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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지역 시문학의 뿌리와 그 현황
장춘식
연변지역의 문학이란 사실상 조선족의 문학이다. 이민시기 “간도”로 불렸던 연변을 중심으로 만주지역에서 이루어진 이주민 문학 전부를 흔히 “연변문학”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본고에서도 이런 범주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1. 연변지역 시문학의 뿌리
연변지역 시문학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한민족의 문화 전통과 문학유산, 특히 근, 현대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민지에서 새로운 문학 전통을 쌓으며 상당 정도 변모를 보이기도 한다.
연변지역 시문학의 효시는 아무래도 창가와 항일가요라 할 수 있는데 창가는 주로 개화기 이후 이주민들이 설립한 학교들에서 불린 노래이고 항일가요는 일제강점기 동안 항일유격대와 유격구 항일민중들 속에서 불린 노래들이다. 창가는 주로 문명개화와 관련된 주제가 다수이고 항일가요에는 일제에 대한 투쟁의지를 고양시키려는 의도가 뚜렷이 표현되어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 이 두 유형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시의 형태를 띠지만 민요적인 요소도 일부 보인다. 이들 작품은 당대에는 상당히 많이 창작되었겠지만 현재 남아 내려온 텍스트는 별로 많지 않다. 그 밖에도 전통적인 장르인 한시도 상당 정도 창작되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문단에서 떨어진 이들 시가작품 보다는 이민지 문단에서 창작된 시작품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문단을 통한 연변지역의 시문학은 당시 발행되던 <民聲報>, <간도일보>, <만몽일보>, <만선일보>, <북향>, <카톨릭소년>, 등 신문, 잡지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이 1940년대 초반에 <만주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등 시집으로 집대성되기도 하였다. 이를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民聲報> 시기의 시문학
먼저 <민성보>시기의 시문학은 <민성보>의 성격과도 관련되겠지만 계급문학적인 성격이 강하다. <민성보>에 게재되었던 시작품으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겨우 9편이다. 3년여에 걸쳐 발행되었던 신문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작품들이 게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겨우 9편의 작품으로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들은 <민성보>를 통해 활동했던 우리 시작품의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백악산인(白岳山人)의 「朝鮮心」이 민족주의적인 이념이나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외에 다수의 작품은 계급적 이념이 짙게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가령 초래생(初來生)의 「단오(端午)」나 김근타(金根朵)의「밤」, C.S.C의 「언니를 그리며」, 남문룡(南文龍)의 「백색테로」 등 작품이 그렇다. 초래생의 《단오(端午)》에서는 단오명절을 맞아서도 아이에게 새 옷은 물론 과자마저 사 먹이지 못하는 병든 어머니의 애탄 사정을 그리면서 “차라리 생명을 땅에 두며/인간의 모든날을 전취하야/우리의 명일(名日)을 만들 때까지” 투쟁하여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계급혁명의 이념과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김근타의 「밤」에서도 사회적약자인 어린애를 빈곤상징의 형상으로 이용하고 있고 또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좀 더 구체적이고 상황이 절실하다.
밤은 깊어 집집에 등불은 켜지고
하늘우에 별들도 반짝거리건만
맥없이 늘어진 그는 별조차 보지 못하였다
배고파 잉-잉 밥달라 우는 어린애
세네때 굶주린 어머님에게 어찌 젖이 있으랴
오! 우는 그 애를 어찌 달랠것인가?
곁집에선 저녁연기 끊은지 오라고
뒷산에 부엉새는 깊은밤을 노래하는데
때지난 이때 누구의 집에서 한술밥 얻어오랴
여전히 울고있는 어린애는 말끝마다 밥주--
한숨짓는 부모의 간장 다 녹여내리나니
긴긴 여름밤 또 어찌나 새워보내랴
1930년 5월 7일 밤에
「밤」의 전문이다. 어린애는 배고파 밥 달라 하는데 어머니는 굶주려 맥없이 늘어져 있다. 게다가 밥 한술 얻어 올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들 두 작품은 못가진자의 빈곤한 삶의 양상을 계급적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하겠다. 빈곤상황의 제시는 계급의식의 표현이나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의 구현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못사는 민중을 의식화시킴으로써 계급혁명을 이루려 하였던 것이 이때 사회주의운동의 기본적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료적인 한계 때문에 이 시기 시문학의 전모를 평가할 수는 없으나 현재 남아있는 작품으로만 보면 <민성보>시기의 시문학은 예술적인 성취도가 높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의식과잉,이념과잉의 문제점들도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시기 열악했던 문화 환경에서 이 정도의 시문학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특히 일제가 “9.18사변”을 도발하여 중국의 동북 땅을 강점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문학이여서 그 이후의 문학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측면에서 문학사적으로 충분히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2) <북향> 시기의 시문학:
다음, 1930년대 초반에는 주로 <간도일보>를 중심으로 문학작품들이 발표되었는데 현재 자료 유실로 하여 전해진 작품은 단 한편도 없다. 그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로 1930년대 중반 용정지역에서 발행된 <북향>지의 작품이 있다. 4호까지 낸 <북향>지에는 상당수의 시작품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다수의 작품들은 “학생시단”의 형태로 발표되었고 강경애, 박계주 등 기성문인들의 시작품도 더러 있지만 전반적으로 작품 수준은 낮은 편이다.
(3) <만선일보>시기의 시문학:
이민지에서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만선일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시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김조규, 함형수, 박팔양 등 당시 한국문단에서 두각을 드러낸 시인들이 이민해 오면서 이민지에서 성장한 신인들과 더불어 지방색과 이민문학적인 성격이 뚜렷한 시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것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만주시인집>과 <재만조선시인집>이다.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은 1943년(康德九年) 9월에 당시 신경(현재의 장춘)의 제일협화구락부 문화부에서 간행했고 편집인은 박팔양(朴八陽)이다. 그리고 <재만조선시인집(在滿朝鮮詩人集)>은 그 한 달 후인1943년 10월에 당시 간도 연길에 있던 예문당(藝文堂)에서 간행했고 편집인은 김조규(金朝奎)였다.두 편집인의 권위성으로 보나 간행 시간으로 보나 이 두 시집은 현존하는 <만선일보>의 자료보다 훨씬 대표성을 지닌다 하겠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두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주요 텍스트로 하면서 <만선일보>에 게재된 여타 작품들도 참고하여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a. 이민지의 서정
조선족의 문학은 이민문학으로 출발하였다. 조선족의 역사가 이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민의 정서가 이민시인들의 시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시작품에는 이민의 정서를 표현한 것들이 많이 있다.
가령 김조규(金朝奎)의 「胡弓」의 경우 이국적인 정서와 이민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일차적으로 호궁이라는 중국인을 상징하는 악기를 등장시킴으로써 동북지역 중국인 이주민의 삶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주민인 조선족 이주민의 삶을 호궁이라는 이미지로써 표현한 것이라 해야 맞다. “어머니의 자장노래란다” “일어버린 南方에의鄕愁란다”라는 두 행의 의미는 오히려 조선인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새 늣길려느뇨?胡弓”과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라는 마지막 행의 표현은 이주민들이 공유하는 암울한 삶과 슬픈 운명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김달진(金達鎭)의 「룡정(龍井)」 또한 이민지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략)
黃昏 길거리로 허렁허렁 헤매이는 흰옷자락 그림자는
서른 내가슴에 허렁허렁 떠오르는 조상네의 그림자.
나는 江南 제비새끼처럼
새론 옛故鄕을 찾어 왔거니.
난생 처음으로 馬車도 타 보았다.
胡弓 소리도 들어 보았다.
어디 가서 나혼자라도 빼酒 한잔 마시고 싶고나
작품의 마지막 2연인데 여기서 “새론 옛故鄕”은 아마도 여기가 고구려의 옛 땅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점은 3연의 내용과 맞물려 있다. 소위 “호인(胡人)”들 속에서 발견한 “흰옷자락 그림자”를 보며 “조상네의 그림자”를 떠올린 것은 이주해온 이 땅이 전혀 낯설지만은 않으며 따라서 여기가 이주민이 뿌리를 내릴 새로운 고향이 될 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이민자의 처지는 “서른 내가슴”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불행하고 서럽지만 그 서러움을 “나혼자라도 빼酒 한잔” 마시면서라도 달래면서 살아야 한다는 강한 생존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시인들의 정서 속에는 이국땅과 이국인에 대한 편견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정서나 편견은 시작품에도 표현된다. 가령 상기 작품의 제2연에서 “한(하얀) 粉이 고루 먹히지않은 살찐 얼굴/당신은 저 넓은 들이 슬프지 않습니가/저 하늘바람이 슬프지 않습니다(가)” 라는 시구에는 이민지 원주민과 이민지의 자연과 기후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표현되고 있는데 비록 이민자로서 그러한 사람과 자연에 적응하기 이전의 주관적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일종의 선입견, 즉 “거치른 만주땅” “미련한 만주인”이라는 선입견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다.
유치환(柳致環)의 「哈爾濱道裡公園」도 비슷한 정서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느낌과 정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김북원(金北原)의 「봄을 기다린다」에서 답을 찾을 수가 있다.
(전략)
꼬지깨의 草原이
故鄕의 平原이 되고
高梁의 平原이
벼이삭의 바다가 되는동안
내사 수염과 靑春을 바꾸었고
안해는 새아이의 어머니가 되였다.
잔뼈가 굵어진 故鄕말이뇨
洛東江물을 에워 젖처럼 마시며
아매사 할배사 살엇드란들
그것이야 아스런 옛이약이지.
오붓이 點點한 우중충한 집옹이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이
봄을 기다린다.
비록 오색기가 만주국의 국기였으니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이/봄을 기다린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땅에서의 삶이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을 기다”리는 희망찬 삶이 되였다고 하였으니 어느 정도 체제 협력적이라는 혐의가 있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고 제2의 고향을 건설하여 대를 이어 살아가려는 민족생존의 의지도 담겨있다. 그러니까 이민지의 자연환경과 기후에 대한 불쾌한 느낌은 다분히 적응의 문제였음을 확인시켜주는 셈이다. 따라서 이제 고향땅에서 쫓겨난 서러움이 조금씩 잊혀져감에 따라 그러한 불쾌감도 조금씩 색이 바래지며 심지어 이민지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정체성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잔뼈가 굵어진 故鄕”은 “아스런 옛이약이”가 되었고 화자는“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에서 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할 운명이요 처지임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숙명론적인 체념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을 확인하는 생존의 의지이다. 윤해영(尹海榮)이「海蘭江」에서 이민지의 대표적인 강인 해란강을 “寂寞한 江이로다./거룩한 江이로다.” 라고 하면서 자신의 강으로 인식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차원이다. 이민지의 자연과 좀 더 가까워지고 이제 곧 하나가 되어 감을 뜻하는 것이다.
윤해영은 특별히 그러한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에 시적인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다. 앞의 「해란강」에서 화자자신의 현재 삶의 현장을 노래하고 있다면 「오랑캐고개」라는 작품에서는 오랑캐고개를 3단계 역사의 상징적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二十年前”에 오랑캐고개는 “豆滿江 건너 北間島 이도군 들의/아담찬 한숨의 關門이엇다.”고 했다. 간도이주민들은 대개 두만강을 건넌 후 이 오랑캐고개를 넘어 북간도 땅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十年前”, 이 고개는 “밀수군 절믄이들의/恐怖의 關門”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이주민의 삶이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오날 이고개엔/五色旗 날부”낀다고 했다. 한숨도 공포도 다 흘러가고 희망의 기쁜 노래만이 넘치는 고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어용적인 작품의 혐의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냥 현실에 순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괴뢰 만주국의 현재 삶을 어느 정도 찬미하는 의미가 드러난다. 그만큼 만주국의 정치 문화적 담론의 영향이 심각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정체성 확인의 욕구는 천청송(千靑松)의 「先驅民」에서 선구민을 통한 역사의 회고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좀 더 궁극적인 확인의 방식이라 할 수가 있다. 특히 5장으로 된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인 “墓地”는 너무나도 슬픈 이주민의 운명을 제시하고 있다.
靜穩의 집
무덤은 너무나 寂廖하다
하도 故鄕을 그렷기
넉시나마 南을 向했도다
외로운 밤엔
별빗치 慰撫의 손을 나린다는데
墓標업는 무덤들이
옹기 옹기 정잡(답)계(게) 둘너안젓구나!
눈보라 사나웁든
매듭만흔 歷史를 이얘기 하는거냐.
죽어서 마저 고향이, 고국 땅이 그리워 “넉시나마 남을 향”했다는 표현이야말로 이주민의 슬픈 운명의 상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墓標업는 무덤들이/옹기 옹기 정답게 둘너안젓구나!”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묘지를 또 다른 이주민의 삶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렇게 보았을 때 이는 곧 이주민의 제2의 고향이 바로 여기, 북간도 땅임을 확인시켜주고 있기도 하다.
함형수의 「歸國」만큼 이주민의 이중적 정체성을 뼈아프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귀국은 조선 땅에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화자는 고국의 사람들이 자신이 갔던 곳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상념은 오히려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것은 한개 덧업는 그림자”이라는 데에 미친다. 이처럼 이제 자신은 더 이상 고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은 정체성의 분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먼- 하늘 테서/총과 칼의 수풀을 헤염처/이 손과 이 다리로 모-든 무리를 뭇럿스나/그것은 참으로 하나의 肉體엿도다”라는 표현은 정체성의 분열을 야기시킨 일종의 연옥(煉獄)행과도 같은 체험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갔었던 그곳에서의 체험에 대한 개괄이 되겠는데, 그러나 그러한 살벌한 체험은 이제 삶 자체가 되어버렸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言語를 배웟고 새로운 行動을 배웟고
새로운 나라(國)와 새로운 世界와 새로운 肉體와를 어덧나니
여기 도라온것은 實로 그의 그림자이로다
“여기 도라온것은 實로 그의 그림자”이라는 표현은 앞의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것은 한개 덧업는 그림자”이라는 표현을 좀 더 강하게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그만큼 화자의 삶은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었음을 강조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제 화자는 고국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삶의 현장에 적응된 새로운 정체성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주민으로서의 조선족이 될 것이다.
이민시인들은 이민지의 서정을 통해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 확인은 향수의 표현에까지 연장되어 이주민의 이중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족 문학이 이민문학으로 출발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동시에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 성격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b. 암울한 현실에의 대응
일제강점기 괴뢰 만주국에서 생활했던 조선 이주민에게 있어 현실은 암울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암울한 현실을 느끼고 인식한 대로 표현할 수 없는 일제 괴뢰정부치하라는 정치적 환경이다. 즉 당대의 문학풍토가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느낌이나 인식을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시인들은 그러한 모순된 현실을 어떤 시적인 수단 혹은 방법으로 대응했을까?
먼저 함형수(咸亨洙)의 《비애(悲哀)》라는 작품을 보자.
나는 이 괴로운 地上에서
살기만은 조곰도 希望치는 안는다
어한 달가운 幸福과 快樂이
나를 부고 노치안는다 해도
그러나 나는 저 아득한 한눌을 치어다 볼
마음은 슬퍼지고 외로움으로 눈물이 작고 난다
저 나라에서도 나는 여기서처럼 이러케 孤獨할바
여기서 화자는 천상과 지상을 두개의 세계로 갈라놓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첫 두 행에서 지상의 괴로운 삶을 조금도 희망치 않는다고 하면서도 천상의 세계에 가기를 두려워한다. 천상의 세계 또한 지상의 세계처럼 고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 때문이다. 또한 지상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달가운 행복이나 쾌락이 잡고 놓지 않는다 해도 미련은 조금도 없다고 했다. 왜서 그런지를 확대 해석하지 않더라도 이는 현실에 대한 분명한 부정이다.
채정린(蔡禎麟)의 「밤」이나 손소희(孫素熙)의 「어둠속에서」 등 작품은 현실을 암흑으로 인식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한다. 그러한 현실의 삶에 대한 분노는 동시에 저항의 심리를 동반한다. 그래서 분노는 어둠이나 차가움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한 차원 높다고 할 수 있다. 유치환의 「怒한 山」은 그러한 분노를 울분으로 풀어낸다. 물론 유치환에게 있어 그러한 울분이나 분노는 메아리도 없이 사라지는 부질없는 외침만은 아니다. 강한 생명의 욕구가 내재해있다. 「生命의 書」에서 유치환은 그러한 생명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리고 왜 분노하는지를 은근히 내비친다. 현실 부정은 현실 비판과 차이가 있지만 정상적인 언로가 막혀있던 일제강점기에 있어서는 같은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 시인들은 용인할 수 없는 현실의 암흑을 부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징적인 현실 비판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현실 비판의 또 다른 장치로 작용하였다. 초현실주의로 대표되는 “시현실” 동인의 시가 이에 속한다.
“시현실” 동인의 작품 1은 이수형(李琇馨)과 신동철(申東哲)의 공동작인 「生活의 市街」이다.
밤의 피부 속에는 夜光筮의 神話가 피어난다
밤의 피부속에서 銀河가 發狂한다
發狂하는 銀河엔 白裝甲의 아츰의 呼吸이 亂舞한다
時間업는 時計는 모-든 現象의 生殖術을 구경한다
그럼으로
白裝甲의 이마에는 毒나븨가 안자
永遠한 午前을 遊戱한다
遊戱의 遊戱는
花粉의 倫理도 아닌
白晝의 太陽도 아닌
시커먼 새하얀 그것도 아닌
眞空의 液體 엿으나 液體도 아니엿다
자- 그러면 出發하자
許可된 現實의 眞空의 內臟에서
시커먼 그리고 새하얀 그것도아닌
聖母마리아의 微笑의 市場으로 가자
聖母마리아의 市場엔
白裝甲의 秩序가 市街에서 퍼덕일뿐이엿다
「생활의 시가」의 전문인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작품이 당시 조선족문단에서 일반적으로 대할 수 있던 여타의 시작품과는 뚜렷한 구별을 보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구별을 일단 (1) 현실적인 논리성의 파괴, (2) 사유의 순수한 자동기술성, (3) 이미지의 격리성과 기이성, (4) 신비적, 광란적 수법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보여주는 시작품의 경향을 우리는 초현실주의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현실”동인의 초현실주의 작품들로는 이수형(李琇馨)·신동철(申東哲)의 「生活의 市街」, 김북원(金北原)의 「椅子」, 강욱(姜旭)의 「樂譜를 가젓다」, 이수형의 「娼婦의 運命的海洋圖」, 김북원의 「비들기 날으다」, 신동철의 「능금과 飛行機」 등 6편으로 6회에 걸쳐 <만선일보>지에 발표되었고, 동인으로는 이수형, 신동철, 김북원, 강욱 등 4명이 여기에 묶여있다.
물론 유사경향을 보인 S. S. Y, 송석영, 천청송(千靑松), 정야야(鄭野野), 함형수(咸亨洙) 등 5명을 포함해 보아야 총 9명 시인에 12편의 작품이 전부여서, 양적으로는 빈약하다 할 수 있고, 그 중 다수는 조선본토 문단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문학에 관한한 문제는 달라진다.순수문학 중에서도 “정신의 폭발”로 압축되는 이 문예사조가 조선시가에서 하나의 성과로 평가되는 것은 이상 정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1940년 8월의 만주는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의 일차적 후방이었고,따라서 상당수의 문인들이 일제의 강압적, 혹은 포용적 책략에 시달리다 못해 변절하고 투항했던 당시 조선족문단에서 “시현실”동인들이 이런 시대적 상황, 달라진 천지, 대동아공영의 신 풍토에서 눈을 딱 거두고 있는 것은 이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詩現實” 同人集에 묶여 발표된 작품은 아니지만 이수형의 「白卵의 水仙花」, 金北原의 「胎動」, S. S. Y의 「氣焰」, 송석영의 「詩人」, 千靑松의 「愚感錄」, 鄭野野의 「거리의 碑文」, 咸亨洙의 「正午의 모-랄」등 <滿鮮日報>에 발표된 다른 작품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동인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성격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그 주변에 유사한 문학적 경향을 가진 시인들이 비슷한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것은 초현실주의 실험이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하나 흥미있는 것은 이와 같은 초현실주의 성격의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하여 3개월여 만에 “시현실” 동인이라는 그룹이 출현하여 동인특집을 연재한 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만선일보>를 통한 초현실주의 시작실험이 일정기간 진행되어 오다가 그것이 무르익으면서 동인그룹이 형성되었고 본격적인 동인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다른 측면에서 초현실주의 문학유파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셈이 된다. 그만큼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띤다 하겠다.
“시현실”동인들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시의 실험운동은 그 기법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1940년 일제의 발악적인 식민통치라는 최악의 환경에서 우리 이민시인들이 자신의 정서를 문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치로서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따라서 긍정적이었다 하겠다.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의 암울함을 표현하기 위한 시인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으나 일부 시인들은 결국 현실에 머리를 숙이고 지극히 소수이기는 하나 심지어 체제협력적인 작품도 일부 발표하였다. 이를 인정해야만 조선족 문학의 뿌리를 제대로 파악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4) 사후에야 알려진 시인과 시작품:
광복 이전 연변지역 시문학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시인 생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광복 후에야 그 진가를 드러낸 경우가 있다. 윤동주(尹東柱)와 심연수(沈連洙)가 바로 그 대표적인 시인이다.
윤동주는 널리 알려진 연변 출신 시인이다. 그러나 심연수는 최근에야 발굴되어 아직은 연구가 미진한 편이다. 그러나 두 시인 모두 이민지인 연변에서 성장하면서 감성을 키우고 그러한 체험을 시적 언어로 표현한 시인들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벌써부터 널리 알려진 시인이고 심연수 또한 최근에 많이 소개된 시인이어서 여기서는 분량 관계로 더 전개하지 않기로 한다.
2. 연변지역 시문학의 현황
1945년 이후의 문학은 사실상 광복 후의 문학이라야 맞다. 현재와 조금 가까운 시기의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현황” 항에서 논의할 뿐이다. 이 시기의 시문학을 정치공명의 시문학과 다원화 시대의 시문학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1) 정치공명의 시문학
오늘의 시문학, 다시 말하면 개혁개방 후 연변의 시문학이 있기까지 광복 후 30여 년간의 과정을 거쳐 왔다. 특이한 것은 이 30년의 문학이 오늘날의 시문학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30년의 문학을 문학사가들은 흔히 “정치 공명의 문학”이라 부른다. 문학 창작 전반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사건들과 공산당의 정책에 공명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가령 해방이 되자 해방의 환희를 노래하고 토지개혁 시대에는 땅을 나눠가진 기쁨과 이를 가능케 해준 공산당과 정부를 노래하며 사회주의개조를 실시하자 사회주의 제도를 노래했다. 특히 문화대혁명 동안에는 계급투쟁과 개인우상화에 우리 시가 한 몫을 톡톡히 했다.
(2) 다원화 시대의 시문학
a. 개혁개방의 시문학:
1970년대 말, 중국 땅에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연변지역의 시문학은 점차 정치공명의 시대를 탈출하기 시작한다. 상처문학, 반성문학을 거치면서 점차 외래 사조들을 받아들이고 다원화 시대의 시문학을 위한 준비를 서두른다.
이 시기 시문학에서 주목할 부분은 장편서사시 창작의 성행이다. 그 대표시인은 김성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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