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룡남시인
2019년 04월 27일 19시 59분
조룡남시인과 저 그리고 <<옥을 파간 자리>>/ 최흔
오늘은 조룡남시인의 타계 일주년을 기념하여 연변작가협회에서 기념행사를 조직한데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저는 조룡남시인의 지인으로서 조룡남시인이 생평과 작품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고저 한다.
지난해 12월 저는 덴마크에 있는 딸집에 가서 한가한 나날을 보내다나니 조룡남시인의 장례에 참가하지 못하여 느을 가슴이 쓰리였다. 저는 평소에 시인의 암이 가짜 암이라고 말하면서 덴마크에 다녀올만큼한 시간내에 조룡남시인은 타계하지 않으리라고 믿으면서 간다는 말만 전 하고 덴마크로 갔댔다. 그것이 마지막 리별일 줄은 전혀 몰랐던 그 아둔함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룡남 시인님이시여 죄송스럽습니다.
조룡남시인은 우리 로세대시인들 중에서 시개성이 가장 돌출한 시인중의 한사람이다. 제가 조룡남시인과 가까이 지내게 된것은 아마 장시 <<아, 청산골>> 때문이였던것 같다. 이 시는 당년에 발표할 곳이 없는 문제작이였다. 지금 보면 아무렇지도 아닌 작품인데 문학지 편집이 도리머리를 저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파는 모자를 벗겨버렸지만 우파에 관한 시는 발표할수 없던 때였기 때문이였다. 아마 우파투쟁이 완전히 잘못 되였다는것이 해명된 초기였다고 생각된다. 저는 그전에 조시인한테서 보았던 그 문제작이 생각나서 원고를 달라고 하였다. 조시인은 발표할 수 있겠는가고 반신반의하면서 저에게 <아, 청산골>이라는 원고를 넘겨주었다. 저는 한글자도 손대지 않고 원고를 발간하였는데 반응이 열렬하였고, 후에는 전국 소수민족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조시인의 위망도 당연히 한급 높아지였다.
한번은 조시인이 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였다. 제가 병문안을 갔는데 시를 썼다면서 저한테 종이장을 넘겨주었다. <<병상시초>>라는 시였는데 감정도 뜨겁과 환상도 풍부하여 저는 그 시를 가져다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웬걸 하늘땅이 뒤집힐 줄이야. 우파분자가 권토중래하여 공산당을 보복하는 시를 신성한 당보에 냈다고 란리가 벌어졌다. 며칠후 신문사 주필과 부주필들이 모여앉아 저더러 편집착오를 승인하라고 윽박질렀다. 족히 세시간은 말도 안되는 비평을 당했다. 퇴근시간이 되여 온다고 빨리 태도를 표시하라고 하였다. 눈치를 보니 괜한 짓들을 벌렸음이 알리였다. 저는 <<모두들 나쁘다고 하니까 앞으로 사회효과에 주의를 돌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저와 조시인은 날이 갈수록 더 가까와 지였다. 그도 그럴것이 하마트면 둘다 비판투쟁을 받으며 고역을 치를 번 했으니까.
저는 조시인에게 울보라는 별명을 하나 달아주었다. 시를 쓴다는 것이 죄다 가슴에 응어리졌던 울분을 토하는 것이였다. <<병상시초>>를 제외하고도 <<아. 청산골>>이며 <<옥을 파간 자리>><<해빙기 강변>>, <<꿀벌의 죽음>>를 제외하고도 고향을 노래해도 사랑을 노래해도 조시인의 시는 모두가 밑바닥에 울음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울분에 의하여 산생되였고, 눈물에 의하여 산생되는 것이였다. 그래서 저는 조시인의 모든 작품은 현시대의 한을 뿜어낸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한시대의 뒤안길을 쓴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후에 저는 조시인한테 또 <<바보>>라는 두번째 별명을 달아주었다. 그를 바보라고 부른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는 1950년대 초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스무살도 안되였던것이다. <<반디불>>이라는 유명한 동요와 <<제비네 학교>>라는 명동요를 발표하였고 후에는 <<날아다니는 열매>> 라는 명동시를 발표하였다. 작가가 우파라는 모자를 썼든 말았든, 어떤 고관대작들이 그의 작품을 지옥에 처넣으라고 명령을 내렸든 말았든 백성들과 아니들은 줄창 <<반짝반짝 반디불>> 하고 수십년을 기분나게 노래를 불렀다. 문화대혁명이 지나가고 작가협회가 다시 나타났지만 주석단에는 조시인의 이름이 없었다. 시간이 써억 지나서야 시분과 주임이란 이름이 차례졌고, 남들이 다 해먹은 다음에야 부주석이란 자리가 차례이였는데 그나마 말석이였다. 조시인은 언제나 제때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시인이였다. 이것이 첫번째 원인이다.
그는 퇴직후에도 그냥 출근하면서 일을 했다. 저는 그에게 이젠 일을 그만하고 자기가 겪은 우파생활이나 소설로 써보라고 권고했다. 22살 꽃나이에 우파에 걸려 45살이 되여서야 완전히 해방을 받았으니 그의 황금시절은 지옥에 묻혀있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을 장편실화라도 쓰면 얼마나 값진 것이랴! 그런데 조시인은 잃어버린 청춘으로 하여 일을 못한 것이 섭섭했던지 아니면 쓰기 싫어서 그랬던지 체계적으로 쓸 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바보가 아니고 우었이랴.
제가 이런 말을 하는것은 조시인의 작품을 리해하려면 조시인의 생애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시 <<옥을 파간 자리>>와 같은 상징성이 강한 작품을 리해하려면 조룡남시인이 어떤 사람이였던가를 짚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시는 자아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조시인의 시는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과 직결된다. 그의 시는 그의 사상,감정, 추구가 너무 진실하게 깔려있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일 것이다. 이제 조룡남시인의 대료작으로 될수 있는 <<옥을 파간 자리>>를 구체적으로 보기로 하자
내 가슴에는 웅덩이 하나
그것은 오래전에 옥을 파간 자리
나는 모른다 그 옥이 지금은
누구의 머리를 장식했는지
내 가슴에는 웅덩이 하나
그것은 오래전에 옥을 파간 자리
오랜 세월이 흘러갔건만
오늘은 웅덩이에 허연 소금이 돋히여
마를 줄 모르는 비물 눈물이 고여있다.
고요한 환경에서 한번 읽어만 봐도 속으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옥을 파간 자리가 가리키는 것이 우파에 걸려 빼았긴 조룡남시인의 청춘이라고 생각해 보자. 너무너무 처절하다. 정말 분통이 터질 일이 아닐수 없다. 황차 그 옥이 누구의 머리 장식품이 되였고 누구의 빛나는 목결이가 되였단다. 스물두살, 얼마나 찬란한 나이인가! 스물두살 얼마나 창창한 앞길인가! 그 스물두살에 우파로 몰려 조시인은 스물두살보다 더 많은 스물세해동안 인권이 없는 생활에 시달리였다. 스물두살 시인을 잡아놓고 누구는 대단한 공로를 세웠을 것이고 누구는 행운아가 되였을 것이고, 누구는 급도 췄을 것이다. 조시인은 죽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23년후에 다시 문단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초기에 그를 동정하는 문인은 있어도 그를 알아주는 문인은 별로 없었다. 우파라는 그림자가 그냥 그의 뒤를 따라다니였다. 시 그대로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오늘도 웅덩이에 소금이 돋히여/마를 줄 모르는 비물 눈물이 고여있다>> 고 조시인은 쓸쓸하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고독의 비탄을 토해내고 있으며 한없는 억울함을 토해내고 있다.
조룡남시인은 전생에 468수의 시를 창작하여 발표였는데 시인의 3권의 시집에는 467수의 시가 실려있다. 한수가 빠진 것은 <<병상시초>>에서 직접 쓸쓸하고 황량한 우파생활을 쓴 한수이다.
조시인은 생전에 우리 조선족시인들이 받아야 할 문학상을 거이다 받았지만 <<옥을 파간 자리>>만은 한번도 상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시인의 대표작을 꼽을 때에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 <<옥을 파간 자리>>가 최대의 잇슈로 떠오르군 한다.
왜 그런가?
시란 상상의 산물이다. 이 시는 상상의 폭이 넓고 상상의 심도가 깊고 시적언어의 밀도가 비교적 치밀하다. 그러기 때문에 음미하여 보지 않으면 이 시의 알짜맛을 알기 어렵다. 이 시는 조시인의 피눈물이 앙금된 시이다. 조시인은 붓으로 이 시를 쓴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온 몸으로 이 시를 썼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시의 상상에는 재생적 상상, 복합적 상상, 생산적 상상 세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상상중에서 제일 중요한 상상은 생산적 상상이다. 생산적 상상은 기억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 내야 한다. 즉 련상의 기초우에서 새로운 상상의 사물을 생산해 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상상할수 있지만 누구나 다 시를 쓸수 있는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생산적 상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상은 신비스럽고 환상적이며 바로 그러한 상상속에 예술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상속에서 태여난 사물은 실제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허상이다. 조시인은 자기의 시에서 이 허상을 잘 발굴하였다.
세상에는 세가지 보물이 있다. 금,은,옥이다. 시인 조룡남은 잃어버린 청춘을 옥이라고 하였다. 왜 옥이라고 하는가? 귀중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열줄의 짧은 시에서 이렇게 반복하고 있다. <<내 가슴에는 웅덩이 하나/ 그것은 오래전에 옥을 파간 자리>>. 옥을 파간 자리가 주먹만큼한 것도 아니고 웅덩이 만큼하단다. 사람의 가슴에는 웅덩이라는 것도 없고 옥이라는 것도 없다. 가슴에 웅덩이가 있다는 것은 문학적으로는 통하지만 실제적으로 말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시에서는 이렇게 새빨간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통하고 있으며, 이것이 곧마로 생산적 상상의 산물인 것이다. <<옥을 파간 자리>>가 좋다고 하는 것은 조시인이 바로 이 창조적 상상에 발을 붙이고 시를 창작하였기 때문이다. 시에서 나오는 웅덩이는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웅덩이가 아니고, 옥은 산이나 들이나 그 어떤 땅에서 캐낸 것이 아닌 언어로만 존재하는 옥인 것이다. 이런 옥이나 웅덩이는 시인의 오관에 의하여 산생하는 것이 아니라 제6감각에 의하여 창출해 낸 것이다. 6감각이란 어떤 것인가? 오관에 의하여 감각을 받았거나 련상에 의하여 떠오른 영상에 의하여 새로운 상상을 떠올린 이미지를 말한다.
<<오늘도 웅덩이엔 허연 소금 돋히여/마를 줄 모르는 비물 눈물이 고이여 있다>> 조시인은 이렇게 시를 마무리한다. 그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이런 이미지로 이 시의 종지부를 찍었겠는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아픔의 깊이를 다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허연 소금이란 어떤것일가? 썩지 않는 것이 소금이다. 화자의 생애에 영원히 아물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상처! 그 상처에 고여있는 것은 자연사물로서의 비물과 눈물이 아니라 화자의 설음이, 눈물이 그것도 인간의 뼈에서 우러져 나오는 설음이며 눈물이며 아픔과 한인 것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웃으며 사는 화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울며 사는 화자를 보게 된다. 그 어느 시각, 그 어느 장소에 선들 상처의 모진 아픔을 달래며 감내하지 않았으랴. 여기서 우리는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며 사는 화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조룡남시인이라고 생각할 때 실로 조룡남은 불쌍한 시인이며 울보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고통과 시는 정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시는 외롭기 때문에, 고독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기 때문에 쓴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시는 시인이 받은 스트레스 깊이와 너비에 의하여 심각성이 결정된다고 하겠다. 23년 동안 숨도 제대로 쉬며 살아보지 못한 조시인의 점철한 고통은 하늘이나 알 일이다. 마를줄 모르는 비통을 누구와 이야기하여야 23년 동안 쌓인 아픔과 한이 다 풀릴 수 있었으랴.
시인의 눈에 흙이 들어갔어도 그의 가슴에 패인 웅덩이는 메워지지 않았다. 그냥 력사의 상처로 남아서 후세를 울리고 있다. 영원히 사라질수 없는 이 웅덩이와 옥은 빛나는 등대로 남을 것이다!
조룡남 시인은 해방후 조선족문단에 데뷔한 제1대 시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 조선족문단의 거목이시다. 이 거목은 력사의 증언자이며 시대의 불행아이며 시단의 기념비이다.
고 조룡남시인이시여 영원하시라.
2017년12월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