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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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재한조선족은 한족에게 한 수 배워야…” 댓글:  조회:5835  추천:66  2007-10-1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2부  재한조선족의 삶의 실태      5. “재한조선족은 한족에게 한 수 배워야…”  -조선족은 ‘현재형’, 한족은 ‘미래형’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현재 한국에는 조선족이 22만, 한족이 11만이 살고 있다. 그러니 중국에서 한국에 온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조선족이고 한 사람이 한족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족은 설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어 조선족의 눈에 한족이 아주 적어 보인다.  실제로 가리봉시장 일대에서는 하루저녁에 3건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선족들은 설치고 있다. 이곳 상인들은 벌써부터 조선족이 체류가 합법화되면 시름 놓고 술 마시고 싸울 것이니 큰 걱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조선족들의 한국생활은 여러모로 복잡하다. 이에 비해 한국에 온 한족은 그 절대다수가 돈 벌이를 왔기 때문에 다년간 일관하게 쓸데없는 일에 눈을 팔지 않고오로지 일만 꾸벅꾸벅 해서 착실하게 돈을 모으고 있다.  금천구 가산동의 한 비좁은 쪽방에 서로 타지방에서 온 한족이 셋이 살고 있다. 그들은 모두 수년간 일당 일을 하고 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하도 꾸준하게 출근하니인력회사에서 겨울에도 별로 쉴 사이 없이 일감을 준다고 한다. 뿐더러 아침점심은현장에서 먹고 저녁은 윤번으로 가장 값싼 채소를 골라 사서 해먹는다고 한다. 부지런히 일을 하고 아껴 먹고 아껴 쓰고 해서 매달 평균 집에 120만 원 씩 꼭꼭 부쳐 보낸단다. 필자가 농담으로 여자생각이 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돈을 벌려고 왔는데 웬 여자예요? 꾸준히 벌어 모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요.”라고 대답했었다. 물론 조선족들도 처음에 한국에 오면 ‘감옥’에 온 셈치고 열심히 산다. 그러다가 거퍼 1년 지나기 바쁘게 이리저리 눈을 팔고 돈을 헛되이 써가면서 ‘향수’를 추구한다.  연변에 가면 ‘한족들이 조선족들의 돈을 번다’는 말이 있는데, 한국사회에서도 이 말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듯하다.  한국에 온 한족여성들은 조선족남성들을 애인으로 사귀기를 선호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한족남성들이 너무 짠데 반해 조선족남성들은 여자를 위해서라면 아끼지 않고 돈을 펑펑 쓰기 때문이라 한다. 연길에서 온 박모(32세)는 5년 전에 총각으로 심양에서 온 4살 연상인 한족 아줌마와 동거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매달 번 돈을 꼬박꼬박 여자에게 바쳐 보관하게 했다. 남자는 여자의 “앞으로 결혼해주겠다”는 감언이설을 믿고 ‘밸까지 빼’주었으나 그녀는 남자의 돈 6천여만 원을 갖고 홀랑 도망가 버렸다. 다음 한족은 친척초청이 안되어 결혼으로 한국에 온 수가 많은데, 이민족 간의 국제결혼이라 혼인생활에 갈등도 많아 이혼건수도 많다. 그런데 한족여성들 중 십중팔구는 이혼소송에 반드시 필요한 한국남성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착실하게챙겨 갖고 있다. 이에 비해 조선족여성들 중 십중팔구는 아무 서류도 챙기지 않고 무작정 가출하거나 이혼소송을 제출하려고 하는데 남편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을 손에 쥐지 않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것이 곧바로 예로부터 문서에 대한중요성을 알고 살아온 한족과 문서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온 조선족의 큰 차이점이다. 한 때 중국에서 단일적인 사회주의체제하에서 조선족이 한족보다 우수해 보였을지는몰라도 경제시대에 들어서 조선족이 한족보다 많이 낙후되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혹자는 재한조선족이 한족보다 돈을 더 잘 벌고 있지 않느냐? 고 반문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확실히 재한조선족이 한족보다 여러모로 따지면 돈을 훨씬 더 많이 벌고 있다. 허나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아껴 쓸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볼 때 조선족은 ‘하루살이’ 생활관습에서 여전히 못 벗어나고 있어 ‘현재형’인데 반해, 한족은 여전히 멀리 보고 살아가는 ‘미래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말해보자. 현재 한국에는 한문판 신문으로서 ‘신화보’, ‘대기원보’, ‘手拉手’ 등이 있다. 이들 신문들은 <삼자경(三字經)> 풀이를 비롯해서 중국역사문화에 대한 글을 부지런히 싣고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 말을 “모든 현대사는 역사관성의 표현이다.”고 바꿔 말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이 문화제국으로 수천 년 뻗혀 온 이유와 앞으로 뻗혀 나아 갈 수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들 한문판 신문을 통해 알아야 한다. 이에 비에 현재 재한조선족 관련신문들은 전혀 그 역사관성의 무게를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중국에서 살아왔지만 ‘염황’도 모르고, 명색이 조선민족이지만 단군역사도 몰라 역사관성의 힘을 갖지 못해 한국생활도 ‘보따리 민족’으로 어정쩡하게 살고 있으니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족은 한때 중국에서 한족을 깨지 못했다고 비웃으면서 살아온 적이 있다. 허나 이젠 거꾸로 한족이 조선족을 깨지 못했다고 비웃을 시대가 온 것 같다. 
25    “돈 많이 벌어도 부부조차 믿지 못하는 세상…” 댓글:  조회:5485  추천:45  2007-10-1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2부  재한조선족의 삶의 실태      4."돈 많이 벌어도 부부조차 믿지 못하는 세상..."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지난 일요일(29일) 오후 퇴근시간 무렵, 한 쉰 넘어 보이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필자를 찾아왔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가 물었더니,  “저의 친동생의 일이라 말하기가 부끄러워 망설이다가 얘기하기로 결심했어요. 억울하게 이혼당한 제 동생의 사연을 선생님께서 들어보시고 글로 발표해 조선족사회에 ‘경종’이 되게 해주었으면 좋겠어요.”하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의 동생 김철(가명)은 27세(1999년)에 결혼하여 이듬해에 메주 같은 아들애를 낳았다. 그는 앞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한국에 가서 돈을 벌기로 맘을 먹었었다. 출국수속이 의외로 순리로워 아들애가 태어 난지 6개월 만에 한국에 입국하는데 성공했다.  김철은 몇 년 동안 감옥에 온 셈치고 악착스레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술 담배를 좋아하던 것을 끊었고, 웬만한 거리는 버스비마저 아까워 걸어 다녔으며 건설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했고, 휴일이면 친인척의 집에서 보냈다. 동포들이 흔하게 하는 ‘애인 찾기’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여자란 손도 만져보지 못한 채 몇 년 동안 ‘스님’으로 살았다. 그에게 유일한 오락은 한 달에 한 번씩 영화구경을 하는 것, 되도록 소비를 줄이느라 근사한 양복 한 벌조차 사지 않고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  이렇게 6년 동안 한국에서 열심히 번 돈을 꼬박꼬박 전부 집에 부쳐 보냈었다. 아내도 남편이 보내준 돈을 헛되이 쓰지 않고 모아서 아파트도 사놓았고 아들애의 미래 학비로 정기저금도 해놓았다.  김철은 이렇듯 한 눈 팔지 않고 돈 벌면서 아내와 아들애를 사무치게 그리워했었다. 아내도 마찬가지, 남편이 하루속히 귀국하기를 바랐다. “인젠 돈도 많이 벌었으니 당신이 더 그리워나네요. 아들애가 더 커서 아빠와 정이 멀어지기 전에 어서 귀국해 우리 세 식구 단란하게 살아요.” 부부의 뜻이 같아 김철은 지난 해 10월 두 번째 고향인 한국을 떠나 귀국했다.  김철이가 고향에 오니 아내와 아이는, 처음에는 서먹서먹해 하다가 금세 불이 붙을 정도로 화끈해졌다.  젊은 부부는 6년 만에 처음으로 ‘신혼’을 맞게 되어 몸과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런데 김철은 마음뿐이지 아무리 애써 봐도 거시기가 발기되지 않았다. 밤새껏 시도해보았으나 몸만 지쳤을 뿐 헛수고였다. 이튿날 아침 애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부부가 또 시도해보았으나 역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거시기가 오래 동안 써먹지 않아 병신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는 의심을 갖고 거침없이 남편에게 따지고 들었다. “당신 한국에 가 있는 동안 얼마나 여자들과 ‘그 짓’을 많이 했으면 시들어버려 발기조차 되지 않지요?”  남편은 아내의 말에 화가 상투밑까지 치밀었으나 여하튼 ‘안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라 아내에게 그동안 정조를 지켜온 과정을 차근차근 이야기 해주었다. 아내는 남편의 말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고, 그냥 남편을 의심하였다.  부부는 매일 이 일 때문에 크게 다투게 되었고, 다툼으로 스트레스가 심해 거시기는 끝내 고개를 쳐들지 못한 채 급기야 이혼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남편의 잘못 아닌 잘못으로 이혼하게 된 것, 아내가 아이를 키우는 조건으로 집과 돈을 전부 아내에게 주게 되었다.  김철은 6년 동안 모국 타향에서 한 눈 팔지 않고 정직하게 살았고 뼈 빠지게 일을 하여 돈을 벌었으나, 앞으로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려던 꿈은 뜻하지 않게 깨졌었다. 그런데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든 것은 친인척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이 진짜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지나치게 여자를 밝혀서 결국 몸이 상해 아내에게 이혼당한 줄로 믿고 뒤에서 쉬쉬한다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김철은 당지에서 살아갈 체면이 없어 형제들한테서 돈을 빌려 갖고 한국으로 재입국했다. 그는 한국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억울하다고 여겨 병원에 가서 검사받고 치료했다. 기적은 있는 법이다. 그의 거시기의 발기가 회복된 것이다.  김철은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면 악몽과도 같아 “이제부터 정조고 뭐고 되는대로 살아야지.”라는 삐뚤어진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안한 것도 한 것’으로 인정되는 판에 “차라리…”, 하고 남의 말 듣던지 하는 것이 오히려 속 편하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 온 조선족 중에 정직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중국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에 다녀온 사람은 거개가 ‘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재한조선족사회에 “한 것도 했다하고 안 한 것도 했다고 떠드는 판에 차라리 하고 말 듣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고 한다.  위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김철의 아내를 나쁘다고 탓할 것인가, 아니면 김철의 비극이 곧 전체 우리조선족의 코리안드림으로 빚어진 비극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김철의 누나는 끝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돈이 무엇인지? 돈을 많이 벌었어도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 이 한심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참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4    바람피우다와 까오퍼쎄(稿破鞋)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6315  추천:85  2007-10-14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9바람피우다와 까오퍼쎄(稿破鞋)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같은 사물을 갖고 민족에 따라 그 언어 표현법이 다른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는데, 민족과 민족 간의 언어표현 차이는 곧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남녀불륜을, 우리민족은 바람피우다고 하고 중국인은 까오퍼쎄(?破鞋)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남녀 성을 표현하는 포인트가 우리민족은 ‘바람’이고 중국인은 ‘신발’이라는 것이다.  왜 전자는 ‘바람’이고 후자는 ‘신발’로서 표현할까? 여기서 먼저 후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중국인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전족(纏足:쫑발)’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현시대 사람들은 흔히 ‘전족’이 여성들이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려고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중국인은 세상에서 생식숭배사상이 가장 강한 민족이다. 그래서 중국은 세상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따라서 중국인의 남녀 성을 연구한 방중술(房中術:섹스 기술)이 가장 발달했으며 ‘전족’문화도 역시 중국인의 방중술에서 유래되었다.  즉 중국인은 발이나 신발이 성기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물론 이러한 관념은 고대사회 여러 민족이 갖고 있던 공통된 관념이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에서는 신혼 첫 날밤 신랑신부가 동방(洞房)에 들 때 신부가 신랑의 신발을 벗겨주는 풍속이 있으며, 우리민족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여성들이 외간 남자 앞에 맨발을 드러내 보이는 행위를 터부시했다(여성이 맨발을 보이는 것은 치부를 보여주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인이 타민족에 비해 발이나 신발이 성기를 상징한다는 관념에 대한집착이 가장 강했다.  실제로 여자의 인체부위에서 ‘치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위 중 발을 애무하고 자극하면 흥분이 빨리 오고 가장 절정에 이른다. <<금병매>>에 서문경이 반금련의 발가락 사이에 포도를 끼워놓고 비벼 터치우고 혀로 빨아먹으니 반금련이 몸을 지체 못할 정도로 흥분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에피소드가 묘사되어 있다.  그건 그렇고 세상의 남성들이 여자의 성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매력적이라 여겼다. 그런데 중국인은 여자가 발이 작으면 성기도 작다는 인식이 타민족보다 강했다. 동양 최대 미인인 양귀비의 발이 10센치가 되나마나 하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아마 양귀비가 최대 미인으로 평가된 이유 중에 ‘소족(小足)’이 크게 한몫을 했을 것이다. 양귀비는 당나라 사람이므로 ‘전족(송나라 때 생겨났음)’문화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중국인이 이미 ‘소족’에 대한 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결국 이러한 ‘소족’숭배에 의해 ‘전족’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인은 여자의 발과 신발이 여자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남녀 성행위를 말할 때 우회적으로 발(第三者揷足:제3자가 끼어들다.) 혹은 신발(?破鞋:바람피우다)로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까오퍼쎄(?破鞋)는 외간남자한테 ‘내맡기’는 여자의 성기는 헌 신발처럼 천하다는 의미도 있다.  다음 우리민족이 남녀불륜을 바람피운다고 표현하는 유래에 대해 아래와 같은 세 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 아득히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여자의 임신이 남자의 역할에 의해 이루진다는 관념이 생기기 전에는 바람을 맞으면 여자가 애를 밸 수 있다고 인식했었다. <<이역지(異域志)>>에 “여인국이 있는데, 그 나라는 순수하게 음(여자)만 있는 곳이다 ······ 여자들이 몸에 실 한 오리 걸치지 않고 홀딱 벗은 채 남풍(봄바람)을 맞으면 바람에 감하여 잉태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대목이 있다. 나. 우리민족은 일상생활에서 바람이란 낱말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는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전통복장인 한복을 바람 옷이라 하며 통풍이 잘 되라고 옷 디자인이 굉장히 널찍하다. 이는 옛날 우리 선조들은 성기에 바람이 잘 통해야 성욕이 강하고 생육력도 강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이 추운 겨울에 내의를 입지 않고 팬티에 바지만 걸치는 습관이 역시 이러한 인식의 관성표현이라 볼 수 있다.  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뭄이 오면 조정에서 직접 조직하여 수백 명의 여무(女巫:여자무당)를 동원하여 기우제(祈雨祭)를 거행하였다. 여무들이 굿판에 설 때 속옷은 벗은 채 치마만 걸쳐 입고 다리를 번쩌번쩍 쳐들면서 바람을 일으켰다.  한국 소설가 김별아 씨는 그의 <<미실>>에서 고대 우리민족의 기우제 때 있었던 무당들의 굿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마르고 곡식이 타들어 갈 때, 궁중에서는 엄숙한 천제의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민간의 처방을 병행하여 기우제를 치렀다. 무당들은 속옷을 벗고 치마만 걸쳐 입은 채 굿판에 섰다. 물기 하나 없는 바람이 함부로 그녀들의 통통한 허벅지와 엉덩이를 매만졌다. 무녀들은 분노한 신령과 교접하며 영신했다. 치마를 들추어 바람을 희롱하며 가랑이를 번쩍번쩍 들어 한바탕 음란한 춤을 추었다. 가뭄이야말로 양이 음을 이겨 눌러 음력이 부족해 빚어진 탓이다. 그래서 무녀들이 지닌 음력의 발산을 통해 신령을 위로하고 천기를 다스리려 한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우리민족은 수천 년 동안 남녀 성행위가 바람의 역할과 연관이 크다고 인식하여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녀 성행위를 바람피운다는 말로 표현하게 되었다.  지난 밤 꿈에 문화혁명 때 불륜을 저지른 남녀에게 헌 신발을 새끼줄로 꿰달아 목에 걸어놓고 대중비판투쟁을 하던 일이 나타나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23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5710  추천:103  2007-10-14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8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 민족의 언어에는 그 민족이 만들어낸 고유어휘가 있고 외래종교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외래어휘가 ‘우리말’로 굳어져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휘도 있다.  중국은 하상주 삼대(夏商周三代)시기까지 유교와 도교를 주축으로 언어가 발달해 오다가 후한(後漢)시기부터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해서 수당(隋唐)시기에 불교의 ‘꽃’이 만개하여 불교용어가 일상생활에 침투되어 중국언어가 한층 풍부해졌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문화의 영향이 커 일상생활에서 유교와 도교적 용어를 많이 사용할 뿐만 아니라 1600년 전부터 불교가 유입되면서 불교의영향이 굉장히 크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문화재 80% 이상이 불교와 연관이 있고, 불교신자가 전체 인구의 26%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으며, 일상생활에서도 불교에서 유래된 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전편에 얘기했던 ‘야단법석’, 본편에서 얘기하려는 ‘이판사판’도 역시 불교에서 유래된 언어이다.  ‘이판사판’이란 ‘이판’과 ‘사판’이 덧붙혀진 합성어이다. ‘이(理)’는 이상(理想), 이성(理性), 이지(理智), 도리(道理), 원리(原理) 등에서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뜻하고 있으나 종교에서 말하는 ‘이(理)’는 ‘성(聖 )의 세계’ 즉 천리(天理)를 의미한다. ‘이판(理判)’은 곧 ‘이(理)’를 맡은 스님을 뜻하며 또한 ‘이(理)’의 세계에 대한 판단을 의미한다. ‘사(事)’는 인간세계의 그 어떤 구체적인 일을 뜻한다. 불교에서 ‘업(業)’, ‘업보(業報)’를 굉장히 중시하는데 ‘사업(事業)’이란 ‘사(事)’와 ‘업(業)’의 합성어로서 역시 불교에서 유래된 어휘이다. ‘사판(事判)’은 ‘사(事)’를 맡은 스님을 뜻하며 또한 구체적인 일(사물)에 대한 판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판’은 주로 이상세계에 대한 판단, ‘사판’은 주로 현실세계에 대한 판단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부연적으로 설명하자면 중국에 주자학(신유학)이 있는데, 우리 선조들은 조선조 500여 년을 통해 주자학을 뼈가 절도록 받아들였다. 조선조 유생들이 맨날 허구한 날 ‘이(理)’냐? ‘기(氣)’냐? 하는 논쟁을 벌였다. 유교에서 말하는 ‘이(理)’가 불교에서의 ‘이(理)’와 같은 것이고, 유교에서 말하는 ‘기(氣)’는 불교에서의 ‘사(事)’에 해당된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이판(理判)’, ‘기판(氣判)’이란 말이 생겨나지 않은데 반해, 불교는 ‘이판(理判)’, ‘사판(事判)’이란 말을 지어냈다. 본래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따로따로 되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합쳐져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이 생겨났으며 우리민족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굳어졌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이판사판(理判事判)’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막다른 데에 이르러 더는 어찌할 수 없게 된 판이라 해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것저것 따질 것 없다,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이 없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더 물러설 곳 없다는 등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 이러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이’를 맡은 스님(이판)이면 어떻고 ‘사’를 맡은 스님(사판)이면 어떠냐? 또한 이상세계면 어떻고 현실세계면 어떠냐? 굳이 꼭 갑이면 갑이고 을이면 을이라고 따질 것 있느냐?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22    세종대왕이 발명한 문자는 조선글일까? 한글일까? 댓글:  조회:6750  추천:88  2007-10-09
김정룡의 시론 한국에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한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4년 집현전에 유생을 모아 만들도록 지시했고 2년 후인 1446년에 완성되었으며 훈민정음이라 칭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하는 훈민정음이 현재 조선글, 한글 두 가지로 불리고 있는데 이북에서는 한글이란 표현을 수용하지 않고 이남에서는 조선글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며, 아울러 이남과 이북이 서로의 표현에 대해 거부감 내지 적대감마저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적인 요소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서 이남에서는 문자도 한국, 한민족, 한인, 한국어 등의 표현에 따라 한글이라 하고 이북에서는 조선,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어 등의 표현에 따라 문자를 조선글이라 한다. 만약 세종대왕이 살아 계신다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먼저 타민족의 상황을 살펴보자. 중국 인구 93%를 차지하는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부르며, 외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중국어를 중국 내에서는 한어, 중국인이 쓰는 문자는 한자라 하는데 한족, 한어, 한자 등 개념은 유방이 세운 한조(漢朝)에 의해 유래되었다. 한족의 전신은 화하족(華夏族)인데, 화하족은 화의 제족과 하의 제족이 합쳐진 총칭으로서 통일된 민족 개념이 아니었다. 서한시기 경학통치의 확립에 따라 사회가 대통합을 이루면서 본래 2만 여개의 성씨가 점차 470여 개의 성씨로 줄어들었다. 성씨가 줄어든 것은 많은 민족과 부족이 유실되고 문화가 통합되고 풍속습관이 통합되고 언어와 문자도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따라서 언어, 문자, 문화, 의학 등 여러 면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고 국토도 전례 없이 넓어졌다. 한조는 이러한 대통합을 바탕으로 왕망이 정권을 탈취했던 시간을 빼면 서한과 동한이 400여 년의 통치를 지속했다. 한족, 한어, 한자 등의 개념은 바로 한조의 이러한 대통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번영과 발전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비록 기원 220년에 한조가 멸망을 고했으나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중국 내의 주체민족을 한족이라 하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계 사람을 화인(거주국의 국적을 소유한 자), 화교(거주국의 국적이 없는 자)라 부르며 한족들이 대외에 자민족을 자랑스럽게 말할 때 화하민족이라 한다. 화(華)는 한족과 화인, 화교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며 ‘국제 화상대회’라는 회칭이 바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일본은 자민족을 야마토(大和)민족이라 한다. 중국인과 일본인에 비해 우리민족은 민족호칭이 유태인만큼이나 복잡하다. 이는 아마 유태인과 우리민족이 모두 대재 다난했던 수난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반도 남쪽에서는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이라 하고 북쪽에서는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이라 부른다. 그리고 해외에 흩어진 사람들은 거주국에 따라 민족호칭도 다르고 복잡하다. 만약 민족, 언어, 문자에 대한 남쪽에서 쓰는 호칭과 북쪽에서 사용하는 호칭을 서로 수용하고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실제로는 서로 상대가 사용하는 호칭에 대해 적대감마저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조선족은 비록 중국 내에서는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이라 말하지만 한국인을 만나면 조선민족, 조선어, 조선글 등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하고 북조선인을 만나면 한민족, 한국어, 한글이라는 표현을 조심해야 하는 이중성격으로 살아가는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 여기서 남북의 이 면에 대한 갈등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朝鮮)과 한(韓)의 유래를 살펴보기로 하자. 전설에 의하면 4천 년 전, 즉 중국의 요(堯)와 동시대에 단군이 나라를 세웠는데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고 한다. 그 후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기자(箕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해서 기자조선(현재 한국의 일부학자들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는다.)이라 불렀고 기원 전 3세기에 조선이 중국의 연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부여, 예맥,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로 흘러오다가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명나라의 지시에 의해 국호를 조선이라 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1948년 10월 이북에서 김일성이 세운 정권이 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서 국호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 했다. 韓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아리수(阿利水:한강의 고칭) 이남에 마한, 진한, 변한이란 이른바 삼한이 있었다. 그 후 삼한이 각각 마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 변한은 가야로 바뀌어 韓이란 호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2천년 동안 우리 일상 삶 속에 韓文化는 간간히 명맥을 이어왔는데, 한복(韓服)이란 호칭이 바로 그것이다. 1887년 일본이 조선을 청나라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내려는 수단으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도록 종용했다. 제국이란 본래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에서 대외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의미가 있으나 당시 대한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그러한 힘이 근본 없었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대한제국은 말 그대로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 후 1948년 9월 이남에서 이승만이 먼저 단독 정부를 세우면서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했다. 자아! 문제는 남북이 분단 이후 서로 자신들이 역사를 계승한 전통국가라 주장하고 상대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동시에 민족, 언어, 문자 등 호칭마저 상대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또 서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북에서는 조선이란 호칭이 단군조선과 조선조 500년을 합치면 2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유래가 깊을 뿐만 아니라 정통이라 주장하고 따라서 민족은 조선민족, 언어는 조선어, 문자는 조선글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종대왕이 문자를 발명해 냈다면 세종대왕은 분명히 조선시대의 임금이었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졌다면 마땅히 조선글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문자가 어떻게 한글이라 말할 수 있는가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재 한국의 주장은 이렇다. 한국은 대한제국의 연속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 국가이다. 한편으로 이남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한, 진한, 변한의 후예라고 여기고 있는데서 韓의 표현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韓의 표현을 선호하고 朝鮮의 표현을 기피하고 있는데서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가 생겨나고 있다. 한국인의 잠재의식 속에 朝鮮의 표현이 이북과의 정치적인 대립의 측면, 이를테면 이북국호 ‘조선’을 인정할 경우 이북이 고조선과 조선을 계승한 정통국가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꺼리는 외에, 힘없고 못살던 “죠센징”을 상징하기에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간지로 가장 유명한 신문의 명칭이 <<조선일보>>이고 조선간장, 조선된장, 조선옥돌 등 표현은 이중성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닌가? 한국인이 만약 남북 간의 정치적인 대립에 의해 朝鮮이란 표현을 꺼려한다면 다소나마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 않고 朝鮮이란 표현이 힘없고 못살던 “죠센징”을 상징하기 때문에 거부한다면 이는 불효자식이다. 왜냐하면 조상이 잘살았던 못살았던 힘이 있었던 없었던 우리 조상이다. 한국인이 우리도 5천년 역사를 지닌 민족이라 말하는데 이는 절대 韓에서 온 것이 아니라 朝鮮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국인이 좋은 것은 韓이고 궂은 것은 朝鮮이란 인식은 참으로 이중성의 문제가 아닌가?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한국인이 우리민족을 총칭하여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 등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어폐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북의 2천만과 중국조선족, 러사아고려인, 일본조총련 등 많은 사람들이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원인도 정치적인 요소도 있을 것이고 습관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 중국조선족은 엄연히 민족 명칭이 조선족이고 언어와 문자도 두음법칙을 보나 문법을 보나 분명히 조선민족, 조선인, 조선어, 조선글이지 결코 한민족, 한인, 한국어, 한글이 아니다. 1995년에 연변대학 역사학부 전춘원 교수가 <<早期東北亞文化圈的朝鮮>>이란 책을 발표했는데, 1999년 한국 집문당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할 때 제목을 <<한민족이 동북아문화권에서의 역할>>로 고쳤다. 즉 조선을 한민족으로 바꿔놓았다. 이 외에도 조선족이거나 이북에서 신문, 잡지, 책에서의 조선민족, 조선사람, 조선어, 조선글 등 표현이 한국에 옮겨질 경우 한국인은 임의로 韓으로 고친다. 이는 분명히 한국인의 옳지 못한 처사이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첫째 한국인은 마땅히 조선족과 이북의 표현을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둘째 한국인이 조선민족, 조선인, 조선어, 조선글 등의 표현을 거부하는 것은 조상을 부인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월 5일 서울에서 제1회 세계한인의 날을 기념하는 대회가 열렸다. 한국인은 남북 및 해외 겨레를 모두 한인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비현실적이다. 만약 제2회, 제3회 우리 겨레에 관한 행사를 이북에서 개최한다면 한인이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중국연변에서 개최해도 똑 같은 문제가 대두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예전의 분단국들은 국호가 우리처럼 혼란스럽지 않았다. 이를테면 동서독일, 남북베트남 등이 그것이고 독일은 분단 중에 게르만민족이란 호칭을 서로 사용했고 서로 국호, 민족, 문자에 대한 호칭에 거부감이나 적대감이 없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이 국호, 민족, 언어, 문자에 대한 호칭에 서로 거부감 내지 적대감을 갖고 있는 민족은 없다. 참으로 비극이다. 남북이 통일하려면 정치적인 통일에 앞서 민족호칭, 언어호칭, 문자호칭 등이 먼저 통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글이냐, 한글이냐? 세종대왕이 죽은지가 500년이 넘었으니 그를 중재자로 모실 수도 없고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21    “제 마누라 찾아주세요!” 댓글:  조회:5219  추천:72  2007-10-06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2부  재한조선족의 삶의 실태      3. “제 마누라 찾아주세요!”  -코리안드림의 비극을 짚어본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열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조선족 박모가 중국동포타운센터를 찾아와 “저의 마누라를 추적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무슨 사연인가고 물었더니, 그는 “창피하기도 하고 그년이 괘씸해서······”라고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박모는 7년 전에 한국에 왔다. 첫 1년은 열심히 일해 올 때 진 빚을 갚았다. 이듬해부터 매달 100만원 넘게 꼬박꼬박 집에 부쳐 보냈다. 그러다가 4년이 접어들면서부터 일한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해 수개월 한번 씩 돈을 보내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마누라가 “한국에서 애인을 친해 사느라 돈을 안 보내는 거 아니냐?”면서 걸고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 한국에 와 있는 친구를 스파이로 내세워 남편의 사생활을 추적했다. 친구가 “별 단서가 잡히지 않았다”고 회보하니, 그녀는 남편과 전화통화 시 하다못해 식당여종업원의 말소리가 나도 “당신이 바람피우는 것이 틀림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또 “만약 당신이 당금 집에 오지 않으면 이혼하자”고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박모는 가정파탄이 두려워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헌데 그는 기절초풍할 일에 부딪쳤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한국에 떠난 이듬해부터 외간남자와 살림을 차렸고 남편이 피땀으로 번 돈으로 새살림의 생활비로 충당했고 나머지 돈을 챙겨갔고 그 외간남자와 함께 한국수속을 마치고 떠나려는 참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한국에 있는 것이 껄끄러워 얼려 귀국하게 만들고 자신은 외간남자와 같이 한국에 와서 재미를 보려는 계산이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귀국한 남편은 그녀의 한국행을 놓치고 말았다. 박모는 할 수없이 또 친인척들의 돈을 빌려 갖고 한국에 재입국했다. 하지만 아무리 한국 땅이 좁다고 한들 마누라를 찾는 것이 바다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려웠다. 그래서 도움을 받으려고 신문사를 찾아온 것이었다.  필자는 박모의 사연을 듣고 나니 친구 동생인 김철(가명)의 일이 떠올랐다.  김철은 5년 전에 한국에 왔다. 그도 돈을 벌어서는 마누라한테 부쳐 보냈다. 그러다가 노임을 제때 받지 못하게 되자 꼬박꼬박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마누라는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하다못해 고향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실 때 전화에서 여자소리가 나도 남편이 한국에서 바람피운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이 때문에 김철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필자가 김철의 사람 됨됨이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야, 너의 처가 중국에서 바람피우고 있으니 너한테 선수를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라고 했더니, 그는 “간대르사(설마하니)?”하면서 마누라를 믿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헌데 몇 달 후에 나의 말이 사실로 밝혀졌다.  한 달 전에 김철은 단속에 걸려 강제추방되어 귀국해보니 마누라가 외간남자와 붙은지가 3년이 넘었고 얼굴부터 튼 뱃살, 보이지 않는 음부까지 성형수술 하느라 숱한 돈을 써버렸다. 그가 집에 도착한 다음날 마누라가 나머지 돈을 챙겨갖고 집을 나간 이후로 들어오지도 않고 이혼을 제기했다고 한다. 위의 두 사례는 매우 공통한 점이 있다. 첫째 남편이 한국에서 피땀으로 번 돈으로 외간남자와 재미를 본다는 것. 둘째 두 여자는 자신이 바람피우고 있으면서 근거 없이 남편이 바람피운다고 떠드는 것으로 이혼조건을 삶으려는 것. 셋째 두 여자 모두 돈을 챙겨갖고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도망간 것이다. 박모가 찾아온 날 한 할머니가 사위와 5살 먹은 손자를 데리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돈을 몽땅 갖고 다른 사내와 사분(私奔)해버린 저의 딸년을 찾아달라고 우리 센터에 방문했다.  연길아리랑방송을 청취해보면 위의 사례와 같은 일이 허다하다. 이는 조선족여성들의 가치관과 가족관이 엄청난 변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코리안드림으로 빚어진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사회와, 개개인의 소통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20    '연변내기'와 연변사람 댓글:  조회:5045  추천:90  2007-10-06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2부  재한조선족의 삶의 실태      2.'연변내기'와 연변사람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북한에서는 함경도 처녀들이 일등 신붓감으로 꼽히고 있다. 그 이유는 함경도여성들이 생활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변사람은 대다수가 함경도 출신이다. 그래서 연변여성들은 타 지역 조선족여성들에 비해 생활력이 강하다. 연변남자들도 이해력이 빠르고 진취심이 강한 등 우수한 면이 많다.  허나 문화혁명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 내 타 지역 조선족들은 연변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많이 갖고 있는데 연변사람을 ‘연변내기’라고 부르고 있다.  필자는 연변에서 40여년을 살면서 들어보지 못했던 연변사람에 대한 다른 호칭인 연변내기라는 말을 한국에 와서 배웠다. 그런데 처음에는 연변내기라는 말이 단지 연변출신이라는 뜻인 줄로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연변출신사람을 비방하는 뉘앙스를 풍긴 낱말이었다.  다시 말해서 재한 조선족사회의 연변을 제외한 흑용강성을 비롯한 기타출신 조선족들이 연변출신의 사람들에 대해 나쁜 평가를 할 때 연변사람이라 하지 않고 연변내기라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이다.  그럼 연변내기란 어떤 유형의 대명사인가? 진실하지 못하고 허위적이며, 약고 꾀바르고 사기 치기를 좋아하며, 남의 등을 쳐 먹고 한탕 치기를 일삼는, 그리고 이중성격이 있고 남을 물어먹기 좋아하며 아부를 잘하는 등등인데 하여튼 몹쓸 인간이라는 것이다. 구체 예를 들어보면,  가) 파출부사무실에 가면 연변내기들이 자기를 먼저 보내달라고 사무원에게 가만히 뒷돈을 찔러준다. 이리하여 아침 8시에 도착한 기타 조선족들은 기다리고 있으나 9시에 도착한 연변내기는 일을 배당받는다. 기타 조선족들도 일을 가려면 할 수 없이 뒷돈을 준다. 이렇게 되어 결국 한국 사람들의 배만 채워준다.  나) 건설현장에서 단가가 맞지 않을 경우 대다수 기타 출신 조선족들은 거절하나 연변내기들은 남몰래 슬그머니 주인을 찾아 일을 맡는다. 결국 연변내기들에 의해 노가다 단가를 떨어뜨린다.  다) 한국 내 조선족끼리 임시부부를 맺고 사는 사례가 많은데, 연변여자들은 대다수가 돈을 바라고 남자를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에 비해 기타조선족여자들은 상대가 마음에 들면 돈을 따지지 않고 진심으로 대해준다고 한다.  라) 연변내기들은 일을 하는 중 다른 직장에서 돈을 더 준다고 하면 주인과 아무 말도 없이 월급을 탄 이튿날로 그만둔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주인들이 준비가 없다보니 자리가 비고 갑자기 사람을 구하느라 애먹는다.  마) 한국 사람에게 아부하려고 2002한일월드컵 때 한국이 16강에 오르니 너무 기뻐서 밥상 위에 올라가 춤을 추었다느니, 3개월 동안 일을 하지 않고 월드컵에만 열중했다느니 당치도 않은 얘기들을 한다는 것이다. 일본 놈이 다시 쳐들어오면 일등 한간감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바) 한국주인들마저 연변사람을 고용하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이 외에도 필자는 연변내기들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많이 들었다. “왜 재수 없이 하필이면 연변에서 태어났나?”, “너 왜 연변내기처럼 거짓말을 하나?”, “연변사람이라면 상종도 하지 않겠다.” 등등이다. 그렇다면 연변내기들이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이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연변은 흑용강성에 비해 땅이 적어 먹고 사는데 풍족치 못해 인심이 박해진 것이고 둘째, 연변은 정치적으로 위의 눈치를 살피고 살다보니 사람들이 이중성격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고, 셋째 연변사람들이 타 지역 조선족에 비해 단합심이 약한 것, 아니 약한 정도가 아니라 흩어진 모래알과도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모인 곳에는 이런저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며, 따라서 연변사람과 연변내기를 갈라 보아달라는 것이다. 개별적인 연변내기의 폐단을 갖고 마치 전체 연변사람들이 다그러한 것처럼 매도하는 현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인들이 연변출신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결코 연변사람을 다 격어 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일부 타 지역 조선족들이 한국인 앞에서 일부러 연변조선족을 팔아먹는 수단으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또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켜려고 한 결과라 생각된다.  며칠 전 필자는 한국 분과 흑용강 출신 조선족여성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인인 한국인 총각에게 조선족여성을 소개해줄데 관한 화제가 나오자 흑용강 조선족 분이 하는 말이 “연변처녀는 쓸게 없으니 안 된다!”고 소리 높이는 것이었다. 그날 그 장소에서 솔직히 필자는 그 분을 한바탕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와 같은 분들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인데, 따지고 보면 그들은 ‘연변내기’보다 더 야비한 ‘00내기들’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는 속담이 있듯이 연변사람들이 과거를 뒤돌아보며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 한편 왜서 조선족들은 모국 땅에 와서조차 서로를 헐뜯는지 참으로 가슴 아프다.  
19    답답한 재한조선족 댓글:  조회:5420  추천:68  2007-10-06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2부  재한조선족의 삶의 실태      1. 답답한 재한조선족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지난 6월 어느 토요일 오후 6시경 비가 출출히 내리고, ‘해도 지지 않은 시간대’에 남구로역 4번 출구에서 좌측으로 굽어드는 골목길 어구에서 40대로 보이는 조선족남녀 각각 2명이 술에 만취해 ‘길이 좁다’고 비틀거리면서 걷다가 흰바지를 입은 한 여성이 흙탕물이 질퍽한 길바닥에 덜컥 주저앉는다. 동행하던 여성이 “야, 창피하지도 않아!”라고 말하니, 그녀는 “야, 좋은 내 돈으로 술을 먹었는데 뭐가 창피하냐!”고 큰소리친다. 길을 오가던 손님들이 그녀의 흙탕물에 적신 흰바지가 구경거리였던지 모두 돌아다본다.  시선을 그녀에게 집중하던 길손들이 바로 지나가던 중국음식점에서 갑자기 우장창 땅땅, 쾅쾅하면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서로 목소리를 높여 “죽이네, 살리네.”하며 야단법석이어서 또 새로운 볼거리가 생겨 일제히 그리로 눈길을 돌린다.  두 볼거리를 구경하던 부근의 한국인노점상주인이 “조선족들이 갈 데까지 갔구먼.”라고 말하면서 혀를 찬다.  조선족들의 이러한 추태는 조선족집거지인 가리봉, 대림, 안산, 안양 등지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 젊은 조선족남자(28세)가 버스요금을 내지 않겠다고 기사와 신랑이를 벌이다가 70세 되는 한국노인이 “우리 한국 사람은 버스요금을 내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자, 그 노인을 때려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어느 언론이 보도했다.  며칠 전 대림의 00노래방에서 도우미로 일하던 조선족여성끼리 말다툼하다가 25살 먹은 여자가 주방식칼로 상대를 찔러 경찰에 잡혀갔는데, 그녀의 엄마가 “우리 딸을 구해줄 수 없느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하여튼 조선족들이 한국 땅에서의 여러 가지 추태상을 글로 옮기자면 몇 권의 책은 족히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즉 만약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이 미국이나 일본에 갔다면 ‘시름 놓고’ 추태를 부릴 수 있을까? 답은 뻔하다. “어림도 없는 소리!”  그렇다면 왜? 이 문제에 관해 네 가지 측면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은 미국이나 일본에 간 조선족에 비해 소질이 차하기 때문이고, 둘째 언어가 통하니 행동이 자유스러운 것이고, 셋째 고국이니 같은 민족이니 하면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넷째 조선족이 미국인이나 일본인보다 한국인을 만만하게 보는 면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돈벌이를 하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그러한 추태를 저도 모르게 부리게 될 것”이라고 변명할 것이다. 허나 이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어느 나라에 가든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마음 편안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세상에 없다. 총적으로 말해서 조선족의 소질문제다. 조선족 소질에 관한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해보자.  작년 제2차 동포 자진귀국지원프로그램 시행 시, 등기부를 저절로 작성할 줄 아는 조선족은 불과 5~10%밖에 안 되고, 대다수는 말귀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반 정도는 자기주장만을 하고, 일부는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일보려 다니고, 만취한 상태에서 경찰조사 받으러 가겠다하고, 일부는 중국에서 밑바닥에서 헤매던 분들도 한국에 와 돈을 좀 벌었다고 사무원에게 큰소리치고··· 아무튼 참말로 답답한 면이 많다.  조선족 가운데 비행기표를 예약해주는데 똑 부러지게 한두 마디로 끝날 수 있는 분이 극히 드물고, 대다수는 불필요한 말을 길게 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비행기표 값이 얼만가?” “어디로 가려합니까?” “중국에요” “중국 어디예요?” “연길에요” “어느 날 가십니까?” “8월 10일이요” “왕복으로, 아니면 편도로 해드릴까요?” “가는 것만” “한국비행기로 할까요? 중국비행기로 해드릴까요?” “아무거나”  만약 “자리가 없다”고 하면 “서서가는 표라도 괜찮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다. 처음에 농담인줄로 알고 “바쁘니까 죄송합니다. 농담할 시간이 없습니다.”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면서 “내가 왜 당신과 농담을 하겠느냐? 기차는 서서가는 표가 있는데 왜 비행기는 없느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중국 내에서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고 밀입국이거나 배를 타고 한국에 온 분 중에 비행기도 기차처럼 서서갈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구나고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한국 분의 경우 “몇 월 며칠, 인천-연길, 대한항공 (혹은 중국민항), 왕복 (혹은 편도)” 이렇게 한마디면 끝난다.  출입국 공무원을 비롯해서 무릇 조선족을 상대로 사무를 보는 일이 실로 쉽지 않다는 것을 필자는 체험으로 느꼈다.  재한조선족은 앞으로 귀국하여 조선족사회를 이끌어갈 주력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어두운 면만 보고 “한국도 별거 아니다”고 거만을 떨지 말고, 한국의 선진적인 것을 열심히 배워 스스로 소질을 높이기에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18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의 유래 댓글:  조회:6265  추천:69  2007-10-0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7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사람들은 흔히 서구민주화의 뿌리가 고대그리스의 광장문화에 있다고 해서, 그게 뭐 굉장히 대단한 줄로 여기고 있는데 기실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 아니다. 인류 고대사회에 있어서 그런 ‘광장문화’는 고대그리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 사회생활의 보편현상이었으며, 중국에도 있었고 한국에도 있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야단치다.’, ‘야단맞다.’, ‘야단법석을 떤다.’, ‘야단법석거리다’ 라는 등의 말을 곧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의 유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 것으로 짐작된다.  이 ‘야단법석’이란 말은 고대 중국에서 불교의 유입과 전파에 따라 생겨난 것이며, 고대그리스의 광장문화와 같은 것이었다.  야단(野壇)이란 세속도시(世俗都市)의 빈 공터, 즉 사람들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는 곳에 단(壇)을 설치하는 것이며, 법석(法席)이란 법어(法語:佛語)를 말하는 자리를 의미한다. 불교로 놓고 말하자면 절간은 ‘성(聖)의 세계’라면 야단법석은 ‘속(俗)의 세계’이다. 쉽게 말하자면 불교가 백성들을 신도로 불러들이려고 세속화(世俗化)하기 위해 야단법석이란 아이디어를 발굴했던 것이다. 이 야단법석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흔히 계급적 구분이 없이 각설이, 갑돌이, 짚세기 할 것 없이 아무나 모여서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 예하면 씨름, 널뛰기, 제기차기, 재주넘기, 수수께끼내기, 남녀데이트, 심지어 어떻게 하면 남녀가 더 자극적이고 또 어떻게 하면 애를 쉽게 배고 낳고 하는 등등의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부담 없이 서로 주고받고 맘이 내키는 대로 한바탕 떠들어대는 장소였다. 야단법석이란 말은 한바탕 떠들어 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야단법석은 그냥 한바탕 떠들어 대는 난장으로 끝나버리고 마는가? 아니다! 이 야단법석은 겉보기에는 일종 난장 같지만 역사적으로 변문(變文)이란 최대의 성과를 이룩해냈다.  변문이란 당대(唐代) 승려(和尙)들이 야단법석에서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무지한 민중에게 알아먹기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바꿔놓은 것(변경)을 의미한다. 불경(佛經)이야기의 재미를 북돋우려고 악기도 곁들고 노래도 부르면서 잡예(雜藝)식으로 설경(說經)하였는데, 이로부터 강창문학(講唱文學)이 생겨났고, 제궁조(諸宮調:스님들이 비파를 타면서 노래와 이야기를 섞어 설경하는 설창법)가 생겨났고, 송사(宋詞)가 생겨났고, 원곡(元曲)이 생겨났고, 명대(明代)에 이르러 설화문학(說話文學)이 소설문학으로 발전했고, 이윽고 20세기 초에는 백화문(白話文)이 생겨나게 되었다.  우리민족 역사에서는 야단법석을 통해 불교를 대중화 시킨 주인공으로서는 7세기 신라에 살았던 원효대사(元曉大師)이다.  원효대사는 660년 당나라에 유학 가는 도중 해골 물을 마시고 득도하여 유학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불교를 대중화 시키려고 촌촌락락(村村落落)을 찾아다니면서 낫 놓고 기윽(ㄱ) 자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어려운 불경을 재미있고 쉬운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주고 바가지를 악기로 삼아 반주하며 노래를 곁들어 부르면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쳤다. 원효가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었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판을 벌이었다.  필자가 시골에 있을 적에 잔치 집에서 물독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반주하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이러한 관습이 원효대사가 바가지를 악기로 사용하는 것을 널리 보급시킨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공중장소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우리민족이 각종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고 한바탕 떠들썩하게 놀기를 즐기는 관습이 모두 야단법석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라 본다. 
17    중국인이 물건을 뚱시(東西)라 부르게 된 유래 댓글:  조회:5260  추천:76  2007-10-0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6중국인이 물건을 뚱시(東西)라 부르게 된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중국어는 간결하면서도 뜻이 심오한 특징을 갖고 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어는 영어보다 의미전달(의사소통)력이 4.5배나 높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그 유래를 다 알고 사용되는 어종은 없으나, 특히 중국어는 그 어느 언어보다 어휘가 풍부하고 뜻이 넓고 깊으며 상용어휘라 할지라도 유래를 모르고 사용하는 것이 매우 많다.  그럼 여기서 중국인은 왜 물건을 ‘남북(南北)’이라 하지 않고 ‘동서(東西)’라 부르는가는 유래를 살펴보자.  남송시기 성온화(盛溫和)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다. 주희(朱喜)가 아직 출세하기 전 어느 하루, 시가지 골목길에서 대바구니를 들고 마주 오는 성온화를 만났다. “선생님, 어디 다녀오시려옵니까?”고 주희가 물으니 “저잣거리에 가서 ‘동서’를 사오려고 하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주희가 의아해서 “왜 선생님은 ‘남북’을 사지 않고 ‘동서’를 사려하옵나이까?”고 물었다.  성온화가 “자네, 오행(五行)을 알고 있지?”라고 말하니, 주희가 “그럼요.”라고 대답했다. 성온화는 “음, 그럼 됐네.”라고 말하고 나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행에 의하면 동은 목(木)이고 서는 금(金)이요, 남은 화(火)이고 북은 물이며 가운데(中央)는 토(土)일세. 만약 내가 이 대바구니에 불을 담으면 타버릴 것이고 물을 담으면 새어버릴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남북’을 못 사고 ‘동서’를 사려고 하는 것일세.”  이로부터 중국인은 물건을 ‘뚱시(東西)’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6    남편을 왜 ‘서방’이라 하는가? 댓글:  조회:5473  추천:78  2007-10-0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5남편을 왜 ‘서방’이라 하는가?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우리민족 언어에 ‘서방’, ‘서방임’, ‘서방질하다’, ‘서방노릇하다’, ‘기둥서방’ 등 ‘서방’에 관한 말이 있는데, 이 ‘서방’이란 낱말은 성인남자가 성인여자와 이루어지는 성적결합행위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취(娶)하는 것을 ‘서방 간다(북한과 중국연변에서는 지금도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서방 간다고 말하고 있음)’고 표현하고 남편을 ‘서방’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서방’이란 낱말은 풍속학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선 중국 쪽의 ‘서방’에 관한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은 은나라 때부터 오색, 오방, 오행의 관념이 있었으며, 주나라 때부터는 모든 현상을 음양오행설에 꿰맞추고 풀이했다. 따라서 음은 서쪽이고 양은 동쪽이요, 여자는 서쪽이고 남자는 동쪽이요, 여자는 오른쪽이고 남자는 왼쪽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동남서녀, 남좌우녀이다.  중국역사에서 왕모전설이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왕모는 곧 서왕모이다. 그녀는 동왕공(東王公)과 대응되는 여신이며 장생불로약을 지니고 있다든가, 남자들의 정력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주나라 목왕(穆王)이 서왕모와 로맨스가 있었다든가, 그 유명한 한무제가 7월 7석에 서왕모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등등의 전설이 생겨난 것으로 보아, 동남서녀 관념에 의해 서방에 위치해 있는 왕모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미화되었으며 유명한 인물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가 꾸며졌다.  농경문화에서 견우와 직녀는 남경여직(男耕女織)의 상징이다. 그들이 7월 7석에 은하수에서 만나는데 견우는 동쪽에 위치해 있고 직녀는 서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7월 7석 날에 만나는가? 그것은 여름에 왕성했던 양기가 음기를 만나게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민족도 역사적으로 동남서녀의 관념이 굉장히 뿌리 깊었다. 특히 전설과 민담에 여자가 등장하면 십중팔구는 서방(서쪽)이 따라서 나타난다. 여기서 <<삼국유사>>에 등장한 여자와 서쪽에 관한 기록들을 간추려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가. 노파와 하서지촌(下西知村)  남해왕 때에 가락국해 중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마침 포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이라 하니 혁거왕(신라초대왕)의 고기잡이 할미였다.  나. 흰닭과 서쪽마을(西里) 영평삼년 경신년 8월 4일 박공이 월성 서쪽마을을 가다가 큰 광명이 시림 속에서 나타남을 보았다. 자색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치었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또 흰닭(여자를 상징함)이 나무 밑에서 우는지라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다. 보희와 서악(西岳)  춘추공의 비(妃)는 문명황후 문희니 즉 유신공(庾信公)의 둘째 여동생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서울에 가득 찼다. 이 꿈을 해괴하게 여긴 보희가 동생 문희에게 말했다. 영리한 동생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고 그 방뇨몽을 산 덕분에 춘추공과 가연을 맺고 왕비가 되었으며 자식을 수두룩하게 낳았다.  라. 선도성모와 서란산(西鸞山)  신모는 본시 중국제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며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내왕하였다. 사소가 부황이 보내온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은 후 소리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 잡았고 신이 되었다. 그래서 서란산이라 하였다.  마. 호녀와 서산기슭  신라 원성왕 때 흥륜사를 돌던 김현이 자신을 따라 돌던 한 처녀와 정을 통한 후 그녀를 따라 갔더니 집은 서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 백호광(白毫光)과 서쪽  부득과 박박이 심산계곡에 들어가 도를 닭고 있던 어느 날밤 꿈에 백호광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빛 가운데서 금색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만지었다. ...... 백호광은 후에 부득과 박박으로 하여금 목욕재계를 통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한 여자이다. 사. 선덕여왕과 서교여근곡(西郊女根谷)  선덕여왕이 영문사 옥문지(玉門池)에 숨어 있는 500명의 백제병이 잠복해 있는 것을 예지하여 소문났다. 신하들이 그 비결을 물었더니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즉 여근(女根:생식기)이니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이 희고 또 흰 것은 서쪽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고 있으며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라 그러므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고 왕이 말했다.  이상 <<삼국유사>>에 실린 일곱 가지 이야기로부터 알 수 있듯이 고대한민족은 여자를 반드시 서쪽에 연계시켜놓았다.  또 고대에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축제 때 남근과 여음의 모의물 놀이가 있었는데 동쪽에 남자, 서쪽에 여자가 위치해서 놀이를 하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고대 우리민족은 여자는 서쪽, 서쪽은 여자라는 관념이 매우 강하게 또 매우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런 관념으로부터 남자가 여자를 취(娶)하는 행위(결혼)를 남자가 서쪽, 즉 서방에 가는 것으로 형용되었으며 비유되었다. 따라서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서방 간다’고 표현하고 갓 결혼한 남자를 ‘서방쟁(북한과 중국연변에서 쓰는 말)’이라 하며 남편을 ‘서방’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15    수작이란 말의 유래와 우리민족의 음주가무관습 댓글:  조회:5163  추천:98  2007-10-06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4수작이란 말의 유래와 우리민족의 음주가무관습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우리민족의 일상 언어에 ‘수작을 피우다.’, ‘수작을 걸다.’, ‘개수작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수작이란 말은 음주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술상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손님이 주인에게 권하는 것을 작(酌)이라 한다. 혹은 손님에게서 받은 잔을 되돌려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술을 붓거나 스스로 따라서 마시는 것을 작(酌)이라 한다.  아무튼 수작이란 말은 술판에서 유래된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을 욕되게 하는 말로 변질되었다. 왜일까? 우리민족은 하도 술판이 많고 또 술판에서 서로 이래저래 명분을 달아서 권커니 작거니 하면서 술을 마시다보면 서로 피곤하고 귀찮을 때가 많다. 그리하여 수작이란 말이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은 술만 마셨다 하면 노래와 춤판을 벌리는데 이는 하나의 관습으로 전승되어왔다. 그럼 우리민족은 왜 술판, 노래판, 춤판을 벌리기를 좋아할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제천의식  제천의식이란 농경문화에 있어서 주로 5월 파종이 끝난 후와 10월 수확이 끝난 후 하늘에 향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기원 3세기 중국학자인 진수(陳壽)가 동이족(東夷族:조선민족의 조상)들의 제천의식에 관해 <<위지동이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흔히 5월에 파종이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남녀노소가 모여서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10월에 수확을 마치고 반복해서 이러한 제천의식을 거행한다.  당시 우리민족 조상들의 여러 갈래가 모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으며 모두 나라 안에서 촌락마다 군데군데 크게 모여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우리민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적어도 2천년 역사는 족히 된다.  둘째 한의 역사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주변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왔다. 우리민족은 유태인처럼 비록 나라는 잃지 않고 용케도 버텨냈으나 너무나도 빈번한 외래침략 때문에 나라는 늘 쑥대밭이 되었고 백성들은 가슴에 멍이 들고 한이 맺혔다. 그리고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 양반과 상놈간의 차별이 심했고 관리들은 당파싸움에다 부패했으며 또 자주 발생하는 자연재해 때문에 우리민족은 더구나 가슴에 한이 맺히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 낙천적이었던 우리민족은 술과 노래와 춤으로 한많은 인생살이를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셋째 명분의식  우리민족은 체면이 강한 민족이다. 매사에 있어서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한다. 즉 음주가무 하는데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술판에서 타인에게 술을 권할 때 꼭 무슨 명분을 찾아서 연설하고는 권한다.  우리민족은 슬프면 슬프다고 마시고 기쁘면 기쁘다고 마시고 심심하면 심심하다고 마신다. 연변축구팬들은 연변축구팀이 이기면 기쁘다고 마시고 지면 슬프다고 마시고 비기면 아쉽다고 마신다. 그러니까 축구경기결과가 어떻든 간에 술을 마실 명분은 다 있다.  넷째 판의 문화  판이란 낱말은 우리민족만이 쓰는 특이한 언어이다. 술판, 춤판, 노래판, 도박판, 오락판, 개판, 한판 벌리다는 등 이러한 말은 타민족 언어로 정확히 번역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각종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민족은 없다. 필자의 가문에서는 어른들의 생일이면 마치 큰 잔치처럼 친척들이 크게 모여서 술판, 노래판, 춤판을 한바탕 벌리었다. 아마 조선족 가문에서는 거의 다 이러한 관습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세상에서 노래방이 가장 발달한 곳이 곧 한국과 연변이다. 이는 과거 우리민족의 판문화의 연속의 표현이다.  다섯째 종교가 없는 민족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신선사상과 무속신앙이 발달했을 뿐 교리교의가 있는 그렇다고 할 만한 종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옛날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던 관습이 하나의 생활종교로 되어왔다.  이상 다섯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우리민족은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즐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음주가무관습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하나의 생활신앙이 되어왔으며 본래는 매우 좋은 관습이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이 관습이 많이 변질되어 부작용이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이를테면 사촌이 병들어 죽는다 해도 술을 권하거나 술판에서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왕따시키거나 갓 시집온 색시한테 기가 넘어가도록 술을 권한다. 하여튼 우리민족은 세상에서 술을 가장 잘 마시고 노래방에 잘 가고 기타 유흥에 탕진하는 비용이 가장 많다. 앞으로 더욱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면 사람마다 절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4    한 한국 남자의 국제결혼 신세담 댓글:  조회:5528  추천:70  2007-10-0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1부 사례로 본 한국인-조선족 국제결혼실태분석-국적이 뭐길래?9.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내가 당하고 보니···”  -한 한국 남자의 국제결혼 신세담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내가 조선족여성과 재혼한다고 하니 나의 친인척과 친구 중에 “조선족여성들이 한국에 시집오면 도망가는 사례가 많은데···”라고 말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었다. 허나 나는 그것도 사람의 나름이겠지, 만약 내가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여러모로 잘해준다면 도망갈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고 결혼하기로 작심했다.  2006년 여름 나는 중국 용정에 가서 조선족여성 이미화(가명)를 만났고 혼인을 약속했다. 그 후 나는 이미화가 2007년 5월 20일경 한국에 오기 전까지 다섯 차례 중국에 갔고 그녀의 명의로 115평방짜리 아파트를 사주었다. 당시 나는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집까지 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 오기 전에 여러 차례 나의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이 있었고, 이 때문에 서로 말썽도 있었다.  5월 중순경 비자를 발급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다음 달에 중국에 가서 이미화를 데리고 한국에 오겠다고 알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남편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미화는 2007년 5월 20일 나와의 결혼비자로 한국에 오면서도 나에게 온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또 한국에 도착해서는 친언니 집에 가서 하루 묵고 이튿날 아침에 나한테 전화로 한국에 이미 왔다고 알려왔다. 나는 마치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틀 후 이미화가 나를 만자고 해서 만났더니, “앞으로 벌어서 집값을 갚을 테니 외국인등록증을 내달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결국 그녀는 나와 결혼생활을 보낼 의도가 없었다.  나는 인내성이 있게 이미화를 달랬다. 만약 같이 얼마간이라도 살다가 정말 맞지 않는다면 그때 헤어져도 좋다. 그리고 나의 잘못으로 헤어진다면 집을 줄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아예 살아보지도 않고 집은 선물로 알고 있다느니, 외국인등록증부터 빨리 내달라느니, 서울에 가서 일을 하면서 주말이면 보러 오겠다느니 등 횡설수설하는 것을 용납 못하니 일단 살림을 차리자고 설득했다.  그래서 2007년 6월 6일 수원시 병점에 집을 맡고 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이미화는 15일 동안 언니네 집으로 간다, 친구 만나러 간다는 등 이유로 7~8 차례 밖에 나갔고 심지어 이튿날에 귀가할 때도 있었다.  밤에 잠자리를 거부하는 등 아무튼 여러모로 보아 나와 진실로 혼인생활을 할 의도가 없어 보였다. 이미화가 심장병 때문에 잠자리를 거부한다고 했다. 내가 “그럼 중국에 가서 병을 고치고 나와 살거냐 말거냐를 결정하고, 만약 살지 않겠다면 내가 사준 집을 나의 명의로 돌려놓고, 너를 한국에 데려올 테니 1년 체류를 보장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이미화는 아내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의무는 지키지 않은 채, 맨날 외국인등록증을 내달라는 타령이었다. 만약 이미화가 한국에 올 때부터 나에게 알리고 왔거나, 또 와서도 진실성이 있게 처사했다면 왜 내가 외국인등록증을 협조해주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녀를 한번 믿어보기로 하고 7월 6일 외국인등록증을 협조해주기로 했다. 허나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7월 5일 끝내 가출하고 말았다. 가출 후 이미화의 전화 통화내역을 보니 조선족 남자 강모와 하루 평균 7~8 차례 통화했다. 나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이미화가 호프집에서 강모와 키스하고 끌어안고 등 추잡스런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나는 강모에게 전화를 했더니 받지 않아 음성메세지로 “나는 내 여자를 찾자는 것이 목적이니 모든 것을 따지지 않겠으니 여자만 보내 달라.”고 했다. 이튿날 강모는 전화번호를 바꿔버렸다. 만약 이미화와 강모 사이가 떳떳한 관계라면 왜 전화를 받지 않거나, 굳이 전화를 바꿔버리겠는가?  나는 오는 8월 5일까지 이미화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는 것을 그녀의 오빠와 언니에게 알렸다. 허나 그들은 자신들도 이미화가 연락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도 이미화를 달래고 욕하고 욱박지르고 하면서 나와 살기를 권유해보았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미화는 한국에 오기 위해 나를 이용해 사기결혼을 한 것이고, 한국에 와서도 같은 조선족 남자와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급기야 그 남자에게 도망갔다. 나는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해서 집도 사주고 한국에 데려다 잘살아보려고 했으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예전부터 조선족여성들이 한국에 시집오면 도망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내가 조선족여성과 재혼한다고 하니 말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조선족여성들이 도망가는 데는 한국인남자들에게 문제가 있어 그런 것 아니겠는가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내가 잘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도망갔으니, 나의 맘은 허망하기 그지없다.           (제1부 끝)
13    "중국동포들이 가출하면 어디로 가나요?" 댓글:  조회:5549  추천:83  2007-10-0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1부 사례로 본 한국인-조선족 국제결혼실태분석-국적이 뭐길래?8."중국동포들이 가출하면 어디로 가나요?"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중국동포타운신문입니다.” “여보세요, 저는 한국 사람인데요, 한 가지 여쭈어 볼 일이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중국동포들이 가출하면 어디로 가나요?”  하느님 맙소서. 한국 땅이 아무리 작다고 한들 도망가면 어디에 가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일단 중국동포가 가출한 이유부터 물었더니 한국분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정씨인 한국분이 올해에 44살이고 이혼자이며 아이는 엄마가 부양하고 있단다. 홀로 2년간 쓸쓸하게 지내다가 한국에 있는 엄씨라는 조선족 젊은 여인을 통해 중국심양에 있는 그녀의 친구 한모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다.  한모 여인은 25살이고 심양예술대학 졸업생이며 누가 봐도 탐낼 정도로 인물체격이 잘 빠진 처녀다.  정씨는 첫눈에 한모 여인에 홀딱 반했고 한모 여인도 별로 싫은 기색이 없이 혼인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한모 여인은 한국에 입국해서 1개월만에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자 이튿날로 짐을 챙겨갖고 가출해 버렸다. 정씨는 마누라가 십중팔구 엄씨 여인을 찾아갔다고 판단하고 전화해보았더니 벌써 전화번호를 바꿔버려 헛물을 켜고 말았다. 그래서 정씨는 마누라를 찾을 단서가 끊어졌고 마치 바다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려워졌다.  정씨는 어려운 생활 형편에서 1000만원의 돈을 들여 한모 여인을 한국에 데려왔다. 자신은 진짜 결혼이라 생각하고 한 혼인인데 이제와 보니 여자는 처음부터 위장결혼이였다. 즉 남자는 진심이였으나 여자는 오로지 한국 땅을 밟으려는 목적으로 국제결혼이란 수단으로 남자를 이용했던 것이다.  정씨는 돈도 떼우고 사람도 떼우고 남은 것은 허탈감 뿐이다. 그는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필자에게 물었다. 사실 필자는 같은 조선족 입장이라 참으로 대답하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대충 얼버무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한국분들이 여러 통의 전화를 걸어왔다. 그중에 묘하게도 위의 사례와 비슷하게 조선족 여성이 한국 남성을 사기 친 내용이 하나 있었다.  전화상의 목소리를 듣건대 50대 한국 남성이였는데, 1년 전부터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입국한 30세의 중국동포여성과 사귀어왔다고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1000만원의 현금과 세집을 마련해 주었고 자주 용돈도 주었다. 물론 무작정 준 것이 아니라 본마누라와 이혼하면 자신과 결혼한다는 각서까지 받고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이혼을 추진했으며 이혼서류를 손에 쥔 날 들뜬 마음을 안고 여자를 찾아갔더니 그녀가 하는 말이 중국에 잠깐 다녀와서 함께 살림을 차리자고 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곧이 듣고 이제나 저제나 하고 손꼽아 기다렸으나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의심이 들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알아본 결과 그녀는 아예 중국에 가지 않았다. 틀림없이 잠수해 버린 것이였다.  남자가 일이 꼬이고나니 대충 짐작이 가는 데가 있었다. 즉 어느 한번은 자기가 마련해준 집에 갔더니 젊은 사내와 지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열 받은 남자는 자기가 준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여자가 잘못했다고 무릎 끓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남자는 그 일을 떠올리면서 틀림없이 그 사내와 함께 도망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역시 필자에게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러한 내용의 전화를 받는 순간 필자의 심리는 매우 모순적이다. 같은 조선족의 입장에서 ‘경찰에 신고해서 손해배상을 받아내고 강제추방 시키라’는 말도 못하고 말이다. 그래도 믿고 전화를 걸어왔는데 시원한 대답도 드리지 못하고 참으로 딱한 일이다.  전화는 그런대로 대충 넘겼으나 나의 생각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일면 일차적으로 볼 때 조선족 여성들이 오로지 한국 땅을 밟으려는 목적과 또한 한국 땅에 와서 한국인을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고, 거꾸로 한국 남성들이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꽃다운 조선족 여성들을 탐내는 자체가 틀려 먹었다고 지적하고 싶다.  조선족 여성들이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후 도망간다는 얘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또 그 비례가 많아 한국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러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일방적으로 조선족 여성들만 나쁘다는 결론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물론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행을 목적으로 한국남성들을 사기 치는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나, 일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이 있듯이 한국 남성들이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짝이 엄청 기울게 조선족 여성들을 데려온다면 그 혼인이 유지될 리가 만무하다는 점을 념두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도망가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감한하고 혼인을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쉽게 말해서 한국남성들은 아무리 훌륭한 옷도 나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좋은 옷이 아니라는 도리를 염두에 두고 조선족 여성과의 결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기 친 자와 사기당한 자는 모두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것이다. 즉 사기당한 한국남성들은 물심양면으로 손해를 보았고 ,사기행각을 벌인 조선족 여성들은 비록 일시적 목적으로 자존심을 꺽는다고는 하지만 근본 맘에도 없는 한물 건너간 남성들한테 몸을 망친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또 사기 친 행위로 인하여 한국생활이 떳떳하지 못할뿐더러 한국 땅을 떠나기 전까지 굉장히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그녀들은 천국의 꿈을 안고 왔으나 지옥 같은 세월을 기약 없이 보내야 한다.         
12    무지한 계약결혼자들 (김정룡) 댓글:  조회:5272  추천:65  2007-10-0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1부 사례로 본 한국인-조선족 국제결혼실태분석-국적이 뭐길래?7. 무지한 계약결혼자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 국제결혼을 대체로 진짜결혼과 위장결혼으로 나누어 왔었는데, 요 몇 년 사이 계약결혼이란 새로운 방식이 등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국제결혼방식은 가지각색이다.  계약결혼이란 브로커가 나서서 한국인남성(이하 남자로 간칭 함)과 조선족여성(이하 여자로 간칭 함)을 계약을 맺어주고 하는 혼인을 말하는 바,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자가 브로커에게 소개비(한화로 300~400만원)를 지불하며 출국수속비는 여자가 별도로 부담한다.  둘째 여자는 남자에게 결혼해주는 조건으로 사례금 (한화로 300~400만원)을 준다.  셋째 여자가 한국 땅에 도착하면 브로커에게 성공대가로  한화로 300~400만원을 추가로 지불한다.  넷째 여자가 한국에 오면 남자와 반드시 살아야 한다. 대신 남자는 반드시 여자의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게끔 해준다.  다섯째 여자는 반드시 국적을 취득할 때까지 남자와 살아야 한다. 만약 사는 도중에 가출하거나 이혼신청을 하면 남자에게 위자료 금 300~400만원을 지불한다.  여섯째 만약 여자가 국적을 취득하기 전에 남자가 여자를 쫓아내거나 이혼을 제출하면 여자에게 위자료 금 300~400만원을 지불한다.  일곱째 여자가 국적을 취득하면 남자와 헤어져(이혼)도 남자는 여자의 의도대로 해준다. 여덟째 만약 남녀양방 중 어느 일방이 계약조건을 위반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진다.  이상 내용은 필자가 여러 명의 결혼계약서를 친히 보고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자아! 우리 모두 한번 평심하게 생각해보자. 감정과 애정을 토대로 이루어진 국제결혼도 이혼율이 하늘을 치솟고 있는 마당에 사랑이 전혀 전제되지 계약결혼이 어떻게 남녀가 함께 3~4년을 한 이불을 덮고 살 수가 있을까? 물론 같이 살다보면 정이 들어 계속 살아가는 경우도 간혹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비례가 1%나 될까?  문제는 여자는 한국에 와서 합법적으로 체류하면서 돈을 벌고 국적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남자는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처지이기에 계약결혼을 통해 돈이나 벌고 홀애비가 성욕도 해결할 겸, 이런 목적으로 계약결혼을 하기 때문에 사는 중에 갈등이 많아 3~4년을 뻗힌다는 것이 실로 하늘에 별따기다. 그래서 여자들이 한국에 온지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1~2년을 살다가 뻗히지 못해 가출하거나 이혼을 제기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흑룡강성 상지에서 온 서모 여인(31세)은 계약결혼으로 한국에 와서 남자에게 폭행을 당하고 상욕을 먹고 생활비를 주지 않고 과도한 섹스에 시달리는 등 참다못해 5개월 만에 가출하고 이혼을 생각하고 있으나 주저한다. 그 이유는 계약을 위반하는 후과에 대해 몹시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계약결혼이란 자체가 위법이기 때문에 브로커가 개입해서 맺어진 계약은 법정효율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녀 어느 일방이 계약을 파기하더라도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러한 법률상식을 모르고 있는 여성들은 계약결혼에 목을 매고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참으로 한심스럽다.  허나 누구를 탓하랴! 법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 그 놈의 국적에 목을 매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을.    
11    위장결혼자들의 착각 (김정룡) 댓글:  조회:5096  추천:67  2007-10-0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1부 사례로 본 한국인-조선족 국제결혼실태분석-국적이 뭐길래? 6. 위장결혼자들의 착각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결혼이란 본래 두 남녀가 결합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고, 또 유교문화권에서 결혼은 남녀 당사자 간의 결합뿐만 아니라 가문과 가문사이의 결합이기도 하다. 중국과 한국은 전통사회에 있어서 결혼을 두 남녀 당사자 사이의 결합보다 두 가문의 결합에 비중을 더 두었다. 물론 전자보다 후자에 비중을 더 두었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는 가부장적 혼인으로 인하여 비극이 초래된 경우가 매우 많았으나 필경은 진짜 결혼일 뿐 위장결혼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족사회의 결혼에 무슨 진짜요, 가짜요 라는 시비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위장결혼이란 말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조선족사회 위장결혼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 이후에 나타난 새롭고 특이한 현상이며, 이 위장결혼 때문에 수많은 조선족들이 웃고 울었다.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 위장결혼은 그 절대다수가 틀에 맞추고 판에 박힌 듯한 ‘공식’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위장결혼을 새로운 돈벌이로 간주한 한국과 조선족사회의 일부 브로커들이 개입해서 짝을 묶어준다. 한국사회 밑바닥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위장결혼을 통해 2~3백만이란 돈도 벌고 중국에 ‘관광’을 다녀올 수 있어 호적을 더럽히면서까지 위장결혼에 나선다. 한편 조선족은 위장결혼을 통해 코리안드림이란 꿈을 이룰 수 있고, 따라서 돈을 벌 수 있으며, 운이 좋으면 한국국적도 취득할 수 있다.  허나 이는 표면에 드러난 ‘화려한’ 이미지일 뿐 실제 내막은 위장결혼을 한 사람들 중 60%이상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로 심적인 고통이 심하고, 빚을 갚기도 전에 강제추방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등 부정적인 측면도 많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수의 위장결혼자들은 장밋빛 환상을 품고 ‘천국’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아니라 ‘지옥’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극이 초래된 원인은 위장결혼에 나서는 당사자들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착각을 갖고 한국에 오기 때문이다. 첫째 브로커들의 감언이설을 액면 그대로 믿고 한국에 온다. 위장결혼 당사자들은 브로커들의 “결혼수속 시 일정 금액(인민폐7~10만원)을 내면 한국에 도착해서는 더 돈이 들지 않고 체류연장도 되고 국적도 취득할 수 있다.”라는 그럴듯한 감언이설을 액면 그대로 믿고 온다. 즉 이미 브로커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했으니 한국에 오면 더는 돈이 들지 않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허나 실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자면, 1년 후 체류연장허가를 받으려면, 2년 후 한국국적허가신청을 제출하려면 한국남자의 협조가 없으면 안 되는데, 한국남자들이 돈을 받거나 ‘잠을 자는’ 등 대가가 없이는 협조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돈이 아까워 주지 않거나 ‘잠을 자기’가 싫어 불법이 된 조선족 여성들이 허다하다. 안도에서 온 탁모 여인(38세)은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본신문사에 방문하여 첫마디로 하는 말이 “그 XX를 죽이고 싶다.”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는 3년 전에 브로커의 감언이설을 철석같이 믿고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왔다. 헌데 오자마자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하는데 한국남자가 100만원을, 두 번째 체류연장 시 200만원을, 국적취득허가신청을 하는데 400만원을, 그리고 세 번 ‘잠을 자’야만 협조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국적취득허가신청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온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국적까지 취득하려면 한국남자한테 일정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위장결혼자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다. 둘째 브로커가 잡히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위장결혼자 중 일부는 브로커가 잡혔거나 결혼대상자인 한국인이 잡히면 따라서 수배자가 되고 단속에 걸리면 강제추방 된다. 문제는 이럴 경우 위장결혼자들이 숨어 살아야 하고 이혼을 하고 싶어도 매우 힘들다. 필자가 지난 2006년 제2차 동포자진귀국 프로그램 시행 시 이 부류의 위장결혼자 100여 명을 일처리 해주는 과정에서 그들은 정신적으로 너무 시달려 대다수가 ‘바보’로 될 정도로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셋째 위장결혼이 범죄라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한국법에 의하면 위장결혼은 형사범죄에 속하며 일단 법적으로 위장결혼사실이 판명되면 100~300만원의 벌금을 물게 하거나 혹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1년이란 판결이 선고된다. 허나 위장결혼자 중 대다수는 자신의 위장결혼 행위를 한국에 오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여기고 있을 뿐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사법당국을 욕하고, 브로커나 한국인을 고발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거나, 돈만 날리고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법에 신고하여 돈을 되돌려 받겠다고 한다. 뇌물을 받은 자만 위법행위일 뿐만 아니라 뇌물을 준 사람도 똑같이 법적제재를 받는다는 도리마저 모르고 있다. 타인을 물에 빠뜨리려면 자기 자신의 발부터 물에 적셔야 한다는 도리를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넷째 한국인에게 여러모로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온다. 위장결혼을 한 한국남자들은 한국에서 직업이 없거나 신용불량자이거나 장애인이거나 심지어 엉덩이를 들이밀 곳조차 없는 노숙자 등 가장 밑바닥에서 헤매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부류의 한국인들이 200~300만원이란 돈을 받아먹고 호적을 더럽히면서까지 조선족여성들과 위장결혼을 한다. 이들은 조선족여성들이 한국에 오기만 하면 이런저런 명목으로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거나 ‘잠을 잘’ 것을 요구한다. 때문에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온 조선족여성들은 그들에게 여러모로 끊임없이 시달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당치도 않은 논리이지만 위장결혼에 나선 한국인도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즉 브로커가 잡히면 따라서 잡히는데 300만 원 정도의 벌금을 물고 나면 버는 것이 전혀 없을뿐더러 호적만 더럽히고 만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욱이 조선족여성들한테서 보상을 받으려고 ‘목을 조이고 있다.’ 다섯째 도박성으로 위장결혼에 임한다. 일단 한국에 와보고 남자가 괜찮다 싶으면 같이 살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위장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장으로 시작한 혼인이 결국 진짜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허나 끝까지 살아가는 부부는 극히 드물다. 여섯째 이중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온다. 중국에서 남편과 가짜로 이혼하고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온 후 남편이 따라서 한국에 온 조선족여성들은 한국남자와 본남편과의 사이에서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 이중고통을 겪게 된다. 일단 한국에 왔으니 합법으로 체류해야 하고 내친김에 국적까지 취득하려면 한국남자를 잘 대해주어야 하는데 중국에서 따라온 본남편은 여러모로 ‘어찌는 갗고 살피기 때문이다. 아무튼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온 조선족여성들은 한국생활이 몹시 고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장결혼 건수는 늘어나고 있고 천국이 아닌 지옥에 빠져드는 조선족여성들이 날로 늘어만 가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비극이 줄어들게 하려면 조선족이 자유로 한국에 왕래할 수 있게끔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H-2비자의 시행이 실로 값진 것이라 인식된다.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1부 사례로 본 한국인-조선족 국제결혼실태분석-국적이 뭐길래? 5.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결혼하고 있는 조선족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연변여성(2007.1)'에 조선족 소설가 허련순 씨가 <더 크고 소중한 것은 우리가 버리고 있는 것들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저자가 한국인이 조선족여성과 결혼하려고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연길시 00결혼소개소를 찾았다. 00결혼소개소의 사무원은 한국인을 보자마자 마치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이 열정적으로 맞았고 한국인 한 사람에 무려 10여 명의 조선족여자를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헌데 한국인은 10여 명의 조선족여성을 상대로 마음대로 고를 수 있고, 거꾸로 10여 명의 조선족여성은 모두 가 결혼할 대상자의 그 어떠한 조건도 따지지 않고 무작정 OK라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사례는 비단 허련순 씨 한 사람만 목격한 일이 아니라 한국인이 중국결혼소개소를 통해 조선족여성을 소개받을 경우 거의 다 똑 같이 벌어지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조선족은 한국인과의 국제결혼을 코리안드림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결혼할 대상자의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무릇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OK 싸인을 보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10여명의 조선족여성가운데 하나 점찍으면 당일로 혼인약속을 하고 당일로 여자 측의 부모를 만나고 당일로 잠자리를 같이 하는 등 번개부부가 된다.  일부 한국인들은 조선족들의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조선족여성들을 농락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 한 사람이 조선족 여러 명을 상대로 ‘잠도 자고’, 여러모로 환대를 받고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혼인을 포기해버리면 조선족여성들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만다.  또 일부 한국인은 여자 집에 머무르는 불과 7~8일 되는 동안에도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거나 여러 가지 추태를 부려도 여자는 임시적으로 기분만 상해할 뿐 개의치 않고 한국에 시집온다.  이렇게 애정이 배제된 채 번개 불에 콩을 굽듯 이뤄진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 혼인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당연히 말도 많고 탈도 많기 마련이다.  용정시에서 온 박모 여인(40세)은 보험회사에 근무했고 5년 전 전 남편과 이혼하고 딸애를 키우면서 살다가 2년 전에 연길00결혼소개소를 통해 60세인 한국인을 결혼대상자로 소개받았다.  한국인은 박모 여인을 만난 이튿날 하루 종일 여자를 옷을 못 입게 하고 섹스를 요구했다. 박모 여인은 한국인을 변태라 욕하면서 거절하니 남자는 창문유리를 부셔버리면서 “나와 결혼할거냐? 말거냐?”면서 큰소리 쳤다. 그녀의 엄마가 “유리를 부수는 자가 앞으로 사람도 때리지 않겠느냐면서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고 하자, 한국인은 “저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여태껏 여자를 때려본 적이 없고, 댁의 따님은 하늘이 저에게 내려준 선물이니 잘 대해줄 것을 맹세한다.”고 삭삭 빌었다. 한국인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모녀는 결국 결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조선족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즉 만약 같은 조선족 남자가 여자를 만난 이튿날부터 한국인처럼 추태를 부린다면 그 결혼이 성사될까? 두말할 것 없이 모두 답은 “NO"일 것이다. 허나 그 결혼이 성사된 가장 기본 요소는 남자가 어떻게 어떤 일을 저지르든 간에 그는 한국인이니깐!  만약 중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간에 여자가 한국에 와서 잘 지낸다면 왈가왈부할 것이 없지만 그녀는 한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상욕을 먹기 시작하고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당해왔으나 국적 때문에 2년 가까이 뻗히다가 끝내 가출하고 말았으며 현재 정신마저 이상해졌다. 그녀는 필자보고 “저의 국적 문제는 어떻게 되는지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왕청에서 온 강모 여인(35세)은 한국인이 중국에 가서 처음 만나고 혼인을 약속하고도 그 며칠을 못 참아 술집 여자와 놀다가 임질에 걸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국인과 결혼했다.  강모 여인이 한국에 와서 아이까지 낳았다. 허나 남편은 자주 외박하면서 그녀를 속태우게 하더니 반년 전부터 아예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놓고 집에 오지도 않는다고 한다. 필자가 “왜 이혼소송을 제출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이혼하면 국적을 취득할 수 없지 않나요. 참고 기다렸다가 국적이 나오면 이혼할 타산이예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오상시에서 온 조모 여인(29세)은 1년 10개월 동안 직업도 없고 아무런 생활력도 없는 한국인 남편을 벌어서 먹여 살리고도 욕먹고 매 맞으며 ‘비인간적’으로 살아왔다. 허나 그녀는 이제 2개월만 지나면 국적취득허가신청을 제출할 수 있으므로 그때까지는 참고 견디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 세 가지 사례와 서두에서 말한 사례로부터 볼 수 있듯이 조선족은 오로지 한국 땅을 밟기 위해 또 오로지 한국국적을 위해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과 결혼하고 있다.  실제로 진짜결혼으로 한국에 와서 남편과 갈등이 심하면 돈도 못 벌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망가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이 망가지고 나서 국적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도대체 국적이 뭐길래 조선족들이 그토록 ‘목숨을 걸고 있는지?’   이제부터 조선족은 국제결혼에 나서더라도 한국과 결혼할 생각을 버리고 진정한 감정과 애정이 토대로 된 한국인과 결혼할 생각을 갖는 자세로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9    "이제는 낯 뜨거운 일 그만, 자성해야"(김정룡) 댓글:  조회:5305  추천:82  2007-10-0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1부 사례로 본 한국인-조선족 국제결혼실태분석-국적이 뭐길래? 4. "이제는 낯 뜨거운 일 그만, 자성해야"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2007년 새해 첫 출근인 1월 2일 아침 아홉시 반, 중국동포정책민간연구소에 첫손님으로 고희(古稀)에 가까운 늙은 양주가 찾아왔고, 두 분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으며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필자가 찾아오신 영문을 물었으나 두 분은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듯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두 분은 찻물을 마시고 나서 한참 후에 겨우 말문을 연 얘기의 내용이 아래와 같다.  따님이 12년 전 여권을 위조(가명으로)하여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와서 30일 만에 아주 식은 죽 먹기로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국적취득목적이 달성되자 곧바로 이혼수속을 해버렸는데 수년 전에 조선족 남자 1명을 위장으로 결혼대상자로 한국에 데려오고 이혼한 것이다. 이런 수단을 이용하여 그녀는  얼마간 돈을 벌었다. 이번(2005년 3월)에는 친오빠를 자신의 위장결혼대상자로 한국에 데려왔다. 그러니까 친 오누이가 호적상으로 부부가 된 셈이다. 여기까지는 일이 '잘된 편'이었다.  그런데 작년 12월 20일 누군가 친 오누이의 위장결혼사실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고하는 바람에 오빠가 잡혔고 여동생은 도피중이라고 한다.  늙은 내외분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으면서 "이제 우리 아들과 딸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들의 결과에 대해 대충 짐작이 가면서도 "글쎄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고 대충 얼버무려 넘겼다.  이 일이 있고나서 며칠 후, 30대 중반의 한 조선족여인이 찾아와서 무작정   "단속에 걸려 잡힌 사람을 구해낼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무슨 사연인지 차분하게 말씀하십시오."라고 했더니  "구해준다는 확답을 받아야 얘기하겠다."고 하면서 자기고집만 부렸었다. 그날 어렵게 그녀의 말문을 열게 하였는데 사연이 이러했다.  그녀는 4년 전에 결혼으로 한국에 왔고 국적을 취득한 후 한국인 남편과 이혼했다. 그러다가 2006년 9월에 중국에 있는 친정아버지를 자신의 배우자로 한국에 혼인신고를 하고 입국시켰다. 그러니까 부녀가 법률상으로 부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3개월도 안 돼 부녀간의 위장결혼사실이 들통 나 아버지가 잡혔다.  여기서 위 두 사례의 당사자들의 결과에 대해선 잠시 접어두고 이 사건과 또 이와 유사한 조선족들의 위장결혼바람에 대한 필자의 소감을 얘기해 보려한다.  필자는 중국동포타운신문사에서 일을 하면서 조선족 위장결혼자 100여명을 상담해 보았는데 한 가지 유감으로 남는 것은 위장결혼당사자들이 위장결혼을 한국에 오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여기고 있을 뿐 이에 대해 양심적, 도덕적으로 죄책감이나 수치심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친 오누이, 부녀 간 혹은 처제와 형부…사이에 위장결혼으로 호적상으로 부부가 된데 대해서 아무런 거리낌이나 수치심이 없는 듯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조선족은 중국 56개 민족가운데서 여러모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인정을 받고 살아왔다. 따라서 조선족은 결혼관과 정조관이 여타 민족에 비해 가장 순결하고 깨끗했다. 그토록 자타가 인정하던 조선족의 결혼관과 정조관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우리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사숙고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위장결혼이 한국에 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며 운이 좋으면 한국 국적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가세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와서 모두 잘되어 뜻대로 돈을 팡팡 잘 벌어서 근심걱정 없이 잘 살수만 있다면 그나마 도덕이고 양심이고 운운할 것 없이 ‘잘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장결혼을 알선하는 소개자들은 자신들의 장사수익을 위해 “위장결혼도 결혼이기에 한국에 가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고 당사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허나 실제는 위장결혼자의 50% 이상이 한국에서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고 심지어 본래 중국에서 교사 혹은 공직에 있었던 분들이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와서 머리가 혼란스러워 정신이 이상해져 이제는 말귀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로 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그 이유는 위장결혼대상자인 한국인으로부터 쩍하면 “돈을 달라” “같이 자자” “신고해 중국에 돌려 보내겠다” 등의 시달림과, 상대를 찾을 수 없거나 상대가 협조해주지 않아 체류연장이 되지 않기에 맨 날 허구한 날 경찰만 눈에 띄면 간이 콩알만 해져 불안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결혼 자들은 2년이 되어야 국적취득허가신청을 제출할 수 있게끔 되어 있어 ‘그놈’의 국적 때문에 모진 무시와 냉대와 차별과 폭력까지 당하면서도 참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이 수두룩하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도 위장결혼자들 처럼 ‘바보’가 된 자가 굉장히 많다. 필자는 같은 조선족으로서 이러한 분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말 못할 감정이 솟구친다. 조선족들이 ‘그놈’의 국적 때문에 발목이 묶이어 이러한 비극이 초래된 것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랴!  사실 위장결혼이든 진짜결혼이든 당사자들이 한국국적취득을 원하는 것이 한국에 영원히 뿌리박고 살기위해서가 아니라 합법체류와 또 가족 혹은 친인척들을 한국에 친척방문으로 초청하기 위해서가 절대다수일 것이다.  필자는 조선족들의 위장결혼이든 진짜결혼이든 그 숫자가 줄어들게 하려면, 첫째 한국정부가 H-2비자를 발급, 혹은 이보다 더 입국규제를 완화해서 조선족들이 수월하게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해어야 하고, 둘째 중국이 하루빨리 잘 살아야 되며, 셋째 조선족 남자들이 타민족보다 백배의 노력을 경주하여 조선족 여성들을 지켜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8    다문화시대 국제결혼실태 (김정룡) 댓글:  조회:5211  추천:77  2007-10-0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제1부 사례로 본 한국인-조선족 국제결혼실태분석-국적이 뭐길래? 3. 다문화시대 국제결혼실태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1989년 동서독일이 통일되고, 1991년 쏘련이 해체됨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이 불러왔던 냉전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과 이념의 대결도 무의미해져 세상은 다문화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다문화시대의 가장 큰 변화는 타부로 취급되었던 이질적인 여러 가지 문화가 병존하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했고 따라서 금지사항으로 취급되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국가 간의 국제결혼이 그 장벽이 허물어져 불과 10여년 사이에 대폭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이 개혁개방 이래 한족이 대만에 시집간 수가 20여 만 명이고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이 한국에 시집온 수가 6만 여 명이다.  다문화시대의 국제결혼의 급증은 국제화를 추진하는 선봉꾼, 평화를 도모하는 천사, 이질적 문화를 전하는 전도사의 역할이라는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 여기서 거론하려는 국제결혼은 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단절되었던 대만인과 대륙인(중국), 한국인과 조선족사이 동족간의 국제혼인 실태를 의미한다.  민족이란 개념은 혈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즉 같은 종교, 언어, 생활관습 등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동족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동족 내의 문화의 동질성이 다문화시대에 동족간의 국제결혼 건수가 급증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동서독일의 결혼이 통일에 기여하고 통일 후 동서화합에 기여하는 등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는 점을 거울로 삼고 대륙인과 대만인의 국제결혼을 양안화합과 미래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990년 중반에 <<중국의 꿈(中國夢)>>의 저자(중국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대륙에서 대만으로 시집간 수가 5만 여 명에 이르며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양안 간에 매일 전화 통화하는 수가 10만 여차에 달한다. 이미 그들은 양안교류의 활성화와 양안의 평화를 도모하는 선봉꾼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현재 대만인과 대륙인의 결혼 수가 20여 만 명에 이르니 그들을 통해 양안 교류가 더욱 활성화 되었고 양안간의 긴장완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에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중국의 00학자는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치고 싶어도 이미 대만에 시집간 20여만 명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의미심장하게 지적했다.  지금의 추세대로 양안간의 국제결혼 수가 급증한다면 양안은 ‘결혼통일’, 즉 결혼이 통일을 촉진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는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다.  대만인과 대륙인사이 국제결혼실태는 결코 우리와 상관없는 남의 얘기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국제결혼은 앞으로 남북한 사이 ‘국제결혼’의 전주곡으로 보아야할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한국정부 당국자들은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국제결혼실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연구하여 좋은 방향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려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족은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문화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상과 이념이 북한인과 비슷하거나 같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조선족은 언어사용이 북한인과 비슷하다. 셋째 조선족은 생활관습이 북한을 많이 닮았다. 넷째 조선족여성과 북한여성은 사회참여도가 높다.  다섯째 조선족과 북한인은 성격상 비슷한 점이 많다.  모두어 말하자면 조선족, 남한, 북한은 모두 동족이지만 문화, 언어, 생활관습, 성격 등 여러 면에서 조선족은 남한보다 북한 쪽과 동질성이 강한 반면에 남한과는 이질성이 많다.  그러므로 한국은 마땅히 조선족과의 국제결혼을 앞으로 남북한의 ‘국제결혼’의 전주곡으로 삶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언젠가는 남북한도 결혼이 성사된다고 본다면 마땅히 이것을 대만과 대륙처럼  결혼이 남북교류의 활성화와 통일을 촉진하는 촉매제, 즉 ‘결혼통일’을 기대하는 방향으로 키를 잡아야 할 것이다. 물론 동족간의 국제결혼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하면,  첫째 국제결혼이 부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경제가 낙후한 나라(중국)에서 경제가 부유한 나라(대만과 한국)에 대량 시집간다. 거의 일방통행 결혼이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부유한 나라에서 이런저런 여건이 여의치 않아 내국인과의 결혼이 어려운 사람들이 국제결혼을 이용하여 장가갈 수 있는 문제가 해소되고 있으나 이 부류의 사람들이 차원이 낮은 탓으로 시집온 여성들의 이런저런 조건을 만족 줄 수가 없어 이혼율이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위장결혼 비례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대만인과 대륙인의 국제결혼이 하도 위장결혼 수자가 많아 대만에서는 입국 후 8년이 지나야만 국적취득허가신청을 제출할 수 있게끔 법으로 제정해 놓았다. 한국에서는 현재 2년이 되면 국적취득허가신청을 제출할 수 있게끔 되어 있으나 지금 추세대로 위장결혼이 급증한다면 본래 2년이 3년, 4년으로 법이 바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설사 위장결혼이라 하더라도 법적으로 위장이란 사실이 들통나지 않으면 국적취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위장결혼 건수가 모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넷째 이혼율이 폭발적으로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다문화시대에 국제결혼의 증가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나라, 이질적인 문화 환경에서 살아왔던 동족간의 국제결혼은 더욱 증가될 추세이다. 이는 서로 단절되어 있던 단일 문화에 다문화 요소가 증가되고 결혼 당사자들을 통해 국가 간의 교류도 활발해지는 등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하지만 이렇듯 문제점이 많은 동족간의 국제결혼실태를 어떻게 올바른 방향에로 이끌어 나아갈 것인가? 이에 관해선 다음 호에서 논해 보려한다.   
7    동생과 혼인신고하고 형과 살다 신세 망친 여자 댓글:  조회:4783  추천:62  2007-10-04
동생과 혼인신고하고 형과 살다 신세 망친 여자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일부 조선족여성들이 한국 땅을 밟으려고 국제결혼을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그 방법도 가지각색이여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딸, 오누이, 형부와 처제가 위장결혼을 하는 경우가 있으며 동생과 혼인신고를 하고 형과 사는 사례도 있다. 길림시에서 온 장모 여인(28세)은 3년 전에 한국에 왔는데, 당시 한국인 박모가 중국에 가서 그녀와 선을 보고 혼인약속을 했지만 신용불량자라 재산담보를 제출할 수가 없어 혼인신고를 못하고, 박모의 동생이 형을 대신해 장모 여인과 결혼수속을 하고 그녀를 한국에 데려왔다. 박모는 장모 여인과 살면서 신근한 노력으로 빚을 갚았고, 자영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그녀는 일을 하지 않고도 본가식구들을 돌볼 수 있었고, 용돈도 푸짐하게 쓰고 차도 끌고 다닐 정도로 한국에 시집온 여성들 치고는 비교적 여유 있게 보냈다. 2년이 넘어 귀화허가신청까지 제출했다. 그녀를 알고 있는 주변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부러워했다. 허나 쨍하게 떠 있던 해는 사라지고 갑자기 흐리고 광풍이 불더니 우박이 쏟아져 농사를 망치듯 그녀는 강제추방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장모 여인의 여동생이 2년 전에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왔는데 남편 강모의 심한 폭력으로 이혼소송을 제출했다. 강모는 박모와 동서간이자 친구사이여서 박모와 장모여인의 위장혼인신고사실 내막을 알고 있었다. 강모는 법원으로부터 패소판결을 선고받게 되자 보복으로 박모와 장모여인의 위장혼인신고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신고했으니 박모와 장모여인은 경찰조사에서 오리발을 내밀 수가 없어 인정했다. 결국 박모와 장모여인은 법원으로부터 각각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출입국에서 그녀에게 출국명령을 내렸다. 위장결혼사실이 밝혀졌으니 동생과의 혼인을 해소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법상 동생과 이혼수속을 하고 형과 다시 혼인신고를 못한다. 또 중국에 가지 않고 다른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하더라도 체류변경이 되지 않는다. 결과는 하나, 그녀는 오로지 중국에 돌아가는 것. 조선족여성들이 코리안드림을 이루려고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일단 한국땅을 밟으면 만사 OK라는 장밋빛 환상을 품고 오지만, 한국에 온 후 이런저런 일이 터져 뒷감당을 할 수 없어 신세를 망치는 자가 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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