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2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31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시인이란 명칭은 줄곧 있었다... " --- 시인 牛漢
2015년 02월 16일 17시 54분  조회:4832  추천:0  작성자: 죽림
     
 
 
 
중국현대시론
 
     
 
척추가 아주 곧은 시인, 뉴한牛漢
 
                                     김금용 

 

 

                     

 

시를 배반한 적이 없다

 

  

 “ 시인이라 불리는 게 제일 좋다. 중국은 옛적부터 소설가라거나 극작가라든가 하는 명칭은 없었어도 시인이란 명칭은 줄곧 있었다. 즉 시를 쓴다고 해서만 시인이라 불리지는 않았다. 모든 개체의 생명을 떠나서는 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면, 시와 사람은 나눠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과 시를 분리해서 쓰다가 추락하고 시 역시 그를 떠난다. 시를 쓰는 건 쉽지 않다. 시를 써서는 부귀를 이룰 수 없다. 심지어 더 곤란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생명은 그로 인해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한번도 시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젊음 가운데 있음을 느낀다. 차이치자오蔡其矫는 80 여 세에도 아이들 기운이 넘치고 리잉李瑛 시인도 80 세에 여전히 신체가 청년 같다. 그들 모두 노년에도 시를 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렇게 청춘의 빛을 발하게 한다. “

 

   2007년 10월 17일, 중국작가협회 주관으로 이뤄진 <시간詩刊>사 제 23회 ‘젊은 시 회의’에서 젊은 시인들이 존경과 갈망의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머리가 희끗한 팔순의 노시인은 큰 체격과 형형한 눈빛으로 둘러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발걸음도 확실하게 무대에 섰다.  평생 시에만 몰두해 온 노시인의 이런 시에 대한 인식과 그 깨달음은 무대 아래의 청년 시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모진 비바람과 역사의 대재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시인 본색의 정신을 이 노시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허리가 곧다. 아니, 나의 척추는 아주 곧다. ” 뉴한의 유머러스한 말에는 시의 맛이 있다. 그의 건강한 신체를 부러워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는 말한다. 20 여 년간의 노동으로 오히려 이득을 보았다고,..불행했던 과거를 한 마디 가벼운 유머로 넘겨버리는 그에게서 무수한 담금질로 마침내 찬란하게 빛나는 삶의 값진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뉴한牛漢은 1955년부터 1980년 가을 핑반平反(* 문혁이 끝나면서 노동개조소로 끌려갔던 지식층들의 신분을 다시 회복시킨 일련의 제도)이 될 때까지 20여 년간 절필을 당했었다. 이 때 그는 굶주림, 박해, 구속 감금, 심판, 유랑, 노동개조소에서의 중노동, 중형,..등등,  “고난으로 풍부해진 삶” 그 자체였었다.

“나로 하여금 고난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하나도 어렵지 않다. 나의 시에는 모두 있기 때문이다. 피눈물, 분노, 고소,..등등, 그러나 나는 고난에 고개 숙인 적이 없고, 후퇴도 없었고, 추락도, 투항도, 내 스스로 양심에 대한 배반도 없었으며 인문정신을 배반한 적도 시를 배반한 적도 없었다. 왜냐면 나는 더 높은 곳을 지향하며 현실규범 일체를 초탈, 인문의 경지를 넘어 어떤 것과도 비교하지 않고 오직 그 가치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시를 위해, 문학을 위해, 나는 일체를 내놓을 수 있다. 어떤 상황 아래서도 나는 시를 포기하지 않으며 문학창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시와 나의 인생의 경력은 나눌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 쓴다는 것은 내심의 활동을 자서한다는 것이며 내 생명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중국 현대 대표시인인 아이칭艾青(1910──1996)이  “ 고난은 행복보다 더 아름답다. ” 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뉴한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뉴한은 항일운동과 시를 쓰면서도 늘 옷섶에 독창적이고도 허다한 민족고난의 정경이 응집된 아이칭의 《북방北方》시집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그만큼 아이칭의 영향은 컸다. 그는 문화혁명이 끝난 뒤 비판을 받던 아이칭艾青을 위시한 일련의 시인들이 다시 복귀하자 그들의 새 흐름이 된 "귀래(归来)"파에 들어가 80년대부터 시작된 <신시新诗운동>의 주류가 되었으며 <칠월파>의 한 사람으로도 활동하였다.

 

시는 생명 통곡의 진실된 기록이다  

 

“1955년 구금되어 반혁명모자를 25년간이나 썼던 동안 나는 공민권이 없었다. 작품을 발표할 권리도 없었다. 노동개조소나 단위(기관, 혹은 공장 등 단체기관을 가리킴)에서 시키는 대로 초대장이며 편집이나 하다가 농촌에서 노동을 하며 지냈다. 2 년 3 년 또 그렇게 해를 보냈고,  팔달령 만리장성으로 다시 옮겨갔을 때, 그 시절은 정말 어이없도록 황막해서 행복이란 단어는 다시는 없을 줄 알았다.”

 “대체로 비통한 사람이란 많은 오해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박해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대재난을 겪은 사람만이 행복을 이해할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공허한 게 아니다. 현실을 즐기는 게 아니다. 행복은 자발적인 내면의 추구에서 얻어지는 일종의 이상의 경지이다. ” 이런 뉴한의 주장대로 행복은 바로 이런 끊이지 않는 추구, 발현, 돌파, 재추구의 과정 중에 있지 않을까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뉴한은 많고도 많은 고난을 이겨낸 사람이다. 유랑, 기아 핍박, 구속, 수감생활, 노동개조소 생활, 살기 위한 숱한 노동과 수모,..그의 시는 이런 “풍부한 생명 통곡의 진실된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곳곳에서 피눈물, 분노, 항의,.등이 보인다. 그는 말한다. “나는 일종의 더 높고도 숭고한 정신력을 믿기 때문에 현실규범을 초월한 일체의 인문정신과 경지에 가치를 두고 추구해 왔다. 그럴 때 비로소 행복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

뉴한이 보는 관점에서 행복은 이렇게 부단히 추구하고 발견해내고 부딪치는 과정이며 “시를 위해 문학을 위해 난 일체를 걸 수 있다. 나는 어떤 상황 아래서도 절대 시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문학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시와 나의 지나온 일생은 떨어질 수 없다. 쓴다는 것은 그러므로 내 자전적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시는 내 생명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도 모르게 미처 인식하지 못한 내 자신을 곧잘 드러내기도 하지만, 한편 경건한 고행자임을 자처할 수 있다.“    

 

내 시는 개인의 자서가 아니다

 

    5.7 간부학교 *¹ 시절에 뉴한은 한편으론 고달픈 노동에 착취당하면서도 틈만 나면 시를 구상하는데 보냈다. 당시 허다한 평범한 작은 일속에서도 돌연 내심의 정서를 불붙일 수 있는 충격을 받곤 했다. 혹독한 환경 아래서도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은 언제나 시였으며 시는 능히 영혼을 자유롭게 숨쉬게 한다고 믿었다. 이 기간 동안 쓴 시들이 시집 ≪온천溫泉≫에 들어있는데 이 긴 생명력을 갖은 시 한 수 한 수는 혼돈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자긍심 높은 그의 시혼을 보여주고 있다.    

  뉴한은 원래 몽고족으로서 북방농민의 순박하고도 굴복하지 않는 강렬한 성격의 전승이 보인다. 북방농민으로서의 그의 생활력과 열정은 그의 시 창작의 원천으로 그의 시에 흥미를 시종 보여준다. 한편 뉴한의 사상은 기실 전통적이다. 부친의 의지를 많이 따르고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원래 목각과 회화를 배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문학을 택한 것은 부친의 희망이었다. 그를 가르친 것은 그의 부친이었고 아버지와 형은 모두 문학에 빠졌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서북대학 러시아과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으나 시 쓰는 데에 재미를 더 붙였다. 이런 특수한 정서적 결과는 자연 그의 시에서 명확한 특색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보여준 시 <화남호랑이华南虎> <피땀 흘리는 말汗血马>를 보면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묘사하고 있음을 곧 알아차릴 수 있다. 평론가가 말하듯  “ 그림으로 시를 끌어당기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시는 뉴한의 생명의 동력이었다. 시가 없다면 그 역시 없다고 말한다.

 “내 시는 개인의 자서가 아니다. 내 시는 역사 대서사의 한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지 모르지만, 역사가 산출해 놓은 한 열매는 될 것이다. 내가 지닌 작품들은 산문을 포함해서 살아있는 한 역사이며 신선한 단층이며 일종의 서사시로서의 업적을 지니고 있다. 나와 나의 시가 소유한 이 완강한 활력은 고통스런 저주이거나 역사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역사로 하여금 재난으로부터 깨어나 밖으로 나오라는 주문인 것이다. ”  

그는 “ 특정한 민족 고난의 시기를 견뎌온 한 증인으로서 특정한 시대(문화혁명을 가리킴)의 민족고난이 다시는 중화민족에게 영원히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기에 이 역사의 대재난을 시로 표현했을 뿐이다 ” 라고 밝히고 있다. 

 

  1998년 출판된 《뉴한시선牛汉诗选》을 보면 뉴한의 시가 대부분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통서정시는 절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면 그의 시의 소재가 우선 일상적인 아름답고도 고운 정상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면에서 소개한 그의 대표시이기도 한 <반쪽나무半棵树>나 <한 그루 단풍나무를 애도함 悼念一棵枫树>, <거대한 뿌리巨大的块根>들은 하나같이 최악의 분위기 속에 펼쳐져 있음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벌목된 단풍나무나 반쪽으로 부서진 나무를 통해 끔찍한 생존환경 속에서도 위풍당당한 기세를 죽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로써 문화혁명의 대재난을 극복해낸 작가나 중국 인민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잘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화남호랑이华南虎>에서는 우연히 들린 계림의 한 동물원 철창 안에서 발톱이 잘린 채 잔인하게 유린당한 호랑이의 삶을, <피땀 흘리는 말汗血马>에선 땀이 피가 되어 온 몸의 수분이 마를 때까지 달려서 마침내 뼈만 앙상하게 남을 때서야 편안한 죽음을 통해 자유로울 수 있다는 한혈마의 운명을 그림으로써,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막바지 환경 아래 변형되고 왜곡된 삶이지만, 그럼에도 굽히지 않는, 완강하게 견뎌내는 인고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최악의 환경으로부터 항쟁하는 모습은 바로 시인 자신의 지나온 삶의 모습이기도 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진한 감동을 준다. 굽히지 않고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우연히 마주치는 주변의 동식물을 앞세워 그의 이런 열악한 환경으로부터의 저항정신을 보여주며 나아가 심오한 생명의 힘을 느끼게 한다. 절망의 모습이 아닌, 비장하고도 숭고한 아름다움을 그들을 통해 역설하고 있음을, 내달리는 삶의 완강함과 그 분투하는 정신력을 찬송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시는 바로 이런 통한의 생생한 삶의 기록이다.  그의 초기시가 이런 통한의 격렬한 감정이나 정서를 외부로 전달, 표출한 것이라면 최근의 시풍은 단련되고 연마된 뒤에 얻어지는 무겁고도 신중한 심오한 세계를 보여준다 하겠다. 

그의 시에 대한 이런 열정과 정의에 대한 발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미학의 어떤 주의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범주에도 들어있지 않다. 내가 읽은 책은 다양하고 복잡해서 인류의 아름다운 시편을 다 씹어먹었다 할 정도이다. 그러나 나는 영원히 문학적 지식이나 이론적 방법에 의존하여 시를 쓰지 않는다. 나는 생명의 체험을 가지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에 대하여 시를 구상한다. 나라는 위인과 나의 시는 시종 거칠고 불안하고 미숙하며 우아하지 않다. 나의 시는 몽롱한 상상력, 혹은 꿈 속에 보이는 하나하나 머나먼 경치이며 나의 시는 그것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린다. 배회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고 피땀 흘리는 <한혈마汗血馬>처럼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달리고서야 죽을 것을 안다. 죽은 후에는 하늘로 올라갈지 땅 속으로 들어갈 지, 신이 될 지 귀신이 될 지 생각조차 안한다. 이것도 바로 나라는 사람, 그리고 내 시의 성격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가 여전히 신세대들에게 읽혀지고 젊은 시인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투지력, 이런 생명력에 있다 하겠다. 근육이 장대한 20대 젊은이로 느껴질 정도로 여전히 열정적인 삶, 정직하고 의기투합된 자유정신을 소유한 시인으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25년간이나 절필을 했음에도 신분이 회복된 이듬해인 1981년, 그는 여기에 소개한 시 <한 그루 단풍나무를 애도함 悼念一棵枫树>으로 문학창작상을 받았으며 시집《온천温泉》으로 전국우수시집상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2003년 5월, 마케도니아 작가협회 주석 레이부스키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중국작가협회를 통해 뉴한에게 “문학제상‘을 주었는데, 이 상은 마케도니아 작가협회가 설립한 일련의 국제적인 문학상이다. 또한 2008년엔 녹색중국 초점인물평가위원회에서 주는  “녹색중국초점인물”로도 선정되었다.

 

 

몽고족시인 뉴한의 약력 

 


 

원명은 스청한史承汉이며  1923년 10월 산시성山西省 딩양시엔定襄县의 한 궁핍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이 뉴한牛汉으로 바뀐 것은 초교 2학년 시험을 볼 때 ‘承’을 작게 써냈다가 일등을 못하자 같은 소리음인 ‘成’ 으로 개명했던 것을 시를 쓰면서부터 다시 우직하게 노동만 하는 ‘소 牛’로 바꿨다고 한다.(그의 작품 <나의 첫 번째 책>에서 인용) 필명은 꾸펑谷风 이다. 그는 14세까지는 고향에서 소를 방목하거나 장작을 패고 벼를 심고 때론 권법이나 씨름도 익히면서 진흙장난도 하면서 개구쟁이로 자랐다. 아버지는 예술적 기질이 많고 민주자유사상을 갖고 있던 중학(중고등학교를 말함)교사여서 그는 10살 때부터 아버지가 소장한 많은 책들을 이해가 되든 안 되든 두루 읽었으며 엄마로부터는 당시唐诗를 배웠다고 한다. 엄마는 아주 강직한 성격이었는데, 그는 엄마의 그런 감성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항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아버지를 따라 산시성陕西省 시안西安으로 피난을 갔고 거기 머무는 동안 그림을 배웠다. 이때부터 그림과 시에 빠져들어 1940년부터는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41년 청두成都에서 발표한 시극《지혜의 비애智慧的悲哀》,1942年 꾸에린桂林《시창작诗创作》에 발표한《어얼뚜어스초원鄂尔多斯草原》으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43년 산시성의 시빼이西北대학 러시아과에 입학했다. 1945년 초엔 시안의 문예지《류훠流火》의 주필이 되었으며 1948년 여름엔 시집《채색있는 생활 彩色的生活》을 출판했다. 그러나 1955년 5월 후펑안胡风案*²으로 해서 심문을 받고 검거, 그 때로부터 1980년 가을에 신분이 회복되는 <핑반平反>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난과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70년대 후빼이湖北 시엔닝咸宁간부학교의 노동기간 중 분연히 일어나는 비분의 심정을 숨어서 시로 쓰기 시작, 1979년 까지 미발표작이 약 2,3백수였으며 등소평의 경제개방에 힘입어 文革에 대한 자유비판이 가능해지던 80년 이후에야 시집《후퉈허와 나滹沱河和我》로 묶어냈다. 현재 그는 중국시가협회 부회장이며 중국작가전국명예회원이다.

시집으로《채색생활彩色生活》、《조국祖国》、《온천温泉》、《지렁이와깃털蚯蚓和羽毛》、《뉴한서정시선牛汉抒情诗选》등 십여 권과 산문집으로 《뉴한산문牛汉散文》,《반딧불집萤火集》,《어린시절의 목가童年牧歌》등 7 권이 있다. 또한 시화집으로 《시학수기学诗手记》、《몽롱시인이 말하는 시 梦游人说诗》2 권이 있다.

                                                             

 

참조 주 :

* 주 1) 五七干校는 중국문화혁명 중 모택동의《5월7일 지시五七指示》를 관철하기 위해 공산당 간부들로 하여금 이를 접수,노동을 통해 재교육을 실시하게 하던 학교를 가리킨다. 즉, 당정치기관간부와 과학기술 간부들과 대학 등의 고등교육기관 교사 등을 농촌으로 내려 보내 노동을 시켰던 곳으로 1966년 5월 7일 모택동이 임표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본계급을 비판한데서 비롯된다. 이후 1968년 5월 7일, 흑룡강성에서 가진 모택동의 <5.7지시>2주년 기념식에서 간부들의 대비판이 일면서 경안현 유하庆安县柳河의 한 농장에서 노동개조를 본격적으로 시작, 그곳을 <5.7간부학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주 2) 胡风 ; 1950년대 호풍반혁명집단안으로 문예논쟁이 정치심판으로 발전한 비극적인 사건. 이 일로 2100명이 연루되어 비판받았다. 그 중 92인은 압송, 62인은 격리, 73인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 후 1952년 6월8일,《인민일보人民日报》는 〈연안에서 가진 문예좌담에서의 강좌在延安文艺座谈会上的讲话〉》를 싣고 더불어 호풍의 문예사상은 일종의 자본계급의 개인주의적 문예사상이라고 발표,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참고문헌

1. 《뉴한시인诗人牛汉》,《전기문학传记文学》2005년 제 7 기에 수록 

2. ≪“피눈물汗血”시인——뉴한 ≫ 평론 :장지엔 张健

3. 뉴한의 삶과 시 개략 소개 : 청용린程泳淋

4. 뉴한의 시 해설 : 위웨이余 玮

5. 《몽롱시인이 말하는 시梦游人说诗》: 뉴한 (화문출판사 華文出版社 2001 년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8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563 민족과 현대시 2015-06-12 0 3818
562 시적 자기 희생 2015-06-12 0 4159
561 시의 정신 2015-06-12 0 3982
560 자유시의 정착 2015-06-12 0 4293
559 전통시가 형식의 붕괴 2015-06-12 0 4690
558 한국의 현대시 2015-06-12 0 4112
557 천재 시인 - 李箱 김해경 2015-06-08 0 4406
556 <시장> 시모음 2015-06-08 0 4217
555 <6월> 시모음 2015-06-08 0 4737
554 담배는 웬 담배ㅠ? 2015-06-05 0 4277
553 詩 - 칼 . 맑스 = 칼 . 마르크스 = 칼 . ' 막 '쓰 2015-06-04 0 5541
552 <서울> 시모음 2015-06-04 0 4776
551 한설 시넋두리 2015-06-02 0 4323
550 <<막걸리 시>> 노벨문학상 ???... 2015-06-02 0 4784
549 연변 동시 한바구니 2015-06-02 0 4529
548 동시와 한석윤 2015-06-02 0 3924
547 동시인 한석윤 시비 2015-06-02 0 5731
546 김광섭 시인을 아시나ㅠ? 2015-06-01 0 4726
545 성북동 비둘기 2015-06-01 0 5262
544 상상력과 詩 2015-05-31 0 4549
543 시인 -리호원 2015-05-31 0 4454
542 석화 / 시창작 강의록 2015-05-21 0 6619
541 최룡관 동시론 4 2015-05-20 0 4752
540 최룡관 동시론 3 2015-05-20 0 4465
539 최룡관 동시론 2 2015-05-20 1 4883
538 최룡관 동시론 1 2015-05-20 0 4869
537 이승훈 시론 5 2015-05-20 0 4291
536 이승훈 시론 4 2015-05-20 0 4512
535 이승훈 시론 3 2015-05-20 0 4608
534 이승훈 시론 2 2015-05-20 0 4635
533 이승훈 시론 1 2015-05-20 0 4606
532 시쓰기에서 의성어, 의태어 활용법 2015-05-20 0 5440
531 시쓰기에서 이미지에 대하여 2015-05-20 0 5755
530 여러 빛깔의 동시 알아보기 2015-05-20 0 5301
529 윤삼현 시창작론 2015-05-20 0 5497
528 문삼석 동시론 2015-05-20 0 4655
527 우리 민족의 정형시 - 시조 쓰는 방법 2015-05-20 0 5602
526 유명한 동시 모음 (클릭해 보세ㅛ@@) 2015-05-20 0 9074
525 동시 작법 모음(클릭해 보기) 2015-05-20 1 5442
524 영상시 모음 2015-05-20 0 5908
‹처음  이전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