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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 詩를 읊다]- 詩 몇토리
2016년 05월 01일 00시 25분  조회:4396  추천:0  작성자: 죽림
옛집 마당에 꽃피다
- 김선태(1960~ )

 
기사 이미지
옛집 마당을 숨어서 들여다본다

누군가 빈집을 사들여 마당에 텃밭을 가꾸었나
온갖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울며 맨발로 뛰쳐나왔던 내 발자국 위에
울음꽃 대신 유채꽃 고추꽃 환하다
어머니 아버지 뒤엉켜 나뒹굴던 자리에도

DA 300

 

언제 그랬냐는 듯 깨꽃 메밀꽃 어우러졌다

( … )

슬며시 옛집 마당에 들어가 꽃으로 서본다





과거는 현재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 상처의 과거가 꽃의 현재로 치환되는 순간, 울음과 싸움이 “유채꽃” “깨꽃”으로 변한다. 과거의 상처가 부끄러워 “숨어서 들여다” 보던 주체가 그 과거로 돌아가 꽃으로 변신하는 순간, 세계는 꽃 천지가 된다. 주체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 꽃의 힘이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수조 앞에서
- 송경동(1967~ )

 
기사 이미지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DA 300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수조 속 풍경이 끔찍한 것은 그것이 인간 세계의 폭력적 예각을 투명하게 되비쳐주기 때문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재화를 놓고 싸우는 승자 중심의 세상은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 “살아남은 것들만”의 평화라니, 얼마나 잔인한가. 짐승성의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조건 없는 환대의 법”을 모든 “조건적 법들”(데리다)의 위에 놓아야 한다. 실현 불가능한 ‘사랑’을 꿈꿀 때, 인간은 짐승의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슬픔의 진화
- 심보선(1970~ )

 
기사 이미지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 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DA 300

 

이것이 내가 밤새 고민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 … )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책 읽기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보는’ 유효한 방식이지만 아무리 책상에 “장기 투숙”을 해도 세계가 빠진 인식은 무의미하다. 세계는 “영원한 악천후”로서 “진화”의 마지막 목적지다. 책장을 넘어 세계의 고통을 만날 때 사유는 완성된다. 세계의 “벼락”이 달콤한 위로(“설탕”)보다 낫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백자 항아리 - 허윤정(1939~ )


너는 조선의 눈빛

거문고 소리로만

눈을 뜬다


어찌 보면 얼굴이 곱고

어찌 보면 무릎이 곱고


오백년

마음을 비워도

DA 300

 

다 못 비운 달 항아리


백자 항아리는 비례와 대칭이 완벽하지 않다. 이 부정형의 백자 항아리는 크고 풍성한 보름달을 닮아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함으로 이끈다.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84)는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으로 이루어진 달항아리를 한국 미의 원형으로 꼽고 그 소박미를 찬미했다. 김환기(1913~74) 화백도 “내 예술의 모든 것은 달항아리에서 나왔다”고 말할 정도로 일그러진 백자 항아리를 사랑하고 즐겨 그렸다. “조선의 눈빛”이고 “거문고 소리”에만 반응하며 눈을 뜨는 이것! 이 달항아리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마음 비우기’다. <장석주·시인>




 

 燈에 부침

                   / 장석주

 

     

 

 

 

 

 

         

 

 

 

 

 

燈에 부침

 

 

                             장 석 주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 뛰어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들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 나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 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 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장석주 시집 <완전주의자의 꿈> 중에서

 

 

 

 

장석주 연보

 

1955년 1월 8일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시 부문 신인상 당선 후 등단.

 

1976년 해양문학상 수상.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존재와 초월).

       제1시집 <햇빛사냥> 간행.

 

1981년 제2시집 <완전주의자의 꿈> 간행.

 

1984년 제3시집 <그리운 나라> 간행.

 

1985년 제4시집 <어둠에 비친다> 간행.

 

1987년 제5시집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간행.

 

1989년 제6시집 <어떤 길에 관한 기억> 간행.

 

1991년 제7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간행.

 

1996년 제8시집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간행.

 

1998년 제9시집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간행.

 

2002년 제10시집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간행.

       조선일보 이달의 책 선정위원 역임.

 

2005년 제11시집 <붉디붉은 호랑이> 간행.

 

2007년 제12시집 <절벽> 간행. KBS 자문위원 역임.

 

2010년 제13시집 <몽해항로> 간행. 계간 <미네르바> 제1회 질마제문학상.

 

2012년 육필시집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간행.

 

<고려원> 편집장, <청하> 편집발행인 역임.

계간 <현대시세계> 및 계간 <현대예술비평>을 펴내며 기획과 편집주관 역임.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에서 소설창작과 소설이론 강의.

명지전문대와 경희사이버대학교에서 시 창작 연구와 문예편집론 등 강의.

<국악방송>에서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 진행.

현재 전업작가로 경기도 안성의 금광호숫가 <수졸재>에서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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