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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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안쪽(비연변)이 왜 안쪽인가? 댓글:  조회:8352  추천:6  2012-07-07
안쪽(비연변)이 왜 안쪽인가?   수년 전 CCTV춘절만회에서 조본산과 송단단의 소품이 인기가 좋았는데 조본산이 秋波를 가을의 시금치라고 말해 시청자들로 하여금 웃음보가 터지게 했다. 개그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秋波를 가을의 시금치라는 식으로 엉뚱하게 풀이해도 무방하다. 개그의 기교는 어찌 보면 짖굳은 말장난으로 본래의 뜻을 벗어나 엉뚱하게 표현하면 할수록 매력이 넘친다. 칼럼은 개그가 아니다. 엉뚱하게 풀이하는 것은 절대 금물인줄 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개그와 같은 칼럼을 접하게 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요즘 동북아신문 온라인에 이란 제목으로 된 칼럼이 올라 있는데 한 편의 개그를 보는 것 같았다. 이란 칼럼의 서두를 보자. “우리 연변사람들은 연변 밖의 쪽을 ‘안쪽’이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 스스로 ‘바깥쪽’이라는 말이 되겠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우리에게는 변두리의식 내지는 소외의식이 앙금처럼 서려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나는 우리 ‘연변’의 한자어새김을 음미해보며 이런 앙금을 녹여본다. 연변(延边)—변두리를 넓힌다, 어쩌면 우리는 확장주의. 사실 우리의 꿈은 저 푸른 하늘로 나래치거늘.” 저자는 안쪽과 연변을 主와 外, 중심과 변두리란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완전히 개그다. 1860년대부터 함경도 조선인들이 먼저 두만강을 건너 희망의 땅에서 자리 잡은 곳이 곧 연변이다. 그 뒤로 황해도 평안도 조선인이 처음에 두만강을 건너왔으나 워낙 연변이란 곳은 산이 많고 개간할 땅이 적어 조선과 더 먼 곳, 이른바 안쪽으로 더 안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변을 제외한 길림성 내 타지방과 요녕성 일부 지역이다. 1930·40년대 경상도 조선인이 뒤늦게 만주진출하다 보니 연변과 길림성 내 타지방과 요녕성 일부 지역에 발붙일 곳이 여의치 않아 더 안쪽인 흑룡강성의 허허벌판에 짐을 풀었다. 연변사람들이 연변을 제외한 타지방을 안쪽이라 부르게 된 것은 연변은 지정학적으로 친정과 가깝고 타지역은 친정과 거리가 멀며 중국지리를 따지면 연변에 비해 안쪽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안쪽이라 불렀던 것이다. 안쪽이란 개념이 처음엔 순수하게 지정학적 논리에서 생겨났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의식상 이질적인 요소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연변과 비연변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연변사람들은 안쪽사람들에 비해 우월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연변은 지정학적으로 친정과 가까워 민족문화 차원에서 우월의식을 갖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후 정부의 정책혜택에 의해 연변은 대학, 출판사, 방송국, 극단 등 민족문화의 본산지로 자리매김하면서 우월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지정학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구비례를 따질 때 연변은 조선족이 많아 한어를 모르고도 삶을 영위할 있어 민족적인 자부심도 강했다. 안쪽은 친정과 거리가 멀고 또 인구비례를 따질 때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다 보니 본토민의 문화에 많이 물 젖었는데 연변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질적인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연변사람들은 한족과의 통혼을 마치 집안이 태풍을 맞는 것처럼 강력하게 거부했다. 심지어 한족학교를 다닌 조선족처녀를 며느리 삼기를 꺼려했다. 한족학교를 다닌 처녀애들이 예모예절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연변과 비연의 이질점을 이런데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 말하자면 연변사람들이 칼럼의 저자가 지적한바와 같이 스스로 바깥이라고 인식한 것이 아니라 민족문화본산지이자 조선족의 중심이란 인식과 이에 따른 우월의식이 강열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연변의 지식인 수명이 한국에 왔는데 근사한 음식점에서 식사했고 그 때 그들이 서빙아가씨 보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흑룡강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후진 곳에서 왔구먼.”라는 비하식의 말을 던졌다. 즉 안쪽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찮게 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사건을 보면 연변사람들이 자신을 밖이거나 변두리의식이 아니라 스스로 主와 중심의 우월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민족 한 인간집단을 짚을 때 물론 다양한 시각으로 풀이가 가능할 수 있으나 인류문화학적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필자는 수년 전 연변대학을 포함한 조선족문화인들의 인문학적 지식이 딸린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여 되지게 욕을 먹었는데 요즘 이란 칼럼을 보고 저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44    지저분한 동포들의 쓰레기처리 댓글:  조회:6761  추천:7  2012-06-23
지저분한 동포들의 쓰레기처리   “동포 여러분, 여러분들이 쓰레기처리가 지저분하여 지역민(한국주민)과 갈등을 빚고 있는데 제발 쓰레기를 잘 처리해 주세요. 두 손 모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난 4월 21일 이주동포정책연구소가(소장 곽재석) 주관하고, 서울구로구청의 주최로 열린 회의에서 이성 구로구청장의 축사내용 중 한 대목이다. 구로구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절대다수가 동포이고 그 회의주제에서 말이 외국인이지 실제로 참석자 300여 명이 전부 동포일색이었다. 동포들이 얼마나 쓰레기처리가 지저분했으면 구청장이 세 번이나 반복하여 부탁했을까? 실제로 동포밀집지역인 가리봉시장 골목과 남구로역 부근 여기저기서 검은 비닐봉투 혹은 아무 봉투에 넣은 쓰레기들이 쌓여 있어 파리가 날아다니고 악취가 풍겨지고 있다. 대림동을 비롯해 기타 동포밀집지역도 지저분한 쓰레기처리사정은 비슷한 상황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전날 오전 9:30 가리봉2동에서 규격외의 아무 봉투에 아무렇게 넣은 쓰레기를 전문 실어가는 구로구청의 트럭을 만났다. 공무원의 말에 의하면 가리봉1·2동, 구로2동과 4동·6동이 가장 심각한데 매일 평균 한 차 내지 두 차씩 가져간다고 한다. 한 차에 네 사람씩 붙어 있었다. 인건비도 그렇거니와 별도로 가져가는 쓰레기 소각에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요 몇 년 사이 서울에서 새로운 동포밀집지역이 생겨날 때면 지역민들이 거세게 반발한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언론에 보도되었다. 반발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중국인(한국인은 동포들을 중국인이라 표현함)이 지저분하여 환경을 어지럽힌다는 것인데 지저분한 쓰레기처리가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중국에선 쓰레기를 검은 봉투든 무슨 봉투든 아무봉투에 넣어 아파트 자기 집 입구에 내놓으면 청소부가 알아서 가져간다. 한국은 일반쓰레기, 음식물쓰레기, 재활용쓰레기 등 세 가지로 분리한다. 동네슈퍼에서 여러 가지 표준(종량제)쓰레기봉투를 판매한다. 지역주민들은 반드시 표준(종량제)쓰레기봉투를 구매하여 분리에 따라 처리하고 월·수·금 혹은 화·목·토로 나눠 가져간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말로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뜻이겠다. 동포들은 고국한국에 왔으면 한국법을 준수하고 한국사회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 중국에서 하던 생활습관을 한국에 와서 그대로 답습한다면 한국인으로부터 무시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에서 동포들이 지저분하게 던진 쓰레기를 처리하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다. 국민의 혈세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왜 불만이 없겠는가? 동포밀집지역 한국지역민들 말하기를 “쓰레기 때문에 이러저러하게 동포들한테 가르쳐도 보고 충고도 해보고 심지어 야단도 쳐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동포들은 고국 한국에 이런저런 서운한 감정을 갖기 앞서 내가 진정 고국을 사랑하거나 존중하고 있는 걸까? 이런 반성부터 선행되어야 옳지 않을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고국만을 탓하는 처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43    재한조선족사회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다 댓글:  조회:6305  추천:0  2012-05-01
재한조선족사회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다 공부의 붐 바람직한 현상   “농어촌에 중국동포일군이 없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려고 학원에 몰려갔기 때문이라 합니다.” 모 방송국 보도내용이다. 농어촌뿐 아니다. 회사, 건설업, 음식점 등 중국동포 근로자가 많았던 직장들이 요즘 들어 자리가 비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역시 임시 휴가를 내거나 심지어 직장을 그만두고 학원에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동포사회에 눈길을 돌리고 있던 학원들이 기술교육생입국저조로 불경기였다가 요즘 기능사자격증 때문에 호황을 맞고 있다. 얼마나 많은 중국동포가 기능사자격증취득에 관심이 있는 걸까? 지난 4월 15일 본지가 법무부 F-4확대정책설명회를 개최한 이후로 현재까지 약 2천여 명이 상담을 받았다. 2006년 재입국프로그램 실시 때와 비슷하게 붐볐다. 이곳저곳에서 정책설명회를 개최하고 학원들이 전단지를 뿌리고 있다. 동포밀집지역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비자변경이다. 절대다수가 귀국하기를 꺼려 어떻게 하나 한국에 남으려고 하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공부에 뛰어든다. 대다수가 연령대가 높아 수십 년 놓았던 공부를 하자니 실로 고역이다. 그래도 고역을 감내하고라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다. 우리 선조들이 우리한테 물려준 공부란 낱말은 중국어 ‘工夫’에서 유래되었다. ‘工夫’란 어떤 높은 차원의 경지를 뜻한다. 일본인은 공부를 벤쿄(べんきキょウ)라 하는데 한자로 ‘면강(勉強)’ 이라 적는다. 이 ‘면강(勉強)’이란 어휘는 글자 그대로 억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일본인은 공부를 일종 억지행위라고 간주한 것이다. 어찌 보면 공부는 억지로 하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사람은 공부한다는 것이 실로 죽을 맛이 나는 억지노릇이다. 특히 요즘 재한조선족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기능사자격증취득 때문에 학원에 몰려드는 붐은 우리말 ‘工夫’보다 일본말 ‘勉強’이라 할 수 있다. 사정은 이해 가지만 ‘勉強’으로 출발하여 ‘勉強’으로 끝난다면 실패이다. ‘勉強’으로 출발하였으나 ‘工夫’로 전환되지 못하면 성공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록 ‘勉強’으로 출발하였으나 하다보면 즐겁고 재미있는 ‘工夫’로 바뀌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工夫’가 되었든 ‘勉強’이 되었든 단순노무일군이 주력이던 재한조선족사회에 배움의 붐이 일어났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남편이 주말이면 친구 만나 술을 마시고 허송세월을 보내던 것이 요즘 학원에 나가기에 술을 마시지 않아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한 중국동포 여성의 말이다. 어떤 방식이든 배움은 좋은 일이다. 재한조선족사회가 변화하고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는 물결을 일으킬 수 있다. 미국의 문명평론가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
42    5천만이 2백만을 두려워하다니! 댓글:  조회:7974  추천:3  2012-04-30
5천만이 200만을 두려워하다니!   요즘 5천만의 대한민국이 200만 조선족을 두려워하는 희한한 일이 생겼다. 사연은 이렇다. 2011년 10월 말경 재한조선족장기협회가 백두산클럽을 조직해 제2회햇터배방송장기대회에 출전하여 한국클럽들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조선족장기가 한국대회에 참가하는데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족장기실력이 너무 뛰어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족장기수준이 높아 한국대회에 참가하면 찍어놓은 우승이기에 한국클럽들이 기권하겠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조율이 우습지만 그래도 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즉 2011년 1월 30일 제1회재한조선족장기대회에서 우승한 한성걸 선수와 같은 해 9월 4일 제2회재한조선족장기대회에서 우승한 김철 선수 둘을 동시 출전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백두산클럽이 계속 주장을 굽히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면 대회가 무산된다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대회에 참가했고 한국 측의 제의를 받아들이고도 백두산클럽이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장기계에 어떻게 조선족장기수준이 상당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을까?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장기협회의 주최로 중국 하얼빈에서 세계장기대회를 개최하였다. 한국프로선수들이 국내에서 선발을 거쳐 참가였는데 우승부터 3등까지 조선족이 휩쓸었고 4등에 재미교포 젊은이 하여명 선수의 몫이었고 한국프로선수는 5등 그리고 나머지 8강 안에 든 선수는 역시 조선족이었다. 이 결과가 한국장기채널인 브레인TV에서 수차례 재방송으로 한국장기애호가들이 보게 되어 조선족장기실력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제2회햇터배방송클럽대항전에 조선족클럽이 출전하는 것을 한국클럽들이 두려워했던 것이다. 오는 5월 초 제3회햇터배방송클럽대항전이 열린다. 우스운 것은 전번 대회에서 우승한 클럽을 이번 대항전에 참가 자격을 박탈한단다. 즉 조선족선수로 묶어진 백두산클럽이 대회에 나오지 말라는 것이다. 이유가 바로 전번 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이란다. 소 웃다가 꾸레미가 터질 일이다. 브라질이 우승했다고 차기 월드컵에 나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전번 우승 팀이 차기 대회에 출전 못한다는 규정은 아마 세계스포츠역사에 대한민국 말고 또 있는지? 묻고 싶다. 재한조선족장기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조선족장기애호가들의 정서를 고민해 한발 물러섰다. 다시 말해서 그럼 전번 우승팀의 5명의 선수를 전부 빼고 새로운 선수로 새로운 팀을 만들어 참가하겠다고 하였다. 주최 측이 신청을 접수했다. 그런데 결과는 선정에서 탈락이란다. 조선족장기가 한국클럽대항전에 참가자격을 박탈당한 것이다. 잘못이라면 조선족장기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 잘못이다. 이렇게 달리 할 말이 없다. 해외교포가 750만 명이고 그 중 200만 명의 조선족이 고국의 민속 문화를 잘 보존해온 사실에 대해 한국사회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장기가 민속 문화로 가장 잘 보급되어왔고 조선족이 한국스포츠에서 한국인과 막상막하 수준에 이른 것은 오직 장기뿐일 정도로 조선족장기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필자는 장기인이 아닌 주제에 재한조선족장기대회를 두 차례 개최하였고 조선족장기협회도 (사)대한장기협회 하나의 지회로 가입되어 법적인 기구로 성장시켰다. (사)대한장기협회의 도움이 컸기에 차기 제3회조선족장기대회에 한국클럽들의 2~3명 선수를 선발하여 대략 50명의 한국선수를 출전시켜 조선족과 한국인의 문화교류에 발판을 마려하려는 방안을 협회에서 이미 통과시킨 사안이다. 조선족장기협회는 이토록 너그러운 자세로 임하는데 거꾸로 5천만의 대한민국이 200만의 조선족을 배척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정말 유감이다.   재한조선족장기협회 김정룡 회장  
41    새해 중국동포사회 지적변화 바란다 댓글:  조회:7830  추천:38  2012-01-02
2012년 임진년은 흑룡의 해가 되며 60년 만에 한 번 찾아온다. 60년 동안 승천의 날을 기다린 2012년 임진년 흑룡의 해, 용이 꿈틀거리고 있다. 재한중국동포는 용기와 비상, 희망, 성취, 미래를 상징하는 흑룡과 더불어 모두 힘찬 상승의 기운을 가지고 새해 새롭게 출발하여 지적변화를 일으키기를 바란다. 본지가 말하고자 하는 지적변화의 요지는 선진적인 주민의식수립이다. 주민의식은 시민의식보다 그 의미가 협소하다. 이를테면 시민의식은 그 나라 국민으로서 병역을 포함한 모든 의무를 갖고 참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주민의식은 거주지에서 반드시 지켜야 법률은 물론이고 윤리도덕 및 사회질서를 잘 준수하고 봉사와 기부에 이바지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재한중국동포는 90일 이상 장기체류자로서 등록증을 발급받고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임시주민이다. 임시란 표현이 애매하지만 어찌되었든 거주국 주민이라면 주민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지난 20여년의 코리안드림을 돌아보면 돈벌이가 주된 목적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간다는 생각만 갖고 있어 우리에겐 주민의식이 매우 취약했다. 그리하여 법을 지키지 않고 폭행을 비롯한 각종 범죄와 심지어 한국경찰을 우습게 여기고 공무집행방해죄를 범하는 사례도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공중도덕을 지키는 것이 주민의식 중 중요한 일부분인데 재한중국동포는 중국에서의 생활관습이 몸에 배어 한국에서 공중도덕의식이 매우 취약하다. 담배꽁초를 아무 곳에나 버리고 쓰레기를 길가에 버리고 술을 마시고 노상방뇨를 서슴지 않는다. 중국동포가 밀집된 가리봉과 대림동일대엔 아침부터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 나타나 한국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이 두 곳엔 주말이면 택시가 잘 서지 않으며 심지어 택시가 이곳을 지날 때면 안으로 문을 잠궈 버리는 경우도 있다. 술주정뱅이들이 달리는 택시 문을 열어 재껴 사고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중국에서 살아오면서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은 것이 습관이 되어 한국에서도 무단 침입하여 횡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26세 되는 이씨는 술에 취해 설마 차가 와서 나를 박겠느냐는 ‘배짱’을 부리면서 대로를 가로질러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꽃 같은 젊은 나이에 반신불수신세가 되어버렸다. 일방적인 책임이기에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선진적인 국가는 봉사와 기부문화가 잘 이뤄지고 있는데 비해 재한중국동포는 봉사와 기부문화가 몸에 스며들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부분적이나마 봉사와 기부활동에 참여한 재한중국동포들이 있었다. 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가 클로버봉사단을 결성하여 광진구노인종합복지관 치매환자센터에서 한국인을 위한 정기봉사를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중국동포한마음협회, 재한동포연합총회, 귀한동포연합총회 등 다수 동포단체들에서 각자 봉사단을 설립하여 동포사회와 한국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를테면 태안기름유출현지봉사, 불이웃돕기봉사, 노숙자급식봉사, 각종 체육대회봉사, 용양원청소, 및 위문공연봉사, 농어촌지원봉사, 길거리청소봉사 등 한국 사회에서의 봉사법위를 확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봉사문화가 전반 재한중국동포사회에 하나의 관습으로 몸에 배기까지는 거리가 아주 멀다. 기부에 대한 인식도 무에서 유에로 발전하고 있다. 꽃망울회, 중덕장학재단, 진달래회, 나뭇잎 사랑 등 중국동포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생기고 그에 동참하여 기부하는 동포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기부문화가 전반 재한중국동포사회에 확산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선진적인 주민으로 살아가려면 거주국에서 상기 법과 윤리도덕을 잘 준수하고, 사회질서를 잘 지키고, 봉사와 기부문화가 몸에 배는 획기적인 인식전환이 있어야 한다. 2012년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60주년, 한중수교 2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특별한 해이다. 재한중국동포사회는 임진년 흑룡의 기운을 타고 주민의식의 획기적인 지적변화로 보답하기를 기대해 본다. 중국동포타운신문 사설 김정룡    
40    재한조선족사회 리더가 필요한 이유 댓글:  조회:10180  추천:0  2011-12-20
재한조선족사회에 리더가 필요한 이유     사람들은 흔히 재한조선족사회를 흩어진 모래알과 같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40만 명의 재한조선족은 목자가 없는 양떼와 같이 고단한 삶으로 방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리더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리더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결과가 빚어진 데는 물론 조선족이 내부 단합이 되지 않은 이유가 있겠으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잘못된 한국정부동포정책 때문이었다고 지적하여도 어폐가 없을 듯하다.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를 계기로 조선족이 한국에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동포인 조선족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없어 절대수가 불법체류신분으로 한국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한국인이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 무리 범죄자집단이었다. 한국인 고용주들이 조선족한테 마땅히 지불해할 임금도 불법체류범죄자로 얕잡아보고 체불했고 산재를 당해도 방치해 두기가 일쑤였다. 조선족은 불법체류신분 때문에 임금체불을 비롯해 각종 불이익을 당해도 신고할 수가 없어 인권이 사각지대에 처해 있었다. 고국을 찾은 조선족이 인권문제가 바닥에서 헤매게 된 이유는 한국정부가 조선족을 동포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없이 그저 외국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들어 한국 민간단체(주로 교회)가 적극 나서 조선족문제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보고 조선족을 외국인이 아닌 동포로 취급해야 한다는 청원을 정부에 반영하였다. 아울러 재한조선족인권문제해결에 많은 힘을 쏟아 부었다. 조선족이 스스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국 민간단체들이 나섰다. 덕분에 부분적으로나마 인권이 상승되었고 동시에 조선족도 한국 땅에서 합법으로 체류할 수 있는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았고 자유왕래를 보장할 수 있는 방문취업비자와 재외동포비자발급도 가능하였다. 한국 민간단체들의 이러한 노력에 감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 민간단체들의 오너가 필경 한국인이기 때문에 조선족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젠 조선족이 스스로 나서 조선족문제를 풀어갈 시기가 도래하였다. 재한조선족사회는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재외조선족사회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미국이나 일본의 조선족사회는 재한조선족사회에 비해 처음부터 안정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재한조선족사회가 절대다수 10년 넘게 불법체류집단으로 거주한 사례는 세상에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산적한 문제들이 태산 같다. 즉 아직도 재한조선족인권문제가 풀어야할 큰 숙제로 남아 있다. 또 조선족1세 가운데 한국국적을 회복한 수가 2만 명이 넘고 이들은 모두 고희가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저렴한 임대아파트분양 같은 혜택이 전혀 없어 비좁고 숨이 막히게 탐탐한 콧구멍만큼 한 지하, 반지하방에서 생을 마감하게 생겼다. 고국국적을 회복한 이들의 삶이 비극으로 끝날 것은 야밤에 불 보듯 빤한 일이다. 그리고 정부예산의 혜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경로당이 대림2동 시내길 경로당이 유일하다. 재한조선족이 40만 명이나 되는데 정부예산은 달랑 1,200만 원 뿐이다. 한 사람의 일 년 노임도 안 되는 액수다. 정말 있으나마나다. 정부는 그래도 재한조선족한테 정부예산을 배정했다고 생색을 낼 것이다. 요 몇 년래 정부의 동포정책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는데 대해 이의가 없다. 하지만 정부가 영향력이 미칠 새로운 정책을 제정할 때, 즉 기술교육을 비롯한 굵직한 정책을 마련할 때 재한조선족언론 및 단체장들을 불러 머리를 맞대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조선족의 특성을 무시하고 나름대로 주먹 식 구구로 결론짓다보니 부작용이 엄청 커 불만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 한국정부의 동포정책은 일관성이 없이 자주 변하고 있어 동포들한테 많은 불편을 안기고 있다. 한편 한국인이 하지 못할 일들, 이를테면 조선족이 스스로 자질을 높여 한국 사회에 녹아들고 한국의 선진문화를 습득하여 한국생활을 무난히 보내고 나중에 중국에 귀국하여 여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하려면 재한조선족사회에 꼭 리더가 있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이나 일본조선족사회는 굳이 리더가 없이도 그런대로 잘 굴러가고 있지만 재한조선족사회는 특수하게 풀어야할 문제가 산적해 있어 조선족이익을 대변하여 목소리를 내고, 앞으로 재한조선족사회발전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덕망이 있고 학식이 있고 자질이 높고 헌신과 자아희생정신이 있고 금상첨화로 일정한 재력을 겸비한 리더가 필요하다.
39    조선족=한국인, 말이 되나? 댓글:  조회:14971  추천:52  2011-12-19
지구상의 수많은 민족 중에서 유태인과 우리민족의 호칭이 복잡하다. 이를테면 유태인의 발상지는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가나안, 이스라엘, 유대, 주이시, 팔레스타인 등 다양하게 부르고 한반도를 코리아, 조선, 한국 등 여러 가지로 부르고 전체 우리민족은 조선민족, 한민족, 고려인, 조선족 등 다양한 호칭을 갖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불러야 하나 헷갈린다. 이념문제도 개입되어 더욱 복잡하다. 남한 사람은 조선민족이란 호칭을, 이북 사람은 한민족이란 호칭을 죽기살기로 싫어한다. 샌드위치에 있는 조선족은 가운데서 눈치보기작전에 급급하다. 비극이다. 우리민족 호칭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렇다. 전체 우리민족을 아우르는 호칭을 조선민족이라 할 수도 있고 한민족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그리고 한국인의 입장에서 해외동포를 말할 때 재미교포, 재일교포, 고려인, 중국동포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러나 한국인도 조선족이라 부를 수 있다는 주장엔 반대이다. 조선족이란 개념은 중국에서 56개 민족 중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등록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을 비롯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우리겨레와 혼돈하여 사용할 수 없다. 아울러 조선족은 우리 겨레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광의적인 의미로 조선족을 조선민족이라 부르는 것은 어폐가 없다. 이 주장은 조선족학자들이 한국에서 학술포럼 때 수차례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도 글을 씀에 있어서 쩍하면 사전을 들먹이기를 좋아하는 유식한 분이 한국국어사전이 어떻고 조선어사전이 어떻고 중국어사전이 어떻고를 들먹이면서 한국인도 조선족이라 부를 수 있다는 ‘횡설수설’을 발표하여 일부 독자들이 조선족=한국인 식으로 혼돈하고 있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틀에 박힌 권위 외에 이 세상엔 관념법과 관념상식이란 것이 있다. 이를테면 한국에선 부부가 이혼하면 자녀의 친자행사권을 보통 부에게 귀속시킨다. 법적으로 제정된 것은 아니나 유교적 관념법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 같은 사건도 선의적인 범죄와 악의적인 범죄의 차이에 따라 처벌이 달라진다. 상식도 마찬가지이다. 틀에 박힌 상식 외에 관념상식이 있다. 오늘날 만주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인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머리에 굳어진 관념에 의해 동북삼성을 여전히 만주라 부르는데 이것이 곧 관념상식이다. 조선족을 포함한 우리민족 여러 호칭에 대해선 사전적인 해석보다 관념적인 상식을 믿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수가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38    재한조선족사회에 리더가 없는 이유 댓글:  조회:8457  추천:6  2011-12-02
사람들은 흔히 재한조선족사회를 흘어진 모래알과 같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한겨레신문 차한필 기자가 수년 전에 “재한조선족사회는 리더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는 요지의 글을 발표하였다. 최근 들어 한국과 중국조선족사회 지성인들 여러 분이 차한필 기자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필자에게 재한조선족사회에 리더가 없는 이유를 물었다. 조선족의 한국바람이 어언간 20여년이 흘렀다. 장기체류 40만 명, 귀화한 조선족출신까지 합치면 53만 명이 한국에 살고 있다.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에 맞먹는 인구이며 한국으로 말하면 중소도시인구에 해당된다. 이렇듯 중소도시를 이룰 만큼 한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재한조선족사회를 이끌어 나아갈 리더가 필요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리더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리더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리더가 되려면 지도력, 호소력, 설득력, 포옹력 등 리더십을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덕적으로 검증된 자로서 덕망이 높아야 하고 학식도 있어야 하고 주머니가 두툼하게 재력도 있어야 한다. 게다가 헌신과 봉사 및 이에 따르는 자아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 과연 이런 조건을 구비한 인재가 있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재한조선족역사가 극히 짧은 것이 치명적인 이유이다. 코리안드림이 20년이 넘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정부가 조선족 합법체류를 허락한 것은 불과 몇 년밖에 안 된다. 1990년대 초부터 한국에 와서 석·박사공부를 한 조선족 수가 꽤 있었으나 그들은 한국정부가 체류를 허락하지 않아 전부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중앙민족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박광성 씨는 서울대에서 박사공부를 마치고 본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채용하려는 데 한국정부가 체류를 허락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귀국한 것이 5년 전의 일이었다. 조선족출신 석·박사들이 한국에 남아 활동할 수 있은 시기가 2007년 말부터 재외동포비자(F-4)가 실시된 이후라고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일본에는 조선족출신 석·박사들이 학계, 언론, 재계 및 도요타를 비롯한 글로벌회사들에서 중견 인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쟁쟁한 인재들이 수두룩한 데 비해 한국의 학계, 언론, 재계 및 삼성 같은 글로벌회사들에서 중견 인력으로 활동하는 쟁쟁한 조선족출신 인재들이 없는 실정이다. 현재 일본에는 5만3000여명의 조선족이 체류하고 있고 그 가운데 33%가 유학생이다. 일본에서 취업한 이는 27%, 상당수는 유학 직후 현지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최고 학력의 엘리트들이 재일조선족사회의 주류를 이룬다. 80년대 초반 집권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유학생 10만 명 유치 정책’을 추진했고 그 혜택을 조선족이 톡톡히 누린 결과이다. 일본은 또 10여 년 전부터 재중일본회사에 취직하여 두각을 나타낸 조선족인재들을 일본본사에 불러들인 사례가 수두룩하다. 그들은 일본에서 500만 엔 연봉을 받고 있고 일본경력 10년이면 아파트도 구입하는 등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재일조선족사회는 엘리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비해 재한조선족사회는 3D업종을 비롯한 노무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왜 이런 상반된 결과가 빚어졌는가? 조선족출신 한국유학생과 일본유학생을 비교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차이가 크다. 현재 재일조선족유학생 수가 2만여 명인데 비해 재한조선족유학생 수는 3천 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졸업한 대학을 놓고 봐도 재일조선족유학생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을 비롯해 중국 명문대 출신이 많은데 비해 재한조선족유학생은 연변대학을 비롯한 일반대학출신이 많다. 연변대학출신은 한국유학이 여러모로 적성에 맞을 수 있다. 그러나 고국인 한국은 조선족출신유학생을 달갑게 맞이하지 않았다.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OOO 교수는 1994년 한국에 유학 왔고 당시 한국어시험을 치렀는데 불합격을 맞았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생이 한국어시험에 낙방이라니? 아이러니한 것은 한국어수준이 바닥인 한족들을 합격시키면서 조선족한테 태클을 걸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상열 교수가 연변대학에서 배운 것은 조선어이지 한국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선어고 한국어고 모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같은 민족 언어인데 무슨 말이냐? 답은 빤했다. 남북분단 이념잔재의 영향이었다. 그 영향이 2000년대 중후반까지 미쳐 조선족출신 석·박사의 한국체류를 불허했을 것이다. 유학생 외에 기타 분야의 사정도 한국정부는 각박하게 2000년대 중반까지 조선족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극소수 조선족이 10여 년 전부터 투자비자(D-8)로 한국에 입국하여 창업한 사람,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입국한 사람 외 다수 장기체류자는 불법으로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집정시기인 2007년 3월 4일부터 방문취업비자(H-2)를 실시하여 조선족의 한국자유왕래가 보장되었고 그때부터 사실상 재한조선족사회정착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므로 재한조선족사회형성을 거시적으로 보면 20년이 넘었으나 세밀하게 따지면 5년도 채 안 되는 극히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이 있다. 한 개 집단사회가 뭘 이루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려야 될까 말까 하는데 재한조선족사회는 겨우 5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내에 뭘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조선족의 특유의 순발력이 있어 최근 들어 조선족출신 석·박사들이 학계를 비롯한 한국의 여러 분야에 진출해 있으며 이들이 10년 후이면 쟁쟁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창업하여 번 돈으로 조선족단체를 결성하여 좋은 일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중국동포연합총회(회장 김숙자)는 노인의 쉼터, 배구협회, 컴퓨터교실, 서예가협회 등 다양한 분야의 조직을 묶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마음협회(회장 이림빈)와 중국연맹총회(총재 김성근)는 3천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재한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를 위해 여러모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언론도 활발하게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그리고 스포츠, 예술, 서예, 민속 문화 장기협회 및 교사모임 등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이민사회에서의 리더는 학계, NGO, 재계, 신앙계 등 분야에서 배출되는데 현재 재한조선족사회의 학계는 석·박사들이 한국의 대학이나 연구원에 다수 진출하여 자리를 잡고 있는 단계이고 NGO는 3~6년의 짧은 기간이어서 역시 발전 중에 있는 단계이다. 또한 다수의 사업가들이 어느 정도의 부를 쌓았지만 아직 재계라고 말하기 이르고 신앙계는 더욱 멀어 보인다. 하지만 재한조선족사회가 50만 명을 넘어서고 장기체류하면서 여러 분야의 대표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더욱 성숙한 리더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 조선족사회에 분명히 모두가 인정하는 리더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상기 여러 가지 이유로 재한조선족사회 현 상황에서 비영감이나 명월공주 같은 ‘광땡’은 없으나 단풍열끗 같은 ‘장땡’은 얼마든지 있다. 수년 후이면 ‘장땡’이 ‘광땡’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한조선족의 미래는 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7    좀도둑이 큰 화를 부른다 댓글:  조회:6408  추천:9  2011-11-17
한국정부는 조선족이 한국에서 취직하여 돈도 벌고 중국과 한국을 자유왕래 할 수 있도록 2007년 3월 4일부터 방문취업비자(H-2)를 실시하여 현재 30만 3천 명의 조선족이 혜택을 받고 있다. 이는 한국정부가 조선족에게 부여한 획기적인 정책이다. 따라서 H-2소지자 조선족은 5년 체류기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5년 체류기간을 무난하게 넘기고 또 다시 재입국하려면 그 동안 열심히 일하는데 신경을 써야지 범법행위가 있으면 전과자로 낙인이 찍혀 체류연장과 재입국하는데 지장이 생긴다. 조선족이 한국생활에서의 범법행위를 살펴보면 폭력이 가장 많다. 건설현장에서, 회사에서, 음식점에서 가끔 한국인과 싸우는 사례가 있지만 다수의 사건은 조선족끼리의 폭행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건의 발단 원인을 보면 별거 아닌 걸 갖고 싸우는데 주로 자존심다툼이다. 조금만 참으면 능히 피할 수 있는 사건이란 뜻이다. 그리고 음식점과 호프집에서 싸움이 많이 일어나는데 똑 마치 중국에서 하던 본새를 그대로 달고 와 한국에서 폭행사건을 일으킨다. 다음 보편적인 범법행위로서 도박이다. 극소수 조선족이 카지노에 다니고 마작을 노는 수가 적지 않다. 올해 들어 마작 때문에 벌금형을 받은 수가 부쩍 늘고 있다. 주인은 도박개장죄로 벌금 300~600만원이고 기타사람들은 50~200만원이다. 문제는 폭행사건이든 도박사건이든 보이스피싱사건이든 모든 범법행위는 형사사건으로 입건되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면 체류연장에 지장이 생기고 심한 자는 구속되고 강제출국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외 조선족이 한국 땅에서 홀시할 수 있는 범법행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좀도둑이다. 일전에 심양에서 온 박모 여인(54세)이 본지를 찾아와 상담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부끄러워 말을 꺼내기를 저어하는 것이었다. 사연을 알아보니 음식점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데 수차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도둑질했고 이를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한 번에 훔쳐간 수는 2~3근이다. 만약 한두 차례 훔쳤다면 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상습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족만 음식점에서 고기를 훔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종업원들도 훔친다. 그러나 똑 같은 좀도둑사건이지만 한국인과 조선족의 입장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즉 한국인은 고기값을 갚거나 벌금을 납부하면 그만이지만 조선족은 외국인으로서 체류문제가 걸려 있고 범법행위로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면 연장에 지장이 생기게 된다. 음식점에 근무하는 한국여성들은 생계형 종업원으로서 고기를 훔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족은 한국에 돈 벌러 왔으나 당장 눈앞의 생계형이 아니기 때문에 그까짓 한두 근의 고기 때문에 체류를 망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한국음식점에 근무하는 조선족들은 좀도둑에 빠져들지 말기를 바란다.
36    조선족이 한국스포츠에서 내세울 것은 장기뿐이다 댓글:  조회:6885  추천:1  2011-11-17
1980년대 말 대한장기협회 김응술 회장이 백두산관광 차 연길에 들렀는데 그때 시가지 골목 여기저기에 조선족들이 장기판을 펼쳐 놓고 장이야, 멍이야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 땅이니 조선족도 ‘중국상기’를 두고 있겠지 생각했는데 우리민족장기를 두는 것을 보고 몹시 흥분되었다. 조선족이 우리민족고유민속 문화를 지켜온 것에 감개무량해 가슴이 울컥했다. 그 후 김회장은 장기알과 장기판을 연변에 많이 기증하였고 한국에서 자금을 모아 여러 차례 연변에 가서 조선족장기대회, 한중(한국인과 조선족)대항전을 개최했다. 2009년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장기협회 주최로 중국하얼빈에서 제1회 세계인장기대회를 개최했다. 그 대회에서 조선족이 우승부터 3등까지 싹쓸이 하였고 4위는 미국에서 온 하영명이란 젊은 청년의 몫이었고 한국프로선수 중 조선족출신인 김동학 5단이 5위를 차지했고 나머지는 8강 밖으로 밀려났다. 본 장기대회는 방송대국으로 치러졌고 한국장기채널인 브레인TV가 수차례 방송하여 전체 대한민국장기계에 조선족장기수준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쫙 퍼지게 되었다. 2011년 1월 30일과 9월 4일 두 차례 재한조선족장기대회가 있었고 108명 선수가 참가해 한국장기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조선족장기가 한국 땅에서 활성화 되니 한국인으로부터 견제를 받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지난 10월 말경 햇터방송의 주최로 제2회 클럽대항전이 있었는데 한국아마선수들이 출전하는 대회이다. 재한중국동포장기협회가 백두산팀(5명 선수)을 구성하여 출전하게 되자 한국클럽들의 항의에 의해 제1회 대회에서 우승한 한성걸과 제2회 대회에서 우승한 김철 두 선수 중 한 명만 출전하라는 견제가 있었다. 사실 한성걸과 김철 선수는 한국프로와 대국하여도 막상막하일 만큼 수준이 높다. 그렇지만 두 선수는 한국에서 프로로 인정받지 못해 아마대회에 출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백두산팀은 결국 한 발 물러나 둘 중 한 선수만 출전하라는 요구를 승낙하고 클럽대항전에 참가하였다. 한 선수가 빠지더라도 조선족장기수준이 워낙 높기 때문에 결과는 역시 우승이었다. 11월 13일 한국 천호동클럽의 주최로 천호동공원에서 전국아마장기대회가 있었다. 천호동클럽회장이 1주 전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조선족선수를 출전시키지 말아달라는 요청이 왔고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아마장기계에서 반발이 너무 심해 주최 측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재한조선족장기는 상당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프로로 인정받지 못하고 아마대회도 견제를 받는 샌드위치에 놓여 있다. 그래서 필자는 재한조선족장기대회에서 우승한 한성걸과 김철 선수를 프로입단에 신청하였고 대한장기협회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필자는 조선족선수 10명과 한국프로선수 10명이 대국하는 한중대항전을 치를 것을 대한장기협회에 건의하였고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대한장기협회도 한중대항전 양 측 수준을 막상막하로 보고 있다. 필자와 대한장기협회는 승부를 떠나 조선족과 한국인의 문화교류를 우선 염두에 두고 따라서 조선족의 참여로 인하여 한국장기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조선족이 축구를 잘한다지만 연변축구팀이 한국대표팀과 대항전을 치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수준차이를 말함). 배구와 탁구, 씨름 등 기타 스포츠도 만찬가지로 조선족팀 수준이 한국과 아예 견줄 수가 없다. 오로지 장기만이 조선족이 한국과 대항전을 치를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을 앞으로 어떻게 더 승화시켜 전체 우리민족의 장기발전에 기여하는가는 것이 큰 과제이다.
35    한국선거와 재한조선족 댓글:  조회:6072  추천:6  2011-11-02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치러지는 총선이든 대선이든 지자체 단체장 선거이든 재보궐선거이든 여러 선거운동에 재한조선족은 강 건너 불구경으로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그저 다를 정도가 아니라 달라도 엄청 달라졌다. 10월 26일 치러질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재한조선족사회는 사람이 모인 곳이면 나경원 후보와 박원순 후보 중 어느 후보가 될까, 어느 후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여론이 분주하게 오갔다. 이와 같은 흐름에 발맞춰 재한조선족관련 언론과 단체장들이 지난 10월 8일 대한민국에서 조선족이 가장 밀집된 대림동에 모였다. 20여년의 코리안드림 역사에서 한국 선거를 앞두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는 처음이다. 이는 실로 전례가 없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모임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가 있었다. 이젠 한국정치사회에 조선족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재한조선족(귀화자 포함)이 서울시장후보에게 바라는 것을 전달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한을 전달받은 나경원 후보 측과 박원순 후보 측의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박원순 후보 측은 전달받은 이튿날인 10월 14일 답변이 온데 비해 나경원 후보 측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끝내 답변을 보내오지 않았다. 박원순 후보 측의 발 빠른 움직임은 재한조선족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고 나경원 후보 측의 무답변은 관심이 없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실제 박원순 후보 측의 선거캠프엔 선대위원장을 비롯해 한국인이 조선족을 초청사기를 벌인 피해보상운동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에 여러모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움직여 온 시민운동가들이 있었다. 석자 얼음이 하루아침 추위로 결빙될 수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와 같은 양 측의 반응은 현재 집권당과 야당의 과거 성향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려는 성향은 이른바 한국사회에서 상식적으로 거론하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재한조선족사회는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정치다툼에 관심이 없다. 재한조선족은 한국사회에서 약자 집단이다. 그냥 소박한 표현으로 젖 주는 게 어미라는 속담에 비취 문제를 분석하면 답은 간단하다. 그 답이 곧바로 어느 정당이 되었든 재한조선족을 끌어안으려 노력하느냐, 아니면 무관심 하느냐는 문제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당시인 2005년과 2006년 연속 두 차례  '중국동포자진귀국지원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수만 명에 이르는 불법체류 중국동포를 합법화시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시 2007년 3월 4일부터 방문취업비자를 부여하여 자유왕래를 실시하였고 무연고동포한국입국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재한조선족사회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깊은 애정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결과가 아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한조선족을 정말 동포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실천으로 보여준 결과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될 때 조선족출신 귀화자의 75%의 높은 투표율을 얻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이러한 높은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동포정책이 과거 정부에 비해 많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한국에 13만 명에 이르는 조선족출신 유권자가 있고 서울시에만 4만 여명의 유권자가 몰려 있다. 이들 유권자들은 40만 명 재한조선족의 민심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대선이든 총선이든 서울시장 선거이든 조선족출신 유권자들이 끼치는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차원에 이르렀다. 2012년이면 총선과 대선을 치른다. 각 정당들은 구호가 아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공약으로 재한조선족민심잡기에 나서는 것이 선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34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조선족언어문제 댓글:  조회:6687  추천:1  2011-10-20
이른바 표준어와 사투리는 역사적으로 정치 혹은 경제에 따른 힘의 논리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변방언어로 취급받던 연경어(燕京語)가 명·청을 거쳐 중심언어로 자리매김 되었고 신중국 이후 급기야 표준어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반도도 마찬가지이다. 통일신라 때 경주어가 표준이었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경상도사투리로 취급받고 있다. 통일신라와 고려 때 사투리에 불과했던 아리수지역(지금의 서울)언어가 오늘날에 와서 표준어가 된 사실을 볼 때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현재 남한 사람들은 ‘평양어’를 이북사투리라 하고 이북사람들은 평양어를 우리민족표준어라 말한다. 언어란 입고 다니는 옷처럼 자의든 타의든 유행을 따르는 것이 인류역사의 흐름이다. 앞선 곳이 낙후된 지역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고 낙후된 집단은 앞선 집단을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한 발 앞선 한국어가 처진 조선족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세기 가까이 잘 나가던 조선족언어가 한국과의 왕래와 한국인과의 접촉이 빈번해짐에 따라 한국어를 따르는 흐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다수 조선족이 그런 흐름에 반감을 느끼면서도 싫든 좋든 또 알게 모르게 조선족언어는 한국어를 따르는 흐름으로 흘러왔다. 이것은 조선족집단의 자존심 문제를 떠나 자연적으로 이뤄진 역사의 흐름이다. 군더더기가 장황한 것 같아 본론에 들어가기로 하겠다. 대세를 볼 때 조선족언어가 한국어를 따르고 있으나 필자의 개인입장을 말하자면 조선족은 반드시 언어 면에서 지킬 것을 지키자는 것이다. 즉 조선족언어를 고집할 것은 반드시 고집하자는 것이다. 특히 조선족생활을 담은 문학작품이라면 언어사용이 백 프로는 아니더라도 98% 사투리를 포함한 우리조선족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실제 사례를 말해보겠다. 조선족작가들이 한국에서 문학작품을 발표한 수가 적지 않다. 그런데 한국출판사들에서 조선족문학작품을 출간할 때 조선족언어를 대함에 있어서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한국에서 꽤 유명한 집문당출판사를 비롯해 일부 출판사는 조선족언어도 우리민족 언어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전체 우리민족 언어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조선족작가들이 사용한 소위 사투리를 포함한 조선족언어를 한국식으로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실어준다. 다만 한국인이 알아먹지 못할 말은 괄호 안에 한국식으로 표기한다. 이와 반대로 많은 출판사들에서는 사투리를 포함한 조선족언어를 전부 한국어로 수정한 후 책을 출간한다. 문제는 우리조선족작가 중 소수이긴 하겠으나 일부러 한국식으로 맞춰 문학작품을 쓰다 보니 문학적 가치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연변시골생활을 반영한 소설에 ‘한강에서 뺨 맞고 서빙고에 와서 눈을 흘기다.’ ‘닭 쫓던 개가 지리산을 멍하니 바라보듯’, 연변시골총각이 좋아하는 처녀를 엎고 걷는데 ‘원, 투, 쓰리’로 헴을 센다든가 또 한국에서 10여년 살면서 글을 많이 써온 필자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외래어를 잔뜩 사용하는 것은 마치 머슴이 주인의 비단옷을 빌어 입은 꼴 같아 더 읽어내려 갈 수가 없고 생선을 먹다 가시가 목에 걸리는 느낌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문혁 때 연변시골생활을 반영한 소설에서 “여보, 영감, 팬티에 지린내가 심하게 난다.”는 표현은 정말 어처구니없다. 당시 연변시골에 팬티란 말이 있었는가? 필자의 기억에 의하면 ‘살마대’ 혹은 ‘빤쯔’이다. 또 1980년대 이전의 조선족남녀가 성교하는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서 ‘브래지어’, ‘팬티’, ‘히프’, ‘페니스’ ‘섹스’, ‘오르가즘’ 등 어휘를 총동원하는 것이 과연 옳은 행위인가? 이와 대조적으로 의 저자인 정수인 씨는 한국인이면서도 불구하고 연변시골생활을 반영한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사투리를 포함한 절대다수 언어를 연변식 그대로 사용하여 구수하게 읽을 수 있고 독자로 하여금 작품 속에 빠져들게 한다. 필자는 이 문제를 갖고 한국인들과 논의해본 결과 조선족생활을 반영하는 문학작품이라면 반드시 그 현지 언어와 시대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것으로 입이 모아졌다. 외래어사용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은 역사소설이다. 작가 김별아 씨는 외래어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고 현대 한국어사용도 많이 자제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역사소설가치를 끌어올렸다. 필자가 지은 장편역사소설 도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유교, 도교, 불교식 언어를 일절 자제하였다. 그래야 시대적 맛이 나고 고전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가가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수준이 떨어진다든가, 작품성이 저하된다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일반 독자들이 알아먹지 못할 외래어를 잔뜩 써 유식한 체 하는 것은 실패일 수밖에 없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邯鄲學步’의 고사처럼 밥도 죽도 아닌 지경에 이르기 전에 문학작품을 쓸 때 무작정 한국식 언어를 따르지 말고 또 외래어를 되도록 적게 사용하고 더욱이 알아먹지 못할 외래어사용을 삼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
33    한국어능력시험제도가 남긴 일부동포들의 상처 댓글:  조회:6333  추천:1  2011-10-17
2008년 이전까지 한국에 친척이 없는, 이른바 무연고동포들은 고국에 올 방법이 없어 가짜친척초청, 위장결혼, 밀입국, 여권위조, 허위상무고찰 등등의 편법을 이용하여 입국하였다. 정당한 도경이 없어 어쩔 수 없는 방법을 택하게 되다 보니 한국법무부도 부담이 컸고 입국당사자들도 한국에서 떳떳한 삶을 보낼 수가 없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2008년부터 한국법무부는 동포들의 상기 불법입국을 줄이고자 획기적인 정책을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무연고동포한국어능력시험을 거쳐 방문취업취업비자를 발급하여 한국에 입국시키는 것이었다. 동포사회로부터 환영받을 정책이었으나 처음으로 시행하다보니 폐단도 많았다. 이를 테면 시험참가접수가 컴퓨터로 작업하게끔 하여 컴퓨터에 익숙치 못한 다수 사람들은 1천 위안에서 5천 위안, 소수 사람들은 1만 위안 이상의 거액을 지불하고 타인에게 부탁하여 어렵사리 신청할 수 있었다. 수험장도 문제였다. 동포밀집지역인 연변이 수험장소가 배제되어 장춘, 청도, 대련, 심지어 수도 북경 혹은 수천 리 밖의 광주나 상해에 가서 시험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지쳤고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을 지게 되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겨우 시험에 합격되었는데 추첨방식으로 소수만 직접 방문취업비자(H-2)를 발급받아 한국에 올 수 있었고 다수는 C-3비자로 입국시키고 반년 이상(처음엔 1년이었다가 9개월로 줄였고 현재는 6개월로 되었음) 지루한 기술교육이수를 받은 후 H-2로 변경해 주었다. 기술교육제도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렇게라도 한국에 올 수 있다는 문이 열렸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헌데 2011년 1월 13일부터 만 55세 이상자는 기술교육이수대상자에서 제외시키는 새로운 제도를 공표하였다. 이렇게 되어 정신상, 경제상 많은 투자를 통해 어렵사리 시험에 합격된 자들은 한국에 단기비자로 올수는 있어도 H-2로 변경할 길이 막혀버렸다. 이에 해당되는 동포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다. 만약 처음부터 만55세 이상자는 시험에서 자격을 배제하였다면 아무런 이의도 없다. 그러나 시험 당시엔 연령 제한이 없이 했다가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면 이들은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 불미스런 제도는 결국 한국정부가 동포사회에 불신을 던진 것이고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011년부터 무연고동포한국어능력시험제도가 취소되었고 앞으로 만25세 이상 동포는 신규입국제도에 의해 한국에 입국시킨다는 방침이다. 대리응시 폐단과 정신상, 경제상 투자가 많이 필요한 시험제도가 사라진 것은 환영할 일이나 과거 상기에 해당하는 동포들에게 한국정부가 남긴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든 치유해주길 바란다.   
32    풍요속의 빈곤 댓글:  조회:6525  추천:2  2011-10-10
    “世風日下, 人心不古, 今不如昔” ‘효(孝)’와 ‘예(禮)’는 중화문명의 산물이며 아울러 동방문화에 있어서 비중 높은 전통이다. 특히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는 우리민족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효’와 ‘예’를 매우 중시해왔다. ‘효’는 자식이 부모에게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이며, ‘예’는 사회적으로 어린 사람이 연장자에게 존경하는 태도로 깍듯이 대하는 것이다. 우리선조들은 조선조 518년 동안 유교확립을 통해 ‘효’와 ‘예’의 정신이 타민족에게 비해 굉장히 밝았다. 19세기 60년대부터 만주에 이주하기 시작한 조선인은 낯설고 물선 땅에서 선조들의 ‘효’와 ‘예’의 정신을 지키고 살아왔기에 신중국 건립 후 56개 민족가운데서 가장 사리가 밝은 민족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렇듯 ‘효’와 ‘예’의 정신이 으뜸이던 조선족이 문화혁명이란 10년 동란을 거쳐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린 사람이 연장자를 존경하는 예의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말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함에 따라 조선족은 돈을 쫓는 사회로 전환되어 전통적인 ‘효’와 ‘예’의 정신이 크게 타격을 입어 현재는 위·아래의 사회질서가 말이 아니게 변해가고 있다. 1992년 중한수교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불어친 한국바람, 일명 코리안드림을 살펴보면 재한조선족사회가 얼마나 ‘예’에 굶주려 있는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난 9월 12일 우리민족전통명절인 추석날에 서울구로고등학교운동장에서 하나은행 주최로 ‘추석맞이중국동포노래자랑’이 열렸다.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에서 새로 무섭게 스타로 떠오른 백청강이 출연하여 노래자랑무대가 한결 빛났고 수천 명의 관객이 환희에 휩싸여 들끓었다. 이 행사는 실로 재한조선족에게 큰 명절선물이었다. 그러나 그렇듯 좋은 행사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건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의자에 버젓이 앉아 구경하고 지팡이에 의지하는 불편한 할머니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구경하고 있는 광경이 동북아신문 장헌국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잡혔다. 필자는 이 사진 한 장이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정신적으로 빈곤하게 살아가는 우리재한조선족사회를 가장 잘 반영하였다고 진단하고 싶다. 혹시 젊은이들이 자리를 양보해드렸는데 할머니가 괜찮다고 거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할머니를 땅바닥에 방치해둔 결과만으로도 우리는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다 알다시피 코리안드림은 우리조선족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를 안겨주었다. 부모들이 한국에서 돈을 벌어 자녀들의 공부뒷바라지를 하고 심지어 유학까지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아파트까지 장만해주고, 자신들의 노후에 쓸 돈을 마련하였다. 한편 경제적인 부를 쌓은 동시에 우리는 정신적인 것을 너무 많이 잃었다. 이를 잘 나타내는 물증이 바로 노래자랑에 있었던 광경이다. 중국어에 다음과 격언이 있다. “세상기풍이 날로 못해 가고 인심이 예전과 같지 않으니 오늘이 과거보다 못하구나(世風日下, 人心不古, 今不如昔).” 이 구절이 곧바로 우리 재한 조선족사회현실을 말하는 것 같아 맘이 서글프다.
31    변화하고 있는 차이나타운거리 댓글:  조회:6608  추천:3  2011-09-16
한국엔 1990년대 후기부터 2000년대 초반을 계기로 서울가리봉동, 가산동, 독산동, 대림동, 안산, 안양 등지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왔다. 본래 이 여러 곳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산업화시기에 공단집거지로서 지방에서,  시골에서 상경한 공돌이와 공순이들이 발붙인 쪽방촌이었고 한강기적창조에 기여한 역사를 남겼다. 한국이 산업화에서 정보화시대로 이행하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이 여러 곳은 썰렁해지기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 텅텅 비어 있는 상황을 맞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코리안드림에 나선 조선족들이 이 여러 곳에 모이기 시작해 현재는 차이나타운으로 형성되고 있다. 한국 땅에서의 차이나타운은 그야말로 조선족들의 애환이 깊이 묻어 있는 곳이다. 낮에는 힘들고 어렵고 더러운 3D업종에서 피땀을 흘리고 저녁이면 친구끼리 모여 한잔 나누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고향을 그리는 곳이었다. 차이나타운은 조선족에게 있어서 실로 고향 같은 안식처였다. 한편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불법체류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에 인권적으로 침해를 당하고 살던 조선족들이 차이나타운에 모여 술을 마시고 사건을 많이도 일으켰다. 가리봉시장 거리엔 하루 저녁에 세 건 정도 굵직한 폭행으로 인한 상해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라 말할 만큼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 시절에 차이나타운에서 사건이 많았던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가운데서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남자들이 홀로 한국 땅에서 살면서 서러움과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어 술만 마시면 스스로 절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가족단위로 한국에 많이 와 있고 형제자매 및 가까운 삼촌조카나 사촌까지 따지면 집집마다 10여 명이 한국에 와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군일을 치르면 적게 모이는데 반해 한국에서 모임을 가지면 흥성흥성하게 모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추석과 구정이면 가족단위로 친척단위로 차이나타운거리가 미어지게 모여들어 음식을 나누면서 웃고 떠들고 명절을 즐겁게 보낸다. 친구끼리 모여들던 시기엔 술을 마시면 절제가 되지 않아 싸움이 많았던데  비해 가족단위, 친척단위로 모이니 절제가 되어 싸움이 예전보다 많이 적어진 것이 차이나타운의 큰 변화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남자들이 하루저녁 수십만 원의 돈을 이리 팔고 저리 팔면서 바보처럼 소비하던 것이 요즘 들어 소비관념이 많이 바뀌고 있다. 쓸 만큼 쓰고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되도록 쓰지 않는 변화가 보인다는 것이다. 또 예전엔 명절이면 새벽까지 조선족 주정배들이 밤새 떠들고 다니던 것이 지금은 새벽 1시~2시면 길거리가 조용한 변화가 있다.  그러나 가리봉 시장골목 차이나타운은 여전히 명절저녁이면 무시무시한 분위가 가득한 것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추석날 저녁 22시~23시경 길이 좁다하고 쓸고 다니면서 길손들에게 불편과 불안을 안기고 실없이 가게 문을 걷어차거나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과 걸고 들고 심지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길손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자도 있고 또 가끔 술에 만취해 치고 박고 싸움을 벌이는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 타향에 왔으면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착실히 벌어 앞날을 알차게 준비하는 것이 상책이건만 아직도 바보스럽게 부질없이 싸움하는 자가 있는 것이 유감이다.         
30    55세 이상 조선족의 비애 댓글:  조회:7937  추천:5  2011-09-06
1990년대 중반부터 연길에서 은행, 우체국을 비롯해 이른바 철밥통이라 믿었던 공직자들이 45세가 되면 내부퇴직을 강요받았다. 육체노동이 필요한 기업에 근무하던 45세 이상 노동자는 대량 퇴직을 면치 못했다. 연길골목마다 ‘노인활동실’ 간판을 건 마작청이 수백 개 업소가 있었는데 도박행위로 신고 되면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여 신분증검사를 한다. 45세 미만자는 연행하여 조사하고 벌금을 안기는데 비해 45세 이상자는 연행도 벌금도 없다. 연길시교에 새로 일떠선 양로원이 여러 군데 있는데 45세 이상자는 입주가 가능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조선족사회는 45세가 되면 노인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이다. 40대는 불혹의 나이로서 안정된 일자리와 고정수입으로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녀를 키워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짊어지고 인생에서 고비를 맞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사회는 45세가 되면 노인취급을 받으면서 일자리를 잃게 되자 이들은 일가족의 생계를 위해 코리안드림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정부의 변덕스런 정책에 의해 55세 이상 조선족의 코리안드림에 비상이 걸려 조선족사회가 크게 술렁이게 되었다. 여기서 한국정부가 55이상 조선족에 대한 잘못된 두 가지 정책에 대해 지적하려 한다. 한국정부는 무연고동포들을 한국어능력시험을 보게 하고 입국시키는 정책을 2007년부터 펼쳐왔다. 하지만 이 정책은 로또식 추첨이 문제였다. 즉 제비노름처럼 추첨에 걸린 자는 직접 방취제비자인 H-2를 발급받고 한국에 올 수 있는 반면에 똑 같이 성적은 합격되었으나 ‘로또’에 탈락되어 C-3단기종합비자를 발급받고 한국에 와서 기술교육이수 과정을 걸쳐 H-2로 변경 받는다. 문제는 지난 2010년 1월 13일부터 55세 이상자는 기술교육이수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55세 이상자는 한국에 올 수는 있어도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정부에서 시험에 참가하라 하여 머나먼 남방도시에까지 장거리 여행을 걸쳐 시험 보는 고충을 겪으면서도 한국에 입국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 정책의 변화에 의해 한숨만 짓고 있다. 55세 이상자가 결국 한국정부한테 농락된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 지난 8월 17일 법무부와 고용노동부의 합의 하에 H-2만기자에 대한 후속정책이 확정되었는데 55세 미만자는 재입국유예기간을 1년(제조업과 농축수산업에 종사하는 자는 6개월로 하였음)으로 규정하고 재입국하면 역시 H-2비자를 발급해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찬반양론이 떠들썩하지만 어찌되었든 재입국하여 또 4년 10개월 체류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55세 이상자이다. 이번 정책에 의하면 55세 H-2만기자는 재입국할 수 있되 C-3단기종합비자로 한국에 왕래할 수는 있으나 한국에서의 취업을 불허하여 결국 그들은 한국에서 정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55세 이상 H-2만기자 중에 자녀들이 한국에 있어 그들은 중국에서의 생활기반을 상실하고 한국에 정착하여 살아가야 하는 처지인데도 한국정부는 한국정착을 불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55세 이상자 중에 한국회사에서 숙련공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있고 한국회사도 그들을 수요하고 있으나 한국정부는 이런 구체적인 사실을 전부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55세 이상자에게 또 다시 H-2비자를 발급하면 5년 후 이들이 전부 60세 이상 노인이 되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부담으로 여기고 한국정착을 불허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45세 이상자는 중국에서 노인취급 받고 55세 이상자는 한국정부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조선족사회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29    H-2재입국유예기간 1년에 따르는 고충 댓글:  조회:6549  추천:2  2011-08-18
지난 7월 말경 한국 법무부와 고용노동부의 합의에 의해 올해 말부터 있을 H-2만기자는 일단 본국으로 출국하였다가 재입국유예기간을 1년 이내로 하자는 초안이 발표되었다. 이에 대해 동포사회는 재입국이란 후속대책을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이지만 1년이란 유예기간이 너무 길어 이런저런 고충이 많다는 불평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흑룡강성 해림에서 온 손모씨(39세)는 지난 2월경 자가용을 구입해 출퇴근에 사용하고 있다. 내년 3월이면 만기가 되어 정부정책에 따라 중국으로 가긴 가야하는데 1년 동안 차를 고스란히 세워두는 주차도 문제이거니와 차를 움직이지 않아도 세금을 바쳐야 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차를 처분하고 재입국하여 다시 구입하려고 해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스럽다고 토로한다.   현재 H-2소지자 중 승용차, 봉고차, 화물차를 구입해 사용하고 있는 자가 굉장히 많다. 이들은 재입국할 시 모두 손모씨와 같은 고충을 안게 된다.   연길에서 온 김성남씨(49세)와 장선녀씨(46세) 부부는 한국생활이 어언간 10년이 넘었다. 부부가 손 맞잡고 벌다보니 두 자녀를 공부시키고 연길에 아파트를 구입하고도 현재 한국에서 보증금 4천만 원, 월세 30만 원짜리 빌라를 맡아 살고 있다. 부부의 체류만료기일은 전후 보름 차이다. 그래서 함께 귀국하고 함께 재입국해야 한다. 만약 1년 동안 집을 비워두면 360만원의 집세를 살지 않고도 고스란히 지불해야 한다. 집을 빼자니 계약기간이 맞지 않아 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지가 의문이다. 가령 집을 뺄 수 있어도 가재도구며 온갖 집기를 처분한다는 것도 힘들고 재입국하여 다시 집을 맡고 가재도구와 집기들을 갖춘다는 것 또한 물심양면으로 웬만히 힘든 일이 아니다.   H-2만기자는 아마 90% 이상이 이 부부와 같은 고충을 안고 있을 것이다.   또 많은 조선족이 우려하는 것은 한국인 집주인들이 만기자들이 부득이하게 귀국일자에 맞춰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점을 노리고 보증금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돈도 떼이고 정신적으로 엄청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H-2비자소지자 중 일부 사람들이 중국식품가게나 음식점을 남의 명의로 등록하고 실제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재입국유예기간 1년에 대해 한숨을 짓고 있다.그러므로 현재 초안으로 된 재입국유예기간을 1년을 길어서 6개월로 줄였으면 하는 기대가 동포사회에서 많이 논의되고 있다.   한편 이런저런 고충이 만만치 않지만 정부에서 재입국기회를 부여하니 가긴 가겠으나 정말 재입국이 보장되는지를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부연설명하자면 2005년과 2006년 재입국정책실시 시 귀국비행기티켓을 구입하고 여권을 비롯한 관련서류를 갖고 공항출입국관리사무소(재입국실시 기간엔 인천공항에 별도로 카운터를 설치함)에서 ‘출국확인서’를 발급 받으면 재입국이 보장된다.
28    재한조선족은 한국경찰을 존중해야 댓글:  조회:6757  추천:8  2011-08-17
“중국동포 분들이 한국경찰을 너무 무시하고 있어 참 난감합니다.” 이는 중국동포 밀집지역인 구로구와 금천구에서 16년 동안 경찰업무에 종사해온 00경장의 말씀이다.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대다수 조선족은 한국00경장의 이와 같은 말씀에 공감할 것이다. 두 달 전 어느 일요일 저녁 서울시 구로구청 부근에서 벌어진 일이다. 젊은 조선족 셋이 00음식점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있었다. 주차한 차를 빼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높은 소리로 세 번 알릴 때까지 모른 체 하고 술을 마신다. 네 번째 만에야 ‘씨팔’하면서 움직였다. 술을 많이 마신데다 탐탁치 않는 기분으로 핸들을 잡다보니 뒤차를 들이받았다. 큰 사고는 아니지만 차주가 경찰에 신고했다. 한국은 음식점에서 손님끼리 말다툼하거나 손님과 주인이 언쟁이 생겨도 경찰에 신고한다. 부부끼리 손찌검해도 경찰에 신고한다. 집 키를 분실해도 경찰에 신고한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어도 경찰에 신고한다. 하다못해 가게 앞마당이거나 주택가에서 조선족들이 장기를 두어도 시끄럽다고 경찰에 신고한다. 이렇듯 대한민국국민은 조금 불편이 생겨도 경찰에 신고하는 의식이 투철하다. 한국경찰은 중국경찰에 비해 ‘권력행사’가 크지 못하고 사소한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일일이 참견해야하니 참으로 피곤해 보인다. 남의 차를 들이받은 조선족 청년이 차주에게 “우리끼리 해결하면 될 것을 왜 경찰을 불렀느냐”고 입에 담지 못할 상욕을 해댄다. 음주운전에 폭언을 쏟아 붓는 청년을 경찰이 연행하여 조사하려고 하자 그 청년은 “경찰이 다 뭐야.”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팔을 잡은 경찰을 밀어 넘어뜨린다. 결국 연행된 청년은 경찰서를 뒤엎을 태세로 난동을 부리는 과정에 경찰에게 폭력을 감행하였는데 공무집행방해죄, 폭행죄, 음주운전죄 등 형사사건에 걸려 벌금 500만원을 납부하게 되었다. 날이 지는 어슬녘, 서울 남구로역 3번 출구 부근 노래방에서 경찰이 아가씨 두 명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우려 하자 대낮부터 고주망태가 된 조선족남자 셋이 경찰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서는가 하면 마치 자기차라도 되는 것처럼 아예 차 앞체에 걸터앉는다. 같은 조선족아가씨를 붙잡아간다는 불만으로 취한 행동이다. 경찰이 두 아가씨가 위법행위가 있어 연행하여 조사할 사항이 있다고 설명해도 네 명의 조선족은 막무가내로 듣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공무집행방해죄로 연행되어 갔고 형사처벌을 받게 되었다. 경기 안산원곡동 주택가에서 조선족들이 10여명 모여 장기를 두고 있었다. 떠들어 시끄럽다고 한국주민이 경찰에 신고했다. 술을 마시고 장기를 두고 있던 조선족이 “우리가 장기를 두는 것이 위법인가? 한국경찰은 별 거 다 상관한다.”면서 경찰이 그만두라는 권고를 무시하고 그냥 장이야, 멍이야 하면서 놀고 있었다. 경찰이 재차 그만두라고 권고하자 이번엔 “당신들이 뭔데 우리보고 이래라, 저래라 야단이야.”고 소리를 지른다. 오가는 목소리가 커지자 주택가가 시끌벅적하여 경찰이 연행하려고 하자 상욕을 하면서 경찰을 밀치는 등 몸싸움을 일으켰다. 결과는 빤하다. 공무집행방해죄로 벌금을 납부하게 되었다. 일부조선족은 ‘중국경찰은 무섭다, 한국경찰은 만만하다.’는 심리가 있어 중국에 있을 땐 경찰한테 어쩌지 못하다가 한국에 와선 안하무인으로 경찰을 대하다가 공무집행방해죄를 범하는 사례가 굉장히 많이 발생하고 있다. 공무집행방해죄로 형사처벌을 받게 되면 전과자가 되고 체류연장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경찰을 존중하는 맘만 있다면 피할 수 있는 범죄이다. 쓸데없이 날뛰다가 화를 자초하는 행위를 삼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지침이 아닌가! 한편 조선족들이 천방지축으로 한국경찰을 대하지 말기를 바라는 동시에 한국경찰은 이국땅에서 고달프게 생활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조선족을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너그럽게 대해주었으면 바람이다.  
27    옌볜아줌마를 왜곡하지 말자 댓글:  조회:7592  추천:12  2011-08-04
일 전에 한국일요신문에 실린 ‘옌볜아줌마’…“돈 되는 일이면 뭐든”라는 글이 조선족지식인이 많이 보는 조선족글로벌네트워크(간칭 조글로)에 전재(轉載)되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또 한편의 한국기자가 조선족을 모독한 글이다.” 한국기자는 국내 조선족 여성의 ‘충격’ 실태라는 포인트를 잡고 글을 전개하였다. 그 충격실태란 것이 한국사회 깊숙이 포진 ‘옌벤 아줌마’…“돈 되는 일이면 뭐든”지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서술을 들어보자. “이제 식당에서 조선족 종업원을 보는 것은 한국인 종업원을 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됐다. 몇 해 전부터 돈을 벌기 위해 타향살이를 선택한 조선족 여성들은 식당, 모텔 청소부, 가정부 등 한국인들이 꺼리는 직종에 포진해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노래방, 티켓다방 등 유흥업소나 성매매업소에 발을 들이는 조선족 여성도 크게 늘고 있다. 그러면서 퇴폐와 타락에 빠지는 조선족 여성도 느는 것이 현실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적은 수년 전부터 있어왔던 것으로서 새로운 충격이 아니다. 또 한국인이 조선족아줌마를 가정부로 고용할 경우 이들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어린이들의 말투가 조선족 형태로 바뀌고 있어 고민이라는 지적도 벌써 10년 전부터 논의가 있었다. 최근 년래 중국의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에서 중국어 배우는 열풍이 불고 있다. 한국인 부유층은 가정부 겸 어린 자녀한테 중국어 강의가 가능한 조선족아줌마를 고용하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어 이른바 옌볜아줌마가 가정부로 인기상품이 되고 있다는 것을 한국기자는 간과하고 있다. 다음 한국기자가 ‘조선족 여성, 오직 돈만 보고 타향살이’이란 소제목에서 “조선족 여성들은 거의 100% 오로지 ‘돈’ 때문에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면 단돈 10만원에 자리를 옮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배신’이라는 것에 민감한 한국인들은 그들의 행태를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매도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조선족 여성들의 코리안드림의 동기는 100% 돈벌이를 위한 것이라 말한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코리안드림이 스무 살을 넘긴 현재 상황에서 ‘조선족 여성들은 거의 100% 오로지 돈 때문에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는 주장은 실제를 떠난 허황한 얘기다. 이런 내용의 기사가 만약 10년 전에 발표된다면 맞는 것일 수 있다. 가정부로 일하는 조선족여성들의 절반 이상은 한국생활경력이 5년 이상으로서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갖고 있다. 그녀들의 정서는 돈보다 주인이 편하게 대해주는 것을 우선조건으로 삶는다. 단돈 10만원에 비둘기처럼 쉽게 자리를 옮기는 현상은 지나간 옛말이다. 많은 조선족여성 가정부는 돈보다 안정된 일자리를 요구하고 따라서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기를 원하고 있다. 강남부촌에서 입주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한 조선족 여성은 한 집에서 8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아이 둘을 키웠다. 그 아이들은 부모를 떠나 지낼 수는 있어도 ‘이모’가 없으면 못 살 지경에 이르렀다.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월급을 후하게 줄 테니 우리 집으로 오라는 섭외가 들어온다. 허나 그녀는 돈을 적게 받더라도 이미 정이 들 대로 든 아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어 한국을 떠나는 날까지 눌러 있을 타산이다. 필자와 안면이 있는 가정부로 일하는 여러 조선족여성은 일자리가 안정되자 짬짬이 공부하여 운전면허도 따고, 한식자격증도 취득하고, 통역자격증도 손에 넣으면서 돈보다 여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다. 또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원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옌볜아줌마를 돈벌레로 취급하는 것은 케케묵은 지나간 얘기다. 그녀들은 결코 100% 돈을 쫓는 치졸한 인간집단이 아니다.  
26    한류의 문화기원(3) 댓글:  조회:6137  추천:1  2011-08-03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멋’에 대한 추구를 통해 내성도 다지고 외왕도 장식해왔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물이 없듯이 한민족의 내성외왕은 곧 내성보다 외왕 쪽에 무게를 더 두어왔다. 그래서 속보다 겉을 더 챙기는 관습이 지속되어왔다.   단군신화에서 홍익인간사상이란 고귀한 문구를 ‘멋’의 내성에 대한 추구라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확실히 기타 민족에 비해 매사에 사리가 밝다. 조선족이 사리가 밝은 것은 곧 홍익인간사상의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조에 들어서 유교의 영향 때문에 ‘멋’은 외왕보다 내성 쪽에 기울려졌다. 당시 유교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겉으로 드러나는 ‘멋’보다 내심의 ‘인(仁)’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이러저러하게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이 서로 엇바뀔 때가 있었으나 대체로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 추구가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들어왔다.   한민족의 외왕에 대해 조금 더 논의한다면 한민족은 겉으로는 멍청이가 매우 적어 보인다. 이는 상대적으로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교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곧 실속 없이 겉만 꾸미는 내빈외화라 할 수 있겠으나 긍정적인 시각에서 말하자면 곧 한민족은 상향의식이 강한 민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의 이 ‘멋’에 대한 내성과 외왕의 추구가 한민족으로 하여금 민족정체성을 갖게 만든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한민족은 모든 사물을 ‘멋’을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민족은 일본인을 ‘쪽발’이라 부르고 중국인을 ‘때놈(汚垢)’이라 한다. 일본인은 중국인을 ‘지나인(支那人)’이라 부르고 조선인을 그냥 ‘죠센징’이라 했다. 물론 ‘지나인’은 중국이 이미 늙었다고 얕잡아 보는 호칭이고 ‘죠센징’은 힘없고 가난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호칭이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를 볼 때 한민족이 타민족을 평가해 비하하는 호칭에 비해 훨씬 신사적이다. 중국인은 일본인을 ‘작은 일본(小日本)’이라 부르고 조선인을 ‘까오리빵즈(高麗捧子:고려 몽둥이)’라 한다. ‘작은 일본’이란 곧 일본은 사람도 작고 땅도 작고 나라도 작고 인심도 야박하다는 등등의 뜻을 나타내는 호칭이며 조선인을 ‘까오리빵즈’라 하는 것은 아마 옛날에 고려인(고구려인)과 싸울 때 고려인들이 몽둥이를 잘 써 혼났던 모양인데 이로서 유래되었다. 아무튼 중국인이 타민족을 평가하는 뉘앙스도 한민족에 비해 많이 점잖은 편이다.   한민족이 타민족을 평가하는 호칭이 매우 신사적이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돌이켜야 할 것은 곧 한민족은 ‘멋’을 통해 타민족과의 특징의 구분을 부각시키려는 데서 비신사적인 호칭이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내세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다름이’ 곧 ‘멋’에서 유래된 것이며, 아울러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든 주체성과 정체성이다. 이 ‘다름이’ 곧 한민족이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았어도 꿋꿋이 살아남게 된 가장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왔던 것이다. 중국이란 거대한 문화용광로 속에서도 조선족은 뚜렷한 교리교의가 있는 자체종교가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민족정체성을 잘 지켜온 것이 곧 ‘멋’에서 유래된 ‘다름이’ 크게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강력한 종교를 갖고 있는 회족(회교도:무슬림)마저 한족과 통혼이 잘되고 있는데 비해 조선족은 한족과의 통혼이 매우 드물다. 한족은 조선족과의 통혼을 원하지만 조선족부모들이 만약 자식이 한족과 연애를 하면 망종으로 취급할 정도로 통혼을 반대한다. 그 주유 이유가 바로 ‘우리(조선족)는 당신(한족)들과 멋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한민족의 고유한 ‘멋’ ‘맛’ ‘판’ ‘넋’ ‘얼’의 문화로서 이미 중국대륙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았다.   이 멋에서 유래된 ‘다름이’ 비록 한국 내에서는 이러저러하게 역사적으로 당파싸움도 유난히 많았고 지금도 역시 영남과 호남을 대변하는 당파싸움을 비롯한 사회 각 영역에서 갈등이 심각하게 드러나게 만들고 있다. 허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다름이’ 곧 한민족이 타민족과의 구분을 부각시켜 일치 단합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대한민국을 세상에 크게 홍보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 예하면 1997년 말 IMF 직후에 전체 국민이 동원되어 장롱 속의 금붙이를 나라에 바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때에는 7백만의 붉은 악마가 세상을 또 한 번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그 힘이 어디서 왔을까? 필자는 그 힘이 곧 한국인의 특유한 ‘멋’과 ‘판’에서 온 신바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그 어떠한 종교도 그 어떠한 문화도 때에 한국인이 세상에 보여주었던 그러한 멋진 장관을 연출해내지 못했다. 세상은 그때 그 사건 때문에 크게 놀랐으며 대한민국을 크게 부러워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멋’을 이미 엄마의 언어를 통해 배웠고 몸에 배였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힘의 표출은 나라가 가르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단군시대부터 ‘멋’에 대한 터득의 결과이며 엄마의 언어를 통해 배우고 실천한 결과이며 한국인의 몸속에 깊이 배어 있는 신바람이 표출된 결과이다.   만약 외국인이 한국과 한국인을 알려면 반드시 ‘멋’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중국인을 알려면 반드시 도교를, 일본인을 알려면 반드시 신도를 알아야하는 이치와 같다. 만약 일본문명을 독자적 문명으로 취급하는데 동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도리로 ‘멋’이란 독특한 문화도 역시 독자적 문명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멋’ ‘맛’ ‘판’ ‘넋’ ‘얼’ ‘신바람’이야말로 한류의 문화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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