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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뿌리 알아보기 - 러시아 쏘련 문학
2016년 03월 21일 02시 02분  조회:9280  추천:0  작성자: 죽림
 
[ 2016년 03월 23일 08시 13분  ]

 

 

 

 러시아·소련문학

-·蘇聯文學〔槪說〕 러시아는 9세기 중반에 동슬라브족이 유럽에 세운 국가에서 비롯하여 수백 년 동안 차르(황제)가 러시아를 다스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차르의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커져갔고 1917년에 혁명이 일어나 제정을 무너뜨렸다. 이듬해 러시아는 러시아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되었다. 1922년에는 다른 세 공화국과 함께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연방(U.S.S.R)을 탄생시켜 러시아는 소비에트연방(소련)에서 가장 크고 힘이 막강한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와 10개의 공화국은 새로 느슨한 형태의 연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러시아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편의상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러시아 문학과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후부터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의 소련문학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러시아 문학의 역사는 18세기 초두에 있었던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경계로 하여 중세(혹은 고대)와 근대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11세기에서 17세기 말에 이르는 중세 러시아 문학은 소수의 전문가 이외의 일반 독자에게는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고 또 별로 큰 흥미도 없는 영역일 것이다. 그 까닭은 12세기 말에 쓰여진 <이고리 군기>를 제외하면 첫째로 중세 러시아 문학은 예술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둘째는 중세와 근대 사이에 전통이 끊겼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문학이 제 나라의 중세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도 많이 계승하고 있는 데 반하여 러시아 근대문학은 그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중세와는 전혀 관계 없이 오직 근대 서구문학의 모방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재출발은 표트르가 단행한 러시아 사회의 서구화·세속화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으로 18세기는 이른바 러시아 문학의 ‘수습 시기’이며, 가지각색 서구 문예사상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작품이 많이 나왔으나 그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완성도가 낮아 현재의 독자들이 읽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러시아 문학이 진정한 뜻의 국민문학이 되는 것은 19세기의 20년대, 즉 시인 푸슈킨이 나타난 이후의 일이다. 그런 뜻에서는 러시아 문학은 유럽 제국의 문학 중에서 가장 새로운 문학이며 그 역사는 1세기 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얕은 역사는 질적 깊이로 보충되고 남음이 있으며 19세기 초의 푸슈킨에서 체호프에 이르는 약 80년간의 황금시대는, 예를 들어 기원전 5세기의 아테나 전성기나 ‘위대한 세기’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에 비교해 조금의 손색이 없으니 세계문학에서 드물게 보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황금시대를 거의 혼자의 힘으로 열어놓은 천재 작가 푸슈킨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그는 18세기 초부터 서구에서 흡수한 모든 문예사조와 수법을소화하여 더욱 고차적 종합이라고도 할 수 있는 러시아 리얼리즘을 확립함으로써 러시아 문학을 일거에 세계적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옮기기 어려운 운문으로 쓰여 있기 때문에 외국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세기 러시아 소설 특유의 주제나 인물의 원형을 거의 모두 그의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러시아 문학사에 있어서 푸슈킨의 위치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최고봉으로 하는 러시아 소설은 푸슈킨의 리얼리즘, 레르몬토프의 심리(心理)주의, 고골리의 풍자를 그 근원으로 하여 1840년대 후반기에 전성기에 들어갔으며 그 후 19세기 말까지 러시아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 특징은 사상적 내용으로 보면 인텔리겐차의 문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인텔리겐차는 19세기 러시아에서는 지식인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세계관을 가지고 그 세계관에 따라서 살 각오를 가진 사람들 전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의 제정 러시아 정부는 개인이 각각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니 인텔리겐차는 필연적으로 권력과 대립하고 그 비판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작품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도 또한 ‘사냥꾼’이고 아웃사이더이며 따라서 자주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소설에 있어 전제주의체제에 대한 비판과 표리일체를 이루는 것은 그 체제 밑에서 고통을 받은 ‘국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동정이다. 그러나 체제에 대한 비판도 인도주의도 러시아에 있어서는 자칫하면 과학과 예술의, 국가와 교회의, 그리고 또 이성과 진보의 전면적 부정으로 내달리기 쉬웠고 또한 ‘국민’을 종종 신으로 숭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무정부적 문화부정과 몰아(沒我)의 ‘국민 숭배’야말로 러시아 소설의 저류를 이루는 두 개의 커다란 특질인 것이다. 이러한 문학은 낡은 문화적 전통과 절연한 근대 러시아에 있어서만 가능한 것으로 ‘문명’의 입장으로 본다면 때로 야만인의 문학으로도 보이겠으나 그 대신 거기에는 인습과의 타협에서 유래하는 위선성이나 미온성 혹은 페시미즘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 문학이 ‘문명’이나 ‘전통’을 오히려 무거운 부담으로 느끼는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시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러시아에 있어 작가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19세기와는 매우 다르다. 작가들을 오로지 적대시하던 정치권력은 작가를 ‘인간 넋의 기사’로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 기여하기를 요구한다. 즉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원칙이 지상 명령으로 모든 작가들에게 부과되어 이 원칙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인정된 작품은 반혁명적, 비애국적, 코스모폴리탄적, 형식주의적 등으로 불리고 가혹한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에 대한 통제는 항상 똑같은 엄격함으로써 문학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20년대는 1930-1950년대에 비해 문학에 대한 당의 통제가 심하지 않았으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할 만한 걸작의 대부분은 그때에 쓰인 것이다.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 예술이나 현대의 카톨릭 문학의 예로 미루어 특정의 이데올로기에 구속당하는 것이 반드시 예술의 황폐를 의미하지 않는다고는 할지라도, 이른바 러시아의 ‘작가 동맹’이 나타나기 이전에 걸작이 많았다는 사실이나 ‘해빙’상황 속에서야 세계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 즉 두 차례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의사 지바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등이 나왔다는 사실로 보아 어떤 사회에 있어서나 작가는 어느 정도 국외자이고 회의가이며 비판자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문학이 침체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러시아 문학의 문제는 그러한 문학을 쓸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학이 러시아 국내에서 발표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며, 발표의 자유가 본원적인 것이라면 거기에 체제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董 玩>

 

 
고 대편집

고대문학편집

古代文學 러시아 문학은 11세기부터 시작된다. 이 이후 17세기까지를 러시아 문학에서는 관습적으로 고대라고 부른다. 서구제국의 중세부터 근세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구전문학(口傳文學)은 별도로 치고 러시아 문학의 성립은 비잔틴으로부터의 그리스도교 섭취와 직결되어 있다. 988년 키예프 대공(大公) 블라디미르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한 것을 계기로 하여 그리스인 성직자 및 기술자가 동로마 제국의 고도문화(高度文化)를 러시아에 가져왔다. 이와 함께 불가리아 등지에 당시 이미 존재했던 전례서(典禮書)나 역사관계 서적의 슬라브역(譯)이 거의 그대로 러시아에 도입되었다. 이 번역에 사용된 이른바 ‘교회 슬라브어(語)’는 ‘고대문학’의 전기간을 통하여 러시아 문장어(文章語)의 지위를 점유했다.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고대 러시아의 문화는 최초의 개화기를 맞는다. 각지에 건립된 수많은 사원, 현재까지 전해 오는 성상화(聖像畵) 등이 키예프 문화의 높은 수준을 말해 주고 있는데 문학에서도 여러 장르에서 걸작이 나왔다. 13세기에 들어서자 러시아의 대부분은 바투가 이끄는 몽고 대군에 의해 유린되었다. ‘타타르의 멍에’라 불리는 킵차크 한국(欽察汗國=Kipchak-Khan)의 지배는 2세기 이상 계속되어 그 후의 러시아 문화에 독특한 아시아적 성격을 부여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는 문화적 정체기로 간주되고 있다. 러시아의 정치 및 문화의 중심은 이 사이에 결정적으로 키예프에서 북동 러시아로 옮겨졌고, 더욱이 모스크바 공국(公國)이 점차 번성해져서, 15세기 말의 러시아는 최종적으로 타타르의 지배에서 이탈, 16세기 중엽의 대제(大帝) 이반 4세 때 거의 전러시아의 재통일이 실현되었다. 이때 동로마 제국은 이미 멸망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최대 최강의 그리스 정교국으로서, 모스크바야말로 제3의 로마라는 강한 긍지와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거창한 역사 편찬사업이나 성인전집성(聖人傳集成)이 이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폴란드의 간섭에 의한 동란시대를 거친 17세기에는 서구제국과의 유대가 밀접해져, 문학에 있어서도 서서히 세속적 테마가 다루어지기에 이르렀다.

키예프 시대 문학편집

-時代文學 현재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가 정치적·문화적으로 동슬라브 제족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던 10세기부터 13세기 초까지를 러시아사상(史上) 키예프 시대라고 한다. 이때 그리스도교 전래 이전부터 풍부한 내용을 지닌 구전문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령 예를 들어 영웅 서사시군(群) 부이리나의 경우처럼 현재 알려지고 있는 것은 훨씬 후세의 수집에 의한 것으로 형태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에서의 그리스도교 도입에 수반해서 비잔틴 문화의 유입이 급속도로 진전된 것은 물론이지만 라틴 세계와의 교류가 성행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키예프는 이즈음 비잔틴, 인도, 페르시아 등 동방제국과 북구·서구를 연결하는 국제무역상의 거점이었다. 키예프 러시아의 문학은 동슬라브족의 구전문학의 전통과 남슬라브, 비잔틴, 이슬람, 노르만-스칸디나비아 등의 문화적 영향의 융합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겠다. 키예프 시대의 문학은 번역문학과 창작문학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비잔틴에서 전해진 것으로 종교관계서(宗敎關係書)와 세속적 작품으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서적인 <오스트로밀 복음서>는 성서 발췌로서, 이런 종류가 성인전과 함께 그당시 가장 널리 읽혔다. 그러나 교회 당국에서 공인하지 않은 ‘외전(外典)’ 혹은 ‘위경(僞經)’이라 불리는 종교전설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성모 마리아가 지옥에 내려가 죄인의 고난상을 보고 다니는 <성모의 지옥순회>가 바로 그런 것이다. 비잔틴의 세속문학으로서는 조시퍼의 <유대 전사>, 서사시 <디게니스 아크리타즈> <트로이 전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기 등등의 번역 또는 번안물이 읽혔는데, 비잔틴 문학이 도입될 때 러시아인의 이니셔티브로써 윤색이 이룩된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러시아인이 쓴 최초의 문학적 작품으로서는 연대기 외에 11세기 중엽 키예프시(市) 주교가 된 일라리온의 설교 <율법과 은총에 대해서>가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는 벌써 비잔틴 교회문학의 복잡한 수사기교가 종횡으로 색채가 농후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교훈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 예로서 러시아에서 최초로 성인에게 열좌된 보리스공(公)과 글레프공에 관한 이야기, 키예프 페테르스키 수도원의 교부열전(敎父列傳),수도원장 다닐의 <성지순례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작자의 개성이나 주장이 명확하게 부각된 작품도 나타났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공(公)의 <자식에의 교훈>, <유형수 다닐의 기원>, 키예프 문학의 정상을 점하는 <이고리 군기(軍記)> 등이 그것이다.

원초연대기편집

Letopisi Nestra (11-12세기) 슬라브 제종족의 역사 및 풍습의 기술에서부터 러시아 건국을 거쳐 12세기 초엽까지의 러시아 최고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11세기 중엽 키예프에서 몇 사람의 수도승에 의해 쓰여져, 12세기 초에 현재 알려진 형태로 이루어졌다. 네스토르라는 수도승이 편찬자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네스토르의 연대기> 또는 긴 표제의 일부를 따서 <흘러간 세월의 이야기>로 불리기도 한다. <원초연대기>의 구성은 매우 복잡하다. 사용되고 있는 사료를 보더라도 모두(冒頭)에 나오는 노아의 자식들에 의한 세계분할과 바벨탑의 건설은 비잔틴에서 전해진 문헌에서 동슬라브족의 역사, 풍속과 러시아 건국공로자들의 무훈에 관한 기술은 구전된 전설이나 서사시에서 11세기 이후의 사건기록(이것은 編年體로 되어 있고,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크다)은 목격자들의 진술 또는 편자 자신의 기억에서, 이렇게 가지각색이다. 이 밖에도 신약·구약의 성서, 비잔틴의 성인전, 설교집, 외교문서, 나아가서는 키예프 시대 초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종군기, 수도원의 창립 유래 등이 이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그 문체는 일정하지가 않으나 이 역사서에 높은 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전반에서 북구전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이고 있는 구전 서사시라든가, 슬라브 고래의 민간설화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점과, 또한 후반에서 11세기의 여러 사건 기술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형상성(形象性)이 풍부한 묘사이다. 키를 비롯한 3형제에 의해서 이룩된 키예프시(市)의 건설, 오레크공(公)의 키예프 점령과 콘스탄티노플 원정, 오레크공의 죽음의 예언과 그 실현, 남편을 죽인 도레브랴네족(族)에 대한 올리거 공비의 복수 등, 민간의 전승에 입각한 이야기는 얼핏 보면 소박하나 깊은 시정이 흐르고 있다. 편자가 동시대의 역사를 기술한 후반 부분에서는 그리스도교적인 세계관이 표면에 나타나 교훈조가 뚜렷하긴 하나, 여러 공들 사이의 불화와 전투, 외적의 침입, 이들로 인한 민중의 고난에 관한 기술에는 편자 자신의 깊은 인간성과 애국적인 정열이 스며나오고 있어, 독자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는다. 연대기는 이 밖에 <키예프 연대기> 13세기 남서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가리치 보루이니 연대기>, 전(全) 러시아적 시야를 지닌 15세기의 <모스크바 연대기> 등 유명한 것이 적지 않다.

이고리 군기편집

Slovo o Polku Igoreve (1187) 고대 러시아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히는 서사시. <이고리 무용담>, <이고리 원정기>라고도 한다. 이 작품은 오랜 동안 묻혀 있었으나 18세기 말에 발견되어 1800년에 간행되었다. 여기에서 읊은 것은 남러시아 제공(諸公) 가운데의 한 사람인 이고리가 그 무렵 더욱 빈번하게 러시아를 침범한 폴러베츠족(族) 정벌을 위해 일족을 이끌고 스테프로 출전한 원정이다. 광야의 한복판에서 적군과 조우(遭遇)한 이고리군(軍)은 최초의 싸움에서는 혁혁한 승리를 거두나 다음날에는 전력을 가다듬은 폴러베츠족에게 크게 패하여 이고리와 그 아들은 포로가 된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이고리는 감시의 눈을 피해서 러시아로 탈출하고 폴러베츠족 수령의 딸을 아내 삼은 아들도 가족을 이끌고 불원 조국에 귀환한다. 이 사건 자체는 연대기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이고리 군기>의 작자는 사건의 단순한 기록에 중점을 둔 연대기와는 아주 다른 수법을 써서 이고리의 원정을 묘사하고 있다. 작자는 우선 전설적인 음유시인(吟遊詩人) 보얀을 회상하여 그 시재(詩才)를 찬양하고 광야에서의 격전을 왕년에 있었던 러시아 제공의 회전(會戰)에 비교, 이고리의 패전과 러시아 민중의 재난을 초래한 원인이 된 제공간(諸公間)의 내분을 비난하고 있다. ‘루시의 땅을 위해 이고리의 마음의 상처에 보답하기 위해’ 분기할 것을 촉구하는 부르짖음은 이 작품에 독특한 절박감을 불어 넣고 있다. 이에 뒤이어 이고리의 아내 야러슬라브나가 바람과 드네프르강(江)과 태양을 향해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고 남편의 구원을 원하는 서정적 장면이 묘사된다. “두견새로 변하여 도나우강을 훨훨 날아가자 옷소매를 물에 적시어서 내 낭군님 상처의 피를 씻기 위해서”라는 기원은 마침내 보람이 있어 이고리 공은 루시의 땅에 돌아오게 되고 이고리 공과 병사들에 대한 축복의 말과 함께 이야기는 끝난다. <이고리 군기>의 작자는 불명이다. 이고리공의 수행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면 당시의 음유시인에 의한 것으로도 생각되는데 고도의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깊은 교양을 지닌 시인인 것만은 확실하다. 또 이 작품이 성립된 정확한 연대도 뚜렷하지 않다. 다만 이고리와 그 아들의 귀국이 작품 가운데 나오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 2년 후인 1187년 경에 저술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너무나 걸출한 데다가, 더욱이 핵심이 되는 사본이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후세의 위작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과도시대 문학편집

過渡時代文學 키예프 시대와 모스크바 시대의 중간을 과도시대라고 부르며 정치적으로는 킵차크 한국(汗國)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대이다. 이 시대의 문학활동은 대체로 부진했다. 주요 작품으로서는 13세기 몽고군에 대한 과감한 저항을 묘사한 <랴잔 황폐기(荒廢記)>, 러시아의 자연과 왕년의 영광을 찬양한 주옥의 단편 <러시아 국토 멸망기>, 북서 러시아에서 게르만 기사단의 침입을 막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공의 <일대기> 등이 있으며, 또 그 이후로는 쿠리코보 들판에서의 대(對)타타르전(戰) 승리를 기념하는 <자돈시치나>를 비롯한 여러 작품이 잘 알려져 있다. 이상의 여러 작품에는 그 어느 것에나 키예프 문학의 잔영이라고도 할 만한 자취가 서려 있는데, 예를 들어 <자돈시치나>는 <이고리 군기>를 완전히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전의 분야에 있어서는 이 시대에 새로운 경향이 출현했음을 볼 수 있다. 극단적인 수사적 기교를 바탕으로 삼는 양식이 바로 그것으로 틀에 박힌 미사여구를 길게 나열했기 때문에 ‘말의 조립 세공’이라 불린다. 이 스타일은 이슬람의 압박을 피해 러시아에 온 세르비아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제2의 남슬라브 영향’이라고도 호칭된다. 에피파니 작인 <페르미의 스테판전(傳)> <라도네슈의 세르기전>이 대표적 작품이다. 이 밖에 15세기부터는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까지 들어온 러시아 상인 아화나시의 기행문 <세 개의 바다 저 건너에의 여행>, 네르토르 이스칸데르라는 사람이 쓴 종군기 <콘스탄티노플 함락기>. 러시아 민화에 입각한 소품 <무롬의 표트르와 페브로니아 이야기> 등이 전해지는데 이들 작품은 뒤의 모스크바 시대 문학과 연결되는 것들이다.

16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전세기말에 ‘타타르의 멍에’에서 벗어난 러시아는 모스크바 공국에 의해 통일되어 16세기에는 모스크바 공을 차르(Tsar’=皇帝)로 추대하는 중앙집권국가가 성립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시기는 국민의식이 매우 앙양되었음을 볼 수 있다. 때마침 동로마 제국이 터키에 의해 멸망당했기 때문에, 러시아야말로 그리스 정교의 마지막 옹호자라는 ‘모스크바 즉 제3로마’의 이론이 수도사 피로페이에 의해 제창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15세기 말 또는 16세기 초에 나온 <블라디미르의 제공(諸公) 이야기>에도 반영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모스크바의 제공들이야말로 왕년에 키예프에 군림했던 류리크공을 잇는 정통이며 나아가서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혈연에 연결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모스크바시(市)의 주교 마카리의 지도하에 편찬된 대규모적인 연대기 집성, 그리고 <대성인전집>도 이 시대의 고양된 국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세계 개벽에서부터 아우구스투스, 류리크를 거쳐 모스크바공에 이르는 10권 2만 페이지로 되어 있는 웅대한 구상의 역사서이며, 후자는 러시아 각지에 산재하고 있던 성인전을 모두 집대성한 것으로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외국의 성인전기도 남김없이 수록하고 있다. 전대의 쿠리코보 전쟁의 기록이나, <콘스탄티노플 함락기>의 전통을 잇는 종군기로서는 이 세기의 60년대에 쓰여진 <카잔 왕국사(王國史)>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카잔 한국(汗國)의 성립에서 이반 대제의 정복에 이르는 경과를 기술한 것으로, 특히 모스크바 포위군과 농성군의 최후 공방전은 특징 있는 서사적 스타일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작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반 대제에 의한 카잔 공략(攻略)의 양상은 이 당시 구전문학의 새로운 형식인 ‘역사 가요’에서도 읊어지고 있다. 연대기거나 종군기거나 거기에는 통일 러시아의 성립이라는 시대 특유의 강한 정치의식·역사의식이 나타나 있으며 이 시기에는 동시대의 정치 및 사회 양상에 관한 관심을 그대로 표시하고 있는 저작이 많이 나왔다. 서구적 합리주의의 영향하에 발생한 온갖 이단(異端)을 둘러싼 논쟁,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따지는 ‘요시프파(派)’와 ‘청렴파’의 대립, 차르의 절대주의를 지지하는 이반 페레스베토프의 저서, 차르의 권력에 관한 이반 뇌제 자신과 쿠르프스키공의 격렬한 응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 평론적 문학’은 러시아 문학에서 하나의 뿌리깊은 전통이 되었다. 또한 문학적 가치로서는 빈약하나 이 시대의 분위기를 적절히 전하는 것으로는 가장으로서의 마음 가짐을 가르치는 시리베스토르 승(僧)의 <가정훈(家庭訓)>이 있다.

17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17세기 초 참칭자(僭稱者)인 가짜 드미트리의 출현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대동란은 러시아 사회에 현저한 변화를 초래한 것은 물론이고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귀족에 대신한 사족(士族)의 진출, 상공업의 발흥에 수반한 새로운 독자층의 출현, 서구제국과의 교섭증대 등이 원인이 되어 문학에 세속적 요소가 점차로 뚜렷해진 것이 바로 그것이다. 17세기 초에는 대동란에서 취재한 <모스크바 국가의 포로와 멸망 이야기> <스코핀 슈이스키공의 죽음과 매장 이야기> 돈 카자흐의 활약을 묘사한 <아조프 농성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 등 몇 개의 종군기가 나왔으며, 이들 작품은 전통적 수법을 지키면서도 사건의 즉물적 묘사에의 경향 가운데 새로운 시대의 조짐을 감지케 한다. 17세기 문학의 최대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일련의 세 상인의 이야기이다. 운문으로 된 <불행한 이야기>는 어떤 상인의 아들이 ‘불행’에 봉착, 속세의 온갖 고난을 겪은 끝에 수도원에 들어가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상인의 아들이 등장해서 남의 젊은 아내와 밀통하는 <사바 그루친의 이야기>에서도 결국 주인공은 영혼의 구제를 수도원에서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어느 쪽이나 이야기의 흥미 중심은 세상의 묘사에 있다. 가난한 청년이 책략을 써서 부유한 귀족의 딸을 손에 넣고 자신의 출세를 꾀하는 <프롤 스코베예프의 이야기>, 남편의 부재시 현명한 처가 종횡무진의 지략을 써서 정조를 지키는 <카르프 수툴로프의 이야기>에는 종교 냄새나 교훈적 색채 같은 것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들 작품의 작자는 미상이다. 이 밖에 17세기에는 <요르슈 에르쇼비치의 이야기> <셰미야카의 재판 이야기> 등과 같은 풍자문학도 성행했다. 또한 새로운 경향은 성인전 분야에도 미쳐 아들에 의해 묘사된 여성의 전기로서 흥미가 있는 <율리아니아 라자 레프스카야전(傳)>이나, 고대문학의 도미(掉尾)를 장식하는 걸작 <자전>이 나왔다.

자전편집

Zitie (1672-75) 저자인 아바쿰 페트로비치는 17세기에 러시아 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이른바 분파(구교도라고도 함)의 지도자이다. 1620년경 지방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각지의 사제보(司祭補) 및 사제직을 거쳐 1652년에는 모스크바의 어떤 대사원 수석사제에까지 오른다. 열렬한 종교적 정열의 소유자로서 젊을 때부터 성속(聖俗) 양계의 모랄 쇄신을 지향하는 ‘순경건파(純敬虔派)’ 그룹에 가담했다. 1652년 옛 벗 니콘이 총주교에 취임, 예배의식이나 전례서(典禮書)의 일부를 그리스풍으로 통일하는 등의 개혁을 강행하려 했을 때, 아바쿰은 동지들과 함께 이에 맹렬히 반대하여, 교회와 차르의 양쪽에서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관헌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나 끝내 초지를 굽히지 않으므로 온 가족이 모스크바에서 추방된다. 처음 시베리아에 유배된 이후부터 짧은 사면기(赦免期)를 포함해서 그 유형(流刑)과 유수(幽囚)의 생활은 30년이나 되었다. 1682년 성자의 명성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정부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유명한 이 <자전>은 1670년대에 최후의 유형지 프스토졸스크에서 집필된 것으로, 8절판 약 100매의 분량으로 되어 있으며 가능한 한 많은 신자들에게 읽히기 위해 당시의 문어(文語)였던 교회 슬라브어(語)를 될 수 있는 한 사용치 않고 구어(口語)를 썼다.

 

 
18세기편집

18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17·18세기 전환기에 표트르가 차르(황제)의 권좌에 앉아서 적극적인 서구화 운동에 나섬으로써 ‘새로운 시대’, 즉 러시아적인 근대가 비롯된다. 급속도로 서구화하는 사회에서 문학의 세속화는 가속되었다. 교회와는 관계가 없는 잡지나 문학작품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꽤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문학과 사회생활의 관계가 긴밀하여져 문학은 사회의 동태에 직접·간접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군사면이나 행정면에서의 서구적인 여러 제도의 도입은 표트르 대제의 치세 중에 거의 완료되었으나 문학세계의 서구화는 이것보다 다소 늦게 진행되었다. 가령 표트르 대제 시대를 반영하는 <바실리 코리오츠키의 이야기> 등은 아직 전대의 세상 이야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표트르 대제와 동시대의 문인으로서는 노브고로드의 대주교인 프로코포비치가 르네상스인(人)다운 박삭다재로서 알려졌을 뿐이다. 깊은 교양의 소유자로서 프랑스 문학의 소개와 자작의 풍자시에 의해 러시아 문학에 신풍(新風)을 주입시킨 것은 칸테미르(1708-1744)였다. 그에 이어서 트레자코프스키, 로모노소프, 수마로코프가 나타나 프랑스 문학의 압도적 영향 밑에 18세기 중엽에는 고전주의가 문학의 모든 장르를 지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세계문학사에 있어 가장 화려한 1장을 형성하는 러시아 근대문학은 18세기 동안에 그 기초가 확립되었고, 또한 시분야에 있어서도 혁신이 일어나 새로운 시법이 성립되었으며 연극, 저널리즘이 이에 뒤따랐다. 산문, 즉 소설부문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은 이 세기말에 등장하는 주정주의(主情主義) 작가들이다. 이성만능(理性萬能), 규범엄수에 대신하여 감정의 우위를 주장하는 주정주의의 한쪽 기수는 카람진이고, 다른 한쪽은 라디시체프에 의해 대표된다.

고전주의 문학편집

古典主義文學 표트르 대제의 후계자(그 대부분은 여제였다)들의 궁정에서 전(前)세기에 프랑스에서 개화한 고전주의가 인기를 끈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고전주의는 그 이름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예술적 표현의 최고의 형태를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에서 구하려 하는 것으로 그 특징은 이성을 존중하고 일정한 규범을 엄격히 지키며 균제를 중시하는 데 있었다. 고전주의는 정비된 국가 지배체제를 이상화하여 절대왕제를 찬미하는 사상과 결합하기 쉬운 것이다. 러시아는 본래 비잔틴과 문화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11세기부터 그리스 고전문명의 한 모서리에 접할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눈에 띄게 영향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서구적인 르네상스 풍조도 경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어 갑자기 프랑스류의 장중한 고전주의 세례를 받자 건축, 조각, 회화 등 문화의 온갖 영역이 그 조류 속에 휩쓸려 들었다. 문학에 있어서의 고전주의는 프로코포비치, 칸테미르를 그 선구자로 하여 트레자코프스키, 로모노소프, 수마로코프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러시아의 고전주의에는 독자적 특징이 있었다. 예를 들어 비극을 쓸 때도 제재(題材)를 반드시 고대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러시아의 역사와 현실에 강렬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규범의식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비극은 때로 희극적 요소를 포함하고 송시(頌詩)는 풍자와 결부되는 등 장르의 혼교(混交)를 낳았다. 현실생활에 대한 생생한 관심은 후에 러시아 문학의 골격을 형성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고전주의를 가장 훌륭히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시(詩)이며 그 가운데서도 어떤 인물이나 사건의 의의를 찬양하는 송시가 고전주의 정신에 가장 적합한 형식이었다.

트레자코프스키편집

Vasilii Kirillovich Tredyakovskii (1703-1769) 러시아 시인·학자. 아스트라한의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네덜란드, 프랑스로 유학하여 철학, 문학, 역사를 수업하고 귀국 후 즉시 <사랑의 섬 여행>이라는 프랑스 통속소설을 러시아어로 번역 출판하였다. 이것이 러시아에서 활자화된 최초의 문학작품일 것이다. 번역으로서는 이 밖에 프랑스 작가 페늘롱의 <텔레마크의 모험> 러시아어 역(譯) <치레마히다>가 있다. 1734년에 쓴 <단치히 함락의 찬양>은 고전주의의 온갖 규칙에 부합하는 러시아 최초의 송시이다. 그는 또한 러시아 시(詩)의 형식을 개혁하는 데 대한 이론화에 착수, <신 간이(新簡易) 러시아 작시법>(1735) 속에서 종래의 음절시(音節詩)를 배격하고 러시아 민요형식에 입각해서 악센트의 규칙적 교체를 도입한 음절 억양 시형(音節抑揚詩形)을 제창했다. 이 시형은 현재까지도 러시아 시의 기본이 되고 있다. 작시법 이론가로서의 공적은 실제적 시작자(詩作者)로서의 범용(凡庸)함을 보완해 주는 감이 있다. 1745년 러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의 라틴어 및 러시아어 웅변술교수가 되었다.

로모노소프편집

Mikhail Vasilievich Lomonosov (1711-1765) 러시아 시인·학자·과학자. 백해(白海)의 어민이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세 때 가출하여 모스크바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 후 선발되어 독일에 파견되었다. 5년간의 유학 끝에 741년 귀국했을 때는 학문의 모든 분야에 당대 일류의 학자가 되어 있었다. ‘질량 보존의 법칙’ 발견, 오로라 현상의 해명 등은 그의 공적으로 꼽히고 있다. 로모노소프의 문명은 유학 중 고국에 보낸 송시 <호친 점령의 찬양>으로 일찍이 확립되었다. 이 시와 함께 쓴 <러시아 작시법에 관한 서간>도, 트레자코프스키의 생각을 전개한 것으로서 문학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로모노소프의 작품에는 36편의 송시, 서정시, 우화시 등이 있는데 그가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장려한 송시였다. 이 가운데서도 <여제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즉위일에 붙여서> <신의 위대함에 관해서> <아침의 명상>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고전주의 시인에 알맞게 고양된 공민정신과 과학에의 절대적 신뢰가 항상 그의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로모노소프는 러시아 문장어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장르에 따라 상이한 문체를 사용해야 한다는 ‘3문체론’을 제창했다.

18세기 연극편집

-世紀演劇 17세기의 1960년대 독일인 극단이 영국연극을 모스크바에서 상연한 이후 귀족 및 상인들 사이에서 연극열이 높아져 그들 자신의 극단을 만드는 일까지 생겨났는데 배우에는 농노 출신들이 많았다. 신학교 학생들의 학교연극도 18세기 전반까지 성행했다. 175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최초의 상설극장인 ‘비희극(非喜劇) 상연용의 러시아 극장’이 창설되어, 수마로코프가 지배인에 임명되었다. 여기에서 처음에는 영웅적, 귀족적인 고전주의 작품이 상연되었으나 후에는 격을 낮춘 서민극이나 희가극, 풍자극이 관중의 갈채를 받았다. 수마로코프, 폰비진을 비롯해서 루킨, 아브레모프, 포포후 등 극작가가 18세기 후반에 활약했다.

수마로코프편집

Aleksandr Petrovich Sumarokov (1718-1777) 러시아 고전주의 극작가·시인. 명문귀족 출신이며 유년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복무했다. 이 기간에 쓴 수편의 비극으로 명성을 떨쳤고 러시아 최초의 국립극장 지배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트레자코프스키의 문학이론에 공명하고 이어서 로모노소프풍의 새로운 시를 썼으나, 무엇보다 자신의 길잡이로 삼은 것은 말레르보, 라신, 몰리에르 등 프랑스 작가들이었다. 그의 작품은 비극, 우화시, 송시, 서정시 등 고전주의 문학의 거의 모든 장르에 이르고 있다.

폰비진편집

Denis Ivanovich Fonvizin (1744-1792) 러시아의 극작가. 모스크바 대학 졸업 후 관리가 되었고 재직 중 서구 여러 나라 극번역에 종사했다. 20세를 전후해서 자신도 우화시나 풍자시를 썼으나 문단에서 그의 지위를 확립시킨 것은 희극 <여단장(旅團長)>(1769)이다. 이 희극은 프랑스풍(風)에 심취한 여단장의 아들을 중심으로 몇 갈래의 사랑의 쟁탈전을 희화화(戱畵化)한 것이다. <여단장> 이래 십수년의 침묵을 거쳐 발표된 희극 <미성년>은 전작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폰비진 극의 핵심은 통렬한 사회풍자에 있었으나 비판의 화살은 얼마 안 가 궁전으로 겨누어져 예카테리나 2세와도 잡지를 통해 서로 헐뜯은 적이 있다.

미성년편집

Nedorosl’ (1782, 초연 1783) 폰비진의 대표작이다. 양친을 잃고 먼 친척인 시골 지주집에 의지하게 된 슬기로운 소녀 소피아를 둘러싸고 무지하고 탐욕스러운 지주들과 정의파의 계몽주의자들이 등장하는 사회풍자극으로 형식상으로는 고전주의에 속한다. 프로스타코바 부인은 소피아를 동생인 스코치닌과 다음에는 아들인 미트로환과 결혼시키려 한다. 소피아의 백부와 애인의 출현으로 그 책략은 실패하고 오히려 농노학대를 이유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 프로스타코바 부인의 철저한 인색과 비도(非道), 어리광쟁이로만 자라 버릇 없는 미트로환, 세 끼의 밥보다 돼지가 더 좋다는 스코치닌의 생태가 교묘히 묘사되고 있어 이들은 인간 타입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서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18세기 저널리즘편집

-世紀- 러시아에서는 18세기 초엽 표트르 대제가 처음으로 정기간행물을 발행했으며 18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잡지 출판이 크게 유행했다. 계몽군주(啓蒙君主)로 자처하고 있던 예카테리나 2세 스스로 <이것 저것>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상임 기고가가 되었다. 폰비진 및 노비코프와 그녀가 벌인 논쟁은 유명하다. 진보적인 잡지의 발행자는 자주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노비코프편집

Nikolai Ivanovich Novikov (1744-1818) 러시아 최초 저널리스트. 처음에는 예카테리나 2세의 신법전위원회(新法典委員會)의 서기로 일하다가, 여제의 피상적인 계몽주의에 환멸을 느껴, 1760년대 이후 잡지간행을 시작했다. <숫벌> <허풍쟁이> 등 10종의 잡지를 창간, 스스로 숱한 양의 기사를 써냈다. 신랄한 사회풍자와 교육계몽적 내용을 지닌 그의 잡지는 러시아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이 때문에 여제에 의해 투옥당했다.

18세기의 시편집

-世紀-詩 트레자코프스키와 로모노소프에 의해 비롯된, 음절수를 갖추고 특정한 억양을 짜맞추는 시형은 러시아 근대시의 출발점이 되었다. 18세기 고전주의시대에 있어서는 송시가 가장 많이 나왔으며 우열의 차이는 있을 망정 시를 쓰지 않은 작가는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18세기로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서는 데르자빈을 비롯해서 카프니스트, 마이코프, 헤라스코프 등이 뛰어난 송시와 서사시를 발표했다. 18세기 후반에는 가요집의 간행도 성행했다. 민요에 대한 관심도 나타나, 출리코프의 <가요집> 4권(1770-74), 리보프의 <악보를 곁들인 러시아 민요집>(1790) 등이 출판되었다.

데르자빈편집

Gavrila Romanovich Derzhavin (1743-1816) 러시아 시인. 가난한 귀족 출신, 사병생활 끝에 장교가 되어 군대복무를 오래 하다가 나중에는 문관이 되었다. 40세가 다 되어 <펠리차>라는 예카테리나 여제를 찬양한 한편의 시를 그녀에게 바쳤고 이 시로 일약 문명을 떨쳐 관직도 높아졌다. 데르자빈의 시는 고전주의적 장중성은 있으나 답답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점에 특징이 있고, 문체는 우미하면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았으며 화려하면서 동시에 리얼리티를 갖추고 있었다. 18, 19 양 세기에 걸쳐 시단에 군림하면서 국가의 영광, 철학적 사색, 생활의 기쁨을 노래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정주의 문학편집

主情主義文學 이성을 중시, 숭고하고 영웅적인 것을 동경하는 고전주의에 반해서 감정에 큰 의의를 부여하며, 개인적 경향을 지닌 주정주의가 러시아 문학에서 지배적인 조류가 된 것은 18세기의 90년대이다. 서정시나 서민극에는 이미 60년대경부터 주정주의적 요소가 나타나 있었으나 1790년대가 되어 겨우 산문의 장르에서 카람진 및 라디시체프의 작품이 발표되었다. 사상적으로 자유주의와 결부돼 있던 주정주의는 카람진, 드미트리예프, 오제로프에 있어서는 목가적, 공상적인 형식을 취했고, 라디시체프에 있어서는 사회적, 비판적 성격을 띠었다. 러시아의 주정주의적 문학의 모범이 된 것은 영국의 리처든슨, 스턴, 그리고 프랑스의 루소 등이다.

카람진편집

Nikolai Mikhailovich Karamzin (1766-1826) 러시아 작가·역사가. 지주 귀족 출신. 처음 노비코프의 잡지에 기고하고 있었으나 80년대 말부터 서구를 여행, 귀국 후 <러시아인 여행자의 편지>(1791-92)를 자신이 창간한 잡지에 게재했다. 또한 소설 <가련한 리자>(1792)를 발표 러시아 주정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소설은 농사꾼 딸의 귀족 출신 청년에 대한 비련을 청신한 문체로 묘사한 러시아 최초의 근대소설로 농사꾼 여자일지라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일반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문장어(文章語)를 새로 개발시킨 점에서도 커다란 공적을 남겼고 만년에는 대작 <러시아 제국사(帝國史)>의 집필에 몰두했다.

라디시체프편집

Aleksandr Nikolaevich Radishchev (1749-1802) 러시아 소설가·사상가. 귀족 출신. 독일에 유학 중 루소, 헤르베티우스 등 혁명적 사상가의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송시 및 우화시를 쓰는 한편, 계몽주의자의 저작을 번역했다. 1790년 손수 인쇄소를 차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행>을 간행했다. 이 책을 읽은 예카테리나 2세는 저자를 ‘푸가초프(당시의 농민혁명의 수령)를 능가하는 모반인’으로 단정, 즉각 체포해서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했다. 여제가 죽은 후 파벨 1세에 의해 유형이 해제되고 그 후 법률개정을 위촉받았으나 얼마 안 가 자살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행편집

puteshestvie iz Sankt Peterburg v Moskva (1790) 라디시체프 작. 스턴의『풍류기행>의 형식을 본따 여행자가 여러 지방에서 보고 들은 실제적인 사회 부정을 묘사함으로써 러시아 사회의 병폐를 적발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1주일 가운데 6일을 지주의 밭에서 노동을 강요당하는 농사꾼, 무법의 지주를 정당방위를 위해 때려 죽인 후 종신형을 선고받는 촌민 등 구체적 사례를 평이한 문체로 서술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풍부하다. 저자 라디시체프가 사회악의 근원을 ‘백 개의 턱을 가지고 포효하는 괴물’인 전제정치와 비인도적 농노제에 있다고 보는 사실이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의 체포와 함께 압수된 이 책은 여제의 명령으로 모조리 소각되었으며 그 후 1세기 이상 출판금지되었다.

 

 
19세기편집

19세기 문학편집

-世紀文學 러시아 19세기 문학은 카람진과 함께 시작된다. 그는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의 규범을 타파하고 문학을 개인감정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 평가하고 부드러운 문체를 써서 낭만주의에의 길을 열었다. 1810년대에서 1820년대 말까지는 낭만주의가 번성한다. 초기의 대표자는 주코프스키(1783-1852)이다. 그가 폐쇄된 개인의 내면을 파고든 데 반해, 나폴레옹 전쟁으로 자유의 공기를 맛본 청년 귀족들 사이에서는 전제주의에 대한 반항을 통해 자아를 해방시키려는 시민적 낭만주의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12월 당원)가 되나, 푸슈킨은 독자의 입장에서 국민문학의 창조를 지향하게 된다. 30년대에 들어서자 산문이 발달하였고 실작면(實作面)에서는 푸슈킨에 이어서 고골리, 레르몬토프, 이론면에서는 벨린스키가 나오기에 이르러, 리얼리즘에 기초를 둔 국민문학이 탄생한다. 이 흐름은 1840년대에 들어와 ‘자연파’로서 확정되어,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곤차로프 등 많은 작가가 배출됨으로써 리얼리즘은 새로운 전개를 보이기 시작한다. 1850년대 말부터 60년대에 걸쳐서는 농노제의 쇠퇴와 함께 체르느이셰프스키, 도브롤류보프를 선두로 하는 잡계급(雜階級) 인텔리겐차가 등장하여 비판적 리얼리즘의 입장을 강력히 추진한다. 혁명운동의 격화와 함께 1870년대에는 여기에서 인민파의 작가가 탄생한다. 한편 1850년대 초에 등장한 톨스토이를 포함한 기성의 대가들은 ‘자연파’의 한계를 뛰어넘어 러시아 사회·러시아 민족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또한 현대적으로 깊은 통찰에 바탕을 두고 묘사함으로써 러시아 문학은 근대문학의 발걸음을 내디딘 지 반세기 남짓만에 세계문학이 된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말에 이르러, 체호프에 의해 푸슈킨에서 비롯된 러시아 산문은 완벽의 경지로 다듬어진 것이다.

국민문학의 탄생편집

國民文學-誕生 18세기 말이 되자 고전주의도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여 러시아 문학계도 루소의 <신 엘로이즈>, 스턴의 <풍류기행>,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프레 로만티시즘의 물결에 휩쓸렸고 또 그 영향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산발적이었다. 러시아 문학을 하나의 새로운 물결을 향해 출범시킨 것은 카람진의 감정주의이다. 그는 문학을 의고전주의의 합리주의적 딱딱함에서 해방시키고 문학의 본질은 개인의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에 있다고 표방했고 따라서 이것에 적합한 부드럽고 평이한 문체를 창시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새로운 문체를 맹렬히 공격, 전통적인 평속(平俗)·중위(中位)·고위(高位)의 문체 등 세 종류를 엄밀히 구별해서 사용하도록 주장했기 때문에 여기에 문어논쟁이 벌어졌으나 결국은 카람진파의 승리로 끝났다. 카람진의 문학운동은 얼마 안 가 낭만주의 흐름에 흡수되어 1810년 이후 약 20년간은 낭만주의가 주류가 되었다. 초기의 낭만주의의 대표자는 주코프스키(1783-1852)인데, 그의 시는 외부에 개방되지 않는 폐쇄된 내면의 자아를 노래하여 말하자면 그 자체로써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1812년의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의 자유로운 공기를 흡수한 청년 귀족들 사이에 전제농노제의 중압에 자신을 대치시킴으로써 자아를 해방시키려는 시민적 낭만주의가 대두했다. 그 대표적 인물은 르일레예프(1795-1826)로서 그는 잡지 <북극성>을 발간하고 스스로 시작(<두마 시집>)에 나섬으로써 국민문학을 지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불원 급속도로 정치적 해방에 의해 자아를 해방시키려고 데카브리스트의 난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런 인물들에 대하여 공명하면서도 이 자아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문학 속에서 추구하려 했던 것이 푸슈킨이다. 그의 입장은 궁극적으로 문학을 국민적 시야에서 파악함으로써 자아를 국민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려는 점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는 먼저 <루슬란과 류드밀라>에서 설화의 세계와 아름다운 러시아어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카프카스의 포로>와 <집시>에서 대지와 자아의 관계를 다루었으며 <보리스 고두노프>와 서사시 <폴타바>에서는 역사적 과거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민족의 성격을 밝히는 한편 <예프게니오네긴>에 의해 당시 러시아 사회와 러시아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국민문학을 쌓아올렸다. 그러나 국민문학의 참된 확립을 위해서는 1830년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정부가 강요하고 있던 관제(官製) 국민성에 대처할 이론이 필요했고 그 이론을 증명할 문학이 필요했다. 푸슈킨과 함께 이를 성취시킨 것은 고골리와 헬린스키이다. 벨린스키는 고골리에 관한 평론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국민적 문학은 항상 세계적 문학이 된다. 국민적인 문학이 아닌 세계적 문학은 없다 국민은 현실에 접근하고 현실을 이해함으로써 참된 국민이 된다. 그래서 참으로 국민적인 작가는 자국의 근본적인 경향을 반영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국민문학과 사실주의 문학을 같은 시점에 서서 설명하려고 하는 벨린스키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크릴로프편집

Ivan Andreevich Krylov (1769-1844) 러시아 우화시 작가. 모스크바 출생. 어렸을 때 육군사관이던 부친을 잃고 역경속에서 자랐다. 1783년(14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평생을 여기서 보냈다. 1789년(20세)부터 풍자 잡지의 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수편의 희극 및 희가극을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게다가 농노제에 대한 풍자를 이유로 잡지는 정간처분을 당했다. 그 후 수년간 침묵을 지키다가 1806년부터 우화시에 손을 대서, 1809년(40세)에 최초의 <우화> 시집을 발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부터 명성이 높아져, 우화시 창조를 천직으로 하여 평생을 통해 205편을 써서 우화시를 민중생활에 도입했다.

우화편집

(1809-44) 시(詩)형식에 의한 크릴로프 우화. 전편은 9권으로 되어 있고 205편이 있다. 이 가운데 45편은 이솝(기원전 6세기경의 사람), 라 퐁텐 등의 개작인데도 자작의 것과 다름없을 만큼 러시아화되어 있다. 작자의 생전에 약 7만 5천 부가 팔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취재범위가 넓으며 동물과 식물 등 온갖 것이 등장하여 인간의 우매함, 아첨, 허영, 사회관습, 전제정치 체제 등을 풍자한다. 그리고 이 풍자는 모랄리스트로서의 작자의 성격과 건전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의 우화는 민중의 말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민중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점에 의의가 있다.

그리보예도프편집

Aleksandr Sergeevich Griboedov (1795-1829) 러시아 극작가. 모스크바 태생. 가계는 유서 깊은 귀족으로 부친은 근위사관이었다. 신동(神童)으로 불리었으며 1807년(12세)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했다. 1810년 언어학·법학 양 과를 졸업,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완전히 마스터했고 뒤이어 수학과에서 수업하는 한편, 음악가로서도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1812년, 지원병으로 조국전쟁(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했고, 1816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으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프랑스 극의 번안 <젊은이 부부>(1810), <대학생>(1817)을 썼으나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학식과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아, 당대 으뜸가는 교양인으로서 꼽혔다. 이 무렵 후에 테카브리스트가 되는 르일레예프나 큐헤리베케르 및 푸슈킨 등과 알게 되어, 농노제에 바탕을 둔 전제국가 체제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1818년(23세), 결투의 입회인이 된 것이 화근이 되어 페르시아 공사관의 서기로 좌천되었고, 그 후 코카서스의 각지를 전전했다. 이 동안에 그리보예도프는 그의 이름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시형식의 희곡 <지혜의 슬픔>집필에 착수, 1824년에 완성시켰다. 1825년 12월, 전제 타도를 부르짖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들의 일당으로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재차 외교관생활에 복귀, 827년부터는 페르시아 공사로서 러시아의 중근동 외교에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1829년(34) 테헤란에서 토인(土人)의 폭동으로 참살당했다.

지혜의 슬픔편집

Gore ot uma (1824) 그리보예도프의 시형식으로 된 희극. 완성 후에 작자 자신이 모스크바의 문학 서클에서 낭독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귀족사회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작자 사후의 1833년까지 출판이 금지되었다. 초연은 1829년. 외국생활을 마치고 러시아에 귀국한 청년귀족 차츠키가 목격한 귀족사회는 출세주의자, 욕심꾸러기, 우쭐대는 자, 경박한 여성 등의 천하였다. 그는 특유의 정의감, 지식 및 말재주로 사람들을 비판하나 도리어 미치광이 취급을 당해 상심한 가운데 또 다시 외국으로 떠난다. 뛰어난 지성과 변설(辯舌)을 가지고도 그것만에 의한 비판은 현실적으로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 희극의 제명이 지니는 의미이다. 차츠키는 19세기 러시아 소설에 허다하게 등장하는 무력한 지식인인 ‘사냥꾼’의 한 사람이다. 이 희극은 고전극의 구성을 지니나, 놀랄 만큼 사실적이며 독특한 시구와 날카로운 풍자 및 기지에 넘쳐 현재도 자주 상연되고 있다.

푸슈킨편집

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 러시아 시인. 모스크바 태생. 가계는 명문의 귀족으로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에티오피아의 소군주 한니발(흑인)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유모 아리나가 들려준 러시아의 옛날 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시인으로 성공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외국어 가운데 프랑스어에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811년(12세), 차루스코에 세로에 있던 학습원에 들어가서 자유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1816년(17세)의 공개 진급시험에서는 자작시 <차루스코에 세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이곳에 나와 있던 노(老)시인 데르자빈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1817년(18세), 학습원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간다. 그 후 거의 3년간은 고등 룸펜이 되어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명석한 판단력은 잃지 않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1820년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설화를 주제로 하면서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서 러시아 시에 새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추방생활 중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카프카스의 포로>(1822), <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며, 이 동안에 르일레예프(1795-1826) 등 데카브리스트와 친해졌다. 1824년 오데사 총독과 충돌, 프스코프 현에 있는 모친 영지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바이런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남방체제 중에 제1장을 발표한 바 있는 시형식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의 후속(後續) 장이나 <보리스 고두노프>에는 리얼리즘에의 이행이 엿보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시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하에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서정시나 연애생활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꾀하다가, 1830년부터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들어간다. 그는 우선 <오네긴>을 완성하고 이어 <인색한 기사>(1833) 등 시작품을 내는 한편, 신문에도 손을 대 단편집 <벨킨 이야기>(1830), <스페이드 여왕>(1834), 소설 <대위의 딸> 등 허다한 걸작을 썼다. 이러는 동안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아와 결혼했으나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아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슈킨은 부득이 결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그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예프게니 오네긴편집

Evgeny Onegin (1822-30) 푸슈킨의 시형식 장편소설. 연작물로서 단속적(斷續的)으로 출판되었고 책이 나올 때마다 대단한 인기를 거두었다. 오네긴은 이성과 재질이 뛰어난 청년 귀족이나 화려한 사교계에 드나들고 있던 중, 쾌락과 명성에 싫증을 느끼고 내심의 공허함을 맛보게 된다. 백부의 유산을 차지하게 된 것을 계기로 시골에 파묻히는데 이웃동네 지주의 딸인 타치야나는 오네긴을 한번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연애편지를 쓴다. 그러나 화려한 연애의 맛을 실컷 맛본 그는 시골처녀의 순진한 사랑을 차갑게 거절한다. 그러면서도 친구인 이상주의자 렌스키가 타치야나의 동생 올리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올리가와 농락 정도의 연애 관계를 맺는다. 이에 격분한 렌스키와 결투 끝에 그를 죽이고 마을을 떠난다. 수년 후 모스크바에서 오네긴은 이제 공작 부인으로서 사교계의 꽃이 되어 있는 타치야나와 재회한다. 그는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혀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먼저 사랑을 고백하나 정숙한 타치야나는 그의 사랑을 물리친다. 지적이며 박식하나 부박한 오네긴은 ‘사냥꾼’의 전형이며 타치야나는 순박한 감정과 도덕적 결단력, 그리고 인생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갖는데 이러한 대비는 그 후의 러시아 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러시아 최초의 사실소설(寫實小說)인 동시에 낭비적인 생활의 무의미함, 러시아에 대한 서구의 영향, 도덕적 행위의 문제 등 당시의 러시아 사회의 근본 문제를 제기했다.

대위의 딸편집

Kapitanskaya Dochka (1836) 푸슈킨 장편소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유명한 푸가초프의 반란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청렴결백하고 민중을 이해하는 지성과 따뜻한 감정을 지닌 청년 귀족 그리뇨프와 반란의 수령 푸가초프와의 묘한 우정을 종으로, 미사와의 사랑을 횡으로 하여 역사·가정·연애 등이 혼연일체가 된 소설이다. 푸가초프는 단순한 악당이나 이상화된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적나라한 인간으로서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푸슈킨은 이 소설에 앞서 역사연구 <푸가초프사(史)>를 썼는데, 이는 러시아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민족의 숨은 심리를 파악하여 그 경향을 동시대의 나아갈 길에 결부시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얼키고 설킨 줄거리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장면 등에서 스콧의 영향이 엿보이나 푸슈킨의 특징인 격조 높은 간결한 문체는 특히 탁월하여 그 후의 러시아 산문의 모범이 되고 있다.

사냥꾼편집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어떤 공통된 성격을 지닌 청년 귀족 등에게 붙여진 명칭이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 특성을 말하면 그들은 보통수준 이상의 뛰어난 지성을 지니면서도 일찍부터 인생에 권태를 느껴 재능을 사회를 위해 유효하게 활용시킬 행동력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개성이 지닌 결함에서 오는 것이긴 하나 주로 농노제 러시아의 병폐에서 생겨난 성격이다. 이러한 타입을 사냥꾼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리게 된 것은 투르게네프의 소설 <사냥꾼의 일기>(1852)에서 비롯되며, 그 최초의 인물은 오네긴(푸슈킨의 <예프게니 오네긴>)이다. 그는 사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나 자신이 그 사회로부터 소외된 존재라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이어서 나타나는 것은 차츠키(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로서, 그는 이상주의자의 정의한이긴 하나 결국 사회라는 벽 앞에서 얌전하게 물러서고 만다. 이 점에서 페초린(레르몬토프의 <현대의 영웅>)은 ‘사냥꾼’ 가운데서는 드물게 행동력을 지니긴 했으나 그것은 자신과 대립하는 사회에 대한 복수심이 불러일으킨 악마적 힘으로 사회적으로 유효한 것이 되지 못한다. 투르게네프가 그리는 사냥꾼의 철저한 모습은 일체의 행동을 상실한 게으름쟁이의 화신 오블로모프(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이다.

레르몬토프편집

Mikhail I’ur’evich Lermontov (1814-1841) 러시아 시인·소설가. 러시아 낭만주의의 대표자.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모친이 그의 3세 때 죽었기 때문에 펜자현(縣)의 귀족인 외할머니 밑에서 귀엽게 자랐다. 다만 외할머니와 부친 사이가 좋지 않아 가정의 행복은 맛보지 못했고 이로 인한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성격이나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 그는 지나치게 조숙해서 1829년(15세)에 이미 시, 희곡, 소설을 썼고 회화, 음악, 수학에도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1830년(16세)에 모스크바 대학 부속 귀족기숙학교를 마치고 모스크바 대학 윤리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했고, 대신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근위표기병사관(近衛驃騎兵士官)이 되었다(1834). 이 무렵까지 그는 이미 평생의 시작 가운데서 4분의 3을 썼는데 바이런의 영향이 크게 눈에 띈다. 1835년 희곡 <가면무도회>(1842년 간행)을 썼으나 여전히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일약 유명하게 한 것은 1837년(23세), 푸슈킨이 결투로 살해당했을 때 쓴 시 <시인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푸슈킨 살해의 진범은 전제주의를 옹호하는 귀족이라고 날카롭게 비난한 이 시는 니콜라이 2세의 분노를 사서 카프카스로 좌천당한다. 조모나 시인 주코프스키(1783-1852)의 끈덕진 주선으로 10개월 후 러시아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동안에 대 나폴레옹 전쟁을 노래한 시 <보로지노>(1838), 이반 대제 시대를 다룬 역사시(歷史詩) <상인 카라시니코프의 노래>(1838)에서 애국심을 읊었고, 낭만적 서사시 <므츠이리>(1840)에서 자유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노래하고 있다. 1840년 연애의 갈등에서 벌어진 결투가 원인이 되어 내전이 한창인 카프카스로 또다시 추방된다. 이 추방 중에 전년부터 그가 쓰고 있던 유일한 소설 <현대의 영웅>, 15세 이래 계속 퇴고해 오던 서사시 <악마>(1841)가 나왔는데 전자는 러시아 최초의 심리소설이기도 하다. 그의 일생은 비운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1841년 카프카스의 파치고르스크에서 사소한 일로 친구 마르트이노프로부터 결투를 도전받아 그의 손에 죽었다. 그의 작품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나 총체적으로 볼 때 자유에의 동경과 찬미 악마적인 반역의 힘, 행동에의 갈망 등에 넘쳐 있고 사회현상이나 인간심리가 주관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러시아 낭만주의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이다.

현대의 영웅편집

Geroi Nashego Vremeni (1839-1840) 레르몬토프의 자전적 심리소설. 한 사람의 주인공 페초린의 행동을 중심으로 해서 3인칭 또는 1인칭으로 엮어진 다섯 가지의 일화를 하나의 소설형식에 묶고 있다. 이것은 제1화 <베라>, 제2화 <막심 막시므이치>, 제3화 <페초린의 수기>―첫째 <타마니>, 둘째 <공작의 딸 메리>, 셋째 <운명론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하나가 훌륭한 단편을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의 전부는 이기주의자이자 고집 센 청년 사관 페초린의 성격에 있다. 그는 20세에 불과하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낄 뿐, 기쁨을 느끼는 일이 없다. 그의 권태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행동뿐이다. 이상이나 인생의 목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그저 따분함을 벗어나기 위해 한가닥의 들뜬 기분에서 여자의 사랑이나 남자의 우정을 희생시켰고, 속물인 친구를 결투에서 태연히 죽인다. 그러면서도 총명하고 진지한 감정도 지니며, 용감하고 의지가 굳은 복잡한 인물이다. 그의 비극은 자신의 비정상적 정력과 풍부한 재능을 쏟을 목적을 못 지닌 채 이를 부질없이 낭비하는 데에 있다. 페초린은 확실히 전제 러시아 니콜라이 시대의 산물이자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주요 인물상인 ‘사냥꾼’의 하나이다. 그러나 선악을 초월한 ‘무정부적으로 자유분방한’ 그 정신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나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이반으로 통하는 새로운 타입이기도 하다.

콜초프편집

Aleksei Vasil’eevich Kol’tsov (1809-1842) 러시아 시인. 보로네지에서 출생. 가업인 가축상을 이으면서 독학으로 시작에 정진했다. 초기작품은 푸슈킨 등의 모방이 많고 내용도 신비적, 종교적이었으나 그 후 점차로 민요수법에 바탕을 두고, 농민생활이나 농촌의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를 쓰게 되었다. 그는 민중의 감정을 적절히 노래하여 러시아 최초의 민중시인이라 불린다.

튜체프편집

F der Ivanovich Tyutchev (1803-1873) 러시아의 서정시인. 모스크바 태생. 귀족 출신으로서 평생을 외교관 생활로 보냈다. 처음에 푸슈킨 그룹의 한 사람으로 출발했으나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후에 네크라소프의 소개로 각광을 받았다. 자연을 테마로 한 철학시가 많고 범신론·이원론적이다. 현실세계와 이를 지배하는 카오스의 바다 대립을 낮과 밤, 빛과 어둠, 선과 악, 사랑과 죽음 등의 상징으로 나타냈는데 후의 상징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30년대 문학편집

-年代文學 1830년대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산문의 융성에 있다. 1820년대에 있어서는 산문작품에서 이렇다 할 작품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나 1820년의 폴란드 반란을 계기로 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역사소설이 유행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또한 산문의 발달을 촉구하게 되었다. 보수적 입장에서의 멜로드라마틱한 역사소설(불가린이나 베스투제프 마를린스키 등)도 성행했으나 푸슈킨은 시형식의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에서 보인 리얼리스틱한 수법을 산문에서도 전개하기 시작, <표트르 대제의 흑노(黑奴)>(1827), 단편집 <킨 이야기>(1830), <두부로프스키>(1833) 등을 거쳐 <대위의 딸>에 이른다. 고골리도 또한 단편집 <디칸카 근향 야화(近鄕夜話)>(1831-1832)로 러시아 문학에 신풍을 일으키면서 스스로의 문학적인 걸음을 내디딘다. 그는 이어서 <미르고로도>(1835), <네프스키 거리>(1835), <광인 일기>(1835), <검찰관> 등을 차례로 써서 리얼리즘 확립의 기수가 된다. 1830년대 말에는 레르몬토프의 <현대의 영웅>도 나와 리얼리스틱한 산문의 기초가 수립된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벨린스키의 활동이다. 그는 처녀논문 <문학적 공상>(1834)과 다음 작품 <고골리론>(1835)에 의해 이미 국민문학과 리얼리즘의 결합에 이론적 근거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고골리편집

Nikolai Vasil’ eevich Gogol’1809-1852) 러시아 소설가·극작가. 우크라이나의 소로친츠이에서 소귀족의 집에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소인극(素人劇)의 각본을 쓰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흥미를 느껴 네진 중학교시절에는 손으로 쓴 회람잡지를 내기도 했고 자작 자연(自作自演)의 연극에도 손댔다. 그러나 장래의 희망은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1828년(19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으나 직업도 없었고, 관리가 되려했으나 실패했다. 재학시절부터 쓰고 있었던 서사시 <한츠 큐헬리가르텐>을 자비 출판했으나 낭만주의의 아류(亞流)에 속하는 미숙한 작품으로서 대단한 혹평을 받고 서점에서 회수하여 전부 불살라버렸다. 그 후 하급관리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2,3 개 신문에 투고도 하고 미발표의 단편을 쓰기도 했다. 1830년 그의 작품계열의 하나를 이루는 우크라이나 농촌을 무대로 한 <이반 쿠팔라의 전야(前夜)>로 대호평을 얻고, 이듬해와 또 그 다음해에 같은 종류의 단편을 수록한 <디칸카 근향 야화> 1,2 권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서의 지위를 굳혔다. 푸슈킨, 주코프스키(1783-1852)와 지면을 얻은 후 전자로부터는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고 이어서 역시 우크라이나를 제재로 한 <미르고로드>(1835)를 발표했다. 이들 작품은 전체적으로는 쾌할과 해학이 뒤섞인 옛날 이야기식의 세계이긴 하나 환상적, 몽환적 세계와 내부의 리얼한 묘사가 일체를 이루어, 그의 분방한 상상력과 서정적 재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어 183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물(物)>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작품계열에 속하는 <네프스키 거리>, <광인일기>, <코> 등에서 추악한 현실세계에 대한 증오와 의의가 완전히 꺽인 ‘하찮은 인간’에 대한 동정을 나타내어 리얼리스틱한 작풍을 강화시키고 있다. 1836년 희곡 <검찰관>을 써서 상연했으나 관료사회를 철저히 폭로한 그 내용이 불러일으킨 비난에 못 견뎌 외국여행을 떠난다. 이후 십여 년 간을 주로 로마를 비롯한 외국에서 보내면서 그동안에 1835년부터 착수했던 대작 <죽은 영혼> 제1부의 집필에 몰두하는 한편, <검찰관>의 비판에 대한 반론의 희곡 <연극의 폐막>(1841), 소설 <외투> <로마>(1841) 등을 완성시킨다. 그러나 일체의 악(惡)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죽은 영혼> 제1부를 집필 중 악을 폭로하는 것에 대한 회의가 생겨 점차적으로 종교적, 신비적 정신상태에 빠져들어갔다. 그 결과 선량한 인간을 묘사할 목적으로 <죽은 영혼> 제2부의 집필에 착수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끝났다. 마지막에는 반착란(半錯亂)의 정신상태에서 단식에 들어가 그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데 세부를 데포르메(변형)하여 이를 쌓아올려 감으로써 특이한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는 수법은 독특한 것으로 다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외투편집

Shineli (1841) 고골리 중편소설. 고골리 자신이 말하는 이른바 “눈물을 통해서 웃음”의 정상을 가는 작품이다. 동료들로부터 바보취급을 받는 가난한 하급관리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애써서 맞춘 외투를 강도에게 빼앗겨 이를 되찾으려고 무진 애를 쓰나, 경찰서장이나 찾아간 장관의 냉담한 반응으로 허사가 된 채 실의 가운데 죽고만다는 이 줄거리는 후의 러시아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 작품이 나온 후 추악한 현실세계와 이에 대비되는 이상주의적 인간,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인간의 필연적 패배라는 테마는 많은 작가에 의해 다루어지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들은 모두 고골리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죽은 영혼편집

Mertvye dushi (1842) 고골리 장편소설. 이 작품도 <검찰관>과 마찬가지로 푸슈킨으로부터 테마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집필 착수는 1835년으로 고골리 일생의 대작이다. 속편도 썼으나 미완성인 채 작자 자신이 불살라 버려 현재는 제1부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죽은 영혼>이라고 하면 제1부를 말한다. 이 소설은 사기꾼 치치코프가 한밑천 벌려고 어떤 시골거리에 나타나 인근의 지주한테서 죽은 농노를 사 모으며 다니는 것이 줄거리이다. 이 작품의 진가는 줄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치치코프가 방문하는 지주나 시골관리 하나하나의 묘사에 있다. 백일몽을 꾸고 있는 허수아비 같은 마니로프, 우둔하면서도 욕심꾸러기 여지주 코로보치카, 굉장한 수전노 프류시킨, 대식한인 소바케비치, 허풍쟁이 노즈도료프 등이 바로 그들이다. 추악한 얼굴만을 모은 화랑(畵廊)-이것이 이 소설의 전부이나 작가 특유의 디테일한 묘사에 의해 각 인물이 훌륭히 그려져 있어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에 있어 기념할 만한 작품이 되었다.

검찰관편집

Revizor (1836) 고골리 희극으로 푸슈킨으로부터 테마를 얻어 만든 4막극. 머리가 다소 모자라는 남자 프레스타코프가 어느 시골 거리에서 검찰관으로 오인되어 수회나 횡령 등으로 뒤가 켕기는 시장 및 관리들로부터 돈을 받아 먹고 뺑소니 친다는 것이 줄거리인데 작극(作劇)의 기교로 보나 이념의 깊이로 보나 고골리 극작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며 러시아 리얼리즘극의 대표적 고전이다. 고골리는 “모든 추악한 것을 한데 묶어 한꺼번에 조소해 주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의도는 완전히 성공했다고 하겠다.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데 거울을 나무라면 무엇하나”라는 제자(題字)에 담긴 의미는 지금도 살아 있다.

벨린스키편집

Vissarion Grigor’eevich Belinsky (1811-1848) 러시아 문예비평가. 현재는 핀란드령(領)인 스베아보르크시(市)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군의(軍醫). 모스크바 대학 재학 중인 1831년에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희곡 <카리닌>을 써서 퇴교당했다. 1834년 처녀논문 <문학적 공상>으로 문단에 등장, 이어 이듬해 <고골리의 중편소설과 러시아의 중편소설에 대하여>를 써서 국민문학으로서의 고골리 작품의 새로운 의미를 논했다. 당초 벨린스키는 셸링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이상주의의 입장을 취했으나 그후 피히테, 헤겔을 거쳐 40년대 초엽에 게르첸을 지나서 포이어바흐의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접하고서는 사회주의자로 전환한다. 이와 함께 그의 문예비평은 문학이란 현실을 전형적으로 바르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리얼리즘의 입장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부패한 러시아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푸슈킨론(論)>(1843-46), <고골리에의 편지>(1847), 1840년 이후 매년 쓴 문학개관, 특히 죽기 직전에 쓴 <1847년의 문학 개관>(1848)은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빈궁한 가운데 젊어서 폐결핵으로 죽었으나 그 후의 러시아 문학에 이론적 지주를 부여했다고 하겠다.

게르첸편집

Aleksandr Ivanovich Gertsen (1812-1870) 러시아 유물론적 사상가·소설가. 모스크바 출생이며 대(大)지주의 아들. 모스크바 대학 재학 중에 평생의 벗 오가료프와 함께 혁명적 서클을 조직했고 졸업 후 철학 박사학위를 땄으나 위험한 자유사상가로 지목되어 두 번이나 유형당했다. 평론 <과학에 있어서의 딜레탕티즘>(1843), 소설 <누구의 죄인가>(1845-1847), <닥터 크루포프>(1847) 등을 발표한 후에 1847년 가족을 이끌고 유럽으로 망명했다. 1852년부터는 런던에서, 이어서 제네바, 파리에서 살았고 연감 <북극성>, 신문 <종>을 오가료프(1813-1877)와 공동으로 출판하여 러시아 망명 혁명가의 정치·사회·평론 기관지로 삼는 동시에 러시아 국내에도 비밀리에 발송했다.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사상의 발달>(1851), <러시아 인민과 사회주의>(1855), 회상기 <과거와 사색> <러시아 문학의 새 양상>(1864) 등을 써서 유럽 지식인에게 러시아 혁명의 의의를 알렸다. 그는 러시아의 서구파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나 1848년의 프랑스 2월혁명에 실망한 나머지 농촌 공동체와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러시아 사회주의의 독특한 길을 확신하게 되어 인민주의자들의 이론적 전제를 만들어 냈다.

과거와 사색편집

Byloei dumy (1852-1868) 게르첸 회상기. 작자가 태어난 해(1812)부터 죽기 2년 전(1868)까지의 반세기에 걸친 8부 64장으로 된 대저작이다. 이 회상기 집필의 직접적 동기는 자기 아내와 관계가 있었던 독일 시인 헤르베크(1817-1875)를 사회적으로 지탄하는 데 있었으나 실제는 그러한 범위를 훨씬 넘어, 혁명가 게르첸의 일생에 관한 회상록이 되었다. 1820년대 모스크바 대학 학창생활, 모스크바의 지하생활 및 유형지생활, 1830-1840년대 러시아의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의 프로필, 나아가서는 1848년의 2월혁명에서 파리 코뮌에 이르는 유럽의 혁명운동 등이 그의 작가적 재능에 의해 생생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가 말한 바 “우연히도 역사가 지나는 길에 들어선 인간의 내부에 비친 역사의 반영”으로서 한 권의 서사시가 되고 있다.

리얼리즘의 확립편집

-確立 러시아의 리얼리즘은 푸슈킨과 고골리에 의하여 기초가 이루어졌다. 그 후는 다만 그들이 깔아 놓은 길을 똑바로 돌진하는 것으로 족했다. 주제에의 접근이나 문체의 자연스러움, 방법으로서의 관찰, 생활적 소재의 비판적 해부 등이 그 기본적 입장이었다. 고골리에 이어 1840년대에 들어서자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1846), 그리고로비치의 <마을>(1846), <안톤 고레뮈카>(1847),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일기>(최초의 <호리와 칼리느이치>가 1848), 오스트로프스키의 초기 희곡, 곤차로프의 <평범한 이야기>(1847) 등이 잇달아 나와 여기에 ‘자연파’라고 하는 러시아 특유의 리얼리즘의 흐름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1840년대에 있어서도 고골리의 영향이 매우 큰 바 있어, 제각기의 작가가 자신의 개성을 명확히 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1850, 1860년대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로비치편집

Dmitry Vasil’eevich Grigorovich (1822-1900) 러시아 소설가. 심비르스크 태생. 모스크바의 귀족기숙학교를 나온 후 10년쯤 지나 소설 <마을>(1846)과 <안톤 고레뮈카>(1847)로 ‘자연파’의 유력한 작가가 되었다. 이들 작품은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애정으로써 묘사한 것으로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일기>(1852)에 앞서, 농민을 주인공으로 한 점에 의의가 있다.

피셈스키편집

Aleksei Feofilaktovich Pisemsky (1821-1881) 러시아 소설가·희곡가. 고스트로마에서 출생. 가난한 귀족으로 후에 출생지에서 관리를 지냈다. 처녀작 <대귀족령(大貴族領)>(1845)으로 리얼리즘 작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했고 <1천 명의 농노(農奴)>(1858), 희곡 <비운>(1859), <포효하는 바다> 등으로 일류의 지위를 굳혔다. 그의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 이전으로서는 드물게 그 어느 것이나 교묘한 줄거리로서 박력이 넘치나 페시미스틱한 경향이 농후하다.

아크사코프편집

Sergeri Ti-mofeevich Aksakov (1791-1859) 러시아 소설가. 우파에서 태어난 지주 출신. 사상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고골리의 문학을 몹시 사랑했다. 만년의 대작 <가족의 기록>(1856), <손자 바그로프의 유년시대>(1858)에서 동부 러시아의 시골생활을 비판적·윤리적인 측면을 일체 배제한 가운데 정확히 묘사함으로써 ‘시각적 사실주의자’로 불린다.

투르게네프편집

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러시아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소설가. 오룔시(市)에서 출생. 부유한 지주 귀족의 집안이었으나 부모 사이가 나빠 가정(家政) 일체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성질이 사나운 어머니의 지배하에 농노제의 참상을 자세히 목격하면서 자랐다. 이 경험은 후년의 그의 성격 및 작품에 강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예를 들면 소설 <무무> 및 <첫사랑> 등). 1833년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 1년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문학부로 전학했다. 학생시절부터 시작(詩作)을 시도, 1838년에 수편의 서정시를 발표했으나 모방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학졸업 후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 철학을 연구, 학위를 땄다(1842). 1843년, 서사시 <파라샤>로 성공하여 문학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다. 이어서 중편 <페투시코프>(1848), 희극 <식객>(1848) 등을 썼으나 그의 명성을 요지부동케 한 것은 <사냥꾼의 일기>(1852)이다. 이 작품은 거의 외국에서 쓴 것인데, 그 이유는 1843년에 러시아를 방문한 오페라 가수 비아르드 부인을 알면서 사랑에 빠져 그녀를 따라 외국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평생을 두고 느낀 사랑으로서 이 때문에 일생 독신으로 지내게 된다. 1856년 바쿠닌을 모델로 한 소설 <루딘>으로 장편작가로 전향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사냥꾼’을 본격적으로 취급했다. 이후 <그 전날 밤>(1859)에서는 불가리아의 혁명가 인사로프와 러시아의 ‘사냥꾼’의 대립을, <귀족의 보금자리>에서는 각성한 귀족 인텔리 라브레츠키를 묘사했고, 나아가서 프롤레타리아를 위시한 서민층에서도 지식층으로 진출하여 유물사상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와 아들>을 썼다. <연기(Dim)>에서는 서구의 원리와 위업을 러시아에 도입할 필요를 설파하였고, 최초의 장편 <처녀지>에서는 1870년대의 인민주의 운동을 취급, 그 좌절을 묘사했다. 이것으로 볼 때 태반을 외국에서 보내면서 1840-1870년대의 러시아 청년남녀·정치·도덕 등의 문제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녀지> 이후는 <산문시>(1878-82) 외에 거의 남긴 것이 없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다른 러시아 작가들과는 달리 표현방법이나 작품의 세계에 있어 애써 자기를 억제하고, 심리적 인상주의, 혹은 심리적 사실주의를 창안해 낸 점에 있다. 더욱이 주인공에 대해 살펴보면, 그 대부분이 비극적 최후를 마치고 있고 또한 연애에서는 성취 일보 전에 반드시 파국이 찾아든다. 여자가 극히 정열적인 데 반해 남자는 마지막 판에서 꽁무니를 뺀다. 여기에는 그가 본 부모의 관계, 자신의 경험(바쿠닌의 동생과의 사랑에서 투르게네프는 마음이 약해 실패로 끝났다) 등이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버지와 아들편집

Ottsi i deti (1862) 투르게네프 장편소설. 작자가 영국체재 중에 목격한 한 청년 의사의 강렬한 인상에서 니힐리스트인 주인공 바자로프의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하는데 이와 함께 당시 러시아 사회에 새로 대두하고 있던 잡계급 인텔리겐차의 존재에 의해 촉발된 것도 사실이다. 의학생 바자로프는 유물적 실증주의의 입장에서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가치가 있는 것은 실용적 효용을 지닌 과학뿐이다. 친구의 집에 체류 중에 친구의 백부로서 아버지 세대에 속하는 교양주의자 파베르와 격론 끝에 결투를 벌이고 만다. 친구 약혼자의 언니가 되는 아름다운 미망인 오진초바를 사랑하나, 그의 이성은 사랑을 단순히 유해한 감정이라 해서 배척한다. 결국 그녀의 곁을 떠나 시골에 칩거하면서 의료에 전념하다가 해부 중에 손가락에 독이 들어가 급사한다. 이 작품은 바자로프의 인물상에 관해 한편에서는 진보적 청년의 캐리커처라 해서 좌파로부터 또 한편에서는 이들 청년을 미화시키고 있다고 해서 보수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바자로프는 러시아 문학에 처음으로 나타난 강렬한 적극적 남성이자, 소비에트 문학 주인공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작품 가운데, 바자로프에 대해 사용된 니힐리스트란 용어는 그 후 세계적으로 퍼졌다. 신구세대 간의 불가피한 대립이라는 영원한 주제를 다룬 이 소설은 투르게네프의 최고 걸작이다.

처녀지편집

Novi (1877) 투르게네프 장편소설. 7년에 걸친 준비 끝에 잡지 <유럽 통보>에 발표되었는데, 투르게네프가 59세 때 쓴 작품이다. 온건한 자유주의자 그룹에 속했던 투르게네프는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1860년대 말부터 1870년대 초에 걸친 인민주의 운동을 다루었다. 작자의 입장으로 보아 혁명가들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회개한 귀족’인 네지다노프는 이상가로서 농민을 봉기시키려고 한다. 관념적인 그들의 슬로건은 농민에게 납득되지 않아 신념을 잃고 자살해 버린다. 이에 대치되는 인물이 점진적 개혁자로서 실무가로서의 재능도 있는 솔로민인데, 그는 작자의 대변자로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처음에는 시인 기질의 네지다노프와 함께 생활하며 싸우는 성실한 이상가인 처녀 마리안나는 결국 솔로민의 정당함을 이해하고 그를 따르게 된다. 그녀는 <그 전날 밤> (1859)에 나오는 옐레나와 함께 투르게네프의 여성상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적극적인 여성으로 매력 있는 형이다. 이 소설은 인민주의의 어두운 면만을 그리고 있는 점, 마리안나와 솔로민의 관계묘사의 불충분한 점 등 결점을 지니고 있으나 ‘사냥꾼’의 변형으로서의 네지다노프의 비극은 훌륭히 묘파되고 있어 시대의 가장 첨예화된 문제를 반영시킨 사회소설로서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첫사랑편집

투르게네프 소설. 투르게네프의 자전적 중편 소설로 1860년에 발표되었다. 16세의 ‘나’는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어느 여름밤 별채에 이사온 공작댁 딸 지나이다를 담너머로 보고 반해 버린다. 교만한 이 미소녀와의 교제를 금지한 어머니 몰래 그녀의 숭배자들과 사랑을 겨루어 그녀의 달콤한 키스를 받고 행복감에 도취되나, 그녀를 괴롭혀 온 사람이 자기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고 놀란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가 그녀의 하얀 팔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관능의 노예가 된 유순한 그녀가 빨갛게 부르튼 채찍 자국에 천천히 키스하는 처절한 장면을 본다. 2개월 후 아버지는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급사한다. 작자는 여기에서 연애라는 것이 불가항력의 맹목적인 힘으로서, 인간을 지배하여 인간에게 행복이 아니라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적 성장에 필연적인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곤차로프편집

Ivan Aleksandrovich Goncharov (1812-1891) 러시아 소설가. 심비르스크에서 출생. 부친은 부유한 상인. 1831년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에 입학. 졸업 후에는 정부관리가 되었다. 약 10년간의 습작기를 거쳐서 3부작의 제1작 <평범한 이야기>(1844)를 발표했는데 지주 귀족의 부패한 세계관이 신흥 부르주아지의 발랄한 세계관에 패배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후 일생의 최대 걸작 <오블로모프>를 써나가면서 그동안 프차친 제독을 따라 일본과의 통상을 목적으로 한 원양항해에 참가, 여행기 <프리키트함(艦) 팔라다>를 저술했다. 귀국 후 한때 검열관이 되었으나 건강이 나빠 1860년 사직했다. 1869년 <단애(斷崖)>를 발표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그 후는 창작을 그만두었다. 그는 3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이들은 동일한 주제의 변형으로 이 주제를 정성들인 리얼리즘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데에 그의 가치가 있다.

오블로모프편집

Oblomov (1849-59) 곤차로프의 장편소설. 제1부 가운데 <오블로모프의 꿈>만이 1849년에 따로 떼어 발표되었고 그 후 단속적으로 집필이 진행되어 10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주인공인 지주 오블로모프는 교양도 있고 착하며 순진한 사람이나 1년 내내 평상복을 입고 소파에서 뒹굴고 있다. 그는 일체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농노제가 지배하는 시골에서 어릴 때부터 하인의 시중을 받고, 심지어 양말까지도 남이 신겨주는 응석받이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에게 정신적으로 바로 설 듯이 보이는 기회가 찾아든다. 지성과 실천력이 넘치는 매력적인 처녀 올리가가 그 앞에 나타나 서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랑을 한다는 것조차 ‘더할 나위 없이 어려운 인생학교’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헤어지고 오블로모프는 이전의 나태한 생활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락(零落)한 끝에 죽고 만다. 이 작품에 대해 도브롤류보프는 평론 <오블로모프슈치나(오블로모프 기질)란 무엇인가>를 써서, 철저한 ‘사냥꾼’ 오블로모프의 성격은 러시아 사회의 병폐를 보편적으로 나타내는 것임을 해명했다.

1860년대 문학편집

-年代文學 러시아 문학에서의 1860년대는 보통 1861년의 농노해방을 전후한 10년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크림 전쟁(1854-56)의 패배로 러시아의 후진성과 부패가 폭로되고 이 사회의 기초가 되는 농노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난 때에 해당된다. 알렉산드르 2세의 정부는 불온한 정세를 파악하고 상부로부터의 개혁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했으나 귀족의 특권을 근본적으로 개혁시키지 않는 불철저한 것에 그쳤기 때문에 농민의 반란은 그치지 않았다.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운동이 1860년대에 크게 벌어진 것은 이러한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럴 때 그들의 이론적 지도자 체르느이셰프스키, 도브롤류보프 등은 작품분석에 의해 사회 모순의 고발과 그 해결을 호소하는 이론, 즉 리얼리즘 비평을 무기로 삼아 싸웠다. 따라서 이러한 견지는 문학작품에 대해 한결같이 사회적·정치적인 면을 반영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고 훗날의 산문학의 거장들 즉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러시아 국민극의 확립자 오스트로프스키 등은 막 대두하기 시작한 잡계급 작가들과 함께 러시아의 현실을 리얼리스틱하게 묘사해서 그러한 비평방법을 위해 좋은 소재가 되는 작품을 제공했다. 한편 시민시(市民詩)의 기수 네크라소프는 혁명적 민주주의자와 주장을 달리하고, 러시아 시에 처음으로 민중의 고뇌와 비애의 테마를 대담하게 도입, 새로운 리듬과 여운을 창조했다. 문학의 정치성·사회성에의 요구는 논쟁사적으로 순수예술파로 일괄되는 교양 높은 귀족시인들(페트, 마이코프, 알렉세이 톨스토이 등)의 반론을 불러일으켜 그들을 순수미 속에 파묻히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현실 폭로에 불과한 조잡한 작품을 내놓은 잡계급 작가들(레셰트니코프, 포미알로프스키, 슬레프초프 등)이나, 과학과 이상을 방패로 ‘니힐리스트’를 옹호하는 독설비평가 피사레프가 지향하고 있던 바로 그 방향에 시대의 나갈 길이 있었던 것이다.

체르니셰프스키편집

Nikolai Gavrilovich Chernyshevsky (1828-1889) 러시아 비평가·소설가·철학자·경제학자. 도브롤류보프와 함께 혁명적 민주주의의 대표자. 사라토프의 사제 집안에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졸업 후(1850) 잡지 <현대인>의 집필자가 되었으며(1854), 1856-62년에 걸쳐 동지(同志)를 배경으로 앙양된 혁명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현대인>의 발행 정지처분과 함께(1862)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감옥에 투옥된 후 ‘청년에게 끼친 유해한 영향’을 이유로 시베리아에 추방되었다. 추방이 해제된 것은 1883년이었고 이로부터 6년 후 출생지 사라토프에서 사망했다. 체르니셰프스키는 <현실에 대한 예술의 미학적 관계>(1853-55), <러시아 문학에서의 고골리 시대 개관>(1856) 등의 논문으로 관념적 미학을 배척하고 현실이 예술보다 우월함을 주장하면서 사회에 대한 리얼리즘 문학의 비판 및 판결의 역할을 강조했다. 옥중에서 쓴 장편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서는 외관미보다 평등과 경제적 독립을 지향하는 새 여성이나 엄격한 윤리관에 투철한 혁명가를 러시아 문학에 처음으로 등장시켜, 사회주의적 생활의 실천과 전망을 묘사함으로써 급진적인 젊은 세대의 압도적인 인기를 모았다.

도브롤류보프편집

Nikolai Aleksandrovich Dobroliubov (1836-1861) 러시아 비평가·혁명적 민주주의자. 니지니 노브고로드의 사제 집안에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범학교를 마치고, 잡지 <현대인>의 기고가가 되어(1857) 처음에는 비평부문을 이어서 자기가 설치한 풍자부문을 담당했다. 동지(同志)를 거점으로 그가 활약한 시기는 불과 4년간이었으나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에 힘입어 다수의 논문을 발표, 혁명세력의 선두에 서는 비평가로서 거대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당시 문호의 작품을 분석한 <암흑 왕국>(1859), <암흑의 왕국의 한줄기 빛>(1860, 이상 오스트로프스키), <오블로모프 기질이란 무엇인가>(1859, 곤차로프), <오늘이란 날은 언제 오는가>(1860, 투르게네프), <거세된 무리들>(1861, 도스토예프스키) 등 논문은 모두가 문학작품이란 민중의 이익과 진실을 보호하고 생활의 모순을 독자에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계몽적 입장에서 쓴 것으로 말하자면 리얼리즘 비평의 기초가 되었다.

피사레프편집

Dmitry Ivanovich Pisarev (1840-1868) 러시아 비평가. 오룔현의 유복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중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역사·문헌학부에 입학했다(1856). 학자에의 길을 닦았으나 만족할 수 없어 잡지 <여명>의 동인이 되고(1859), 대학졸업과 함께 잡지 <러시아의 말> 상임 집필자가 되어(1861) 문명(文名)을 확립했다. 1862년 게르첸을 옹호한 논문을 써서 투옥되었으나 옥중생활을 하면서 4년간이나 집필활동을 계속했다. 석방된 지 얼마 후 발트해(海)에서 수영 중 익사했다. 파사레프는 사회발전의 원동력은 과학적 지식의 보급과 발달에 있다고 판단, 정치투쟁보다 유물론적 세계관과 자연과학을 터득한 ‘사색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활동에 기대를 걸었다. <아버지와 아들>을 소재로 니힐리스트론을 전개한 <니힐리스트>(1864), <죄와 벌>을 분석한 <생활을 위한 투쟁>(1864), 푸슈킨의 가치를 부정하기까지에 이른 <푸슈킨과 벨린스키>, <미학의 파괴>(다같이 1865) 등의 논문이 유명하다.

네크라소프편집

Nikolai Alekseevich Nekrasov (1821-1877) 러시아 시인·저널리스트·혁명적 민주주의자. 볼가강 연안의 소도시 네미로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838년 수도로 나가 귀족유년학교에 입학시키려는 부친의 의사를 거역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청강생이 되었다. 그 때문에 생활비를 얻지 못해 ‘3년 동안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문필생활을 하려는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38년경부터 로맨틱한 시를 쓰기 시작했으나 1840년대 초에 벨린스키와 알게 되면서 커다란 영향을 받아 리얼한 작풍으로 전환했다. 1847-1862년에 걸쳐 잡지 <현대인>의 주간이 되어 체르니셰프스키, 도브롤류보프 등에게 활약의 무대를 마련해 주었고, 날카로운 비판 안목에 의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의 신진작가를 발굴했다. <현대인>지가 발행정지(1862)를 당하자, 2년 후에 시체드린과 함께 <조국 잡기(祖國雜記)>를 만들어 활동을 계속했다. 이 동안에 네크라소프는 길고 짧은 여러 시를 써서 <민중의 시인>으로서 명성을 높였고 특히 급진적인 인텔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학대받는 농민(<붉은 코 마로스>, <러시아에서는 행복한가> 등)이나 권리도 없고 평등도 모르는 부인(<데카브리스트의 아내>) 등으로 그들의 인내심 강한 불굴의 자세는 이 시인의 조국애를 입증하는 산 증거였다.

러시아에서는 누가 행복한가편집

Komu na Rusi zhit khorosho (1863-76) 네크라소프 장편 서사시. 7명의 농사꾼이 우연히 길에서 만나 ‘러시아에서 제일 행복하게 좋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의논을 벌이나, 서로가 자신을 내세워 양보하지 않는다. 결국 모두 함께 그 답을 구하기 위해 편력의 길을 떠난다. 작자는 민간구전(民間口傳)이나 민요의 형식을 빌어 주인공에 아무런 특색도 없는 농민을 선택함으로써 어머니인 러시아와 같이 ‘짓밟히면서도 억센’ 민중의 생명을 노래했다. 여기에 담긴 라이트모티프는 병고나 시베리아 유형도 마다 않고 농민 속에 뛰어들어 그들의 자각을 촉구, 농민혁명을 일으키려던 1870년대 인민주의 운동의 서곡이었다.

페트편집

Afanasy Afanas’evich Fet (1820-1892) 러시아 시인. 본명 셴신. 부친은 귀족, 모친은 독일인이었다. 그의 시세계는 결코 넓지 않으나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는 감미롭고 정서에 넘쳐 있어 가곡으로 작곡된 것이 많다. 1860년대의 급진적인 문학자들과의 논쟁에서는 예술가는 “대상의 미(美)만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 순수예술의 입장을 취했다. 그의 뛰어난 작품은 시집 <저녁의 불빛>(1883-91)에 수록되어 있다.

톨스토이 (알렉세이 콘스탄티노비치)편집

Aleksey Konsan-tinovich Tolstoi (1817-1875) 러시아 시인·소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백작 집안에서 태어났다. 재능이 뛰어난 다작가. 역사소설 <백은 공작(白銀公爵)>(1863), 3부작 <이반 대제의 죽음>(1866), <황제 표트르>(1868), <황제 보리스>(1870) 등이 그의 대표작. 시인으로서는 코즈마 프루트코프란 이름으로 풍자시를 쓰는 한편 자연이나 사랑을 노래한 많은 서정시의 대부분은 가곡으로서 애창되고 있다.

마이코프편집

Apollon Nikolaevich Maikov (1821-1897) 러시아 시인. 모스크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30년대 후반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항상 역사적인 테마에 관심을 보이면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세계를 찬미했다. 한동안은 벨린스키와의 교제도 있었으나 농노해방 후는 ‘순수예술’의 지지자가 되어 시체드린 등의 비판을 받았다. 1882년,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대립을 묘사한 서사시 <두 개의 세계>로 푸슈킨상(賞)을 탔다.

오스트로프스키편집

Aleksandr Nikolaevich Ostrovsky (1823-1886) 러시아 극작가. 모스크바의 가난한 재판소 서기의 집에 태어났다.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서 배웠으나(1840-43) 중퇴. 문학을 지망했으나 부친의 반대에 부딪쳐 부득이 상업재판소에 다니면서 희곡을 썼고 극장을 쏘다녔다. 부친한테서 의절당한 이듬해 <친구끼리는 나중에 따지자>(1850)로 문명을 확립했으나 작품이 물의를 일으켜 실직하고 말았다. 1850년대 초 슬라브파에 접근, 그 잡지 <모스크바인(人)>에 몇 개의 작품(<자기 썰매에 타지 말라>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도브롤류보프의 논평에 이끌려 1850년대 후반부터는 잡지 <현대인> <조국잡기>에 잇달아 희곡을 발표(<가정교사> <뇌우> <삼림(森林)>등), 그 명성을 요지부동케 하였다. 그의 등장인물이 사는 세계는 모스크바 강의 대안에 있는 상인의 세계, 즉 무지·편견·공포가 지배하는 ‘암흑왕국의 한줄기 빛’에 불과하다. 그러나 작자의 이해와 애착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파멸의 길을 더듬는 희생자 편에 있었다고 하겠다. 오스트로프스키는 러시아의 축도인 ‘폭군’의 세계를 폭로하고, 고골리의 후계자로서 러시아 국민극을 완성하고 리얼리즘의 뿌리를 그곳에 심은 것이다.

뇌우편집

Groza (1859) 오스트로프스키 희곡. 1850년대 볼가강 연안의 어떤 시골이 무대. 수줍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꿈 많은 처녀 카테리나는 상인의 아들 치혼과 결혼한다. 시집에서는 시어머니 카바니하가 잔인한 폭군으로서 군림하고, 남편은 무기력하다. 카테리나는 남편에 대한 사랑 속에서만 살아 가려 하나, 금력과 무지의 지배에 못 견딘 나머지 역시 이 세계를 혐오하고 있는 교양있는 청년 보리스를 알게 되어 정열의 포로가 되고 남편이 없는 동안 보리스와 밀통한다. 돌아온 남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구원을 청하나 가차없는 보복이 가해진다. 카테리나는 고민 끝에 볼가강에 몸을 던진다. 도브롤류보프는 논문 <암흑 왕국의 한줄기 빛>(1860)을 이 희곡에 바쳐 잔인과 무능, 조야(粗野)와 우매 속에 파묻힌 환경에서의 카테리나의 사랑을 인간성의 발로로 보고 그녀의 죽음을 항의의 유일한 수단으로서 그 도의성을 높이 평가했다.

포미알로프스키편집

Nikolai Gerasimovich Pomialovsky (1835-1863) 러시아 소설가. 가난한 사제보(司祭補)의 집안에 태어났다. 장편 <소시민의 행복>(1861), <몰로토프>(1861)에서 잡계급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리얼한 형상을 그려 유명해졌다. 자전적 요소가 강한 대표작 <신학교의 기록>(1862-63)은 잔혹하고 무지한 교사가 관리하는 신학교의 추악상을 학생의 회색(灰色) 생활을 통해 폭로한 작품이다.

슬레프초프편집

Vasily Alekseevich Sleptsov (1836-1878) 러시아의 소설가. 1861년 혁명적 민주주의자와 접근하여 청년을 위한 합숙소, 즉 ‘슬레프초프 코뮌’을 조직했다. 르포나 단편을 중심으로 한 그의 작품은 농촌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작인 중편 <고난의 시대>(1865)도 농노해방 직후의 농촌을 무대로 잡계급인과 농민이 자유주의적인 지주와 다투는 이야기이다.

우스펜스키편집

Gleb Ivanovich Uspensky (1843-1902) 러시아 소설가. 부친은 관리. 어릴 때부터 병적으로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고 모스크바 대학을 중퇴, 1862년부터 작가활동에 들어가, 스케치 <라스체랴예프가(街)의 풍속>(1866)으로 이름을 떨치었다. 농촌소재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며 대표작 <땅의 힘>(1882)은 자본주의 침투에 의한 농촌의 붕괴과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인민주의 작가로서 밝은 내일을 맏고 있었으나 정신이상으로 죽었다.

레셰트니코프편집

F dor Mikhailovich Reshetnikov (1841-1871) 러시아 소설가. 사제의 집안에 태어났다. 한때 신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문학에 열중했고, 사상적으로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864년 페르미의 농민과 배 끄는 인부의 생활을 그린 중편 <포도리프나야의 사람들>을 발표, 문명을 확립시켰다. 이 밖에 우랄 지방의 노동자생활을 다룬 <광산 노동자>(1866) <그루모프가의 사람들>(1866-67) 등이 유명하다.

1870년대 문학편집

-年代文學 이 시기를 상징하는 것은 소위 인민주의의 발흥이다. 그것은 복잡한 성격의 혁명운동이며 이론적으로는 농촌 공동체·직인조합(職人組合)의 이상화에 바탕을 둔 러시아의 사회적·경제적 특수성과 농촌에까지 침투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를 강조하고 그 목적을 농민중심의 혁명에 의해 자본주의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시키는 데 둔다. 1870년대(문학사에서는 1866년부터를 말한다)의 급진적인 인텔리는 그 사상의 실천방안으로서 ‘인민 속으로’를 슬로건으로 농촌에 뛰어들어 불행한 다수의 민중에게 정신적 부채를 갚기 위해 민중 계몽에 힘을 기울였다. 인민주의자 운동은 작가들까지도 사로잡고 말았다. 우스펜스키는 1860년대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인민 속으로’ 뛰어들어 대표작 <땅의 힘>을 완성시켰고, 시체드린은 인민주의적 경향은 다소 희박하나 네크라소프 등 진보파의 기관지 <조국잡기>를 거점으로 해서 반(反)체제적인 독설을 퍼부어 젊은 세대의 인기를 끌었다. 한편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도 이 시기에 여전히 건필(健筆)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특히 두 사람의 거인은 그 재능의 절정기에 있었다. <죄와 벌>을 내놓은 도스토에프스키는 <백치> <악령> <미성년> 등의 세계적 명작을 잇달아 완성시키는 한편 평론가·비평가로서도 <작가의 일기>를 써서 독특한 견해를 세상에 묻고, 미완성의 대표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목표로 해서 충실한 창작력을 결정시켜 가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톨스토이는 예술적 가치로는 더높이 평가되는 <안나 카레니나>를 고뇌 속에 집필하면서 스스로의 정신적 위기와 정면으로 대결, 독자적 교의(敎義)에의 전환점에 다다르려 하고 있었다. 이 사이에 화술의 교묘성을 가지고 특이한 산문의 세계를 개척한 레스코프의 활약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시체드린편집

Mikhail Evgrafonovich Saltykov-Shchedrin (1826-1889) 러시아 소설가. 본명 살투이코프. 투라현(縣)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844년 귀족유년학교를 졸업, 관계(官界)에 투신했다. 이 동안 그의 세계관은 주로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영향하에 형성되어갔다. 초기의 중편 <모순>(1847), <얽힌 사건>(1848)이 물의를 일으켜 최북단의 마을 뱌트카로 유배되고(1848) 약 7년간 그곳에서 유형지에서의 관찰을 바탕으로 관헌의 횡포 및 우매함을 폭로한 <현(縣)의 기록>(1856-57)이 출세작이다. 1856년 관계에 복귀하여 그 후 착실히 지위를 높이는 한편 <현대인>지, <조국잡기>지에서 편집자 겸 진보파의 투사로서 활약했다(1962-84). 장편 <골로블료프가(家)의 사람들>(1872-76), <어떤 마을의 역사(歷史)>(1869-70)는 귀족가정의 퇴폐와 전제정치의 부패상을 통렬히 풍자, 비판한 것으로, 검열의 눈길을 현혹시키기 위해 ‘이솝어(語)’를 구사한 우화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다.

레스코프편집

Nikolai Semenovich Leskov (1831-1895) 러시아의 소설가. 오룔현의 하급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사망 후 가계를 돕기 위해 오룔의 형사재판소에 근무(1847), 2년 후 키예프로 전근하여, 키예프 대학 청강생이 되었다. 그 후 여러 일에 종사했는데 실생활의 풍부한 체험은 후의 작가활동(본격적으로는 1861년부터)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떨친 것은 니힐리스트 및 혁명가를 조소한 장편 <막다른 길>(1864) 등에 의한 것이나 그는 단순한 보수적 작가는 아니다. 그의 특질은 장편 <수도원의 사람들>(1872)보다는 <므첸스크군(郡)의 마크베스 부인>(1864, 후에 쇼스타코비치가 오페라화했다), <매혹된 여행자> <봉인된 천사>(다같이 1873) 등의 중·단편 소설에 있다. 그가 민중어를 도입하고 스릴 넘치는 에피소드를 도처에 깔아놓은 경쾌한 스타일은, 러시아의 다양한 세태풍속을 묘사한 특이한 것이다. 당대의 작가 중 줄거리의 흥미에 중심을 둔 점에서는 유일한 인물이라 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편집

Fe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1881) 러시아 소설가. 모스크바의 마린스키 빈민병원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8년 부친의 의사를 좇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육군공과학교에 입학했으나 군대식교육과 군사교련은 전혀 그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동시대인들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당시부터 이미 우울하고 비사교적이며 고독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다고 한다. 재학시절부터 푸슈킨, 고골리, 레르몬토프 등의 러시아 작가는 물론 발자크, 조르주 상드, 호프만, 실러 등에 열중하고 있었다. 1843년 학업을 마친 후 육군성공무국에 근무하게 되었으나 억누를 수 없는 문학에의 정열에 불타 문필로 입신할 것을 결심, 이듬해 이 직장을 뛰쳐나왔다. 문단에의 등장은 참으로 눈부신 바 있어,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은 이미 원고단계부터 절찬의 대상이 되어 그를 일약 문단의 총아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중년의 가난한 하급관리와 의지할 곳 없는 불행한 소녀와의 사이에 교환된 편지로 구성되어 있는 서간체소설로서, 학대받는 사람들에 대한 지도적 동정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 이어 자아의 분열을 다룬 주목할 만한 작품 <이중인격>(1846) 등을 썼으나 일반의 평은 좋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47년부터 페트라셰프스키를 중심으로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진보적 청년들의 서클에 가담하고 있었으나 1849년 4월, 반정부 음모를 획책한 위험분자로서 일제히 검거되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감옥에 감금되었다. 8개월 후 재판이 끝나고 그는 다른 20여 명의 연루자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대에 섰으나, 총살 직전 특사가 내려 대신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옴스크 감옥에서 약 4년간을 죄수들과 함께 보냈고, 출옥 후에는 일개 졸병으로 군무에 복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59년 겨우 군무에서 풀려나 대중의 뇌리에서 어지간히 사라진 작가로서 10년 만에 수도로 돌아왔다. 옥중에서의 특이한 생활체험은 귀환 얼마 후 발표된 <죽음의 집 기록>에서 엿볼 수가 있다. 이 작품에는 처참한 감옥생활에 관한 리얼한 묘사와 범죄자의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상식적인 선악의 기준에 대한 작자의 의문이 조심스럽게 표명되어 있다. 1864년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가까운 두 사람, 즉 시베리아에서 열렬히 연애결혼을 한 애처 마리아와 형 미하일이 연달아 죽고 설상가상으로 형과 함께 발행하고 있던 잡지도 경영부진으로 폐간이 불가피해졌으며 이에 수반되는 일체의 빚과 형 가족의 부양을 그가 짊어지게 되었다. 우선 급한 김에 어떤 악덕 출판업자로부터 가혹한 계약조건으로 3천 루블을 꾸었는데 이것이 그의 운명에 중대한 전기를 이루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불후의 걸작 <죄와 벌>을 쓰는 한편, 동시에 또 하나의 소설을 완성시켜야만 했다. 이래서 여(女)속기사를 고용, 불과 26일이란 짧은 시일에 <노름꾼>(1866)을 탈고했다. 이 속기사야말로 그의 둘째 부인이 된 안나였다. 1867년 갓 결혼한 이들 부부는 빚쟁이의 불 같은 성화에 쫓겨 외국으로 도망쳤다. <백치> <영원의 남편>(1870), <악령>(1871-72) 등은 고난의 연속인 이 4년간의 외유시절에 쓴 것이다. 1871년 외국에서 돌아온 이래 안나 부인의 내조의 공에 힘입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활은 점차로 안정되고 끊임없는 궁핍과의 투쟁도 끝났다. 미완성 작품이 되긴 했으나 그의 마지막 걸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는 작가의 파란만장한 창작활동을 총결산한 구상이 웅대한 야심작이다. 이 작품에서 원숙의 경지에 다다른 거장의 필치는 도처에서 그 빛을 보여 철학적·형이상학적 주제의 억센 추구는 독자로 하여금 긴박한 일종의 처절감마저 느끼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심각하면서도 정확하고 확실한 심리묘사에 뛰어나 그 수법은 외적인 특징이나 사회적 환경이 아니라, 오직 회화를 통해 인물의 개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을 장기로 했다. 또한 의식 속의 세계나 비정상적인 병적 심리에 특히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 점에서 근대 서구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의 문제로 삼은 것은 철학적·형이상학적 의미에 있어서의 인간존재의 모순 바로 그것이며, 선과 악의 두 원리가 서로 싸우는 곳에 바로 인간의 영혼이 있다고 보고, 이 무한히 복잡한 세계의 정경을 묘사하는 데에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런 뜻에서 그의 소설은 모두가 형이상학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의 집 기록편집

Zapiski iz M rtvogo doma (1861-62) 도스토예프스키의 중편소설. 작자가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체험한 사실에 입각해서 쓴 것이다. 1861-62년에 걸쳐 주간신문 <러시아 세계>에 이어서 형 미하일과 공동 편집했던 잡지 <시(時)>에 발표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어디까지나 잔잔한 서술은, 이 세상에도 실존하는 <죽음의 집> 속에서 무서운 고독감과 싸우면서 어떤 기이한 사실조차도 놓치지 않은 작자의 냉철한 관찰을 반영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목격한 사건은 일찍이 작자가 꿈꾸었고, 그 까닭으로 시베리아 유형의 원인이 되었던 사상으로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 <집>에서는 단순한 정사(正邪)·미추(美醜)의 개념을 넘어 모두가 성립되고 있다. 가장 지저분하고 추악한 환경 속에 있는 가장 기이한 인간에도 ‘인간(人間)’은 있다. 시베리아 이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이것을 여러 형태로 파헤치는 방향으로 크게 여물어갔다고 본다면 이 대문호의 작품들에 있어, 이 책이 단지 당시의 정치체제를 지탱하는 무자비한 감옥기구를 고발하는 책, 또 그곳에서 신음하는 민중에의 공감의 기록 이상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죄와 벌편집

Prestuplenie i nakazanie (1866)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서구적인 합리주의자·무신론자이다. 빈곤에 허덕이고 고독에 짓눌린 그는 한결같이 추상적 사색에 몰두한다. 그의 예리한 지성은 이 고독의 사색에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독창적 이론-초인사상-을 체계화시킨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인류는 ‘나폴레옹’과 ‘이(蝨)’로 분류된다. 즉 선악을 초월하고 나아가서 스스로가 바로 법률이나 다름없는 비범하고 강력한 소수인간과 인습적 모랄에 얽매이는 약하고 평범한 다수인간으로 분류된다. 그는 자신이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한 마리의 이에 불과한 무자비한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인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전혀 설명이 안 될 ‘비합리적인’도덕감각으로 고민한 끝에 ‘성스러운 매춘부’ 소냐의 권유에 따라 자수를 하고 시베리아의 감옥으로 끌려간다. 소냐는 작자가 이상으로 여긴 복음서적인 사랑과 인종의 사도이며 무신론자 라스콜리니코프에 대립되는 구원의 담당자로 묘사되고 있다. 에필로그에서 그녀의 감화에 의한 주인공의 종교적 갱생과 정신적 부활이 그려지고 있으나 이 부분은 예술적인 박력이 부족하고 충분한 설득력을 지녔다고 볼 수 없다. 이에 반해 합리적 원리와 비합리적인 원리와의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에 직면한 주인공의 심각한 고민은 투철한 심리분석과 극적인 박진력으로 훌륭히 묘파되고 있다.

백치편집

Idiot (1868-1869)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1868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잡지 <러시아 보지(報知)>에 단속적으로 발표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간’을 그리기 위해, ‘백치’인 무이시킨 공작이란 윤리적 이상의 체현자(體現者)를 등장시켰다. 무이시킨이 밝히는 윤리적 이상이란 라스콜리니코프가 역설적으로 도달한 ‘고난을 통한 구제’이며, 적극적 행동의 규범은 아니다. 그는 행동보다 감정을 중시하고 사랑하는 상대를 얻기 위한 자기 주장보다 연적에게 양보하는 자기 희생을 근본 뜻으로 한다. 그러나 무이시킨을 둘러싸고 현세로부터의 등장인물들은 그의 인간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존경, 그리고 통찰력의 뛰어남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항상 수동적인 그의 덕성에 불안을 느낀다. 무이시킨이 결국 가지각색의 불행 앞에서는 무력하여, 그 스스로도 발광하고마는 비극적 결말은 무이시킨에 걸었던 작자의 이상이 현실의 중압에 견디지 못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편집

Bratiya Karamazovi (1879-1880)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카라마조프 일가의 가장인 표트르는 골수까지 광대 근성이 밴, 미천한 계급으로부터 입신양명한 사람으로 탐욕스럽고 음탕하기 이를 데 없는 지주였다. 장남 드미트리는 부친의 음탕방자한 피를 이어받아 청년의 정열에 탐닉하여 이를 전혀 제어할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풍부한 시적 감수성이 뛰어나 영원한 것에 대한 순진한 동경심을 품고 있다. 차남 이반은 철저한 무신론자·합리주의자이다. 그의 왕성한 지적 탐구는 “불사(不死)란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은 허용되고 있다”고 하여 도덕적 허무주의를 도출해 낸다. 서자 스메르자코프는 간지(奸智)에 뛰어난 비열한으로 이반의 심오한 이론에 대해 자기 나름의 비속한 해석을 내리고 유산을 한몫 차지할 생각에서 부친살해를 결행한다. 막내아들 알료샤는 종교심이 두터운 순결 유화한 사람으로 그의 맑고 선의에 찬 마음은 타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동정에 넘쳐 있다. 드미트리와 이반은 평소부터 추악한 부친을 맹렬히 증오하고 마음속으로부터 아버지가 죽기를 원한다. 또한 아버지 표트르와 아들 드미트리는 어여쁜 한 여자에 반하여 서로 싸움을 벌인다. 따라서 스메르자코프의 교묘한 계획에 따라 부친이 살해당했을 때 혐의는 의당 드미트리에게 걸린다. 모든 상황이 그에게 불리하고 무죄의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예심 중에 심경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그는 전인류의 죄를 자신의 고난으로 보상하기 위해 전혀 죄가 없으면서 기꺼이 수형(受刑)할 결심을 한다. 이 미완성 대작은 도스토예프스키를 평생 괴롭힌 신과 악마, 선과 악의 두 원리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야심작이다. 이 두 원리의 대결은 이반의 극시 <대심문관(大審問官)>과 장로 조시마의 수기와 대비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결국 두 원리의 통일이 성취되지 않은 채 끝나고 있어, 작자 자신의 자아 분열이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톨스토이 (레프)편집

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 러시아 소설가·사상가. 중부 러시아의 츠라시(市)에 가까운 조상 전래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 명문의 귀족으로 태어났다(4남으로 이름은 레프). 두 살 때 어머니와 사별하고 1837년 집안이 모스크바로 이사한 후 얼마 안 가서 아버지와도 사별했다. 그 후 톨스토이는 촌수가 먼 백모들 손에 양육되었다. 1841년 후견인인 오스텐 사켄이 죽어 아이들은 카잔에 사는 새 후견인 유시코바에게 인수되었다. 1844년 톨스토이는 카잔 대학 동양어학부에 입학, 이듬해 법학부로 전과했으나 아카데믹한 학문에 불만을 느껴 퇴학하고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왔다. 대강 이때까지의 생활은 작가의 문명을 확립시킨 자전 3부작 <유년·소년·청년시대>(1852-57) 속에 소상히 나와 있다. 미래의 문호는 주인공인 이루테네프 소년으로서 등장한다. 소년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모든 불공평한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된다. 여기에는 이미 작가가 후년에 이르러 보이는 구도자적 정신의 싹이 엿보이고 있다. 고향에서 톨스토이가 뜻한 것은 이상적인 농장경영이었으나 이 계획은 좌절되고 절망을 느낀 나머지 모스크바로 나가 ‘할 일도 없고, 목적도 없는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다. 1852-1855년에 걸쳐, 카프카스에서 산지민족(山地民族)의 토벌과 크림 전쟁에서 세바스트폴리 공방전에 참가했다. 이러한 경험은 <카자흐>(1853-62), 3부작 <세바스트폴리 스케치>(1855-56)에서 잘 나타나 있다. 전쟁에서 수도로 돌아온(1855) 톨스토이는 신진작가로서 환영을 받고 투르게네프, 네크라소프, 체르느이셰프스키 등과 가까워지나 도회지에서의 문인생활에 익숙치 못했고 퇴역한(1856) 후는 야스나야 폴랴나에 칩거하면서 농장경영과 집필활동에 열중했다. 한편 조정원(調停員)으로서 농민과 지주와의 분쟁을 중재하거나 농민의 자제를 모아 학교를 개설하기도 하고 혹은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의 발행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어느 것에서나 본래의 뜻은 이루지 못했다. 이 동안 톨스토이는 두 차례 외유했으나(1857년과 61-62년) 결국 선진적인 도시문명에 깊은 환멸을 느껴 귀국했다. 이때 스위스 여행의 체험을 표사한 단편 <류체른>(1857)은 서구문명과 진보를 탄핵(彈劾)한 책이다. 1862년 톨스토이는 16세 아래인 궁정의(宮廷醫) 베르스의 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가정생활에 있어서나 창작활동에 있어서나 가장 충실한 시기를 맞이한다. 톨스토이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두 대작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는 이 시기에 완성을 보았다. <전쟁과 평화>는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입이라는 조국의 운명을 건 대사건을 소재로 해서 황제로부터 일개 농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인물을 등장시켜, 역사의 참된 주인공은 야심이나 자기 주장과는 관계가 없는 겸허한 사람들, 즉 민중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장편 역사소설이다. 예술적 완성도에 있어 전작보다 뛰어난 장편 심리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위선과 허식으로 가득 찬 상류사회 속에서 패륜(悖倫)의 사랑에 자신을 관철시키기 위해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여주인공 안나의 비극과 농지경영에 땀 흘리는 지주 레빈의 성실한 생활태도를 대조적으로 제시한다. 특히 레빈은 그 밖의 작품에서도 중심인물로 자주 등장하는 작자 자신의 당시의 고뇌와 탐구의 자세를 전하고 있다. 1870년대 후반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몇 장을 쓸 무렵,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죽음에의 공포에 사로 잡혀 인생의 의미를 구하여 고민을 계속했는데 결국 삶의 의의는 과학이나 철학도 설명할 수 없고 이성의 힘에 의지해서도 문제가 해결되지 되지 않으며 다만 구원은 이성이나 자아 밖에 있는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중의 태도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정신적 위기와 극복이 이른바 톨스토이의 ‘회심(回心)’이며 <참회>(1882) 속에 서술된 적나라한 고백의 내용이다. 여기에서부터 톨스토이 만년의 독자적인 종교적 인생관이 유도된다. 그것은 윤리적으로는 악에 대한 무저항과 자기 완성에 귀결되는 체계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온갖 허위와 부패를 배격하는 강한 부정의 힘에 충만한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라고도 할 만한 것이었다. ‘회심’ 이후의 저작은 모두가 이러한 신념에 입각해서 저술되었다.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1886), <크로이체르 소나타>(1887-90), <부활>(1899-1900),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98) 등의 작품에 있어 톨스토이는 당시의 사회제도·도덕·생활양식에 도전하여 이를 남김없이 부정하고 최후로 자기 자신 속에서 가장 강한 것-성과 예술과 사회적 특권을 내던졌다. 이러한 신념과 실천의 단호한 일체화는 공공기관으로부터 반격을 받았고(1901년 공무원은 톨스토이를 교회에서 파문했다), 자기의 부인에게서마저 이해를 얻지 못했다(재산이나 저작권의 표기에 관해). 그러나 톨스토이의 엄격한 생활 태도는 최후까지 변치 않았다. 1910년 10월 28일 미명,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과의 지고(至高)한 화해에 도달하기 위해 집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올랐으나 11월 7일 랴잔 우랄 철도의 작은 아스타 포보에서 폐렴에 걸려, 82년에 걸친 고뇌와 파란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예술과 교의는 전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도 생동하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편집

Anna Karenina (1875-78) 톨스토이 장편소설. 1870년경부터 구상되어 모두(冒頭) 부분은 17회나 고쳐쓴 후, 1875년부터 잡지 <러시아 보지(報知)>에 단속적으로 발표되었다. 다만 마지막 8장만은 동지 발행인 카토코프와의 불화로 별도로 발간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여주인공 안나 카레니나가 우연히 알게 된 백작 브론스키와 열렬한 사랑에 빠져 표면상으로는 행복한 남편과의 생활을 버리나 온갖 장애에 부딪쳐 마침내는 철도에 자살하고 만다는 비극이다. 안나를 이러한 파국으로 몰아넣은 것은 체면과 무사안일을 생활신조로 삼는 남편과 상류사교계의 위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랑의 격정에서 결국은 몸에 밴 아늑한 생활환경으로 다시 빠져들어가는 애인 브론스키와의 단절감, 그리고 안나 자신의 외곬로 향하는 정열의 힘, 즉 너무나 강하게 주장된 자아의 발로 등에 있다고 하겠다. 소설의 끝 부분에서 안나의 육체를 찢어 놓는 기관차를 몰고 온 것은 안나 자신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정열의 불이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안나에 공감을 나타내면서도 그녀의 파멸적인 생활방식의 대극점에 레빈과 키치의 성실한 생활을 설정하여 자아를 초월한 곳에 생기는 구원을 설파한 것은 위에서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전쟁과 평화편집

Voina i mir (1865-69) 톨스토이 장편소설. 데카브리스트를 둘러싼 중편소설 모체가 되어 구상된 것. 1865-1866년에 걸쳐 첫머리 2장만이 <러시아 보지(報知)>에 게재되었다. 나머지 부분은 1869년 단행본으로 일괄해서 발표되었다. 톨스토이가 이 작품에서 의도한 것은 크림 전쟁의 패배로 상처 입은 조국의 영광과 국민정신의 위대함을, 나폴레옹 군대를 패주시킨 1812년의 역사적 사건에 되돌아감으로써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톨스토이는 인류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인격’ 나폴레옹에 대항해서 ‘운명에의 유순한 순종’의 체현자, 즉 러시아 농민병사와 그 사령관 쿠투조프가 승리한 것이 바로 러시아의 승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개성의 투쟁과 승패의 귀추는 톨스토이의 분신으로서 등장하는 두 사람의 중심인물에게서 일어나는 정신의 갈등과 발전으로서도 또한 뒷받침되고 있다. 지성이 높은 교만한 야심가 안드레이 공작은 나폴레옹의 숭배자였으나 죽음을 앞에 놓고 신의 법도는 자기 희생에 있음을 깨닫는다. 한편 세련되지 못한 낙천적 이상주의자 피에르도 또한 나폴레옹을 영웅시하고 있었으나 농민병사 플라톤 카라타예프와 만나 자기가 구하고 있던 진리를 찾게 된다. 그는 신의 의지를 믿으며 모든 것을 용인하고 거역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이러한 눈에 띄지 않는 민중이야말로 러시아 정신의 체현자이자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인 것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편집

Kreitserava Sonata (1887-89) 톨스토이 중편소설. 원고 단계에서부터 이미 독자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킨 화제작이었으나 주로 ‘적당치 못한 표현’ 문제로 해서 출판허가가 나오지 않아, 1890년 13권의 톨스토이 작품집 속에 수록되어 겨우 햇빛을 보게 되었다. 줄거리는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자가 질투가 넘친 나머지 아내를 살해한다는 비참한 사건을 차안에서 주변의 승객들에게 스스로 이야기하는 회상형식으로 전개된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자신의 비극의 원인을 독단적이며 시니컬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견해는 대략 ‘회심’ 후의 작자의 성에 대한 견해와 일치하는 것으로 봐야겠다. 그는 사랑이라는 미명 뒤에 숨은 매춘행위나 다름 없는 결혼생활의 허위와 동물적 성욕의 배출구에 불과한 남녀관계의 부패를 백일하에 폭로하고 인류의 이상이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강한 성욕을 억제하는 것으로 성취될 수 있다면 인류의 사멸마저도 부득이하다고까지 단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결론 때문에 여자를 쾌락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는 남성의 방자한 이기심에 대한 톨스토이의 날카로운 항의와 여자의 본분은 분만·출산·육아에 있다고 하는 그의 무게 있는 주장은 결코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부활편집

Voskresenie (1889-1900) 톨스토이 장편소설. 1889년 변호사 A. F. 코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상되었다. 집필에 소요된 기간은 중단되었던 기간을 포함해서 10년 이상이나 되며 1899년부터 잡지 <니바>에 연재되었다. 한때 카추샤를 능욕, 그녀를 윤락의 길에 몰아 넣었던 네프류도프 공작이 살인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서게 된 그녀와 배심으로서 재회한다. 그는 죄의식에 번민한 끝에 카추샤의 갱생을 통해 속죄를 하고 자신의 허위에 찬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으려 한다. 그러나 작가는 네프류도프의 신생에 이르는 길을 결코 안이하게 그리고 있지는 않다. 네프류도프가 구하는 용서는 카추샤에 의해 거절당한다. 그것은 민중의 고뇌가 고귀한 사람들의 안이한 동정이나 개심에 의해 보상받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가혹하기 때문이다. 네프류도프의 눈길은 점차 카추샤와 같은 비참한 운명에 처한 인간들의 배후에 있는 여러 가지 것에 쏠리게 된다. 심판받는 사람들의 죄는 바로 심판하는 사람이 가담하고 있는 국가기구에 있다. 신의 의지를 설교하는 교회는 국가권력의 도구에 불과하다. 톨스토이는 카추샤와 네프류도프의 부활을 통해 동시대의 사회악을 근원부터 폭로하고 고발하려 했던 것이다.

1880년대 문학편집

-年代文學 ‘인민 속으로’의 운동은 마침내 개개의 반항도 또한 유효하다는 사고방식을 자아내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성공케 했으나(18981), 현실을 철저히 소화시키지 못한 달콤한 이론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했고 더욱 알렉산드로 3세의 즉위와 함께 포베도노스체프가 시행한 강력한 반동체제에 의해 유력한 운동 지도자들이 모조리 체포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다. 인텔리는 절망과 혼미 속에 후퇴하고 겨우 운동을 계속하는 자들도 개인주의적인 ‘조그만 사업’에 종사하거나 톨스토이의 교의에 의지해서 무저항과 도덕적 완성을 지향하는 데 시종했다. 이러한 ‘황혼’시대의 회색빛 나는 분위기를 반영했음인지 러시아 리얼리즘의 줄기찬 흐름은 정체상태에 접어들었고 특히 네크라소프,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등의 잇달은 사망에 의해 그늘이 심해졌고 전성기를 넘긴 시체드린, 우스펜스키 등이나 이류작가들의 활동 정도로 거기에 찬란한 광택을 줄 수 없었다. 러시아 리얼리즘의 전통은 전적으로 상반되는 자질에서나마 다같이 인도주의적 정신을 구상화시켰던 두 사람의 작가 코롤렌코와 가르신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면서, 한걸음 나아가 1880년대부터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는 암흑시대의 풍경화가를 자처했던 ‘신분이 미천한’ 대작가 체호프의 간결함을 중시하는 냉정한 필치에 의해 새로운 세기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가르신편집

Vsevolod Mikhailovich Garshin (1855-1888) 러시아 소설가. 우크라이나 태생. 광업전문학교 졸업 후 자진해서 참가한 터키와의 전쟁에서 취재한 <4일간>(1877)으로 유명해졌다. 소년시대부터 광기의 발작에 고민했으며 결혼(1883)후 한때 쾌유하는 듯하다가 결국 자살했다. 대표작 <붉은 꽃>(1883)은 광인이 붉은 앵속화(罌粟花) 속에 악의 세계가 구현되어 있다고 믿고 이를 없애고 자기도 죽는다는 이야기로서 작자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코롤렌코편집

Vladimir Gala-ktionvich Korolenko (1853-1921) 러시아 소설가. 관리의 집안에 태어났다. 모스크바의 표트르 농림학교에 재학중 당국에 반항하여 퇴학을 당했다. 그 후 여러 직업을 전전 끝에 혁명민주주의 영향으로 농민들 속에 뛰어들어 선전활동에 종사했으나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대표작 <마카르의 꿈>(1885), <장님 음악사>(1886) 등의 작품은 민중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그린 것으로 휴머니즘이 넘쳐 있다.

체호프편집

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 러시아 소설가·극작가. 아조프 해안의 항구 도시 다간로그에서 5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식품 잡화상을 경영했고, 어머니는 나사점의 딸이다. 조부는 농노였으므로 몸값을 적립하여 일가의 자유를 산 사람이다. 체호프의 회상에 의하면 “재능은 부친한테서 마음은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았다”고 되어 있다. 1876년 체호프 일가는 파산하여 모스크바로 이주했으나 그만은 다간로그에 남아 가정교사를 하면서 자활했다. 대학 입학자격을 얻어 모스크바로 이주,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1879). 이때부터 유머 잡지나 신문에 ‘안토샤 체혼테’ 등의 필명으로 단편소설 집필을 시작했고 그 수입으로 집안의 가계를 지탱하면서 작가로서의 수업시대를 보냈다. 1884년 대학을 마쳤으나 ‘본처(本妻)인 의학’보다 ‘정부(情婦)인 문학’쪽에 더 힘을 기울이는 생활이 계속된다. 이듬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나가 신진작가로서 대환영을 받고 <신시대> 신문사 사주(社主) 수보린 및 문단의 장로 그리고로비치와 알게 되었다. 즉 그는 드디어 ‘귀족작가가 안일하게 자연에서 얻은 것을 청춘의 대가를 치르고 사들인’것이다. 1886년 그리고로비치로부터 재능을 낭비하지 말고 진지한 작품(장편)에 착수하라는 충고를 받고 자신에 대한 경박함을 반성했다. 그 성과는 희곡 <이바노프>(1887), 중편 <광야>(1888)에서 결실을 보았으나 동시에 작품의 무경향성을 비난받기도 했다. 같은 해 단편집 <황혼>으로 푸슈킨상(상금 500루블)을 탔다. 1889년 중편 <따분한 이야기>와 희곡 <삼림의 주인>(<와냐 아저씨>의 초안)을 완성했으나 후자의 상연은 평이 좋지 않아 재능에 대한 회의, 대학졸업 때부터 징후가 엿보이던 폐결핵, 가정 내의 여러 잡음 등에서 오는 우울증이 더욱 심해졌다. 사할린 여행은 이러한 정신적 위기에서의 탈출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1890년(4월-12월) 친한 벗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신 마차로 시베리아를 횡단, 유형지 사할린으로 실태 조사여행을 감행하였고, 귀로에는 동중국해·인도양·수에즈·흑해를 거쳐 귀국했다. 이 경험은 <시베리아 여행>(1890), <사할린 섬>(1892-94)에서 결정(結晶)을 보았다. 이 대모험을 계기로 1880년대 중엽부터 받아 오던 톨스토이주의 영향에서 벗어나 가장 다작의 시기를 맞는다. 중편 <결투>(1891), <6호실>(1892), 단편 <다락방이 있는 집>, 희곡 <갈매기>(다같이 1895), 단편 <상자 속의 남자> <귀여운 여자>(다같이 1898), 단편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계곡>(다같이 1899) 등이 이 시기의 걸작이다. 이 사이에 메리호보(모스크바 교외)에 별장을 사서(1892) 가족이 모두 이사했다. 그는 폐결핵의 재발에도 구애되지 않고 콜레라의 예방과 기근 구제사업에 몰두했고 두 번 유럽을 여행하여 톨스토이, 고리키 등과 사귀게 되었다. 1897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얄타에 별장을 짓고 여생을 크림에서 살기로 결심했다(1898). 1901년 모스크바 예술좌(藝術座)의 여우 올리가 크니페르와 결혼했으나 남편은 얄타에 처는 모스크바에 살아 공동생활의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별거하는 처 앞으로 보낸 서간은 훌룡한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만년의 명작 희곡 <세 자매> <벚나무 동산> 단편 <약혼자>(1902)는 이러한 기묘한 결혼생활과 악화되어 가는 병세와의 투쟁 가운데 집필된 것이다. 1904년 7월 15일 요양지인 남독일의 온천장 바덴와일라에서 44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냉정하게 “나는 죽는다(이히 슈테르베)”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체호프는 세기말부터 세기 전환기에 걸친 회색빛 나는 시대를 배경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그 어리석음·허무함·무의미함, 그리고 실현되지 않는 몽상을 일관해서 묘사했다. 초기 작품에서는 이들이 조소의 대상이 되었으나 점차로 우수가 깃든 가운데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 우수는 페시미즘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대의 ‘공평한 증인’으로서 한결같이 주의 주장을 피하면서 허위를 배격하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그가 또 이러한 입장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은 무엇보다도 작가의 정신력이 강인한 결과이며, 회의나 절망에 빠져버리는 허약한 심정과는 인연이 먼 것이다. 그의 정적인 리얼리즘 필치에 의해 묘사된 대상은 모두가 ‘이런 모양이어서는 안 되는’ 것들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사람은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젓하게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소박한 민중철학이 눈에 띄지 않게 그러면서도 무겁게 도사리고 있다.

지루한 이야기편집

Skuchnaya Istoriya (1889) 체호프 중편소설. ‘나’(저명한 대학교수)는 죽음의 예감에 고민하는 노경에 이르러 자기 생활의 무서운 진실을 발견한다. 명성과 이를 둘러싼 모든 것은 허무한 존재이다. 유일한 위안은 친구의 유자녀인 카차인데, 한때 여우였으며 실연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그녀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는 적어도 인생의 끝판에나마 자신의 허무를 극복하려 하는 자기에게는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 밖에 없고, ‘일반 이념’이 결여되어 있음을 안다. 카차의 “이따위로는 살 수가 없잖아요! 어쩌면 좋지요?”라는 필사적인 물음에 ‘나’는 답변을 못하고 망연히 서 있다. 이 작품이 나왔을 당시, 체호프의 명성은 점차 확립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노력가인 체호프는 명성을 신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경박한 명성의 함정을 앞질러 가서 그때까지 외적인 자기에게 겨누어졌던 비판과 회의의 눈을 자기의 내부로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체호프는 이 작품에 있어 준엄한 자기 검증에 견뎌 낼 수 있는 것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작자가 새로운 혼란의 요인에 불과한 모든 기성의 해답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890년 체호프를 사할린에로의 여행으로 몰아넣게 한 것은 이 궁지를 탈출하여 카차에의 회답을 모색하려는 집념이었다.

세자매편집

Tri Sestri (1900) 체호프 희곡. 모스크바 예술좌를 위해 쓴 것으로 초연은 1901년 1월. 배경은 19세기 말의 어느 지방 도시. 그곳에서 사는 세자매에게는 꿈이 있다. 질식할 듯한 시골을 벗어나 모스크바로 가는 것, 단 하나뿐인 남자 형제가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저속한 시골처녀와 결혼, 시회의원이 되고 처한테도 멸시당하게 된다. 속인인 남편에게 얽매여 있는 차녀 마샤는 실현되지 않는 사랑에 번민하고 3녀인 이리나는 약혼자를 결투에서 잃고 만다. 꿈은 차례차례로 추한 현실로 바뀌지만 이들 자매는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의 고생은 후에 사는 사람들의 기쁨으로 변해 행복과 평화가 이 지상에 찾아오는 것이 되지 않겠니…우리들의 생활은 아직 끝장이 난 것은 아니야, 더 살아 가 보자꾸나…” 체호프는 희곡이 우수의 색채로 칠해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미래의 시간은 빠져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색의 현실을 복종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벚나무 동산편집

Vishn vii Sad (1903) 체호프 희극.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모스크바 예술좌를 위해 쓴 것. 착상을 얻은 것은 <세자매>의 무대 연습중이라고 한다. 초연은 작자의 마지막 생일인 1904년 1월 17일. 몰락한 귀족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영지 ‘벚나무 동산’은 경영난에 빠져 벚나무를 잘라내고 별장지로 임대하든가 팔든가 해야 할 운명이다. 그러나 그녀도 그녀의 언니도 달리 타개할 만한 방도도 없는 채, 벚나무를 잃는 것에 대해 감상적으로 반발하고 결단을 하루 연기한다. 결국 벚나무 동산은 경매에 붙여져 어릴 때 이 영지를 맨발로 뛰어다니던 농노 출신의 벼락부자 장사꾼 로파힌의 수중에 들어간다. 아름다운 벚나무 동산의 소멸-여기에는 감미로운 애수감(哀愁感)이 있으나 과거에 매달린 채 목전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곧 그들은 체호프에게 있어 짜증스러움과 어리석음을 느끼게 하는 희극의 대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작가가 <벚나무 동산>을 일부러 ‘희극’이라 부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기말부터 혁명까지편집

세기말부터 혁명까지의 문학편집

世紀末-革命-文學 러시아 사회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와 병행해서 노동자의 수(數)도 증가되고 자본가계급의 부(富)도 축적되어, 사회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새로운 힘이 지주·귀족계급을 기둥으로 하는 제정 러시아의 낡은 사회체제와 충돌을 일으켜 동란과 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회의 발전과 함께 교육을 받은 계층이 급속도로 늘어나 앞선 시대의 침체를 타파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문화의 모든 국면에서 나타났다. 인민주의의 대표적 비평가였던 니콜라이 미하일로프스키는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이 시대까지 지니고 있었으나 러시아가 농민을 바탕으로 해서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인 사회주의에의 길로 매진한다고 생각하는 인민주의는 실제적인 사회의 움직임 앞에 무력해져갔다. 그 대신 당시 서유럽에서 도입된 최신사상인 마르크스주의가 점차로 지식인·노동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초기의 대표적 이론가는 프레하노프이다.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침체된 사실주의에 반동(反動)도 싹트고 있었다. 이미 코롤렌코나 체호프에게서는 섬세한 휴머니스틱한 감각이라든가 인상파풍의 기법이 엿보였으며 1890년대에 등장하는 고리키를 중심으로 한 신사실파(新寫實派)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시정과 낭만적 감정에 물들어 있었다. 이 신사실파의 사람들은 1899년 이후 모스크바의 작가 테레쇼프의 집에 매주 수요일마다 모였다. 이 작가 그룹을 ‘수요회’라 불렸는데 안드레예프, 부닌(1933년 망명 중에 노벨상 수상), 베르자예프, 치리코프, 세라피모비치 등도 멤버였다. 그후 고리키를 중심으로 해서 민주파에 속하는 작가들이 출판사 ‘지식’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 출판사의 문집(文集)에는 고리키의 대표작 <어머니> <참회> <오크로프 마을> <마토베이코제미아킨의 일생>, 체호프의 <벚나무 동산>, 쿠프린의 <결투> 등의 명작이 발표되었다. 이 ‘지식’ 그룹 이외에서는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은 <절름발이 공작(公爵)> 등으로 사실주의에 신풍을 불어 넣었고 프리슈빈이 북방의 민중생활을 개성적인 필치로 썼다. 이 시대에는 또한 ‘사회에 대한 문학의 봉사’라는 사고방식에서 떠나 예술창작의 신비와 형식 자체의 아름다움에 집념하는 새로운 상징파의 문학운동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정신적인 지주로서 철학자이자 시인인 솔로비요프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메레지코프스키의 시집 <상징(象徵)>(1892), 브류소프의 문집 <러시아 상징주의자>(1894-1895), 발리몬트의 왕성한 시 발표 등 신유파의 작품이 속속 나타났으나 사실주의와 사회비평의 전통이 강했던 러시아에서 그 어느 것이나 난해 및 무의미한 것으로 비판되어 ‘데카당파’라는 이름으로 매도(罵倒)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비평가 보루인스키가 활약하고 있던 잡지 <북방통보(北方通報)>, 디아길레프(후에 러시아 발레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가 주간을 맡고 있던 잡지 <예술의 세계> 등에 기고해서 점차로 힘을 길렀다. 폴라코프가 창립했고 상징파의 유능한 조직자 브류소프가 주관했던 출판사 ‘스코르피온사(社)’나 잡지 <천칭(天秤)>의 활약에 의해 문단에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기 시작, 20세기 초엽에는 상징파가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 상징파에는 이 밖에도 명작 <소(小)악마>(1902)나 유려한 서정시로 알려진 솔로구프나, 시·비평·희곡에 다채로운 필치를 휘둘렀던 여류시인 기피우스가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후기 상징파에 속하는 재능있는 세 신인 안드레이 벨르이, 알렉산드르 블로크, 비아체슬라프 이바노프가 등장한다. 산문의 세계에서도 메레즈코프스키의 철학적 역사소설, 벨르이의 환상적 소설, 독창적인 새 표현법으로 후대의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레미조프의 이야기, 섬세한 정감을 풍기는 낭만적인 자이체프의 작품 등은 상징시의 운동과 관련이 있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엿보인다. 안드레예프는 정치적 신조나 작품이 고리키에 가까운 점으로부터 출발했으면서도 점차로 페시미스틱한 경향으로 흘러 인간에의 불신과 절망 및 신비의 세계를 묘사하면서 상징주의에 접근한다. <사닌(Sanin)> 등에서 성애(性愛)를 대담하게 그린 아르츠이바셰프나 로프신이란 필명으로 테러리스트 생활의 체험을 모더니즘풍의 소설(<창백한 말<馬>>)로 쓴 사빈코프 등도 당시 잘 읽힌 작가들이다. 1910년경을 고비로 하여 상징주의는 그 대표자인 블로크나 벨르이가 러시아의 민족적 운명의 문제 및 현실 참여의 방향으로 나가는 동시에 아크메이즘(Akmeizm)과 미래파(Futurism)라는 새로운 유파가 나타나 상징파에 대립했다. 아크메이즘은 시의 기법이란 점에서는 상징파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었으나 상징파의 막연한 신비적 애매함에서 벗어나 명석하고 견고한 표현법을 택했다. 이 파는 쿠즈민, 그미료프, 그의 처인 안나 아후마토바, 고로데츠키, 만데리슈탐 등 언어 감각에 뛰어난 유능한 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9년 이탈리아에서 마리네티에 의해 제창된 미래주의는 곧 러시아에도 들어왔는데 가장 재능 있고 영향력이 강한 것은 마야코프스키와 흘레브니코프였다. 세련되고 아름다워 보이는 말을 배격하고 옛 문법을 부정하면서 말의 소재를 본래의 것대로 살려야 한다는 주장은 반감과 함께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도회의 새로운 문명을 찬미하고 옛 문화 유산을 부정하는 미래파의 반항적 기분은 그들을 혁명의 길로 접근시켜 나아갔다. 한편 연극의 세계로 눈길을 돌려 볼 때, 위대한 연출가 및 배우의 이름을 간과할 수 없다. 스타니슬라프스키-시스템으로 이름 높은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체코는 1898년 “예술좌”를 창립했는데, 그들의 활동은 이 시대의 연극에 활기를 불어 넣어 러시아 연극의 명성을 전세계에 떨치게 했다. 20세기 초에는 그들의 사실적인 경향에 맞서서 장치를 간단히 하고 상상력에 호소하는 연출을 시도한 코미사르체프스카야, 메이에르호리드, 타이로프, 와프탄코프 등 금세기의 유럽 연극에 커다란 영향을 준 연출가가 배출되었다. 러시아 혁명에 앞서는 20년간은 정치적으로 격심한 동요의 시대였으나 문화, 예술, 학술 전반에 걸친 진보라는 면에서 본다면 19세기 중엽에 견줄 만한 ‘은(銀)의 시대’였다. 20세기 르네상스라는 표현을 쓰는 학자가 있을 정도다. 문예이론 및 비평 부분에서는 알렉산드르 베세로프스키, 이바노프 라주므니크가 활약했고 사상계에서는 레닌, 루나차르스키 등 마르크스주의자와 서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와실리 로자노프, 셰스토프 등이 활동을 시작했다.

고리키편집

Maksim Gor’ky (1868-1936) 러시아 소비에트 작가. 본명 알렉세이 마크시모비치 페시코프. 니지니 노브고로드(현 고리키시)의 가난한 소목(小木)의 집에서 태어나 7세 때 고아가 되어 외조부에게 기탁되었다. 그러나 외조부의 가업인 염색업이 부진하여 초등학교는 불과 5개월 다녔을 뿐 막벌이꾼으로 나가게 되어 이거리 저거리로 떠돌아 다니며 직업을 전전했다. 이와 같은 생활 속에서도 독서에 열중, 독서에 의해 추악한 현실과는 별개의 세계에 젖으면서 고난의 생활을 견뎌낼 수가 있었다. 카잔에 체재한 18-20세 무렵 나로드니크(인민주의자)혁명가와 알게 되어, 혁명운동의 길에 들어섰다가 체포되었다. 1892년 티플리스(현 트빌리시)의 신문에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 그 후 창작활동에 들어갔고 1898년에 출판된 2권의 단편집으로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며 희곡 <밑바닥> 등에 의해 그의 명성은 한층 높아졌다. 출발점에서는 자유주의적, 무정부주의적이었으나 점차로 사회주의적 색채를 짙게 띠게 되었고 작품은 더욱 사실주의적, 사회비평적이 되어 갔다. 1905년 혁명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페트로파브로프스크 요새에 감금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나 이미 국내외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리키의 체포는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석방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카프리섬에 망명, 1907년부터 1912년의 러시아의 정치적 반동기에는 볼셰비키파와 인민주의의 한 계보인 사회혁명당과의 사이에서 동요되기도 하고 마르크스주의와 종교를 화해시키는 ‘건신주의(建神主義)’의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다가 레닌과 친교를 맺게 되면서 1917년 혁명 무렵에는 드디어 볼셰비키파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1912년 병 때문에 재차 이탈리아 소렌토에 가서 체류하게 되었다. 1928년 이후 조국에 돌아와 문단의 원로로서 문예행정, 사회활동, 작가들의 교육면 등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1936년 6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는데 그 장례식은 전국적인 행사로 치러졌다. 그의 창작은 대별해서 3기의 시기로 구분할 수가 있다. 제1기에는 러시아의 부랑자(浮浪者)나 ‘옛날엔 인간이었던 자들’의 생활을 그린다. 제2기에는 <포마 고르제예프>(1899), <세사람>(1900)에서 시작, 장편 <어머니>에 이르는 시대로 리얼리즘과 혁명 선전의 목적의식이 확실히 나타나 있다. 제3기는 작가적 원숙의 시기로 걸작 <유년시대> <사람들 속에서>(1916), <나의 대학> <추억>(다같이 1923) 등 자전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 나왔다.

밑바닥편집

Nadne (1902) 고리키 희곡. 제나름의 과거를 짊어진, ‘옛날에는 사람이었던’몰락한 인간들이 하루하루 생활의 중압감에 신음하고 있는 밑바닥 생활이 그려져 있다. 값싼 여인숙에 나타난 순례하는 노인 루카는 절망에 허덕이는 밑바닥 인간들에게 아름다운 환상에 가득 찬 정신적 구제의 처방전을 준다. 그러나 여인숙의 주거자들 사이에서 언쟁 끝에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여권을 갖고 있지 않는 루카는 감쪽같이 꼬리를 감춰 버리고 만다. 노름꾼인 사친은 약한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루카 노인과 같은 거짓이 필요할지 모르나 강한 자에게 있어서는 진실이야말로 인간의 신(神)이라고 부르짖는다. 인류의 미래를 믿는 고리키의 내심의 부르짖음이 사친의 독백을 통해 뚜렷이 울려 퍼진다. 1902년 모스크바 예술좌에서 초연되어 크게 히트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상연되고 있는 러시아 연극의 고전적 작품이다.

어머니편집

Mat (1906) 고리키 장편소설. 1906년 고리키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사명을 띠고 미국에 갔을 때 쓴 것. 나지니 노브고로드 근교의 공장지대 소르모보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모델이 되어 있다. 청년 노동자 파베르가 데모에 참가하여 체포된다. 무학인 어머니 니로브나는 혁명가들의 자기 희생적 정신에 신앙심 깊은 자세로 접근해 가서 마침내 혁명가의 신념을 얻을 정도까지 성장해 간다. 이 소설은 격조 높은 산문으로 쓰여 있으나 인물묘사가 때에 따라 평면적, 도식적이어서 문학적으로는 좀 불만스럽다. 그러나 이 소설이 성공한 점은 오히려 그 사회적 의의에 있으며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리키의 사회주의에 소설이란 옷을 입힌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혁명운동에 궐기하는 노동대중을 테마로 다루었다는 참신한 면에 가치가 있으며 그 후 나타나는 일련의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본보기가 되었다.

유년시대편집

Detstvov (1913) 고리키 중편소설. 속편인 <사람들 속에서> <나의 대학>과 함께 고리키의 자전소설 3부작을 이루는 것으로 그의 최고 걸작. 담담한 필치 속에 서정미와 가냘픈 아이러니를 뒤섞어 작자의 10세까지의 성장과정을 뒤쫓고 있다. 놀랄 만한 감수성을 지닌 소년의 눈으로 혁명 전 러시아 사회의 저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같은 작자의 <추억>과 함께 동시대의 회상문학 가운데 최고 걸작이며 고리키 문학의 독자성을 알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가 되고 있다.

메레즈코프스키편집

Dmiitrii SergeevichMerezhkovskii (1865-1941) 러시아 시인·소설가. 보들레르의 영향으로 시집 <상징>(1892)을 내놓아 러시아에 처음으로 상징이란 말을 사용함과 동시에 러시아 상징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평론 <러시아 문학 쇠퇴의 제원인과 새로운 주류>(1893)는 상징주의의 최초의 선언서이자 평론이다. 3부작 <그리스도와 반(反)그리스도>(1894-1904)는 육체와 정신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있고 두 번째의 3부작 <파벨 1세>(1908), <알렉산드르 1세>(1913), <12월 14일>(1920)은 궁정의 내분을 그린 작품이다. 평론으로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1902)가 있는데, 여기에서 톨스토이는 육(肉)의 종교적 관조자이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혼의 관조가라 규정짓고 양자는 영구히 대립·모순하나 한쪽은 육(肉)의 영화(靈化)를, 한쪽은 영(靈)의 육화(肉化)를 시도함으로써 궁극에서는 합일한다는 것이다. 혁명 후 1919년 파리로 망명 반공주의자로 활약하고 만년에는 파시즘을 옹호하기도 했다.

발몬트편집

Konstanin Dmitrievich Balmont (1867-1942)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적되었다. 초기 작품 <시집>(1890), <북방의 하늘 밑에서>(1895), <정적>(1898), <태양같이 되리>(1903)를 내놓으며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얻었다. 초기에는 혁명에 동정적이었으나 1905년 파리로 망명, 세계 각지를 여행하였다. <오시리스의 나라>(1914), <흰 건축가>(1914), <뱀의 꽃, 멕시코 여행소식>(1910)은 여행의 소산이다. 또한 이집트·멕시코·페루·인도 등지의 시를 수집하여 번역하였다. 한때 귀국하여 10월 혁명을 찬미하다가 다시 망명하였다. 이 밖에도 연작시(連作詩) <복수자의 노래>(1907)가 있다.

부닌편집

Ivan Alekseevich Bunin (1870-1953) 러시아 시인·작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간되는 주간지 <조국>에 시를 투고하면서 문필생활을 시작했다. 도서실에서 근무를 하다가 체호프 등과 사귀게 되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방랑으로 젊음을 보내다가 1909년 러시아 학술원 회원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의 11월 혁명을 반대하여 발칸 지방으로 망명했다가 프랑스로 건너갔다. 농촌의 자연미를 노래한 <시집>(1891)과 푸슈킨상 수상 작품인 <낙엽>(1901)은 장원(莊園)의 정적과 미와 조락(調落)의 비수(悲愁)를 읊었으나 그의 산문은 주로 하층민의 생활을 표현하고 뒤떨어진 러시아와 가난한 농민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형제>(1913-1914)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는 비관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이 나타난 작품들이며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아르치바셰프편집

Mikhail Petrovich Artsybashev (1878-1927) 러시아 소설가 집안 출신으로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까지 러시아에서 한때 유행한 시니즘 계열의 대표적 작가. 사회적·정치적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현실에 등을 돌리고 오직 개인적 주장, 특히 연애의 자유, 성애(性愛)의 해방을 제창하여 사회적 시야가 퍽 결여된 입장이었다. 육체의 성서(聖書)로 불리우는 <사닌>(1907)과 <최후의 일선(一線)>(1912)이 대표작이다. 이 밖에 희곡 <질투>(1914)와 감상집 <영원한 신기루>(1922)를 발표했다. 10월 혁명 후 폴란드로 망명하여 바르샤바에서 죽었다.

자이체프편집

Boris Konstantinovich Zaisev (1881- ? ) 중앙 러시아의 몰락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네오 로맨티시즘의 대표적 작가. 귀족 인텔리겐차의 미세한 신경을 가진 최후의 거장이라 불리운다.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를 중퇴하고 1901년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프라우다>지 편집인을 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는 메레즈코프스키가 주재한 잡지 <새로운 길>에 단편 <조용한 새벽>(1906)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잃어버린 귀족적 장원생활을 묘사하고 과거의 생활과 자연의 영위와의 융합을 칭송하여 인간 운명에 대한 숙명적 철학관으로 일관되어 있다. 22년 이탈리아로 망명, 이어 파리로 가서 작가생활을 계속했다. <금장식(金裝飾)>(1926), <먼나라>(1925), <청춘>(1950) 등이 있다. 투르게네프에 대한 전기 <투르게네프의 생활>(1932)을 발표하기도 했다.

안드레예프편집

Leonid Nikolavich Andreev (1871-1919) 러시아 소설가·극작가. 중부 러시아의 오룔에서 측량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학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다녔고 후에 모스크바 대학에 전학했다. 일찍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좀처럼 인정을 받지 못했고 세기말의 불안과 절망의 분위기 속에서 염세철학의 영향을 받아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으나 취급한 사건이 민사사건 단 한 건 뿐이었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잡문을 써서 겨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1900년경 고리키가 그를 발굴하여 당시 유명하던 문학 그룹 ‘수요회’에 소개했고 이 회합에서 그의 단편 <침묵>을 낭독했다. 이 작품이 호평을 얻어 그는 그룹의 유력한 멤버가 되었다. 출발점에서는 고리키나 체호프류의 사실적인 휴머니스틱한 작품이었으나 변덕스러워서 사상적으로 불안과 동요를 거듭했던 안드레예프는 당시의 모더니즘적 시류에 빠져 역설적·상징적·형이상학적인 것에의 관심을 굳게 가졌다. 1905년의 제1혁명 이후 그는 극작 <인간의 일생>(1906), <기아왕(飢餓王)>(1908)이나 소설 <암흑> <나사로> <나의 수기> 등에서 상징주의의 교의 및 생과 사의 신비에 관한 철학을 알기 쉬운 형식으로 제시하여 신진작가로서 독서계의 인기를 독점했다. 1906년의 정치적 반동기에는 희망을 끊긴 돌파구가 없는 사회에 대한 염세적 기분이 강해져 갔다. 인간의 암흑면에 대한 감수성의 예민함, 신비적·종교적인 것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의 수사적이며 화려한 문장은 당시의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은 마치 깊이 있고 무엇인가 뜻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당시 전세계에서 널리 읽혀져 문학사상의 지위도 확대되었으나 그의 작품은 저속하게 찬란한 표현에 비해서는 내용이 빈약하고 멜로드라마적이라는 비평도 받았다. 오늘날에도 걸작으로서 평가되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인가 하면, 오히려 사실적 감각이 풍기는 작품 <지사(知事)>(1906), <일곱 사형수 이야기> 등이다. 만년에는 혁명운동에 등을 돌렸고 혁명 후 핀란드에서 죽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오랫동안 냉대를 받았으나 최근 리얼리스트로서의 면이 재평가되고 있다.

일곱 사형수편집

Rasskaz o semi poveshennykh(1908) 안드레예프 중편소설. 1905년에 있었던 혁명가 대량 처형의 생생한 인상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대신(大臣)을 암살하려 했던 여인 2명을 포함한 5명의 혁명가가 사전에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 다섯 사람 외에 살인과 폭행을 저지른 2명의 사형수가 있어 다같이 처형의 날을 기다린다. 여자 가운데 하나인 타니아는 젊었으나 마음씨가 착해 동지들을 위해 꾸준히 신경을 쓴다. 또 하나의 여성인 뮤샤는 마음 속에 정열이 불타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긍지를 느끼고 있다. 세르게이는 단식을 통해, 정신 속에가 아니라 건강한 자신의 육체 속에 숨은 죽음에의 공포를 억제하려 한다. 와실리만은 홀로 죽음의 공포에 사로 잡혀 동요한다. 베르네르는 죽음과 직면함으로써 비속한 삶에의 권태를 잊고 죽음 속에서 자신들의 신념이 완성되는 것을 냉정히 응시한다. 이렇게 해서 처형의 날이 찾아 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혁명가들의 성격묘사와 죽음에 직면한 인간해부에 뛰어났다. 안드레예프의 페시미즘도 여기에서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이 어떻게 삶에 대해 뜻을 부여하려 노력하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어렴풋한 미래에의 기대와 기구 같은 것이 감지되며 오늘날도 여전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블로크와 후기상징파편집

-後期象徵派 데카당파로 불리었던 상징주의 초기의 시인들, 즉 브류소프나 바리몬트는 프랑스 상징시의 훌륭한 이식자(移植者)였으나 예술의 독립성과 아름다움에만 몰두하는 유미파였다. 그러나 다음에 나타난 상징파의 제2세대인 이바노프(1886-1944), 벨르이(1880-1934), 그리고 블로크(1880-1944)는 러시아 시(詩)의 전통인 독일 낭만파와 이에 가까운 추체프 및 페트에 관심을 돌려 니체나 소롤비요프의 영향하에 철학적 신비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상징주의는 미적 신조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러시아의 민족성·종교·슬라브주의적 경향에의 경도(傾倒)를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서구에서 배우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상징주의 운동은 이와 같이 해서 전대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네크라소프와 같이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과 종교적·사상적 교훈을 깨우친다는 러시아적 예술로 재차 복귀하게 된 것이다. 뱌체슬라프 이바노프는 고전 및 철학에 관한 광범한 지식이라는 점에서 20세기 르네상스를 참으로 대표하는 휴머니스트였다. 작품은 신비적이며 어느 것이고 난해하여 읽는 데는 고전적인 지식을 필요로 한다. 여러 가지 많은 점에서는 20세기 서구의 엘리어트류(類)의 지적인 시풍을 연상케한다. 그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주거는 사람들이 흔히 ‘탑’이라 불렀고 당시의 유력한 시인, 예술가, 철학자들이 수요일마다 모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뱌체슬라프’라 불렀고 신봉자들도 많았다. 후에 사회적·국수적 색채를 더욱 짙게 했으나 혁명 후 한참 동안은 러시아 국내에 머물면서 바쿠 대학의 고전학 교수로 일했다. 1920년 잡지 <예술의 말>에 실린 걸작 <겨울 소네트>는 혁명의 비극을 고전적인 명확한 이미지를 통해 묘사, 러시아 혁명을 역사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눈과 얼음으로 상징되는 자연 그 자체의 힘이 가져온 것으로 노래하고 있다. 1924년 이탈리아로 망명,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 죽었다. 안드레이 벨르이(본명은 보리스 부가예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수학 교수의 집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문학에 재질을 나타냈다. 20세 때 벌써 상징파의 대표적 인물이 되어 그가 발표하는 시, 시적 산문 및 소설은 항상 물의를 일으켰다. 블로크의 벗이자 솔로비요프의 제자인 그는 신비가로서 출발했으나 후에 가서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보이면서 미래파를 지지하거나 루돌프 시타이너의 인지학(人知學) 신봉자가 되기도 했고 1930년대에는 자기류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시는 음악적인 구성, 훌륭한 음조 등이 특색인데 이것은 그의 시론가(詩論家), 그리고 문예이론가로서의 깊은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소설 <은빛 비둘기>(1910), <상트페테르부르크>(1913-1916)는 혁명 전 소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조이스나 프루스트와 견주어진다. 그는 1917년 혁명을 혁명적 구세사상(救世思想)의 입장에서 환영하고 장시 <그리스도가 부활한다>를 썼다. 그의 특색은 용어 및 표현에 관한 대담한 새로운 실험에 있으며 그가 장기로 하는 음조를 중시한 ‘시적 산문’은 소비에트 시대 초기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블로크(1880-1921)에 있어 러시아의 상징주의 운동은 그 절정에 도달했다. 법률학 교수의 아들이자 외할아버지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학장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미술·문학에 둘러싸인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라 고도로 높은 교향을 몸에 익혔다. 솔로비요프와 상징주의적 시대 사조의 영향을 입어, 후에 자기 아내가 된 화학자 멘데레예프의 딸 류보피에 대한 사랑을 <아름다운 부인의 노래>에서 읊었다. 이 시집은 상징파인 동료들로부터 솔로비요프 철학이 주장한 바, 세계를 구제하는 ‘영원의 여성’에 관한 찬가로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의 반동기 속에서 그는 현실에 눈뜨고 이 세계의 비참, 부정 및 고뇌를 점차 노래하게 된다. 그의 시 가운데는 새로운 ‘도시’의 풍경이 나타나며 ‘아름다운 부인’에 대신하여 그의 뮤즈가 되는 것은 변두리의 싸구려 캬바레에서 취안(醉眼)에 비치는 ‘낯선 여자’였다. 그러나 그는 점차로 삶과 문화 문제에 관해 깊은 관심을 품게 되어 러시아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또한 혁명에 있어서의 지식계급의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하등의 주저 없이 민중의 움직임과 일체가 되어 서사시 <스카타이 사람>과 <12>를 발표, 혁명을 찬미했다. 그러나 혁명 후의 피비린내 나는 가혹한 시련과 창작의 속박 속에서 고뇌를 거듭하는 가운데 일생을 마쳤다.

12편집

Dvenadtsati (1918) 블로크의 장편시. 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아름다운 서사시로서 구러시아 문학의 최후를 장식함과 함께 새로운 러시아문학의 탄생을 고하는 걸작이다. 시의 주인공은 눈보라에 휩싸인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행진해 가는 12명의 적군 병사들이다. 패배한 낡은 사회질서는 휘몰아치는 북풍과 눈보라 속에서 멸망해 가려 하고 있다. 이 12명의 병사는 동시에 12사도를 암시하며 최후에는 민중의 왕인 백장미의 관을 쓴 그리스도가 그들을 인도해 간다. 형식면에서는 다소 이색적이어서 공장의 삐라, 정치적 슬로건, 혁명가의 후렴 및 민요 등을 도입, 갖가지 리듬과 음조를 완벽한 기교로 교착시키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생생한 사실적 장면은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10일간>에서 보는 것과 같은 박진감마저도 지니고 있다.

 

 
소 련편집

소련 문학편집

蘇聯文學 혁명 직후에는 정부가 당면한 긴급문제에 몰두하여 문학에 대해 그다지 압력을 가하지 않음으로써 상당히 폭 넓은 자유가 허용되어 혁명 전부터의 문학조류와 새로 등장한 프롤레타리아 문학파가 공존(共存)했고 문화의 꽃이 자유로이 피는 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시대도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러시아에서는 혁명 전부터도 문학은 항상 사회적인 영향력을 지녀 정부는 문학에 대하여 이상하리만큼 관심을 보이면서 검열과 통제를 가했으나 소비에트 체제가 굳어져감에 따라 사회주의 건설의 목적을 위해 봉사할 것이 강요되는 한편, 문학이 갖는 교육적 역할이 중시되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문학에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같은 테마와 경향을 지닌 ‘공인’받는 재미없는 문학이 대량 생산되기에 이르렀고 자유로운 창작은 ‘지하문학’ 혹은 ‘망명문학’의 방향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죽은 후 문학에 정치의 개입이 완전히 일소된 것은 아니었으나 소련 사회 전체의 신풍을 반영하여 새로운 태동이 감지되었다. 이 변화는 일랴 에렌부르크가 1954년에 쓴 <해빙>이라는 중편소설의 제목을 따서 ‘해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에렌부르크는 소련의 생활을 행복하고 낙관적으로 묘사하라는 정책을 따르지 않고 외롭고 절망적인 사람들에 관해 썼다. 그러나 1962년 스탈린 폭정시기의 노동자 수용소를 그린 솔제니친의 중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발간 이후 엄격한 검열은 다시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는 젊고 자유로운 작가들이 소련작가동맹에 나타났는데 젊은 시인 예프투셴코와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가 특히 주목된다. 두 사람 모두 삶의 자유와 창조성을 지지했는데 <바비야르>(1961)라는 시에서 예프투셴코는 유대인에 대한 소련의 편견을 비판했고, 보즈네센스키는 경험을 통한 자기 분석을 주제로 했다. 이 시기에는 바실리 악쇼노프를 비롯한 젊고 재능 있는 산문작가들이 등장하여 소련생활의 부정적인 면을 그렸고 바실리 슈크신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은 농촌생활의 어려움과 집단농장의 가난을 글로 나타냈다. 공산당의 검열제도로 인해 출판할 수 없었던 작품들은 복사본으로 비밀리에 읽혀졌고 어떤 작가들은 국내에서는 공식으로 출판하지 못하는 작품을 해외에서 출간했다. 대표적으로 파르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가 1957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다음 해 다른 서유럽 국가와 미국에서도 출간되었다. 파스테르나크는 이 소설을 포함한 여러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소련 정부의 압력 때문에 상을 거부했다. 안드레이 시냐프스키는 여러 편의 단편을 1959년 해외에서 출간했다. 시냐프스키는 경찰국가의 공포스러운 일상을 그렸는데 1966년에 체포되어 1971년까지 감옥생활을 하다가 1973년에 프랑스로 이주해다. 서유럽에서 1968년에 발간된 솔제니친의 <제1권(圈)>은 스탈린시대에 정치범으로 있었던 한 인간의 삶을 보여주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1918-1956>은 1973년에서 1976년 사이에 서유럽에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정치범들을 수용한 소련 노동자 수용소의 역사를 다룬 것이다. 솔제니친은 197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고 1974년에 소련에서 추방당하여 스위스에서 2년간 살다가 1976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그 후 1990년 소련 정부는 솔제니친의 시민권을 복권했다. 1970년에서 1980년까지는 정치 규제로 인해 소련에서 문학 작품의 출판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은 자신들이 본 이기주의와 위선을 글로 표현하여 소련사회를 비판했다. 발렌틴 라스푸틴은 농촌 지방의 도덕과 규범의 붕괴에 관해 썼고 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는 소련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소설 <병사 이반 촌킨의 일생과 이상한 모험>(1975)을 썼다. 유리 트리포노프는 <또 다른 삶>(1975)과 <나이 먹은 남자>(1978)와 같은 작품에서 소련 지식인들이 처한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었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검열을 완화하고 정보와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을 취했다. 그리하여 아흐마토바나 파스테르나크와 같은 중요한 소련작가의 작품을 출간하기 시작하여, 1988년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가 처음으로 소련에서 출판되었다. 그러나 소련문학은 1991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그것은 소련이 무너지고 여러 개의 독립국가로 분열하여 러시아와 10개의 공화국이 연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11월 혁명과 문학편집

-月革命-文學 혁명 직후의 소위 전시공산주의(戰時共産主義) 시대는 국내의 반혁명군 및 외국 간섭군과의 힘에 겨운 투쟁의 시대로서 물자의 결핍이 대단했고 출판활동은 크게 위축되어 겨우 한 해에 2천 점을 셀 뿐으로 그것도 대부분이 얄팍한 정치 팜플렛에 불과했다. 지명(知名) 작가의 태반인 부닌, 쿠플린, 자이체프 등의 신사실파도, 바리몬트, 안드레예프, 메레지코프스키, 레미조프 등의 모더니스트도 나라를 탈출하여 망명대열에 끼었고 고리키마저도 국외로 탈출하는 시기가 있었다. 한때는 파리, 프라하, 베를린 등지에 러시아 본국보다 많은 망명작가들이 산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혼란 속에서도 새로운 문학부활의 조짐이 나타났고 그 부활은 먼저 시부문부터 시작되었다. 시인들은 종이가 부족했기 때문에 포장지 뒤에다 인쇄를 한다든가 카페나 집회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시인들은 혁명에서 영감을 얻어 블로크 및 벨르이처럼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혁명을 찬양하기도 하고 예세닌과 같이 농민의 목가적인 꿈을 혁명에 기탁하는가 하면, 보로신과 같이 국민의 힘의 발현을 혁명 속에서 보기도 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장간 파(派)’는 공산주의의 승리에 열광했고 데미얀 베도누이는 정치적 우화시(寓話詩)로 시사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는데 당시에는 미래파, 이미지니스트, 인상파, 표현파 등 많은 시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두 사람의 시인이 걸출했는데 그들은 예세닌과 미야코프스키이다.

예세닌편집

Sergei Aleksandrovich Esenin (1895-1925) 소련 시인. 랴잔에 매우 가까운 농촌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혁명 전부터 농촌의 자연과 생활을 섬세한 서정으로 노래하여 문명을 높였으나 혁명이 닥쳐 오면서 혁명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융합하는 전원적 낙원의 실현을 꿈꾸었으며 장편시 <이노니야>(1918)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예세닌은 시단의 유파로 말하면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를 무엇보다도 중시 밝은 인상과 이미지 속에서 언어를 소생시키려하는 이미지니스트에 속해 그 대표적 시인으로 꼽힌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간결하고 음악적이며 다른 이미지니스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억지 기교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스스로 ‘최후의 농촌 시인’으로 자처했던 예세닌의 몽상은 사회주의 건설의 진전과 농촌에서 볼 수 있던 그리운 옛 러시아의 소실(消失) 앞에 점차 허물어져갔다. 유명한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도 결혼은 실패로 끝나 그의 우수를 한층 짙게 했다. 서사시 <안나 스네기나>(1925) 등에서 러시아 농촌의 변혁을 적극적으로 묘사하려 했으나 사회의 급격한 변혁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고 레프 톨스토이의 손녀 소피야와 결혼했으나 그것도 구원이 되지 못해 음주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 끝에 레닌그라드의 호텔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그 후 오랫동안 예세닌은 퇴폐적 경향의 대표인 양 냉대를 받았으나 오늘날에는 민중적인 형식 속에 상냥한 감정을 읊은 시인으로서 인정되어 애창되고 있다.

마야코프스키편집

Vladimir Vladimirovich Maiakovsky (1893-1930) 소련 시인. 그루지아의 한촌(寒村) 바그다디의 산림관(山林官)의 집에서 태어났다. 바쿠 유전지대의 혁명적 분위기가 소년기의 마야코프스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부친 사망 후 모스크바로 옮겨 볼셰비키 혁명운동에 가담, 2년간에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 그 후 모스크바의 미술학교에 입학, 미래파 시인 그룹에 속하면서 과거의 문학유산 및 부르주아 문학의 전통에 철저한 반항을 보였다. 노란빛 자켓을 허리 아래까지 내려뜨려 사람들을 몹시 놀라게 하는 화려한 시위로 유명해진 마야코프스키는 실제 작품면에서도 <바지를 입은 구름>(1915)이나 <등뼈로 만든 플롯>(1916) 등의 거친 리리시즘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마야코프스키는 혁명을 ‘나의’ 혁명으로 받아들여 인간의 해방을 초래하고 개인의 역량을 개화시키는 혁명의 승리를 노래했다. 그는 모든 재능을 혁명의 대의명분을 위해 바쳤고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시의 제재(題材)를 찾았다. 그의 시법 또한 혁명적이었다. 토막토막 짤린 짧은 시구문이 그랬고 의미 및 음조를 강조할 수 있도록 단어를 행으로 나누어 나열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일상어의 교묘한 구사와 거친 유머의 사용도 혁명적이었다. 그는 집회나 공장에서 자작의 시를 자주 낭독했는데 그의 이러한 낭송하기 용이한 시는 고정화된 시어의 파괴를 지향했고 억센 힘과 동적인 비유에 충만해 있었다. 거기에다 뛰어난 서정적 재능과 기발한 발상 및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해서 그의 작품이 단순한 프로퍼갠더로 전락되는 것을 막고 있다. 특히 혁명 초기의 작품이 그러하여 유토피아적이고 예언적인 밝음이 있다. 희곡 <미스테리 부프(Mystery Bouffo)> (1918)는 아리스토파네스를 연상케 하는 활력이 있고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한 서사시 <150000000>(1920)도 공상의 비약과 거친 유머에 차 있다. 20년대에 들어와 미래파의 옛 동지들을 중심으로 한 잡지 <레프>(예술좌익전선)를 발간, 전위적 문학운동의 중핵이 되는 한편, 레닌의 죽음을 노래한 <블라디미르 일리이치 레닌>(1924), 풍자 희극 <빈대>(1929), <목욕>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혁명의 정열을 격렬하게 노래하는 가운데 내부로부터 좌절감이 싹텄고 시사적 문제에 관해 노래하는 것이나 시를 낭독하는 일에도 싫증이 났다. 그의 국가에 대한 봉사는 자발적으로 자신이 부과한 의무였으나 그 노력도 헛되어 당시 점차로 재편성기에 접어든 문학계의 공적 권위자들이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1930년 4월 권총 자살을 했는데 죽기 직전에 쓴 유고에는 “사랑하는 작은 배는 세속에 충돌했다”고 씌어 있었다. 그의 자살은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스탈린이 그를 소비에트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예세닌처럼 냉대를 받지는 않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명성은 높다.

20년대 문학편집

-年代文學 1921년부터 내전으로 황폐된 국민경제를 바로 잡고 전시 공산주의의 지나쳤던 점을 시정하기 위해 레닌은 ‘네프’(신경제정책) 방식을 도입, 자본주의와의 일시적인 타협을 단행하였다. 이와 함께 문학면에서도 급속한 프롤레타리아 문학 확립이라는 방침이 포기되고 온갖 유파와 비공산주의적인 ‘동반자 작가(同伴者作家)’들에게도 대폭적인 자유활동이 인정되어 침체된 문학계에 활기가 주어졌으며 잡지 및 서적 출판도 재빨리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또한 자유로운 토론과 문학의 자유경쟁도 벌어졌다. 비평이나 문학연구도 주로 형식주의자로 불리는 한 무리의 유력한 연구가들에 의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는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고 오늘날에 있어서조차도 이 시대의 수준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정도였다. 망명 중이던 알렉세이 톨스토이나 예렌부르크도 귀국하여 문학계에 복귀했다. 혁명 전의 문학이 재차 강력히 부활하여 벨르이나 레미조프의 영향이 피리냐크나 바베 등의 동반자 작가들에게서도 엿보였다. 부르주아 사회를 풍자한 중편소설 <섬 사람들>(1922)로 이름 높은 자먀틴도 리얼리스틱한 묘사력과 표현주의적 기법을 교합하여 젊은 작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고 문학 그룹 ‘세라피노프 형제’를 탄생케 했다. 자먀틴의 풍자소설 <우리들>(1924)에 견줄만한 반(反)유토피아 소설이나 가장 악질적인 반소적 문학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금단의 책으로 꼽히고 있다. 이 시대는 혁명 직후의 시시대에 대신하여 산문, 특히 소설이 융성한 시대였다. 고리키, 세라피모비치 등의 구시대의 작가에 이어서 푸르마노프, 파제예프 등의 프롤레타리아파, 프세보로드 이바노프, 레오노프, 페딘, 바벨리, 필리냐크 등의 동반자 작가가 잇달아 등장했다. ‘일리프와 페트로프’의 필명으로 알려진 2인조의 풍자 작가 ‘세라피노프 형제’의 한 사람인 풍자작가 조시첸코 등도 활약했다. 이 20년대의 ‘네프’시대는 시에 있어서 자유로운 실험의 시대로서 파스테르나크와 같은 순수시의 혈통이 끊기지 않는 시인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1921년에 망명하여 39년에 귀국한 후 전시 중에 자살한 여류시인 마리나 츠베타에바도 그와 가까운 경지에 있었다. 낭만적 신풍을 불어넣었던 바그리츠키, ‘세라피노프 형제’의 한 사람이었던 니콜라이 지호노프, 마야코프스키의 제자로서 출발한 아세예프 등의 시인들이 속속 등장했다. 연극에는 타이로프, 메이에르호리드 등의 실험이 혁명 후에 와서도 계속되었고 극작도 후세보로드 이바노프의 작품을 각색한 <장갑 열차(14-69)>, 와렌친 카타예프의 <원구적법(圓求積法)>, 부르가코프의 <토우루빈가(家)의 나날>, 트레뇨프의 <류보피 야로바야>, 키르숀의 <철로는 울린다> 등의 명작이 나왔다.

세라피노프 형제편집

-兄弟 Serapinovi Bratiya 1921년 자먀틴을 중심으로 모인 문학 그룹으로 E. T. A. 호프만의 소설 가운데에 나오는 은자(隱者)의 이름을 자기들 그룹에 붙였다. 그들은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비정지주의를 주장했다. 그 그룹에는 룬츠, 프셰보로드 이바노프, 페딘, 가베린, 니키친, 조시첸코, 슈크로프스키 등의 산문작가들이 있었으나 거의 모두가 복잡한 플롯과 장식적인 문장을 장기로했다. 일찍 죽은 룬츠를 제외하고는 그룹 해체 후에도 제각기 독자적인 작가적 완성에의 길을 더듬었다. 프셰보로드 이바노프는 소비에트 산문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혁명 전후의 각지의 갖가지 불행한 사건들을 선명하게 묘사했다. 풍자작가 조시첸코는 <나자르일리치 시네브류호프의 이야기>(1922)로 이름을 떨쳤다. 이 작품에는 그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그로테스크하며 우스꽝스러운 풍자적 재능이 충분히 발휘되어 있다. 카베린은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을 써서 문체나 소설작법의 기교에 정열을 쏟았다. 슈크로프스키는 형식주의에 속하는 비평가였으나 주목할 만한 작품 <감상적 여행>과 서간체 소설 <동물원 혹은 사랑에 관한 것은 아닌 편지>를 썼다. 이 그룹에는 이 밖에 시인인 포론스카야 부인과 니콜라이 치호노프, 블라디미르 포즈네르 및 비평가인 그루제프도 참가했다. ‘세라피노프 형제’파에 가까운 사람으로는 레오노프와 문학사가(文學史家)이자 역사소설에도 뛰어났던 투이냐노프 등이 있다.

동반자 작가편집

同伴者作家 네프 시대에 등장한 한 무리의 비공산주의 작가들을 가리키는 말로 트로츠키가 문학론집 <문학과 혁명>에서 처음으로 이 용어를 썼다. 가장 특이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필리냐크(1894-1945)였다. 그의 소설은 상징주의와 적나라한 묘사가 교합된 대담한 실험적 문체로 장식되어 있다. 장편 <벌거숭이 해<年>>(1922)는 혁명 후의 소비에트 현실을 처음으로 파노라마식으로 다룬 작품으로서 획기적인 것이었으나 공산주의와 니체주의, 국수주의가 뒤섞인 그의 세계관은 소비에트 문단의 주류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지워지지 않는 달의 이야기>(1925)에서 스탈린의 푸룬제 암살을 취급하는 등 반주류적 색채가 강해, 이 때문에 1937년에 체포되어 옥사를 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이와 똑같은 운명은 벨르이풍의 장식적 문체를 구사한 아루촘 베쇼루이에게도 찾아 왔다. 이삭 바벨리(1894-1941)도 마찬가지로 숙청의 희생물이 되었는데 낭만적 격렬함과 비극적인 잔인함, 그리고 아름다움이 뒤섞인 독특한 문체를 지니고 있었다. 대표작 <기병대>(1926)는 작자의 종군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내전의 험악한 에피소드를 묘사하고 있다. 레오노프(1899- ? )는 소련작가의 제1인자이나 당시는 동반자 작가의 전형인물로 지목되었다. 호프만이나 레스코프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깊은 심리적 분석을 통해 혁명과 개인의 문제를 추구하여 갔다. 장편 <오소리> <도둑>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혁명시대에 있어서의 개인의 문제는 올레샤(1899-1960)의 아름다운 소설 <선망(羨望)>(1927)의 주제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레오노프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휴머니즘으로서 받아들였다. 극히 과작(寡作)의 작가였으나 아동문학의 걸작 <세 명의 뚱뚱보>(1926)를 남기고 있다. 이 밖에 동반자 작가들 가운데 가장 현실참여의 색채가 강했던 라브레뇨프, 시베리아의 자연을 묘사한 세이프리나(1889-1954) 등 유능한 작가가 많아, 20년대의 문학계에서는 그 작품의 질과 양 어느 면에서나 프롤레타리아파의 작가를 압도했다.

페딘편집

Konstantin Aleksandrovich Fedin (1892-1977) 소비에트 작가. 볼가 지방의 소상인의 집안에 태어났다. 독일 유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을 만나 민간포로가 되었다. 귀국 후 소비에트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한편, 창작활동에 들어가서 ‘세라피노프 형제’에 가담하나, 이 그룹 주류의 위치에는 있지 않고 신사실파에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 1924년 소비에트 시대의 최초의 대장편 <도시와 세월>로서 문학적 성가(聲價)를 확립했다. 혁명과 맞부닥친 지식인이 자신의 파산을 의식하면서도 새 시대에 부합되는 세계관을 가지지 못하는 고민을 묘사한 이 소설은 독일과 러시아를 무대로 해서 기복이 심한 복잡한 줄거리와 굴절 있는 심리묘사가 특징이다. 그가 후에 쓴 여러 작품 <형제들>(1928), <유럽의 탈취>(1933-1935), 전후 문학의 기념적 작품 <최초의 환희>(1945), <이상한 여름>(1948)은 그 어느 것이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장편소설을 소비에트 시대에 부활시킨 작품이나 왕년의 장식적·표현주의적 문체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느껴진다.

파스테르나크편집

Boris Leonidovich Pasternak (1890-1960) 소련 시인. 유명한 화가를 아버지로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한 그는 자신도 음악을 지망한 적이 있었으나 모스크바 대학과 마르브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서구작가에 지기가 많은 부친의 관계와 외국유학을 통해서 서구문화와 깊은 직접적인 인연을 맺었다. 1914년에는 처녀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를 출판, 미래파 그룹에 가담하여 가지각색의 유파, 즉 상징주의, 이미지니스트, 미래파와 친근성을 유지하면서도 지극히 개성적이어서 어느 유파로 잘라 분류하기가 힘들다. 그의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확립시킨 초기의 시집 <우리 자매는 생명>(1922), <주제와 변주(變奏)>(1923)에는 블로크풍의 상징주의적 음악미, 이미지니스트의 화려한 비유, 인습적인 이미지를 피하는 미래파적 자세 같은 것이 엿보인다. 20년대 후반에 서사시 <슈미트 대위> <1905년>에서 혁명의 테마를 다루었으나 개성적인 서정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작가동맹의 성립, 사회주의 리얼리즘 교의(敎義)의 성립, 숙청 등으로 이어지는 국가 통제강화시대에는 10년 가까이 침묵을 지키고 구르지야 시인이나 괴테 및 셰익스피어 번역에 종사했다. 한편 소설 <의사 지바고>가 국내에서 출판이 거부되어 이탈리아에서 출판되었고 이어 1958년에는 노벨 문학상이 수여되었으나 반소적인 작가로 낙인찍혀, 이 작품도 반혁명이라는 비난을 받아 노벨상을 사양, 실의와 고독 속에서 세상을 떴다.

의사 지바고편집

Doktor Zhivago (1956) 파스테르나크 장편소설. 의사이자 시인인 지바고가 1905년 혁명 전야의 청년시대부터 1929년 모스크바 가두에서 심장마비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의 생활이 주제가 되고 있다. 모스크바의 교수 딸 토냐와의 결혼, 애인 라라와의 재회 등 개인적 사건이 혁명의 비정한 물결에 밀려 내려가는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내용이나 줄거리가 복잡하여 에피소드풍의 묘사가 많아서, 대하소설풍의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는 흠도 있으나 내전(內戰) 및 혁명 등 살벌한 시대의 복잡한 인간관계의 갈등을 시인다운 리리컬한 묘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멸망해 가는 구세계에의 애착을 나타내고 혁명의 부정적 면도 다루고 있는 점, 그리고 소련 내에서 출판이 거부되어 국외에서 출판된 사정 등이 얽혀 금단의 책이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실시 이후 해금되었다.

예렌브르크편집

Il’ia Grigor’evich Erenburg (1891-1967) 소련 작가. 매우 다재다능하고 많은 책을 쓴 작가로서 저널리스틱한 감각에도 뛰어나며 그의 문학생활 또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어지럽게 변천했다. 키예프의 유대인 가정에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소년시대를 보냈다. 15세 때 볼셰비키당의 지하조직에 가담, 17세 때 체포되었고 이듬해 파리로 망명, 파리의 보헤미안이나 망명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서구적 지성을 지닌 아방가르드 작가로서 성장했다. 풍자적이며 그로테스크한 걸작 <훌리오 후레니토의 편력>(1922)이나 표현주의적이며 20대 문학의 특질을 잘 나타내고 있는 <트러스트 D·E>(1923) 등을 썼다. 30년대에 들어와서는 소비에트 체제 편에 명백히 가담, 사회주의 건설을 테마로 하는 작품을 많이 쓰는 한편, 에스파냐 내란에의 참가 등 현실 참여의 자세를 더욱 강화해가나 작품 그 자체는 시사적 테마 및 사실에 파묻혀 초기 작품의 예리한 맛이나 매력을 잃어갔다. 스탈린 비판 이후 문제작 <해빙>(1954)을 발표, 사회의 부정면에는 고의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소련 문예계를 지배하였던 풍조를 비판하고 수많은 에세이를 통해 비(非)스탈린화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회상록 <인간·세월·생활>(1960-64)은 소비에트 시대를 몸소 체험한 지식인의 증언으로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시대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지녔으며 그 시대에 부합되는 작품을 쓰는 능력을 지닌 그는 세계 각국에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으며 주요 작품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다.

소비에트 작가동맹의 성립과 사회주의 리얼리즘편집

-作家同盟-成立-社會主義- 네프(신경제정책) 시대가 끝나고, 뒤이어 1928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사회주의 건설시대에 접어들었고 이듬해인 29년부터는 농업의 집단화가 단행되기에 이르러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다. 동반자 작가들도 사회주의 건설을 테마로 하여 노동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게 되었다. 예를 들어 카타예프의 <시대여, 전진하라>는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거대한 콤비나트를 묘사했으며 필리냐크는 <볼가강은 카스피해로 흐른다>에서 댐의 건설을 레오노프는 <소티>에서 제지공장의 건설을 그렸다. 그 밖에 샤기냔의 <중앙 수력 발전소>, 예렌부르크의 <제2의 날>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서 숄로호프, 파제예프, 글라트코프,판표로프 등 프롤레타리아 문학계의 작가들에게 접근해 갔으며, 숄로호프의 <열려진 처녀지>, 글라토코프의 <시멘트> <에네르기>, 판표로프의 <부르스키>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구지식인들이 이와 같이 소비에트 체제 지지의 방향으로 나가려 할 즈음, 1929년부터 1932년경까지 프롤레타리아 문학계의 최강 단체였던 ‘라프’(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문학연맹)는 당의 일부 지지 아래 “동맹자냐, 적이냐”라는 극좌적(極左的) 슬로건을 내걸고 출판사를 독점하였고 반대파로 지목되는 작가들에게 박해를 가해, 공포와 불모의 상태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해독이 차츰 명확해지자 당은 33년, 이 무질서를 수습하기 위해 모든 문학단체를 해산시키고 당원·비당원을 막론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려는 모든 작가를 통합하는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설립하기로 결정, 고리키를 명예위원장으로 하는 조직위원회가 세워지고 1934년 제1회 소비에트 작가대회가 개최되었다.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하나의 해방이었고 앞서의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의 탈선은 트로츠키적 경향이라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 작가 동맹은 유일한 단체로 군림하면서 당의 지도에 복종함으로써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단일 교의가 부과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자율적인 그룹도 경합하는 단체도 소멸되었는데 대국적으로 보면 스탈린 체제하에서의 문학계의 재편성을 가져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라프와 같은 편협한 작가조직에서 작가들을 해방시켜 작가동맹으로 재편성시키기 위한 구호로서 생겨났으나 이 교의는 벨린스키나 체르니셰프스키 이래의 문학, 예술의 사회적 역할, 예술가의 사회적 사명, 국민에의 봉사와 신뢰, 진보에의 확신 등과 같은 역사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순수 객관적인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은 현실의 부정적인 면밖에 나타내지 않고 미래의 밝은 전망과는 연결이 되지 않으며 또한 라프의 유물 변증법적 창작방법은 이데올로기만을 강조하는 그릇된 방향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의 극복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속에서 모색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의 길을 최초로 개척한 작품은 고리키의 <어머니>가 꼽히며 비판적 리얼리즘과 미래에의 전망을 지닌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통일시킨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두 개의 대립되는 문학조류가 통일된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기는 힘든 일이다. 또한 새시대에 알맞는 긍정적 인간상을 묘사한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불려졌는가>와 같은 작품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범적인 형태로 꼽혔다. 결국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봉사하는 문학에서 바람직한 것을 모조리 한데 묶는 획일주의적 느낌이 있는데 이것은 세계관, 창작방법, 표현형식까지도 포함한 혼합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양한 형식의 문학의 공존을 인정해야 할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스탈린 시대의 문학 관료들의 손으로 문학을 사회정책의 기관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고 1936년에 시작된 대숙청 때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관계 없는 작품’이라는 낙인하에 모든 전위적 현대적 작품은 형식주의, 모더니즘, 코스모폴리티즘의 이름 아래 배격되어 30년대 후반에는 문학활동이 점차 침체되어 갔다. 이 시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는 역시 숄로호프이다. 혁명과 내전기의 카자흐를 주인공으로 한 대장편 <조용한 돈강(江)>의 창작에 몰두, 20년대부터 13년의 세월을 소비했다. 농업집단화를 묘사한 <열려진 처녀지>(1932-60)는 힘찬 리얼리즘으로 쓰여 있으나 <조용한 돈강>의 웅대한 다채로움은 엿볼 수 없다. 숄로호프에 가까운 작가로서 파제예프(1901-56)가 있는데 장편 <괴멸>(1927)로 일약 프롤레타리아파 작가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시베리아에서 백군과 외국 간섭군에 포위된 적군 빨치산 부대를 그린 작품으로 숄로호프의 서사시적 웅대함은 없으나 극적인 박진력이 넘치는 걸작이다. 1922년 망명처에서 귀국한 알렉세이 톨스토이도 이 시대에 눈부신 재능을 다양한 작품 속에서 발취하고 있다. 파리 망명 중에 쓰기 시작한 대작 <고뇌 속을 가다>는 혁명에 있어서의 러시아 지식인의 운명을 묘사한 대작이다. 이 밖에도 SF적 수법으로 쓰인 <아예리타>, 추리소설풍의 <기사(技師) 가린의 쌍곡선>, 역사소설 <표트르 1세> 등이 있다. 이 시대에 특히 높이 평가되면서 베스트 셀러가 된 작품 가운데 마카렌코(1888-1939)의 <교육시(敎育詩)>와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불리어졌는가>를 들 필요가 있다. 새로운 인간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독자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이들 작품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으로 간주된 사실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앞선 수년간에 국민의 독립 자부심의 각성과 함께 역사소설이 잇달아 나와 새 시대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특히 걸출한 작품은 앞서 말한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표트르 1세>로서 당시의 생활상이 힘차고도 색채가 풍부한 필치로써 묘사되어 있다. 토냐노프(1894-1943)의 <큐프랴> <와지르 무후타르의 죽음>, 차푸이긴(1870-1937)의 <스테판 라딘> 등의 걸작이 나왔고 이 밖에 이반 대제, 드미트리 돈스코이,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등의 역사상의 인물, 푸가초프와 같은 반란자에 관한 소설이 속속 출현했다. 토름, 시시코프, 올리가 폴시(1873-1961) 등이 이런 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른바 전쟁 기록물로서는 노비코프 프리보이의 <쓰시마>, 세르게예프 첸스키의 <세바스토폴리의 고전(苦戰)> 등이 있으며 과거의 문학자들에 관한 소설풍으로 쓰인 전기도 이시대에 잇달아 나왔다. 이러한 작품들의 유행은 어느 정도 현실을 묘사하는 문학에 대한 통제가 엄격해졌기 때문에 작가들이 과거에서 제재를 찾게 되었다는 데서도 설명될 수 있으나 소비에트 체제에 일대 시련이 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바로 전의 시기, 그리고 과거의 영광을 알고자 하는 애국적 정열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1939년에는 스탈린의 만 60세 탄생일을 기념하여 과학·예술 부분에 스탈린상(賞)이 제정되었고 이듬해 40년에는 문학부문의 스탈린상도 추가 제정되고 당의 교육적·지도적 견지에서 소비에트 체제에 기여하는 작품에 연달아 수여되어 당의 문학활동 통제에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숄로호프편집

Mikhail Aleksandrovich Sholokhov (1905-1984) 소련 소설가. 우크라이나의 돈 지방에 있는 뵤센스카야 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순수한 혁명아로서 15세 때부터 소비에트 정권의 기관에 근무하였고 적군(赤軍) 토벌대에 가담하여 전투에 몇 번이나 참가했다. 내전 종결 후에는 모스크바로 나와 인부, 석공 등의 잡일을 하면서 소설수업을 쌓아 단편 <점(Kon) 이야기>와 <남색(藍色)의 광야>가 발표되었는데 어느 쪽이나 다 내전시대의 돈 지방의 생활에서 취재한 것으로 <조용한 돈강>의 싹이 될 작품들이었다. 25년 고향에 돌아와 <조용한 돈강>의 창작에 착수했고 그 이후 숄로호프는 고향 땅을 떠난 일이 없다. <조용한 돈강>과 병행해서 1932년에는 <열려진 처녀지> 제1부를 발표했다. 이 작품도 지루하게 긴 숄로호프류(流)의 운명을 더듬고 제2부가 완성된 것은 1960년이었다. 제2차 대전 중에는 종군하여 많은 르포르타주를 썼는데 1942년의 단편 <증오의 학문>은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장편소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를 썼으나 미완성으로 그쳤다. 전후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살려 단편 <인간의 운명>(1956)을 쓴 외에는 뛰어난 작품을 남기지 않고 있다. 1937년 이래 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이기도 했다. 1965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조용한 돈강편집

Tikhi Don (1928-40) 숄로호프 장편소설. 혁명과 반혁명, 적군과 백군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혁명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의 살길을 찾지 못한 채 마침내 혁명과 인민의 길에서 벗어나 파멸해 가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건장한 육체와 성실하고 정열적 감정을 지닌 순수한 돈 카자흐인 주인공 그리고리 메레호프는 돈 지방을 무대로 해서 상쟁(相爭) 하는 적군과 백군 사이를 전전하나 항상 압박받는 민중편에 서서 성실한 정의감에서 행동했다. 그는 또한 유부녀 아크시냐의 한결 같은 사랑과 정숙한 아내 나스타샤의 사랑 사이를 방황한다. 평화로운 돈 지방의 지방색이 짙은 묘사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거기에 사는 돈 카자흐들의 풍습, 제정시대부터 차르의 비호 아래 러시아에서 독립하여 자치를 얻고 있던 카자흐들의 강한 독립심, 내전의 격전지가 되어 동족상쟁하는 비참한 지옥도(地獄圖), 그리고 이 속에서의 사람들의 심리적 동향을 커다란 구도 속에서 세밀하게 묘사하여 간다. 많은 평론가가 지적하듯이 여러 가지 점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연상시키는데 연대기적 세밀함과 서사시적 웅대함을 심리적 리얼리즘의 탁월한 기법으로 집약시키고 있는 것은 틀임 없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마찬가지로 내전에서 취재한 푸르마노프의 <차파예프>와 함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는데 19세기 리얼리즘의 전통에 충실한, 뛰어난 심리적 리얼리즘의 소설로서 소련 문단에서도 혁명에 반항하여 멸망해 가는 ‘부정적’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이 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느냐에 관해 논란이 거듭되었다. 제3권이 발표되기까지는 돈의 반혁명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라는 일부의 오해도 있었으나 현재는 소련문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되고 있다.

오스트로프스키편집

Nikolai Alekseevich Ostrovsky (1904-1936) 소련 소설가.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노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후, 역 식당의 급사 등으로 일했다. 내전시대에는 14세에 당운동에 참가, 이듬해에는 유명한 부존누이의 제1기병군단에 들어갔으나 부상을 입고 제대하여 당원으로서의 활동에 종사했다. 그러나 이 상처가 도져 1924년 악성관절염에 걸렸고 이어서 실명하면서 전신불수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는 자살에 관하여 생각하게 되나 자신의 짧은 여생을 사회적으로 의의가 있는 소설을 쓰는 데에 바치기로 결심, 막심한 고생 가운데 자신을 주인공으로 해서, 한 청년이 어떻게 하여 굳은 신념을 갖는 공산당원으로 성장하는가를 썼다. 자전소설 <강철은 어떻게 불려졌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이 한 작품으로 그는 소비에트 작가동맹의 회원이 되었고, 35년에는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어서 독일군 점령하의 우크라이나에서의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제2작 <폭풍 속에 살아 가는 자>의 집필에 착수했으나 제1부를 완성시켰을 뿐 요독증(尿毒症)으로 짧은 일생을 마쳤다. 오스트로프스키는 직업적인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예술작품으로서는 미숙하며 또한 통속적인 서술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강철은 어떻게 불려졌는가편집

Kaz zakalyalas stal (1932-34) 오스트로프스키의 장편소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파벨 코르차긴은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하자 역의 식당에서 일하게 되고 이어서 발전소의 견습 화부가 된다. 고난의 생활을 겪는 가운데 혁명발발과 함께 혁명군 병사가 된다. 전상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고 13일간이나 인사불성에 빠졌다가 겨우 회복하여 귀향, 어려운 일을 잇달아 맡아 하면서 조국을 위해 활동한다. 그러나 전상(戰傷)과 그 후의 과로 때문에 수족이 마비되고 두 눈이 다 실명된다. 그러나 확고한 신념을 지닌 그는 자살의 유혹을 극복, 문학으로 사회에 봉사할 것을 결심하고 천신만고 끝에 소설을 완성시킨다.

톨스토이 (알렉세이 니콜라에비치)편집

Aleksei Nikolaevich Tolstoi (1883-1945) 소련 소설가. 사마라현(縣)의 명문 백작가 출신. 아동문학 작가였던 어머니가 백작가의 생활에 불만을 느끼고 그를 임신한 채 교양있는 지주 보스토롬에게로 갔기 때문에 이 청년 지주 밑에서 자랐다. 구 귀족계급으로부터의 풍부한 교양을 이어받은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업전문학교 재학시절부터 문학에 열중하고 상징주의에 심취, 시집 <서정시>(1907) <푸른 강 저 건너에>(1908)로 문단에 데뷔했다. 혁명 전에 이미 중편 <투레네보에서의 1주간>(1909), <기인(奇人)들>(1911), <절름발이 공작(公爵)>(1912) 등을 발표, 모더니즘의 색채가 농후하긴 하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과 전통적인 사실기법을 소화시켜 멸망해 가는 지주귀족의 생활을 묘사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의 살벌한 현실에서 도피,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처럼 망명의 길을 택해 파리로 갔다가 그 후 1922년 베를린으로 옮겼다. 이 망명기간 중에 <고뇌 속을 가다>의 제1부, 자전적 중편 <니키타의 유년시대>를 썼다. <니키타의 유년시대>는 어린시절의 달콤한 추억과 러시아 자연의 정취가 넘치는 가작(佳作)이다. 이 밖에 소련인의 화성탐험이라는 공상과학적인 제재와 국제정치를 얽어 놓은 경묘한 장편소설 <아엘리타(Aelita)>, 중편 <침대 밑에서 발견된 수기> 등을 썼다. 또한 극 <기계의 반란>, 소설 <기사 가린의 쌍곡선>은 H. G. 웰즈를 연상케 하는 작풍이면서도 풍자가 잘 곁들여진 작품이다. 이와 같이 다재다능하고 비범한 스토리텔러였으나 톨스토이의 가장 뛰어난 면은 1923년 귀국 후에 쓴 역사소설 <표트르 1세>(1929-45), 3부로 이루어지는 대장편 <고뇌 속을 가다>에서 발휘되고 있다. 1918년의 츠아리친(지금의 보르고그라드) 방위전을 소재로 하여 레닌 및 스탈린을 묘사한 장편 <빵>(1937)도 이 계열에 속한다.

고뇌 속을 가다편집

Khojdenie pomukam (1920-1941) 알렉세이 톨스토이 장편소설. 제명 ‘고뇌 속을 가다’는 고난에 찬 편력과 지옥순회를 뜻하며 고대 러시아의 아포크리파(經外聖書) <성모의 지옥 순회>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작자는 이러한 제명으로 러시아 지식인이 혁명과 내전의 시련, 고난의 길을 거쳐 이를 극복하는 모습을 예부터의 이야기에 견주려고 한 것 같다. 이 소설은 3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의 <자매>는 1920년 작자가 파리 생활을 할 때 쓴 것이며, 제2부 <1918년>은 1927-1928년에, 제3부 <어두운 아침>은 1940-1941년에 걸쳐 쓴 것으로 전후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조금 전, 부패와 데카당스가 번성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아름다운 두 자매, 카차와 다샤의 생활묘사부터 시작된다. 그녀들 앞에는 데카당 시인 베스소노프, 공장기사인 테레긴, 대위 로시친 등과 같은 남성이 나타난다. 테레긴과 다샤는 맺어지나 혁명이 둘 사이를 갈라 놓아 테레긴은 적군에 다샤는 대수롭잖은 일로 반혁명조직의 일원이 된다. 한편 혁명으로 남편을 잃은 카차는 로시친과 맺어지나 로시친은 혁명에 대한 증오심에서 카차와 의견을 달리하고 백위군(白衛軍)에 투항한다. 그러나 상상도 못했던 백위군의 부패상을 알게 된 그는 깊은 의혹에 사로잡히는 한편, 점차 혁명의 의의에 눈떠 적군에 가담, 혁명과업에 참여한다. 다샤는 반혁명정부의 요인이 된 부친 곁을 떠나 적군의 간호원이 되었다가 어느 날 부상한 테레긴과 상봉하게 된다. 카차 또한 로시친과 재회한다. 겨울이 끝나고 네 사람은 또다시 모스크바에서 함께 모이게 되었다. 백위군은 격파되고 고난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등장인물과 역사적 사건의 교차는 심리적으로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작자는 또한 내전에 휘말린 러시아의 일대 파노라마를 전개시키고 있다. 증오와 적의를 지주(支柱)로 한 내전의 처참한 묘사를 배경으로 하여 스스로의 사랑과 진실을 전(全)시대와 정면으로 맞붙어 쟁취하려는 강인한 인간성이 부각되고 있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고 최후에 해피엔드로 끝나는 줄거리는 안이한 감이 느껴져 <니키타의 유년시대>와 같은 문학적 향기가 부족한 흠은 있으나 혁명, 대전, 내전 기간 중의 러시아 사회와 지식인의 생활을 남김 없이 그린 점에 있어 소련문학 사상 <조용한 돈강>에 견줄 만한 작품이다.

제2차대전중의 문학편집

-大戰中-文學 1941년 6월 독소(獨蘇)전쟁이 벌어졌다. 1941년부터 1943년에 걸쳐 유럽·러시아의 3분의 1이 점령되자, 소련 국민은 민족의 운명을 걸고 조국 방위에 궐기했다. 작가들도 전선으로 출전, 기자로서 활약하거나 실제로 총을 들고 싸우기도 했다. 조국의 승리라는 대의를 위해 문학이 자발적으로 활동하여 문학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었다. 문학의 테마는 전쟁에 한정되었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규범도 완화되어서 작가들의 작풍이나 창작기법도 자유로워져 활기에 찬 가작이 많이 나왔다. 우선 먼저 나타난 것은 시(詩)였다. 레닌그라드 시민의 불굴의 투지를 노래한 치호노프의 <키로프, 우리와 함께 있다>, 트바르도프스키의 <바실리 초르킨>, 빨치산 소녀를 그린 여류시인 알리게르의 <조야>, 그리고 여류시인 베루고리츠나 베라 인베르의 작품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안토 콜리스키의 애국적인 시도 널리 애창되었는데 전장에서 쓰러진 자기의 자식을 노래한 <아들>이 대표작이다. 알렉세이 스루코프는 일관해서 문학노선에 가장 충실한 시인인데 대전 중 <12월은 모스크바 가까이에> <러시아는 벌(罰)한다> <노여움의 노래> 등을 출판했다. 널리 알려진 민요 <카추샤>의 작자인 이사코프스키는 이 밖에도 훌륭한 시를 써서 전시중의 소련인의 애국적 감정을 표현했다. 트바르도프스키는 전술한 <바실리 초르킨> 외에도 전쟁에서 취재한 시집 <보복(報復)> <길가의 집> 등의 가작을 발표하고 있다. 전쟁은 소련의 모든 기성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파스테르나크, 치호노프, 안나 아흐마토바와 같은 예술파 시인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스테르나크는 1932년 이래의 침묵을 깨고 시집 <1번 열차에서>(1943)를 발표했다. 니콜라이 루이렌코프(1909- )는 전쟁에서 취재한 세 권의 시집 <청년기와의 결별> <푸른 포도주> <아버지 집>을 발표했는데 그 서정성과 체호프, 블로크 및 예세닌 등에 영감의 원천을 구하고 있는 시풍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러시아 미래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블라디미르 리프시츠는 <후미위의 노을>에서 전쟁을 테마로 해서 시를 썼다. 전쟁의 제반 사건에 곧 호응하는 ‘기동성이 풍부한’ 장르가 전시중에 나타났다. 전술한 시가 우선 이에 속하는데 그 외에도 시사평론, 오체르크(Ocherk)라 불리는 기록문학, 포스터에 인쇄되어 인심을 격려하는 선전시 등이 종군작가나 후방 시인들에 의해 대량으로 나왔다. 숄로호프, 알렉세이 톨스토이, 예렌부르크 등의 대가들도 단편, 기록문학, 시사평론 등에서 건필을 휘둘렀다. 바실리 그로스만의 <스탈린그라드의 기록>, 일리프와 페트로프 2인조의 한쪽인 페트로프의 <전선 일지>, 파제예프의 <포위당한 날의 레닌그라드>, 여류시인 베라 인베르의 <레닌그라드 일기> 등도 기록문학의 걸작이다. 전시중 가장 눈부시게 활약한 것은 콘스탄틴 시모노프이다. 저널리스틱한 재능을 타고나 시·희곡·소설·기록물 등 모든 면에서 가작을 내놓았는데 소설 <낮이나 밤이나> 희곡 <러시아의 사람들>이 대표작이다. 구세대의 작가들도 단순히 기록문학에만 그치지 않고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데 파제예프의 <젊은 친위대(親衛隊)>, 레오노프의 <베리코슘스크의 점령>, 희곡 <내습(來襲)>, 숄로호프의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소설은 전시중이라는 제약 때문에 예술적 완성도가 낮은 것도 있었으나 시대의 증언, 기록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거의 모두가 흥미있는 작품이다. 고르바토프의 <정복되지 않는 백성>, 치호노프의 <레닌그라드 이야기>, 바실레프스카야의 <무지개>, 바실리 그로스만의 <인민은 죽지 않는다> 등을 들 수 있다. 역사소설도 애국적 감정이 앙양된 가운데 계속해서 나왔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표트르 1세>는 이 시기에도 계속 집필되었고 코스투어료프의 <이반 대제>, 고르보프의 <바그라치온>, 보로딘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스테파노프의 <여순항(旅順港)> 등이 나왔다.

전후의 문학편집

戰後-文學 전쟁의 승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시중의 비교적 자유로웠던 창작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냉전이라는 긴장된 국제 관계와 시급한 국내재건은 애국주의와 고립주의를 극단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다. 1946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통제를 강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나아갈 길의 강화를 결정했다. 이 결의는 유명한 주다노프 연설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이 연설에서 레닌그라드의 두 잡지를 비난하면서 “소련문학의 사명은 국가가 청년을 올바르게 교육시키는 것을 돕고 청년의 관심에 부응해서 새로운 세대와 자신의 과업을 믿는 가운데 장애를 두려워 하지 않고 어떠한 장애도 극복할 수 있는 세대로 교육시키는 데 있다”고 선언, 조시첸코와 아흐마토바를 공격했다. 특히 아흐마토바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은 격렬하여 “화장실과 기도실 사이를 발버둥치며 기어 다니는 미치광이 여자”라든가 “창부의 미태(媚態)가 기도와 혼합된” 또는 “창부이자 여승”이라는 등 문학과는 관계없는 비평이었다. 이후 스탈린이 죽는 1953년까지 당의 문학에 대한 압력이 강화되어 문학은 전쟁 중의 소련민족의 영웅적 행위나 사회주의 재건의 영웅들에 대해 쓸 것을 강요받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품은 많으나 읽을 만한 작품은 별로 없다. 이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은 예렌부르크의 <폭풍>(1947), 카자케비치의 <오데르의 봄>, 파노바의 <쿠르지리하>(1947), <밝은 해안>, 아자예프의 <모스크바를 멀리 떨어져>(1948) 등이 있는데 이 시기의 최대 수확은 대가 페딘의 <최초의 환희>(1945), <이상한 여름>(1948)이라 할 수 있다. 해빙문학의 원형이 된 파노바의 <사계(四季)>(1953), 빅토르 네크라소프의 <고향의 거리에서>도 가작이다. 기성작가의 작품 가운데 카베린의 <펼쳐진 책>(1953-56), 레오노프의 <러시아의 삼림>(1954)은 이 시대에 압도적으로 많았던 사회주의 재건의 테마를 다루면서 러시아의 자연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숄로호프는 “적들은 우리가 당의 지령에 따라 쓰고 있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사실은 좀 다르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쓰고 있는데 우리들의 마음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예술에 의해 봉사하는 당과 인민에 속하고 있다”라고 작가동맹 대회에서 연설했는데 이 말은 이 시기의 분위기를 가장 명료하게 밝혀주고 있다. 1953년의 스탈린 사망은 하나의 전환기가 되었다. 숄로호프가 말하는 당과 일체가 된 작가들이 리얼리즘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현실미화에 급급, 무조건 체제와 지도자를 찬미하면서 참된 모순에는 외면하고 형식적으로는 전세기적(前世紀的)인 낡은 기법에 매달려 있는 사실이 당의 비평가들로부터도 지적되었다. 1954년의 제2회 작가동맹대회에서의 예렌부르크의 발언과 같은 해 재빨리 발표된 그의 중편소설 <해빙>이 신시대의 개막을 고했다. 문학통제(統制)의 총수로서 활약했던 파제예프의 자살은 상징적이었다. 새로운 세대의 대두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낡은 세대의 작가들의 대세(大勢) 순응주의를 무너뜨려 나갔다. 두진체프의 <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1956)는 작품으로서도 훌륭했으나 개인숭배나 관료주의를 대담하게 파헤쳤기 때문에 흐루시초프에 의해서 “중상적(中傷的)인 작품”이라고 단정되었는데 한 시대 전에는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또한 1956년의 문집 <문학 모스크바>의 발간은 문학의 새로운 물결의 출현을 의미했다. 구세대의 정통파 작가와 함께 마르투이노프, 스르츠키, 예프투셴코 등 새 세대의 시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해빙(解氷)의 진행은 일진일퇴를 반복했다. 극히 비정치적인 시인 파스테르나크의 작품 <의사 지바고>는 소련에 있어서의 정치와 문학의 긴장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멸망해가는 지난 날의 인텔리겐차에 대한 비가(悲歌)라 할 수 있는 서정적인 이 작품은 소련에서의 출판을 거절당해 번역형태로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소련에서는 전통적으로 국외에서 출판하는 것은 범죄적 행위로 간주되어, 1920년대에도 자먀틴의 <우리들>, 필리냐크의 <마호가니>가 심하게 공격받았고, 최근에도 시냐프스키와 다니엘리 두 사람이 국외에서의 출판죄로 중죄에 처해진 사건이 있었다. <의사 지바고>가 반소적인 작품으로서의 성가(聲價)가 높아졌기 때문에 노벨상 수여라는 명예도 반소적 경향의 찬양이라고 지적되어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당하고 상을 사퇴, 실의 끝에 죽음을 재촉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해빙·비(非)스탈린화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스탈린화는 먼저 스탈린 시대에 매장당한 과거의 문학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 작품을 복간(復刊)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또한 스탈린 시대의 암흑을 그린 작품의 출판이 주목되었다. 솔제니친(1918- )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는 스탈린 시대의 정치범 강제수용소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묘사하여, 현대의 ‘죽음의 집 기록’이라는 평을 받아 해빙에 의해서 개화된 소련문학의 한 정점이 되었다.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도 활발하다. 심리적 묘사에 뛰어난 나기빈, 대담한 수법으로 외국에서도 주목되고 있는 아크쇼노프, 인상파 경향의 심리묘사에 뛰어난 카자코프 등의 소설가들이 대량으로 진출되었다. 연극의 면에서는 전후 잠시 동안은 동서간의 냉전을 반영하여 자본주의 국가 문화의 공격, 서구주의 비판을 테마로 하는 일련의 작품, 시모노프(1915-1979)의 <러시아 문제> <프하라의 밤나무 가로수 아래서>(1946), 예렌부르크의 <광장의 사자>, 라브레뇨프(1891-1959)의 <미국의 소리> 등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극작가들이 연이어 나타나서 신풍을 불어넣어 갔다. 아르브조프(1908-1986)의 <이르쿠츠크 이야기>(1959)는 단순한 인간의 감정을 신선한 수법으로 노래하여 소련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볼로딘(1919- )도 <다섯 가지의 저녁>(1959)에서 새시대 청년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기성작가 가운데서는 니콜라이 빌타가 <여름·하늘은 높다> <희망의 3개의 돌>을 발표, 또 레오니드 조린과 미할코프(1913- )가 희극에 가작을 발표했다. 미할코프는 또한 신진인 빅토르 로조프(1913- )와 함께 아동극에도 유명하다. 로조프는 <기쁨을 찾아서>(1958), <불평등한 싸움>(1960)에서 속된 것에 도전한다. 아나토리 소프로노프(1921- )도 새세대의 기대되는 작가이다.

두진체프편집

Valdimir Dmitrievich Dudintsev (1918- ) 소련 작가. 남러시아 하르코프주 출생. 모스크바 법과대학 졸업 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중상을 입고 시베리아에서 군검찰국에 근무했다. 최초의 시나 단편은 별로 문제되지 않았으나 전후 <프라우다>지 기자로 있으면서 쓴 장편 <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1956)로 일약 소련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모았다. 제20차 전당대회 후의 스탈린 개인숭배가 처음으로 비판된 때의 이상한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고 헝가리 침공으로 해빙(解氷)에 대한 역행적 정세도 곁들어서 전후 소련 문학계와 독서계에 일찍이 없었던 최대의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서방세계의 저널리즘도 이를 센세이션으로 취급했다.

솔제니친편집

Aleksander I. Solzhenisyn (1918- ) 소련 작가. 1918년 12월 11일 코사크 지방의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제2차대전 중에 부상을 당하기도 하여, 그 용감성 때문에 두 번씩이나 훈장을 타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5년 스탈린을 비방하는 개인적인 서신교환을 이유로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어 8년의 중노동을 선고 받았다. 그는 스탈린 사후에 공식적으로 흐루시초프 등의 반(反)스탈린 운동하에서 풀려 나왔다. 노벨상 수상 작품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1962년 출판되었다. 사실 이 책이 묘사한 스탈린 시대의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의 참상은 흐루시초프의 반스탈린 운동에 이용되었던 관계로 소련 내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것은 또한 서방 자유세계에 소련의 처참한 수용소 생활을 전달해 준 덕택에 갈채를 받았고 비평가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 기록>에 비견될 수 있는 현존하는 러시아의 고전이라는 평을 내리고 있다. 흐루시초프의 몰락 후 체제비판은 허용되지 않았고 솔제니친의 작품은 금지되고 솔제니친과 기타의 반체제 지식인은 탄압·검색·감시를 받았다. 이들의 의견이나 작품은 출판될 수 없는 것이 되고 따라서 자연히 필사본(筆寫本)으로든지 아니면 지하신문의 형태로 유포되었다. 처음의 필사본 형태로 된 솔제니친의 문제작 <제1원>과 <암병동(癌病棟)>은 솔제니친의 어떠한 의도나 주장에 의하지 않은 채, 서방 자유세계로 유출되어 자유세계에 크나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위의 두 작품은 솔제니친이 1950년 중엽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한 병원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서방세계에서 이런 작품이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이제까지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에서 받은 소련문학의 차원을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소련 내부의 사정을 적나라하게 펼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솔제니친이 소련에서의 위치를 압박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는 작가동맹에서 추방당하고 모스크바 교외에서 외부와 격리당한 채, 침묵을 강요당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친구인 첼로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솔제니친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는데, 로스트로포비치는 1970년에 솔제니친이 강권에 의해 보호 받지 못한 사실을 국내에 호소하고 각 출판업자에게그 내용을 서신으로 우송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내의 어느 곳에서도 이는 출판되지 않았다. 결국 솔제니친은 “진리에 도달하려는 나의 길을 아무도 막을 수 없으며, 이 명분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선언하여 그의 문학에 대한 열렬한 자율, 진리성을 말하였으며 소련의 반체제 운동의 중요하고도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상 수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개인적인 사정을 이유로 내걸고 있지만, 소련 당국이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든가, 아니면 출국하면 소련으로서는 재입국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1974년 소련은 서독정부에 솔제니친의 추방사실을 통고하면서 그의 수용(受容)을 요청했다. 소련은 솔제니친과 그의 가족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국외로 추방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유는 당국의 소환에 계속적으로 불응하는 솔제니친이 1973년 <수용소 군도>를 서방에서 출판하였기 때문이다. 솔제니친은 스위스에서 약 2년 동안 살다가 1976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솔제니친은 소련에서 박해를 받았던 마지막 몇 년간의 일을 <참나무와 송아지>(1975)라는 자서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1990년 소련 정부는 솔제니친의 시민권을 복권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편집

솔제니친 소설. 주인공 슈호프(이반 데니소비치)는 평범한 농민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 왔기 때문에 간첩죄로 10년 형을 언도받고 이 수용소에 갇혀 있다. 매일 아침 기상 신호가 울리면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 벽돌을 쌓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강제 노동에는 하나의 건물 벽을 만든다고 하는 인간의 창조 정신은 통용되지 않는다. 매일같이 거듭되는 단조로운 노동과 한 그릇의 수프를 핥아 내듯 먹는 극한 상황 속에서의 생활, 거기에 강제 노동 수용소의 비인간성이 깃들여 있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 외에도 소설가·해군 중령·영화 감독 등 수용소에 갇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시대적인 비극 속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망명문학편집

亡命文學 원래 문학은 사상성이 강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졌고 정치와 문학이 긴장 관계에 있었던 러시아에서는 작가들의 망명과 외국행이라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10월혁명은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이었기 때문에 구러시아 문화에 강한 애착을 가진 대량의 망명자를 속출시켰다. 후에 귀국한 쿠플린이나 소련작가로서 성장한 알렉세이 톨스토이 등은 문학사에서 상당한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데 조국을 떠나서도 러시아어로 저작을 계속한 일군의 작가들은 러시아의 문학전통을 외국에서 개화시켰다는 점에서 러시아 문학사에 추가하여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혁명 직후의 망명자들의 대부분은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20년경에는 알렉세이 톨스토이, 부닌, 쿠플린, 메레지코프스키, 기피우스, 슈메료프, 발리몬트 등이 활약했다. 1922년경이 되자 고리키, 벨르이, 자이체프, 오에렌브르크 그리고 파리에서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이주해 와서 베를린이 본거지가 되었다. 여러 개의 혁명출판사가 창립되었다. 30년대의 주역은 상징파나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러시아 전통의 리얼리스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본래 ‘즈나니에(지식)’파의 부닌, 쿠플린, 슈메료프(고리키 자신도 베를린에 있었다), 거기에다 알렉세이 톨스토이, 자이체프, 레미조프 후에 자먀틴이 가담한다. 이상하게도 모더니스트파의 대부분은 메레지코프스키, 기피우스, 발리몬트를 제외하고는 국내에 머물러 혁명측에 가담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과거를 서정적으로 추억하고 잃어버린 과거를 개인적으로 회상하는 작품에 걸작이 많이 탄생되었다. 혁명 전에는 저널리스트였던 오소르긴은 자먀킨풍의 유머와 감상이 혼합된 리얼리스틱한 구러시아 사회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쓰고 있다. 역시 저널리스트 출신인 알다노프는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의 최근 사건에 관한 재치가 넘치는 역사소설을 썼다. 철학자 표트르 스테픈의 서간체(書簡體) 소설 <니콜라이 페레스레긴>도 특기할 만하다. 시작(詩作) 활동도 왕성했던 뱌체슬라프 이바노프, 호다셰비치, 마리나 츠베타예프, 잡지 <아포롱> 편집자였던 마코프스키 등의 구세대에 이어서 망명 제2세대의 시인들도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크메이스트의 전통을 부활시킨 게오르기 이바노프와 아다모비치, 니콜라이 오츠프 등이다. <로리타>로써 문명을 떨친 나보코프도 1930년대까지는 시린이란 필명으로 <루딘의 방위(防衛)>(1930), <사형에의 초대>(1935) 등 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작풍은 소련의 1920년대의 산문작가들과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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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시인 - 려순희 2015-03-11 0 3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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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시인 - 심명주 2015-03-11 0 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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