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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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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 시모음
2015년 06월 15일 22시 28분  조회:5963  추천:0  작성자: 죽림

 

주민등록

     - 하일 -


 우리 가족은 주민등록도 못했읍니다  공식적으로 부산시 진구 초읍동
133번지에 거주한 것이 아니고, 월세방 한 칸 얻어서 서로 하늘같이 믿으며
살았읍니다  누가 죽어도 공식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면 죽었다가 한 번만
더 비공식적으로 부활했으면 좋겠읍니다  그냥 비공식적으로 살다가 그냥
비공식적으로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무죄한 자입니까  뿌리만
남았다가 봄이면 다시 피는 들꽃같이 얼마나 얼마나 무죄한 자들입니까

 

 

주막에서

        - 천상병 -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쟝주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빡 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주막에서

         - 김용호 -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威儀)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

 

세월이여!

 

소금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주점에서

     - 이수익 -

 

바다에 띠워놓은 原木들은

소금물에 저려진 검은 색조로

이제는 체념한 꿈의 타령을

서오서로 부딪치며 울리고,

 

그들이 바다로 오기 전에 있었던

무서운 동화 같은 원시림에서는

오늘도 바람과 은하, 물소리가

어린 나무들을 성장시킨다.

 

부딪쳐라 술잔이여, 한때는 우리들도

은빛 살로 날으던새을 쏘지 않았던가

 

      그렇고 말고 그렇고 말고

      그렇고 말고……

주점에는 불그레한 얼굴들이 몇 둘러앉아

감격한 이 밤을 지키고 있다.

 

 

 

죽림도

     - 이원섭 -

 

  세상과 멀어
  세상과 멀어
  봄이온들 제비조차
  안 오는 곳이었다.

  사철은 푸르른
  죽림 가운데서
  죽처럼 마음만을
  지켜 사는 곳이었다.

  어찌 슬픔인들
  없을까마는
  북두같이 드높이
  위치한 곳이었다.

  세월조차 여기에는
  만만적하여
  한 판의 바둑이
  백 년인 곳이었다.

 

 

 

죽은 날벌레를 위하여

           - 김옥영 -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
  뜨겁다고 그들은 속삭인다.
  전등 갓 안쪽에 까맣게 타 죽은 날벌레들.

  들끓는 한낮의 태로부터 태어난
  날개들은 죽었다. '밤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
  제 그리움에 쫓겨
  작은 불빛의 덫에 머리를 처박고
  어둠에서 달아나왔던 그들의 배는
  멋대로 다시 어둠에 밀려 다닐 뿐.

  겨드랑에 아직 묻어 있는 햇볕의 분가루는,
  흔들리며 구름 속으로 빨려오르는 무더운 수증기의 내음은,
  잃은 것이 많아서 꿈 많은 사람들의 꿈 속에 들어가
  자꾸 날개가 투명해진다.
  어둠이 무서웠던 그들.

  불을 켜서, 밤마다 우리는 외면했다. 보이지 않는 무서움을.
  어둠이 모든 길들을 이장하고
  알 수 없는 그의 복면만을 보여 줄 때
  소름 돋쳐 뛰어간 우리.
  에비! 에비!
  겨자씨만한 불씨에 겨자씨만한 두 눈을 가리고
  에비! 헛짚은 우리.

  두 눈이 먼 날벌레들은
  뜨겁다고 속삭인다. 이제,
  꺼 버려. 작은 불빛들을 불어 버려.
  돌아서, 어둠의 허허벌판을 바라보고
  바라보며 말하라.

  불을 끄면 별이 보인다고.
  불 끈 자리에 에워싸는 어둠에도 낯이 익으면
  어둠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가볍게, 가볍게
  떠 오르는 별빛.
  불을 끄면 밝은 별이 보인다.
  어둠에 조금씩 날개를 비비며 날아오르는 것들이.
  비로소 더 날아오르는 것을 배우는 것들이.
  밤의 유영에 익숙해지고 마는 어떤 힘찬 팔들이.

 

 

 

       죽은 바둑이

           - 김동호 -


  그것은 네가 아니다.

  눈깜짝할 사이
  번개를 타고 간
  너는
  정말 네가 아니다.

  교통
  지옥
  막바지 낭떠러지를

  독기를 곤두세운
  쇠바퀴가
  너의 급소를 후려치고
  달아났을 때

  죽어서도 백리를 달려온 사랑이여.
  피 한 방울 겉으로 내뱉지 않고
  속으로 속으로만 토하며 간
  순결이여.
  벼락치는 문명을
  조용히 조용히 땅 속에 묻고 간
  혼령이여

  아버지
  개도 심장마비가 있나요?
  막내가 울면서 물었을 때
  나는 울면서 대답했다.
  암 있고말고.
  나무도 있는데
  돌도 있는데.

  왜 나는 지금
  죽음 앞에 맑게 서 계시는
  은사 C선생을 생각하는 것일까?
  왜 나는 지금
  십 년 전에 간 고우
  K형의 그 마지막 조용한 눈빛을
  생각하는 것일까?
  교통이 두절된 밤거리를 활보하는
  도적고양이가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고 죽은
  개를 무한히 힐난하는 오후.

  먼 하늘가
  어데로부턴가
  별빛이 날아와
  바닷속의 말간 눈빛과
  너의 빛나는 마지막 침묵을 엮어
  프리즘을 만든다.
  쏟아지는 프리즘 사이로
  사라지는 그림자들
  시간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바둑아
  죽어서도 백리를 달려온
  바둑아

  나는 오늘 너에게서
  영원히 사는 법을 배운다.

 

 

 

죽음

     - 이용악 -

 

별과 별들 사이를

해와 달 사이 찬란한 허공을 오래도록 헤매다가

끝끝내

한번은 만나야 할 황홀한 꿈이 아니겠읍니까

 

가장 높은 덕이요  똑바른 사랑이요

오히려 당신은 영원한 생명

 

나라에 큰 난 있어 사나히들은 당신을 향할지라도

두려울 법 없고

충성한 백성만을 위하야 당신은

항상 새 누리를 꾸미는 것이었읍니다.

 

아무도 이르지 못한 바닷가 같은 데서

아무도 살지 않은 풀 우거진 벌판 같은 데서

말하자면

헤아릴 수 없는 옛적 같은 데서

빛을 거느린 당신

 

 

죽편(竹篇) - 여행

          - 서정춘 -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중앙탑에서
          - 博川 최정순 -

 
한반도 한가운데 세워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중원에 홀로 우뚝 서 
한반도 치솟는 정기 모아 
천하 굽어 살피고 있으니 
나그네 잠시 발길 멈춰 
인간사 무사무탈하기를 
큰 절 올려 간절히 빌고 비니 
저 멀리 찬바람 맞는 빨간 능금 
알알이 옹골차게 영글어 가고 
탄금호 핏빛 석양에 
정겨운 우륵 가얏고 한 가락 
갈대꽃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간다.

 

 

중추절

      - 원용문 -


  해마다 가윗날은
  하늘 나라 사는 날

  은도끼 금도끼로
  초가 삼간 집을 짓고

  순이야 네 손목 잡으면
  꽃구름도 일었지.

  달빛어린 소반 위에
  둥그런 어머니 사랑

  하나, 둘 빚노라면
  솔바람도 일어오고

  순이는 하늘에 닿아
  둥근달이 되었지.

  사자골 머루 섶에
  꿈을 묻고 싶던 날

  가을 빛에 영근 정분
  소근대는 네 눈동자

  순이야 나즉이 부르면
  메아리로 안겼지.

 

 

 

조그만 사랑노래
        - 황동규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조그만한 무덤 앞에

                 - 유정 -

 

  흰 나무패 눈에 아픈
  임자 무덤 앞에 손을 짚으면
  잊은 줄만 믿었던
  슬픔이 파도처럼 밀리어 오오

  임자 하얀 손이 여기에 있소
  임자 푸른 눈동자가 여기에 있소
  되살아 오는 가지가지 말씀
  몰래 홀로 앓다가
  몰래 홀로 눈 감은
  임자는 지금도
  먼 파도 소리에 홀로 귀 기울이고 있소이까

  수풀 속에 소소로이 흔들리는 들국화
  들국화 들국화
  시월달 산바람에 마구 휘불리우는
  연보라빛 가녈픈 네 모습을
  오오 누구라 마음하여 나는 불러 볼 건가

  임자 앞에 꺾고저
  이 산허리 어느 비탈 어느 그늘에나
  구름처럼 들국화만 피어 있음에
  난 다시금 눈물이 솟아... 뜨거운 눈물이 솟아...

  흙내음새도 새로와 가슴 막히는
  임자 조그마한 무덤 앞에 얼굴을 묻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순결하리라 맹세하는
  나요
  유정이요

 

 

 

조각달

        - 유안진 -


사랑이 떠난 후에
알게 모르게 허물어진 몸
허공에 떠도는 줄
혹시 알리 또 모르리만
이 길이 내 길이리라 여겨
홀로 기웃대었다


그대 뉘 지아비 되고
나 또한 지어미 되니
운명이 꾸미는 장난에
맹물 같은 웃음뿐
가벼이 반공중에서
사라지고 말아라


무궁한 세월이 흘러
저승길 더듬을 제
그 누가 문책하면
품안에서 꺼내 뵈리
네 가슴 노리던 비수

 

 

조국(祖國)
             - 정완영 -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祖國은 너의 것이 아니다

             - 한무학 -

 

눈짓으로 서로 입술을 깨물어 답할 수 있는

수많은 기폭들이

한데 뭉쳐 펄럭이며 다가오는

저 육중한 바람소리는

 

조국의 하늘은 푸르러

새들은 저렇게 서로 훨훨 오고 가는데

너와 나와 그리고,

나는 너를, 너는 또한 나를

서로 이렇게 길게 미워해야 한다는 이 부자유를

언제까지나 견디어가야 하는가,

 

조국의 산악은 연연

북으로 남으로 저렇게 서로 정다이 오고 가는데

너와 나와 그리고,

나와 너와는

착한 조국에 금 긋고, 好食에 잠들은 그러한 자들에,

마음에도 없는 찬양의 손깃을

언제까지나 높이 추겨주어야 하는가.

 

조국의 江河는 출렁출렁.

고기떼들은 저렇게 서로 싱싱하게 오고 가는데

너와 나와 그리고.

너의 남아돌아가는 일터와

또한 나의 남아돌아가는 일꾼들을

서로 바꿀 수 없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내야 하는가.

 

조국의 延海는 조용히 파도쳐

난류와 한류는 저렇게 서로

무거이 흘러오고 가는데

너와 나와 그리고.

나와 너와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서로

半體溫만을 지켜가야 하는가.

 

조국에 눈이 훨훨 내리는 날이면

북녘 붉은 軍衣 견장 위에도,또한

남녘 카키색 군의 견장 위에도,

하이얀 눈은 수북수북 쌓여

서로 기꺼운 한핏줄 白衣의 너와 나로

다시 돌아가고야 마는데,

너와 나와 그리고,

너는 너의 것 아닌

나도 또한 나의 것 아닌 그러한 총검으로

너는 나의 가슴팍을, 나는 또한 너의 가슴팍을

언제까지나 서로 이렇게 겨누고 있어야 하는가.

 

눈짓으로 서로 입술을 깨물어 답할 수 있는

수많은 기폭들이

한데 뭉쳐 펄럭이며 다가오는

저 육중한 바람소리는,

 

 

조선의 딸

        - 모윤숙 -

 

이 마음 물결에 고요치 못할 때
믿부신 그의 음성 내 곁으로 날아와
내 영혼의 귓가를 흔들어줍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느냐"고.

 

내가 자리에 피곤히 기대었을 때
소리없이 그의 손은 내 가슴에 찾아와
고달픈 내 혼에 속삭입니다.
"너는 왜 잠들지 못했느냐"고

 

헤어진 치마보고 가난을 슬퍼할 때
어데선지 그 얼굴은 가만히 나타나
께어진 창틈으로 속삭입니다.
"너는 조선의 딸이 아니냐"고.

 

그리운 사람 있어 눈물질 때면
내 어깨 가만히 흔드는 이 있어
자비한 목소리로 들려 줍니다.

"인생의 전부는 사랑이 아니라"고.

 

 

조선의 맥박(脈搏) 
           - 양주동(梁柱東) -

 

한밤에 불 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잠잠할 때에,
나는 조선의 힘 없는 맥박을 짚어 보노라.
나는 임의 모세관, 그의 매박이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훤한 동녘 하늘 밑에서
나의 희망과 용기가 두 팔을 뽐낼 때면,
나는 조선의 소생된 긴 한숨을 듣노라.
나는 임의 기관이요, 그의 숨결이로다.

 

그러나 보라, 이른 아침 길가에 오가는
튼튼한 젊은이들, 어린 학생들, 그들의 공 던지는
날랜 손발, 책보 낀 여생도의 힘 있는 두 팔
그들의 빛나는 얼굴, 활기 있는 걸음걸이
아아! 이야말로 조선의 맥박이 아닌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갓난아이의 귀여운 두 볼
젖 달라 외치는 그들의 우렁찬 울음, 작으나마 힘찬,
무엇을 잡으려는 그들의 손아귀
해죽해죽 웃는 입술, 기쁨에 넘치는 또렷한 눈동자.
아아! 조선의 대동맥, 조선의 폐는 아기야 
너에게만 있도다.

 

 

조선의 참새

     - 한석윤 -

                                            
챠챠

중국참새는

중국말로 울고

 

쥬쥬

일본참새는

일본말로 울고

 

짹짹

조선참새는

조선의 새라서

남에 가나

북에 가나

우리말로 운다.

 

짹짹

하얀 얼 보듬는

조선의 참새.

 

 

조춘

    - 김양식 -

 

  눈 내리는 아침
  솔잎의 시샘이
  연두빛 불꽃을
  훌훌 피울 적
  너는 살짝 제비목욕을 하고
  머리 뒤꼭지도 마르기 전에
  맑은 눈빛으로 내게로 온다.

 

 

조춘

    - 김소원 -

 


  타래진 햇살
  하오를 엮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붓끝을 모으면

  향 스민 자국마다
  숨결이 돌아
  초서 머문자리
  조으듯 일어서는

  난향 바람에
  놀라는
  세상.

 

 

 

 

조충혼(弔忠魂) 
               - 윤영춘 -


새벽닭 울며 눈을 감았다
바다의 소란한 파도소리 들으며
 
영오(囹圄)의 몸에 피가 말라가도 
꿈이야 언젠들 고향 잊었으랴 
스산한 고동소리 울려올 제 
민들에 웃음으로 맘 달랬고 
창안에 빗긴 달빛 만져가며 
쓰고 싶은 가갸거겨를 써 보았나니

근심에 잡힌 이마 주름살
나라 이룩하면 절로 틀렸건만 
채찍에 맞은 생채기 낫기도 전에 
청제비처럼 너는 그만 
울고 갔고나.

 

 

조카딸에게

       - 김원호 -

 

  너를 아이로만 생각하던 건
  바로 내 잘못
  어느새 어른의 눈짓을 배워
  섬세한 어깨를 슬쩍 내뵈는구나
  춘정기의 도드라진 가슴
  젖은 눈
  누가 너에게 작은 허리띠를 거넬까
  머리의 장식을 좀 숫되게
  미로의 껄음걸이를 하지 말고
  팔짱 낀 의젓한 모습에
  나는 할 말이 없구나
  숨가쁘게 뛰는 심장
  한 마리 파닥이는 새
  공중에 도는 피리소리를 좇아
  너는 날아가려 하는구나
  좀 이상해
  옮기는 정은
  벌써 계절이 바뀌는데
  혓바닥에 느끼는 산초 열매처럼
  언제나 너는 애띤 미련이구나.

 

 

존재의 이유 

            - 김종환 -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지금은 헤어져 있어도
니가 보고 싶어도 참고 있을 뿐이지
언젠가 다시 만날테니까 그리 오래 헤어지진 않아
 너에게 나는 돌아갈꺼야
모든걸 포기하고 내게 가고 싶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알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지만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내가 달려갈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졸고 있는 신

      - 김규태 -

 

  하느님은
  요즘 계속 졸고 계신다.
  눈을 뜨고
  맑고 깊게 사물을 가늠해 볼 여유가 없다.

  옛날엔
  단지 밤에만 주무셨다.
  주무실 동안에는
  풀벌레까지도 함께 잠들어 꿈꾸었고
  자신도 흥건히 꿈 속에 빠져 들 수 있었다.

  어쩌다 마른 기침소리만 내어도
  아주 잠에 골아 떨어진
  땅 속의 두더지와
  아슬한 가지 끝에서 숙면하던 날짐승까지도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나도 그때 깨어 일어났다가
  다시 잠 들어야 했다.

  그때는 생물들이
  한결같이 하느님편이어서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요즘은
  너무 변괴스러운 일이 많아
  한 밤에도 잠자리를 펴지 못하고
  천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노인.

  하느님이 한낮에도 졸고 있는 이상
  우리는 모두 불면증으로 고생하게 된다.

 

 

졸본 꾀꼬리

      - 박경석 -

 

  보리밭 고랑에서 풀냄새 어머니는
  꾀꼬리 사설을 풀이해 주셨다.
  머리 빗고 물 건너 임 만나 볼까.
  비 갠 뒤에 우는 뜻을 새겨 들었다.
  삼대같이 키가 크면서
  버들 그늘 머리 빗는 강의실이었다.
  태자 유리왕의 참된 사랑은
  고구려에 옮겨 심은 중원의 꽃,
  치희의 슬픔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열을 올렸다.
  이 노래를 강의할 때마다
  졸본 꾀꼬리가 와서 운다며
  주임교수는 눈매가 엄숙했다.
  사랑의 실습보다
  눈물의 효시부터 먼저 배웠다.
  성빈여숙 기숙사로 그대 떠나고
  내 앞에는 텅 빈 보리밭만 남더니.
  되돌아갈 궁전도, 버드나무도,
  버드나무 선 토담집도 없더니.
  꾀꼬리 사설 들을 적마다
  불혹을 넘긴 이 나이에도
  상처 아문 자국에
  따끔따끔 그 아픔 살아나느니.

 

 

 

좁디좁은 세월의 길목에서

              - 송찬호 -

 

전쟁이 끝나던 그 해 그 거리에는 갑자기

죄지은 자들로 붐볐다

창녀들은 죄지은 자들을 부르러 거리에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방 앞에는 죄지은 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짓을 오래하다 보니 이제 반은 짐승이 됐어요

껌을 짝짝 씹으며 여자는 아랫도리를 벗었다

사내가 발가벗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아아 개가 되고 싶어 ! 사내는

작은 언덕 밑에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죽을 수도 있었으리라

죽지 않기 위하여 죽일 수도 있었으리라

 

무덤같은 그 작은 언덕을 밀어 뭉개며 사내는

피를 흘리며 앞으로 기어갔다, 기어서

여자의 가랑이 밑을 지날 때 우우, 미친 개처럼 울부짖었지만

아쉬운 짧은 시간이 지나도 사내의 가슴엔 털이 돋지 않았고

긴 세월이 흘러도 죄지은 자들의 행렬은 여전히 줄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던 그 해 그 거리에 죄없는 자가

홀로 살아 돌아왔을 때

여자들은 오색종이처럼 날려가 그 가슴에 매달렸다

죄 많은 자들의 모가지처럼, 빛나는 전공戰功훈장처럼

 

 


종 (鐘)

      - 설정식 -
                                        
 

만(萬) 생령(生靈)  신음을

어드메 간직하였기

너는 항상 돌아앉아

밤을 지키고 새우느냐.

 

무거히 드리운 침묵이여

네 존엄을 뉘 깨트리드뇨

어느 권력이 네 등을 두드려

목메인 오열(嗚咽)을 자아내드뇨.

 

권력이어든 차라리 살을 앗으라

영어(囹圄)에 물러진 살이어든

아 권력이어든 아깝지도 않을 살을 저미라.

 

자유는 그림자보다는 크드뇨.

그것은 영원히 역사의 유실물(遺失物)이드뇨.

한아름 공허(空虛)여

아 우리는 무엇을 어루만지느뇨.

 

그러나 무거히 드리운 인종(忍從)이여

동혈(洞穴)보다 깊은 네 의지 속에

민족의 감내(堪耐)를 살게 하라

그리고 모든 요란한 법을 거부하라.

 

내 간 뒤에도 민족은 있으리니

스스로 울리는 자유를 기다리라.

그러나 내 간 뒤에도 신음은 들리리니
 
네 파루(破漏)를 소리없이 치라.

 

 

 

종로 5가(鐘路五街)

               - 신동엽 -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낮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기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에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 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 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이 뿜어낸 이마엔 세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미면 타자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肥료廣告)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없고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종례 시간

      - 도종환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지 말고

코스모스 갸웃갸웃 얼굴 내밀며 손 흔들거든

너희도 코스모스에게 손 흔들어 주며 가거라

쉴 곳 만들어 주는 나무들

한 번씩 안아 주고 가라.

머리털 하얗게 셀 때까지 아무도 벗해 주지 않던

강아지풀 말동무해 주다 가거라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

만질 수도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

공간에 빠져 있지 말고

구름이 하늘에다 그린 크고 넓은 화폭 옆에

너희가 좋아하는 짐승들도 그려 넣고

바람이 해바라기에게 그러듯

과꽃 분꽃에 이 맞추다 가거라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 방안에 갇혀 있지 말고

잘 자란 볏잎 머리칼도 쓰다듬고 가고

송사리 피라미 너희 발 간질이거든

너희도 개울물 허리에 간지럼 먹이다 가거라

잠자리처럼 양팔 날개 하여

고추밭에서 노을 지는 하늘 쪽으로

날아가다 가거라

 

 

종소리

      - 박남수 -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종이배 사랑

         - 도종환 -

 

내 너 있는 쪽으로 흘려 보내는 저녁 강물빛과
네가 나를 향해 던지는 물결소리 위에
우리 사랑은 두 척의 흔들리는 종이배 같아서
무사히 무사히 이 물길 건널지 알 수 없지만

 

아직도 우리가 굽이 잦은 계곡물과
물살 급한 여울목 더 건너야 하는 나이여서
지금 어깨를 마주 대고 흐르는 이 잔잔한 보폭으로
넓고 먼 한 생의 바다에 이를지 알 수 없지만

 

이 흐름 속에 몸을 쉴 모래톱 하나
우리 영혼의 젖어 있는 구석구석을 햇볕에 꺼내 말리며
머물렀다 갈 익명의 작은 섬 하나 만나지 못해

 

이 물결 위에 손가락으로 써두었던 말 노래에 실려
기우뚱거리며 뱃전을 두드리곤 하던 물소리 섞인 그 말
밀려오는 세월의 발길에 지워진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내가 쓴 그 글씨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었음을

 

내 너와 함께하는 시간보다
그물을 들고 먼 바다로 나가는 시간과
뱃전에 진흙을 묻힌 채 낯선 섬의
감탕밭에 묶여 있는 시간 더 많아도

 

내 네게 준 사랑의 말보다 풀잎 사이를 떠다니는 말
벌레들이 시새워 우는 소리 더 많이 듣고 살아야 한다 해도
잊지 말아다오 지금 내가 한 이 말이
네게 준 내 마음의 전부였음을

 

바람결에 종이배에 실려 보냈다 되돌아오기를 수십번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이 한마디 네 몸 깊은 곳에
닻을 내리지 못한다 해도 내 이 세상 떠난 뒤에 너 남거든
기억해다오 내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종전차

      - 이형기 -

 

  멀리서 삐걱거리며
  종전차는 간다.
  마즈막 기대가 실려 간다.

  내 가슴에 역력한 차바퀴
  여인아
  그곳에 눈물을 쏟으라

  약한 자의 침실에는
  달이 비칠 것이다. 오늘밤
  자비의 명월이

  다사롭고나. 오히려
  생활에 찌든 검은 손등을
  어루만지는 자비의 월광

  아아 인생의 희비는
  가벼운 싸락눈이다.
  또 그처럼 무심한 은혜다.

  어디에서고 내가
  팔을 벼고 누웠는 창 밖을
  가는 종전차.

 

 

 

지금도 지금도

          - 최영철 -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잠들어 있거나
  명상에 젖어 온 밤을 지새울지라도
  미묘한 음반처럼
  레미콘은 돌고 있다
  등돌린 그대들의 화합을 위하여
  모래와 자갈은 아프게
  물과 시멘트는 성질을 죽이고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까마득히 잊고 있을 때에도
  길을 걷거나 걷지 않을 때에도
  따뜻한 화합을 위하여
  그대들 먼 발치에 우뚝 멈추어선
  콘크리트는 위험하지
  순하게 섞여 물에 물탄 듯
  물에 물탄 듯 부서지지 않는
  시멘트는 모래가 되고
  모래는 자갈이 되어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오랜 미아로 서성대는
  그대들의 어깨너머
  다시 만남을 위하여
  알게 모르게
  절망하지 않을 때에도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양성우 -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총창뿐인 마을에 과녁이 되어
  소리없이 어둠 속에 쓰러지면서
  네가 흘린 핏방울이 살아 남아서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 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골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진흙의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네가 죽꼬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 끝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혹은 군화 끝에 밟히는
  끈끈한 눈물로
  잠시 머물다가 갈지라도
  불보다 뜨거운 깃발로
  네가 어느날 갑자기 이 땅을 깨우고
  남과 북이 온몸으로 소리칠 수 있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엄동설한에 재갈물려서
  여기저기 쫓기며 굶주리다가
  네가 죽은 그 자리에 과녁이 되어
  우두커니 늘어서서 눈 감을지라도
  오직 한마디 민주주의, 그리고
  증오가 아니라 포옹으로
  네가 일어서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이 저주받은 삼천리에 피었다 지는
  모오든 꽃들아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지난날

     - 이승훈 -

 

  지난날을 어떻게 잊으랴
  새벽닭 울 때마다
  삶은 노엽고 원통했다

  해질무렵 귀머거리로
  바다에 귀 기울여도
  바다는 언제나 말이 없던

  지난날을 어떻게 잊으랴
  한사코 불빛 식어가던 방에서
  그대 고운 손
  차마 잡을 수 없었던

  지난날을 어떻게 잊으랴
  그대 눈물 고인 눈을
  어떻게 잊으랴 통곡 뒤의 산들을
  산 아래 마을들을 밤마다
  그대 손이 켜던 램프를

  어떻게 잊으랴 이른 새벽
  눈길 밟고 도망치던 삶
  도망치던 맨발의 날들을
  소리도 없는 날들을
  이렇게 또 다가오는 날들을

 

 

 

지렁이의 노래 (정해 여름 삼팔선을 마음하며)

           - 윤곤강 -


아지못게라 검붉은 흙덩이 속에

나는 어찌하여 한 가닥 붉은 띠처럼

기인 허울을 쓰고 태어났는가


나면서부터 나의 신세는 청맹과니*

눈도 코도 없는 어둠의 나그네이니

나는 나의 지나간 날을 모르노라

닥쳐 올 앞날은 더욱 모르노라

다못* 오늘만을 알고 믿을 뿐이노라


낮은 진구렁 개울 속에 선잠을 엮고

밤은 사람들이 버리는 더러운 쓰레기 속에

단 이슬을 빨아마시며 노래 부르노니

오직 소리 없이 고요한 밤만이

나의 즐거운 세월이노라


집도 절도 없는 나는야

남들이 좋다는 햇볕이 싫어

어둠의 나라 땅 밑에 번드시 누워

흙물 달게 빨고 마시다가

비오는 날이면 땅위에 기어나와

갈 곳도 없는 길을 헤매노니


어느 거친 발길에 채이고 밟혀

몸이 으스러지고 두 도막에 잘려도

붉은 피 흘리며 흘리며 나는야

아프고 저린 가슴을 뒤틀며 사노라

 


지리산

     - 안도섭 -


사시사철

어머니의 품처럼

의젓한 산 지리산


부채살 꽂는

연하봉 아침해 뜨면

산이 고와 날고싶으다


도도한 력사의 숨소리

솔바람에도 흐느끼고

피아골의 아픔이

등걸인듯 저려온다


한번 어둠이 걷히고도

누가 누굴 겨누던

그 밤낮

피가름의 불길이더냐


봄이면 철쭉꽃

푸른 산맥 넘나든

청노루

그 보람마저

앗아가 버리고


오 지리산,침묵의 산

지리산이여

말을 해다오


혈맥처럼

산줄기 뻗어

련이은 고을과

옹크린 마을

휘둘러 섰는

우뚝우뚝한 봉우리


바라보면 갈매빛

하늘 맞닿은 천왕봉

그날의 메아리

달려가는듯


한여름 구름 휘몰리고

깊은 골 우뢰치면

천지간에

몸을 떠는 지리산

산이 운다

 

 


     지리산 뻐꾹새

           - 송수권 -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몸을 더 넘겨서야
4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중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름 끝에
  비로서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소리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지비(紙碑)

     - 이 상(李 箱) -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작아서다리는짧고바른다리가아프니 내바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부부(夫婦)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무사(無事)한세상(世上)이병원(病院)이고꼭치료(治療)를기다리는무병(無病)이끝끝내있다.


지비/ 이상(李箱)의 조어(造語)로서, 석비(石碑)의 돌을 '종이'로 환치한 것. 이로써 '기념(紀念)'에 대한 반어적 태도를 보여 준다.

 

 

 

지하여장군

       - 박현령 -

 

  장군님, 여장군님.
  어디쯤 입니까
  그곳은
  할 수도 아니 할 수도 없이
  끝없이 황량해가기만 하는
  교외의 어느 간이역, 거기
  넘쳐 흐르는 쉬르리얼리즘의 배반
  밤차를 기다리며, 오직
  사랑만이 남아있어
  불타야하는
  그런 충절의 밤의 간이역
  꺼져들어가는 가등을
  켜고 또 켜며
  기다릴 쑤도, 아니할 수도 없는
  끝없이 황량해 가기만 하는 
  거긴 어디쯤입니까.
  지하여장군님!

 

 

 

지하인간

      - 장정일-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직녀에게

        - 문병란 -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은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를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연인아

        

 

진눈깨비
      - 기형도 -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

        - 유정 -

 

  가는 곳곳이 길은 막다르고
  가슴 속은 하늘처럼 어둡다
  미친개같이 다랍게 고픈 배
  배꼽까지 젖는 대로 어는데
  염치 없이 양뺨을 흘러내리는
  차고 짠 이것은 무슨 진눈깨비냐
  그날 내 멱살을 잡고 쪼주하시던
  아버지 당신의 불덩이 같은 눈초리
  되살아오는 그런 이픔을 안고
  오늘 또 바람 쌀쌀한 경상도 거리
  흙탕길을 자꾸만 미끄러지며
  아아 내 나이 서른 하나
  이렇게 얼굴과 손이 추해졌으니---

 

 

 

진남포항

          - 博川 최정순 -

 

어둠 팔 벌려

평택 항 감싸 안고

살진 보름달빛 흩뿌리면

화물 운반 크레인 잠들고

중국  가는 여객선 닻 올리면

봄날 고양이처럼

사위 잠들어 가고

가로등 긴 그림자 끝

누운 박천 고향 추억

아버지 마음 배에 실어

진남포향으로

동풍에 푸른 돛 달고

이물 돌려  달려가네.

 

 

 

진달래 산천
       - 신동엽 -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뱃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집으로 가는 길

           - 강방영 -


  1
  바람과 놀고 있는
  시골 아이들
  머리카락 살랑일 때마다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

  진분홍 분꽃을 따
  꽃술 당겨 씨방으로
  귀걸이하고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는 길.

  공기마저 살쩌 있구나!
  가슴 가득
  맛있어라
  맛있어라

  전나무 사이 길
  아직도 풍성한
  남은 여름의 노래

  눈을 뜨고
  걸어 가다가
  눈을 감고
  걸어 가다가.

  2
  밤의 숲에
  안겨
  어둠은 잠이 들고

  깜박깜박
  하늘에서
  시간을 재는
  푸른 별들

  아가들의 꿈길 지켜
  두어번 낮게 짖는
  검둥개

  불빛 새는 마당에는
  감꽃 홀로
  깨어 귀 기울이고

  심해처럼
  갈앉는 밤

  먼 사막에서 일어나
  파리하게 불어 오는
  바람 소리

  마을 한 귀퉁이
  소리 없이 부서져
  잠든 이들의 이마에
  눈썹에 내리는
  밤의 가루
  검은 재와 같이
  조용히
  내려 앉는다.

  3
  바람을 재우며
  내리는 가랑비

  수북이 동백꽃 떨어져
  노랗게 꿀물 씻기는
  마당
  다시 담장은 푸르게
  이끼를 입는다.

  지나는 자리마다
  안개는 고사리 새순
  세우고

  산으로
  꿈 속에서도
  산으로
  달리는 아이들

  아이들과 함께
  물결치는 산
  아이들이 웃는 소리
  산이 웃는 소리

  골짜기를 오르며
  빛나는 꼭대기를
  휘어 감으며
  돌굽이에 나무 등걸에
  울리는 메아리

  쉬임 없이 당기는
  시간의 ?시위에서
  솟구치는 빛의
  화살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아이들은 춤춘다
  아이들은 노래한다.

 

 

   - 조남익 -

 

  하필이면 길가에
  태어난 죄
  질경이의
  하얀 뿌리가 밉다.

  하늘에 닿지 못하는
  어여차, 미치고 싶은 사랑
  코리어에 태어난
  나의 죄...

  태평양 끝
  높이높이 오른
  우리들의 죄.

  질경이야,
  짓밟힌 질경이야
  어여차, 미치고 싶은
  밟히며 자란 사랑이야.

 

 

 

  - 박진숙 -


  그대 가엾은 사람
  푸른 빛 도는 등허리
  눈물 젖은 얼굴
  외로운 손

  죽어서
  그만 나도 죽어서
  어느 기러기떼 눈 먼 한 쌍의
  기러기 되어...

  가마득히 눈 내리는
  오오 우리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하늘에 가면.

  나뭇가지 뚝 뚝 꺾으며 바람 불어
  이 아침 눈발 그치고
  꿈도 깨이고

  맑은 하늘을 보니 주여,
  저는 눈물이 많아
  아무래도 눈물 많은 그 사람을
  떠나 보낼 수 없었읍니다.

 

 

 

죄를 짓고 돌아오는 날 밤

        - 도 종 환 -

 

죄를 짓고 돌아온 날 밤...  밤을 새워 울었습니다.

 

아침마다 당신으로 마음을 열고
날 저물면 당신 생각으로 마음 걸어 닫으며
매일 매일 당신 생각만으로 사는데도
이렇게 흔들리며 걸어가는 날이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울지 않고
무너지는 나의 마음 때문에 울었습니다.
죄를 지은 손 하나를 잘라버리고라도
깨끗한 몸으로 당신께 가고 싶었습니다.

 

제 불꽃일 때 물길의 마음으로
언제나 당신이 다독이며 오심으로 제가 살았습니다.
제가 손바닥만큼 당신을 사랑할 때
당신은 한 아름의 크기로 저를 보듬어 주시어 제가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 흔들리는 밤이 많습니까?
죄를 짓고 돌아온 날 밤 당신이 그리워 울지 않고

 

제 마음이 야속해 울었습니다

 

 

 

자기 빨래하기

     - 채희문 -


  하루 종일 남의 겉살만 닿으며 살다
  누구에게도 깊이 닿지 못하고
  나에게도 깊이 이르지 못하고
  늦은 저녁에 돌아와
  나의 하루를 빨래한다

  빈 시간의 한가운데 고인
  맑은 고요의 물
  내 모두를, 잔가지에서 밑뿌리까지
  하나 하나 지우듯 담그고
  확인하듯 만지며
  버리듯 비비며
  자꾸만 나를 물에 헹군다
  나의 안을 뒤집어 짠다

  하루의 구정물 줄어들 때까지
  내 얼굴 맑은 물에 보일 때까지

  그렇게 다시금 건져진 나의 안팎
  잠의 줄에 걸고
  꿈의 바람결에 널어
  한밤내내 나를 말린다

  그러나 끝내 마르는 것은
  겉자락뿐인가

  또다시 다음날 밤이면
  어느새 나의 가슴은 
  여전히 그날의 줄에 걸린 채
  밤 이슥토록 젖어 울고...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 신경림 -


자리를 짜보니 알겠더란다
세상에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미끈한 상질 부들로 앞을 대고
좀 처지는 부들로는 뒤를 받친 다음
짧고 못난 놈들로는 속을 넣으면 되더란다
잘나고 미끈한 부들만 가지고는 
모양 반듯하고 쓰기 편한 자리가 안 되더란다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서러워진다
세상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기껏 듣고 나서도 그 이치를 도무지 모르는
깨닫지 못하는 내 미련함이 답답해진다
세상에 더 많은 것들을 휴지처럼 구겨서
길바닥에 팽개치고 싶은 
내 옹졸함이 미워진다

 

 

 

자수(刺繡)
         - 허영자 -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靑紅)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世事煩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내올 듯

머언
극락 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자연 - 춘향이 마음 초(抄) -

               - 박재삼 -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자유

     - 조병화 -

 

공중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공중을 날며 스스로의 모이를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그렇게 공중을 높이 날면서도
지상에 보일까 말까 숨어 있는 모이까지
찾아먹을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아, 그렇게
스스로의 모이를 찾아다니면서
먹어서 되는 모이와
먹어서는 안 되는 모이를 알아차리는
민감한 지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지상을 날아다니면서
내릴 자리와 내려서는 안 될 자리,
머물 곳과 머물러서는 안 될 곳,
있을 때와 있어서는 안 될 때를
가려서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가볍게 먹는 새만이
높이 멀리 자유를 날으리.

 

 

자유.2

     - 정의홍 -

 

  어젯밤엔 울분으로 뜨거워진 소줏잔을 퍼마셨어요. 귀가하는 길에는
저주스런 환영들이 거만하게 서 있는 그 집 담벽에 시원하게 오줌총도 쏘아
보았지요. 나같은 천한 놈이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니, 그래도 내 나라엔
자유가 참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자유란 사람보다 위대한 것,
그것은 상식을 구속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어요.

  어젯밤엔 자유의 진짜 얼굴을 처음 보았지요. 그것은 남을 세울 수도,
눕혀버릴 수도 있는 초능력의 얼굴이었어요. 기회가 오면, 참으로 위대한
자유의 기회가 오면 수백억의 욕망을 슬쩍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를 향한 위대한 업적의 제스처로 되돌릴 수도 있고, 아뭏든 이러한
새로운 법률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자유란 만물 앞에선 참으로 위대한
존재였음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어요. 윤리, 윤리, 오늘날 윤리란 자유
앞에선 그까짓 별것 아닌 위신이며, 담배불처럼 꺼져버릴 위선자의
얼굴이었어요.

  어젯밤엔 아내 몰래 남의 자가용을 탄 녀석과 남편 몰래 밤 풍선을 띄운
아주머니를 만났지요. 이들의 자유란 (서恕)자를 목에 걸고 다닌다는 점에서
도덕군자의 외침보다 높고, 그들의 마음보다 넓다는 걸 이제야 겨우
깨달았어요. 내 나라의 자유는 나의 핏발 선 주먹보다 힘이 세고, 나의
직언보다 아량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자유로에서 
         - 박천 최정순 -

 


자유로 달려 임진각 가는 길 
평양 개성 77 표지판 
언제부터 있었나 

배꼽 걸려 숨통 끊긴 
저 철책 꼬리 감추면 
북으로 북으로 단숨에 달려 
아버지 고향 박천 당도하여 
혼이나마 해후하련만 

말로만 자유로 가장자리엔 
봄꽃 아우성치며 부서지는 임진강
속으로 울며 여울지는 피눈물은 
고향 떠나 서럽게 살다간 아버지 통곡

 

 

 

 자유에 대하여

      - 이영유 -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말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배나무는 시원하다 봄에
  싹이 돋는 모든 식물은 시원하다
  시원한 것은 배고픈 것이다
  배고픈 것은 서양적인 자유에
  해당되는데,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밥이 필요하다
  움트는 배나무 가지가 저절로
  흔들리는 데에도 자유가 필요하다
  말이 없음은 그것이 아주 많은 말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기고
  몸부림치는 것도 자유이다.
  배가 고플 때 비로소 밥을
  생각한다는 것은 봄바람에
  떨림의 이유를 감춘 싹트는
  배나무의 욕망과 같다.

  모름지기 떨림이란 자유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자야곡(子夜曲)

           - 이육사 -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 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돌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절여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소리


숨 막힐 마음 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노라.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자전

     - 강은교 -

 

자전 중,

문을 열면 모든 길이 일어선다.
새벽에 높이 쌓인 집들은 흔들리고 
문득 달려나와 빈 가지에 걸리는 
수세기 낡은 햇빛들 
사람들은 굴뚝마다 연기를 갈아 꽂는다.
길이 많아서 길을 잃어버리고
늦게 깬 바람이 서둘고 있구나.

 

 

 

자정의 꿈

      - 박상봉 -


  창 밖에 가득히 눈 내리는 밤
  나의 잠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
  낮은 곳 먼저 눈들은 쌓이고
  드러난 살은 모두 희어져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언덕을 넘어
  십리쯤 다가오는 나무를 보았다.
  어느 이름모를 활엽수의 중심에서 솟아오른 새들은
  밤이 너무 깊어서 잠들지 못하고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 가는 별자리를 쫓아
  꿈의 궤도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문득 없어진 별 하나를 그리워하다가
  새처럼 쉽게 날아오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였다.
  눈은 좀처럼 그치지 않고
  터널을 지나 비껴서는 나무들 사이로
  어깨 나란히 눈덮인 산들이 일어서서
  밤마다 꿈꾸는 종착역까지
  가 닿 을 수 있 을 까
  갈수록 길은 걱정에 쌓인다.

 

 

 

자화상 
           - 서정주 -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고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自畵像 자화상
                  - 윤동주 -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億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 이선관 -


  민족시인만해를죽도록존
  경한다고하면서일제가죽
  잠바를입고몇달만인가가
  장오랜만에원고자빈칸에
  나를채우고는거창한제목
  이떠오르지않아이미지는
  포물선만그리다가건방진
  게나이가얼마나먹었다고
  아아이제부터나는타락하
  는가보다자꾸만살아야지

 

 

 

작은 짐승

     - 신석정 -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러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처럼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말없는 작은 짐승이었다.

 

 

 

작업대 앞에서

       - 김용주 -


  낮일을 하고, 7시
  구멍가게로 몰리는
  캄캄한 눈발
  우리는 서로 볼을 비비며 지하실로 들어간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다른 이들은 지금 무슨 일을 끝내고 있을까'

  엉켜붙은 실뭉치 사이로
  때에 절고 닳아진 원판
  가득히 널려 있는 작업대 앞에서
  너는 졸고, 몸판만 남은 꿈에 시달리고
  나는 봄 옷감에 싸여 재봉틀 바퀴마다 굴러 다닌다.

  옷들은 짐차에 실려
  신평화 새벽장으로 나간다.
  눈이 아린 불빛 속에서
  조각조각 우리를 박으면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누구의 옷이 되는가.

  밖에는 얼음이 맺히고 숨겨질 얘기들이 숨겨 들고
  우리는 조용히 걸어온 길 앞에 선다. 발바닥를 핥으며 발바닥 깊숙히
얼굴을 묻는다. 모든 것이 육체의 일부로 남는다. 허리, 머리, 눈 그 위에
손 댈 수 없이 구겨져 있는 정신.

 

 

 

   - 이근배 -
 

풀이 되었으면 싶었다
 한 해에 한번쯤이라도 가슴에
 꽃을 달고 싶었다.
 봄, 여름,가을,겨울을
 목청껏 울고 싶었다.
 눈부신 빛깔로 터져 오르지는 못하면서
 바람과 모래의 긴 목마름을 살고
 저마다 성대(聲帶)는 없으면서
 온 몸을 가시 찔리운 채 밤을 지새웠다.
 무엇하러 금세기에 태어나서
 빈 잔만 들고 있는가
 노래를 잃은 시대의 노래를 위하여
 모여서 서성대는가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것일 뿐
 가슴에 남은 슬픔의 뿌리 보이지 않는다.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 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 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잠실 밤개구리

          - 신세훈 -

 

     --잠실 연작시

  잠실 밤개구리가 운다.
  밤새도록 밤새도록 운다.
  울음숲을 이루며 잠실잠실
  실실실 잠실...
  아파트가 더 들어서면
  고향을 잃어버린다고 운다.
  비 맞은 인디언 물귀신처럼 운다.
  아스팔트가 덮히면
  변두리 산으로 쫓겨나
  숨 다할 거라고 무한정 밤을 운다.

  잠실 밤하늘을 원망이라도 하듯
  순하디순한 흙값이 금값임을
  허공천에 대고 원망이라도 하듯
  잠실 개구리가 새워새워 운다.
  금구렁이들이 자꾸자꾸 몰려들면
  이제 울 수도 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울음시위와 울음화살로는
  마른 번갯불로 빛나는 그림자 앞에서는
  울어봐도 다 소용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여름밤 인디언 물귀신처럼 그리 슬피 운다.

 


 

잠의 나이테
            - 권혁재 -


느티나무 껍질이 단단한 것은
외부로부터 받는 자극 때문이 아니라
중심에서 밀어내는 외로움의 두께 때문이다
 
강경 옥녀봉을 오르다
금강 물줄기에 눈이 멀어
팔꿈치가 느티나무와 스친다
살갗이 벗겨진 팔꿈치에서
느티나무의 유전자기 침투했는지
이내 붉은 싹이 돋는다
살갗을 헤집고 뿌리를 뻗는
인간의 느티나무
몸 속에 펴진 갑각류의 유전자들이
중력을 거부하며 물관을 타고 오른다
 
사람들과 스쳐가는 사이사이
이파리가 된 내 손들은 
죄다 까뒤집어져 파도처럼 출렁인다
살갗이 굳어가는 사이사이
내 팔은 줄기처럼 쑥쑥 자라나
금강에 닿아 물을 적실 수도 있다
 
내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외부로부터 받는 자극 때문이 아니라
중심에서 밀어내는 외로움 때문에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느티나무에 접을 붙이다

 

 

잠지

    - 오탁번 -

 

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운 밥 얻어먹겠네

 

 

 

잠자는 돌

           - 박정만 -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기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이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며
  마을마다 떠디니는 슬픈 귀동냥.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데
  반벙어리 가슴으로 바다를 보면
  밤눈도 눈에 들어 꽃처럼 지고
  하늘 위의 하늘의 초록별도 이슥하여라.

  내 손을 잡아다오,
  눈부신 그대 살결도 정다운 목소리도
  해와 함께 저물어서
  머나먼 놀빛 숯이 되는 곳.

  애오라지 내가 죽고
  그대 옥비녀 끝머리에 잠이 물들어
  밤이면 눈시울에 꿈이 선해도
  빛나는 대리석 기둥 위에
  한 눈물로 그대의 인을 파더라도,

  무덤에서 하늘까지 등불을 다는
  눈 감고 천년을 깨어 있는 봉황의 나라.
  말이 죽고 한 침묵이 살아
  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
  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
  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선 모양으로.

 

 

잠자는 바다

           - 남진우 -


  나무 그늘 아래
  잠든 여인이 누워 있다 그녀 숨소리 따라
  조금씩 잎사귀들이 흔들린다 살며시 내려앉는
  안개와 새 울음소리

  머얼리 바닷물은 부풀어 올라
  둥근 달을 낳고 달은 소나무 향기를
  대기 가득히 풀어 놓는다 푸르른
  바람 한줄기 그녀 입술을 스칠 때

  누군가 촛불을 켜들고
  우물 밑으로 내려간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우물 밑 잎사귀들은 쌓이고
  달빛은 오솔길을 거슬러 오르는 피를 따라
  어두운 숲으로 흘러간다

  흘러간다 서서히 밤하늘을 적시며

  ... 이 밤 그들은 뗏목을 타고 사나운 밤바다를 건너가리라
  ... 조금씩 가라앉은 수평선 너머 폭퐁우는 그들을 기다리고
  ... 이 밤 그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섬을 찾아 헤매리라

  점점 자욱해지는 안개 저편
  그녀는 미소짓는다 그물을 들고 바다를 내려가는
  사나이들의 낮은 휘파람이
  들리다 그치는데

  아득히 열리는 바다 달빛에 씻긴 물결이
  그녀 잠 속으로 밀려들어 물보라를 일으킨다
  자욱히 어둠의 가루를 흩날리며 파도가
  해변에 토해놓는 부서진 나무 조각들

  말미잘 불가사리 물거품의 상형문자들

  다시 바람이 일어 잎사귀 흔들고
  그녀 숨소리가 차츰 멀어진다. 서서히 구름의
  천막이 걷혀진 밝아오는 하늘 저 멀리엔 차갑게
  빛나는 등대 하나뿐

 

 

 

잠적

     - 김대구 -


  이 세상에 (말씀)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허약한 몸을 가누며 저 황량한 바다에 주저앉아서
  철썩 철썩 가슴을 치고 있나요

  산촌 어느 가난한 농부의 뜨락에서
  졸고 있는 가을 햇살인가요

  아니면 도시의 음침한 지하밀실에 갇혀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마시고 있나요

  우울증에 걸린 도시
  움츠린 자세로 빌딩의 그늘을 할일 없이
  배회하는 겨울 바람인가요

  폭우가 쏟아진 오후
  오색영롱한 무지개를 비추시던 하늘
  우렁찬 뇌성과 폭풍우로 말할 수 없는
  울분을 토하시며 이 여름을 수장하시고
  우리들의 (말씀)은 비참한 이 도시 속에서 잠적

 

 

 

잠행 1

     - 이륭 -


  내 가슴 속 칼처럼 와서 꽂히는 저것은 무엇인가
  유리파편을 씹으며 확인하는 나의 숨소리, 아직은
  칼로 베어낼 수 없는 이 살점 한 조각이라지만
  그 살점 한 조각으로도 배부를 수 없는 질긴 목숨이라지만
  그게 어디 그렇던가
  혹 그것뿐이라던가
  그렇더라도

  내 언제 저 무심한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잠깬 적이 있었던가
  호루라기 소리에 벌떡 일어나 창살을 부여 잡은 채
  숨죽였던 적이 있었던가
  그 창살 사이로 빠져 하늘로 하늘로만 달아나는
  이토록 마른 피를 내 언제 꿈이라도 꾸었던가
  이젠
  더 마를 피도, 오를 하늘마저 없는 밤
  어둠이 내리고, 그러면 또 어김없이 내 가슴 속
  칼처럼 와서 꽂히는 저, 저것은 무엇인가, 분명
  새인가, 새처럼 날아다니는
  푸른 옷인가
  새라면, 또 새처럼 날아다니는 푸른 옷이라면
  부옇게 밝아오는 새벽 하늘 어느 한 모서리쯤에서나
  잠들 수 있을지, 그렇게
  한순간이나마
  소리 없는 곳
  고요히
  잠들 수 있을지

 

 

 

잡초 뽑기

         - 김종해 -

 

호미로 흙을 파면서

잡초를 뽑는다

잡초들은 내 손으로 어김없이 뽑혀지고

뽑혀진 잡초들은 장외(場外)로 사라진다

옥석(玉石)을 구분하는 나의 손도 떨린다

하늘은 이 잡초를 길러내셨으나

오늘은 내가 뽑아내고 있다

밭을 절반쯤 매면서

문득 나는 깨달았다

이 밭에서 잡초로 뽑혀나갈 명단 속에

아, 어느새 내 이름도 들어가 있구나!

 

 

 

장미

    - 송욱 -

 

  장미밭이다
  붉은 꽃잎 바로 옆에
  푸른 잎이 우거져
  가시도 햇살 받고
  서슬이 푸르렀다

  벌거숭이 그대로
  춤을 추리라
  눈물에 씻기운
  발을 뻗고서
  붉은 해가 지도록
  춤을 추리라

  장미밭이다
  피 방울이 지면
  꽃잎이 먹고
  푸른잎을 두르고
  기진하며는
  가시마다 살이 묻은
  꽃이 피리라

 

 

 

장미

    - 소재호 -


  모두 말해버릴거나
  아니 그냥 표정만 짓자.
  더 큰 덩어리를 내밀기 위해
  더 높은 등불을 켜들기 위해
  몸채만큼 근심 그늘 거느리고
  아직은 우리끼리만 몸짓하자.
  가시이면서 장미이게
  장미이면서 가시이게
  왜낫으로도 목을 걸 수 없는
  더 큰 키발로 하자,
  뿌리까지 흔들리는 소리를.

  따라 나설거나.
  아니 그냥 머물러 있자.
  몰려간 바람들
  부끄럽게 되돌아 오는 게지.

  어둡고 험한 계절, 트이는 구름
  울을 넘고 훈훈한 손 뻗어
  이제는 이웃을 부르자,
  아직은 우리끼리의 눈짓으로.

  나비들의 뜨거운 시늉
  훨훨 번지는 언어.
  꽃이 지는 날을 위해
  씨방 채곡채곡 사려 넣고
  땅 바닥에 글이나 쓰자.
  글줄을 뚫고 나가
  새로운 장미를 세울 때까지
  우리들 바람에게 글이나 쓰자.

 

 

 

장식론

     - 홍윤숙 -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 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 보면
  쇼우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 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장의 낙엽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장수산 1

        - 정지용 -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

 

 

 

장자시

     - 박제천 -

 

  2
  지나쳐가고지나쳐가는형상의아름다운음정들
  고물께서소리죽이고흐느끼는바닷물문득
  머리위에높이떠피어나는물보라꽃에저희넋을실으나
  뉘라볼수있으랴
  허공에서꽃잎날리고꽃잎날려꽃잎날리거니
  바다아래꽃게의거품이그꽃잎들을삼킬뿐이네

  10
  정액처럼끈끈한손길의말을버리면
  꿈의껍질이벗겨지고하이얀뇌골만햇빛에쪼그라드네
  상상의날랜눈이슬그머니소매에가둔
  천체의여러벌들그것들이이마를맞대어날으던죽음의
  반짝인빛이었네

  24
  신경질의여윈그림자로고사리과식물의줄기끝에
  신경질의줄은풀려엉기고삶을재는그림자마저도르르말리네
  여러개의손가락이엮어세운십자가에지등의흐린불빛이걸려
  내삶의편린을가벼이흔들어주네
  천상의궤도마다장미밭을일?네
  내생애는바람의도포를입었네
  가다오다장미꽃가지를치는
  오오인연의칼끝에길이놓였네
  바람속으로바람속으로헤매이는내피의물살이여
  흩날리는장미꽃이여

 

 

 

장편(掌篇) 2

       - 김종삼 -

 

조선 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 변 10전 균일상(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김용호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아득한 먼 그 곳

그리움도 흘러가라 파아란 싹이 트고

꽃들은 곱게 피어 날 오라 부르네

행복이 깃든 그 곳에 그리움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가는 곳 이 가슴 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구름 흘러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 가라

그대를 만날 때 까지 내 사랑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 가는 곳 가 없는 하늘 위에

별 빛도 흘러가라 황홀한 날이 와서

찬란한 보금자리 날 오라 부르네

쌓인 정 이룰 그곳에 별 빛도 흘러가라

 

저 구름 흘러 가는 곳 이 가슴 깊이 불타는

영원한 나의 사랑 전할 곳 길은 멀어도

즐거움이 넘치는 나라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저 구름 흘러 가는 곳 내 마음도 따라 가라

그대를 만날 때 까지 내 사랑도 흘러가라

 

 

 

저녁 눈

           - 박용래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저녁 노우트.5  -- 대화법

          - 강안희 -


  때 가 되 면시집은가야지어머니는외 제다리미와외 제후라이팬외
제믹서기손가락을꼽으며슬금슬금나를살피신다어머니어디호두딸집없을까요?
고무장갑없이그많은호두껍질이나까 고 싶 어 요쯧쯧이추위에무슨놈의호두가
맺힐까무 엇 보 다다리미는외제가좋아글쎄 요글쎄요라니써 보 면 다차암어
머니는쓸데없는소리마라뒷집선이서울시댁에서외제안해왔다고애 낳 은지금도
오 금을건다더라삼성금성대우것들도쓸만 해 요그런대로수명도길 구요그 런
대로어머니의숨소리가길 길어졌다.

     7.어느 듯

  주인여자가 머리 볶으러 간 사이 신나게 빨래해 널고
  방으로 온 나는 고향집 생각을 더듬는다
  베란다에선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 옷가지들이
  스스로 수분을 뱉으리라 어느듯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며 증발할 수 있으까
  꿈 꾸겠지만
  무거운 나의 마음을 뱉을 수 없어 어느듯
  어둠은 문 틈에 조롱박같이 매달린 채 어느듯
  방울방울 떨어질 듯 말 듯.

     8.벌판

  어느 날 갑자기 나는 허허
  벌판에 서 있었다 가뭇가뭇한 벌판의 끝
  을 향해 나는 달리고 있었다 가도가도 드러나지 않는
  왠일일까 벌판의 끝에 소스라치게
  뻗은 벽
  그 벽의 밑바닥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었다
  뛰어내리면서 보니 하늘이 낮게낮게 벌판에 엎드린다
  엎드려 별을 뿌린다 도리깨에 흩어지는
  참깨같은 저 별이 어느 날
  벌판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저녁놀

     - 유치환 -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저녁의 염전
               - 김경주 -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저녁에

        - 김광섭 -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저물녘의 노래 
           - 강은교 -
 

저물녘에 우리는 가장 다정해진다.
저물녘에 나뭇잎들은 가장 따뜻해지고
저물녘에 물위의 집들은 가장 따뜻한 불을 켜기 시작한다.
저물녘을 걷고 있는 이들이여
저물녘에는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기다리리라.
저물녘에 그대는 가장 따듯한 편지 한 장을 들고
저물녘에 그대는 그 편지를 물의 우체국에서 부치리라.
저물녘에는 그림자도 접고
가장 따뜻한 물의 이불을 펴리라.
모든 밤을 끌고
어머니 곁에서.


 

 

저승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 천상병 -


저승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아버지 어머지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누나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 못하니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

         - 원재훈 -

이젠 불빛마저 희미한 도시의 자정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듯 비틀거리는 몇 명의 행인들만이 
처량한 어두운 삼류극장의 골목길에 서성거리면 
더러운 벽면에 붙은 외국영화의 포스터 몇 장 같은 청춘들 사이로 
왜 저리 달은 아름답게 떠오르는 것인가 
항상 누군가의 주검 같은 그림자를 밟으며 
걷다가 보면 지하철 보도에 널려 있는 사람들의 신문지 만한 
전생애는 누구나 구겨 버릴 수 있는 휴지 같은 것 
단지 시간을 죽이기 위해 극장에 들어서는 몇 명의 
철없는 관객을 위해 나의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는 
지상의 어느 구석진 극장 안에서 그 낡은 필름을 돌리고 있을까 

내 몸 속의 나의 적은 항상 충혈된 눈동자로 내게 총을 겨누고 
내 몸 속의 나의 사랑이야기는 그 초라한 온몸을 무방비로 드러내는데 
탕탕탕 우악 으악 해대는 비명소리는 극장 안에서 울려 퍼지는 무서운 진실 
하나 둘 사람들이 딴 생각을 하면서 어둠 속에서 자신의 동공을 넓히면 
거기로 기어들어오는 당신들의 적 당신들의 사랑이야기는 
나의 적 나의 사랑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나 
항상 되풀이 되는 일상의 장면들, 
오래 전에 촬영된 그 장면들처럼 눈이 내린들 비가 내린들 
나의 적 그리고 나의 사랑이야기는 그저 지상의 한 귀퉁이에서 
그 낡은 필름을 돌릴 뿐 
영화가 끝나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등 뒤로 
나를 부르는 나의 적 
나의 사랑이야기는 그러나 아무도 보지 못한 미개봉 작품

 

 

 

적막(寂寞)한 식욕(食慾)

          - 박목월(朴木月) -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素朴)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者)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渴求)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전라도.2

              - 이성부 -

 

  아침 노을의 아들이여 전라도여
  그대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잠의, 끝남이 나를 부르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짐승도 예술도
  아직은 만나지 않은 아침이여 전라도여
  그대 심장의 더운 불, 손에 든 도끼의 고요
  하늘 보면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꿈속에서만 몇 번이고 시작하던
  내 어린 날, 죽고 또 태어남이
  그런데 지금은 꿈이 아니어라.

  사랑이어라.
  광주 가까운 데서는
  푸른 삽으로 저녁 안개와 그림자를 퍼내고
  시간마저 무더기로 퍼내 버리면
  거기 남는 끓는 피, 한 줌의 가난

  아아 사생아여 아침이여
  창검이 보이지 않는 날은
  도무지 나는 마음이 안놓인다.
  드러누운 산하에는
  마음이 안놓인다.

 

 

 

전라도 가시내
                  - 이용악 -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全羅道 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
                      - 한하운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고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全羅道) 길.

 

 

전라도의 무등과 함께

               - 윤재걸 -

 

  앙금이 밑바닥으로 갈앉듯
  불씨는 늘 아랫녘으로 도사린다.
  눈 부릅뜨고 곧추 서 있는 무등처럼
  예사로 일어서는 물건 하나 있어
  언제나 쇠 잠긴 조선의 사타구니--.
  이 땅의 인총처럼 사철로 무성한
  우리네 음모의 강기슭엔
  땀내 나는 빤스와 더불어
  어두운 만큼 힘을 지켜가는,
  아끼는 만큼 자랑스러운
  두알의 불알과 함께
  꼿꼿한 이 땅의 남근이 숨어 있지 않느냐.

  잠겨서 혼자 일어서고
  일어서서 홀로 평정하는
  몽정의 밤마다
  함께 일어서는 물건 하나 있어
  전라도의 부릅뜬 눈빛을 본다.
  빤스에 묻어나는 내 나라의 하혈을 보면서
  우리들은 아작껏 중요한 것을 써먹지 못하고 있다.
  앙금이 밑바닥으로 갈앉듯
  불씨는 늘 아랫녘으로 도사리고
  이 땅의 은총만큼이나 우리네의 음모는 사철로 무성타--.

 

 

 

전망대(展望臺)

          - 李昌大(이창대) -

 

오렴

팽팽한 활줄 같은 긴장을 풀

시간아 오렴。

견디임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려 주려 오렴。

잃었던 이상 같은 태양을 맞아

새로운 살림에 관하여 의논하고

새로운 꿈을 이룩할 그때

영원과 현재가 어울려진 시간아

안개 개이듯 분명히 오렴。

불타오른 나의 날 위에 쏟아져 오렴。

너 속에서 내 사랑스런 야심을 말할께

어떻게 내가 꽃처럼 피고

어떻게 내가 생각하며

어떻게 내가 영혼을 노래하는가를

말하여 줄께。

피같이 짙은 정신의 노래 들으려

오렴。

무지개를 넘어 탄탄한 세계 위에 부드럽게

너를 위해 번잡한 뉴스를 즈려밟고

드높은 벌판 한가운데

서 있지 않느냐。

오렴。

팽팽한 활줄 같은 긴장을 풀

시간아 오렴。

 

 

 

전설

   - 정동주 -


  바람 난 처녀 총각
  단오 무렵 보리밭에서 껴안고 뒹군다
  지나던 밭 임자 먼산 보며 하는 말
  풍년이로다 어허, 만사 풍년이로다

 

 

 

전아사(餞迓詞)

        - 신석정 -

 

포옹(抱擁)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歷史)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階段)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座標)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音樂) 같은 가녀린 소리

철 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祖國)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叱責)함은

아아, 어인 지혜(智慧)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黃河)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孕胎)한 함성(喊聲)으로

다시 억만(億萬)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리라.

새벽 종(鐘)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전화를 끊은 후

       - 안혜경 -


  전화를 끊은 후
  유리창을 보니
  바다의 흔들거리는 소리가
  바람처럼 몰려 와
  기다리던 날의 끝에 가서
  휘몰아치며 거칠게
  층계를 기어오른다.

  두려움과 절연하기 위해
  화분을 옮기면
  먼지 속에 쌓인
  말라죽은 바퀴벌레.
  위에 떠도는 한가로움.

  책장 뒤에서 주운
  기억조차 없는 단추.
  에서 주먹질하는
  거세된 평화.
  유형지에서 시간은 더욱
  칼날을 세우고
  상처의 무게를 가늠한다.

  누더기를 걸친 나무에 붙어 있는
  살아온 날의 그림자가 일어나
  거리의 한가운데서
  이름없는 비석이 된다.

  마른 벌레 껍질에 붙어서
  숨이 차도록
  방안 가득 출렁거리며
  넘쳐오는 바다의 소리.
  바다에게는 말하리라.
  일찌기 침묵했던 것을.

  유리창을 열고
  전화기를 밖으로
  던져버린다.

 

 


절대(絶對)고독

          - 김현승 -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한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만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와 함께.

 

 

절벽
      - 이 상 -


꽃이 보이지않는다
꽃이 향기롭다.

향기가 만개한다
나는 거기묘혈을 판다. 
묘혈도 보이지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속에 나는 들어앉는다

나는 눕는다
또 꽃이 향기롭다
꽃은 보이지않는다

향기가 만개한다
나는 잊어버리고 재차거기 묘혈을 판다.

묘혈은 보이지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로
나는 꽃을깜빡 잊어버리고 들어간다
나는 정말 눕는다
아아. 꽃이 또 향기롭다
보이지 않는꽃이―보이지도 않는꽃이.

 

 

 

절 정
         - 이육사 -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로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점묘

     - 박용래 -

 

싸리울 밖 지는 해가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보리 바심 끝마당
허드레꾼이 모여
허드렛불을 지르고 있었다.
푸슷푸슷 튀는 연기 속에
지는 해가 이중으로 풀리고 있었다.
허드레,
허드레로 우는 뻐꾸기 소리
징 소리
도리깨 꼭지에 지는 해가 또 하나 올올이 풀리고 있었다.

 


점집 앞 

      - 장석주 -

 

아마 官妓로 산다는 것,
그 遊樂의 나날이
늘 즐겁지만은 않았을 거야.
왜 안 그랬겠어. 답답한 날도 있겠지.
한 날은 점집을 찾았는데,
점집 대문 앞 살구나무가
분홍꽃구름을 이고 서 있네.

점집으로 발 들여놓지 못한 채
분홍꽃구름 아래 얼음기둥으로 서 있는데,
취한 듯
취한 듯
취한 듯
내 속의 관기가 미쳐 홀연히 미쳐서는
금생에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몸짓으로
춤을 추는 것이네.

 

 

접동새

      - 김소월 -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津頭江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우리 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읍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 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육친애(肉親愛)의 정한(情恨)

아우래비 아홉+오래비 의 활음조 현상 아홉명의 여자의 남동생

오랍동생 여자가 자가의 사내 동생을 일컫는 말.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옆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 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 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들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땜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겠습니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정님이
       -  이시영 -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어 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 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싯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정념의 기(旗)

      - 김남조 -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정든 임

     - 이승철 -


  저기 붉은 흙 황토산 마루에
  정든 임, 살고 있어
  우리가 꿈물결 굽이 속일망정 잊으랴.
  이젠 차마 압삔으로도 못 누를 애절함
  마디마디 엮어,
  그토록 긴긴 밤 상처뿐인 나날에
  기다렸던 사람아.
  오직 단 한분, 황토산 임
  모진 목숨 부여잡고 에헤라 돌자갈 길 지나오며
  지금껏 그 누굴 위해 살았나, 눈물겨운 사람들.
  찬 서리 강산마다 몰려와 찢기어진 분단 깊어만 가고
  침묵뿐인 산천에 받은기침 울려 퍼지는 지금
  이내 청춘에 쌓인 그리움 확확 불타오르는데,
  꽃 지고 새떼마저 떠난 들녘에 당신 오려는가.
  그때까지 내 못 기다려,
  오직 단 한분, 황토산 임 찾아
  설움 많은 시대에 살다가
  넘어져도 일어서서 눈 흡뜨고 다리 절며
  에헤 간다 에헤 간다 에헤야 간다.
  가을 억새 울음에 사무친 숨결 실어
  막막한 세상 모진 파도에 타고 가네
  오늘 이 출발에는
  저 거리 저 등 굽은 사람들 함께 하느니
  얼마나 많은 기다림에, 설레임 속에
  아픈 넋을 깨물며 참고 진저리치며
  서슴없이 젊은 목숨 부대껴 쌓는데,
  우리야 청청하게 살아오는 정든 임 못 보겠느냐
  살아서 한세월 못 맞이하겠느냐, 이 사람아.

 

 

 

  정든 유곽에서

           - 이성복 -

 

  1
  누이가 듣는 음악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음악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 돋아나는데, 그 남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의 잠, 한반도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
  당한 여자의 반복되는 임종, 병을 돌보던
  청춘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의 신체를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일본인가, 일식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니신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승천하면
  나는 죽음으로 월경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신음,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 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전쟁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사명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조국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후세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구미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한족의 별

 

 

 

정로환

     - 윤성학 -

가실 때, 정로환 한병을 가방에 넣어드렸다 

멀리서 손주딸 살림을 들여다보러 온 처할머니가 
선 채로 똥을 지렸다 
다리를 타고 내린 덩어리 하나가 
바닥에 멈추어 섰다 
아내는 얼른 달려가 휴지로 그걸 훔쳐내었다 
바지를 벗기고 노구를 씻겼다 
딸아야, 
아래를 잘 조이고 살아야 여자다 
고개 돌려 모른 척하던 손주사위가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인다 
구멍이 헐거워 
밑살이 야물지 않아 
내 속이 늘 가지런하지 못했다 
때론 분노를 때론 눈물을 
몸에서 놓치곤 했다 
늙는다는 건 
구멍이 느슨해진다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를 더 늙어야 
나의 구멍들을 다스릴 수 있을 건가 

가실 때, 
정로환 다섯알을 내가 먼저 꺼내 먹고 
가방에 넣어드렸다

 

 

정물

     - 구경서 -

 

  은쟁반 속에
  그 과수원은
  싱그러운 가을 바람
  사과 배 청포도...

  그것들은
  포개 쌓인 피라미트 형의 지세로
  피곤한 한숨을 잔다
  위대한 음악의 반주로
  입체의 핵과 핵은
  심연의 사상.

  하나의 계시
  원의 울타리 속
  원숙한
  발효
  그리고
  생명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사자의 치아 앞에서
  돌과 같이 굳어져 있는
  과일들의 인력.

  그 하이얀 에프론
  위의 과수원
  아침
  햇살에
  난무하는
  미각의 나이프

  하나.

 

 

정야

    - 장만영 -

 

이슬에 젖어
 이슬 내린 풀잎을 밟고 가노라면
 우거진 수풀 속에
 무슨 슬픈 이야기라도 있을 듯한 조그만 집이 한 채.
등불 켜지 않아 캄캄한 속에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유리창만이 번쩍거리는 저 낡은 집엔
 어느 외로운 이가
 세상을 버리고, 세상한테 잊히어
 홀로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울타리 가에 숨어 뜰안을 들여다본다.
달빛 속에 꽃향기가 그윽히 풍긴다.
꽃향기 속에 여인인 양 싶은 이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바람도 없이
 꽃잎만이 낙옆처럼 우수수 지던 날 밤이었다

 

 

정주성(定州城)

        - 백 석(白石) -

 
산(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정적.2

        - 백미혜 -


  한 정류장 더 지나 황망히 몸을 내리면
  발자욱을 따라오는 흐린 신발소리.
  문앞에 멈추어서 식은 열쇠를 돌리면
  비어있는 어둠 안으로 우산처럼 퍼지는 빗소리.
  마루 위를 뒹구는 젖은 첼로소리.
  불을 켠다.
  한꺼번에 쏟아져 무너지는 물,
  망식의 빈 속을 자르며
  백열구가 아프게 눈을 감는다.

 

 

 

정천한해(情天恨海)

         - 한용운 -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소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 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다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에 떨어지고 한해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놓은 줄만 았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너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즐거운 사자(악의 꽃)
           - 보들레르 -
 

달팽이 우글대는 기름진 땅에
내 스스로 깊은 구멍을 파고
거기에 한가로이 내 늙은 뼈 누이어
물 속에 상어처럼 망각 속에 잠들고 싶다.

나는 유언도 싫고 무덤도 싫다.
사람들의 눈물을 청하기보다
차라리 살아서 까마귀 떼 불러
내 추한 해골 구석구석 되흘리고 싶다.

오, 구더기여! 귀도 눈도 없는 검은 동료들이여!
보자, 자유롭고 즐거운 죽은 자 너히들에게 왔도다.
호색적인 철학자, 부패의 아들들이여,
이제 후회없이 내 육신 파고 들어가라.
그리하여 나에게 말하라, 아직도 무슨 고통 남아 있는지,
주검들 사이에 끼어 있는 영혼 없는 이 늙은 죽은 몸에!

 

 

즐거운 일기

      - 최승자 -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돋힌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서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 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 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
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놀아났읍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姿勢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재봉

     - 김종철 -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 가지의 난동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
  눈 나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의 가봉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천사에게 주문받은 아이들의 전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이는 신의 겨울,
  그 길로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화잉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알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뢰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눈이 와서 나무들마저 의식의 옷을 입고
  축복받는 날.
  아이들이 지껄이는 미래의 낱말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섬조의 방에 누워
  내 동상의 귀는 영원한 꿈의 재봉,
  이 겨울날 조요로운 아내의 재봉일을 엿듣고 있다.

 


 

제막식

      - 박현서 -


  31년 전
  개미고개 전투에서 전사한
  죤.알.메킨니스 상사
  그의 이빨엔 군번이 물려 있었다.

  오늘 M화랑에서
  31년 만에 완성된 조각을 감상했다.
  '작품 34130719'

  충남 연기군 전의면 개미고개
  조각품 제막식에선
  쉰 두 발의 축포가 울리고
  피빛 융단 위엔
  허연 이빨들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스크린 속에
  인체박제사 완장을 찬 사나이들이
  화구를 챙기고 있었다.

 

 

 

제비붓꽃

         - 전연옥 -


  친구를 따라 강남에 가서 살꺼나
  애인을 따라 섬에 가서 살꺼나
  이대로 서로의 경계선이 되어
  석삼년 애간장을 태워도 오지 않을
  엽신을 기다리며 살아갈꺼나

  기다림 하나만으로 일생의 안부를 묻고
  내것이 아닌 침잠의 슬픈 얼레도 풀다가
  맨발 아래 차가운 물소리와 함께
  한평생 고질병에 이를 갈며 살아갈꺼나

  아아 내일이 되어도 아지 못할
  이 징그러운 소망의 잔뿌리들이여
  이제 나는 홀로 자유로와야 하겠네

 

 

 

 

제1번 비가
        - 김춘수 -

 
여보, 하는 소리에는
서열이 없다
서열보다 더 아련하고 더 그윽한
구배句配가 있다. 조심조심
나는 발을 디딘다. 아니
발을 놓는다
왠일일까 하늘이 모자를 벗고
물끄럼 말끄럼 나를 본다.
눈이 부신 듯
나를 본다. 새삼
엊그제의 일인 듯이 그렇게
나를 본다
오지랖에 귀를 묻고
누가 들을라,
사람들이 다 가고 그 소리 울려오는
여보, 하는 그 소리
그 소리 들으면 어디서
낯선 천사 한분이 나에게로 오는 듯한,

 

 

 

제주바다 1

      - 문충성 -

 

  누이야, 원래 싸움터였다.
  바다가 어둠을 여는 줄로 너는 알았지?
  바다가 빛을 켜는 줄로 알고 있었지?
  아니다, 처음 어둠이 바다를 열었다. 빛이
  바다를 열었지, 싸움이었다.
  어둠이 자그만 빛들을 몰아내면 저 하늘 끝에서 힘찬 빛들이 휘몰아 와
어둠을 몰아내는
  괴로와 울었다. 바다는
  괴로움을 삭이면서 끝남이 없는 싸움을 울부짖어 왔다.

  누이야, 어머니가 한 방울 눈물 속에 바다를 키우는 뜻을 아느냐. 바늘귀에
실을 꿰시는
  한반도의 슬픔을. 바늘 구멍으로
  내다보면 땅 냄새로 열리는 세상.
  어머니 눈동자를 찬찬히 올려다보라.
  그곳에도 바다가 있어 바다를 키우는 뜻이 있어
  어둠과 빛이 있어 바다 속
  그 뜻의 언저리에 다가갔을 때 밀려 갔다
  밀려오는 일상의 모습이며 어머니가 짜고 있는 하늘을.

  제주 사람이 아니고는 진짜 제주 바다를 알 수 없다.
  누이야, 바람 부는 날 바다로 나가서 5월 보리 이랑
  일렁이는 바다를 보라. 텅벙텅벙
  너와 나의 알몸뚱이 유년이 헤엄치는
  바다를 보라, 겨울 날
  초가 지붕을 넘어 하늬바람 속 까옥까옥
  까마귀 등을 타고 제주의
  겨울을 빚는 파도 소리를 보라.
  파도 소리가 열어 놓은 하늘 밖의 하늘을 보라, 누이야.

 

 

 

짝사랑

      - 성태진 -

 
멀리서 보아도 
몸 둘 바를 모르고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

 

가까이 다가와도 
왠지 떨리는 마음 
말더듬이가 되어 버린다

 

바로 눈앞에 있어도 
말 못하고 꿍꿍거리니 
언제나 말문이 열릴까

 

 

짝지어주기

          - 조태일 -

 

  아무래도 우리는
  짝짓는 데 나서야겠읍니다.

  마음 하나로
  세상을 굴복시키기 어려울지라도
  그 마음 하나
  짝지어 주고 싶은 그 마음 하나
  갖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이런 짝지어주기는 어떨까요?
  모래와 물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바람과 나뭇잎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데모와 진압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펜과 잉크를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여당과 야당이 짝지어 있는 것 말고
  남자와 여자가 짝지어 있는 것 말고
  옷과 살결이 짝지어 있는 것 말고
  입술과 거짓말을 떼어내어
  귀와 침묵을 떼어내어
  국토와 휴전선을 떼어내어

  이남과 이북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마음과 마음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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