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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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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시인 지구촌

애송시 3
2015년 06월 16일 21시 39분  조회:4593  추천:0  작성자: 죽림
장서언. 1913년 서울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 "동광"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모더니즘에 입각한 청신하고 감각적인 시를 써온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장서언 시집"이 있다.

     이발사의 봄

 

  봄의 요정들이
  단발하러 옵니다.

  자주공단 옷을 입은 고양이는 졸고 있는데
  유리창으로 스며드는 프리즘의 채색은
  면사인 양 덮어 줍니다.

  늙은 난로는 가맣게 묵은 담뱃불을 빨며
  힘없이 쓰러졌읍니다.

  어항 속에 금붕어는
  용궁으로 고향으로
  꿈을 따르고

  젊은 이발사는 벌판에 서서
  구름 같은 풀을 가위질할 때

  소리없는 너의 노래 끊이지 마라.
  벽화 속에 졸고 있는 종달이여.


     밤

  바람 불어 거스러진
  샛대 지붕은
  고요한 달밤에
  박 하나 낳았다
.

 

  장순화. 1928년 전북 정읍 출생. 원광대학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자연과 인생, 개인과 집단,
가정과 사회, 민족과 국가 등 다양한 진폭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시조집으로 "백색부"가 있다.

     유방의 장

 

  난 몰라,
  모시 앞섶 풀이 세어 그렇지.

  백련 꽃봉오리
  산딸기도 하나 둘씩


  상그레 웃음 벙그는
  소리 없는 개가.

  불길을 딛고 서서
  옥으로 견딘 순결

  모진 가뭄에도
  촉촉이 이슬 맺어

  요요히 시내 흐르는
  내일에의 동산아!

 

  장윤우. 1937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대와 동 교육대학원 졸업.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신춘시' 동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4인 부락" "겨울 동양화" 등이 있다.

     나부

  벗긴 채 양접시 위에
  뉘어 있는 물고기의
  끄 싱싱한 몸집
  나이프로
  찍어
  식욕을 돋구고 싶은
  화실의 오전

  난로 위에선
  뜨거운 오차가
  욕망을 뿜어 올리고

  화가는
  퍽 탐욕스런 눈으로
  벌겋게 이곳 저곳을 핥는다.

  뒤채는 누드의
  밉게 볼록한 아랫께
  검스레한
  신의 애교를 시새워
  밖엔
  몸부림치는 눈발

  흰 겨울에
  하얀 접시 위에서
  물고기는 그 흰 몸체를
  뜨겁게 숨쉬고
  있다.

 

  장호. 1929년 부산 출생. 본명은 김장호. 동국대 문과 졸업. 1951년
(하수도의 생리)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이후, '시작'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극 (수리뫼)와 (바다가 없는 항구)가 있고 현재 동국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파충류의 사상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우리가 이러기 시작한 것은
  언제까지일지 모른다
  우리가 이러고만 있을 것은.

  찌그러진 바위를 뚫고
  불을 뿜는 숲을 지나
  추상의 동굴을 내려다보며
  죽은 놈의 팔뚝 같은 넘늘어진 거리를 건너

  우리들 옆의 누구나처럼
  우리들이 이렇게 기어엎대어
  쑥스러운 눈길로 서로의 얼굴들을 치어다보며
  해맑은 동체를 끄을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언제까지일지 모른다.

  자궁에서부터 기어나와
  무덤에까지 기어들어야 할
  우리들의 포복은,
  혹은 삶과 죽음의 가로 세로 교차하는
  점의 작렬일지 모른다.

  하이얀 양광이
  백지 같은 얼굴을 내밀고 있는
  엉뚱한 장마철에,

  옆구리로는 검은 피를 쏟으며
  굼돌아 비트는 지렁이같이

  지각이 눈시울과 함께 붙어 버린 우리들의 망막에
  풍선같은 불만을 안고 기어들 구멍이 비치지 않는 것은,
  죽음의 예감이 맴도는 10월의 해안에
  복징어 알을 주워먹고 나와 앉은 야윈 소년을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는 슬픔이란 게 없다.
  슬프다는 것은
  즐거웠던 시절을 가져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입실이다.

  우리들에게는 가을도 없고 겨울도 없다.
  소슬한 가을 바람에 떨어뜨릴 잎새 한 잎 익혀 볼 여름을 우리들은 가진
적이 없고
  꽃 한 포기 피워 볼 봄을 기다릴 구실을 우리들의 겨을은 가진 적이
없다.

  우리들에게는 우수라는 사치스런 삽화가 없다.
  우리들의 참회록엔 새까만 점액,
  골짜기마다 실종자의 발자취만 남루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꺼지지 않을 신호등,
  미묘한 바람결에도 굼돌아 비트는
  빛의 대열이다 대열!
  차알삭 땅바닥에 기어엎대어
  소리없이 포복하라, 소리없이!
  오만한 밤의 장막을 진 우리들의 생존은,
  숨찬 응시다, 응시!

  혹은 소리 없는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혹은 소리 나지 않는 입을 멍충히 열고
  우리들의 침묵은 어느 아우성보다
  더 높은 목청으로 역사의 문지기를
  두들겨 깨운다.

  풍경은, 현명한, 우리들의 예편네들을 닮아
  고요한 위험에 파랗게 질렸고

  소리라는 소리는 모두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박물관에 갇혔다.

  돌아다보면 아아 기어가는 이웃이 있고
  이웃너머 이웃이 그 이웃너머 또 다른 이웃이
  기어가는 이웃이 있다 우리들처럼.

  우리들이 죽지 않는 것은
  가혹한 하늘을 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봉건. 1928년 평남 안주 출생. "문예"에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
그는 초현실적 수법에 신선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작품들을 써왔다.
시집으로 "전쟁과 음악과 희망" "사랑을 위한 되풀이" "춘향연가"와 연작시
"고전적인 속삭임 속의 꽃"과 시론집 "시를 찾아서"가 있다. 현재
"현대시학" 주간.

     돌.2

 

  달밤엔
  소문이 돌았다.

  제주도
  통영
  마산
  부산
  또는
  원산의
  바닷가
  젖은 모래톱에
  달밤이면 달빛같은 색깔의
  고운 돌 하나가 서서

  달빛같은 소리로 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러는
  대구나
  서울의
  달빛 스며든 뒷골목에서
  그 돌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중섭의 웃기만 하는 아이들 가운데
  자지 달린 한 아이더라는 소문이었다
.


     돌.31

  대나무로 만든
  피리의 구멍은 전부 아홉 개다
  사람의 몸에도 아니 뼈에도
  아홉 개의 구멍은 날 수가 있다
  아홉 개의 구멍 난 돌도 있다
  그제는 30년 전 한 이등병이 피 흘린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 떠도는 피리소리를 들었고
  어제는 충청북도 후미진 돌밭을 적시는
  강물 속에 떠도는 피리소리를 들었다

  오늘 내가 부는 대나무 피리소리는
  그제의 피리소리와 어제의 피리소리가
  하나로 섞인 소리로 떠돈다


     물

  나는
  물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웅덩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개울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샘이나 늪 못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강이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바다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비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또 있읍니다.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삼월 어느 날 사월 어느 날 혹은 오월 어느 날
  꽃잎이나 풀잎에 맺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
  가장 여리고 약한 물 가장 맑은 물을 일음인
  이 말과 만날 때면
  내게서도 물기운이 돌다가
  여위고 마른 살갗 저리고 떨리다가
  오 내게서도 물방울이 방울이 번지어 나옵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물입니다.

 

  정공채. 1934년 경남 하동 출생.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단' '현실' '목마시대' 동인. '현대문학상' '시문학상' '한국문학가
협회상'을 수상한 그의 시풍은 현실 상황을 원시적인 힘의 응결로 다루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시집으로 "해점"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와 수필집
"지금 청춘" "비에 젖습니다"가 있다.

     시는 술이다

 

  시를 읽는 동안에
  나직이 따뤄지는
  흰빛
  술의 잔의 가득함.

  시를 읽고 있는 동안에
  오고 있는
  따사로운 불빛의 가득한 점등.

  시를 읽고 있는 동안
  가버렸던
  마차의 삐걱대는 바퀴가
  싣고 오는 가을.

  시끄럽지 않은
  밤의
  저 푸른 별의 얼굴.
  잊어버린
  도시의 밤하늘!
  이 모두가 시를 읽고 있는 동안에
  조용히 혼자의 술.
  희디흰 혼자의 술.


     망향

  강원도에서 울던
  새가
  그 삼림 속으로 날아
  가
  버린다.

  잠잠하게 가라앉은
  청공은
  저편 동해 물소리에
  귀가
  멀었다.

  대한민국의 한쪽,
  아직도
  청청하게 푸르러
  빛나는 목화의
  기를
  흔든다.

  원목을 두들기는
  통소리,
  강원도에서 날던
  새가
  울며 가버린
  아득한
  삼림에
  희디흰 빛이 자꾸 일면서
  가만한
  옛 고향의 소리도 살아나온다.


  정대구. 1936년 경기도 화성 출생. 명지대 국문과 졸업.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됨으로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구체적 체험에서
얻어지는 평이하면서도 질박한 언어로서 삶 속에 박힌 슬픔과 소망을
드러내는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겨울나무의 진실

 

  겨울나무의 진실은
  남성적이다.
  여자야 어디 견디겠느냐.
  사내 대장부인 나의 참뜻을 알려거든
  설한풍에도 빳빳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를 보아라.

  일체의 장식을 떨구어 버리고
  가슴팍을 가는 칼질 소리
  선명하게 드러내 놓고
  버티어 버티어서는 골격
  겨울나무의 진실을 보아라.
  절제를 보아라.
  그 이상 사나이가 무슨 가식이 필요한가.
  여자야, 견디겠느냐.
  최소한의 표현으로
  나는 너에게
  살 한 점 붙지 않은
  순 뼈로써 말할 뿐이다.


     박문답.5

  내가 죽은 김수영을 읽고 있을 때
  까치가 세 번 혹은 네 번 울고 날아간다.
  까치는 울면서도 날아갈 줄을 알지마는
  김수영은 죽어서도 노래하고
  노래하면서도 욕을 할 줄 아는 시인이다
.
  까치는 침묵할 줄을 알지마는
  김수영은 죽어서도 침묵하지 않고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 나에게 욕을 퍼붓는다.
  깍깍깍 이 제엔장할 밤중에도
  까치 소리만 듣고 있는 나에게
  된소리로 욕을 퍼붓는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처럼 또
  깍깍깍 울고 있는 저놈의 까치 저놈의 까치
  나로서도 된소리로 이 시를 끝내야 할까보다
  끝내야 할까보다가 다 뭐냐 말야

  이 시에서 끝에서 세 줄, 혹은 네 줄이
  내 마음에 더욱 들지 않는다.

 

  정렬. 1932년 전북 정읍 출생. 국학 대학 졸업. "문학예술"과 '사상계'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바람들의 세상" "어느 흉년에"(3인
공저)가 있다. 그의 시는 개인적인 순수한 서정의 탐구와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꽃밭

  한 보름만에 간
  술이 덜 깬 아침
  손님같이 집 한바퀴 돌고
  꽃밭에 갔더니
  꽃밭은 쥔 없어도
  한 뼘쯤 더 키가 자라고
  손주놈은 언제 깨었는지
  꽃망울 속에 숨어 웃고 있었다.
  감나무 삭정이에 한올 연실처럼 걸려 있는
  할아버지 마른 기침소리도
  아름드리 포플러 삭은 등걸 속에서
  조금은 녹슨
  아버지 날선 도끼소리도
  내 전지가위 소리도 크고 있었다.
  쉰이 넘어 더 헤퍼진
  내 헛웃음소리도
  한밤중 내 시의 속울음들도
  내 전지가위에 잘려 나간
  가지 끝에서
  아픈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정양.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와 원광대 대학원 졸업.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를 통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개인의 구체적인
체험 배후에 깔려 있는 사회 역사적 의미에 천착하여 이를 자연스럽게
형상화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까마귀떼"
"수수깡을 씹으며"가 있다.

     수수깡을 씹으며

     떡 한 쪼각 주면 안 잡어먹지
     떡 한 쪼각 더 주면 너
     안 잡어 먹지
  이 땅의 호랑이들은 처음에는
  떡 한 쪼각만 달라고 하더란다.

  고개고개 너머 어쩌면 그리
  고개도 많은지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산모퉁이
  첩첩한 고갯마다
  안 잡아 먹히어 다행스러운
  숨이 가쁘다.
  굶어죽게 생긴 자식들
  산 너머 두고
  수수깡이나 씹으며 돌아가는 길
  가진 떡을 다 주어도 소용없는 고갯길.

     치마저고리 벗어주면 더
     안 잡어 먹지
     고쟁이까지 벗어 보이면 정말로
     안 잡어 먹지
  부끄럼도 욕됨도 잊어버린
  이 고개의 알몸,
  아무리 시달려도 소용없는 알몸,
     팔뚝 하나 띠어주면
     안 잡어먹지
     정갱이 하나 띠어주면
     안 잡어먹지

  고개고개 너머 어쩌면 그리
  고개도 많은지
  소용없는 정갱이 소용없는 허벅지 소용없는
  엉덩짝 소용없는 젖퉁이...
  기다리다 지친 자식들
  산 너머 두고
  넋 달아났으므로 아픔도 없는
  아무 소용없는 피비린내만
  소름끼치며 흩어지더란다.

  고을마다 피먹은 이야기들이
  깨물어도 깨물어도 소용없는
  수수깡으로 자라서 쓰러진다.


     날참새를 씹으며

  피묻은 입술을 닦아내면서
  날참새를 씹어 먹는다.
  오늘은 누구 흉을 볼꺼나
  산산히 찢어발기며
  웃어버리자, 참새집
  지난 가을 노래도 부르고
  철 지난 또 무슨 노래로
  질긴 살맛을 뱉아버리자.
  질기디 질긴 사랑은 원수는
  날참새는 죽어도 못뜯는 박민평
  이가 약하고 위가 약하고 비위 틀려서
  더는 못견딜 피비린내를
  내가 씹으마, 참새집
  너는 마시고 노래하고
  보고 싶으면 임방울이도 목이 쉬더라.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열두번도 더 목이 쉬는 술.
  목이 쉬는 대목은 분질러 놓고
  마셔라, 매운 재처럼 귀가 삭는다.
  마셔라, 마시면 피가 썩는 술
  가을 햇살 쪼아먹고 피가 썩은 새.
  독한 햇살이 익어
  네 가슴에도 피가 썩느냐,
  술잔마다 목청마다 피가 묻는다.

 

  정완영. 1919년 경북 금릉 출생. 호는 백수. "현대문학"과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두권의 시조집이 있다.

     조국

  행여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 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 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정의홍. 1944년 경북 예천 출생.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1967)한 그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격리된
상상력이나 언어 자체만의 환상적인 미학의 시를 가능한 배제하고 참신한
이미지의 시를 즐겨 쓰는 시인이다. 현재 대전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

     자유.2

  어젯밤엔 울분으로 뜨거워진 소줏잔을 퍼마셨어요. 귀가하는 길에는
저주스런 환영들이 거만하게 서 있는 그 집 담벽에 시원하게 오줌총도 쏘아
보았지요. 나같은 천한 놈이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니, 그래도 내 나라엔
자유가 참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자유란 사람보다 위대한 것,
그것은 상식을 구속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어요.

  어젯밤엔 자유의 진짜 얼굴을 처음 보았지요. 그것은 남을 세울 수도,
눕혀버릴 수도 있는 초능력의 얼굴이었어요. 기회가 오면, 참으로 위대한
자유의 기회가 오면 수백억의 욕망을 슬쩍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를 향한 위대한 업적의 제스처로 되돌릴 수도 있고, 아뭏든 이러한
새로운 법률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자유란 만물 앞에선 참으로 위대한
존재였음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어요. 윤리, 윤리, 오늘날 윤리란 자유
앞에선 그까짓 별것 아닌 위신이며, 담배불처럼 꺼져버릴 위선자의
얼굴이었어요.

  어젯밤엔 아내 몰래 남의 자가용을 탄 녀석과 남편 몰래 밤 풍선을 띄운
아주머니를 만났지요. 이들의 자유란 (서恕)자를 목에 걸고 다닌다는 점에서
도덕군자의 외침보다 높고, 그들의 마음보다 넓다는 걸 이제야 겨우
깨달았어요. 내 나라의 자유는 나의 핏발 선 주먹보다 힘이 세고, 나의
직언보다 아량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정진규. 1939년 안성 출생. 고려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1960). '현대시' 초기 동인으로 활동한 그의 작품 세계는
자기 인식을 통한 일상적 삶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시집으로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 등이 있으며
시론집 "한국 현대시 산고"와 시극 "빛이여 빛이여"를 공연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 의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 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지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바보의 살

  지난 몇해간은
  날 잘 잠재우는 여자 하나 있어
  날 잘 잠재우는 통달한 여자 하나 있어
  바보의 살을 찌우면서
  대낮의
  깊고 깊은 잠 속으로
  익사해 가기도 했읍니다만
  또한 몇해간은
  한 그루 목련을 심고
  그것이 자라 꽃 피우고 잎 피우는
  순서를 따라가 보기도 했읍니다만
  소리 내지 않는 생장의 법, 침묵의 법,
  그것이 거기 있기는 있었읍니다만
  끝없이 푸르고 푸르게 출렁이는
  바다가 그러나 나를 다시 일깨우고
  내 피는 뜨거워, 뜨거워,
  맑고 맑은 피는 다시 고이고 고이어
  온 몸으로 일어서는 법,
  뜨거운 목청으로 노래하는 법,
  그걸 공부하려고
  낡은 바랑 하나 짊어지고
  안 간 데 없이 찾아다니는
  이제 또다시 밤이 깊어갑니다.
  천지 가득
  바다의 출렁임 소리 드높고 드높습니다.
  나의
  바보의 살이 내립니다.

 

  정한모. 1923년 충남 부여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인지
"백맥"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백맥' '시탑' '주막' 동인이며 인간 생명에
대한 긍정적 추구를 통하여 현대문명 속에서 인간의 문제를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휴머니즘을 기조로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 경향이다. 시집으로 "아가의 방"
"새벽" 등 7권. 연구저서로 "한국현대시 문학사"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한국
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재직중.

     어머니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선택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 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를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나비의 여행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의 강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망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포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 하는 화약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강물은 발길을 끊어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는 언제나 어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정현종. 1939년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현대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60년대 사화집'과 '사계' 동인인 그는 존재론적 인식이 강하여 사물을
현상학적으로 파악하는 시 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과 "정현종 문학선" 시선집 "고통의 축제"가
있다. 현재 연세대에 재직하고 있다.

     고통의 축제

  계절이 바뀌고 있읍니다. 만일 당신이 생의 기미를 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이 기미지, 그게 얼마나 큰 것입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씬을 만나면 나는 당신한테 색쓰겠읍니다. 색즉공, 공즉. 색공지간 우리 인생.
말이 색이고 말이 공이지 그것의 실물감은 얼마나 기막힌 것입니까. 당신한테
색쓰겠읍니다. 당신한테 공쓰겠읍니다. 당신에게 공쓰겠읍니다. 알겠읍니다.
편지란 우리의 감정결사입니다. 비밀통로입니다. 당신한테 공쓰겠읍니다.
안그렇습니까. 당신한테 편지를 씁니다.

  식자처럼 생긴 불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시민처럼 생긴 눈물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불덩어리 눈물에 젖고 눈물덩어리 불타
  불과 눈물은 서로 스며서 우리나라 사람 모양의 피가 되어
  캄캄한 밤 공중에 솟아오른다.
  한 시대는 가고 또 한 시대가 오도다, 라는 코러스가
  이따금 침묵을 감싸고 있다.

  나는 감금된 말로 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금된 말은 그 말이
지시하는 현상이 감금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나는 감금될 수 없는 말로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영원히. 나는 축제주의자입니다. 그중에 고통의 축제가
가장 찬란합니다. 합창소리 들립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까뮈)고. 생의 기미를
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안녕.

     사랑의 꿈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꿈속의 아모라

  내 손이 그대 가슴을
  시냇물처럼 흐른다, 아모라여,
  내 눈 속에 뜨는 무지개의 한 끝이
  그대 눈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오색궁륭이 만월처럼 부풀 때, 아모라여,
  그대는 들었는가
  바닷물이 땅 위로 넘치는 소리, 혹은
  상처입은 시간의 날개 소리를.

  흐르다가 우리가 끊어지고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간다 해도
  꿈 속의 아모라의, 나는 너를 듣는다
  노예의 귀로.

 

  정훈. 1911년 충남 대전 출생. 일본 메이지 대학 문과 중퇴. 1940년 시조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민족적 서정을 직유적인 방법으로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호서 대학을 설립하였고, 현재 한의업에 종사하고 있다.

     파적

  부-- 부--
  고동이 운다
  부두가 운다.

  항구와 항구에서
  향수를 쓸어 담아라
  떠날 때면
  그렇게 우는 것이냐.

  나도 이젠
  피리를 깨뜰고
  우람한 목청을 갖고 싶다.

  커어다란 슬픔을 노래할
  커어다란 기쁨을 노래할
  이런 날이면 섹스폰이라도
  한 아름 안고 서서
  부부부-- 불고 싶다.

 

  정희성. 1945년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가 처한 현실과 노동의 문제를 통하여
삶의 궁극적 가치를 묻는 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 시인. 시집으로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저녁무렵, 박수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떼의 깃치는 소리
  광목폭 찢어 펄럭이며
  피묻은 팔뚝 함께 일어서
  만세 부르던 이 광장
  길을 걸으며 나는 늘
  역사를 머리 속에 떠올린다
  종합청사 너머로 해가 기울면
  조선총독부 그늘에 잠긴
  옛 궁성의 우울한 담 밑에는
  워키토키로 주고 받는 몇 마디 암호와
  군가와 호루루기와 발자국소리
  나는 듣는다, 이상하게 오늘은
  술도 안 취한다던 친구의 말을
  신문사를 가리키며 껄껄대던 그 웃음을
  팔엔듯 심장엔듯 피가 솟구치고
  솟구쳐 부셔지는 분수 물소리
  저녁무렵, 박수 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떼 깃치는 소리 들으며
  나는 침침한 지하도 입구에 서서
  어디론가 끝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을 본다
  건너편 호텔 앞에는 몇 대의 자동차
  길에는 굶주린 사람 하나 쓰러져
  화단의 진달래가 더욱 붉다.

 

  조남익. 충남 부여 출생.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향토성과
토착적 세계를 바탕으로 해서 차츰 현실 의식과 역사의식이 결합되는 시 세계로
전환해 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산바람 소리" "풀피리" "나들이의 땅"
외에 다수의 저서가 있다.

     죄

  하필이면 길가에
  태어난 죄
  질경이의
  하얀 뿌리가 밉다.

  하늘에 닿지 못하는
  어여차, 미치고 싶은 사랑
  코리어에 태어난
  나의 죄...

  태평양 끝
  높이높이 오른
  우리들의 죄.

  질경이야,
  짓밟힌 질경이야
  어여차, 미치고 싶은
  밟히며 자란 사랑이야.

 

  조병화. 1921년 경기 안성 출생. 호는 편운.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도시적 멜랑콜리와 감미로운 고독의 세계에서
인간의 운명과 존재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유문학상' '제2회 세계시인 대회상' '한국시인 협회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는 "하루만의 위안" "사랑이 가기 전에" "석아화" "기다리는 사람들"
"딸의 파이프" 외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마산 인터체인지

     --고향에로 가는 길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마아크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 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안개로 가는 길

     --경인 하이웨이에서

  안개로 가는 사람
  안개에서 오는 사람
  인간의 목소리 잠적한
  이 새벽
  이 적막
  휙휙
  곧은 속도로 달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긴 내 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지금 말할 수 없는 이 해답
  아직 안개로 가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께
  생각할 수도 없는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이 길로 왔을까
  피하여, 피하여
  비켜서 온 자리
  사방이 내 것이 아닌 자리
  빈 소유에 떠서

  안개로 가는 길
  안개에서 오는 길
  휙휙
  곧은 속도로 엇갈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도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다 흘러가는 강이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잇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쌩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결혼식장

  여자들이 모다 빨간 입술들을
  긴목 위에 앉혀 놓고
  만국기 아래 상품들처럼 나열한다

  남자들은 모다 도야지 같은 입술들을 다물고
  햇볕을 두려워하는 짐승처럼
  목을 숙인 채 여자들을 마주 본다

  신부와 신랑은 혼야의 예절을 생각하고
  귀빈들은 축사를 길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크레오파트라보다 호사한 신부와
  와이싸스가 커서 거북한 신랑을 위하여

  빨간 입술들도
  도야지 입술들도

  금속제 훈장을 다는 가슴에
  종이꽃들을 얌전히 달고

  시인이라는 사람이
  소용이 없는 시를 읽는다

  이미 나에겐 그리운 것은 없지만
  과자를 흘리는 아이들에 끼어
  만국기 속에
  남미제국의 소식을 듣고 싶어 한다.


     분수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을 그대로 뿜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따스한 입김을 다오
  저녁 노을에 무지개 서는
  섬세한 네 수줍은 모습을 보여라
  향수는 없어도 좋다
  긴 치맛자락 그대로의 냄새를 피워라
  빨간 옷고름이 노을 바람에
  다시 보고 싶은 편지 조각같이 휘날리는
  아 네 모습 그대로 있어 다오
  분수야 네게 어울리는 잔디밭에 영 있어라
  너는 외로운 사랑을 부르지 않아도 좋다
  외로움은 언제나 나에게 주어라
  노을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수줍어 하네 옷고름 같은 그리운 것은
  나에게 주어라
  하두 그리워서 네 곁을 소리없이
  오고가는 그 마음을 영 나에게 주어라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이란 말라
  차라리 부끄러워 하는 입김을 내어
  영 그리움일랑 나에게 다오

 

  조상기. 1938년 충북 진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신년대' 동인이며 동덕여고 교사로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밀림
이야기) (겨울 이야기) (눈 오는 날) 등이 있다.

     눈 오는 날

  오늘도 내 어린 동심은
  눈꽃 핀 가지 위에서 떤다.

  어둑한 종소리에
  귀 밝은 내 사랑은
  측백나무 그늘에 앉아 있더니

  가랑잎 밟고 오던 기억이 아파
  바람의 깃을 접어
  등피를 닦는다.

  얼마나 큰 무지개를 잡으면
  바람의 뒷길을 따라갈 수 있을까.

  여름내 무성했던
  우리들 꽃밭에 가서
  동그라미 음계를 그리고 오는
  내 새끼 비둘기들이여.

  오늘도 내 어린 동심은
  눈꽃 핀 가지 위에서 떤다.

 

  조종현. 1906년 전남 고흥 출생. 본명은 용제. 호는 천운. 일본 추우오오
불교 연꾸원 졸업. '조선일보'에 작품을 발표하면써 문단에 데뷔. 주요
작품으로 (천애의 고아) (파고다의 염원) (가을비 가을바람) 등이 있다.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

  1
  나도 푯말이 되어 너랑 살고 싶다.
  별 총총 밤이 들면 노래하고 춤도 추랴
  철 따라 멧새랑 같이 골 속 골 속 울어도 보고.

  2
  오월의 창공보다 새파란 그 눈동자
  고함은 청천벽력 적군을 꿉질렀다.
  방울새 손가락에 건 채 돌격하던 그 용자

  3
  네가 내가 되어 이렇게 와야 할 걸,
  내가 네가 되어 이렇게 서야 할 걸,
  강물이 치흐른다손 이것이 웬 말인가.


     의상대 해돋이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는가.

 

  조태일. 1941년 전남 곡성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식칼론" "국토" "가거도" 등의 시집을 갖고 있는 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바탕으로 살아 있는 시, 움직이는 시를 주로 발표하였다. 세상과 인간을 따스하게
포용하려는 휴머니즘이 돋보이는 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짝지어주기

  아무래도 우리는
  짝짓는 데 나서야겠읍니다.

  마음 하나로
  세상을 굴복시키기 어려울지라도
  그 마음 하나
  짝지어 주고 싶은 그 마음 하나
  갖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이런 짝지어주기는 어떨까요?
  모래와 물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바람과 나뭇잎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데모와 진압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펜과 잉크를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여당과 야당이 짝지어 있는 것 말고
  남자와 여자가 짝지어 있는 것 말고
  옷과 살결이 짝지어 있는 것 말고
  입술과 거짓말을 떼어내어
  귀와 침묵을 떼어내어
  국토와 휴전선을 떼어내어

  이남과 이북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마음과 마음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수수께끼

  질문은 다소 강압적이겠지만
  답변은 자유로와야 합니다.
  질문은 다소 상상적이겠지만
  답변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첫번째 문제 풀어볼까.
  태양에 붙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낮?
  두번째 문제 풀어볼까.
  달에 붙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밤?
  세번째 문제 풀어볼까?
  섬에 달린 것이 무엇인가요?
  육지?
  네번째 문제 풀어볼까.
  풀잎에 축 처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땅덩어리?
  다섯뻔째 문제 풀어볼까?
  말소리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
  여섯번째 문제 풀어볼까?
  팔다리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몸뚱어리?
  일곱번째 문제 풀어볼까?
  대왕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백성?

  아이고 정신없어라.

 

  주문돈. 1940년 경남 함양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집 "잎핀 날에" "둘 혹은 하나"가 있고 (현대시) 창간 동인으로
활약했다. 현재 태평양화학에 재직중.

     귀뚜라미

  어둠이 깃들면서 들리게 말게 숨죽여 울기 시작한 귀뚜라미가 어둠이 짙어져서는
드러내놓고 목청껏 울어 좁은 뜨락을 온통 울음으로 채우고 말았다. 새벽녘에는
뜨락에 가득한 제 울음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다급해져서야 이웃을 부르고 또
불렀으나 소식이 없자 게워놓았던 제 울음을 담장 밖으로 퍼내느라고 심하는 것을
지켜보던 시간이 눈흘기며 지나가 버린다.

 

  천상병. 1930년 경남 창원 출생. "문예"지에 시 (강물) (갈매기)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스러운 서정을 바탕으로 한
신고전주의 경향을 특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집 "새" "주막에서"가 있다.

     주막에서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쟝주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빡 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새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무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양희.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하여
데뷔. 이후 침묵하다가 자기응시의 처절한 고뇌를 노래한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을 출간했다. 그의 시 세계는 느끼고 생각한 것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침묵을 깨고 현재 시작에
전념하고 있따.

     꿈에 대하여

  눈을 감아도 사방무늬로 번져 보이고
  버리고 버려도 그림자처럼 따라오니
  그대의 집요한 자유자재
  동서남북 가로놓여
  너의 푸념 나의 푸념 머리 들 곳 없다
  벌집처럼 들쑤신 고통
  한 시대 벌겋게 쏘고 지나갈 때까지
  물불 안 가리고
  여러번 죽고
  여러번 태어나
  평생 못 버릴 불치의 풍경 하나
  어른 된 오늘까지 우릴 따라와서
  우리와 함께 지병이 되어 앓고 있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최원규. 1933년 충남 공주 출생. 충남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수료.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충남문화상'(1967)을 수상했다.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시집에 "겨울가곡" "순간의 여울" "자음송" 등이
있으며 현재 충남대학 교수로 있다.

     달

  그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수미산이 가려있기 때문이리.
  그대 미소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잎새에 가려있기 때문이리.
  그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바람 속에 묻혀있기 때문이리.
  아 두고온 얼굴을 찾아
  하늘로 솟구치는 몸부림
  그대 가슴에 뚫린 빈 항아리에
  담고 담는 반복이리.

 

  최재형. 1917년 평남 안주 출생. 일본 코마자와대학 인문과 졸업.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한 후 침묵하다가 다시 시작에 전념.
현재 경제일보 공무국장으로 있다.

     양지

  양지쪽에 앉으면
  인생이 행결 따뜻해 온다.

  어렸을 때 헐벗고 배고파도
  항상 즐겁던 양지

  나는 혼자
  오랫동안
  그늘로 쫓기어 왔다.

  여수는 절로
  녹아 내리고

  차라리
  울수도 없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눈부신 햇살만이
  옛날의 인정이었다.

  외로운 이여 오라.
  ...

  와서 잠깐
  해바라기 하며
  쉬어서 가라.

  이렇게
  양지쪽에 앉으면
  세상이 행결 정다와진다.

 

  최하림.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산문시대' 동인을 거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와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등이 있다. 현재
서울예술 전문대에서 시 강의를 하고 있다.

     시

  눈이 지천으로 오는 밤에 시를 써야지
  머리를 눈에 박고 써야지
  눈 속을 걸어가는 사내 몇
  불을 찾는 사내 몇
  겨울까마귀 몇
  죽은 자들도 그런 밤엔 불을 찾아
  몇날이고 몇밤이고 언덕을 넘겠지 그들의 목소리
  벌판을 헤매겠지. 그들의 불을 찾으러? 꿈꾸는 불? 그 불 속에
  밤차가 달리고 겨울까마귀들이 공중을 떠돌겠지
  --겨울까마귀가 중부 지방엔 없어요, 여보.
  중부지방이 아니야, 내가 말하는 건...
  나는 그 살도 뼈다귀도 안다 바람이 그들 소리로
  하늘을 울리는 걸 안다 당신도 그 소리를 알았으면 좋겠어
  아이들도 이웃도 그 나라의 바다쪽으로
  검은 머리를 빗겨내리며
  붉은 불빛 속에서 마음을 드러내고
  어머님이 나를 보시듯, 그래 어머님이...

  오오 떠오르는 어머님이여
  그날 저녁도 우리는 어둔 거리를 헤맸읍니다.
  세종로 우체국 옆 담뱃가게에서 솔을 한갑 사고, 거스름돈을 받고, 어느
술집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면서 거리 끝까지 걸어갔댔읍니다.


     산

  바람으로 천둥으로 또 설움으로 가야지
  우리 뒤에 있고 지금은 앞에 있는 저
  검은 산 붉고 푸른 산
  옥수수잎이 하늘을 울리는 밭머리
  몇날 며칠을 두고 소란스러운 마을을 지나서
  시도 버리고 서쪽으로
  뛰어간 사람도 버리고 썩어문드러진 천둥이
  한꺼번에 쩌르릉쩌르릉 천지를 울리며
  사람들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밤이 오기 전에
  산 너머 구름 너머 그림자보다 빠르고 쓸쓸하게 가야지

 

  한광구. 1944년 경기 안성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심상"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으로 "이 땅에 비오는 날은"
"찾아가는 자의 노래"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현재 추계예술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심지 하나로 녹으면서

  말씀의 우유였으면 합니다.
  조용한 축복이었으면 합니다.
  따스한 입김이었으면 합니다.

  마른 바람만 질주해오고
  흔들리는 윤곽뿐입니다.
  몇 번씩 마음으로 넘어지는
  검은 그림자 넘실거립니다.
  죽어가는 피톨들은 앙금으로 가라앉아
  굳어져 갑니다.
  부서지는 낱말들이 시나브로 떨어져
  금속성 울림만 시끄럽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심지 하나로 녹으면서 가라앉는
  지금은 중년,
  하늘엔 구름 가고,
  밤새 기울이던 술잔도 덧없이 넘어지고
  분노하거나 슬퍼하던 일들도 하얗게 바랬으니
  살아가는 일이 경건한 아침입니다.

 

  한기팔. 1937년 제주 서귀포 출생. "심상" 신인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데뷔(1975)한 그는 정제된 언어로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서귀포" "불을 지피며"가 있고 '제주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가을비

  비 뿌려
  마음 고요해지는구나.
  고요한 마음이
  하느님 나라 빗소리를 몰고 오는구나.

  무덤가 하얀 모래밭,
  깃털 고운 물총새
  그의 발목이 연한 분홍빛이다.

  오오!
  누구라 말하랴.
  내 마음 그리 쓰임이
  빗소리로 말하고
  빗소리로 들리나니

  내가 사는 땅,
  잠 자는 이의 젖은 눈꺼풀 사이
  빗소리 알 수 없는 등불을 달고
  깊은 잠 깨우고.

 

  한무학. 1925년 일본 릿꼬오대학 철학과 수업. 1950년대 초에 문단에
데뷔한 그는 상황적인 현실의식을 비운율적인 수법으로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재미중. 씨집으로 "시민은 목하 입원 중"이 있다.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북으로 훈풍 따라
  찬 개울 천이나 건너고,
  남으로 아지랭이 따라
  시린 산봉우리 천이나 넘어
  봄이 먼 고향 산천에
  연분홍 봄 심어 놓고는
  말없이 훌쩍 떠나버리는 꽃
  그것은 진정 진달래꽃인데,
  여기 진달래를 진달래라고 못 부른다 해서
  꽃 있는 마음에
  어찌 꽃마중이야 못 나가랴.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오는 마음 가는 옷섶에
  검은 상장이나 달고 가게 해 주려무나.

  형제사 있건 없건,
  이웃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이웃 있는 좁은 노정 위에
  샘물모양 가늘게나마 솟아
  36도 5부의 체온으로 이어지는 다리
  그것은 진정 동무의 정인데,
  여기, 동무를 동무라고 못 부르고서야
  그리워 나눈 술인들
  어찌 정 되어 돌아오랴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오는 마음 가는 옷섶에
  검은 상장이나 달고 가게 해 주려무나.

  이름이야 옛 것이건 새 것이건,
  그 이름 뒤에 두고, 살아서 유랑 천 리
  그 이름 옷섶에 싸 안고 죽어서 귀향 천 리
  그러면서 긴 세월 울고 웃고
  그러면서 아린 세월 잃고 찾은 우리의 땅
  그것은 진정 조선인데
  여기 조선을 조선이라고 못 부른다 해서
  석별의 인사 한 마디 없이
  어찌 값없이 아무데나 넘겨야 주랴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오는 마음 가는 옷섶에
  검은 상장이나 달고 가게 해 주려무나.

 

  함윤수. 1915년 함북 경성 출생. 동인지 "맥"에 (앵무새)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상징적인 시 세계에 현실적인 비판 정신을 가미한
시풍을 특색으로 갖고 있다. 시집으로 "사향묘" "함윤수 시선" 등이 있다.

     수선화

  슬픈 기억을 간직한 수선화
  싸늘한 애수 떠도는 적막한 침실.

  구원의 요람을 찾아 헤매는
  꿈의 외로움이여,

  창백한 무명지를 장식한 진주 더욱 푸르고
  영겁의 고독은 찢어진 가슴에 낙엽처럼 쌓이다.

 

  허만하. 1932년 대구 출생. 경북의대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병리학 전공,
의학박사. "문학예술"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해조조"를
출간(1969)했다.

     꽃의 구도

  당신은 빈 컵의 중심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장미를 한 송이 꽂았다.
  나는 그것을 당신의
  피라고 생각했다.
  한때는 허무가 가득했던 용적을
  이제는 눈부신
  화약이 차지한다.
  꽃은 씨앗을 감추고 있지만
  꽃은 이미 뿌리가 없다.
  꽃은 죽음의 조형이다.
  스스로가 감추고 있는 씨앗처럼 
  허무는 꽃을 감추고 있다.
  죽음은 종자처럼 구체적이따.
  빈 컵에 자리잡은 꽃의 위치가
  묵시적인 창의 중심이다.
  당신은 빈 컵에 꽃을 꽂았지만 
  그것은 적막한 바람의 언저리다.
  나는 안다.
  죽음을 배경으로 했을 때
  비로소 한 송이 꽃은 산다.


     데드마스크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려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허소라. 1936년 전북 진안 출생. 전북대와 고려대를 거쳐 경희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 현재 군산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자유문학"지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1959년)한 이래 한국 문인협회, 국제 펜클럽회원으로
활동. 시집으로는 "풍장"이 있고 산문집 "흐느끼는 목마" "파도에게 묻는 말"
논서로 "한국현대작가연구"가 있으며 '전북문화상'을 수상했다.

     10월의 노래

  가늘고 긴 여름 노래 끝나고
  이제 세상은 거대한 지휘봉,
  사랑의 비밀구좌인 당신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하였읍니다.
  은박지에 새겨진 악보
  한 음계씩 창을 닦으며 오를 때
  어디선가 쿵, 울리는 당신의 기침
  모든 그을음은 투명으로 빛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이사이 것은 가이사의 창고로
  나뉘고 있었읍니다.
  비로소 끝이 보이는 시간
  어차피 날지 못하는 닭들은
  그들의 자유를 알로 밀어내고
  옷을 벗은 우리는
  제 몸의 가장 단단한 곳에
  피리구멍을 내고
  가을의 노래를 불렀읍니다.
  지은 죄 벗으려고
  칼날 되어 불렀읍니다.

 

  허영자. 1938년 경남 함양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대학언 졸업.
"현대문학"으로 데뷔했으며 '청미' 동인으로 연가풍위 그윽하고 섬세한 정적
세계를 아름답게 형상화시켜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강한 시들을 보여 주고 있다.
'제4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 시집으로 "가슴엔듯 눈엔듯" "친전"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와 수필집 "한 송이 꽃도 당신 뜻으로"가 있다.

     백자

  불길 속에
  머리칼 풀면
  사내를 호리는
  야차 계집 같은

  그 불길 다스려 다스려
  슬프도록 소슬한 몸은
  현신하옵신 관음보살님
  --이조 항아리


     감

  이 맑은 까을 했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봄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장끼

  죽은 나무도 생피붙을 듯
  죄스런 봄날

  피여, 피여

  파아랗게 얼어 붙은
  물고기의 피,

  새로 한 번만
  몸을 풀어라

  새로 한 번만
  미쳐라 달쳐라.


     임

  그윽히
  굽어보는 눈길

  맑은 날은
  맑은 속에

  비오며는
  비 속에

  이슬에
  꽃에
  샛별에...

  임아

  이
  온 삼라만상에

  나는
  그대를 본다.

 

  허형만.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국문과 및 숭전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월간문학"으로 데뷔하여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시집으로
"청명" "풀잎이 하느님에게"가 있으며, 현재 목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일상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다루되 전혀 난해성의 부담을 주거나 생경한 표현
따위로 곤혹감을 주지 않는 시를 쓰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월의 아침

  세월의 머언 길목을 돌아
  한 줄기 빛나는 등불을 밝힌
  우리의 사랑은 어디쯤 오고 있는가.

  아직은 햇살도 떨리는 1월의 아침
  뜨락의 풀 뿌리는 찬 바람에 숨을 죽이고
  저 푸른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살아갈수록 사람이 그리웁고
  사람이 그리울수록 더욱 외로와지는
  우리네 겨울의 가슴,

  나처럼 가난한 자
  냉수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깨끗해진 두 눈으로
  신앙같은 무등이나 마주하지만
  나보다 가난한 자는
  오히려 이 아침을 만나 보겠구나.

  오늘은 무등산 허리에 눈빛이 고와
  춘설차 새잎 돋는 소리로
  귀가 시려운 1월의 아침,

  우리의 기인 기다림은 끝나리라
  어머니의 젖가슴같은 땅도 풀리고
  꽃잎 뜨는 강물도 새로이 흐르리라.
  우리의 풀잎은 풀잎끼리 서로 볼을 부비리라.

  아아,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무등산은 한결 가즉해 보이고
  한 줄기 사랑의 등불이 흔들리고 있다.

 

  홍신선. 1944년 경기 화성 출생. 동국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시문학"을
통해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이 있다.
변화와 함께 직접적인 정황묘사, 감각의 해부, 극적 독백의 독특한 시세계를 갖고
있는 그는 현재 안동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겨울섬

  대교를 건넜다. 피나민 몇이 과거 버린 채 살고 있다
  마을 밖에는
  동체뿐인 새우젖 배들
  빈 돛대 몇이 겨울 한기에 가까스로
  등받치고 기다리고

  물빠진 갯고랑, 삭은 시간들 삭은 물에 이어져 잠겨 있다.
  일직선,버려진 마음들로 쌓아올린 방파제까지
  나문재나무들 줄지어 나가 있다.
  뻘에 두발 내리고 붙어 있는 목에 힘준 저들.
  쓸리지 않으면
  개흙으로 삭는 일
  더러 쓸리면
  닻으로 일생 내리는 저들의 일.

  힘 힘 풀어놓고
  공판장 매표소 회집들로 선착장에 힘 풀어놓고
  두어걸음 비켜서서
  말채나무 오그라든 두 손에
  저보다 큰 겨울하늘 든 채 있다.
  사는 일이 사는 일로 투명하게 보이고 있다.


     산에 오르며

  탕! 앞산에서 총소리가 울렸읍니다. 몰면서 앞산에서 어느새 몰이꾼이 된
소리들이 골짜기를 뒤지며 올라갔읍니다. 겨울이라 살아있는 것은 없었읍니다.
지나간 자리에 추위나 잔뜩 부둥켜 안고 서 있던 나무들이 그 시린 귀들이
풀썩풀썩 떨어져 굴렀읍니다.

  서로의 어깨를 찍어 누르며 죽은 칡넝쿨이나 마른 새꼬치풀 시엉풀들이 무슨
흔적처럼 남아 있었읍니다. 망가진 몸짓, 망가진 정신만 가지고 여기저기 남아
있었읍니다. 무서움들이 정체 모를 사람들처럼 나타나곤 했읍니다. 가다가 어느
골짜기에선 소문없이 무서움이 된 19**년도 만났읍니다. 갈수록 무서움이 깊어지고
보이는 것은 없었읍니다.

  보이는 것은 없었읍니다. 이 보이지 않는 일들만이 기침을 컥컥하며 판을 치고
있었읍니다. 마음 내버린 눈 코 내버린 때까치 새들이, 이상한 생들이 망가져
떨어져 있었읍니다. 맨 위에는 골짜기를 만들고 올라온 능성이만이 오똑 앉아
있었읍니다. 위는 위대로 가려서 보이지 않았읍니다. 보이지 않는 일, 무서움 속을
우리는 다시 걸어 내려왔읍니다.

 

  홍윤숙. 1925년 평북 정주 출생. 호는 여사. "문예신보" 예술평론의 추천을 받아
데뷔. '시극 동인회' 동인으로 사물이나 관념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정감을
억제하는 것이 이 시인의 시풍이다. '제7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여사 시집" "풍차" "장식론" "일상의 시계소리" 등과 수필집이 있다.

     장식론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 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 보면
  쇼우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 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장의 낙엽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풍차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기녀의 마음일까

  그리움에 맴도는 나뭇잎 하나
  붉은 색지처럼 손끝에 돌리며
  멋없이 멋없이 배회하는 날

  외로움이 진하면 거울을 보고
  거울 속 눈물에 번져나는
  희미한 얼굴

  붉은 연지꽃처럼 진하게 칠하며
  웃어도 보는
  뉘라서 알까만 배율의 양심

  보랏빛 새옷이랑 갈아 입고
  검은 머리 꽃이랑 꽂고
  나비 같은 마음으로 나서 보건만
  짐짓 갈 곳이 없는...

  너 없는 이 거리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내 마음은 부칠 데 없는
  가랑잎 엽서 한 장
  바람에 돌고 도는 장난감 풍차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기녀의 마음일까

  붉은 양관 긴 층계를 내리면서
  문득 내 나이 이미 젊지 않음을
  생각하는 날

 

  황금찬. 1918년 강원 속초 출생. "문예"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으며
초기에는 황토색이 짙은 시를, 점차 현실성이 강해지면서 상징적 표현 수법을 쓴
그는 '청포도' '시단' 동인이다. '시문학상' '월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현장" "5월의 나무" "분수와 나비" "한깡" 외에도 많은 저서를 갖고 있다.

     보리고개

  보리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불랑은 유럽,
  와라스카는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떼 코리어의 보리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어의 보리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촛불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극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 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황동규.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 졸업. 에딘버러대학
대학원을 수료. "현대문학" 추천과 동인지 "사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현대문학상'을 수상(1968)했고 "어떤 개인날" "비가" "삼남에 내리는
눈"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와 문학선 "풍장"이 있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동요함이 없이 지식인의 현실 인식을 엄격하게 통제된 서정성의 틀로
추구하는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는 현재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십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탁소리 목탁소리 목탁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이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 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커지기
시작하는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만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아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 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 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 다니는
  몇 송이 눈.

 

  황명. 1931년 경남 창녕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많은 작품을 발표한 그는 생활 주변에서 소재를 얻는 지성적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휘문고 교사로 있다.

     분수

  1
  오죽하면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의
  노여움을 자제하는 저
  묵시의 입김은
  얼마나 거룩한
  종교 같은 것이라 할까.

  2
  일찍 하늘로 승화하지 못한
  먼 태고인 적 우리
  어버이들의 눈물이 마침내
  영원과 맞서는 자리에
  찬란한 무지개를 피우듯
  아기찬 우리들의
  의욕으로 되살아 오르는가.

  3
  언제고 한 번은
  끝없는 강물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러 오던
  하늘이여,
  해여,
  달이여,
  별이여,
  지금은 모두가
  나에게로 어울려 드는
  이 창업의 경이 같은
  아 청청히 나의 가슴을
  굽이치는 강물아

 

  황명걸. 1935년 평남 평양 출생. "자유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현실' 동인으로 서민적인 소재를 평이하게 노래하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한국의 아이" 외에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나의 손

  서른 하고도 넷
  예수의 수명인 나이에
  아직 철들지 못한 가장
  몸은 약해빠졌고
  마음은 모질지 못한데다
  손까지 희고 가늘다
  부끄러워라
  어쩌다 아내보다 고운 나의 손이여
  그 손으로
  한 조각 목문패 한 뼘 땅이 없음을 개탄할 수 없다
  오직 굵은 매듭에
  소나무 등걸 같은 피부의
  아내의 손을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길 모퉁이
  구두수선장이의 갈라지고 굳은 살 박힌 손을
  닯아야 한다 닮아야 한다


     한국의 아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남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보채다 돌맹이를 가지고 노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빚과 함께 남겼단다
  뼈공이 부숴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일가친척 하나 없는 아이야
  혈혈단신의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올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황선하. 1931년 경북 월성 출생. 마산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에서
시 (밤)이 추천된 후 시작활동을 한 그는 과념적인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진해시문학연구회'를 주관하고 있으며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

     아버지의 연가

  잠 안 오는 아홉 밤
  괴로운 그리스도
  멍든 늑골
  궂은 비 내리고,
  궂은 비 들고
  동그맣게 미소짓는 무구한 햇살.
  구구구
  콩 먹는 사랑스런 비둘기 떼.
  외론 마음 먹은 귀 트이고,
  둥둥둥
  아득한 지심 축제의 북소리,
  울먹이며 춤추는 망각의 쥐꼬리들.
  한 점 힌 구름 뜬
  어머니의 하늘,
  비비배배
  종달새
  아버지의 연가.

 

  황윤헌. 1931년 서울 출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문학예술"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문명 비평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한때 '현대시'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시집으로 "불의 변주"를 출간했다.

     난파선

   7.불의 변주

  ... 기적은 아름다웠다.

  노오란 빛을 퍼뜨리는 달이 뜨고
  불꽃처럼 아편꽃처럼 헤일 수 없이 별이 뜨고 달이 뜨고
  밤이 차가운 손끝에 머물렀다.
  마른 잎을 모아 불을 피웠다.

  차가운 손에서 불이 부활을 변주하듯 익사한 늙은 수부가 소생하였다는
전설이 되풀이 되고, 묘패가 없는 짙푸른 바닷 속에서 숱하게 신화를
조상하던 늙은 수부의 손이 파아란 불을 피우며 아득히 침몰했던 범선을
꽃보라치는 풍토를 변모시킨다.

  늙은 비둘기를 추방한 땅
  먼 하늘에서
  분노에 찬 제신의 북소리가 울려오고
  산과 숲과 벌건 바위가
  무너져내리더라도
  ... 기적은 눈부셨다.

  짙은 꽃내 풍기는 도취 속에서
  늙은 수부는 범선을 타는 꽃보라치는 풍토로 간다.
  ...

  불로 변신하는 마른 잎에 쪼이는
  차가운 손이 부신 기적에 떨고

  --늙은 수부는 깊은 잠속에 묻혀 버린다.

  하얀 꽃가루가
  소리도 없이 휴식을 밟고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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