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시인(大詩人)은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선 ‘국부(國父)적 존재’로 추앙받았다. 국어수업시간에 배웠던 국민적 애송시는 시인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나름의 위상을 가진 시인은 자기 고향을 대표하는 존재로 대접받았다. 전국적 인지도를 갖게 되면 ‘계관시인’으로 인정돼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는 등 초특급 예우도 받았다.
사후에는 작고시인 시비건립추진위를 결성, 죽은 시인을 기렸다. 이후 문학관 건립은 물론 문학상도 제정했다. 이걸 본 시민은 시인을 한없이 부러워했다. 시인은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시인이 시민을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해서 1948년 국내 최초의 근대 시비가 죽순문학회 주도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다. 바로 민족시인 이상화를 위한 시비였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시비 건립에 엄격한 잣대와 기준이 있었다.
‘아무리 유명해도 살아 있을 때는 시비를 세워선 안 된다’ ‘작고시인 시비도 일정한 세월이 지난 뒤 정말 세울 만한 가치가 있고 지역민과의 공감이 되는 시인으로만 국한해야 한다’는 불문율이었다. 그토록 엄격하게 세워지는 시비는 결코 졸속일 수 없었다. 대표시와 그 시를 적을 서예가, 시를 돌에 새길 조각가가 삼위일체가 돼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시도 감동이지만 시비도 감동이었다.
그 시절 시인에겐 최소한의 지조와 염치 같은 게 있었다. 시인이 되기도 힘들었다. 아무나 될 수도 없었다. 검증된 자질이 요구됐다. 신춘문예와 추천 등을 통하지 않으면 시인이 되기 힘들었다. 일제강점기~광복~6·25전쟁~3·15부정선거~군부독재 치하, 시인은 시대정신과 동고동락했다. 시집에 만족하지, 감히 생전에 시비를 세운다는 발상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선비들은 생전의 비석을 하나의 ‘수치’로 여겼다.
74년 5월19일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국내 생존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미당 서정주 시비가 전남 고창 선운사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선운사 동구’란 시를 새긴 것인데, 고창 라이온스클럽이 주도했다. 조금의 시비가 일었지만 미당이었기에 가능했다. 그 시비는 본격적 시비라기보다 선운사 분위기와 어울리는 조형물로 간주됐다. 하지만 생존 시인도 시비를 세울 수 있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0여년 우리 문단은 작고 문인 시비 세우기에 주력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세상은 달라졌다.
시비는 만인의 몫이 아니라 ‘누구의 몫’으로 권위가 추락했다. 예전에는 지사적 시인의 시대였지만 이젠 유명한 시인의 세상이 도래했다. 신문과 방송을 타고 굵직한 문학상을 받으면 단번에 1급시인이 된다. 김용택·안도현·정호승 같은 시인은 시단의 ‘특급엔터테이너’로 등극했다. 곧 문단파워를 누리고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도 받는다. 지자체도 유명 시인이 필요했다. 시를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정표 같은 시비를 곳곳에 세운 것이다.
스토리텔링거리가 있는 유명 산·강·바다, 심지어 간이역까지 시비가 전주처럼 세워졌다. 전남 해남 땅끝마을 같은 데는 상징성 때문에 여러 유명 시인이 시비를 경쟁적으로 세워댔다. 심지어 시비 건립으로 사업을 하는 단체도 생겨났다. 김천시는 미당문학상을 받아 일약 스타가 된 문태준 시인을 위해 시인의 ‘생가 가는 길’이란 교통표지판까지 설치했다.
생존 시인의 시비 건립 문제 이상으로 고민해야 될 사안도 있다.
‘무조건 세워주자’ 식으로 치닫고 있는 작고문인 시비 건립 건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기준과 원칙 없이 진행되고 있다. 시집을 여러 권 내고 이런저런 문학상을 받거나 문학단체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작고하자마자 서둘러 추모비를 세워준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유족과 문인단체 관계자가 간청하면 지자체는 시비 건립용 공공부지를 슬그머니 내놓는다. 시인들 사이에 유명하면 그만이지 시민과의 공감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시인공화국’.
시인 수가 1만3천명에 육박했다. 대구시에만 1천여명의 시인이 북적대고 있다. 시인 되는 길도 어렵지 않다. 상당수 문예지는 시인을 상품처럼 찍어내기도 한다. 시비가 워낙 흔해지다 보니 유명 트로트 가수들도 앞다퉈 노래비를 세우고 있다. 우리 강산이 ‘비공화국(碑共和國)’으로 변하고 있다.
유명한 시는 돌에 새기고 위대한 시는 인간의 맘에 새겨야 한다. 돌은 1천년 가지만 인간의 맘은 영원한 탓이다.
퇴계 이황은 별세하기 나흘 전인 1570년 음력 12월4일,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카 영(寗)을 불러서 이같이 당부한다.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사양하라.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앞면에는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 晩隱 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향리(鄕里)와 세계(世系), 지행(志行), 출처(出處)를 간단히 쓰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銘)을 쓰도록 하라.”
당시 퇴계는 종1품 정승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사후에는 예조에서 도감을 설치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데도 퇴계는 유언으로 이를 굳이 사양했다. 그리고 단지 4언(言) 24구(句)의 자명(自銘)으로 자신의 일생을 정리했다. 퇴계가 특별히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경우엔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한 나머지 장황하게 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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