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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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민족은 왜 노인이 사망하면 돌아갔다고 하는가? 댓글:  조회:4939  추천:81  2007-10-02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3. 우리민족은 왜 노인이 사망하면 돌아갔다고 하는가?    김정룡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 법이다. 이는 인간이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섭리이다. 헌데 인간은 미래라는 의식이 생겨나서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두려워한다. 종교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종교가 생겨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해결할 것인가는 문제가 모든 종교가 탄생하게 된 가장 근본적이고 공통적인 요소’라고 한다.  유교문화에 ‘관혼상제(冠:성인식, 婚:결혼, 喪:상사, 祭:제사)’라는 4대 의례가 있는데, ‘관’과 ‘혼’은 인간이 살아 있을 때의 의례이고 ‘상’과 ‘제’는 인간이 죽은 후의 의례인바, 이는 유교문화가 인간의 죽음의 의미를 삶의 의미와 같은 비중으로 보았다는 증거이다. 유교문화를 주축으로 하는 한중일 3국에서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중시했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여러 모로 우회적이고 완곡한 어휘로 표현한다. 그중에 죽음을 돌아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며 특히 우리민족이 이 표현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민족은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는 말을 가장 즐겨 사용할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먼 옛날 우리선조들은 인간의 생명, 영혼, 생각 등 정신적인 것은 하늘의 기를 타고 났고, 인간의 육체는 땅기를 타고났다고 여겨왔다(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편에도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인간은 땅에서 왔기 때문에 죽으면 땅에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이 죽으면 자연에 회귀해야 한다는 것이 동양문화의 자연관이다.  왜 인간이 죽으면 반드시 땅에로 돌아가야 하는가?  둘째 생명의 순환 원리.  대지는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생명(만물)을 창조하고 탄생시킨다. 그런데 새로운 생명은 낡은 것들이 죽어 땅에서의 썩음에 의해 탄생된다. 나무 잎이 뿌리에로 돌아간다(낙엽귀근:落葉歸根)는 말의 뜻은 바로 나뭇잎이 죽어 뿌리에 돌아가 썩어야만 새로운 나뭇잎이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이다(인류는 이 원리에 의해 비료를 발견했음). 옛날 우리 선조들은 대지의 생산원리와 인간의 탄생원리를 같은 이치로 여겨왔다. 이 원리에 의하면 인간이 죽으면 땅에 묻혀 썩어야만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 곧바로 인간의 생명순환의 원리이다. 셋째 돌아간 곳은 대지의 자궁이다.  인간은 엄마의 자궁에서 잉태되고 태어난다. 엄마의 엄마 ······는 대지의 자궁에서 나왔다. 인간이 죽으면 엄마의 자궁에로, 대지의 자궁에로 돌아가야만이 후대가 번성해진다. 이러한 생명의 순환원리에 의해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는 표현은 땅에로 회귀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아무 땅에나 함부로 묻으면 잘 썩지 않아 생명의 순환이 잘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후대번식이 잘되지 않는다. 후대번식이 잘되지 않으면 그 가문이 망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죽은 사람을 묻을 곳, 즉 묘자리를 잘 골라야 한다.  풍수지리학에 의하면 묘자리는 바람을 잠재우고(장풍:藏風) 습기가 적당히 있어야한다(득수:得水). 이러한 묘자리를 명당이라 부른다. 명당이라 할수 있는 묘자리는 산꼭대기거나 허허벌판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산속의 여성의 성기를 닮은듯한 아늑한 곳이 곧 일등 묘자리로 꼽힌다.  우리민족이 아직도 주변국에 비해 화장(火葬)보다 토장(土葬)을 더 선호하고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땅에로 돌아가야 한다는 종교적 의식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5    한국인의 삐뚤어진 국제결혼관 (김정룡) 댓글:  조회:5516  추천:61  2007-10-01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1부 사례로 본 한국인-조선족 국제결혼실태분석-국적이 뭐길래? 2. 한국인의 삐뚤어진 국제결혼관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국은 조선조 500여 년을 통해 유교를, 본산지인 중국보다 아주 뼈속까지 스며들 정도로 받아들여, 유교중심의 전통국가로 되어버렸다. 유교문화는 여러모로 폭이 넓지만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곧 ‘씨’를 철저하고도 깨끗하게 만들려는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인의 전통 결혼관과 정조관은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깨끗했다.  이를테면 한국인은 본래 세상에서 가장 자민족끼리만의 결혼을 고집했고 한번 결혼하면 이혼불가, 재가불가가 전통이었고 바람피우는 자를 가장 파렴치한 인간으로 취급했었다.  이렇듯 고상하고 순결하고 깨끗했던 한국인의 결혼관과 정조관이 1990년대부터 국제결혼이 급격히 늘어나고 이혼율이 세계에서 2위를 차지하고 애인이 없는 사람은 바보로 취급될 정도로 성적문란이 심한, 등등 부정적인 면으로 많이 전환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한국인의 국제결혼이 급증하는 이유는 바깥세상에 눈을 돌리는 세계화 의식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주요하게는 경제적인 문제가 많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국제결혼에 나서는 한국인은 그 다수가 시골총각, 도시의 경제가 넉넉지 않는 노총각 혹은 여러 가지 여건이 여의치 않는 도시의 재혼자들이라는 사실이 충분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국제결혼에 나선 한국인 중 다수가 자신의 처지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내국인과의 혼인이 어려워 혼인대상자로 한국보다 경제가 낙후한 중국, 베트남, 몽골 등 나라의 여성들을 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부류에 속한 한국인 중에 외국여성을 데려다 잘 살아가고 있는 사례도 적지 않지만, 이와 반면에 아래와 같은 여러 가지 부작용도 많이 드러나고 있다.  우선 국제결혼은 내국인과의 결혼과 달리 서로간의 요해나 이해가 충분치 못한 상황에서 혼인을 서두르다 보니 애정이란 중요한 요소가 개입될 틈도 없이 ‘남녀’의 결합만 있을 뿐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자면 혼인소개소에서 미리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집단적으로 한 장소에서 선을 보고 물건을 고르듯 고르고는 당일에 여자의 부모를 만나고 당일 밤에 잠자리를 같이 하고 며칠 내에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마친다. 개별적인 소개에 의한 국제결혼도 역시 이와 같은 리듬으로 비슷하게 혼인이 추진된다. 여기서 지나친 비유이긴 하나 노신(魯迅)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마치 두 마리의 암컷과 수컷을 한 돼지우리에 처넣고 이제부터 니네는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과 패턴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벼락적인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이유는 한국 남성들은 무작정 여자를 데려와야 한다는 강박관념, 당지 여성들은 무작정 한국 땅을 밟고 보자는 의욕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부 부도덕한 자들은 혼인당사자들의 강박관념과 의욕을 이용하여 돈을 뜯어내려 하거나 돈을 들이지 않고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는 수단으로 삶고 있어 국제결혼은 사기성으로 변질된 사례도 적지 않다.  설사 진짜결혼에 임하는 한국 남성의 경우도 반드시 여자를 데려와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첫 만남에서부터 실제와 다르게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좋은 직장에 출근하고, 시골에 땅도 있고, 경제상에는 아무 걱정 없고 등등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늘여놓는 사례도 허다하다. 요해가 전무한 당지 여성들은 한국남성의 말에 대해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이 곧이 듣고 한국에 와보니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순간 속아왔다는 배신감부터 앞서면서 도망갈 생각을 갖게 된다.  설 아무개 여인(35세, 서란현)은 중국에서 첫선을 볼 때 한국 남자로부터 “서울의 모 대기업에 근무하고, 나의 명의로 된 큰집이 있고, 돈걱정은 전혀 안 해도 되고......”라는 말을 믿고 왔는데, 실제는 엉덩이를 겨우 들여놓을만한 쪽방 세집이었고 고정 직업도 없는 백수였다. 그녀는 속아왔다고 집을 나가려고 하니 남편은 그녀를 위장결혼이라고 몰아붙이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가령 첫선을 볼 때 한 말들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열심히 살려고 든다면 모를까, 조선족 여성과 결혼한 한국 남성중에 경제력이 부족하고 생활력이 모자라 부모형제들의 도움으로 장가가고 결혼생활을 일정기간 지탱하다가 돈줄이 끊기면 돈을 벌려고 들지 않고 마누라를 부려먹을 생각을 굴리다가 결국 혼인이 파탄나게 된다.  김아무개 여인(28세, 용정시)은 한국 남편이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짓만 하면서 장인 장모가 한국에 와서 번 돈마저 3천만 원이나 써버리고도 아예 갚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어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국제결혼을 한 일부 한국 남성들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우월감을 갖고 못사는 나라에서 온 여성들을 무시하거나, 마누라와 연령차이가 많거나 외모상 마누라보다 못할 경우 의처증이 심하고, 매달 생활비를 얼마간 준다던 약속을 깨버리거나,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에 시집오면 도망간다는 선입견 때문에 체류연장에 협조해주지 않거나, 2년이 넘었으나 국적취득을 방해하는 등 행위로 인하여 혼인이 파탄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아무개 여인(45세, 목릉시)은 2년 동안 한국 남편과 같이 살면서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이 곧 남편이 입만 벌리면 상욕을 하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김아무개 여인(31세, 오상시)은 한국에 와서 90일 동안 하다못해 동네 슈퍼가게마저 혼자서 다녀본 일이 없이 일단 집문을 나서면 늘 남편 혹은 시어머니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고 한다.  최아무개 여인(24세, 목단강)은 시집올 때 한국 남편으로부터 매달 70만원의 생활비를 보장받기로 했다. 허나 6개월이 지나도록 용돈 만원도 가져본 적이 없다. 매달 생리가 올 때면 시어머니에게 회보하고 ‘필수품’을 살 돈만 갖는다. 여성으로서 최저한도의 필수품마저 마음 놓고 살수 없는 것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장아무개 여인(30세, 산동성)은 한국 남편과 아이까지 낳고 4년이나 살았는데도 남편이 귀화신청에 협조해주지 않아 불법으로 체류하다가 300만원을 남편에게 주고 체류연장을 할 수 있었다.  모두어 말하자면 한국 남성들이 조선족 여성들을 무시하고 내심으로 대접을 안 해주는 것이 혼인이 파탄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에 시집온 이혼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편이 잘해준다면 왜 가출하고 굳이 도망 다니면서 불안하게 살려고 하겠어요.”  국제결혼이 이러한 비극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주요 이유가 바로 한국 남자의 여자를 데려오려는 강박관념과 조선족 여자의 코리안드림 의욕으로 혼인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이는 마치 기초가 없는 건물과도 같아 쉽게 깨지게 마련이다.                          
4    국적취득기회를 놓친 이혼여성들 댓글:  조회:4666  추천:57  2007-09-28
국적취득기회를 놓친 이혼여성들김정룡 재한칼럼니스트최근 몇 년 사이 한국정부는 조선족에 대해 여러모로 우대정책을 많이 실시해왔으며 따라서 조선족은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일부는 국적 혹은 영주권을 부여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 일례로서 2005년 9월 15일 이전에는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여성들이 한국인 배우자와 이혼할 경우 어느 쪽의 귀책사유(잘못)를 불문하고 무작정 본국에 돌아가야 했으나 그 후부터는 한국인 배우자의 귀책사유로 인해 이혼한다는 판결을 선고받으면 귀화허가신청 혹은 영주권허가신청을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한국정부의 우대정책을 모르고 있는 조선족결혼여성들이 많을뿐더러 설사 알고 있더라도 한국인 배우자와 이혼 시 의지가 약해 분명히 유리한 조건에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국적 혹은 영주권 취득기회를 놓치고 마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사례 1. 구럭도 잃고 게도 잃어 불법체류로 전락한 여성 용정시에서 온 김모 여인(28세)은 2005년 3월 처녀로 한국인 장모와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왔는데, 남편의 심한 폭력에 견디지 못해 지난 3월경 이혼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한 증거로서 상처 사진과 병원진단서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받은 고통의 대가로 위자료도 충분히 받아낼 수 있었다. 법적소송을 당한 남편은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그녀와 협의이혼을 하자고 제안했다. 만약 협의이혼을 하게 되면 그녀는 한국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때문에 끝까지 싸워 이겨야만 한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협의이혼하고 또 다른 한국인과 재혼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을 택하는 조선족여성들은 법적으로 싸워 이길 확률이 낮은 경우이다. 가령 승소의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 협의이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김모 여인의 경우 승소할 확률이 90%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혼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K한국남자와 재혼할 타산이었고 또 K남자는 그녀의 이혼이 아무렇게나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과 협의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K남자와 얼마간 지내보니 맘에 들지 않아 재혼이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지금 국적취득기회도 놓치고 재혼도 깨지고 구럭도 잃고 게도 잃어 현재 불법체류로 전락하고 말았다.
3    환갑 및 사주팔자란 말의 유래(김정룡) 댓글:  조회:6543  추천:200  2007-09-2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2. 환갑 및 사주팔자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 중 일 삼국에서는 사람의 나이가 60주세가 되면 환갑(회갑)년이라고 하는데,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백성들마저 이와 같은 풍속에 익숙해 있으나 정작 환갑이란 말이 도대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매우 드물 것이다. 환갑이라 하든 회갑이라 하든 ‘환(還)’과 ‘회(回)’는 모두 돌아온다는 뜻이다. 즉 환갑(회갑)이란 말은 ‘갑(甲)’이 돌아온다는 뜻이다. ‘갑(甲)’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갑(甲)’은 ‘갑자(甲子)’의 약칭이다. ‘갑자(甲子)’란 또 뭐냐?   전설에 의하면 5천전에 삼황오제 중 한 사람이였던 황제(黃帝)가 ‘갑자(甲子)’를 지어냈다고 한다. ‘갑자(甲子)’란 천간지지(天干地支:12가지라고도 함) 의 총칭이다. 그렇다면 왜 천간지지(12간지)를 ‘갑자(甲子)’라고 할까? 여기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먼저 천간지지(12간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를 천간이라 하고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畜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지지라 한다. 위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를 하나 하나 씩 순서대로 짝을 지어놓으면, 즉 ‘갑자’로부터 시작하여 ‘계해’로 끝나면 모두 60개가 되는데 이를 총칭하여 ‘갑자’라 한다.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무진  기사  경오  신미  임신  계유 갑술  을해  병자  정축  무인  기묘  경진  신사  임오  계미 갑신  을유  병술  정해  무자  기축  경인  신묘  임진  계사 갑오  을미  병신  정유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인  계묘 갑진  을사  병오  정미  무신  기유  경술  신해  임자  계축 갑인  을묘  병진  정사  무오  기미  경신  신유  임술  계해 (참고: 1984년이 갑자년이므로 독자들은 각자가 자신이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를 앞뒤를 쫏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가령 필자가 1958년 무술년에 태어났다면 60년이 지나 2018년이 되어서야 다시 무술년을 맞이하게 되며 2018년이 곧 나의 환갑년이 된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각자가 태어나고 맞이하는 환갑년의 명칭이 꼭 갑자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환무’ ‘환신’ 등 이런 식으로 부른다면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에 전부 통털어 ‘환갑’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를 순서대로 짝지어 놓은 것을 총칭하여 ‘갑자’라 부르는 데서 60주세가 되어 자신이 태어난 해의 ‘명칭’이 사람에 따라 다르더라도 통털어 환갑이라 말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부연해서 설명한다면, 첫째 12개 지지가 12가지 띠(자:쥐, 축:소, 인:범, 묘:토끼, 진:룡,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의 의미가 있고, 둘째 옛날에는 하루가 24시가 아닌 12시(자시: 밤 11~1, 축시: 1~3, 인시: 3~5, 묘시: 5~7, 진시: 7~9, 사시: 9~11, 오시: 11~1, 미시: 오후 1~3시, 신시: 3~5시, 유시: 5~7시, 술시: 7~9시, 해시: 9~11시)였는데, 이것도 12가지 지지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그다음 천간지지와 관련해서 사주팔자란 말의 유래에 관해 간단히 얘기해보자. 사주를 한자로 ‘四柱’라 적는데, 그 뜻인즉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年月日時)를 의미하며, 팔자를 한자로 ‘八字’라 쓰는데, 팔자는 말 그대로 여덟 글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여덟 글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에서 말한 60개의 ‘갑자’는 해(年)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월일시와도 연관되어 있다. 즉 가령 필자가 1958년 9월 17일 묘시(아침 5~7시 사이)에 태어났다면 해는 ‘무술’이고 월은 ‘경신’이고 일은 ‘신해’이고 시는 ‘을묘’라고 가정한다면, 이와 같이 태어난 연월일시(사주)에 각각 ‘갑자’가 두 글자 씩 붙어 4×2=8 여덟 글자가 되므로 ‘팔자(八字)’라 한다. 팔자가 좋다.’ ‘팔자가 사납다.’는 말은 사람이 태어날 때 사주에 각각 붙는 ‘갑자’가 음양오행학(陰陽五行學)에 근거하여 자연의 ‘기(氣)’를 면바로 받고 나면 팔자가 좋고, 거꾸로 자연의 기를 잘못 받고 나면 팔자가 사납다. 점쟁이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주팔자의 논리에 근거하여 운세점을 본다. 현시대 사람들은 사주팔자를 미신으로 보는 경향이 짙은데 반해, 우리 선조들은 수천년 동안 사주팔자를 미신으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적인 학문으로 여겨왔다. 세상에서 우리 민족만큼 아직도 사주팔자에 집착하는 민족은 드물 것이다. 그래서 사주팔자란 말의 유래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2    무너진 조선족사회 결혼관 (김정룡) 댓글:  조회:5588  추천:97  2007-09-23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1부 사례로 본 한국인-조선족 국제결혼실태분석-국적이 뭐길래? 1. 무너진 조선족사회 결혼관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국통계청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5년도 한국 남자와 외국 여자의 혼인은 총 31,180건으로 그중 중국 여성과의 혼인이 20,635건(66.2%)이며, 2005년도 한국 남성이 외국인 처와의 이혼은 2,444건으로 전년 1,611건에 비해 51.7% 증가하였고 그중 중국 여성과의 이혼이 1,431건(58.6%)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 여성은 그 절대다수가 조선족이며, 이 통계수치는 조선족 여성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수도 많고 이혼한 수도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 여성 중에 위장결혼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고 또 진짜결혼으로 왔으나 가출하여 이혼하게 될 여성까지 포함하면 정부가 통계한 한국인 배우자와 조선족 여성간의 9%의 이혼율보다 잠재적 이혼이 굉장히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에 “조선족 여자들이 한국에 시집오면 거개가 도망간다.” “조선족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라.”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족은 본래 중국이란 거대한 다민족 국가에서 살아오면서 개혁개방 전인 1970년대 말까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다 공산주의 금욕사상이 뿌리 깊어 결혼관과 정조관이 가장 보수적이였다. 그리하여 조선족 사회는 중국 내의 타민족에 비해 가장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조선족여성들은 가장 순결하고 ‘깨끗하다’는 호평이 자자했다.  그러던 조선족 사회가 개혁개방을 맞아, 특히 1992년 한중수교 이후 결혼관과 정조관은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일례로서 이혼한 조선족 여성은 물론이고 남편과의 생활에서 자그마한 마찰이 생겨도 재빨리 이혼정리하고 한국인과의 국제결혼으로 코리안드림에 나섰다. 더욱이 멀쩡하게 잘살던 부부가 부인이 한국에 오기 위해 가짜이혼하고 위장결혼으로 한국행에 가세한 수도 적지 않다.  조선족 여성들이 앞다투어 결혼으로 한국에 오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유형 1.> 한국인과 결혼하면 한국행이 쉽다.  김아무개 여인(연길시)은 한국에 오려고 수차례 이리저리 수속을 접수시켰으나 ‘퇴자’를 맞고 돈만 날렸었는데 남편과 가짜이혼하고 한국인과의 결혼수속으로 한국행을 이루었다.  <유형 2.> 한국입국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든다.  장아무개 여인(안도현 )은 한국에 오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지만 수속비를 마련할 돈이 없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역시 남편과 이혼하고 15년 연상인 한국인과 결혼하여 전혀 돈을 들이지 않고 한국에 올 수 있게 되었다. <유형 3.> 한국인의 경제적인 덕을 보기 위해서.  한아무개 여인(오상시 )은 한국에 온지 7년이나 되는데 여태껏 일을 하지 않고도 해마다 중국에 보낸 돈이 천만원이 된다고 한다. 허나 그녀의 걱정은 남편이 다른 애인을 사귀고 남편의 자식들이 새엄마를 못마땅하게 여겨 언제 쫓겨날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결국 그녀도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다.  또 정아무개 여인(가목사)은 남편이 번 돈으로 가정생활을 유지하고 자기가 버는 돈은 몽땅 중국에 송금하는데 2년반 동안 4천만원을 챙겼다. 그녀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든 무슨 불쾌한 일이 있든 참고 견디면서 돈을 착실히 벌고 또 이미 국적취득을 신청해 놓았는데 일단 국적을 취득하면 남편과 이혼할 타산이다.  <유형 4.> ‘아들만 둔 집은 망하고 딸을 둔 집은 부자가 된다.’ 딸을 한국에 시집보내고 잇따라 부모들이 돈을 들이지 않고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부자가 된 사례도 많지만 강아무개양의 가족처럼 박산난 사례도 적지 않다. 강아무개양(용정시 )은 20세 나이에 대학입시에 낙방되자 부모들의 압력에 못 이겨 18살 연상인 한국인과 결혼했다. 그녀는 소개받을 때 들었던 한국 남자의 생활조건이 정작 한국에 와 보니 완전히 다르게 몹시 구차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를 초청하기 위해 꾹 참고 살다가 나중에 이혼하고 말았으며 윤락업소에 전전했고, 엄마는 한국에 와서 한국 영감과 바람이 나서 고된 노동으로 인하여 병든 남편을 버렸다. 애초에 딸을 한국에 시집보내고 잇따라 덕을 보면서 잘살아보려는 꿈은 다 깨지고 단란하고 오붓하게 살아오던 가족이 한국바람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유형 5.>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에 시집오는 것은 한국국적취득이 목적.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 여성 중에 물론 결혼생활이 순탄하게 국적을 취득한 분들도 있지만 어떤 여성들은 매 맞고 무시당하고 살면서도 불구하고 지옥 같은 생활을 꾹 참고 있다가 일단 국적을 취득하면 곧바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  박아무개 여인(심양시)은 국적은 취득하였으나 남편에게 심한 학대를 당해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정신이 이상해졌다. 페인이 되고나서 국적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사례분석> 이상과 같이 조선족 여성들이 결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결혼으로 코리안드림에 나서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추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 조선족 사회는 경제보다 체면을 더 중히 여기고 얼굴이 깎기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였다. 심지어 강력한 종교를 갖고 있는 위글족, 짱족, 회족 등 소수민족들은 한족과의 통혼이 잘되고 있는데 반해 조선족은 그렇다고 할만한 자체 종교도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한족과의 통혼이 극히 드물 정도로 자민족끼리만의 혼인을 고집해 왔다. 그래서 조선족 결혼관과 정조관은 매우 순결했다.  그러나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 여성들의 이혼율이 높아져 한국 남성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을뿐더러 조선족 사회는 막대한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순결했던 조선족 사회 결혼관과 정조관이 제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게끔 하고 또 순결한 결혼관과 정조관으로 한국인과의 국제결혼에 임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한국과 조선족 사회가 깊이 고민해야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계속)  
1    우리 민족은 왜 김씨 성이 많을까? (김정룡) 댓글:  조회:5427  추천:97  2007-09-18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1. 우리 민족은 왜 김 씨 성이 많을까?    김정룡  <서울남대문시장에서 ‘김사장’라고 부르면 10명 중 다섯 명이 머리를 돌린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돌을 던지면 맞는 사람이 김 씨다.> <김 씨가 너무 흔해 빠져서 머저리 김 씨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얘기들은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행어다.  실제로 한국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278가지 성이 있는데, 그중 김, 이, 최, 박 씨 성이 대략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김 씨가 전체 인구의 21.9%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과 해외동포사회도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필자가 연변1중 교사로 있을 때 각 학급의 학생등기부를 살펴보니 김가 학생이 대략 4/1~3/1 정도였다.  그럼 우리 민족은 왜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엄청 많을까?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은 역사유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김 씨 조상은 김알지(金閼智)인데, 그는 신라 제4대 석탈해 왕대에 금궤에서 탄생하였던 고로 성을 김이라 하였으며 그의 7손인 미추(味鄒)가 제13대왕으로 등극하여 제52대 효공왕(제53,54,55대왕은 박씨이고 제56대 왕은 김씨)에 이르기까지 줄곧 김 씨가 신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는 신라가 모두 56대왕에 이르는 역사에서 무려 41대를 김 씨가 통치하였으므로 김 씨 가문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 왕 씨가 통치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신라문화가 주축이였다. 그 당시 조정과 재야에 유명인물중 김 씨가 많았다. 예하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삼국유사>>의 저자 김일연 등 경주 김 씨들이 유명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이 씨가 500여년을 통치하였으나 조정을 비롯해 안동 김씨, 경주 김 씨, 선산 김 씨 등 김 씨네 일가가 정치적으로 세도를 부렸고 양반신분을 가진 분들도 굉장히 많았다. 그리하여 조선후기(16~17세기)에 들어 족보바람이 일자 돈 많은 가문에서 김 씨 가문의 양반족보를 사서 허위로 족보를 만들었다. 더욱이 본래 성(姓)이 없었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백성들이 조선시대 말기에 성을 갖는 바람이 불었는데, 그때 김 씨 성을 갖기를 원하는 자가 굉장히 많았다. 그 일례로서 김좌진 장군댁의 100여 명이나 되는 노비들이 전부 안동 김 씨 성을 가짐으로 하여 양반가문으로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본래 조선시대에 양반이 10%로밖에 안되였었는데 일제시대와 광복 후 양반가문출신이라고 자처하는 수자가 90%를 넘었다. 물론 그 중에는 김 씨가 차지하는 비례가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성이 있고 또 본(本籍)이라는 것이 있는데, 본이란 조상이 태어난 구체적인 곳의 이름을 뜻한다. 예를 들어 ‘밀양 박 씨’ ‘경주 최 씨’라고 할 때 ‘밀양’과 ‘경주’는 그 가문의 조상이 태어난 곳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본을 살펴보면 그 절대다수가 남한이다. 이것은 통일신라문화의 영향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통일신라의 영토는 대동강 이남이였고 고려와 조선시대는 역시 통일신라문화가 주축이였고, 물론 성 씨 문화도 신라의 영향이 컸다.  이리하여 조선시대 말기에 90%나 되는 백성들이 갑자기 성을 갖게 되자 기존에 있었던 양반(경상도가 위주이고 전라도 경기도 강원도 등지가 본적이였음)가문의 성과 본적을 따르게 되어 우리 민족의 대다수의 본적이 남한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김 씨 성 중에 ‘김해’ ‘경주’ ‘전주’ ‘안동’ ‘선산’을 비롯한 본적이 거의 다 남한이며 그 가운데서도 경상도가 차지하는 비례가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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