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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모음 ㄷ
2015년 04월 03일 21시 38분  조회:4510  추천:0  작성자: 죽림

1964년 전남 나주생.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

《문학사상》 <칼레의 바다> 외 6편의 시가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
 명지대 국어국문과 교수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
 시론집 『패러디 시학』평론집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그만 파라 뱀 나온다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속은 
죄다 소굴이다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다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애를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속을 알수 없어 속을 파면 
속의 때나 딱지들이 솔솔 굴러 나오기도 한다 
속의 미끼들에 속아 파고 또 파면 
속의 피를 보기 마련이다

 

남의 속을 파는 것들을 보면 대체로 사납고 
제 속을 파는 것들을 보면 대체로 모질다

 

 

속 좋은 떡갈나무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단팥빵1

 

빵집에 단팥빵 빵 일곱 개

맛있게 생긴 단팥빵

한 사내가 빵 사러와

아줌마, 단팥빵 하나 주세요

여기 있어요

단팥빵 한 개 사갔어요

 

빵집에 단팥빵 빵 여섯 개 포동포동한 단팥빵

아이들이 빵사러 와

아줌마, 단팥빵 여섯 개 주세요

여기 있어요

단팥빵 여섯 개를 사갔어요

 

빵집에 단팥빵 빵 없네

어떤 맛이었을까 단팥빵

빵 주인이 빵 사러 와

아줌마, 단팥빵 다 주세요

다 없어요

단팥빵 빵들을 가져갔어요

 

다 어디갔지? 달디단 울엄마!

 

 

사과 껍질을 보며

 

떨어져 나오는 순간

너를 감씨 안았던

둥그렇게 부풀었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

반짝이던 살갗의 땀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돌처럼 견고했던 식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탁 모퉁이에서

사과껍질이 몸을 뒤틀고 있다

살을 놓아버린 곳에서 생은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붉은 사과껍질은

사과의 살을 놓치는 순간 썩어간다

두툼하게 살을 움켜진

청춘을 오래 간직하려는 과즙부터 썩어간다

 

껍질 한 끝을 집어 든다

더듬을수록 독한 단내를 풍기는

철렁, 누가 끊었을까 저 긴 기억의 주름

 

까맣게 시간이 슬고 있는데

 

 

밥이 쓰다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 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풋여름

 

 

어린나무들 타오르고 있어요 
휘휘 초록 비늘이 튀어요 
풋, 나무를 간질이는 빛쯤으로 여겼더니 
풋, 나무 몸을 타고 기어올라 
풋, 나무 몸에 파고들어요 
가슴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을까요 
어느새 휘감치는 담쟁이 덩쿨은?

온몸을 뒤틀며 
뿌드득 뿌드득 탄성을 지르며 
풋, 나무 힘줄 세우는 소리 
용트림하는 풋, 나뭇가지

초여름 저물녘 입술 자국에 
겨드랑이부터 뚝 뚝 
초록 진땀을 흘리고 있어요 
풀물냄새를 풍기는 
저 풋, 나무 
담쟁이 치마폭에 폭 싸여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봄 늦바람

 

늦바람이 건들건들

벚나무애 기대 휘파람을 불어대자

수런대는 가지의 그늘들

귓볼을 땅에까지 늘어 뜨리고

아 간지러워

꽃잎들 출렁 먼저 튀어나오고

제 꽃잎을 지키려고

잔뜩 독이 올라 가지를 뚫고 나오는 잎눈들

아직 발이 차다

이참에 늦바람은

벚나무 가지에 눌러 앉겠다고

아에 둥지를 틀겠다고

헛둘 헛둘

알통을 덥히고

 

내 애인이 씹던 츄잉껌은

                         
단물 빠진 껌
뱉기 전 애인의 빨간 입술과
고른 齒列 사이에서
짝 짝 두어 번 씹히다
퉤 던져진
쥬시후레시 스피아민트
오오 롯데껌

애인은,
나는 눈부신 여자가 그리워
은박에 싸인 탄력있는 속살
삼킬 수 있지만 못 먹는
그것은 내가 오르고 싶은 오르가즘
언제고 버릴 수 있는
후레쉬향 스피아민트향 같은

단물빠진 껌
그가 남긴 치흔의 휴식 속에서
까짓껏, 까짓껏,
껍을 씹는다
그가 씹던 오오 롯데껌들처럼
뒤틀린 과거
이미 뱉어진 사랑

 

첫눈 

날선 삿대질을 되로 주고 말로 받던 그날밤의 창가에
느닷없는 점령군처럼 함박눈이 내렸것다
서로의 눈이 부딪치고 쨍그랑 겨누던 무기를 놓쳤던가
그랬던가 어둡던 창밖이 우연의 남발처럼 환해지는
저건 대체 누구의 과장된 헛기침이란 말인가
그러자 핸드폰을 귀에 댄 남자가 검은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우산을 옆으로 든 여자가 흔들리는 네온싸인에 사뿐사뿐 제 얼굴을 비춰보고
오토바이를 세운 폭주족 크라운 베이커리 앞에 서서 환한 라이터를 지피고
달리던 자동차가 멈칫 쌓인 눈을 쓸어내리고는 천천히 미끄러져 가고
그렇게 무섭게 굴러가던 것들이 일제히 제 둥근 모서리를 쓰다듬고 있었더란 말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내려앉으며 
누군가의 어깨가 누군가의 어깨에 쌓이며
생애 첫눈을 뜬 장님처럼 서로의 눈을 맞추고 말았더란 말인가
염치를 잊고 손을 내밀고 말았더란 말인가, 용서라는
보고 또 보고도 물리지 않는
아 저건 누구의 신파였고
누구의 한물간 낭만적 연출이었던가
그리하여 창밖에 펼쳐진 단막의 해피엔딩이 끝날 즈음
뜨겁게 내리는 저 첫눈에게
그리고 또다시 속아넘어가버리고 말았더란 말인가

 

고집

 

참새는 천적인 솔개네 둥지 밑에 몰래 집을 짓는다 
무덤새는 뜨거운 모래 밑에 제 몸 수백 배 집을 짓는다 
고릴라는 잠이 오면 그제서야 숲속 하룻밤 집을 짓는다 
너구리는 오소리 집을 슬쩍 빌려서 잔다 
날다람쥐는 나무의 상처 속 구멍집을 짓는다 
꿀벌과 흰개미는 집과 집을 이어 끝없는 떼집을 짓는다 
수달을 물과 물 중간에 굴집을 짓는다 
물거미는 물속에 텅 빈 공기집을 짓는다 
바퀴벌레는 사람들 집 틈새에 빌붙어 산다 
집게는 소라 껍데기에 들고 다니는 집을 짓는다 

세상 모든 짐승들은 
제 몸을 지붕으로 덮고 
제 몸을 벽으로 세워 
제 몸에 맞는 집을 짓고 산다 
제 몸이 원하는 대로 
제 몸이 기억하는 대로 

큼직한 집을 짓는다 살아 있는 하루가 끔찍하다 
하나 더 들여놓고 한 평 더 늘리느라 오늘도 나는

 

소금호수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중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에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글쭈글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다
맨발이었다

벗어놓은 신발이 웃는다

 

바람을 피우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기공을 한다 했다
몸을 여는 일이라 했다
몸에 힘을 빼면
몸에 살이 풀리고
막힘과 맺힘 뚫어내고 비워내
바람이 들고 나는 몸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의 몸이 가장 열려 있다고 했다
닿지 않는 곳에서 닿지 않는 곳으로
몸속 꽃눈을 밀어 올리고
다물지 못한 구멍에서 다문 구멍으로
몸속 잎눈을 끌어 올리고
가락을 타며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다면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란 
바람을 부리고
바람을 내보냄으로써
저기 다른 몸 위에
제 몸을 열어
온몸에 꽃을 피워내는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는 일 아닌가!


공전


별들로 하여금 지구를 돌게 하는 
지구로 하여금 태양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문득, 별을 떨어지게 하는 
저 중력의 포만

팔다리를 몸에 묶어놓고 
몸을 마음에 묶어놓고 
나로 하여금 당신 곁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기어코, 나를 밀어내게 하는 
저 사랑의 포만 
허기가 궤도를 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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