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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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김관웅 닮은 김광림 댓글:  조회:6579  추천:11  2010-10-09
  김관웅 닮은 김광림  한 편의 글을 쓰는데 제목이 참 고민이다. 이번 글의 제목을 이렇게 달아도 되는 것인지? 어떤 면에서 보면 김관웅교수는 자신의 소신 하나만 굽히지 않은 불굴의 정신소유자이고 그래서 앞서 글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친하고 싶다는 심경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김광림 박사(이하 김박사라 칭함)는 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행위가 영 맘에 들지 않아 김관웅교수를 닮았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김박사의 글 방식 및 내용 서술에 있어 비슷한 점들이 많아 많은 고민 끝에 이 제목을 선택하게 되었다.  지난여름 김문학 선생이 한국에서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이란 책을 번역출간을 할 때쯤 김박사는 조글로에 그의 일본어서적을 번역해 올리겠다고 하였다. 전자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조선총독부시절 일본인의 시각(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평가도 조금 포함되어 있음)으로 쓴 글이 1927년 일본어로 출간되었는데 한국에서 모르고 있는 것을  발굴하여  한일합방100주년 맞아 한국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후자는 자신이 발굴한 책도 아닌 남의 서적을 번역하여 조글로에 올리겠다고 하였다. 당시 필자는 동대박사이고 세계학문의 본산지인 하버드 어쩌고 스스로 자랑을 늘여놓으시는 위대한 김박사께서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이런 짓거리를 기획하고 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김박사는 새롭게 불어치고 있는 ‘김문학현상’에 대해 진실을 밝히는 ‘구원투수’로 자칭하였다. 그런데 그 자신이 고백하였듯이 이유도 충분치 않는 어떤 이유로 그만두겠노라 성명을 발표하고 김문학 선생의 표현처럼 자라목처럼 쏙 들어가더니 허구한 날 자루에 갇힌 송곳처럼 불쑥 튀어나와 ‘내가 공정한 심판원으로 나서야겠다.’고 자청하고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솔직히 필자는 김박사의 공정심판역할에 많은 기대를 걸었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1990년대 중반에 중국축구계에서 발생했던 사건이다. 당시 사천성 성도의 축구열기가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그러나 사천팀은 강급위기에 몰리게 되자 축구협회의 입김에 의해 성도에서 열린 연변팀과의 경기에서 홈팀을 구하기 위해 연변팀을 지게 만들었다. 적당히 암묵적으로 지게 조작하여도 모르겠으나 경기시작휘슬이 울리자마자 아예 연변팀을 공을 차지 말라는 식으로 5분 동안 무려 대여섯 장의 카드를 흔들었다. 눈치 챈 연변팀 선수들이 아연실색해 공을 차지 않으려 하여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필자는 김박사의 행위가 꼭 마치 그때 주심을 맡았던 심판원 같다고 평가하고 싶다. 처음부터 김문학비판을 목적으로 출발하면서도 진실을 들먹이며 공정한 심판원으로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였다는 것이다.   자아~, 영양가 없는 부질없는 말을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올 해 들어 김관웅교수가 김문학저작 중 하나를 골라 목록을 나열하고 “봐라! 이래도 김문학이 일본군국주의주구가 아니란 말인가!” 고 목청을 높였고 사이트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필자는 당시 깜짝 놀랐다. 내가 흠모의 심경을 품었던 분이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다니? 그 후 김관웅교수는 여러 분이 지적하였듯이 고군분투하면서 이성을 잃고 김문학과 그의 나팔수들이 모두 불알 찬 갈보라고 욕하였고 그래서 필자가 저질이란 표현을 사용하였고 그때부터 본래 계획에 없었던 김관웅교수에 대해 쓰기 시작하였다.  김박사는 스스로 김관웅교수와 자신이 비교문화전문가라 자랑한다. 그렇다면 세인을 설득시킬만한 비교문화에 대한 글을 한 편도 보이지 못하면서 김관웅교수를 모방하여 유순호 선생이 비웃었듯이 연길서시장난전을 방불케하는 식의 목록나열을 잔뜩 늘여놓고 거기다 이래서 김문학이 친일분자라 욕먹는다는 내용의 말미를 달아놓았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김박사가 스스로 비교문화 전문가이고 동대박사이자 하버드에 계신다면 그 신분에 걸맞지 않게 나만의 작품 한 편도 보이지 못하면서 아울러 쓴다는 글 수준이 기껏해야 남의 작품목록나열이나 하고 또 <김문학이 욕 먹는 이유>에서 자신의 독특한 견해가 하나도 없이 10년 동안 ‘김문학현상’ 찬반론의 비판 글들을 베껴다 옮겨놓고는 마치 자신의 주장과 견해인 듯 위장하는 그 작법이 여느 고등학생의 수준에 비하기도 아까울 정도라는 것이다.  김박사에게 한 가지 묻고 싶다. 당신은 스스로 굉장히 위대하다고 여기는데 글을 얼마나 쓰고 발표해보았는가?  김박사가 조선족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이트에 올라와 함부로 사람을 무지의 맹신이요, 질투요, 거기다 소인배처럼 제 속을 짚어 남을 반대급부를 노린다느니, 해외연대 어쩌고 공격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은 조선족사회의 신문, 잡지, 인터넷에 글을 얼마나 쓰고 발표해보았는가?  솔직히 지난해부터 김박사가 조글로에 글을 올리기 시작해서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알게 되었는데 아마 다른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인식일 것이다. 조선족사회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김박사이기에 스스로 동대와 하버드를 들먹이고 비교문화전문가를 자랑하는 전략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 여러 독자들의 생각이다.  자랑은 자유이므로 더 이상 논할 것도 아니요, 허물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자랑이 돋보이게 글 수준이 높으면 그 누구도 탓할 사람이 없고 모두 내심으로 탄복한다.  중국어 속담에 여인들은 머리칼만 길었지 견식이 짧다는 말이 있듯이 김박사는 동대박사이고 비교전문가이고 학계에서 흠모하는 하버드를 자랑하는 요란만 한바탕 떨었지 내실을 세인들에게 보여준 작품이 없지 않는가? 요즘 그러한 작품으로는 당신의 명성을 입증하기는 역부족일세! 유순호 선생과 필자는 조선족사회에 수많은 글을 발표하였고 어느 정도 독자층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누구를 무지하게 맹신할 발바닥 수준도 아니고 누구를 질투할 그럴 소인들이 아니다. 하물며 조선족사회에서 글로 말하자면 까마아득한 후배이고 겨우 몇 편의 글을 발표하고 거기다 수준도 그닥지 않은 김박사를 질투한다는 발언은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는 애숭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만약 김관웅교수께서 질투라는 발언을 하신다면(물론 그 분의 신분으로 그럴리가 없지만) 어찌되었던 인생의 대선배이시고 학식이나 실제 발표한 글로 말해도 우린 그 분의 발바닥에도 못 미치기 때문에 찍소리 한마디 하지 않겠다. 허나 이름도 없는 ‘머리칼만 긴 여인네’가 불쑥 나타나 질투를 들먹이니 참 소 웃다가 꾸레미가 터질 일이다. 나는 우리선조들이 이 속담을 지어낸 것을 대단히 감사드리고 싶다. 이럴 때 써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김박사는 김문학이 욕먹을 짓을 하였으니 김관웅교수와 자신이 비판하는데 왜 유순호와 김정룡이란 두 사람(사람이란 표현은 김박사가 사용했던 것임)은 무지의 맹신으로 자기 네 두 둘을 비판하는가고 투정질한다. 필자는 김문학 선생의 일부 작품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고 따라서 욕먹을 부분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필자는 김관웅교수가 김문학을 비판한 것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한 적이 없다. 다만 문혁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고 일부 과격한 표현 심지어 신분에 걸맞지 않는 저질적인 표현을 비판하였고 그릇문제도 작년 유순호 선생과의 주고받음에 있어서 그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체신을 까먹은 행위가 안타까웠다는 속심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김박사는 이 문제에 있어 뭐가 배 아파 그토록 팔자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 무지의 맹신이니, 질투이니, 생각도 해보지 못한 반대급부효과이니, 대리만족이니 하는 언사들을 동원하여 함부로 사람 잡이를 하려 드는가?  독자들은 김문학비판은 김관웅교수 한 분이 고군분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김박사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슬쩍 끼워놓고 나도 김문학을 비판하노라고 자랑한다.  필자는 인생의 선배로서 또 인터넷 글 선배로서 김박사에게 충고하고 싶다.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더욱이 김박사는 하버드에 계신다면 얜칭도서관에 쑤셔 박혀 할 일도 굉장히 많을 것 같은데 하도 밥 먹고 할 일이 없어 이 일반사회인이 올리는 글에 들어와 편수나 세고 있으니 참 뭐라 말해야 할지? 자신의 자랑은 이젠 그만하고 아무리 욕을 호되게 먹는 김문학이지만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과 실제행동만은 따라 배우는 것이 어떨까? 그렇지 않고 허구한 날 할 일이 없어 조선족사이트에 들어와 남의 작품이나 평가하고 지저분한 말만 늘여놓는 것이 정말 신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명감? 김박사의 사명감은 요즘 같은 행위로 보여줄 것이 아니라 나만의 작품으로 승부를 거는 것으로 치고 나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싶으면 인터넷생리부터 터득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동대박사출신이니 이쯤 말하면 알아먹겠지!      
185    김문학과 김관웅의 수준차이(1) 댓글:  조회:8957  추천:13  2010-10-06
김문학과 김관웅의 수준차이(1) 2개월 전의 일이다. 필자가 연변대 인문학분야 모교수와 한국 유명대 정치외교학 교수 셋이서 함께 식사한 적이 있다. 식사 도중 어찌하다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화제가 돌았다. 일본인의 국민성을 파헤친 권위 저작으로는 미국여류문화인류학자 루스·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모교수는 이 책에 대해 금시초문이고 ‘토론’에 한마디 끼지도 못했다. 나는 매우 의아했다. 인문학 교수이면 세상의 학문적 흐름은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읽은 책을 반드시 당신도 읽어야 한다는 도리는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학자라면 특히 인문학분야의 교수라면 적어도 흐름은 알고 있어야 하고 그래야 타인과의 대화도 충분히 이뤄질 수가 있지 않을까? 연변문화인들은 흔히 자신을 ‘夜郞自大’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학문적인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그 문화인들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역 환경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 중국에 갈 때면 연길직행을 한 적이 한두 번밖에 되지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거개 심양이나 장춘으로 에돌아간다. 그 이유는 연길서점에서는 내가 원하는 책들을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심양이나 장춘 서점을 들러 책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연길서점의 도서량은 심양이나 장춘 서점의 몇 십분의 일이나 되나마나 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화인들의 독서에 문제가 생기지 아닐 수 없다. 다음 필자가 전에도 지적하였듯이 연변의 사회환경분위기로 볼 때 책 읽는 기풍이 매우 결핍되어 있고 연변은 중앙직속이라는 풍자처럼 너무 사상이 경직된 환경문제도 심각하다. 아직도 필자가 종교에 관한 글을 쓰면 혹자는 나를 ‘마레주의를 반대하고 종교를 선양한다.’고 비판하는 등 한심한 관점과 인식들은 그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환경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본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연변문화인들이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학문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산재지역에 계시는 조선족문화인들과 대화해보면 연변문화인들보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더 넓지만 문혁교육잔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고 역시 한족학자들보다 세상의 흐름을 따르는 데 좀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혹자는 필자를 김문학을 일방적으로 찬양하고 심지어 나의 눈에 콩깍지가 끼지 않았나고 의심한다. 솔직히 나는 그의 친일언행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친일언행들이 정말 高行健이 <나만의 성경>(필자는 한국에서 홍콩에서 출간한 한문판을 읽었다.)을 지어 노벨상을 받았지만 반화분자라는 사실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중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문화인처럼 김문학도 중국정부가 찍어놓은 친일매국분자라면 말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중국정부가 문제 삼지 않는 문화인에 대해 일부 안티김문학파들에 동조하여 나의 소신을 팔아먹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흑백논리에 물젖어 친일이 아니면 반일이란 이분법으로 모든 문제를 보는 시야가 매우 안타깝다. 제삼의 관점과 견해 및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존재형태를 말살하려하고 넌 김문학을 두둔하면 무조건 같은 친일족속이란 타매질이 역겨워난다. 현시대는 다문화사회이다. 다문화란 여러 가지 인종문화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부동한 문화형식과 내용 및 여러 가지 부동한 견해도 공존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한 문화인에 대해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인간적으로 나의 성향에 맞으면 친할 수 있다. 내가 김문학과 친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그의 학문적 시야가 나와 비슷한 점이 많고 내가 읽었던 책과 그가 읽었던 책들이 비슷한 것들이 많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고 축복이다. 더욱이 나는 이 몇 년래 김문학만큼 나와 학문적 대화의 상대가 되는 문화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말이 샌 것 같다. 본론을 말하자면 김관웅 교수도 필경 지역 환경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인 수준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전의 작품들도 그렇거니와 요즘 그의 작품을 보면 독특한 자신의 관점과 학문적인 새로운 맛이 없이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방식 똑 같은 문풍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를테면 요즘 김관웅 교수의 <일제의 중국침략과 김문학의 왜곡>의 제목으로 쓰고 있는 시리즈를 보면 먼저 교과서 식의 나열을 늘여놓고 다음 정의를 외치고 그다음 김문학에 대한 온통 고깔모자를 동원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글을 올리는 사이트를 공격하고 연변유관기관을 걸고넘어지는 작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학문적인 서술이나 독특한 견해가 없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수준에 똑 같은 문풍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께서 김문학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으나 그의 어떤 작품 이를테면 <신 추한 일본인>은 그래도 일본인국민성 평가에 있어서 기존의 권위로 인정받아왔던 미국여류문화인류학자의 <국화와 칼>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각으로 일본인국민성을 파헤치는 창의성이 돋보인다. 학자와 학자 간의 비교수준은 그렇다 치고 솔직히 김교수의 이런 글들은 아무 타이틀도 없는 나의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는 문장에 비해 창의성, 학술성, 서술성 및 내용의 깊이와 넓이가 아예 비교되지 않는 수준이다.
184    그릇 다른 김문학과 김관웅 댓글:  조회:12177  추천:17  2010-10-01
그릇이 다른 김문학, 김관웅 지난 8월 초경 필자가 김문학을 만나보고 <내가 만나 본 김문학>을 내용으로 본래 20편쯤 예산하여 시리즈로 쓰려고 계획하였었다. 연재가 나가자 폭발적인 클릭수가 기록되었다. 그렇지만 쓰다 보니 너무 실망스럽게 느껴져 8편 쓰고 끊어버렸다. 그 주요 이유는 내가 왕산작가를 말하면 독자들이 왕산과 김문학은 어떻게 다르다는 등의 토론이 전개되어야 하는데 그 누구도 왕산을 들먹이는 사람은 없었다. 결론은 중국에서 한때 떠들썩하게 시비를 일으켰던 사건조차 모르고 있는 독자 분들을 상대로 내가 아무리 써보았자 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그냥 인신공격과 인격모독밖에 할 줄 모르니 너무 실망스러워 그만두고 말았다. 그런데 그 후 연변의 골수김문학반대파인 김관웅 교수는 지금까지도 김문학의 글을 올려주고 있는 조글로에 시비를 걸고 아울러 조글로와 필자를 비롯한 사람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본래 ‘김문학현상’에서 손을 떼려했던 내가 다시 김문학과 김관웅을 비교하는 글 몇 편을 연재하려 한다. 필자가 <문학과 예술>에 실린 조선족정체성을 조선의 사과를 연변돌배나무에 접목시켜 사과배가 되었듯이 비유하여 서술한 김호웅 교수의 문장을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필자가 연변일중교사로 있을 때 교학분담부교장인 최승묵 선생이 부친이 연변사과배창시자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더욱이 김호웅 교수의 문장을 주의 깊게 읽었고 아주 창의적인 글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연변문학>에 실린 김관웅을 연변에서 대단한 인재라고 찬양한 조성일의 글을 읽고 정말 굉장한 인물이란 인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김관웅과 김호웅이 형제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슬그머니 흠모의 심리가 생겨났다. 그렇지만 김관웅 교수의 문장 한 편도 읽지 못하고 그냥 막연한 동경이라 할까 아무튼 내가 따라 배워야할 인물들이란 인식이 머리에 자리하게 되었고 꼭 그의 글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인연이 되지 못해 직접 그의 작품들을 접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다. 때는 꼭 돌아온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2009년 7월이라 기억된다. 한국 분이 나보고 니카라는 사이트를 보고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NO였다. 나는 내가 관심밖에 있는 사물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 분이 유순호 씨와 김관웅 교수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했더니 당신 글 쓰는 조선족이 맞느냐? 고 매우 의문스러워하였다. 아울러 그 분이 김문학을 들먹이면서 한때 큰 화제인물이었다는 사실도 들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난 한국 사람보다 조선족사회흐름에 대해 더욱 까막눈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 분이 하도 내가 한심해 전에 김문학현상을 모르고 있었으면 지금이라도 한참 떠들썩하게 돌아가고 있는 흐름을 알아야하지 않겠느냐면서 니카를 꼭 들어가 보라고 권고하였다. 세상엔 보지 말았어야 해야 할 것을 보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니카를 보고 정말 크게 실망하였고 크게 후회하게 되었다. 요지를 말하자면 유순호 씨의 6적이니, 문화깡패니, 문화건달이니 하는 식의 공격과 모 인사의 사생활을 들먹이는 작법이 영 맘에 안 들었다. 연변문인사회에 대해 답답하게 생각되는 일들이 아무리 많고 많아도 개인인신공격과 인격모독은 나는 반대한다. 더욱이 사내로서 남의 사생활을 꼬집어 밝히는 작법은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문제는 만약 유순호 씨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나오던지 간에 그와 차원이 다른 학자로서 또 박사지도로 계시는 김관웅 교수는 같은 식으로 맞불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 전에도 내가 지적하였듯이 此時無聲勝有聲 방식으로 가만히 계셨더라면 격을 지키고 더욱이 일방적으로 떠들다가 끝날 사건을 갖고 이전투구 식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교수의 인격을 다 까먹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견해일 것이다. 당사자인 김관웅 교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북경의 한 조선족 권위인사가 나보고 이렇게 말했다. 유순호와 김관웅의 싸움은 승자와 패자가 없는 게임이지만 김관웅이 이겨도 진 것이요, 져도 진 것이니 결국 망신은 교수가 당한 결과밖에 없지 않느냐! 나 개인적으로 김관웅 교수한테 못마땅하게 느낀 것은 “유순호는 미국에 있는 개이고 김문학은 일본에 있는 개”라는 식의 발언, 물론 일관적인 반화세력이요, 매국자이요 라는 식의 발언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물이 날 지경이다. 김교수께서는 남을 비판하고 뭉개는 데는 익숙하고 어떻게 보면 이것이 그의 장끼이고 ‘전공’이 되어버려 몸에 습관처럼 배어버려 타인이 나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전혀 용납하지 못한다. 더욱이 얼굴이 가려워 더 참지 못하고 이성을 잃은 듯 한 모습을 보여 매우 안타깝다. 이 면에 관련해 나는 개인적으로 김문학을 높게 평가한다. 10년이란 세월동안 몽둥이세례를 맞아왔지만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릇이 크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라 말하고 싶다. 같은 이치로 남영전 선생도 연변에서 “공산당을 반대하고 조국을 반대하고 혁명선배를 배반하는 남영전은 7천만 겨레 앞에서 사과하라.”는 식의 공격을 받았어도 일절 대응하지 않았는데 나 개인적으로 역시 남영전 선생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토록 욕을 많이 먹어도 자신의 갈 길을 향해 걷는다는 것은 그릇의 문제이다. 요즘 남영전 선생은 중국소수민족 10대시인으로 평선되었다는 소식이 뉴스를 타고 있다. 연변에서 아무리 죽이려 들어도 김문학과 남영전은 큰 무대에서 당당하게 활개치고 잘 나아가고 있다. 큰 노릇하려면 그릇이 커야 한다. 모아산 테두리에서 아무리 세상을 타매하려고 노력하여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제발 이젠 문혁식의 작법을 때려치우고 넓은 세상에 향해 가슴을 여는 그릇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83    서울에서 느껴본 漢流 댓글:  조회:5414  추천:46  2010-09-16
서울에서 느껴본 汉流 중국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데는 유구한 역사, 사대 발명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많겠지만 그 가운데서 음식문화가 크게 한몫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중국음식이 널리 알려진 것은 100년 전 인천에서 화교에 의해 출시된 자장면이 계기가 되었고, 그 후 1990년 북경아세아게임 전까지 한국인의 인식 속의 대표중국음식은 자장면이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나들이에 나섰던 한국인은 대표적인 중국음식으로 알고 있던 자장면이 정작 본토인 중국엔 없더라, 혹은 있더라도 주목받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허탈했다. 아울러 중국은 음식천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중국에 매력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기름기가 많고 향내가 짙은 중국음식에 적응이 어려우나 맛을 들이면 한식을 저리 가라하고 자꾸 찾게 된다. 대련에 상주해 있는 한국인 김모의 고백이다. “먹을 것이 풍성한 중국음식에 길들여져 중국에 영 눌러 살고 싶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에 주재했던 한국인들이 국내에 오면 가족을 데리고 중국음식점을 찾는 사례가 굉장히 많다. 가리봉시장 근처에 살고 있는 한국인 최 사장은 내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손님접대가 있으면 반드시 중국음식점을 찾는다. 특히 중국에서 살면서 양꼬치구이에 맛을 들인 한국인은 국내에 와서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찾아 먹어야 시름 놓는다. 대림역 근처에 있는 丰茂양꼬치구이점은 8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게인데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한국인 손님이 삼분의 일을 차지한다고 한다. 동대문 부근에 있는 양꼬치구이가게도 한국인이 많이 찾는다는 사실이 매스컴을 탔다. 지난 8월 말경 KBS가 차이나타운으로 알려진 가리봉시장을 찾아 중국동포들의 삶의 현장을 <다큐3일>프로를 제작해 2TV를 통해 방송했다. 가리봉시장과 근처 중국음식점 및 중국식품가게는 중국에 있는 음식과 식품이 거의 다 있을 정도로 마치 중국의 어느 한 시장거리를 옮겨 놓은 듯하다. 삼거리에서 시장 쪽으로 약 30미터 들어가면 오른 편에 <사계흥면식점>이란 간판을 건 작은 테이블 네 개밖에 없는 가게가 소개되었다. 주인은 중국 길림성 길림시 출신이며 아들의 한국에서 대학원공부뒷바라지를 위해 열심히 하고 있다. 음식으로는 중국에서 아침식사로 즐겨먹는 유탸오(油条), 꽈배기, 순두부(豆腐脑), 평상시에 먹는 왕만두(包子), 진병, 찐빵, 만두, 자장면(面条) 등등 간단한 면식이 있다. 이 가게가 KBS방송을 타자 고객이 중국인 손님 일색이던 것이 한국인들이 찾기 시작하였다. 한국인들은 가게 밖에서 꽈배기나 만두를 많이 사 간다. 9월 2일 저녁 19시경 필자가 가게를 찾았을 때 네 개의 테이블 중 두 테이블이 한국인이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남녀는 결혼할 연인사이이며 중국에 대해 관심이 커 무릇 중국과 중국인에 관련된 방송프로를 즐겨본다고 한다. <다큐3일> 프로를 보고 이 가게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거주지를 물으니 강원도 원주에서 일부러 이 가게에 밥 먹으로 먼 서울에 왔던 것이다. 다른 테이블의 남자 분은 역시 TV를 보고 경기도 평택에서 왔단다. 한국 손님들이 부추계란볶음, 자장면, 육면(肉丝面), 순두부를 먹고 나서 진짜 중국음식을 맛보아 기분 좋다고 고백한다. 가게 문을 나서자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가족에게 맛보이려고 음식을 사 갖고 떠났다. 중국 땅에서 韩流선전에 조선족이 큰 기여가 있었다. 필자는 서울 땅에서 汉流가 흐르고 있는 것을 실감하였고 汉流의 전도사역할을 우리조선족들이 맡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났다. 韩流와 汉流,그 흐름에는 조선족이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출처 중국동포타운신문 183호
182    연변대 학자, 동네망신 댓글:  조회:5749  추천:36  2010-09-15
연변대 학자, 동네망신 연변대의 모 학자는 10년 동안 김문학 때리기에 정열을 불태워왔다. 그 끈기는 실로 감탄스럽다. 허나 그 문풍은 참으로 학자가 쓰는 글인지? 의심스럽다. 10년 만에 ‘김문학현상’이 다시 불붙고 있을 때 저 대서양 건너 하버드에 계시는 조선족학자가 연변대 학자의 ‘김문학연구’ 성과를 긍정하는 발언을 하였다. 과연 그럴까? 필자가 연변대 학자의 김문학을 논하는 글을 많이 읽어보았는데 한마디로 매우 실망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그 이유는 글마다 ‘주구’ ‘충견’ ‘악질분자’ ‘반화분자’ ‘반민족자’ 등등의 수식어로 가득 찼고, 증거가 없는 돈 이야기를 들먹이고, 수호전을 인용하여 암컷이 어떻고 식의 발언, 심지어 이완용시대 이후 조선민족의 가장 악질적인 매국노라는 등 실로 어이없는 발언들로 글을 꾸민 문풍이 논문이 아니라 학자의 신분을 의심케 하는 잡문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요즘엔 <불알 달린 갈보들의 추태극을 지켜보면서>란 글로 인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먼저 저자의 말부터 들어보자. “필자는 앞선 글에서 원래 <불알 달린 갈보들의 추태극을 지켜보면서>라는 제목을 달았었는데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사이트 관리자님이 아마도 너무 야하고, 너무 과분하다고 판단했던지 ‘얼팡둥과 얼꾸이즈’라고 바꾸어 놓았는데 그 고심은 알만하겠지만 필자는 이 제목이 조금도 야하지 않고, 조금도 과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 김문학과 그의 나팔수들이 ‘불알 달린 갈보’들이 아니란 말인가?” 필자는 제목이 너무 야하거나 너무 과분하다기보다 저질적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만약 필자와 같은 일반사회인이 그런 발언을 한다 해도 사회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데 하물며 대학교수 분이, 그것도 박사지도교수 신분으로 사회적 도의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설사 김문학이 정말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는 놈이라 쳐도 일개 대학교수이며 연변조선족사회에 영향력을 갖고 계시는 분의 그렇듯 저질적인 발언은 세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민족은 한 사람의 수치스런 일을 흔히 가문의 망신 혹은 동네 망신이라 표현한다. 필자는 영향력이 있는 학자의 저질스런 발언과 행위는 곧바로 연변대의 망신이라 말하고 싶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그런 자질을 갖춘 교수 밑에서 수업 받고 있는 학생들이 무슨 교육을 받을 것이며 어떤 인간됨됨이를 배울 것인가는 것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왜 줄곧 근거가 없는 돈 이야기를 들먹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제 속을 짚어 남을 말한다는 속담처럼 자신의 잣대로 남을 헐뜯는 것은 정말로 소인배들이나 할 노릇이다. 쉽게 말해서 사이트운영자나 글 쓰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의 소신을 갖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지 어느 멍청한 인간이 돈 몇 푼 받아먹고 김문학의 글을 올려주거나 그에 대한 글을 쓰겠는가? 거물급의 학자의 사고방식이 이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 한 번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이는 연변대의 망신이며 우리민족의 수치이다. 도를 넘는 비판은 비판이 아니다. 김문학이 뭐 그토록 굉장히 대단한 인물이라고 아직도 그에 대해 노이로제에 걸린 환자처럼 과민반응을 보이는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결국 아집의 늪에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해 애족자의 허울을 쓰고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을 전부 걸고넘어지려 드는 행위는 참으로 불쌍해 보인다. 학자라면 학자의 체신을 지키고 영향력이 있는 문화인이면 사회적인 도의를 지키기를 바란다.
181    동포들이 한국법률상식을 알아야 댓글:  조회:5200  추천:29  2010-09-08
동포들이 한국법률상식을 알아야 중국에서 나서 자라고 사회생활을 해왔던 동포들이 한국법률상식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 법을 지켜야 하고 또 여러 가지 고충을 겪게 되어 한국법률상식을 알아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재한조선족의 흐름을 살펴보면 2007년 3월 4일 방문취업제의 실시 이전에는 인권보장이 사각지대에 처해 있어 고충이 생겨도 해결된 건수는 소수였다. 이런 상황이 법무부의 방문취업제의 실시로 체류합법화에 따라 많이 개선되어 매우 고무적이다. 우선 방취제비자로 입국한 동포들은 삼일간의 교육을 받는다. 교육내용은 한국생활에 있어서 지켜야할 규범과 준칙, 한국정부와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 근로법, 출입국상식, 간단한 법률상식 등등이 있다. 아울러 한국에서 고충이 생기면 어떠한 기관 혹은 민간단체들을 찾아 자문을 구하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교육이 동포들의 한국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삼일간의 교육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동포들이 출입국법을 모르고 있거나 여러모로 겪는 고충이 많고 문제해결도 많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동포들 중 의외로 일에만 매달려 있다 보니 여권유효기가 지나도 모르고 있거나 출입국법을 몰라 외국인인등록증이 만기되었는데도 체류연장수속을 밟지 않아 불법이 되는 자가 꽤나 있다. 이런 사례를 피면하고자 삼일간의 교육기간에 출입국 분들이 교육시키고 있으나 머리에 입력되지 않아 여전히 범하고 있다. 동포들이 한국생활에서 겪고 있는 임금체불, 산재, 결혼피해, 폭행, 교통사고, 금융사기, 유학사기 등 여러 가지 고충은 법률과 관련이 있으므로 사건의 대다수는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동포들의 법률상식과 법제의식의 결핍 및 동포관련단체나 일부 한국인 혹은 중국인의 사건해결을 빌미로 하는 사기행각에 의해 문제해결을 못하고 이중삼중으로 피해를 입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동포들이 한국법률상식을 모르면 동포관련 신문사나 여러 단체들에서 고충해결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 연변에서 온 한규식 최옥화 부부는 고희가 넘은 고령에 한국 모회사에서 2년간 근무하였는데 봉금(합계 3천만 원)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다. 왜 월급을 주지 않는데 일을 계속 하였는가? 물으니, 주겠거니 하다가 1년이 지나 속이 안달아 났으나 어떻게 받아야하는지 몰라 어영부영 지나다 보니 어언간 2년이 되었다고 한다. 더욱 한심한 것은 노부부가 전 회사에서 번 돈 380만원을 업주에게 빌려주었는데 그 돈마저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부의 사례와 같이 아무 것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분들이 적지 않다. 또 어떤 동포 분들은 한국생활을 수년 겼었지만 실제로 모르고 있으면서 다 아는 체하고 친척, 친구 및 주변 사람들한테 주관억측으로 엉뚱하게 잘못 알려줘 문제해결이 안될 뿐만 아니라 혹을 더 붙여주고 마는 경우가 있다. 한편 동포들의 체류 수가 늘어가고 고충사례가 늘어감에 따라 최근 이삼년 동안 한국 내 동포관련단체 혹은 무슨 협회라는 간판을 건 사무실들이 우후죽순마냥 늘어나고 있고 고충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사무실 중 어떤 곳은 사건해결을 빌미로 중국인이 같은 중국인을 사기 치는 경우도 있다. 심양에서 온 강모는 “한국 사람한테 피해당하고 같은 중국인한테 사기당하니 우린 누굴 믿고 살겠느냐?”고 한탄한다. 사무실 명의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분들은 법률을 무시하고 눈앞의 돈벌이를 위해 범죄의 늪에 빠져들어 개인적으로 여생을 망쳐먹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동포사회이미지에 먹칠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82호 원제:“한국의 법률상식 얼마나 아시나요?”
180    김문학과 김광림 댓글:  조회:6369  추천:23  2010-09-06
김문학과 김광림 글제목이 우습다. 모택동과 장개석, 히틀러와 스탈린, 혹은 유방과 항우란 타이틀로 글을 쓴다면 모를까, 김문학과 김광림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려니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 나 자신도 그런 멋진 타이틀을 쓰지 못하고 두 인물을 거론해 하나의 문장을 꾸미는 자체가 스스로도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어졌다.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만약 김문학과 김관웅이란 글을 쓴다면 내용의 허실을 떠나 쓸거리가 많은데 김문학과 김광림을 하나의 레벨로 거론할 수 있는지? 혹 어느 쪽에서 내가 왜 그와 비교되는가? 나의 쪽이 훨씬 우월한데, 혹은 함께 거론하는 자체가 기분이 나쁜데 김정룡이란 인간이 한심한 발상을 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글 수준이 어떠냐의 여부를 떠나 김문학은 중한일에서 책 여러 권 출간하여 욕을 되 지게 먹는 바람에 이름이 많이 알려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헌데 김광림 선생의 존함은 조글로에 글을 올리면서 알게 되었는데 아마 다른 독자들도 나와 비슷한 처지일 것이라 믿는다. 나는 김광림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냥 객관적인 시각으로 요즘의 흐름에 한해서만 한 번 집고 넘어가고 싶었을 뿐이다. 강산이 한 번 바뀔법한 세월동안 김문학이 우리조선족사회최대화제인물로 되어왔고 지난 3개월 동안 또 새롭게 불이 붙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최고 문화 본산지인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구촌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하버드에서 방문학자로 계신다는 김광림 선생이 새롭게 불어치고 있는 ‘김문학현상’에 ‘구원투수’를 자처하고 나섰다. 김광림은 김문학의 일본에서 출간된 작품을 목록으로 올리고 앞으로 한글로 번역하여 지속적으로 올리겠다고 하였다. 취지는 독자들이 직접 작품을 접하고 나름대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태도에 많은 독자들이 박수를 보냈다. 이유는 김광림의 타이틀이 만만치 않아 편견이 없이 공정한 입장에서 ‘김문학현상’을 짚어낼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며칠 못 가 “나는 김문학토론에서 발을 빼노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성명서를 필자가 직접 접한 것이 아니고 나의 글에 댓글로 올라왔는데 나는 그것이 사실이란 전제를 갖고 이 글을 쓴다. 그의 성명서에서 발을 빼는 이유를, 첫째 저자의 동의를 거치지 않았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고 저작권침해소지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동대박사이고 하버드의 방문학자로 계시는 분이 사전에 이런 상식조차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는 이유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둘째 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김문학토론에 뛰어든 것이 격에 맞지 않으니 저 미국의 아무개 한국의 아무개들이나 연구하라는 언질을 던졌다. 나는 한마디로 한심하다는 말밖에 더 할 수가 없다. 김광림 선생이 최고의 신분으로 자랑하시면서 그 프로젝트를 내놓으려할 때 사전에 충분한 맘의 준비가 없었단 말인가? 또 털어놓고 말해 시시비비에 휘말릴 각오가 없이 ‘井水 이미지’를 보존하고 싶은 맘을 갖고 있었다면 섣불리 뛰어들지 말았어야 했던 거 아닐까요? 오늘날 김광림 선생의 행위가 너무 경솔했다는 결론밖에 달리 어떻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글을 올리고 지우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고 자유이지만 독자들의 입장에선 저자가 소신이 부족해 보이고 가볍게 느껴질 수 있다. 더욱이 대단한 학자라면 처신을 신중히 했어야 되는 거 아닐까요?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신분이 높으시면 그에 걸 맞는 행위를 취해야지 너무 가볍게 보인다면 스스로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으로서 인사불성이 아닐까요? 당신이 후지산에 계시던 모아산에 뛰어들어 헤매이던 나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우리조선족학자어른들이 왜 이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못하는 것인가? 정말 안타깝다. 나는 김관웅 선생의 일부‘표현’에 반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나이로서 소신을 변함없이 밀고 나아가는 의지와 투지는 정말 감탄한다. 솔직히 말해 서로의 입장 차이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친하고 싶은 맘이 있다. 따라서 김문학 선생도 10년 동안 아무리 곤장을 맞아대도 흔들리지 않는 소신에 감탄한다. 대단한 학자도 인간이다. 학자이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하고 남자면 사나이다워야 한다. 요지는 한마디. 세간의 바람에 뛰어들려면 소신부터 갖춰야 되지 않을까요?
179    (김문학)연재를 맺으면서 댓글:  조회:7584  추천:20  2010-08-27
(김문학)연재를 맺으면서우리조선족문화인사회는 분명히 비정상이다. 또 맞아 죽을 소리이지만 나는 확신을 갖고 이렇게 외친다. 우리조선족문화인사회는 인물이 없다. 어쩌다 중한일 삼국에서 책을 자유롭게 내는 김문학이란 양반이 나타나 화제인물이 되었고 10년이란 세월동안 왈가왈부해왔고 아직도 가장 큰 화제인물로 남아 있는 것은 분명이 비정상적이다. 설사 그가 나쁜 놈이라 치자. 그럴지언정 연변의 문화계거목(김광림 선생의 표현)이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숱한 정력을 김문학 때리기에 나선 행위는 객관적으로 보기도 안쓰럽다. 그 신분이면 할 일도 굉장히 많으실 텐데 어쩌면? 또 어느 네트진의 말대로 우리사회는 김문학이란 늪에 빠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문제와 관련해 필자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가 <벌거숭이 삼국지> <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 <조선족 대 개조론>으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그 후 아무런 저작도 내놓지 못하고 동양 삼국에서 아무런 명성도 얻지 못했다면 ‘김문학현상’이 진작 막이 내려졌을 것이다. 헌데 현실은 달랐다. 그는 중한일 삼국에서 꾸준히 저작을 발표하였고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중국 명문대에 들락거리면서 강연활동을 활발히 진행해왔다. 그래서 그의 반대파들이 더욱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일부 사람들은 그의 반대론자들을 ‘유명콤플렉스’ 때문에 비판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김문학이란 이름을 들은 것이 2006년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막차를 탄 셈이다. 그 후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5월초부터 조글로에 그의 글이 연재되면서 이 양반이 아직도 조선족사회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구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누가 김문학을 뜨게 했나?>는 글을 올렸는데 생각 밖으로 찬반양론이 뜨거웠다. 우리사회가 왜 김문학에 대해 열광하고 있는가? 큰 미스테리이다. 3개월이 지난 8월초 내가 김문학을 만나게 되었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그가 그렇게 때려죽일 나쁜 놈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생겼다. 하여 나의 감수를 써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시리즈가 나가자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나 자신도 정말 놀랐다. 김문학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사람들이 이토록 열광하는가? 나는 김문학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런 것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찬이든 반이든 열광하고 있으면서 글 쓴 자를 “김문학을 빌어 이름 날리려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 코웃음이 저절로 난다. 김광림 선생이 어처구니없는 지적이라 말했듯이 나도 어처구니없는 지적이라고 태도 표시한다. 김문학을 통해 이름 날려 뭘 할 건데? 전에도 내가 말했다시피 나는 그 개도 안 먹는 인기와 명예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더욱이 나는 조글로에서 분류하듯이 아무 타이틀도 없는 그냥 사회인일 뿐이며 나는 글을 써 먹고 사는 인간이 아니다. 그냥 나의 흥미로 나의 소신을 갖고 쓸 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김문학을 모르고도(불과 3개월 전까지) 여태껏 잘 먹고 잘 살아왔다. 전번 만났을 때 한국에서 책을 내고 며칠 후 중국에 가는데 어떠어떠한 책 7권 출판계약 건 또 누구누구를 만난다는 얘기가 있었다. 요즘 뉴스에서 증명되었다시피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에서 특히 중국인민대학과 북경대학 교수 분들이 나서 그를 환영할 정도면 우리조선족사회도 이젠 그에 대한 시각이 조금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갖고 글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 입장의 분들이 여전히 많은데 이는 정상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를 아직도 이완용에 비유하고 노신에 비유하는 찬반양론은 도가 넘친다고 지적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좀 삐딱한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은 나의 개성과 관련이 있다. 한국 사람치고 내가 좋아하는 인물로서 도올과 조영남이다. 도올은 욕도 참 많이 먹은 인물이다. 나는 특히 그가 사회 잘못된 부분을 누가 감히 말 못하는 문제(불가침의 영역인 기독교계 잘못된 현실을 과감히 지적 비판한 것)를 거침없이 건드리는 배포가 부러웠다. 조영남도 솔직하면서도 대바르게 또 유머적으로 삐딱하게 글 쓰는 스타일이 맘에 들었다. 삐딱한 시각으로 글 쓰는 사람은 찬성 못지않게 반대가 동반되기 마련이다. 어느 명인의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세상은 평범한 사람한테는 열광하지 않는다. 오늘날까지 김문학현상이 여전히 뜨거워지고 있는 것은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반증이 될 것이다. 이 연재를 끝내면서 언제부터 하고 싶은 말을 고백하려 한다. 이삼년 전이라 기억된다. 내가 동북아신문과 조글로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과정에 있었던 두 가지 에피소드를 잊지 못하고 있다. 나의 글 <조선족의 비극은 지식빈곤에 있다>가 발표되자 아래와 같은 댓글이 올라왔다. 하나는 조선족교사출신(중국 어느 소학교교사)인데 한국인과 결혼하여 한국에 와서 아이까지 낳았다. 그는 학구열이 높아 어느 명문대 석사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 분이 거창하게 ‘교육지킴이’이란 아이디로 아무 조사도 없이 “김선생과 같이 아이를 한족학교에 보냈기에 조선족학교가 폐교되고 있다.”고 했다. 나는 편집한테 물어 답장을 썼다. 나는 아이를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조선족하교를 졸업시켰다고. 결국 알고 보니 나와 안면이 있는 분이었고 대충 그의 현 상황을 알고 있어 맘이 매우 허탈해났다. 조선족학교의 폐교현상이 나타난 이유에 대해선 모두 알고 있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더 말하지 않겠다. 다른 한 분은 나와 같이 한국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을 빗대 조선어규범이 어떻고 하면서 한국어를 잡탕언어이므로 사용을 배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결국 이 분이 어느 연해도시에 가서 그토록 미워하던 잡탕어를 가르치고 있단다. 참 더 말이 나가지 않는다.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는 남의 말을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나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남을 함부로 깎아내리고는 지신이 그 길을 걷는 행위는 정말 웃기는 일이다. 내가 여기서 이런 자질구레한 말을 꺼내는 이유는 우리조선족사회 일부 사람들은 자신을 마치 조선족사회를 지키는 애족자이고 나와 같은 사람은 얼빠진 배족자로 몰아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애족자인양 떠들지 말고 차라리 나처럼 바른 소리를 하고 욕이나 실컷 처먹는 것이 훨씬 더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이 부류의 사람 중에 골수 김문학반대론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젠 우리사회가 김문학 늪에 더 깊이 빠져들기 전에 훌훌 털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동안 나의 시리즈를 관심 있게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178    김문학은 친일매국노? 댓글:  조회:5932  추천:12  2010-08-23
김문학은 친일매국노? 역사는 바야흐로 동서이념과 사상대결로 한 시대를 휩쓸었던 20세기를 넘어 다문화시대인 21세기에 접어들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및 기나긴 냉전시대에는 내편 아니면 네편 이렇게 두 부류의 인간만 있을 뿐 다양한 목소리를 주장하는 제삼의 인물은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인간 무리는 적아간의 대립상태만 존재했었다. 전쟁이란 가해자가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고 아울러 피해자는 냉전 및 탈냉전시대에도 세세대대로 피해의식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인간세상의 현실이다. 18세기까지 세계경제총생산량의 삼분의 일을 차지할 만큼 덩치에 오천년의 문명고국에다 세상의 중심국이라 자부해오던 중국이 서방의 군사와 문화 앞에서 속절없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4억 인구가 큰 충격에 빠졌으며 낙후하면 얻어맞는다는 ‘진리’를 터득하고 자강의 길을 모색하는 방향밖에 없었다. 그런데 중국의 문제는 사방세계로부터 받은 피해보다 역사적으로 중국문화를 수혈 받아 개화해온 별 볼꼴 없던 바다 건너 왜인한테 당한 피해에 충격이 더 컸고 일본이란 그림자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었다. 모택동이 미국을 우습게보면서도 일본을 두려워했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이 냉전시대에 친서방자들보다 친일분자 청산에 더 열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반도 상황을 보면 역사적으로 중원조정과 조공책봉의 외교에 별 의의가 없지만 한반도로부터 숱한 문물을 수입하여 눈이 떠진 쪽발이한테 36년이란 세월동안 받은 치욕은 잊지 못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감정이 이성을 초월하여 일본이 어떻게 명치유신 전부터 서방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했고 명치유신 이후 어떻게 서방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역사에 관심이 없고 무작정 일본하면 쪽발이를 떠올리고 치욕만 떠올리고 친일이냐? 반일이냐는 데 신경을 도사려왔던 것이다. 과거 식민지시대에는 분명히 친일과 반일 두 진영이 확실했다. 그것이 생계형의 친일(한국에서 주장하는 논리)이든 기득권 지키기 반일이든 오늘날 이 문제의 해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의 논의의 초점은 현시대에 있어서의 친일행위를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는가는 것이다. 국가정보를 팔아먹는 행위는 분명히 친일매국에 속하고 아울러 이런 상황은 국가 정보당국에서 판단하고 사법부에 넘겨 형사처분을 받는다. 이런 극단 상황 외에 한국의 상황을 보면 하다못해 일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배울 것은 겸허하게 과감히 배우자는 목소리를 내도 친일로 몰린다. 물론 한국 지성인 중 반일만 주장하지 말고 學日, 知日, 用日, 克日의 길을 걸어야만 일본을 이기(勝日)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들의 논리는 먹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김문학의 친일매국을 주장하는 김문학 반대파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두 가지 맥락이다. 김문학이 일본우익세력의 뒷돈을 받고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는 것이고 또 조선족과 모국 한국 및 나고 자란 중국을 일본에 팔았다는 것이다. 김문학이 일본우익세력의 뒷돈을 받고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관련해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한 억측에 의해 아무렇게나 떠들어대고 또 소문이 입을 타 마치 정설인 것처럼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다. 과거 김문학현상이 들끓고 있을 때 연변지성인 중에 김문학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는데 그를 김문학한테서 엔을 받고 썼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번에는 필자가 <내가 만나본 김문학>시리즈를 쓰니 또 “김정룡이 김문학한테서 일본우익세력으로부터 받은 엔 부스러기를 받았다.”고 떠들고 있다. 참 한심하다. 속담에 제 속을 짚어 남을 말한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속을 뒤집어 보이는 꼴밖에 더 무엇이 있겠는가? 글이란 누가 쓰라 해 쓰거나 어떤 공리주의 목적을 갖고 쓰면 간상배 행위로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글이란 저자가 자신의 소신을 갖고 쓰는 것이지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다. 정치시대엔 그런 일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런 미친 짓을 할 인간이 있는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인기를 위해 글을 쓴다? 웃기는 얘기다. 과거 한 때 조선족 관련 10여 개의 사이트나 카페에서 열점화제 15편 중 항상 나의 글이 반 정도 차지했고 클릭수도 제일 높았다. 인기가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지 말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김문학 선생이 일본을 많이 연구한 결과 일본이 근대화과정에서 중국과 한반도를 많이 앞섰고 아울러 중국과 한반도에서 일본을 모델로 많은 것을 배우고 옮겨다 사용해왔다는 것을 여러 편의 글에서 지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본이 없으면 노신의 백화문도 있을 수 없다.” 그만큼 노신은 일본어영향이 컸다는 의미이다. 또 여러 모로 노신의 재일행적을 추적하여 노신연구를 하고 있는데 중국학자들은 그의 이런 연구에 매우 흥미를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쓰다보면 독자들한테 일본을 찬양하고 중국과 한반도를 비하하는 듯한 모습의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斷章取義’의 행위이다. 백양이 그의《추한 중국인》에서 중국인의 정신지주로 되어온 전통문화 유교를 “장독구더기”라 비판했고, 노신은 유교를 사람을 잡아먹는 문화라 신랄하게 비판했다. 만약 ‘斷章取義’해서 말하자면 백양과 노신은 수천 년의 전통문화를 부정하는 매국노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을 당시 김원웅 국회의원이 KBS심야토론에서 “안중근은 우리 입장에서 말하자면 의거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테러리스트이다.”고 했다. 이 말을 ‘斷章取義’하면 곧 안중근은 테러리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이 무슨 세월이라고 어느 얼빠진 인간(문인)이 생각 없이 그 어떤 눈앞의 공리목적으로 민족과 국가를 팔아먹는 행위를 한단 말인가? 김문학 반대파들은 그를 매국노라 하는데 도대체 그가 어느 나라 무슨 국가를 팔아먹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홍용암 선생의 주장에 의하면 김문학은 <개조론>과 <한국인이여, 상놈이 되라.>를 쓴 것이 우리조선족공동체와 모국 한국을 일본에 팔았다는 것인데 참 세상에 이런 논리도 있구나! 웃지 않을 수가 없다. 한심해 논의를 더 전개하지 않겠다. 또 김문학 반대론자들은 그의 <반문화지향적인 중국인>이 중국을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행위의 증거로 제시하는데 그렇다면 일본과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중국대사관에서 김문학을 가만 둘리가 없다. 본국정부에 제보하여 김문학이 중국 땅을 밟는 순간 연행하여 죄를 물을 것이 아닌가? 이번 달 8월 한 달 간 김문학 선생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여러 권의 책 출판 계약을 맺었다. 19일 북경에 도착하였고 중국인민대학과 북경대학 모모한 분들이 환영만찬회에 참석하였다. 20일 7권의 책 출간계약을 맺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그의 친일매국행위를 몰라서 환영하고 책을 내줄까? 두 나라가 모두 눈이 멀어도 한참 먼 모양이다. 중국인민대학은 그를 교수로 초빙할 의향이 있다고 표명했다. 학술은 학술이고 정치는 정치이다. 정교일치시대는 지나갔다. 그런데도 아직도 정교일치와 정학일치의 몽둥이를 빌어 누구를 때려죽여 보자는 속셈은 비현실적이 아닌가! 필자가 이 시리즈를 쓰는 것 또한 개인적인 편견을 갖고 김문학을 평가하는 부분, 심지어 옳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기에 다각도의 토론과 비평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정당한 토론이 아니고 인격모독과 인신공격으로 나온다면 토론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왕산 작가를 말했는데 네티즌들이 왕산 작가에 대해 한마디 언급 없이 엉뚱하게 댓글을 단다면 토론이 될 수가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177    김문학 토론과 죽이기 댓글:  조회:6000  추천:31  2010-08-21
김문학 토론과 죽이기 1993년 ‘天’자 계열의 소설로 명성을 날렸던 북경 왕산작가가 중국형세를 해부하는《第三只眼睛看中國》란 책을 발표해 황하대륙에서 한바탕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저자는 이 책을 쓰고 나서 발표할 때 많은 시끄러움이 닥쳐올 것 같아 독일인의 이름을 차용해 독일작가가 쓴 것으로 만들었다. 허나 진실은 쉽게 밝혀지는 법이다. 독자들이 글을 읽는 과정에서 글 속에 아무개의 철학과 사상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틀림없이 왕산작가가 쓴 것이란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캐고 캔 끝에 저자가 밝혀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모택동시대 정책 다수를 옹호하고 등소평의 개혁개방에 의해 중국이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문혁을 욕하지 않고 개혁을 찬성하지 않는다.”이다. 당시 학자 층부터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강택민 주석을 비롯한 중앙영도들이 다수가 읽어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당과 정부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의 글을 썼지만 그는 단두대에 오르지 않았고 책이 정간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 여러 분야에서 의논이 들끓었다. 반대파들은 “便餐에 오른 한 접시의 밑반찬에 지나지 않을 만큼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고, 지지자들은 “연회만찬에 클라이맥스로 오른 잉어.”라 치하하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적으로 토론이 열렬했고 이를 평론하는 글과 그와의 인터뷰내용을 담은 단행본이 출간되었으나 저자를 반당반국가분자로 타도하자는 목소리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올바른 토론문화이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조선족이 이와 유사한 글을 발표했다면 같은 조선족이 상급기관에 바짓가랑이에 불이 이는 줄 모르고 뛰어다니면서 반동분자를 잡아 처단하라고 고발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는 필자의 괜한 부질없는 노파심일까? 아니면 그것이 현실이 될 ······,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다. 김문학 선생의 <개조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옳은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다. 저자가 조선족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면 체질을, 즉 삶의 방식을 갱신해야한다는 취지에는 동감이다. 그러나 남도여창이라든가, 소아과 병동비유라든가 일부는 조선족현실에 맞지 않거나 표현이 지나쳐 충분히 반감을 일으킬 소지가 크고 혹자는 역겨울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필자도 글을 쓰는 입장이지만 글이란 객관사실과 논리에 맞게 써야하는 것이 원칙인 것을 알고 있으나 때론 주관판단과 주관감정이 개입될 때가 많다. 그렇게 되면 부분적으로 독자들의 반대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또 글이란 일일이 전부 해석 식으로 쓸 수 없어 흔히 독자들의 오해를 사기도 한다. <개조론>의 저자는 연변출신이 아닌 입장에서 연변을 논하다보니 아무리 현지조사와 자료 수집을 거쳤다 해도 완전완미하게 쓸 수 없고 아울러 오류가 나타나는 부분 또한 있다. 물론 미국인류문화학자인 루스·베네딕트는 일본생활체험이 전무한 상황에서《국화와 칼》을 지어낸 것이 세계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편협한 글이란 지적은 면치 못했다. 한 국가 혹은 한 민족을 평가하는 글은 모두 말이 많고 탈이 많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개조론>도 이러한 흐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그 글은 독자에 따라 반대와 지지 및 이에 따른 퍼센트 확률도 다를 것이고 찬반양론이 들끓는 것은 정상이다. 여기서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상적인 토론이냐? 아니면 인신공격과 인격목욕으로 죽이기냐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왕산작가의 작품에 대한 사회반응은 토론이라 말할 수 있으나 <개조론>에 대한 사회반응 및 이에 따른 반대파들의 입장은 머리에 토론이 자리할 틈이 없이 아예 죽이기에 열을 올려왔다는 것이다. 장정일 선생님과 같은 분들은 <개조론>을 “조선족사회현실에 맞지 않거나 일부 왜곡한 부분이 있어 반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크다.”는 식으로 평가한 반면에 과격한 분들은 학술적 접근이 아니라 아예 몽둥이를 들고 나와 두들겨 패려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말 속담에 “며느리 미우면 발뒷굼치 큰 것도 흉”이란 말이 있다. <개조론>의 과격한 반대론자들은 개조론이 미우니 저자에게 고깔모자를 씌우다 못해 이완용이 저리 가라이다. 분명히 이는 토로문화가 아니라 죽이기 태도이다.
176    김문학친일론 진실? 허위? 댓글:  조회:6074  추천:20  2010-08-19
김문학친일론, 진실? 허위? 필자의 <김문학의 반대파수용>글에 태산이란 아이디(이하 태산 씨로 칭함)로 출처를 오마이뉴스라 밝힌 한 단락의 문장을 댓글로 올렸다. 필자는 일관적으로 댓글에 신경을 쓰지 않으나 태산 씨의 댓글이 오마이뉴스라고 밝히니 나의 입장을 말하려고 이 글을 쓴다. 아래에 댓글의 전문을 올린다. 조선족 출신으로 일본에서 논설가로 활동중인 김문학이 일본 우익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반도가 다시 일본의 영토화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김문학은 요미우리 신문의 시사잡지 '야마이노 특보' 4월호에 실린 인터뷰 내용에서 "한국인들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주변 강대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으며 속국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한국인들이 스스로 원했거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김문학은 이어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주권 국가를 운영할 때에는 불행과 비극이 반복되었지만 주변 강대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을 때에는 번영과 행복이 계속되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스스로 주권을 행사하고 영토를 가질 자격이나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다. 이조 시기에는 항상 한반도의 민중이 관리와 왕족들의 무능과 가렴주구에 시달려 왔으나 일본의 통치 36년간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문명이 발달하여 행복한 생활을 영위했다. 당시 한반도의 민중이 일본의 통치를 고마워하고 있었다는 좋은 반증이 된다."고 주장했다. 김문학은 현재 한국 내에서 서민들의 생활이 매우 열악하다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붕괴되고 다른 경제 선진국이나 군사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문학은 "한국의 정권은 어떻게 민중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국민들을 평안하게 할수 있는지 방법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면서 "나는 일본이 무능한 한국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다시 일본의 영토로 지배하면서 한국인들을 일본 국민으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진정한 행복과 번영을 베풀어주는 은덕을 펼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한국 재침략을 주장한 김문학은 "일본이 UN 상임이사국에 선정될 경우 한국의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함을 지적하고 국제사회에 한국이라는 국가의 불필요성을 인식시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일본이 통치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동아시아 평화적 질서를 위협하는 북한의 정권이 만약 붕괴된다면 한반도 북부 지역은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일본과 중국이 각각 한반도 남쪽과 북쪽을 사이좋게 나누어 통치한다면 한국인들의 삶이 질적으로 달라지고 풍요로운 경제적 생활을 영위할 것으로 판단한다."라고 강조했다. -오마이뉴스중에서- 필자는 위 댓글에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 첫째 사실이다. 둘째 태산 씨가 퍼뜨린 루머다. 셋째 오마이뉴스의 오보이다. 만약 뉴스가 사실이라면 김문학은 철두철미한 친일분자이다. 그것도 자신의 모국을 일본에 팔아넘기는 가히 ‘이완용의 후계자’로 부를만한 ‘매국(모국)’행위이다. 만약 뉴스가 사실이라면 필자는 연재의 필을 접겠다. 뿐만 아니라 이미 발표한 <김문학연재>를 지울 것이고 나의 전부 글을 지우고 영원히 조글로에서 탈퇴하겠다. 왜냐? 내가 독자들을 우롱했기 때문에 필을 접고 탈퇴하는 것으로 독자들한테 사과를 대신하겠다. 만약 사실이라면 김문학 선생은 한국인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머리가 돌아도 한참 돌았다. 아울러 같은 조선족으로서 우리 전체에게 치욕을 안겨주는 악행이다. 허나 김문학 선생은 아예 그런 일이 없단다. 그래서 내가 한 번 확인해 보기로 했다. 8월 18일 오후 14시경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전화를 걸었고 편집부의 성함이 박순옥이란 편집기자가 받았다. “어찌어찌한 용건으로 전화를 드렸고 사실여부확인을 부탁한다.” 8월 19일 14시 42분 박순옥 편집기자께서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리 검색해보아도 오마이뉴스는 그런 기사를 발표한 적이 없다는 대답이 왔다. 그러면서 왜 출처를 오마이뉴스라 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김문학 선생도 그런 일이 없다 하고 오마이뉴스도 그런 기사를 발표한 적이 없단다. 그렇다면 태산 씨가 허위로 조작하여 댓글로 올린 것일까? 만약 태산 씨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고 사실여부에 확신이 있다면 기자 이름, 글 제목, 발표일자를 밝혀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오마이뉴스에서 다시 정확한 검색이 이루어질 수 있고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한 가지 남은 것은 만약 오마이뉴스에서 그런 기사를 발표했다면 사실내막에 대한 질실 여부는 김문학 선생이 알아서 명예훼손죄로 형사고발을 하든지. 그것은 필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아무튼 이 사건에 관련해 진실은 하나일 것이고 언제든 밝혀질 것이다. 필자는 그 진실이 밝혀지면 다시 논의하겠다.
175    김문학은 김문학현상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댓글:  조회:5451  추천:21  2010-08-18
김문학은 김문학현상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김문학 선생은 35세에《벌거숭이 3국지》를 발표하였고 한중일 삼국에서 일부 대학 혹은 고등학교교재로 활용되었다. 36세에 한국과 일본에서 발표한《한국인이여 ‘상놈’이 돼라》로 한국(조선일보)에서 해외지한파 4인에 선정되었다. 김문학 선생이 한국과 중국을 비판하는 책을 한국과 일본에서 내니까《장백산》잡지사의 남영전 사장이 우리조선족을 비판하는 책을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침 그가 쓰고 싶었던 글이고 1994년부터 자료수집하고 현지조사도 해왔다. 오랫동안 미뤄오다가 2000년 여름방학에 써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해외에서 고향을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조선족이 체질을, 살아가는 방식을 갱신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이 글을 쓰자면 간이 커야하는데 쉽게 말해 맞아죽을 각오가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영전 사장께 원고를 보내면서 “잡지사가 폭격당할 준비를 하라”고까지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장백산》에서 연재하기 시작하자 ‘장백산’에 화산폭발이 일어났고 마치 연변이 큰 폭탄이라도 맞은 분위기에 젖어 위기의식을 갖고 반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잡지사는 큰 홍역을 치르게 되었고 저자는 벼라 별 수식어가 다 붙었고 테러말도 나왔고 혹자는 전화로 암살하겠다고 협박했다. 물론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섰고 일명 김문학현상으로 연변이 들끓었다. 그렇다면 김문학 선생은 어떻게 미리 ‘김문학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것을 예측하고 있었을까? 그는 우리민족의 비판문화와 반성의 태도가 매우 취약한 데서 미리 답을 찾았다. “1920년대 이광수가 우리민족사에서 처음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친일역적으로 몰렸고 8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비판문화에 관련해 변한 것이 전혀 없다.” 사실 한국의 상황을 보면 우리민족의 열근성을 반영한 글을 발표하면 반민족자로 몰리고 타민족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 베스트셀러가 되고 출세한다. 마찬가지로 만약 일본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글을 쓰면 친일파로 내몰리는 것이 한국인의 풍토이다. 일례로 1993년 한국의 전여옥이《일본은 없다》는 글을 발표해 초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필자가 읽어보았는데 괜히 돈 팔고 산 것을 후회할 만큼 글의 내용이 형편없었다. 다시 말해 저자는 일본의 역사문화와 현실문화 및 진정한 일본인의 민족성의 유래 혹은 그런 현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그저 어느 뒷골목에서 떠도는 풍월을 토대로 써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저자는 한국과 한국인에게도 존재하는 현상을 갖고 마치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식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일본어는 아름답다. 하지만 일본인은 그 아름다음 자기 말을 팽개치고 외래어를 많이 사용한다. 아마 일본인은 우리처럼 나라를 잃은 슬픔 같은 감정이 없어서 외래어를 쉽게 받아들인 것 같다.”고 저자는 말했다. 이 대목을 보고 필자는 한심한 글이고 이런 책도 출간되나 하고 어이없어 덮어버리고 말았다. 1993년 당시 저자는 한국 언론인으로서 한국이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김문학 선생과 필자는 ‘일본은 없다’를 놓고 이야기를 꺼냈다가 서로 허허 웃고 말았다. 수년이 지난 후 한국 유명가수 조영남씨가 일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내용을 담은《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을 발표해 자신이 만들고 10여 년을 진행을 맡아온 <삶의 체험현장>이란 KBS프로그램에서 쫓겨나는 불상사를 맞았다. 얼마간 가수활동도 하지 못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한국은 이상하게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는 나라지만 일본을 폄하하는 글을 쓰면 스타덤에 오르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책을 내면 쓰레기로 취급된다. 어찌되었든 우리민족은 비판문화와 반성문화가 매우 취약하다. 해외에서 사는 조선족이래야 다를 바가 없다. 조선족은 개혁개방 전 사이즈가 거대하고 인구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나라, 인종이 56개나 되는 다민족국가에서 무엇도 제일이요, 무엇이 으뜸이요라는 찬양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마치 장점만 있고 단점이 없는 민족인양 흘러왔다. 특히 연변은 한족과 어울려 사는 산재지구 일명 안쪽사람들을 연변사람에 비해 좀 개명치 못한 인식으로 보아 올만큼 우월의식이 강했다. 물론 우리조선족의 우월성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칭찬은 남이 해주고 스스로는 비판하고 반성할 줄 알아야 민족발전에 도움이 되건만 우리조선족사회 특히 연변은 이런 풍토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서 가령 그 누가 민족비평의 글을 쓰면 반민족주의자로 몰고 쓰레기로 취급하기가 일수이다. 우리민족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민족이다. 허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민족공동체가 잘 못 되기를 바라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니 100% 확신한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사람이 지구촌의 천애지각을 자유로이 떠돌아도 자신의 출신 공동체에 대한 애착정신만은 잊지 못한다. 한국국적을 취득한 조선족출신 및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조선족은 출신국인 중국이 여러모로 낙후되어 있어도 만약 한국인이 중국을 비하하는 말을 하면 모두 반발한다.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소집단인 출신 공동체인 조선족사회가 잘 못 되기를 바라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은 자신이 출신 소속공동체와 출신국이 힘이 크면 어깨가 펴지고 그렇지 못하면 위축되기가 일수이다. 김문학 선생과 필자는 입을 모았다. “세상에 자신의 출신공동체를 비하하고 헐뜯으려고 글을 쓰는 자가 없다. 다만 글을 읽는 인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유감스럽게도 민족비평의 글을 쓰면 반민족주의자로 모는 것이 우리조선족의 현주소이다. 물론 표현에 있어서 타당치 않은 부분도 있을 것이고 일부 착오적인 대목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엮어졌다는 성경도 말이 많고 탈이 많은데 하물며 김문학 선생의 작품임에랴 더 말할 것 없이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김문학 선생 자신도 이 점에 대해선 이미 명확히 밝혔다. 천년만년 썩을 것이라던 유소기도 죽어 십년 만에 평판을 받았는데 이젠 1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김문학 선생의 ‘명예를 회복’해 줄 때가 되었다고 보고 이 연재를 시작하였다.
174    김문학의 반대파수용 댓글:  조회:6036  추천:21  2010-08-17
김문학의 반대파수용 지금 나의 손에 한국인 강원석씨가 김문학현상을 둘러싼 贊反양론 내용의 글들을 묶어 편찬한 한 권의 책(도서출판 한일문화교류센터, 2003, 출판)이 있다. 책표지는 <발전을 위한 비판>이란 큰 글과 “한국, 중국, 일본의 지성 김문학 읽기”란 작은 글로 되어 있다. 편자는 서문의 마지막대목을 다음과 같은 말로 장식하였다. ‘김문학의 경계를 넘어선 글쓰기는 글로벌 시대를 맞이한 지금, 우리 한국 지식인에게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늘 편가르기나 좌우로 갈라서 서로를 공격하기에만 익숙해져 있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이는 또 하나의 신선한 이정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우리는 자신의 아이텐티, 정체성만을 강조하는데 열중하고 익숙해져 있으나 정작 세계화를 외치면서도 세계의 일원으로서 세계 문명에 동참하고 공존하려는 의식은 미약하다. 고유성, 정체성 문제를 넘어서 이제는 세계인으로서의 공존적 동참이라는 화두에 대해 많이 고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는 이 대목을 우리조선족사회에 추천하고 싶다. 편자가 김문학 선생과 책 출간 의향을 밝혔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좋게 평가한 글만이 아니라 비판하고 비난, 폄하하는 글들까지도 모두 실었으면 좋겠다. 다양한 메뉴 속에서 독자들이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다. 편자는 그의 이 제안에 “여기서 나는 김문학의 관용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여 홍용암의 <노신과 김문학의 비교>, 김관웅의 <김문학의 毒書비판>, 윤해연의 <《중국 조선족 대 개조론》유감> 등 세 편이 제2부 안티 김문학에 수록되었다. 김문학을 비판하는 글 중에 ‘친일분자’ ‘일본우익세력의 주구’ ‘매국노’ ‘만고의 역적’ 등 태산보다 더 크고 무거운 고깔모자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지고 일어설 수 없는 그런 무시무시한 어구들이 담겨 있는 글들을 서슴없이 실으라 했다. 조선족지식인들은 자신(공동체와 개인을 포함)을 비판하는 글을 절대 용납 못한다. 그들은 자신을 고상한 존재로 여기고 아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문학현상에서 그를 죽이기에 앞장선 다수가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 비해 김문학은 자신을 비판하는 글들을 실으라는 용기를 보이고 있으며 이에 대해 아주 대범하다. 아울러 비판자들에 대해 종래로 반박을 제기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주변사람들이 그에게 “왜 반박을 내놓지 않는가?”고 하면 그는 “싸움할 상대가 아닌 사람들한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괜히 정력을 저차원의 소모전에 허비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그 시간 있으면 책 한 페이지 더 읽고 글 한 편 더 쓰는 게 났다.”는 말로 웃어넘겼다. 김문학현상에 있어서 남영전 사장을 비롯해 일명 안쪽 지식인들의 다수는 지지파인 반면 연변을 중심으로 반대파가 형성되었다. 근데 흥미로운 것은 연변사회 및 전체 조선족사회지식인 중 권위 인물이었던 정판룡 교수는 “이 글 때문에 장백산 잡지가 성공했다.”고 잡지에서 말씀하셨고, 조선족문인사회 최고 어른인 김학철 선생은 연변에서 하도 김문학을 공격하니까 “김문학은 우리의 희망이고 귀재.”라 했고 “집중포격을 자제하라”고 커버하려 노력하였다. 이 두 큰 어른 외에도 지지자들이 꽤나 있었다. 두 어른이 지지하고 나설 정도면 김문학의 작품이 어느 정도 가치가 높다는 뜻이지만 반대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김문학의 <개조론>이 형편없는 글 같지 않은 글인데 두 어른이 노년에 하신 실언으로 보였을 것이다. 조선족유사이래 김문학의 <개조론>이 실로 큰 폭탄이었다. 아울러 그의 작품에 일부 오류도 있을 수 있다. ‘신의 영역’에 ‘폭탄’을 던져놓았으니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시끌벅적하게 들끓은 것은 정상이다. 문제는 토론문화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민족은 토론문화가 성숙하지 못한 풍토 속에서 살아왔고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다. 어찌 보면 회색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흑과 백만 주장하는 민족이고 더욱이 연변사회풍토는 흑백론리가 심하다. 문화대혁명 가장 선두에 서서 대국혁명에 목숨 걸었던 경험도 있고 해서 혁명분자 아니면 반혁명분자만 있을 뿐이란 인식밖에 없다. 제 삼의 인물은 있을 수 없다는 흑백론리에 물젖어왔기 때문에 반대파들은 무조건 김문학을 반동으로 몰아왔다. 아니 반동도 보통 반동이 아니다. 심지어 이완용에 비견될 정도의 반동이다(홍용암의 <노신과 김문학의 비교>에서 등장한 어법). 승자와 패자가 없는 싸움을 피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아울러 반대파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정신은 고귀하다. 한편 조선족사회 최고 지식인으로 꼽히는 분들이 먼 바다 건너에 있는 자신들과 신분이 다른 분과 시야비야 사이버전쟁을 벌이는 현상을 보고 필자는 맘이 착잡해 났다. 비중이 있는 인물일수록 자신을 보호하는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그 선택이 상대가 누구이든 이전투구식의 싸움이 아니라 此時無聲勝有聲으로 대처하는 것이 진리라 생각한다. 다른 조선족지식인이라면 자신을 평가하는 책에서 자신을 만고의 역적으로 모는 글이 실리면 신사옷차림에 똥물바가지를 집어쓴 기분이 들어 용납 못할 것이다. 그릇의 문제이다. 김문학 선생은 독을 약으로 여기고 자신이 이완용으로 비유될 만큼 큰 타격을 입었으나 그런 내용이 담긴 글을 실으라는 용기와 대범 및 관용정신을 취했다. 불필요한 체면치례에 물젖어 그릇이 작아진 조선족지식인들은 싫든 좋든 그의 이런 정신을 따라 배워야 하지 않을까.
173    인간 김문학 댓글:  조회:6173  추천:20  2010-08-11
인간 김문학 축구게임을 감상하는 데는 여러 가지 수단이 있다. 현장관람, TV생방송, 라디오중계, 컴퓨터문자중계, 재방송 등등이다. 이 가운데서 단연히 현장관람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와 비슷한 도리로 한 문인을 요해하는 데도 직접 만나 대화하고 밥 먹고 하는 것, 전화통화 하는 것, 메일을 주고받는 것, 그의 책을 읽는 것, 그에 대한 평론의 글을 읽는 것 등 여러 가지 루트가 있지만 그 중 직접 만나보는 것이 그를 요해하는데 가장 의미 있는 수단이다. 지난 10년 세월동안 조선족사회의 가장 큰 화두인물로 되었던 김문학 선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찬반양론이 시끌벅적하였으나 직접 그를 만나보고 인간 김문학이란 요해를 한 자는 매우 드물 것이다. 필자는 두 번 김문학 선생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기에 인간 김문학에 대해 조금 발언권이 있다고 생각되어 그에 대한 인상을 여러 편으로 나눠 시리즈로 글을 발표하려고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김문학. 아니 냉전시기가 지나가고 이념과 사상의 적대대결이 사라져가는 21세기 벽두에 문인분야에서 김문학처럼 몽둥이세례를 맞은 인물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런 김문학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 8월 6일 저녁 6시 반 서울시 가리봉시장에서였다. 그날 오후 3시경 처음 전화통화가 있을 때 내가 서울지리에 익숙하니 당신의 거처(서울시 강서구 등촌동 소재 그린호털)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허나 그는 나한테 찾아오는 것이 예의라 하면서 기어코 이쪽에 오겠다고 고집했다. 나의 사무실이 가리봉시장 부근에 있다고 하니 그럼 중국인이 모여 사는 일명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곳에 서민생활도 요해할 겸 차라리 잘된 일이라 한다. 서울시간이 중국보다 한 시간 빨라 오후 6시 반이지만 서산에서 비추는 햇볕이 창창했다. 가리봉시장 입구에 한 대의 택시가 멈춰 서자 사진으로 익숙하게 보았던 김문학 선생이 미소를 지으면서 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근데 사진에서 본 얼굴윤곽만 비슷할 뿐 내가 생각했던 김문학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키가 나보다 작고 몸집도 나보다 더 왜소한 체격, 흰 얼굴에 수백도 되어 보이는 안경을 끼었다. 아니 동북사범대학외국어학부에서 100미터 11초6의 기록보유자이고 교내축구선수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어느 글에서 보았는데 저런 약골체격으로 어떻게? 의문이 스쳤다. 나와 악수한 그의 손은 덩치가 자그마한 처녀애들의 손처럼 작고 섬약하게 느껴졌다. 아니 이 야들야들한 손끝에서 히로시마 원폭을 연상케 하는 글폭탄을 세상에 던져 놓다니? 가리봉삼거리 정풍빌딩3층을 가리키면서 재한조선족을 상대로 꾸린 중국동포타운신문사인데 여러 동포신문 중 가장 잘 나오는 신문이라 소개했더니 그는 올라가 보고 신문도 갖고 싶다고 한다. 중국동포타운신문사 책임자가 한국 분인데도 10년 동안이나 조선족관련 일을 하다 보니 김문학이란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연변일보사 기자출신인 박00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아무개 아니냐면서 인사를 나눴다. 신문사 책임자께서 인터를 요청했으나 그는 오늘 스케줄은 김선생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후로 미루자면서 거절했다. 내가 괜찮다고 했으나 그는 일이란 순서와 질서가 분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가리봉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조선족순대를 맞보고 싶다면서 샀다. 저녁식사는 중국요리도 맞보고 우리민족전통음식도 먹어볼 겸 진달래냉면집으로 정했다. 이런 얘기를 장황하게 늘여놓는 이유는 그가 유명학자 김문학보다 나에겐 친서민적인 일반친구 김문학이란 인상이 깊었기 때문이다. 인간 김문학이 친서민적이고 아무리 무국적자, 국제인, 아세아인, 동양인 등등으로 말하고 있지만 고향향토의식이 뿌리 깊다는 것이 다음 사실을 통해 드러났다. 남구로역 3번 출구에서 나와 내리막 길 따라 오면 진달래냉면이 있고 10미터 더 내려오면 조선족출신들이 꾸린 음식점이 줄지어 있다. 그중 한 음식점에 내가 자주가지만 그 집 아기엄마가 연변화룡사람이기에 기타 식구들도 역시 연변사람이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음식점 앞을 지나갈 때 아기엄마 이상 시누이가 나보고 인사하는 한 마디를 듣던 김문학 선생이 대뜸 “아주머니 심양에서 오셨죠.”라고 말을 걸었다. 그 아주머니도 상대방의 말투를 알아듣고 같은 심양이라 반가워한다. 그런데 두 분은 모두 심양시 于洪區에 살았고 불과 5리 거리에 있었으며 같은 1962년 출생이며 반가워 고향의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이나 나눴다. 수년 전에 내가 연길에 갔을 때 나의 고향출신인 전 연길시장이 고향학교선배들을 연길 거리에서 만나면 “나를 모르겠소? 내가 TV에 자주 등장하는 연길시장인데.”라고 한다는 어설픈 처세술을 들었다. 읽은 벼가 고개 숙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 시장은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돌피와도 같다면 김문학 선생은 자신이 유명인사임에도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한 고향 분들을 만나 정말 보통친구처럼 격이 없이 따뜻하게 대한다.
172    내가 만나본 김문학 댓글:  조회:5819  추천:30  2010-08-08
내가 만나본 김문학 김문학 선생은 8월 4일부터 8일까지 4박5일간 방한하여 새로 발굴한 조선총독부 對外秘 자료《조선인의 사상과 성격(1927년 3월 일본어문판 출간)》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국지식여행출판사에서 한일합방 100주년을 즈음하여 출판하기로 계약했고, 또 한국당대 최대 석학으로 꼽히는 이어령 선생과 한중일 비교문화에 관련한 신작을 출간하기로 하였다. 필자는 그간 그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두 번 만나 장시간의 진지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중일 삼국에서 알아주고 조선족사회에서 글이나 읽는다는 사람치고 김문학을 모르는 자가 없을 만큼 유명하고 기재, 괴재, 귀재, 친일파, 매국분자 등 온갖 수식어가 많지만 그는 자그마한 체격을 가진 사나이며 나의 보통친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다. 나의 눈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 저 자그마한 체격에서 어떻게 그 무궁무진한 에너지와 엄청난 파워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지금까지 50여 권의 저작을 펼쳐냈고 현재도 동시에 여러 가지 장편의 글을 구상하고 부지런히 써내고 있는 노력가이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동력은 지칠 줄 모르는 탐구력이다. 어디에 유용한 책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뛰어간다. 이번 빡빡한 방한일정 중에도 청계천 고서시장에 가서 세월의 때가 흠뻑 묻은 여러 권의 책을 구입했고 한국출판사에서 기증한 서적을 포함해 100권 정도의 책을 일본에 갖고 간다. 매월 책 구매비용이 6만 엔 정도라 한다. 더욱 놀란 것은 일본에 9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등박문, 안중근, 유길준 등 세인의 주목을 받는 인사들의 친필유묵도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다. 이번 방한 후 일본에 갔다가 서둘러 중국 북경에 100년 전 한중일·근대재발견을 책 출간 계약 건으로 간다. 이렇게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탐구로 부지런히 한중일 세 나라에 책을 쏟아내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그가 일부 비평서에서 과격한 태도와 예리한 필법을 구사하여 그를 오만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가질 수 있으나 내가 만나본 김문학 선생은 그런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또 사람이 유명해지면 건방을 떨 법도 하지만 그는 티를 낼 줄 모르고 상대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주는 아주 겸손한 학자이다. 그래서 무명인 필자와 유명학자 김문학의 만남이 아니라 서로 격이 없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화를 충분히 나눌 수 있었다. 우리 둘의 대화는 한 곬으로 흐르는 데가 많아 기분이 좋았다. 100년 전 미국선교사 아서·스미스(중국명 湯恩薄)의《중국인의 성격(일문판 제목은 지나인의 기질)》이란 책을 비롯해 서로 읽은 책들이 유사한 것들이 많고 공감하는 부분도 굉장히 많았다. 더욱이 김문학 선생은 한중일 비교문화에 관심이 깊고 나는 한중일 역사문화에 관심을 갖다보니 오랜 친구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김문학 선생도 일본어전공이다. 앞서《羅生門》수업에서 받은 계시라는 글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이미 1980년대 일본교수들한테서 좋은 수업을 많이 받았다. 당시 모든 인간은 계급적 낙인이 찍혀 있다는 계급관점으로만 인식하고 분석하는 방법론에만 매달려 있던 우리가 일본교수한테서 “일본인은 척박하고 메마른 자연환경에 의해 국민성이 생겨났고 일본의 강들의 흐름이 낙차가 크고 물의 흐름이 급한데서 인간의 성격이 급하다. 거꾸로 중국인은 황하와 장강의 유유한 흐름처럼 인간의 성격도 느긋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인간의 민족성은 계급적 낙인이 아니라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이론인데 필자는 그때부터 역사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교수의 회의 후 연설은 중국영도들의 기존의 套話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인간적으로 하는 데 큰 매력을 느꼈으며 여러모로 우리는 마치 외국에 가서 유학한 것처럼 기존의 고질적이고 중국적인 문화와 문혁 틀에서 벗어나 한발 앞선 교육을 많이 받았다. 이 부분에 관련해 우리 둘은 서로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었고 좋은 추억도 많이 가질 수가 있었다. 중국고사에 “人怕出名, 猪怕肥”이란 말이 있듯이 김문학 선생은 욕도 많이 먹었고 심지어 그에 대한 테러목소리마저 나왔다. 그래서 혹자는 그에게 “당신을 죽이자는 반대파에게 왜 당신은 한마디 대꾸나 변명을 하지 않느냐?” 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와 관련해 김문학 선생이 나에게 한 말이 이렇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나는 오로지 나의 관점으로 글을 쓸 뿐이다. 그들이 나의 글을 어떻게 해독하고 공격하는가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다. 할 일이 많고 많아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데 언제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쓰겠는가! 과거도 그랬고 앞으로도 나는 나의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다.” 한 인간이 세간의 풍문에 휘말리고 포화처럼 공격의 화살을 맞으면서 일절 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한다는 것은 말이 쉬운 것이지 현실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연변의 한 문인은 남의 공격을 받고 대응하지 않는 사람을 성인군자에 비유했다. 지나친 표현이 되겠으나 이런 의미에 따라 해석하면 김문학 선생은 성인군자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71    연길에 조선족이 있는가? (김정룡) 댓글:  조회:7311  추천:32  2010-07-28
연길에 조선족이 있는가? 김정룡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으로 보인다. 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에 조선족이 없으면 어디에 조선족이 있겠는가? 하지만 한 사회를 랭철하게 실상과 허상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이런 황당한 질문도 할수 있다는것이다. 현재 연길에는 분명히 20여만에 달하는 조선족이 살고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를 허상적인 존재라 생각한다. 왜냐? 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집단은 그들의 기본생존바탕인 민생기반이란 실상이 보장되어야 장기적으로 생존할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연길시 조선족의 민생기반은 구경 어떤 형편일가? 개혁개방직후 연길은 중국 다른 도시에 비해 빠르게 눈을 떠 택시시장이 매우 활성화 되였는데 택시기사 절대다수가 조선족이였다. 1990년대중후반에 이르러 연길시 택시수가 인구비례로 따지면 전국에서 으뜸이고 기사 역시 조선족 택시기사가 다수였다. 헌데 지금은 연길에서 조선족 택시기사를 만나기가 가물에 콩나듯 말라들어 한족일색으로 되여가고있는 형편이다. 1980년대초반부터 시작된 연길시 로천매대와 서시장, 후에 들어선 지하국제무역청사 매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거의 조선족 일색이였 다. 하지만 점차 한족들한테 밀려 지금은 조선족이 줄어들고 한족이 우세를 점하고있다. 1990년대초중반까지 연길시 거리마다 골목마다 조선족 녀성들이 꾸린 파마점과 리발점이 다닥다닥 줄지어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고 당지 혹은 관내에서 연길에 진출한 한족 젊은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연길시 골목마다에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품가게가 줄지어 있었고 시민들이 퇴근시간에 직장동료 혹은 친구와 함께 마른 명태를 쪽쪽 찢어 호프를 마시면서 희로애락을 나누는 장소였다. 현재는 그 가게들이 다 사라지고 한족들이 운영하는 슈퍼가게가 들어서있다. 연길에 안마방을 처음 오픈한것은 한국에 몇년 체류했던 조선족녀성이다. 장사가 잘 되니 너도나도 뛰여들어 인구비례를 따지면 안마방이 중국에서 으뜸으로 늘어났고 대다수가 조선족이 꾸린것이였다. 헌데 지금은 안마방도 점차 한족들에게 넘어가고있다. 공원시장 북쪽 길옆에 안마방이 줄지어 있는데 원래 조선족이 운영하던것을 한족이 단번에 주변의 안마방가게 셋이나 사들였다. 아직도 그나마 조선족음식점이 많이 남아있지만 홀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아가씨들 절대다수가 한족녀성들이다. 조선족이 한족들한테 밀리다 못해 지금은 한족처녀가 조선족된장을 팔기에 이르렀다.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있다는 뜻이다. 연길시호텔은 1990년대중반까지 직원 80%가 조선족이였다. 그 후 연길시정부가 개인한테 매각하면서 주인이 한족으로 바뀌자 조선족직원이 거의 다 밀려났다. 지금 연길시 많은 공기업 혹은 집체기업이 연길시호텔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있어 조선족들이 일자리를 많이 잃어가고있다. 연길시 조선족이 한족한테 밀린 측면도 있지만 스스로 밀리게끔 처사해온것도 사실이다. 관내진출과 해외진출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혹자는 조선족이 외국에 많이 진출해 돈을 많이 벌어 한족보다 잘 살지 않느냐고 말할것이다. 필자는 이에 매우 회의적이다. 조선족이 외국에 나가 번 돈으로 연길에 아파트를 구입한 사례는 굉장히 많다. 허나 그들은 연길에서 살아갈수 있는 민생기반이 없어 공중루각처럼 내용이 텅 비여있는 불안요소를 안고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민생기반이 허물어져 가고있는 조선족은 생존수단이 보장되지 않아 앞으로 스스로 사라져갈 위기에 처해 있다는것이다. 연변주도 좋고 연변시도 좋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실상을 잃어가는 판국에 허상에만 매달려 있으니 무슨 의미가 있는가?    
170    羅生門수업에서 받은 계시 댓글:  조회:4648  추천:35  2010-07-24
《羅生門》수업에서 받은 계시 일본근대문학 거장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892.3.1~1927.7.24)의 처녀작 단편역사소설《羅生門》의 이야기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생전에 뱀 말린 것을 마른 생선으로 둔갑시켜 팔아먹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여시체가《羅生門》누상에 버려졌다. 집 주인한테 쫓겨난 하인이 을씨년스럽고 공포에 짓눌린 누상에서 한 노파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을 목격한다. 사내는 시체의 머리카락이 뽑혀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있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와 함께 노파에 대한 증오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 증오는 단순히 노파에 대해서만 느끼는 증오가 아니었다. 세상에 있는 ‘악’이란 악, 모두에 대해 느끼는 강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이 사내에게 얼마 전까지 고민하고 있던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 굶어 죽을 것인가,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둑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물어본다면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굶어 죽을 것’을 택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이 사내는 악에 대한 증오가 불을 붙인 소나무 장작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굶어 죽을 것인가, 도둑질을 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을 일순간에 없애버리게 된 것이다. 마음속에서 갈등하던 굶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깊게 의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연 그럴까!” 사내가 노파의 행위에 분노해 꾸짖자 노파가 태연스레 대답한다. “내가 하는 짓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안하면 굶어죽게 되니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생각 밖의 말을 듣고 난 사내는 노파 앞으로 성큼 다가가서는 얼굴의 여드름을 만지고 있던 오른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면서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당신의 옷을 벗겨 빼앗아가도 원망하지는 않겠군. 나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될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이 작품은 일본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인 받은 명작이 되었고 영화, 뮤지컬 등으로 창작되어 관객의 호평을 받아왔다. 필자는 이 작품을 장춘에서 공부할 때 일본교수한테서 수업 받았다. 선생님은 전쟁과 기근, 지진, 태풍 등에 시달려온 과거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 어둠이 작품의 배경으로 된 점을 주력해서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등장인물들의 감정 강의에 몰입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라는 숙제를 남겼다. 세상에 이런 수업이 다 있나? 다시 말해서 모든 작품을 그 당시 역사배경과 사회배경 및 문화배경과는 전혀 상관없이 계급투쟁의 관점으로만 인식하고 분석하는데 길들여진 우리 중국학생들의 머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업이었고 실로 충격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의 숙제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회주의 중국은 선생이든 학생이든 일치하게 악을 반대하고 선을 제창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끝이다. 이런 맥락에서《羅生門》은 더 말할 것 없이 악의 투성이라 악에 대한 증오감을 호소하고 정의를 외치면 되는 것이지 뭔 뚱딴지같은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인가? 이것이 바로 일본과 중국이 문학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차이었다. 즉 일본은 인간이 처한 환경에서의 인성에서 답을 찾으려 하는데 반해, 중국은 인성을 논하는 것은 썩어빠진 사상과 이념으로 취급하고 무작정 모든 인간은 계급적 낙인이 찍혀 있다는 계급투쟁의 관점으로만 두들겨 맞추다 보니 모든 작품의 진실이 왜곡되어 있었으며 우리는 그 왜곡된 허상을 머리에 입력하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강산이 두 번 반도 넘어 바뀌었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일본교수한테서《羅生門》수업을 받은 것이 정말로 감명 깊게 느껴진다.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세상살이하는데 있어서 어쩌면 영원한 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의 가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개개인이 사회생활에서 가정생활에서 부딪치는 일들에서 “만약 내가 그 하인이었다면?”라는 문제설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그럴 때마다 나의 선택을 요구하게 된다. 직장 상사나 동료 및 친구가 비합법적 혹은 비합리적인 수단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회사 오너로서 타회사가 불법게임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나는 정당한 길을 걷고자 하기에 망하게 된다면? 현금 중국정부관리와 공기업관리들의 부정부패문제가 따지고 보면 악행의 환경에서 나 홀로만 깨끗할 수 없다는 심리인소가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굴원이 절망에 빠져 멱라강 강가에서 헤맬 때 한 도사가 나타나 “당신은 세상 사람이 다 술에 취해 혼탁한데 홀로 맑게 살려니 어이 될 말인가!”고 지탄한다. 부모형제의 악행을 목격하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출국한 남편(아내)이 바람났다고 나도 집에서 맞바람을 피워야 하나? 《羅生門》에 “만약 이 지구 수억 명의 인간이 다 괴물로 변한다면 그 다음날부터 곧 괴물들 사이 생존경쟁이 일어나겠지!”라는 대목이 있다. 이 한 마디 말이 곧 작품 중의 인물들이 악행을 인간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합리화하는 에고이즘을 암시하고 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황하대륙의 인간을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무당 알곡산량이 수만 근이 되고, 시골에서 수백수천 톤의 강철을 생산하고, 비옥한 토지를 깊이 갈아엎어 생땅이 드러나 농사를 망치게 하는 심경운동, 굽이 흐르는 강을 혁명은 직선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보조에 맞춰 곧게 흐르게 만드는 공사 등은 모두 괴물성적인 행위였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 똑똑했던 당정간부들이 무당 알곡산량이 얼마이고, 시골에서 강철생산이 되지 않는 것, 땅을 깊이 갈아엎으면 수확이 떨어진다는 도리, 자연의 섭리에 의해 세상의 모든 강이 굽이 흐른다는 것을 몰랐을까? 절대 아니지! 세상이 인간을 괴물로 만들고 있는데 나만 괴물이 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니깐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위해 양심을 버리고 허위를 부르짖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당시에 고지식하게 진실을 주장한 사람들은 억울하게 반혁명이란 감투를 쓰고 한생을 망쳐 먹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사람들이 이지를 상실하고 괴물로 되어 부모형제, 친구 및 스승과 제자 사이 반목하는 인성이 여지없이 짓밟혔던 것이다. 유감스런 것은 황하대륙에서 이상하게 연변만 아직도 괴물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연변만 아직도 무슨 분자라는 감투를 씌우려 애쓰고 타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쩍하면 괴물의 몽둥이로 두들겨 패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169    나는 누구냐?(jin과 kim) 댓글:  조회:6089  추천:30  2010-07-16
JIN과 KIM 1990년대 초반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있었던 일이다. 강남 리베라호텔에서 삼일 묵고 마포소재 가든호텔에 옮기게 된다는 소식을 한국 업무거래처 분들에게 알렸다. 그 시절은 지금과 달리 한국도 통신이 발달해 있지 않아 매우 불편했다. 하여 한국 분들이 호텔카운터에 전화해서 나의 룸 번호를 체크하고 나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 분들이 나의 성을 KIM라고 말하니 호텔 측에선 그런 손님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하긴 나의 성은 한국식으로는 KIM이지만 나는 분명히 중국공민이기에 중국식으로 JIN이기 때문에 KIM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오늘 날 느닷없이 그때 일을 들먹이는 이유는 JIN과 KIM을 갖고 우리조선족이 흔히 안고 있는 문제, 나는 누구냐? 는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풀이를 하기 위함이다. 조선족은 분명히 'JIN'이지 ‘KIM’이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조선족을 동족이란 차원에서 ‘KIM’으로 인식하고 만약 한국이 중국과 축구경기를 하는데 중국을 응원한다면 몹시 서운해 한다. 관건문제는 한국인은 조선족을 재미 혹은 재일교포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 왜 ‘KIM’이 아닌 ‘JIN’이 되었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재미 혹은 재일교포와 질적으로 다르다. 재미 혹은 재일교포는 이미 달리고 있는 그 나라 열차에 무임승차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슨 말이냐? 조선족은 만주시절부터 그 땅에 가서 토지를 개척하여 생계를 유지해왔고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면서 항일도 하고 국민당과도 싸우고 신중국 건설에 피와 땀을 이바지해 왔고 귀중한 목숨까지 바쳐왔다. 또 이런 맥락으로 항미원조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중국사회주의건립과 건설에 직접 자신의 몫을 해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민권을 얻고 주인의식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재일교포의 경우 수십 년 열도에서 살았어도 국적은 여전히 한반도이기 때문에 거주국에 대한 애정이 조선족에 비해 발바닥에도 못 미친다. 그들은 거주국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어 있어 만약 한국과 일본이 축구경기를 할 경우 당연히 한국을 응원한다. 이 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서 40여 년 동안 냉전시대를 걸치면서 고국인 한국과의 문이 닫혀 있었던 것이 조선족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애정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양모가 잘 길러준 아이한테 생모가 갑자기 나타나 “너 누구 편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질문자가 상식이 없다고 비난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한국 사이 조선족의 문제는 이 사례와 같다고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이렇듯 ‘JIN’으로 무난하게 살아오던 조선족이 한국 문이 열리기 시작해서 ‘JIN’과 ‘KIM’ 사이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JIN’이냐? 아니면 ‘KIM’이냐? 예전에는 중국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거의 백 프로 중국을 응원하던 데로부터 점차 한국을 응원하는 수가 늘어가는 추세였다. 요즘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중국을 응원할 수도 있고 한국을 응원할 수도 있다. 헌데 이것은 조선족의 개개인의 취향문제만은 아니다. 조선족이 한국을 응원하면 중국이 서운해 하고 중국을 응원하면 한국이 서운해 한다. 어찌되었든 한 인간이 자기 소속된 공동체에 애정을 갖고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 인간은 행복하다. 그렇지 못한 인간은 불행하다. 지난겨울 중국에 갔을 때 연변라디오 <이 밤을 함께 합니다>를 청취한 적이 있다. 한 여인의 사연이다. 부부가 함께 한국에 와서 수년간 열심히 노력해 연길에 번듯한 아파트를 마련하고도 충분히 먹고 살만한 돈을 저금해놓았다. 천당 같던 가정생활이 남편의 잘못으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했다. 남편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귀가 벌쭉해 연변에 온 한국인 00사장한테 동업한다는 명목으로 있는 돈을 몽땅 사기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의 돈까지 빌려 밀어 넣어 빚 구렁에 빠지게 되었다. 한데도 남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졸부가 되는 꿈을 버리지 못해 아내가 “나 어쩌면 좋아요?”라는 요지로 방송국에 사연을 신청했던 것이다. 청취자의 조언목소리가 울린다. “그 동무 아직도 과학발전관을 수립하지 못하고 ······” 나는 피씩 웃음이 나왔다. 한 개인이 사기당해도 과학발전관을 들먹이다니? 남아공월드컵이 막을 내렸다. 요즘 새삼스럽게 그 청취자의 조언목소리가 자꾸 나의 귀전을 맴돈다. 아울러 그 분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자신의 소속 공동체의 이념이든 사상이든 맘속으로 받들고 정신지주가 되어 그 흐름에 따라 희로애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 분에 비해 재한조선족의 경우 ‘JIN’도 아니고 ‘KIM’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남아공월드컵 때 한국이 16강 진출이냐, 탈락이냐를 결정짓는 나이지리아와의 경기가 새벽 3:30에 열렸다. 한국인은 밤잠을 자지 않고 경기를 관람하고 함성을 질렀다. 8강 탈락이 결정되는 순간에는 선수와 함께 울었다. 이에 비해 조선족은 한국이 이기면 좋고 지면 기분이 좋지 않는 감정은 있으나 정작 한국인과 같은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울고 웃는 희로애락은 없었다. 조선족이 집결해 살고 있는 동네는 조용했고 한국인 속에 끼어 살고 있는 동네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물론 태극기를 보면 눈시울이 젖어나고 애국가를 들으면 가슴이 울먹거린다는 개별적인 열성한국사랑에 빠진 조선족을 빼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보았다. 중국이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고 우리가 한족들처럼 진심으로 서운해 할까? 그렇다면 한국응원도 그저 흐지부지하고 중국응원도 내심으로 우러나는 감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냐? 는 것이다. ‘JIN’도 아니고 ‘KIM’도 아닌 어느 공동체에도 진심으로 귀속되지 못한 인간무리의 삶은 정말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느냐? 참으로 불행하다. 마치 이젠 우리재한조선족의 삶도 어쩌면 돈벌이에만 신경을 도사리는 재일교포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재일교포는 한국응원이라는 정신적인 삶이 있지만 우리재한조선족은 그러한 정신적인 삶마저 없으니 그들에 비해 더 비참하다고 말해도 어폐가 없을 것이다.
168    중국단오절과 강릉단오제 댓글:  조회:4541  추천:22  2010-07-10
중국단오절과 강릉단오제 2005년 한국이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에 문화재로 등록신청을 했는데, 이에 대해 중국이 자기네 전통명절을 도둑질했다는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의 강릉단오제에 관해 살펴보기로 했다. 음력 5월 5일은 단오절로 이 날은 원래 위대한 애국 시인 굴원(屈原)을 기리는 날이었다. 굴원(기원전 340~278년)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을 실현 할 수 없고, 멸망해 가는 초나라를 구할 수 없음을 슬퍼하다 5월 5일에 돌을 안고 멱라수(汨羅水)에 뛰어 들었다. 강가에 있던 사람들이 사실을 알고 배를 저어가 굴원의 시체를 건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매년 이 날이 되면 강에서 용주(龍舟)를 저으며 그를 추모하고 쌀을 담은 죽통을 강에 던져 그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민간에서는 단오절에 쭝즈(粽子:대나무 잎으로 찹쌀을 싸서 찐 음식) 먹고, 용주경기를 하는 풍습이 남아있다 중국은 굴원이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결한 일자가 음력 5월 5일인데서 단오절의 유래가 분명하지만 한반도의 단오절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반도의 단오절은 먼 옛날 농경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행사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본래 한민족의 단오절은 농경문화와 관련된 제천의식에서 기원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영웅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유래가 깊은 전통 민속놀이인 강강술래가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하는 것처럼 가장 유명한 강릉단오제도 임진왜란시기에 공이 큰 범일국사를 기리는 행사에서 기인되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진행하는 것으로 변모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강릉단오제는 부족국가였던 동예 때부터 오월제의 성격으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릉단오제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고려 때부터 나타난다. 강릉지에 대관령의 승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산신제의 존재가 확인된다. 조선 초기 남효온의 기록에서는 음주가무를 곁들인 3일간의 산신제가 확인된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의 허균의 시문집인《성소부부고》에도 기록되어 있어 이미 이 시기에 강릉단오제의 대대적인 축제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산신을 모셔와 기원제를 올리는 강릉단오제의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중기 허균의 기록에서이다. 임영지에 나타나 있는 단오제의 기록은 현재의 강릉단오제와 가장 유사하다. 강릉단오제는 설화적인 요소, 불교적인 요소, 유교적인 요소에 민중의 신앙적인 요소까지 포함된 적층문화로 발전되어 왔다. 1967년 1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예능보유자는 김종군이다. 범일국사(泛日國師)가 죽어서 대관령 서낭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범일국사와 관련이 있는 여러 서낭당에서 차례로 제사를 지낸다. 강릉단오제에 관해 오청(吳晴)의《조선의 연중행사》,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44집 <부락제>, <강릉지> 등 문헌들에서 기술한바가 있지만 그 기원에 관해선 언급이 없다. 다만 대관령성황신과 산신에 대한 여러 전설이 있는데 그 성황신과 산신이 도대체 누구냐는 것조차 일치하지 않다. 강릉 현지인들은 대체로 국사성황은 범일국사이고 산신은 김유신이라고 믿고 있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천여 년 동안 숭배의 대상으로 되어왔지만 범일국사는 임진왜란시기의 사람이기에 기껏해야 400여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릉사람들이 성황신으로 모시는 까닭은 아마 그가 당지의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범일국사는 400여 년 전의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2천 년 전의 예수처럼 신비한 탄생설화와 기적이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마을의 한 처녀가 있어, 아침에 굴산사(屈山寺)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바가지 물속에 해가 떠 있었다. 처녀가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겼으나 나중에 해가 떠 있는 바가지 물을 그대로 마셔버렸다. 그런 후 처녀는 몸에 이상을 느끼고 달이 차서 남아를 분만했다. 처녀가 아비 없는 아이를 낳은지라 마을 사람들의 지탄과 가족들의 꾸지람이 있었다. 그래서 산모는 그 아이를 뒷산에 있는 학바위 밑에 버렸다. 학바위는 마치 여러 바위를 포개놓은 동굴처럼 되어버렸다. 영아를 버린 산모는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이튿날 아침 일찍 모정을 못 이겨 아이를 버린 학바위를 찾아갔다. 영아인 까닭에 밤새 얼어 죽거나 산짐승이 물어갔을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뜻밖에도 어린 아이는 잠이 들어 있었으며 학을 비롯한 산짐승과 날짐승들도 서로 다투어 아이를 감싸 따습게 해주고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누구도 감탄치 않는 이가 없었으며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 짐작을 하였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나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7세가 되니 비로소 입을 열고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 외조부는 사실대로 이야기 하고 경주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경주에 간 소년은 열심히 공부하여 국사가 되어 돌아왔으며 중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국사는 학바위에서 지팡이를 던져 꽃인 곳에 사찰을 지었으니 심복사(尋福寺)라고 한다. 범일국사는 강릉에 살았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이 났다. 국사는 대관령에 올라 술법을 쓰니 산천초목이 모두 군세로 변하여 왜군이 감히 접근치 못하고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나라에 공이 많고 향토를 보호하는데 공이 큰 국사는 죽어 대관령성황신이 되었다. 국사의 이름을 범일국사라 부르는 까닭은 해가 떠 있는 바가지 물을 마시고 낳은 데서 지어진 것이다. 대관령성황당에는 대관령국사성황과 대관령국사여성황의 이위(二位)를 사(祠)하고 있으니 국사성황이 배위(配位)인 여국사성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고 있었다. 정씨 가에는 나이 찬 딸이 있었다. 하루는 꿈에 대관령성황이 나타나 내가 이 집에 장가오겠노라고 청했다. 그러나 주인은 사람 아닌 성황을 사위 삼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어느 날 정씨가 딸이 노랑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어 곱게 단장하고 뒷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업고 달아났다. 소녀를 업고 간 호랑이는 산신이 보낸 사자로서 그 소녀를 모셔오라는 분부를 받고 왔던 것이다. 대관령국사성황은 소녀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딸은 잃은 정씨 가에서 큰 난리가 났으며 마을 사람의 말에 의해 호랑이가 물어간 것을 알았다. 가족들이 대관령성황당에 찾아가 보매 소녀는 성황과 함께 서 있는데 벌써 죽어 혼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다. 가족들은 화공을 불러 화상을 그려 세우니 소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호랑이가 처녀를 데려다 혼배한 날이 4월 15일이다. 그래서 4월 15일에 대관령국사성황을 제사하고 모셔다가 여성황사에 두 분을 함께 제사하게 되었다. 강릉단오제는 이 두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대형행사이다. 강릉단오제의 특징은 참여자 수가 수만에 달할 정도로 많고 행사일이 근 50일이나 될 정도로 길고 무당이 많이 동원되어왔다. 민속행사 치고 참여자가 수만이고 행사기일이 50일이면 규모가 엄청 커 국제적으로도 대형행사에 속한다. 단오제의 일정을 대략 적으면 다음과 같다. 3월 20일 제수용 술을 빚는다. 4월 1일 초단오, 헌주와 무악 4월 8일 재단오 헌주와 무악 4월 14일 봉영(奉迎) 4월 15일 삼단오, 봉영, 대관령성황제 및 산신제 4월 27일 사단오, 무제 5월 1일 오단오, 괫대(花蓋), 관노가면극 5월 4일 육단오, 관노가면극, 무악, 농악, 그네뛰기, 씨름대회, 체육대회 5월 5일 칠단오, 동상 5월 6일 팔단오, 동상 5월 7일 소제(燒祭), 봉송 고대한반도에서 무릇 제사에 연관된 모든 행사에 무당이 관여치 않으면 되는 일이라곤 없었다. 강릉단오제는 더욱이 산신과 성황신을 제사하는 행사이므로 무속성(巫俗性)이 강해 제의 전체가 무당에 의해 거행된다. 무당은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전달하고 신의를 사람에게 전한다. 강릉단오제에 관여한 무당은 크게는 국태안민과 강릉 내의 무재를 빌고, 작게는 신도 개개인의 제화초복을 빌어준다. 이렇듯 본래 농경문화에서 기인되었던 한반도의 단오절은 그 원 모습을 잃고 영웅을 제사하는 행사로 변모되었고 아울러 ‘節’보다 ‘祭'에 무게가 실려 있다.
167    한류의 문화기원 댓글:  조회:4371  추천:25  2010-07-05
한류의 문화기원 한반도는 일본과 함께 한자와 유교를 공통분모로 하는 중화문명권에 속한다. 하지만 일본은 신도라는 자체종교가 있고 따라서 일본인의 인간타입과 민족특징은 신도적이며 신도가 일본인의 영혼과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데 비해 한반도는 자체종교가 없는데 무엇이 한반도 인간의 타입과 민족특징을 형성케 하였을까? 다시 말해 한반도 인간의 타입과 민족특징을 형성해온 기본요소는 무엇이며 한반도 인간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쳐왔을까? 이에 관해 한국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00년 전 세계적인 석학인 중국인 고홍명은 그의 저서 《중국인의 정신》을 통해 “한 문명이 그 문명을 안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케 하고 정신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내놓아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00년 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고홍명의 문명과 인간타입관계 이론에 대해 흥미를 갖고 한반도 공동체 인간타입의 형성기원 및 민족특징에 관해 살펴보기로 결심하고 지난 수년간 이에 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려왔다. 재미있는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중국에서 문화혁명 때 불륜을 저지른 남녀에게 새끼줄 양 끝에 헌 신발을 달아놓고 그것을 목에 걸게 하고 대중비판을 하였다. 그런데 비판대회에서 한족들은 불륜을 저지른 남녀를 “따따오까아오퍼쎄!(打倒搞破靴:헌 신발을 건드린 자를 타도하자!)”고 외쳤고, 조선족은 “비람피우는 자들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그러니까 불륜이란 한 가지 같은 사실, 같은 포인트를 한족은 ‘헌 신발’로 표현하는데 비해 조선족은 ‘바람’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 언어상의 차이가 곧 두 민족 간의 문화차이를 말해주는 좋은 증거이다. 그 후부터 필자는 우리 한민족이 일상생활에서 한족에 비해 ‘바람’이란 낱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말(네가 오는 바람에 내가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럴 경우 타민족은 바람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에도 ‘바람’이요, 무엇을 희망하는 뜻에도 ‘바람’으로 표현한다. 1980년대 이북사람들과 접촉해 보았는데 그들도 ‘바람’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1990년대부터 한국인을 접촉해보니 역시 만찬가지였고 특히 한국가요에 ‘바람’이란 어휘가 굉장히 많다.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의 말 대로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논리에 따르면 우리 한민족이 일상생활과 가요에 ‘바람’이란 낱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필시 역사적인 문화와 연관성이 있을 것이고,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언어표현은 과거역사문화의 관성에서 온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신라계통의 경상도사람들이 집권하고 경상도 천하를 이루게 되자 유행가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휘가 ‘바람’이라는, 이 한 마디라는 사실은 결코 단지 우연한 잠시적 유행현상으로만 간주할 수가 없다. 국제적으로 유행가요를 분석해보아도 바람이라는 단어는 특히 우리나라가요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수천 년을 무의식적으로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토속신앙의 메모리체계의 작동으로 보아야 하며 ‘바람’이야말로 잃어버린 우리자신의 ‘야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현상을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눈이 필요하다. 즉 한 1500년 정도의 시간단위는 좀 거시적 혜안을 갖게 되면 몇 십 년 정도의 압축된 연속성의 체계로 간주할 수도 있고 해야 하는 것이다. 김범룡의 ‘바람,바람,바람’이나, 최치원의 난랑비서의 바람이나 화랑·미륵의 바람이나 《시경》의 바람이나 모두 한 가지 ‘바람’의 연속된 아키타입일 뿐이다. 한반도의 바람에 대한 고유토속신앙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바람이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신앙대상이었으며 아울러 우주의 본체로 인식되어온 인류 보편사적인 원시종교사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오운역년기(五運歷年紀)》에 반고가 우주만물로 변화한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태초에 살았던 반고가 죽어서 우주만물로 변화하였다. 숨은 바람과 구름, 목소리는 우레, 왼쪽 눈은 해, 오른쪽 눈은 달, 사지오체는 사극과 오악, 혈액은 하천, 근맥은 지리, 근육은 전토(田土), 머리칼은 성신, 피부와 털은 초목, 치골은 금석, 정수는 주옥, 땀은 비와 못, 그리고 몸의 제충(諸蟲)이 바람에 감하여 인간이 되었다. 《회남자·정신훈(淮南子·精神訓)》에 음양이신이 인간과 충수(蟲獸)를 창조했다고 적혀 있다. 옛날 옛적에 하늘과 땅이 없었던 시절에 모든 물체가 모양이 없이 희미하고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두 신이 혼생해 있었는데 하늘을 살피고 땅을 다스렸다. 그 비어 있음이 끝을 알 수 없고 도도함이 그칠 줄 몰랐다. 이리하여 곧 음과 양으로 분별되고 갈라짐이 팔극이 되고, 강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어울리고, 만물이 모양을 갖게 되고, 혼탁한 기는 충수(蟲獸)가 되고 깨끗한 기는 인간이 되었다. 《성경》창세기편에 “여호와 하나님이 진흙으로 빚어놓고 그 코 구멍에 입김을 불어넣었더니 사람이 된지라(2:7)”라는 구절이 있다. 입김이란 한국말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곧 숨이다. 그리스어로 숨을 ‘프뉴마(Pneuma)’라 하는데 ‘프뉴마’는 본래 바람을 뜻한다고 한다. 신약성서에 바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시니 나는 그의 신발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마태복음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불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발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5~8) 신화 연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성령이란 바람의 고상한 표현이라 한다. 《이역지(異域志)》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여인국이 있는데 그 나라는 순수하게 음만 있는 곳이다. 여자들이 몸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고 홀딱 벗은 채 남풍을 맞으면 바람에 감하여 잉태하고 아이를 낳는다. 이상 이야기들은 바람과 인간탄생설화에 관한 것들이다. 다음은 한국인 학자 손진태 씨의 바람과 인간의 영혼에 관한 언급을 살펴보자. 기혼설에 의하면 사람의 혼은 마치 숨과 같아서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혼은 육체의 소유주라고 한다. 즉 우리는 혼을 넋이라고 한다. 넋이란 말은 한국말로서는 무슨 뜻인지 해석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은 일본어의 주인, 소유주 등을 뜻하는 ‘主’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야쿠트(yakut) 사람들도 그들의 혼을 이츠츠(ichichi)라고 하며 이츠츠란 말은 소유주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소유주인 넋이 몸에서 빠지면 사람은 죽는다고 하며 한편으로 ‘숨’이 없어지면 또한 죽는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넋과 숨은 이명동물과 같이 생각되고 있다. 추상적인 것이 넋이면 구체적인 것은 ‘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적인 것이 넋이면 동적인 것은 숨이라 생각하여 양자가 전연 별물 같이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 일치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위 여러 문장을 통해 바람이 곧 기(氣)이며 기는 바람을 고상하게 표현한 낱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바람에 연관된 원시종교사상을 개괄해 ‘풍교’라 지칭하고 바람(기)을 우주의 본체라 인식하고 바람의 흐름에 ‘도(道)’가 있다는 이른바 풍류도를 발병하였으며, 이 풍류도는 한대(漢代)부터 하나의 고등종교인 도교로 승화되었다. 이른바 도교란 중국모계씨족사회에서 자발적인 여성숭배를 특징으로 하는 원시종교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고로한 무사(巫史)문화, 귀신숭배, 민속전통, 여러 방기술수(方技術手)를 종합적으로 받아들임과 아울러 도가의 황로지학을 기치와 이론지주로 하고 유불도의 음양, 신선제가학설 중의 수련사상, 쿵푸(工夫)경계, 신앙성분과 윤리관념을 포섭하여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구하고 장생하고 신선이 되며, 따라서 몸과 도의 합진(合眞)을 목적으로 신학화, 방술화한 다차원의 종교이다. 도교는 중국의학, 과학, 예술, 무술, 방중술, 수련, 장생술,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등의 발견과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해왔다. 임어당 선생은 그의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본질적으로는 도교를 받들어왔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풍류도가 신도로 변이되고 발전해왔다. 200년 전 사대국학자에 속하는 모토오리노리나가(本居宣長)는《고사기》와《일본서기》를 연구하고 나서 “일본역사는 하→상에로 흐르는 한신과 충성 및 봉사의 구조로 흘러왔고, 이것이 곧 일본인의 신도의 기본정신이라고 말했다.” 도올·김용옥 교수는 저서《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서 “일본인의 하→상에로 흐르는 충성과 헌신과 봉사의 구조는 카미(神)의 길이며 바람의 길이다.”라고 지적했다. 한반도에서도 바람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다. 《삼국유사》에 신라불교를 서술함에 있어서 풍교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고유토착신앙 가운데서 풍교가 으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삼국유사》에 신라의 불교를 논하는 장절에서 ‘석씨풍교(釋氏風敎)’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곧 불교를 의미한다. 신라인들은 왜 불교를 그냥 불교라 하지 않고 ‘석씨풍교’라 했을까? 신라인들은 바람을 우주의 본체라 여기고 풍교신앙이 뿌리 깊었다. 따라서 모든 외래종교를 풍교의 일종일 뿐이라 여겼다고 볼 수 있다.《삼국유사》에 ‘예의풍교, 불류우상(禮儀風敎, 不類于常)’란 구절이 있는데, ‘禮儀風敎’는 곧 공자교 즉 유교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신라인들은 유교든 불교든 모두 풍교이며 다만 그 구분을 말하고자 ‘석씨풍교’ ‘예의풍교’라 했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왕은 법흥왕(법은 불교, 흥은 발흥하고 흥기시킨다는 뜻으로서 불교를 발흥하고 흥기시킨 왕이란 의미)이며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으로 그다음의 왕을 진흥왕이라 했다. 그런데 진흥왕은 천성이 풍류(風味)적이어서 젊고 예쁜 낭자를 원화로 삼고 국선으로 받들었으며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선행시켜야 한다(幇興國, 須先風月道)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진흥왕은 ‘석씨풍교’가 나라를 일으키는데 있어서 재래의 전통 풍교보다 못하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고유토착신앙인 풍교와 풍월도를 불교와 아주 조화롭게 접목시켜 화랑도를 흥기시켜 나라를 일으켰다. 화랑도는 신라인의 정신지주이자 넋이었다. 《삼국유사》에서 화랑도의 명부를 ‘풍류황권(風流黃券)’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화랑도를 풍류도의 산물이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화랑도가 풍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최치원은 화랑역사를 회고하면서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일컬으며 그 뿌리는 선사(仙史)에 있다.”고 했다. 선사란 곧 풍교의 역사이며 그것을 또한 풍류도로 표현했다. 연세대 유동식 교수는《풍류도와 한국인의 종교사상》에서 “풍류도는 하나의 종교라 불수는 없지만 한국인의 신앙사상을 강력하게 지배해왔으며 아울러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곧 ‘멋’이다.”고 지적하였다. 필자는 한국인이 흔히 잘 사용하는 낱말 ‘맛’과 ‘판’ 및 ‘넋’도 역시 풍류도문화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 가세히데아키(加漱英明)는 저서《추한 한국인》에서 “멋이란 낱말은 중국어와 일본어에는 없고 유일하게 한국인만 사용하는 어휘이다.”고 지적했다. 필자는 그의 이 한마디 지적에서 큰 힌트를 얻었다. 즉 필자는 중한일 세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멋이란 낱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해보았으나 대충 의역은 될 수 있으나 완벽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어휘를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멋이란 낱말이야말로 한민족의 민족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어휘이다.’ 이것이 곧 나의 결론이었다. 어떤 한국학자 분은 ‘멋’이 곧 ‘맛’이고 ‘맛’이 곧 ‘멋’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필자는 ‘맛’이란 낱말에 대해서 연구해본 결과 ‘멋’과 마찬가지로 역시 한민족만이 사용하는 특수용어라는 발견하게 되었다. 중국어와 일본어에 ‘맛’에 해당되는 ‘아지(味)’, ‘워이따오(味道)’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말 맛의 뜻을 완벽하게 나타내지 못한다. 또 노래판, 춤판, 도박판, 놀음판, 술판, 오락판, 싸움판, 난장판, 개판, 심지어 X판을 포함해 한민족은 ‘판’이란 낱말을 풍부하고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 중국어와 일본어로 ‘판’을 경우에 따라 ‘場’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한민족이 말하는 ‘판’의 의미를 완벽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판을 깨다.’ ‘판이 깨지다.’ ‘판이 사라졌다.’ ‘판을 유지하다.’등등의 말을 중국어와 일본어로 번역이 쉽지 않다. 한국고전음악에 ‘판소리’라는 것이 있는데 최근 중국문학작품을 보면 ‘盤瑟里’라고 중국어로 옮겼는데 이는 음역에 따라 억지공사로 번역한 것일 뿐 한민족의 진정한 생활정서가 배어 있는 ‘판소리’ 의미가 아예 전달되지 않는다. ‘판소리’가 중국음악과 일본음악에 비해 독특한 한민족의 특성을 반영하는 민족음악이라 할 때 우리는 한민족이 얼마나 ‘판’의 문화를 중시해왔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저 ‘판’이란 무엇인가? ‘판’이란 낱말은 분명히 어떤 행위의 장을 의미하지만 중국어와 일본어에서 말하는 ‘場’과는 엄연하게 구분된다. 정확히 말해서 ‘판’은 바람이 몰고 오는 일종 유형무형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판의 문화’가 풍류도에서 유래되었음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멋’ ‘맛’ ‘판’이란 낱말이 바람문화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며 이는 곧 한민족의 풍류도의 정수이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도의 의미내용을 규정하는 말이 곧 ‘멋’이라고 지적했다. 이 말을 바꿔하면 ‘멋’은 곧 풍류도의 기본정신이며, 풍류도의 기본사상이며, 풍류도의 기본 넋이다. 풍류도가 고대한민족의 기본종교사상이었다면 넋은 곧 ‘멋’이며 ‘멋’은 곧 한민족의 넋이다. ‘멋’을 한민족의 넋이라 말하는 것은 한민족은 수천 년 동안 ‘멋’에 대한 추구를 통해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내성외왕이란 말은 본래 <장자>에서 유래되었다. 장자는 인간의 이상적 경지가 곧 내성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중국유교비평가들이 지적한바와 같이 중국인은 내성에 대한 추구에만 치중해왔을 뿐 외왕을 홀시해왔기 때문에 중국인은 외모가 초라해보이게 되었다. 중국인은 확실히 내성은 강하지만 외왕이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인도 내성은 강하지만 외왕은 중국인에 비해 나으나 한국인에 비해 조금 떨어진다.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멋’에 대한 추구를 통해 내성도 다지고 외왕도 장식해왔다. 세상에 완전완미한 사물이 없듯이 한민족의 내성외왕은 곧 내성보다 외왕 쪽에 무게를 더 두어왔다. 그래서 속보다 겉을 더 챙기는 관습이 지속되어왔다. 단군신화에서 홍익인간사상이란 고귀한 문구를 ‘멋’의 내성에 대한 추구라 이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확실히 기타 민족에 비해 매사에 사리가 밝다. 조선족이 사리가 밝은 것은 곧 홍익인간사상의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조에 들어서 유교의 영향 때문에 ‘멋’은 외왕보다 내성 쪽에 기울려졌다. 당시 유교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겉으로 드러나는 ‘멋’보다 내심의 ‘인(仁)’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이러저러하게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이 서로 엇바뀔 때가 있었으나 대체로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 추구가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들어왔다. 한민족의 외왕에 대해 조금 더 논의한다면 한민족은 겉으로는 멍청이가 매우 적어 보인다. 이는 상대적으로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곧 실속 없이 겉만 꾸미는 내빈외화라 할 수 있겠으나 긍정적인 시각에서 말하자면 곧 한민족은 상향의식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의 이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의 추구가 한민족으로 하여금 민족정체성을 갖게 만든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한민족은 모든 사물을 ‘멋’을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민족은 일본인을 ‘쪽발’이라 부르고 중국인을 ‘때놈(汚垢)’이라 한다. 일본인은 중국인을 ‘지나인(支那人)’이라 부르고 조선인을 그냥 ‘죠센징’이라 했다. 물론 ‘지나인’은 중국이 이미 늙었다고 얍잡아 보는 호칭이고 ‘죠센징’은 힘없고 가난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호칭이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를 볼 때 한민족이 타민족을 평가해 비하하는 호칭에 비해 훨씬 신사적이다. 중국인은 일본인을 ‘작은 일본(小日本)’이라 부르고 조선인을 ‘까오리빵즈(高麗捧子:고려 몽둥이)’라 한다. ‘작은 일본’이란 곧 일본은 사람도 작고 땅도 작고 나라도 작고 인심도 야박하다는 등등의 뜻을 나타내는 호칭이며 조선인을 ‘까오리빵즈’라 하는 것은 아마 옛날에 고려인(고구려인)과 싸울 때 고려인들이 몽둥이를 잘 써 혼났던 모양인데 이로서 유래되었다. 아무튼 중국인이 타민족을 평가하는 뉘앙스도 한민족에 비해 많이 점잖은 편이다. 한민족이 타민족을 평가하는 호칭이 매우 신사적이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돌이켜야 할 것은 곧 한민족은 ‘멋’을 통해 타민족과의 특징의 구분을 부각시키려는 데서 비신사적인 호칭이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내세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다름이’ 곧 ‘멋’에서 유래된 것이며, 아울러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든 주체성과 정체성이다. 이 ‘다름이’ 곧 한민족이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았어도 꿋꿋이 살아남게 된 가장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왔던 것이다. 중국이란 거대한 문화용광로 속에서도 조선족은 뚜렷한 교리교의가 있는 자체종교가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민족정체성을 잘 지켜온 것이 곧 ‘멋’에서 유래된 ‘다름이’ 크게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강력한 종교를 갖고 있는 회족(회교도:무슬림)마저 한족과 통혼이 잘되고 있는데 비해 조선족은 한족과의 통혼이 매우 드물다. 한족은 조선족과의 통혼을 원하지만 조선족부모들이 만약 자식이 한족과 연애를 하면 망종으로 취급할 정도로 통혼을 반대한다. 그 주유 이유가 바로 ‘우리(조선족)는 당신(한족)들과 멋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한민족의 고유한 ‘멋’ ‘맛’ ‘판’ ‘넋’ ‘얼’의 문화로서 이미 중국대륙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았다. 이 멋에서 유래된 ‘다름이’ 비록 한국 내에서는 이러저러하게 역사적으로 당파싸움도 유난히 많았고 지금도 역시 영남과 호남을 대변하는 당파싸움을 비롯한 사회 각 영역에서 갈등이 심각하게 드러나게 만들고 있다. 허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다름이’ 곧 한민족이 타민족과의 구분을 부각시켜 일치 단합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대한민국을 세상에 크게 홍보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 예하면 1997년 말 IMF 직후에 전체 국민이 동원되어 장롱 속의 금붙이를 나라에 바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2002한일월드컵> 때에는 7백만의 붉은 악마가 세상을 또 한 번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그 힘이 어디서 왔을까? 필자는 그 힘이 곧 한국인의 특유한 ‘멋’과 ‘판’에서 온 신바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그 어떠한 종교도 그 어떠한 문화도 <2002한일월드컵> 때에 한국인이 세상에 보여주었던 그러한 멋진 장관을 연출해내지 못했다. 세상은 그때 그 사건 때문에 크게 놀랐으며 대한민국을 크게 부러워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멋’을 이미 엄마의 언어를 통해 배웠고 몸에 배였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힘의 표출은 나라가 가르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단군시대부터 ‘멋’에 대한 터득의 결과이며 엄마의 언어를 통해 배우고 실천한 결과이며 한국인의 몸속에 깊이 배어 있는 신바람이 표출된 결과이다. 만약 외국인이 한국과 한국인을 알려면 반드시 ‘멋’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중국인을 알려면 반드시 도교를, 일본인을 알려면 반드시 신도를 알아야하는 이치와 같다. 만약 일본문명을 독자적 문명으로 취급하는데 동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도리로 ‘멋’이란 독특한 문화도 역시 독자적 문명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멋’ ‘맛’ ‘판’ ‘넋’ ‘얼’ ‘신바람’이야말로 한류의 문화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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