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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시집 기상도 정진명
■다시 시집을 읽으며 내가 이른바 등단이라는 걸 한 것이 1987년도 겨울이니까, 벌써 15년도 더 된 적의 일이다. 등단이랍시고 한 뒤로 변변한 활동도 보여주지 못하다가 1993년에 시집 두 권을 내고는 그 뒤로 세상으로부터 눈을 떼었으니, 정확히는 10년 세월을 눈감고 보낸 셈이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그것을 회복하려고 활쏘기를 배웠고, 곁들이로 배운 활에 미쳐서 문단이라는 동네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1994년 2월에 집궁을 했으니, 정확히 10년이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글쟁이의 고약한 심사가 발동하여 그 동안 내 의지와는 조금 다르게 활에 관한 책을 몇 권 썼고, 그것이 문단에 눈 돌릴 경황이 없는 원인을 제공했다. 10년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보니 활 쪽에서 내가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들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그러니 이제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떠밀렸다. 그렇다고 해서 활을 쏘는 동안에 시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활을 쏘면서 건강이 회복되는 그 정력을 시로 분출했기 때문에 건강이 더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 수준을 유지하게 된 데는 활에서 얻은 에너지를 시 쪽으로 옮겨버린 것이 원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만큼 나는 시를 많이 썼다. 10년 세월 1천 편을 썼으면 결코 적은 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생에서 내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시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동안 눈을 뗐던 세상 실정을 알아보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앞섰다. 가장 좋고 빠른 방법으로 우선 그 동안 읽지 못한 남의 시를 우선 읽기로 했고, 그 목표를 1천 권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2003년 하반기부터 읽기 시작해서 2004년 하반기로 접어드는 지금 850권 째를 통과했다. 이 작전에는 방법이고 뭐고 없다. 손에 잡히는 것을 다 읽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간행된 시집들을 닥치는 대로 순서 없이 읽으면서 보니, 내가 눈을 잠시 떼었던 지난 10년간 진행되어온 문단의 변화랄까 이런 것이 눈에 보여, 그것을 한 번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그런 작업의 뒷목인 셈이다.
▼2004년에 보는 시집 기상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원래 사주 명리학의 대운을 셈하는 방법에서 나온 말이지만, 지난 10년 세월의 문단 변화에도 이 말은 적실하다. 가장 먼저, 그리고 손쉽게 눈에 띄는 것은 1980년대를 어떤 당위성처럼 몰아쳤던 노동문학의 몰락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징후일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의 고르바초프로부터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가 그 첫 단추의 징후였으니, 이후 옐친과 푸틴 정권을 거치면서 러시아는 격동이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순식간에 체제의 변화를 겪었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체제 변화는 그러한 체제를 꿈꾸며 사회 변혁을 시도하던 운동권 세력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것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사상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 변혁과 그 전망을 노래하던 시 역시 사상의 부재와 빈곤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징후는 시에서 사상운동의 맏형 노릇을 하던 창작과비평사의 변화에서 한눈에 드러난다. 반동보수화가 그것이다. 창비시선 100번까지 개괄해보면 대체로 작품성보다는 사회변혁과 양심을 가진 자들의 정직한 세계가 시집 출판의 기본 요건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100번을 넘어서면서 이런 구분점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실천문학사 같은 유사한 출판사의 시집 출판이 그런 분위기를 희석시켰을 것이다. 그러다가 200번 쪽으로 다가가면 그때는 사상성은 어디로 사라지고 작품의 완결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미 이때쯤이면 노동문학으로 대표되던 이데올로기가 시에서 힘을 잃고 그 반동으로 작품의 완결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미주의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노동문학을 얘기하면서 실천문학사를 빼놓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실천문학사는 창비보다 오히려 더욱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는 노릇을 해왔다. 그리고 시집으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니 이 잡지의 방향은 노동문학의 현주소를 잘 보여줄 수 있다. 2004년 상반기 현재 실천문학의 시집 시리즈는 156번까지 나왔다. 그런데 이 중에서 100번 이전의 시집들은 대부분 절판되어 구할 길이 없고 도종환이나 김남주 같은 유명 시인의 시집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근래에 출판된 100번 이후의 시집들 중에도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것이 있다. 이것은 실천문학사의 영업 담당자가 귀띔해준 사실이다. 그러니 이른바 노동판의 고단함과 노동자의 해방을 염원하는 작품들이 이른바 문학시장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쯤 되면 노동문학은 침체나 퇴조라는 말보다는 차라리 궤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싶다. 시는 노동을 말하기조차 꺼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시에서 남는 분야는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곶감 빼먹듯이 고독이나 우울, 절망 같은 것을 끄집어내어 영탄조로 노래하거나 낯설게 하기 수법으로 새롭게 포장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청률을 의식한 방송 편집과도 같은 것이어서 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다. 문제는 창비가 여기에 발벗고 나섰다는 점이다. 아마도 시장성 확보와 생존 전략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런 변신이 신자유주의의 경제논리에 백기를 들고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변화된 환경 속에서 출판사가 살아남아야 그나마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궁색한 논리를 앞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등뼈를 발라낸 뒤에는 사람이 설 수 없는 것처럼 창비가 추구한 민족 민중주의 정신을 빼면 창비의 시에서 건져낼 만한 것은 없다. 창비의 변신은 생존의 논리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그러한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의 근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점을 낳는다. 추종자들을 한 순간에 역사의 천덕꾸러기로 만드는 어이없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어떤 변명을 해도 창비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창비의 이런 변화는 다른 출판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창비가 잠식한 부분은 그 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꾸준하게 전담하다시피 한 부분인데, 창비쪽에서 시장을 잠식해 들어오자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방향전환을 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는 유미주의, 쾌락주의, 실험주의화로 귀결된다. 창비에게 잠식당한 시장을 실험시 쪽으로 극단화하여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는 방향을 택한 것이 주된 전략이다. 문학과지성시인선 200번 언저리에 포진한 시집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쉽게 확인되는 것은 김행숙, 윤병무, 함성호, 김중, 조인선, 김점용, 성기완 류의 시집들이다. 이들은 현실에 대한 문제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착을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또 이미지 조작을 통해서 그것을 무의식 내지는 집단무의식까지 파고들려는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맹랑한 것들도 있어 이런 경향들이 시의 한 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런 현상을 문지 2세대 현상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문지 1세대와 이들의 관계이다. 문지 1세대는 황동규, 오규원, 이하석, 이태수, 이기철 같은 사람들이다. 2세대에 견주면 이들은 실험시보다는 오히려 전통 서정시에 가깝다. 그것은 아마도 그 후의 작품들 때문에 실험성이 덜 심해 보여서 생긴 현상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시를 계속 쓰고 시집을 계속 내면서 2세대의 특징을 시집체계 안에서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사의 시간 누적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1970년대 중반에 창비를 필두로 문지와 민음사 세 곳에서 시리즈로 시집을 내면서 시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러다 보니 문단에 일정한 구획이 그어지고 그에 따라서 출판사 가족 비슷한 무리가 생겼다. 한 20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출판사별로 1년에 시집을 내는 권수는 제한되고, 이 식구들은 불어나면서 시집 출간의 일정량을 스스로 채워 이제는 시집을 내겠다고 청탁하는 사람들이 불필요해지는 식구 과잉이 생긴 것이다. 제 식구 챙기기에도 바쁜 상황이 벌어진 이 사태 앞에서 불리한 것은 당연히 신인들이다. 이들의 시집 출판이 어려워졌고, 이것은 그 식구들이 갖는 어떤 경향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전에는 어느 집단으로 소속되기 힘들게 되며, 그것은 신인들이 쉽게 길들여지는 아주 보기 안 좋은 결과를 유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경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문학과지성시인선이다. 그러나 문제는 창비와 문지 두 군데 모두 이러한 경향의 원칙에서 엉뚱하게 벗어나는 시집을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작품 수준도 형편없을뿐더러 경향도 다른 시집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가족온정주의가 얼마나 끈질기고 불편한 함정으로 한국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가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기득권 밖의 세력들은 새로운 모색을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같은 구도를 비집고 등장한 출판사 가운데 세계사와 문학동네의 약진이 두드러져 보인다. 세계사는 1989년 하반기에 1호를 내는 것으로 벌써 100호를 채우고 새로운 기획으로 전환했다. 무엇보다도 세계사는 선발주자인 민음사, 창작과비평사, 문학과지성사가 지닌 온정주의의 폐해를 단호하게 극복하고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시집을 기획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도시문명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기획을 하여 일정한 작품들을 엮었다. 물론 대부분 앞의 세 출판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시인들이지만 앞의 세 출판사가 자신들의 원칙을 스스로 허무는 시집들을 간간이 낸 것에 견주면 세계사의 원칙고수는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고, 어려웠을 일이며, 이것은 분명히 역사의 평가를 받을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문학과지성사의 기획과 어떤 차별성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남은 숙제이다. 문학동네는 1994년부터 시집을 기획 출판했다. 그런데 문학동네 시집의 특징은 앞의 다른 출판사들과 특별히 구별되는 바가 없다. 문명비판이나 현실 참여도 아니고 개인의 상상력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어서 후발주자로서 갖는 신선함이 다소 떨어진다. 굳이 문학동네 시집의 특징을 찾아본다면 시의 완결성에 있다는 점이다. 즉 그 이전 출판사의 시집들 중에는 형편없는 작품들이 많아서 작품의 완성도나 경향보다는 사람 때문에 시집을 내주었다는 혐의가 짙은 시집들이 많다. 그러나 문학동네의 시집을 보면, 앞 번호 쪽의 형편없는 몇 권을 제외하면, 형상화 면에서 일정한 선을 넘고 있다는 점이 나타난다. 나름대로 시의 수준을 정해놓고 좀 처진다 싶은 작품들은 제외시켜서 시집의 형상화 수준을 고르게 유지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시가 작품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판단을 하면 이러한 시도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유미주의 경향에 집착하면 때로는 시가 말장난으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것들에 대해 사상성을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 가져올 후환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시의 완성도도 사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상이 곧 정치 이데올로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 간단히 밝혀둔다. 그리고 이들보다 좀 늦었지만 새로운 시도로 시리즈 시집을 내는 출판사가 나타났다. 천년의시작사나 시와시학사, 문학과경계사, 문학판, 시선 같은 출판사들이 그런 경우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다양해진 시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만 써놓으면 시집 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시가 어느 정도 수준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시인들은 정말 행복한 고민을 할 때이다. 좋은 시만 쓰면 그것을 내줄 출판사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시가 점점 위축되고 독자가 줄어드는 이 세계 문명의 주된 흐름 속에서 이는 분명히 한국시의 한 특이한 현상임이 분명하다. 이에 대한 분석은 다른 장을 요구할 것이다.
▼한국 시의 한 코미디, 신춘문예 좌주문생제라는 것이 있다. 좌주(座主)는 시험관을 말하는 것이고 문생(門生)은 그의 문하생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과거가 처음 시행되던 고려 때의 일이다. 시험관은 응시자의 당락을 결정짓는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 결과가 발표되고 나면 합격자는 자신을 뽑아준 좌주를 마치 아버지처럼 여기는 관행이다. 이것은 당시 고려사회의 귀족문벌을 견제하기 위해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은 선비들이 만든 관행이다. 그래서 성리학자인 이색도 이 제도의 좋은 점을 살리자는 논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자일 때의 문제이다. 이들이 왕의 후원을 입어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세력으로 성장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때는 권력의 중심에서 자기 권력을 확대재생산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전락하고 만다. 자기 식구 끌어주기라는 천박한 방법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고려 후기의 혼란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이 폐단을 절실하게 느낀 태종은 정치개혁의 첫 번째 슬로건으로 좌주문생제의 폐지를 주장하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조선조에서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 고착화될 때 이조 정랑 자리를 놓고 비슷한 소란이 반복되었다. 결국 선조조 이후에는 붕당정치라는 사색당파로 자리잡았고, 그것이 조선의 정치판도를 결정짓는 밑그림이 되어버렸다. 엉뚱하게도 좌주문생제를 거론하는 것은 이른바 추천이라고 하는 제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근대문학 형성기부터 오늘날까지 일관되게 적용되어 시인을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추천제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추천을 해주는 어떤 권력을 전제로 한다. 그 권력이 좌주문생제 초기의 취지를 살려서 이 땅에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진지한 고민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애초에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거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문제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추천하는 세력의 경제전략과 문화 패권 전략에 맞물려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추천 제도의 좋은 점을 들추어서 그 순기능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정 부분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추천 폐지론자조차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제도 때문에 상처받는 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상처는 추천 과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활동 방향과 시의 경향을 결정하는 것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인 것이다. 추천의 문턱을 엿보는 자는 아무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스스로 그런 경향에 기대고 그렇고 그런 평가 속에서 거기에 맞는 작품을 쓰는 풍조는 한국시의 장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좌주문생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이 추천의 관행은 옛날 과거제도의 악습이 봉건제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뒷골목 문화 속에 그대로 재연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언가 권위 있는 단체에 인정을 받아야 안심되고 그런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힘을 구사할 수 있다는 유치한 발상이 문학이라는 분야에 적용된 것이 추천제도의 본질이다. 구시대의 유습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칭찬 받아야 할 요소보다는 비판받아야 할 요인이 더 많다. 더구나 뽑는 자와 뽑히는 자의 관계가 뽑고 뽑히는 관계로 끝난다면 그만이겠지만, 그게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추천이라는 제도는 시인이 누려야 할 자유를 억압하는 한 기제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 권리이면서 족쇄가 된다. 이 권리와 족쇄는 그를 뽑은 사람과 잡지가 부여하는 것이고 평생 그 짐을 벗기 힘들다는 점에서 시인에게는 가장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하면 안 된다. 추천제도가 정말 불가피한 경우라면 문학지의 경우는 그래도 덜하다. 그러나 각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는 한 마디로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들이 추천해준 문인들에게 무슨 발표지면을 할애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후원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후원을 해준다는 것은 더 이상한 일이지만.) 문단 바깥의 문밖 권력이 언론이라는 한 조건만으로 시인 딱지를 붙이고 떼고 하는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고 쓰러진 장승이 벌떡 일어설 일이다. 그런 웃기는 일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언론의 장단에 춤추며 놀아나는 이 코미디야말로 한국 시가 지닌 모순의 한 극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의 시가 진정으로 발전하려면 이런 장난을 그치고 시집 발간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시인의 조건은 그가 지닌 타고난 재주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구력이다. 그런데 이른바 추천제도는 그 단발성으로 인해 이 지구력을 고려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고 나서도 몇 년 뒤에는 이름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시인이 나타나는 것이다. 시의 천재가 아닌 한 평생을 두고 시를 쓸 수 있는 지구력은 시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것을 추천제도는 감당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지구력을 측정하는 방법은 여러 해에 걸쳐서 시인에게 발표지면을 할애해주면서 마침내는 시집을 내주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호기심으로 잠시 얼굴을 비쳤다가 시큰둥해져서 스스로 주저앉아버리는 뜨내기들을 얼마든지 걷어낼 수 있고, 정말 시가 좋아서 평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살아남아서 시집으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문단 관행으로는 절대로 이것을 이룰 수 없다. 잡지사조차도 신인상 모집을 하면서 1회 10편 안팎의 작품으로 시인을 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반짝 재주보다는 그 시의 뒤에 서려있는 정신과 지구력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 10편 가지고는 그게 잘 나타나지 않는다. 추천자가 신통한 무당이 아니라면 알아볼 도리가 없다. 그러니 선무당이 신통한 무당이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신인들이 지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그들이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면 된다. 그것이 시단의 중진과 원로들이 해야 할 일이다. 당장 등 따시고 배부르다고 악습에 안주하는 것은 어른들이 하실 바가 못 된다.
▼사소하나 큰 문제① : 한자표기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 하나 생겼다. 새로 생긴 도서관인 만큼 모든 시설이 다 새로운 첨단이어서 대출부터 반납까지 모두 빌리는 사람 스스로 해야 하는 체제였다. 짬을 내서 돌아보고는 몇 차례 시집을 빌려다가 읽었는데 하루는 시집을 빌리려고 대출기 앞에 섰더니 컴퓨터 시스템이 고장나는 바람에 직원이 직접 접수를 받았다. 마침 그날 빌린 시집이 정희성의 <詩를 찾아서>였다. 대출장부에 기록을 하는 사람은 사서 아르바이트생이었는데 시집을 내밀자 표정에 곤혹스러운 빛이 잠시 스쳤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 이 아가씨가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대출 도서명을 적는 칸에 <사랑을 찾아서>라고 쓰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내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가운데 왜 <詩>를 <사랑>으로 읽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에 풀린 내 생각은 이렇다. 시집은 주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시집이 팔리는 상황이니, 아마도 <詩>는 사랑과 관련이 있는 말일 것이고 반납 받을 때 자신만 알아보면 되니 반납될 때 역시 이 의문의 문자를 <사랑>으로 읽으면 될 일이다. 이것이 나의 추정이다. 내 추측이 맞는지 안 맞는지 그 처녀에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왜 시에 한자를 쓰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암시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한자는 결코 시에서 용납해서는 안 될 이물질이 돼버린 것이다. 문제는 시인들의 의식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한계급이고, 그런 전통은 우리 사회가 인문학에 근거한 교양주의의 덕목을 존중하는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 정도는 어느 정도 멋으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근대시 초기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런 전통은 지금까지도 시에서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괴상망측한 인습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미지의 문제를 들어서 한자가 시에서 차지하는 이미지의 비중을 문제삼기도 하지만 그건 궤변 지나지 않는다. 이미지가 유독 한자에서만 버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이 궤변임을 증명해주기도 전에 이미 독자는 한자를 버린 것임을 도서관의 그 아가씨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시대는 한자의 함정을 건너 영어로 건너가 버렸다. 차라리 영어를 쓰는 것이 더 낯익다. 그것이 이 사건이 암시하는 바다. 한자를 버리지 못한 자는 시인들 자신일 뿐이다. 이미 시대는 한자를 버렸다. 옛날의 낡은 체제를 아쉬워하는 어설픈 지식이 한자로라도 권위를 한번 세워보려고 버둥거리고 있는 것이 한자 혼용의 본질이다. 게다가 시에서 한자를 쓰는 것이 이런 단순한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자를 쓰는 것은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허는 짓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한자는 봉건세계의 반영이고 청산되지 못한 낡은 시대의 굴레라는 점 때문이다. 세계사에서 상식으로 굳어진 사실이지만 한자는 중세의 공용어고 공용어와 민족어의 관계는 근대를 가르는 중요한 한 기준이 된다. 원래 근대는 중세 봉건체제가 허물어지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중세의 특징은 사상과 삶의 보편성에 있다. 그 보편성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몇 가지 큰 특징을 갖는다. 전제왕권의 확립, 율령체제의 성립, 보편종교의 존재, 보편언어의 성립과 같은 것이 그런 것들이다. 따라서 중세체제란 많은 논란이 있지만 동양에서는 일정한 전제왕권이 성립되어야 하며, 그 왕권을 실행하기 위한 법과 제도가 구비되어야 하고, 그것을 뒷받침하여 정신을 순화시킬 보편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천하에 두루 전달할 문자언어가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세 보편언어란 유럽에서는 라틴어, 동양에서는 한문을 말한다. 따라서 근대란 이들의 특징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즉 중국 중심의 세계 지배가 흔들리고 민족 중심의 국가가 탄생하며 기독교나 민중종교가 발생하여 기존의 보편종교인 유교, 불교의 체계를 흔드는 그런 시점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근대의 징후가 자국어의 확립이다. 이른바 ‘근대’가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전개되었다는 것은 세계사에서 일반화된 법칙이다. 라틴어로 쓰여서 종교권력자들만이 볼 수 있던 성서가 독일어, 불어, 영어, 스페인어 같은 지방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고 그들 스스로 그것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문화면에서 볼 수 있는 근대의 징후인 것이다. 여기서 합리와 이성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정신이 싹트는 것이다. 유럽의 근대국가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성립하고 발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라틴어로 시를 써서 영어권에서 발표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것은 곧 중세언어로 시를 쓰는 광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예외가 제 나라 시로 인정받는 나라가 있다. 한국의 오늘이 바로 그 나라이다. 역사에서도 삶에서도 이론상 중세가 이미 말끔히 청산된 이 나라의 현대시에서 아직도 중세의 유물인 한자는 그대로 생생히 살아 숨쉬는 것이다. 이 지독한 후진성과 자기모순을 예술과 문화의 선봉이라고 자부하는 시인들께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세계사의 흐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시인에게 한자표기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 언어체계에서 한자는 외국어이다. 그것도 제2 외국어로 분류된다. 영어에 제1 외국어의 자리를 넘겨준, 국민들의 선택권으로부터도 한 단계 더 떨어지는 먼 자리에 있는 문자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한자가 시의 독자층을 제한하는 아주 중요한 역기능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잖아도 시의 독자는 줄어든다. 시의 위기론은 결국 독자들이 감소한다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 위기를 가장 확실하게 부채질하는 것이 한자라는 것이다. 막말로 말해 시에 한자 한 글자를 쓰는데 수십 명의 독자가 시로부터 등을 돌리고 떠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소하나 큰 문제② : 문장부호 한자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이상하고 묘한 관행을 시인들이 반복하고 있는 문제가 문장부호이다. 산문의 경우에는 맞춤법에서 정한 규정에 따라 문장부호 체계를 정확히 지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인들은 무슨 특권을 부여받았는지 맞춤법 체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이다. 이 현상은 한두 명한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시인들에게서 나타난다. 너무 많아서 저것이 규칙위반인지 어떤지도 잘 판단이 안 갈 정도이다. 한글표기체계를 지키지 않는 시인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의 한글표기체계는 1933년에 확립되었다. 그때 맞춤법 통일안이 조선어학회에서 채택되었고, 그것은 알려진 대로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선어 말살 정책을 고수한 일본제국주의는 이들에게 갖은 죄목을 씌워 심한 고문을 했고, 결과는 두 명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원들도 유죄판결을 받은 나머지 복역을 했다. 일본제국주의 경찰은 그들이 완성한 <조선말 큰 사전> 원고를 독립운동의 근거자료로 파악했고, 마녀 사냥식의 악랄한 재판이 진행되던 도중에 다행히 해방이 되어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독립운동 단체들이 거의 다 지리멸렬하던 일제 말기에 우리측의 승리로 끝난 거의 유일한 사건이 바로 이 조선어학회 사건의 전말이었다. 이 민족운동사의 위대한 승리를 스스로 까먹고 먹칠을 하는 시인들의 행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마침표라든가 쉼표, 아라비아 숫자 같은 것들은 1933년 조선어 맞춤법 체제에서 이미 우리가 써야 할 것으로 채택되었고, 그것은 비록 우리 나라에서 연원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세계사의 대세와 올바른 언어체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쓰자고 합의를 본 것이다. 그때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면 그 뒤에 한글을 표현의 도구로 선택한 자들은 그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 존중이란 그 표기법을 최대한 성실하게 지켜주는 것이다. 시라고 해서 유독 그들의 선택을 굳이 무시해야 할 무슨 불가피한 이유가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시인들은 왜 시에 마침표를 찍는 데 그렇게 인색한가? 그것은 현행 표기법 체계에 대한 무지 때문이거나 그에 대한 가치관의 부재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한자와 표기법 관행을 보면 시인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정신의 문제 꽤 많은 시집을 읽으면서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묘한 의문 한 가지가 생겼다. 그것은 해방 후의 시들이 해방 전에 쓴 시들의 수준을 따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시의 수준이 후퇴했다는 말이다. 몇 번에 걸쳐서 확인하고 또 했지만, 확실히 해방 전의 시인들이 쓴 시와 그 후의 시는 보이지 않는 묘한 차이가 있다. 양은 어떨지 몰라도 질만큼은 분명한 차이가 난다. 그런데 그 양상과 이유가 분명히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또 다른 고민거리이다. 시집을 바꿔서 교대로 읽어보면 분명히 묘한 차이가 있는데, 증거는 잘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아있다. 어떻게 보면 시를 쓰는 솜씨나 말 다루는 재주는 오히려 해방 전보다 후가 더 나은 면도 있다. 현란한 어휘 구사나 시공을 뛰어넘는 상상력, 특히 최근에 보이는, 가늠하기 어려운 시들의 언어행진을 보면 동원된 말이나 수사 기교는 읽는 사람의 기를 죽이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혼의 울림은 해방 전의 시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것이 혹시 내가 옛 시에 익숙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최대한 선입견을 없앤 다음 읽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해방직후 그러니까 1950, 60년대에 활동한 시인들의 작품과 그 이전의 작품을 비교하면 그 질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따라서 내가 느끼는 의문은 단순히 개인의 능력 차이보다는 시대의 어떤 문제에서 발생하는 원인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정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시대를 기점으로 해서 시의 질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는 것이다. 그 정신이란 말할 것도 없이 조선시대를 지배해왔던 유교, 또는 그 주변의 문제이다. 일제강점기를 보낸 사람들은 삶과 사고에서 유교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마지막 세대이고 이것은 그들이 그 이전에 지배층의 행동과 사고에 절제력을 부여하던 세계관의 잠력을 내면에 갖고 있던 까닭에 그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무장한 그 이후의 후배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정치사상이기는 하지만 요즘 말하는 정치사상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신앙이라는 것은 영혼의 존재 근거를 묻는 것이고, 그것의 형식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가 현실정치에서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로 굳었지만, 그것이 한 개인에게는 행동과 사고, 나아가 믿음의 근거로 작용하는 종교 노릇까지도 떠맡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교는 단순히 자본주의라든가 민주주의라든가 하는 것과는 어딘가 다른 양상을 지닌다. 그 양상은 세계를 인식하는 형식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형식을 자신의 행동에 규율을 부여하는 어떤 내면의 기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신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세계를 해석하는 어떤 형식에 집착한다. 그 경우 그들의 의식 속에는 이기철학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주역의 음양오행이 뒤따른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보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 그들의 선배들이 해온 관행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의 정신이 보이지 않는 어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본능의 작용에 기대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본다. 바로 이런 보이지 않는 형식과 규율에 대해 내면화된 경향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 양식이 도입된 상황에서도 작용하여, 새로운 자유시를 개척하는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런 작용이 아니라면 당시로서는 별종에 가까운 이상의 시에서도 드러나는 엄정한 형식성과, 정지용의 시에서 드러나는 깔끔한 묘사방법, 만해의 시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깊이, 그리고 이육사의 시에서 보이는 살얼음을 걷듯 하면서도 지켜지는 묘한 긴장과 엑스타시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이미 여러 논자들이 이들의 근원에 대해 설명을 하고 어느 정도 그것이 성과를 이루고 있지만, 그것 가지고 그 후의 세대들이 이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까지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그 어려움은 바로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 나아가 내면화된 무의식의 형식에 대한 본능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한두 사람의 성과나 결과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관의 교체시기에 나타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본질과 그 원인을 묻는 것이다. 영혼을 울리는 시의 요소, 그것은 정신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해방 전후인 두 시기의 작품비교를 통해서 보는 것이다. 해방 후 특히 최근의 시는 해방 전의 시들보다 현란해졌고 화려해졌다. 그러나 작품이 주는 감동과 깊이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퇴보를 했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해방 전에 도달한 시의 경지는 1980년대의 노동문학도, 그 후의 문명비판도, 최근의 고독과 환멸 맛보기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로 우뚝 솟았다. 어떤 거대한 정신의 흔적이 아니고는 오를 수 없는 그런 경지이다. 그 거대한 정신은 유교와 조선 후기의 문화감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해방 전 세대가 이룬 놀라운 성취, 그리고 그 후의 세대가 해방 전 세대의 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은 유교라는 거대 이념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규율이 사라지면서 정신의 공황 상태가 오고 그것이 시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아마도 누군가 그와 유사한 경지를 개척하기 전까지는 해방 전의 세대가 보여준 높이는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정신의 벽 앞에 서있는 셈이다. 그 은산 철벽을 무엇으로 넘을 것인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 하나 : 노동문학 노동문학은 그칠 수 없다. 인간이 숨쉬고 먹고 싸고 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는 한 이 명제는 불변의 진리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과 인간의 관계 때문이다. 자본이 존재하는 한 그것이 인간사회에 야기한 갈등은 사라질 수 없고, 갈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자본에 대한 인간의 전쟁은 그칠 수 없는 것이다. 이때 전쟁은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한다는 것은 물질과 정신 두 측면에서 모두 자유를 쟁취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곧 해방이라는 말과 같으며 해방이란 여러 가지 질곡을 스스로 풀고 본래 한 몸이었던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내 안에서 평화로운 관계 속에 놓는 것을 말한다. 근원에 대한 이 같은 인간 본연의 갈등을 고착화시키고 그런 갈등을 전제로 해서 특권을 가진 자에게만 무한한 물질의 자유와 영혼의 타락을 부여하고 조장하기에 자본은 인간에게 악의 화신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전쟁은 날숨과 들숨이 교차하는 그 한 순간에도 쉴 수가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본이 현대 사회를 옥죄는 질곡의 원천이라면 그에 대한 인식과 해결 노력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데올로기 탐구가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실천하는 길이다. 그리고 문학에서 그러한 길로 드러난 것이 1980년대의 노동문학이다. 그런데 10년 세월 동안 흥기하던 이 기운이 또 10년 사이에 무슨 기피해야 할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렸으니, 이보다 황당한 일도 없을 것 같다. 1990년대를 지나고 2000년대 중반으로 접어든 현재 이 점을 지켜보면 황당해서 할 말이 없다. 박영근, 서정홍, 이선관, 김해자 같은 몇몇 시인들만이 지난 시절의 메아리처럼 노동의 언저리에서 그 고통을 이야기할 뿐 불과 10년 전 입에 게거품을 뿜으며 노동문학의 당위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던 자들이 갑자기 도사가 되어 공중부양을 하거나 제 안의 슬픔 속으로 퇴영하여 제살 깎아먹기를 자행하고 있다. 이들이 보인 행태의 황당무계함은 자본의 문제를 반대로 물으면 입증된다. 한국 사회에 뿌리박은 자본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한국사회의 노동자들이 모두 화이트 칼라화 되어서 더 이상 자본론의 분석과 그에 따른 실천이론 창출이 불필요해졌는가? 노동과 자본의 모순은 해결되었는가? 이 대답에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자본가들 중에서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원점이라는 얘기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노동문학의 대열은 사라졌다?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말이 변절이라는 낱말이다. 그렇다면 한국시의 변절자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사람들을 굳이 꼽을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 질문이 이름 없는 촌놈의 뜽금 없는 발언이 아니라 정의와 미래를 향해서 노도와 같이 진군하는 역사의 물음이라는 것은 이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할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한국시에서 노동문학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한국 노동자의 생존과 한국시의 지형을 결정짓는 주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회색분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다 떠난 자리에 남을 사람만 남은 이 어려운 시대에 꼭 필요하고 목청껏 외쳐야 할 말이 있다면 바로 이 말이다. “이제야말로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허리띠를 다시 조일 때다!”
▼간과해도 되는 문제 : 천민자본주의 몇 년 전에 서울대의 한 경제학 교수가 자신의 글에서 무심코 던진 말이 몇 년이 지난 오늘 노동계의 한국사회 평가답안처럼 자리잡은 말이 있다.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그것이다. 한국 자본가들의 천박한 노동관과 악랄한 사기성에 치를 떨던 노동자들은 이 말이 나오자마자 한국 자본의 모순을 한 마디로 압축한 말인 양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자본을 비난하는 심정이 빚어낸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문제가 있다. 감정이 실린 이런 시각은 자본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자본은 원래 천한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을 수 없고, 끝없는 탐욕만이 동력이 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그 앞에 천하다는 말을 붙인다고 해서 원래 천한 자본의 본질이 더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감정만 자극함으로써 사태의 본질을 희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천민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스스로 모순을 갖게 된다. 그것은 자본의 본질을 민족성의 문제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런 오류는 의외로 심각한 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 다른 나라, 그러니까 미국이나 유럽의 자본주의는 천민 같지 않고 신사 같다는 인식을 은근히 유포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자본의 성격과 흐름을 냉정하게 보는 시각에 혼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얼마든지 나쁜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1980년대에 한 때 유행했던 종속이론의 경우도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춘 경우라는 판단 같은 것이 그것이다. 종속이론은 남미라고 하는 특수한 경제조건 때문에 생긴 것이다. 미국의 주변부에서 자본이 중심부로 이동하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서 형성된 이론이고, 그것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그 본질을 희석시키거나 도외시했다는 비판을 받고는 썰물처럼 운동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있다. 개념의 모호성이나 방향 설정 오류는 때로 이런 커다란 문제점을 안는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는 천민자본주의라는 말도 그런 위험을 다분히 안고 있다. 자본은 민족의 문제나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사에서 나타나는 아주 보편화된 현상이며 거기에 작용하는 지역이나 민족의 문제는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자본의 전개과정에서 그런 요인을 무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것에 가려서 사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진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곧장 연결되기 때문이다.
■맺으며 한국 시는 두 가지 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로 시의 시대가 가고 있다는 사실과, 여기에 부합하여 시인들이 백기를 들고 자본에 투항했다는 사실이다. 시의 시대가 가고 있다는 것은 불가항력으로 치부한다고 해도 노동문학의 궤멸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들이 노동문학을 노래하든 말든 노동자들의 궁핍한 영혼은 지금도 자본의 바퀴 밑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그러한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한 노동문학의 당위성은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명명백백한 전제가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시가 다른 분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만이 갖는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즐겁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에 몰두하면서 그것이 시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은 인간의 순결한 영혼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를 드러내어 이 세계로부터 받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시의 행위를 한순간에 자위행위로 전락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 시는 말장난으로 떨어지고 만다. 시집으로 둘러본 현재의 한국 시는 이미 그런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야말로 그런 말장난을 넘어서 정신의 영역으로 나아가 시의 건강성을 되찾을 때다. 그 말장난과 정신의 경계에 노동문학이 흐르고 있다. 이것을 첨벙거리며 건너지 않고서 어찌 우화등선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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