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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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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모음
2015년 04월 05일 15시 32분  조회:5175  추천:0  작성자: 죽림

류시화 시 모음


시 제목에 클릭하세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지금 알고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사랑이란

여행자를 위한 서시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 만났었다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누구든 떠나갈 때는

겨울의 구름들

안개 속에 숨다

잊었는가 우리가

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무

들 풀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두 사람만의 아침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그만의 것

세월

그건 바람이 아니야

뮤직박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잇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 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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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 거리자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명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장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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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를 위한 서시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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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 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 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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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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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마치 사탕 하나에 울음을 그치는 어린아이처럼
눈 앞의 것을 껴안고
나는 살았다
삶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태어나
그것이 꿈인 줄 꿈에도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사랑을 하고 또 헤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집을 떠나
방랑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등 뒤에 서면 다시 한번 쳐다본다
책들은 죽은 것에 불과하고
내가 입은 옷은 색깔도 없는 옷이라서
비를 맞아도
더 이상 물이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무엇이 참 기쁘고
무엇이 참 슬픈가
나는 짠 맛을 잃은 바닷물처럼
생의 집착도 초월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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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든 떠나갈 때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고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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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구름들
 


1

겨울이 왔다
내 집 앞의 거리는 눈에 덮이고
헌 옷을 입은 자들이 지나간다
그들 중의 두세 명을 나는 알고
더 많은 다른 얼굴들은 알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소리쳐 그들을 부른다 내 목소리는
그곳까지 들리지 않는다
겨울은 저 아래 길에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2

겨울이 왔다
나의 삶은 하찮은 것이었다
밤에는 다만 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온갖
부질없이 깊은 생각들에 사로잡힐 때
늘어뜨려진 가지, 때 아닌 붉은 열매들이 
머리 위에서 창을 두드리고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희고 창백한 얼굴로 바깥을 내다보면
겨울의 구름들이
붉은 잎들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내 집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홀로 있었다 등불의 심지만을 들여다보며
변함 없는 어떤 흐름이 갑자기 멈춘 일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3

아니다,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책장에 얼굴을 묻고
참이 들곤 했다, 겨울이 왔다
나의 삶은 하찮은 것이었고
나는 오갈 데가 없었다
내 집 지붕 위로
겨울의 구름들이 흘러가는 곳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오래 불고 조용히 속삭이면서
더 큰 물결을 내 집 뒤로 데리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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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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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는가 우리가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 뒤에서 한숨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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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마치 외로운 새 같다 
긴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한겨울의 저수지에 가 보았는가 
그곳에는 침묵이 있다.
억새풀 줄기에
마지막 집을 짓는 곤충의 눈에도 침묵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다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법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삶
그렇다, 나 또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당신도 한때 사랑을 했었다.
그때 당신은 머리 속에 불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외롭다
당신은 생의 저편에 서 있다.
그 그림자가 지평선을 넘어 전화선을 타고
내 집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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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무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주었다

내집뒤에 
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때
그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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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 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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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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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만의 아침


나무들 위에 아직 안개와
떠나지 않은 날개들이 있었다
다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었다 오솔길 위로
염소와 구름들이 걸어왔지만
어떤 시간이 되었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여기 이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한때 한없이 투명하던 것들
기억 저편에 모여 지금
어떤 둥근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한때 우리가 빛의 기둥들 사이에서 두 팔로
껴안던 것들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때 우리가 물가에서
귀 기울여 주고받던 말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새와 안개가 떠나간
숲에서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옛날의 불꽃을
본다 그 둘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숲의 끝에 이르러
나는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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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넌 알겠지
바닷게가 그 딱딱한 껍질 속에
감춰 놓은 고독을
모래사장에 흰 장갑을 벗어 놓는
갈매기들의 무한 허무를
넌 알겠지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녹슬게 하고
꿈이 인간의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다는 것을

내 마음은 바다와도 같이
그렇게 쉴새없이 너에게로 갔다가
다시 뒷걸음질친다
생의 두려움을 입에 문 한 마리 바닷게처럼

나는 너를 내게 달라고
물 솔의 물풀처럼 졸라댄다
내 마음은 왜
일요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생을 관찰하고 있는 물새처럼
그렇게 먼 발치서 너를 바라보지 못할까

넌 알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무한 고독을
넌 알겠지
그냥 계속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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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시월의 빛 위로
곤충들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개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 봐
이 모든 것을 위로
넌 아직도 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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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 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 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 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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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의 것


외딴 집에 홀로 사는
남자, 침묵은 그의 것
오후의 나른함과 권태는 그의
어깨죽지에서 피어오르고,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가 산책하는
길에는 잎사귀가 넓은
붉은 꽃들이 피어있다, 붉은 꽃들
그의 그림자는 그의
것, 반항하지 않으며 그가 좋아하는
엉겅퀴풀들, 엉켜 있는 뿌리들, 시간의
얼룩들 위를 지나
우리는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
남자, 태양은 등 뒤에서 그의
뇌를 미지근하게 부풀린다 둥글고
딱딱한 것, 열에 들뜬 열매들
좁고 가파른 돌길을 걸어내려와 우리가
한쪽으로 비켜섰을 때 우리 발앞을
지나쳐간 남자, 그의 시간은
그만의 것, 그가 꿈꾸는 것과
위험한 생각들도
그만의 것
그가 비탈을 걸어 내려갈 때 그의 발이
굴러 떨어뜨리는 흙은 비탈에게 한 세계를 준다
그는 왜 모자를
썼을까, 왜 모자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을까, 그는 살아가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 두렵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홀로 사는 남자, 이따금
한번도 내려가보지 않은 강 아래쪽의 풍경과
한 낮의 수증기, 구름들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오후에 한 두시간 쯤 시간을 내어 그는
어느 곳에 이른다 그의 삶은
그의 것, 그가 이르는 곳에는
그만이 서 있다, 꽃들의 그림자
그림자가 감추고 있는 그림자
산책하는 이들의 발길을 비웃는
비탈길에서 그는 미끄러진다, 미끄러져 내린다
우리가 놀고 있는 강 아래쪽으로 떠 내려온
남자, 죽음은 그의 것
햋빛을 피해 얼굴을 물 속에 처박고
뒤통수에 앉아 있는 검은 물잠자리도
그의 것, 이미 알수 없는 곳에 가 있고
알수 없는 그만의 것에
이끌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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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월


강물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강물이 소리내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그대를 만나 내 몸을 바치면서
나는 강물보다 더 크게 울었네
강물은 저를 바다에 잃어버리는 슬픔에 울고
나는 그대를 잃어버리는 슬픔에 울었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먼저 가 보았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서러운 울음을 나는 보았네
배들도 눈물 어린 등불을 켜고
차마 갈대 숲을 빠르게 떠나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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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널 사랑하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불 붙은 옥수수밭처럼
내 마음을 흔들며 지나가는 것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가 입 속에 혀처럼 가두고
끝내 하지 않은 말
그건 바람이 아니야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혼
가볍긴 해도 그건 바람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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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직 박스

 

나 어렸을 때
뮤직박스 하나를 갖고 있었다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집착했던 것
유리상자 안의 인형이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내 머리맡에 늘 놓여 있던
뮤직박스
나 잠이 들면
세상 전체가 뮤직박스가 되어
별자리들의 음악에 맞춰
끝없이 돌아가곤 했다
그것이 곁에 있을 때
나는 슬픔을 잊었다
나는 나이를 먹고
뮤직박스는 어느새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이 생에서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집착했다
당신이 곁에 있을 때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잊었다
당신이 내 태엽을 감으면
나는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는
뮤직박스 속의 인형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당신은
그 뮤직박스를 버렸다
아무도 태엽을 감아 주는 이 없이
춤을 추던 그 동작 그대로
나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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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243 시인 - 김미화 2015-03-15 0 3914
242 동시인 - 김성룡 2015-03-15 1 3919
241 시인 - 허동식 2015-03-15 1 4613
240 시인 - 천애옥 2015-03-15 0 4321
239 시인 - 리승호 2015-03-15 0 4206
238 동시인 - 윤동길 2015-03-15 0 4596
237 시인 - 고 허흥식 2015-03-15 1 4530
236 시인 - 홍용암 2015-03-15 0 4748
235 시인 - 리홍규 2015-03-14 0 4167
234 시인 - 리창현 2015-03-14 0 4150
233 시인 - 홍군식 2015-03-14 0 4387
232 시인 - 김선희 2015-03-14 2 4066
231 시인 - 황춘옥 2015-03-14 0 4320
230 시인 - 허련화 2015-03-14 0 3798
229 詩의 革命...! 과 詩의 革命...? 2015-03-14 0 3951
228 시인 - 박명순 2015-03-14 1 4285
227 시조의 제5의 변혁은 숙제... 2015-03-14 0 4302
226 시인 - 오정묵 2015-03-14 0 5087
225 시인 - 백진숙 2015-03-14 0 4401
224 시인 - 김영애 2015-03-14 0 4484
223 시인 - 김춘택 2015-03-14 0 4635
222 시인 - 최강 2015-03-14 0 4216
221 시인 - 박성훈 2015-03-14 0 4769
220 시인 - 남철심 2015-03-14 0 4293
219 시인 - 박운호 2015-03-14 0 4932
218 시인 - 김기덕 2015-03-14 0 4737
217 시인 - 리태학 2015-03-14 0 5406
216 시인 - 김인선 2015-03-14 1 4856
215 시인 - 김성우 2015-03-14 0 4500
214 시인 - 고 리명재 2015-03-14 0 4281
213 <<두만강여울소리>>는 영원히... 2015-03-14 0 4311
212 시인 - 리문호 2015-03-13 0 4963
211 시인 - 박설매 2015-03-13 0 4087
210 시인 - 고 김정호 2015-03-13 0 4297
209 시인 - 신현철 2015-03-13 0 4793
208 시인 - 고 김태갑 2015-03-13 0 4491
207 시인 - 한동해 2015-03-13 0 3607
206 시인 - 김경석 2015-03-13 1 4977
205 시인 - 황상박 2015-03-13 0 4204
204 시인 - 리해룡 2015-03-13 0 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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