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批林批孔의 내막
천안문광장 모택동 곁에 공자가 모셔졌다. 요즘 중국사회에서 이를 두고 갑을박론이 펼쳐지고 있다. 모택동시대에 뼈도 추스릴 수 없게 난도질 당하던 공자가 모택동과 같은 위인으로 모셔졌으니 그럴 수밖에!
공자는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와 같이 동서양에서 공통으로 인정하는 사대성인에 속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공자처럼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한 성인이 없다.
처음으로 진시황에 의해 죽었다. 한조 동중서에 의해 공자가 하나님 격으로 모셔졌다가 위진남북조시대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해 송조에 이르기까지 노자와 부처한테 외면당했다. 남송의 신유학창시자인 주희 덕분에 다시 위인으로 받들렸고 명말 이탁오에게 한바탕 두들겨 맞았다. 20세기 초 노신이 유교를 사람을 잡아먹는 종교라고 칼을 빼들었고 따라서 공자는 또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신중국 건립 후 중국공산당은 계급투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계급분류엔 여러 가지 방법과 방식이 있었지만 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유물론과 유심론의 이분법으로 계급을 분류했다. 이것이 소위 혁명(유물론)과 반혁명(유심론)의 논리로 비화되었다. 이런 맥락으로 흘러 공자비판은 1971년 임표가 죽고 나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당시 소학생부터 운신조차 힘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으로부터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농군에 이르기까지 멋도 모르고 외치던 ‘비림비공운동’이다.
2,500년 전의 공자와 중국현대정치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임표가 대체 어떤 관련이 있었기에 한 몽둥이에 물매를 맞았을까?
임표는 이른바 ‘천재사관’을 주장했다. 이것이 선험론적인 유심론이며 영웅이 역사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역사를 창조했다는 유물론에 위배되었기에 공자사상과 일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와 임표를 한 꼬챙이에 달아놓고 두들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그럴듯한 명분이다.
허나 내막을 들춰보면 비림비공운동의 실제목적이 따로 있었다.
리차드·닉슨이 저서 <미래 영수들에게>에서 “모의 만년의 정치실패엔 부인 강청의 탓이 컸다.”고 지적했다. 세인이 아는 바와 같이 모는 만년에 부인 강청을 통제할 수 없었다. 강은 굴레 벗은 말처럼 날뛰었고 황하대륙의 주인(여황)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강은 모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던 임표 생전에는 그 기세에 눌려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가 임이 죽자 곧바로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앞에 또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있는 인물이 있다.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여황이 될 수 없다. 그가 바로 인민의 애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주은래였다.
주은래는 마치 유방과 한신에 비유되는 것처럼 모와의 관계가 돈독했다. 그런 인물을 어떻게 제거할까?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 강청으로 불리는 4인방이 궁리 끝에 비림비공운동을 빌어 화살을 주에게 돌리기로 작정했다.
무슨 말이냐? 신중국혁명은 사람마다 태도가 분명할 것을 요구한다. 즉 다시 말해 유교가 제창하는 중용은 혁명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이쪽저쪽 다 살피는 습성을 지닌 주은래야말로 명실상부한 중용사상이 가장 농후한 일인자라는 것이다. 또 주은래야말로 대표적인 재상유(宰相儒)라 낙인을 찍어놓고 비림비공운동을 빌어 간접적인 무기로 주은래를 거꾸러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리하여 말하면 임표와 공자는 정치적으로 한 꼬챙이에 묶을 이유가 없었으나 억지로 외형적인 모양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무기로 주은래를 죽이고 황하대륙을 4인방의 천하로 만들려고 한 것이 비림비공운동의 실제내막이었다.
중국동포타운신문 1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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