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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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죄의식 떨쳐버리고 정부정책 믿고 따르자(김정룡) 댓글:  조회:5580  추천:72  2008-03-24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5부 제2차 동포자진출국 시 정부정책 허점과 동포들의 반응 2. ‘죄의식 떨쳐버리고 정부정책 믿고 따르자.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법무부의 제2차 자진출국 프로그램이 실시 된지 45일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동포들이 귀국하려는 마음은 간절하나 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은 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직도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진출국대상자 중, 특히 여권위변조자 밀입국자 위장결혼자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담하게 나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구체적인 실례로서 중국동포타운센터에 찾아오는 동포 중에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일이지만 친척 혹은 주변 사람들의 일 때문에 알아보려고 온 척 하다가, 자세한 상담을 거친 후 사실대로 고백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해서 그냥 돌아갔다가 며칠 후에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분들은 하루 속히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중국동포타운센터는 중국동포들의 권익과 입장을 대변하는 단체라는 확신을 갖고 대담하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진정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둘째 아직도 정부정책에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진출국하려는 동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확실히 재입국이 보장되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재입국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밀입국자 여권위변조자 위장결혼자들은 자신들이 구제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또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류의 분들은 우선 자신들이 “구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정부정책을 믿고 따라 움직여야 한다.  만약 정부에서 제정한 절차에 따라 움직이면 재입국이 보장되는 것이고 그러지 않고 맹목적으로 귀국하면 재입국의 길이 막혀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아 모든 절차를 완벽하게 마치면 재입국이 보장된다고 믿어야 한다. 셋째 아직도 중국 측에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권위변조자, 밀입국자, 위장결혼자들은 자신이 “죄인”이란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돌아가면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다는 것과 막연하게 중국 측에서 재입국을 협조해주지 않으리라는 억측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언비어로 떠돌고 있다. 그리고 작년에 중국 측 어느 한 공항에서 벌금을 심하게 때렸던 사실을 가지고 이번해도 그러하리라는 막연한 추측을 가지고 귀국을 주저하거나 귀국하되 어느 공항을 선택하느냐는 잔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것이다. 장춘과 연길공항에서는 여권위변조자와 밀입국자에게 최하 5백원 최상 2천의 범칙금을 책정하였으나 실제로 벌금을 낸 자는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6월 1일 길림성반석시에 거주하고 있는 김모 여인은 장춘공항에서 벌금을 심하게 때린다는 헛소문을 듣고 심양으로 갔다가 오히려 5천이라는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 요녕성 사람에게 심양에서 5천원의 벌금을 안겼다는 사실을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방보호주의가 짙기 때문에 그래도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의 공항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모두어 말하자면 과거에 지니고 있던 죄의식을 떨쳐버리고 정부정책을 믿고 또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아 출국절차를 완벽하게 마치면 재입국이 보장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며 중국 측에 대한 막연한 추측이 자진출국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말기를 바란다.
85    서울의 중국동포활동실은 뭘 하는 곳일까? 댓글:  조회:4732  추천:55  2008-03-21
서울의 중국동포활동실은 뭘 하는 곳일까?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연길시에는 골목마다 노인활동실이란 간판이 수 없이 걸려 있다. 들어 가 보면 노인들이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십중팔구는 젊은이들이 모여 마작을 논다. 통계수치를 보지 못해 그 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림짐작해보아도 족히 수 백 곳이며 대다수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 연길시 노인활동실이 요 몇 년 사이에 한국에 ‘이사’ 왔으며 개칭 ‘중국동포활동실’이란 간판을 걸고 가리봉동, 가산동, 독산동, 대림동, 구로동, 봉천동, 신림동, 신대방동, 영등포, 건국대입구, 안산, 안양 등 조선족이 집결해 사는 곳에 퍼졌고 역시 대다수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땅에서 중국동포활동실을 개설하는데 투자는 집을 맞는 보증금 1,000만원에서 2,000만 정도이고, 월세 30~60만원 정도, 마작기계를 수입하는 데 대당 100만원 들고 기타 비용을 다 합쳐봐야 200만원이면 된다고 한다. 수입은 기계 한 대 갖고도 밥벌이는 된다고 하니 3~4 대이면 수입이 짭짤할 것이다. 중국동포활동실은 마치 한국의 여느 기원처럼 푸른 혹은 노랑 종이를 붙여놓은 창문에 장기, 바둑, 마작이라고 써 붙이지만 실제로 장기와 바둑은 찾아보기 힘들고 기계마작만 갖춰져 있고 50대 초반이면 나이가 많은 편이고 20대부터 40대 사이가 많으며 실제로 돈 내기를 한다. 한국에 와서 돈 내기를 놀던 뭘 하던지 모두 나름대로의 자기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싱거운 소리할 일이 아니지만 아래와 같은 사례를 들어보니 안타까운 맘을 금할 수가 없다. 연길시에서 온 장모(41세)는 2006년 재입국으로 중국에 가 1년 머무는 동안 1,000만원 가까이 썼고, 2007년 11월 재입국할 때 100만원을 들고 와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해놓고 취업교육수업을 기다리는 며칠 사이 친구 따라 00중국동포활동실에 갔다가 마작을 놀았는데 처음에는 300만원 땄고 이에 재미 들어 계속 다니기 시작했는데 요 4개월 동안 취업교육도 받지 않았고, 집도 맡지 않은 채 매일 마작 판에 붙어 있었고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빌릴 만한 사람한테 모두 돈을 빌려 놀았는데 1,100만원을 잃었다고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할 타산인가고 물었더니 이미 발이 푹 빠졌는데 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 나에게 되묻는 것이었다. 용정에서 시집 온 박모 여인(35세)은 2년 반 동안 열심히 다방을 운영하여 돈을 꽤 벌었다고 한다. 지난 구정에 우연히 친구 따라 00중국동포활동실에 가게 되었고 손이 근질거려 놀게 되었는데 1주 사이에 800만원을 땄고 이에 재미 들어 계속 놀기 시작한 것이 요 몇 달 동안 1,500만원을 잃었다. 한국인 남편이 마누라가 마작 판에 붙어 있으면서 가정생활에 등안 해 화가 나서 이혼을 제출했다고 한다. 듣는 소문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서 일 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마작만 놀고 살아가는 조선족의 수가 꽤나 된다고 한다. 물론 중국동포활동실에 다니는 사람들이 전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업으로 마작을 노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수요가 많으니 공급이 생기고 따라서 중국동포활동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84    너무도 감개무량하여 목이 멘다(김정룡) 댓글:  조회:6079  추천:84  2008-03-18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5부 제2차 동포자진출국 시 정부정책 허점과 동포들의 반응 1. 너무도 감개무량하여 목이 멘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지난 4월 24일부터 불법체류 동포자진출국 프로그램이 실시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동포타운센터에 전화를 걸어오고 또 직접 찾아 방문하고 있다. 처음 15일 동안에는 자진하러 센터에 찾아가면 잡아가지 않느냐는 전화가 많았었는데, 지금은 이런 질문을 하는 전화는 기본상 사라지고 출국하는데 어떤 절차를 밟아야 되느냐는 질문이 위주이다. 이는 동포들이 자진출국정책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고 믿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변화는 작년 이맘때에 비해 훨씬 빠르게 전이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자진출국 프로그램에 밀입국자, 위장결혼, 여권위변조자를 포함시킨데 대해 동포들이 대단이 기뻐하고 있음을 정리할 수 있다.  <밀입국자들의 표정> 본센터를 방문하는 자진출국 대상자 가운데 반 이상이 밀입국자이다.  이는 이번 정책에 가장 반기는 것이 밀입국자임을 말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밀입국자들이 ‘죄의식’ 때문에 귀국하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일로 생각해왔었는데, 이번 정책에 의해 정정당당하게 비행기를 타고 집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고, 또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연길에서 온 박모 씨는 지난 5월 10일 귀국하기 전날 KBS2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정정당당하게 집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자주 되묻게 된다.”면서 “이번 정책에 너무도 감개무량해서 목이 멘다.”고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흑룡강성 밀산시에서 온 김모 씨는 “세 번째로 밀입국 했었는데 드디어 정정당당하게 집에 다녀올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꿈만 같다.”고 매우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밀입국자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약 이번 정책이 아니었다면 출국해서 가족과 상봉하고 일정기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밀입국할 타산이었는데, 참으로 좋은 기회를 만나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밀입국자는 경찰서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에 대해 상당히 기뻐하고 있으며 몸이 한결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다. <위장결혼자들의 표정> 불법체류자 가운데 위장결혼자가 상당히 많은 수자를 차지하고 있다. 위장결혼은 브로커가 잡히거나 동행 중 한 사람이 잡혀 기타 사람들을 고발할 경우 외국인등록증과 무관하게 이 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불법체류자로 취급된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한국인 남자 측에서 체류연장수속 시에 돈을 요구하거나 잠자리를 하지 않으면 체류연장에 협조해주지 않겠다고 협박하여 결국 불법체류자로 전락한 경우가 많다. 이 두 가지에서 첫째 부류는 수배자이며 그들은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두 번째 부류는 수배자는 아니지만 불법체류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아예 이번 기회에 정리하고 귀국하였다가 일년 후에 다시 재입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자진출국을 원하고 있다. 요녕성 심양에서 온 신모 여인은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온지 6개월도 채 안 되어 브로커가 잡히는 바람에 수배자로 되고 말았다. 올 때 천만 원을 들여왔으니 집에 돌아가면 갚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숨어 사는 것보다 어차피 귀국했다가 일 년 후에 정정당당하게 한국생활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자진출국을 결심했다고 한다.  길림성 매화구에서 온 기모 여인은 첫 번째 체류연장 때 한국남자가 4백만 원을 내라고 협박했고, 일 년 후 두 번째 연장 때는 5백만 원을 내야만 협조해주겠다고 하기에 아예 포기하고 자진출국에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진짜 결혼자도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해 이런저런 이유로 별거상태거나 아예 한국남자와 거래를 중단하여 체류연장이 되지 않아 불법체류자로 전락된 경우가 많다. 이 부류의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자진출국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있다.  길림성 화룡시에서 시집온지 일년이 되는 성모 여인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지만 국적에 발목이 묶여 그런대로 참고 견디려고 했으나, 이번 기회에 아예 국적을 포기하고 재입국해서 자유의 몸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여권위변조자들의 표정> 여권위변조들은 밀입국에 비해 올 때 고생을 덜 했고 위장결혼자에 비해 가슴을 덜 조이고 있다. 허나 그들은 남의 머리를 바꿔왔다는 심리적 부담이 있고 또 이번에 경찰조사대상에 포함되어 정신적으로 홀가분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여권위변조들은 이번 기회에 남의 이름으로 살아온 비정당한 생활을 청산하고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자진출국에 나서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번 정부정책은 동포들에게 비정당하게 살아온 부끄러운 생활을 청산하고 정정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83    중국에 수박이 있나요?(김정룡) 댓글:  조회:4413  추천:53  2008-03-17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15. “중국에 수박이 있나요?”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국생활을 수년간 해본 조선족이라면 한국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당황한 질문을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중국에 귤이 있나요?”, “중국에 전기밥솥이 있나요?” “중국에 00이 있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조선족들은 ‘저것들이 중국을 보기로 더럽게 보네.’면서 속으로 욱하고 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같은 질문도 상대에 따라 반응이 조금씩 달라진다. 수년 전에 내가 창동에서 살고 있을 때, 주인집 할머니는 나를 자기 아들은 몰라도 조카만큼은 생각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 할머니로부터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름 아니라 맛 나는 음식과 과일을 자주 가져다주시면서 중국에서 이런 걸 마음대로 먹어보지 못했을 것이니 생겼을 때 기껏 먹으라고 하신다. 나는 처음에는 할머니의 성의를 생각해서 별로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예, 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얼마 후 나는 “중국에서도 이런 걸 흔하게 먹는다.”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나의 말을 믿지 않으셨다. 어찌되었든 지금도 나는 그 할머니를 잊지 않고 있다. 며칠 전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데 사무실은 냉방이 없어 사우나처럼 더워 난리다. 한국인 셋, 조선족 셋이서 더위를 물리쳐 보려고 냉장고의 수박을 꺼내 쪼개 먹는다. 한참 시원하게 먹고 있을 때 한 한국인이 “중국에 수박이 있나요?”라고 묻는다. 조선족 한 분이 “중국에 왜 수박이 없겠어요?”라고 화난 기색으로 대답한다. 한국인은 “아니, 우리 한국에서는 60~70년대까지 잘사는 집에서만 수박을 먹어볼 뿐 일반 서민들은 먹어보지 못해 현재 중국도 그렇지 않느냐는 뜻으로 묻는 겁니다.”라고 해석한다. 나는 듣다가 “당신, 이런 말을 조선족 앞에서 함부로 하면 한방 얻어터질 수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하시오.”라고 경고했다. 그날 시원하게 먹던 수박이 갑자기 목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자식처럼 생각해주시면서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지만, 소위 조선족을 상대로 일을 하는 한국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아무튼 기분이 찜찜하다. 한국인들이 “중국에 00가 있나요?”라는 질문 속에는 물론 중국을 몰라서 그런 것도 있겠으나, 한 면으로 너희 조선족은 그토록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심리를 전제로 깔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 사람도 값싼 중국산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전여옥은 저서 <<일본은 없다>>에서 일본인이 “한국에 가스레인지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세계화를 부르짖는 일본인이 우물 안에 개구리”라고 맹비난했다. 나는 거창하게 글로벌시대를 운운할 생각은 티끌만치도 없이 그저 한국인들에게 중국을 조금이나마 더 알기를 바랄 뿐이며 대다수가 먹고 살지 못해서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자식공부 혹은 더 나은 노후의 보장을 위해 한국에 왔기 때문에 너무 값싼 중국산을 대하듯 조선족을 대하지 말아 주십사! 고 부탁하고 싶을 뿐이다.  다음 한국인들도 조선족들 때문에 황당해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한국인은 호박잎을 먹는가 하면 배추 푸른 잎을 가려내지 않고 김치를 담그는데, 조선족들은 한국인 앞에서 “이런 걸, 우리 중국에서는 돼지나 먹여요. 참 여기 사람들은 별난 걸 다 먹고 사네!”라고 쏘아붙인다. 이런 말을 듣는 한국인들은 겉으로든 속으로든 아무튼 “꼴깝들 하고 자빠졌네, 중국에서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믄서 와 한국에 돈 벌려 왔디야?”라고 비꼴 것이다.  한국은 50~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조선족들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중국에서 호박잎이나 돼지를 먹이는 어떤 산나물을 사람이 먹는다.  문제는 조선족이 한국인 앞에서 사실과 진실을 말해도 꼴깝 떤다고 비꼬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며, 한국인은 “중국에 00가 있느냐?”는 질문이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당하는 쪽은 조선족이니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82    조선족은 왜 깨끗한가? (김정룡) 댓글:  조회:4926  추천:65  2008-03-17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14. 조선족은 왜 깨끗한가?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조선족이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위생이 제일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즉 조선족은 가장 깨끗한 민족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어떤 민족은 깨끗하고 어떤 민족이 깨끗하지 못한 데는 모두 그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이를테면 유태인은 개개인이 깨끗하게 목욕하고 몸을 가꾸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항상 깨끗한 형상을 보이는 것으로서 하나님에게 책임진다고 여긴다. 고대 인도와 중동지역에서 물에 뛰어들거나 물을 뿌리거나 물로서 몸을 씻는 것을 하나의 종교적 의례로 취급했다. 기독교에도 세례(洗禮)라는것이 있는데 물로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의식이다. 때문에 세례의식을 갖고 있는 모든 종교를 신앙하는 민족들은 깨끗하다. 중국인은 동방문화를 창조했고 주변민족들의 개화를 도와왔지만 중국에는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세례의식이 없었다. 중국인은 외면보다 내실을 다지는 민족이다. 고홍명(辜鴻銘)은 그의 저서《중국인의 정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실제로 진전한 중국인은 영혼이나 정감적인 생활에 너무 치중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꼭 필요한 인간적 욕구마저 지나치게 무시하면서 생활한다. 중국인이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못하고 청결하지 않는 생활환경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민족은 역사적으로 내실보다 외면에 더 신경 쓰는 민족이다. 그리하여 조선민족은 깨끗하다. 그리고 조선민족은 역사적으로 목욕재계와 세례의식이 있었다. 이에 관한 실례로서《삼국유사》에 기재된 이야기만 열거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박혁거세와 알영의 목욕 이야기 박혁거세는 2천 년 전 신라를 세운 초대왕이고 알영은 그의 부인이다. 그들 부부탄생설화에 목욕재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 양산아래 나정 옆에 이상스러운 기운이 전광과 같이 땅에 비치더니 거기에 백마 한 마리가 꿀어 앉아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보니 한 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모습이 단정한 아름다운 동자가 나왔다. 경이히 여겨 그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이 청명한지라. 이로 인해 그를 혁거세왕이라   이름하였다. …… 당시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가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인을 찾아서 짝을 지어야할 것이라 하였다. 이날에 알영정 하에 계룡이 있어 나타나 왼편 갈비에서 동녀 하나를 탄생하니 자태와 얼굴은 유난히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 북천에 가서 목욕시키니 그 부리가 빠짐으로 그 내를 발천(拔川)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에 신화적 색채가 가미된 것은 사실이지만 하여튼 2천 년 전부터 조선민족은 이미 목욕재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박혁거세와 알영이 목욕을 통해 불온전 했던 인으로부터 온전한 인간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가락의 계욕일 가락을 가야(伽倻)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경상도남부에 있었던 나라였다. 2천 년 전 그나라에 수로왕이 탄생하기 전에 이미 계욕일이라는 종교행사가 있었다. 계욕(禊浴)이란 요사를 떨어버리기 위해 해마다 음력 3월 상사일(上巳日)과 음력 7월14일에 물가에서 지내는 제사를 가리킨다. 계욕이란 말 그대로 강물에 뛰어들어 목욕하고, 목욕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더러운것을 씻어버리고 청결한 상태를 보존함으로서 요사가 인간의 몸에 접근하지 못하게끔 하는 일종 액막이 세례의식이었다.  세째 목욕으로 징악하다 옛날 신라에 익선(益善)이라고 하는 한 지방관리가 있었는데, 탐욕심이 많고 부패해서 조정의 심기를 건드렸다. 조정에서 익선을 잡아다 버릇을 고쳐주려고 했으나 눈치 빠른 익선이 도망갔기에 대신 그의 장자를 잡아다가 한겨울 극한의 날에 성안 못에서 목욕시켰더니 얼어붙어 죽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더러운 탐욕심을 목용을 통해 씻어버리게 하려는 징악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넷째 목욕을 통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이야기 옛날 신라에 부득과 박박이란 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도를 닦으려고 산속에 들어갔는데, 부득이 남암에, 박박이 북암에 기거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 질 무렵 나이 20된 여자가 있어 그 자태가 아름답고 향기를 풍기며 북암에 찾아와서 기숙하기를 청하였다. 박박은 “사찰은 청정을 중히 여기므로 너는 가까히 할 곳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녀는 남암에 찾아가니 부득이 불쌍히 여겨 기숙을 허락했다. 이윽고 밤이 늦어지자 여자가 불러 말하되 내가 마침 불행히 산고가 있어 바라건대 스님은 짚자리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부득이 불쌍히 여겨 아니든지를 못하고 은근히 초불을 밝히니 그녀는 이미 해산하고 또 목욕하기를 청하였다. 부득이 애달피 여겨 마지못해 통을 준비하여 여자를 그 가운데 앉히고 더운 물로 목욕시켰더니 물에서 향기가 풍기고 금액으로 변하였다. 부득이 크게 놀라니 여자가 가로되 “스님도 이 물에 목욕하시옵서.”하니 부득이 그 말에 쫓아 하니 홀연히 정신이 맑아짐을 깨닫게 되고 살결이 금색이 되고 그 옆에 연대(蓮臺: 부처님이 앉는 곳)가 생긴 것을 보았으며 마치 자신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느껴졌다. 박박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밤에 염계(染戒: 스님은 여자를 범하지 않는다는 계율을 어긴다는 뜻)했을 것이니 놀려주려 하고 이르러보니 부득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박박이 넙쩍 엎드려 절을 하면서 “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니 도와 달라”고 말했다. 부득이 말하기를 “너도 저 물에 목욕하면 부처  님처럼 될 수 있다.” 과연 박박이 목욕을 통해 역시 부득처럼 되었다. 이상 네 가지 이야기에서 첫째는 목욕이 불온전한 인간이 온전한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수단이었고, 둘째는 액막이 행사였으며, 셋째는 징악수단이었고, 넷째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수단이었다. 조선민족은 옛날에 제사를 굉장히 중시했는데 제사용 술을 빚거나 떡쌀을 다른 때 반드시 깨끗하게 목욕하고 입에 백지를 물었다. 조선민족이 백색을 숭상하고 흰옷을 입기를 좋아하는 것도 역시 깨끗함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역사를 알고 보면 백의동포라는 말속에 조선 사람은 깨끗한 민족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목욕을 단순히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수단으로만 간주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정신적인 더러움도 함께 씻어내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간주해왔다. 즉 목욕을 통해 과거를 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로 여겨왔다.1635년 청나라가 조선반도를 침략했을 때 60만에 달하는 인질을 잡아갔다. 무능했던 조선왕조는 9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도 귀향시키지 못했다. 충신 최명길이 조정과의 합의를 거쳐은 2천5백 냥을 갖고 청에 가서 2만9천여 명을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당시 인질중 절대다수가 여자였으므로 그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다. 환향녀들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귀국했으나 그녀들에게 돌아온 것은 오히려 냉대와 비방과 욕설과 버림뿐이었다. 그 주요 이유는 “전개를 버리고 몸을 더럽힌 아녀자들이 어찌 선조님의 제사를 받들 수 있는가는 것이었다. 우의정 장유(張維)마저 소환되어온 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버림받은 여인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더러는 목을 매어 죽고, 더러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길가에는 시신이 즐비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왕은 자신의 비정 (정치를 잘못했다는 뜻)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초라고 탄식했다.이 난리판에 최명길이 다시 입궐하여 왕에게 진언했다. “전하, 궁여지책이긴 하오나, 각 고을에 있는 강을 지정하오시고, 정해진 날에 환향녀로 하여금 지정된 강에서 몸을 깨끗이 씻게 하는 것으로써 심신을 모두 닦은 것으로   하되, 그런 연후에는 환향녀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리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왕은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지라 최명길의 건의에 따라 교지를 내렸다.“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경상도는 낙동강, 충청도는 금강, 전라도는 영산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 함경도는 압록강을 각각 회절강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최명길은 슬기롭게 본래 조선민족역사에 있었던 목욕재계와 세례의식을 궁여지책으로 내걸고 수많은 환향녀를 구해냈다. 조선민족이 깨끗한 또 하나의 이유는 체면의식이 강한데서 비롯되었다.중국인과 일본인도 체면의식이 강하다. 하지만 중국인의 체면의식은 겉보다 속을 챙기는 체면이고 일본인은 수치를 허용치 않는 체면이다. 중국인은 겉이야 어떻든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음의 자존심을 중히 여기는 체면을 강구한다. 그래서 중국인은 외면이 깨끗하지 못하다. 일본인은 모든 면에서 완벽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깨끗하다. 조선민족은 내실보다 외면에 대한 체면이 가장 강한 민족이다. 즉 조선민족은 외면의 형상에 대단히 신경 쓴다. 세상에서 조선민족여성처럼 화장을 짙게 하는 민족은 없다. 그리고 옛날에 조선민족은 서로 뉘 집의 두지에 쌀이 얼마 있는 것까지 알정도로 터놓고 살았다. 이는 그만큼 서로 남남이 한집안식구처럼 지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동시에 조선민족은 타민족에 비해 유난히 남의 말을 입에 올리기를 좋아하고 특히 남의 흉보기를 좋아한다. 이런 관습이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동시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즉 조선민족은 남한테 흉을 잡히지 않게끔 노력하고 남의 말밥에 오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개개인의 외면형상과 집안을 늘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매우 중시해왔다. 농촌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마을에 한두 집은 꼭 게으르다. 마을사람들은 늘 게으른 집을 말밥에 올리고 또 제집안식구나 혹은 주변사람들이 게으른 표현이 있으면 아무개네처럼 어쩌고저쩌고 하는 식으로 말한다. 조선민족은 절대다수가 그 ‘아무개’에 속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더욱 깨끗하다. 조선민족이 왜 깨끗한가는 데 관해 역사적으로 그 원인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계속 깨끗한 민족으로 평가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썼다.
81    장례식장에서의 남녀교합(김정룡) 댓글:  조회:6194  추천:70  2008-03-14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26. 장례식장에서의 남녀교합의식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장주(庄周:장자의 본명)가 젊었을 때 초나라(楚國)에 여행을 갔다. 그가 본 초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중원에 비해 너무 달랐고, 따라서 그들이 인이니 예의니 도덕이니 하는 인위적이고 허위적인 문화속박이 없이 자연의 섭리 그대로 살아가는 삶이 몹시 부러웠다. 또 초나라 사람들이 손님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도와주고, 성격이 모두 낙천적이어서 마치 고민을 모르고 살아가는 듯 했다. 또한 장주는 초나라의 어떤 풍속에 대해 몹시 놀라기도 했다.  어느 하루 장주를 도와주었던 젊은 오누이가 미친 듯이 경쾌하고 즐겁게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장주가 물었다. “무슨 굉장한 기쁜 일이 생겼나 보지요?”  오누이가 대답한다. “그럼요, 우리 어머님이 지난밤에 죽었어요.”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그렇듯 기뻐하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니요?”고 장주가 의아해 물었다.  오누이는 장주의 말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당시 초나라 사람들은 중원처럼 사람이 죽으면 비통한 심정으로 울며불며 곡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生과 死는 모두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똑같이 기쁜 일이지 절대 슬픈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고대사회에서 초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족들이 인간의 죽음을 비극으로 여기지 않고 기쁜 일로 취급했다.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장사법과 제사법도 천차만별이다.  중국신화연구학자들의 지적에 의하면 중국운남성(云南省)의 하니족(哈尼族) 등 여러 소수민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젊은 남녀들이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광란하게 섹스를 한다고 한다. 만약 그 장소에서 서로 섹스 상대로 된 젊은 남녀가 부모들에게 혼인을 청하면 부모들이 거절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볼 때 장례식장에서 마땅히 슬프다고 한바탕 곡을 해야 하나, 그들이 기쁘게 오락을 즐기고 섹스까지 하는 것은 굉장한 불효를 저지르는 행위로 인식될 것이다. 허나 그들은 오히려 그러한 행위야 말로 사자(死者)에 대한 최대 효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례식장에서 오락을 즐기고 섹스까지 하는 풍속은 어떻게 유래되었으며, 왜 그렇게 할까?  아득히 먼 옛날 인류는 남녀교합을 생식행위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신력을 갖고 있다고 인식하고 죽음에 항거하는 신적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서 인류의 생식순환이 사자의 부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인식하고 사자 앞에서 열심히 남녀교합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주나라 역대 천자들이 매년 매신(媒神)에게 농업풍수를 기도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수많은 청년 남녀들을 모아 놓고 들판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난 후, 쌍쌍이 짝을 지어 후미진 곳을 찾아 ‘야합(野合)’했다고 한다. 공자님의 부친 숙양흘도 그런 장소에서 16세 꽃다운 안씨(顔氏) 녀를 낚아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던 것이다.  ‘매신’은 조상신이며 사람이 죽으면 모두 ‘매신’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자 앞에서 섹스 하는 것은 섹스의 생명 신력을 빌어 생명순환을 지속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0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자 댓글:  조회:5548  추천:111  2008-03-09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자 김정룡 재한 조선족 칼럼니스트 인간은 어릴 적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것과 어릴 적부터 배워온 상식을 쉽게 깨지 못하는 관성을 갖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족은 중국이란 문화 환경에서 성장하고 배워온 이데올로기적인 지식을 진리라고 믿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답답함을 금할 수가 없다. 정인갑 선생님이 쓰신 나의 ‘사관’에 대한 반론의 글은 역시 중국학자들이 칼·맑스의 역사5단계설을 천하의 유일진리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중국봉건에 관한 학설들을 옮겨놓은 것이라고 나는 본다. 물론 필자의 ‘견해’와 ‘주장’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의 것이므로 독자들이 어떤 입장이든 반론과 비평을 제기하는 토론문화는 십분 찬성한다. 허나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직도 절대다수 조선족학자나 문인들이 칼·맑스의 이론과 상식은 천하의 유일진리이고 이에 대한 異見은 ‘반동’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최균선 선생님은 “과학적이고 역사학적이며...역사발전의 5단계설은 세계적인 공인을 받는 이론인데 그걸 뒤집을 천재는 아직 세상에 나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했는데, 이는 현시대에 있어서 너무나도 상식 밖의 견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칼·맑스는 인류사회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및 착취와 피착취의 대립구도로 보고 역사를 ‘계급’이란 새로운 개념을 적용하여 분석했으며 아울러 직선발전사관에 의해 역사5단계설을 내놓았다. 따라서 칼·맑스는 헤겔의 소외론을 이어받아 기왕에 소수 착취계급이 다수 피착취계급을 소외시킨 불합리한 사회를 다수 피착취계급이 소수 착취계급을 소외해야한다는 주장을 했고, 이렇게 하려면 오로지 플로레타리아가 혁명적인 폭력수단으로 브루죠아를 뒤엎고 정권을 탈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칼·맑스의 이 일련의 이론과 주장을 러시아, 중국을 비롯한 일부 나라들이 받아들였고, 중국의 경우 칼·맑스의 변증유물론을 수입해서 무릇 역사적으로 유물론자는 좋고 유심론자는 타도의 대상으로 분류하고 중국전통문화의 원조인 황로지학, 공자의 유학을 뒤엎었다. 따라서 칼·맑스의 역사5단계설에 근거하여 무릇 낡은 것이면 모두 정치적인 목적으로 ‘봉건’이란 렛델을 붙여놓고 뒤엎는 이른바 破四舊 운동을 일으켜 황하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현대중국의 비극은 본래 모든 사물을 조화와 화해의 일원론의 전통을 버리고 서양의 모든 사물을 대립으로 보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으로 시작해서 칼·맑스로 이어진 이원론적인 철학을 받아들여 불필요한 과격한 문화운동을 일으킨데 있다. 여기에 ‘봉건’이란 개념을 확대하여 널리 적용시킨 것이 크게 한 몫을 했다고 나는 본다. 우리의 논의의 초점은 칼·맑스의 역사5단계설이든 기타 이론과 주장들이 일부공산권 국가들에서 진리로 받아들일 뿐이지 결코 최선생을 비롯한 많은 조선족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적인 공인을 받는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미의 선진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에서는 역사를 고대, 중세, 근세, 현대로 획분하고 봉건이란 일부 지역역사의 한단계일뿐 중국에서처럼 광의적인 의미로 보고 두들겨 맞추지 않는다. 임어당은 그의 <<중국인>>에서 “중국역사에 만약 계급이 있었다면 아문계급과 피아문계급만 존재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뜻인즉 칼·맑스의 계급이론을 반대했던 것이다. 한국TV매체에서 강펀치를 날리고 있는 도올·김용옥 선생은 인류문화5천년역사를 왕정과 민주 두 개념으로 획분한다. 즉 왕의 일인 독재통치시대를 통털어 왕정이라 명명하고 현시대를 민주라 명명한다. 역사를 보는 사관은 천차만별이고 다종다양하다. 그러므로 칼·맑스의 역사5단계설이 세계적인 공인을 받는 이론이란 주장은 현시대에서 어처구니없는 어불성설이다. 만약 일부조선족학자들이 중국의 기존의 봉건에 관련된 이론들을 들고 나와 나의 견해를 반박한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다만 그러한 이론들은 중국학자들이 역시 정치적인 배경에서 두들겨 맞춰 놓은 이론이란 나의 관점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 할 것은 기독교신도는 기독교를, 불교도는 불교를, 이슬람교도는 이슬람교를 모두 자신이 믿는 종교를 세상에서 유일진리라고 고집한다. 그래야만이 신앙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허나 분명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떠한 종교든지 세계적인 공인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비록 종교는 아니지만 신앙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어떠한 종교보다 못지않다. 칼·맑스의 이론도 세상의 수많은 이론 중의 하나의 이론일 뿐이지 결코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제발 칼·맑스의 역사5단계설이 세계적인 공인을 받는 이론이란 주장을 버릴 것을 충고한다.  
79    조선족은 왜 냄비성이 강한가?(김정룡) 댓글:  조회:5016  추천:82  2008-03-07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13. 조선족은 왜 냄비성이 강한가?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조선민족은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성격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성격을 한국에서는 ‘냄비정신’이라 하고 연변에서는 ‘쟁개비사상’이라 한다. 즉 조선민족은 흔히 쟁개비처럼 보르르 끓다가 일단 불이 꺼지면 바짝 식어버린다. 고추장 맛보기라는 말이 있는데 역시 조선민족이 흔히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현상을 두고 생겨난 말이다. 여기 한 샆 저기 한 샆 뜨나가는 결국 물을 구하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조선민족의 이러한 성격을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조선민족은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성격을 갖고 있을까? 그 주요 원인은 멋을 추구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민족은 멋의 민족으로서 멋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생활철학처럼 굳어졌다. 멋의 특징은 시대성이나 유행성이 강하다. 조선민족은 늘 시대성과 유행성을 쫓다보니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릴 수밖에 없다. 처음에 멋이 있는 일처럼 생각되어 시작해놓고는 새로운 멋이 눈에 뜨이면 당금 본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달라붙는다. 새로운 멋을 추구하는 것은 상향심이 높은 표현으로서 긍정적인 면이 있는 동시에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첫째 지구력과 인내력이 부족하다. 중국에는 《우공이 산을 옮기다》라는 우화가 있다. 이 우화는 중국인이 지구력과 인내력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반영한 대표적인 이야기다. 문화혁명 때 이 우공이야기가 《노삼편(老三篇)》이라 하여 당시 조선족도 글자를 때운 사람이면 전부 암송했다. 하지만 그저 정치적인 흐름으로 맹목적으로 외웠을 뿐 그 내용을 음미할 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조선족은 저마다 우공이야기를 외울 정도라면 다소나마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성격이 개변되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무리 우공이야기를 골백번 외웠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민족성격이란 아무리 태풍과도 같은 정치바람이라 할지라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민족성격은 그만큼 생명력이 질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은 예로부터 지구력과 인내력이 강한 민족이다. 돈황막고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 벽화는 모두 4, 5백년을 거쳐 완성된 작품이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한무제한테 궁형(宮刑: 불알을 거세당하는 형벌)까지 당했고 또 한무제가 사마천이 애써 써놓은 원고를 수차례 불에 태웠다. 그러나 사마천은 중도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써냈다. 사마천의 지구력과 인내력의 덕분에 중국은 세상에서 역사기재가 가장 빠르고 완벽한 사서를 남기게 되었다. 당나라 무측천이 집정할 때 누사덕(婁司德)이란 재상이 있었는데, 동생이 지방 주자사(州刺使)로 부임되어갈 때, “만약 다른 사람이 너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화를 내지 말고 닦지도 말고 스스로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한다.”고 교육시켰다. 실제로 주변사람들이 누사덕을 많이 헐뜯었지만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자기가 할일에만 몰두했다. 결국 누사덕은 오래 동안 관리노릇을 해먹었으며 재산도 많이 모았다. 일본인은 평생 사전을 하나 만들고 세월을 보낸 학자가 있다. 일본에서 만든 전쟁시대를 반영한 영화를 보면 중국이나 조선처럼 멋이 있는 전투장면을 많이 담는 것이 아니라 날씨가 춥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에 묵묵히 수일동안 강행군하는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다른 민족이 보면 대단히 갑갑증을 느낄 수 있으나 이것이 곧 일본인의 지구력과 인내력을 담은 내용이다.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얼씨구절씨구 띵까당 땡까당 하기를 좋아하여 역사기재를 남기지 못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사서가 있기는 하나 주로 중국사서의 기재를 근거로 하여 지은 것이다. 그래서 현재 조선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역사기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굉장히 애를 먹는다. 현재 한국에서는 쥐꼬리만 일을 놓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지만 아무리 큰일이라도 일단 지나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까맣게 잊고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식을 공부시킨다든가 소까지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고 하는 조선족이 일단 어른이 되면 책을 읽지 않는다. 연변도서관의 조사에 의하면 지식인이 모인 직장의 직원들이 열 명 중 두세 명이 일 년에 책 한두 권을 읽으나마나 하고 나머지는 일 년 내내 책을 손에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연변사람들이 아무리 대학을 나와도 술판에서 한다는 얘기가 탸오펑(挑風: 남녀가 서로 끼어 앉는다는 뜻)이요, 정부요, 돈이요, 거기다 여자들 앞에서 걸쭉한 쌍소리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의 입에서 무슨 영양가가 있는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지식인들의 처지가 이러하니 기타 사람들의 정황이야 더 말해 무얼 하랴. 한국도 인구 당 독서율이 1,5권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은 10,7권이고 일본은 9,8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미국과 일본의 국민소질이 그냥 맹목적으로 높아진 것이 아니다. 그들 나라들이 세계앞자리를 달리고 있는 데는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으려면 흥미만으로는 안된다. 반드시 지구력과 인내력이 필요하다. 조선족이 문화수준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지금의 상태대로 나아간다면 앞으로 곤란하다. 연변의 학부모들 중 적지 않는 사람들이 하루건너 술판을 벌리고 노래방에 다니지 않으면 동네 마작 판에 붙어있으면서도 애한테는 공부를 하라고 한다. 어른들이 이 모양인데 자녀들이 어떻게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연변의 학부모들은 정신을 차리고 인내력이 있게 집에 붙어 있고 또 아이들의 곁에서 공부를 도와야 한다. 나의 사촌형수는 문화혁명시기의 고중생이라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딸애가 매일 저녁 늦게 까지 공부하는 것을 동무해주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도 아닌 세월을 몇 년 간 보냈다. 엄마의 정성덕분에 딸애가 중점대학에 갔고 성품도 매우 밝다. 만약 엄마가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면 딸애가 성공할리가 만무하다. 유태인이 과학자가 많은 것은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다. 유태인 엄마들은 우리연변의 엄마들처럼 술판, 노래방, 동네 마작 판에 붙어있지 않는다. 둘째 빨리 빨리하는 성격 반짝 끓고 바짝 식어버리는 것은 빨리 끓고 빨리 식어버린다는 뜻이다. 조선민족은 두뇌가 민감하기 때문에 새로운 일에 빨리 달라붙는다. 이는 매우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뒤를 꼬아야하는데 중도포기가 많다. 세상의 모든 민족은 거의 다 마지막고비가 관건이라고 말하지만 조선민족은 “시작이 절반이다”라고 말한다. 무슨 일을 일단 시작해놓으면 마치 다 된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시작하자마자 돈을 벌기도전에 돈을 쓰는데 신경 쓴다. 한국지하철역에 가보면 사람마다 뛰어다니거나 걸음이 대단히 빠르다. 필자의 걸음이 중국에서는 빠른 편에 속하지만 한국에 가면 만만디에 속한다. 한국 사람들이 굳이 이번 차를 놓치면 큰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냥 생활습관과 생활절주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마다 마치 집구석에 불어라도 난 것처럼 뛰어다닌다. 한국인이 생활절주가 빠른 것은 자본주의생존경재의 압박도 있겠으나 본래부터 전승되어온 관습이다. 조선에서도 천리마속도로 사회주의건설을 한답 시고 맨날 뛰어다닌다. 조선민족은 어릴 때부터 밥도 빨리 빨리 먹으라 하고 신부름도 빨리빨리 하라고 하고 …… 모든 일에서 빨리빨리 하라고 가르친다. 세상에 냉수에 밥을 말아서 삽시간에 후르륵 하고 먹어치우는 민족은 조선민족밖에 없다. 중국인은 밥상이 오랜 것이 특징인데, 중국인은 먹었다는 결과보다 먹는 과정을 WMF긴다. 이에 비해 조선민족은 먹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먹었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중국인은 요리를 먹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민족은 술을 마시기 위해 안주를 먹는 것이 절대적이다. 조선민족이 술주정뱅이 많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주로 급하게 빨리빨리 마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민족은 해외동포를 포함해서 7천만인데 그중에 노벨과학수상자가 단 한명도 없다. 교육을 중시하는 민족이라고 소문났는데 왜일까? 일본에서는 대학교수도 아닌 평범한 직원이 2002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조선민족은 일단 대학을 나오면 빨리빨리 성취하는 것이 급선무다. 조선민족이 추구하는 성취는 빨리빨리 진급해서 멋있게 살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민족은 진경윤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연구에만 몰두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 더욱이 평범한 직원이 연구 성과를 올려 노벨상까지 받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없는 일이다. 연변의 경우 조선족사회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가히 “지식 세계를 대상하는 지식이 아니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자연분야가 아니고 사회분야를 말한다. 중국조선족지식인이 《4서 5경》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연변대학 사회과 교수가 《성경》을 보고 이해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즉 조선족지식인은 중국고전지식도 없고, 자민족역사지식도 없고, 《성경》지식도 없고 불교지식도 없다. 《코란: 이슬람교경전》에 대한 지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때문에 조선족들이 발표한 글들을 읽어보면 배울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조선족지식인들은 모두 성취감에 빠져있다. 셋째 대충대충하는 성격 세상에서 조선민족만큼 모든 일에서 ‘괜찮다’ , ‘일없다’고 하면서 대충대충, 건성건성, 어지간히 하는 민족은 없다.조선민족이 대충대충하는 성격이 조선시대에 “무슨 일이나 따지고 들면 양반이 아니다”라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필자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조선민족이 대충대충하는 성격은 과정보다 결과를, 즉 무슨 일에서나 빨리빨리 결과를 얻어 빨리빨리 성취하려는 심리소질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민족은 멋에 대한 추구가 마치 종교처럼 굳어져왔는데, 멋에는 그렇다할만한 기준이 없다. ‘제멋대로’라는 말이 말해주듯이 멋은 제나름이다. 그 어떤 기준이 설정되지 않은 것을 신앙하고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충대충하는 성격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서양 사람과 일본사람은 애를 키울 때 칼로리가 어떻고 영양가가 어떻고 하면서 과학적으로 키운다. 절대 애가 하자는 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이에 비해 조선족엄마들은 거개가 애가 하자는 대로 해준다. 조선족엄마들이 애한테 모질지 못한 것은 정의 문화 때문이다. 정의 문화는 합리(合理)보다 합정(合情)에 치중하기 때문에 대충대충하게 된다. 넷째 높은 데만 바라보는 성격 조선민족은 큰일은 못해내고 작은 일은 시시하게 여기는 것이 또 하나의 성격특징이다.우리주변에는 작은 일은 시시하게 여기고 놀고 있으면서 맨날 떵대 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현상도 역시 빨리 또 크게 성취해서 멋있게 살아보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어떤 일에 반짝 열을 올리다가도 어느 천 년에 부자가 되겠느냐면서 금방 때려치운다. 우리주변에는 미용원을 꾸렸다가 식당을 경영하고 다방을 챙겼다가 안마방을 운영하다가 결국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무슨 일을 벌렸으면 꾸준하게 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쪽 산에서 바라보면 저쪽 산이 더 높아 보이고 저쪽 산에서 …… 맨날 높은 산만 쳐다보면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한 민족의 성격이 일단 형성되면 세세대대로 전승된다. 아무리 외부환경의 지배가 있어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조선반도는 수천 년 동안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왔지만 중국인의 깊이와 넓이를 배워내지 못했다. 36년 동안 일본인의 지배를 받았지만 일본인의 정확함, 진지함, 완벽함을 배우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타민족을 따라배우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태인처럼 자기네 것을 지킬 것은 지키면서 타민족의 우수성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만 세계에 소문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 조선족이 무수한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좀 느긋하게 깊이와 넓이 그리고 세밀함을 갖춰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78    조선족은 왜 음주가무를 즐기는가?(김정룡) 댓글:  조회:4968  추천:56  2008-03-07
재한조선족문제연구중심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12. 조선족은 왜 음주가무를 즐기는가?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필자가 관광업에 종사할 적에 중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당지사람들로부터 당신네 조선족은 술을 잘 마시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줄로 알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는 조선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관습이 널리 알려졌다는 증거이다. 우리민족의 일상 언어에 ‘수작을 걸다’ ‘수작을 피우다’ ‘개수작을 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수작이란 말은 음주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술상에서 주인이 손님에게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손님이 주인에게 권하는 것을 작(酌)이라 한다. 혹은 손님에게서 받은 잔을 되돌려 권하는 것을 수(酬)라 하고 술을 붓거나 스스로 따라서 마시는 것을 작(酌)이라 한다. 아무튼 ‘수작’이란 말은 술판에서 유래된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을 욕되게 하는 말로 변질되었다. 왜일까? 조선민족은 하도 술판이 많고 또 술판에서 이래저래 명분을 달아서 권하면서 마시다보면 귀찮을 때가 많다. 그리하여 ‘수작’이란 말이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조선족은 술만 마셨다 하면 노래와 춤판을 벌리는데 이는 하나의 관습으로 전승되어왔다. 그럼 조선족은 왜 술판 노래판 춤판을 벌리기를 좋아할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제천의식 제천의식이란 농경문화에 있어서 주로 5월 파종이 끝난 후와 10월 수확이 끝난 후 하늘에 향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기원 3세기 중국학자인 진수(陳壽)가 동이족들의 제천의식에 관해 <<위지동이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흔히 5월 파종이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남녀노소가 모여서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그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손에 손 잡고 땅을 쾅 밟고 머리는 땅을 향했다가는 하늘을 쳐다본다. 손발이 한데 어울리는 춤동작이 마치 중국의 탁무와 비슷하다. 10월에 수확을 마치고 반복해서 이러한 제천의식을 거행한다. 위의 기술은 마한의 제천의식에 관한 것이지만 당시 조선민족의 여러 갈래가 모두 제천의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내용도 비슷했다. 고구려의 경우 그 민중은 가무를 즐기는바 나라 안에서 촌락마다 저녁이면 남녀가 모여서 서로 노래유희를 하였으며··· 5월 제천의식 때에는 나라 안에서 군데군데 크게 모여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우리민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적어도 2천 년 역사는 족히 된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연변의 농촌에서는 모내기가 끝나거나 가을 수확이 끝나면 마을에서 소나 돼지를 잡아놓고 남녀노소가 모여서 됫놀이를 하였는데 이 관습이 역시 위에서 말한 조상들의 제천의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둘째 한의 역사  한국의 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반도는 역사적으로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왔다고 한다. 우리민족은 비록 유태인처럼 나라를 잃지 않고 용케도 버티어냈으나 너무나도 빈번한 외래침략 때문에 나라는 늘 쑥대밭이 되었고 백성들은 가슴에 멍들고 한이 맺혔다. 그리고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 양반과 상놈간의 차별이 심했고 관리들은 당파싸움에다 부패했으며 또 자주 발생하는 자연재해 때문에 조선민족은 더구나 가슴에 한이 맺히게 되었다. 그래서 본래 낙천적이었던 우리민족은 술과 노래와 춤으로 한 많은 인생살이를 달래려고 했던 것이다.   조선민족의 대표적인 노래가 ‘아리랑’ 인데 ‘아리랑’은 바로 한 많은 조선민중의 심정을 반영한 노래이다. 우리는 흔히 ‘아리랑’이 무슨 고개이름인줄로 알고 있는데 실제 ‘아리랑’은 한 많은 인생살이 때문에 가슴이 아리다는 뜻이고, ‘쓰리랑’은 가슴이 쓰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바로 조선민중의 아리고 쓰린 마음을 담은 노래이다. ‘아리랑’이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는 것은 곧바로 우리민족은 얼마나 한 많은 민족인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팔도에는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울산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홀로아리랑’ 등 아리랑 노래가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셋째 명분의식 우리민족은 체면이 강한 민족이다. 매사에 있어서 명분을 따지기를 좋아한다. 즉 음주가무 하는 데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술판에서 타인에게 술을 권할 때 꼭 무슨 명분을 찾아서 연설하고는 권한다.  우리민족은 슬프면 슬프다고 마시고 기쁘면 기쁘다고 마시고 심심하면 심심하다고 마신다. 이래저래 술 마시는 데는 모두 명분이 있다. 연변축구팬들은 연변축구팀이 이기면 기쁘다고 마시고 지면 슬프다고 마시고 비기면 아쉽다고 마신다. 그러니까 축구경기결과가 어떻든 간에 술을 마실 명분은 다 있다. 넷째 판의 문화 판이란 말은 우리민족만이 쓰는 특이한 언어이다. 술판, 노래판, 춤판, 도박판, 오락판, 개판, 한판 벌리다는 등 이러한 말은 타민족언어로 정확히 번역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각종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민족은 없다. 필자의 가문에서는 어른들의 생일이면 마치 큰잔치처럼 친척들이 모여 술판, 노래판, 춤판을 한바탕 벌리었다. 아마 조선족가문에서는 거의 다 이러한 관습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세상에서 노래방이 가장 발달한 곳이 곧 한국과 연변이다. 이는 역시 과거 조선민족의 판문화의 연속의 표현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연길에는 돈을 빌려서라도 노래방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판에 참여하기를 즐긴다는 표현이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타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민족은 없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웬만해서는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지 않는다. 우리민족이 자신의 속마음을 타인한테 털어놓는 것은 역시 옛날부터 각종 판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자주 벌어지는 술판, 노래판, 춤판에서 서로 자신의 고충을 얘기하면서 서로 도우려고 하고 기쁨은 함께 나누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정신이 매우 강했다. 우리민족이 타민족에 비해 타인의 일에 관심이 많거나 동정심이 많은 것도 역시 각종 판의 문화에서 형성된 관습이다. 조선족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역시 판의 문화에서 생겨난 민족성격이다. 예하면 출국바람을 하나의 출국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무슨 큰 판이 생겼다 하면 너나없이 뛰어든다. 연길에 수백 곳의 노인활동실이 있는데 거기에 모이기를 좋아하는 것도 역시 판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표현이다. 그 내용이야 오락이든 도박이든 하여튼 판에 뛰어들기 좋아하기 때문에 노인활동실은 늘 만원을 이루고 있다. 판의 문화가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2002년한일월드컵> 때 길거리에 나선 7백만에 달하는 붉은악마의 참여사건이다. 축구의 종가인 영국도, 터밭이 없이는 살아도 축구장이 없이는 못 산다는 브라질도, 국내리그로 세상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프랑스에서도 한국의  붉은악마와 같은 멋진 장관을 연출해내지 못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곧 민족과 민족 간의 문화 차이이며 한국인만이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은 곧 옛날부터 흘러온 판의 문화의 우월성이 표출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의 응원열기는 하나의 노래판 춤판으로 여기고 한바탕 멋있게 벌려보려는 마음이 모여서 이루어낸 사건이다. 다섯째 종교가 없는 민족 중국에는 유교와 도교가 있고 또 도교이론으로 해석한 중국식대승불교가 있다. 일본에는 신도가 있다. 허나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신선사상과 무속신앙이 발달했을 뿐 교리교의가 있는 그렇다할 만한 종교가 없었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유교와 불교가 발달했으나 유교는 주로 윤리도덕과 제사의식에 많이 사용되었고 불교는 기복신앙이 위주이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혹은 서양이나 인도처럼 또는 중동의 이슬람처럼 뚜렷한 종교 신앙이 없었다.  우린민족은 그렇다할 만한 종교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옛날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던 관습이 하나의 생활상의 종교로 되어왔다. 서양 사람들은 술집에 가서 혼자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민족은 반드시 둘 이상 모여서 판을 벌려야 술을 마신다. 즉 우리민족이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것도 하나의 종교라고 보아야 한다. 세상에 술을 마시면서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면서 노래 부르거나 잔칫집에서 바가지를 물독에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반주하는 민족은 조선민족밖에 없다. 이상 다섯 가지 이유로 하여 우리민족은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 추기를 즐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음주가무관습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하나의 생활신앙이 되어왔으며 본래는 매우 좋은 관습이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이 관습이 많이 변질되어 부작용이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예하면 사촌이 병들어 죽는다 해도 술을 권하거나 술판에서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왕따 시키거나 갓 시집온 색시한테 기가 넘어가도록 술을 권한다. 조선족은 이상하게 애를 유치원에 보내놓고는 쩍하면 학부모들이 모여서 술판을 벌리고 노래방에 간다. 분옥(가명)이란 여인은 애를 조선족유치원에 보냈다가 끊임없는 술판에 지쳐서 소학교는 기를 쓰고 한족반에 보냈더니 세상 편안하다고 말한다. 소학교와 중학교 학부모회의는 학부모들이 술판을 벌리고 노래방에 가는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되었다. 어린이절에 애를 하나 놓고 가족 및 친척들이 적게는 대여섯 많게는 열 명 정도 모여 음식을 갖추고 맥주를 둘러메고 야외에 가서 기껏 먹고 마시고 한바탕 노래와 춤판을 벌린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또 노래방에 간다. 3.8부녀절이 오면 남자들이 여성들을 위로한답시고 연일 기껏 먹고 마시고 논다. 3.8부녀절에 술판이 없는 남자는 인기나 센스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참으로 세상이 이상하리만치 변했다. 서울시는 50명당 음식점 하나가 있고 기타 유흥업소도 세상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놀고 하는 업소가 가장 많다는 뜻이다. 필자는 세상에서 인구비례를 따지면 연길이 먹고 마시고 노는 업소가 가장 많다고 생각한다. 출국해서 번 돈을 연길에다 투자하는 항목을 살펴보면 절대다수가 먹고 마시고 노는 업소를 꾸린다. 조선민족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은 본래 좋은 관습이었는데 오늘날 도를 넘어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데 앞으로 더욱 밝은 세상을 만들어가려면 사람마다 절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77    우리민족역사에 봉건사회가 없었다.(김정룡) 댓글:  조회:5011  추천:58  2008-03-07
우리민족역사에 봉건사회가 없었다.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2007년 8월 말 필자가 중국에 갔을 때 연변00잡지사 사장님이 <<장백산>>, <<도라지>>, <<연변여성>>, <<청년생활>> 등 조선어 잡지들을 나에게 한 보따리 주었다. 무거운 대로 메고 한국에 와서 시간 나는 대로 뒤적여 보았는데 한 가지 ‘아쉬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조선족문학평론가들이 아직도 조선족문학을 평론하는 글에서 이른바 ‘봉건사회’, ‘봉건사상’, ‘봉건문화’, ‘봉건습관’ 등 ‘봉건’이란 어휘를 무분별하게 마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민족대학 00교수는 조선족문학사를 평론하는 장편의 글에서 ‘봉건’이란 어휘를 무려 수십 차례 사용하면서 ‘봉건’으로 도배했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표현이라 생각된다. 잘못된 표현의 요점을 말하자면 조선족문인들은 아직도 중국과 조선의 수천 년의 봉건역사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고, 우리민족전통가족윤리와 사회윤리의 절대다수가 조선조 500년을 거쳐 생겨나고 자리매김 된 것을 마치 수천 년 동안 줄곧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폐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민족역사에는 아예 봉건사회가 존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봉건이란 어휘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역사에서 봉건제는 서주시기 중국, 중세기 유럽, 중세기 일본 등 세 곳에만 존재했을 뿐 기타 지역과 나라들에는 아예 봉건제가 없었다. 이른바 봉건제란 왕이 기존의 토지 혹은 군대를 이끌고 정복한 이민족의 땅을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나눠주는데서 생겨났으며, 땅을 분봉 받은 영주들은 장원 내에서 정치적으로 인사권이 있고, 경제적으로 세금을 받아들일 권리가 있고, 군사적으로 군대를 소유할 권리가 있어 독립적인 왕국의 형태를 갖춘 소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봉건제는 중국, 유럽, 일본 등 세 곳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중국은 서주 초기 정전제와 분봉제에 의해 봉건제가 실시되었고 따라서 각 제후국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왕은 허수아비가 되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게 되어 춘추전국시대에 진입했고, BC221년 진영정이 천하를 통일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시대에 접어들었고 중앙집권제는 청말까지 이어졌다. 그러므로 중국은 진나라부터 청말까지의 정치제도가 봉건제가 아니라 통일중앙집권제였다. 중세기 유럽은 왕이 각 지방호족들에게 군대를 내줄 것을 요구하는 대가로 정복한 이민족의 땅을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나눠주는데서 장원영주제가 실시되었는데, 프랑스에서는 왕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영주들이 소유한 땅에 비해 새발의 피였다고 한다. 영주들이 실권을 갖고 있는데 비해 왕은 虛權에 허덕이었다. 이것이 명실상부한 봉건제였다.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과 달리 이민족의 땅을 정복하여 장원영주제가 실시된 것이 아니라 백성과 최하층 관리로부터 자신들이 개척한 땅을 층층이 위로 헌납하는 데서 장원영주제가 생겨났고, 이것이 세상의 모든 민족과 다른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충의 문화이며 봉사의 문화이다. 현재 한국인들이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인하여 봉사라는 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즉 봉사란 일본인의 특유한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충의 문화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지상의 최고 권력자인 쇼오군은 백성을 다스리는 행위를 통치라 여기지 않고 천황에 대한 의무적인 봉사라고 여긴다. 봉사란 일본인의 神道에서 유래된 아래로부터 위로 흐르는 충의 개념에서 형성된 특이한 문화이다. 그러므로 횡적이거나 위로부터 아래로의 복무를 봉사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어폐가 있다. 봉건제의 개념은 대충 이러하다. 그런데 왜 현대중국에서 봉건이란 말을 그토록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예로부터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 즉 역사관이 대체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맹자가 말한 태평시대가 되었다가 혼란시대, 혼란시대로터 또 다시 태평시대를 반복하는 一治一亂의 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사회는 목저지가 있고 역사는 마치 우리가 여행지를 정하고 티켓을 끊어 갖고 출발해서 일정시간이 경과하면 도착하기 마련인 것처럼 반드시 그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기독교적인 묵시론적 직선발전사관이다. 칼·맑스는 묵시론적 직선발전사관에 의해 인류사회를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사회주의사회, 공산주의사회 등 5단계로 나누었는바, 이것을 이른바 맑스 역사5단계설이라 한다. 칼·맑스의 이론을 천하의 유일진리로 받아들인 현대중국은 그의 역사5단계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아울러 중국역사를 5단계설에 두들겨 맞추느라 애썼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은 중국역사에서 노예사회와 봉건사회의 획분에 대해 곤혹스러워했고 곽말약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시대 획분에 각기 다른 설을 내놓았다. 결국 곽말약이 권위를 갖게 된 이유로 중국역사 시대 획분은 그의 설에 의해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근대사회라 금을 긋고 그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 진의 통일중앙집권제 역사까지 봉건사회라고 단정해버렸다. 아울러 전통사회 문화, 사상, 습관 등등을 통상적으로 ‘봉건’을 붙혀 말해왔다. 중국문화환경에서 자라고 배워온 조선족들은 필터의 여과장치 없이 현대중국역사관, 즉 맑스의 역사5단계설에 물젖어 ‘봉건’이란 어휘를 무분별하게 사용해왔고 아울러 우리민족역사에 봉건사회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쩍하면 “조선의 수천 년 동안 봉건사회가 ······”라는 말을 쓴다. 물론 이북이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체제였고 칼·맑스의 역사5단계설을 받아들여 줄곧 통일중앙집권제로 흘러온 우리민족역사를 이 이론에 두들겨 맞추고 추광해왔기 때문에 중국과 이북의 영향을 받은 조선족들은 더구나 ‘조선의 수천 년 동안 봉건사회’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인 예와 효, 이혼불가, 재가불가, 여성의 정조문제 등등은 근근이 조선조 500년을 거쳐 확립된 것일 뿐 “수천 년의 봉건사회를 통해 수립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려 말기까지 이혼자유 재혼자유였다고 한다.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말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丈家에 간다는 뜻인데 조선조 초기까지 남자가 결혼하면 먼저 여자 집에 가서 일정 시간을 살다가 여자를 데리고 남자 집에 와서 사는 관습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민속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소위 우리민족의 가족윤리와 사회윤리의 전통의 절대다수가 조선조 유교 500년을 거쳐 확립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현재 조선족들이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를 말할 때 쩍하면 수천 년의 봉건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의 수천 년 역사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문화혁명시기와 후기까지 ‘봉건사회’, ‘봉건사상’, ‘봉건문화’, ‘봉건습관’ 등등으로 말하던 것을 근래에는 중국에서 TV매체에 돌풍을 일으킨 易中天 교수를 비롯해 학자들과 문인들이 역사에 관련해 쓴 글들을 보면 ‘전통사회’, ‘전통사상’, ‘전통문화’, ‘전통습관’으로 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봉건’대신에 ‘전통’이라 말한다. 중국인이 말하는 ‘전통’이란 본능적으로 도교를 받들고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해온 전통(물론 불교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을 의미한다. 우리민족의 수천 년 역사는 ‘멋’을 의미내용으로 하는 풍류도의 仙史이며, 16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불교, 적게나마 받아들인 도교적 요소, 뼈가 절도록 받아들인 조선조 500년의 역사가 우리민족의 전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때 정치입장에서 의도적으로 두들겨 맞춰 놓은 ‘봉건’이란 말을 버리고 ‘전통’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76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김정룡) 댓글:  조회:4615  추천:42  2008-03-05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 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 11. 조선족은 왜 일하기 싫어하는가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조선족은 본래 '총명하고 깨끗하고 부지런하고 예절 밝은 민족'이라고 소문났었다. 허나 오늘날 이러한 소문은 낡은 터에서 이밥 먹던 얘기로 되어버렸다. 조선족은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한탕 치기를 하고, 말썽을 일으키고 일하 기 싫어하는 것이 현주소다. 조선족은 이러한 현상 때문에 '본가집사람 (한국 인)'한테도 환영받지 못하고 '시집식구 (한족)'들로 부터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대에 장춘에 있는 각 대학에서 조선족학생을 적게 모집하는 바람이 일어났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혀 받지 않겠건만 상급의 소수민족정책 때문에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고 해서 적게 모집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이유가 조선족학생들은 말썽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쩍하면 술을 마시고 사람을 쥐어 패고,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기율이 산만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족이 예절바른 민족이라는 형상은 찾아볼 수가 없고 일단 조선족학생이라면 학교  측에서 도리질한다. 1990년대 조선족과 한국인간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서로간의 기대가 컸다. 허나 한국인에게 심어준 조선족의 인상이라면 한탕 치기를 하는데 정신팔고 오늘 좋고 내일 나쁘고 등등이다. 조선족가운데서도 특히 연변사람들이 문제라는 것 이다. 현재 한국에 있는 연변조선족가운데 일부사람들이 자신이 연변사람이라는 것을 속이고 있다. 그 이유는 연변사람들은 약아빠지고, 거짓말이 많고, 남의 등을 쳐 먹고,……등등의 나쁜 낙인이 찍혔다는 것이다. 예전에 흑룡강 조선족이 연변사람이라면 도리질했는데 현재 한국인마저 도리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화두는 역시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일하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질적인 문제라고 꼬집고, 혹자는 사회적 환경지배문제라고 역설한다. 필자는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보다 사회적환경지배문제가 더 크고 사회적 환경지배문제는 여러 가지 복합적 원인으로 야기되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조선민족처럼 부모자식간의 정이 두터운 민족은 없다. 서양인과 일본인은 자식이 성인이 되면 저절로 살게끔 독립시킨다. 멀리 말고 한족도 자식이 자립하게끔 어릴 때부터 가르친다. 한족은 자식들이 공동분담으로 부모의 양로문제 를 해  결한다. 이에 비해 조선족은 자식이 성인이 되어도 끼고 있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결혼한 후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우려고 애쓴다. 조선족은 부모의 재산이면 나의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다. 그래서 부모가 잘사는 집 애들은 분발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족은 부모가 돈벌이하는 것이 ‘나의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새끼를 위해서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애들은 당연히 부모의 것이 곧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일하기는 싫어하고 돈쓰는 데 신경 쓴다.  다음 조선족은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다. 옛날 양반문화가 뿌리 깊어 더욱 그러하다. 서양인은 직업적 차별이 없다. 즉 공부를 잘 해야만  출세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다. 공부를 잘했건 못했건 또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치 않고 열심히 하느냐 안하느냐가 중요하다. 서양인이 직업적 차별이 없는 것은 예수가 목수출신이기 때문이다. 일개 목수출신이 공부를 잘 했을리가 만무하다. 이와 반면에 유교를 뼈 속까지 절어들 정도를 받아들인 조선민족은 공자가 공부를 잘해서 성인이 되었다는 인식이 뿌리 깊다. 맹모삼천이란 이야기와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란 이야기가 조선족사회에 널리 전해진데 비해, 옛날에 장사해서 부자가 되었다거나 도자기를 만들어 잘살았다는 얘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선족은 이러한 역사적 영향 때문에 막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천시하고 아울러 사회적으로 천시 받는 일이기에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기피한다.  이상 두 가지 원인 외에도 조선족이 멋을 추구하고 체면의식이 강하고 판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등 기타 원인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원인을 갖고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족의 역사가 150년 정도라고 본다면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일하기 싫어하는 현상이 근근이 20~30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선조들은 만주 땅에 이주해 와서 개간한 땅이 조선반도의 두 배나 된다. 만약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면 어떻게 그 엄청난 땅을 개간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현재 연변에서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 팔던 사람들도 일단 출국해서 환경이 바뀌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 간 조선족의 90%이상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 퇴근하면서 막일을 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실례만으로도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다면 조선족이 일하기 싫어하는 주요원인은 무엇일까? 필자는 연변의 사회 분위기에 있다고 본다. 즉 현재 실업자들만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출근하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예하면 무릇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아침에 출근해 서는 얼굴을 보이고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10시가 넘으면 그놈의 핸드폰이 울어 대기 시작하면 점심약속이 되고 점심에 술을 마시고는 오후에는 끼리끼리 모여서 마작 판을 벌리지 않으면 노래방에 간다. 심지어 “약은 사람은 대낮에 노래방에 가고 저녁이면 오솝소리(고스란히) 집에 붙어  있는다.”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  특히 손님접대를 책임진 사람들의 형편은 말이 아니다. 2002년 연변민속 절에 참가했던 일본대표단 5명은 “죽어도 다시 연변으로 가지 않겠다.” “죽어도 연변 사람들의 피는 수혈 받지 않겠다.”는 등등의 말을 하면서“연변행이 고생 행” 이였다고 볼멘소리를 했다고 한다. 즉 연변에 머무는 동안 식사 시에 술을 기껏 마시게 하고 안마방에 노래방에 줄 끌리워 다녀서 지쳤다고 한다. 이러한 얘기들은 연변에서 큰 행사가 있은 뒤에 반드시 따라붙는 얘기들이다. 왜 연변사람들은 돈 팔고 “실컷 대접”해 놓고는 고맙다는 소리보다 오히려 불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 기회에 자기 들이 놀기 위해서인가? 그 사정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연변사람들은 자기네끼리 모임을 벌려도 마찬가지다. 같은 피를 물고 난 한국인은 무슨 일 때문에 모임을 갖는 것이 지 연변사람처럼 먹고 마시고 놀기 위해 모임을 갖지 않는다.  지식인이 모여 있는 직장의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업여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작 판이 아니면 술판 노래방에 정신팔고 있다. 이것도 역시 일하기 싫어하는 표현이다.  필자는 1993년에 태국에 갔을 때 매일 낮에 보고 들은 것을 저녁이면 메모했다가 홍콩에 머문 3일 동안 바깥구경도 못하고 호텔에 쑤셔 박혀 글을 썼다. 연변일보에 한 면을 다 치지하는 글이었다. 당시 나는 직업상 연길에 돌아와서 글을 쓴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연변에서는 전문 학자가 아니 사람이 글쓰기 위해 청하는 술판에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로 웃기는 얘기가 된다. 본래 글쓰기가 나의 흥미였는데 어쩐지 연변분위기에서는 잘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최근 몇 년 간 한국에 가서 공자, 부처, 예수 등 엄청난 공부를 많이 했고, 심지어 예전에 단군이란 ‘ㄷ’자도 모르던 형편에서 우리민족역사공부도 많이 했다. 만약 내가 전문학자도 아닌 사람이 연변에 계속 머물고 있었더라면 그 많은 공부를 했을리가 만무하다. 하여튼 연변은 먹고 마시고 노는데 정신팔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이 이미 사회적인 분위기로 되어버렸다. 이는 실로 큰 악재다. 이러한 악재가 수십 년간 더 지속되어간다면 곤란하다. 연변을 떠나 관내거나 출국해서 공부한 사람들이 연변으로 돌아오기 싫어하는 데는 경제적 문제나 연구 환경 등 여러 가지 여건이 부족한 탓도 있겠으나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연변으로 돌아가면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인생을 망친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연변의 사회분위기가 “금”을 “돌”이 되게 할 소지가 많다. 하다면 연변의 이러한 부정적인 사회분위기가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한때 큰가마밥 정책 때문에 사람들이 나태해진 원인도 있고, 다른 하나는 개혁개방바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조선족은 예로부터 그 어느 민족보다 공동체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획일적인 사회주의 체제에 가장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집체 때 조선족마을이 한족마을보다 보편적으로 잘 살았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단 집체생산방식이 해체되니 조선족은 어찌할 바를 몰라 갈피를 집지 못했다. 예하면 필자는 개혁개방초기에 농촌에 있었는데, 한족들은 농사철에는 열심히 밭을 다루고 농한기에는 비를 틀거나 광주리를 틀어서 도시에다 팔았다. 그들은 일 년 내내 쉬지를 않는다. 이에 비해 조선족은 대충 농사를 짓고는 그 긴긴 겨울에 내내 화토놀이 등 오락에 빠져 있었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다. 한족은 열심히 돈을 벌고 있지만 조선족은 돈을 벌기 앞서 돈을 쓰는 것부터 배웠으며 일단 내 돈이든 남의 돈이든 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먹고 마시고 노는데 탕진해버린다. 연변에서 “한족은 돈을 벌고 조선족은 돈을 쓰고  있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연변의 한족은 조선족의 돈을 벌고 있다.”는 말도 이미 아주 묵은 얘기다. 다른 한 방면으로 볼때 본래 얼씨구 절씨구를 좋아하던 조선족이 문화혁명이란 “호랑이”가 없어지자 일단 고삐 풀린 말이 되어 “좋은 세상”을 만났노라고 마음껏 실컷 먹고 마시고 놀게 되었다. 연변의 부정적인 사회분위기가 형성된 가장주요 이유는 페쇄성에 있다. 조선반도는 예로부터 주체문화가 아닌 언저리 문화였다. 조선족일세들은 여전히 그 페쇠적인 언저리문화를 갖고 왔으며 우리후대들은 여전히 그 페쇄적인 언저리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일부에서는 어릴 때부터 우리말, 우리교육, 우리풍속습관,…… 모든  면에서 우리 것을 고수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들의 민족심은 매우 기특한 일이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라면 우리조선족은 ‘우리 것’때문에 더욱 페쇄적인 언저리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혹시 예전에는 ‘우리 것’이 훌륭한 문화였다고 말할수는 있겠으나 오늘날 격변하고 있는 시대에 언저리문화인 ‘우리 것’이 낙후된 측면이 많다는 것을 과감하게 인정해야 한다.  필자는 연변의 부정적인 사회분위기가 바뀌려면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길이 바로 중국내지에 진출하든 출국하든 여건만 허락된다면 갈 수 있는 사람은 다 떠나라! 필자의 이러한 강력한 주장에 대해 일부 조선족공동체해체위기에 아우성을 치고 계시는 분들은 펄쩍 뛸 것이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페쇄적인 언저리문화를 계속 고집하다가 ‘망하기’보다 차라리 떠날 수 있는 자는 모두 떠나서 바깥세상을 배우고 돌아온다면 우리조선족사회는 해체되지 않을뿐더러 더욱 밝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물론 목전에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단향적인 인구류동이 사회적문제로 떠오르고 있으나, 필자가 요해한데 의하면 한국 간 조선족의 99%가 아무리 연변이 어쩌고저쩌고 하다가도 결국에는 본고장에 돌아가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내지에 진출한 다수가 젊어서 돈을 벌고 늙으막에 연변에 돌아가 살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지든 외국 이든 그곳의 선진적인 것을 배우고 터득하게 되어 그들이 돌아온다면 페쇄적인 언저리문화가 많이 바뀔 수 있다.  특히 그들은 “사람이 되기”에 크게 노력하고 있기에 그러한 생활방식을 갖고 돌아온다면 조선족사회는 한결 더 밝아질 수 있다. 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출국바람이지만 일단 여건이 허락된다면 모두 떠나라! 더구나 조선족은 자식을 품에 끼고 있기를 원하는데, 자식을 사람이 되게 하려면 내지든 외국이든 보내서 인생 공부를 시키라! 한국한양대학에 유학 간 이군은 연변대학을 다닐 때까지 엄마가 식사 시에 간을 맞추는 일까지 챙겨줄 정도로 마마보이였다고 한다. 엄마의 모든 배려 하에서 오로지 공부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에 가서 처음 에는 자살할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모든 것이 막막했다고 한다. 3년이 자나고 보니 이제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도리를 깨우치게 되었다고 한다. 집 생활이 넉넉해서 돈근심은 없지만 한국학생들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따라 하게 되었는데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생활이 매우 충실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부모들은 자식이 고생한다면서 돈 걱정 말고 공부만 하라고 늘 전화 오는데, “이것이 곧 연변조선족의 잘못된 자식교육방법”이라고 그는 말한다. 저절로 돈을 버니 재미도 있고 돈이  귀중한 줄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집에서 보내온 돈은 저축했다가 나중에  부모한테 되돌려드릴 계획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큰 변화이며 또 얼마나 기특한 일안가? 이런 젊은이들이 많아진다면 연변의 앞날은 더욱 밝아질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그가 계속 연변대학에 남아 석사, 박사 공부를 했더라면  이러한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병이 위급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 받아 재생하는 도리를 잘 알고 있다. 페쇄적인 언저리문화가 바뀌려면 외부의 ‘피’를 수혈 받는 길밖에 없다.   
75    음모(陰毛) 없는 여성은 왜 재수 없나? 댓글:  조회:9421  추천:61  2008-03-03
   음모(陰毛) 없는 여성은 왜 재수 없나?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이야기 1.  옛날 조선에서 왕이 음모 없는 여인과 교접을 해보니 기가 막히게 좋더라. 그래서 뭇사람들이 탐낼 가봐 “음모 없는 여인과 교접하면 3년 동안 재수 없느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의 이 말이 민간에 퍼져 사람들이 음모 없는 여성과 교접하면 재수 없다고 믿고 음모 없는 여성을 기피하는 관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야기 2.  조선시대에 13세에 장가갔던 아버지가 18세에 장가가는 아들보고 “계집이란 시집와서 애를 낳아야 아래에 털이 나는 법이니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말이라면 공자님의 말씀처럼 받들던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철석 같이 믿고 있다가 첫날밤 동방에 들어보니 마누라의 아래에 털이 무성해 있는 것을 보고 ‘처녀가 아니’라고 한바탕 소동을 벌렸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혼사를  파하고 며느리를 친정에 돌려보내라고 고집을 부렸고, 기타 친인척들은 여자 나이 17세인데 왜 아래에 털이 없겠는가라고 하면서 털이 있는 게 오히려 정상이라고 주장하여서야 시비가 가라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 3.  고대 유럽과 중국의 상층 계층의 여성들이 한때 음모가 미에 손상이 있다고 밀어버리는 바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남성 중심사회에서 남자들이 음모가 있거나 무성한 여성들을 꺼려 하는 데서 생겨난 ‘해프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4.  한중일 동양 삼국 사람들은 공중목욕탕에서 거시기가 큰 남자들은 활개 치고 다니고 거시기가 작은 남자들은 위축되어 있다고 한다. 또 음모가 있는 여성들은 당돌한 태도를 취하는 반면 음모가 없는 여성들은 ‘앞’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 5.  수년 전 한국KBS9시뉴스에, 음모 없는 젊은 여성들이 병원에 가서 음모를 심는 수술을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기자가 “왜 음모를 심으려고 하느냐?”고 물으니, 그녀들 왈 “음모가 없으니 남자들이 재수가 없다고 하길래······”    아무튼 여성의 음모에 대해 역사적으로 또한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의 음모에 대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모두 남권주의 사회에서 남자들이 여성들에 대해 임의적으로 ‘잣대’를 적용해놓고 자신들의 ‘쾌락’으로 관습을 만들어 생겨난 것이다.  어찌 되었든 과거 한때 음모 없는 여성을 선호하다가 현시대 사람들은 음모 없는 여성은 재수 없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현재 한국인들 대다수가 음모 없는 여성은 재수가 없다는 관념이 상기 이야기 1에 의해 생겨나고 전해 내려와 그렇다고들 믿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굳이 한국인의 이런 인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고, 다만 중국인의 음모 없는 여성을 재수 없다고 여기는 관념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중국인은 본능적으로 도교를 숭상해왔다. 도교는 자연주의를 제창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에 속한다는 것이 도교의 관념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리구조도 역시 자연의 원리와 같다고 보는 것이 도교의 기본 원칙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인은 농사가 잘 되지 않아 소출이 낮은 땅을 불모지지(不毛之地:인재가 나지 않거나, 어떤 분야에서 성적이 매우 낮은 것을 뜻함)라 하는데, 여기서 毛는 초목을 뜻한다. 풀이 자라지 않는 메마른 땅은 곡식을 심어도 소출이 나지 않는다. 메마른 땅(불모지지)을 아무리 가꾸어도 힘만 들뿐 소출이 나지 않아 헛수고로 재수가 없다. 중국인은 여자의 생산성과 땅의 생산성을 연관시켜놓고 여성을 땅과 같은 존재로 여긴다. 따라서 여성의 음부에서 아이가 생산되므로 생산부위는 반드시 대지의 풀을 상징하는 음모가 있어야 생산성이 풍부하고 또한 가꾸어도(성교) 기분이 좋다. 거꾸로 음모 없는 여성과 열심히 교접해봐야 마치 불모지지를 가꾸는 것처럼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중국인은 성교를 교미(交尾)라 하는데, 원의(原意)는 털과 털이 교접한다는 뜻이다. 만약 음모가 없으면 ‘교미(성교)’의 참뜻이 상실된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다수 사람들이 털이 있는데 비해 극소수 여성들이 음모가 없으니, 이런 여성들과 교접을 하면 진정한 성교의 즐거움이 없다는 것이다.  허나 위와 같은 중국인의 관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으로서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 즉 음모가 없는 여성이 성교를 잘 못한다거나 아이 낳는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현시대 사람들은 마땅히 음모 없는 여성은 재수 없다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
74    조선족은 왜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가? 댓글:  조회:5464  추천:75  2008-02-26
재한조선족문제연구자료집제4부 조선족문제에 대한 논과 쟁 10.조선족은 왜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가?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수년 전에 한국 KBS에서 주한외국인을 모여 놓고 설맞이오락프로를 열었다. 그 때 죤슨이란 미국인이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서양인이 이 말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부자간에도 경쟁의식으로 살아가는 서양인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 말은 우리민족이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봐주는 심리를 가장 잘 반영한 속담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민족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할까?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은 몇 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평균의식 우리민족은 본래 평균주의의식이 강한 민족이었다. 예하면 고대조선에 두레문화가 있었다. 두레문화란 마을사람들의 노력의 다소를 막론하고 또 심지어 장애인가족의 노동참여여부를 따지지 않고 공동으로 경작해서 나온 이윤을 오락기구와 음식을 만드는데 소비하며 전체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나눠 먹고 함께 오락을 하는 활동이었다. 두레문화를 쉽게 이해하면 원시공산주의사회형태의 문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민족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정신이 일면 두레문화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레문화는 전체 마을성원들의 화목을 추구했다. 이 두레문화 속에서 생활하는 마을사람 중 가령 그 누가 사심이 있어 제 욕심을 채우려 들면 공동으로 공격하고 창피를 두었다. 바꿔 말해서 가령 그 누가 기타 사람들보다 뾰족하게 앞서거나 소총명(小聰明)하게 놀아도 안 되며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잘살아도 안 된다. 모든 것이 비슷비슷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우리민족이 남이 잘되면 깎아내리려고 애쓰는 성격이 이러한 평균주의의식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우리”라는 개념 “우리”라는 말은 분명히 혼자가 아니고 두 사람이상의 복수를 뜻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공통된 개념이다. 허나 우리민족은 예외다. 이를테면 조선민족은 나 대신에 우리를 쓰는 경우가 많다. ‘우리 처’ ‘우리 나그네(남편)’ ‘우리 아버지’ ‘우리 아들’ 등등이 그것이다. 부모나 자식 형제를 말할 경우 ‘우리’라는 말을 써도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다(물론 기타 민족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왜냐하면 부모 형제자매 자식은 복수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허나 일부일처제 사회에서 ‘우리 처’ ‘우리 남편’라고 말하면 마치 여럿이 공동으로 처 혹은 남편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분명히 ‘나의 처’ ‘나의 남편’이지 결코 ‘우리 처’ ‘우리 남편’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민족사회에서는 이러한 말들이 허물이 아니라 그냥 너도나도 그렇게들 말하고 있다. 본래 틀린 말이 바른 말로 사용되고 있다면 분명히 그 속에는 문화적인 유래가 있다. 우리민족은 가정도 하나의 두레문화처럼 가정 내에서 평균주의를 강조했다. 옛날에는 팔촌까지 한온돌에서 살았다고 하니 가족성원이 수십 명에 달했을 것이다. 이 수십 명이나 되는 가족성원을 제대로 이끌어 나아가려면 평균주의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매시에 폭풍이 휘몰아칠 것이다. 그리고 가정 내의 모든 것은 ‘우리’ 것일 뿐 ‘나’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우리’ 것이라는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혔기 때문에 ‘나’란 개념이 소실되고 ‘우리’라는 개념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은 심지어 남편, 부인을 말할 때 나를 쓰지 않고 ‘우리’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집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다. ‘우리’라는 개념자체가 이미 평균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팔촌까지 이 ‘우리’ 안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 똑 같아야지 그 누가 기타 가족성원보다 뾰족하면 안 된다. 가령 그 누가 뾰족하게 나오면 ‘우리’를 배반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런 생활환경에서 살아온 우리민족은 가령 그 누가 잘되면 있는 말 없는 말까지 보태가면서 깎아내리려고 애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바로 이 ‘우리’라는 개념에서 유래된 것이다. 셋째 멋의 민족 우리민족이 멋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생활종교이자 생활철학이다. 우리민족이 진취심이 많고 상향심이 높고 똑똑한 등 원인이 곧바로 멋에 대한 추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민족의 멋은 이러한 장점이 있는 동시에 여러 가지 단점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민족은 남이 자기보다 더 앞서거나 훌륭하면 질투하고 남이 자기보다 못하면 업신여긴다. 우리민족의 질투심과 시기심의 생성의 기본요소가 바로 멋이다. 즉 남이 나보다 멋이 있으면 용납 못하고 남이 나보다 멋이 없으면 쓰게 보지 않는다. 세상에서 우리민족만큼 친구사이 친척사이 동창사이 등 가까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흉을 보기 좋아하고 헐뜯기 좋아하는 민족은 없다. 친구가 잘되면 축복해주는 것이 도리이건만 우리민족의 축복은 내심의 축복이 적고 뒤에서 깎아내리려고 애쓴다. 친구란 말 그대로 오래 친하다(親舊)는 뜻이다. 허나 우리민족은 흔히 오래 친하려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더우면 친구가 되고 차면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사람을 쉽게 친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허나 일단 친하면 끝까지 믿고 지내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민족은 사람을 쉽게 친하고 쉽게 헤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친척 간에도 잘사는 사람끼리 친하고 못사는 사람끼리 뭉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형제 중 친척 중 어느 한 사람이 출세하면 벌떼처럼 모여들어 이런저런 도움을 받다가도 일단 그 사람이 꼬꾸라지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있는 말 없는 말까지 만들어 더욱 난처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필자는 소학교는 조선학교, 중학교는 한족학교를 다녀서 조선족동창도 있고 한족동창도 있다. 중학교 때 낙후분자여서 남들이 다 드는 공천단조직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후에 대학을 나온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다. 한족동창들은 비록 학교 때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후에 대학을 나왔다고 모두 내심으로 축복해주고 내심으로 존중해준다. 이에 비해 조선족동창들은 그 애가 학교 때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헐뜯는 소리를 많이 하고 있다. 아마 이런 현상은 필자뿐만 아니라 ‘출세’한 모든 조선족이 다 경험해본 일일 것이다. 동양의 정조관념은 유교에서 유래되었으나 오히려 유교의 본산지인 중국여자들은 정조관념이 희박하다. 일본에서는 마누라가 잠자는 자세가 곱지 못하다고 이혼하는 사례는 있어도 정조관념은 희박하다. 동양에서 여성들의 정조를 가장 강조한 것이 곧 조선민족이다. 옛날에 마누라가 청나라 소금장수한테 손목을 잡혔다고 청나라사람한테는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기 마누라를 쥐어 팬 일이 있었다. 힘이 없어 자기 마누라를 지켜주지 못한 주제에 오히려 자기 여자를 압박하고 박대한 것이 곧 조선남자들이다. 우리민족은 여자의 멋(매력)은 곧 정조에 있다고 여겨왔다. 다시 말해서 정조관념이 희박한 여자는 멋(매력)이 없는 여자라고 평가했다. 이슬람사람들은 여자들이 바람피우면 돌로 쳐 죽이는 관습이 있다. 이는 이슬람경전인 <<코란>>에 그런 대목이 있기에 종교를 지키는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민족은 강력한 종교도 없이 흔히 멋을 잣대로 사물을 판단한다. 이를테면 중국에서 강력한 종교를 갖고 있는 회족, 장족, 중국을 268년이나 통치했던 만주족, 중국을 80여 년이나 통치했던 몽골족은 한족과의 통혼이 잘되고 있다. 이에 비해 강력한 자민족의 종교도 없는 조선족이 오히려 한족과의 통혼이 잘되지 않고 있다. 그 주요 원인이 바로 한족은 조선족과 멋이 다르다는데 있다. 이렇게 보면 조선족의 멋은 기타 민족의 그 어떤 종교보다 더욱 종교적 색채가 농후하다. 조선족의 멋에 비록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파다’는 등 폐단이 있으나 확실히 자민족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넷째 단합심의 부족 단합심이 부족한 것이 우리민족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왜놈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내부 당파싸움에 빠져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가 회복되니 당파싸움이 더욱 심했다. 우리민족이 단합심이 부족한 원인가운데 풍수이론으로 지역과 지역사이 사람을 갈라놓은 사례가 있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죽을 때 전라도 나주지역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훈(訓)을 남겼다. 그 이유는 나주지역은 지세가 활모양처럼 구불게 생겼으니 그 지역사람들의 심리도 배역적이라는 것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 전라도 지방 사람들이 출세 길이 막혔다. 해방 후 한국사회는 경상도사람들의 천하가 되면서 전라도사람들이 천대를 받고 살아왔다. 우리민족은 나라적으로 단합심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모인 곳이면 거개가 단합이 되지 않는다. 한국 관광단을 접대해보면 셋이든 삼십 명이든 늘 싸움이 있다. 조선족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족은 서로 뭉치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족이 뭉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지가 잘났다고 여기고 너나없이 제멋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며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 질투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문화혁명 때 조선족은 기타 민족에 비해 가장 발 벗고 혁명에 앞장섰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 과거 잘살았던 지식인, 지주, 부농을 타도하는 바람이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아파’하는 심리가 폭발하게끔 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 나보다 잘살던 사람들을 은근히 배 아프게 생각해왔는데 그 배 아팠던 심정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조선족이 가장 혁명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제는 혁명바람도 지나갔고 다시는 그 어떤 거대한 폭풍에 휘말릴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가만히 앉아서 배만 아파할 것이 아니라 나도 땅을 사려고 분투해야 한다. 배 아파하던 질투심리가 사려고 하는 경쟁의식으로 전환된다면 조선족의 앞날은 한결 더 밝게 될 것이다.            
73    공부란 무엇인가?(김정룡) 댓글:  조회:5988  추천:82  2008-02-25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9. 공부란 무엇인가?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조선족은 부모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식을 공부시킨다.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 그래서 조선족은 56개 민족가운데서 유일하게 문맹이 없고 대학입학률이 가장 높고 평균문화수준도 가장 높다. 이는 실로 조선족의 자랑이다. 그런데 공부란 도대체 무엇인가?  중국인은 공부를 학습, 독서, 책읽기(念書)라고 한다. 옛날 중국인은 공부한 사람을 독서인(讀書人)이라 하고, 공부하지 못한 사람을 책을 읽지 않았다(沒念過書)라고 했다. 일본인은 공부를 벤쿄(べんきキょウ)라 하는데 한자로 ‘면강(勉強)’ 이라 적는다. 이‘면강(勉強)’이란  어휘는 글자 그대로 억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일본인은 공부를 일종 억지행위라고 간주한 것이다. 어찌 보면 공부는 억지로 하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특히 공부에 취미가 없는 사람은 공부한다는 것이 실로 죽을 맛이 나는 억지노릇이다. 중, 한, 일 3국 세 민족가운데서 유일하게 조선민족만이 공부란 말을 쓰고 있는 데, 이 공부란 어휘는 중국어 쿵푸(工夫)에서 유래되었다.  쿵푸(工夫)는 노련함과 공력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에 주자학(신유학:新儒學)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 쿵푸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조선민족이 지식습득을 공부(工夫)라고 표현한 것은 조선조 5백 년 동안 주자학 을 뼈가 절도록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어찌되었든 조선민족이 쓰고 있는 공부란 말에는 상당히 넓고도 깊은 뜻이 담 겨져 있다. 우선 우리선조들은 공부를,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단순히 책 읽는 행위 혹은 대학에 붙기 위해 교실학습에 충실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것은 수신(修身)을 위한 것으로 간주했다. 수신이란 몸과 마음의 수련을 뜻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수신이란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수신 즉 사람이 되는 것은 가정을 고르게(옳바르게)하기 위해서이다. 옛날 가정 에는 수십 명의 가족성원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 대가정을 고르롭게 한다는 것은 실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공부를 통해 수신이 잘 된 사람이 이 대가정을 고르롭게 하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조설근의《홍루몽》이나 파금의《집》을 읽어보면 대가정을 고르롭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정을 고르롭게 하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보탬이 된다. 나라를 국가라고 하는 데, 즉 나라란 ‘국(國)’과 ‘가(家)’가 합쳐진 개념이다. 공자님은 “가정 내의 화목이 사회에 퍼지면 그것이 곧 치국의 토대”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되어 가정을 고르롭게 하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그러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이것이 곧 공자님의 공부이론이자 목적이자 이상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공부에 담겨진 본래 뜻이 왜곡되어 공부가 말이 아니게 변질되었다. 그 구체적인 표현을 살펴보면 현대인의 공부는 단순히 자신의 출세에  그 전부 목적이 있다. 이를테면 공부하는 가장 주요목적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인데, 현대인의 공부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다지 중요치 않다. 옛날사람들이 사람이 된다고 하는 기준은 어질고(仁), 의롭고(義), 예의 바 르고(禮), 지혜롭고(智), 믿음(信)이 있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사람이 되는 기준은 공부를 통해 갖추어진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소학교에 수신과목이 있는데 학생 들이 이 다섯 가지 사람이 되는 기준을 배우고 있다. 물론 중국에도 사상 품덕과 목이 있기는 하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메마른 이론뿐이어서 사람이 되는 기준 과는 거리가 멀다. 소학교에 다니는 김양은 길거리에서 엄마가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동학들 에게 “우리 마다매(큰엄마)”라고 인사시켰다고 한다. 중학생인 최군은 역시 길거리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자 친구들한테 “우리 아버지 친구”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지금 학생들은 자기 부모가 가난하거나 늙어 보이면 창피하다고 학부모회의에 참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동네 세탁소에 가보면 여학생들이 심지어 자기 팬티 나 양말짝조차 세탁소에 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유사한 실례는 한도 끝도 없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학생들도 명색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부모도 모르고 제 손으로 팬티 짝도 빨지 않는 학생들이 공부를 해서 뭘 하느냐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은 쩍하면 “지금 애들은 글러먹었다”고 푸념한다. 위에서 말한 실례의 학생들의 그릇된 행위거나 현재 학생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그 근원이 오히려 “지금 애들이 글러 먹었다”고 푸념하는 부모세대들에게 있다고 본다. 조선족기성세대들의 대다수가 자식을 공부시키는 목적이 단순하게 아래와 같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신분상승이요, 다른 하나는 체면의식 때문이다. 신분상승이란 출세를 의미하는데 옛날에는 출세하려면 과거시험에 합격되는 길밖에 없었다. 과거시험이란 본래 중국에서 생겨난 것을 우리 조상들이 도입해서 실시한 관리 선발 제도다. 문제는 중국에서는 짚세기 고무신출신 할 것 없이 무릇 양민이면 전부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던데 비해, 조선에서는 양반가문, 그것도 양반가문의 본처의 자식(적자)만 응시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판에 짚세기 고무신출신인 상농(쌍놈:常奴)의 자식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자식은 출세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하도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심해서 절대다수 인구비례를 차지하고 있는 상놈들은 출세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한을 품고 있었다. 우리 중국조선족 일세들은 조선에서 파산된 농민출신이었다. 그래서 우리조선 족에게는 현재 한국이나 조선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출세에 대한 한이 더 크다. 거기다 이국땅에서 정착생활을 하면서 자식의 출세문제가 더욱 긴박해졌다. 우리조선족 일세와 이세는 절대다수가 문명이었다. 자신들이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려고 하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러한 한의 마음만 갖고 있었을 뿐 지식이 전혀 없는 부모들은 자식을 교육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고 오로지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심지어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키는 열정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식을 공부시키는 목적이 출세에만 초점이 맞추어졌을 뿐 자식을 어떻게 사람이 되게 하느냐에 대해선 관심이 적었다. 이렇게 하는데서 위에서 말한 공부의 본래 뜻이 상실되고 오로지 공부가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되었다. 현재 연변일중을 비롯한 중점고중에 다니는 학생들의 부모들은 절대다수가 자식을 아무것도 상관 말고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라고 교육시킨다. 그리하여 어떤 학생들은 어른을 만나 인사조차 할줄 모른다. 필자가 연변일중 교사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경비실에 네명의 여학생이 선생님을 빤히 쳐다 볼뿐 누운 채로 일어나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 여학생들의 예절 없는 행위는 순전 히 가정에서 그렇게 바르지 못한 교양을 받아온 탓이다. 연변일중에 다니는 학생들은 거개가 대학에 붙는다. 하지만 최저한도의 예절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에 진출해서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부모들은 그러한 문제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직 대학에만 가면 만사 오케라고 만 생각할 뿐이다. 다른 면에서 볼 때 조선족은 체면의식이 대단히 강하다. 이는 매우 좋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체면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상향심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열심히 자식을 공부시키는 것도 일종 상향심이 높은 표현이다. 이는 매우 제창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체면의식이 지나치면 역작용을 놀게 된다. 예하면 우리부모들은 “공부를 안 하면 앞으로 소궁둥이나 두드리겠느냐?”, “삼륜차나 끌겠느냐?”는 등 이러한 비하적인 말밖에 할줄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물론 첫째는 자식의 장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다른 하나는 자식이 소궁둥이나 두드리거나 삼륜차를 끌게 되면 부모의 낯이 깎인다는 체면의식이 내포도어 있다. 우리조선족은 부모들한테서 이런 비하적인 말을 많이 들어왔기에 대학에 가면 문제될 것이 없으나 대학에 못가면 그러한 사회밑바닥 일에 종사하려고 하지않는 다. 그러한 일을 하면 체면이 깍인다고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한족들은 어릴 때 부터 공부할 감이 못되면 밖에서 돌아올 때 하다못해 나ant가지라도 손에 들고 오도록 생활력을 높이는 교육을 시킨다. 필자는 4인방 시절에 한족중학교에 다녔는데 그때 그 애들은 과일 철이면 등에 과일을 지고 아침시장에 넘겨주고는 등교했다. 만약 조선족학생이 그렇게 한다면 부모들이 난리를 피울 것이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무슨 짓이냐?”고 말이다. 조선족은 어릴 때부터 생활력을 높이는 교육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일단 대학에 못가면 천한일은 하기 싫어하고 높은 데는 바라볼 수 없고 해서 집에서 놀거나 사회말썽꾸러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부모들은 확실히 자식교육에 있어서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예하면 어린 이절이면 아이한테 용돈을 주거나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해주고는 어른들이 먹을 것을 한보따리 싸가지고 맥주상자를 둘러메고 공원에 가서 실컷 두드려 먹고 마시고 논다. 아이의 명절을 빌어 어른들이 오히려 한바탕 명절을 쇠고 있다. 유태인은 어린이 절이면 부모가 아이한테 장래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만약 아이가 왕이 되고 싶다고 하면 소박한 왕 옷을 지어 입히고 부모가 아이 앞에서 “마마”하고 절을 하는 것으로 어린이절을 보낸다. 듣는 말에 의하면 어떤 가정에서는 예배 돈을 수천원 심지어 만원까지 준다고 한다. 이는 순전히 미친 짓이다. 아이에게 예배 돈을 주겠으면 적당히 학습용품을 살 돈을 상징적으로 주면 되는 것이지 수천 원 만원을 준다면 그 아이가 앞으로 공부를 하면 얼마나 할 것인가? 현재 한국에 가있는 부모들은 자식한테 전부 돈으로 행세하고 있다. 한국에 시집간 한 여인은 아이가 중학생인데 매달 60만원 을 보내고 있다. “왜 그렇게 엄청난 돈을 보내느냐?”고 물었더니 “아이와 함께 있지도 못하니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부모가 한국 간 아이들은 대다수가 돈이 무엇인지 모르고 흥창만창 쓰고 있다. 돈을 쓰고 싶은 대로 쓰는 아이들이 공부를 하면   얼마나 할 것인가? 사람이 되면 얼마나 될 것인가?학생교육에 있어서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진짜 공부가 부족한 상황이다. 예하면 아이가 학교에 붙어서 첫 학부모회의에 참가해보면 아이의 미래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다. 물론 고학년에 올라가서도 매번 학부모회의는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유태인은 첫 학부모회의에 대학교수를 청해놓고 어떻게 아이의 미래를 바로 잡아줄 것인가는 공부를 한다. 예하면 만약 성격이 발랄한 아이면 방에다 어두운 색을 선택해서 장식하고 만약 우울한 성격의 어린이면 밝은 색을 선택해서 방을 꾸미도록 하는 공부를  한다. 조선족은 학교 붙기 전에 구구를 외우고 철자를 쓰면 마치 천재인양 떠들고 난리다. 유태인은 소학교3학년이 되어도 구구단을 모른다고 한다. 그들의 소학교 저학년의 교육은 주로 사람이 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교사에게 돈을 주는 행위는 필자가 알건대 전세계에서 아마 한국과 중국조 선족뿐이다. 한국에서는 교사한테 주는 돈을 촌지(寸志)라고 하는데, 촌지바람이 심해서 사회문제로 떠오른지도 오래되었건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 조선족도 마찬 가지다. 아무리 교육국에서 명문을 내려 막으려하고 있으나 마치 고양이가 있다 고 해서 쥐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여전히 부모들은 돈을 주고 있고 교사들은 돈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시대학생들이 아는 것은 많지만 어른들의 눈에 거슬리는 일이 굉장히 많다. 무엇 때문일가? 이는 지(知)만 있고 식(識)이 없는 잘못된 공부 때문이다. 지(知)가 아무리 풍부해도 식(識)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죽은 공부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마땅히 지(知)와 식(識)이 결합된 공부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에 노력을 기울려야 한다. 그래야만 공부가 진정한 사람이 되는 공부로 될 수 있다.   
72    점심이란 말의 유래(김정룡) 댓글:  조회:4447  추천:56  2008-02-23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24. 점심(點心)이란 말의 유래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한국 각종 퀴즈대회에 ‘아침, 점심, 저녁 중에 어느 것이 한자어인가?’는 문제가 잘 출제되고 있는데, 이 문제를 맞추는 자는 반도 안 된다. 답은 점심이며 한자로 ‘點心’이라 적는다.  점심이란 말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 사람들은 아침을 늦게 먹고 저녁을 일찍 먹었으며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않았다고 한다.  불교가 중국에 유입된 후 점심이란 말이 생겨났는데, 그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한 스님이 아침을 먹고 먼 길을 떠났다. 도중, 갈 길은 멀고 저녁시간도 멀었는데 너무 많이 걸어 배가 몹시 고파서 현기증이 나고 쇼크 할 직전에 이르렀다. 길 가던 손님이 뭔가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스님은 구걸했다. 손님이 스님을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주어, 스님이 그것을 조금 먹고 나니 기력이 회복되고 정신이 버쩍 드는 느낌이었다(아마 현대인들도 이런 경험을 거의 다 해보았을 것이다). 점심이란 바로 배가 몹시 고플 때 기력을 회복시키고 정신이 들게 만드는 음식을 말한다.  그런데 왜 그 음식을 점심(點心)이라 했을까?  현대인은 정신을 비롯한 사유, 생각, 의식 등등이 두뇌활동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서양문화의 유입에 따라 우리 의식 속에 박힌 개념일 뿐이다. 중국의학원리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두뇌에서 산생되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서 생겨난다. <<황제내경>>에 “심장이 신을 주재한다(心主神).”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모든 의식 활동을 가리키며 마음이 곧 심장과 동일한 개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 머리  속에 ‘심주신(心主神)’의 의식이 깊이 뿌리내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인은 정신을 비롯한 모든 의식 활동을 생산하는 곳이 곧 심장이고 ‘점(點)’이란 터치한다는 뜻이며 정신이 나게 만드는 것을 ‘點心)’이라 했고, 그 점심이 바로 ‘심’을 ‘점’하게 만드는 간단한 음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인은 간식을 ‘點心’이라 하며 정오에 먹는 음식을 오반(午飯)이라 한다. 우리민족은 하루 세끼 중 정오에 먹는 음식을 점심이라 하는데, 이것이 곧 중국인과 다른 점이다.  중국인은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점심을 좀 잘 먹고 저녁을 굉장히 잘 먹는다. 우리민족은 아침저녁을 잘 먹고 점심을 대충 먹으니 아마 정오에 먹는 음식을 ‘점심’이라 했을 것이다.                      -한중동포신문 제117호   
71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출국바람 (김정룡) 댓글:  조회:5902  추천:92  2008-02-22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8.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출국바람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출국바람.  출국바람이 하도 말도 많고 탈이 많아서 십여 년래 조선족사회의 가장 큰 화제 거리로 되고 있다. 이 출국바람에 관해 여태껏 얼마나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모른다. 필자는 기왕의 출국바람에 관한 글들과 각도를 달리하여 말하고 싶다. 즉 조선족은 왜 너나없이 출국바람에 뛰어드는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출국바람이 바람직한 일인가? 부부간의 어느 일방이 출국했을 경우 어떻게 마음가짐을 바꿔야하는가? 이 세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얘기하려고 한다. 조선족이 너나없이 출국바람에 뛰어드는 데는 외적원인과 내적원인이 있다.먼저 외적원인을 살펴보면 연변의 도시특징은 산업형이 아니고 소비형이기 때문에 실업자가 매우 많다. 게다가 돈이 될 만한 기업과 예전에 철밥통이라 여겨오던 공공부문에서조차  점차 새로 일자리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이러한 객관적인 원인을 따져보지 않고 그냥 출국바람 때문에 초래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만 꼬집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도시시민들이 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생활수준 격차가 점점 더 커짐에 따라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너나없이 출국바람에 뛰어들고 있다. 내적원인으로는 조선족은 한족처럼 자아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맨날 타인과 비기면서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남들이 출국해서 돈을 벌면 너나없이 따라서 춤을 춘다. 다시 말해서 조선족은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성격이 있다. 그래서 심지어 먹고 사는데 별로 지장이 없는 사람도 출국바람에 뛰어들고 있다. 미자(가명)는 연길에서 미용원을 운영하여 매달 3천원이란 짭짤한 순수입을 올리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렇게 벌어선 어느 천 년에 부자가 되겠느냐?”면서 미용원을 때려치우고 한국에 갔다. 해월(가명)은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과 함께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 다녔는데 매달 월급이 합치면 4천원이나 된다. 4천원이면 연길에서 먹고 쓰고도 얼마쯤은 저축할 수 있다. 그런데 중학교동창이 본래 자기네보다 형편없이 구차하게 살았었는데 부부가 한국에 갔다 온 후 큰집을 장만해놓고 번듯하게 사는 것을 보고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에 갔다. 직장이 없거나 월급이 낮은 사람들이 출국바람에 뛰어드는 것은 제창할 일이지만 충분히 먹고살 여유가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출국바람에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미자와 해월과 같은 경우의 사람은 비례가 적을 것이고 대다수가 생활이 어려워서 출국바람에 뛰어든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래저래 출국하다보니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는 조선족만 약 15만 명에 달한 다. 이미 전에 한국에서 몇 년 간 묵어 있다가 돌아온 사람 , 일본, 싸이판, 아프리카 및 기타 나라들에 다녀온 사람이거나 현재 머물고 있는 사람을 합치면 30만 명 정도 될 것이다. 이는 200만 조선족인구를 볼 때 실로 엄청나다. 일부에서는 출국바람 때문에 초래되는 리혼, 자녀교육, 부모양로 등 문제가 하도 심각해서 출국하지 말고 본고장에서 열심히 살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호소하는 분들의 주장은 이렇다. 한족들은 왜 출국하지 않고 본고장에서 잘살고 있는데, 조선족은 출국에만 몰두하고 있는가? 출국해서 돈은 벌었으나 가정불화가 생기거나 자녀교육이 바로 되지 못한다면 돈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인가? 이러한 호소는 소귀에 경 읽기라고 생각한다. 조선족이 본고장에서 더러운 일, 힘든 일 등 사회최하층의 일거리에 나서면 쪽팔린다는 체면의식 때문인 건만 사실이지만, 확실히 그러한 막노동은 아무리 힘들게 해봐야 월급이 적은 것도 또한 사실이다. 아무래도 힘들게 할 바엔 목돈을 벌 수 있는 외국에 가는 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너나없이 출국바람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간에 조선족사회는 한족들보다 소비수준이 훨씬 높기에 적은 월급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너나없이 출국하려고 애쓰고 있다. 출국바람 때문에 이혼율이 높고 자녀교육이 문제되고 있지만 또한 돈이 적거나 없어도 가정불화는 면치 못한다. 이미 사회가 그렇게 변화 된 만큼 과거처럼 적게 벌면 적게 쓰고 없으면 쓰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는 이미 낡은 터에서 이밥 먹던 얘기로 되어버렸다. 때문에 가령 출국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더라도 역시 출국할 수만 있다면 외국에 가야 한다. 출국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출국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은 마치 비행기가 사고 날 확률이 높다고 해서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처럼 설득력이 없다. 출국하되 좋기는 부인보다 남편이 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예로부터 남자는 나돌고 여자는 집에 있는 것이 전통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남자가 가정을 떠메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아직도 남자가 벌면 말썽이 적지만 여자가 벌고 남자가 집구석에 쑤셔 박혀 있으면 말썽이 많을뿐더러 남자가 병신 되기 마련이다. 현재 조선족사회 가정불화는 남편이 부인보다 돈을 적게 벌거나 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남편들이 제구실을 하려면, 특히 출국문제에 있어서 남자들이 나서고 여자들을 집에 있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 현재 조선족이 출국한 남녀비례를 보면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더 많다. 이 때문에  특히 이혼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다. 예하면 남자는 부인이 자기보다 못하거나 돈을 벌지 못한다고 나무라는 경우가 적은데 비해, 여자는 자기보다 남편이 못하거나 돈을 벌지 못하면 투정하기 마련이다. 특히 여자들이 밖에 나가서 눈을 뜨고 나면 또는 자기 남편보다 썩 훌륭한 남자들을 접촉하게 되면 남편이 눈에 차지 않아하는데서 이혼율이 높아지게 된다. 필자가 한국에서 조선족을 대상으로 조사한데 의하면 거의 40%에 가까운 여성들이 귀국 후 남편과 계속 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고, 거꾸로 80%의 남자들은 계속 가정을 유지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로부터 남자들은 밖에 나가서 아무리 지랄하다가도 나중에는 제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만 여자들은 일단 변하기 시작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재 가정유지관념에 있어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경솔해진 것만 사실이다. 옛날에는 남자들이 밖에서 나돌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면서 여자들도 남자들 못지않게 나돌고 있다. 그릇이 나돌면 깨지듯이 현재 수많은 여자들이 깨지고 있다. 한국에 가 있는 조선족사회에 ‘애인’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 임시부부현상에 관해 이미 여러 편의 글들이 발표되었기에 여기서 현상라열은 그만두고 각도를 달리하여 얘기해보자. 남나든 여자든 모두 한국에 떠날 때에는 몇 년 간 감옥에 간 셈치고 모든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꾸벅꾸벅 열심히 일만해서 돈을 벌자고 결심한다. 바꿔 말하자면 출국하는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내가 외국에 가서 다른 남자 다른 여자와 임시부부를 맺거나, 도박놀이 하거나. 기생놀이 하거나, 한국영감과 친하려는 목적으로 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한국은 필경 감옥이 아니고 또 출국하는 사람들은 필경 불교스님처럼 무아(无我)경지에 이른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인 유혹에 나의 욕구를 억제할 수 없다. 한 해 두 해 지내다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특히 홀로 출국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이겨내기 힘든 것이 고독이다. 멀리 있는 물이 가까운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멀리 헤어져 있는 남편이거나 부인은 현재 갈증을 풀어줄 방법이 없으므로 가까운 물을 구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어찌 보면 인지상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경(가명)이란 연길여성은 집에 장독이 어디에 있는지 김치 그릇이 어느 것인지조차 모를 지경이었으며 심지어 남편이 발까지 씻겨주고 안마까지 해줄 정도로 편안하고 행복스러웠다. 그토록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살던 여자가 막상 타향에서 홀로 지내자니 고독을 못 이겨 3개월도 안되어 임시남편을 찾아 생활하기 시작했다. 한국 간 사람들이 거개가 임시부부를 맺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남편이 전화로 “내가 그토록 너를 사랑하는데 만약 니가 다른 남자와 바람피우는 날이면 때려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문경이 하는 말이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힘이 있으면 왜 당신이 나와서 돈을 벌지 않고 나를 외국에 보냈느냐”고 오히려 남편을 원망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아무리 금슬이 좋던 부부라도 일단 일방이 출국하면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수수하게 지내던 부부가 일방이 출국했을 경우에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더욱 없다. 변하는 것을 제창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 어찌 보면 정상이다. 필자가 한국에서 여자냄새도 모르고 수년간 꾸벅꾸벅 일만하고 있는 남자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허나 정작 당사자들은 자신이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내고 있다. 거꾸로 임시부부를 맺고 사는 남자들은 우울증이 없이 모두 활기찬 모습이다. 7년간 여자 손도 만져보지 못한 창수(가명)는 귀국해서 부인과 잠자리를 하려는데 거시기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이 “드문드문 써먹을 것이지 왜 병신이 되도록 놔두었느냐?”고 애탄 어투로 말했다. 의학상식으로 말하면 창수처럼 오래 동안 써먹지 않으면 병신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남자든 여자든 써먹어도 말썽거리요, 안 써먹어도 말썽거리다. 창수처럼 한국에서 오래 동안 써먹지 않는 남자는 적다.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써먹지 않는 자의 비례는 적다. 이는 20~40대 남녀를 대상해서 하는 말이다. 이 연령층에 있는 사람들은 한창 성적욕구가 강할 나이에 안 써먹고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때문에 어찌 보면 출국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은 정상이다. 그리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부부가 헤어져 있으면 자연히 마음이 멀어지게 되고 따라서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정상이다. 그래서 출국한 남녀들이 임시부부를 맺는 경우가 많다. 만약 남편 혹은 부인이 출국해서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아예 보내지 말라. 괜히 보내놓고 변할까봐 속 태우면서 살 거면 아예 보내지도 말라는 뜻이다. 일단 보내기로 마음먹었으면 될 대로 되라고 속편하게 마음가짐을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 세월에 남편 혹은 부인을 출국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도박과 마찬가지다. 운이 좋으면 돈을 벌어 와서 함께 살것 이고, 운이 나쁘면 좇 떼이고 불 떼이고 다 떼이고 만다. 변하는 것은 집에 있는 남편 혹은 부인도 마찬가지다. 요즘 아리랑방송을 들어보면 한국에서 열심히 번 돈을 전부 집에 보냈는데 정작 귀국해보니 돈이 다 날아나 없어진 실례가 많다. 대개 도박이나 유흥에 탕진해버린 경우가 많고 다른 남자나 여자를 만나 새살림에 탕진한 경우도 적지 않다. 철호(가명)는 한국에서 6년간 열심히 번 돈을 몽땅 집에 보냈다. 얼마 전에 귀국해보니 마누라가 얼굴만 뜯어고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아이를 난 여성이라면 뱃살이 트기 마련인데 새 남자한테 처녀처럼 보이려고 튼 뱃살까지 수술했다. 남편이 그토록 힘들게 번 돈을 다른 남자한테 잘 보이려 이리저리 뜯어고치는 데만 20만원을 소비해버렸다.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이혼을 제기해놓고는 아예 집으로 들지도 않는다. 사실 출국한 사람들은 힘들게 돈을 번다. 그러나 집에 있는 사람들은 맨날 술판과 노래방 및 동네 마작 판에 빠져있다. 옥화(가명)는 4년 동안 동네 마작 판에 처넣은 돈이 20만 원 정도나 된다. 남편이 전화 오면 새 아파트를 사놓았다고 거짓말을 해댄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면 어떻게 교대해야할지 고민에 빠져있다. 하지만 마작은 여전히 손을 떼지 못하고 있다. 김표(가명)는 마누라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다른 여자와 4년 반이나 살면서 15만원을 소비했고 그 여자가 출국하게 되니 8만원을 대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출국 후 감감무소식이다. 마누라가 애써 번 돈을 다른 여자한테 날려 보냈다.  출국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철칙이 있어야 한다. 즉 남편 혹은 부인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번 돈을 몽땅 집에 보내지 말고 적당히 생활비만 보내라. 그렇지 않고 일단 힘들게 번 돈을 몽땅 보냈다가 집에 있는 사람이 다 날려 보내면 좇 때이고 불 떼이고 남는 것은 병든 몸뚱아리 뿐이다. 세월이 변했으면 사람도 변해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챙길 줄 알아야 한다. 해가 서산에 기운 후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비록 출국바람이 말고 많는 탈도 많지만 그래도 외화가 연변경제가 돌아가는데 크게 한몫을 하고 있으며 외국에 가서 몇 해 있다가 돌아오면 여러모로 삶의 의식이 변화되는 등 좋은 점도 많다.
70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 (김정룡) 댓글:  조회:6984  추천:103  2008-02-22
재한조선족문제연구집“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  -5월 6일 중국동포큰잔치 참관인상기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우리맘속의 붉은 태양 조국변강 비춰주니장백천리 해란강반 붉은 기발 물결치네천만송이 해바라기 태양따라 활짝 피고연변인민 한맘으로 모주석을 노래하네 아~~~ 모주석 우린그대 열애하며그대교시 명심하리연변인민 그대의 만수무강 축원하네만수무강 축원하~네~  지난 5월 6일 오후 1시, 중국동포의집 주최로 연변구연단의 배우들을 초청해 고척교 안양천 체육장에서 중국동포잔치 행사를 했다.  5천여 명의 중국동포들이 모여든 이번 행사는 한국 땅에서 모처럼 고향의 조선족배우들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날 공연은 구연단의 소품이 위주였는데 출현한 프로 대다수가 10년 전에 이미 연변에서 수없이 무대에 올랐던 내용들이었다. 고향땅에서 본 소품을 여기 서울에 와서 보게 된다는 반가움도 있었지만, 모처럼 한국 땅에서의 공연을 맞아 새로운 프로를 창작하여 재한조선족들에게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겨주었다.  묵은 프로도 녹쓸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생명력 있다. 그 한 예가 사회자 김문혁 씨가 마지막으로 부른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노래였다.  전주곡이 시작되자 수십 명의 남녀가 얼싸 신나게 춤판을 벌린다. 기자도 가슴이 뭉클해나면서 어깨가 들썩들썩해지는 기분을 갖게 한다. 춤판에 뛰어들어 옛솜씨를 뽐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술 한 잔 거치지 않고는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구경만 하고 말았다.  공연이 끝나고 기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맴 도는 것이 있었다. 귀가 길에 내내 ‘나를 비롯해 왜 조선족들이 아직도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노래에 열광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조선족에게 모택동은 누구인가?’ 모주석은 인간이자 신이였다. 조선족들의 가슴속에는 모주석의 형상이 뿌리 깊다. 특히 문화혁명을 통해 모주석은 우리 삶 속에 너무 깊게 너무 굳건하게 자리잡아왔다. 조선족이라면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기자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연변가무단의 대형가무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처럼 감동적인 가무를 감상해 본 적이 없다. 개혁개방이래 모주석의 사상과 이념이 많이 부정되어왔으나 아직도 ‘그때가 좋았지!’하면서 모주석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한국에 와있는 조선족은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식 생존경쟁방식, 차별적 대우, 지하철에서 뛰어다닐 정도로 채바퀴 돌듯 바쁘게만 살아가는 각박한 삶, 배금주의와 용모제일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의 병폐 때문에 모주석을 더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날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자 열광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참고문 : 조선족 가슴속의 모택동 20세기 초 중화민국정부와 장개석정부는 조선인이 만주에서 개간한 토지가 불법행위라 취급하고 토지사용권을 몰수하려고 했다. 이와 반대로 공산당은 조선인이 항일혁명을 같이 하면 해방을 맞아 토지사용권을 경자(耕者)의 소유로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해방 후 공산당정부는 약속대로 조선인에게 토지를 돌려주었다. 1952년 연변에 조선족자치주정부까지 세워주었고 조선인을 중화인민공화국공민으로 인정해주었다.  1945년 광복 시에 만주의 조선인이 210만이었으나 반 정도인 100만이 한반도로 돌아갔고, 나머지 110만의 대다수는 피땀으로 개간한 땅이 아쉬워 한반도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 살게 되었으며 이들은 공산당의 조선족에 대한 정책에 감지덕지하면서 살아왔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모주석에 대한 개인숭배가 ‘예수’를 능가했다. 조선족은 공산당의 덕분을 모주석의 한 몸에 돌리게 되면서 여타 민족의 추종을 불허하는 모주석 찬양에 발 벗고 나섰다. 조선족이 모주석 찬양에 한참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연변인민 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노래가 나왔고 또 가무로 만들고 보급시켜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입을 가진 조선족이라면 빠짐없이 부르고 또 불렀다.
69    연변이면 주체성, 옌볜이면 친한(漢)파?(김정룡) 댓글:  조회:5031  추천:60  2008-02-21
재한조선족문제연구자료집연변이면 주체성, 옌볜이면 친한(漢)파?  -발음법에 대한 논란, 언어학적 접근이 필요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연변을 옌볜이라 부르지 말아주세요!”라는 글이 발표되자 이에 대한 한국 주요언론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글 쓰는 이들이 모두 문제의 본질을 떠나 정치적인 논쟁으로만 비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대단히 유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언어학적으로 접근하여 논의해 보려 한다.  첫째, ‘음독이냐? 중국어발음식 표기냐?’의 논란에 대하여  세인이 다 알고 있는바와 같이 우리민족은 수천 년 동안 한문을 사용해왔다. 한문은 우리민족 언어와 발음이 다르다. 그리하여 한문을 우리말 발음으로 읽는 음독법을 발명해냈는데, 하늘 천(天) 따 지(地)라 하는 이른바 천자문이 바로 음독법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이 음독법이 우리민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현재 우리말 중 75%가 한자어에서 온 어휘이다. 한문의 발원지가 중국이므로 우리민족은 중국의 지명과 인명도 역시 음독으로 표기해왔다. 이 수천 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한문음독법이 한글전용이 보편화됨에 따라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중국어발음 식 그대로 옮기는 표기법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한국정부에서 지시를 내리고 방송, 신문들이 따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北京을 북경이라 하는 것과 베이징이라 부르는 것에 논쟁이 생기게 되는 근원이 곧바로 수천 년 전통의 음독법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인 음독법을 타파하고 현실적으로 중국어발음을 따르겠는가에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한국정부가 중국어 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을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한중수교가 건립되었고 양국 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한국정부는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전통적인 음독법을 포기하고 중국어 발음을 따라 표기하는 것이 중국을 빨리 알고 교류를 더 활성화시키는 지름길이라 판단하고 선택한 표기법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정부는 중국과의 교류라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하여 한중교류에 있어서 한국과 한국인이 보다 빠르고 보다 쉽게 중국에 접근하려는 의도 하에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을 통일로 하라고 지시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음독법보다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면 이것이 진보적인 개혁조치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北京에서 장기체류하고 있는 한국 분에게 “‘북경’에 와 있다는 느낌과 ‘베이짱에 와 있다는 느낌 중에 어느 쪽인가?”고 물었더니 “당연히 ‘북경’이 아닌 ‘베이짱이란 느낌이 훨씬 더 강하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례가 말해주 듯 한국정부의 조치가 근거 없는 개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음독을 따르면 주체성이고 중국어 발음을 따르면 사대주의? 음독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국어 발음을 따르는 것을 쓸개 빠진 사대주의의 표현이라고 독설을 퍼붓고 있다. 이는 마치 한국인이 東京을 ‘동경’이라 하면 주체성이 있고 ‘도쿄’라 하면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같은 못난 행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유치할까? 이는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한국인의 피해의식이 불러온 결과가 아닐까?  한국인은 이러한 잠재적인 피해의식 때문에 단순한 언어학의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비약시키기고 있다.  넷째,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을 역사문제와 연관시키는 것이 바람직 한 일이 아니다.  음독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연변’과 ‘옌볜’의 표현을 놓고 고구려를 들먹이고 항일을 거들고 그 땅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역사와 연관시키고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한국정부와 방송, 신문 등을 민족의 얼을 잃은 00이라고 공격하고 있는바, 이는 올바른 행위라 말할 수 없다고 본다.  과거 역사가 어떠하든지 현재 연변은 엄연히 중국 내 속하고 있는 땅이자 행정구역일 뿐이다. 물론 연변은 조선족자치주라는 특징 때문에 우리 것을 지켜가고 있고, 또 특히 언어문제에 있어서 중국의 지명과 인명을 전부 전통적인 음독을 시행하고 있다. 이는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허나 우리 조선족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해서 이를 한국과 한국인에게 반드시 우리조선족을 따라 배우라고 호소하거나 한국이 중국어발음을 따라 ‘옌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항의할 필요성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연변을 제외한 중국의 모든 지명은 중국어발음을 따라도 상관없고 오직 연변만 ‘옌볜’이라 부르지 말라고 호소하거나 항의하는 것은 편협한 지역주의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들이 중국에 개척한 땅이 연변뿐만이 아니라 동북3성 및 내몽골 지역을 포함해 한반도의 두 배나 된다. 우리선조들의 얼과 넋이 연변에만 뿌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조선족들이 연변, 연변···만을 고집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방면으로 볼 때 한국정부는 연변을 중국 내 일부로 여기고 있을 뿐 중국과 동떨어진 그 무엇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연변에 있는 延吉, 龍井, 圖門을 중국어 발음을 따라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전 방위적으로 볼 때 한국에서 연변을 제외한 기타 중국지명을 따로, 연변을 따로 하지 않고 통 털어 통일적인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허물이 될 수가 없다. 조선족이 한국과 한국인에게 연변을 내세워 특수하게 따로 대해달라는 주문은 중국 내에서 스스로 고립만을 자초할 뿐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다섯째, 한국학자들은 3류급 코미디 발언을 그만두고 품위를 지키기를 바란다.  한국인 김창진 교수는 그의 <<金昌辰의 방송언어 바로잡기>>란 글에서 길림성을 지린성이라 하는 표현에 대해 “거기가 무슨 지린내가 나는 지역입니까?······”라는 3류급 코미디 같은 표현을 서슴치 않았다. 욕은 듣는 자가 먹는다는 속담이 있듯 이 글을 본 필자는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김창진 교수의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지린성’에 살고 있는 우리 고장을 지린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 교수가 할 얘기가 아니라고 본다.  소위 교수라는 분의 입에서 이렇듯 천박한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천박한 감정을 갖고 대하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이런 천박한 표현이 결코 주체성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여섯째, 청도와 칭따아오란 호칭이 불러온 혼란  한국에서 현재 중국의 지명과 인명에 대해 음독과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것이 혼재하고 있어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인 김00는 작년 3월에 청도에 가려고 00여행사에 티켓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곳이 청도가 아닌 사천성 성도(成都)였다. 그는 중국어 한마디도 모르고 당지에 지인도 없어 1주간 죽도록 고생하고 나서 청도에 갔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00여행사를 찾아 항공료와 추가비용을 환불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00여행사에서는 ‘청도는 발음이 청두(成都)와 비슷하므로 우리는 成都로 가는 줄 알았다. 당초에 왜 칭따아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우리 여행사에서 책임 질 일이 아니다.’ 라고 하는 말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을 떠나 하여튼 전통적인 음독과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 사이 혼란이 존재하고, 또 이로 인해 실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정부와 방송, 신문 및 기업체들에서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을 실행하고 있다면 국민들도 하루 속히 이에 적응해야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일곱째, 중국어발음을 따르려면 올바르게 쓰자는 것이다. 중국에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현재 한국에서 중국어발음을 따라 표기하는 것들을 보면 90% 이상이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귤이 탱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江澤民을 장쩌민으로, 蔣介石을 지앙제스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실로 웃기는 일이다. 江과 蔣은 중국어로 모두 JIANG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는 장으로 다른 하나를 지앙으로 옮기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또 우리민족 언어에 분명히 쌍모음이 있어 한문 JIANG을 능히 ‘쟝’으로 정확히 옮길 수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장’이나 ‘지앙’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때 한국에서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조선일보 박승준 중국전문기자는 이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중국어발음을 한글로 옮길 경우 통일적으로 쌍모음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결과다.” 그렇다면 정확히 옮길 수 있는 쌍모음을 무시하고 단모음을 사용하여 이상하게 옮기게끔 한 결정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그럼 한국에서 진정 중국어발음을 한글로 옮길 경우 쌍모음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가? 답은 아니다. 연변을 ‘옌볜’이라 말하는 것은 그래 쌍모음이 아닌가?  더 한심한 것은 연변은 한글로 중국어발음을 정확히 따르면 분명히 ‘얜뱬’이지 결코 ‘옌볜’이 아니다. 어느 유식한 양반이 ‘얜뱬’을 ‘옌볜’, ‘얜지’를 ‘옌지’라 지어냈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는 표현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방송, 신문을 비롯해 중국어발음을 한글로 정확하게 옮긴 것을 별로 본 기억이 없다. 한국에서 한문에 도사라 자부하는 도올 선생마저 山東을 ‘싼똥’으로 옮기고 있다. 아니 산동이면 산동이고 싼뚱이면 싼뚱이지 뭐 뚱딴지 같은 ‘싼똥’이란 말인가? 그는 또 孔子를 쿵쯔라 옮긴다. 子는 중국어에서 輕聲으로서 성조가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子는 ‘쯔’가 아닌 ‘즈’로 옮겨야 한다. 도올 선생이 이러할진대 기타 분들의 상황이야 더 말치 않아도 너무나도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결국 한국인이 제멋대로의 표기법으로 중국인을 만나 대화할 경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물론 중국어발음을 한글로 정확히 옮길 수없는 것들도 있다. 예하면 福建省이란 福에 F음이 들어 있어 우리말로 정확히 옮길 수가 없다. 이 F음을 제외하고는 우리민족 언어가 발음이 풍부해서 거의 정확하게 옮길 수 있다. 허나 한국에서는 중국어 발음과 거리가 먼 제 나름대로의 표기법을 남용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중국에는 또 邯鄲學步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한단은 조나라의 수도였는데 거기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매우 세련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한 시골소년이 한단사람들의 세련된 걸음걸이를 배우려고 이불짐을 메고 한단에 가서 오래 동안 머물면서 열심히 배웠다. 헌데 그 소년은 한단사람들의 세련된 걸음걸이를 배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잃어버려 기여서 고향에 돌아왔다고 한다. 나의 생각이 기우이기는 하지만 한국인이 전통적인 음독법도 잃어버리고 중국어발음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한단학보 신세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필자는 한국에서 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음독을 고수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해서 한국과 한국인에게 우리와 같게 할 것을 주문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음독이든 중국어발음을 따르는 표기법이든 이는 한국과 한국인의 선택일 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한국이 중국어발음을 따르겠으면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귤이 탱자가 되는 현상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할 뿐이다.
68    조선족으로 사는 것이 행(幸)인가, 불행인가? (김정룡) 댓글:  조회:6197  추천:88  2008-02-21
재한조선족문제연구자료집 조선족으로 사는 것이 행(幸)인가, 불행인가?  김정룡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1993년 미국의 샤무엘·헌팅턴 교수는 <<문명의 충돌>>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는 양대 진영의 대결이 사라짐에 따라 사람들은 저마다 ‘나는 누구냐?’ 고 묻게 된다. ······사람들은 기존의 이념과 사상을 버리고 본래의 종교나 민족문화에로 회귀하려 할 것이다.”  헌팅턴 교수의 이와 같은 지적은 조선족사회의 변화에도 많은 사색을 던져주고 있다.  조선족은 1980년대 말까지 국적이 있는 중국과 고국인 한반도의 존재에 대해 아무 고민이 없이 오로지 중화인민공화국공민이 되기에 충실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다가 1992년 8월 24일 중한수교를 계기로 조선족이 고국인 한국과의 왕래, 중국에 간 한국인과의 접촉이 빈번해짐에 따라 조선족은 ‘나는 누구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정체성논란이라 말한다.  1990년대 중반, 흑룡강신문에서 조선족정체성문제에 대해 지상토론을 펼쳤는데, 대체로 ‘조선족은 고국인 한국인과 같은 민족이지만 한국인은 우리를 이방인으로 취급하더라. 우리조선족의 삶의 터전은 역시 중국이다.’라는 인식으로 가닥이 잡혔었다.  그 후 현재까지도 조선족사회정체성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 흘러왔으며 요즘 들어 어떤 조선족지성인들은 “차라리 중국인이거나 한국인으로 태어날 것이지 나는 뭔가? 이방인이다. ······정부의 소수민족우대정책은 표면적이다.”라고 말해 타인에게 조선족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심지어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우대정책을 폄하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족으로 사는 것이 불행이라는 얘기다.  조선족으로 사는 것이 정말 불행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족은 러시아 까레스끼(고려인)처럼 허허벌판에 추방되어 온갖 고생을 겪은 일도 없고, 재일교포처럼 수십 년을 살아도 국적을 갖지 못하고 참정권도 없는 것이 아니다.  조선족은 만주 땅에서 한반도의 2배 넘는 토지를 개간하여 스스로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항일전쟁시기에 공산당이 약속했던 대로 해방 후 토지를 되찾았고(피땀으로 가꾼 땅을 버리기 아쉬워 한반도로 돌아가지 않은 수가 100여 만이다.) 자치정부도 세우게 되었으며 참정권도 부여받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우대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조선족을 많이 돌봐주었다.  필자가 1980년대 장춘에서 대학공부 할 때 소수민족비 2위안(1년이 지나 4위안이었음)을 받았다. 당시 한 달 소비가 5위안 내지 10위안이었으니 2~4위안이란 돈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족애들과 다른 민족애들은 매달 입쌀권(大米票)이 2근이었으나 조선족만은 8근이었다. 그 때 한족애들이 우리조선족들에게 잘 보여 입쌀권을 얻어먹으면서 “왜 니네 조선족은 특별한 대우를 받는지 부럽다.”고 했으며 우리조선족들은 이로 인해 자호감을 느끼며 살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좋은 것은 좋다 하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중국정부에서 조선족들에게 밭을 적게 주었나, 일을 못하게 했나, 정치를 하지 말라고 했나, 도대체 무슨 차별을 받고 살아왔단 말인가?  조선족이 중국정부로부터 우대정책을 받고 살아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조선족은 개혁개방을 맞아 자신들의 장점을 이용하여 내지와 연해도시에 진출하여 김치와 짠지 장사를 했고, 북조선과 보따리 장사를 하여 돈을 벌었다.  한국기업이 중국에 진출하자 조선족이 다리역할을 했고 취직도 많이 해서 돈을 벌었다. 또한 한국 문이 열리게 되자 코리안드림으로 엄청난 돈이 조선족사회에 흘러들었다. 가짜친척초청으로 한국에 온 수가 굉장히 많은데 어찌되었든 조선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또한 연변의 한족들은 조선족이 한국에 많이 갈 수 있는 것에 대해 몹시 부러워하고 있다. 현재 재한조선족이 22만이고 한족이 11만이나 되지만 한족은 재입국과 방문취업제 등 우대혜택이 없다.  또 조선족은 조선어와 한어 및 외국어 하나 더하면 3개국 언어를 구사하기에 우세한 점이 많다. 이도 조선족이 중국에서 살아온 특수요인으로 자연스레 얻은 이점이다.  여하튼 조선족은 중국에서 사는 것이 불행인 것이 아니라 행이다.  필자는 조선족이 중화인민공화국공민으로 조용하게 살아왔고 고요하던 조선족사회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킨 주인공은 한국과 한국인이라 생각한다. 그 근거로서 중한수교가 되기도 전에 한국인들이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에 올라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만세!”를 불렀고, 조선족을 만나 “여기가 본래 한국 땅이었다.”고 선교하고, 고고학자와 기자들이 ‘옛것’을 탐사하고 고찰하는데 조선족을 앞세우고, 조선족이 걸어온 길과 실질을 모르면서 한국과 중국이 축구할 경우 조선족이 중국을 응원하는 것에 반감을 드러내고, 언론들은 자기네 목적을 이루려고 조선족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에서 차별을 받고 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게하는 등등의 일련의 한국인의 행위는 일부 어리숙한 조선족을 동요하게 만들었고 아울러 ‘북경’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럼 한국과 한국인은 의도적으로 조선족의 입장을 난감하게 만들었을까? 필자는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한국은 단일민족국가로서 구성원들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만을 알고 있을 뿐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 더 크다는 또 다른 하나의 소박한 진리는 모른다. 고로 한국인은 조선족을 민족문화에로 회귀하기를 바라고 밀어주는 것은 좋은 일이나, 조선족을 이해 못해 ‘양모’와 ‘생모’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들고 도를 넘어 조선족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다.  객관적으로 어떠하든 간에 판단은 우리조선족 자신에게 달렸다.  조선족은 한국이란 고국에 와서 돈을 엄청 많이 벌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거지(散居地)에서 살아온 조선족들이 우리말 우리문화를 모르던 것을 한국에 와서 배우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우리조선족을 여러모로 폭넓게 끌어안을 그릇이 못 된다. 우리조선족의 삶의 터전은 고국인 한국이 아니라 역시 나고 자란 고향 중국이다.  고국에 와서 돈을 벌고 민족문화를 익히고 고향에 가서 사는 것도 역시 행이 아니겠는가?    
67    "사이트는 노가다 판?" 댓글:  조회:4867  추천:45  2008-02-15
“사이트는 노가다 판?” 김정룡 재한조선족칼럼니스트 리차드 닉슨 미국 전 대통령이 은퇴 후 <<미래의 영수들에게>>라는 책을 발표했는데, 세계적으로 반향이 컸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소모하는 젊은이는 전도가 없다. 그 시간이면 책 한 페이지라도 더 읽으라.”는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70~80년대 어떤 학자들이 “현대사회를 병들게 만든 주범이 곧 텔레비전의 출현이다.”고 지적했다. 인간세상이 텔레비전의 출현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인터넷이란 새로운 ‘통신문화’가 나타났으며 인류역사 이래 인터넷처럼 급속히 세상을 ‘하나’로 만들어 놓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은 유례가 없다. 세상만사가 ‘이’와 ‘폐’가 동반되듯이 인터넷의 출현도 인간사회에 신속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많은 ‘이’를 갖다 준 동시에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을 정도로 ‘폐’ 또한 적지 않다. 어찌되었든 현대인으로서 인터넷을 모르면 미개인으로 취급되리만치 인터넷은 널리 보급되어 있다. 필자는 남들이 다 하는 인터넷을 모르는 미개인으로 살다가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겨우 2006년 8월부터였고, 인터넷 검색은 겨우 2006년 12월부터였다. 웃기는 얘기를 하자면 2006년 2월 내가 조선족문제에 관련된 주제로 8 편의 시리즈와 1만자에 달하는 <<한류의 우와 열>>이란 글을 원고지에 써서 들고 연변여성, 연변문학과 예술, 연변문학 등 잡지사를 찾아갔더니 책임자들이 나보고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 맞냐? 중국에서도 웬만한 사람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데······. 나는 내 배짱대로 귀 잡지사의 취지에 맞으면 원고지에 쓰던 컴퓨터로 쓰던 무슨 상관이지? 관건은 작품성아니냐였다. 결국 나의 작품은 실렸다. 연변문학의 김삼 사장은 초면에 나를 대놓고 컴퓨터 배우기가 아주 간단한데 아직도 원고지에 글 쓰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컴퓨터를 몰라 수치심을 느낀 것이 아니라 속으로 글만 잘 쓰면 되지않느냐였다. 2006년 4월 말부터 동포들의 자진귀국 프로그램 때문에 나는 4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을 정도로 아주 바쁘게 보냈고 매 신문에 한 두 편의 글을 써야 했는데 역시 원고지에 쓰고 타인이 타이핑해서 신문에 올리다보니 너무 미안해서 8월부터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의 원고지에 쓴 글이 잡지와 신문에 수 십 편이 발표된 후 2006년 11월 27일 동북아신문 이동열 편집국장이 나한테 전화가 와서 나의 글 <<사례로 본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 국제결혼실태>>를 인터넷에 올리려한다고 했다. 또 웃기는 얘기지만 그 때까지 나는 세상에 인터넷신문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그 후에 주변사람들이 나의 글이 여러 사이트에 올라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사이트가 뭐냐고 물으니 사람들은 나를 마치 다른 세상에서 사는 인간이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본격적으로 사이트를 접촉하게 된 것은 겨우 2007년 1월부터였다. 그 시기 이동열 국장이 나의 과거의 글들을 올리자고 제의해왔다. 그래서 동북아신문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고 질적으로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양적으로 글을 많이 쓰는 사람으로 되고 말았다. 나는 글 쓰는데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쓴다. 첫째 현실적이면서도 이색적인 주제를 선택한다. 둘째 어려운 지식을 통속화하여 대중성이 있게 한다. 셋째 나만의 독특한 필법을 구사한다. 넷째 직설법을 사용한다. 나의 글이 한창 많이 발표되고 있을 때인 2007년 여름 나와 같이 일을 하던 한국인이 사이트는 노가다 판이니 김선생이 글을 많이 올리다 보면 후회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글을 많이 올렸고, 2007년 8월 말 연길에서 김삼 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그가 나의 글을 조글로에 올리자는 제의에 대답했다. 사이트가 노가다 판이라는 한국인의 말을 들은 지 8개월이 지난 지금 그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게 되었다. 우선 인터넷을 본격적으로 접촉한 이후로 나는 한 해 100권 정도의 독서량이 10권을 맴돌 정도로 현저하게 떨어졌다. 물론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보는 책도 있지만 웬지 서책을 읽기보다 기억에 못한데도 이제는 서책을 펼치는 일에 게을러져 인터넷을 배운 것을 후회하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나 개인적인 사정이고 객관적인 사정의 요지를 아래와 같은 두 가지로 요약하겠다. 첫째 댓글문화 예전에 잡지나 신문에만 글을 발표할 시기에는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가 카페나 사이트들에서 나의 글을 올리기 시작해서부터 솔직히 기분이 나쁠 때가 많았다. 한 인간이 작품을 쓰는 데는 많은 정력이 소모되고 그 만큼 공부도 많이 해야 되고, 나는 작품을 많이 쓰지만 매 편의 글마다 오랜 기간을 거쳐 사색하고 쓴다. 작품을 쓰는 것은 뼈를 깎는 노릇이다. 그런데 나의 작품이 나의 허락이 없이 아무 곳에서나 게재하고 불필요한 인신공격까지 받는다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 나는 실리적이므로 명예나 이름 따위에 연연하는 인간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카페나 사이트들에서 나의 글이 인기가 높고 클릭 수가 확실히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 따위 인기나 클릭 수에 연연할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다. 어떤 네티즌들이 아니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인신공격을 해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불필요한 것을 받아들일 아량이 없다. 물론 어느 매체나 카페 사이트들에서 나를 지지하는 수가 나를 공격하는 수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관리자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는 몰라도 일부 카페나 사이트 관리자들이 악성 댓글을 제지하는 관리를 하게 되면 클릭 수가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 그냥 놔둔다고 한다. 나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관리가 안 되면 결국 저자와 네티즌 사이에 불쾌한 일이 일어 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다. 내가 며칠 전 조글로에 글을 올리면서 조선족대모임카페나 모이자 사이트 사회 어중이떠중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의 문맥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를 인신공격한 네티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것이지만 일부사람들이 내가 마치 조서족대모임이나 모이자 회원을 모두 어중이떠중이로 비하한 것처럼 떠들고 있으니 참으로 불쾌하다. 하지만 나는 변명이나 사과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물론 나의 글이 다 맞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건전한 토론이나 비판은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악성댓글을 용납할 생각은 없다. 나는 본래 조선족사회에서 글 썼던 사람이 아니다. 1993년 연변일보에 3 편의 글을 발표한 후 13년 동안 글에 손을 대지 않다가 2006년 3월부터 현재까지 100 여 편의 글을 써냈다. 나는 직업 문인이 아니고 업여 흥미로 글을 쓰기 때문에 그 따위 인기나 명예를 따지지 않는다. 나는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밥 먹고 남한테 인신공격을 받으면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 분명한 것은 차라리 나를 대놓고 때려죽일 놈이라든가, 머저리, 바보 이런 식의 악성댓글은 그렇거니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의 필법에서 드러나듯이 나의 성격은 매우 직설적이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직설적으로 나오는 사람한테는 악감을 갖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문인들의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취하는 척하면서 상대를 비하하는 수법이며 분명히 누가 봐도 A라고 인정할 사실을 A가 아니라고 변명하거나 발뺌하려는 문자유희를 일삼는 문인의 얄팍한 처세술에 나는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나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가 한 말에 대해선 책임을 진다. 이런 용기가 없으면 나는 글을 쓰지 않는다. 둘째 저작권의 문제 내가 알기로는 작품은 저적권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동북아신문의 이동열 국장과 조글로의 김삼 사장이 나의 허락을 받고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작권을 존중하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흑룡강신문, 길림신문, 요녕일보와 같은 정규화된 매체에서 마저 나의 글을 나의 허락이 없이 자기네 마음대로 게재하고, 조선족대모임, 모이자, 아리랑 등 많은 카페거나 사이트에서 나와 한마디 말도 없이 나름대로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여러 곳에서 많이 글을 올려주면 지명도 어쩌고저쩌고 할지 몰라도, 나는 지독할 정도로 바보스런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즉 나의 글을 찬성하는 네티즌들한테 여태껏 감사하다 고맙다는 인사의 댓글을 올린 적이 없고, 다른 사이트들에서 나를 홍보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본 적이 없다. 볼거리가 있으면 읽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 나는 나의 허락이 없이 글을 마음대로 올리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나의 글이 대단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싸구려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글이 값어치가 없이 아무 곳에나 떠돌아다니는 것이 달갑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부터 정중하게 나의 입장을 밝힌다. 동북아신문과 조글로 말고는 다른 그 어떤 신문매체나 카페 사이트들이 나의 허락이 없이 나의 글을 올리지 말 것을 성명하는 바이다. 메일 : kzl0917@naver.com 전화 : 010-792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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