 여인(당시 34세)은 남편과 가짜 이혼하고 한국인과 가짜결혼으로 코리안드림의 꿈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비자가 기각되었다. 오로지 한국행 꿈에 빠져 있던 그녀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기막힌 조언을 듣게 되었다. “교회에 등록하고 헌금 내면 비자가 나올 거야!” 장모 여인은 무신론자라 처음엔 친구의 말에 뚱딴지같은 헛소리라고 듣지 않았다. 그런데 비자는 한 달 지나고 반년 흘러도 여전이 나오지 않는다. 친구 왈, “우리 사촌언니도 너처럼 3년 동안 애타게 기다려도 비자는 여전히 소식조차 없어 교회에 다녔는데 글쎄 다니자마자 비자가 나왔지 뭐야.” 장모 연인은 하도 절망에 빠져 있던 터라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어서 마음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헌금 얼마 내면 되나?” “각자 자기 마음이긴 한데 한 50원~100원 정도.” 장모 여인은 곧바로 교회에 가서 신도로 등록하고 예배 시 헌금 80원을 납부했다. 불과 며칠 후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의 한국행 비자가 거짓말처럼 나왔던 것이다. 장모 여인은 동네방네 홍보하고 다녔다. 예수를 믿으라고. 예수를 믿으면 소원했던 일이 다 성사된다는 것. 사람들은 흔히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의 고등종교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는 신이 아니라 심양영사관의 영사노릇을 담당하고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예수를 신앙하는 그리스도교는 고등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평범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에 등록하고 헌금 바쳐서 원했던 일이 소원성취 되는 행위는 민간에서 말하는 방토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것은 분명히 기독교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가 영지주의였는데 왜서 문자주의로 전환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고등종교는 보편적으로 제국의 통치도구 내지 통치무기로 이용당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교리 의미들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왜곡된 교리들이 전파됨에 따라 그것이 정설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일례로 불교는 지금의 네팔에서 생겨날 때는 소승불교(경전의 교리교의에 따라 개인의 수도를 통해 구원 받는 것, 지금도 남아, 동남아 불교는 소승불교임)였으나 후한말기에 중국에 유입되면서 도교식 불교 즉 격의(隔意) 불교로 변이 되었고 기복신앙을 위주로 하는 대승불교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한국 부녀들이 부처님 상을 만지며 아들을 점지해 주시기를 비는 행위는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다. 중국의 도교는 본래부터 종교가 아니라 일종 학설이었다. 즉 춘추시기 초나라 중앙도서관 관장을 맡고 있던 노자가 복잡한 난세의 구국처방으로 내놓은 학문이 하나의 대표적인 학파인 도학으로 승화되었다. 도학의 기본은 도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처사하는 것, 유학과 달리 인위적인 윤리니, 도덕이니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지 않고 無爲自然의 치국방침으로 천하를 태평성세로 만드는 것, 개개인의 수도를 통해 인간의 최고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제국에 이르러 도학은 신선숭배와 연단술 및 양생술로 변하면서 하나의 종교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유교도 본래부터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처음엔 하나의 학설, 즉 유학이었다. 한제국에 이르러 한무제 때 동중서가 매니저로 나서서 한무제와 ‘흥정’한 결과 유학이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선정되었으며 따라서 선비들은 관료집단에 진출하여 사대부로 되어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학은 유교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유학이 유교로 변화됨에 따라 본래 공자의 학설이 제국의 통치자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된 것들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유학의 ‘군군신신, 부부자자’는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가 군주를 따르지 않는다. 가령 겉으로 억지로 따르는 척 하면서 진심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역이용하여 자신의 이속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 그래서 어리석은 군주가 있으면 ‘뛰어난 신하들’이 많기 마련인데 그들은 나라를 말아먹기가 일쑤였다. 군주가 군주다우면 신하도 역시 자신의 푼수를 알아야지 하극상이 되면 천하가 어지러워지기 쉽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 자격이 없으면 아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이며 가문은 혼란에 빠지기 쉽다. 유교의 ‘군군신신, 부부자자’는 신하는 무조건 군주에 복종해야 하고 아들은 무조건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유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제국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왜곡되어 전반 사회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극기복례’도 유학 때와 유교의 시기에 들어 하늘과 땅 만큼 엉뚱하게 해석되었던 것이다. 먼저 유교의 ‘극기복례’를 살펴보면 자기를 억제하고 예에 맞게 행동하라는 것인데 여기서 예는 周禮, 즉 주나라 정치제도와 정치질서를 일컫는 것이므로 공자는 복고주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보수분자로서 마땅히 타도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문화혁명 때 특히 비림비공(批林批孔) 시기에 배운 ‘지식’이었다. 그렇다면 유학에서 말하는 ‘극기복례’의 참뜻은 무엇일까? 우선 禮는 농경문화의 산물이며 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며 일상생활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농사는 철저히 현실에 안주해야 하며 경험이 많아야 잘 지을 수 있다. 경험을 쌓으려면 나이를 먹어야 한다. 그래서 중국문화는 노인을 존중하는 禮와 孝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禮는 점차 농경사회에 가장 성스러운 바이블로 떠올랐다. 종교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禮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경지로서 聖이며 기독교 영지주의 교리에 따르면 수준 높은 불멸의 자아 다이몬이다. 己는 俗이며 수준 낮은 자아 에이돌론이다. 기독교 영지주의에 따르면 속에서 성으로 도약하려면 입문식을 치르고 4단계 세례를 거쳐야 한다. 공자는 나라는 己, 즉 俗이 禮라는 聖에로 도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공자는 인간사회를 소인과 군자라는 두 계층으로 나누고 수준 낮은 자아인 소인이 수준 높은 불멸의 자아(군자)에로 도약하려면 배우라고 호소하였다. 즉 소인은 배움을 통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공자의 어록이라 말할 수 있는『논어』는 학이편으로 시작되고 첫 구절이 곧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學而時習之, 不亦悅乎)"이다. 이는 공자가 배움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는 증거이다. ‘극기복례’는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하자면 속물인 小我를 죽이고 성스러운 大我에로 도약하는 것이며 그 루트는 배움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똑 같다. 다만 목적에 이르는 방법과 방식이 다를 뿐이다. 서양은 유목문화의 환경에서 속세에서 성세에로 도약하려면 종교의례가 필요했고 동양은 농경문화의 환경에서 리얼리즘이 발달했기 때문에 속세에서 성세에로 도약하려면 종교의례가 아닌 배움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333    불편한 진실 댓글:  조회:4722  추천:10  2016-01-27
불편한 진실   서울에서 알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강남 청담동에 유명한 불고기집이 있다. 음식점 치고는 규모가 커 종업원도 많다. 홀에만 여덟 명의 서빙이 있고 주방에 요리사와 참모 및 설거지 아줌마까지 합쳐 20여 명이 뱅뱅 돌아친다. ‘조선족아줌마가 없으면 서울 음식점들이 문을 닫는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3명 이상 종업원이 있는 아무 음식점에 가보아도 조선족아줌마가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없다. 음식점 규모가 클수록 내국인종업원 구하기 힘들어 조선족아줌마를 많이 채용하고 있다. 구인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불고기집에도 전체 종업원 30여 명 가운데 조선족아줌마가 삼분의 일이나 된다. 한국아줌마든 조선족아줌마든 돈 벌기 위해, 한국인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먹고 살기 위해” 음식점에 취직하여 근무한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목적은 똑 같으나 한국아줌마들과 조선족아줌마들이 지나온 문화 환경이 달라 자주 마찰을 빚고 갈등을 일으킨다. 매일 점심때면 손님이 어찌나 많은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손발이 나른해나고 배가 허전하기 짝이 없다. 배는 심하게 고프지만 매일 반복해 먹는 식당 음식이 질려 힘들어도 때론 자기네절로 먹고 싶은 음식을 해 먹는다. 재미나는 것은 음식 해 먹을 때면 가재는 게 편이요 오리가 오리무리 따르듯 한국아줌마들과 조선족아줌마들이 두 무리로 쫙 갈린다. 조선족아줌마들은 한국에서 기름기 번지르르한 음식을 먹지 못해 속이 사막이 되는 느낌이어서 ‘차오차이(볶음요리)’를 해 먹는다. 한국아줌마들은 기름이 번지르르한 ‘차오차이’를 보고는 처음에는 “니글니글 거리는 음식 어떻게 먹느냐?”고 주춤거리다가도 정작 맛보고는 볼이 미여지게 잘도 먹는다. 한국아줌마들은 흔히 해먹는 음식이 바로 쌈 싸 먹는 것이다. 어느 하루 한국아줌마들이 호박잎을 데쳐 쌈을 싸 먹는 모습이 마치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기분으로 맛나게 먹고 있었다. 처음 이와 같은 광경을 목격한 한 조선족아줌마가 못마땅하다는 눈길로 째려보면서 낮은 소리로 “한국 것들은 잘 산다고 하면서 별 것 다 먹네.”라고 말한다. 언어표현에 굉장히 서툰 조선족아줌마의 ‘한국 분’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닌 ‘한국 것들’이라는 말은 굉장한 실례였다. 한국 사람들은 ‘00것들’이란 말을 매우 혐오한다. 왜냐하면 양반과 상놈의 차별문화가 심각했던 조선시대에 양반가문 사모님들이 일반백성들을 쩍하면 ‘상것들’이라고 욕했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족아줌마들이 자기네끼리 하는 소리였는데 한국아줌마들이 홀깍 들어버려 크게 화나게 만들었다. 한국아줌마들이 화 난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즉 “별 것 다 먹네.”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기가 세고 말발이 센 한 한국아줌마가 매우 흥분되어 묻는다. “임자네 중국에서 호박잎을 안 먹노?” 평소에 괜히 자격지심으로 피해의식에 젖어 있던 조선족아줌마는 단 1초의 머리회전도 거치지 않고 툭 한 마디 내뱉는다. “우리 중국에서는 이런 걸 돼지 먹여요.” 이 말을 들은 한국아줌마들이 열이 상투밑까지 치밀어 올랐다. 한국인 자기네들이 졸지에 돼지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굴러온 돌들이 배긴 돌한테 큰소리 빵빵 치니 더 참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무식하고 야만스럽게 머리채 잡아끌면서 싸움을 벌일 수는 없고 하여 한 마디 뼈 있게 쏘아붙인다. “임자네 그렇게 잘 살믄서 와 한국에 돈 벌려 왔디야?” 이 말을 들은 조선족아줌마들은 꿀 먹은 벙어리 꼴이 되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위 사실을 필자는 일명 ‘호박잎 사건’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자아, 이 ‘사건’에서 조선족아줌마가 한국아줌마들을 ‘한국 것’들이라고 비하하는 식의 표현이 잘못되었으나 “중국에서는 호박잎을 사람이 먹지 않고 돼지 먹인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고 진실이다. 필자도 연변 동불사 시골에서 나고 자라면서 어릴 적 집터 주변에 호박잎이 흔해 빠져 있었으나 먹어본 기억이 없고 데쳐서 돼지 먹이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니까 조선족아줌마의 말은 사실이고 진실이었다. 동시에 한국아줌마의 “임자네 그렇게 잘 살면서 왜 한국에 돈 벌려 왔느냐?”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고 진실 된 표현이다. 그 환경에서는 맞는 대응이라는 뜻이다. 조선족아줌마와 한국아줌마 사이 오고간 말들이 서로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진실을 진실대로 표현해 버리면 서로 불편해지고 마찰을 일으키고 갈등을 불러온 화근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호박잎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또 하나 있는데 일명 ‘김치 사건’이다. 물론 필자가 지어낸 사건명이다. 조선족종업원아줌마가 음식점에서 밥 먹으면서 배추김치 푸른 잎을 가려내 버리고 흰 것만 골라 먹는 것을 보고 한국종업원아줌마가 “임자, 푸른 잎이 영양가가 많은데 왜 버리는 거요?”라고 하자 조선족종업원아줌마가 “우리 중국에서는 김치 담글 때 푸른 잎을 잘라내어 돼지 먹여요.”라고 대포처럼 쏘아댄다. 이 말을 듣는 한국인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까? 아무 고려도 없이 말이다. 이 말을 들은 한국종업원아줌마는 “임자, 지금 우리 한국 사람들을 돼지 취급하는 거요?”라고 거칠게 나오자 조선족종업원아줌마는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난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왜 화를 내요?”라고 맞받아친다. 맞는 말이다. 사실 중국조선족은 김치 담글 때 푸른 잎을 쳐내고 맨 흰 잎으로만 담근다. 이것이 진실일지언정 진실을 진실대로 말해버리면 서로 불편해지고 갈등을 빚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이다. 현시대에 있어서 진실을 진실대로 말해버리면 불편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KBS2 채널에 이란 개그코너까지 생겨났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는 불가사이한 일들이 많고도 많다. 사실이 아닌 일이 한 입 건너 두 입 건너 사회에 널리 퍼지면 그것이 사실이 되고 진실처럼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 노무일군들이 한국에 밀물처럼 몰려들자 한국사회에 다음과 같은 말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조선족들이 한국에 돈 벌러 와서 아무리 돈을 쫓는 돈벌레라고 하나 단 돈 5만원 더 준다고 철새처럼 일자리 옮겨버리는 것은 너무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족은 돈이라면 오금 못 쓰고 의리도 지키지 않는 못 믿을 족속이라는 것이다. 이 ‘유행어’ 때문에 조선족이 일자리 옮기는 것이 단 돈 5만원을 위해서라는 것이 진실이 되어버렸다. 어느 한 번 술자리에서 대한민국 권위 있는 매체 기자조차 필자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조선족이 한국직장문화에 적응 못해 부득이하게 자주 직장을 옮겨 다니는데서 생겨난 거짓풍문이라고 해석해 주었다. 즉 한국에서 노무에 종사하는 조선족 다수가 농민 출신이고 가령 도시출신이라 해도 직장체험을 해보지 못했거나 혹시 도시 직장문화를 경험해보았다 해도 그것은 사회주의 큰가마 밥 직장에서 세월을 보냈을 뿐이어서 일을 더 해도 그만 덜 해도 그만, 정해진 월급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경쟁이 무엇인지? 내가 일을 열심히 하면 회사가 수입이 증가되고 나중에 나에게 그 만큼 한 보수가 더 차려진다는 직장의식이 없었다(요즘에는 중국도 많이 변했지만). 또 한국처럼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일이 없고 상사가 부하직원을 자기 동생이나 자기 자식을 대하듯 내리 막 대하는 직장문화가 중국에서는 없는 일이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직장을 자주 옮기는 이유는 한국직장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월급 더 준다는 조건에 유혹되어 직장을 옮기는 사례가 있긴 하겠지만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단 돈 5만원 때문에 돈 쫓는 돈벌레이기 때문에 직장을 자주 옮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중국직장에서는 오너가 직원보고 그만두라는 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진짜 그만두게 될 경우에만 말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한국직장에서는 오너가 직원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밥 먹듯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영업 구멍가게 사장님들은 아무 말이나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음식점들은 점심 한때와 저녁 한때, 이렇게 시간 때에 따라 갑자기 볶아친다. 한국인들의 말대로 하면 “진짜 정신없다. 미치겠다.” 사장은 정신없이 미치겠는데 시골출신 조선족아줌마 종업원은 손님들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사장님의 전라도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외래어도 알아먹지 못해 얼어붙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 종업원이 이쯤 되면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주문하고 요구하기도 하고 서비스가 따라가지 못해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사장은 진짜 미친다. 그래서 사장은 홧김에 “아줌마 내일 당장 그만둬!”라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이튿날 점심 손님이 들이닥칠 시간이 되었는데도 조선족아줌마 종업원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사장은 진짜 미치겠다. 전화로 “이게 몇 시인데, 어떻게 된 일이야?”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사장님 어제 저보고 그만두라 했지 않았나요?” 사장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참, 기가 막혀!” 사장의 입장에서 진짜 직원을 그만두게 하려면 퇴근 시간에 불러 여차여차하여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라, 그 동안 보수는 내가 알아서 얼마 챙겨줄게.” 합의가 되면 사장이 한마디 보탠다. “미안하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다시 함께 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그냥 해보는 말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직장문화를 모르는 조선족아줌마들은 흔히 사장이 홧김에 한 말도 진실로 받아들이고 이튿날 바로 실행에 옮겨버려 말없이 출근하지 않는 것으로 사직을 알리는 것이다. 사직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해보자. 한국직장에서는 직원의 의도이든 고용 측의 뜻이든 하여간 직원이 그만두게 될 경우 사직서를 작성하여 상사에게 바친다. 이와 같은 직장문화를 모르는 조선족아줌마들은 사직서는 고사하고 그냥 말없이 출근하지 않는 행위로 사직을 알리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 사장님들이 이 때문에 숱한 골탕을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계는 돌려야 하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렵사리 전화 연락되면 돌아오는 대답은 진짜 골 때린다. “저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하였어요.” 사장이 새로운 일군을 모집할 틈도 주지 않고 일방적인 통보로 이직한다. 코리안드림 바람을 타고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아줌마들, 건설업이나 제조업에 종사하는 조선족남자직원들도 말없이 그만두는 일은 마찬가지로 비일비재하다. 이래저래 한국직장문화를 모르고 있는 조선족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지만 한국인은 조선족사회 이와 같은 사정을 모르고 그냥 단 돈 5만원 더 줘도 철새처럼 직장을 쉽게 옮겨버린다고 말하고 있고 또 이 말이 진실처럼 한국인들은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크든 작든 세 사람 이상부터 모인 직장에서는 처세술이 능해야 한다. 사장님에게 적당히 잘 보여야 하고 직원과 직원 사이 각을 세우지 말고 두리뭉실 넘어갈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조선족들은 너무 직설적이고 자기 감정을 숨길 줄 모르고 보면 본대로 말해버리다 보니 미움을 살 때가 많다. ‘호박잎 사건’도 ‘김치사건’도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족직원과 한국인직원 사이 마찰을 빚고 갈등이 생겨나면 손해 보는 쪽은 십 중 팔구 조선족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굴러온 돌이 배긴 돌을 이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직장을 자주 옮겨 다니는 이유가 주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인과 조선족 직원 사이 갈등이 생겨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서로 상대방의 과거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호박잎 사건’과 ‘김치사건’은 조선족아줌마들이 직설적인 성격문제도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 과거를 전혀 모르고 있은 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조선족아줌마들이 한국음식점에 근무하면서 이 ‘두 사건’ 외에 목격한 ‘사건’들이 많고도 많았고 때론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중국에서 사람이 먹지 않고 돼지를 먹이는 무 이파리, 돼지비늘 풀, 고양이풀 등등의 식물들을 한국에서는 사람이 다 먹는다. 조선족아줌마들의 눈에는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신기하다는 눈길로 바라본다. 한국의 과거사를 모르는 조선족아줌마들에게는 실로 수수께끼였다. 한국은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이 끝나고 국토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고 먹을 것이 턱 없이 부족하여 나무껍질 벗겨서 먹을 지경이었다. 아무 식물이든 독이 없으면 다 먹었을 만큼 어려운 세월을 겪었다. 그러므로 호박잎쯤은 어찌 보면 좋은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김치 담글 때 배추가 없어서 문제이지 푸른 잎을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 김치 담글 때 푸른 잎을 쳐내지 않고 그대로 담그는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호박잎을 데쳐 쌈을 싸 먹거나 무 이파리, 돼지비늘 풀, 고양이풀 등등을 먹는 것은 현재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옛날 먹었던 추억을 되살리고 또 매일 하루 세끼 쌀밥만 먹기보다 어떤 음식은 가끔 먹으면 맛이 있을 때가 많다. 보리밥을 가끔 먹으면 별미이지만 하루 세끼 먹으면 진짜 미칠 지경이다. 서울에 보리밥집이 여러 곳 있는데 먹을 것이 풍부한 요즘 손님들이 가끔 먹으므로 하여 과거 맛을 되새겨 보고 추억도 해보는 장소여서 장사가 꽤 잘되고 있다. ‘호박잎 사건’과 ‘김치 사건’의 두 주인공 여성인 조선족종업원아줌마들이 만약 한국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온 과거사를 알고 있었더라면 불편한 진실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인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직장을 옮기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같은 도리로 거꾸로 한국종업원아줌마들이 중국에서 조선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들의 과거와 그들의 문화를 알았더라면 그토록 갈등을 빚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족은 한국인과 같은 문화뿌리를 두고 있지만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중국문화가 몸에 배어 한국인과 생활방식, 생활방법, 생활양식이 다른데서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완전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직장생활이 어설플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몸에 배인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못한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올바르게 정착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걸려야 해결될 것 같다.  
332    조선족 국회의원? 아직은 천방야담 댓글:  조회:5390  추천:3  2016-01-21
조선족 국회의원? 아직은 천방야담   “비례대표 이야기가 정치권에서 먼저 나오진 않았을 거다. 여당도 야당도 쉽사리 중국동포를 공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당장 선거구에서 동포들에게 과도하게 친화적인 정책을 실시했을 경우 내국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전략상으로 보면 망하는 수가 있다. 동포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의 여론이 꼭 좋지는 않다. 지역구가 슬럼화 된다고 해서 떠난 분들도 많다. 다문화 사회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시점이 지금이냐고 물으면 ‘아직 시기상조다’고 말할 수 있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한국00언론 기사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권은 여당과 야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20대 총선에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국회의원 공천 얘기는 여당과 야당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도 없고 또 발표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이것이 현실이지만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비례대표 얘기가 들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말부터 올해 들어 4.13총선을 앞두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일부 후보들(후보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족사회와 인맥이 닿는 한국인을 지정)이 재한조선족사회 표를 의식하여 개별단체장들을 찾아 이런저런 약속을 하고 또 귀가 솔깃한 공약을 던져준다. 일부 단체장들이 확인을 거치지 않고 확정되지 않는 공약(公約)이 아닌 공약(空約)을 떠들고 다닌다. 많은 내용의 空約 가운데 20대 총선에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국회의원 공천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아직 당 차원에서 거론조차도 되지 않은 일을 마치 이미 확정된 것처럼 공공연하게 ‘홍보’한다. 한 표라도 더 얻으려는 얄팍한 전략에 의해 생겨난 풍문이 사실처럼 되어가고 있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이 空約이 公約처럼 잘 먹혀드는 이유가 있다. 이자스민 때문이다. 수십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이 19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4년이 지난 지금 70만 조선족사회에 당연히 국회의원이 한 명쯤은 공천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일각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보는 경향이 짙다. 미안한 일이지만 재한조선족사회는 한국정치권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적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필리핀 사람들은 적지만 단합이 잘 되어서 국회의원을 배출한데 비해 조선족은 머릿수만 많았지 단합이 되지 않아 국회의원을 배출 못한다고 떠들고 있다. 필자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당신들 언제 필리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고 그들이 단합된 것을 눈으로 보았느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근거도 없고 사실도 아닌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19대 총선에서 여당이 이자스민을 비례대표로 공천한 것은 당시 한국정부가 다문화에 지원한 예산이 연간 2,800억원이 배경이었다. 천문학 숫자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지원한 예산은 서민 한 사람의 연봉의 반밖에 안 되는 1,200만원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또 여당의 입장에서 천문학적인 정부예산을 퍼부으니 당연히 이를 대변할 국회의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자스민이 공천 받은 것이지 단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방인’ 대표를 국회에 입성시키려면 명분이 필요한데 이자스민은 명분이 있었던데 비해 조선족출신 비례대표 공천은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4년 후 지금에 와서 조선족출신을 비례대표로 공천하는 것이 전혀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숫자적으로 70만 명이니 정부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고도 많다. 따라서 국회에 한 명쯤 입성하여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만 정치는 단순히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의 논리로 움직일 수도 있고 국민을 설득시킬 확실한 명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떠한 방식을 떠나 조선족출신 비례대표를 공천했다가 내국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면 당 차원에서 믿지는 장사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 공천을 받으려면 가만히 앉아서 되는 일이 아니다. 피동적으로 기다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한국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것처럼 60여개 단체가 뭉치고 있다는 움직임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실제로 뭉치지도 않고 또 뭉칠 수도 없다). 또 더욱이 한국정치권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로 중시하는 일부 조직들은 마치 4.13총선용으로 존재하는 듯이 한국정치권에 비취지고 한국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은 곤란하다. 00후보를 지지하고 그 대가를 바라는 식의 조직은 더욱 곤란하다. 조선족출신 비례대표는 이런 임시적이고 단기적인 눈앞의 이익을 쫓는 움직임에 의해 공천되는 것이 아니다. 능동적인 움직임은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힘의 형성은 단순히 숫자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영향력이 있는 조선족사회 단체장들과 엘리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왜 조선족출신국회의원이 필요한지? 국회에 입성하면 무엇을 대변할 것인지? 재한조선족사회 현안이 무엇이고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재한조선족사회 중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충분히 논의하고 연구를 거쳐 문자화 해 갖고 여당과 야당을 찾아다니며 설득 작업을 발이 닿도록 해야 한다. 한편 재한조선족사회에 국회의원이 될 자격을 갖춘 인물이 있는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국회의원 자격 기준에 대해 정해진 것은 없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역사문화를 비롯해 다방면 지식수준을 갖춰야하고, 도덕적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일정한 자금력도 있어야 하고 재한조선족사회발전과 한국사회에 기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언변능력도 있어야 하고 리더십도 있어야 하고······ 등등,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감각이다. 정치란 ‘ㅈ'자도 모르는 조선족이 국회의원이 된다면 재앙이 될 수 있다. 정치 감각을 익히려면 좋기는 구의원, 시의원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는 것이 자산이 될 수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 입성하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초등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사람이 대학생이 되는 꼴이 되면 의정활동을 제대로 못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동네망신만 남기게 될 것이다. 혹자는 한국문화에 서툰 이자스민도 국회의원을 맡고 있는데 조선족이 못해내겠는가고 반문할 수 있는데 사실 한국인은 외국인에 비해 동족인 조선족에 대해 모든 면에서 기대치가 훨씬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조선족은 다른 외국인에 비하지 말고 스스로 자질제고에 힘써야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객관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철저한 준비 과정이 없이 가령 운이 좋게 비례대표가 된다한들 안 되기만도 못하다. 어떤 루트의 라인을 타서 자격이 되지 않는 속이 텅 빈 00가 비례대표로 공천되면(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나 100% 배제할 수는 없다) 조선족 수준과 자질이 도마 위에 올라 여론의 물매를 맞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 한 사람의 수준과 자질이 전체 조선족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동네 망신만 남길 것이고 추후 총선에선 비례대표는 더는 바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사회를 대변하는 일군인 비례대표를 바라겠으면 조직적인 준비도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후보가 되려는 사람들도 자신의 자격을 스스로 검증하고 또 객관적인 검증도 거치고 나서 철저한 준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족 국회의원 얘기는 천방야담으로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331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댓글:  조회:6558  추천:23  2016-01-02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우리 조선족역사가 각 가문의 이주시간이 보편적으로 100년도 채 되지 않지만 1세대·2세대들의 뼈를 묻은 정든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조선족농촌마을이 개혁개방의 거센 파도에 의해 농민들이 뿔뿔이 도시로 해외로 진출하는 바람에 해체되고 있다. 조선인1세대들이 만주에 와서 피땀으로 토지를 개간하고 삶의 터전을 이뤄놓았던 고향이 사라져가고 있으니 매우 안타깝고 따라서 공동체 해체위기이니 뭐니 하면서 대서특필하고 떠들고 있지만 이농에 따른 농촌의 황폐는 새로운 경제시대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젠 고향이란 개념과 고향에 대한 의식 및 관념을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향은 농경문화의 산물 고향이란 자신이 태어난 곳, 혹은 조상이 살던 곳을 의미하며 과거 전통사회에서 90%이상 사람들이 농경에 종사해왔기 때문에 고향은 흔히 농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전통문화 맥락에서 하는 말). 고향의 다른 표현인 고구(故丘), 고리(故里), 고산(故山), 고원(故園), 구리(舊里), 모향(母鄕), 전리(田里), 향관(鄕關), 향리(鄕里) 등등의 어휘가 시골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고향은 곧 농촌을 의미하고 농촌은 곧 우리 선조들의, 아니 불과 30년 전의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다. 유목문화의 특징이 이동이라면 농경문화의 특징은 정착이다. 전통사회에서 절대다수 사람들은 세세대대로 한곳에서 정착하여 살아왔다. 농촌마을문화는 아침에 본 사람 점심에 만나고 점심에 만났던 사람 저녁에 또 마주치고 오늘 본 사람 내일 또 부딪힌다. 매일 반복되는 이와 같은 삶 속에서 자연스레 마을 구성원들 사이 서로 유대감이 강해진다.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마을문화는 서로 한우물의 물을 마시고, 농번기에는 서로 일을 돕고, 색다른 먹을 것이 생기면 서로 나눠 먹고, 서로 허물없이 마실 다니고, 누구네 집 두지에 쌀 얼마 있고를 알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등 정(情)의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한반도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 지리적인 환경특징 때문에 우리민족은 지구촌에서 정의 문화가 가장 발달되었고 따라서 고향문화가 가장 발달되었으며 가장 끈끈해졌다. 한국전통노래가사에 고향이란 어휘가 매우 많이 등장하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우리는 고향을 말할 때 흔히 정든 고향이라고 표현한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된 고향은 정이 많아 살맛이 나지만 농사일이 그 어느 일 보다 고되다. 일의 고달픔도 심각하지만 주나라 이래 3천년 동안 백성이 농사일에 종사하여 부자가 된 사례가 가뭄에 콩 나 듯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일도 고달프고 게다가 가난하고, 이것이 우리 전통농촌의 현실이었다. 현대문화에서는 都와 市, 혹은 城과 市를 하나로 묶어 都市 혹은 城市라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市는 都 혹은 城과 鄕 사이에 설치하여 시골농산품을 도시에 판매하는 장소였다. 都와 城은 고귀하고 鄕은 비천하고 시는 잡배들이 모이는 곳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전통사회에서 士農工商 신분서열문화가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왔으나 예로부터 농부가 대접받아 본 역사는 없다. 농촌현실이 이러했기 때문에 농촌을 벗어나면 출세했다고 온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먼 전통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개혁개방 전까지 도시진출이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에 농촌미녀들이 5전짜리 공인(노동자)이라도 도시총각한테 시집 갈수만 있다면 역시 온 마을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공부하여 농촌을 벗어나든, 군대 갔다가 도시에 진출하든, 병신 같은 도시총각한테 시집가든 듣기 좋게 말하면 출세였고 나쁘게 말하면 고향을 버리는 행위였다. 바꿔 말하자면 고향을 버려야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왜 고향을 그리는가? 인간은 그토록 고향을 버리기 위해 발버둥 치고는 돌아서서 고향을 그리는 간사함이 강하다. 인간이 고향을 그리는 것은 추억 때문이다. 어릴 적 먹던 음식, 어릴 적 다니던 유치원과 학교 모두 추억의 대상이다. 임어당은 “애국주의란 듣기엔 거창하지만 따지고 보면 개개인이 어릴 적 먹던 음식의 기호를 지켜내려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도시에 진출했거나 특히 외국에 나가 있으면 어릴 적 먹던 음식이 더 그리워난다.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은 살고 있는 집이 한국 집이냐, 중국집이냐 의식하지 않고 생활한다. 옷도 굳이 한국복장이냐, 중국옷이냐를 의식하지 않고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먹는 것만은 다르다. 한국에 오래 있어도 중국음식이 생각나고 조선족밀집지역 사무실에 근무하는 조선족은 매일 점심 거의 중국음식점에 다닌다. 저녁 회식도 기본상 중국음식점을 찾는다. 중국개혁개방 전까지 도시에 진출했던 사람이 가끔 고향에 가면 고향을 떠날 때 살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지 않고 있어 반갑게 맞아준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의 음식대접을 받는데 어릴 적 먹었던 음식 맛이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진짜 고향을 그리는 멋이고 맛이다. 그런데 요즘은 고향에 가면 얼굴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없고 타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 혹은 한족들이 이주해 와서 고향을 찾아간 사람은 매우 생경하다. 반갑게 맞아줄 사람도 없고 맛있는 음식대접은 먼 옛말이 되어버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향에 갈 멋이 없다. 한국 실향민들이 아직도 고향을 몹시 그리는데 그들은 고향을 갈 수 없기 때문에 꿈의 고향으로 남아 있어 더욱이 사무치게 그리게 되지만 조선족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고향에 가면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고 남은 것은 허탈한 한숨뿐이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확 사라져버리고 만다. 필자는 용정시 동불사 요구촌 출신인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및 삼촌들의 묘가 있어 가끔 가는데 예전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이집 저집 음식을 권하여 고향 맛이 났었는데 요즘은 청명에 보토(補土)하고 추석에 벌초하려고 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삽을 빌기가 힘들고 낫을 얻기가 어려워 연길에서 갖춰갖고 가야하는 상황이다 보니 ‘고향’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20·30대 조선족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1990년대 초반 한국인관광객이 백두산투어에 나섰을 때 가이드가 전부 조선족이었다. 한국인관광객들이 같은 핏줄 젊은이들을 만나 몹시 반가워했고 흔히 “고향이 어딘가?”고 물었다. ‘왕청’, ‘화룡’이라고 대답하면 한국인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들어보지 못했던 지명이기 때문이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면 연길에서 얼마 가고 어떤 방향이라고 말하면 그때서야 알아차리고 “아니 할아버지 고향 어딘가?”라고 다시 재차 묻는다. 한반도 조상의 뿌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질문은 아직도 농경문화의 산물인 고향의식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조선족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태어난 곳이 고향인 줄 로 만 알고 조상고향이 곧 나의 고향이라는 의식이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 고향을 물으면 다수가 모른다. 개혁개방 전까지 도시 아이들이 방학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시골할아버지 집 혹은 시골외갓집에 가서 방학을 보냈다. 도시에서 태어난 이들 세대까지는 조상고향의식이 있었는데 나의 딸애가 소학교 다닐 때 방학에 시골할아버지 집에 가라면 죽어라 가지 않았다. 아무리 어떻게 달래도 가지 않았다. 나의 딸애 세대 조선족젊은이들에게 조상고향이라는 개념이 아예 머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딸애가 연길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삭막한 도시생활이 과연 그들에게 전통고향의 의미가 존재할까? 이 세대들은 기껏해야 타도시 사람들이 연길 흉을 보면 화날 정도이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재한조선족들 앞에서 중국 흉을 보면 화내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리고 중국 내 타성이거나 해외에 출국해 있는 조선족들은 이젠 어디가 살기 편하면 그곳이 곧 ‘고향’이란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다.   고향을 버려야 잘 살 수 있다. 과거 고향을 버리는 사람이 출세였고 모두 농민에 비해 생활이 윤택했던 건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세월 도시진출이 어렵다 보니 고향을 버리고 싶어도 버리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요즘은 고향을 버리는 행위가 매우 쉽다. 쉽다 못해 식은 죽 먹기이다. 도시에 진출해 짠지 팔아도 살 수 있고 자전거수리해도 먹고 살 수 있고 하다못해 인력거를 끌어도 생계는 유지할 수 있다. 아무 일 해도 농사일만 덜 고달프고 수입이 더 좋을 수 있다. 도시에 진출해 창업하면 금상첨화이고 해외에 출국하면 더욱 ‘출세’이다. 재한조선족 70만 중에 농촌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자식을 공부시키고 중국에 집 사놓고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을 ‘소강’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한국바람이 아니었다면 현재의 부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국바람에 자녀공부문제 어떻고, 이혼문제가 어떻고 하면서 만약 한국이 아니었다면 조선족사회가 잘 살 것처럼 심각하게 떠들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 만약 한국에 오지 않고 돈을 벌지 않았더라면 빈곤한 처지에서 자녀공부는 저절로 잘 될까? 돈이 없어도 부부가 여전히 이혼하지 않고 화목하게 가정을 잘 지킬 수 있을까?   농촌공동체는 사라져가고 있으나 조선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개혁개방 전까지 농촌공동체마을이 조선족전통문화의 근거지였다. 이 근거지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새로운 경제시대에 어쩔 수 없는 추세였다. 농촌을 떠나 중국 내 도시생활하거나 한국을 비롯해 해외에 출국해 있거나 하는 조선족들에게 농촌에 돌아가라고 호소하는 행위는 소귀에 경 읽기이다. 최근 중국에서 도시호구보다 농촌호구를 더 선호하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는 토지를 확보하여 예측불허의 미래에 보증수표를 만들어 놓으려는 목적일 뿐 정작 지금 농촌에 가서 농사지으라면 지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무리 농촌을 중시하고 혜택을 베풀어도 조선족공동체마을 해체는 막을 수 없는 추세이다. 일각에서는 전통조선족공동체마을해체를 조선족사회 실종과 등식화하고 있는데 글쎄 이런 결론은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까? 중국 내 도시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사회는 각종 협회와 동호회 및 이런저런 모임을 통해 조선족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게다가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는 한국인이 그만큼 많이 살고 있는 것이 정비례 되어 함께 하나의 새로운 문화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기타나라에 출국해 있는 조선족사회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공동체들은 조선족들로 하여금 나는 조선족이란 끈을 유지하게끔 만들고 있다. 나의 딸애가 대학 졸업하고 광주에서 취직하게 되어 아빠인 나는 은근히 한족남자를 신랑감으로 데려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걱정은 기우였다. 광주에도 조선족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연길총각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였다. 요 몇 년래 한국에 오는 조선족젊은이들 중 적지 않은 자가 우리말을 모른다. 안다 해도 매우 서툴다. 한족이나 다름없던 이들이 한국생활 수년을 거쳐 우리말뿐만 아니라 우리전통문화를 알아가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실례는 우리민족의 조상도 모르고 살아온 조선족이 다수였던 것이 한국생활 통해 조상을 알게 되었고 가문의 뿌리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부모가 한국에 있으니 어쩔 수 없어 한국에 오긴 하였으나 한국생활 수년을 거치고 나면 한국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부류는 중국에 있을 때는 90% 한족처럼 생활해 와서 무늬만 조선족일 뿐이었는데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점차 ‘조선족’으로 회복되어가고 있다. 위 사례들을 살펴보면 전통조선족공동체마을은 해체되어도 또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고 고국이란 끈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330    재한조선족은 노무일군이 아닌 이주민 댓글:  조회:5415  추천:17  2015-12-11
재한조선족은 노무일군이 아닌 이주민   재한조선족 노무일군의 형성과정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조선족 코리안드림의 붐이 일어났고 10년 동안 한국정부가 손 놓고 있었던 탓에 10만에 이르는 방대한 집단이 불법체류 신분으로 한국에서 머물면서 돈을 벌었다. 2002년부터 한국정부가 심각성을 느끼고 접수받기 시작하였고 2004년 고용허가제 실시, 2005년과 2006년 연속 두 차례 동포자진귀국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4만여 명의 불법체류자를 구제하였다. 2007년 3월 4일 방문취업제가 실시되기 이전에는 한국에 올 수 있는 입국루트가 매우 제한적이어서 가짜 비자가 살판 치게 되어 빚지고 와서 금방 불법체류로 전락되었다. 재한조선족1세대들은 빚 갚으려고 휴무도 없이 죽기내기로 일하였다. 재한조선족 불법체류자를 다른 말로 보기 좋게 부르면 노무일군이다(물론 노무일군이란 합법적 신분을 뜻하지만). 한국정부는 조선족이 같은 핏줄이라는 인식의 작용에 의해 할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낸 합법체류 방법이 곧 한국을 방문도 하고 한국에서 일해 돈을 벌라는 의미로 ‘방문취업비자(H-2)'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방문취업비자는 체류시간이 4년 10개월이다. 본래 5년인데 세계적으로 거주국에서 5년만 체류하면 귀화신청 할 수 있다는 룰이 있다. 한국정부는 이 법을 교묘하게 피하기 위해 3년 되면 외국인등록증을 반납하고 중국에 출국했다가 다시 재입국하면 1년 10개월 연장해 주었다. 방문취업비자는 체류시간을 제한하였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제한하였다. 즉 중국조선족과 러시아 및 CIS지역 고려인 합쳐 30만3천이란 쿼터제를 실시하였다. 이런저런 이유에 의해 숫자가 줄어들면 추첨의 방식으로 30만3천을 채운다. 이렇게 체류시간도 제한하고 숫자도 제한 있으니 그들의 신분은 분명히 노무일군이다.   노무일군으로부터 이주민으로 과도 그런데 방문취업비자가 4년 10개월 되면 한국정부는 나 몰라라 한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출국하였다가 일정유예기간(6개월) 주고 재입국이란 제도를 실시하여 또 합법체류로 한국에서 거주하게끔 만들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에 입국하여 불법체류로 있다가 구제받았고 재입국 여러 차례 거쳐 한국에서 합법으로 체류하고 있는 조선족이 10여 만에 이르는데 이들은 한국생활 10년이 넘는다. 10년이 넘는 이들은 앞으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 없이 한국에 정착하려고 한다. 과연 이들을 노무일군으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인가? 2008년부터 실시되기 시작한 재외동포비자(F-4)는 현재 수혜범위가 확대되어 20만에 이르는 조선족이 혜택 받고 있다. 재외동포비자는 3년에 한 번씩 별 조건 없이 연장수속을 밟으면 계속 체류할 수 있다. 이외 영주권자, 귀화자, 결혼이민자, 유학생 등 합쳐 전체 재한조선족 수는 69만5026명(2015. 1. 1. 통계)이다. 법무부에서 2016년 1분기 기술교육추첨 7,500명 선발하기로 기획하였는데 접수자가 4,910명밖에 되지 않아 추첨할 의미가 없어 통째로 패스시켰다. 이는 한국에 더 입국할 조선족 수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현재 이미 체류하고 있는 70만에 육박하고 있는 수는 앞으로 수년간은 이 수치로 유지될 것으로 짐작된다. 70만에 이르는 재한조선족사회를 살펴보면 이제는 노무일군의 시대를 벗어나 정착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부모가 한국에 있으니 중국에서 직장이 있어도 그만두고 한국에 오는 자녀가 증가하고 있다. 또 한국정부의 정책이 좋아져 중도입국자녀가 4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 자녀를 중국에 두고 학비와 생활비를 송금하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동창모임 열면 중국에서 보다 한국에서 더 모인다는 사실은 벌써 수년 전부터의 일이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처녀총각이 결혼하면 혼례식을 한국에 와서 올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한국에 더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명절이면 한국에 있는 부모가 중국에 가던 상황이 반전되어 자녀들이 명절이면 한국에 온다. 재한조선족사회문화생활도 풍부해졌다. 축구, 배구, 배드민턴, 민속장기 등 동호회 혹은 협회가 활성화되어 있고 요즘 제기차기 동호회가 수십 곳이나 되어 하나의 단체로 통합하고 있다. 산악회도 활발해져 등산을 즐기는 문화가 한국인 못지않다. 낚시문화도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문화가 활성화 되고 있는 것은 임시 수년간 돈 벌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노무일군이 아니고 이주민으로 정착의 움직임이 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직도 재한조선족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한테 앞으로 거취를 물으면 중국에 간다고 대답하지만 정작 가라고 하면 가지 않는다.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에 남기를 바란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입국한지 2년 내지 3년 되는 젊은 조선족, 혹은 중년 조선족들은 5년 만기 되면 때려죽여도 한국에 남지 않고 고향에 돌아간다고 큰소리 빵빵 치다가도 정작 5년이 될 즈음이면 한국에 계속 남을 방법을 찾느라 혈안이다. 6개월 재입국유예기간도 싫어 F-4비자를 취득하느라 분주하다.   재한조선족 다수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 왜 절대다수 재한조선족은 고향에 돌아가려 하지 않을까? 일각에서 지적하고 있는 재한조선족이 중국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H-2만기 되어 돌아가지 않으면 불법체류가 되기 때문에 고향에 갈 것이라 했는데 이 지적은 오류이다. H-2만기 되면 재입국, 또 재입국 제도를 실시하여 불법체류를 없앤다. 특히 한국정부는 조선족한국입국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있는 추세인데 만기되어 돌아가지 않으면 불법체류가 되기에 부득불 귀국할 것이란 지적은 현실을 떠난 얘기이다. 그리고 창지투(長吉圖) 어쩌고, 한중FTA 어쩌고 재한조선족한테 기회라고 하는데 돌아가 그 혜택에 의해 자아개발하거나 좋은 일자리 찾아 안정된 생활 보낼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또 이 두 가지 환경이 마련되면 거기서 창업하여 사장님이 되려는, 사장님이 될 수 있는 자가 많다고 하는데 이 지적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 재한조선족 다수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자녀공부뒷바라지 하고 가족에게 생활비 보내고 중국에 집 한 채 사놓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남은 돈이 있으면 한국에서 수천만원 전세 살면 괜찮은 편이다. 한국에서 노무로 번 돈으로 중국에서 창업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물론 소수자가 한국에서 번 돈을 갖고 중국에서 창업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다. 한편 창업은 돈만 있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머리가 잘 돌아야 하고 시세도 잘 볼 줄 알아야 하고 박력도 있어야 하고 인간관계처리도 잘해야 하고 등등의 소질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에 극소수자가 하는 일이다.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는 노랫말처럼 “창업은 아무나 하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다수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 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단순하게 경제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일자리가 보장된다고 해도 돌아가지 않는다. 왜? 일자리란 한 달 벌어서 2~3개월 살 수 있는 보장이 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한국에선 가능하다. 일자리 외에도 생활환경이 좋아야 한다. 사회치안문제, 공공기관 서비스문제, 기후문제, 주변 인간들의 소질문제 등등의 환경이 안정된 생활에 미치는 영향요인들이다. 재한조선족 다수는 이젠 단순하게 돈을 더 벌려고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고자 남는 것이다. 재한조선족다수가 한국에서 계속 체류하면 무시당하는 ‘하층영세민’으로 전락한다는 일각의 지적은 맞는 얘기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고향에 돌아가면 ‘양반’이 될 수 있는가? 고향에 돌아가도 ‘상놈’이요, 한국에 남아도 ‘상놈’일 바엔 이미 적응이 되어 있는 한국에 체류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2010년 5월 벌써 이란 글에서 그 이유를 여덟 가지로 짚었었다. 여기서 중복하지 않고 그 글에서 지적하지 못한 요소 하나를 추가로 말하려 한다. 인간의 몸에는 관성의 체계라는 것이 있다. 오른손으로 밥 먹고 글 쓰고 등등의 일상생활을 오른손으로 영위한다. 가령 오른손을 다쳐 왼손을 사용하게 되면 습관이 되지 않아 불편하다고 항의를 제출하고 반항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몸의 관성체계에 의해 우익, 좌익이란 어휘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기존의 체제를 답습하고 조금만 손을 보아 개량의 목적을 이루려는 집단을 우익이라 하고 기존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고 혁명을 일으키는 집단을 좌익이라 부른다. 아울러 우익은 보수요, 좌익은 진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조선족1세대들은 만주에 가서도 한반도문화를 오른손처럼 활용하다가 2세~3세 내려오면서 학교를 다니게 되고 중국문화 함량이 몸속에서 비중이 높아가게 되어 처음엔 어색하던 것(왼손)이 점차 오른손처럼 몸에 배이게 되어 오히려 오른손과 왼손이 바뀌어 적응하면서 살아왔다. 사과배처럼 조선반도문화도 있고 중국문화도 소유하고 있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한국인과 비록 같은 문화뿌리이지만 이중문화구조 때문에 갈등을 빚게 되었고 또 5년 넘어 10년 이상 살아오는 과정에 처음엔 낯설던 한국문화가 또 오른손처럼 자리잡아왔는데 또다시 중국에 가게 된다면 또다시 새로 적응해야 하는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몸의 관성체계가 파괴되는 것을 싫어한다. 이것이 재한조선족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주민으로 살아가려면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계속 정착하여 살아가려면 획기적인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재한조선족 다수가 노무일군을 벗어나 이주민생활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을 임시 거주하는, 잠시 스쳐지나가는 둥지쯤으로 여기고 있어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이행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주민으로 살아가려면 세금납부를 성실하게 이행해야 하지만 재한조선족사회 다수는 세금납부의식이 매우 박약하다. 세금뿐만 아니라 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등 4대 보험에 대해 굉장히 소극적이다. 김00는 중국에 임시출국하면서 거소신고증(F-4)을 바치고 가겠다고 한다. 한국에 다시 올 생각이 없는가 물으니 발끈하며 “왜 안 오겠는가?” 화낸다. 다시 올 거면 왜 등록증을 반납하려고 하느냐?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7년간 낸 국민연금을 환급받으려고.” 한국국민연금법은 10년 혹은 120차례 납부하고 나이가 되면 혜택을 받는다. 그리고 조선족은 방문취업비자(H-2) 만기일이 되어 귀국하게 되면 돌려준다. 만약 H-2비자에서 F-4비자로 혹은 영주권으로 변경되면 처음부터 납부한 국민연금을 돌려주지 않고 누적계산 되고 나중에 120차례 차고 나이가 되면 혜택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조선족들의 책임 없는 의식이다. 즉 한국에서 계속 체류하겠다면서 국민연금도 환급받으려 하고, 뜻인즉 좋은 일은 다 챙기고 책임과 의무는 전혀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주권 신청하려면 2천만 원의 재산도 있어야 하고 일정 수입도 보장되어야 하고, 소득세납부증명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법이 바뀌었다. 일부조선족들은 “돈 있으면 왜 한국 오겠는가?”면서 제쪽에서 한국정부에 불만 갖고 화낸다. 고객 중에 같은 조선족으로서 듣다못해 “아저씨 돈을 벌면 되고 정부에서 하란대로 하는 것이 순리이지. 무슨 불만이요. 정 싫으면 중국에 돌아가면 되지. 누가 한국에 오라고 했어요?”라고 면박 준다. 한국사회가 재한조선족사회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을 바라면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329    윤동주의 정체성은 댓글:  조회:5984  추천:5  2015-09-01
윤동주의 정체성은?   윤동주는 한국문인사회에서 굉장히 존경받고 숭앙받는 인물인 것 같다. 수년 전 어느 한 번 술자리에서 한국문인 한 분이 “윤동주는 한국이 낳은 걸출한 시인이며 정말 대한민국의 자랑이다.”라고 가슴에 힘주어 역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에 대해 젬병이다. 평생 시 한 구절 써 본 적도 없고 남의 시 한 편 제대로 읽어본 기억도 없다. 당연히 윤동주의 시 한 구절 읽어본 적은 없지만 윤동주가 만주 간도 명동에서 태어났고 일본 후쿠오카에서 이립의 나이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상식쯤은 알고 있었다. 한국 분의 말씀에 나는 심술궂게 한 마디 던졌다. “만약 윤동주가 일찍 사망하지 않고 중국에서 우리처럼 조선족으로 살고 있었다면 당신네 대한민국에서 지금처럼 그를 위대한 인물로 받들고 숭앙할 것인가?” 한국 분은 나의 홍두깨 같은 질문에 도발한다고 발끈했다. 나는 도발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니 답해보라고 졸랐다. 한국 분은 아마 갑작스런 한 방에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대답을 머뭇거리고 마는 것이었다. 동석했던 조선족 문인 몇 명이 질문이 참으로 현실적인 문제제기라고 나의 행위에 힘을 실어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 이국 타향에서 ‘디아스포라’신분으로 살아가는 같은 민족은 거주국에 관계없이 정체성에 대한 같은 문제의식을 품고 살아가는 듯하다. 최근 나는 나와 똑 같은 윤동주에 대한 정체성 문제의식을 제기한 재일조선인2세 서경식 작가를 그의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에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란 조직이 있는데 8년째 독서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민변독서모임 맴버 중에 검찰총장 후보, 대법관후보에 이름을 올렸던 분도 있고 법무부 요직에 종사했던 분들도 있다. 그들의 독서 폭이 매우 넓고 수준이 상당하다. 심지어 , 같은 어려운 서적을 독서모임 지정토론 책으로 선정할 정도로 굉장한 수준을 갖췄다. 지난 7월 13일 나는 이 민변독서모임 초청에 의해 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게 되었고 그 후부터 보름에 한 번씩 있게 될 독서모임에 정기회원으로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8월 31일 저녁 독서모임에서 서경식 저 이란 책을 토론하게 되었다. 저자 서경식은 1951년 일본에서 재일조선인2세로 태어났고 일본어로 문필활동을 한다. 그의 일본어로 된 작품이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것이 13편 된다. 책 제목이 이어서 나는 내용이 시에 관련된 전문지식이거나 상식을 담은 책인 줄 알고 거부감이 들었다. 민변독서모임 맴버들이 전문 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하필이면, 그런데 나의 예측은 빗나갔다. 저자는 일본에서 재일교포2세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신분의 고달픔, 고국 한국과의 정체성 정립문제 등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도 던져주는 질문이 많고 해법을 적지 않게 찾게 되는 훌륭한 저서이다. 저자 서경식은 윤동주의 사례를 들어 고국 한국이 안고 있는 좁은 울타리 의식을 비판한다. 아래에 중에 한국문학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라는 소제목의 일부내용을 발췌하니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께 맡긴다. 문학이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행위인 이상, 우선적으로 그것이 언어라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유통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라는 공간인 경우, 국가공용어(국어)라는 장벽을 의미하는데, 그 장벽은 교육이나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강화된다. 이 장벽 안에서는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소비자에 의해 구성되는 시장이 존재하고, 문학 행위의 대부분은 이러한 시장을 무시하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곳에서 자본이 문학을 간섭하거나 지배하는 일이 생겨난다. 문학에는 이 장벽을 뛰어넘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이 장벽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만약 이와 같은 정의가 틀리지 않는다면 ‘한국문학’이라는 용어는 ‘민족문학’이라는 용어보다도 협소한 개념을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일제 강점기 즉 대한민국 성립 이전의 문학은 ‘한국문학’일까? 그것이 현재 한국에 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유고 작가나 월북 작가, 디아스포라(이산민) 작가는 거기 포함되는 걸까? 혹은 재일조선인 허남기의 시나 김석범의 소설은 ‘한국문학’인가? 아니면 ‘일본문학’인가? 아니 애당초 이 둘 중의 하나로 분류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시인 윤동주는 만주 간도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후쿠오카에서 옥사했다. 만약 그가 해방 후까지 살아남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생활했다면 그의 작품은 ‘한국문학’에 속할까? ‘중국문학’에 속할까? 만약 “당연히 한국문학이지”라고 대답한다면 현재 연변에서 활동 중인 조선인 문학가들의 작품은 모두 ‘한국문학’에 속하는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이미 ‘한국문학’이라는 호칭에 모순과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분단과 이산이라는 현실을 살고 있는 조선민족의 문학을 ‘한국’이라는 한 국가에 한정 지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윤동주가 한국에서 많이 읽힌다는 의미에서는 ‘한국문학’이지만 동시에 ‘중국문학’이기도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학’이기도 하며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본문학’일 수조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윤동주의 작품이 근대 이후 경험한 식민지 지배, 분단, 이산이라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무관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고뇌와 동경을 잘 표현했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한국’이라는 국가의 틀을 넘어선 조선민족의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민족문학’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요컨대 나는 근대 이후 조선민족의 경험에 뿌리 내린 문학을 널리 시야에 담는다는 의미에서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여기까지 책 중의 말). 인간은 흔히 자기 코도 닦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코를 닦으려 든다는 속담이 있다. 나를 두고 생겨난 말 같아 얼굴이 뜨거워난다. 자기 정체성도 정립하지 못하면서 윤동주를 거론하는 것은 스스로도 매우 웃기는 일이다. 3년 전 일이다. 나와 가까운 한 문인이 나 모르게 연변작가협회 회원가입신청을 얘기해 놓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대답했더니 가운데서 좋은 일 하느라 한 것이니 서류 작성해 보내란다. 얼마 후 가입이 “NO” 됐다는 소식이 왔다. 이유인즉슨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되려면 조선말 4대문학잡지에 수필이나 단편소설 15편 이상 발표한 경력이 있어야 되는데 김아무개는 연변에서 문필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장편역사소설 발표하는 등 연변작가협회와는 관련이 없기에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소식을 접하고 나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고 연변작가협회 책임자 중 한 분을 한국에서 만나 그쪽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나의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그리고 그 후 이 일을 잊고 있다가 요즘 서경식의 을 읽다보니 나의 정체는 무엇일까? 즉 “나는 어디에 속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저도 모르게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답은 연변사람이지만 연변에 속하지 못하고 있고 그렇다고 한국에 속하고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디아스포라신분이다. 현재 최선의 선택은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속하고 있는지를 고민하지 말고 오로지 나의 실력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8월 28일 오후 서울시 외국인다문화과 공무원 대상으로 라는 주제로 특강을 진행하였다. 이 특강은 구로구, 영등포구, 금천구, 관악구 등 조선족밀집지역 구청과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 공무원 대상으로 ‘중국동포이해강의’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기로 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된 첫 강의였다. 나는 비록 연변문단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니 속하지 못하지만 조선족이란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 학계와 공무원 사회 및 민변 같은 엘리트집단, 병원을 비롯한 기업을 대상으로 조선족역사문화를 알리는 강의를 많이 해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해나아 갈 타산이다. 이와 같은 의미 있는 활동으로 나의 정체성을 위로하기로 맘먹고 있다.
328    중국동포, 한국시민 아니지만 댓글:  조회:5389  추천:7  2015-06-06
중국동포, 한국시민 아니지만   지난 22일 저녁 19시 가리봉동에 위치한 진달래식당 웨딩홀에서 서울시가 후원하고 재한동포연합총회가 주최한 가 첫 개강을 맞이하였다. 필자는 영광스럽게 라는 주제로 개강 특강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타이틀이 맘에 걸렸다. 즉 중국동포는 대한민국 시민이 아닌데 왜 중국동포와 시민을 한데 묶어 타이틀을 정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네이버 선생의 해석에 따르면 시민은 민주 사회의 구성원으로 권력을 창출하는 주체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공공 정책 결정에 참여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시민이란 정치참여의 일원이어야 하며 쉽게 말하자면 투표권이 있는 도시거주자를 뜻한다. 중국동포는 70만 되는데 그 중 10만쯤 한국국적을 취득했거나 회복한 조선족출신들은 투표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민이 맞다. 그 나머지 60만은 투표권이 없어 한국정치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중국동포는 국적취득자 제외하고 등록증에 한글이름도 아닌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고 30만3천 되는 H-2소지자들은 외국인등록증을 부여받고 있다. 정서상 시민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시민의 개념을 투표권 하나를 갖고 전부를 말할 수는 없다. 시민이란 그 도시에서 사는 사람을 일컬을 수도 있다. 즉 그 도시에 살아가려면 책임과 의무를 다 하면서 생활해야 한다. 세금납부는 물론이고 쓰레기처리와 횡단보도 지키기 및 공공장소에서 떠들지 않는 등 한국사회 공공질서를 지키며 살아야 하고 대한민국의 제반 법규도 잘 준수하고 대한민국국민에게 미안한 일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이쯤하면 시민의 자격으로 생활한다는 의식을 갖고 한국사회에 융합되어 공존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공공질서도 잘 지키지 않고 입만 벌리면 한국과 한국 사람을 욕하고 등 행위로 살아간다면 시민의 자격을 운운할 수 없는 것은 차치하고 무시와 기시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무시당하는 이유가 곧바로 낙후한 농경문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울과 같은 현대화 도시문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 변변히 해보지 못한 다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직장생활하려니 적응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며 이로하여 한국인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재한조선족은 몸은 현대화 도시에 살고 있지만 머리는 여전히 육칠십년대 중국농촌사람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도시시민으로 살아가는데 괴리가 큰 것이 사실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수 재한조선족은 서울과 같은 현대화 도시생활이 어쩌면 머슴이 비단옷을 빌려 입은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환경에서 억지로 살아가고 있어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 다수는 현대화 도시시민이 되기엔 아직 먼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의식전환 노력이 없이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재한조선족사회는 희망이 없다. 너무 야박한 판단이라고 비판할 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어디까지나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말이 나온 김에 시민이란 용어의 유래를 알아보기로 하자. 시민이란 용어는 중국문화권에는 없었다. 19세기 일본이 중국과 조선보다 발 빠르게 서양을 따라 배우면서 많은 서양의 어휘를 한자어로 번역하였는데, 예하면 과학, 화학, 물리, 지식인, 시민 등등이다. 일본인이 서양어휘를 한자어로 번역해낸 것이 중국과 조선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일본인이 서양의 어휘를 한자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그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리(物理)라는 어휘는 먼저 일본어 한자로 ‘궁리학(窮理學)’으로 번역되었는데 궁리는 일본어로 きゅぅり라 발음하는데 야채 오이도 きゅぅり로 발음되어 잘못하면 오이학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 다시 연구 끝에 물체의 운동원리라는 의미를 요약하여 물리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시민이란 용어가 서양의 산물임에 틀림없는데 그 유래를 살펴보자. 고대 그리스(希臘)는 민주화가 잘 되어 있었다. 물론 현시대의 서양의회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민주화가 활성화된 사회였다. 그런데 당시 민주화는 시민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시민에는 외국인, 여자, 노예가 배제되어있었다. 역사적으로 여자가 시민이 된 것은 1920년 미국 대선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여자가 시민이 된 시간을 따져보면 기껏해야 100년의 역사도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현대사회에 노예라는 신분이 사라졌지만 외국인은 점차 더 늘어나는 추세인데 아직도 나라마다 외국인을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찬란했던 문화는 기원 324년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함에 따라 서구는 신이 통치하는 1천년의 암흑의 세계에로 빠져든다. 그 시기 신의 노예만 있을 뿐 시민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유럽에서 시민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789년 프랑스혁명이 계기였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국이었다. 경제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졌으나 경제발전에 기여한 중산층 이상 부르조아들은 목소리를 낼 힘이 없었다. 이들이 혁명을 주도하여 시민역량을 강화시켰다. 이때부터 서구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서구는 시민사회가 민주화를 주도할 만큼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시민이란 개념이 없었고 대신 공민이란 어휘를 사용하였다. 공민이란 개념의 등장은 제국의 시작에서 비롯된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함에 따라 천하의 모든 것은 공공의 것인데 이것을 역사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 부른다. 따라서 모든 귀족세습제를 타파하고 관원대리제도를 실시하였고 나라의 것은 공가의 것,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공무원, 국가의 공공문서를 공문(公文), 나라에서 닦은 도로는 공로, 나라의 구성원인 백성은 공민 등등의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공민이 아니라 황제의 신민이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시(市)’란 개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중국은 성(城)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하다는 사상이 뿌리 깊었다. 북경을 말하자면 가장 중심은 궁성(宮城), 궁성을 둘러싸는 황성(皇城), 황성 외곽이 바로 경성(京城)이다. 성 안에 사람들이 곡식을 먹어야 하고 야채도 먹어야 하며 과일도 먹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고귀한 성 안의 어르신들이 먼 시골에 가서 직접 구매해 올 수가 없어 시골 사람들이 성 가까이에 시를 펼쳐놓고 매매가 이뤄졌던 것이다. 후에 성 안의 인구가 부단히 증가함에 따라 성과 시는 하나가 되어 성시라 불렀다. 시의 탄생은 이렇게 생겨났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도시를 성시라 부른다. 한국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차별을 도농차별이라 표현하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성향차별이라 말한다. 성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하다는 사상이 뿌리 깊기 때문에 중국역사에서는 시민이란 어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본문화가 중국에 수입되고 중국도 민주혁명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현대화시기에 시민이란 어휘를 사용하긴 하지만 아직도 중국에서는 유렵처럼 한국처럼 시민문화가 발달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북경사람들이 자신을 首都人라는 우월의식은 있으나 기타 지방 사람들과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유독 상해 사람을 굉장히 무시한다. 이유는 북경은 전통적인 城이기 때문에 고귀한데 반해 상해는 순수한 市이기 때문에 자기이익만 따지는 소시민의식이 팽배한 집단이란 것이다. 공자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북경은 전통적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군자의 세상이지만 상해는 사사로운 이익을 따지는 장사치 소인배 세상이라는 것이다. 상해사람도 무든 기타지역 사람들을 鄕下人이라고 깔보고 업신여기지만 유독 북경사람만은 무시하지 못하고 비교적 客氣한 태도로 대한다.    
327    재한조선족사회 완장바람 댓글:  조회:6678  추천:4  2015-02-25
재한조선족사회 완장바람   완장이란 신분이나 지위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팔에 두르는 표장(標章)이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완장을 흔히 권력이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완장을 찬 사람들은 개 잡은 포수마냥 무소불위 식으로 으스댄다. 안내원은 특정장소에서 질서유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완장을 차는데 일단 완장을 차게 되면 그 장소에서는 갑의 횡포를 부리려고 든다.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넘어지게 생긴 허약한 녀석일지라도 반장 완장만 찼다 하면 백팔십도로 달라져서 으레 남들을 호령하는가 하면, 머리가 텅 비어 있는 자들이 완장을 차면 민폐가 심각해진다. 완장 하면 떠오르는 것이 곧바로 중국의 홍위병일 것이다. 홍위병은 붉은 정권의 수호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혁명을 파괴로 이해하고 사람을 때려죽이고 문물을 때려 부수는 등 황하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북경 사합원(四合院 : 장정간부들이 모여 살던 곳)의 어린 계집애들이 여성홍위병 조직을 결집하여 혁명 일선에 앞장서 설치면서 허리에 손을 잡고 입만 벌리면 “제기랄” 질러대더니 여자다운 맛을 다 잃어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이상한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이 북경에서 출범한 여성홍위병 조직이 전국에 전파되어 황하대륙의 여성들이 매력을 상실한 이상한 여인으로 변해 벌렸다. 완장이란 이렇게 함부로 사용하게 되면 사회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게 된다. 재한조선족사회는 현재 각종 단체가 40여 개나 되니 완장이 넘쳐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이 가운데 5년 이상 꾸준하게 활동을 진행하고 탈이 없는 종합단체로는 조선족연합회, 한마음협회, 재한동포연합총회 등이고 전업단체로서 축구협회, 배구협회, 장기협회, 교사협회, 외국인자율방범대 정도이다. 나머지는 거의 모두가 최근 연간 생겨난 단체들이며 대다수는 별 활동도 없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회원들이 모여 먹고 노는 단체들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단체들이 이렇듯 많이 생겨난 원인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로서 단체 조직이 자유롭고 쉬우며 등록도 매우 간편하고 수월하다. 비영리 단체 세무서 등록은 땡전 한 푼 들지 않는다. 둘째 재한조선족사회는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엘리트집단이 사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나서 아무 단체를 만들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완장을 찰 수 있다. 완장을 찬다는 것은 책임감과 의무감이 있어야 한다. 책임감과 의무감은 주관적인 생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남들이 인정할리 만치 지식도 있어야 하고 도덕도 갖춰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 룰을 지키고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일부 재한조선족사회 완장을 찬 사람들 가운데 사회 룰조차 모르고 인간집단의 대인관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설쳐대니 조선족 이미지를 까먹고 재한조선족사회에 먹 칠 하고 있다. 자기가 만든 조직의 범주에서 조용히 활동하는 것은 괜찮지만 소질이 형편없는 사람이 괜히 나서 크게 설쳐대면 민폐를 끼치게 되며 한 마디로 “조선족은 요지경”이란 평가받기가 일쑤이다. 단체가 많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일부 완장을 찬 사람들이 잘못 설쳐대는 것이 문제이다. 재한조선족사회 단체 상황은 선진국은 더 들먹일 필요가 없고 중국에 있는 연해지역이나 대도시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단체들에 비해도 형편없는 수준에 처해 있는 것이 재한조선족사회 현주소이다. 중국 연해지역이나 대도시에 있는 조선족단체 완장을 찬 분들은 대학졸업생들이 많고 오너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엘리트 출신이 많다. 재한조선족사회 완장을 찬 사람치고 명문대는 고사하고 대학 문이 어디 어떻게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이니 지금의 현주소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계 4대성인 중 한 사람인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람마다 자신의 푼수를 알고 살라”는 명언을 남겼다. 재한조선족사회 완장을 찬 사람들도 자신의 푼수를 알고 설쳐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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