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재한조선족사회를 흘어진 모래알과 같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한겨레신문 차한필 기자가 수년 전에 “재한조선족사회는 리더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는 요지의 글을 발표하였다. 최근 들어 한국과 중국조선족사회 지성인들 여러 분이 차한필 기자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필자에게 재한조선족사회에 리더가 없는 이유를 물었다.
조선족의 한국바람이 어언간 20여년이 흘렀다. 장기체류 40만 명, 귀화한 조선족출신까지 합치면 53만 명이 한국에 살고 있다.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에 맞먹는 인구이며 한국으로 말하면 중소도시인구에 해당된다. 이렇듯 중소도시를 이룰 만큼 한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재한조선족사회를 이끌어 나아갈 리더가 필요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리더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리더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리더가 되려면 지도력, 호소력, 설득력, 포옹력 등 리더십을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덕적으로 검증된 자로서 덕망이 높아야 하고 학식도 있어야 하고 주머니가 두툼하게 재력도 있어야 한다. 게다가 헌신과 봉사 및 이에 따르는 자아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 과연 이런 조건을 구비한 인재가 있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재한조선족역사가 극히 짧은 것이 치명적인 이유이다. 코리안드림이 20년이 넘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한국정부가 조선족 합법체류를 허락한 것은 불과 몇 년밖에 안 된다. 1990년대 초부터 한국에 와서 석·박사공부를 한 조선족 수가 꽤 있었으나 그들은 한국정부가 체류를 허락하지 않아 전부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 중앙민족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박광성 씨는 서울대에서 박사공부를 마치고 본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채용하려는 데 한국정부가 체류를 허락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귀국한 것이 5년 전의 일이었다. 조선족출신 석·박사들이 한국에 남아 활동할 수 있은 시기가 2007년 말부터 재외동포비자(F-4)가 실시된 이후라고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일본에는 조선족출신 석·박사들이 학계, 언론, 재계 및 도요타를 비롯한 글로벌회사들에서 중견 인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쟁쟁한 인재들이 수두룩한 데 비해 한국의 학계, 언론, 재계 및 삼성 같은 글로벌회사들에서 중견 인력으로 활동하는 쟁쟁한 조선족출신 인재들이 없는 실정이다. 현재 일본에는 5만3000여명의 조선족이 체류하고 있고 그 가운데 33%가 유학생이다. 일본에서 취업한 이는 27%, 상당수는 유학 직후 현지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최고 학력의 엘리트들이 재일조선족사회의 주류를 이룬다. 80년대 초반 집권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유학생 10만 명 유치 정책’을 추진했고 그 혜택을 조선족이 톡톡히 누린 결과이다. 일본은 또 10여 년 전부터 재중일본회사에 취직하여 두각을 나타낸 조선족인재들을 일본본사에 불러들인 사례가 수두룩하다. 그들은 일본에서 500만 엔 연봉을 받고 있고 일본경력 10년이면 아파트도 구입하는 등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재일조선족사회는 엘리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비해 재한조선족사회는 3D업종을 비롯한 노무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왜 이런 상반된 결과가 빚어졌는가? 조선족출신 한국유학생과 일본유학생을 비교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차이가 크다. 현재 재일조선족유학생 수가 2만여 명인데 비해 재한조선족유학생 수는 3천 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졸업한 대학을 놓고 봐도 재일조선족유학생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을 비롯해 중국 명문대 출신이 많은데 비해 재한조선족유학생은 연변대학을 비롯한 일반대학출신이 많다.
연변대학출신은 한국유학이 여러모로 적성에 맞을 수 있다. 그러나 고국인 한국은 조선족출신유학생을 달갑게 맞이하지 않았다.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OOO 교수는 1994년 한국에 유학 왔고 당시 한국어시험을 치렀는데 불합격을 맞았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생이 한국어시험에 낙방이라니? 아이러니한 것은 한국어수준이 바닥인 한족들을 합격시키면서 조선족한테 태클을 걸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상열 교수가 연변대학에서 배운 것은 조선어이지 한국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선어고 한국어고 모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같은 민족 언어인데 무슨 말이냐? 답은 빤했다. 남북분단 이념잔재의 영향이었다. 그 영향이 2000년대 중후반까지 미쳐 조선족출신 석·박사의 한국체류를 불허했을 것이다.
유학생 외에 기타 분야의 사정도 한국정부는 각박하게 2000년대 중반까지 조선족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극소수 조선족이 10여 년 전부터 투자비자(D-8)로 한국에 입국하여 창업한 사람,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입국한 사람 외 다수 장기체류자는 불법으로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집정시기인 2007년 3월 4일부터 방문취업비자(H-2)를 실시하여 조선족의 한국자유왕래가 보장되었고 그때부터 사실상 재한조선족사회정착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므로 재한조선족사회형성을 거시적으로 보면 20년이 넘었으나 세밀하게 따지면 5년도 채 안 되는 극히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이 있다. 한 개 집단사회가 뭘 이루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려야 될까 말까 하는데 재한조선족사회는 겨우 5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내에 뭘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조선족의 특유의 순발력이 있어 최근 들어 조선족출신 석·박사들이 학계를 비롯한 한국의 여러 분야에 진출해 있으며 이들이 10년 후이면 쟁쟁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창업하여 번 돈으로 조선족단체를 결성하여 좋은 일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중국동포연합총회(회장 김숙자)는 노인의 쉼터, 배구협회, 컴퓨터교실, 서예가협회 등 다양한 분야의 조직을 묶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마음협회(회장 이림빈)와 중국연맹총회(총재 김성근)는 3천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재한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를 위해 여러모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언론도 활발하게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그리고 스포츠, 예술, 서예, 민속 문화 장기협회 및 교사모임 등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이민사회에서의 리더는 학계, NGO, 재계, 신앙계 등 분야에서 배출되는데 현재 재한조선족사회의 학계는 석·박사들이 한국의 대학이나 연구원에 다수 진출하여 자리를 잡고 있는 단계이고 NGO는 3~6년의 짧은 기간이어서 역시 발전 중에 있는 단계이다. 또한 다수의 사업가들이 어느 정도의 부를 쌓았지만 아직 재계라고 말하기 이르고 신앙계는 더욱 멀어 보인다. 하지만 재한조선족사회가 50만 명을 넘어서고 장기체류하면서 여러 분야의 대표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더욱 성숙한 리더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 조선족사회에 분명히 모두가 인정하는 리더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상기 여러 가지 이유로 재한조선족사회 현 상황에서 비영감이나 명월공주 같은 ‘광땡’은 없으나 단풍열끗 같은 ‘장땡’은 얼마든지 있다. 수년 후이면 ‘장땡’이 ‘광땡’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한조선족의 미래는 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