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조운이 쓴 < 채송화 > 라는 시조이다. '채송화'는 시조거리가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읊조렸던 시조는 거지반 매화·난초·국화 같은 폼나는 꽃 아니면 소나무·대나무같이 끼끗한 나무들이었다. 채송화 따위는 하찮은 들꽃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조운(曹雲)은 1900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본이름은 주현(柱絃)이고 자는 중빈(重彬)이다. 1940년 필명이었던 '운(雲)'을 본이름으로 고쳤다. 조운 아버지는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해어화(解語花), 곧 '말을 알아듣는 꽃'인 기생이었다.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가 고마(소실)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으니, 그때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賤出)'이었다.
문학동아리 만들어 시조부흥운동
3·1운동에 들었다가 만주로 도망갔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崔曙海, 1901~1932)를 만난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문학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갈팡질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에 있는 옛자취들을 돌아본다. 1922년 지방문예운동에 앞장이었던 < 자유예원(自由藝苑) > 을 등사판으로 박아내며, < 추인회(秋蚓會) > 라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조부흥운동을 벌인다. 조운이 했던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했던 시조부흥운동과는 그 본바탕이 다르다. 그들이 했던 것은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장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이 벌였던 운동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짓밟는 서구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24년 < 조선문단 > 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넣은 자유시 세닢을 선보이며 문학동네에 나왔고,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광 부위원장을 하였다. 47년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인민의 행복에 복무하는 문학'을 힘주어 말하다가, 49년 식구들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잊혀진 사람이 된다. 이른바 '치안'을 맡았다는 관공리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릴 수 없었으며, 그가 남긴 시조를 읊는 사람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시인이던 이은상(李殷相)과는 여러 가지로 두드러지게 다른 사람이었다. 이은상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 '성공한 시조시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운은 월북과 함께 가뭇없이 잊혀지고 말았다.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만 변(암호)처럼 떠돌았을 뿐이다. '인민의 나라'로 올라간 남조선 출신 문학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지만 조운 경우는 더구나 그러하니, 그가 택한 문학 갈래가 시조였던 까닭에서였다. '반동지배계급인 량반놈들이 근로하는 인민대중의 구체적 삶과는 관계없이 음풍농월하던 것'을 '시조'로 보는 사회주의 문학관 탓이었다. 사회주의 문학 갈래에는 아예 시조라는 것이 없다. 조운이 '공화국 문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갈래 자체를 바꿔야 한다.
49년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 듯
그러나 천운순환(天運循環)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하였다. < 대학장구(大學章句) > 서(序)에 나오는 말이니, '하늘 운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가 < 예기(禮記) > 라는 책에서 뽑아 쓴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 밑 남송(南宋)으로 오그라든 한족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儒學)을 되살려 여진족을 몰아내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이런 문자가 생겨나게 된 뒷그림과는 상관없이 '무왕불복'이 주는 울림은 아주 애젖하다. 이제 곧바로는 이긴 것 같지만 참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진 것이 아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아귀다툼하는 곳에서 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 또한 '패자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갈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맨처음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었고, 영광중학원 작문선생으로 있으며 동료 교사였던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 추석전야 > 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 조선문단 > 에 실리게 하였다. < 석류 > 라는 시조 네 번째 수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 한국문학통사 > 라는 책에서 지은이 조동일(趙東一)은 이렇게 말한다. "조운은 이은상이나 이병기보다도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고 했다. 이은상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이병기와 비슷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 다음에 드는 < 어느 밤 > 은 < 신가정 > 1934년 3월호에 낸 대수롭지 않은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산뜻하다."
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대로 가고 싶다 이 길로 가고 가면 어데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
28살 때 3살 밑인 누이 분려(芬麗)를 최서해한테 시집보냈는데, 1살 밑인 매제 서해가 죽자 < 서해야 분려야 > 라는 시조를 썼다.
조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서 출생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영광읍 사립학교 교사로 복무했다.
○1926년 청년운동에 가담했고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기 작품에 청년동맹 좌익파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반일운동 때문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고 영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1948년 7월 31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의장단 소속 주요 인사 평정서'에 나오는 대문이다.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은 모두 20명인데, 이 가운데 남조선 출신은 모두 11명이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홍남표(洪南杓), 상임위원 장권(張權)·이기영(李箕永)·김창준(金昌俊)·이능종·유영준·조운·라승규·성주식·구재수.
최고인민회의는 남조선으로 치면 국회이고 상임위원이면 장관급이다. 문학인으로는 < 고향 > 작가 이기영과 조운 두 사람뿐이다. 내각 쪽에 < 임꺽정 > 작가 홍명희(洪命熹)가 제2부수상이다. 2000년 복간된 < 조운 시조집 > 에 나오는 연보에 따르면 49년 식구와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47년 식구와 함께 서울로 이주, 5월 5일 < 조운 시조집 > 을 < 조선사 > 에서 간행. 동국대학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평정서'에 따르면 늦어도 48년 5?10단선이 끝난 다음 월북한 홍명희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
남녘에서도 그랬지만 조운 삶은 북녘에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관급 우러름을 받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작품이 없다. 남로당 숙청 피바람에서 살아 남았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알몸뚱이 삶일 뿐이다. 김재용 교수가 보는 시조시인 조운이다.
"짐작컨대 그는 우리의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를 깔보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본적 성찰이 없었다면 당대의 지적 유행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실험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몇 안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조운 마지막 작품이다. < 문학평론 > 1947년 4월호. < 얼굴의 바다 > (어느 대회장에서)
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들 모도 몰으는 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시선이 마조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 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동지더냐 쪼차가 손을 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하던 말을 다 했다.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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