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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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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시인 지구촌

애송시 1
2015년 06월 16일 21시 32분  조회:9263  추천:0  작성자: 죽림

 구경서. 1921년 출생. 호는 남촌 또는 가남. 1945년 동인지 <백맥>을
주간했으며 시집으로 <폭음> <회귀선> <염전지대> <전원교향곡> 등이 있다.

     정물

  은쟁반 속에
  그 과수원은
  싱그러운 가을 바람
  사과 배 청포도...

  그것들은
  포개 쌓인 피라미트 형의 지세로
  피곤한 한숨을 잔다
  위대한 음악의 반주로
  입체의 핵과 핵은
  심연의 사상.

  하나의 계시
  원의 울타리 속
  원숙한
  발효
  그리고
  생명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사자의 치아 앞에서
  돌과 같이 굳어져 있는
  과일들의 인력.

  그 하이얀 에프론
  위의 과수원
  아침
  햇살에
  난무하는
  미각의 나이프

  하나.

 

  구상. 1919년 함남 원산 출생. 본명은 상준. 일본 니혼대학 종교과 졸업.
원산 문학가 동맹에서 낸 동인시집 <응향>에 작품을 발표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는 <구상시집> <초토의 시> <구상문학선> 등이 있다.

     초토의 시

  1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하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수난의 장

  1
  우 몰려 온다. 돌팔매가 날은다.
  머슴애들은 수수깡에 소똥을 꿰매 달고
  어른들은 고꽹이를 휘저며 마구 쫓아 오는데
  돌아 서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선지피가 쏟아지는 이마를 감싸 쥐고서
  어머니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이제 어디메로 달려야 하는가.

  2
  쫓기다가 쫓기다가 숨었다.
  도갓집으로 숨었다.
  애비 욕 애미 망신 고래고래 터뜨리며
  벌떼처럼 에아싸고 빙빙 돌아 가는데
  나는 얼른 상여 뚜껑을 열어 제치고
  벌떡 드러누워 숨을 죽엮다.

  3
  피를 토한 듯 후련해지는 가슴이여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지는 마음이여
  사람도 토까비도 얼씬 못하는 상여 속에서
  나는 어느 새 달디 단 꿈 한 자리를 엮고 있고나.

  4
  상여 속에서 송장처럼 잠들은
  사나이 얼굴은 십상 달같이 흴게다.
  어쩌면 상달같이 깜찍한 여인이 별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상처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있어야 핳 풍경
  나의 달가운 꿈 속의 꿈이여.

  5
  추억의 연못 가엔 사랑의 연꽃도 한 송이 피었으리.
  다 홍신은 벗어 놓고 외로움에
  장승처럼 못 박혀 있는
  또 나의 사랑.

  6
  꽃다발처럼 화려한 상여를 타고
  림보로 향하는 길 위엔
  곡성마저 즐겁구나
  소복한 나의 여인아
  사흘만 참으라.

 

  구석봉. 1936년 충북 영동 출생. 호는 곡천, 양산.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수료.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으며, 제1회 역사 소설
모집, 동아일보사 방송국 개국 기념 단막극 현상모집에서 입상했다.
시집으로 <피의 역사>가 있다.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

  그것은 몽롱한 구름을 타고, 장승마냥 서 있는 나를 향하여 무쇠의
형벌을 가하면서, 겹겹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시야속은 온통 그들로해서 가득하고, 어떤 날 그들은 밀물과 썰물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해만의 특권처럼 음탕한 6월이 숨어버리고, 뒤미쳐 달려온 7월도 흠뻑
자란 어느날, 난 마을 사람들의 박꽃 얼굴 빛을 본뜨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로는 훌훌히 버리고 뜬 푸른 산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집과 황량해진 논밭이 조을고 있었다.

  -거기 지나쳐 간 갖가지 슬픈 실화가 있었다.

  위도와 경도가 선뜻 취해 잠꼬대를 했기, 지구 위의 조그만 귀퉁이에
불은 노도처럼 날뛰고 있었다.

  낯이 검어 가는 태양 아래 가을이 익고 있을 무렵, 엎드려 피를 토한
나의 시집이 있었고, 배만 움켜쥔 채 신음했을 그 일그러진 퇴색한
초가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시멘트 벗은 부엌이 설워 돌아가는 아줌마, 펌풋대 우뚝 우뚝 묵묵한
공허가 있었다고, 젖내 풍기는 고사리 손을 놀려 어영차 밥도 짓고 국수도
썰고, 내 아우랑 여설 살 짜리 계집애랑 각시 신랑 혼례식장 꾸미던 그
회상의 담장 아래로, 아 탄피가 있었고, 해골이 희쭉 웃고 있었다.

  거기 슬프게 억센 아이들의 입다문 눈 빛에서 무한히 겹쳐간 밤의 살생과
야만을 읽을 수 있었다. 뼈가 녹아날 태양의 투시처럼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위도와 경도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물은 다시
바위의 굳굳한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으로 미망인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시가지엔, 죄인 같은
고아와 불구자의 행렬이 밀려 가고 있었다.

  나의 시야 속은 어느 지점 눈 덮이는 이국벌판 위에, 새로 생긴
공동묘지가 폭풍우를 삼켜가면서 울고 있었다.

 

  권국명. 1942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했다. 경북대를 졸업하고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1946)했다. 연작시 '무명효'
외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나는 사랑이었네라

  나는 피였네라,
  처음은 다만 붉음만이었다가
  다음은 조금씩 풀리는
  아픔이었다가,
  석남꽃 허리에 아픔이었다가,
  이 어지러운 햇살 속에
  핏줄 터져 황홀히 흘리는
  피였네라,
  내 피는 남산을 적시고
  남산과 대천세계를 적시고
  그래도 죽지 않는 더운 사랑이었네라.

 

  권달웅. 1944년 경북 봉화 출생. 한양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으로는
<해바라기 환상> <사슴뿔>이 있으며 현재 <신감각>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감처럼

  가랑잎 더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훤한 하늘에는
  감이 익었다.
  사랑하는 사람아,
  긴 날을 잎피워 온
  어리석은 마음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아,
  해지는 하늘에
  비웃음인 듯 네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눈웃음인 듯 내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찬서리 만나
  빨갛게 익은 감처럼.

 

  권일송. 1933년 전북 순창 출생.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불면의 훈장'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강변이야기'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신춘시> 동인으로 활동. 언어의 사회성을 추구 표현의 세련도를 이루는 것이 그의 시의 특징.
시집으로 <이 땅은 나를 술마시게 한다> <도시의 화전민> <바다의 여자>와
수필집 <한해지에서 온 편지> <이 성숙한 밤을 위하여> <사랑은 허무라는
이야기> 등이 있다.

     풀잎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그 눈 속의 우뚝한 무덤이 되고 싶다.

  무덤에 돋아나는 엉겅퀴와
  가느다란 몸살의 햇빛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늘 깨어 있는 한 방울의
  술이 되고 싶다.

  뺏고 빼앗기는 마음의 줄 다리기
  실상 사람의 말씀은
  죽음 속에서 돌아 눕는
  조용한 풀잎의 새벽

  언제까지나 외로운 이승의 뱃길
  글썽한 눈물로 풀이하는
  내 마음 깊은 곳
  서걱이는 갈대의 숲.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서설

  아르노 강변의 꽃도 지고
  백합 문장의 도시와 창들이
  이파리를 접으며 가을에 사위는

  눈을 들면 낙엽으로 저무는 모든 것
  글썽한 눈물이게 내 맘도 지고
  4년을 하루같이 순금으로 일렁였던
  마지막 한 점 붓을 놓았을 때

  모나리자 모나리자 모나리자
  부인 ^6 236^지오콘다^356 3^여-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울지 않겠읍니다.

  당신의 신비로운 눈동자와 함께
  그 온갖 것
  내게서 소리없이 사라져 간다 할지라도
  영원을 때리는 오묘로운 빛보라
  그 앞에서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서러워 않겠읍니다.

  육신에 닿는 아픈 여백의 사랑을 말고
  찰나에 숨지는 이슬의 영광을 말고
  이승에서 만나는 그 최후의
  값진 두려움에 떠는 담홍빛의 영혼들

  이윽고 첫날같이 칠칠한 밤이 내리고
  서늘한 내 손이
  깊디깊은 산회의 덧문에 걸리어
  서성이고 있었던 경이의 순간

  모나리자 모나리자 모나리자
  부인 ^6 236^지오콘다^356 3^여-
  그때 당신의 수정 입술은
  내 머리털에 부딪고
  처음으로 내미는
  당신의 부신 손목에 입맞추었을 때
  오호 전혀 부끄러운 쉰 넷의 생애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차마 울 수조차 없었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오지 못할 길
  죽음과 만날 그 최후의 약속 위하여
  나는 눈 덮힌 알프스를 넘고
  당신은 카라브리아 연안
  지아비 프란체스코의 곁으로
  달려갔읍니다.

  사랑이란 기다리는 플로렌스의 꽃밭
  예술이란 호올로 남는
  나의 키 큰 그림자에 불외했던 것

  나의 손은 이미 조용한 천상의 것
  당신의 눈동자는 이승을 출렁이는
  고요한 상징과 강물의 회귀로 시방은
  문예부흥의 심장
  플로렌스에 떨구는
  나의 한 방울 눈물의 의미처럼

  아르노 강변의 꽃은 지고
  내 맘의 설운 문장도 어둠에 묻히는
  부인 ^6 236^지오콘다^356 3^여-

 

  고원. 1925년 출생. 삼인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이율의 항변> <태양의 연가> 등 시집이 있고, 미국 아이오아대학 출판부를
통해 <한국 현대시집>을 영역 간행하여 해외에 한국 현대시를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모나리자의 손

  저녁 냄새가 번지는 미소,
  그쪽으로 가까이 가면서
  나는 유난히 크다란
  모나리자의 손을 느낀다.
  두껍고 따뜻하다.

  이 손은 나의 어느 부분이든지
  스쳐가거나 휘감을 수 있고, 나를
  저 아래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소 뒤의 세계는
  그 손, 큰 손 때문에
  어둡고 차지 않는가?

  놀빛 속에 입술이 흐르는구나.

 

  고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본명은 은태이며 법명은 일초이다. 11년간
불교 승려 생활을 했으며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의 특색은 자연이 갖고 있는 무의지의 율동에서 삶의 빛을 찾아 내려는 노력과 의식의

객관화를 표현하는 데 있다. 시집으로 <피안감성> <해변의 운문집> <신, 언어, 최후의 마을>
<새벽길> <조국의 별>과 장편소설 <피안행> 등이 있다.

     문의 * 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문의: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신해가사

  청수장에서

  내가 무엇이 되어 여기에 남아 있는가.
  청수장 수년의 빈 마음으로
  때로는 모르는 것을 너라고 불러
  물소리를 이루어 앉아 있어도,
  살아온 것 만큼 헛되이 오래인 것이
  다만 물소리로 물을 흐르게 한다.
  네 앞에서 낯익을수록 추운 너보다도
  어둑어둑한 나무 잎새 저마다 잠들어서
  네 몸안에 둔 마음도 잠이 든다.
  이제 내가 무엇이 되어 여기에 남아 있는가.
  깊은 밤이 돌아다보면 더욱 깊어서
  물소리는 저 혼자서 흐르는 물을 따라 가는가.

  죽사 * 에서

  강물은 저 스스로 돌면서 흐른다.
  때때로 빠른 강물도 늦어서
  아직 이 세상을 벗어나지 않고
  빛이 푸룬 빛을 만들어
  강 기슭의 풀과 나무 사이로 흐른다.
  그러나 강물을 따라가며
  아무리 오래된 소리로 불러도
  죽음이란 더 깊어서
  깨이는 것은
  저문 강물 위의 작은 물소리 일 뿐.
  이 세상은 서로 서로 혼자 남아서
  강물이 남겨 준 것이 된다.
  아아 놀라워라 바람 한 자락,
  새삼스러운 산 너머에도
  이 세상에도 따로 남겨 둔 것이 된다.

  * 죽사: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근처의 산사. 옛 시대에 있었던 암자
죽사에서 연유된다.

  제4 한강교에서

  없어진 것은 고인만이 아니다.
  이 세상도 강을 건너서
  비오는 날만큼 멀고
  항상 울던 밤섬이 없어져서
  이 세상에 흩어졌다.
  저녁 무렵 불이 켜질 때
  흐르는 물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맹세하랴.
  우리가 무엇을 맹세하고 돌아가랴.

  우리가 이름을 부르며 떠도는 것은
  떠도는 곳에만 우리가 있을지라도
  또한 금빛 저녁바다 위에도 있다.
  그렇다. 우연은 어느 날보다 잉잉 거린다.
  우리가 우연으로 모여서
  몸 속의 어둠으로 떠도는
  저녁바다에 이르러
  다음날 모든 금빛을 거둬버리려 함!
  우연이란 몇 만개의 우연인 하나와
  또 하나의 그리운 벗들아
  우리가 우뢰 소리를 먹어도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저녁 바다의 번개를 불러서 운다.
  우리가 떠돌지 않을 때
  누가 구층 십층 밑에서 우리로서 떠돌겠는가.


     투망

  최근 나에게 비극이 없었다.
  어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새벽마다
  동해 전체에 그물을 던졌다.
  처음 몇 번은 소위 허무를 낚아올렸을 뿐,
  내 그물에서 새벽 물방울들이 발전했다.
  캄캄한 휘파람소리,
  내 손이 타고 온 몸이 탔다.
  그러나 새벽마다 그물을 던졌다.
  이윽꼬 동해 전체를 낚아 올려서
  동해안의 긴 줄에 오징어로 널어 두었다.

  한반도여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내 오징어를 팔지 말라.


     삶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화살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년 동안 가진 것
  몇 십년 동안 누린 것
  몇 십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도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조국의 별

  별 하나 우러러보며 젊자
  어둠 속에서
  내 자식들의 초롱초롱한 가슴이자
  내 가슴으로
  한밤중 몇백 광년의 조국이자
  아무리 멍든 몸으로 쓰러질지라도
  지금 진리에 가장 가까운 건 젊음이다
  땅 위의 모든 이들아 젊자
  긴 밤 두 눈 두 눈물로
  내 조국은
  저 별과 나 사이의 가득 찬 기쁨 아니냐
  별 우러러보며 젊자
  결코 욕될 수 없는
  내 조국의 뜨거운 별 하나로
  네 자식 내 자식의 그날을 삼자
  그렇다 이 아름다움의 끝
  항상 끝에서 태어난다 아침이자
  내 아침 햇빛 떨리는 조국
  오늘 여기 부여안을 일체 결합의 젊음이자

 

  김경린. 1918년 함북 경성 출생. 해방직전에 모더니즘 에 참가.
8.15후엔 <신시론> 및 <후반기>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 이후
침묵하다가 최근 다시 시와 시론을 쓰기 시작(1981)했다. 엔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현대의 온도> 등에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국제 열차는 타자기처럼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보라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과
  예절과 그리고
  공포만이 거품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온다.

  또디시
  먼 앞날에
  추락하는 애증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를 안고
  투명한 아침을 가져오리.

 

  김광규.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독문과와 서독 뮌헨대에서 수학.
현재는 한양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학과 지성>지에 작품을
발표(1975)하기 시작하여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반달곰에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등을 출간했다. 제1회 <녹원문학상> 제5회 <오늘의
작가상> 제4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 세계는 평이한 언어로
씌어진 일상시이면서도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 독자와의 통교 회복에 좋은
역할을 하였다.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갔고
  몇이서 춤을 추러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균. 1914년 경기 개성 출생. <동아일보>에 시 '야차'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자오선> 및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기림의 이론과 시작에 영향을 받고 '시는 회화다'라는
모더니즘의 시론을 실천, 회화성과 이미지 공간적 조형으로 이루어진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시집으로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등이 있으며,
1950년 이후 실업계에 투신하고 있다.

     추일 서정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ㅎ게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진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세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홀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설야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서리다.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날개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김광림. 1929년 함남 원산 출생. 본명은 충남이다. <전시문학선집>에 시
'장마'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동인지 <모음>과 시집지
<현대시학>을 발행했으며 제5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상심하는 접목> <심상의 밝은 그림자> <오전의 투망> <학의
추락> <갈등> <한겨울 산책>과 시론집 <오늘의 시학> 등이 있다.

     파리의 개

  애를 낳기보다
  차라리 개와 함께 산다는
  빠리의 여인들
  빠리의 개는
  낯선 사람을 짖지 않는다
  동족끼리 싸울 줄도 모른다
  유순하고 점잖키가
  퇴화한 어느 인종만 같다
  빠리의 개는
  이미 개가 아니다
  둔갑한 천사의 모습이던가
  불신시대를 사는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간다.
  문명의 한복판에다
  질끔 오줌을 갈긴다
  이권 앞에서
  쿠리게 똥을 싼다
  파괴를 모르는
  불독의 험상궂은 얼굴이
  진짜 형화인지도 모른다
  저주를 잊은
  세퍼트의 사나운 입술이
  정말 자유의 징표인지도 모른다
  말귀를 알아 듣는
  빠리의 개야
  네가 버린 짐승티를
  누가 가져갔는지
  지금 빠리에는 코제트나 말세리노만한 귀엽게 생긴 애들이
  떼지어 다니며 들개처럼 길손을 습격하고 있다
  다가오면
  밀어부치거나
  발길로 걷어차도 무방한
  누가 버린지도 모르는 악의 종자들이 있다


     석쇠

  1
  도마 위에서
  번득이는 비늘을 털고
  몇 토막의 단죄가 있은 다음
  숯불에 누워
  향을 사르는 물고기

  고기는 젓가락 끝에서
  맛나는 분신이지만
  지도 위에선
  자욱한 소연 속
  총칼에 찝히는 영토가  된다.

  2
  날마다 태양은
  투망을 한다.
  은어떼는
  쾌청이고
  비린내는
  담천과 같아.

  3
  나란히 선
  계집아이들의 종횡,
  질서의 꽃밭,
  머리를 갸우뚱,

  천상
  무봉의 하늘
  드리운 그물 속엔
  비늘 찬 인어가 한 마리
  헤엄쳐 오르다가
  그만 걸림직도 하다만.

 

  김광협. 1941년 제주 출생. 서울대 사대 졸업. <신세계>와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현재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 그의
작품 세계는 삶의 세계를 건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되어 있다.

     말씀

  칼 가세요
  칼을 가세요
  대낮에 거리를 가며
  칼을 가세요
  목소리도 시언 시언
  날이 선 목소리
  모든 집이 칼을 가세요
  녹이 슬고 무딘 칼을
  시퍼렇게 가세요
  모든 것이 원한이기보다는
  모든 것이 사랑이기에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칼을 가세요
  한 근 고깃덩일 탐낼 것이 아니요
  양심의 한 쪼가리
  그것이 귀하나 그것을 우러러
  칼을 가세요
  영원히 휘두를 칼을 가세요


  김광회. 1929년 충남 예산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섬세한 감성으로 절도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 <시원에의 연가>가 있다.

     피리를 불자

  아직도 남은 한 밤 낮이
  목이 마르다 피리를 불자.

  이삭들은 아직 덜 여물고
  열매도 풋내만 난다.

  우리들의 소망은 별밭의 꽃
  사랑도 저 문 밖에 지나간다.

  그리고 모두 멀리만 있지
  아직 반가운 대답은 없지

  우리는 어디에선가 따로따로
  높은 하늘밑 빈 땅위다.

  오늘도 한줄기 강물이 간다
  강물을 보며 피리를 불자.

 

  김규동. 1923년 함북 경성 출생. 연변의대 수업. <예술조선>에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1948). 시집으로 <나비와 광장>
<현대의 신화> <죽음 속의 영웅> 등이 있으며, 수상집 <지폐와 피아노>,
평론집 <새로운 시론> <문학 강좌> <어두운 시대의 마지막 언어> <한국의
명시해설> 등 다수의 작품이 있는 그는 사회성이 짙은 리얼리즘 경향으로
역사의식과 민중적 언어로써 새로운 시를 많이 발표했다.

     오는구나 봄이

  다행한 일이다
  봄이 오는 소릴 듣는 것은
  지난 겨울은
  너무 춥고 스산하여
  마음 놓지 못하고 살았거니
  이제 강이 풀리고
  나무에 파란 물이 오르니
  희망, 기쁨
  그런 것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만 같다
  생각해 보라
  희망이 없다면 무엇이 될건가
  여전히 캄캄한 세상 살아가는 건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봄바람 살랑대는 거리에 서면
  그나마 한 줄기 빛이
  잔인하게 등골을 어루만져 주는구나
  통일하자
  통일하자
  외쳐댄 소리도
  다시금 산울림 되어 들려온다
  이 혼란 속에도
  구정이라
  더러는 명절 기분을 내는데
  북으로 달리는 기차소리
  영 들리지 않고
  빈소리 외쳐댄 몸이 차라리
  형제와 조상님 앞에
  엎드려 잘못을 빈다
  무엇이 어떻게 됐다는 것이냐
  하루 하루 연명이나 하는 건
  삶이 아니다
  절대로 삶이 아니구나
  삼천리 강산 소리치고 일어설
  그날 없이는
  영광도 아니구나
  사십년 묵은
  분단의 가시 철망
  그대로 놓아둔 채
  떨리는 봄소식 듣는 건
  산뜻한 봄바람 속에
  소스라쳐 놀라는 건
  무엇 때문이냐
  오 가고 싶고나 고향 가고 싶고나
  북쪽 형제 있는 곳
  가보고 싶어라
  얼싸안고 울어보고 싶어라.


     곡예사

  가벼우나 슬픈 음악.
  관객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때,
  곡예사의 가슴엔
  싸늘한 바람이 스쳐 간다.

  아슬 아슬한 새 기술을 부리기 위하여
  파리한 얼굴의 여자와
  표정없는 구리빛 가슴의 사나이가
  줄을 타고 오를 때
  껌을 씹으며 담배를 피우며 과자를 먹으며
  얼마나 신기한 기대를 보내는 관중들이었던가.

  이런 상업일수록 인기가 있어야 하고
  또 새로운 멋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곡예사는
  오늘도 위험한 공간 속에 살아야 한다.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에로
  서로 옮겨 탈 순간과 순간.

  담배 연기 자욱한
  아득한 하늘 위에서
  아 저러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런 것은 벌써 잊어버린
  곡예사의 어저께와 오늘-

  하얀 손의 여자여
  곡예사여
  너의 입술에 어린
  떨리는 생명의 포말들을 삼키며
  아 인간은
  왜 이처럼 잔인해야만 하는가.

  원폭의 하늘처럼
  소란한 오늘의 기류-
  그 속에서 오히려
  네가 지니는 한오리의 질서가
  오늘은 무한한 기쁨처럼 나를 울린다.

 

  김규태. 1938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불문과 졸업. <문학예술>과
<사상계>로 등단하여 시집 <철제 장난감> <현대시 11인선>(공저)이 있다.
현재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중이다.

     갇힌 뻐꾸기

  이따금
  내 책상서랍에선
  뻐꾸기 소리가 난다.

  낡은 목재의
  어느 구석진 자리에
  새의 혼령이 남아 있었을까.

  경상북도 죽령부근의
  숲 속에서나 들릴
  뻐꾸기 소리.

  헐은 사무용
  책상 위엔
  핏발 잘 서던 날의
  내 벌건 손자국도 묻어 있다.

  내 절망을 소리내어 울던
  눈물 자국도 얼룩져 있다.

  속 쓰린
  내 추억의 반점들을 쪼아먹고
  대신 울어 주는 새

  무성했던 그 원형의 나무들에
  옮겨 다니며 살던
  옛날의 뻐꾸기 한 마리.


     졸고 있는 신

  하느님은
  요즘 계속 졸고 계신다.
  눈을 뜨고
  맑고 깊게 사물을 가늠해 볼 여유가 없다.

  옛날엔
  단지 밤에만 주무셨다.
  주무실 동안에는
  풀벌레까지도 함께 잠들어 꿈꾸었고
  자신도 흥건히 꿈 속에 빠져 들 수 있었다.

  어쩌다 마른 기침소리만 내어도
  아주 잠에 골아 떨어진
  땅 속의 두더지와
  아슬한 가지 끝에서 숙면하던 날짐승까지도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나도 그때 깨어 일어났다가
  다시 잠 들어야 했다.

  그때는 생물들이
  한결같이 하느님편이어서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요즘은
  너무 변괴스러운 일이 많아
  한 밤에도 잠자리를 펴지 못하고
  천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노인.

  하느님이 한낮에도 졸고 있는 이상
  우리는 모두 불면증으로 고생하게 된다.

 

  김규화. 1919년 전남 승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이상한 기도>가 있다. 현재 <시문학> 발행인.

     솔베이지 노래를 주제로 한 시

  -페르귄트의 말

  그러면 그대, 베틀에서 내려오게.
  우리들의 사랑은 저 빙산
  깊으디 깊은 살얼음 속
  영원한 청춘으로 갇히어 있으니.
  세월은 그대 베틀에서 날올을 짜며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 놓으며
  돌아온 영웅, 백발의 나에게
  한조각 꿈과 방랑의 지팡이
  회한의 가지 위에 걸어두게 한다.
  그러면 그대, 베틀에서 내려오게.
  우리들의 사랑은 저 들판
  한점 소리 없는 바람으로
  잠자다 깨어 있는 푸른 이마.
  영원 속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허깨비의 우리들.
  훠어이훠어이 춤이나 추어 보세.

 

  김남석. 1920년 함남 북청 출생. 동인지 <시와 시론> 편집부장을
역임했으며 시집으로 <이 산하를>이 있고 시론집 다수를 발표했다.

     길은 하난데

  길은 하난데

  산산하는 발길들아
  춥고 시장한 우리 거리일지라도
  종소리가 하나의 성전에 굳어지듯
  너와 나의 심장은 걷고 있노라.

  몹시
  출출하고 허술함이
  낙화일지라도
  낙화일 수 없는
  너와 나의 성전보다 굳은 가슴
  어버이의 종을 울리며
  하늘이 흐리어 어두울지라도
  노을빛보다 귀중한
  저 능선의 아침으로

  아아,
  3월에 꽃핀
  길은 하난데
  옆집 외등 밑을 허우적대지 말고

  빈 주머니에 손을 박고
  흩어져 까는 밤아!
  고달픈 청춘아!

  꽃피는 소녀의 남루한 지도가
  하이힐에 찢기는 고층 골목은
  이렇게 춥고 시장한 시간일지라도
  빙하는 흐른다.

  얼어붙은 가슴 그대로라도
  흐른다.

  <빠고다 함성>처럼이나
  찢긴 심장에 검을 울리며
  북을 울리며 산산치 말고

  소녀의 울음 귀담아 안고
  구름에 가린 햇살 안고
  종소리가 하나의 성전에 굳어지도록
  춥고 시장한 우리 거리가
  3월의 제비되어지도록

  흐르지 않으려나
  해빙이 오는 피안으로
  아아,
  너와 나

  길은 하난데.

 

  김년균.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서라벌 예대 졸업. 1971년 박목월,
이동주 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 <장마> <갈매기>
<바다와 아이들> <사람>이 있다. 그의 시는 짙은 서정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에 깔린 슬픔과 비애를 노래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문의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모두 오는데,

  창가에 서면 꿈들이 오듯
  버려진 생각들도 따라서 오듯

  강가에 서면 강물이 오듯
  강물의 줄기따라 세월이 오듯

  삼라만상을 이끄는 평범한 바람
  거리에 오듯

  모두 오는데,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가랑잎 떨어져서 길목에 지듯
  패어진 웅덩이로 빗물 스미듯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어디론지 어디론지 가고만 있는가.

 

  김남조. 1927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시집
<목숨>(1951)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자유문학협회문학상>, <한국
시인협회상>(1975)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 <김남조 시집> <겨울바다> <사랑초서>
<동행> 등이 있으며, 현재는 숙명여대 교수로 있다.

     목숨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 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읍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 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가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읍니다.


     범부의 노래

  1
  바다는 큰 눈물
  웅얼 웅얼  울며 달을 따라가지
  그 눈물 다 가면
  광막한 벌이라네

  바다는 그저 눈물
  눈물이 더 불어 누워 돌아오지
  그리곤 또 가네
  몇 번이라도 달 때문이네

  2
  이 바람을 어이랴
  실바람 한 오락지 살갗에만 닿아도 사람 내음에 절은 머리털 한 움큼에
열 손가락 찔러 넣듯, 진홍의 관능에 몸서리치며 내 미치네
  이적진 몷랐던
  이리도 피가 달아진 일
  아아 바람에, 바람에, 이 살을 다 풀어 주어야 내가 살겠네

  3
  사랑만으로는
  결코 배부르게 못해 줄
  지금 세상의 사나이들,
  신이 한 가지만을 주신다 하면
  나는 역시 한 남자를 갖겠다.

  패전한 국민이 소리를 모아 부르는
  국가의 절망과 그 소망을 품겠지.


     생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벌어지고 피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 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께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정념의 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이제금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것이란다.

  황제의 항서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기도 드린다.

 

  김달진. 1907년 경남 창원 출생. 호는 월하. 일제시 지방에 묻혀
시작생활을 해오다 해방후 <시인구락부>에 가입. 동양적인 인생관을
노래하는 것이 이 시인의 특징. 시집으로는 <청시>와 수필집 <월하수상>
외에 번역 시집이 있다.

     단장

  1
  아무 마음 없이
  나 홀로 여기까지 걸어 왔구나.
  숲 속은 좁은 산길 위에
  엷은 저녁 햇방울이 떨어져 있다.

  2
  몇 날을 두고
  아침 산보길에서 만나는 여인이기에
  그 이름이 알고 싶었다.

  3
  기다려 기다려도 비는 오지 않고
  쨍쨍 쪼이는 한낮 창 앞에
  멀리 어디서 포소리 들려 오더니
  건너 산에서 흰 연기 구름처럼 떠 오른다.

  4
  밝은 달빛이 가득 차 넘치는 넓은 이 마당
  별처럼 반짝이는 이 숱한 벌레소리 속에 서면
  해질녘까지 그처럼 시끄러이 놀던 애들의
  꿈 속에 벌어지는 화려한 놀이판.

  5
  아침 산 그늘이
  모시 적삼에 스미는 썰렁한 기운,
  아 이제 대지에는
  그 숱한 나뭇잎이 알고 모르고 꽃잎처럼 내리겠구나.


     체념

  봄 안개 자욱히 내린
  밤 거리 가등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는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
  혼자 정렬의 등불을 달굴 뿐

  내 너 그림자 앞에 서노니 먼 사람아
  우리는 진정 비수에 사는 운명
  다채로운 행복을 삼가하오.

  견디기보다 큰 괴롬이면
  멀리 깊은 산 구름 속에 들어가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주워
  싸늘한 입술을 맞추어 보자.

 

  김대규. 1942년 경기 안양 출생. 연세대 국문과 및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으로는 <이 어둠 속에서의
지향> <흙의 사상>과 산문집으로는 <시인의 편지>가 있다. 주지적인 작품을
썼던 초기를 거쳐 ^6 236^흙의 사상^356 3^이라는 연작시를 통하여
물질문명에 얽매인 삶의 현실적 고뇌와 문명비판적을 표현하는 경향으로
시세계를 전환하고 있다.

     사랑 잠언

  누구나
  몸에 걱정 하나
  마음에 병 하나를
  깊이 깊이 묻고 사나니.

  그 몸 아픔,
  그 마음 켕김.

  걱정도 그윽해지면
  영혼의 노래 되고,
  병도 잘 다스리면
  육신의 복음 되나니.

  거기에 이르는 길은
  오직 사랑뿐.
  그 밖의 다른 구원을
  얻으려 하지 말라.

 

  김동현. 1944년 충남 서산 출생. 구명은 기종. 공주 사범대학과 영남대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에로 문단에 데뷔(1977)한 그는 진솔한 자기 고백,
인생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의 모습을 보여 주는 한편, 정신의 심층에
동양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하는 시적 예지를 보여 주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 <새>가 있으며, 현재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바람이

  날마다 창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노라면
  바람은 매일 와서 무얼 빚고 있을까.

  부드럽게 쓸리는 나무들 위로
  맑디 맑은 무언가가
  열기를 여윈 서늘한 불꽃으로 피어 오르고
  가끔 새가
  불꽃 속을 날카롭게 날아간다.

  이 세상 아닌 어느 하늘에서도
  내가 보는 나무의 흔들림을 받아서
  나무는 저렇게 흔들리고
  거기 사는 이들은 눈이 맑아서
  나 대신 바람이 빚는 것을 보고 있을까.

  몇 굽이 몸살을 앓고 나면
  바람이 무얼 빚는지
  나도 알 수 있을까.

  이제 저녁을 먹었으니
  다만 고향바다를 내 안에 불러들여
  바닷가에 꽃게나 한 마리 놀게 해야지.

 

  김명수. 1945년 경북 안동 출생. 서독 푸랑크프르트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 제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월식>과 <하급반 교과서>가 있다.

     월식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욱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우리나라 꽃들에겐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김사림. 1939년 일본 대판 출생. 본명은 광수. 동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자유문학>을 통해 데뷔(1960)하여 자신을 찾는 진솔한
작업을 하고 있는 시인으로 <잎을 모아서> <바람의 비밀> <송짓골 우화> 등
시집이 있다.

     가을

  -송짓골 우화 6

  해마다 여름 내내
  박꽃이 지붕을 타고 놀다가
  이맘 때쯤이면 주렁주렁 열리던
  보름달만한 박들.

  꽹과리 징을 두들대며
  풍년이 왔다고 흥청거리던 동네,
  그런 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이맘 때면 가슴을 앓는다.

  할머니는 가마타고
  할아버지는 나귀타고
  시집 장가 들던 시절.
  소나무 그늘로 쉬엄쉬엄 갔다는
  소나무가 많아서
  청솔 그늘이 푸르러서 송짓골이라는
  그런 곳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는 많다.

  푸른 물줄기 낙동강이
  송짓골을 지키고
  동구밖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듯
  내 아버지의 내 아버지의 아버지쩍부터
  뿌리내려 사는
  경주 김씨 우리집.

  푸른 잎이 노랗게 되는 은행처럼
  노랗게 찌들은 얼굴을 하고
  도심지에서 살아가는
  내 주변의 사람들.

  푸른 하늘과 푸른 강물
  푸른 소나무와 청솔 푸른 바람
  그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송짓골 같은 고향을 품고 있는 나처럼
  그런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풍년가 울리는 이 무렵이면
  함께 가슴을 앓는다.

 

  김상억. 1923년 함남 문천 출생. 동국대학 전문부 문학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하여 데뷔하여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인간 내면의 서정성,
자연의 속삭임 등을 상징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특징. 제6회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 현재 청주대 조교수로 재직.

     성터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의지의 고독한 여백이었읍니다. 속으로 운 바위의
노여움이며, 그렇게 참은 이끼의 고요한 노래 더불어, 나는 성터에서
숨가쁘지 아니하였읍니다. 진작 그가 깃발을 묻고 황폐함으로 하여 그의
정력이 이념보다 더 아롱져 있는 곳. 허허히 산 이마에 휘불리면서 지평을
가꾸신 그의 시도가 있고자 한 높은 의미이며 일체였음과 같이, 나는 그의
태초의 자리에 나를 지우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김상옥. 1920년 경남 충무 출생. 호는 초정. <문장>에 추천,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시집으로 <초적> <고원의
곡> <의상> <목석의 노래> <삼행시> 등이 있다.

     백자부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김석규. 1941년 경남 함양 출생. 부산대 사대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서민적 삶을 토속적으로
노래하며 현실적 상황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윤리의식으로 비판을
던지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파수병> <늪에다 던지는 토속>
<닭은 언제 우는가> <남강하류에서> <대문을 열어 놓고>가 있다.
<경남문화상>을 수상, 현재 경남교육위원회 장학사로 재직.

     풀밭

  해 설핏하면 풀밭에 나가 뒹굴었다.
  힘 없고 가난해서 정다운 풀잎의 마을
  청솔가지 타는 연기 냄새
  뿌리쪽에서 숟가락 딸각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양잿물 먹고 죽은 사람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어두워오는 속에 하얀 이빨 드러나는
  아직 한 번도 이름 부르지 않은 풀꽃
  머리 위에 묻어 있는 노란 가루를 털어주며
  이 세상 가장 귀중한 목숨
  착하게 살아라. 오래 오래 살아라.
  여윈 볼이라도 마구 비벼대고 싶은 저녁 때
  자전거 뒤에다 어머니를 태우고 가는 중학생도 보인다.


     사랑에게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루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김양식. 1931년 서울 출생. 호는 작이. 이화여대 영문과와 동국대학원을
졸업. 제1회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 <정읍후사>
<작이시집> <숫 고양이 한 마리>와 수필집 <세계 시인과의 만남>이 있다.
현재 한국 타고르 문학회 회장.

     눈바람

  내가 펄펄 쏟아지는 흰 눈발에
  서투른 눈바람 나서
  너를 찾아 나섰더니

  먼 발치에 네 집 바라뵈는 고갯길을
  단숨에 뛰어오른 사슴의 숨결만큼
  내 가쁜 발길이 채 넘어서기도 전에

  너는 벌써 날 앞질러 눈바람 나서
  그 싱그런 하늘 바람 왼통 품에 끼고

  천년 푸르른 솔나무 위를
  학이 되어 휠휠 날고 있었다.


     조춘

  눈 내리는 아침
  솔잎의 시샘이
  연두빛 불꽃을
  훌훌 피울 적
  너는 살짝 제비목욕을 하고
  머리 뒤꼭지도 마르기 전에
  맑은 눈빛으로 내게로 온다.

 

  김여정. 1933년 경남 진주 출생. 본명은 정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청미> 동인이다. 그의 시는 사물의 내면을 궁극에까지
추구하려는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시집으로 <화음> <바다에 내린
햇살> 등이 있다.

     돌

  부산 태종대에서
  청옥빛 파도를 타고
  파도가 되던
  둘째놈 세째놈이
  해변에 밀려 와선
  청옥의 돌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돌밭에 솟아난
  사슴의 뿔을 만나고
  나는 십년 수절을 헐어버렸다.

  엄마의 황홀한 정사에
  둘째놈 세째놈이 곁에서
  들러리 서서
  바다 한 자락을 끌어다가 덮어주고
  덮어주고 있었다.

  파도도
  우리의 만남을 손뼉치며
  흰 이빨 내어 웃어주고 있었다.

 

  김영태. 1938년 서울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사상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세계는 현실과
이상 그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초극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각기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시집으로 <유태인이 사는 마을> <초개수첩> <객초> <북호텔> 등이 있다.

     호수근처

  그대는 지금도
  물빛이다
  물빛으로 어디에
  어리고 있고
  내가 그 물 밑을 들여다보면
  헌 영혼 하나가
  가고 있다
  그대의 무릎이 물에 잠긴
  옆으로, 구겨진 수면 위에 나뭇잎같이


     한 잔 혹은 두 잔

  시고 텁텁하고 쓴 잔 받으세요
  같이 사는 세월 받으세요
  한 잔 두 잔 석탄 백탄 받으세요
  말탄 고추 가루 가랭이 좆대
  이쁘다 이뻐 너는 이뻐 인마 너는 이쁘다 이쁘지 이뻐 받으세요
  양복쟁이도 한 잔
  한산모시 두루마기에게도 한 잔
  수염단 풍각쟁이 한 잔
  덕대같은 건너편 왈패에게 거푸 한 잔
  총독의 소리 오동추야 우리 구보에게도 한 잔
  이 거리 저 읍내에서 또 한 잔
  웃으세요 웃으세요 오래 웃으며 많이 많이 속으로 우세요
  개울가에서 멱 감다 한 잔 숲에서 한 잔
  연탄광에서 한 잔 뜻 있는 곳에 뜻끼리 두 잔
  이마를 맞대고 코가 비뜰어지게
  겹잔 처마밑에 날나리들이
  깜부기들 바지저고리 머리 위에
  근사한 달이 조명이네요
  조명 안주삼아 이판사판
  뜻 있는 곳에 열 잔


     비빔밥

  입맛이 달아날 때
  혀의 기능은 마비된다
  비빔밥이라는 밥은
  나물과 고추장에 발가락에
  기름을 발라 비벼먹은 밥
  찝찔한 눈물도 이 한숨
  비빌 게 남아 있다면


  김영석. 1945년 전북 부안 출생. 경희대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1970)와 <한국일보> 신춘문예(1974)에 시가,
<월간문학>에 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세계는
인간의 고뇌 속에서 새로운 각성을 불러일으키며 도덕적 의지와
형이상학의 세계를 노래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현재 배제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감옥 3

  우리들의 감옥은 너무나 멀리
  서로 떨어져 있다
  걸어도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적막한 모래의 시간
  전화도 없고
  별빛처럼
  감옥의 불빛만 아슬히 멀다
  별 하나 감옥 하나
  별 둘 감옥 둘
  별 셋 감옥 셋
  ...

 

  김요섭. 1927년 함북 나남 출생. 동화작가로 출발하여 60년대부터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동양적인 토속성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는 <죽순>과 <현대시> 동인이기도 하다. 시집으로
<체중> <국어의 주인> <빛과의 관계> <얼굴이 없는 얼굴> <달을 몰고
다니는 진흙의 거인> <은빛의 신> 등이 있다.

     음악

  태초의 말씀과 함께
  하늘에는 불과 음악이 있었다
  하늘 기득히 울며 퍼졌던 음악
  사람들을 찾아 마을 위로 거리 위로
  휘날리며 오는 동안
  소리는 스러지고 눈송이가 되었다

  나뭇 가지 위
  음악의 흰 그림자로 앉은 눈송이
  눈송이로만 있기에는 심심했다
  나무 속 심줄을 타고 녹아드는
  뿌리 끝에서 소리가 나고
  흙들이 귀를 기울였다

  어느 태초의 아침 같은
  아침
  대지는 풀포기를 토하면서
  허공에다 새를 날렸다
  음악처럼


     꽃

  손을 대도 데지 않는다
  그 불은
  이슬이 떨어지면 더욱 놀라는
  그 불은
  태고적 이야기에 향기 입힌다
  그 불은
  태양도 꺼트리지 못한
  이슬의
  그 불은
  별빛의 씨 땅위에서 눈을 떴다
  그 불은
  꽃

 

  김용진. 1939년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형상파시학>이 있으며, 시어의 공깐성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소네트

  천 년 버리기 싫은
  쪽삧 내 마음이라 하여도
  어찌하면 유월
  모래밭에 묻을까 내 사랑.
  바람 설찬 그리움.
  항아리처럼 갓도는 공허.
  진종일
  이마 앞을 보채다가
  돌아 가는 아지랭이.
  꽃이란 꺾이면 
  해바라기라 하지만 
  봄처럼 
  사슴처럼
  눈짓 아름찬 별이고저.

 

  김용팔. 1914년 출생. <현대문학>을 통해 1953년에 데뷔한 그는 감성의
조화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 시풍의 특징을 갖고 있다.

     기원

  바람이 울 때마다 가랑잎이 전율하면
  나의 가난한 마음이 당신의 문을 두드립니다.

  언젠가는 메아리도 없이 기화해 버린
  내 가까운 사람들을 옆에 보면서

  머언 뒷날 어느 하늘 가에서
  아내와 만날 것을 믿어보는 건
  이 허전한 마음이 마지막 남는
  어쩔 수 없는 목숨의 소리입니다.

  투명한 달빛인데
  마음마저 얼어 붙은 밤이 옵니다.
  스스로를 달래보는 저 이승은
  목탁소리 코 골리며 조나 봅니다.

  어김없는 윤회 속에 내일은 올 것인데
  아 당신의 소리를 기다립니다.

 

  김원호. 1940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흐트러지지 않는 언어의 소박성과 단아함으로
시작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 시집으로 <시간의 바다> <불의 이야기>
<행복한 잠>이 있다.

     과수원

  1
  빈센트.반.고호의 ^6 236^과수원^356 3^을 아시는지요.
  도깨비도 무서워 할 고목뿐인 올리브 숲이었지요.
  불타다 남은 자리보다 더 쓸쓸한 곳이었지요.
  어쩌면 내가 이런 숲을 생각하는지
  나 자신 올리브숲의 도깨비가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

  2
  벌레 먹은 가지를 하나씩 따 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인 것을 잊어버리고
  물 익은 과일이 달린 과수원의 나무가 되고
  나도 가지에 벌레 먹은 과수원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고독뿐인 이 숲이 도깨비보다 덜 무서워지는군요.

  3
  똑,똑, 가지꺾는 소리뿐
  이 과수원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혹시 이런 곳에서 몸에 배인 병이나 씻어 버리며
  도깨비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산골보다 더 조용한 것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4
  잔잔하고 푸른 먼 이오니아 바다처럼
  쓸쓸한 여름날 같은 하늘도 보입니다.
  조용한 원색 속에서 생활을 하며
  향기 푸른 과일밭에서 일을 하시면
  어느 새 병도 깨끗이 나으실 것입니다.

  5
  푸른 달밤에 과일이 익을 때
  과수원 옆에 초막을 짓고 지내시면
  단물 고인 과일나무가 되시겠읍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고 싶으실 땐 언제라도 돌아가시지요.
  그래도 우리 이 과수원에서 도깨비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조카딸에게

  너를 아이로만 생각하던 건
  바로 내 잘못
  어느새 어른의 눈짓을 배워
  섬세한 어깨를 슬쩍 내뵈는구나
  춘정기의 도드라진 가슴
  젖은 눈
  누가 너에게 작은 허리띠를 거넬까
  머리의 장식을 좀 숫되게
  미로의 껄음걸이를 하지 말고
  팔짱 낀 의젓한 모습에
  나는 할 말이 없구나
  숨가쁘게 뛰는 심장
  한 마리 파닥이는 새
  공중에 도는 피리소리를 좇아
  너는 날아가려 하는구나
  좀 이상해
  옮기는 정은
  벌써 계절이 바뀌는데
  혓바닥에 느끼는 산초 열매처럼
  언제나 너는 애띤 미련이구나.

 

  김유신. 1944년 경기 안성 출생. 안성농고 졸업. <현대시학>에 시가
추천되어 시단에 데뷔한 그는 농촌의 순수함과 자연에로 동화되어 나오는
시심의 세계로 작품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시인. 현재 안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시집으로 <바람에 기대어>가 있다.

     천리향

  차가운 땅에 피어
  눈속에 뜨거운 잎을 펴는
  그 속을 나는 안다.

  향의 바다
  출렁이며
  끓어 오르는
  혈기,

  한쪽 가지로만 뉘워 놓는 바람.
  겨울 한나절
  순한 짐승들의 핏발선 눈동자로
  솟아나는
  너의 열망,

  멀리서
  너의 향그러움 듣는다.
  바람에 흐르는
  너의 영혼
  뜨거운 몸짓을 본다.


     바람에 기대어

  서운산을 넘어
  가슴에 젖어오는
  빗방울.

  푸른 잎 속
  화안한 꽃송이 터지는
  흙의 꿈.

  속살까지 저려오는
  빛의 향기

  풋과일 성그는
  바람에 기대어

  한종일 한종일 빗소리 재운다.
  밤 깊도록 빗소리 재운다.

 

  김윤성. 1925년 서울 출생. 호는 조운. 동인지 <백맥>을 운영하면서 시,
소설을 발표했다. <사상계> <시문학> <현대문학> 등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산길> <예감> <애가> 등이 있다.
<현대문학> 주간을 지냈으며,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다.

     나무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홤금색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다.
  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졸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따.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혼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고 한다.


     애가

  담장을 끼고 기어오르던
  덩굴이
  담장 위에 와서
  헛되이 허공만이 휘젓고 있다.

  이 소리 없는 고요의 절규

  썩은 장미가지 끝에
  기척도 없이
  앉아 있던 잠자리가
  저 혼자 후르르 날아 오른다.

  영원한 한숨의 포근한 햇살.

 

  김윤희. 1939년 경남 진주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
출신으로 전통적 서정성에 바탕을 두기 보다는 존재에의 탐구나 생명의
내면적인 고통을 담고 있는 시를 쓰고 있다. 시집으로 <겨울방직> <소금>
<오직 눈부심>이 있다. 현재 <여류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첫눈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인 지 석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은 없지만
  첫 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만

  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김재원. 1939년 서울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시 이외에 다수의 서사적 에세이를 발표하고 있다. 현재 <여원>의 발행인이다.

     몸 부딪치는 비둘기

  아내는 모를 것이다.
  그 앞에선 유일의 왕자
  우주의 제1조인 내가
  출근시간 5분전
  회사 근처의 횡단로
  황새처럼 꺼부정한 신체로
  시계 보며 뛰어서 건너가는 것을.
  인생은 뛰어가도
  그렇게 가끔 지각하는 것을.

  아내는 모를 것이다.
  그에겐 두 번째 아빠.
  제 그림자 말고는 둘째인 내가
  내 키보다 5분 낮은
  어느 장관의 비서실,
  빼랑빼랑한 말투 대신 서류를 읍하고
  눈치 보며 힐끔힐끔 숙이는 것을.
  인생은 그렇게 절을 해도
  가끔씩 나보다는 상전인 것을.

  그러나 아내는 알 것이다.
  그대하고, 또 하나 득남의 셋이서
  세 간짜리 전세방
  착실한 오욕으로
  시어머니가 사시는 구에
  문패라도 걸려면 야근을 하고
  인기보다 싼 글을 써야 하는 것을.
  인생은 받은 명을
  득남의 몸에 묻어 놓고 가는 것을.

  구공탄으로 꽃을 피우고
  눈물로 협박하는
  아내는 아는 것, 모르는 것 합쳐서
  내 인생을 빼고 더해 제자리에다
  묶어놓고 정착시켜 가장이게 하고
  양복 저고리에 단추되고 포케트 되어
  심심한 낮, 대견스런 밤을
  단둘이서 우리는 몸 부딪는 비둘기.


     입만 다물면야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도둑질처럼 배운 취미는 함구 무언
  입만 다물면야
  세상은 산뜻합니다.
  갈빗대 들춰낸 내 허파를
  돌덩이로 내리찍는 아픔은
  함구 무언의 휴유증이지만
  어머님.
  이발사가 된다면야
  소리칠 갈대밭이 있는 게 야단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도둑질처럼 배운 취미는 함구 무언.
  입만 다물면야 남의 세상은
  산뜻하고 고귀한 꽃밭입니다.
  아, 그래도 입만 다물면
  쑥밭인 내 세상이 안스러운 어머님.

 

  김정웅. 1944년 경기 김포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동시대 시인들이 해결해야 할 생활의 일면들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더욱 더 선명한 목소리로 시세계를 형성해 가는 시인이다. 현재
농장을 경영하면서 시작에 전념하고 있다.

     배우일지 5

  멀리 수평선을 가로막으며 고딕체로 누워있는 긴 봇둑, 붉게 타는 나문재
질펀히 깔린 간척지의 갯바닥, 조수가 밀지 않는 갯고랑, 폐선 한 척-
공중에 뻔쩍 들린 고물이 아직도 녹슨 닻줄에 매어 있다.

  연일 힘 없이 부는 바람이
  낡은 밧줄이
  부러진 마스트에 칭칭 감겨 있다.

  해가 바뀌어도 물러가지 않는 몇 개의 황혼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조심스런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무언극의 저쪽에서 가늘게 떨린다.

  들린다, 들린다, 안 들린다.


     돌아온 편지

  산 하나를 헐어낸다.
  한 삽을 들어낼 때마다
  들어내는 힘의 깊이로
  발밑에 소인 찍히는 발자국

  다른 한 삽을 뜨기 위하여
  비켜서면
  그 자리에 남은 어설픈 그림자가
  삽을 든 채로 나를
  노려보고 서 있다.

  내 발자국 파내기 위하여
  산을 헐어 내린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대지의 본향은 얼마나 되나,
  발자국이 또 남는다.

  진종일 산을 헐어 내린다.
  진종일 발자국이 쌓인다.
  날이 저물면
  저무는 하늘의 깊이 만큼 헐려 있는 산
  저무는 하늘의 깊이 만큼 쌓여 있는 산
  아아, 되돌아 온 편지처럼 부끄러운 산.

 

  김종길. 1926년 경북 안동 출생. 영국 세필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
시집 <성탄제>로 문단에 데뷔하여 주지적 경향의 선명한 이미지에 주력한
시인. 시집으로 <하회에서>와 시론집 <진실과 언어>가 있다.

     고고

  북한산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밤 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만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로도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미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하회에서

  냇물이 마을을 돌아 흐른다고 하회.
  오늘도 그 냇물은 흐르고 있다.

  세월도 냇물처럼 흘러만 갔는가?
  아니다. 그것은 고가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여
  오늘은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다.

  그것은 또 헐리운 집터에 심은
  어린 뽕나무 환한 잎새 속에 자라고,
  양진당 늙은 종손의 기침소리 속에서 되살아난다.

  서애대감 구택 충효당 뒷뜰,
  몇그루 모과 나무 푸른 열매 속에서,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 중인
  유물전시관 건축공사장에서
  그것은 재구성된다.

 

  김종원. 1937년 제주 출생. 서라벌예대 및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문학예술>과 <사상계>를 통하여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 <강냉이 사설>이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환상과 현실의 조화, 주지적 서정과 토속어의
형상화를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조선일보 주간부에 근무.

     달팽이

  처음
  그의 궁전에는
  우수에 잠긴 달이
  가난히 떠올라 갔다.

  이윽고
  차다찬 숨그늘을 이루며
  아득한 지층을 향하여
  한 매듭 기어오른 그는

  온 무게를 등에 지고
  오직 금진 제 사랑을
  소리 없이 갈아 가고 있었다.

  이슬째 미끄러진 울타리에
  사과나무
  한
  그
  루.

  오늘 타고난 이 터전으로
  한 마디 우화를 모종해 나온
  그는

  아무도 열어 보지 못한 탑 안에
  어느 새
  이파리가 되어 가는 것이다.

 

  김종해. 1941년 부산 출생. <자유몬학> <경향심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장편 서사시
'판우, 일어서다'로 제28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문학세계사> 주간이다. 시집으로 <인깐의 악기> <신의 열쇠> <왜 아니
오시나요> <향해일지> 등이 있다.

     향해일지.18

  아구란놈에대해이야기하고자한다.아구란놈이해진에서입을벌리고물길을
가고있을때는오징어.전광어.칼치.고등어.가오리.게따위가통째로들어와뱃
속에쌓인다.힘없고왜소한것들이눈을뜬채삶의본전까지아구의뱃속에상납해
버린다.철벽위장을가진바다의낡강도아구란놈이빠르게물길을가고있을때,불
쌍한것들아무력한것들아가급적밑바바닥에더욱머릴쳐박고소리내지말라.
  나는확신한다.바다의날강도아구란놈이반드시이도시의어느곳에몇백마리,
몇천마리가눈빛내며서식하고있는것을,이도시의가장기름진물목에서음흉하
게덫을놓아두고있는것을.
  허전한 저녁나절
  종로에서 입을 벌리고 앞으로 앞으로 물길을 나
  아가면 아아, 내 뱃속에 와 쌓이는 것들.
  몇 잔의 소주와 몇 잔의 적개심.
  종삼 아구탕집의 아구찜을 어금니로 물어뜯고 뜯으며
  씹고 또 씹을 분이다.

 

  김지하.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졸업. <시인>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후 어두운 시대를 가로질러 인간과 세계의 한
가운데서 온몸으로 몸부림쳐 온 시인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의
(1975)과 국제시인협회의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1981)했다.
시집으로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대설 남>과 이야기 모음집 <밥>
이외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한 민중시인이다.

     황톳길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란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빈 산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 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네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향. 1938년 경남 양산 출생. 서울여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했으며
한양여전에 교수로 재직중. <여류시> 동인으로 쩨1회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병실> <사육제> <검은 야회복> <속의 밀알> <빛과
어둠 사이>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 평범한 풍경이여

  겨울 둥지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눈이 생각하는 만큼의
  풍경들이 긴장해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풍경은 제 편에서 미리 미안해 한다
  점점 크게 뜨고 따라가는
  나의 눈에
  머뭇 머뭇 안개를 따라 보내며
  풍경이 하나 둘 미안해 하며
  안개 뒤로 몸을 빼돌린따

  우우우 저희끼리 모이는 잎진 나뭇가지가
  가령 저 안개를 벗고 나와
  사과나무는 사과 아닌 앵두 열매를
  매화 나무엔 매화 아닌 진달래꽃을
  피우는 일이라도 해 낸다면
  나는 하루 열 번쯤
  창문에 붚어 서서 신명이 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독하게 정상인
  구부린 허리 얄팍한 안개뿐
  갈곳도 없는지
  자꾸 내 눈에만 들어오는
  안개 뒤에서 미안해 하는 나무들의
  이 평범한 풍꼉이여.

 

  김창영. 1922년 경기 강화 출생. <신시대>에 시 ^6 236^조광^356 3^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후반기> <다이알> 동인으로 엔솔로지
<현대의 온도>에 참여했다. 시집으로 <상아환상>이 있으며 시각적 입체적인
추상의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조형하여 현대화하는 시의 방법론을 추구하고
있는 시인.

     부릅뜬 태풍의 눈

  기억은 애매하다. 그리고
  또 좀 모자랐다.
  그래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든
  여자는 레이즈비언을 자처했단다.

  여자와 나는 팝콘 한 봉지를 사들고
  어느 한계, 그 꼭대기를 향하여
  에스파니아식 나선형 층계를
  자꾸 올랐다.

  그 곳, 하지선이 가까운 한낮의 절정
  그 절정 허리춤으로 깔아 뭉개진
  우리의 표고, 그 하늘의 한껏을
  구름은 로코코풍 과거를 뭉뚱거려
  지구 바깥
  먼 대류권을 흘렀다.

  그래 지금 어디 쯤에서
  부릅뜬 태풍의 눈,
  비바람 전부를 장전한 채
  밝음, 너를 거역하는
  어느 아열대의 해일이더냐?

  -그게 무슨 상관이죠. 우라와...

  너와 나 2인층의
  저기, 하얀 공백의 모서리
  낮달 반 쪼가리 해골바가지
  부릅뜬 여자의 눈. 눈.
  태풍의 그 눈.

  -우리는 어쩌자는 거죠.

 

  김창완. 1942년 전남목포 출생.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반시> 동인으로 활동중인 그의 시세계는 강직한 남성적
시정신을 시 속에 용해하고, 서민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인동일기>가 있다.

     수유리의 침묵

  꽃샘바람 불리라 미리 알았다 해도 피고야 말
  진달래 무더기로 져 길 위에 나뒹군다.
  짓밟혀도 아프단 말 못하는 꽃잎 짓밟고
  손등으로 눈 비비며 황사속 더듬어 수유리 찾아가니
  꽃샘바람은 좁은 내 어깨 다시 움츠리게 하고
  말라붙은 입술도 트게 한다 그러니 침묵해야지.
  저물녘 두꺼워지는 산그늘 속으로 들어가는데 나에게
  내 키보다 훨씬 큰 그림자 앞세우고 돌아오는 나에게
  그러니 침묵해야지 아직은 침묵해야지 일러 주는 이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이냐는 물음에조차 입 다문다.
  돌에 새긴 그대들의 주먹 만큼 내 주먹은 단단하지 못하고
  돌에 새긴 그대들의 가슴 만큼 내 가슴은 뜨겁지 못해
  쓰다듬어 보아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내 손바닥엔
  감옥에서 보내온 아우의 편지가 구겨져 있을 있을 뿐
  형님, 형님이란 말이 돌멩이처럼 날아와 나를 때린다.
  작은 돌멩이들아 너희가 왜
  날아가 새 되지 못하고 떨어져 뒹굴며
  이 외면당한 변두릿길에서 짓밟히고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침묵해야지
  돌멩이들조차 그렇게 일러주는 수유리
  짙어지는 어두움.


     돌멩이

  척박한 땅일수록 여럿이 묻혀
  개간의 괭잇날을 완강히 거부하던
  너는 한때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던 네가 어디를 떠돌이로 다니다가
  고향 버린 막벌잇군들만 모여 사는
  이 변두릿길에까지 굴러와서
  취한 사내들의 발부리에 채거나
  리어카아 바퀴에 밀리거나 하면서도
  너는 그들과 같이 살고자 원한다.
  흙먼지 뒤집어쓴 채
  더러는 개굴창에 처박힌 채
  추워도 절대로 떨지 않고
  더워도 땀 흘리지 않는다.
  할머니 좌판 위에 내리쬐는 햇살
  순대집 나무 의자에 내려앉는 그늘
  그들이 조금씩 조금씩 희망을 포기하고
  순종조차 조금씩 조금씩 포기해 버려
  아무 가진 것 없는 맨손이 되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너를 움켜쥐리라 믿는다.
  너는 날개 없이도 날 수 있고
  거만하게 번쩍이는 유리창을 깨트렸고
  눈부셔 바로 보지 못하던
  넓고 환한 이마도 깨트렸다.
  겨울이 아무리 길고 추워도
  네가 묻혀 있던 이 땅의 어느 어덩 하나
  어깨 움츠린 걸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김춘수. 1922년 경남 충무 출생. 사화집 <날개>에 '애가'를
밢표, 이어 <죽순>에 시 '온실'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릴케의 영향을 받은 그의 초기시에서 점차 산문적인 시의
형식으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는데, 시집으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꽃의 소묘> <구름과 장미> <늪> <타령조 기타> 등이 있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숴진 네 두부는 소스라쳐 30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따.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 앞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1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따.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쉬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 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 세 살은 잡히는 것 한낱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접어든다.
  기억의 분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주일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강에 살엏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쥬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의 염염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늪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같은 것, 물장군같은 것,
  거머리같은 것,
  개밥 순채 물달개비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혼령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처용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뽄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김해강. 1903년 전북 전주 출생. 본명은 대준. <조선문단>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다.
<시건설> 동인이며 <전북문화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청색마>(공저)와
<동방서곡>이 있다.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학도 아니면서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을 모르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날만 새면 뭇 참새
  떼지어 지절대도
  조으는 채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비바람
  번개가 날리고 우뢰가 흘러도
  천 년인 양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오욕과 허화의 도가니 속
  어지럽고 시끄러운 실의의 나날에도
  한가한 손님같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어디를 가나
  시장마다 악화가 판을 치고
  흙탕물 도도히 거리를 휩쓸어도
  오연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해는 빛을 잃고
  꽃밭은 향기를 잃고

  눈이랑 무너지듯
  하늘은 무너져도 무너져도
  으젓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금촉 화살에 심장이 꿰뚫려도
  끝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징그러운 비늘에 온 몸이 휘감겨도
  그저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흙 썩는 냄새만
  코를 찌를 뿐
  바위틈 콸콸 샘 솟고,

  하늘 한 자락 파랗게 깔린
  아름다운 해뜨는 동산
  삼삼한 솔밭도 아닌데

  춤 너울너울
  빛 풍요로운
  눈부신 아침도 아닌데

  언제나 고고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도 못추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김형영. 1944년 전북 부안 출생. <문학춘추>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데뷔.
<칠십년대> 동인으로 활동한 바 있는 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단형시의 구조
속에 용해하는 독특한 동물시편들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침묵의 무늬>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라를 친다>가 있고, 현재 샘터
기획실장으로 있다.

     여우

  흰 두루마기도
  장죽도 없이
  도사가 된 백여우야
  어둠 속에 길로 서서 네가 기다리는 것,
  이젠 다 둔갑해서 너를 노린다.

  대지의 이름으로 킹킹거리며
  킹킹거리며 너를 노리는
  그들은 가졌다
  이빨과 꼬리를,
  백개의 얼굴을,
  그들은 가졌다
  죽일 수 있는 권리
  더 만족할 만한 법을.


     모기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 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김혜숙. 1937년 강원 강릉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 '문'
'여담' '광화문 네거리' 등이 있고 현재 시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딸에게

  걱정하지 말아라
  광화문이 넓어진다
  을지로도 넓어진다
  걱정하지 말아라

  어젯밤
  밤새도록 네 잠자리를 어지럽히던
  이제는
  꿈을 깨어라
  소경의 눈
  그 눈을 또 감고 히히거리는
  원수의 늪을 피하여

  아! 네가 흘리는 눈물은
  순백의 꽃이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종로가 넓어진다
  을지로도 넓어진다
  걱정하지 말아라

 

  김후란. 1934년 서울 출생. 본명은 형덕. 서울대 사대 재학시 전국학생
작품모집에 소설로 입상한 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청미> 동인이며 <월탄문학상>을 수상(1977)했고, 시집으로는
<장도와 장미> <음게> <어떤 파도> <눈의 나라 시민이 되어>와 수필집
<너로 하여 우는 가슴이 있다> 등이 있다.

     설야

  흰 눈이 지상을
  깨끗이
  덮는 날은

  대지의 침묵이
  흰 눈에
  겁탈당하는 날은

  절반쯤 감은
  신부의 눈으로
  이 허구를 감내하는 날은

  강물도 목이 잠긴
  유연한 수묵화 한폭.


     포도밭에서

  내 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면
  입 안에 가득 고이는
  감미로운 후회같은 것.
  흑진주, 네 곤혹의 눈빛을 피해서,
  넝쿨 사이로 빠져나오면
  짙은 방향
  어깨 너머로
  앵도라진 눈을 모으네.

 

  나태주. 1945년 서천 출생. 공주사범대 졸업.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제3회 <흙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전원적 서정이
생명 감각과 결합되어 자연애와 인간애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시집으로 <대숲 아래서> <누님의 가을> 등이 있다.

     대숲 아래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 네 얼굴이 어리고
  밤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이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모두 내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찌기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낭승만. 1933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졸업. <문학예술>과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는 <북녘 바람의 귀순>
<양수리> <한비가>가 있다. 현재 한국불교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으로
있는 그는 뇌졸증으로 쓰러져 반산불구의 몸으로 시작 생활을 하고 있다.

     가을의 기도

  뜨거운 여름날의 강물소리를 보내며
  가을 풀꽃들과 함께 죽게 하십시오.

  아무 수확이이라곤 없는, 떨리는
  손바닥뿐입니다.

  그 주위로는 노을이 나리게 하여
  가늘은 벌레소리와 함께
  머리 위를 지나간
  찬란한 가을비 소리를 잊게 하여 주십시오.

  이 조그만 영토에 그대로 애잔할
  한 가을 풀꽃의 뿌리밑을 흐를
  맑은 물소리로 죽어지고
  짙푸른 하늘 아래 나무가지마다 눈부신 과실의 빛으로 죽어져서
  당신에게 드리는 제단 앞에 목메어 쓰러지겠읍니다.

  바람에 불리는 나뭇잎으로 부서져
  땅 속에 깊이 묻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흐느껴우는 겨울엔 두터운 지층 위를 강설하면
  죽어진 버레의 노래를 되살리며, 가슴 속으로
  마구 뜨거운, 파도치는 목숨의 피를 조양하는 것입니다.

  온화한 빛깔들로 취하게 하여...
  가을엔
  가을 풀꽃들과 함께 죽으며
  미소짓게 하십시오.

  눈물나는 죽음의 이야기 속에 다시 살아날
  그들이 잠들어 누워있는 무덤 위에, 더 슬픈
  사랑을 주십시오.
  아침에는 눈뜨게 할 종소리를
  뜨거운 드거운 빛을 던지십시오.

 

  노영란. 1924년 경남 함양 출생. 일본제국여자전문학교 졸업. <등불>
동인이며 모더니즘의 수법으로 현대인의 의식풍경을 펼져 보인 작품을
써왔다. 시집으로 <화려한 좌표> <흑보석>과 창작찝 <마지막 향연>이
있다.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에 재직중이다.

     초야

  정열의 채단으로 커어튼을 내리어라
  헤리오드로오프의 향내 같은 수줍음

  비단 숨결은 보랏빛 연륜을 수놓는다

  엷은 밤빛에 빛나는 너의 얼굴은
  오오 이밤의 주피터어

 

  노향림. 1942년 서울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데뷔한 그는 <한국시> 동인으로 참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유년' '여름밤' '바람부는 날'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가을 편지

  안녕하세요? 가을입니다.

  발끝까지 풀려버려 허한
  빛으로 흩날리고 있군요.

  발 밑에
  흔적처럼 남은
  물이나 쓸쓸함.

  기댈 곳 없는 나는 재채기를 쏟아냅니다. 그동안 기대던 가난한 식구와
낡은 가구와 해골같은 한 편의 시를 버리고 등언저리를 모두
비워놓았읍니다. 아무 한 일 없이, 누구도 만날 일 없이 가을과 나는
한몸이어서 다 해진 하늘, 마른 햇볕은 자꾸 쏟아냅니다. 스물스물
빠져나가던 가을은 다시 무엇이 되어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는지 어디
들판에라도 적시고 있는지 선천성 약질인 폐를 부풀리는 나무 곁에 누워
있는지. 두리번대도 온통 가을뿐이예요. 씌어질 때 씌어지더라도 씌어지지
않는 단 한줄 우리 고통, 안녕!

 

  마종기. 1939년 일본 동경 출생. 연세대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도미,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있다. 1959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그는 의사의 체험, 외국생활의 체험들을 아름답고
산뜻하며 착한 서정으로 수용, 맑은 지성과 세련된 언어로 승화시키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두번째 겨울>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등이 있고
<한국문학작가상>(1976)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가 9

  1
  전송하면서
  살고 싶네.

  죽은 친구는 조용히 찾아와
  봄날의 물속에서
  귓속말로 속살거리지,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

  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
  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 끝을
  몰래 배우네.

  2
  의학교에 다니던 5월에, 시체들 즐비한 해부학 교실에서 밤샘을 한
어두운 새벽녘에, 나는 순진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네. 희미한 전구와
시체들 속살거리는 속에서, 우리는 인육 묻은 가운을 입은 채.
  그 일년이 가시기 전에 시체는 부스러지고 사랑도 헤어져, 나는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으면서 실내의 방황, 실내의 정적을 익히면서 걸었네.
홍차를 마시고 싶다던 앳된 환자는 다음날엔 잘 녹은 소리가 되고 나는
멀리 서서도 생각할 것이 있었네.

  3
  친구가 있으면
  물어 보았네.

  무심히 걸어가는 뒷모습
  하루종일 시달린 저녁의 뜻을.

  우연히 잠깨인 밤에는
  내가 소유한 빈 목록표를,
  적적한 밤이 부르는 소리를.

  우리의 내부는
  깊이 물 속에 가라앉고
  기대하던 그 웃음을
  물어 보았네.


     연가 12

  1
  이렇게 어설픈 도시에서 하숙을 하는 밤에는 월트디즈니의 장편
만화영화나 보자. 하숙이 허술해서 몽땅 도둑을 맞았으니 온돌을 때는
이 극장이 격에 어울리지. 총천연색의 세상에서 나도 메뚜기가 되어 보면,
밖에는 눈이 그칠 새 없고 혼자 보고 혼자 오는 발이 시리다. 친구야,
총천연색의 메뚜기가 되어 살자.

  2
  도서관을 돌다가 무심결에 호흡기 내과책 한 권을 뽑았더니, 겉장에는
알 케이 알렉싼드리아의 싸인이 있고 철필로 쓴... 보스든
메서츄세츠스에 1879년 8월 2일. 1879년 8월 2일은 날씨가 흐렸다. 흐려진
철필글씨, 무덤 속에 있는 내과 의사 알렉싼드리아의 손작국을 유심히
본다. 냄새라도 맡아서 코에 기억해 두자. 1966년을 내 책에 기입하고 나도
훌륭한 내과의사가 될 것이다.

  3
  현관이 있는 집을 가지면, 소리 은은한 초인종을 달고, 지나가던 친구를
맞으려고 했었지. 파란 항공엽서로는 연상 편지를 쓰면서 겨울을 사랑하고,
테없는 안경을 끼고 수염을 조금만 키운 뒤,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헷세의 아우구스투스를 읽으려고 했었지. 이제 당신은 알고 말았군. 길어야
육개월의 대화만이 남은 것 육 깨월의 사랑, 육 개월의 세상, 육 개월의
저녁을, 그리고 나에게 남은 육 개월을, 육 개월의 눈물을 알고 말았군.

 

  마종하. 1943년 강원도 원주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했으며 삶의 탄력과 미래의 꿈,
즐거운 예감을 노래한 시인으로 시집 <노래하는 바다>를 갖고 있다.

     비가

  푸른 물에 떠 있는 구름이 울리네.
  나를 흔들어 울리네.
  물의 기류가 켜켜이 쌓이는
  이 길게 뻗친 공간, 냇가에서
  나는 잠긴 채 하늘을 보네.
  저 포플러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바람,
  나의 눈은 어리둥절 떠 있네.
  왜 모든 것이 그리 막막하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이며
  흐리멍덩한 웃음 속에
  눈알을 묻고 사는 일이며
  이 정신 나간 시대에
  나는 물 머금은 개천의
  자갈 바닥이나 들여다 보며
  온 몸에 햇빛이나 칠해 보네.
  칠하면 칠할수록 살갗은 벗겨지고
  벗겨지면 없어지는 몸.
  바람은 물 위를 흐른다.
  하늘 한가운데 걸리어 퍼지고
  간간이 빛나는 눈물이나 떨구며
  구름처럼 풀려 가는 몸.
  울음 가득한 푸른 하늘 아래서.


     배꽃이 피면

  배꽃이 피면 내님은 돌아올까
  은의 월쓰 반짝이는 달빛 속에
  그대의 웃는 이빨 차고 시려서
  배꽃이 피면 강물도 푸르러
  불밝힌 열차가 서럽게 떠나는 밤
  저녁 잠결에서 깨어나 앉으면
  창 밖엔 어느새 희게 웃는 바람소리
  빗발은 밝게 꽃잎에 부서지고
  멀리서는 떠난 밤차의 긴긴 울음소리
  배꽃이 피면 끊어질 듯 서러워
  달빛은 흘러내린 산모래를 적시고
  그대의 물빛 크림 상기도 싱그러워
  그대의 밝은 손은 내 가슴에 어른거려
  오 코를 묻네 눈을 감네 향기로 뜨네.

 

  모윤숙. 1910년 평북 안주 출생. 호는 영운. 개성 호수돈 여학교와
이화여자 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시원>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해방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를 설립했다. 유엔총회 한국대표 외에도
국제펜클럽 한국대표를 역임. 시집으로는 <빛나는 지역> <렌의 애가>
<옥비녀> <풍랑> <정경>과 수필집 <포도원> 및 전집 등이 발간되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 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숲속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시베리아 먼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이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내 나라 땅에 한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울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문덕수. 1928년 경남 함안 출생이며 호는 청태이다. <흑상아> 동인으로
시 '성묘' 등을 발표했으며, <현대문학>에 시 '바람속에서' '화석'이 추천되어 문단에 대뷔했다.
<현대문학신인상>, 제1회 <현대시인협회상>을 수상. 시집으로는 <황홀>
<선, 공간> <새벽 바다> <영원한 꽃밭>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 <본적지>와 이론집 다수가 있다. 현재 <시문학> 주간이며,
현대시인협회 회장, 문인협회 부이사장이며 홍익대 사범대 학장으로 있다.

     꽃꽈 언어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손수건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시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발딱발딱 살아나는 슬픔.

 

  문병란. 1935년 전남 화순 출생. 조선대학 문리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지에 추천받아 시단에 나옴. 현실을 소재로 하여 풍자와 비판적
정서로서 민족의식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시적 세계를 가지고 있는 그는
현재 학원강사로 재직중이다. 시집으로 <문병란 시집>(1970) <죽순 밭에서>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등 다수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저 미치게
푸른 하늘>(1979) <현장 문학론>(1983)이 있다.

     코카콜라

  발음도 혀끝에서 도막도막 끊어지고
  빛깔도 칙칙하여라, 외양간 소탕물 같이
  양병에 가득 담긴 녹빛깔 미국산 코카콜라
  시큼하니 쎄하게 목구멍 넘어간 다음
  유유히 식도를 씻어내려가
  푹 게트림도 신나게 나오는 코카콜라
  버터에 에그후라이 기름진 비후스틱
  비계낀 일등 국민의 뱃속에 가서
  과다지방분도 씻어낸 다음
  삽상하고 시원하게 스미는 코카콜라.
  오늘은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식물성 창자에 소슬하게 스며들어
  회충도 울리고 요충도 울리고
  메시꺼운 게트림에 역겨움만 남은 코카콜라.
  병 마개도 익숙하게 까제끼며
  제법 호기 있게 거드름을 피울 때
  유리잔 가득 넘치는 미국산 거품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병을 비우는구나
  슬슬 잘 넘어간다고 제법 뽐내어 마시는구나
  혀끝에 스며 목구멍 무사 통과하여
  재빨리 어두운 창자 속으로 잠적하는 아메리카
  뱃속에 꺼져버린 허무한 버큼만 남아 있더라
  혀끝에 시큼한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제법 으시대며 한 병 쭉 들이키며
  어허 시원타 거드럭거리는 사람아
  진정 걸리지 않고 잘 넘어 가느냐
  목에도 배꼽에도 걸리지 않고
  진정 무사통과 넘어가느냐
  콩나물에 막걸리만 마시고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던 우리네
  오늘은 코카콜라 마시고
  시큼새큼 게트림 같은 사랑만 배우네
  랄랄랄 랄랄랄 지랄병 같은 자유만 배우네
  목이 타는 새벽녘 빈 창자에
  쪼르륵 고이는 냉수의 맛을 아는가
  언제부터 일등국민의 긍지로
  쩍쩍 껌도 씹으며
  야금야금 초콜렛트도 씹으며
  유리잔 가득 쭉 들이키는 코카콜라
  입맛 쩍쩍 다시고 입술 핥은 다음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허무한 거품이여
  우리 앞엔 쓸쓸히 빈 병만 그득히 쌓였더라
  너와 나의 배반한 입술,
  얼음도 녹고 거품도 사라지고
  시큼새큼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폐 염전

  평생을 뻘밭에 바치고
  대대로 소금 구워 먹던 김생원,
  정든 고향의 뻘밭
  폐염전만 길게 남겨 놓고
  오늘은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뜨거운 유월의 햇빛 아래
  미닥질로 익어가던 영롱한 보석,
  산더미 같은 소금산 아래서
  땀방울도 알알이 여물던
  소금풍년 조개풍년 꼬막풍년
  그날의 어부가는 들리지 않는다.

  만선 소식 감감한 남해바다
  시름처럼 길게 누워 있는 뻘밭 위에
  햇살만 너훌너훌 춤을 추는데
  어깨 실한 돌쇠도
  궁둥이 실한 갑순이도
  가난만 남은 뻘밭을 버리고
  오늘은 어느 공단으로 떠나갔는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검은 폐수 뿐
  멈춰 버린 수차는 말이 없고
  허옇게 죽어간 폐각 위에
  기운 없는 갈매기만 
  폐촌의 적막을 쪼으고 있다.

  공장 지어 번성한 땅 위에
  소금까지 외국에서 사다 먹으니
  실직한 김생원
  뻘밭을 버리고 도시로 가서
  오늘은 어느 공단 품팔이 되어
  아스팔트 위에서 맥주를 마실까?

  여기는,
  여천 공단의 검은 연기가
  간간 불을 뿜는
  삼일만 가까운 어촌,
  조개도 죽어가고
  꼬막도 죽어가고
  정든 갈매기도 죽어가고
  마지막 김생원도 떠나간 마을.
  주인 잃은 수차 위에
  6월의 햇살만 눈부시게 곱고
  근대화를 모르는
  빈 뻘밭만 맨살로 타고 있다.

  5남매 7남매 쑥쑥 뽑아내
  아기 잘 낳아 자랑스럽던 아내
  이제는 하나만 낳는 시대
  그 누가 소금쟁이 어부를 낳을꼬?

  먹는 입만 생각하고
  일하는 손은 계산 안하니
  새끼 낳는 것도 부끄러운 인생
  바다는 옛정을 못잊어
  뻘밭을 적시며 정답게 출렁거린다.

  어매야 아배야
  어디로 갔느냐
  떠나간 사공의 배따라기도 없이
  포구의 새악씨 이별의 손수건도 없이
  멈춰 버린 수차 위에
  병든 갈매기 시름없이 날 때
  용왕님도 떠나 버린
  텅 빈 사당 앞에
  미쳐 버린 똥개만 컹컹 짖고 있다.

 

  문충성. 1938년 제주 출생. 한국 외국어 대학 불어과 졸업. <문학과
지성>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제주도의 한과 더불어 토속적인 정서
속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제주바다> <섬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 등이 있고 현재 제주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어도

  이어 이어 이어도 사나
  이어도가 어디에 시니 수평선 넘어
  꿈길을 가자 이승길과 저승길 사이
  아침 햇덩이 이마에 떠올리고
  저녁 햇덩이 품안에 품어
  노을길에 돛단배 한 척
  이어 이어 이어도 가자

  한라산을 등에 지고 제주
  바다와 마주 서 보라
  수평선은 하늘하늘
  눈썹 밑으로 잠기어 들고

  새 하늘 동터 올 내일을 열라, 이글대는
  수평선이어, 이글대는 가슴을 열라
  수평선 넘어 꿈길을 열라, 썰물나건 돛단배 한 척
  이어 사나 이어도 사나
  별빛 밝혀 노저어 가자
  별빛 속으로 배저어 가자


     제주바다 1

  누이야, 원래 싸움터였다.
  바다가 어둠을 여는 줄로 너는 알았지?
  바다가 빛을 켜는 줄로 알고 있었지?
  아니다, 처음 어둠이 바다를 열었다. 빛이
  바다를 열었지, 싸움이었다.
  어둠이 자그만 빛들을 몰아내면 저 하늘 끝에서 힘찬 빛들이 휘몰아 와
어둠을 몰아내는
  괴로와 울었다. 바다는
  괴로움을 삭이면서 끝남이 없는 싸움을 울부짖어 왔다.

  누이야, 어머니가 한 방울 눈물 속에 바다를 키우는 뜻을 아느냐. 바늘귀에
실을 꿰시는
  한반도의 슬픔을. 바늘 구멍으로
  내다보면 땅 냄새로 열리는 세상.
  어머니 눈동자를 찬찬히 올려다보라.
  그곳에도 바다가 있어 바다를 키우는 뜻이 있어
  어둠과 빛이 있어 바다 속
  그 뜻의 언저리에 다가갔을 때 밀려 갔다
  밀려오는 일상의 모습이며 어머니가 짜고 있는 하늘을.

  제주 사람이 아니고는 진짜 제주 바다를 알 수 없다.
  누이야, 바람 부는 날 바다로 나가서 5월 보리 이랑
  일렁이는 바다를 보라. 텅벙텅벙
  너와 나의 알몸뚱이 유년이 헤엄치는
  바다를 보라, 겨울 날
  초가 지붕을 넘어 하늬바람 속 까옥까옥
  까마귀 등을 타고 제주의
  겨울을 빚는 파도 소리를 보라.
  파도 소리가 열어 놓은 하늘 밖의 하늘을 보라, 누이야.

 

  민영. 1943년 강원 철원 출생.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부두노동자,
인쇄소 조판공을 하다가 <현대문학>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시의
아름다움이란 곧 삶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고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단장> <용인 지나는 길에> <냉이를 캐며> 등의 시집이 있다.

     냉이를 캐며

  -귀염이 엄마에게

  오늘은 언 땅의
  냉이를 캐며
  내 손톱이 여린 것을
  서러워하네.

  바람은 등에 업은
  어린 것을 후리고
  몸 묶인 그이로부터는
  소식이 없네.

  바람아 불어라
  쌩쌩 불어라
  들판에 햇살 비쳐
  새 울 때까지.

 

  민재식. 1932년 출생. <문학예술>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세계는 감정의
직접적인 노출을 억제하고 정형 설정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속죄의 양>이 있다.

     밤에 산엘

  밤에 산엘 올라가면
  어둠을 딛고 설 수 있다.
  밤에 산엘 올라가면
  어둠을 이고 설 수 있다.
  어둠은 까만 스폰지
  딛어도 소리 없는, 치켜도 소리없는
  그러나 온몸에 밀착해 오는
  죽은 탄력성

  밤에 산엘 올라가면
  하늘에도 바다에도 별이 뜬다.
  밤에 산엘 올라가면
  눈에도 가슴에도 별이 어린다.
  별은 빛으로 통하는 스폰지의 구멍
  후벼도, 헤쳐도, 꺼지지 않는
  빛의 부스러기

 

  박경석. 1937년 전남 나주 출생. <현대문학>지에 추천으로 등단. 시집 <황제와
시>가 있다. 판소리 패로디를 통해 응어리진 삶을 노래하면서 신화와 고전의 현대적
수용을 꿈꾸는 작품세계를 다져가고 있다.

     졸본 꾀꼬리

  보리밭 고랑에서 풀냄새 어머니는
  꾀꼬리 사설을 풀이해 주셨다.
  머리 빗고 물 건너 임 만나 볼까.
  비 갠 뒤에 우는 뜻을 새겨 들었다.
  삼대같이 키가 크면서
  버들 그늘 머리 빗는 강의실이었다.
  태자 유리왕의 참된 사랑은
  고구려에 옮겨 심은 중원의 꽃,
  치희의 슬픔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열을 올렸다.
  이 노래를 강의할 때마다
  졸본 꾀꼬리가 와서 운다며
  주임교수는 눈매가 엄숙했다.
  사랑의 실습보다
  눈물의 효시부터 먼저 배웠다.
  성빈여숙 기숙사로 그대 떠나고
  내 앞에는 텅 빈 보리밭만 남더니.
  되돌아갈 궁전도, 버드나무도,
  버드나무 선 토담집도 없더니.
  꾀꼬리 사설 들을 적마다
  불혹을 넘긴 이 나이에도
  상처 아문 자국에
  따끔따끔 그 아픔 살아나느니.


  박근영. 1931년 출생. 호는 수매.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순수 형상미를 추구하면서, 서민적 생활미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가난한 축가> <빛의 층계>가 있다.

     동정의 시

  밤을 새우면서 목숨을 앓다가도
  고운 해 동산에 떠오르면
  나는야 이름 없이도 창 앞에 고운 해

  아침 두레박을 드리우듯
  깊은 속 어둠에 잠겨 있는
  당신의 목소리를 가만히 길어
  갈한 목 축이고 나면
  안으로 맑아오는 나의 목소리

  옥통소처럼 곱게 울려
  차가운 하늘 열어 주면

  빨간 댕기 드리운 듯
  적연한 햇빛의 가지 끝에
  가을 과일처럼 익어 오는 건
  어느 날엔가
  꽃다이 주어질
  당신의 은혜로운 언약이십니다.

 

  박남수. 1918년 평남 평양 출생. 평양 숭인상업 및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 월남후 <문학예술> <사상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문장>을 통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 선명하고 안정된 이미지와 미적 표현의 작품을
보여주는 한편 이미지와 형상화에서 존재론적으로 다가서는 작품도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는 <초롱불> <새의 암장> 등이 있다. 한양대 강사 등을 
지내다 현재 도미중.

     새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 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종소리

  나는 떠난다.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6 236^역사^356 3^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박두진. 1916년 경기 안성 출생. 호는 혜산. <문장>에 시
'묘지송'^외 4편을 정지용에게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조지훈, 박목월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각 잡지와 신문에
많은 시를 발표했다. 특히 내면 생활의 정관에로 향하는 시적 의지가
강하게 담긴 <수석열전> 외에도 10여권의 시집과 수필집 <시인의 고향>
등이 있다.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과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도봉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묘지송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대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죽음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청산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가고 밤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 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꽃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당신의 사랑 앞에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 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가락과 심장에 상채기 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 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박봉우. 1934년 전남 광주 출생이며 호는 추풍령. 전남대 정치학과를
졸업.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여 <전남도 문화상>(1957), <현대 문학상>(1962)을 수상했다. 초기의
시는 분단의 현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차차 센티멘탈한 시적
정서로 승화되고 있다. 시집으로 <휴전선>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 <4월의
화요일> <황지의 풀잎> 등이 있다.

     휴전선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같은
정신도 신라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 가는 이야기 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나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 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눈길속의 카츄샤

  어느 집을 갈거나 어느 집을 갈거나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어데로 갈거나.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해바라기 무거운 목을
숙이고 꽃같은 울음을 고요히 피우시고 계실 어느 창변에 갈거나.

  캄캄한 무덤에서 부활한 소복한 내가 되어 오늘만은 피를 토할 슬픔,
괴로움 속에 모아온 눈물 잊고 꽃초롱 밤 늦도록 피워놓고 이 길을 준 푸른
하늘을 이야기 하자고 가다리실 어느 집을 갈거나.

  하얀 길. 하얀 벌판을 밟고 무한한 지평선에 흰 비둘기 나래의 깃발이
되어 이 기쁨을 누리자고 어느 머언 창변에까지 들리게... 산산이 부서져
버릴 유리조각이 되게 허공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울어보고 싶어라.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사운사운 밟고 하얀 길. 하얀 벌판. 하얀 보자기를 지나서 어데를
갈거냐.

  자꾸만 가는 길 달밤보다 흰 벌판에서 붉게 피어버린 꽃처럼 울어나
보았으면... 이 길을 이 하얀 길을 고이 고이 나려주신 풍경 속에 끝없이
젖어...

  밤늦도록 꽃초롱이 켜진 집을 찾아서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진실한 노래와 내 맑은 눈물을 읽어줄 하늘 같이 넓은 기슴에 안기리
안기러 가리...

 

  박성룡. 1932년 전남 해남 출생. 호는 남우. <문학예술>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했으며 자연의 사물을 철저히 추구하여 이것을 서정성과 서경성이
융합되도록 표현한 시인이다. <60년대 시화집> 동인으로 활동. <현대문학
신인상>(1961)을 수상.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춘하추동>이 있다.

     교외

  1
  무모한 생활에선 이미 잊힌지 오랜 들꽃이 많다.

  더우기 이렇게 숱한 풀벌레 울어 예는 서녘 벌에
  한 알의 원숙한 과물과도 같은 붉은 낙일을 형벌처럼 등에 하고
  홀로 바람 외진 들길을 걸어 보면
  이젠 자꾸만 모진 돌틈에 비벼피는 풀꽃들의
  생각밖엔 없다.

  멀리 멀리 흘러가는 구름 포기
  그 구름 포기 하나 떠 오름이 없다.

  2
  풋물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풀밭엔 꽃잎사귀,
  과일 밭엔 나뭇잎들,
  이젠 모든 것이 스스로의 무게로만 떨어져 오는
  산과 들이 이렇게 무풍하고 보면
  아 그렇게 푸르기만 하던 하늘, 푸르기만 하던 바다, 그보다도
  젊음이란 더욱 더 답답하던 것,

  한없이 더워 있다, 한없이 식어가는
  피비린 종언처럼
  나는 오늘 하루
  풋물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3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다오,

  저 이름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바람 부는 날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6 236^풀잎^356 3^이라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6 236^풀잎^356 3^, ^6 236^풀잎^356 3^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 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박의상. 1943년생.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삶의 뿌리를 조명하면서도 넓은 시야로 세게를
수용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성년> <봄을 위하여> <오늘은
미래> 등이 있고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풍뎅이

  풍뎅이가 벽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진다.
  바로 앉지 못하고 누워서 파닥이는 것이
  등이 둥근 때문보다는
  등이 무거운 때문이리라
  열 두 회사의 사장 회장을 하는
  모씨의 종합병원
  벽에 날아와 부딪쳐 떨어진
  풍뎅이 한 마리가
  미국에서 온 것도 아니련만,
  그것을 상징하는 듯한 것은 웬일인지?

  풍뎅이의 작은 날개보다
  더 작은 나의 날개
  나의 이상.


     아내와 함께

  한 쪽 것이 큰 아내여, 새끼가 윗니 하나로 쪼아댄 그 검은 젖꼭지로라도
나를 짓눌러 주게. 뒷방에 쌓인 드라이 밀크 깡통을 누르는 먼지 같이
흐릿하게 말고, 맨 위의 깡통이 밑의 빈 깡통을 짓누르는 것같이.

  새끼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우리끼리라고 다짐하였지만, 그때의 내 말은
아직 내 자신에게도 달콤하지만, 아내여 푸른 비눗물에 손목이 부어서,
빨래를 내걸려고 내미는 손목이 햇볕에 너무 따가와서.
  울고 섰는 아내여, 내가 짓는 죄는 그래도 새끼가 없을 때 지은 죄보다는
가벼우리. 도둑질도 간음도 죄가 아닐 때, 멸시만은 정말 죄가 된다고
하지. 내가 그대의 지아비가 되었을 때부터가 아니라, 그대가 아내가
되었다고 믿은 때부터지만.
  신뢰하는 것, 긍정하는 것을 지나서 아내를 알고 나서부터는 무심하였네.
지난 시절이 그리웁기보다 짜증스러워서도 우리는 빨리 자고 더 많이
잤던가.
  잠든 아내여, 두 젖이 보름밤 언덕처럼 떠 있네. 나는 또 불통을
휘두르며 달려갈꺼나. 작은 숲 사이로 더 어린 아이들이 따라나오고, 나는
달을 향해서처럼 이 불의 씨들을 우리 새끼 눈에 대어보여 줄꺼나.

 

  박이도. 1938년 평뿍 함천 출생. <자유신문> 신춘문예와(1959)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가 당선되어 등단(1962). 시집으로 <회상의
숲> <북향> <폭설>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나의 형상

  밤사이
  하나님은 쉬지 않고
  나의 형상을 새로이 지으신다.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풀섶에 숨은 이슬
  햇살에 꿰어 매듯
  사랑을 엮어 주네
  밤사이 진 감꽃들이
  하얗게 웃음짓는따
  못다한 결백의 생명으로
  내 형상을 짓는다

  아, 밤사이
  내가 무엇을 꿈꾸었나
  어둠에 빠져 허위적이며
  먼 데만을 향해
  손짓을 하였구나

  이 아침의 밝음을 두고
  이슬의 총명과
  감꽃의 결백을 두고
  나의 참 형상을 두고


     바람의 손 끝이 되어

  욕실에 든 여인을 위해
  나는 창문을 연다

  싱그러운 바람-

  검은 빛깔 갈매기처럼
  바다로 날아 가네

  여인의 머리카락에선
  바다 바람이 인다

  젖은 입술 사이
  흰 잇발이 파도 끝처럼 다가온다

  아, 보이지 않는 것
  바람의 손 끝이 그대를 어루만질 때

  이미 나는 바람 속의
  한 마리 갈매기

 

  박이문. 1931년 서울대 및 동대학원 불문과 졸업. <사상계>(1955)와
<문학예술>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시작보다 주로 철학적 저술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미국 시몬즈여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내 꿈속의 나비는

  내 꿈속의 나비는
  꿈
  나비 속의 꿈에서
  나를 보고
  나는 나비 속의 그림자
  나비의
  꿈속의 나의
  그림자
  껍데기
  나는
  그늘
  속의
  그늘
  껍데기
  꿈으로 만들어진
  현실
  현실의 껍데기
  속의
  꿈의
  꿈

 

  박재륜. 1910년 충북 충주 출생. 호는 국초.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수학한 뒤 귀국, 모더니즘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궤짝 속의 남자> <메마른 언어> 와 시문집 <인생의 곁을 지나면서>와
시선집 <흰 수염 갈대풀> 등이 있다.

     편지

  내 마음 적막한 때는
  바다 저편 나라 벗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그 사람의 마음의 전신
  오늘 내 쓰는 말도 이같이 애절하다
  벗이여
  어디에 나의 연인은 있느냐
  어디에 나의 행복은 있느냐
  아아
  인생의 거치른 바다 위에
  그 아름다운 섬은 헛되이 사라져 없어지고
  오늘의 나는
  기이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름 모를 항구와의 무역엔 실패하다
  다시 어느 지각을 저어
  거치른 물결 이는 마음을 잠 재우리.
  다만 여기에 남긴 인생은
  사랑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탕조차 아니어도
  젊음은 헛되이 늙으려 하고
  남은 가재는
  홀로된 어머니의 마음 동산의
  또 하나의 꽃의 향기를 뺏으려 한다.
  얼마나 나는 불효자냐.
  어느 지점에 이르르면
  나에게도 말하고 남는 자랑을 얻으리.
  벗이여
  편지는 오늘 내 마음 싣고
  너를 찾아 표박의 길에
  아름답게 꾸며진 한 척의 범선.
  벗이여
  사람에게 말하고 남는
  나의 큰 자랑이여
  멀지않은 시일이 지나면
  너에게서
  감격에 넘친 글발이 올 줄로 믿는
  오늘날 나의 적막한 마음의
  바램을 끊지 마라.

 

  박재릉. 1937년 출생.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 <한국시>
동인으로 샤마니즘적인 낭만주의가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시집으로 <작은 영지> <꺼지지 않는 잔존> <밤과 연화와 상원사> 등이
있다.

     서울

  저렇게 하늘이 얕아서 쓰겠는가?
  광화문부터 종로를 사뭇 걸어가노라면
  지붕이며, 유리창이며, 간판이며, 모두들
  저렇게 얕게 하늘 가까이 들러붙어...

  연변의 경복궁은 저만큼 먼발치서 차라리
  안 보이는 뒷뜰의 그 응향의 먼지 낀 냄새들을 쭈그리고 앉아
  낡은 섬돌의 이끼 낀 침묵들을 묵묵히 맡고 섰다.

  아, 그 누가 알 것인가?
  머언 그 옛적 머언 그 조선 시절에
  구중에서 안락하게 살다 간 이들이
  지금은 무릎까지 시려 오는 그 제단에서 드디어는 떠나
  저기, 저 눈부신 빛들을 화사히 줏어 입고들 나와 선 것을...
  층층벽으로, 모퉁이로, 길가로
  바람에 채일 듯이 싸늘히 선
  낯선 저 얼굴들 위에, 눈빛 위에, 몸짓 위에.

  그리고 그 예리한 빛들이, 지금은
  지붕 위에서 다락키 만큼 높은 그 끝까지 다가붙어
  위태로이 그 위를 닿으려고 저마다 날카롭게 빛이 선 것을...

  그래도 그래도 꺼질 듯이 흩날려 버릴 듯한
  이 서울이 끄덕도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저 삼각이나 북악 만큼 든든한 마음끼리
  이 바닥을 깊이 움켜잡고 있는
  힘 있는 어느 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렸다.

  돌이... 걸이... 돌이... 걸이 엇갈린 아우성들...

  고층을 오르내리는 그믈을 뜨는 손짓과 손짓들...
  앞뒤 물의 낯들... 엇갈린 선과 선들...
  수연이 그리워, 눈물이 그리워, 슬픔이 그리워, 그늘이 그리워...
  제 콧날 위의 하얀 제 별도 못 떠받아
  서울은 나부껴, 하얗게 가루처럼 나부껴
  ...

 

  박재삼. 1933년 일본 도오꼬오에서 출생하여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했다.
<문예>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여성적인 톤으로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대문학 신인상> <문교부
문예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는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비듣는
가을나무> <천년의 바람> <아득하면 되리라> 등이 있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어떤 귀로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것들이
  방 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놓는다.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자연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바람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가난의 골목에서는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건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박정온. 1926년 전남 장흥 출생. 연세대에서 수학했으며 시집으로
<최후의 서정> <이 산하를> <밤은 아침을 위하여> 등이 있다. 그의 시의
특징은 내부의 생명을 외부와 결부시키는 데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차에서

  눈이 날린다
  차가운 것이 유리에 와 닿는다.

  제각기 가야 할 종점-
  마음은 어느 하늘을 달리는가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가는
  지친 몸짓도

  어둡게 살아온 흐린 눈망울도
  손을 잡으면 정다운 이웃들!

  십 이월 하늘은 북구라파의 표정을 하고
  눈발이 세차게 휘몰아 오는데

  아무도 말이 없는
  이 차가움 속에
  누구의 기침소리인가
  비늘처럼 가슴을 찌른다

 

  박정희. 1936년 함북 길주 출생. 동국대 영문학과 및 건국대 대학원을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하여 시집으로 <내실> <주둔지> <문풍지>와
논문집 <김기림의 연구> 등이 있다. 현재 상명여사대에 출강하고 있다.

     술래의 편지

  겨울이 다 간 뒤에
  나에겐 추위가 다가왔오.

  하루에 한 번
  봄에 앓던 학질은

  하루에 두 세 번
  여름 독감으로 이어졌오

  쇳물 녹이는 불가마에
  앉아서도

  나는 춥고
  또 추웠오.

  주사 바늘에 꽂혀
  파닥이는 검은 사지

  살아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거듭하던 죽음.

  창 밖으로 떼지어 날으는 잠자리
  눈부신 아이들의 술래잡기

  발돋움해도 당치않는
  높은 창 너머도

  달려가 잡히는
  술래가 되고 싶소.

  영영 달아나지 않는
  당신의 술래가 되고 싶소.

 

  박제천. 1945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중퇴. <현대문학>지에 시
추천으로 등단(1966)하여 <시정신> <손과 손가락> 동인. 한국 시인협회
상임위원이며 미 아이오아대 국제 창작 프로그램 객원 시인(1984)으로
참가했다. 현재 한국 문화 예술 진흥원에 근무하고 있으며 제24회
<현대문학상> 제14회 <한국 시협상> 제4회 <녹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장자시> <심법> 등 다수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영혼의 날개>와
영역시집이 있다.

     장자시

  2
  지나쳐가고지나쳐가는형상의아름다운음정들
  고물께서소리죽이고흐느끼는바닷물문득
  머리위에높이떠피어나는물보라꽃에저희넋을실으나
  뉘라볼수있으랴
  허공에서꽃잎날리고꽃잎날려꽃잎날리거니
  바다아래꽃게의거품이그꽃잎들을삼킬뿐이네

  10
  정액처럼끈끈한손길의말을버리면
  꿈의껍질이벗겨지고하이얀뇌골만햇빛에쪼그라드네
  상상의날랜눈이슬그머니소매에가둔
  천체의여러벌들그것들이이마를맞대어날으던죽음의
  반짝인빛이었네

  24
  신경질의여윈그림자로고사리과식물의줄기끝에
  신경질의줄은풀려엉기고삶을재는그림자마저도르르말리네
  여러개의손가락이엮어세운십자가에지등의흐린불빛이걸려
  내삶의편린을가벼이흔들어주네
  천상의궤도마다장미밭을일퀐네
  내생애는바람의도포를입었네
  가다오다장미꽃가지를치는
  오오인연의칼끝에길이놓였네
  바람속으로바람속으로헤매이는내피의물살이여
  흩날리는장미꽃이여


     사기등잔과 함께

  이미 불태운 것들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
  이제 불타고 있는 것들은 사라져 또 어디를 가리
  닳아 버린 심지, 거뭇거뭇 남아 있는 석유찌꺼기, 군데 군데 흠이 간
싸구려
  등잔 하나를 닦으며
  불꽃 한 줄기 피워 손에 들고 있느니
  불타오를수록
  남아있는 뼈와 살이 무게를 또한 느끼느니

  어느 별의 회답이 이리 더딘가
  한밤중이면 깨어나 앉아
  지난 시간의 그림자들을 개어 먹을 가느니
  밤을 밝힐수록 검게 빛나는 이 어둠을 온몸에 받아들이며
  내가 만들어 띄우는 불꽃
  한 줄기
  언뜻언뜻 별처럼 어려보여라.

 

  박태진. 1921년 평남 평양 출생. 시 ^6 236^신개지^356 3^를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변모> <너의 정담> <나날의 의미>와 합동시집
<현대의 온도>, 산문집 <현대시와 그 주변> 등이 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우리 시를 낮은 목소리의 생생한 언어로 누비면서
개성적인 서정과 리듬으로 점철한 특유의 시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교동

  정말 그런가고 그렇다 치고
  심각했던 말끝을 흐리어
  약주잔이 뒤받은 뒤를 이어
  비 오듯이 해 저물듯이
  그것은 무교동 언저리

  하루는 달력에 미끄러진 숫자
  사람들이 변했다고 그는
  가래 낀 목청, 술을 엎질렀다
  달력의 숫자는 왜 속지 않느냐고

  인생이 짧다뿐 잘못은
  짧아서 초라하다 뿐
  속는 것도 즐거움인 줄을
  그는 미처 몰랐다고

  이 지붕 밑은 그렇다 치고
  웃음이 감도는 눈자위
  주름이 거북한 눈자위
  그는 나더러 나는 그더러
  그런가고 그렇다 치고

    

한국인의 애송시 II
           제1권


  편집고문: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발행인:장석주
  발행처:청하
  주소: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80-1
  초판발행일:1985년 7월 25일
  입력일:1992년 2월 15일
  입력 및 교정자:임종욱

 

  원로, 중견 125인 선 II


  박화목
  호접

  박현령
  지하여장군

  박홍원
  선인장의 역설

  박훈산
  보리고개

  박희선
  모악산 기슭 나그네

  박희진
  지상의 소나무는
  골과 향수
  회복기

  변학규
  목숨

  서정주
  동천
  화사
  국화 옆에서
  푸르른 날
  무등을 보며
  문둥이
  꽃밭의 독백
  귀촉도
  봄
  대낮

  석용원
  겨울 명동

  설의웅
  외갓집 있는 마을 풍경

  설창수
  동백칠칠조

  성찬경
  나사, I

  성춘복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굳은 손으로

  송선영
  강강수월래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지리산 뻐꾹새

  송영택
  소녀상

  신경림
  농무
  겨울밤
  목계장터
  갈대

  신기선
  역설의 꽃

  신달자
  뒷산

  신대철
  눈
  사람이 그리운 날, 3

  신동문
  내 노동으로

  신동집
  목숨
  눈

  신동춘
  꽃은 제 내음에

  신세훈
  잠실 개구리

  신중신
  회색 그림자

  안장현
  어느 정신병원에서

  안혜초
  달속의 뼈

  양명문
  명태
  은행나무 산조

  양성우
  기다림의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양왕용
  남강

  양치상
  목화바구니

  오규원
  한 잎의 여자
  봄
  겨울 숲을 바라보며

  오세영
  봄
  너 없음으로

  오순택
  그 겨울 이후

  유경환
  나비
  초설

  유안진
  청년 그리스도께

  유영
  수박을 먹으며

  유자효
  가을의 노래

  유재영
  유랑의 섬

  유정
  램프의 시, 1
  램프의 시, 5
  조그마한 무덤 앞에
  진눈깨비

  윤삼하
  겨울의 첨단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반도의 눈물

  이건청
  망초꽃의 하나
  추운 벌레

  이경남
  강 건너 얼굴

  이경순
  구름은 흐르고 뻐꾸기는 우는데

  이광웅
  달

  이근배
  냉이꽃
  부침

  이기반
  산 너머 저 노을이

  이기철
  이향
  너의 시를 읽는 밤엔

  이봉래
  단애

  이생진
  그리운 성산포

  이성교
  해바라기 피는 마을

  이성부
  벼
  전라도, 2
  누룩
  어머니

  이성선
  나무 안의 절

  이성환
  그믐달

  이수복
  봄비

  이수익
  우울한 샹송
  말
  봄에 앓는 병
  가을 서시
  안개꽃
  호롱

  이승훈
  지난날
  당신
  암호

  이영걸
  한가위, 1

  이영순
  크리스마스 이브

  이우석
  휘파람

  이운영
  이 가슴 북이 되어

  이원섭
  향미사
  죽림도

  이유경
  형제의 울음
  배반

  이석
  개나리
  서시

  이인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제하
  단풍
  노을

  이종욱
  꽃샘추위
  돌

  이중
  타락사초

  이창대
  애가

  이추림
  바다처럼

  이탄
  구름

  이태극
  삼월은
  낙조

  이태수
  낮달로 슬리며
  옛꿈을 다시 꾸며

  이하윤
  들국화

  이향아
  음미

  이형기
  낙화
  비오는 날
  노년 환각
  종전차
  나의 시
  호수
  들길

  이활
  낙서가 된 앗시리아의 벽화

  이희승
  추삼제

  이희철
  낙엽에게

  인태성
  투우

  임강빈
  코스모스

  장서언
  이발사의 봄
  밤

  장순화
  유방의 장

  장윤우
  나부

  장호
  파충류의 사상

  전봉건
  돌, 2
  돌, 31
  물

  정공채
  시는 술이다
  망향

  정대구
  겨울나무의 진실
  박문답, 5

  정렬
  꽃밭

  정양
  수수깡을 씹으며
  날참새를 씹으며

  정완영
  조국

  정의홍
  자유, 2

  정진규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바보의 살

  정한모
  어머니
  나비의 여행

  정현종
  고통의 축제
  사랑의 꿈
  꿈속의 아모라

  정훈
  파적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조남익
  죄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안개로 가는 길
  하루만의 위안
  결혼식장
  분수

  조상기
  눈오는 날

  조종현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
  의상대 해돋이

  조태일
  짝지어주기
  수수께끼

  주문돈
  귀뚜라미

  천상병
  주막에서
  새

  천양희
  꿈에 대하여
  신이 내게 묻는다면

  최원규
  달

  최재형
  양지

  최하림
  시
  산

  한광구
  심지 하나로 녹으면서

  한기팔
  가을비

  한무학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함윤수
  수선화

  허만하
  꽃의 구도
  데드마스크

  허소라
  10월의 노래

  허영자
  백자
  감
  봄
  임

  허형만
  1월의 아침

  홍신선
  겨울섬
  산을 오르며

  홍윤숙
  장식론
  풍차

  황금찬
  보리고개
  촛불

  황동규
  10월
  즐거운 편지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조그만 사랑의 노래

  황명
  분수

  황명걸
  나의 손
  한국의 아이

  황선하
  아버지의 연가

  황운헌
  난파선


  신예신인 48인 선


  감태준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사모곡

  강경화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
  풍경

  강은교
  풀잎
  우리가 물이 되어

  강창민
  비가 내리는 마을
  시인에게

  강현국
  일장일막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사랑법 첫째

  김명인
  베트남, 1
  동두천, 1

  김승희
  흰 여름의 포장마차
  햇님의 사냥꾼

  김옥영
  죽은 날벌레를 위하여
  말, 1

  김원길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김은자
  초설

  김정환
  마포 강변동네에서
  유채꽃밭

  김정
  역사

  김종철
  서울의 유서
  재봉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천지현황을 뒤집어 쓴 그대들에게

  김창범
  봄의 소리

  김혜순
  납작 납작
  마라톤
  연기의 알리바이

  노창선
  섬
  등 둘

  마광수
  우리는 포플라
  망나니의 노래

  문정희
  편지

  민용태
  고려장

  박남철
  연날리기
  첫사랑

  박정남
  빛이 드는 언덕에는 새 풀들이

  박정만
  잠자는 돌
  아편꽃

  박주관
  벗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살던 광주, 5

  서원동
  달맞이꽃

  송기원
  회복기의 노래

  안경원
  통화

  오승강
  새로 돋는 풀잎들을 보며

  윤석산
  편지
  원색의 잠

  윤재걸
  후여 후여 목청 갈아
  전라도의 무등과 함께

  윤후명
  곰취의 사랑
  명궁

  이동순
  개밥풀
  연탄갈기

  이성복
  정든 유곽에서
  그날

  이세룡
  빵

  이시영
  너
  만월

  이윤택
  늑대

  이하석
  철모와 수통
  핀, 2

  이해인
  민들레의 영토
  가을 노래
  석류꽃

  장석주
  등에 부침
  숨은 꽃

  장영수
  메이비
  그 여자

  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
  슬픔은 누구인가

  조정권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79년 가을

  최승자
  삼십세
  즐거운 일기

  최승호
  대설주의보

  하종오
  풍매화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홍영철
  바다 일부
  작아지는 너에게

  홍희표
  섬에 누워

   원로, 중견125인선. II


  박화목.1923년 출생. 일명 은종. '죽순'과 '등불'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한 그는 기독교적인 사상에 일종의 허무함을 풍기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시집으로 "시민과 산양" "그대 내 마음 창가에" "주의 곁에서"
등이 있고, 수필집 "보리밭 그 추억의 길목에서"가 있다.

     호접

  가을 바람이 부니까
  호접이 날지 않는다.

  가을 바람이 해조같이 불어와서
  울 안에 코스모스가 구름처럼 쌓였어도
  호접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는다.

  적막만이 가을 해 엷은 볕 아래 졸고
  그 날이 저물면 벌레 우는 긴긴 밤을
  등피 끄스리는 등잔을 지키고 새우는 것이다.

  달이 유난하게 밝은 밤
  지붕 위에 박이 또 다른 하나의 달처럼
  화안히 떠오르는 밤

  담 너머로 박 너머로
  지는 잎이 구울러 오면
  호접같이 단장한 어느 여인이 찾아올 듯 싶은데...

  싸늘한 가을 바람만이 불어와서
  나의 가슴을 싸늘하게 하고
  입김도 서리같이 식어간다.

 

  박현령.1938년 경남 마산 출생. 경희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신방과 수료.
"여원"지의 '여류 신인상' 수상(1958)으로 데뷔했다. '여류시'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시 세계는, 새로운 서정을 위한 모색과 탈바꿈을
시도, 현대시가 담아야 할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시집으로 "상사초" "오소서 이 햇볕 속으로"가 있다.

     지하여장군

  장군님, 여장군님.
  어디쯤 입니까
  그곳은
  할 수도 아니 할 수도 없이
  끝없이 황량해가기만 하는
  교외의 어느 간이역, 거기
  넘쳐 흐르는 쉬르리얼리즘의 배반
  밤차를 기다리며, 오직
  사랑만이 남아있어
  불타야하는
  그런 충절의 밤의 간이역
  꺼져들어가는 가등을
  켜고 또 켜며
  기다릴 쑤도, 아니할 수도 없는
  끝없이 황량해 가기만 하는 
  거긴 어디쯤입니까.
  지하여장군님!

 

  박홍원.1933년 전남 무안 출생. 조선대학 문리대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옥돌호랑이" 등이 있고 현재 조선대학교 사대
학장으로 있다. 시경향은 형식과 내용이 조화된 중용의 길을 지향하는
예술파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인장의 역설

  스스로의 뼈를 부수어 만든 마름쇠
  살갗에 박고,
  결식으로 발돋움하는 내핍의 사구
  선인장은 혼신으로 부르짖고 있다.

  발부리는 땅 속을 헤매지만
  연륜을 몰라
  가도가도 심해 빛 심해같은 마음으로
  맹물을 마시며 푸르른 목숨.

  능선인가, 골짜긴가,
  아슬한 정점 어디인가,

  몇 십 구비 그 끝에 피어나는
  태초의 정적 속에 빛살 터지는
  그러한 아침이 오기는 올까?

  온 몸이 눈이요, 이파리요, 꿈
  온 몸이 팔다리인
  두리뭉수리,

  포화 지나간 거리의
  벽돌 조각 사이나
  바람마저 메마른 어느 벌판에 던지워도
  스스로의 샘물에 목 추기며
  잃지 않는 균형으로 너는 있고,

  한 발짝만 들어서면
  너의 마음 언저리
  피안에 잇닿아 출렁이는 강물은

  태양을 부르는 풋풋한 육성인 양...

 

  박훈산.1919년 경북 청도 출생. 본명은 유상. 일본 니혼대학 법과를
졸업했으며 1946년 문단에 데뷔하여 시작활동을 하다가 공군 종군 문인이
됨. '경북 문화상'을 수상(1958). 시집으로 "날이 갈수록" "박훈산 시집"이
있다. 자학의 고배를 마시면서도 육성으로 정신의 투영도를 그려 온
시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보리고개

  아지랭이는 손에 감돌 듯
  저 언덕을
  타 넘어 왔는데
  볼수록
  나의 얼굴은
  추하여라.

  버들피리 불면서
  새싹을 주워 보려던
  나의 어린 날은
  이미
  떨어진 꿈

  봄은
  보리 고개
  숨가쁜
  계절
  꽃은
  제 멋대로
  피어라.

  가난한 마음 골짝에
  스며든
  앓는 가슴아
  나는 지금
  어머니를 기다린다.

 

  박희선.1923년 충남 강경 출생. '죽순' '별' 동인으로 시작활동을
하였으며, 1950 - 1963 전남대, 우석대 등에서 시학 강의를 했다. 장시집
"생쥐와 우표"외 불서 "선의 탐구" 등 10여권의 저서가 있다.

     모악산 기슭 나그네

  --충만에의 거액, 마침내 침묵을 깨고 가지끝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순수의 배반자여!

  어쩌다가 눈을 뜨고 물소리를 생각하면서 다시 소년이고저 기리던
  생각 순간으로 돌아와서 머웃 나를 잊는 때가 있다.
  눈을 뜨고서, 물소리를 그려보는 것은
  지리산 볍솔염,
  내려오다가 만난 사람, 숫돌에 날을 세우던 그 중년 늙은이
  수리개 빙빙 삿갓을 씌워놓고서 오르는
  하늘 아래의 첫 마을, 날을 고눠
  세워든 새을자로 휘어진
  황새목 낟자루,
  어쩌다가 헐어진 터 묵은 초가집 삼간에 세를 들고
  살면서, 나는 이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갑을병정 누구라고 이름하여도 좋은 것이지만,
  수리개 빙빙 돌던 하늘, 성 돌을 주워서 뫃아두고
  시인이여, 시인이여, 누구도 없이 불러보던 이름들
  백불목은 고스라니 죄다가 스러지고
  개가죽나무 열매보다도 그늘이 없어서 슬프더라고(말하던)
  젊음, 오늘은 귀신사에서 목욕탕 주머니
  왼 손아귀에 꾸겨서 쥐고 드나드리로 나와서
  뒤돌아보는 모악산, 너는 이제 한 사람의 시인
  그 이름을 알리라. 개구리 모냥 빠그락 빠그락
  늦 피기 비롯하는 자목련,
  그 가지 끝에서 쉬어가던 목소리를 가다듬다가
  떠난 사람들, 저승 소식과 같은
  갈구리, 어쩌다가 눈을 뜨고
  어쩌다가 다시 소년이 되고져
  물소리 생각하는, 오늘은 한 모서리
  그리하여 신문사의 데스크
  경금속성 소리나는 유리판과 함께 생각하느니
  오늘 새벽 바라보던 달 모악산 기슭의 새벽달
  실눈, 벗이여 평상할지라 오늘은 4월
  1984년, 즈문 날
  문턱에서 피어난 태음력
  푸른 산의 청솔가지 아궁이에 밀어 넣고서 생각하는
  초가삼간, 가맛틀과 같이 기리운 초하룻날이다.

 

  박희진.1931년 경기 연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문학예술"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생에의 외경을
바탕으로 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현대인을 노래하는 것이 특징.
'월탄문학상'을 수상(1976)했으며 시집으로는 "실내악" "청동시대"
"미소하는 침묵" "빛과 어둠의 사이" "서울의 하늘 아래" 등이 있다.

     지상의 소나무는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가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그윽한 향기 인다 신묘한 소리 난다

  지상의 물은 하늘로 흘러가고
  하늘의 물은 지상으로 흘러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무지개 선다 인생의 무지개가

  지상의 바람은 하늘로 불어가고
  하늘의 바람은 지상으로 불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해가 씻기운다 이글이글 타오른다


     골과 향수

  골

  어머니 자궁속에 태아와 같이
  밀폐된 관 속에 그녀는 황골로 불만이 없었다.
  그 볼을 곱게 물들이던 피 한 방울, 머리칼 하나,
  살 한 점 안 남기고. 남 몰래 사랑으로
  빛났을 눈동자, 아 한 번도 사나이 가슴을
  대 본 일이 없었기에 수밀도처럼 익었을
  젖가슴의 심장이나마 남은들 어떠리오. 허나
  조찰히 골만 누웠네요. 땅 속에 자라난
  무슨 기묘한 식물과도 같이. 아름다운 변신일까.
  그녀가 묻힌지 십 오년 만에 발굴된 무덤,
  이 제껴진 관 속에 쏟아지는 햇빛의 조롱이여.
  무덤 파는 일군의 굵직한 손가락이 골에 닿자 마자
  마디 마디 으러지는 그것은 가루, 보니 두골이
  치워진 자리엔 반쯤 담겨진 향수병 하나.


  향수

  고승의 골회에선 영롱한 사리가 나온다지만
  그녀의 고운 마음, 향수로 화함인가... 피도 힘줄도
  내장도 살도 그 몸을 감았던 베옷과 함께
  삭아서 검은 티끌 위에 호올로 숨 쉬는 향수병
  투명한 그 속에 반쯤 담기어, 상기 은밀히 떨고 있는
  향수의 내력을 어느 시인이 풀이할 수 있으리오.
  별에 흘렸던 그녀의 눈물, 잠결에 새어난
  한숨이 모여 향기로운 이슬다이 어리운 것일까.
  이젠 영원히 새어날 수도 없이,유리의 그릇 속에
  죽음을 뚫고 고여진 사랑. 허나 이 그지없이
  고귀한 향수에게 햇빛은 잔인해라, 차라리 흙을
  그 팍팍한 흙을 덮어라요. 다시 십 오 년이 지나간 뒤
  이곳에 길이 나고 집들이 선들, 그녀의 고혼이야
  깊고 어둔 흙 속에 보석으로 오롯이 맺히리니.


     회복기

  어머니, 눈부셔요.
  마치 금싸라기의 홍수 사태군요.
  창을 도로 절반은 가리시고
  그 싱싱한 담쟁이넝쿨잎 하나만 따 주세요.

  그것은 살아 있는 5월의 지도
  내 소생한 손바닥 위에 놓인
  신생의 길잡이, 완벽한 규범,
  순수무구한 녹색의 불길이죠.
  삶이란 본래 이러한 것이라고.
  병이란 삶 안에 쌓이고 쌍인 독이 터지는 것,
  다시는 독이 깃들지 못하게
  나의 살은 타는 불길이어야 하고
  나의 피는 끊임없이 새로운 희열의 노래가 되어야죠.

  참 신기해요, 눈물이 날 지경이죠
  사람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죽지 않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 창 밖에 활보하는 사람들,
  금싸라기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저것은 분명 걷는 게 아니예요.
  모두 발길마다 날개가 돋혀서
  훨훨 날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웃음소리, 저 신나게 떠드는 소리,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날까요.
  그것은 피가 노래하는 걸 거예요,
  사는 기쁨에서 절로 살이 소리치는 걸 거예요.

  어머니, 나도 살고 싶습니다.
  나는 아직 한번도 꽃 피어 본 일이 없는 걸요.
  저 들이붓는 금싸라기를 만발한 알몸으론
  받아 본 일이 없는 이 몸은 꽃봉오리
  하마터면 영영 시들 뻔하였던
  이 열 일곱 어지러운 꽃봉오리
  속을 맴도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머니, 당신 말고 누가 알겠어요.
  마지막 남은 미열이 가시도록
  이 좁은 이마 위에
  당신의 큰 손을 얹어 주세요.
  죽음을 쫓은 손,
  그 무한히 부드러운 약손을.

 

  변학규.1914년 경남 진양 출생. 호는 만춘. 진주 농고 졸업. "농은"지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여 시, 시조를 다수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사계사" "불과 재의 대화" "몸살난 진주" "변학규 시집" 등이 있다.

     목숨

  엄마 눈 눈맞추는
  젖꽃 문 아이같이

  방울 물 움켜 받는
  떨리는 손목같이

  내 목숨 푸름에 젖어
  날개 치는 저 높이.

  흰 눈을 털고 있는
  새움 튼 가지같이

  별빛을 쓰다듬는
  가슴 젖은 강물같이

  내 목숨 머릿물 터져
  출렁거리는 저 깊이.

 

[펌] 한국의 애송시 (1)   

2005/03/2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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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고향 | 목화송이
원문 http://blog.naver.com/zxc972003/20006537005
http://blog.naver.com/jja4423/100004442670
 

하이텔 동호회 시나라에서 퍼온 한국인의 애송시.
청하출판사에서 나왔죠. 한국인의 애송시 1,2,3 이라고... 정말 좋은 자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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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시집] 한국인의 애송시 1,2,3
저작권: 
등록자: 조정미(echang)                      up: 1999-08-10
파일명: lovepoem.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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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애송시 I
          제1권

  편집고문: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펴낸이:장석주
  펴낸곳:청하 출판사
  발행일:1985년 7월 25일
  묵자책의 페이지:437
  점자책의 페이지:
  입력기간:1992년 2월 15일
  입력 및 교정자:임종욱
  제작:부산맹인점자도서관

 

    차례

  서문

  작고시인 61인선

  한용운
  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
  꽃싸움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봄길

  이병기
  난초
  아차산
  오동꽃

  이광수
  붓 한 자루
  서울로 간다는 소

  김억
  봄바람
  삼수갑산

  오상순
  첫날밤

  남궁벽
  말

  황석우
  소녀의 마음
  초대장

  노자영
  불 사루자

  변영로
  논개

  김형원
  벌거숭이의 노래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주요한
  불놀이
  빗소리
  샘물이 혼자서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김동명
  파초
  내 마음은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북청 물장수
  강이 풀리면

  박영희
  유령의 나라

  박종화
  청자부

  백기만
  청개구리
  은행나무 그늘

  심훈
  그날이 오면
  밤

  오일도
  5월의 화단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향수

  김소월
  진달래꽃
  산유화
  초혼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
  접동새
  못잊어
  가는 길
  왕십리
  가막 덤불
  풀따기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청천의 유방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양주동
  산길
  산 넘고 물 건너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은상
  가고파

  박용철
  떠나가는 배
  고향
  눈은 내리네

  이육사
  청포도
  광야
  일식
  절정
  자야곡
  꽃
  호수
  황혼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저녁에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산수도
  추석
  임께서 부르시면

  유치환
  깃발
  바위
  생명의 서
  그리움
  의주ㅅ 길
  춘신

  신석초
  고풍
  바라춤

  이상
  거울
  꽃나무
  절벽
  오감도 15호

  김용호
  주막에서
  눈오는 밤에

  이호우
  개화
  난
  살구꽃 핀 마을

  김현승
  눈물
  플라타너스
  가을의 기도
  절대고독

  노천명
  사슴
  남사당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장만영
  달, 포도, 잎사귀
  비
  소쩍새
  길 손

  박목월
  나그네
  윤사월
  청노루
  산도화
  산이 날 에워싸고
  우회로
  난

  이영도
  백록담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

  윤동주
  서시
  별 헤는 밤
  참회록
  십자가
  자화상
  또 다른 고향

  조향
  Episode

  허민
  산록기

  김종문
  샤보뎅
  첼로를 켜는 여인
  의자

  한하운
  보리피리
  여인

  이동주
  강강수월래
  혼야

  조지훈
  승무
  고풍의상
  완화삼

  김수영
  풀
  달나라의 장난
  폭포
  눈

  김종삼
  북치는 소년
  그리운 안니, 로, 리
  시인학교

  한성기
  역

  공중인
  설야의 장

  박용래
  강아지풀
  월훈
  풀꽃
  저녁 눈
  황산메기
  겨울밤

  이인석
  도척의 개

  송욱
  장미
  개의 이유

  구자운
  청자수병
  우리들은 샘물에

  박인환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김관식
  옹손지
  연
  거산호

  이경록
  이 식물원을 위하여 5

    원로, 중견 85인선 I

  강계순
  안개속에서

  강민
  비가 내린다

  강우식
  사행시초
  타는 사랑은

  강인환
  귀

  고원
  모나리자의 손

  고은
  문의 마을에 가서
  신해가사
  투망
  삶
  화살
  조국의 별

  구경서
  정물

  구상
  초토의 시
  수난의 장

  구석봉
  백년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

  권국명
  나는 사랑이었네라

  권달웅
  감처럼

  권일송
  풀잎
  레오나르도  다빈치 서설

  김경린
  국제 열차는 타자기처럼

  김광규
  안개의 나라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김광균
  추일서정
  설야
  와사등

  김광림
  파리의 개
  석쇠

  김광협
  말씀

  김광희
  피리를 불자

  김규동
  오는구나 봄이
  곡예사

  김규태
  갇힌 뻐꾸기
  졸고 있는 신

  김규화
  솔베이지 노래를 주제로 한 시

  김남석
  길은 하난데

  김년균
  문의

  김남조
  목숨
  범부의 노래
  생명
  겨울바다
  정념의 기

  김달진
  단장
  체념

  김대규
  사랑 잠언

  김동현
  바람이

  김명수
  월식
  우리나라 꽃들에겐

  김사림
  가을

  김상억
  성터에서

  김상옥
  백자부

  김석규
  풀밭
  사랑에게

  김양식
  눈바람
  조춘

  김여정
  돌

  김영석
  감옥 3

  김영태
  호수근처
  한 잔 혹은 두 잔
  비빔밥

  김요섭
  음악
  꽃

  김용진
  소네트

  김용팔
  기원

  김원호
  과수원
  조카딸에게

  김유신
  천리향
  바람에 기대어

  김윤성
  나무
  애가

  김윤희
  첫눈

  김재원
  몸 부딪는 비둘기
  입만 다물면야

  김정웅
  배우일지 5
  돌아온 편지

  김종길
  고고
  하구에서

  김종원
  달팽이

  김종해
  향해일지 18

  김지하
  황톳길
  빈산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향
  이 평범한 풍경이여

  김차영
  부릅뜬 태풍의 눈

  김창완
  수유리의 침묵
  돌멩이

  김춘수
  꽃
  꽃을 위한 서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늪
  처용

  김해강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김형영
  여우
  모기

  김혜숙
  딸에게

  김후란
  설야
  포도밭에서

  나태주
  대숲 아래서

  낭승만
  가을의 기도

  노영란
  초야

  노향림
  가을편지

  마종기
  연가 9
  연가 12

  마종하
  비가
  배꽃이 피면

  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문덕수
  꽃과 언어
  손수건

  문병란
  코카콜라
  폐염전

  문충성
  이어도
  제주바다 1

  민영
  냉이를 캐며

  민재식
  밤에 산엘

  박경석
  졸본꾀꼬리

  박근영
  동정의 시

  박남수
  새
  종소리

  박두진
  해
  도봉
  묘지송
  청산도
  꽃
  당신의 사랑 앞에

  박봉우
  휴전선
  눈길 속의 카츄사

  박성룡
  교외
  바람 부는 날
  풀잎

  박의상
  풍뎅이
  아내와 함께

  박이도
  나의 형상
  바람의 손 끝이 되어

  박이문
  내 꿈속의 나비는

  박재륜
  편지

  박재릉
  서울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아득하면 되리라
  어떤 귀로
  천년의 바람
  자연
  가난의 골목에서는

  박정온
  차에서

  박정희
  술래의 편지

  박제천
  장자시
  사기등잔과 함께

  박태진
  무교동

  

 

 <한국인의 애송시>를 펴내면서

  이 시선집은 그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최남선, 이광수, 등의
신문학기 이후의 작고 시인으로부터 80년대의 신예 시인까지를 포괄하여
애송될 만한 작품들을 선정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오늘의
사회 전반을 침식, 부패시키는 불건강한 정서의 오염을 막고, 시적 정화와
의식의 혁신을 불러 일으키는 범문화적인 새바람을 일으키는 시의 애송을
생활화하고, 그에 따라 시정신이 주도하는 문화풍토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도시산업화 속의 획일화, 집단화, 익명화라는
변화지향의 압력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압력은 인간의 고유한 창조적
자아의 근거와 기반마저 위협하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때 시는
혼의 울림을 일으키는 넋의 어휘로서, 비인간화된 세계의 비인간적 힘에
굴복하여 박제화된 자아가 상실한 역동적 자유로움을 회복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시적 명상과 사고는 삶과 그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의미와
본질을 날카롭게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충실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그 값을 더하고, 그 빛을 더 밝게 한다.
  일찌기 한 시인은 시작행위를 ^6 236^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356 3^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시인들의 삶과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진정성의 밀도이다.
위대한 시인들은 바로 그러한 진정성의 밀도 속에 민족적 삶의 결을 담아
노래하려고 애써 왔다. 따라서 나날의 삶의 무의미하고 시시콜콜한 반복과
지리멸렬을 넘어서는 삶의 본질적인 국면 속에 깃들어 있는 궁국적 의미와 가치를
묻고 캐내는 시인들의 창조적인 작업은 그 자체로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그것은 시대의 혼란 속에 묻혀 흔히 간과되기 쉬운 진실의
전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마음에 새길 만한 민족적 자산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여기 <한국인의 애송시>의 시편들의 하나하나는 시인들의 살아
있는 얼과 뜻이 응축되어 있는 삶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은 1984년 여름에 처음 시작되었다. 애송시의 선정이라는 주관적
작업이 빠질 수 있는 객관성의 결핍을 보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지혜를
짜내 그에 따라 단계적으로 작업을 진행시키느라 많은 시간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먼저 KBS 방송국의 전국 애청자 1,296명을 대상으로
집계한 자료를 받아 일반의 애송시에 대한 기초자료를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서울의 10개 대학과 지방의 15개 대학의 국문과 학생들에게 조사한
설문지를 기준으로 하여 조금더 정밀한 기초자료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기대에 흡족할 만한 애송시 목록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금년 1월에 시인 150분의 명단을 작성하고,
애송시로 낭송될 만한 1) 1950년 이전에 발표된 시 10편과, 2) 1950년 이후
발표된 시 10편을 추천해 달라는 설문지를 발송하였고, 설문의 내용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까다로웠음에도 불구하고 82P의 회답을 얻었으며, 이
결과 <한국인의 애송시>의 전체적인 윤곽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현역시인 거의 모든
분들에게 <한국인의 애송시>의 기획의도를 밝히고, 거기에 수록할 만한
자천 시와 간단한 시인의 이력, 시적 경향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협조받았다. 그 작업의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분들이 빠짐없이
자료를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 자료를 토대로 최종적인 마무리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하여 최종적으로 집계된 시인들은 319분이었고 작품은 무려
599편이나 되는 방대한 책으로 묶여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다시 3부로
나누었는데 1부에서는 작고 시인 61분의 161편의 시를, 2부에서는
1945년도까지 출생한 시인 210분의 356편의 시를, 그리고 3부에서는
1945년도 이후에 출생하여 1979년도까지 문단에 등단한 시인 48분의 82편의
시를 2권으로 나누어 <한국인의 애송시>로 묶은 것이다. 시인들의 순서에는
1부에서는 작품활동 연대를 기준으로 했고, 2부와 3부에서는 가나다 순으로
했음을 덧붙여 밝혀둔다.
  워낙 많은 시인들의 시편을 다루었기 때문에 다소 무리한 점도 있었다.
예를들면 3부로 작품을 나누는 작업에서 중견과 신예시인을 구분함에 있어
출생연도에 비해 등단연도가 좀 늦었거나 빨랐을 경우 과연 중견과 신예를
출생연도에만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그리고 객관적 형평의
원칙이 지켜져야 할수록 시인을 선정하는 점에서, 시인별 수록 작품 편수를
결정하는 점에서 우리의 편견은 얼마나 잘 억제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끝으로 <한국인의 애송시>를 만드는 진행 과정에서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여러분들의 성함을 일일이 밝혀 고마움을 표하지 못하는 우리의
게으름도 용서를 구한다.

  1985년 5월 10일
  <한국인의 애송시> 편집고문
  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작고시인 61인선

 

  한용운. 1879 - 1944. 충남 홍성 출생. 호는 만해. 3.1운동 당시 불교계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 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작 전편을 통해 불교적인 사상이 개진되고 있다.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개혁자로서 또한, 위대한 민족 운동가로서 실천한 민족시인이었다.
시집으로 <님의 침묵>과 소설 <흑풍>및 저서 <불교유신론> <불교대전>
<신협담 주해> <한용운 전집>이 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읍니다. 아아 나의 사랑하는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읍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읍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았읍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꽃 싸움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읍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다.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울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 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울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히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히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읍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읍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오십니다.

 

  최남선. 1890 - 1957. 서울 출생이며 호는 육당.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
했고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잡지 <소년> 외에
<새별> <청춘> 등을 발간. 개화기 문화운동에 공이 크며 기미독립 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한 신문학 3대 천재 중 한분. 주요 저서로는 <백팔번뇌>
<조선역사> <역사일감> <시조유취> 등이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

  1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같은 높은 뫼 집채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2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결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3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4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조그만 산 모를 의지하거나
  좁쌀같은 작은 섬 손벽만한 땅을 가지고
  그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5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깊고 너르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저 따위 세상에 저 사람처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6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맞춰 주마.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봄 길

  버들잎에 구는 구슬 알알이 짙은 봄빛,
  찬 비라 할지라도 임의 사랑 담아 옴을
  적시어 뼈에 스민다 마달 수가 있으랴.

  볼 부은 저 개구리 그 무엇에 쫓겼관대
  조르르 젖은 몸이 논귀에서 헐떡이나.
  떼봄이 쳐들어 와요, 더위 함께 옵데다.
  저 강상 작은 돌에 더북할쏜 푸른 풀을
  다 살라 욱대길 제 그 누구가 봄을 외리.
  줌만한 저 흙일망정 놓쳐 아니 주도다.

 

  이병기. 1891 - 1968. 전북 익산 출생이며, 한성 사범을 졸업했다. 호는
가람. 1927년 <동광>에 시조 '고향으로 돌아갑시다'를 발표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국민학파>의 일원으로서 시조 부흥에 기여했다.
저서로는 시조집 <가람시조집> <역대시조선> <현대시조선총> 등과
<국문학개론> <가람문선> <국문학전사> 등이 있다.

     난초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느니라.


     아차산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오동꽃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이광수. 1892 - ?. 평북 정주 출생. 호는 춘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중퇴. 와세다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는 등
육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신문화 여명기의 개척자. 시집으로 <춘원시가집>이
있으며, 6.25 때 납북되어 생사불명.

     붓 한 자루

  붓 한 자루
  나와 일생을 같이 하란다.

  무거운 은혜
  인생에서 얻은 갖가지 은혜,
  언제나 갚으리
  무엇해서 갚으리 망연해도

  쓰린 가슴을
  부둠고 가는 나그네 무리
  쉬어나 가게
  내 하는 이야기를 듣고나 가게.

  붓 한 자루야
  우리는 이야기나 써볼까이나.


     서울로 간다는 소

  깍아 세운 듯한 삼방 고개로
  누른 소들이 몰리어 오른다.
  꾸부러진 두 뿔을 들먹이고
  가는 꼬리를 두르면서 간다.

  움머움머 하고 연해 고개를
  뒤로 돌릴 때에 발을 헛짚어,
  무릎을 꿇었다가 무거운 몸을
  한 걸음 올리고 또 돌려 움머.

  갈모 쓰고 채찍 든 소장사야
  산길이 험하여 운다고 마라.
  떼어두고 온 젖먹이 송아지
  눈에 아른거려 우는 줄 알라.

  삼방 고개 넘어 세포 검불령
  길은 끝없이 서울에 닿았네.
  사람은 이 길로 다시 올망정
  새끼 둔 고산 땅, 소는 다시 못 오네.

  안변 고산의 넓은 저 벌은
  대대로 네 갈던 옛터로구나.
  멍에에 벗겨진 등의 쓰림은
  지고 갈 마지막 값이로구나.

 

  김억. 1893 - ?. 평북 곽산 출생.호는 안서. 19때에 시 '미련'
'이별' 등을 발표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창조> <폐허>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프랑스의 상징파 시운동을 소개한 <오뇌의 무도>(1921)와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1923)를 내어 신시 운동의 선구자로 이바지했다. 김소월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 이 땅의 자유시, 서정시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었고 한글시에 압운을 주장, 정형시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6.25때
이북으로 납치되었다. 저서로는 <오뇌의 무도> <해파리의 노래> <안서시집>
<먼동이 틀 때> <망우초> 등이 있으며 <소월시초>의 편자로서도 알려져
있다.

     봄바람

  하늘 하늘
  잎사귀와 춤을 춤니다.

  하늘 하늘
  꽃송이와 입맞춥니다.

  하늘 하늘
  어디론지 떠나갑니다.

  하늘 하늘
  떠서 도는 하늘 바람은

  그대 잃은
  이 내 몸의 넋들이외다.


     산수갑산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어디메냐
  아하 산첩첩에 흰구름만 쌓이고 쌓였네.

  삼수갑산 보고지고
  삼수갑산 아득코나
  아하 촉도난이 이보다야 더할소냐.

  삼수갑산 어디메냐
  삼수갑산 내 못가네
  아하 새더라면 날아 날아 가련만도.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보고지고
  아하 원수로다 외론 꿈만 오락가락.

 

  오상순. 1894 - 1963. 서울 출생. 호가 공초인 그는 <폐허>동인으로 문단에
데뷔(1920)했다가 일제시에는 절필, 해방후 다시 붓을 들어 허무와 명상의
구도적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중앙고보, 보성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고 각지의 사원을 두루 다니며 참선의 생활도 했다. 1962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오상순시집>(1963)이 있다.

     첫날밤

  어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 바다 속에서
  어족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 야!
  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원의 성모 현빈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빰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고
  침침히 깊어 간다.

 

  남궁벽. 1895 - 1922. 평북 함열 출생. 호는 초몽. 서울 한성고보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폐허> 동인으로 참가하여 자연의 생명을 예찬한 낭만적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신뢰'^별의 아픔' 등이 유작시로 발표되었다.

     말

  말님.
  나는 당신이 웃는 것을 본 일이 없읍니다.
  언제든지 숙명을 체관한 것 같은 얼굴로
  간혹 웃는 일은 있으나
  그것은 좀처럼 하여서는 없는 일이외다.
  대개는 침묵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온순하게 물건을 운반도 하고
  사람을 태워 가지고 달아나기도 합니다.

  말님, 당신의 운명은 다만 그것뿐입니까.
  그러하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외다.
  나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악을 볼 때
  항상 내세의 심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당신의 은명을 생각할 때
  항상 당신도 사람이 될 때가 있고
  사람도 당신이 될 때가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황석우. 1895 - 1958. 서울 출생이며, 호는 상아탑. <폐허> 동인으로 활동,
문단에 데뷔(1915). 난해한 상징시로 서구 상징시의 선구자로 불리워졌으나
'장미촌' 시대에는 낭만주의로 전환하여 낭만주의 시인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장미촌>과 <조선문단>(1922) 발간.
조선일보 기자, 국민대 교무처장 등을 역임했고, 저서로 <자연송>(1929)이
있다.

     소녀의 마음

  소녀의 마음은 봄잔디 풀!
  그는 밟으면 으크러지고 
  그는 불대면 터진다.

  소녀의 마음은 유리 풍경
  그는 바람 부딪치면 울리고
  그는 내던지면 깨진다.


     초대장

  꽃동산에서 산호탁을 놓고
  어머님께 상장을 드리렵니다.
  어머님께 훈장을 드리렵니다.
  두 고리 붉은 금가락지를 드리렵니다.
  한 고리는 아버지 받들고
  한 고리는 아들딸, 사랑의 고리
  어머님이 우리를 낳은 공로훈장을 드리렵니다.
  나라의 다음가는 가정상, 가정훈장을 드리렵니다.
  시일은 ^6 236^어머니의 날^356 3^로 정한
  새 세기의 봄의 꽃.
  그 날 그 시에는 어머님의 머리 위에
  찬란한 사랑의 화환을 씌워 주세요.
  어머님의 사랑의 공덕을 감사하는 표창식은
  하늘에서 비가 오고 개임을 가리지 않음이라.
  세상의 아버지들, 어린이들
  꼭, 꼭, 꼭, 와 주세요.
  사랑의 용사,
  어머니 표훈식에 꼭 와 주세요.

 

  노자영. 1898 - 1940. 호는 춘성.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집 <내 혼이
불탈 때는> <처녀의 화환>을 간행하기도 했다. <시인문학>을 직접
주재하기도 했고, 평론집 <인생 안내>를 간행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감상적인 연정에 바탕을 둔  서정주의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불 사루자

  아, 빨간 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피, 나의 뼈, 나의 살!
  <전적> 자아를 모두 태워 버리자!

  아, 강한 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몸에 붙어 있는 모든 애착, 모든 인습
  그리고 모든 설움 모든 아픔을
  <전적> 자아를 모두 태워  버리자.

  아, 횃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몸에 숨겨 있는 모든 거짓, 모든 가면을
  오 그러면 나는 불이 되리라
  타오르는 불꽃이 되리라
  그리하여 불로 만든 새로운 자아에 살아 보리라.

  불 타는 불, 나는 영원히 불나라에 살겠다
  모든 것을 사루고, 모든 것을 녹이는 불나라에 살겠다.

 

  변영로. 1898 - 1961. 서울 출생. 호는 수주. 미국 산호세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 이화여전, 성균관대 교수 역임. <폐허> 동인으로 활동.
'정신계의 생명은 영원히 산다^356 3^는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제1회
<문화상>을 수상(1948)했고, 시집으로는 <조선의 마음>(1924)과 영문시집 <아젤리아>
등 다수를 발표하였다.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렬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릿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훈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김형원.1901 - ?. 충남 강경 출생. 호는 석송. 보성고보 중퇴. 1920년대에
문단에 데뷔하여 <개벽>에 미국의 민중 시인 휘트먼을 소개하였으며, 민중,
민족주의적인 긍정적 세계를 지향하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아,
지금은 새벽 4시> <내가 조물주라면> <생장의 균등> <벌거숭이의 노래>
등이 있다. 6.25때 이북으로 피납되었다.

     벌거숭이의 노래
 
  1
  나는 벌거숭이다.
  옷같은 것은 나에게 쓸 데 없다.
  나는 벌거숭이다.
  제도 인습은 고인의 옷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시비도 모르는, 선악도 모르는.

  2
  나는 벌거숭이다. 그러나 나는
  두루마기까지 갖추어 단정히 옷을 입은
  제도와 인습에 추파를 보내어 악수하는
  썩은 내가 몰씬몰씬 나는 구도덕에 코를 박은,
  본능의 폭풍 앞에 힘없이 항복한 어린 풀이다.

  3
  나는 어린 풀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나에게는 오직 생명이 있을 뿐이다.
  태양과 모든 성신이 운명하기까지,
  나에게는 생명의 감로가 내릴 뿐이다.
  온 누리의 모든 생물들로 더불어,
  나는 영원히 생장의 축배를 올리련다.

  4
  그리하여 나는 노래하려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감투를 쓴 사람으로부터
  똥통을 우주로 아는 구더기까지.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그대들에게 이러한 노래를
  (모순되는 듯한 나의 노래를)
  서슴지 않고 보내는 것을 기뻐하라.
  새로운 종족아! 나의 형제들아!
  그대들은 떨어진 옷을 벗어던지자.
  절망의 어둔 함정을 벗어나고자 힘을 쓰자.

  5
  강장한 새로운 종족들아!
  아침 해는 금 노을을 친다.
  생장의 발은 아직도 처녀이다.
  개척의 괭이를 들었느냐?
  핏기 있는 알몸으로 춤을 추며,
  굳세인 목소리로 합창을 하자-

  6
  나는 벌거숭이다.
  우리는 벌거숭이다.
  개성은 우리가 뿌릴 ^6 236^생명의 씨^356 3^이다.
  우리의 밭에는 천재자변도 없다.
  우리는 오직 어린 풀과 함께
  햇빛을 먹고 마시고 입고,
  길이길이 노래만 하려 한다.

 

  이상화. 1900 - 1941. 경북 대구 출생. 호는 상화. 일본 동경 외국어학교
불어과 졸업. 월탄, 팔봉 등과 <빽조>를 창간(1921). 중국대륙을 방랑하며
낭만적이고  상징적인 시를 썼으며, 잘 알려져 있는 '나의 침실로'는
18세때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며
  종달이는 울타리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다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멀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몸 신명이 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나의 침실로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목거지에 다니로라 피곤하여 돌아 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 덧 첫닭이 울고-뭇개가 짓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씸지를 더우 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울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므나. 사원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가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주요한. 1900 - 1979. 평남 평양 출생이며, 호는 송아. <창조> 동인으로
우리나라 신시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며 전원과 자연을 구가한
낭만적인 세계를 노래한 시인. 주요 작품으로는 '불놀이'(1919)가 있고,
시집 <아름다운 새벽>(1924)) <3인의 시가집>(1929:이광수, 김동환 공저)
및 <복사꽃>(1930)이 있다.

     불놀이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 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
위에서 내려다 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하늘을 깨물은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으며, 혼자서 어둔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위에 내어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멀출 리가 있으랴?-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 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속에... 그런데,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 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사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높은 언덕 위에
허어옇게 흐느끼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봄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 박히고, 물결치는
뱃속에서 졸음오는 리듬의 형상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 없는 장구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 깃 위에 조을 때, 뜻 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젖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컴컴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저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거늘-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빗소리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샘물이 혼자서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사이로

  하늘은 밝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홍사용. 1900 - 1947. 경기 수원 출생. 호는 노각이며, 휘문의숙을 졸업했다.
<백조> 동인으로 감상적이며 애수가 어린 서정시를 발표하여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불린다. 신극운동에 투신, 희곡작가로도 활동한
그는 <토월회> 멤버이기도 했다. 시와 수필, 회상기 등의 작품 다수를 발표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6 236^젖 주셔요^356 3^ 하는 그
소리였읍니다마는, 그것은 ^6 236^으아^356 3^-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말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갈 때에도
  어머님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아픈 눈물울
흘리셨답니다.
  벌거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이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섦게 울어버렸오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으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 한 쌀 먹던 해 오월 열 나흗 날 밤 맨 잿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뭇군의 산 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 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둣군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는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좋아 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 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 때부터 눈물의 왕은-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눈물의 왕-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김동명. 1901 - 1968. 강원 강릉 출생. 호는 초허.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신다면'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923).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전원에 묻혀 참신하고 투명한 서정으로 민족의
비애를 노래한 전원파 시인. 해방후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신이 높은
참여의 시인이었으나 종교인이었던 만큼 관조적이며 철학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는 <파초>(1938), <삼팔선>(1947), <목격자>(1957)와
수필집 <세대의 삽화>(1958) 등이 있다.

     파초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 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마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라.


      내 마음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환. 1901 - ?. 함북 경성 출생. 호는 파인. <금성>에 시를 발표,
데뷔한 이후 잡지 <삼천리>와 순문예지 <삼천리 문학>을 간행했다.
우리나라 신시사상 최초의 서사시집 <국경의 밤>(1925)을 출간하여 문단적
위치를 확고히 했고 시집으로 <승천하는 청춘>(1925), <해당화>(1942) 등을
발표했으나 6.25 때 납북되어 생사불명이다.

     산 너머 남촌에는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였다 이어 오는 가느단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북청 물장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강이 풀리면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며는 임도 탔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임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박영희. 1901 - ?. 호는 희월. <백조> 동인으로 1924년 이후 예맹파로
전향하여 카프의 중심 멤버가 되었으나 1933년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고 전향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희월시초>가 있고 6.25 때 납북된 후 생사불명이다.

     유령의 나라

  꿈은 유령의 춤추는 마당
  현실은 사람의 괴로움 불붙이는
  싯벌건 철공장

  눈물은 불에 단
  괴로움의 찌꺼기
  사랑은 꿈속으로 부르신 여신!

  아! 괴로움에 타는
  두 사람 가슴에
  꿈의 터를 만들어 놓고
  유령과 같이 춤을 추면서
  타오르는 사랑은
  차디찬 유령과 같도다.

  현실의 사람 사람은
  유령을 두려워 떠나서 가나
  사랑을 가진 우리에게는
  꽃과 같이 아름답도다.

  아! 그대여!
  그대의 흰 손과 팔을
  저 어둔 나라로 내밀어 주시오

  내가 가리라, 내가 가리라.
  그대의 흰 팔을 조심해 밟으면서!
  유령의 나라로, 꿈의 나라로
  나는 가리라! 아 그대의 탈을-.

 

  박종화. 1901 - 1981. 서울 출생. 호는 월탄. <백조> 동인이며, 시동인지
<장미촌>을 통해 시작활동을 했다. 상징에 의한 낭만적 감상에 젖어 있는
그의 시는 민족적 전통 의식에 기조를 두고 있다. 시 '밀실로
들어가다'와 소설 '목매는 여자' 등이 그의 출세작이나
주로 역사 소설가로 알려지고 있다.시집 <흑방비곡>(1924),
<청자부>(1946)와 소설 <다정불심> <금삼의 피> <전야> <민족> <대춘부>
<임진왜란> 등이 있고 수필집 <청태집>(1942)이 있다.

     청자부

  선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려
  보살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 청자기!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벼개
  흙이면서 옥이더라.

  구름무늬 물결무늬
  구슬무늬 칠보무늬
  꽃무늬 백학무늬
  보상화문 불타무늬
  토공이요 화가더냐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

 

  백기만. 1901 - ?. 대구출생. 호는 목우.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했고
1920 - 25년 사이에 문단에 등단했다. 3.1운동 때 대구 학생운동의
주모자로 투옥, 해방될 때까지 항일운동을 했다. <금성>을 통해 정열적인
시를 발표한 순정 비분파의 시인. 6.25 때 납북되었다.

     청개구리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차디찬 비 맞은 나뭇잎에서 하늘을 원망하듯
치어다보며 목이 터지도록 소리쳐 운다.

  청개구리는 불효한 자식이었다. 어미의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어미 청개구리가 <오늘은 산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물에 가서 놀았고,
또, <물에 가서 놀아라> 하면 그는 기어이 산으로 갔었느리라.

  알뜰하게 애태우던 어미 청개구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떠나려 할 때,
그의 시체를 산에 묻어 주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모로만 가는 자식의 
머리를 만지며 <내가 죽거든 강가에 묻어다고!> 하였다.

  청개구리는 어미의 죽음을 보았을 때 비로소 천지가 아득하였다.
그제서야 어미의 생전에 한 번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뼈 아프게
뉘우쳐졌다.

  청개구리는 조그만 가슴에 슬픔을 안고, 어미의 마지막 부탁을 쫓아 물
맑은 강가에 시체를 묻고, 무덤 위에 쓰러져 발버둥치며 통곡하였다.

  그 후로 장마비가 올 때마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였다. 싯벌건 황토물이
넘어 원수의 황토물이 넘어 어미의 시체를 띄워갈까 염려이다.

  그러므로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고는 먹을
줄도 모르고 자지도 않고 슬프게 슬프게 목놓아 운다.


     은행나무 그늘

  훌륭한 그이가 우리집을 찾아왔을 때
  이상하게도 두 뺨이 타오르고 가슴은 두근거렸어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바느질만 하였어요.
  훌륭한 그이가 우리집을 떠날 때에도
  여전히 그저 바느질만 하였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이에게 선물하였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이가 돌아간 뒤에 뜰 앞 은행나무 그늘에서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노래를 불렀어요.
  우리 집 작은 고양이는 봄볕을 흠뻑 안고 나무가리 옆에 앉아
  눈을 반만 감고 내 노래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 노래가 무엇을 말하였는지 누가 아시리까?

  저녁이 되어 그리운 붉은 등불이 많은 꿈을 가지고 왔을 때
  어머니는 젖먹이를 잠재려 자장가를 부르며 아버지를 기다리시는데
  나는 어머니 방에 있는 조그만 내 책상에 고달픈 몸을 실리고 뜻도 없는
책을 보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 책에서 보고 있었는지 모르시리다.

  어머니, 나는 꿈에 그이를, 그이를 보았어요.
  흰 옷 입고 초록 띠가 드리운 성자 같은 그리운 그이를 보았어요.
  그 흰 옷과 초록 띠가 어떻게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누가 아시리까?
  오늘도 은헹나무 그늘에는 가는 노래가 떠돕니다.
  고양이는 나무 가리 옆에서 어제같이 조을고요.
  하지만 그 노래는 늦은 봄 바람처럼 괴롭습니다.

 

  심훈. 1901 - 1936. 서울 출생. 본명은 대섭이다. 1935년 동아일보에
소설 '상록수'가 당선하여 문단에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항시는 해방 후에 출간 되었는데 시에 담긴 고귀한 정신은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집으로는 <그날이 오면>(1949)이 있다.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밤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정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 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에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 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오일도. 1901 - 1946. 경북 영양 출생이며, 본명은 희병이다. 서울에서
중학교편을 잡으며 시단에 등단, 1935년 <시원>지를 창간하여 5호까지
주재했다. '시문학'파의 흐름을 받아 우수어린 순수시를
지향한 시인이다.

     5월의 화단

  5월의 더딘 해 고요히 나리는 화단

  하루의 정열도
  파김치같이 시들다.

  바람아, 네 이파리 하나 흔들 힘 없니!

  어두운 풀 사이로
  월계의 꽃 조각이 환각에 가물거린다.


     누른 포도잎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오늘도 나는 비 들고
  누른 잎을 울며 쓰나니

  언제나 이 비극 끝이 나려나!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김상용. 1902 - 1950. 경기 연천 출생. 호는 월파.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35년 <시원>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첫시집
<망향>(1939)에 '남으로 창을 내겠소'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시집을 통해 명랑하고 관조적인 시세계를 깔끔한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깔 이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향수

  인적 끊긴 산 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김소월. 1902 - 1934. 평북 곽산 출생이며, 본명은 정식. 오산학교
시절의 스승 김억의 영향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개벽>에
'진달래꽃'(1922)을 발표,김동인과 함께 <영대>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아름다운 서정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적 시형에 향수, 애수 등을 담아 독자적인 세계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다 운영 실패 등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져 33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시집으로는 <진다래꽃>(1925) 외에
최근에 나온 <먼 후일 그 때에>(1983) 등이 있다.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찌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초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그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금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임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뒷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읍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못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홀려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상마루에 걸려서 운다.


     가막 덤불

  산에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뿔 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산에는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바로 말로
  집도 있는 내 몸이라오

  길에는 혼잣몸의
  홑옷 자락은
  하룻밤 눈물에는
  젖기도 했소

  산에는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불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풀따기

  우리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울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엾는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이장희. 1902 - 1928. 경북 대구 출생이며, 호는 고월이다. 1924년
<조선문단>을 통해 시단에 등단했으며, <금성>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란 광채없고 탄력성 없는 굵다란 철사선이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 그는 인생과 사회에 대한 몸부림 속에서 27세 때
음독자살한 천재시인이다. 전해지는 작품은 300여 편인데 주로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우리로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청천의 유방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별을 놓으며
  불룩한 유방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 송이보다 더 아름다와라.

  탐스러운 유방을 볼지어다.
  아아 유방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이때야말로 애구의 정이 눈물 겨웁고
  주린 식욕이 입을 벌리도다.
  이 무심한 식욕
  이 복스러운 유방...
  쓸쓸한 심령이여 쏜살같이 날라지어다.
  푸른 하늘에 날라지어다.

 

  김영랑. 1903 - 1950. 전남 강진 출생. 본명은 윤식이며 동경
청산학원에서 수학했다. <시문학> 동인으로 정지용, 박용철과 작품을
발표하였던 그는 언어의 리듬을 시의 제의적인 것으로 주장, 우리에게
알려진 서정시인이다. 해방 후의 작품들은 당시 상황에 비춘 작품들을
밢표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작품들은 고향의 미를 추구한 것으로
예술지상주의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6.25 동란 때 포탄의
파편으로 변사. 시집으로 <영랑시집>(1935), <영랑시선>(1956)이 남아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어느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르러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은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은 골 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우리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뜨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양주동. 1903 - 1977. 개성 출생. 호는 무애. 와세다대학 불문과 졸업.
<금성>지와 <문예공론>을 발간하면서 '조선의 맥박' 등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대체로 시인 비평가로서의 그의 문단활동은
1922 - 1935년 경까지이며 그 뒤는 향가의 해독과 고려가요의 연구 등
국문학 연구에 전심했다. 그의 시세계의 특징은 민족과의 정신적 연대성,
그리고 가요적인 서정성에 있다.

     산길
  1
  산길을 간다, 말 없이
  호울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그윽히 들리는

  산길을 간다, 말 없이
  밤에 호올로 산길을 간다.

  2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별 안 보이는 어두운 수풀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멀다.

  3
  꿈같은 산길에
  화톳불 하나.

  (길 없는 산길은 언제나 끝나리)
  (캄캄한 밤은 언제나 새리)

  바위 위에
  화톳불 하나.


     산 넘고 물 건너

  산 넘고 물 건너
  내 그대를 보려 길 떠났노라.

  그대 있는 곳 산 밑이라기
  내 산 길을 토파 멀리 오너라.

  그대 있는 곳 바닷가라기
  내 물결을 헤치고 멀리 오너라.

  아아, 오늘도 잃어진 그대를 찾으려
  이름 모를 이 마을에 헤매이노라.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 나랏 사람은
  마음이 그의 옷보다 희고,
  술과 노래를
  그의 아내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착하고 겸손하고
  꿈많고 웃음 많으나,
  힘없고 피없는
  이 나랏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 나랏 사람은
  마음이 그의 집보다 가난하고
  평화와 자유를
  그의 형제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외로웁고 쓸쑬하고
  괴로움 많고 눈물 많으나,
  숨결있고 생명있는
  이 나랏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은상. 1903 - 1980. 경남 마산 출생. 호는 노산. 연희전문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업했다. 동아일보에 '어포 달 밝은 밤에'를
발표하여 문단활동을 시작. 이화여전, 호남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시조집에 <노산시조집> <노산시조선집> <푸른 하늘의 뜻은>, 기행문에
<향산유기> <탐라기행 한라산> <기행 지리산> <피어린 육백리> 등이 있다.

     가고파

  -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 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 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찬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박용철. 1904 - 1938. 전남 광산 출생. 호는 용아. 일본 동경 외국어대
독문과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0년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동인지 <시문학>을 창간했고 이어 <문예월간>과 순수 문예지 <문학>을
창간하여 태서문학파의 문학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박용철 전집>
전 2권이 1940년에 출간되었다.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고향

  고향은 찾어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대
  저녁 까마귀 가을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로 옛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 하리.

  하늘 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 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눈은 내리네

  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내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내리어
  우리 함께 빌 때러라.

 

  이육사. 1904 - 1944. 경북 안동 출생. 본명은 원록이며 아명은
원삼이다. 중국 북경 대학 사회학과 졸업. <자오선> 동인으로 활약하다가
일본 관헌에 피검되어 북경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제의 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감방 번호가 264였기 때문에 육사라 했다고 한다. 34편의 시를
남겼고 광복 후에 출간된 <육사시집>이 있다.

     청포도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며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리.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식

  쟁반에 먹물을 담아 비쳐 본 어린 날
  불개는 그만 하나밖에 없는 내 날을 먹었다.

  날과 땅이 한줄 위에 돈다는 그 순간만이라도
  차라리 헛말이기를 밤마다 정녕 빌어도 보았다.

  마침내 가슴은 동굴보다 어두워 설레인고녀
  다만 한 봉오리 피려는 장미 벌레가 좀치렸다.

  그래서 더 예쁘고 진정 더없지 아니하냐
  또 어디 다른 하나를 얻어
  이슬 젖은 별빛에 가꾸련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갈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켜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자야곡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 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돌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절여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소리

  숨 막힐 마음 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노라.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순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움직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 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호수

  내어 달라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 씻은 듯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워 흑흑 흐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놓이는 동안
  자줓빛 안개 가벼운 명상같이 내려 씌운다.


     황혼

  내 골방의 커어틴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월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산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어틴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길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김광섭. 1905 - 1977. 함북 경성 출생. 호는 이산.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때 반일 혐의로 4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애탄하며 많은 글을 남긴 그는 <극예술 연구회>에도
참가. <서울시문화상>(1957), <국민훈장 모란장>(1970),
<예술원장상>(1974)을 수상했으며 <동경> <마음> <해바라기> <성북동
비둘기> <반응> 등의 시집이 있다.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인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꽈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신석정. 1907 - 1974. 충남 서천 출생. 시 ^6 236^선물^356 3^이
<시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1930). 도회지를 멀리 떠나 전원생활을
하며 부단히 움직이는 역사와 더불어 응결된 서정시를 발표한 그는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촛불>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와 역시집 <중국 시집> <매화 시집> 등이 있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빛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이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밤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울부터 우리 정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읋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읍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읍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읍니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산수도

  숲길같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 구름 한가히 하늘을 지난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바람이 넘어 닥쳐 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시내물 여운 옥인 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 흘러 만 년만 가리...

  산수는 오로지 한폭의 그림이냐?


     추석

  가윗날 앞둔 달이 지치도록 푸른 밤,
  전선에 우는 벌레 그 소리도 푸르리.

  소양강 물 소리며 병정들 얘기소리,
  그 속에 네 소리도 역력히 들려오고.

  추석이 내일 모레, 고무신도 사야지만,
  네게도 치약이랑 수건도 부쳐야지...


     임께서 부르시면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릱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유치환. 1908 - 1967. 경남 충무 출생이며 호는 청마. 연회전문 문과에서
수학했으며 동인지 <생리>를 발간(1929)하기도 했다.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1931). 생명과 자연, 허무와
신을 노래한 시인으로 14권의 시집과 수상록을 발간했다.  시집으로는
<청마시초> <생명의 서> <울릉도> <보병과 더불어> <청령일기> 외에 다수의
작품집이 있다.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수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생명의 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에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6 236^나^356 3^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6 236^나^356 3^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찌기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의주ㅅ 길

  장안을 나서서 북쪽가는 천 리 길
  아카시아 꽃수술에 꿀벌 엉기는
  이 길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안하리니

  속눈썹 감실감실 사랑한 너야
  이대로 고이 나는 너를 하직하노니
  누가 묻거들랑 울지 말고 모른다 하소.

  천리 길 너 생각에 하염없이 걷노라면
  하늘도 따사로이, 뒷등도 따사로이
  가며가며 쉬어쉬어 울 곳도 많아라.


     춘신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에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신석초. 1909 - 1976. 충남 서천 출생. 본명은 응식이며 일본 호오세이
대학에서 수학했다. 1935년 <자오선> 동인으로 시를 쓰기 시작, 한때
발레리에 심취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신석초시집> <바라춤>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고풍

  분홍색 회장저고리
  남끝동 자주 고름
  긴 치맛자락을
  살며시 치켜들고
  치마 밑으로 하얀
  외씨버선이 고와라.
  멋들어진 어여머리
  화관 몽두리
  화관 족두리에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새 치장하고 다소곳이
  아침 난간에 섰다.


     바라춤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 없는 꽃잎으로 살어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이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이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 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서러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 어리는 형역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처럼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이상. 1910 - 1937. 서울 출생. 본명은 김해경. <조선과 건축>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다.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연재하다가 각계의 비난을 받고 중단(1934)했고, <조광>에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1936)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암담한
생활에 대한 회의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지병인 폐환으로 27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유작으로 <이상전집>이 있다.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
하야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런흉내를내었소.


     절벽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
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처거
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
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
-보이지도않는꽃이.


     오감도. 15

  1
  나는거울없는실내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외출중이다. 나는지금거울속
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음모를
하는중일까.

  2
  죄를품고침상에서잤다. 확실한내꿈에나는결석하였고의족을담은군용장화
가내꿈의백지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실내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해방하려고그러나거울속
의나는침울한얼굴로동시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미안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영오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영오되어떨고있다.

  4
  내가결석한나의꿈내위조가등장하지않는내거울무능이라도좋은나의고독의
갈망자다. 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자살을권유하기로결심하였다. 나는그
에게시야도없는들창을가르치었다. 그들창은자살만을위한들창이다. 그러나
내가자살하지아니하면그가자살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
불사조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심장의위치를방탄금속으로엄폐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
겨누어권총을발사하였다. 탄환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하였으나그의심장은바
른편에있다.

  6
  모형심장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 내가지각한내꿈에서나는극형을받
았다. 내꿈을지배하는자는내가아니다. 내가악수조차할수없는두사람을봉쇄
한거대한죄가있다.

 

  김용호. 1912 - 1973. 경남 마산 출생. 호는 학산, 야돈, 추강이다.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맥> 동인으로 활동했다. <자유
문학상>(1956)을 수상했고 시집으로는 <향연> <해마다 피는 꽃> <날개>
<의상세례>와 서사시 '남해찬가' 등이 있다.

     주막에서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의 슬픈 노정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 있는 송덕비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빗긴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눈오는 밤에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 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 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이호우. 1912 - 1970. 경북 청도 출생. 호는 이호우. <문장>지에
'달밤'이 추천(1940)되어 문단에 데뷔, 낙동강인으로
활약했다. 제1회 <경북 문화상>을 수상. 시조집으로 <이호우 시조집>과,
누이 이영도와 함께 낸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고금 시조 정해> 등이
있다.

     개화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난

  벌 나빈 알 리 없는
  깊은 산 곳을 가려

  안으로 다스리는
  청자빛 맑은 향기

  종이에 물이 스미듯
  미소 같은 정이여.


     살구꽃 핀 마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김현승. 1913 - 1975. 전남 광주 출생. 호는 남풍, 다형. 숭실전문시절
<동아일보>에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이
발표됨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지적이고 건강한 생리를 지닌 기독교적 주지
시인이다. <서울시 문화상>(1973)을 수상. 시집으로는 <김현승 시초>
<옹호자의 노래> <절대 고독> <김현승 시선집> 등이 있다.

     눈물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는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플라타나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나스,
  너는 내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너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나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길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절대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혼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인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때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는.

  노천명. 1913 - 1957. 황해 장연 출생.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진내며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여성> 등의
여기자로 활동하며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여류시인. 시집으로 <산호림>
<창변> <별을 쳐다보며>  <사슴의 노래>와 수필집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 등의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너머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삽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장만영. 1914 - 1976. 황해 연백 출생. 호는 초애. 일본 미자키
영어학교를 졸업. 유학시절 <동광>에 시 '봄노래'가 김억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는 이미지즘을 바탕으로 했으며 현실
의식이 크게 반영된 작품과 농촌적 이미지화라는 두 개의 의식을 이중으로
노출시킨 세련된 시로 평까받고 있다. 시집으로 <양> <축제> <유년송>
<밤의 서정> <저녁 종소리>와 자작시 해설집 <이정표> 등이 있다.

     달, 포도, 잎사귀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덩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비

  순이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수정처럼 맑다.
  비는 하이얀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한종일 은빛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스한다.
  비는 입술이 함씬 딸기물에 젖었따.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벚꽃 향기 풍기는 황혼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순이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 앉을 때

  비는 밤 깊도록 창 밖에서 종알거리다가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고 보이지 않는다.


     소쩍새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 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 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 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길손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한 권의 조이스 시집과
  한 자루의 외국제 노란 연필과
  때 묻은 몇 권의 노트와
  무수한 담배꽁초와
  덧없는 마음을 그대로
  낡은 다락방에 남겨 놓고
  저녁놀 스러지듯이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날마다 떼지어 날아와 우는
  검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 속에서
  슬픈 세월 속에서
  아름다운 장미의 시
  한편 쓰지 못한 채
  그리운 벗들에게 문안편지
  한 장도 내지 못한 채
  벽에 걸린 밀레의
  풍경화만 바라보며 지내던
  길손이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산등 너머로 사라진
  머리처네 쓴 그 아낙네처럼
  떠나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영겁의 외로운 길손
  붙들 수조차 없는 길손과의
  석별을 서러워 마라.
  닦아 놓은
  회상의 은촛대에
  오색 촛불 가지런히
  꽃처럼 밝히고
  아무 말 아무 생각하지 않고
  차가운 밤하늘로 퍼지는
  먼 산사의 제야의 종소리 들으며
  하룻밤을 뜬 채 세우자.

 

  박목월. 1916 - 1978. 경북 경주 출생. 대구 계성중학을 졸업했다.
<문장>지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해방후, 좌익 우익의
대립 양상 속에서 <청록파> 동인을 만들어 민족적 서정시집인
<청록집>을 발간했다. 예술원 회원으로 시전문지 <심상>을 발행하여 많은
시인을 배출했으며, 시집으로 <산도화> <난, 기타> <행복의 얼굴> <경상도
가랑잎>, 자작시 해설집인 <보랏빛 소묘>가 있다.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윤사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운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오리목
  속잎 피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산도화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우회로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를
  내가 내려간다.


     난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나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이영도. 1916 -  경북 청도 출생. 호는 정운. <죽순>에 시조를
발표(194)하면서 데뷔했다. 고유한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인생에 대한
관조를 간결한 수사로 구현한 그는 시조집 <청저집>과  수필집인
<청근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 <머나먼 사념의 긺목> 등이 있다.

     백록담

  차라리 스스로 달래어
  싸느라니 고였는가

  그 날 하늘을 흔들고
  아우성치던 불길

  투명한 가슴을 열고
  여기 내다뵈는 상채기.

 

  함형수. 1916 - 1946. 함북 경성 출생. <시인부락> 동인으로 창간호에
시 '해바라기의 비명'을 발표하면서 데뷔. 일종의 데카당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으로, 심한 정신 착란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전
작품은 10여 편에 불과하나 1930년대 후반기 시인으로 유명하다.

     해바라기의 비명
  -청년화가 ㄴ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깥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윤동주. 1917 - 1945. 북간도 명동촌 출생. 아명은 해환이다. 연희전문과
일본 도오지샤 대학을 다녔으며, 재학중 독립운동의 혐의를 받아 2년의
선고를 받고 큐우슈의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자아에 대한
내적응시와 조국광복의 염원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 유고 30여 편을
묶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에 발간되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6 236^프랑시스 잠^356 3^,
^6 236^라이너 마리아 릴케^356 3^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읍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읍니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밤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조향. 1917 - 1984. 경남 사천 출생. 본명은 섭제, 니혼 대학 상경과
수학. <매일신보> 신춘문예로 등단(1941)하여 동인지 <노만파>
<일요문학>을 주제했으며 <후반기> 동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시에 외래어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종래의 산문적 설명적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여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풍을 확립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화집
와 소설 <구관조> 등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Episode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 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쁜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몰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쳐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

 

  허민. ? - 1943. 출생연도나 출생지가 확실치 않은 시인으로 미발표 유작
백여 편이 남아 있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유고시집 제8권(이중 3, 4권
분실)을 남겼으며 동시대 시인인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산렵기

  추석 이튿날 그와 바람 없는 골에 들어
  산새들이 먹다 남긴 산과를 따며

  산 밖을 나가는 날의 설움을 잊어보려고
  가재 웅크린 개울에서 노래도 불렀드니라

  전설도 없는 이 산천 깊숙한 넌출아래
  가지고 오신 괴로움을 모다 묻어두어서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 짐승들로하여
  다양한 봄날을 기다려 파 내도록 당부하였드니라.

  허울차게 태고의 꿈이 감긴 교목에
  유원한 한숨을 보여 주시는 너드렁이 비탈

  머루랑 다래랑 으름이랑 한껏
  그와 노나먹으며 철없이 잠들었드니라.

 

  김종문. 1919 - 1981.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오꼬오 아테네 프랑세
졸업. 평론 ^6 236^문학의 문화에 미치는 영양에 대해^356 3^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 균형잡힌 지성을 바탕으로 폭넓은 미학의 질서를 보여준 그는
파이프 시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시집으로 <벽> <불안한 토요일>
<시사시대> <인간조형> <신시집> 등이 있다.

     샤보뎅

  하늘에서 모래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간은 바람결에 소리를 내며
  이루고 있었다. 평원과 산을
  생각하는 모래알처럼.

  인간이 죽어간 폐허 위에
  집을 지으며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었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생각하며.

  사막에서 떠나 살 수 없는 체념에서 해골바가지를 들고
  오아시스를 찾는 여정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태양이 흘리며 간 적은 피자국들은
  뉘의 눈에도 뛰우지 않았다.
  태양의 유형처럼.

  하늘에서 모래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사막
  저 멀리 사막 사이를 가고 있었다.
  검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운 여인이.


     첼로를 켜는 여인

  무대는 여인의 차지다.

  부푼 유방, 파인 허리, 부푼 만삭,

  긴 머리채로 가리우고, 긴 팔로 가리우고

  진동하는 저음, 아가의 고성을 묻고,

  비트는 긴 모가지, 꼬아 붙이는 두 다리,

  객석은 남자의 차지다.


     의자

  내가 서양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의자이다.
  그렇지만 나의 의자는
  바로크풍이나 로마네스크풍과는 거리가 멀고
  더우기 대감들이 즐기던 교의 따위도 아니다.
  나의 의자는 강원도산 박달나무로
  튼튼한 네 다리와 두터운 엉덩판과 가파른 등이
  나의 계산에 의해 손수 만들어졌고
  칠이라고는 나의 손때 뿐이다.
  나의 의자는
  나의 무게를 저울보다는 잘 알고 있고
  나의 동작 하나 하나에 대해 민감하며
  나의 거칠어지는 피부를 어루만질 줄 안다.
  나의 고독은 나의 의자와의 교감이기에 고독이 아니고
  나의 독백은 나의 의자와의 대화이기에 독백이 아니다.
  낮을 밤에 이어 시를 쓰노라면
  나의 의자에서 시가 우러나며
  나의 다리, 나의 엉덩판, 나의 등이 되어
  때로는 지하 8척 아래로, 때로는 구중의 탑 위로
  나를 운반하지만
  나의 의자는 항시 제자리에 있다.
  나의 의자는 세계의 축, 나의 만세반석이다.
  세상에는 빈 것이 하도 많지만
  나의 의자는
  비록 공석중이라도 비어 있지 않다.

 

  한하운. 1919 - 1975. 함남 함주 출생. 본명은 태영. 나병의 재발로
월남하여 한때 방랑생활을 했다. 나병의 병고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을 읊어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시집으로는 <보리피리> <한하운 시선집> 자작시
해설 <황토길> 등이 있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피ㄹ 닐니리.


     여인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습 걸음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혀 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이동주. 1920 - 1979. 전남 해남 출생. <조광>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했으며 <문예>에 '황혼'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전통적인 정서 세계를 심미적으로 노래한 서정시인이며
실명소설분야를 개척 저명 문인의 일대기를 소설화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혼야> <강강술래> 등이 있다.

     강강술래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애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뉘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 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쓰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혼야

  금슬은 구구 비둘기...

  열 두 병풍
  첩첩 산곡인데
  칠보 황홀히 오롯한 나의 방석.

  오오 어느 나라 공주오이까.
  다수굿 내 앞에 받아들었오이다.

  어른일사 원삼을 입혔는데
  수실 단 부전 향낭이 애릿해라.

  황촉 갈고 갈아 첫닭이 우는데
  깨알 같은 쩡화가 스스로와...

  눈으로 당기면 고즈너기 끌려와 혀 끝에 떨어지는 이름
  사르르 온 몸에 휘감기는 비단이라
  내사 스스로 의의 장검을 찬 왕자.

  어느 새 늙어 버린 누님 같은 아내여.
  쇠갈퀴 손을 잡고 세월이 원통해 눈을 감으면

  살포시 다시 찾아오는 그대 아직 신부고녀.
  금슬은 구구 비둘기.

 

  조지훈. 1920 - 1968. 경북 영양 출생. 본명은 동탁이며,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문장>지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1939)하여
<백지> 동인으로 활동했다. 초기 시는 불교적 선의 감각을 엿볼 수 있으며
동양적 정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시세계를 완성했다.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승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설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똥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양 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고풍의상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줏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 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 당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삶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완화삼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한성기. 1923 - 1984. 함남 정평 출생. <문에>와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그는 사물과 실재에의 겸허하고도 차분한 접근과 통찰을 통하여 경이로운
질서와 참신한 시적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인. 시집으로 <산에서>
<낙향이후> <실향> 등이 있으며, <호서문학> 동인이기도 했다.

     역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만 역처럼 내가 있다.

 

  공중인. 1923 - 1966. 호는 서양. 필명은 시예리, 운서, 공화이다.
<시탑>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씨집으로 <무지개>(1956)가 있다.

     설야의 장

  새하얀 장미의 탄식과도 같이
  눈 내리는, ^6 236^마리아^356 3^의 밤!

  옛날의 그이를 사모쳐
  새하얀 공간에 가득히
  그려 놓은 새하얀 그림들이
  일시에 무너지듯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가 없는 추억을 묻히고
  밤을 묻히고, ^6 236^청춘^356 3^이 작별한
  나의 마음을 묻힌다.
  밤이 새도록 쉴 새 없이
  머언 그이의 사라진 발자욱처럼

  꽃과 나비와 낙엽들의
  쓰러져 하염없는 사연처럼
  눈은 내 고독의 숲을 내려 쌓인다.

  아- 이러한 밤에
  ^6 236^예수^356 3^는 태어났는가!
  바람들이 남기고 간
  이 새하얀 영원의 여백.

  하늘과 땅이 융합하는
  그 설백한 사랑의 노래는,
  그지없는, ^6 236^운명^356 3^을 우는
  나의 혼을 갈앉히우며
  세계를 덮는다.
  ... 눈 내리는 밤에.

  김수영. 1921 - 1968. 서울 출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박인환, 김경린
등과 엔솔로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8)을 간행했으며,
반서정과 참여시의 기치를 높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한 현실과
생활에 밀착된 지성에 의해 전개된 서정시라는 평을 받았고 4.19후에는
참여시를 즐겨 쓰기도 했다. 시집으로는 <달나라의 장난>과 합동시집
<평화에의 증언> 등이 있다. 48세 때 교통사고로 사망.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 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찝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게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 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에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햐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종삼. 1921 - 1984. 황해 은율 출생. 일본 도오꼬오 문화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유치진 씨에게 사사하여 연극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현대시학상> 수상(1971). 시집으로 <12음게> <본적지>(공저)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공저) <북치는 소년> 등이 있다.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한
그는 음악적 리듬과 회화적 형상화를 중요시한 시인이었다.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그리운 안니, 로, 리

  나는 그동안 배꼽에
  솔방울로 돋아
  보았고

  머리 위로는 몹쓸 버섯도 돋아
  보았읍니다 그러다가는
  ^6 236^맥웰^356 3^이라는
  노의의 음성이

  자꾸만
  넓은 푸름을 지나
  머언 언덕가에 떠오르곤 하였읍니다

  오늘은
  이만치하면 좋으리만치
  리봉을 단 아이들이 놀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얕은
  파아란
  페인트 울타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처마 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그 아이는
  얼마 못가서 죽을 아이라고
  푸름을 지나 언덕가에
  떠오르던
  음성이 이야기ㄹ 하였읍니다

  그리운
  안니, 로, 리라고 이야기
  하였읍니다.


     시인학교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 기에 있음.

 

  박용래. 1925 - 1984.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여 강경상고를 졸업했다.
1955년 <현대문학>에 ^6 236^가을의 노래^356 3^를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섬세하고 간결한 함축미를 특징으로 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싸락눈>, 유작집으로 <먼 바다>가 있다.

     강아지풀

  남은 아지랑이가 훌훌
  타오르는 어느 역 구
  내 모퉁이 어메는 노
  오란 아베도 노란 화
  물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
  마른 침묵은 싫어 삐
  걱 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쀼리는. 동네로 다시 이
  사 간다. 다 두고 이
  술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엣 상여 소
  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월훈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읍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기슭에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 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 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 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


     풀꽃

  홀린 듯 홀린 듯 사람들은
  산으로 물구경 가고

  다리 밑은 지금 위험수위
  탁류에 휘말려 휘말려 뿌리 뽑힐라
  교각의 풀꽃은 이제 필사적이다
  사면에 물보래치는 아우성

  사람들은 어슬렁 어슬렁 물구경 가고.


     저녁 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적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 터만 다니며 붐비다.


     황산메기

  밀물에
  슬리고

  썰물에
  뜨는

  하염없는 개펄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여

  목이 메는 백강하류

  노을밴 황산메기는

  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 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딸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이인석. 1917 - 1979. 황해도 해주 출생. 해주고보 졸업. 해방후
월남하여 <백민>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1959년도 <자유문협상>을
수상했으며 이 무렵부터 시극을 발표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시극이란
문학형태를 개척해 놓았다. 시집으로 <사랑> <종이집과 하늘>이 있다.

     도척의 개

  밤의 고요를 찢으며
  줄기차게
  절망을 운다

  원한이 납덩이로 가라앉은
  담장높은
  흉가들...

  공포의 성곽을 둘러치는 충견이여
  이 밤 또 네 주인은
  무엇을 음모하여 미소짓는가.

 

  송욱. 1925 - 1960. 서울 출생. 서울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1952년
<문예>지에 '꽃'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문명비평적인 풍자와 패러독스를 즐겨 다루었다. 시집 <하여지향> <나무는즐겁다> 시론집 <시학평전> 등이 있다.

     장미

  장미밭이다
  붉은 꽃잎 바로 옆에
  푸른 잎이 우거져
  가시도 햇살 받고
  서슬이 푸르렀다

  벌거숭이 그대로
  춤을 추리라
  눈물에 씻기운
  발을 뻗고서
  붉은 해가 지도록
  춤을 추리라

  장미밭이다
  피 방울이 지면
  꽃잎이 먹고
  푸른잎을 두르고
  기진하며는
  가시마다 살이 묻은
  꽃이 피리라


     개의 이유

  살결이 아니라 털결이 흡사 눈송이와 같다. 스핏쓰란 이름처럼 주둥이가
뾰죽하다. 밖에서 돌아오면 채 앉을 사이도 없이 무릎 위로 기어오르다가
눈덩이처럼 온 몸이 돌돌돌 뭉쳐지며 떨어진다. 눈덩이처럼 아프지 않다!

  마치 첫사랑으로 껴안은 때같이 죽을 듯 되살아날 듯 한 시이에서
저리도록 기쁜 소리가 목청 속에서 사뭇 구구대다가 구르기만 하다가 트일
새 없이 온갖 몸짓으로 자지러진다!

  가려우면 날카로운 발톱에 침칠하고 긁는다. 침과 발톱, 이상하게 색다른
두 가지 무기를 갖추었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낯을 가려 마구 짖는다. 아무리 다정한 사이라도
먹는 사이에는 얼씬 못하게 한다. 원수와 먹이를 보면 태고적처럼 법열에
들어 정신을 통일한다!

  잠들어도 종긋한 두 귀는 안테나 삼아 세워 둔다. 콧길 씀씀이 이루
이르지 않는 데가 없고 빈틈 없는 주의력이 레이더망과 같다.

  되도록 납작하게 엎드리어 대지와 일치한 몸매로써 두 발로 뼈다귀를
쥐고 깨무는 이빨! 구미가 당기면 명주 행주처럼 접시를 말끔히 훔쳐 놓는
혓바닥! 전쟁에 익숙하며 능히 평화를 즐길 줄 안다.

  오직 애무를 청할 때만 비로서 쫑긋한 귀를 재우고 손을 핥아 준다. 아아
경계라는 마지막 깃발을 내린 셈이다!

  이 때문일까. 너무나 아름다워 적막한 설경에는 흔히 사랑스런 강아지가
보이는 것은! 뛰노는 눈덩이가, 딩구는 눈덩이가 보이는 것은!

 

  구자운. 1926 - 1972. 부산 출생. 소아마비의 불구인 그는, <현대문학>에
시 '균열'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현대문학신인문학상>을 수상(1959) 했다. <60년대 사화집> 동인, 한국적인 소재를
노래하면서도 사물의 존재의 영원성까지 노래한 것이 그의 시의 특징이다.
시집으로 <청자수병> <벌거숭이> 등이 있다.

     청자수병

  아련히 번져 내려
  구슬을 이루었네.
  벌레가 살며시
  풀포기를 헤치듯
  어머니의 젖빛
  아롱진 이 수병으로
  이윽고 이르렀네.
  눈물인들
  또 머흐는 하늘의 구름인들
  오롯한 이 자리
  어이 따를손가.
  서려서 슴슴히
  희맑게 엉긴 것이랑
  여민 입
  은은히 구을른 부프름이랑
  궁글르는 바다의
  둥긋이 웃음 지은 달이라커니.

  아롱아롱
  묽게 무늬지어 어우려진 운학
  엷고 아스라하여라.
  있음이어!
  오, 저어기 죽음과 이웃하여
  꽃다움으로 애설푸레 시름을
  어루만지어라.

  오늘
  뉘 사랑 이렇듯 아늑하리야?
  꽃잎이 팔랑거려
  손으로 새는 달빛을 주우려는 듯
  나는 왔다.

  오, 수병이여!
  나의 목마름을 다스려
  어릿광대
  바람도 선선히 오는데
  안타까움이야
  호젓이 우로에 젖는 양
  가슴에 번져내려
  아렴풋 옥을 이루었네.


     우리들은 샘물에

  저물녘 흥청대는 이끼를 뜯으면서
  우리들은 샘물에 씻기는 해골일 걸세.
  소금인 양 흰 덩어리 이루어
  아늑한 깊은 수풀의 길표 옆에서.
  점백이 뱀이 움틀거린다.
  전엔 희망이었을 엷은 눈을 뜨고서
  반역의 바위를 물어뜯을 때,
  우리들은 꿈꾸느니, 어슬녘의 파선을,
  검은 절망의 물결 드높이
  벼락불의 축복을 가져오며,
  허무의 고요가 기슭으로 밀려닥침을
  그리고 갓난 아이의 울음이 어머니의 오장을 꿰뚫음을,
  캄캄한 어둠에서 아침이 태어남을,
  노여움이 아니고 배의 키바퀴도 아니고,
  영롱한 맑은 숨결로 엉긴
  소리들이 날개 이루어 파닥거려 옴을.

  우리들은 밤잠에 잠기는
  썩어 버린 관 속의 해골일 걸세.
  빗물인 양 내리는 나뭇잎의 입맞춤에 덮인,
  그리고 가끔씩 하품을 하며 있는 야심 없는 꽃,
  묻혀서 보이진 않지만 가장 뚜렷한
  작은 거울 쪽.

 

  박인환. 1926 - 1956. 강원 인제 출생.  평양 의학전문시절부터 시작을
했던 그는 해방과 함께 의학을 중단,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교류를 갖기 시작했다.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활발히 전개, 도시적이면서도 인생파적인 비애가
다른 동인들보다 두드러진 것이 그의 시세계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으로 <박인환 시선집>과 <목마와 숙녀>가 있다.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 등대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 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신동엽. 1932 - 1969. 충남 부여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6 236^이야기 하는 쟁기꾼의 대지^356 3^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극운동에도 참여하여 단막 시극 ^6 236^그 입술에 파인 그늘^356 3^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서사적 긴 호흡과 민족사의 수난을
바탕으로 했으며 시집으로는 <아사녀> <금강> 등이 있다.  39세에 요절.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김관식. 1934 - 1970. 충남 논산 출생. 호는 우현. 유년시절에 한학을
했으며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데뷔(1955)했다.  우달리 주벽이 심해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으나 강직하고 너그러운 천성의 시인으로 10여년간의
가난과 질병을 청산하고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시집 <낙화집>과 에세이
등 다수를 발표했다.

     옹손지

  해 뜨면
  굴 속에서
  기어나와
  노닐고,

  매양 나물죽 한 보시기
  싸래기밥 두어 술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다.

  남루룰 벗어
  바위에 빨아 널고
  발가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서
  등솔기에 햇살을 쪼이다.

  해지면
  굴 안으로
  기어들어
  쉬나니.


     연

  수천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에
  한 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즈막 타는, 안쓰러히 부서지는
저녁 햇살을.
  얇은 나래야 바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즈러히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젯밤 자고온 풀시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갓난 애기의 새끼손가락 보담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 세로 자질하며 가물 높이 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 오르는 어리디 어린 아그배나무같이
  물 오른 아희들이 웃도리를 벗고 서서
  그 가운데 어떤 놈은 물 속의 하늘만을 들여다보고 제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그늘진 개흙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연꽃이 큰 봉오리를 열었다.


     거산호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도 심우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놈 데리고 오고
  작록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이경록. 1948 - 11977. 경북 월성 출생. 중대 문예창작꽈 졸업.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각 문예지와 <자유시> 동인지를 통해
활동하면서 자신의 의식 구조에 숨어 있는 좌절과 죽음의 그늘을 딛고
일어서려는 강한 초극의지와 사랑에의 접근을 시화시킴으로써 관심을
모았으나 1977년에 지병인 백혈병과의 악전고투 끝에 30세의 아까운
나이로 요절했다. 시집으로 <이 식물원을 위하여>가 있다.

     이 식물원을 위하여 5

  우리 서로 합창합시다. 구화로
  꽃을 피웁시다. 구화로
  우리만의 암유를 위해서, 구화로
  우리만의 결사를 지키기 위해서, 구화로

  산난초가 입을 벙긋합니다. 포인세티아도 입을 벙긋합니다. 남천도
벙긋하고, 진달래도 벙긋합니다. 일렬의 철쭉, 동백, 열대식물들도 따라
벙긋합니다. 식물원의 식물들은 모두 입만 벙긋댑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두 발 독사도 알게 될 겝니다.

  우리 서로 합창합시다. 구화로,
  꽃을 피웁시다. 구화로,

 

    원로, 중견 85인선 I

 

  강계순. 1937년 경남 김해 출생. 성균관대 불문과 졸업. <사상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시단> 동인에 참여했다. 시집으로 <강계순 시집> <천상의
활> <흔들리는 거울>과 에세이 <아! 박인환> 등이 있다. 현재 <여류시>
동인으로 작품에 전념하고 있다.

     안개속에서

  땅 속에는 마르지 않는
  물의 근원이 있었서
  수만 가지 색깔의 눈물로
  봄을 피워 올리고

  하늘 속에 떠 있는
  맑고 맑은 우물
  마르지 않는 눈물을
  나는 길어 올리고 있다.

  욕심을 놓고 돌아서면
  사방에서 소리치고 있는 안깨
  안개 속에 떠 있는
  무중력의 사랑을 본다.

  돌아가리라
  가진 것 다 돌려주고
  이제야 몸 가볍게 시작하는
  여행

  휘적이며 휘적이며
  조금씩 소멸해 가는
  우리들의 매듭.

  돌아가리라
  이른 아침
  승천하는 맨 살의 안개
  다친 몸 거두어
  비단 수건으로 닦아 내고
  이제
  무연의 들판에 돌아가리라.

 

  강민. 1933년 서울 출생. 본명은 성철.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주부생활> <학원> 등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했다. 시집으로 <6월>
<일요일에> <노래> 등이 있고 현재 금성출판사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강한 현실감과 개성의 추구에 몰두하는 시작품을 쓰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비가 내린다

  충충한 층암의 벼랑에서
  의미를 잃은 언어
  고단한 잠 속에
  그것은 거대한 쭉지를 벌리고
  검은 그늘로 덮여 온다.
  우리 생명의 광맥은
  어디에 숨어 있나
  가위 눌려, 허덕이다 깨어 보면
  무심한 천정에 번진
  어쩌면 독버섯같은
  어쩌면 미소같은
  빗물의 무늬

  모반의 물결에
  갈리고 닦이어 오수중 시민인 의
  조약돌이 찾고 있는 것

  승리의 깃발 없는 깃대에
  어둡게 나부끼는
  잃어버린 심층의 언어,
  녹슨 유자철선 속에서
  언젠가 형제가 찾아 헤맨
  애증의 인간 동산에
  비가 내린다.
  시민의 고단한 잠 속에
  그 비는 내린다.

 

  강우식. 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성균관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대문학>에 '사행시초'(1966)를 추천받아 문단활동을 시작한
그는 서민들의 한을 질펀하고 끈질긴 맛으로 시에 토속적인 색감을 잘
살리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지하동인회> 동인이며 현재 성균대
강사로 출강.

     사행시초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방은 하나의 사과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속
  누가 그 순수한 외계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둘)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물구비를 넘어나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셋)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팍에 새삼 피어 오르는 쓰린 눈물이여.

  (넷)

  계집애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 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다섯)

  낙엽은, 한 여자가 생리일에 꾸겨버린 색종이처럼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가을날
  무덤 속같이 생각이 깊어버린 여자 곁에서
  사랑이여, 우리가 할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타는 사랑은

  태양에 끄을린 살갗이
  하루나 이틀쯤 쓰려오는
  팔월이면 별이 박히듯
  떠오르는 여자들이 있어
  아파라

  살뭉치로 살뭉치로 와서
  타는 사랑은
  물집이 생기는 아픔으로 일어
  올리브 향유나 바르며
  온밤을 뒤척이게 하고

  아내 몰래 창가에서
  그 옛날 여자들의 이름을 죄처럼 쓰고
  어떤 때는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지우나니.

  팔월이면 어이하여 살이든지,
  마음이든지
  이리 불타고

  살아 있다는 것이
  가만히 가만히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리듯
  행복하기만 하냐.

  강인한. 1944년 전북 전주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전남문학상>을
수상(1982).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이상기후>
<불꽃> <전라도 시인>이 있다.

     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바람보다 투명한 우리들의 귀.
 
  하찮은 이야기에도
  놀라기를 잘해
  잠자는 시간에도 닫혀지지 않고
  문 밖에 나가 쪼그려 앉은
  가엾은 우리들의 귀.

  이 세상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사람이 눈 부릅뜬 채 거꾸러져도
  전혀 듣지 못하고

  수도 꼭지에서 방울방울
  무심히 떨어지는 물방울
  그 동그란 소문 속으로 들어가버린
  편리한 우리들의 귀


     남행길

  서울에서 정읍까지
  적막한 직선으로
  눈이 내린다.
  영하 오도의 슬픔으로 내린다.
  검은 고속도로 위에
  도로정비를 하는 늙은 인부들의
  오렌지빛 제복 위에
  삼륜차로 달달거리는 가난한 이삿짐 위에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는
  나어린 작부의 취한 눈망울
  떠나온 방직공장 기숙사 지붕 위에
  손금처럼 말라붙은 만경강 줄기 위에
  갈가마귀 북풍 속을
  떼지어 날아가는 남행길

  반도의 하반신에

  어루만지듯이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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