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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시에서 상상, 공상
2015년 02월 18일 01시 03분  조회:4177  추천:0  작성자: 죽림

하이퍼 시에서 상상과 공상 그리고 정서의 문제 

                                          

                                                                심 상 운

 

 

 

 

 

 

1. 상상과 공상

 

 

공상(空想) 또는 몽상(夢想)으로 번역되는 Fancy는 상상(imagination)에 비해 문학 창작의 능력으로서 낮은 평가를 받아 왔다. 19세기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리지(Coleridge)는 그 이유를 “Fancy는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된 기억의 한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문학작품이 갖추어야 할 의도적 질서(목적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들어 있다.

 

 

상상력은 이성적인 사고능력의 한 부분에 속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적 생각을 발생시키는 능력을 보유한다. 따라서 상상은 기억의 재생,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감각적 생기, 연상 작용, 등으로 시의 영역을 확대하고 시를 습관적인 관성에서 이탈하게 하지만 실재성에 기초를 둔 엄숙한 사상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공상은 이성적 사고능력의 밖에서 해방된 공간을 형성한다. 그래서 공상은 자의적이고 비현실적이고 허황하지만 상상이 안고 있는 엄숙한 사상성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서 유희성, 변화성, 경쾌성이라는 매력을 시에 부여하고 새로운 감각을 독자들이 즐기게 한다. 이것이 상상과 공상의 차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공상을 근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를 발명하게 한 상상의 시초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자유로운 공상을 펼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베른 (Jules Verne 1828. 2. 8 프랑스 낭트~1905. 3. 24)이 고안해낸 잠수함 노티러스 호는 당시에는 공상과학(空想科學) 소설 <해저 2만리>의 소재였지만 20세기에는 원자력에 의해서 현실화된 잠수함이라는 것도 공상과 상상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공상이 상상의 원천이 되는 이유는 공상이 상상보다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나 관념의 굴레에서 훨씬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위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고(思考) 작용으로서의 상상력과 아무런 의도성이 없이 아무 것이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의 가지나 줄기가 자유롭게 이어지고 벋어나게 내버려두는 공상이 현대시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활용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적인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Coleridge)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假想空間)을 제공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 추리 작용(推理作用)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자율적 공간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함으로써 시 속에 새로운 자유의 공간을 형성한다.

 

 

인조수지나무에 종이컵이

난쟁이 고깔처럼 조랑조랑

과일들 맺어 풍성이 영글면 다 따서 담아 주스라도 빚을 듯이

종이컵 하나 따서 길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꾹 밟고 눌러 본다

빈 알루미늄 깡통처럼 쭈그러지면서 한마디 꽥소리 없다

이리저리 굴리고 뭉쳐 손아귀로 꼭 쥐어 본다

오렌지 커피 녹차 혹은 그런 갈증과는

아예 관련이 없다

이 빈 기도 속에

지구地球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

-문덕수 「종이컵」전문

 

 

문덕수의「종이컵」은 시인의 창조적인 상상의 밑바탕에 자유분방한 공상의 영역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조수지나무의 종이컵에서 “이 빈 기도 속에/ 지구地球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에 이르기까지의 자유롭고 유희적인 시인의 행위에는 현실적인 어떤 목적의식이나 논리적 인과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변화 속에서 미적 쾌감과 충격적인 의미가 살아나고 있다.

 

하이퍼시는 한국현대시를 오래 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單線構造)의 틀을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靜的) 이미지를 동적(動的)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編輯者)로, 고정된 관념(觀念)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想像)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感覺)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개혁운동이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중심은 연상을 매개로한 창조적 상상일 수밖에 없다. 이 창조적 상상의 밑바탕에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공상이 들어있다.

 

 

높은 빌딩 위 전광판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가 운반되고 있다.

경례하는 미국 대통령의 확대된 모습

 

 

사이에서 나는 짙푸른 오이를 꺾어

한 입 힘차게 베어 문다.

입안에 푸른 피가 철철 흐른다.

-신규호 「풍경․1」2 전문

 

 

신규호의 하이퍼시「풍경․1」2에는 두 개의 풍경이 병치되어 결합돼 있다. 이 두 풍경에는 어떤 유사함도 없다. 오히려 대조적이다. 따라서 두 이미지의 충돌 감각이 미적 쾌감을 일으킨다.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시 속의 캐릭터의 행위에서 찾아진다. 엄숙한 의식(儀式)의 공간을 보는 장면에서 입안에 철철 흐르는 오이의 푸른 피를 보여주는 행위는 공상에서 솟아나는 퍼포먼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유희성의 표출이다. 그것은 하이퍼 시가 감각적 순수 이미지로 보여주려는 정서와 암시적인 사유공간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재서는「문학원론」에서 상상을 문학 작품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공상을 배척하지 않고 옹호하고 있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실재성에 기초를 두니까 엄숙하지만, 공상은 자의적이나까 비현실적이다. 문학에서 상상이 존중되고 공상이 매양 배척을 받는 것은 그럴 법도 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이 상상적이고 무엇이 공상적이냐 하는 문제는 무엇이 실제적이고 무엇이 비현실적이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비평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여기서는 그런 논쟁적인 문제를 불문에 부치고, 다만 공상이 문학에서 차지할 수 있는 정당한 지위를 지적해 두려한다. 첫째로 공상은 그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으로 말미암아 문체의 장식적 요소가 된다. 인생은 엄숙한 것이지만, 이런 것까지도 버린다는 것은 퓨리턴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로 극이다. 희극에서처럼 공상의 매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멕베스> <리어왕> <실락원> <신곡>과 같은 상상의 문학을 존중하는 반면에 <여름 밤의 꿈> <도발적> 같은 공상의 문학도 즐겨할 줄 안다. 심지어 <로미오와 줄이엣>이나 <폭풍> <선녀왕>에서처럼 상상과 공상이 교착하는 문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매력을 느낀다. 이들 작품은 현실과 이상을 대조하고 상상과 현실과 이상을 교체함으로써 실재감을 더욱 감명 깊게 하기 때문이다.

-최재서「문학원론」14장 상상(2) 3. Fancy와 Wit에서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과 공상이 뒤섞여서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을 즐기고 거기서 다른 갈래의 실재성의 근원을 발견한다. 여기에 하이퍼시의 공상이형성하는 다양한 이미지 세계의 당위성이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에 더 기울게 된다.

 

 

 

 

2. 정서의 문제

 

 

공상을 하이퍼 시의 바탕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관념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공상이 시인의 정서와 어떻게 결합되느냐 하는 것이다. 정서는 시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공상과 정서의 결합여부는 시의 생명을 좌우하게 된다. 그 예는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서의 결핍이다. 초현실주의 시들은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새로움을 주지만, 시인의 내적의식의 흐름이 시 전체에 혈관조직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동일성이 결여되고, 한 편의 시가 파편화된 이미지의 나열 또는 집합형식에 머물고 말기 때문에 시적 감동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비합리적이고 무목적의 순수공상(탈-관념)으로 형성되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속에 시인의 정서를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시인의 무한한 공상 속에 축축한 수분의 정서를 넣어서 시의 이미지를 수목처럼 싱싱한 생명체로 만들어 내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정서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다. 독일의 미학자인 게르노트 뵈메(Gernot Bohme)는 “정서를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발생하는 분위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전의 해석을 빌리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 부딪쳐 일어나는 온갖 감정”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비교적 약하고 장시간 계속되는 정취(情趣)와 구분한다. 정서는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된다는 점에서 정동(情動)이라고도 한다. 희노애락(喜怒哀樂)·애증(愛憎)·공포·쾌고(快苦) 등이 정서이며, 의식적으로는 강한 감정이 중심이 되며, 신체적으로는 내장적(內臟的)인 생활기능의 변화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 요약하면, 정서는 인간이 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인간의 내적감정이 일으키는 심리적인 에너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게르노트 뵈메의 분위기(atmosphere)라는 정의는 정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는 정서에는 분위기만 아니라 행동의 직접적 계기가 되는 심리적 에너지가 들어 있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

 

 

정서의 심리적 현상은 강한 폭발력을 내재하고 있으며, 그 내재된 폭발력은 서정시에서 감동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정서가 제거된 이성적인 주지시보다 이성이 약화된 정서 위주의 서정시가 독자들을 더 유인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지성을 중시하는 현대시에서도 정서가 사물이나 지적 사유보다 강하게 인식되는 이유다. 그것은 대중가요의 흡인력과 같다. 특히 이성적인 논리성보다 인정과 눈물에 더 치우치는 감성적인 한국인들에게는 시에서 이성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것이 더 평가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서의 발생은 주체의 내적감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집단적 감정도 정서 발생의 원인이 되지만 정서의 대부분은 대상과 주체의 심리적인 상태의 관계에 의해서 발생한다. 따라서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감정이 표현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서정시의 시점이 1인칭시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주체인 ‘나’ 또는 ‘우리’의 감정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의 특성을 하이퍼 시에서 어떻게 담아내어야 하는가? 하이퍼 시는 주체(화자)의 일방적인 정서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서정시가 아니기 때문에 새롭고 독특한 방법이 요구된다.

 

 

다음 글은 월간 「시문학」2009년 3월호 <이슈의 숲길 12〮> 신진과 조명제 시인의 대담 ‘하이퍼 시의 가능성’에서 발췌한 것이다.

 

 

신진: 하이퍼 시는 원칙적으로 허구를 제시하되 그 세계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현실을 재구성하게 하는 시뮬라시옹의 시라 할 것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전제와 확신에도 갇히지 않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양식이며 이 논리의 골격은 리좀(rhizome)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쉬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사물의 상호연관성이란 뜻으로 쓴 리좀은 원래 식물학적인 용어로 줄기와 뿌리가 같이 이어져 땅속으로 뻗어나는 줄기를 뜻하며, 스스로 뿌리이기도 한 식물을 가리킵니다. 시작도 끝도 아니고, 언제나 중간에 있으면서 접속 가능한 모든 차원과 접속될 수 있는, 복잡한 상호연관성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깨어지고 부수어지며 재생하는 반계보학적 네트워크입니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시학을 포용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2차원의 종이텍스트를 언제나 유동적인 4차원의 사이버 공간까지 확대한다는 하이퍼 시 동인의 논리에 부합합니다.

심상운 시인의 시를 한 편 들겠습니다.

 

 

7월 아침나절 갑자기 쏟아지는 비

 

한낮의 아프리카 대평원엔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사슴의 붉은 살덩이가 내뿜는 싱싱한 비린내

 

6월의 태양 아래 이글이글 벌어지는 초원의 잔치!

 

 

나는 TV에서 가슴 떨리는 아프리카 생태계를 보다가

식탁의자에 앉아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우쩍우쩍 씹는다.

 

 

그때 휴대폰을 울리는 그녀의 가쁜 목소리

 

그녀는 여름비의 유혹이 참을 수 없어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굵고 기운찬 빗줄기에

온몸 부르르 떠는 녹색 가로수들이 제각기 잎사귈 퍼덕이며

소리치는 도로를 지나 녹색의 광기를 한껏 즐기고 있는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

―심상운 「녹색전율」

 

 

인과(因果)의 틀을 벗어나 나열되는 이미지들이 상호 연계되면서 리좀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7월 아침의 비와 6월의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사투, 식탁에 앉아 우적우적 씹는 방울토마토, 휴대폰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하이퍼 실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오남구 시인의 시도 한 편 들어봅시다.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 불그스레 실눈을 뜬 쪽달이 베갯잇 속으로 미끄러진다. 베갯잇의 조각보에 꿈오라기 오락가락 청-백-적-흑-황 지금 신행 온 딸아이가 베고 있다. 꾸륵 꾸륵 흑두루미가 철원하늘을 날아간다. 오르르∼ 신부가 떠는 입춘에 나뭇가지에서 오락가락 햇살 따뜻한 에너지가 스민다. 꿈틀 꿈틀 망울이 가렵고 겨드랑이가 가렵다. 거울 속에 팝콘 같이 흰 철쭉 꽃망울이 터진다.

―오남구 「입춘詩」전문

 

 

서두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에서부터 표준 어법을 이탈하고 있고, 한 마디의 서술 없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나열하여 연결함으로써 입춘의 추상을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시의 길이에 비해 움직임이 큰 동사와 형용사,‘오락가락, 꾸륵 꾸륵, 오르르∼, 꿈틀 꿈틀’ 등과 같은 의성어, 의태어를 빈번하게 사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은 특히 오남구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명제: 김규화의「매미소리」의 방법적 특질은 화자가 <미륵> 강의를 듣고 나오면서 ‘미륵론’의 환청처럼 들리는 매미소리와 그 울음의 유사성으로 하여 연상되는 염소 울음소리, 심지어 기차를 놓친 과거 어느 날 떠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마저 맹랑한 매미소리로 환치 혼융된 감각적 변용에 있어 보입니다.‘미륵’과 ‘매미’는 ‘미’라는 기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기의에는 유사성이 전연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미륵> 강의의 잔상효과와 ‘미륵’/‘매미’ 두 말이 지닌 기표의 유사성만으로 그 관련성을 맺어 줍니다.

 

역사박물관에서 <미륵>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미륵 미륵 미륵,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

사정한다

 

염소에게서 배웠나,매해해 얌얌 염소

입술을 뾰죽이 내밀어

매매매 하는 그그그 미

매 하는 미,매미이이이를

 

플랫폼에 혼자 두고 가는 기차가

소리 한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맴맴맴 매애애

매앵매앵 앵앵앵

미잉미잉 잉잉잉

―김규화의 「매미소리」 전문

 

 

매미소리는 매미의 언어로서 어떤 의미신호가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귀에는 그저 카랑한 울음소리의 기표만 들릴 뿐이지요. 우리가 노승의 독경소리를 들을 때 그 의미는 전연 알지 못하면서도 그 유려한 독경소리 자체에 매료되어 열복(悅福)을 느끼는 절대 순수의 순간처럼 매미소리의 시니피앙 속으로 빠져들어 추억과 환상의 절대적 세계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퍼 시는 일반적 서정시들의 대상과 주체의 밀착에서 벗어나 대상과 주체와의 간격을 중요시 한다. 그 간격은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것이 링크(연결고리)다. 링크로 연결된 이미지의 내면에는 어떤 의도성이나 목적성이 가미되지 않은 시인의 ‘순수한 의식의 흐름’이 들어 있으며, 그 의식의 흐름 속에는 주체의 정서가 들어 있다. 이 정서는 기계 속의 윤활유와 같이 시간과 공간, 사물과 사물을 서로 부드럽게 연결하여 이미지의 세계에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 흐름의 정서 속에서는 신선한 감각의 공간이 열린다. 그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캐릭터의 퍼포먼스 같은 행위는 주체의 정서를 드러내는 감각적 행위가 된다. 앞에서 예시한 신규호의 풍경․1」2에서 보여주는 캐릭터의 입 안에 철철 흐르는 오이의 푸른 피, 심상운의「녹색 전율」에서 빨간 방울토마토를 우쩍우쩍 씹는 행위,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가 환기시키는 감각적인 이고 원시적 본능의 정서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오남구의「입춘詩」에서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이미지의 돌출, 의태어와 의성어가 빚어내는 동적인 감각, 김규화의「매미소리」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순수한 청각 시니피앙은 대상과 주체(시인) 사이의 공간과 시인의 내면 의식의 흐름이 어우러져서 형성된 감각적인 정서의 표출로 인식된다.

 

정서는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감성의 현상이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시인의 주관을 제로상태로 줄일 때 객관화 되어서 드러난다. 따라서 하이퍼 시의 정서는 일반적 서정시의 정서와 같이 어느 한 쪽으로 경도된 주체의 정서가 아니라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는 탈-관념된 정서가 된다. 그 정서는 노출된 정서가 아니라 이미지 속에 내장된 정서라는 데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하이퍼 시에서 주체의 정서를 담아내는 방법은 이미지의 병치와 대립, 연상적 이미지의 전개, 무의식 속의 환상, 자유분방한 유희적 퍼포먼스, 불연속적인 시간과 공간의 결합, 펀(pun)의 삽입을 통한 변화 등 엄숙한 사상성에서 벗어난 정서의 다양한 감각화와 순수한 의식의 흐름을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시 전체에 흐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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