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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初心 - 시에서 생명의 표현 활유법
2016년 03월 12일 02시 34분  조회:4194  추천:0  작성자: 죽림
이시환의 시법 : 만유에 내재하는 물활성

-생명의 표현 활유법

 

심종숙(시인/문학평론가)

 

그의 눈에는 그를 둘러싼 모든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거나 그에게 대화를 해온다. 그는 자연물과도 대화를 한다. 그리고 우주로부터 오는 빛이나 바람, 공기, 별, 달과 푸른 하늘과 마주 대하고 대화한다. 그러니 그에게 이것들은 정지되어 있거나 무생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애초에 이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바위가 아주 작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까지 우주의 만물은 빠르거나 느리게 변화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삼라만상이 모두 유기체적이며 변화한다고 인식하였다.

이시환 시인은 그의 시에서 사물들과 자연물들에 생명을 부여하고 대화하거나 그것들과 하나가 된다. 그러니 그의 시에는 활유법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 중에도 특히 사물과 자연물을 사람처럼 표현하는 의인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가 칩거를 오랜 기간 하면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시 창작과 종교 관련 저작과 중국, 인도, 라틴아메리카 등의 성지순례, 사막 여행을 할 때 그에게 이 사물들과 자연물들은 그에게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에게 말을 걸어주었고, 그도 그것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오랜 기간의 칩거는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상처도 받고 염증도 느꼈으며 거기에서는 그 어떤 생명력도 얻을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홀로 떠나기로 결심하였고 사람들과 일정기간, 일정 정도의 단절을 한 만큼 이런 것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고 본다. 철저한 고독을 대면하고 맞서본 자는 곧 자기와 맞선 자이며, 신과 대면한 인간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세상을 거꾸로 볼 수가 없다. 세상의 바깥에서 세상과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 못한다. 그것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보지 못한다. 이시환의 시적 세계는 이렇게 하여 축조되었고 축성되었다. 어쩌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동일한 것일 게다.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그가 자신을 사막의 공간까지 확장시켜가며 철저히 고립시켰을 때 그 고뇌의 절정에서 시인은 사막의 모래로 자신의 알몸을 씻어내고 정화와 재생, 합일을 성취하면서 마치 거친 모래알과 같은 세상을 용의주도하게 잘 저작하여서 소화시킬 수 있는 되새김위를 가지는 쾌거를 이루었을 것이다. 삶의 모순과 부조리, 그것들의 이중성과 이율배반, 관계들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을 때, 예술의 전당과 같은 백화점식의, 경제적 계급적 이념적 논리에 작동되어 섭렵되어가는 박제화 된 예술이 아니라 그는 들판이나 벌판을 찾아가 걸으면서 거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분노와 상처를 식히고 치유하려 하였다. 그리고 숲이나 산, 계곡, 산길을 걸으면서 그는 바위들과 계곡의 강과 나무들과 이름 모를 야생화나 풀들을 바라보면서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분노케 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말없는 바위와 대화를 하며 그는 가슴 속에 인간들에게 할 수 없었던 못다 한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가 배낭을 꾸리고 등산화를 신고 문 밖을 나서기만 하면 바람은 그의 발에 힘을 불어넣어 주어서 이끌었고, 오라고 손짓하며 품에 안아 주었고, 가슴과 등을 쓸어주었다. 태양은 그에게 환하게 인사를 했다. 그 태양에 미소로 답하며 따라 걷기만 하면 되었다. 질주의 소음과 분노와 방탕, 불륜, 타락, 욕지거리, 기만, 중상, 경쟁, 먹고 먹히는 인간 먹이사슬, 불의한 권력체들, 살인, 방화 등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를 등지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산의 중턱에 올라 자신이 등지고 온 소돔 성읍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그 악한 것들이 피워 올리는 연기로 자욱하여 시야를 가린다. 마치, 룻이 불비가 내려 벌겋게 타오르는 소돔 성읍이 내려다보이는 산에서 ‘저기에서 살았구나’, ‘살아 남았구나’, ‘지금 벗어났구나’라며 스스로 오싹해오는 등골을 의식하며 한숨을 돌렸듯이, 그는 통탄해 하면서 산길을 오른다. 그렇게 삶의 자리를 떠나는 여행을 하면서 그는 순례객이 되었다. 불국토인 인도 티베트를 여행하고 한국 사람으로 드물게 아토스 성산을 오를 때까지 그의 순례는 계속 되었다. 300여 개의 수도원이나 교회당이 있다는 아토스 성산은 그야말로 인간이 하느님과 대화하는 산이다. 인간계와는 철저히 거리를 두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매시간 수신하기 위해 그들을 늘 깨어 전파를 송신하고 수신한다. 이시환 시인은 그의 순례의 여정에서 만나는 이국의 사물들과 자연물, 사람들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곳에서 생명력을 찾았고, 그의 활유법은 그런 과정에서 나온 시법인 것이다. 활유법은 물활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물활론[物活論 hylozoism]은 물질에 생명이 내재해 있다는 입장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애니미즘, 생기론(生氣論), 범신론이다. 물활론을 포함해서 이들 개념은 ‘물질’ ‘생명’ 및 인간의 ‘마음’(정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구별되나, 엄밀히 구별되지 않고 쓰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애니미즘은 자연현상에 영적인 것을 읽어내어 인간과 교섭한다는 것이며, 주로 세계에 관한 이론적인 파악이 없는 단계의 원시종교 등에 대해 쓰인다. 물활론은 이론적 반성이 생긴 후의 것이며,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 자연학이나, 르네상스기의 자연철학, 예를 들어 브르노나 18세기의 디드로, 나아가 19세기의 어른스트 헥켈 등을 들 수 있겠다. 여기에서는 인간이나 동식물 이외의 존재도 생명적 성격 즉, 성장하고 발달하는 경향을 내재적으로, 즉 질료 자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물질적인 것 그 자체는 수동적 질료에 지나지 않고, 생명적인 것은 형상(形相)으로서 바깥에서 주어지는 견해나, 베르그송의 철학 등은 생명주의적이나 물활론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생기론은 거기에 대해 주로 근대에 물리학에서 기계론적 자연관이 성립하여 무기적 세계가 비생명적인 것으로 된 후에 동식물 등의 생물에는, 물리화학 현상에는 보이지 않는 특유의 생명원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근대과학에 있어 생명 현상의 해명이 진보된 여러 영역에서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과 거기에 반대하는 생기론의 입장과의 논쟁이 일어나 근대 이전의 것에 관해서도 기계론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원리를 주장한 인물을 거슬러 생기론자라고 하고 앞서 물활론에서 거론한 인물도 때로는 생기론자라고 불린다. 범심론은 동식물의 생명과는 다른 인간적인 ‘마음’이 자연계에 내재해 있고, 그것은 인간에 있어서 완성한 형태로 자각되는 것이며, 버틀리, 쇼펜하우어 혹은 셸링을 들 수 있으나 물활론 또는 생기론과의 차이를 동식물의 차원에서의 설명으로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곤란하며, 오히려 인간을 포함한 전체 도식에 있어 방향성의 차이로 비로소 구별할 수 있다.

이시환 시의 활유법은 넓게는 물활론의 범주에서 쓰여진다. 자연현상에서 영적인 것을 읽어내어 시적화자인 시인과 교섭하는 것이나 인간, 동식물, 사물 등에 성장, 발달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인식은 물활론이다. 그 중에 특징적인 몇 가지는 원초적 에로티시즘을 통하여 생명력을 나타내거나 자연현상이나 동식물, 사물에서 영적인 것을 읽어내어 시적화자가 친교/교섭하거나, 인간, 동식물, 사물 등에 성장, 발달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 주는 시편들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먼저 원초적 에로티시즘을 통하여 생명력을 나타내는 시편들이다.

 

손끝에 와 닿는 당신의 두 개의 젖꼭지. 그 꼭지와 꼭지 사이의 폭과 골이 당신의 비밀을 말해주지만 가늠할 수 없는 그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사내들의 곤두박질. 그 때마다 제 목을 뽑아 뿌리는 치마폭 사이의 선붉은 꽃잎 골골이 깔리고 누워 잠든 바람마저 눈을 뜨면 이 내 가슴 속, 속살을 비집고 우뚝 솟은 산 하나. 그 허리춤에선 스멀스멀 풍문처럼 안개만 피어오르고.

-「山」,『안암동日記』에서

 

그가 일상을 떠나 늘 찾아다녔던 산은 이 시에서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그에게 산은 여성, 어머니이다. 이 시에서는 완숙한 여성의 젖가슴으로 그리고 있듯이 시적 화자가 모태 회귀적 퍼소나를 이 시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두 개의 젖꼭지란 산과 산의 두 봉우리를 말한다. 이 시는 산을 여체로 의인화 하여 사내들이 그 여체의 골짜기인 산의 계곡을 찾는 것을 사람의 성교로, 그 결과 여성의 처녀막이 찢어질 때 ‘선붉은 꽃잎’으로 비유하였다. ‘산/여성, 계곡/여성의 자궁, 거기로 뛰어드는 남성/페니스, 선붉은 꽃잎/처녀 혈’로 정리 될 수 있다. ‘내 가슴/여성, 우뚝 솟은 산/남성’ 이렇게 겹쳐서 이중적으로 의인화 되고 있다. 두 개의 산 봉우리가 여성으로, 이것은 시인의 시야에 들어온 산을 여성의 젖가슴으로, 나의 가슴 속의 속살을 비집고 우뚝 솟은 산은 남성으로 의인화 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시는 원초적 에로티시즘과 그 생명력을 산을 통하여 나타내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나의 배 위로 배를 깔고 누워있는 당신은 황홀이란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짓눌려 숨이 막힐 때마다 햇살 속 저 은사시나무 잎처럼 흔들리면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 출렁이는 세상이야 부시게부시게 출렁일 뿐. -「오랑캐꽃」, 『안암동日記』에서

 

오랑캐꽃과 시적화자 나와의 정신적, 신체적 교합은 황홀을 자아낸다. 이 둘은 포개어져 있다. 영적인 중첩을 이루어 그 절정에서 황홀함을 느끼기 때문에 세상은 출렁댈 뿐이다. 봄꽃인 작고 땅에 거의 붙어 있듯이 한 이 꽃을 보고 시인은 감탄한다. 그 감탄하는 생명력을 이렇게 인간과 식물의 교합을 빌어 의인화하여 표현하였다. 봄의 들판에 여기 저기 피어있는 한해살이 꽃과에 속하는 보랏빛과 흰 빛의 제비꽃=오랑캐꽃은 가을이 되어 서리가 내리면 사라져 버리기에 봄에 일찍 피어서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시인의 눈은 그 보잘 것 없이 작고 서리를 맞으면 사라질 그 꽃의 눈부신 만개(滿開)에 인간 생의 허무와 고뇌 가운데서 그것을 잊게 해주는 생명력인 교합으로 의인화한 것일까? 그런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빙빙 돌고 이성적 판단으로 스스로 고뇌하는 인간의 영혼도 이 순간은 판단정지한 채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다. 이 한 송이 꽃으로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과 기쁨으로만 흔들리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였다고 생각된다.

 

텅 빈 내 가슴 속을 파고들어 앉아 거친 숨을 쉬는 한 마리 귀여운 들짐승. 너는 이 땅 위로 서있는 것들을 모조리 쓰러트리고 시방 까아만 두 손으로 내 몸뚱아리 구석구석을 쓸어내리는 뜨거운 진흙, 눈먼 狂人이다. 목을 매어 소금기 어린 풀꽃을 터트리는 내 가슴 속의 너는.

-「겨울바람」, 『안암동日記』에서

 

부드러운 봄바람도 아닌 차갑고 메마르고 거친 겨울바람일지라도 텅 비어 있는 시적 화자의 가슴 속에 들어오면 온순하고 따뜻하며 촉촉한 한 마리 귀여운 들짐승이 된다. 이 들짐승인 겨울바람은 땅 위에 서 있는 모든 풀과 나무들을 쓰러트리고 시적 화자의 몸뚱아리의 구석구석을 쓸어내린다. 겨울바람이 털이 보송보송하고 박동을 하여 따뜻한 온혈 들짐승이 되고 습기를 머금은 부드럽고 촉촉한 진흙이 되고 마침내 눈먼 광인이 된다. 사랑에 목을 맨다는 의미는 사랑에 목숨을 걸고 바친다는 의미이며 눈먼 광인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간 경지일 것이다. 겨울바람이 들짐승→진흙→눈먼 광인→너로 동식물, 자연물, 사람으로 변화되면서 가장 마지막 단계에 광인/너로 불리우면서 사람이 된 바람과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목을 매어/목이 매이어 온다. 그 어느 쪽이든지 정에 순사하거나 그로 인한 눈물의 짠맛을 머금은 어린 풀꽃을 터트리는 내 가슴 속의 너이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로 곧장 달려 갈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이마에, 손등에, 목덜미 어디에서든 입술을 부비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부끼다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구름이라도 될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다만, 우리들의 촉각을 마비시키는 추위가 엄습해오는 길목으로 돌아서서 겨울나무 가지 끝 당신의 가슴에 잠시 머물 수 있다는 그것과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실한 從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 젖은 땅, 얼어붙은 이 땅 어디에서든 쾌히 엎드릴 수 있다는 그것뿐이옵니다. 나는 언제나 그런 나에 불과 합니다. 나는 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박눈」, 『안암동日記』에서

 

함박눈에 관하여 쓴 이 시에는 함박눈을 달려간다, 입술을 부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충실한 종의 몸으로 서슴없이 달려가겠다, 엎드릴 수 있다 등의 동사들을 나열하면서 함박눈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시환 시의 물활론은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사람으로 의인화 할 때 동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동작이나 동사 표현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운동성을 지니며, 그가 모든 우주만물이 유기체이며 생성, 발전, 소멸 등의 변화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의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함박눈=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충복이 되겠다는 사랑의 서약을 하는 관계이다. 이 표현은 「오랑캐꽃」과 「겨울바람」에서와 같이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로 사람으로 의인화하여 표현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동식물, 자연물, 사물을 통해 영적 교감을 이루는 시편들이다.

 

서 있는 나무는 서 있어야 한다. 앉고 싶을 때 눕고 싶을 때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서 있는 나무는 내내 서 있어야 한다. 늪 속에 질퍽한 어둠 덕지덕지 달라붙어 지을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될 지라도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할지라도, 젖은 살 속으로 매서운 바람 스며들어 마디마디 뼈가 시려 올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시종 서 있어야 한다. 모두가 깔깔 거리며 몰려다닐지라도, 모두가 오며가며 얼굴에 침을 뱉을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그렇게 서 있어야 한다. 도끼자루에 톱날에 이 몸 비록 쓰러지고 무너질지라도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일이 뒤바뀌는 건 아니지만 서 있는 나무는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서 있는 나무」, 『안암동 日記』에서

 

나무는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다. 나무의 서 있는 모습을 사람에다 의인화하여 불의한 어둠으로 피해를 입어 병들고 만신창이가 될지라도, 누군가가 눈과 귀를 가려서 사고와 판단을 마비시킬지라도 매서운 바람으로 상징되는 고통의 시련 속에서도 나무는 서 있어야 한다. 누군가 무리지어 나무의 얼굴에 조소와 경멸, 조롱을 하며 침을 뱉을 지라도 서 있어야 한다. 목숨을 위협 받아 도끼에 찍혀 쓰러져 무너져 생명이 다할지언정 나무는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이 의미는 정의와 진리를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르는 나무의 모습을 의인/투사로 의인화한 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하나 죽어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서 있는 사람이 없을 때 불의는 어느 새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내민다.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자라는 것처럼. 의인/투사는 외롭고 고독하다. 조롱과 억압을 받는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내놓아야 한다. 죽어서도 그 영혼이 편히 누워서 잠들 수 없다. 그러니 죽어서도 서 있어야 한다. 누워 있지 않고 서 있는 것이 본질인 나무에다 의인/투사와 같은 사람을 의인화한 시이다. 이 시는 식물을 통해 그 나무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얻어지는 영적 교감을 시를 표현한 예이다. 이와 같은 시편인 「벚꽃 지는 날」을 읽어 보자.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벼웁게 바람의 잔등을 올라타는

저 수수만의 꽃잎들이 추는 군무(群舞)가

마침내 반짝거리는 큰 물결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 모습 눈이 부셔 끝내 바라볼 수 없고

그 자태 어지러워 끝내 서 있을 수도 없는

나는, 한낱 대지 위에 말뚝이 되어 박힌 채

그대 유혹의 불길에 이끌리어 손을 내어 뻗는 것이,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아주 가볍게 몸을 버려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저 흩날리는 꽃잎들의 어지러운 비상(飛翔)!

그 마음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소용돌이치는

법열(法悅)의 불길을 와락 끌어안는다, 나는.

 

-2003. 4. 22. 00:5 「벚꽃 지는 날」, 『상선암 가는 길』에서

 

이 시에서는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라는 물음의 시 구절이 제1연과 제4연에 반복 배치되어 있다. 그의 주요 기법의 하나인 반복을 배치하는 데에는 시적 화자가 지는 벚꽃과 바람의 작용으로 마음속의 법열에 이르게 되므로 그렇게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2연에서 바람도 벚꽃도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람이 잔등을 지니고 있고 벚꽃은 그 잔등에 사람처럼 올라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람의 잔등에 올라탄 벚꽃 잎들은 군무를 춘다. 그것이 마침내 강물의 물결이 된다. 시적 화자는 제3연에서 황홀하여 손을 내어 뻗어 잡고자 한다. 그러면서 한 번 더 ‘간밤에 마음과 마음에 통했는가?’라고 벚꽃과 바람에게, 시적 화자 자신과 벚꽃/바람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법열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적 화자 나는 이 바람에 의한 꽃잎들의 눈부신 비상 속에서 한 깨달음을 얻는다. 아주 가볍게 몸을 버릴 때에야만 눈부신 비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가벼움은 마음의 탐욕과 번뇌를 모두 불 태우워 끄고 비워야 가능한 일이다. 바람으로 인한 벚꽃의 군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시적 화자의 마음도 무거운 육신(색계/ 현상계)을 버려 가벼워졌기에 법락의 불길이 소용돌이 쳐 일어난다. 그러니 간밤에 시적 화자의 마음과 이 벚꽃의 마음이 통하였나 보다. 이 시는 바로 벚꽃이라는 식물과 자연물인 바람 속에서 법열이라는 영적 교섭을 통하여 ‘간밤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는가’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경지의 시이다.

 

시「有無同體」의 “집착이요, 욕심이요, 욕망의 덩어리”인 나의 역사를 뒤바꾸는 거룩한 힘은 시인의 눈에 보이는 사물들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일어난다. 대상을 나와 동일시하거나 대상과의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질 때 대상에 몰입하게 되고, 대상이 건네 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소통과 교감은 자기를 비워둘 때 가능한 일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버리고서

뛰어내리라 하네.

뛰어 내리라 하네.

 

치마를 뒤집어 씌고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지며 춤을 추는

저 붉디붉은, 작은 복사 꽃잎들처럼

날더러 뛰어 내리라 하네.

뛰어 내리라 하네.

 

네 깊고 깊은 미소가 피어나는

無心, 無心川으로

뛰어 내리라 하네.

뛰어 내리라 하네.

 

-「芙蓉抄」부분, 『상선암 가는 길』에서

 

무심이란 마음의 번뇌와 업장이 소멸된 적멸보궁의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번뇌와 업장을 소멸 시키는 길은 나를 지우고 비우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욕망과 욕심 덩어리인 주체를 지우기 위해서는 주체의 산화 즉 복사꽃이 천 길 벼랑으로 낙화하듯이 자기를 던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의 꽃들은 때가 되면 피었다가 때가 되면 말없이 낙화한다. 인간만이 이 떨어짐, 자기 지우기를 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주체의 욕망의 역사는 쉽게 자기포기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의 이법에 따라 살려고 한다면 번뇌와 업장의 소용돌이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그 길은 무심의 경지, 자기 비우기에 이르는 길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을 비우고 연꽃이 말을 걸어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시적 화자 ‘나’가 사물이나 자연물에 말을 걸기보다 그쪽에서 말을 걸어오는 것을 중점으로 쓴 시이다. 그쪽의 말은 ‘뛰어 내리라’이다. 이 시 구절이 여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점에서도 뛰어내림의 의미가 강화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겹치지는 역사의 한 장면을 기억해 낸다. 의자왕의 삼천궁녀다. 그 궁녀들이 임금이 죽게 되자 임금을 따르는 마음으로 목숨을 버리고 낙화암에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다. 낙화암의 전설처럼 그 꽃 같은 여인네들이 목숨을 강물에 던진 것을 지는 복사꽃에 비유하면서 무심의 경지로 뛰어내리라고 부용이 시적 화자에게 말을 걸었으리라.

세 번째로 인간, 동식물, 사물 등에 성장, 발달하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 주는 「사하라 사막에 서서」를 읽어보자.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내/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이곳에

서 있는 산은 서 있는 채로/누워 있는 돌은 누운 채로

깨어지며 부서지며/모래알이 되어가는/숨 막히는 이곳에

아지랑이 피어오르고/간간이 바람 불어/모래알 날리며/뜨거운 햇살 내려 쌓이네.

수수만 년 전부터/그리 실려 가고/그리 실려 온

바람도 쌓이고/적막도 쌓이고/별빛도 쌓여서

웅장한 성(城) 가운데/성을 이루고/화려한 궁전 가운데/궁전을 지었네그려.

나는/그 성에 갇혀/깨끗한 모래알로/긴 머릴 감고,

나는/그 궁전에 갇혀/순결한 모래알로/구석구석 알몸을 씻네.

검은 돌은/검은 모래 만들고/붉은 돌은/붉은 모래 만들고/흰 돌은/흰 모래를 만들어내는

이곳 단단한/시간에 갇혀/나는 미라가 되고

이곳 차디찬/적막에 갇혀/그조차 무너지고 부서지며

마침내/ 진토塵土 되어/가볍게 바람에 쓸려가고/ 가볍게 별빛에 밀려오네.

 

-「사하라 사막에 서서」, 『몽산포 밤바다』에서

 

이 시에서는 두 가지의 성장, 발달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자연물로서의 사막은 산과 바위, 돌이 풍화되어 이루어진 곳이다. 이 자연물의 풍화 속에는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 전제가 되었다. 광대한 사막에서 시인은 웅장한 성을 본다. 이것은 자연이 빚은 성이지 사람이 축조한 성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이루어진 성에서 시적 화자 나는 깨끗하고 순결한 모래로 머리를 감고 알몸을 씻는 영혼의 정화와 재생을 꿈꾼다. 이것이 다른 하나의 성장이다. 즉 시적 화자의 영적 성장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비로소 자신도 자연물, 사물도 우주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 발전, 소멸하는 것을 체득한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성장이다. 이 세상에 생멸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현상계의 이법이다. 여기에서 그 어떤 우주 만물도 비껴갈 수가 없다. 시인은 미라가 되고 진토로 변화되는 자신의 미래를 바라본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렇게 되게 되어 있음을 사막의 성에서 그는 깨닫게 되어 영적 진보를 이루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으로 되어 있고, 사막은 하나의 웅장한 성으로 되어 있어서 남성으로 의인화 되어 있다. 사막이라는 남성과 거기의 단단한 시간과 차디찬 적막에 갇힌 나는 여성으로서 머리를 감고 알몸을 씻는다. 이 때 사막은 성(城) 속의 거대한 욕탕이 된다. 모래알들은 물이 되어 나의 몸을 씻어준다. 사막이 성과 욕탕이 되고, 나는 알몸인 채 그 모래 욕탕물에 몸을 담근다는 것은 사막과의 결합을 말한다. 사막은 의인화되어 나를 정화 시키고 재생시키며 또 미라가 되게 하고 진토가 되게 하는 자연물이다. 즉 나의 생멸을 관장하는 자연물이다. 이 시에서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과 상즉상입하는 존재임을 시인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사막 시편들에서 이시환 시인이 체득한 깨달음이다. 거대한 사막에 비해 인간은 한낱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인간은 우주만물들과 상즉상입할 때 우주와 교감하고 친교를 나눌 수 있으며, 사물이나 자연물, 동식물이 건네 오는 말을 알아들을 눈과 귀가 열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이 먼저 걸어간 삶의 여정처럼 생멸을 자연 이법에 맡기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상생의 우주 의지와 부합하면서 자기를 비우고 그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시환 시의 물활성은 바로 자연물과 사물,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허물고 상즉상입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교감과 친교에 있었다. 그가 사용한 활유법이나 의인법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쪽에서 보고 묻고 들은 것이나 저쪽에서 그에게 말을 건네 온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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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과 채찍의 역학

-이시환의 제7시집 『우는 여자』를 읽고

 

 

“저의 고통, 부자유는 민족의 그것과 일치․일체 되어 있고, 민족이 고통․불행․부자유에서 구원되었을 때, 나도 거기에서 해방되겠지요.”(1973년 3월) 이 글은 이른바 ‘서씨 형제’사건으로 투옥된 재일한국인 서승의 말이다. 1973년 3월 서울 구치소에 수감 중 한 말이다. 13년 후 그는 대전교도소에서 남긴 편지글에서 “벌써 봄이다. 3층에 있는 나의 방에서 보이는 산야는 아직 황량한 황야의 풍경이긴 하지만, 밝고 강한 햇살에 흙이 녹아서, 얼마 안 있어 강인한 들풀이 싹을 틔울 것이다. 신생新生이 이 세상에 가져다줄 것을 절실하게 기원하면서.”(1986년 3월) 7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서승․서준식 형제의 투옥은 한국사회와 일본사회에 큰 이슈를 던져 주었다. 무려 17년간의 긴 투옥생활 중 정치권의 민주화․반미투쟁선언을 하며 51일간의 단식투쟁(헝거 스트라이크)도 하였다는 사실과 ‘비전향’을 이유로 장기 독방 수형생활을 집행당하여 인권원칙에 반하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또한 부단한 전향 강요 속에서도 남북통일과 민주주의를 구하는 신념으로 거부하였다.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부자유를 민족의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민족이 고통․불행․부자유에서 구원되었을 때 자신도 거기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87년의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지는 한 해 전인 ’86년 3월에 그는 서울의 봄과 함께 신생과 희망을 3월의 황량하고 차가운 감방에서 내다보았다. 서승에게 민족은 자신과 동일하다. 1973년 3월 13일에 무기징역의 판결이 확정되어 길고 긴 옥중 생활을 보낸 그에게 국가보다 민족이 우선이었다. 이 형제들은 1971년 4월에 반공법․국가보안법위반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아서 17년만인 1988년 5월 25일 주거제한 처분의 조건이 붙은 상태로 동생 준식 씨가 먼저 출옥했다. 1988년 5월 25일 아사히신문 석간에서 ‘서씨 「40세의 날」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그의 출옥 소식이 보도되었다.

루이 알튀세르(Louise Althusser, 1918-1990)는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을 접목하면서 국가를 만들어진 거대한 조직으로 보면서 그 예로 서양 중세의 그리스도교 신국(神國)의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들고 있다. 근대 국가의 기초가 이 중세의 신국과 그 시스템이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의 작동원리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폭압적인 국가기구(RSA)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이다. 전자는 군대, 경찰, 사법기관, 교도소, 병원 등의 기구들이고 후자는 교육, 문화, 스포츠, 매스컴 등이 이에 속한다. 국가 시스템의 유지는 이 두 개의 기구에 의해서 작동된다고 한다. 그러니 국가가 그 구성원인 국민을 길들이는 방법은 바로 이 두 기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한 국가의 국민이 그 국가의 정권에게 자신들의 권력을 선거를 통하여 이양하면서도 그 행정력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대의민주주의의 시스템이다. 당근과 채찍은 국가가 국민을 길들이는 방법임을 알튀세의 구분에서 찾는다. 서씨 형제들에게는 민족이 존재하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일본사회에서 재일한국인으로서의 사회적 차별과 모국의 통일을 민족에서 찾는다. 그들에게는 민족의 통일이 있지 남과 북 어느 한쪽의 국가나 정권은 투쟁의 대상이리라.

이시환의 제7시집 『우는 여자』(2003)는 ‘풍자, 비꼼, 웃음, 모순(satire)’의 기법이 두드러진다. 그가 비꼬는 대상은 무엇인가에 중심을 두며 이 시집 읽어야 한다. 그가 ‘일러두기’에서 “겉으로 드러난 편 편의 의미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칫, 천박한(?) 섹스 탐닉주의자나 비도덕적인 인간의 배설물로 내비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라고 부드러운 경고의 말을 하면서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이 세상과 인간을 보는 눈의 ‘개안 내지는 개벽’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하여 세상과 그 세상을 이루는 인간에 대해 마음의 눈이 열린다는 의미는 얼마나 큰가? 어떻게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이 한 권의 시집으로 다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만 있다면 이 시집은 과연 성공한 시집이 될 것이다. 이 시집이 독자들에게 팔리고 안 팔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팔려야 많은 이들이 개벽․개안을 하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시집이 많이 팔릴 수 있을까? 여기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이 시집이 많이 팔려서 먹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시를 쓰는 것을 취미로 하지는 않는다. 먹는 것을 마련하고 시를 여기로 쓰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시인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이 소통에 대한 원의를 담은 시가 얼마나 잘 제조되었고 얼마나 출판전략이 좋았느냐에 따라서 판매부수가 올라갈 수는 있다고 해도 여전히 시를 읽은 사람은 적다. 시를 쓰거나 시를 연구하거나 시를 가르치거나 시를 특별히 좋아하는 독자들에 한해서 시집은 유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밥이 되지 않는 시를 쓴다. 왜 그는 시를 쓰는가? 시를 써서 밥이 되지는 않으나 여가생활, 명예 추구, 인간 사이에서 고독함, 세상과의 길항, 자신의 존재론적 고뇌 등과 같은 이유로 인해서 쓰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정화하기 위해서 쓰는 것인가? 아니면 뭔가의 목적성을 띠고 시라는 형식을 통하여 대중에게 선전, 선동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시인은 쓰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시환 시인은 이 시집의 자서에서 “여기 실리는 시들의 대부분은, 2002년 12월 30일 오후 시간부터 쓰기 시작하여 2003년 1월 5일 새벽 사이에 걸쳐, 그러니까 약 7일간 다 썼던 것으로, 내 생애 처음 있는 기이한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자서의 글에서 유추되는 바, 이 시집의 시들을 쓰기 전에 이시환 시인은 이렇게 많은 시편들 -정확히는 118편- 을 완성한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많은 양의 시를 약 7일간의 짧은 시간에 다 쓰는 일은 그의 시업 중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기이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마치 자동기술처럼 내면의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게워내는 데에 7일을 걸려 다 게워내었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7일간의 어쩌면 긴 배설을 하였다. 그런데 어떤 배설인가? 배설 이전에는 어땠는가? 배설 이전에 비해 배설 이후에 어떤 느낌이 그에게 찾아왔을까? 시원함일까, 허탈함일까 아니면 후회감일까 만족감일까 이것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 궁금한 사항이다. 좌우간 그에게는 시원함과 만족감이 찾아왔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 배설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필자에게는 그것이 ‘비꼼’의 전략에서 그 비꼼이라는 틀 속에 집어넣어서 돌리니 이렇게 많은 시가 쏟아져 나온 것이라고 본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그런 비꼼의 기법에서 오는 힘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 서정시의 무거운 감성의 외투가 사라진다. 가벼운 말들이 가볍게 쏟아지는 느낌으로 이 시는 술술 넘어간다. 이렇게 술술 새어나오는 내면의 시의 방에서 두루마리 화장지가 술술 풀리듯 그는 한없이 허옇게 풀려진다. 그가 풀어낸 말들의 화장지가 어디까지 닿을 것인가? 그의 이 말들이 얼마만큼의 내압에 견디지 못하고 가공할 속력으로 분출되었으며 그 말의 분사가 어느 범위까지 뿜어졌느냐는 중요하다. 그러니까, 아래로는 한없이 설사처럼 배설하고 위로는 한없이 게워낸다. 복부의 위장과 7미터의 소장과 대장에 순대 속처럼 꽉꽉 채워져 있는 것은 그의 영혼에 정신에 마음에 둥지를 트고 서식하거나 기생하고 있는 무의식과 전의식, 의식하는 단계의 모든 말들이리라. 이 말들은 어떤 의미나 기호를 정확히 가지지 않는 말과 감정이 뒤섞인 것이거나 말이 되기 전 단계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을 쏟아낸 것이 바로 그의 시가 된 것이다.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오르가즘이란 산의 7부 능선만 올라가도

신음 대신 간헐적으로 울기 시작하는 여자.

8부, 9부,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슬픔의 바다를 토해 놓듯이

허허벌판에서 엉엉 우는 여자.

그녀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으면서

더욱 힘 있게, 더욱 깊숙하게, 더욱 빠르게

구석구석 몸 안에 퍼져 있는 불씨에 불을 댕기면

그녀의 험준한 계곡에선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가 들린다.

분명 이 세상을 처음 나올 때의 울음소리보다

더욱 격렬하고, 더욱 원시적인,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을

천지간에 쏟아놓는 여자.

세상엔 그런 여자도 있다.

세상엔 그런 풀꽃 같은 여자도 있다. -「우는 여자․・2」전문

 

이 시에서의 여자처럼 이시환의 시편들은 세상을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운다. 이 울음은 괴이하고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울음으로 슬픔과 기쁨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이다. 슬픔인지 기쁨인지도 모르는 어정쩡하기도 하고 알 듯도 말 듯도 한 그런 울음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바로 시인 자신이다. 「우는 여자․1」에서처럼 ‘구석구석 알몸 속으로 숨겨진 슬픔의 씨앗들이/이성적 제어력이 약해진 틈을 타/일제히 싹을 틔우며 몸 밖으로 나오는 탓일까./라고 하여 이 여인은 아무리 말려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바로 이 시 구절에서와 같이 시인의 무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의식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멈출 줄 모르는 대량생산 체제의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부품처럼 낱낱이 하나의 몸체로 조립되기 전의 모습으로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그런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시인의 무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의식이 각각 언어로 조립되기 위하여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니 생리적으로는 약 7일간의 긴 배설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그의 반생 동안 쌓인 것의 배설이니 짧은 배설의 기간에 죄다 쏟아놓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 그의 시가 비꼼을 통해서 쏟아졌기에 더 폭발적으로 짧은 시간에 긴 배설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배설은 큰 소리로 엉엉 우는 대성통곡, 잔 울음인 흐느낌, 적당한 소리를 지닌 울음, ‘기쁨과 슬픔이 분화되기 전의 울음’, 교성, 땀, 여성의 분비물, 남성의 정액, 몸냄새, 눈빛, 토사물, 똥, 오줌 이런 것들이 모두 섞인 것들이다.

 

어인 일인가?

오늘은 유별나게 도로가 막히고

지하철조차 돼지 창자로 만든 순대 속이 떠올려질 만큼

미어 터진다.

알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다들 신촌으로, 신천으로, 영등포로,

강남으로, 대학로로 몰려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가,

눈이 맞은 자들은 여관으로, 모텔로,

비좁지만 탄력 있는 자신들의 승용차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이 날 밤, 자지러지던 이무기들의 즐거운 비명이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 속으로

꿈틀거리며 기어 나와 발에 밟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근심 어린 얼굴은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는다.

이날 밤, 여성들의 사타구니 밑으로 사정(射精)했던

남성들의 고단백질을 칼로리로 환산한다면

과연 얼마나 되며,

그 에너지로 빌딩을 세우듯

이 땅에 평화를 세운다면 어찌 될까?

크리스마스이브에 정작 우리 곁에 계셔야할

예수 그리스도는 어딜 가시고,

질척거리는 죄인들의 욕망만이

골목골목에서 성(城)을 쌓는구나. -「크리스마스이브」전문

 

「크리스마스이브」는 풍자나 비꼼을 지나서 웃음을 자아낸다. 이시환이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전략은 바로 이 시에서 나타난다고 하겠다. 세타이어(satire)란 비꼼과 풍자, 웃음, 모순을 말한다. 그는 거룩하며 고요하고 평화로워야 할 크리스마스는 어디가고 없는 현실을 이렇게 남녀 간의 성 풍속도를 통하여 모순되고 부조리하며 타락한 세상을 비꼬고 풍자한다. ‘남성들의 고단백질을 칼로리로 환산’이라는 우스꽝스러우면서 그로테스크리얼리즘의 기법을 정사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여기에서는 성에 있어 우위의 점하고 있는 남성성을 뒤집으면서 비꼬고 있기도 하다. 빌딩은 남근 상징이며 사정, 고단백질 칼로리, 거짓되며 타락한 이 땅에는 사회적 정의의 결과인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그러니 ‘지하철조차 돼지창자로 만든 순대 속을 떠올릴 만큼 미어터지는’ 타락한 인간들이 흥청거리며 욕망의 불꽃을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마치 개떼들의 교미처럼 인간의 동물성을 발가벗기고 그런 질척거리는 인간들의 욕망만이 뒷골목의 어둔 곳에서 성을 쌓는다고 개탄하고 있다. 빌딩과 성(城), 이무기(뱀)는 모두 남성성을 상징하고 있고, 그것의 욕망만이 넘치니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는 부재한다는 의미의 시이다. 이러한 욕망의 메커니즘은 새디즘[sadism]과 매저키즘[masochism]의 구조로 되어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힘과 권력의 역학이 남성과 여성, 국가와 국민, 개인과 전체의 사이의 구조로 작동되는 욕망의 메커니즘이다.

 

짓밟아 주세요.

짓밟아 주세요.

이 편안함과 안락함보다 고통이 더 짜릿한

내 몸 안의 푸른 생명의 바다로 하여금

고개를 들게 해줘요.

제발, 내 안의 나를 일으켜 주세요.

인정사정없이 나를 짓밟아 줌으로써

내 안의 나를 깨워 주세요.

이 혹한을 거든히 이겨내는 보리싹처럼

나를 짓밟아 주세요.

나를 짓밟아 주세요. -「눈으로 말해요」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거부하고 오히려 고통을 받는 쪽을 욕망한다. 이 욕망은 매저키즘의 원리이다. 이 욕망을 답청(踏靑)에 비유한 시다. 그 목적은 ‘내 안의 나’를 깨우기 위해서이다. 굼벵이는 밟아야 꿈틀댄다고 한다. 밟히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굼벵이보다 밟힘으로서 꿈틀대는 굼벵이가 되고자 한다. 그 이유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버리고 내 몸 안의 푸른 생명의 바다가 고개를 들게 하고 내 안에 잠자는 나를 깨우기 위한 것이다. 종교적 고행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 육신을 넘어서 자기를 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피학적 욕망은 새디즘과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것으로 남과 여, 국가와 국민의 관계와 같은 상징계의 질서에서 툭툭 터져 나오는 것이다.

 

채찍과 당근이라, 참 좋은 말이지.

그리 좋아하는 당근은 주지 않으면서 채찍만 가해 보라.

말 못하는 말도 화를 내며 그대를 거절할 거야.

그렇다고 당근만 배불리 먹여 봐라.

네가 가야할 때는 몸이 무거워 잘 뛰지도 않을거야.

그러니 적당히 당근을 먹이면서

채찍을 가하는 게 좋아.

이것은 말 타는 녀석이 말에게나 하는 짓이지.

그런데 요즈음 이 당근과 채찍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아주 편리한 공생의 원리가 되고 있잖아?

미국의 부시가 북한의 김에게,

조폭의 두목이 아랫것들에게,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즐겨 쓰는 민주적 방식이니

채찍과 당근이라, 참 좋은 말이지.

스스로 말(馬)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 말을 타고 달리려는 이도 있게 마련 아닌가 -「채찍과 당근」전문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가하면서 굴러가는 시스템을 조롱하는 이 시는 국가/국가, 사람/사람, 남자/여자, 미국의 부시/북한의 김, 두목/아랫것, 가진 자/못 가진 자, 말이 되고자 하는 사람/말을 타고 달리려는 사람의 역학 관계 속에서 즐겨 쓰는 민주적 방식이 바로 당근과 채찍이다. 민주주의의 체제가 지니는 겉과 안을 드러내어 그 결함 부분을 꼬집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스스로 말이 되고자 하는 사람과 짓밟히기를 바라는 피학적 욕망은「당신은 천사 나는 죄인」에서 “분명 내가 너에게 먹히고 싶었다./그 순간부터 나는 너의 노예가 되고 싶었고./나는 너의 순종하는 종이 되고 싶었다.”라고 시적 화자는 부르짖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정치와 남녀 간의 섹스가 한 통속의 역학 관계의 구도에 있음을 말한다.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이다.

여러 사람을 상대로 거짓말을 해도 그럴 듯하게 해야 통하는

정치와 섹스는 단순하지만

남자들을 현혹시키는 힘이 있다.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이다.

한 여자를 다루는 데에도

정치적 판단과 제스추어가 필요하듯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에도

한 여인을 다루듯 충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정치와 섹스는 한 통속이다. -「정치와 섹스」전문

 

생 텍쥐페리는 동화 『어린 왕자』에서 상징질서의 ‘길들이기’를 여우를 통해 어린 왕자에게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라고 가르쳐준다.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를 여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넌 아직 나에겐 수많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꼬마아이에 불과해. 그러니 나는 너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리고 또 나 역시 너에게 아직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지. 너는 나에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나는 너에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되는 거지…

 

정치와 섹스 역시 길들이기이며 동시에 관계 맺기이다. 여우와 어린 왕자는 일대일의 관계 맺기를 통하여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여우를 친구로 얻은 어린 왕자는 여우의 지혜를 통해 자기 별에 두고 온 꽃과 관계회복을 하는데 실마리를 제공받는다. 수 천 송이 꽃과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에서 애정을 보인 꽃과는 다르다는 의미도 그 꽃이 바로 어린 왕자의 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인 정치는 이시환 시인에게는 하나의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기만하며 길을 들이는 것이거나 깃대를 꽂고 따르라는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말이 되고자하는 민주주의의 인민들은 이 당근과 채찍의 맛에 길들여져 있을 뿐이며 주체로서의 자리매김 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추악한 몰골을 “그의 가벼운 입술과/그의 얕은 머릿속은 천박하기 짝이 없네.”라고 일갈하면서 “열리고 닫힘이 따로 없고/어둡고 밝음이 따로 없는 곳에서나/그가 설 명분이 사라지려나.”라고 하여 민주주의의 존재론적 성찰을 들여다보게 한다. 민주주의는 닫힌 사회 어두운 구석이 여전히 있을 때 존립의 이유가 있을 뿐이지 열림과 닫힘이 따로 없고 어둡고 밝음이 따로 없는 곳에서는 그 설 명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가장 깨끗해야할

정치판이 썩어 문드러졌다고들 말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국민에 그 정치꾼이네

...................................

 

지금 우리에겐 혁명이, 혁명만이 필요하네.

총칼로써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휘어잡는 혁명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가 무엇인지

눈을 바로 뜨게 하는

그런 혁명이 필요하네.

그런 뉘우침과 깨우침이 필요하네.

...............................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고 ,

무엇에 힘을 얻어 살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 혁명뿐이라네.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새 살이 차오르게 하는,

그리하여 우리의 건강한 삶과 미래를 보장해 주는

그런 혁명, 혁명만이 필요할 뿐이네. -「우리에겐 혁명만이 필요해」부분

 

주위의 사람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일삼는 부부를 보고 주위의 사람들은 그들을 ‘똑같으니 살지’라고 말한다. 서로를 길들인 결과 그들은 둘이면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다. 한 국민은 그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한다. 이시환 시인은 권력을 잡기 위한 혁명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에 눈을 바로 뜨게 하는 깨끗한 혁명이 이 시대에 요구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인으로서의 이시환은 「나를 건드리지 마」에서처럼 ‘폭발 직전의 침묵’으로 머물고자 한다. 이 폭발 직전의 침묵이란 혁명 전야의 고요함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을 개안하고 천지가 개벽하는 시의 씨앗들을 내장한 것이다.

 

나를 건드리지마.

내가 입을 열면 세상이 발칵 뒤집혀서가 아니다.

누군가 나를 건드리면 내가 폭발하고 마는 부비추랩이거든.

나를 건드리면 내 몸 안에서는 시가 마구 쏟아져 나와.

그 알몸의 시들이 다시 새끼들를 마구 쳐대어

방심하다가는 그놈의 시들에 내가 압사당하거나

나의 진을 다 빼앗기어 시들시들 내가 죽을 수도 있거든.

그래서 나는 아직 시가 되지 못하는 말들을 가득 껴안고서

잔뜩 웅크려 부치고 있는, 폭발 직전의 고요가 더 좋아.

설령 세상에 시 한 편을 내놓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도 시가 되지 못하는 말들을 가득 품고서

잔뜩 웅크려 부치고 있는, 폭발 직전의 침묵으로 머물고 싶어.

나를 건드리지마.

내가 입을 열면 세상이 발칵 뒤집혀서가 아니다. -「나를 건드리지 마」전문

 

되짚으면 보면, 그가 약 7일간 썼다는 이 시집은 바로 침묵으로 일관하고자 하는 그를 건드리고 밟은 것이다. 무엇이 그를 건드렸고 밟아서 꿈틀대게 하여 그에게 내장된 부비추랩을 폭발하게 하였을까? 이 시집은 그 폭발로 마구 쏟아져 나온 시들로 가득하여 118편의 시를 약 7일만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쓴 것이다. 시편들을 쏟아내게 된 폭발의 원인이 뭔가 수상하다. 다만 ‘70년대 모국의 민주화를 위해 폭압적인 기구에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청춘을 바치고 신념을 견지했던 재일한국인 서승의 옥중 글처럼 필자도 황량한 사막이나 광야 같은 풍경 속에서도, 밝고 강한 햇살이 이 세상에 가져다줄 새 생명을 기원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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