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ㄷ" 시모음
2015년 06월 15일 22시 50분  조회:5979  추천:0  작성자: 죽림


드라이플라워

         - 황주경 -

 

누굴 기다리는지

얼마나 오래 가다렸는지

희미한 조명을 타고

내리는 먼지는

망각의 요술가루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

모든 것을 덮을 때

나는 게으른 낮잠에 빠진

망각의 공간으로 간다

 

가시마저 감싸안던 부드러운 손길

빠알간 꽃잎에 입 맞추던 비말의 키스

은밀한 사랑은 영원을 약속했었지

 

그 모습 그대로 아직도 기다리나

꽃은 이제 형상뿐

그 약속은 모두 먼지에 묻혔다

 

그는 이제 누굴 기다리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조차  

잊엇을지도 모르는 일 

 

 

    들길

     - 이형기 -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서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들길에 서서

     - 신석정 -

 

 

 푸른 산이 힌 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해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 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늘..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것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생활은 뼈에 저리도록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 보자
 푸른 별이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 일지니.....

 

 

 

들국화

     - 이하윤 -

 

  나는 들에 핀 국화를 사랑합니다.
  빛과 향기 어느 것이 못하지 않으나
  넓은 들에 가엾게 피고 지는 꽃일래
  나는 그 꽃을 무한히 사랑합니다.

  나는 이 땅의 시인을 사랑합니다.
  외로우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꽃처럼
  빛과 향기 조금도 거짓 없길래
  나는 그들이 읊는 시를 사랑합니다.

 

 

들국화
      - 김동리 -
 

고향의 들끝 
가을 풀더미 속에 
잊었던 얼굴처럼 
들국화 피어 있네

 

날이 날마다 
이슬 받아 먹고 
피어난 들국화 
서슬진 향기

 

내 어린 날은 
이 들끝에서 
아침 저녁 휘파람 
눈물이었네

 

이제 눈물 가시고 
싸늘한 미소 
옛 고장 풀더미 속에 
들국화 피어 있네

 

 

 

들국화

     - 천상병 -

 

84년 10월에 들어서
아내가 들국화를 꽃꽂이 했다.
참으로 방이 환해졌다.
하얀 들국화도 있고
보라색 들국화도 있고
분홍색 들국화도 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우리 방은 은은하고
화려한 기색이 돈다
왜 이렇게도 좋은가
자연의 오묘함이 찾아들었으니
나는 일심(一心)으로 시 공부를 해야겠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 정진규 -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 의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 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지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들판에 서서

     - 박남준 -


  어쩌리, 들판에 서면 떠나지 못하네
  작은 가슴 미어지게 들판이 비어가면
  설움 깊어져서 못내 돌아보고
  떠나지 못하는 무엇이 있을까
  기어이 뿌리치지 못하는
  정든 것이 있었을까

  노여움이었구나
  똑바른 정을 다해 들판을 키웠는데
  거름내고 흙을 갈고 씨 뿌리고 김을 매며
  땀 흘리던 저 일손들, 들판을 채우던 저 알곡들
  어느 것 하나 성하지 못하니
  들꽃들 스스로의 허리꺾고
  흩어져서는 울고 있는지
  눈물 감추며 더욱 아픈 마음들
  부르면 달려오는 것일까

  들판에 가면 이제 알겠네
  '저 건너 묵은 밭에
  쟁기 벌써 묵었느냐
  임자가 벌써 묵었느냐'
  빈 들판 울러대는 찬 바람 잠 재우며
  거기 씨 뿌리던 어머니의 손길
  떠나지 못하고 묻어 나오는지
  태어나서 오직 한길 들판에 호미로 사시던 이
  어째서 어머니는 빈 들판이 되셨는지

  짓밟혀도 깨어져도 피 뚝뚝 흘려도
  봄이면 새싹 틔워 우리 힘 되어준 땅
  거둔 농사 빼앗겨도 지켜야 할 땅이기에
  평생을 빈 들판으로 어머니는 사셨지만
  제게도 그 순종을 미덕이라 하셨지만
  들판 믿고 당당히 살아야 할
  떳떳이 물려주어야 할 내 땅이기에
  힘차게 두 팔 걷고 꽉 찬 들판 키워내며
  하늘 빛을 닮은 그 들판 곁에 서서
  지는 해 바라봐야지요 그러믄요
  뜨는 해 바라봐야지요 손뼉쳐야지요

 

 

 

등나무

       - 김수영 - 

두 줄기로 뻗어올라가던 놈이 
한 줄기가 더 생긴 것이 며칠 전이었나 
등나무 

밤사이에 이슬을 마신 놈이 
지금 나의 혼(魂)을 마신다 
무휴(無休)의 태만(怠慢)의 혼(魂)을 마신다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얇상한 잎 
그것이 이슬을 마셨다고 어찌 신용하랴 
나의 혼(魂), 목욕을 중지한 시인(詩人)의 혼(魂)을 마셨다고 
염천(炎天)의 혼(魂)을 마셨다고 어찌 신용하랴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그의 주위를 몇번이고 돌고 돌고 돌고 
또 도는 조름같은 날개의 날것들과 
갑충(甲蟲)과 쉬파리떼 
그리고 진드기 

“엄마 안 가? 엄마 안 가?” 
“안 가 엄마! 안 가 엄마! 엄마가 어디를 가니?” 
“안 가유?” 
“안 가유! 하……” 
“으흐흐……” 

두 줄기로 뻗어올라가던 놈이 
한줄기가 더 생긴 것이 며칠 전이었나 
난간 아래 등나무 
넝쿨장미 위의 등나무 
등꽃 위의 등나무 
우물 옆의 등나무 
우물 옆의 등꽃과 활련 
그리고 철자법을 틀린 시(詩) 
철자법을 틀린 인생(人生) 
이슬, 이슬의 합창(合唱)이다 

등나무여 지휘(指揮)하라 부끄러움 고만 타고 
이제는 지휘(指揮)하라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쑥잎보다 훨씬 얇은 
너의 잎은 지휘(指揮)하라 
베적삼, 옥양목, 데드롱, 인조견, 항라, 
모시치마 냄새난다 냄새난다 
냄새여 지휘(指揮)하라 
연기여 지휘(指揮)하라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우물이 말을 한다 
어제의 말을 한다 
“똥, 땡, 똥, 땡, 찡, 찡, 찡……” 
“엄마 안 가?” 
“엄마 안 가?” 
“엄마 가?” 
“엄마 가?”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야, 영희야, 메리의 밥을 아무거나 주지 마라, 
밥통을 좀 부셔주지?!”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등나무? 
“아이스 캔디! 아이스 캔디!” 
“꼬오, 꼬, 꼬, 꼬, 꼬오, 꼬, 꼬, 꼬, 꼬” 
두 줄기로 뻗어올라가던 놈이 
한 줄기가 더 생긴 것이 며칠 전이었나 

 

 

등대

    - 박귀례 -


  하늘이 보이는
  망대 위에 올라
  사방을 살피는 파수군
  창살 밖으로
  명멸하는 눈빛은
  물결치는 파도를 가른다.
  심야의 늪을 지나기 위하여
  촉수를 세워 거미줄을 늘인다
  한번 주어진 목숨은
  안으로 무장되어
  결코 휘어지지 않는 신념
  내 몸이 암초에 닳아서
  촉루가 될지언정
  검은 바다를 뚫는다.
  사마리아성의 네 문둥이 *
  적진을 향하여
  행오를 지어 뛰어간다.
  드디어
  혼비백산 무너지는 어둠의
  잔등에 앉아
  개선가를 부른다.
  어둠에 갇힌 자들에게
  아침을 알리려고
  쏜살같이 날아가는 참새떼.
  돌아오는
  네 문둥이의 발걸음마다
  찍히는
  현란한 빛의 떡살무늬여.

 

  * 네 문둥이:구약성서 열왕기하 7:3 - 11에 나오는 인물.

 

 


  등 둘

      - 노창선 -

 

  우리가 우리 삶을 버린다 한들
  내 어머니 뼛 속에 숨은 눈물까지야
  우리가 우리 목숨을 버린다 한뜰
  분노로 회한으로 다져진 이 땅이
  우리네 이름없는 죽음까지야
  누구는 사랑할 때 창자까지 나눈다지만
  모질게 부대끼며 익은 우리네 사랑
  미치도록 환하게 살아 목숨을 버리는 일
  뼛속물까지 나눠 마시며
  맑게 비치는 시냇물처럼
  우리들의 썩은 살을 도려 내는 일
  그리한 상처로 돌아 서서도
  먼지처럼 흩어진 죽음까지 찾아서
  녹두꽃을 피우다가 그 넋을 달래다가
  우리도 이름없이 스러지는 일
  모질게 부대끼며 익은 우리네 사랑
  미치도록 환하게 살아 목숨 아주 버리는 일
  우리가 우리 삶을 버린다 한들
  뼛속으로 숨어온 입김까지야

 

 

 

등에 부침

          - 장석주 -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뛰어 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나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다른 새들과 같이

      - 박진숙 -


  돌아온다 나는
  꼭 다시 돌아온다

  저 은빛 첨탑 위에 내려앉는
  뼈와 살이 투명한 한 마리 새로

  그때에 눈부신 햇살 속에서
  행복하게 노래하는 다른 새들과 같이

  내가 알던 그 사람들 위해
  머언 먼 사람들은 새로 알기 위해

  맑은 눈 부비며 지상의 한 공간을
  채우고 또 채우면서

  나의 사랑은
  꼭 돌아온다 지치지 않고

  그날에 이르러 다시 하늘로부터
  푸른 강물을 지나 그대들 머리 위에

 

 

 


다 바람같은 거야 

        - 묵연스님 -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니?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순간이야.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이야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일 뿐이야.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엔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돌지.

 

다 바람이야.

 

이 세상에 온 것도 바람처럼 온다고

이 육신을 버리는 것도 바람처럼 사라지는거야.

 

가을 바람 불어 곱게 물든 잎을 떨어뜨리듯

덧없는 바람 불어 모든 사연을 공허하게 하지.

 

어차피 바람일 뿐인걸 굳이 무얼 아파하며 번민하리.

결국 잡히지 않는게 삶인걸 애써 무얼 집착하리.

 

다 바람인거야.

 

그러나 바람...그 자체는 늘 신선하지

상큼하고 새큼한 새벽바람 맞으며

바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바람처럼 살다 가는게 좋아

 

다 바람같은 거야.

 

 

 

 

다 바람이라오

        - 서산대사 입적하시기전 말씀 -

 

버릴 것은 버려야지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하리오
줄게 있으면 줘야지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내 것도 아닌데...삶도 내 것이라 하지 마소
잠시 머물러 가는 것일 뿐인데 묶어둔다 그냥 있겠소!

 

흐르는 세월 붙잡는다고 아니 가겠소.
그저 부질 없는 욕심일 뿐!


 삶에 억눌려 허리 한번 못 피고 인생계급장 이마에 붙이고
뭐 그리 잘났다고 남의 것 탐내시오.

 

훤한 대낮이 있으면 까만 밤하늘도 있지 않소
낮과 밤이 바뀐다고 뭐 다른 게 있소


살다 보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있다마는 
잠시 대역 연기하는 것일 뿐!

 

슬픈 표정 짓는다 하여 뭐 달라지는 게 있소
기쁜 표정 짓는다 하여 모든 게 기쁜 것만은 아니오.

 

내 인생! 네 인생! 뭐 별거랍니까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고 불다 보면, 멈추기도 하지 않소
그렇게 사는 겁니다.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다시 그리운 사랑

       - 박상봉 -


  부질없는 기다림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더는 찾아올
  희망도 없는 방은 열려진 채로
  옛사랑을 그리워하고
  그리움만으로 가득한 밤이
  다시 길가로 나아가
  부질없는 기다림으로 서 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기에 너와 나는
  만날 수 없느냐.
  불러도 대답없는 사랑,
  숨어서 나누는 사랑은
  함부로 슬퍼할 수도 없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인 것을.
  그러나 누구나 불렀던
  희망없는 시절의 사랑노래를
  잊을 수 없어
  잊을 수 없어
  나는 여기에 서 있는 것이네.
  더는 찾아올 희망도 없지만
  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별안간 방 안으로 들어왔을 적에
  대문 밖의 불빛 아래에서 어울렸던 사람들은
  자정이 훨씬 지나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주고 받던 잡담과 불렀던 노래만
  각자의 집으로 흩어져 가는 것이었다.

 

 

 

 

 

다시 밝은 날에 
            - 서정주 -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았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당신이 다시 그를 데려가시고
그 휘ㅡ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 위에 밝은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다시 굴리고 싶은 주사위

               - 노진선 -


  원색의 빛을 뿌리고
  알몸으로 구른다.

  열띤 몸매로 말판을 맴돌고
  육면경의 인정 풍물이
  엇갈려 뒤뚱거리는 교차로

  전 달은 맷방석에
  미지수의 확률대로 허덕이는
  난해한 점자판의 미로

  허리 굽어 누운 세월은
  소쩍새 울음에 젖고
  다시 굴리고 싶은 남은 세월

  꿈 꾸는 사슴이다가
  드높은 갈매기더니
  씀벅이는 망부석이 되는가.

 

 

 

다 스쳐 보낸 뒤에야 사랑은  

         - 복효근 -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산길에선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정상이 어디냐 물으면

열이면 열

조금만 가면 된단다

안녕하세요 수인사 하지만

이 험한 산길에서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

반갑다 말하면서 이내 스쳐가 버리는

산길에선 믿을 사람 없다

징검다리 건너뛰어

냇물 건너듯이

이 사람도 아니다 저 사람도

아니다 못 믿겠다 이 사람

저 사람 건중건중 한 나절 건너 뛰다 보니 
산마루 다 왔다

그렇구나, 징검다리 없이

어찌 냇물을 건널 수 있었을까

아, 돌아가 껴안아주고 싶은,

다 멀어져 버린 다음에야 그리움으로 남는

다 스쳐 보낸 뒤에야 사랑으로 남는

그 사람 또 그 사람.....

그들이 내가 도달할 정상이었구나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이 산길에 나 하나를 못 믿겠구나

 

 

 

단디해라
           - 권혁재 -


가장 간절한 말이어서
짧다
가장 염려하는 말이기도 하여서
또 짧다

식전 첫차를 타고 객지로 떠나는 
아들의 어깨 너머로 
태초의 말씀처럼 건네는 한마디
처음 나를 독립한 개체로 치켜세우면서
세상 속으로 밀어 넣던 어머니의 목소리

병상에서 흐린 눈빛으로 나누던
한 박자 끄는 울림이
두레박 닿는 메아리로 되돌아오고

솔갈잎을 긁는 듯한 유언은
애틋하고 간절한 말씀이 되어
짧게도.

니, 단디해라.

 

 

단애

    - 이봉래 -

 

  밤이면 갈증처럼
  기억의 피부 속에
  매몰되어 가는
  바다

  어느날 바다는
  으스러진 기억을 적시며
  남아 있는 땅 속으로
  돌아갈 때
  그것은
  치욕의 화석으로
  굳어 간다.

  무너져 내리는
  밤의 밑바닥에
  깔리고 쌓인
  모래알보다 작은
  인내의 거품
  억만 낱알의 거품을 물고
  이쪽과 저쪽에서
  밀려오는
  피 묻은 바람

  그날밤
  바다는 피로 얼룩진
  거울 속의
  자화상이었다.

  나는 서반아의 투우처럼
  거울 속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거울은 닫혀진 문이었다.
  나는
  바다를 찾아
  문의 둘레를 달렸다
  번득이는 칼보다
  더 광채나는 거품을
  입에 물고

  다음날 나는
  피묻은 바람 속에서
  허물 벗는 배암처럼
  남루한 피부를
  비수로 도려 낸다

  아
  풍선처럼
  날아가는 화석의 바다
  기억의 활 시위를
  하늘에 겨냥하면
  문에 반사되는
  금빛 태양

  나는 달리고 있다
  단애와 같은
  거울 속을 달리고 있다
  무량의 거품 속을
  피붙은 바람처럼
  넘어지며 일어서며
  마냥
  달리고 있다.

 

 

단장

     - 김달진 -

 

  1
  아무 마음 없이
  나 홀로 여기까지 걸어 왔구나.
  숲 속은 좁은 산길 위에
  엷은 저녁 햇방울이 떨어져 있다.

  2
  몇 날을 두고
  아침 산보길에서 만나는 여인이기에
  그 이름이 알고 싶었다.

  3
  기다려 기다려도 비는 오지 않고
  쨍쨍 쪼이는 한낮 창 앞에
  멀리 어디서 포소리 들려 오더니
  건너 산에서 흰 연기 구름처럼 떠 오른다.

  4
  밝은 달빛이 가득 차 넘치는 넓은 이 마당
  별처럼 반짝이는 이 숱한 벌레소리 속에 서면
  해질녘까지 그처럼 시끄러이 놀던 애들의
  꿈 속에 벌어지는 화려한 놀이판.

  5
  아침 산 그늘이
  모시 적삼에 스미는 썰렁한 기운,
  아 이제 대지에는
  그 숱한 나뭇잎이 알고 모르고 꽃잎처럼 내리겠구나

 

 

 

단풍  
     - 김종상 -

빨갛게 익어가는 감을 닮아서
잎사귀도 빨갛게 물이 들었네.

감나무에 떨어진 아침 이슬은
감잎에 담겨서 빨강 물방울.

샛노란 은행잎이 달린 가지에
잎사귀도 노랗게 잘도 익었네.

은행나무 밑으로 흐르는 냇물
은행잎이 잠겨서 노랑 시냇물.

 

 

단풍

      - 이제하 -

 

  가을이로다 가을이로다
  생선처럼 뒤채며 살려던 목숨이
  어째 볼 수도 없는 허공에서 아으으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붙어 닢닢이 토하는 핏줄기로다
  그래도 못다한 숨결
  바작바작 긁어대는 손톱 상채기로다

  무엇을 바래 달음질했던 땅에서 하늘 끝까지
  되돌아 아뜩 아뜩 달려오는 세상에

  아! 단풍이로다, 어느 한군데 머리 숙이고
  눈물마저 못뿌린 못난 마음이
  쑥대밭으로 엉클리어 마구잽이
  타오르는 불길이로다

 

 

 

단풍 한 잎

      - 이은상 -

 

 

 단풍 한 잎사귀 손에 얼른 받으오니
 그대로 내 눈 앞에 서리치는 풍악산을
 잠긴 양 마음이 뜬 줄 너로 하여 알겠구나.

새 빨간 이 한 잎을 자세이 바라보매
 풍림(楓林)에 불 태우고 넘는 석양같이 뵈네
 가을 밤 궂은 비소리도 귀에 아니 들리는가.

여기가 오실 덴가 바람이 지옵거든 
 진주담 맑은 물에 떠서 흘러 흐르다가
 그산중 밀리는 냇가에서 고이 살아 지올 것을.

 

 

 

단 한번만이라도

            - 박상천 -


  척박한 땅,
  척박한 모래땅에 뿌리내린 용설란은
  평생 한 번, 단 한 번
  꽃을 피워올린다 한다.

  모래땅의 아픔
  모래땅의 외로움
  모래땅의 슬픔
  뒤섞고 녹이고 온 힘 다해 빨아올려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아닌
  정점의 꽃을 피운다 한다.
  단 한 번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꽃을 피우기 위해
  잡다하게 꽃을 피우지 않는다 한다.
  이리저리 가지를 뻗지도 않는다 한다.

  정점,
  힘을 다 쏟아버린 그는
  서서히 서서히 죽어간다 한다.

 

 

 

  - 최원규 -

 

 

  그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수미산이 가려있기 때문이리.
  그대 미소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잎새에 가려있기 때문이리.
  그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바람 속에 묻혀있기 때문이리.
  아 두고온 얼굴을 찾아
  하늘로 솟구치는 몸부림
  그대 가슴에 뚫린 빈 항아리에
  담고 담는 반복이리.

 

 


달- 國土 41 
        - 조 태 일 -

 

수많은 별들을 이끌 때라야만 
달은 피어오른다.

 

수많은 별들을 이끌고 
달이 피어오른다.

 

목에 찬 저 恨의 덩어리를 
어떤 바람이 감히 쓸어버리랴.

 

더러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더러는 영영 생명을 버린 
자식들을 차마 못 잊은 채 
남은 자식들만이라도 무릎 가까이 모아 앉히고

 

순한 우리 어머니들이 
못다 베푼 사랑을 피워올리듯 
그 사랑이랑 함께 피어오르듯

 

우리들의 캄캄한 가슴엔 
수많은 별들을 이끌고 
달이 피어오른다. 
순한 어머니가 피어오른다.

 

어떤 바람이 감히 이 사랑을 쓸어버리랴. 
어떤 칼날이 감히 이 자유를 베버리랴. 

 

 


   - 박목월 -

 

桃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혹은 외동면(外東面)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挑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 이광웅 -

 

  네 눈꺼풀 안쪽에 고인 달빛
  네 눈꺼풀 안쪽에 고인 달빛

  약질의 내 체구에 떨어져 부서질 때,
  이빨이 시리고
  피가 얼고 그리던 달빛

  손 안에 받아 보려 한들 이 무슨 헛짓거리랴.
  눈사태같이 부서져 내려 앞 길을 차단하는
  눈사태같이
  차디찬 달빛
  네 눈꺼풀 저쪽에 고인 달빛

 

 

 

달나라의 장난 
              - 김수영 -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數千年 前)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달맞이꽃

         - 서원동 -

 

  1
  이 어둠 속에는 귀신도 보이지 않고 방금 눈뜬 달맞이꽃만 웃고 있어요
낄낄낄 웃고 있어요 달빛 아래 빛나는 꽃의 이빨 자국만 빈 허공에 가득해요
밤새들도 깊이 깊이 숨어 버렸나 봐요 손을 벌리면 손바닥 깊숙이 꽃잎의 살이
닿아요 뼈도 없는가 봐요 피 흘리는 꽃잎 속에 내가 보여요 내 얼굴도 힐힐힐
웃고 있어요 맨살이예요 맨가슴이 춤추고 있어요 자세히 보면 하늘 한 끝이
깨어져 있어요 뿌리로는 미친 노래 부르고 있어요

  2
  나는 밤이 두려워요 떨리기만 해요 눈을 감아도 눈속 가득히 바늘같은
공포가 몰려오곤 해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나무 줄기보다 질긴 어둠을 보세요
내 허리를 붙잡고 뒹구는 저 달빛을 보세요 깔깔거리며 세상 헤매는
그림자들을 보세요

 

달맞이 꽃 

         - 문정희 -


첫여름 하얀
달밤이 되면
그만 고백해 버리고 싶다
그대 내 사람이라고

 

키 큰 포플러 바람에 흔들리고
수런수런 풀냄새 온 몸이 젖어들면

 

입으로 부르면 
큰일나는 그 사람
하르륵! 향기로 터뜨리고 싶다

 

그만 뜨거운 달맞이꽃으로
확확 피어나고 싶다 

 

 

달맞이꽃

        - 김종섭 -

 


  풀잎이 찬 바람에 누워
  별들을 세고 있는 강둑에서
  꽃처럼 기운 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에 한 점 온기도 없이
  이슬에 젖은 꽃잎을 떨굴 때
  언덕은 조용히 일어나
  마른 대궁이를 꼿꼿이 세우고
  감기저린 바람을 막아내고 있엇다

  비틀대던 욕망은
  강둑에 떨어져 잘려나면서
  손을 저었다, 너를 향하여

  그림자 지운 적막한 언덕에선
  시든 닮맞이꽃 그날을 웃고 섰는데
  어쩌란가, 정말 어쩌란가
  꺼지지 않는 불씨 하나
  끝나지 않은 사랑의 연습을

  강물이 열리고
  잠든 평원에 강물이 열리고
  우수 같은 첫눈이 녹아지면서
  또 내리고 있는데
  달맞이꽃, 그날 우리는
  다시 역류의 언덕에서 바라보겠네
  잃어버린 세월 마디를 풀며
  조용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달밤 
   - 박용열 -

 

달밤
달이 밝아서

연잎 위에
청개구리

"퐁당"
달 따러 가네

 

 

달밤 
    - 김동리 -
 

 

달 밝은 하늘엔 
나도 새가 되고 싶다

 

저 멀리 강물 위의 
뿌연 안개 속으로 날아가고 싶다

 

슬픔은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골짝에 흐르고 
꿈은 차라리 설운 가락 
노래나 되어 돌아오는가

 

세상과 소란은 
장바닥 먼지 함께 
달빛에 젖어 잠들면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 위로 
울음 삼키며, 새 한 마리 
가만히 날아간다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 송찬호 -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 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가는 포도의 혀 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

 

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

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

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굴게 완성시켜 놓았다

 

달이 둥글게 보인다

달이 빛나는 순간 세계는 없어져 버린다

세계는 환한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동안 말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것이 인간이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낯선 이방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은

이 세계를 더욱 낯설게 한다

 

 

 

 

달속의 뼈

           - 안혜초 -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이즈음에 이르러선
  밤으로 낮으로
  이따금씩 달 생각이
  떠오르고
  비바람에 닳고 닳은
  저 둥그러운 되쏘임 빛
  얼기설기 드러나보이는
  계수나무 뼈.

  눈물의 뼈
  원망의 뼈
  분노의 뼈
  인고의 뼈
  용서함의 뼈
  잊지못함의 뼈

  이도 저도 재가 되어가는
  가쟁이 뼈 가운데서
  맨 마지막으로
  삐걱대고 있는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의 뼈.
  감사함의 뼈.

 

 

달 아래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 이백 - 
 

꽃사이에 한 동이 술을 놓고
홀로 마시니 가까운이 없다.

 

잔을 들어 밝은 달 맞이하고,
그림자를 대하니 세 사람이 된 셈이다.

 

달은 본시 음주의 즐거움 모르고,
그림자는 공연스레 내 몸을 따르고 있네.

 

잠시 달과 그림자와 짝을 하는 것은.
인생의 행락은 모름지기 봄에 해야 하는 때문이다.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배회하는 듯하고
내가 춤추니 그림자는 어지러이 움직이는 듯하다.

 

깨었을때 함께 기쁨을 나누고
취한 뒤면 각기 흩어져버린다.

 

세속적인 정을 떠난 사귐을 영원히 맺고자 하며
아득한 은하에서 만날 것을 기약한다.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달, 포도, 잎사귀

        - 장만영 -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덩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달팽이

     - 김종원 -

 

  처음
  그의 궁전에는
  우수에 잠긴 달이
  가난히 떠올라 갔다.

  이윽고
  차다찬 숨그늘을 이루며
  아득한 지층을 향하여
  한 매듭 기어오른 그는

  온 무게를 등에 지고
  오직 금진 제 사랑을
  소리 없이 갈아 가고 있었다.

  이슬째 미끄러진 울타리에
  사과나무
  한
  그
  루.

  오늘 타고난 이 터전으로
  한 마디 우화를 모종해 나온
  그는

  아무도 열어 보지 못한 탑 안에
  어느 새
  이파리가 되어 가는 것이다.

 

 

 

 

담배연기처럼

      - 신동엽 -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 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 
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답화귀(踏花歸)

             - 한하운 -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지네 
함박눈인 양 날리네 깔리네

 

꽃 속에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꽃이 달빛에 졸고 
봄달이 꽃 속에 졸고 
꿈결 같은데 
별은 꽃과 더불어 
아슬한 은하수 만리(萬里) 꽃 사이로 흐르네.

 

꽃잎이 날려서 
문둥이에 부닥치네 
시악시처럼 서럽지도 않게 
가슴에 안기네.

꽃이 지네 
꽃이 지네 
뉘 사랑의 이별인가 
이 밤에 남몰래 떠나가는가.

 

꽃 지는 밤 
꽃을 밟고 
옛날을 다시 걸어

 

꽃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당신

      - 이승훈 -

 

  고양이처럼 삵고 싶어라
  엎드려 있고만 싶어라
  고운 피 흘리는 마음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어디로 가고만 싶어라
  이 어두운 마음
  밝아오는 해이고 싶어라
  아무리 채찍이 갈겨도

  그리움은 끝나지 않어라
  당신 얼굴에 입맞추고 싶어라
  하아란 돌이고 싶어라
  파아란 구름이고 싶어라

  모조리 버리고 오늘
  바쁘게 명동을 걸어가면
  바람부는 왕십리를 걸어가면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언제나 다른 나라에 계신
  당신 고개 한번 끄덕이면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당신이 그리운 날은

      - 장남제 -
 
당신이 그리운 날은 
다짐처럼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밤하늘을 잘라다 
마루에 깔고 엎드리면 
한없이 쓸 것만 같던 사연 
펜보다 
가슴이 먼저 젖고 말아

 

밤새 
쓰다가 구겨버린 편지는 
하나 둘 
주인 없는 별이 되어 
캄캄한 마루에 하얗게 흩어지고

밤하늘에 별만큼 쓰고도 
끝내 
마저 쓰지 못한 사연은 
뜬금없이 찾아오는 통증이 되고 맙니다

당신이 그리운 날은 
약속처럼 
하늘에 별이 가득합니다

 

 

 

당신의 사랑 앞에

          - 박두진 -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 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가락과 심장에 상채기 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 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당신의 얼굴 

    - 홍윤숙 -
   
어머니
흰 종이에 
수묵 풀어
당신의 얼굴
그려보아도 
꽃 같은 미소
간데 없고
하얗게 바랜 모습
줄줄이 주름진 세월
하늘 같은 희생들
그릴 바 없어
내 손부끄러이
더듬거립니다.
어. 머. 니.

 

 

 

당신의 자리

        - 이충이 -


  세상 밖으로만 늘 가신다
  안에서는 살 수 없다며
  돌다리 밑 잡초더미 깔고 누워
  남은 이들에게도 고생 남기지 않겠노라
  아버지는 혼자 다짐하신다
  마른 검불로 짓눌린 당신의
  아픈 목울음을 누가 알랴
  시린 가슴 속에 인줄 치고
  사립문짝 미시며
  부끄럼 하나 없는 백발로
  수십 년 해오던 일
  아침에 작파해 버리시고
  그저 가는 거라며
  밖으로 나가는 데는
  노잣돈도 필요없고
  널짝이불도 필요없고
  둘둘 거적으로 말아버리듯
  늘 떠나신다
  재로 뿌려
  냇물에 흐르라며
  당신의 가시는 길
  저녁의 고샅길에
  내가슴 속 빗금을 떨구고 있다
  엄동설한
  맨발도 게염치 않으시니
  가져갈 게 무어 있느냐며
  그냥 떠나신다
  꺼억꺼억 하늘 우러러
  나는 울고 섰고
  당신의 어둠 끝에서
  당신은 흰 무명으로 빛나고 있다
  오
  정녕 당신도 아무것도 세울 수 없으며
  내게 남길 것도 없사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刹那)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도봉(道峰
            - 박두진 -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먼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도척의 개

       - 이인석 -

 

  밤의 고요를 찢으며
  줄기차게
  절망을 운다

  원한이 납덩이로 가라앉은
  담장높은
  흉가들...

  공포의 성곽을 둘러치는 충견이여
  이 밤 또 네 주인은
  무엇을 음모하여 미소짓는가.

 


독(毒)을 차고

        - 김영랑 -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디!'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디!',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돋보기 맞추러 갔다가

             - 장옥관 -


옛 애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험 하나 들어달라고-. 성대도 늙는가, 굵고 탁한 목소리. 10년 전 이사 올 때 뭉쳐 놓았던 고무 호스, 벌어진 채 구멍 오므라들지 않던 호스가 떠올랐다. 
오후에 돋보기 맞추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 흰 모시 치마저고리만 고집하던 노마님이 사돈집에 갔다가 아래쪽이 조여지지 않아 마루에 선 채 그만 실례를 하셨다고-. 
휴지 가지러 간 사이 식어버린 몸, 애걸복걸 제 몸에 사정하는 딱한 사연도 있다. 조이고 싶어도 조일 수 없는 不隨意筋, 늙음이다. 몸 조여지지 않는데도 마음 사그라들지 않는 난감함, 
늙음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실은 남남이듯 몸과 마음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깨달음, 찬물에 발바닥 적시듯 제 스스로 느끼기 전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실, 이것이 늙음이다.

 

 

돌.2

    - 전봉건 -

 

  달밤엔
  소문이 돌았다.

  제주도
  통영
  마산
  부산
  또는
  원산의
  바닷가
  젖은 모래톱에
  달밤이면 달빛같은 색깔의
  고운 돌 하나가 서서
  달빛같은 소리로 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러는
  대구나
  서울의
  달빛 스며든 뒷골목에서
  그 돌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중섭의 웃기만 하는 아이들 가운데
  자지 달린 한 아이더라는 소문이었다.


     돌.31

  대나무로 만든
  피리의 구멍은 전부 아홉 개다
  사람의 몸에도 아니 뼈에도
  아홉 개의 구멍은 날 수가 있다
  아홉 개의 구멍 난 돌도 있다
  그제는 30년 전 한 이등병이 피 흘린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 떠도는 피리소리를 들었고
  어제는 충청북도 후미진 돌밭을 적시는
  강물 속에 떠도는 피리소리를 들었다
  오늘 내가 부는 대나무 피리소리는
  그제의 피리소리와 어제의 피리소리가
  하나로 섞인 소리로 떠돈다

 

 

 

   - 이종욱 -

 

  화산의 입 안에서 지글지글 끓어오르다가
  우리와 더불어 닳고 있다
  장마에 씻겼다가 햇볕에 마르다가
  천둥번개 삼키고 심장이 튼튼해졌다

  돌 하나 품속에 간직하라
  차고 단단한 목소리 하나
  차고 단단한 슬픔 하나
  꼿꼿이 자랄 것이다
  한가닥 마른 번개 번쩍일 것이다
  영생불로의 바람 한자락 펄럭일 것이다
  곧게 내리꽂히는 햇살 한보자기 풀어놓을 것이다

  돌을 던져라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곳을 향해
  거짓된 침묵의 심장을 향해
  돌은 돌아온다
  빛은 이미 오래 전에 어둠을 꿰뚫었으나
  아직껏 거두어 가지 못하고 있다
  어둠 속에 불끈 버티고 선 돌
  뼈와  꽃도 숨기고 두 눈 부릅뜬 돌

  돌 하나 꿈 속에 간직하라
  차고 단단한 목소리 하나
  돌을 던져라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곳을 향해

 

 

 

 

   - 김여정 -

 

 

  부산 태종대에서
  청옥빛 파도를 타고
  파도가 되던
  둘째놈 세째놈이
  해변에 밀려 와선
  청옥의 돌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돌밭에 솟아난
  사슴의 뿔을 만나고
  나는 십년 수절을 헐어버렸다.

  엄마의 황홀한 정사에
  둘째놈 세째놈이 곁에서
  들러리 서서
  바다 한 자락을 끌어다가 덮어주고
  덮어주고 있었다.

  파도도
  우리의 만남을 손뼉치며
  흰 이빨 내어 웃어주고 있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돌멩이

     - 김창완 -

 

  척박한 땅일수록 여럿이 묻혀
  개간의 괭잇날을 완강히 거부하던
  너는 한때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던 네가 어디를 떠돌이로 다니다가
  고향 버린 막벌잇군들만 모여 사는
  이 변두릿길에까지 굴러와서
  취한 사내들의 발부리에 채거나
  리어카아 바퀴에 밀리거나 하면서도
  너는 그들과 같이 살고자 원한다.
  흙먼지 뒤집어쓴 채
  더러는 개굴창에 처박힌 채
  추워도 절대로 떨지 않고
  더워도 땀 흘리지 않는다.
  할머니 좌판 위에 내리쬐는 햇살
  순대집 나무 의자에 내려앉는 그늘
  그들이 조금씩 조금씩 희망을 포기하고
  순종조차 조금씩 조금씩 포기해 버려
  아무 가진 것 없는 맨손이 되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너를 움켜쥐리라 믿는다.
  너는 날개 없이도 날 수 있고
  거만하게 번쩍이는 유리창을 깨트렸고
  눈부셔 바로 보지 못하던
  넓고 환한 이마도 깨트렸다.
  겨울이 아무리 길고 추워도
  네가 묻혀 있던 이 땅의 어느 어덩 하나
  어깨 움츠린 걸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돌멩이를 위한 시

         - 윤여홍 -


  무심코
  발부리에 채인 돌멩이를 보면
  돌멩이가 아니라
  무심한 돌멩이의 아픔이 아니라
  시를 버린 무심한
  나의 아픔이 먼저 보입니다.
  무심한 나의 상처 위에
  무심한 돌멩이의 아픈 가슴이 열리고
  뜨거운 돌의 말씀으로
  내가 입을 맞춥니다.
  시처럼 뜨겁게
  시의 가슴을 열어줍니다.
  무심코 아주 무심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무심한 돌멩이를 내질러 봄도
  시를 쓰기 위해선
  더러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길

     - 백추자 -


  노래해도 노래해도
  채워지지 않는 반쯤의
  달이 둥실 떠 있다.

  은빛 반쪽과
  비어 있는
  반쯤의 허적,

  비어 있는 반쯤의 깊이를
  채울 넓이가
  우리에겐 영
  마련되지 않는다.

  사랑의 모습
  또한 그러하여
  오는 날도 또 오는 날도
  채워지지 못하는
  은빛 여백을 체념한다.

  안개 속에 몇 날을 남기고
  돌아오는 자들의
  영원한 숙제이다. 그것은

 

 

 


     돌아온 편지

             - 김정웅 -

 

  산 하나를 헐어낸다.
  한 삽을 들어낼 때마다
  들어내는 힘의 깊이로
  발밑에 소인 찍히는 발자국

  다른 한 삽을 뜨기 위하여
  비켜서면
  그 자리에 남은 어설픈 그림자가
  삽을 든 채로 나를
  노려보고 서 있다.

  내 발자국 파내기 위하여
  산을 헐어 내린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대지의 본향은 얼마나 되나,
  발자국이 또 남는다.

  진종일 산을 헐어 내린다.
  진종일 발자국이 쌓인다.
  날이 저물면
  저무는 하늘의 깊이 만큼 헐려 있는 산
  저무는 하늘의 깊이 만큼 쌓여 있는 산
  아아, 되돌아 온 편지처럼 부끄러운 산.

 

 

 

 

돌의 시간

         - 서정춘 -

 

자네가 너무 많은 시간을 여의고 나서 그때 온전한 허심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지나간 시간 위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눈을 뜰 수 없고 온몸을 안으로

안으로 웅크리며 신음과 고통만을 삭이고 있는 그동안이

자네가 비로소 돌이 되고 있음이네 
 

자네가 돌이 되고 돌 속으로 스며서 벙어리가 된 시간을

한 뭉치 녹여 본다면 자네 마음속 고요 한 뭉치는 동굴 속의

까마득한 금이 되어 시간의 누런 여물을 되씹고 있음이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 조정권 -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혼자이오나 혼자가 아니옵니다.
  혼자이오나 여전히 혼자가 아니옵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이 마음 오랫동안 혼자 향하고 있었아오나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이 마음 오랫동안 혼자 물굽이 일었아오나 응결하지 아니하였읍니다.
  어느 고적한 밤의 어깨에 기대어 그 침묵의 물굽이를 향하고 있었아오나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내 스스로 이룬 근심이니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내 스스로 향한 불길이니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정결하게, 그리고 공손하게,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에 이르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이루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응결하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혼자로서 그득하지 못했읍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차 넘치옵니다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넘치고 있아옵니다.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비어서 넘치옵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오늘은 그분이 지긋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읍니다.
  오늘은 그분이 힘겨운 짐을 내려놓고 앉아 계시는 모습을 뵈었읍니다.
  오늘은 그분이 하늘에 기대어서
  육신도 짐도 다 벗어놓은 채 가슴만으로 앉아 계시는 모습을 뵈었읍니다

 

 

 

 

동그라미 

      - 이대흠 -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 하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이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 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발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손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동경(憧憬)

       - 김광섭 -

 

온갖 사화(詞華)들이
무언(無言)의 고아(孤兒)가 되어
꿈이 되고 슬픔이 되다.

 

무엇이 나를 불러서
바람에 따라가는 길
별조차 떨어진 밤

 

무거운 꿈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形象)이
나의 만상(萬象)에 깃들이다.

 

 


  동두천.1

          - 김명인 -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릴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 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동대문

          - 고운기 -

 


  이 문이 열리면 조선의 동쪽이 열리고
  이 문이 닫히면
  조선의 동쪽 사람들은 이문동이나
  신설동에 와 머물러야 했따
  조선의 동쪽은
  동대문의 문짝만큼만 했을까
  소나 나귀도
  사람이나 화물도
  동대문 하나면 족했다, 조선의 동쪽은
  이 문이 열리면 열리고
  상감께 올리는 공물도
  서울 시민 먹일 옥수수며 감자도
  족히 들어왔다
  어둠을 맞고 이 문이 닫히면
  소도 나귀도 잠들고
  들어올 사람도 짐도 문밖에서 잠들었다
  잠든 마을은 평화로왔지만 이제
  종로는 힘차게 달려오다 여기서 멎고
  건널목도 지하로 숨어
  사람들은 속삭이며 지하도 어디로 사라지는데
  이 문은 닫혀 있다
  버스도 사람도 문을 두고 돌아
  돌아서 어디로 가고 있다
  닫힌 것은 동대문만이 아니며
  돌아가는 것은 자동차 뿐만이 아닌 것 같이.

 

 

 

동두천에서

      - 정상현 -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중등 2급 정교사가 되어
  신탄리행 기차에 올랐다 김명인을 읽으며
  도착한 동두천은 꽃샘 추위에 막막히 잠겨 있고
  교문 앞을 행진하는 흑인 병사의 탱크 행렬에
  핫도그를 먹는 꼬마들이 거수 경례하고 있었다
  정 선생, 여기는 어려운 도시니까 열심히 해 보도록!
  첫수업부터 나는 너희들의 기를 잡겠다며 설치고
  한문 숙제 때문에 발바닥을 맞은 너희들
  마침내 교실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나는 체벌 이유를 합리화, 끝까지 정당화했다
  이유없는 선생의 위신과 분필가루 같은 사랑을 앞세워
  부기와 타자 급수로 여상 3학년을 점수 매기고
  5분 늦은 지각생을 벌 주면서
  그러나 나는 무엇에 대해 선생이 될 수 있을까
  퇴근길 동두천 별빛이 부끄러워
  생연동 숲 속을 고개 숙여 걸을 때
  흐느끼는 눈망울이 가슴에 별처럼 찍혀 왔고
  숲 끝난 논둑에서 봄벌레 자지러지는 소리 들으며
  작고 연약한 것에 나는 왜 이렇게 강하고 난폭해지는지
  가듭 자문했지만 대답하지 못한 채
  교단 위의 인격과 카아네이션이 오래 오래 미안했다

 

 

 

동무생각

     - 이은상 -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없이 오는 눈밭 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방의 태양울 쏘라
                    - 조명암 -


동방이 얼어붙었다
태양의 붉은피가 얼어붙었다

 

젊은이여 이 고장 백성의 아들이여
손에 든 화살을 힘주어 쏘아보내라
태양의 가슴의 붉은피를 쏘아 흘려라
백성이 광명에 굶주리고
강산의 줄기줄기 숨죽여 누었으니

 

허물어진 옛터
님의 꽃잎 하나 둘

 

아 젊은이들아
함정에 빠진 사자의 포효만이 
광명 잃은 보표(譜表) 우에 달음질칠 이 날은 아니다

 

화살을 쏘라
동방의 태양을 뽑아내라
피끓는 심장에 불을 붙여
낡은 봉화 재 우에 높이 들고 서서
산과 들 곳곳에 이 날의 레포를 아뢰우자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

                    - 영랑 김윤식 -

 

 

 내마음의 어린듯 한편에 끗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츰날빗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 곳 
내마음의 어린듯 한편에 끗업는 강물이 흐르네 

 


동백. 당신... 

        - 김재진 -                


섬에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문을 열면 후두둑, 꽃이 지던 그 섬에 
동백 보느라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떨어지는 동백은 절벽 아래 몸 던지는 궁녀처럼 
치마 뒤집어쓰고 뚝, 수직으로 낙하하곤 했습니다 
동백이 환각이듯 섬은 내게 환각이었습니다 
사실 산다는 것 모두가 환각입니다 
번개같고,그림자 같고,꿈같고,

 

뜬구름 같은 것입니다 
환각 속에서 나는


살아가는 동안 나를 따라오던 
욕망이나 집착 같은 것들은 
한순간 다 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차가운 물 속으로 발을 담갔습니다 
물은 금새 예리한 비수처럼 나를 찔렀고 
물의 은장도에 베는 순간 나는 나의 성급함이 
여전한 욕망이나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집착을 버리기 위해 당신을 버립니다 
당신을 버리기 위해 또 오랫동안 동행했던 아픔도 버립니다 
다시 떨어진 동백이 물위로 떠내려가는 날 
한번쯤 당신 이름을 불러보겠습니다 
당신 조금도 아프지 않아도 아픈, 
비수같은, 
당신, 
그립거나 말거나......

 

 

   동백칠칠조

         - 설창수 -

 

  차마 이대로서야 피도 지도 못하는
  몸짓들 가쁜 정을 가눌 수가 없구나

  기름 똑똑 진 갈매 눈보라도 이겨서
  꼭꼭 야문 봉지가 홍갑사 나부 댕기.

  차마 이대로서야 풀도 맺도 못하는
  열두발 삼단 머리 깎고 중이 될까나.

  아낙네 품은 원한 오월에도 서리온다.
  깊은 밤 잠꼬대로 불러주랴 내 이름.

  속 태워 고인 기름 알알히 맺혔다가
  옥비녀 화촉동방 새낭자에 풍기자.

 

 

 

동지를 위하여

     - 김창규 -


  너와 나의 가슴 속에
  반만년을 이어온 뜨거운 사랑
  가난한 판자촌 꼭대기에
  깃발처럼 펄럭이는
  우리들의 그것

  바람부는 날
  험산 준령 넘어 온 손님을 맞아
  죽을 때까지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것을 위해 살아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개 죽더라도
  가슴과 가슴으로 문 열고
  소문이라도 좋은 소문 들리는 날
  목청껏 외쳐 부를 노래
  아! 만주

 

 

 

동정의 시

     - 박근영 -

 

  밤을 새우면서 목숨을 앓다가도
  고운 해 동산에 떠오르면
  나는야 이름 없이도 창 앞에 고운 해

  아침 두레박을 드리우듯
  깊은 속 어둠에 잠겨 있는
  당신의 목소리를 가만히 길어
  갈한 목 축이고 나면
  안으로 맑아오는 나의 목소리

  옥통소처럼 곱게 울려
  차가운 하늘 열어 주면

  빨간 댕기 드리운 듯
  적연한 햇빛의 가지 끝에
  가을 과일처럼 익어 오는 건
  어느 날엔가
  꽃다이 주어질
  당신의 은혜로운 언약이십니다.

 

 

 

동천(冬天)
            - 서정주 -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탄행 버스

      - 홍일선 -


  동탄까지 들어가는
  막차도 끊긴 지 오래
  달빛이 지친 몸뚱이를
  허옇게 감아
  길가 아무데나
  나를 팽개치지
  동탄에 들어가면
  일손이 없어 난리라던데
  하루 세 끼 밥 먹여주고
  품값도 일시불에다
  모내기 일당으로는 괜찮다던데
  공사판의 일거리도
  이제는 다아 끝나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황톳물 무논의 못단이
  꿈길처럼 아련하구나
  동탄엔 논밭이 기름지다던데
  왜 농사질 사람이 없을까
  거기도 우리 고향처럼
  정든 땅 버리고
  밤길 떠난 사람 많은가
  오늘 동탄 가긴 글렀으니
  막소주나 한 잔 하고
  오산역에서 밤을 새야지
  쑥고개 백화점 지을 때
  잡부로 몇 달 썩을 때
  양키들 부랄 털럭거리는
  이 거리가 더러웠지만
  살찐 양키들이 부럽구나
  아아 저 달빛이
  우리집 안마당을 비추겠지
  우리집엔 누가 살까
  그냥 빈 집
  명아주만 우리를 기다리며
  무성히 피었을까
  그때 그 몸서리나는 오월
  형님은 어디서 죽었는지
  돌아오지 않고
  칼빈 소총 반납하고
  이듬해 오월
  우리는 고향 떠났지
  내 고향 함평에도
  지금쯤 물꼬대느라
  정신들이 없을텐데
  내일 새벽 첫차로
  동탄에 들어가야지
  농촌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난데
  품값이 일시불이 아니라도
  동탄에 가야지
  함평의 오월을 생각하면
  벌써 몸이 달아오지만
  이 달 오월 한 달은
  동탄에 들어가서
  한없이 모나 심어야지

 

 

 

동화의 나라

       - 박정숙 -


  밤새도록 눈이 내리는 도회지의 빌딩 밑에서
  삐걱삐걱 기계소리를 들으며
  나는 안델센의 동화책을 펼칩니다.

  각박한 삶을 위하여
  잠시 잊고 있던 순수의 대문 앞에서
  나는 내 몸에 묻은 먼지와
  내 마음에 묻은 기름기를 떨어냅니다.

  한 장의 문을 넘어
  저토록 고운 눈이 송송 내리는데
  깊은 동화의 나라에는 순수한 어린이들로 가득 차 있읍니다.

  성냥팔이 소녀도 보이고
  인어공주의 얼굴도 보이고
  송아지, 말, 염소, 강아지 따위들이
  마음을 풀어 놓고 뛰어다니는 것도 보입니다.

  나는 갑자기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져서
  눈 속으로 신나게 뛰어들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멀리멀리 달아나고 맙니다.
  아마 내가 너무 무서웠던지
  내 몰골이 너무 추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언덕에 서서
  가슴이 하나 둘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읍니다.
  눈시울이 자꾸만 시큼거리며
  기계소리가 삐걱거리고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각박함이
  분명히 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읍니다.

  잃었던 동화의 나라로
  천진무구한 어린이들의 세게로
  결국 내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안델센은 나를 대문 밖으로 밀어 내고는
  철컥 소리를 내며 동화책에 자물통을 채웠읍니다.

  잃어버린 내 어린 시절이
  저 눈알 속에서 하나하나 내려 쌓이고
  나는 그 순수의 눈을 바라보면서
  목을 축 늘어뜨린 채
  마치 유형을 떠나는 죄인과도 같은 심정이었읍니다.

 

 

 

동행

    - 하일 -


 신문 방송에서 믿을 건 광고뿐이다, 아니다, 하고 때로는 다투었지
때로는 다투며 새벽까지 소주를 나누어 마시다가 교회의 잠긴 문밖에서
유행가를 불렀지  요즈음 잘 팔리는 게 예수냐? 아니면 그리스도냐? 서로
묻기도 했었지  그는 한 번도 손바닥을 펴서 내게 보이지 않았고, 헤어질
때 그냥 웃기만 했었지  목이 쉬어 그냥 웃기만 했었지

 

 


두견새

    - 博川 최정순 -

 

님의 숲에서

목 터져라 피 토하며 우는 밤 

 

한때 걸쳤던 진주홍빛 옷 벗고

벌집처럼 시커멓게 구멍난 시간들

주체할 길 어찌할 길 없어

튼실한 이음줄로 지배했던

지난날의 특별함 속으로

걸망 하나 둘러메고 날아가니

 

버리고 싶지 않은 수많은 단상들

오로지 너 향하던 님의 선연한 눈빛

어디에도 꼬리 감췄네

  

무섭게 몰려드는 갈증 떨치려

이슬에 술 타 마시는 밤

눈물의 꽃가람에 홀로 닻 내리고

저 멀리 멀어진 님의 곁 그리워 

목이 타도록 너는,

울고 울더라.
  

 


두 여인의 노래  

     -博川 최정순 -

아버지 고향
박천 봉화리 할머니
호롱불 밤새 바느질
풀 먹인 옷가지
박달나무 방망이
또닥또닥, 또닥또닥
구김살 없이 펴 반드러워
아버지 품새 내려면
다듬이질 마주 앉아
박자 맞춰 노래하며 두드려야 제 맛
아버지 입혀 남으로 보냈다.
온양 거르미 어머니 박달나무 방망이
또닥또닥, 또닥또닥
다듬이질하며 노래
두 여인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네 같은 풍속도
접동새 구슬피 우는 달밤
아버지 옷 다듬는
남과 북 공간 허무는
한 많은  두 여인의 소리
아버지 꿈길 밟히어
서둘러 북에 가셨나 보다

 


 

두만강아 너 우리의 강아

          - 이용악 -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

오늘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은 덮어 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 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두메산골

       - 이용악 -


1

들창을 열면 물구지떡 내음새 내달았다

쌍바라지 열어제치면

썩달나무 썩는 냄새 유달리 향그러웠다


뒷산에두 봋나무

앞산두 군데군데 봋나무


주인장은 매 사냥을 다니다가

바위틈에서 죽었다는 주막집에서

오래 오래 옛말처럼 살고 싶었다.


2

아이도 어른도

버섯을 만지며 히히 웃는다.

독한 버섯인 양 히히 웃는다.


돌아 돌아 물곬 따라가면 강에 이른대.

영 넘어 여러 영 넘어가면 읍이 보인대.


멧돌방아 그늘도 토담 그늘도

희부옇게 엷어지는데

어디서 꽃가루 날러오는 듯 눈부시는 산머리


온 길 갈 길 죄다 잊어버리고

까맣게 쓰러지고 싶다.


3

참나무 불이 이글이글한

오지 화로에 감자 두어 개 묻어 놓고

멀어진 서울을 그리는 것은

도포 걸친 어느 조상이 귀양 와서

일삼든 버릇일까.

돌아갈 때엔 당나귀 타고 싶던

여러 영에

눈은 니리는데 눈은 내리는데.


4

소곰토리 지웃거리며 돌아오는가

열두 고개 타박타박 당나귀는 돌아오는가

방울 소리 방울 소리 말방울 소리 방울 소리

 


 

뚝새풀 

        - 김동리 -

 

뚝새풀 무논에 
개구리 운다

 

나루 건너 재 너머 
장터는 五十里

 

막걸리 젖은 옷깃의 
장꾼 돌아오지 않는데

 

어스름 달밤을 
뻐꾸기 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 이성복 -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성기(性器)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 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 치 환 -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ㅎ던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에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라.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뜨락

    - 김상옥 -

 


자고 나면

이마에 주름살,

자고 나면

뜨락에 흰 라일락.


오지랖이 환해

다들 넓은 오지랖

어쩌자고 환한가?


눈이 부셔

눈을 못 뜨겠네.

구석진 나무 그늘

꾸물거리는 작은 벌레……


이날 이적지

빛을 등진 채

빌붙고 살아 부끄럽네.


자고 나면

몰라 볼 생시.

자고 나면

휘드린 흰 라일락.

 

 

뜻밖의 추억

        - 음예원 -


  아, 나는 없읍니다.
  둘러보아도 둘러보아도
  내 존재의 괄호는 비어 있읍니다.
  늘 정답은 하늘에 나부끼며
  바람의 성적표를 찍어냅니다.
  샛소리나는 숨 한가락이
  괄호 속에 거미줄을 치며
  미끄러져 내립니다.
  우주는 조용히 나를 토해냅니다.
  나는 진공의 거울 속으로 유배당합니다.
  창밖을 내다보듯이--
  수화로 가득찬 세상에서
  가죽 가방에 정답을 꾸려 넣을 사람이
  무거운 그림자를 끌고 갑니다.
  바람이 성적표를 날립니다.

 

 

   - 김광림(金光林) -

 

나이 예순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더 살면 덤이 된다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종삼(宗三)*은 덤을 좀만 누리다 떠나갔지만

피카소가 가로챈 많은 덤 때문에

중섭(仲燮)*은 진작 가버렸다

가래 끓는 소리로

버티던 지훈(芝薰)도

쉰의 고개턱에 걸려 그만 주저앉았다

덤을 역산(逆算)한 천재들의 밥상에는

빵 부스러기 생선 찌꺼기 초친 것 등

지친 것이 많다

그들은 일찌감치 숟갈을 놓았다

소월(素月)의 죽사발이나

이상(李箱)의 심줄구이 앞에는

늘 아류들이 득실거린다

누군가 들이키다 만

하다 못해 맹물이라도 마시며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떠나가는 배 
         - 박용철의 -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쫒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떠나는 설음

                                         - 심연수(沈連洙) -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보내는 오지랖을 눈물로 적시고

                                        끝없는 두 줄기 길손이 되어

                                        낯 모를 님의 품을 찾아간다

 

                                        사랑보다 참다운 사랑을 찾으려

                                        정처 없이 떠나는 나그네 설음

                                        찢어진 손수건이 다 젖도록

                                        뜨거운 눈물을 흘렸노라

 

                                        귀를 가리우고 눈을 막았노라

                                        뼈와 뼈를 갈고 이와 이를 가는 소리

                                        듣기만 해도 악착한 소리

                                        안 들으려고 무한히 애를 썼다

 

                                        두 주먹이 부서지도록 맞쪼았으나

                                        아프지 않는 아픔을 멀어질수록 똑똑해지는 그 일을

                                        새록새록 꿍쳐보는 죄와 악

 

                                        모든 것 다 버리고싶은

                                        회한을 품고

                                        가리라 언제든지

                                        끝이 날 그날가지

 

 

떠도는 자의 노래

             - 신경림 -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메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정현종 -

 

 

그래 살아 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 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이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

쓰러지는 범이 없는 공이 되어

 

 

따뜻한 책 
       - 이기철 -


행간을 지나온 말들이 밥처럼 따뜻하다 
한 마디 말이 한 그릇 밥이 될 때 
마음의 쌀 씻는 소리가 세상을 씻는다 
글자들의 숨 쉬는 소리가 피 속을 지날 때 
글자들은 제 뼈를 녹여 마음의 단백이 된다 
서서 읽는 사람아 
내가 의자가 되어줄게 내 위에 앉아라 
우리 눈이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린 글자들 
말들이 마음의 건반 위를 뛰어 다니는 것은 
세계의 잠을 깨우는 언어의 발자국 소리다 
엽록처럼 살아 있는 예지들이 
책 밖으로 뛰어나와 불빛이 된다 
글자들은 늘 신생을 꿈꾼다 
마음의 쟁반에 담기는 한 알 비타민의 말들 
책이라는 말이 세상을 가꾼다

 

 

딱 둘만 남게 된다면

            - 임문혁 -


  이 세상에
  딱 둘만 남게 된다면
  하나에게 있어
  하나는
  얼마나 소중할까

  이 세상에
  딱 둘만 남게 된다면
  하나의 고독은
  하나가 덜어주고
  하나의 병고는
  하나가 보살펴주고
  하나의 열매는
  하나와 나누어 먹고
  하나의 일은
  하나가 도울 수밖에 없는데

  그러므로
  하나는 하나가 아니요
  둘이며,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난데

  이 세상에
  딱 둘만 남았을 때
  하나가
  없다면?

  그런데, 우주에는
  딱 하나씩만 살고 있는 별도
  있다고 한다.

 

 

 

딸에게

     - 김혜숙 -

 

  걱정하지 말아라
  광화문이 넓어진다
  을지로도 넓어진다
  걱정하지 말아라

  어젯밤
  밤새도록 네 잠자리를 어지럽히던
  이제는
  꿈을 깨어라
  소경의 눈
  그 눈을 또 감고 히히거리는
  원수의 늪을 피하여

  아! 네가 흘리는 눈물은
  순백의 꽃이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종로가 넓어진다
  을지로도 넓어진다
  걱정하지 말아라

 

 

  - 서소로 -


  지금은 다시 강물이
  산자락 밑에서 언몸을 풀 때
  밭가의 돌을 헤집고 대마순이 돋고
  맷집 좋은 소목에 멍에를 지운다
  땅의 온기 아래 씨앗을 잠재우라
  목마름과 물넘침의 세월 보낸 뒤
  가을, 며칠 더 햇빛을 붙잡아 두어
  입맛좋은 나락과 수수단을 거둘 수 있으리라

  여기서부터 허리를 굽혀라
  어진 얼굴들이 흙을 닮아가는 들판
  가슴다쳐 흘러오는 물살에 몸을 기대고
  봄쑥은 그 위에 겨울의 슬픔을 넌다

  지금 이 땅에 져내리는 퇴비처럼
  버려진것과 썩은것들
  메말라 죽은것들 다 여기에 눕히고
  온누리가 빛바랜 슬픔으로 나뒹굴수록
  땅은 사랑 더욱 비옥하게 다져왔느니
  이제 땅을 죽은 에미라 부를 수 없으리라
  샛강 넘쳐 흘러넘친 빗물굽이
  같이 몸 패이다 아우성없이 쓸려나가고
  마르면 염천 하늘밑
  소리없는 눈물로 등태우며 같이 마르듯
  더딘 이젖줄과 애태움으로 마을들을 키워냈느니라

  지금은 다시
  한번 그쳤던 땅의 숨소리가
  거칠게 몰아쉬는 소의 코끝에서 묻어나는 때
  논밭길 오르내리며
  무지한 대마향에 눈꺼풀이 내려앉아도
  바람드는 그늘을 찾지 않는다
  땀절며 뿌린만큼 거두고
  치성드린 만큼 받아서
  지친 땅에 되돌릴 것은 다시 돌려주어
  흙에서 왔다 본대로 가는
  소중한 순리를 따르기 때문이라

 

 


땅 속 깊이 노래를

             - 이영걸 -

 

  귀뚜라미...

  해마다 이맘때면
  놓치지 않고
  귀중한 한때를
  노래하지만

  그리운 옛 시인의
  노래 속에 자리잡고
  무수한 사람들의
  가슴도 울렸으니

  찬바람 대지를
  휘몰아 칠 땐

  땅 속 깊이 노래를
  묻어 뒀다가 해바라기
  환하게 머리 쳐들
  무렵이면 이렇게
  또 한 번 맑은 노래
  뽑아내니 밤 하늘
  흩뿌리는 무수한
  별빛처럼

  너희들의 노래는
  이어지리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밤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데드마스크

     - 허만하 -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려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데레사씨 꽃가게

          - 정두리 -


  마르면서 붉어지는 분홍 장미는
  물구나무로 매달린 채
  벌써 한 달째다

  한 웅큼 잽싸게 따라와 뿌려진 바람과
  알맞게 고루 배인 햇살로 피어난 꽃도
  여기서는 가끔 기가 죽는다

  시들어빠진 마른 꽃이 팔려나가는 곳도
  이곳이다

  반쯤 피다 만 나리꽃
  하루에 두세 번 피고 지는 알라딘 꽃
  꽃들은 절대로 소리내며 웃지 않는다

  근시인 데레사씨
  꽃말 따위로 부질없는 야담을 만들지 말라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요즘은
  제 냄새 풍기며 사는 법을 배우노라고
  피는 꽃은 다르지만
  지는 꽃은 닮았더라고
  꽃들이 못 알아듣게시리
  가만가만 이야기하곤 하였다

 

 

 

데 모

      - 박팔양(朴八陽) -

 


납덩어리같이 무겁고 괴로웁든 우리들의 마음이

오늘은 엇지하야 이같이 가볍고도 유쾌하냐

5월의 한울 그 밑에서 부르는 우리들의 노래가

무슨 까닭에 참으로 무슨 까닭에

가슴 울렁거리도록 이같이 즐거웁게 들리느냐


시가(市街)가 좁다고 먼지 휘날리며 달리든

×××× 자동차와 마차

그것이 오늘의 ×××× 무엇이란 말이냐

보아라 거리와 거리에 모혀슨 우리 ××××

평소에 묵묵히 일하든 친구들의 오늘을!


가로(街路)에도 우리들의 데모

옥내(屋內)에는 경이(驚異)에 빗나는 저들 ×××

보혀주자 저 영리하고도 앞 못보는 백성들에게

미래를 춤추는 이 군중의 무도(舞蹈)를!


×××××× 노래와 환호와 박수다

보조. 보조. 보조를 맞치라

………… ………… …………

5월의 향기로운 공기를 통하야

오오 울리라 우리들의 교향악을

 

 

 

데셍

    - 김광균 -


1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대낮

     - 서정주 -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아편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임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부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왼몸이 닳아...

 

 

대바람 소리

         - 신석정(辛夕汀) -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럴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

 

 

 

대설 주의보
               - 최승호 -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끄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을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이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끄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까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대숲 아래서

         - 김후란 -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 네 얼굴이 어리고
  밤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이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모두 내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찌기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대자보

          - 윤재철 -


  아무렴 그럼 나는 믿는다.
  눈보다도 깨끗한, 눈보다도 진실한
  너희들의 마음, 너희들의 말을
  또한 아무 곳에도 적을 수 없었던
  하얀 노트, 정의로운 교과서
  어디에도 적을 수 없었던
  너희들의 마음, 너희들의 말을

  1교시 수업을 하며 눈이 왔지
  아무렴 눈은 어디에도 왔지
  그러나 너희들 마음 위에만 하얗게 내린 눈
  눈은 바로 너희들의 슬픔이었을까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교과서 어디에도 없는
  그러면서 말없이 부대끼고
  말없이 얼크러지고 말없이 일어선

  그래, 쉬는 시간 하얗게 눈덮인 운동장에
  게릴라처럼 몇 놈이서 순식간에 써놓고 사라진 대자보는
  운동장만큼 크고 확실한 설상 대자보는
  3층, 4층 높은 곳에서만 보였다.
  우리처럼 높이 갇힌 하늘에서만 보였다.
  너희들은 창가에 매달려 환호하고

  아무렴 그럼 나는 믿는다.
  눈보다도 깨끗하고 눈보다도 진실한
  너희들의 마음, 너희들의 정의를
  아무렴 그럼 언젠가는
  더욱 크게 외치고 더욱 크게 마주치고 더욱 크게 뛰어넘을
  너희들의 마음, 너희들의 정의를

 

 

   대청봉 수박밭

            - 고형렬 -

 


  청봉이 어디인지. 눈이 펑펑 소청봉에 내리던 이 이름밤
  나와 함께 가야 돼. 상상을 알고 있지
  저 큰 산이 대청봉이지.
  큼직큼직한 꿈 같은 수박
  알지. 와선대 비선대 귀면암 뒷 길로
  다시 양폭으로, 음산한 천불동
  삭정이 뼈처럼 죽어 있던 골짜기 지나서
  그렇게 가면 되는 거야. 너는 길을 알고 있어
  아무도 찾지 못해서 지난 주엔 모두 바다로 떠났다고 하더군
  애인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나 나나  행복했을 것이다.

  너는 놀라지 않겠지. 누가 저 산꼭대기에
  수박을 가꾸겠어
  그러나 선들거리는 청봉 수박밭에 가면 얼마나 큰 만족 같은 것으로
겁 속에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와서
  사는 거야. 별 거겠니 겨울 최고봉의 추의를 느끼면서
  걸어. 서릿발 친, 대청봉 수박밭을 걸어.
  그 붉은 속살을 마실 수 있겠지.

  어느 쑥돌 널린 들판에 앉듯, 대청봉
  바다 옆에서 모자를 벗으면 가죽구두를 너도 벗어 놓고 시원해서
  원시 말아야. 그 싱싱한 생명 말이야
  상상력을 건든다.
  하늘에서 들리는 파도소리로
  삼경까진 오겠지 기다리지 못하면 시인과 동고할 수 없겠고
  그게 백두산과 닮았다고 하면 그만큼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맨발로 눈이 새하얗게 덮인, 아니지, 달빛에 비친 흰 이슬을
밟으며
  나는 청봉으로 떠난다.
  독재로 너의 손목을 잡고
  나는 굴복시켜야 돼 너는 사랑할 줄 아니.
  한 가마 옥수수를 찌는 여인의 밤
  그 밤만 가지고, 너와 나 우리 모두 노래할 수 있는가
  가구를 두고 청봉 수박 마시러 나와 간다, 세상은 다 내 책임이었냐는
듯이 가기로 했다.

  이 (대청봉 수박밭) 속에 생각이 있다고 털어놓건
  비유인지 노래인지, 그것이 표명인지
  거짓같지 않은 뜬소문 때문에
  나는 언제고 올테니까.
  대청봉에서 너와 가슴을 내놓고
  여행을 왔노라며, 기막힌 수박인데 하고 뭐라고 할까.

  설악산 대청봉 수박밭!
  생각이 떠오르지 않다니
  그것이 공산 아니면 얼음처럼 녹고 있는 별빛에 섞여서 바람이 불고,
수박 같은 달이다. 아니다
  수박만한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면
  상상이다 아니다
  할 수 있을까.

 

 

 

뒷산

   - 신달자 -

 

  외로울 적에
  마음 딥답할 적에
  뒷산에 올라가 마음을 벗는다.
  나무마다 하나씩 마음을 걸어두고
  노을을 받으며 드러눕는 그림자
  돌아갈 것이 없는 빈 몸이다.
  무겁게 끌어 온 신발의 진흙덩이
  서리 감겨 살을 에는 하루의 바람
  모두 모두 부려놓는
  울먹이는 내몸이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8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563 민족과 현대시 2015-06-12 0 3789
562 시적 자기 희생 2015-06-12 0 4080
561 시의 정신 2015-06-12 0 3845
560 자유시의 정착 2015-06-12 0 4076
559 전통시가 형식의 붕괴 2015-06-12 0 4613
558 한국의 현대시 2015-06-12 0 4031
557 천재 시인 - 李箱 김해경 2015-06-08 0 4284
556 <시장> 시모음 2015-06-08 0 4150
555 <6월> 시모음 2015-06-08 0 4685
554 담배는 웬 담배ㅠ? 2015-06-05 0 4202
553 詩 - 칼 . 맑스 = 칼 . 마르크스 = 칼 . ' 막 '쓰 2015-06-04 0 5313
552 <서울> 시모음 2015-06-04 0 4720
551 한설 시넋두리 2015-06-02 0 4092
550 <<막걸리 시>> 노벨문학상 ???... 2015-06-02 0 4729
549 연변 동시 한바구니 2015-06-02 0 4474
548 동시와 한석윤 2015-06-02 0 3848
547 동시인 한석윤 시비 2015-06-02 0 5647
546 김광섭 시인을 아시나ㅠ? 2015-06-01 0 4514
545 성북동 비둘기 2015-06-01 0 5055
544 상상력과 詩 2015-05-31 0 4487
543 시인 -리호원 2015-05-31 0 4268
542 석화 / 시창작 강의록 2015-05-21 0 6512
541 최룡관 동시론 4 2015-05-20 0 4718
540 최룡관 동시론 3 2015-05-20 0 4408
539 최룡관 동시론 2 2015-05-20 1 4809
538 최룡관 동시론 1 2015-05-20 0 4779
537 이승훈 시론 5 2015-05-20 0 4078
536 이승훈 시론 4 2015-05-20 0 4433
535 이승훈 시론 3 2015-05-20 0 4554
534 이승훈 시론 2 2015-05-20 0 4466
533 이승훈 시론 1 2015-05-20 0 4517
532 시쓰기에서 의성어, 의태어 활용법 2015-05-20 0 5300
531 시쓰기에서 이미지에 대하여 2015-05-20 0 5690
530 여러 빛깔의 동시 알아보기 2015-05-20 0 5175
529 윤삼현 시창작론 2015-05-20 0 5428
528 문삼석 동시론 2015-05-20 0 4581
527 우리 민족의 정형시 - 시조 쓰는 방법 2015-05-20 0 5354
526 유명한 동시 모음 (클릭해 보세ㅛ@@) 2015-05-20 0 8696
525 동시 작법 모음(클릭해 보기) 2015-05-20 1 5256
524 영상시 모음 2015-05-20 0 5712
‹처음  이전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