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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같은 글
요즘 한국 소설가 박명호의 만주일기가 한국 내 00사이트에 연재 중이다. 저자는 글 중 제4편<만주의 봉천, 심양 아이러니>을 아래와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심양역 역사(驛舍) 위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서울역과 흡사한 웅장한 돔 형식지붕 위로 해가 지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해가 지다’는 이 도시의 이름(沈陽)과 기가 막히는 어울림이다. 아니, 차라리 아이러니에 가깝다. 인구 1000만 명에 가까운 만주 제일의 도시로 발전한 이 도시의 이름이 ‘해가 지다’는 지극히 패배적이고 감상적인 이름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심양의 옛날 이름이 ‘하늘을 받들다’는 뜻의 봉천(奉天)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째서 ‘하늘을 받든다’던 도시가 그 정반대의 뜻을 지닌 ‘해가 침몰하는’(沈陽)이라는 이름이 되었을까.
‘심양’이라는 이름에는 한족들의 배만민족주의(만주를 배척하는 민족주의)가 담겨져 있다. 사실 그들은 봉천뿐만 아니라 만주라는 이름도 사용하지 않는다. ······
이 구절을 보면 저자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즉 첫째 봉천을 舊稱, 심양을 新稱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둘째 심양이란 지명유래를 주관억측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고, 셋째 만주를 찬양하고 현재 중국을 비방하는 문제점이 드러난다.
심양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重鎭이었고, BC221년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36郡으로 나누고 심양을 요동군에 예속시켰다. 서한시기 심양은 이미 도시윤곽을 갖췄고 ‘侯城’이라 불렀고, 당나라에 이르러 ‘沈洲’라 개칭했다. 금나라 때 금태조가 심주를 공략하고 ‘심주’란 도칭을 계속 사용했다. 1296년 원나라 때 심주를 ‘沈陽路’로 고치고 遼陽관할에 넣었다. 심양은 沈水이북에 위치해 있는 까닭에 중국전통方位論 ‘山北爲陰, 水北爲陽’에 의해 심주를 ‘沈陽’이라 개칭했던 것이며 따라서 그때부터 심양이란 도칭이 史料에 등장하고 702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1643년 청태종 황태극이 심양을 ‘盛京’이라 개칭했고, 이듬해 북경에 천도한 후 심양을 ‘陪都’라 불렀으며, 1657년 청나라는 ‘奉天承運’의 뜻으로 심양에 ‘奉天府’를 설치하고 그때부터 심양을 봉천이라고도 불렀다. 1929년 장학량이 동북을 지배하면서 ‘봉천시’를 옛 이름인 ‘심양시’로 고쳐 놓았는데, 1931년 일제가 심양을 공략하고 다시 ‘심양시’를 ‘봉천시’로 바꿔놓았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심양이란 도칭이 702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비해 봉천이란 이름은 341년밖에 되지 않는다.
다음 지명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그 유래가 있는 법이고 유래는 대다수가 전설에 의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당연히 심양이란 지명도 유구한 유래를 갖고 있고 이에 관련된 전설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심수(沈水, 강 이름)북안의 石嘴頭山 기슭에 沈哥라는 총각이 있었다. 그 해 심수가 갑자기 범람하여 사처에 홍수가 졌고, 본래 심수의 용왕인 三頭蛟의 작간이었다. 沈哥가 三頭蛟를 찾아 백성을 위해 악귀를 없애려고 결심했다. 바로 그때 東梅용왕의 셋째 딸 羊妹의 부모가 그녀를 외사촌오빠인 三頭蛟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부모 모르게 심수용궁에 친히 외사촌오빠의 성품을 알아보려고 달려왔는데, 三頭蛟는 한참 ‘童男宴’을 크게 베풀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화가 나 沈哥를 도와 三頭蛟를 없애려고 결심했다. 그녀는 龍衣를 沈哥에게 입히고 “이 옷을 입으면 하늘에 날아오를 수 있고 불바다에 가서 태양오빠를 옮겨올 수 있으며 오로지 태양오빠가 三頭蛟를 태워버릴 수 있사옵니다.”고 아뢰었다. 沈哥가 불바다에 뛰어들어 몸이 타 연기가 나고 있었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태양을 지고 달렸다. 심수에 돌아왔을 때 三頭蛟는 羊妹를 필사적으로 물에 밀어 넣고 있었고, 그는 황급히 태양을 물에 향해 던졌다. 三頭蛟가 태양에 그을려 재가 되었으나 그도 더는 지탱할 수가 없어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羊妹가 다급해 “沈哥!”라 부르면서 강물에 뛰어들었다. 허나 그녀는 자신의 龍衣를 이미 沈哥에게 준 것을 까맣게 잊었다. 마을 사람들이 백방으로 심수에서 沈哥와 羊妹의 시체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심수북안에 비석을 세우고 “沈羊”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 후에 이 비석을 중심으로 촌락이 수건되고 城池를 마련했으며 이곳을 ‘沈羊’이라 불렀는데, 마침 沈水陽面에 위치한 까닭에 후세사람들이 沈哥, 羊妹, 三頭蛟의 이야기를 모르고 ‘沈羊’을 ‘沈陽’이라 잘못 불러왔다고 한다.
‘沈羊’은 전설이고 ‘沈陽’은 심수양면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전설이든 심수양면이든 모도 ‘沈’은 심수란 강에서 유래된 것이지 결코 박명호 씨의 지적처럼 ‘침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심양이 ‘해가 진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느니,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한족들이 만주족에게 당한 패배의식에서 심양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느니, 옛날‘하늘을 받든다’던 봉천이 그 정반대로 ‘해가 침몰하는’ 뜻인 심양으로 바꿨다느니, 이 코미디라도 수준이하의 코미디 같은 글을 소위 소설가란 양반이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 개인 생각으로는 저자가 중국역사에 대해 무지한 탓이고, 유래가 있는 지명을 글자 그대로 ‘望文生意’하여 주관억측으로 자의적으로 코미디 식으로 풀이한 결과이고, 저자의 의중에 만주를 찬양하고 현재 중국 한족에 대한 편견이 마음속 구석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코미디 같은 글들이 발표되면 한국 내 독자들에게 피해 될 뿐만 아니라 중한관계에도 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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