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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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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2016년 04월 21일 08시 17분  조회:4149  추천:0  작성자: 죽림

작가 조정래의 부인은 시인 김초혜. 조정래는 시인이 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시인 부인을 '떠받들고' 산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대학 시절 그가 시인을 꿈꾸며, 1년여의 습작기간을 가지다 결국 소설로 돌아섰다는 것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신작 <핑퐁>(창비. 2006)을 발표하며, 독자와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소설가 박민규. 그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며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영역이 시"라고 밝힌 바 있다. 지금도 습작 수준이지만 몰래 시를 쓰고 있다고 고백한다.

역사소설의 대가로 군림한 원로작가와, 평단과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얻고 있는 인기작가들. 소설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왜 시에 대한 '연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소설가가 흠모하는 시인, 그리고 그 시인이 사랑하는 시인이라는, 문태준의 시를 통해서라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같다. 동서문학상(2004), 노작문학상(2004), 유심작품상(2004), 미당문학상(2005), 소월시문학상(2006) 등 내노라하는 상은 모두 '석권'하다시피 한 그이니, 시인 '대표' 삼아 그의 시를 살피는데 이견은 없을 듯하다.

여기 문태준의 시 한편이 있다.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老母')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이제 입가에 자글자글한 주름만이 남은 노모. 시인은 그녀의 주름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가 거진 다 빠져, 음식을 씹기 위해 열심히 움직거리는 입모양도 사랑스럽다고.

단 7행으로, 시인은 노모가 살아온 삶과, 자신이 그녀에게 품은 존경과 애정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골짜기'가 노모의 입가에 깊이 패인 주름을 연상시키고, '산새 소리'가 노모가 사는 곳을 짐작시킨다.

바로 이것이 소설가가 시인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닐까. 소설로 썼다면, 몇백매를 훌쩍 넘길 한 여인의 삶을, 2,3개의 시어로 표현해내는 '함축성' 말이다.

아직 설득력이 부족하다면, 또 한편의 시를 살펴보자.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은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5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극빈')

열무를 심어 꽃을 얻기까지 그 계절의 변화와, 채소밭에 꽃을 가꾸냐는 사람들과의 문답, 어렵게 얻은 꽃을 보금자리 삼은 나비에 대한 '귀여운' 시기와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반추 . 한 편의 시에 이 많은 것을 녹아내리는 힘.

그 `응집력`이야 말로, 박민규의 표현을 빌자면 '작은 이야기(小說)를 길게 써야하는' 소설가에겐 충분히 매력적인 힘이 아닐런지.

문태준의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엔 이처럼 소설가들이 '군침'을 흘릴, 시들이 가득하다. 삶과 사람, 이 방대한 주제를 한 편의 시로 '압축'해내는 시인의, 절정에 오른 능력을 보여주는 문장 하나가 있다.

"자루는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다" ('자루' 중)

자루는 무얼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고, 시인을 무얼 써도 시가 된다.

(사진 = KBS 제공) [북데일리 고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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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충치 / 이운룡












충치

이 운 룡

어금니 하나를 뽑아 버렸다
아픔 한 점이 빠져나갔다
욱신욱신 들쑤시던 놈,
알게 모르게 파 먹은
벌레가 남긴 그 자리,
아픔이 응혈진 말을 악물고 있다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런 사기질의 벌레가 득실거려
아픔 밑에 허탈도 패이지만
그 때마다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나의 그림자,

그 자리에 새로 아픔 몇 점
무덤을 파고 들앉아
바늘 신경으로 솟아올랐다
집게란 것이 닿기만 하면
실핏줄이 뿌리째 까무러치고
전 생애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젖니를 뽑았을 때에는 순전히
젖빛의 피가 흘러서
푸른 하늘에 번지고 있었건만.


이운룡 시집 <산불 ‧ 산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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