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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되기 힘들다, 詩쓰기는 더더욱 힘들다...
2016년 01월 09일 04시 58분  조회:3982  추천:0  작성자: 죽림

<시 창작 개론> 유창섭

 

 <시의 내용과 기교에 대한 이해>

 

 시에 있어서 압축이란 무엇인가?

 

  “詩 쓰기보다 詩人 되기가 힘들고, 詩人 되기보다 詩 쓰기가 더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시를 쓰기 시작할 때에는 시인이 되는 것이 힘들고, 시인이 되어서는 시 쓰기가 더 힘들다”는 말이니 둘 다 모두 힘들다는 이야기이겠지요.시를 쓰는 데 있어서 시인들은 흔히 시에서는 [압축]을 통하여 시적 감동을 증폭시켜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만 사실 그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압축]이란 고뇌의 산물입니다. 시를 쓰는 데에 고뇌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글자(단어)만 고뇌"를 하고 정작 "고뇌하여야 할 시인은 고뇌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고뇌하지 않고 쓰여진 시는 시인의 양심과 자만과의 타협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데 압축의 기법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시에 꼭 필요한 문장, 즉 [간결]하고 [시적인 언어]로 시를 쓰라는 말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잘못 인식하여 어휘의 수를 줄이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간결함만 추구하고 시적인 언어로 쓰라는 말의 뜻은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의 기성 시인들조차 그러한 경향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시인이므로 자기가 쓰는 것은 모두 시가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산문처럼 쓴 글을 적당히 [행 가름] 하여 놓고 그것을 시라고 생각하는 일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빼더라도 좋을 설명 몇 줄을 빼내고는 압축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압축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적당히 타협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적 경향은 컴퓨터에 의존하는 N 세대의 경우 더욱 심화되는 것 같습니다.

매우 즉흥적이고 산문적이고 표피적인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고 있는 것은 내가 고루한 세대의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내 시대의 마지막 사람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나의 [시론]을 정리해 놓아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답적인 시론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할 작정입니다.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방창조]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과거의 시론은 어떠했는지, 현재의 경향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하는 것을 비교하고 좋은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압축]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예를 하나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좋겠군요.

 

<사랑>

 

바람을 보았는가

 

아무도 없는 길섶에서

흔들리는

무성한 잡초더미 위에서

흔적없이 사라지는

 

바람을 보았는가

 

 이 시는 “사랑”이라는 시 입니다.

 매우 짧은 短詩입니다만 사랑의 모습을 간결하게 정리하여 보여 주는 시 입니다.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지만 사랑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이고, 사랑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 역시 그 모습이 어떠한 지를 ‘바람’이라는 시적 상관물로 대체 시켜 표현함으로써 사랑이 어떤 것인지 생각게 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의 예를 들어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해후(邂逅)>

 

지난 밤

내 꿈의 상류上流

어디쯤에서 범람하였나

 

빗밑 한결 가벼운

오늘 아침

강江 기슭 한켠에

 

저리도 민망스레

돌아 앉은, 가냘퍼

더 하이얀 목덜미

 

오! 백합白合아

언제

어디에서 만난

뜻 밖의 이별이었나

 

인적人跡 드문

이 강江, 저 물길

거슬러 오르다 보면

 

화초花草담 넘보며

남몰래 사모思慕했던 규중시인閨中詩人은

너의 어느 전생前生이었나

 

 이 시는 김준환 시인의 [해후]라는 시로서 “백합”이라는 시적 상징물인 꽃을 통하여 아름다운 오랜만의 우연한 만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연한 만남이 단순한 시적 상관물인 백합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들어앉아 있던 아름다운 기억의 한 부분을 찾아내고, 놀랍게도 차분하게 이제까지의 삶을 관조하며 그 만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시에서 우리는 어디에도 군더더기가 될 만한 표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장황하게 만남의 사연이나 그간의 그리움이나,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에 잊지 못하고 있었던 사모의 정을 늘어놓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밤/내 꿈의 상류上流/어디쯤에서 범람하였나’ 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모든 추억의 한 모서리 어디엔가 숨겨져 있던 꿈에도 보고 싶었던 아름다운 기억을 찾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압축]입니다. 그리움이나 사모의 정을 설명하지 않고도 시인은 그 속에 그러한 자신의 뜻을 감추어 놓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이 시를 해설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압축]이라는 말을 하게 될 때 자칫 언어의 수를 줄인다거나 토씨를 줄여나가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압축]이란  절제된 언어로 시의 이미지를 간결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노래하여 그 속에서 다양한 시적 정서가 교차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적 감동을 증폭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글에서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장치가 시에는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시에서, 시에 필요한 압축이 어떠한 감동을 주게 되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누군가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당신은 그러한 시를 쓰고 있는가?” 하고.

  나의 대답은 “나 자신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내 자신도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적인지 아닌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좋은 시는 독자가 평가한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3. 詩 속에 나타나는 문장 부호의 기능

 

 우리는 시 읽기나, 시 쓰기에 있어서 시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문장의 부호, 예를 들면 쉼표[,] 마침표[.] 등의 기능적 역할에 대해 크게 주의를 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의 영향으로 일반적인 글이나 문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장의 부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쉼표”는 글이 길어지거나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마침표”는 글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단순한 부호로서 인식하고 있고, 또 “말없음표”는 소설이나 다른 문장에서 침묵의 표현 또는 생략의 의미로 쓰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어떤 법률적인 문제에 부딪히기 전에는 그러한 문장의 부호에 대한 의미 파악에 등한히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 읽기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시 쓰기에 있어서도 시인들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시 쓰기에 있어서 문장부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글을 쓰지 않는다면 시 읽기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언어의 연금술사이며, 기호학적 의미의 언어를 파괴하여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인詩人들”이 그러한 문제를 소홀히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시가 감추면서 드러내는 형식의 글”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앞에서 말한 문장부호에 대하여 시인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의미의 전환이나, 가타의 다른 목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마침표”와 “쉼표”에 대해서만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다른 문장 부호는 특별히 일반적인 문장에서 사용하여 그 문장부호의 기능이 주는 의미와 다를 바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가장 쉽게 습관적으로 만나는 “마침표”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시의 행이 끝날 때마다 마침표를 찍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습관적으로 마침표를 찍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언어의 조탁미를 생각하고 글을 쓴 많은 시인 중에도 행의 끝에 마침표를 찍은 시와 찍지 않은 시가 있습니다.

 신석정, 이육사, 노천명, 김기림, 정지용, 서정주 시인 등의 경우에도 마침표가 있는 시와 없는 시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왠 일일까요? 실수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쓴 충분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정지용 시인은 주로 산문시에서 시의 중간에 끝나는 행에서도 마침표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시의 맨 마지막 행이 끝나는 곳에서만 마침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도적인 시적 장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고 그 아름다운 말을 시로 써온 정지용 시인은 그러한 마침표를 쓰는 데에도 철저히 의도적이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시의 행마다 철저하게 마침표를 찍는 김기림 시인도 시집詩集<기상도>에는 마침표가 없는 시로 채워져 있습니다. 시집詩集<바다와 나비>에 실려있는 시 중에 마침표가 없는 김기림 시인의 시를 한 편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봄]

 

四月은 겨으른 표범처럼

인제사 잠이 깼다

눈이 부시다

가려웁다

소름친다

등을 살린다

주축거린다

성큼 겨울을 뛰어 넘는다

 

 겨울 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봄을 게으른 표범으로 내세워 그 아름다운 봄이 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시 입니다. 움츠렸던 봄이 잠을 깨어 온 천지에 봄이 가득 밀려오는 모습을 표범의 몸동작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데, 그 동작이 하나하나 따로 일어난다기 보다는 연속적으로 또는 한 두 가지가 겹쳐져서 일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마침표를 생략하여 그 동작들을 오버.랩(over-lap)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동작 하나마다 마침표를 찍었다면 그 동작은 하나씩 분절되어 하나씩 하나씩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표가 있었다면 그 동작만으로 의미는 축소되어 호흡이 빠르게 시의 행이 읽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표를 없앰으로 해서 시의 행간의 호흡은 길어지고, 그 의미가 앞과 뒤로 연결되는 형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의 행간에 걸려있는 봄날의 정서를 느끼게 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의 정서적 의도를 표현하는 데에는 문장의 부호 하나도 허술하게 다루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쉼표의 기능적 의미 확장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쉼표의 경우에도 현대시의 초기 시인들은 쉼표를 상당히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쉼표가 그 행의 중간에 의미의 중단을 의미함과 동시에, 글을 읽는 데에 호흡을 고르는 역할을 중시하던 국어의 맞춤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근자에는 단어의 어미 변화가 쉼표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으므로 우리말에서는 쉼표의 사용을 하지 않아도 의미전달 체계에 문제가 없다는 국어학자들의 주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詩에 있어서 쉼표의 역할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행 가름이 있기 때문에 쉼표가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쉼표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시적 정서의 전달은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이번에는 정지용 시인의 쉼표가 주는 의미가 현저히 다른 시 한 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촉불과 손]

 

고요히 그싯는 손씨로

방안 하나 차는 불빛!

 

별안간 꽃다발에 안긴듯이

올뺌이처럼 일어나 큰눈을 뜨다.

 

그대의 붉은 손이

바위틈에 물을 따오다,

신양山羊의 젓을 옮기다,

간소簡素한 채소菜蔬를 기르다,

오묘한 가지에

장미薔薇가 피듯이

그대 손에 초밤불이 낳도다.

 

 위의 시는 연인이 성냥불을 켜서 촛불을 켜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눈뜸처럼 그려내고 있는 정감이 따뜻하기 그지없는 시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등장하는 그대가 연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시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 준 다른 제삼자로서 힘을 가진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좀 더 다른 문제이므로 그것을 빼고 단순한 연인으로 해석하여 볼 경우로 한정하고 시 읽기를 하여 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3연을 살펴 보면 “그대의 붉은 손이” 물을 따오다, 젓을 옮기다, 채소를 기르다, 로 연결되어 세 가지의 일에 손이 역할 하는 것으로 연속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손에 촛불이 장미처럼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때 각각의 쉼표는 의미를 한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호흡을 빠르게 진전시켜 불이 켜지는 순간의 모습이 영사기에 필름이 돌아가며 움직이는 모습을 만들어 내듯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만약 쉼표가 없다면 어떻게 읽히게 될까요?앞의 마침표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미가 두 가지 또는 세 가지가 함께 어울려서 의미를 다르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시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켜 그 시의 의미를 음미하며 읽도록 시간을 길게 잡아 주게 될 것입니다.

위의 세 가지 동작뿐만 아니라 아래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미가 꽃피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으로 엮어 효과를 내게 될 것입니다.그렇다면, 이 경우 어느 쪽이 더 나은 표현이 될까요? 그것은 시인의 몫입니다.

 아마도 그 세 가지의 일을 영화처럼 보이도록 장치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위의 본문처럼 쓰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좀 더 다른 깨달음의 시나, 관조의 시에서는 그러한 경우 쉼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의미의 확장이 가능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마침표”와 “쉼표”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만, 이 외에도 행 가름에서도 의미 변화가 시적 변화를 주고 있으므로 뒤이어서 이를 보완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시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언어를 새로운 이미지로 변용하여 시를 쓰게 됩니다. 적어도 시인은 그 시에 사용되는 문장 부호 하나에도 애정을 가지고 시 쓰기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의 “시의 세계”가 넓어지고 보다 많은 정서를 그 속에 담아내게 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4. 행 가름을 통한 시적 의미의 변조 또는 의도적 강조

---<정서적 상상력의 이중 공간에 의한 시적 의미 詩的 意味 증폭>

 

 시를 쓰는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독자가 읽게 될 때, 그 반응하는 정서적 질서에 대한 배려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행 가름을 하는 경우에 “하나의 구절이나 언어”를 앞과 뒤에 오는 행의 행간에 걸쳐 놓는 수법을 쓰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미묘한 의미들이 서로 충돌하며 그 속내를 상승시키거나 그 의미증폭을 일으키도록 교묘히 배열하여 놓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장 속에서의 문장 부호의 활용이나 문장 속의 조사 사용의 의도적 배열로 그 의미나 이미지를 바꾸어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의 구절이나 언어”들은 그 의미 전달 효과가 의도적이면서도 직접적이라는 점에서 조금 다르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교를 통해서 시인들은 그 속에 감추어둔 시적 정서의 뒷공간에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을 만들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변조시키거나 증폭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예가 되는 시를 인용하여 그 의미변조와 강화 현상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은 뛰고 싶어 한다

우리를 탈출하여 밖으로 나온 고삐 풀린 말은

제 마음대로 뛰고 싶어 한다 갇혀 있던

시간을 뛰어 넘어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풀린 말은 장애물을 뛰어 넘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 나가

제 몸 살피지 않고 달리는 고삐 풀린 말,

옆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달리도록 길들여진 말,

그런 말들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

고삐 풀려 제 멋대로 달리고 싶은 말이

가끔 튀어 나간다 그 말에 채어

상처를 입는 사람들 앞에서

그 말이

내 안에서 키우던 말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니, 아니, 사실은 그 말이

숨었다가 나도 몰래 탈출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그 말은 잡아올 수가 없다 바람처럼

발자국도 없이 사라졌으므로,

내 안에 사는 말은 언제나 내 말을 잘 듣는 것이 아니라

불쑥, 경계를 뛰어넘어 홀로 방황한다

그렇게 자라는 말은 새끼를 기르고

길들여진 말과 길 안 들여진 말은

서로를 길들여지게 또는 길들여지지 않게

제 편에 끌어 들여 길 들이려고 한다

 

 
 
 위의 시는 말이라는 단어를 말(=말씀)의 의미와 달리는 말(=승마용 말)의 의미를 교차 연결 시켜 그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는 시 입니다. 그 속에서 또 하나의 의도적인 행 가름이나 어휘 배열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거나 그 의미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제 마음대로 뛰고 싶어 한다 갇혀 있던 / 시간을 뛰어 넘어 자유로워지고 싶어서”에서는 ‘갇혀 있던 (곳에서) 제 마음대로 뛰고 싶어 한다’는 의미와 ‘갇혀 있던 시간을 뛰어 넘어 자유로워지고’라는 의미의 문장으로 읽혀져서 “갇혀 있다는 의미가 강조되어 그 전체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가끔 튀어 나간다 그 말에 채어/상처를 입는 사람들 앞에서”라는 행에서는 ‘그 말에 채어 가끔 튀어 나간다’는 문장과 ‘그 말에 채어 상처를 입는 사람들 앞에서’라는 문장으로 분화하여 의미가 강화되고 있으며, 다시 “이미 그 말은 잡아올 수가 없다 바람처럼/ 발자국도 없이 사라졌으므로,”라는 행에서도 ‘바람처럼’이라는 어휘를 매개로 의미 강화가 시도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읽게 되는 “오래된 의자”에서는 그 의미전환이나 강화를 시도하는 많은 시도가 읽혀 지고 있습니다.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여러 행에서 그러한 의도가 나타나고 있으므로 하나하나 그 의미를 설명하기보다는 그 중심이 되는 이중장치의 어휘들 밑에 밑줄을 그어 그 단어들이 앞으로 또는 뒤로 연결되면서 의미가 강화되거나 전환되는 현상을 살펴 보겠습니다.

 

 

오래된 의자 /강문숙

 

묵은 의자를 들어낸다
간혹 삐그덕거리며 불만을 터뜨리던 의자는 
덩치보다 무겁게 끌려 나온다. 삐죽이 
솟아오른 못들이 버팅기고 있던 시간들을 놓아준다
그 방의 일부였던 의자는, 수많은 기억들과 
자신을 누르던 시간의 무게 때문에 
결코 가벼울 수가 없다

 

넓은 잎으로 창문을 가리던 나무가 
흔들리는 제 그림자를 말아 올린다. 적막이 
슬쩍 발 걸어 햇살을 넘어뜨리고 지나가는 
이런 저녁, 오래된 의자는 기억한다
어린 주인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딸깍 
흐린 전등을 켜는 소리 
끌고 왔던 하루가 아! 하고 내뱉는 신음소리 
실체도 알 수 없는 쓸쓸함으로 
밥을 먹고 잠자던 시절, 등받이에 걸쳐진 
무거운 외투처럼 밤새 쌓이던 그 고요를 기억한다
한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될 때까지 
수천 번 앉았다가 일어선, 수천 번 
등받이 외투가 걸쳐졌던 책상 앞의 의자
아궁이에서 불탄다. 사소함으로 기억되어질 뿐 
형체도 없이 재가 되는 저 오래된 의자
재로 만든 의자의 날들 속에 
아직 어린 주인도 함께 불타고 있다.

 

 예를 들면 “적막이 흔들리는 제 그림자를 말아 올린다.” “ 적막이 슬쩍 발 걸어 햇살을 넘어뜨리고 지나가는”의 두 가지 형태의 강화된 또는 변형된 이미지에 의해 다른 중심정서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적 기교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하나의 도구로서 시적 의미를 변화시키려는 시인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이용될 수 있는 기교의 하나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시적 의도에 맞게 자연스러운 형태로 이러한 기교를 부려 그 의미를 강화시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적 기교란 어디까지나 중심정서를 드러내는 보조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5. 조사의 생략과 상상력의 확장

 

 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만, 요즘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더욱 자주 느끼는 것은 시를 쓰는 분들이 모두 하나같이 조사의 활용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각 행에서 다른 행으로 넘어갈 때, 적절한 조사의 생략은 글 속에 담긴 의미를 여러 갈래로 확장시켜 줄 수도 있는 것인데 조사를 고정함으로써 의미의 확장이나 전환의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조사를 생략하여 시적 정서의 혼란을 초래하도록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사의 생략법이 시를 쓴 시인이 의도대로 정서적 감동을 이끌어 내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경우도 있음을 생각하면 조사를 잘 활용하는 기술은 신선한 표현기교 못지않게 효과적인 표현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절한 행에서의 조사 생략은 독자의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시에 담고 있는 시적 의미 이상으로 상상력을 확장시켜 그 시의 감동을 증폭시켜 나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을밤 >

 

별 밭 찾아 떠도는 풀벌레의

층층이 쌓여 가는

외침을 듣는다.

……………

 

<기다림 >

 

호수의 수면 위로

반짝거리던 햇살이

밤 하늘의 별들로 총총이 뜨는 날,

……………

 

 위의 두 개의 글은 습작기에 있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의 작품입니다. 이 글을 살펴보며 조사의 사용과 그 뜻의 움직임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을 밤]을 살펴 보면 “별밭 찾아 떠도는 풀벌레의”라는 구절의 “의”라는 조사를 생각해 보도록 할까요?

 “의”라는 조사가 있을 경우 이 구절은 글을 쓴 화자話者가 멀리 떨어져서 가을 밤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의미를 한정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의”라는 조사가 없다면 화자가 바로 “풀벌레”로 형상화되어 그 가을밤 속에 들어앉아 “층층이 쌓여가는 외침을 듣는” 모습으로 읽혀지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풀벌레들이 층층히 쌓여가는 (가을밤의) 외침을 듣는” 형태로 비약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의 독자들은 매우 다른 감상에 빠져들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의미의 확장이나 의미의 전환이 일어나, 그 다음에 오는 글의 내용에 따라 정서적으로 다른 반응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조사의 생략 여부는 시의 정서적 감동을 증폭시키거나 또는 조절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기다림]이라는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조사를 생략하여 그 의미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수의 수면 위(로) 
반짝거리던 햇살(이) 
밤 하늘의 별들(로) 총총히 뜨는 날,

 

위의 글에서 (괄호)안의 조사를 두고 읽는 경우와 생략하고 읽는 경우에는 어떤 차이가 생기게 될까요?

본문대로 조사를 두고 읽는다면 “호수의 수면 위에서 반짝거리던 햇살이 밤 하늘의 별이 되어 총총히 뜨는 날”로 의미가 고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 )안의 조사를 지우고 읽는다면 앞의 경우와 같이 “호수의 수면 위에서 (낮에) 반짝거리던 햇살이 밤 하늘의 별이 되어 총총히 뜨는 날”로 읽히기도 하고, “호수의 수면 위에 (낮에는) 반짝거리던 햇살, 밤에는 별들이 (호수의 수면 위에) 총총히 뜨는 날”로 읽히기도 할 것입니다.

 이 때에도 마찬가지로 조사가 생략된 경우에는 의미의 전환과 확장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조사가 생략된 경우, 이와 같은 글 읽기 이 외에도 복잡한 감성의 결과에 따라 다른 형태로 이 시가 읽혀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시에서 조사를 생략하면 그러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조사를 반드시 넣어 그 뜻을 분명히 해 주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고, 조사에 의해 이미지(심상)의 전환이 제한되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시에 그러한 의도에 맞는 표현 방법을 선택해야 할 것이며, 지나치게 많은 조사를 써서 행간의 연결을 꾀하다 보면 불필요하게 시의 긴강감이 떨어지고 시가 사설적인 모습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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